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우리 중전마마께서는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시나?”
도형이 뜬금없는 말을 걸어 오는 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뜻이다. 대개 무슨 생각을 하는 건 수현이 아닌 도형 쪽이다. 수현은 도형의 말간 얼굴을 물끄러미 건너다보다가 생기 넘치는 표정이 눈부셔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새하얀 피부 아래 연한 홍조가 비쳐 뺨이 분홍색으로 물든 것처럼 보였다. 새초롬하게 눈꼬리가 올라간 둥근 눈은 장난기로 가득 차 있었으며 새카만 눈동자는 반들거리는 흑석 위에 올려 둔 투명한 수정 구슬처럼 맑게 빛났다. 아무렇지도 않게 수현을 뒤흔드는 말들을 툭툭 내뱉는 사랑스러운 입술은 마치 이슬을 머금은 아침 꽃잎처럼 탐스러웠다.
도형은 제 얼굴을 눈으로 떠먹느라 넋을 잃은 수현을 재차 채근했다.
“중전 강씨? 지금 어명을 무시하는 건가?”
“아니요. 잘 듣고 있습니다.”
“어제 조폭 사무실 압수 수색했거든요?”
“네.”
“압수품 목록을 보는데 말이에요.”
“저한테 말씀하셔도 됩니까?”
“응?”
“수사 상황 누설하셔도 괜찮으신가 해서요.”
“우리가 그런 거 따질 사이에요? 나 신고할 거야?”
“그냥 해 본 말입니다.”
도형이 토라진 티를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팩 돌리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압수품 목록이 왜요?”
“됐어요. 수사 상황 누설 안 합니다.”
“궁금해서 잠이 안 올 것 같아요. 잠을 못 자면 피부가 상하고, 피부가 상하면 미모가 시들지도 모르는데. 미모가 시들면 저는 형사님께 버림받겠지요? 이렇게 소박을 맞는다고 생각하니 너무 괴롭고 마음이 아파서….”
미간을 찌푸린 도형이 수현을 향해 삿대질했다.
“아, 진짜! 내가 평생 데리고 산다고 했지! 내가 소박 놓으면 얼른 다른 사람한테 새로 시집가려고? 그 꼴 못 보지!”
“귀여워서 그랬습니다.”
“뭐요?”
“당신이 삐친 얼굴이 보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미치셨나.”
“네. 미쳤죠. 당신에게.”
몇 번 어색하게 눈을 깜빡거리던 도형은 결국 귀 끝까지 새빨개져서는 궁지에 몰린 동물처럼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수현의 뜨거운 시선을 피했다.
“아이, 진짜. 강수현 씨는 수치심도 없어요?”
상처투성이 손으로 고운 얼굴을 연신 문지르던 도형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있었던 것 같기는 해요.”
“한 마디를 안 져요.”
“하지만 이건 수치스러울 일이 아니지 않나요?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이 왜 수치스럽나요? 저는 뉴욕 타임 스퀘어에 전면 광고도 낼 수 있어요. 우선 지하철 광고부터 시작할까요?”
“강수현!”
“네에.”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그만 좀 해요. 나 강수현 씨가 그럴 때마다 수명 까이는 거 같아요. 진짜 어떻게 저런 사람이 있지?”
“그래서 압수품 목록에서 재미있는 거라도 발견하셨습니까?”
태연하게 말꼬리를 돌린 수현이 도형에게 성큼 다가섰다. 셔츠 깃 사이로 드러난 도형의 하얀 살갗에 가슴이 선득거렸다. 귀에서 턱으로, 그리고 다시 목으로 이어지는 반드러운 선을 보며 수현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수현에게 도형은 멸종 위기의 희귀종 같았다. 그의 생명력 충만한 아름다움은 관능적이었으며, 정면으로 햇빛을 받으며 문간에 비스듬히 기대선 모습은 또 얼마나 색정적인지.
수현은 도형을 야생 동물처럼 포획해 애완동물처럼 쓰다듬고 싶었다. 남의 손에 잡혀 줄 남자도 아니고, 잡힌다고 순순히 머리를 내어놓을 남자도 아니었으므로 수현은 그의 늘씬한 몸 선을 감상하는 것으로 부글거리는 욕망에 뚜껑을 덮었다.
“좀 그렇더라고요. 세상에 무슨 변태가 그렇게 많은지. 말세야, 말세.”
“조직폭력배는 변태라기보다는 범죄자가 아닐까요.”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러면 변태라고 할 만한 무언가가 나왔나요?”
“그, 있잖아요. 그거. 막 이상한 그런 거. 몇 박스나 나왔어요.”
“막 이상한 그런 게 뭘까요?”
“또 나 놀리는 거죠.”
“그럴 리가요.”
본래의 뽀얀 빛을 되찾았던 도형의 뺨이 붉은 물이 오르기 시작한 풋사과처럼 향긋하게 익었다. 수현이 한 걸음 더 다가갔다. 한여름 무르익은 가지처럼 탄력 있는 허리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자 도형은 눈을 꼭 감고 몸을 바르르 떨었다.
“도형아.”
새빨개진 얼굴로 숨을 허덕이는 도형을 품에 안고 잠자리에서만 부르는 그의 이름을 부르니 어쩐지 한창 섹스 중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상한 게 뭐야? 뭐가 그렇게 변태 같았길래 이렇게 흥분했어?”
“흥분하기는 누가 흥분해요? 내가 자기인 줄 알아요?”
“내가?”
“자기 변태잖아.”
도형도 그렇고 그런 기분이 들었나 보다. 역시 침대에서만 쓰는 호칭으로 수현을 부르는 것을 보니.
“그래?”
“그으래? 그 말이 나와? 내가 살다 살다 자기 같은 변태 처음 봤다. 아, 강수현! 좀! 시도 때도 없어! 그러니까 변태라는 거 아니야!”
은근슬쩍 엉덩이를 주무르던 수현의 손등을 사납게 후려친 도형이 팔짱을 끼고 매서운 눈을 했다.
“됐어요. 강수현 씨랑 무슨 말을 하겠어. 출근합니다. 돈 열심히 벌어요.”
“오늘 야근하실 거예요?”
“오늘 밤 일을 무슨 수로 벌써 알아요? 내가 무당도 아니고.”
온몸으로 심통을 부리는 얄망궂은 뒤통수를 바라보다가 수현이 작게 웃었다. 야근할 일이 생길 것 같냐고 물어본 게 아니라 야근을 할 생각이 있는지 의지의 여부를 물어보려던 거였는데요. 하지만 그런 말은 속으로 씹어 삼키기로 한다. 입 밖으로 내 봐야 욕밖에 더 먹겠는가.
***
중전마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