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 알파가 만든 오메가 비서 (15)화 (15/60)
  • 권 대표는 한옥 카페 구석에 있는 벤치에 교원을 앉혔다. 후들후들 떨리던 다리가 조금 진정이 되는 듯했다.

    선선한 바람과 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의 페로몬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고 있었다.

    “괜찮아?”

    “아, ……네.”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벤치에 거의 도착했을 때였다. 교원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꾹꾹 눌러 닦아 냈다. 다시 얼굴을 들자 뺨이 홧홧했다.

    “왜 말을 안 했지?”

    “……그야, 별거 아니잖습니까. 거래처에는 늘 친절하게 대하라고, 배웠고…….”

    수없이 겪은 일이었다. 노골적인 추행을 당한 것은 권 대표와 일을 하면서부터였지만.

    형질과 상관없이 교원에게 치근덕대는 사람들은 많았다. 물론 게 중에서도 특히 권 대표와 거래하는 이들은 죄의식이란 눈곱만큼도 없었고, 도리어 뻔뻔하게 박 전무처럼 힘으로 짓누르고자 했었다.

    처음 그것을 겪은 날에는 미처 대처하지 못할 뻔하기도 했다. 지금이야 거절하는 법을 터득했으나, 사회초년생이던 그때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었다.

    “우선, 이교원.”

    “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권 대표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교원과 눈을 똑바로 맞췄다. 그에게서 은은하게 풍겼던 페로몬 향기가 짙어졌다.

    “난, 모든 거래처에게 예의 있게 하라고 가르친 게 아니야.”

    사람을 봐 가면서 하라는 걸까. 하지만 이번 박 전무처럼 중요한 프로젝트의 경우에는…….

    “그게 어떤 일이든 간에 저런 인간이랑 일하고 싶진 않거든. 물론 이 바닥에 저런 놈들이 널리고 널린 건 알아. 저 새끼도 질 나쁘다 소문나 있긴 했지.”

    “…….”

    “전부 피할 수 없으니까 하는 거야. 그리고 내가 뻔히 있는데, 내 앞에서, 내 비서에게 그런 짓을 하는 놈에게까지 잘 대해 줄 마음은 없어.”

    교원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다음에도 이런 일이 있다면, 우선 최대한 말로 설득할 것이다. 박 전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별거 아닌 게 아니야. 왜 그걸 참았어? 내가 이 비서 자르기라도 할까 봐? 아니면 나한테 피해라도 갈까 봐 그랬어?”

    “……그냥, 자주 있는 일 아닙니까. 잠깐만 참으면 되니까…….”

    저답지 않게 말꼬리가 늘어졌다. 교원 또한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일이었다면 권 대표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화를 내고, 다시는 이런 일을 겪지 않게 하겠지.

    그게 옳다는 걸 머리로는 알았다.

    “자주 겪었다고?”

    그때, 순간 권 대표의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과격하다고 느껴질 만큼 흥분된 목소리였다. 교원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아, ……어, 네. 대표님이 자리를 비우시면 권유하시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씨발, 박 전무 말고 또 누가 그랬는데?”

    “그, 음, 최근에는 없었습니다.”

    “전에 있었다는 거 아냐? 그 새끼들 누군데.”

    어깨가 살짝 안으로 굽었다. 그에게서 또 스멀스멀, 페로몬이 흘러나왔다.

    교원은 고개를 재빨리 저었다.

    “오래, 된 일입니다. 지금은 기억도 잘 안 나고…….”

    “네가 까먹을 리가 없지 않나?”

    “……다음부턴 말씀드릴게요.”

    권 대표는 굵은 목에 핏줄이 설 만큼, 흥분하고 있었다. 교원은 입을 꾹 다물며 눈길을 돌렸다. 그러곤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자, 권 대표가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슬쩍 보니 아직도 화가 나 있었다.

    “말 안 하면, 이 비서 연봉 깎을 거야.”

    “그, 그건 상관없지 않습니까?”

    “아니, 내 비서가 거래처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으니 깎아도 충분하지. 시말서는 10장씩 쓰게 할 거야.”

    권 대표는 단언하고는 고개를 휙, 돌렸다. 여전히 인상이 구겨져 있다. 교원은 이렇게까지 화를 낼 일이었나 싶다가 그럴 만한 일이었네, 하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겠습니다. 다음부터는 말씀드릴게요.”

    “약속해.”

    “네, 약속드리겠습니다.”

    “진짜지?”

    “네, 진짜요.”

    권 대표는 거듭해서 대답을 요구하더니,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제야 그의 손등에 상처가 남은 것이 보였다.

    “대표님, 손에…….”

    “어? 이거? 별거 아냐.”

    “박 전무가 그랬습니까?”

    권 대표의 얼굴은 곧 회사의 얼굴이다. 물론 권 대표가 모델이나 배우는 아니지만, 잘난 거라곤 얼굴밖에 없지 않은가. 즉, 써먹을 게 얼굴뿐이니 모델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 ‘얼굴’은 오로지 얼굴만 뜻하는 것이 아니다. 손도 얼마나 예쁘게 생겼는지, 간혹 거래처에서 오메가 임원이 나오면 권 대표의 손을 뚫어져라 쳐다보기도 했었다.

    크기는 큼지막하고, 투박한 사람들처럼 굵직한데 손가락 하나하나가 곧고 길어 페티시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홀라당 넘어가기 좋았다.

    교원은 사색이 되어서는 급하게 권 대표의 팔을 잡아 제게로 끌어당겼다.

    “다치시면 어떡해요?”

    “아, 어? 살짝 스친 거야.”

    “이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대표님 얼굴은 대표님의 것만이 아닙니다. 회사 전체의 것이에요.”

    워낙 한량처럼 놀고먹고 즐겨 와, 자주 다치지 않아 망정이지.

    교원은 급히 제 겉옷 주머니에서 1회용 생리식염수와 ‘새살이 솔솔! 솔솔 연고’를 꺼내 들었다. 혹시 몰라 항상 챙겨 다니는 물건 중 하나였다. 심지어 가방 속 파우치 안에는 구급상자 못지않은 것들이 구비돼 있다.

    “아니, 이런 걸 어떻게 거기에 넣고 다니는 거야?”

    “잔말 말고 대세요.”

    교원은 권 대표의 손을 우악스럽게 쥐고, 식염수 통을 열어 확, 끼얹었다. 차가운 물기에 권 대표가 화들짝 놀라서 손을 빼내려 들었다. 그러나 그것에 질 교원이 아니다.

    “뭐, 뭘 뿌리는 거야?”

    “생리식염수입니다.”

    교원은 식염수가 흘러내리도록 몇 번 더 뿌린 후, 손수건으로 꼼꼼하게 상처 부위를 닦았다. 이물질이라도 들어갔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공병 하나를 더 꺼내 들었다.

    “이 비서 무슨, 도라에…… 아! 따가!”

    “과산화수소입니다.”

    0.5cm가량 그어진 상처 부위에 곧 보글보글, 하얀 거품이 차올랐다. 역시 빠르게 대처하기를 잘했다. 과산화수소 용액이 감염균에 반응하고 있었다.

    “아니, 이렇게까지 할 건…… 으, 나 이거 닦아 줘.”

    “포비돈 요오드가 없는 게 아쉽네요. 다음에는 챙겨 두겠습니다.”

    “……그게 뭔데?”

    권 대표의 눈동자에 조금의 공포가 감돌았다. 주사도 싫어하는 양반이니, 소독은 얼마나 싫겠는가. 교원은 기본 상식인데, 라고 생각하며 답했다.

    “빨간 약입니다.”

    “나 그거 진짜 싫은데.”

    “됐고.”

    교원은 손수건의 깨끗한 면으로 거품과 용액을 닦아 낸 뒤, 충분히 건조가 되었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주머니 안쪽에서 습윤 드레싱 밴드를 꺼냈다. 일반 밴드로는 상처가 쉬이 사라지질 않으니까.

    도톰한 습윤 밴드는 교원이 성심성의껏 고른 것이었다. 각 성분을 비교해 보고, 가장 효과가 좋은 것으로 구비해 두었다. 물론, 법인 카드로.

    “이 비서, 혹시…… 뭐, 병원에서 일한 적 있어?”

    “이 정도는 기본 상식입니다. 권 대표님께서 모르는 것이라고, 다른 사람도 모를 거라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 방금 분위기 좋지 않았어?”

    “이런 것 좀 한다고 병원에서 일했었냐는 말을 하는 사람이 이상한 것 아닙니까?”

    단호한 교원의 말에 권 대표는 시무룩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제 커다란 손을 양손으로 붙잡고 밴드가 구겨지지 않게 깔끔히 붙이는 교원을 내려다보았다.

    이 비서는 얼핏 보면 무심하고 삐뚤어진 성격일 것 같이 생겼는데, 자세히 보면 의외로 다정했다. 지금도 회사의 얼굴이니 뭐니 하지만 분명 저를 걱정해서 해 주는 것이 아닌가.

    정수리를 내려다보고 있자, 동글동글하고 작은 머리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뼈대도 얇고, 체격 자체도 작아서 키가 큼에도 늘씬하니 박 전무 같은 놈들이 한둘이었을까.

    권 대표는 지극히 본능적인 남자였다. 끌리면 끌리는 대로 쫓는다. 어떤 상황이든 어떤 관계든 신경 쓰지 않는다.

    무엇이 시발점이 되어 이 무심하고 차가운 베타에게 끌리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좋은 걸 어쩌겠는가. 권 대표는 자신이 그에게 끌린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바로 이교원을 꼬시기로 마음먹었다. 늘 그랬듯이.

    ……뭐, 그래 봤자 이교원은 쉽게 넘어오질 않고 있지만.

    “다 됐습니다. 여분의 밴드를 드릴 테니, 샤워하시고 난 후에 다시 붙여 주세요.”

    “응, 알겠어.”

    “귀찮다고 그냥 떼어 버리시면 안 됩니다.”

    교원의 말에 권 대표가 슬쩍 웃음을 흘렸다. 그간 제가 막 나가기는 했나 보다, 하면서.

    “근데 박 전무 어떻게 됐는지는 안 물어봐?”

    “그 인간이 죽든, 사지가 찢어졌든 그다지 궁금하지 않습니다.”

    “사지……까지 찢는 게 좋아?”

    “뭐, 별생각 없어요. 하지만 그거 찢다가 또 다치고 오실 거 같으니 안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알겠어, 안 할게.”

    “……요즘 말 잘 들으시네요.”

    교원이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눈물 자국은 이제 온데간데없었다.

    권 대표도 따라 일어서며 입꼬리를 올렸다. 시선을 내리자, 동글동글한 작은 머리가 이제는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서 있었다.

    늘 무심한 얼굴에, 표정 변화 하나 없어서 냉정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말은 안 했지만 그간 참고 있던 모양이었다. 하긴, 이제 스물일곱 꼬맹이인데.

    “내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비서 말은 잘 듣잖아.”

    “다른 사람 말도 조금은 들어주세요.”

    “싫은데.”

    교원이 살짝 째려봤다. 권 대표는 그게 또 귀여워 보여서 실실 웃음을 흘렸다. 이렇게 자세히 보면 교원도 표정이 꽤 많았다.

    어쩌다가 이렇게 홀로 참는 성격이 됐을까. 가정 환경에 대해서라면 대충은 알고 있지만.

    “다음 스케줄 또 미룬 거 아시죠? 다음 주에는 출장이니, 그다음 주에 바쁘실 겁니다.”

    “……어제 스케줄은 이 비서 마음대로 미룬 거잖아…….”

    “대표님 건강을 위해서입니다.”

    “알지, 알지. 나 걱정하는 거 자기밖에 없는 거 알지.”

    “들러붙지 마세요.”

    일정을 미루는 걸 제일 싫어하는 교원이, 어제 오후 스케줄을 모두 취소할 만큼 저를 걱정했던 게 떠올랐다.

    정신 쪽을 걱정하는 것 같아 조금 착잡하긴 했지만, 어쨌든 걱정은 걱정이니까. 권 대표는 교원이 직속 비서가 된 후로 만났던 거래처 목록을 모두 뽑아 볼 생각을 하며 교원을 끌어안았다. 게 중에 소문이 더러운 놈들을 추리면 적당히 나오겠지.

    그 생각을 하다 교원에게서 나는 살냄새가 좋아 헤헤, 하고 웃었다.

    물론, 교원에게 경박하게 웃지 말라고 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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