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의겸: 금요일 오후 10시. 유와이 엔터테인먼트 10층 전무실.]
한참 휴게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이제 페로몬도 가라앉았고, 몸 상태도 좋아진 듯해 몸을 일으켰다. 그때 도착한 문자는 그리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왜]
[차의겸: 아버지 호출]
교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차의겸은 말하자면 중간 관리자다. 이 사채업자들은 남의 돈을 뜯어 놓고, 그걸로 엔터테인먼트를 차렸다. 전무실, 즉 차의겸의 공간. 먼저 그곳으로 부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전무실은 왜]
[차의겸: 처맞기 싫으면 와]
시발 새끼.
아무리 교원이 삐딱하게 나가도, 그는 을의 위치에 있었다. 지금도 교원이 그에게 막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차의겸이 봐주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원금 5억의 빚. 그리고 양심 없는 사채업자답게 30%의 이자. 1년에 1억 5천씩 붙는 빚은 교원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차의겸은 교원이 스무 살이 된 해에 제안했다.
〈공부 그만하는 거 어때? 나랑 만나는 게 훨씬 돈 잘 벌 거 같은데.〉
분명 그의 말대로 했다면 지금처럼 허덕이진 않았을 것이다. 그가 깎아 주겠다며 제안한 금액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교원은 정직하게 제 노력으로, 제가 얻은 힘으로 끝내고 싶었다. 그것이 가능할지는 미지수였지만.
“어디 갔다 오셨어요?”
자리로 돌아오니 옆자리의 직원이 슬그머니 물었다. 교원은 고개를 저었다.
“몸이 조금 안 좋아서, 약 먹고 쉬고 왔습니다.”
“아…… 오늘 할 일 많으실 텐데, 괜찮으세요?”
“어쩔 수 없죠.”
아직은 살짝 미열이 남아 있었다. 페로몬은 모두 거두어졌으나, 기가 모두 빠진 몸이 힘없이 늘어졌다. 그러나 교원은 오전에 임도영이 준 커피를 들이켜고, 다시 자세를 바로 해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오후 10시. 교원은 마지막 일을 남겨 두고 시간을 확인했다. 마지막 업무는 족히 1시간은 걸릴 것이다. 교원은 가물거리는 눈두덩이를 손으로 비비며 흐릿한 화면을 쳐다보았다.
아까 일어난 일 때문인가, 이상하게 몸이 무겁다. 이젠 열도 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기운이 축축 빠졌다. 머리도 지끈지끈 아려 오고, 속도 메스꺼워 글자도 드문드문 읽혔다.
“하…….”
문제없이 잘 퇴근했냐는 문자에 여 팀장은 답장이 없었다. 농땡이를 치는 걸 방해한 게 이렇게까지 미움을 받을 일인가. 몸이 안 좋으니 별게 다 신경 쓰였다.
교원은 눈을 꾹, 감았다가 뜨며 제 어깨를 두드렸다. 집중해서 빨리 끝내자. 평소 몸 상태였다면 이미 퇴근하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교원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다시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타닥타닥, 아무도 없는 고요한 사무실에 교원의 타이핑 소리만이 적막을 갈랐다. 교원은 조급해지려는 마음을 억눌렀다. 쉬고 싶다. 자꾸만 몸이 늘어져 힘에 겨웠다.
이러다 실수라도 하면 안 되는데.
교원은 회사에 들어온 이래, 신입 때의 사소한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었다. 그만큼 일에 대한 책임감이 막중했던 탓이다.
그러나 오늘따라 자꾸만 몸이 늘어지고, 집중이 되질 않았다. 야근을 할 때마다 느껴지던 묘한 자괴감, 부러움 따위의 쓸데없는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듯했다.
오늘 안에 끝내야 내일 권 대표를 보좌하면서 오늘 한 것을 체크해 볼 수 있을 텐데. 피로함에 눈두덩이가 반쯤 감겼다.
두 손에 얼굴을 묻으려던 무렵, 사무실 문이 열렸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구…….”
“역시.”
성큼, 기다란 다리를 쭉 뻗어 다가온 것은 권 대표였다. 이 시간에 이곳에 있을 사람이 아니기에, 교원은 놀란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아, 안, 아니, 대표님? 뭐 놓고 가신 거라도……?”
너무 당황해서 인사를 하려다 먼저 질문부터 뱉었다. 놓고 간 것이 있다고 해도 회사를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이곳에 올 리가 없는데.
“이 비서 아직 퇴근 안 했네.”
“아…… 네. 다음 주에 출장 가니까요.”
“출장 갈 때마다 혼자 이렇게 일을 다 하나?”
오늘도 권 대표는 낯선 얼굴이다. 근래 그의 몰랐던 모습을 많이 보는 것 같았다. 교원은 기다란 눈썹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제가 해 놔야 직원들이 실수를 덜 해서…….”
“봐, 오늘 한 거.”
“네, 네?”
“업무 일지 줘 봐.”
단호한 목소리에 교원은 당황했다가, 시간 별로 미리 적어 둔 업무 일지 화면을 켰다. 그리고 조금 전에 하던 일까지 적은 뒤 바로 프린트 버튼을 눌렀다.
때마침 프린트 근처에 서 있던 권 대표가 종이를 바로 집어 들었다.
그는 한참 말이 없었다. 교원은 어쩐지 혼나는 기분으로 바짝 긴장한 채 등허리를 세웠다.
“이거, 이 비서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 아닌가?”
“대, 대부분은 그렇지만…….”
“내가 알기로 이 비서는 내 직속으로 알고 있는데, 왜 임원 전체의 업무를 정리하고 있는 거지?”
“……그게.”
“인사팀, 경리팀은 일을 안 하나 보군? 이 비서가 비서팀 업무 일지를 정리하고, 지출 내역도 정리하고. 게다가 프로젝트는 혼자 맡아?”
날카로운 목소리에 피부가 따끔따끔했다. 그의 말이 모두 옳았다. 다만 교원이 한두 번 맡아 해 주다 보니 제 몫이 된 것들이 많았다. 게다가 직원들이 실수할 거리를 만들지 않고, 깔끔하게 정리해 넘겨주어야 마음이 편했다.
“왜 다른 놈들 스케줄 정리를 하고 있는 거지? 이놈도, 이놈도 죄다 지들 직속 비서가 있을 텐데 프로젝트 진행 사항을 이 비서가 정해 줘야만 일을 하나? 게다가, 테스크포트도 이 비서가 점검해?”
“……죄송합니다.”
“이 비서가 죄송할 건 아니지. ……하, 보도 자료도 이 비서가 작성하나?”
“…….”
출장을 간 사이 제가 살펴볼 수 없으니 무리해서 일을 떠맡기는 했다. 평소에는 하지 않던 일도 혹시 몰라 정리해 두고 있었다. 교원은 무어라 할 말이 없어 고개를 숙였다.
“보도 자료 같은 건 홍보팀이 하는 일이 아니었던가?”
“보, 본래는 홍보팀이 합니다. 그렇지만 다음 주에 있을 애플리케이션 출시 때문에…….”
“알아서 하게 둬.”
“제가 확인을 해야 하는데, 출장 때문에…….”
“확인도 이 비서가 해 줘야 해? 지들끼리 못 하나? 이 간단한 것도?”
권 대표의 말이 모두 맞았다. 보도 자료 정도야 홍보팀 신입들이 작성하는 것이었고, 그 팀의 팀장이 확인하는 것이 기본 절차였다. 한데 이전에 팀장이 실수를 한 뒤부터는 교원에게 2차로 검수를 받곤 했다.
“다른 직원들은 꽁으로 회사를 다니고 있었군, 이 비서? 이 비서 혼자 다 하는데 말이야.”
“…….”
“이 비서 탓하는 게 아니야. 이 비서가 한다고 해도 지들이 알아서 했어야 하는 일이지.”
“죄송합니다, 제 선에서 정리했어야 했습니다.”
와그작, 권 대표는 들고 있던 종이를 구긴 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표정이 상당히 좋지 않았다. 교원은 권 대표의 눈치를 보며 어정쩡한 자세로 책상에 손을 얹었다.
“퇴근해.”
“하, 하지만.”
“퇴근하고, 내일은 쉬도록 해. 연차 쓴 걸로 안 쳐 줄 테니까, 연차 수당은 그대로 줄 거야.”
교원은 말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단 한 번도 월차, 연차를 쓴 적이 없었다. 권 대표의 말대로 연차 수당 때문이었다. 그걸 권 대표가 알고 있다는 게 수치스러웠다.
“짐 챙겨, 데려다줄 테니까.”
“아, 아닙니다. 챙겨 주시지 않아도…….”
“타라면 타. 교원 씨, 나 지금 기분 안 좋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결국 교원은 하던 컴퓨터를 곧바로 종료하고, 짐을 챙겨야 했다.
그사이 권 대표는 비서실 밖으로 나가 있었다. 교원은 가방을 들고, 코트를 팔에 걸친 채로 급히 사무실을 나왔다.
“가지.”
“네.”
교원은 순순히 권 대표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쫓았다. 평소와 다르게, 권 대표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었던 탓이다.
최근 들어 권 대표는 직원 복지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다. 제가 한 번 더 확인하고, 미리 정리해서 직원들의 일을 돕는다면 실수가 줄어들게 되는 것 아닌가? 그럼 회사의 대표인 권 대표에게도 좋은 것이 아닌가?
무리해서 일을 하는 것은 맞았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권 대표의 일을 소홀히 하지도 않았고 오늘처럼 시간이 나는 날에나 이런 일들을 떠맡는 것이기에 교원은 좀 억울했다.
누가 보면 바보같이 남의 일을 다 해 주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가.
결론적으로 보자면 그게 맞지만, 교원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저, 대표님.”
“어.”
“그럼 내일……은, 누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마.”
제 잘못 아니라고 말했으면서, 쏘아붙이는 투가 꼭 저를 혼내는 것 같다. 교원은 일을 더 열심히 한 죄로 이렇게까지 혼이 나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곧이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안 그래도 얼어붙어 있던 분위기가 더욱 싸늘해지며 적막에 사로잡혔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함을 깬 것은 권 대표였다.
“……미안해. 내일은 김 팀장에게 맡길 거야.”
“예.”
“화풀이하듯 말해서 미안, 진짜 미안해. 이 비서한테 화난 게 아닌데, 내가…….”
자책하듯 숨도 쉬지 않고 뱉어 내는 권 대표의 말을 교원이 잘라 냈다.
“여 팀장은 오늘 업무에 적합하지 않으셨습니까?”
본래 상사와는 이렇게 지내는 게 옳다. 정을 주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두며 지내는 것. 그리고 상사가 부하를 혼내는 것 또한 당연했다. 교원은 서운함을 가졌던 마음을 애써 지웠다.
“아니, 아니야. 나쁘지 않았어. 다만, 아무래도 그쪽은 우성 오메가니까.”
“아.”
그렇지, 교원은 또다시 찬물을 끼얹은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권 대표의 직속 비서는 베타가 맡는다. 그것은 아주 기본적인 사항이었다. 업무의 능률을 떠나서 알파와 오메가는 서로의 페로몬에 영향을 받는 형질인 데다, 갑작스레 러트나 히트가 터질 경우 난감한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권 대표가 여 팀장을 이틀 연속으로 쓰고 싶지 않아 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니, 저 또한 오메가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당연히.
직급 강등 혹은 좌천.
선뜩한 기운이 등허리를 훑었다.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