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nal Chapter. 형사가 사랑을 안 숨김
조그만 사각형 공간에 앉아 투명한 아크릴 건너편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멸망해 버린 세계에 도형과 유선 단둘만 남겨진 것 같았다.
“선배.”
도형은 유선이 그의 말을 듣고 있는 것을, 그렇지만 일부러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유선이 오늘 대답하지 않으면 내일 또 찾아올 것이다. 내일도 대답하지 않으면 모레, 모레가 안 된다면 그다음 날. 도형은 만족스러운 답을 들을 수 있을 때까지 반드시 유선을 거듭거듭 찾아올 것이다. 형사라는 인간들은 대체로 집요한 법이다.
“유선이 형.”
도형이 “유선이 형”이라고 자신을 부른 순간이 유선에게는 경찰 특공대와 광역 수사대에게 긴급 체포당했던 때보다 더 결정적이고 더 무서운 순간으로 느껴졌다. 그것은 유선이 필사적으로 간직해 온 형사 수첩을 강제로 빼앗긴 데에 이어, 겨우 발 딛고 있던 합법적 공간에서 추방된 것을 재확인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 그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은 어리석은 짓이다. 공화국 프랑스는 관용으로 건설되지 않는다.”
“…….”
“저 진심으로 선배 존경했어요.”
“…….”
“기억나요? 이거 선배가 해 준 말이잖아요.”
“이제 오지 마.”
“관용 위에서는 무엇도 건설되지 않는다고 선배가 그랬잖아요.”
“정말 나를 못 견디게 하는 건….”
“네.”
“이 순간에도 내가 살아 있다는 거야. 비겁한 나는 비겁하게 살아남았고, 너무 비겁해서 스스로 죽지도 못해.”
“선배.”
“할 말 없다. 전부 나 혼자 계획한 일이고, 다른 사람들은 나한테 속아서 이용당한 거야.”
“송현미. 황태진.”
차분한 목소리가 익숙한 이름을 불렀다. 차갑지는 않지만 단호함이 배어 있는 목소리다. 유선은 종이에 손가락이 베이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도형이 야위고 핏기 없는 얼굴로 유선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그게 누군데?”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 여덟 명이 죽었어요. 선배, 저 한번 물면 안 놓는 거 아시죠. 이제부터는 선배 하기 나름이에요. 송현미랑 황태진이 살인죄 공동 정범으로 기소될지, 아니면 종범으로 기소될지.”
“나랑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이야.”
유선의 목소리가 쌀쌀했다. 그러나 미처 숨기지 못한 서늘한 절망이 선연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왜 그런 말을 했을까요?”
“무슨 소리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모르는 일이야.”
“정유선 선배.”
도형이 또 유선을 불렀다. 그 얼굴과 음성에서 무언가가 느껴졌다. 꼬집어 말할 수는 없으나 오랫동안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며 말해 온 사람의 목소리였다.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잖아. 왜 자꾸 귀찮게 굴어.”
도형의 신산스러운 시선이 유선을 향했다. 아직 망가지지 않은, 망가져 보지 않은 사람의 얼굴이 유선을 마주 보았다. 악몽을 꾸고 축축한 이불을 걷으며 일어나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그때마다 마주하는 잿더미 같은 절망감을 모르는 얼굴이었다.
“이미 두 사람 다 긴급 체포되어서 구속되었어요. 곧 기소될 거예요. 그쪽은 자기들이 선배 이용했다고 하던데요. 전부 자기들이 계획한 거고, 현역 경찰 꼬드겨서 정보 빼낸 거라고.”
“왜….”
“도대체 왜 그러셨어요.”
도형은 관자놀이를 세게 문질렀다. 유선의 구김살 없는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 웃음소리에 실려 있던 호의와 친밀함을 생각했다. 유선의 코가 천천히 붉어졌다.
“우리 부모님 돌아가신 교통사고, 음주 운전하다가 뒤져 버린 그 새끼가 다른 사망 사고 낸 적 있다고 했지? 그때 죽은 아이가 송현미, 현미 누나 딸이야. 현미 누나가 미성년자일 때 좀 엇나간 적이 있는데… 그때 소년계 계시던 황 경감님이 누나 돌봐 주셨어. 그 사람들은 아무 상관 없어. 자기들이 무슨 수로 나를 이용해. 다 거짓말이야. 전부 나 혼자 한 거야. 뭔지도 모르고 내가 부탁하니까 들어준 것뿐이야. 진짜야. 도형아….”
“검사한테도 똑같이 말씀해 주실 거죠?”
“내가 뭐 하면 돼? 내가 어떻게 하면 두 사람 풀려날 수 있어?”
“지은 죄가 있는데 무슨 수로 풀려나요. 선배가 제일 잘 알잖아요.”
유선이 고개를 푹 숙였다. 바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얼굴을 들었지만, 도형은 그의 눈에 순간적으로 스친 죄책감을 놓치지 않았다.
“나는 후회하지 않아. 잘못한 것이 없어서 후회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후회하는 게 없어서 잘못한 것이 없어. 그런데 너한테 이거 하나만은 꼭 사과하고 싶었어.”
“저한테요?”
“강수현. 그 사람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어. 그거 딱 하나 후회한다. 미안하다. 용서해 달라고는 하지 않을게.”
***
도형은 유달리 크게 느껴지는 병실 문 앞에 서서 재킷 깃을 매만지고 옷자락을 팽팽하게 잡아당겼다가 허벅지 어름의 주름을 탈탈 털고서 그사이에 시든 꽃잎이 없는지 유심히 살핀 뒤에 심호흡을 세 번 하고 드르륵 미닫이문을 열었다.
“희빈 강씨는 어명을 받들…라…?”
보무당당하게 병실로 입성한 도형을 맞이한 것은 회진 중인 주치의와 그 뒤를 따르는 레지던트 무리, 링거액과 드레싱을 막 갈았는지 카트를 정리하는 간호사, 그리고 선우진 팀장과 도진이었다.
황황함에 얼굴을 들지도 못하고 그대로 뒷걸음질 치는 도형의 어깨를 굵은 손이 붙들어 세웠다.
“우리는 끝났다. 너 볼일 봐라.”
의료진이 도형을 흘끔거리며 우르르 나가자 도형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방 안의 상황을 살폈다. 이제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게 된 건지 침대를 비스듬히 세워 기대앉은 수현이 천연덕스러운 시선으로 도형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도형의 옆에 딱 붙어 선 도진이 팔짱을 낀 채 영 못마땅한 표정으로 강수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팀장은 도형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문을 열었다가 다시 병실로 돌아와서는 장승처럼 버티고 선 도진을 질질 끌고 나갔다.
“아, 그게, 그러니까….”
목석처럼 서서 말을 더듬는 도형을 향해 수현이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한 달이 넘도록 자리보전 중인 수현은 많이 여위었다. 뺨이 홀쭉해진 탓인지 그린 듯 수려한 이목구비에 예민함이 덧씌워져 곧 깨질 것 같은 요요함이 풍겼다. 이런 와중에도 여전히 고혹적인 수현 때문에 도형의 심박수가 어지럽게 날뛰었다.
“저 보러 오셨어요?”
“그게, 음….”
손을 뒤로해 꽃다발을 감춘 도형이 천천히 수현에게 다가갔다.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흔들리던 눈동자가 간신히 초점을 되찾고 수현을 곧게 건너다보았다.
무언가 결심했는지 훅 하고 볼을 부풀려 입바람을 불어 낸 도형이 한쪽 무릎을 꿇고 수현에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언젠가 도형이 참 예쁘다 하기에 수현이 이름을 알려 주었던 작약으로 만든 꽃다발이었다. 수현은 알까. 도형이 작약을 특히 어여쁘게 여긴 건 수현을 닮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강수현 씨. 저와 결혼을 전제로 사귀어 주시겠습니까?”
“흠.”
당연히 좋다고 할 줄 알았는데 새침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수현을 보자 도형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어디서 틀린 거지. 말을 잘못했나. 이게 아닌가. 서서히 핏기를 잃어 가는 도형을 가만히 바라보던 수현이 느릿느릿 말했다.
“순서가 틀렸어요.”
“네?”
“그 전에 먼저 듣고 싶은 말이 있는데.”
결혼을 전제로 교제를 청하기 전에 해야 할 말이 뭐지. 뭘까. 연애도 못 해 봤는데 청혼부터 하려니 너무 어렵다. 아, 연애. 맞다, 연애. 사모할 戀에 사랑 愛. 그래. 이 인간, 지독한 컨셉충이었지….
“강수현 씨. 좋아합니다. 아니, 사랑합니다. 평생 행복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저와….”
“날짜는 언제가 좋을까요?”
“네? 갑자기요?”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으니.”
“내가 소예요?”
수현이 갑자기 수줍게 눈을 내리깔더니 이가 썩을 것같이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전 욕심도 많고 독점욕도 지독하고 질투도 사납습니다. 제 앞에서 형사님이 없어지는 상상만 해도 미칠 것 같고, 누가 형사님을 탐내면 무슨 짓을 할지 저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하니 전하, 결코 다른 이에게 정을 주지 마시옵소서. 오직 신첩 홀로 승은을 입고 싶사옵니다.”
“아이, 진짜.”
“약속해 주세요.”
“내가 바람이나 피울 놈팡이로 보여요?”
“그건 아니지만….”
도형은 박력 있게 수현의 얼굴을 감싸 쥐고 입술을 겹쳐 도장을 꾹 찍었다.
“평생 강수현 씨 한 사람만 볼게요. 맹세의 키스. 됐죠?”
수현은 대답 대신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이고는 도형의 입술을 간질이듯 핥았다.
“저도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