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원은 허공을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왜 서운해했는가?
“그건…… 문제가 아니야. 이 비서, 조금 전은 미안해. 나도 모르게 이 비서한테 화풀이를 한 건…….”
문이 열립니다.
부드러운 음성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교원은 권 대표의 말을 무시하고 걸음을 빨리했다.
그래, 어쩌면 제가 업무를 과하게 하다 권 대표의 일에서 실수를 할 수도 있겠지. 그걸 염려해 화를 낼 수도 있다. 그건 명백히 제 잘못이었다. 그것도 출장 가기 전 주이니, 컨디션을 챙기는 게 맞았다.
“이 비서.”
“죄송합니다. 제가…… 신경 썼어야 하는 부분입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권 대표님의 일에 조금 더 집중할 수 있도록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아니라…….”
“아닙니다. 대표님께서 화내시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제가 다른 업무를 줄였다면, 대표님께 보다 도움이 되었을 겁니다.”
교원은 더욱 딱딱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권 대표는 섭섭해하겠지만, 최근 비이상적으로 친근하게 구는 권 대표의 모습이나, ……몇 주 전의 일을 생각하면 이렇게 해야 옳았다.
그때부터 이렇게 굴었어야 했다. 애초에 상사와 그런 관계를 맺은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권 대표는 러트가 왔었다고 하지만, 베타인 저는 그의 페로몬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그냥 휩쓸린 게 아니었다. 술을 마셔서 어쩔 수 없었다고? 그건 관계를 몇 번 해 본 사람에게나 가능한 말이다. 교원은 단 한 번도 애인을 만들어 본 적이 없었고, 누군가와 해 본 적도 없었다.
그리 낯선 것을 술에 취해, 분위기에 휩쓸려 했을 리가 없다. 애써 부정하려 했지만 교원은 권 대표에게 호감이 있었다. 그 호감의 크기가 어떤 것인지, 그 호감이 어떠한 의미인지는 저도 모른다.
그 잠깐의 치기, 혹은 호기심에 오메가로 발현되는 벌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비서, 내 말 좀 들어……!”
“아니에요, 대표님. 대표님께서는 맞는 말씀을 하신 겁니다. 제게 화내신 걸로 사과하지 마세요. ……상사시지 않습니까.”
그 말에 권 대표가 입을 다물었다.
상사.
둘의 관계를 그저 회사 사람으로 정의하며 선을 긋는 단어였다. 이전에 권 대표가 농담처럼 자주 하던 말이 떠올랐다.
〈이 비서랑 나는, 그냥 어? 상사랑 부하가 아니란 말이야. 난 진짜 이 비서 평생 내 비서로 있게 할 거야.〉
권 대표는 무언가를 시킬 때에도 명령조로 한 적이 없었다. 되레 부탁 조로 말했다. 교원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할 때도 고맙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그가 그만큼 제게 정을 주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대표님과 저는 상사와 부하입니다. 그러니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교원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차장에 불이 꺼졌다. 초록빛으로 물든 공간 가운데, 권 대표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커다란 몸집에 큰 키, 흠잡을 데 없는 외견. 그 모습이 천천히 엘리베이터가 닫히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 * *
교원은 권 대표가 말한 대로 출근하지 않았다.
쉬는 날이나 주말에는 섭취하지 말라던 페로몬 조절제도 먹지 않았고, 출근 준비도 하지 않았다.
넉넉히 잡아 5년은 넘게 입고 있는 허름한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차의겸: 내일 안 오면 사람 보낼 거야 알지?]
오후에 온 메시지는 반갑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교원에게는 평생 따라다닐 숙적과도 같았다.
[그래.]
[차의겸: 순순하게 구니 얼마나 좋냐.]
마지막 메시지는 무시했다. 차의겸은 교원이 제 행동에 질색할 때마다 즐거워하곤 했으니까. 교원은 그제야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갔다.
쌀이 다 떨어졌네.
월급, 상여금, 월차와 연차 급여는 모두 들어오는 족족 빚을 갚는 데에 쓰고 있었다. 교원의 생활비는 고작 50만 원이었다. 그중 30만 원은 월세를 냈다. 요즘 같은 때에 월세를 올리지 않는 곳은 귀해서, 이곳에 자리를 잡은 후로 한 번도 이사를 하지 않았다.
집주인 아주머님은 고모와 연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 덕분에 관리비도 제외해 주셨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은, 기억도 나지 않는 그 순간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교원을 키워 주신 고모는 교원에게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이었다.
“쌀 살 돈이…… 아, 없는데.”
이번 달에 병원에 간 것이 문제였다. 최소한의 금액으로 배를 채우며 살아가도록, 매달 배를 채우며 살 정도로만 최소한의 소비를 했으니 이번 달에 쌀을 살 돈이 부족한 이유라고는 병원비와 약값뿐이었다.
이제는 매달 처방을 받아야 할 텐데, 더 줄일 것도 없는데…….
우선, 저번에 준다던 상여금을 미리 받을 순 없을까.
잠시 고민하던 교원은 어제 제가 권 대표에게 한 말을 떠올리곤 고개를 저었다. 평소 같으면 가볍게 물어볼 수 있겠지만, 그리 선을 그었으니 될 턱이 없다.
권 대표는 어제 제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왜 갑자기 이제 와 선을 긋지, 같은 생각을 했을까?
아니면 농담처럼 한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다고 비웃었을까.
어쩌면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교원의 성격이 예민하고 까탈스러워서, 한 번 혼을 낸 것 가지고 삐진 티를 냈다고 생각했을 듯도 하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이게 교원이 살아온 방식이었으니, 고루해 빠진 행동이라 누가 뭐라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아…….”
교원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랬다가, 또 다시금 제 뺨을 스스로 쳤다. 그러기를 반복했다.
이래서 쉬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뭐라도 해야지.”
교원은 이제 지겹기 그지없는 라면을 끓이고, 입에 욱여넣듯이 먹은 뒤 방으로 돌아갔다. 주방이 딸린 거실에서 방이라고 해도 두어 걸음이면 닿는 곳이었다.
이불 옆에 앉은 교원은 낡은 노트북을 켜 영상을 시청하기 시작했다. 노트북은 대학생 시절 어쩔 수 없이 구매했던 것으로, 지금까지 버텨 온 것이 대견한 싸구려 노트북이었다.
그때는 고모의 아들이 최신 노트북을 사용하는 걸 보고 부러워했었다. 저는 가장 좋은 대학에 왔는데도 노트북 하나 사 줄 부모가 없다는 게 그제야 조금 서러웠던 기억이 났다.
교원은 고개를 저어 기억을 훌훌 털어 버리고 영상에 집중했다. 영상은 몇 달 전부터 듣고 있는 디자인 강습이었다. 책은 사지 못했지만, 요즘은 무료 영상이 많아 굳이 비싼 강의를 듣지 않아도 괜찮았다.
수익이 적지 않은 탓에 나라에서 주는 교육 혜택은 못 받는 게 조금 아쉽지만.
교원은 그렇게 간만의 휴일을 보냈다.
* * *
금요일.
출근한 교원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권 대표의 직속 비서로서 업무를 진행했다. 혹여 권 대표가 비서를 교체하려 든다거나, 무어라 쏘아붙일까 긴장했던 것이 우습게 아무 일도 없었다.
물론, 그 아무 일도 없는 것이 평소와 다른 점이었다.
스케줄을 위해 이동하는 시간 동안 그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교원에게 장난을 치지도 않았다. 그럴 것이라 예상했기에 교원은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오후 즈음 되자 권 대표는 안절부절못하며 교원을 힐끔거렸다. 말을 걸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이며 엉거주춤한 자세로 조수석을 훔쳐봤다.
어찌나 꼴이 우스웠던지, 옆에 있던 조 팀장이 슬그머니 권 대표를 불렀다.
“대표님, 혹시…… 화장실이 급하십니까?”
“……뭐, 뭐? 아니야.”
“그럼 왜 자꾸…….”
거울을 힐끔거리자 조 팀장이 권 대표의 다리 아래를 쳐다보는 게 보였다. 발까지 동동거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린애처럼.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 필요한 거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응.”
조 팀장의 말에 조금 부끄러웠는지, 아니면 찔렸는지 권 대표는 팔짱을 끼고 창밖을 노려봤다. 부러 미간을 찌푸리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조금 웃겼지만 교원은 애써 표정 관리를 했다.
신경 쓰지 말아야지. 저거 신경 쓰면 내가 지는 거다.
그때 조 팀장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경호조팀장: 대표님 애인 생기셨어요?]
[제가 알기론 아닐 텐데]
[경호조팀장: 지금 눈치 못 채신 거 같은데 다리 떨고 계심;;ㅋ]
[;;]
[경호조팀장: 근데 아까 이 비서님 잠깐 자리 비우셨을 때요]
[경호조팀장: 화난 사람 화 어케 풀어 주냐고 물어보셧거든요?]
[? 그래요?]
[경호조팀장: 이 비서님 일 맞죠?]
교원은 잠시 고민하듯 턱을 쓸다가, 대답했다. 어차피 권 대표가 술술 힌트를 불었겠지.
[제 일 맞을걸요. 아마]
[경호조팀장: ㅋㅋ안 그래도 제가 뭐 맛있는 거라도 사주라고 했더니 그거 먹으러 갈 사람두 아니라고 엄청 딱딱하다고 그러심]
상담을 하다가 뒷담을 까?
교원은 슬그머니 눈썹 사이를 좁히다가 심호흡을 했다.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그랬냐고, 무시하고 넘겼을 일인데 이상하게 권 대표가 그랬다 하니 신경이 쓰였다.
[제가 그렇게 딱딱한가요?]
[경호조팀장: 넵ㅋㅋ 그게 매력이신데요 머ㅋ]
[칭찬으로 들을게요.]
[경호조팀장: 여튼 화해하세요 두분 ㅠ 오늘 분위기 무서워서 일 못하겠음]
[ㅎㅎ]
교원은 거기서 채팅을 마무리했다. 화해고 뭐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이 분위기도 정착될 것이다. 근래 애인 행세를 해 주질 않나, 출퇴근을 함께하자며 온 권 대표에게 휩쓸리지 않나. 과했던 건 사실이 아닌가.
다시 적당히, 그날 밤 일이 없었던 때로 돌아갈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그렇게 회사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빠앙!
귀를 찢는 경적 소리와 함께 새까만 차가 앞을 대놓고 가로막았다. 운전기사가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고, 차체가 덜컹이며 상체가 앞으로 휙 쏠렸다.
오른쪽에서 튀어나온 검은 차는 권 대표의 차 앞을 가로로 막아서더니 그대로 멈췄다. 교원이 눈살을 찌푸리며 상황을 파악하려는 때, 뒷좌석에서 익숙한 잿빛 머리가 튀어나왔다.
찬란하게 빛나는 권 대표의 금발과는 정반대의, 칙칙한 그 색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