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원은 페로몬 조절제를 먹고, 비상용 약도 챙겨서 출근했다.
주말 수당에 야근 수당까지 1분도 빼지 않고 챙기면 제법 쏠쏠하기도 했지만, 비서 일이라는 게 만만찮아서 일요일에도 일을 해야 했다.
그나저나 이번 주 일요일은 고위층 알파들의 정기모임이 있는 날인데, 권 대표는 왜 출근했는가.
“이 비서어!”
한창 문서를 작성하던 교원은 상큼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온 사람은 당연히 권 대표였다.
“오셨습니까?”
“점심 먹었어? 안 먹었지? 나랑 초밥 먹자.”
“……점심 드시러 출근하신 건가요?”
“에이이.”
능글맞은 얼굴에 교원은 잠시 의심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이것만 처리하고 휴게실로 가겠습니다. 먼저 가 계세요.”
“뭐야, 같이 가. 옆에 있을게.”
“조금 걸립니다.”
“나 혼자 앉아 있기 싫어.”
그럼 그러든가.
교원은 무심한 얼굴로 마저 문서를 작성했다.
사실, 내근 비서가 아닌 수행 비서인 교원은 회사 내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편이 아니었다. 대부분 권 대표와 하루를 시작하고, 끝마칠 때까지 옆에 붙어 있어야 하니 문서 관련 업무는 각 팀장이 맡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교원은 아랫사람들에게 중요한 일을 잘 맡기지 않는 타입이었다. 중요한 일인 만큼 실수는 없어야 했고, 그랬기에 늘 제가 업무를 떠맡았다.
권 대표를 집에 보낸 뒤에 야근을 하는 것도, 주말에 출근하는 것도 모두 그 이유였다.
권 대표는 옆에 앉아 얌전히 기다렸다. 평소 손에서 떼어 놓질 않던 핸드폰도 하지 않고 턱까지 괴며 교원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일하는 게 예뻐서. 신경 쓰지 말고 일해.”
“예쁘…… 하아, 알겠습니다.”
저 사람이 개소리를 하는 게 한두 번이던가.
교원은 마저 작성을 끝내고,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훑은 뒤에야 컴퓨터를 종료했다.
“휴게실로 가시죠.”
“응응.”
그때 교원의 눈에 무엇 하나가 걸렸다. 권 대표의 둥글고 예쁜 이마가 붉게 물들어 있던 것이다.
“이마는 왜 그러십니까?”
“응? 아, 아침에 벽에 박았어.”
“……어쩌다가요?”
“이 비서 생각하다가?”
뭐, 핸드폰 게임을 하다 벽에 박았나 보다. 교원은 신경을 끄기로 하고, 본심을 꺼냈다.
“근데, 오늘은 웬일로 회사에 다 오셨습니까?”
비서실 문을 열며 먼저 나갈 수 있게 몸을 비켜 주는데, 권 대표는 평소와 다르게 제가 문을 붙잡고는 먼저 가라는 듯 턱짓을 했다.
교원은 그를 올려다보며 의심쩍은 얼굴을 해 보였다.
또 뭔가, 부탁할 생각인가 본데.
“아니, 나도 일 좀 하려고.”
“예?”
“왜, 나는 일하면 안 돼?”
“……그간 일하면 안 되는 사람처럼 굴지 않으셨습니까?”
“아니거든. 큼, 나 이제 다시 태어났어.”
일전의 연애 이후 잠잠해졌다 했더니, 뭔가 충격적인 사건이라도 있었나. 예를 들면 차이면서 ‘당신처럼 일 못하는 남자는 싫어.’라는 말이나, ‘그렇게 게으르게 살면 누가 좋아해 줘요?’라는 말을 들었다든가.
“네, 뭐…….”
“안 믿는 거야?”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대표님 말에 토를 달겠어요?”
“맨날 달잖아.”
휴게실에 도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일요일이라 휴게실은 텅 비어 있었다. 권 대표는 정중앙 테이블에 떡 하니 앉으며 달랑달랑 들고 온 봉투를 열어젖혔다.
“자, 먹자. 먹자.”
“네.”
권 대표가 정말 일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그만한 희소식이 없다. 그럼에도 믿음은 가지 않았다. 노는 것, 연애하는 것을 제외하면 의욕이라곤 쥐똥만큼도 없는 남자가 갑자기 바뀐다는 걸 어찌 믿겠는가.
“맛있어?”
“네, 맛있네요.”
“여기 엄청 맛집이야. 줄 서서 사 왔어.”
“뭐…… 그렇게까지요?”
“우리 자기 맛있는 거 먹이려고.”
빈말은.
교원은 코웃음을 치며 초밥을 우물우물 씹어 삼켰다. 확실히 신선하고 살도 통통한 것이 꽤 맛있다. 쌀알도 너무 찐득하거나 흐트러지지 않고 적당히 간이 배어 있었다.
교원은 회사를 다니기 전까지 편의점 음식이나 어설프게 지은 밥으로 끼니를 때우곤 했었다. 그러다 그의 직속 비서가 되고 나서는 매일같이 고급스러운 음식을 먹다 보니 덩달아 입이 꽤나 까탈스러워졌다.
“이 비서, 근데 말이야.”
“예.”
비서의 직감이 알려 주고 있었다. 이번에 할 말이야말로 ‘진짜 할 말’이라는 것을.
“내가, 음…… 원래 오메가만 만났잖아.”
“네.”
그 베타 이야기구나. 교원은 심드렁한 얼굴로 초밥을 하나 더 집어 먹었다.
“근데 그날 만난 사람이 아무래도 베타 같거든. 그때…… 페로몬이 느껴지진 않았으니까.”
“그래서요.”
가장 좋아하는 초밥은 계란 초밥이다. 솔직히 계란 초밥을 초밥이라 부를 수 있는가 물으면 교원은 ‘아니다.’라고 답할 수 있었다. 밥 위에 날 것을 올려 먹는 게 초밥이지 않은가. 하지만 문화적으로 정착되었으니 ‘그렇다.’라고 봐야겠지.
달달한 계란이 입에서 사르륵 녹자 기분이 꽤나 좋아졌다. 어제 차의겸을 만난 불쾌한 일은 머릿속에서 날아가 버릴 정도로.
“그래서 이번에 찾았다고 했는데…… 아직 다시 만난 적이 없거든.”
“네.”
“그게, 이 비서가 만나 보라고 했는데도 마음이 동하질 않아서 말이야.”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그래서 말인데, 이 비서가 좀 같이 가 주면 안 될까? ……오늘.”
그에게서 튀어나온 어처구니없는 말에 교원은 급히 티슈를 찾아 입을 가렸다. 사레가 들려 목이 따끔따끔거렸다. 생리적으로 눈시울이 붉어지자 권 대표가 티슈 하나를 더 뽑아 교원의 눈가를 꾹꾹 닦아 주었다.
“그, 제가, 거길, ……왜?”
“이 비서랑 가면 좀 나을 거 같아서?”
“저 사람 보는 눈 없습니다.”
“진짜?”
“그러니 권 대표님하고 일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비서라면 모두 공감하는 말이 있다. 연봉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사를 잘 만나는 것, 이라고. 처음 입사했을 때 교원은 겨우 일주일 만에 퇴사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물론, 다른 상사들처럼 주말 새벽에 연락한다거나, 시도 때도 없이 잔심부름을 시킨다거나, 갑질을 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 줘야 하는 상사는 참으로 귀찮고 힘들었다.
“너무한다…… 너?”
“권 대표님, 스스로 좋은 상사라고 생각하신 적 있으십니까?”
“그건…… 없지!”
“네, 그런 의미로 거절하겠습니다.”
느닷없이 관심 있는 상대와 삼자대면을 해 달라니. 그의 연애 사업을 도와주는 것이야 수도 없이 해 봤으니 뒤에서 챙겨 줄 수는 있지만, 상견례처럼 그 옆에 앉아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 왜애.”
“제가 끼면 상대분도 불편하실 겁니다. 뭣보다, 그것 때문에 대표님에 대한 마음을 접으실 수도 있고요.”
“상관없어. 같이 가 주라, 응?”
이 정도로 거절했으면 포기할 줄 알아야 하는데.
“제가 같이 가서 좋을 게 뭐가 있습니까?”
슬쩍 쏘아붙이자 권 대표가 끙, 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가 들었다.
“사실, 그 사람이 자꾸 만나자고 하는 거…… 내가, 다른 사람 생겨서 거절했거든.”
“그럼 된 거 아닙니까?”
“근데 그 사람이 눈으로 봐야 믿겠다고 하잖아.”
마지막 초밥을 젓가락으로 집어 든 교원이 손짓을 멈췄다. 설마, 이 인간.
“지금 그래서…… 제가 대표님 연인 행세라도 해 달라는, 뭐, 그런 겁니까?”
“응, 맞아!”
싸늘하게 식은 교원의 낯에도 권 대표는 빙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넓은 어깨가 더욱 커다랗게 보이도록 팔을 양쪽으로 벌렸다.
“역시 우리 이 비서, 똑똑해!”
“……일단, 대표님. 그걸 제가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뭣보다 그 사람 그렇게 안 떨어집니까? 안 믿어도 그냥 끝을 내면.”
권 대표가 난감한 표정으로 제 턱을 긁었다. 교원이 말을 끊자, 그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게…… 거래처 사장 아들이더라고. 뭐, 거래처가 한두 곳이겠냐만…… 만난 술집이 꽤 값이 나가는 곳이라.”
아.
그러니까, 아무 술집이나 돌아다닌 게 아니었다는 말이지.
그건 제가 듣기에도 불편한 만남이긴 했다. 오히려 엮이지 말아야 할 사이가 아닌가. 무작정 떨쳐 내기엔 애매한 사이기도 했다.
대부분 NM 계열사 중 하나인 NM리서치라 하면 먼저 계약을 권할 정도로 제법 평이 좋은 회사였다. 권 대표는 NM리서치의 대표였으니, 거래처 아들을 내친다고 해서 그쪽 사장이 연을 끊어 내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권 대표에게는 하나의 법칙이 있었다. 거래처를 대할 때에는 그곳의 규모가 어떠하든 오만하게 굴지 말 것.
“상여금. 이 비서, 상여금 어때.”
교원이 고민하고 있자, 권 대표가 슬그머니 거래를 요청했다. 50:50으로 기울었던 마음이 한쪽으로 툭, 쏠렸다.
이 새끼가 사람을 돈에 미친놈으로 보네.
“좋습니다.”
교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권 대표는 생각보다 저를 잘 알고 있었다고, 머릿속에 정보를 한 가지 추가하면서.
* * *
오늘의 권 대표는 정말 이상했다.
그간 밀린 일을 주는 대로 처리하질 않나, 오히려 제가 좋은 의견을 내오기까지 했다. 그러고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어때? 나 어때? 멋있어?〉
하고. 그럼 교원은 미쳤냐는 말을 꾹 삼키고, 앞으로도 이래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네, 멋있습니다.〉
그 한마디가 뭐라고, 권 대표는 신이 나서는 하반기에 진행할 프로젝트와 현재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의 고칠 점 등을 정리하기까지 했다.
못 미더운 마음으로 그가 준 것을 살펴봤지만, 매일 탱자탱자 놀던 사람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완벽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지금까지 안 하고 놀았다는 말이 됐다.
그리고 약속대로 교원은 저녁 6시가 되었을 때 권 대표를 따라 퇴근했다. 그는 약속 장소에 가기 전, 교원을 데리고 백화점에 들렀다.
제 연인이라는 티를 내려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로 맞춰야 한다나, 뭐라나.
그런 것치고는 여러 벌을 사긴 했지만 교원은 사양하지 않았다. 권 대표의 직속 비서인 탓에 어느 정도 값이 나가는 정장을 사곤 했지만, 확실히 이 커다란 기업의 비서답지 않은 복장이 많았던 탓이다.
앞으로 이걸 돌려 입어야지.
“맘에 들어?”
“예. 역시 돈이 좋네요.”
“……이 비서는 참, 돈을 좋아해.”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약속 장소는 백화점 근처였다. 교원은 거울을 쇼윈도에 비친 제 모습을 한번 훑어보았다.
확실히 비싼 옷은 때깔이 다르다. 천도 그렇고, 옷매무새나 마무리, 세심한 부위 하나하나가 깔끔하고 각이 잘 잡혀 있었다.
“저기, 저 술집이야.”
“네, ……아, 제가 대표님을 뭐라 부를까요?”
“자기?”
“……희수 씨라고 부를게요.”
“알겠어, 자기.”
저 ‘자기’는 이미 귀에 들러붙어 낯설지도 않았다. 교원은 권 대표를 따라 술집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1층에 위치한 술집은 창이 커 안쪽이 훤히 보였다. 내부가 넓고 사람도 제법 차 있었다. 그 안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교원은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창가에 앉아 있는 사람은 몹시도 익숙한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