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 알파가 만든 오메가 비서 (12)화 (12/60)

교원은 빠른 걸음으로 회사 밖으로 나왔다. 건너편에 검은 세단이 보였다. 교원이 업무 중에는 무게 있어 보이는 세단을 권유하고, 또 권유했던 탓이었다.

회사 주차장에 조용히 잠자고 있을 빨간 스포츠카를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무래도 1년 간 정이 든 모양이다. 권 대표의 건강에 이상이 온다면, 다른 사람을 보좌해야 할 것이다. 분명 권 대표보다는 편할 텐데,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좋아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새 상사를 담당하려면 또 새로운 방식으로 보좌해야 한다. 그럼 귀찮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자기, 여기!”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권 대표가 손을 흔들었다. 굳이 손을 들지 않아도 모든 이목이 그에게 쏠려 있었다.

떡 벌어진 어깨와 두툼한 몸통을 감싼 슈트 선이 깨끗하게 떨어지고, 벌어진 겉옷 안쪽으로 꽉 찬 가슴을 품은 하얀 셔츠가 여실히 눈에 띄었다.

게다가 무슨 생각인지 단추는 두어 개쯤 풀어 놔서, 안 그래도 야시시한 이미지가 더욱 강조되었다. 깔끔하게 입으니 더욱 예쁜 여우 같은 얼굴이 묘한 기분을 들게 하는데, 알파 페로몬까지 은은히 풍기고 있으니 누구 하나 꼬실 작정이라도 한 듯했다.

“음?”

그때 교원의 시야에 이상한 게 잡혔다.

권 대표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손에 쥐고 있었다.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볐는데도 그대로였다.

“갑자기 ……아메리카노를 드십니까?”

“으응? 어, 큼, 요즘 좀 끌리더라고.”

의뭉스러운 눈길로 쳐다보자 권 대표가 헛기침을 뱉으며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입 안에 머금고, 삼키기까지 대략 5초가 걸렸다. 그 5초간, 권 대표의 낯이 하얗게 질렸다가 미간이 꿈틀거렸다.

겨우, 아주 겨우 삼키는 게 훤히 보였다.

“못 드시면 드시지 마세요. 딸기 라테를 주문해 드릴 테니까.”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아 잔을 빼앗으며 옆자리에 앉자, 권 대표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야, 맛있어.”

“……정말로?”

“정, 말로.”

“제가 자꾸 놀려서 일부러 그러시는 거면…….”

“아니, 아냐! 진짜야. 흠, 하나도 안 써.”

써서 죽을 것 같은 표정이다.

교원은 한숨을 쉬며 카운터로 가 딸기 라테를 주문했다. 생크림도 추가한 라지 사이즈의 딸기 라테는 얼마 걸리지 않아 나왔다.

주문한 것을 가지고 자리로 돌아오자, 권 대표가 굳은 얼굴로 교원의 손을 노려보았다. 자리에 앉으며 시간을 확인하는데, 권 대표가 묵직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나 아메리카노 마실 거라니까…….”

누가 뭐라 했나. 교원은 입꼬리를 비죽 올리며 대답했다.

“제가 마시려고 샀습니다.”

“……그래? 이, 이 비서 단 거 싫어하지 않아?”

“오늘부터 좋아하려고요.”

빨대에 입을 대고 쭉 빨아 마시자, 상큼한 딸기에 시럽을 잔뜩 부은 단맛이 났다. 절로 눈썹이 일그러지는 맛이었지만, 교원은 무표정하게 잔을 내려놓았다. 권 대표를 놀리기 위해 주문했지만 잘못된 선택이었던 듯하다.

뭐, 어차피 권 대표의 카드로 긁었으니 상관없겠지만.

“이제 출발하죠.”

“응, 근데 우리 점심 안 먹어?”

“예. 공복을 유지해야 합니다. 아메리카노는…… 뭐, 한 모금밖에 못 드셨으니 괜찮겠죠.”

교원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오후 스케줄을 모두 취소하고, 다음으로 미룬 지 오래다. 권 대표의 건강 때문에 상대에게 아쉬운 소리를 어찌나 했던지 모른다.

“아뇨, 오후 스케줄 전부 취소했습니다.”

“……응? 어? 왜? 아니,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어차피 스케줄, 모르시지 않습니까. 전부 취소한 이유는 대표님의 건강 때문입니다. 다른 것도 아닌 건강 문제이니만큼, 빠른 시일 내에 처리해야 합니다.”

권 대표가 입을 벙긋거렸다. 교원은 카페 문을 열며 덧붙였다.

“싫다 하셔도 갈 겁니다. 피 뽑기 싫다고 하셔도 뽑아야 합니다.”

“피, 피는 왜 뽑아.”

“전체적으로 검진을 받으실 예정입니다. 위내시경도 하셔야 하고요.”

때맞춰 운전기사가 카페 앞에 차를 옮겨 정차했다. 교원은 조수석 문을 열며 단호한 눈으로 권 대표를 마주 보았다.

“위험한 병에 걸리신 걸지도 모릅니다.”

그 얼굴이 너무 진지해서, 권 대표는 이유도 묻지 못하고 얌전히 차에 올랐다.

* * *

〈검사 결과는 일주일 뒤 메일로 송신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교원은 장장 4시간 동안 시무룩했던 권 대표를 데리고 병원에서 나왔다. 할 수만 있다면 검사란 검사는 모두 받았던 탓에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 서러워.”

“큰 병이 아니면 좋겠네요.”

“나 안 아픈데.”

“아뇨, 아프십니다.”

그나저나 스케줄을 모두 미뤘으니 2주 뒤는 무척 바쁠 것이다. 교원은 뜨끈뜨끈한 눈두덩이를 손으로 문지르며 태블릿을 꺼내 들었다.

다음 주가 출장이다. 출장을 다녀오자마자 업무 폭탄을 맞을 생각을 하니 벌써 피곤했다. 게다가, 오늘 비서 2팀의 여 팀장이 그 난리를 쳤으니 출장을 다녀오는 사이 업무를 어떻게 해 놓을지 걱정됐다.

비서 1팀의 김 팀장에게 단단히 각오하라고 전해 둬야지.

“이 비서, 피곤하지.”

“네. 가만히 있는 게 더 고역입니다.”

“……그거 병이야. 이 비서 그러다가 골병 나.”

“돈 좀 만지게 되면 그만두려고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교원은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허리를 툭툭, 쳤다. 당장 집에 가서 씻고 자고 싶다. 하지만 철부지 대표를 집에 보낸 뒤에야 집에 갈 수 있겠지.

“기사님, 대표님 집으로 가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아냐, 이 비서 집으로 먼저 가. 거기가 더 가깝잖아.”

“웬일로 친절을 베푸십니까? 불안하게.”

슬쩍 룸미러로 권 대표를 쳐다보자 그가 꽤 황당하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권 대표가 팔을 뻗어 교원의 어깨를 짚었다.

“내가 뭐 그렇게까지 나쁘게 굴었어? 그동안?”

“좋은 상사는 아니시죠.”

“시죠? 셨죠도 아니고? 지금도 나빠?”

당연한 걸 묻는다. 최근 며칠 편안해지긴 했지만, 얼마 안 가 다시 돌아갈 것쯤은 알고 있다. 그래서 오늘 검진도 받은 것이 아닌가. 교원은 특히 뇌 쪽 검사를 세밀하게 부탁했던 것을 떠올렸다.

“어제나 오늘이나, 뭐. 며칠은 사람다우셨습니다.”

“사람…….”

“하도 이상해서 걱정을 좀 했지요.”

조곤조곤 말로 두들겨 팬 탓일까, 권 대표가 손을 내리며 추욱 시트에 몸을 기댔다. 그러자 옆에 앉은 조 팀장이 어설프게 위로했다.

“그, 요즘! 대표님 진짜 멋지십니다. 다른 사람이 되신 줄 알았어요. 아주 좋은 상사십니다.”

“……있잖아, 나 좀 이상한 생각이 드는데.”

“무엇 말입니까?”

조 팀장이 긴장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교원은 제집으로 향하는 길목을 보며 목받이에 뺨을 댔다.

“나 오늘 종합 건강 검진한 거…… 요 며칠 때문이야? 아니지?”

설마, 하고 덧붙이는 목소리가 가련하게 떨리고 있었다.

농담 같은 일이긴 했다. 하지만, 게으르게 뒹굴거리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달라졌다면 누구라도 이상하게 생각할 법하지 않은가.

직속 비서로 1년, 비서팀으로 2년. 총 3년간 교원이 봐 온 권 대표는 그런 사람이었다.

애인이 없는 날이 없고, 업무 시간에 애인을 만나 놀러 가고, 지각은 주 2, 3회씩 꼬박꼬박 빼놓지를 않는 데다가 일은 닦달을 하지 않으면 정시에 주는 법이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대표라는 사람이 후드티를 입고 출근해서는 그 상태로 미팅을 가려고도 했고, 거래처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경호팀을 따돌리고 도망간 전적도 있었다.

스케줄을 꿰고 있기는커녕, 아침마다 브리핑을 해 주어도 직전에 가서야 ‘저 사람 누구지?’ 하고 물어 오는 일이 일상다반사. 미팅 직전까지 애인과 전화를 하거나 핸드폰 게임을 하고, 주말에는 도박을 하다가 차를 도둑맞았다며 당시 비서에게 연락하기도 했다.

이런 사람을 겉으로나마 반지르르하게 만든 것이 교원이다.

“맞습니다. 대표님.”

교원은 칼같이 냉정한 목소리로 조 팀장을 대신해 대답했다.

하나 이건 그를 골리려는 것이 아니다. 오후 일정을 모두 취소할 만큼, 진심으로 권 대표의 뇌에 이상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아직 결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세균성 감염병에 걸리셨을 확률도 있습니다. 최근 자꾸만 열이 올랐다가, 내렸다가 반복하시지 않습니까. 주치의에게 물어본 결과 브루셀라균에 감염되면 그러한 증상이 보인다고 합니다.”

“이, 이 비서…….”

권 대표는 아니라고 했지만 열이 올랐다 내렸다 하는 것은 분명 이상 증상이었다. 양 볼이 사춘기 소년처럼 발그레하게 물들고, 답지 않게 시선을 피하는 걸 보면 확실했다.

혹 브루셀라증일 경우 쉽게 낫지 않는다 하여 교원은 걱정이 되었다.

“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라도 따뜻한 물을 드시고, 셔츠 단추도 끝까지 채우시길 바랍니다.”

카페에서 보았던, 야시시한 꼴이 떠올랐다. 탄탄한 가슴과 움푹 파인 쇄골을 힐끔거리던 사람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게다가 우성 알파라고 홍보라도 할 셈인지, 페로몬까지 풀풀 풍기고. 괜히 짜증이 치밀어 한마디 덧붙였는데, 권 대표에게서 대답이 없다.

“대표님?”

교원은 대답 없는 권 대표를 슬쩍 훔쳐보았다. 혹시 화가 났나 했지만 오히려 멍청한 얼굴로 입술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그렁그렁한 눈으로 제 입을 막았다.

“이 비서…… 너.”

때마침 집 앞에 차가 멈춰 섰다. 그러나 운전기사도, 조 팀장도 굳은 채로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리 업무를 위해서라지만 상사에게 저런 식으로 구는 비서는 없다고, 다른 곳이었다면 잘렸을 거라 생각하면서.

“날 그렇게나 걱정을…….”

“도착했네요, 퇴근하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대표님, 조 팀장님, 기사님.”

울먹이던 목소리를 매서운 목소리가 갈랐다. 교원은 역시 뇌에 이상이 생겼을 거라 확신하며 차에서 무작정 내려섰다.

그리고 그 원인을 떠올렸다.

갑자기 일요일에 출근했던 권 대표. 애인 행세를 해 주었던 날이다.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으나, 지금 생각해 보니 붉어졌던 이마가 지금 권 대표를 이상하게 만든 것 같다.

교원은 핸드폰 메모장에 ‘주치의에게 이마 박은 거 얘기하기’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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