소설리스트

집착 알파가 만든 오메가 비서 (26)화 (26/60)

교원은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입을 단호하게 닫았다. 받아야 할 전화라는 걸 알았고, 언젠가는 대화해야 함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업무 중이었기에 받을 상황도 아닐뿐더러, 지난주의 일로 녀석의 목소리도 듣고 싶지 않았다. 고민하던 교원은 전화를 그대로 끊고, 메시지를 남겼다.

[일하는 중이야]

이렇게 행동함에는 이유가 있었다. 지난주, 권 대표가 압력을 넣은 만큼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을 거라는 조금은 비겁한 생각.

“저, 허억, 다녀왔, 습니다!”

때마침 임도영이 숨을 몰아쉬며 VIP 룸으로 들어섰다. 정장을 입은 채로 뛰어왔는지 이 추위에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교원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뛰어왔어요? 도영 씨?”

시간을 보니 생각보다 빨리 도착하기는 했다. 교원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임도영의 이마를 닦아 주었다. 키가 한참 커서 고개를 바짝 올려야 했다.

“천천히 오지. 급한 것도 아닌데, 왜 뛰어오고 그래요.”

“후우, 후…… 괜, 큽, 괜찮습니다. 대표님께서 아침을 안 드셨으니 배고프실 거 같아서요.”

어차피 집에서 과자나 사탕을 먹어 댔을 게 뻔한데.

교원은 제 신입 시절이 떠올라 속으로 혀를 찼다.

당시 NM리서치의 비서팀은 위계질서가 상당히 강한 편으로, 9시 출근임에도 8시 30분까지 출근해야 했고, 교원 같은 어린 직원들은 그보다 20분을 더 빨리 와 비서실에 있는 책상들을 모두 닦고 바닥을 쓸어야 했다.

물론 급여는 9시부터 지급되었지만, 막내 비서들은 8시 내지는 8시 10분부터 업무를 해야 했다. 그런 비서팀이 바뀌기 시작한 건 교원이 비서팀 대리로 진급하고, 권 대표의 직속 비서가 된 후부터였다.

“그렇게 안 해도 돼요. 편하게 일해요, 도영 씨. 설마, 누가 도영 씨 막내라고 일찍 오게 시켰어요?”

“네? 아뇨, 아니에요! 오히려 김 팀장님이 먼저 오시는걸요.”

교원은 한숨을 내뱉으며 관자놀이 부근까지 흘러내린 땀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 그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전 손수건 더 있어요. 그건 도영 씨가 써요.”

“네?”

“방금 도영 씨 땀 닦은 걸 쓸 순 없잖아요.”

작게 웃으며 대답하자 임도영이 아, 하면서 머쓱하게 웃었다.

어차피 손수건은 캐리어에 10장 정도 챙겨 왔다. 비서 일을 하다 보면, 손수건은 꽤나 자주 사용하는 물건이었다.

“샌드위치랑 음료는 잘 사 왔어요?”

“네, 여기요.”

찌그러지지도 않고, 음료의 물기가 샌드위치 봉투에 묻지도 않았다. 샌드위치에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걸 보니 받자마자 뛰어온 듯싶었다.

“수고했어요. 저기가 제 자리니까 옆에 앉아요. 10시 5분에 출발이라 9시 50분에 출국 수속 밟을 거예요.”

“아, 넵.”

딱 15분이 남아 있었다. 시간만 넉넉하면 옆에 있는 수면실에서 조금 누워 있다 오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는 없을 듯했다.

임도영이 자리에 뻣뻣한 자세로 앉고 있을 때, 교원은 샌드위치와 음료를 봉투에서 꺼내 권 대표의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그를 깨우려 시선을 들었는데, 어쩐 일인지 권 대표가 시샘이 가득 찬 눈빛으로 임도영을 노려보고 있었다.

“깨셨네요?”

“아까부터 깨 있었어.”

“잘됐네요. 이거 드세요. 도영 씨가 사 왔어요.”

권 대표는 임도영이 힘겹게 사 온 샌드위치와 음료, 쿠키를 내려다보더니 팔짱을 꼈다.

“입맛 없으세요?”

“배 안 고파.”

“기내식이 나오긴 하지만…… 대표님이 샌드위치 드시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매일 아침 주야장천 에그마요 샌드위치만 먹던 양반이, 입술을 비죽 내밀고 퉁명스러운 얼굴로 포장지를 노려보고 있었다. 매번 권 대표의 의중을 금세 파악하곤 했던 교원은 오늘따라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어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드시기 싫어진 거예요? ……1년 내내 아침에 드셔 놓고?”

“……몰라.”

“제가 포장지 벗겨 드려요?”

마지못해 마지막 수를 던지자, 테이블을 노려보던 권 대표가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곤 교원을 내려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응. 먹여 줘.”

“네, 먹…… 네? 먹여 드, 려요?”

“나 지금 손 쓰기 싫어.”

이게 무슨…….

이전에 딱 한 번 먹여 준 적이 있긴 했다. 지각한 권 대표 때문에 샌드위치를 사서 집에 가자, 그가 애벌레처럼 이불에 돌돌 싸여서는 “먹여 줘.”라고 졸라 댔던 것이다.

일정이 넉넉했기에 망정이지, 교원은 결국 침대 옆에 앉아 권 대표의 입에 샌드위치를 밀어 넣어 주었다. 마음만 같아선 15cm의 샌드위치를 목구멍까지 처박아 버리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아.”

“…….”

하지만 이곳은…… 막내 비서에, 경호원들까지 있는 룸이다. 애새끼 같고, 유치하고 추한 모습을 다 본 저와는 다르게 다른 사람들은 이런 상황이 무척 당황스러울 것이란 뜻이다.

권 대표도 그래서 저와 조 팀장과 있을 때 외에는 멋진 대표인 척을 하지 않았던가. 이제 와 대표 코스프레를 벗어던진다고?

이런 사람을 경호하겠다고 서 있다니, 하고 자괴감을 느낄 경호원들 생각은 하나도 하지 않고?

“어서, 이 비서. 아앙.”

권 대표가 몸을 바짝 붙여 오며 입을 벌렸다. 교원은 착잡한 낯으로 몸을 완전히 권 대표 쪽으로 돌렸다. 제 뒤에 있을 임도영과 경호원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포장지를 벗겨 권 대표의 입에 대 주자 와그작, 하고 양상추를 씹는 소리가 산뜻하게 VIP 룸에 퍼졌다. 경호원들도, 임도영도 아무 말이 없었다.

교원은 샌드위치를 두 입 먹이고, 권 대표의 평소 습관에 맞춰 콜라도 입가에 대 주었다.

궁금하다. 저처럼 이렇게…… 어린애 돌보듯 상사를 돌보는 비서가 또 있을까. 다른 비서들도 이렇게 살까.

“맛있, 으십니까…….”

“웅. 이 비서가 먹여 줘서 더 맛있옹.”

“네…….”

착잡하다. 임도영을 데리고 오지 말 걸 그랬다. 출장 경험을 시켜 주고자 부른 것인데, 함께 일하는 대표의 추잡한 모습만 보여 주게 되었다.

“이 비서, 나, 여기.”

반쯤 샌드위치를 먹은 권 대표가 제 입가를 혀로 툭툭, 가리켰다. 어지간히 사람을 부려 먹고 싶은 모양이다. 교원은 샌드위치와 함께 딸려 온 티슈로 권 대표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

모양 좋은 예쁜 입술을 노려보며 닦다가, 교원은 저도 모르게 티슈 끝으로 권 대표의 입술을 확 꼬집어 비틀었다. 아니, 저도 모르게가 아니라 고의였다.

“아, 아야!”

“죄송합니다. 떼어 내려다가 실수로.”

“아퍼…… 호 해 줘.”

“탑승하시면 약 발라 드리겠습니다.”

입술 좀 꼬집힌 거 가지고 호들갑은.

교원은 평소보다 조심해서 말했다. 본래라면 속마음을 그대로 말로 내뱉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인 만큼 자제해야 했다.

부하직원들에게 ‘유치한 상사’라는 이미지에 ‘비서에게 무시당하는 상사’라는 타이틀까지 덧붙여 주고 싶진 않았다.

교원은 다시 샌드위치의 포장지를 더 아래로 벗기고, 권 대표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워낙 입이 큰 사람이라 벌써 반 이상을 먹었다.

와앙, 입을 벌려서 베어 물고, 우물우물 열심히도 먹는다. 교원은 또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 주면서 목이 막히지 않게 콜라도 마시게 해 주었다.

권 대표는 마지막 한 입을 먹고, 콜라를 꿀꺽, 시원하게 마셨다. 배가 조금 찼는지 기분이 좋아진 게 보였다.

교원은 그사이 더블 초코칩 쿠키를 포장지에서 꺼냈다. 아래쪽은 포장지로 쥐고서 고개를 들었는데, 권 대표의 시선이 제 너머에 향해 있었다. 그것도 묘하게…… 비웃는 듯한 얼굴? 자신만만하다고 해야 하나?

“대표님, 쿠키요.”

“웅.”

쿠키도 마저 먹이던 교원은 조금 전 표정을 어디선가 보았다는 걸 떠올렸다.

그래, 사극 드라마에서 왕에게 달라붙으며 아양을 떨던 후궁이 중전을 바라보던 표정이었다. 어째서 권 대표가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는 미지수였다.

“아, 시간이 됐네요.”

쿠키도 모두 먹였을 때, 교원은 징, 울리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회사에서 지급해 주었던 스마트워치는 꽤나 유용했다. 이렇게 알람 설정을 해 놓으면 귀찮게 핸드폰을 꺼낼 필요가 없었으니까.

교원은 샌드위치 포장지와 비닐을 한데 모아 정리하고, 남은 콜라는 권 대표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리고 테이블에 놓여 있는, 항공사에서 제공한 과자도 하나 들어 권 대표의 주머니에 쏙 넣었다.

“도영 씨, 출국 수속 하러 갈 거예요.”

“…….”

“도영 씨?”

“아, 아. 네!”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던 임도영을 재차 부르자, 그가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왠지 얼이 빠져 있어서, 교원은 정신 차리라는 뜻으로 그에게 정리된 쓰레기봉투를 넘겼다.

“저쪽 구석에 놓고 와요. 분리수거는 안 해도 괜찮으니까.”

“아, 네! 알겠습니다.”

출발할 생각으로 몸을 일으키자 잠시 잊고 있던 경호원들과 눈이 마주쳤다.

이제 조금은 익숙해졌던 조 팀장도, 다른 경호원과 2팀 팀장도 동공이 잘게 경련하고 있었다.

……아, 맞다. 다 보고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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