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 수비드(Sous Vide)의 미학
강수현은 혼란스러웠다.
유혹하는 건가? 놀리는 건가? 괴롭히는 건가?
김도형 대체 뭘까….
언제는 어깨만 살짝 스쳐도 히끅히끅 딸꾹질을 하더니, 응급실 소동 이후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도형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원래의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수상한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수현과 눈이 마주쳐도 얼굴을 돌리지 않았으며 장난스럽게 머리를 쓰다듬거나 목 뒤를 살살 간질여도 얼굴이 빨개지지 않았다.
도형의 악행은 다리를 다친 다음 날 밤에 수현의 방문을 똑똑 두드리는 것으로 시작했다. 도형은 문을 조금 열고 훈기가 도는 말간 얼굴을 빼꼼 들이밀었다.
“소독이랑 드레싱 가는 거 도와주세요.”
“아, 구급상자 가져올게요.”
“가지고 왔어요.”
반팔 티셔츠에 딱 붙는 드로어즈만 입고 하체를 훌렁 드러낸 도형이 살짝 다리를 절면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수현은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기분에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혹시 얼굴이 붉어졌다면 기침 때문이라고 생각해 주면 좋을 텐데.
그 와중에도 도형의 다리에서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근육이 잘 잡힌 탄탄한 허벅지와 날렵하게 빠진 종아리, 톡 튀어나온 복숭아뼈와 발뒤꿈치 위로 양옆이 쏙 팬 아킬레스건까지 지나치게 선정적이었다. 다리가 걷고 뛰기만 잘하면 될 것이지 굳이 이렇게 야한 모양을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도형은 침대에 풀썩 앉아 수현의 다리 위에 제 허벅지를 턱 걸쳤다.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상처 입구가 벌써 달라붙었다. 도형의 장담대로 회복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진짜 짐승인가.
“윽, 하아…. 으응….”
그렇다고 앓는 짐승 소리를 낼 필요는 없는데. 많이 아팠는지 눈을 감고 미간을 찌푸린 도형이 잇새로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그 얼굴이 마치…. 수현은 빗속에 방치된 소금 자루처럼 허물어지려는 이성을 간신히 부여잡고 산뜻한 미소를 꾸미며 정성스럽게 드레싱을 마무리했다.
“손 주세요.”
“네!”
도형은 훈련 잘된 강아지처럼 냉큼 손을 내밀었다. 새하얀 붕대를 손에 감은 도형이 수현의 손을 덥석 잡고 그네 타듯 덜렁덜렁 흔들었다.
“만능 강수현 선생님. 종합 능력치 백 점 만점에 5백만 점.”
빙긋 웃으며 칭찬인 것 같은 소리를 하더니 수현의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저 방까지 갈 기운 없으니까 여기서 잘래요.”
“아, 네. 그러세요.”
수현은 이불을 젖혀 도형이 들어올 자리를 만들어 주고 구급상자는 사이드 테이블에 올려 뒀다. 찬물 샤워라도 해야겠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도형이 허리를 끌어안더니 수현을 침대로 쑥 끌어 내렸다.
“어디 가요. 나 졸려요. 얼른 자요.”
말문이 막혀 눈만 끔뻑거리다가 도형의 힘에 이끌려 다시 주저앉았다. 옆구리에 눌린 뺨의 촉감, 습하고 따뜻한 숨결, 간질간질한 속눈썹. 신종 암살 기법인가. 내가 무슨 나쁜 짓을 했다고. 아, 많이 했군. 그간의 업보를 지금 치르는 걸까. 나무토막처럼 천장을 보고 똑바로 누운 수현의 허벅지 위에 도형이 제 벗은 다리를 올렸다.
“상처를 심장보다 높이 둬야 한다더라고요?”
몸을 몇 번 꾸물꾸물 움직인 도형은 수현의 몸을 휘감은 모양으로 자세를 잡았다. 도형과 닿은 자리에서 아른아른한 열기가 흘러 들어와 수현의 중심으로 몰렸다. 다리 사이에 고인 부적절한 욕망에 수현은 얼어붙었다. 미치겠군. 도형의 다리는 타락한 우정의 상징과 닿을락 말락 한 위치에 있었다. 만약 여기서 도형이 움직이기라도 한다면. 혹시라도 그럴 예정이면 스쳐 지나가지 말고 무릎으로 세게 쳐 주었으면. 아예 터져 버리도록. 강수현은 수치심에 목이 메었다.
그런 수현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형은 한층 몸을 가까이 붙여 수현의 몸통에 팔을 둘렀다.
“아. 시원해. 기분 좋다.”
뭐지. 김도형 뭐지. 대체 뭐지. 흘끔 도형을 내려다보니 그는 한 점 티 없이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수현은 꼼짝없이 도형의 팔다리에 휘감긴 채 신규 투자 계획과 신약 개발 현황, 생동성 시험 경과를 되새겼지만 한번 추진력을 얻은 혈액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빌어먹을 유체 역학.
색색 고른 숨소리가 들려 수현은 살짝 몸을 움직여 보았다. 도형이 미동도 없는 걸 보니 아마도 단잠에 빠졌나 보다. 고민할 때 오리 주둥이처럼 튀어나오는 정도는 아니지만, 얼굴에서 힘을 뺐을 때의 습관인지 도형은 새 부리처럼 입술을 살짝 내밀고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손가락에 촉촉한 숨이 느껴지자마자 서둘러 손을 거두었다.
수현은 아주 천천히, 유약한 조각품을 옮기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도형의 팔을 잡아 제 몸에서 떼어 내고 상체를 일으킨 뒤에 아슬아슬한 자리에서 멈춘 다리를 침대에 내렸다. 몸을 웅크리고 있어서 그런지 드로어즈 밑단으로 허벅지의 제일 윗부분, 그러니까 엉덩이의 제일 아랫부분이 보였다.
죽겠군. 수현은 방에 딸린 욕실로 들어가려다 탄식을 닮은 한숨을 내쉬고 어기적어기적 거실 화장실로 향했다. 잠들지 못하는 긴 밤의 시작이었다.
***
도형은 일어나자마자 팔다리를 휘저었다.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번쩍 눈을 떴는데 역시 자기 혼자만 덩그러니 누워 있었다. 살짝 부은 눈도, 헝클어진 밤색 머리도,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는 오싹오싹하게 야한 목소리도 없었다. 어쩐지 시무룩한 기분이 들었다. 주섬주섬 일어나 제 방에서 바지를 챙겨 입고 주방으로 가니 수현이 아침 준비에 한창이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래, 저 목소리. 저 목소리를 들어야 하루가 시작되는 기분이다.
“출근 준비 안 해요?”
“좀 늦게 출근할 예정이라서요. 모셔다드릴게요.”
살짝 피곤해 보이는 수현이 무슨 꿍꿍이인지 짓궂은 미소를 띠었다.
“연두색이 좋으세요, 빨간색이 좋으세요?”
“뭐가요?”
“차요.”
“아, 둘 다 별로. 제 차로 가요.”
“싫어요.”
강수현 왜 저래.
“그럼 주황색으로 결정.”
수현은 새침하게 말하고 다시 조리대 앞에 섰다. 진짜 왜 저래. 한동안 뜸하다 싶었는데 왜 갑자기 안 하던 희빈 강씨 흉내를 내지. 도형은 머리를 긁적긁적하면서 기계처럼 몸을 씻은 후 옷을 갈아입고 식탁 앞에 앉았다. 거대한 식탁은 온갖 산해진미로 가득해 마치 잔칫상 같았다.
“언제 다 만들었대?”
“잠이 안 와서요.”
“아침부터 이걸 어떻게 먹어….”
“형사님 에너지 많이 섭취해서 빨리 회복하시라고 제가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만들었는데, 설마 못 드신다는 말씀은 아니시겠지요?”
“아니요, 그 말이 아니라….”
수현이 촉촉한 눈으로 서글프게 도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상에서 도형이 절대 이기지 못하는 것이 세 가지 있는데, 하나가 배고픔이고 두 번째가 불결함이고 세 번째가 강수현 얼굴이다.
“안 그래도 되게 배고팠거든요. 와! 맛있겠다! 뭐부터 먹지?”
“드시고 계세요. 드레싱 갈아 드릴게요.”
“네?”
“조금만 옆으로 돌아앉아 주시겠어요? 몸 조금만 들어 주시고요.”
도형 앞에 앉은 수현이 도형의 바지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렸다. 당황에 숟가락을 떨어뜨릴 뻔한 도형이 움찔거리며 엉덩이를 조금 들자 수현이 바지를 단숨에 발목까지 끌어 내렸다. 소독하고 약을 바르고 새 반창고를 붙인 수현은 도형의 무릎에서부터 시작해 허벅지를 부드럽게 쓸어 올리더니 단단한 허벅지의 유일하게 부드러운 안쪽 살을 한 움큼 아프지 않게 쥐었다. 꽥. 멱따는 소리와 함께 밥알이 튀어나올 뻔해서 도형은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히 인대와 신경은 괜찮은 것 같군요.”
수현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도형은 셔츠 아랫자락을 잡아 중심을 가리느라 필사적이었다. 다행히 아무것도 보지 못했는지 수현은 태연하게 도형의 바지를 도로 입혀 주려 했다.
“제가 할게요. 제가 입을게요.”
허겁지겁 바지를 추켜 입으니 어느새 옆에 와 앉은 수현이 도형의 왼손을 잡고 주물럭거렸다. 손가락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쓰다듬으며 굽혔다 폈다 굴신과 붓기를 확인하고 안타까운 눈으로 길게 베인 상처를 소독해 주었다. 새하얀 붕대에 감긴 손을 천천히 어루만지며 “몸에서 뼈가 제일 많은 부위가 손이에요.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라며 긴장으로 굳은 손등과 손목을 한참 주무르더니 처연하게 웃었다.
도형의 똘똘이가 폭동을 일으켰다. 이 정도면 거의 전쟁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청바지를 입은 탓에 우람한 윤곽이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그런 만큼 질긴 데님 아래에서 죽겠다고 아우성치는 성기 때문에 뇌까지 저릿저릿했다. 그는 신경을 분산시키기 위해 먹는 행위에 온 힘을 쏟았다. 젓가락이 닿는 대로 꾸역꾸역 입으로 집어넣었다. 분명 엄청나게 맛있을 텐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속이 더부룩한 것이 분명 얹힌 것 같은데 목구멍 안쪽으로 음식을 욱여넣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입이 비면 이상한 말을 내뱉을 것 같아서.
“맛은 괜찮나요?”
“진짜 맛있어요. 이야, 강 선생님 덕에 아침부터 호강하네요.”
“입에 맞으신다니 기쁘네요.”
“근데 선생님은 왜 안 드세요?”
“만들면서 많이 집어 먹어서요.”
수현이 눈을 휘어 접고 웃었다. 상냥하기 그지없는 얼굴인데 이상하게 수현의 눈빛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가 따끔거렸다. 뭐라고 해야 하나. 눈빛이 외설스럽다고 해야 하나. 도형은 고개를 숙이고 식사에 집중했다. 목구멍 바로 아래까지 음식을 꽉꽉 눌러 담았다.
“잘 먹었습니다!”
속이 묵직한 것이 역시 체한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천만다행으로 양치하는 사이에 하반신의 반란이 진압되었다.
수현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입구에 비스듬히 기대 도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원단이 얇은 연한 회색 바지가 그의 끝내주는 다리 선을 고스란히 드러내어 도형은 반사적으로 제 앞을 가렸다. 다행이다. 안 섰다. 거짓말이었다. 절반쯤 다시 섰다.
태연하게 주황색 스포츠카에 올라탄 수현이 시무룩하게 서 있는 도형을 향해 얼른 타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이제 그만 포기하세요.”
“으….”
“저녁때 전화 주세요. 모시러 갈게요.”
“오늘 퇴근 못 할 거 같은데요.”
“왜일까요?”
“경찰 일이 그렇죠.”
“이렇게 다쳤는데도요?”
“이 정도는 형사한테는 손가락에 가시 박힌 정도밖에 안 됩니다.”
“싫어요.”
“뭐가 또 싫어요?”
“집에 들어오세요.”
도대체 이 양반이 왜 이러는 거지. “안 돼요.”가 아니고 “싫어요.”라니. 싫어 싫어 배우기 시작한 네 살 어린애도 아니고. 수현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차를 몰았다. 서른 넘은 190cm 재벌남에게 뾰로통은 세상에서 제일 안 어울리는 형용사였지만, 수현의 그 표정은 뾰로통 말고는 표현할 수 없었다.
정문 앞에 내려 달라고 했는데 수현은 굳이 경찰서 정문 안까지 들어가 현관 바로 앞에 차를 세웠다. 차를 향해 쏟아지는 시선에 도형은 내리기도 전에 이미 불타는 고구마가 되었다.
“다녀오세요.”
“다녀오겠습니다.”
수현이 검지로 제 뺨을 톡톡 건드리며 간드러진 눈웃음을 지었다.
“굿바이 키스.”
“진짜 미치셨어요?”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는 수현이 풍뎅이 날개를 열어 주었고, 도형은 전력을 다해 계단을 뛰어 올라가려고 했으나, 다리가 아파서 그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
수현의 잠들지 못하는 밤이 이어졌다. 첫날 유치한 심통을 부리느라 도형에게 아침을 거하게 먹여 보냈더니 결국 체해서 토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수현은 치졸한 복수를 그만두었다. 대신 분한 마음을 차곡차곡 적립해 단숨에 터트릴 날만 기다리면서 와신상담의 나날을 이어 갔다.
팀장의 배려로 당분간 정시에 퇴근할 수 있게 된 도형은 잘 준비를 마치면 천연덕스럽게 구급상자를 들고 수현의 방으로 왔다. 도형이 입고 온 파자마 바지를 침대 앞에서 벗었던 날 수현은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을 혀를 깨물어 간신히 참았다. 이미 훌렁 벗은 사람보다 벗어 가는 중인 사람이 더 음란하게 보였다는 건 자신의 성벽이 뒤틀렸다는 방증처럼 느껴졌기에 그날 밤은 심란함에 잠을 설쳤다.
방까지 가기 귀찮다. 이 방 공기가 더 좋은 것 같다. 가위눌릴 것 같은 느낌이다. 도형의 핑계는 다양했고, 아무리 억지스러운 이유를 들어도 수현은 무람없이 침대를 차지한 사랑스러운 침입자를 거절할 수 없었다.
그날도 수현은 천장을 보고 똑바로 누워 인간의 뼈 206개의 이름을 하나하나 읊고 인간 유전자 염기 서열에 대해 생각하다가 피보나치수열로 끝없이 숫자를 만들었다. 그러나 중심부의 기세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만약 알몸이었다면 이불을 들어 올리고 말았을 것이다. 김도형, 정말로 사람을 말려 죽이려는 셈인가.
마치 서랍장 맨 아래 칸 구석에 구겨져 있던 잃어버린 양말처럼, 누군가가 수현이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있던 양말 모양의 리비도를 찾아낸 것 같았다. 크리스마스 양말 속에 선물을 넣듯 자신을 리비도 양말 안에 집어넣고 입구를 꼭 막아 짤짤 흔드는 기분을 느끼며 수현은 마른세수를 했다.
갑자기 도형이 너무 얄미워져서 수현은 몸을 돌려 편안하게 잠든 도형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악몽을 꿀 것 같다고 불쌍하게 말하던 남자는 어디 갔는지, 도형은 히죽히죽 웃기도 하고 얼굴을 찡긋찡긋하기도 했다. 대체 얼마나 좋은 꿈을 꾸길래 저런 얼굴을 하는 걸까. 아아. 이 크고 귀여운 생명체를 대체 어찌하면 좋을까.
수현은 충동적으로 도형의 입술에 엄지를 댔다. 도형이 잠에서 깰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심술이 가라앉지 않아 말캉한 입술을 꾹 눌렀다. 갓난아기도 아니면서 입술에 뭐가 닿자 도형이 반사적으로 짭짭 입맛을 다셨다. 황당해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한계였다. 슬그머니 일어나 거실 욕실로 향하며 수현은 도형을 향해 비장한 선전포고를 했다.
각오해. 엉엉 울면서 제발 그만하라고 빌어도 절대로 안 봐줄 거니까.
Revenge is a dish best served cold.
***
창문 밖은 아직 환했다. 길게 늘어지는 건물 그림자, 줄을 이은 퇴근길 자동차의 붉은 후미등, 연푸른 하늘에 군데군데 분홍색으로 물든 구름이 그리는 바닐라 스카이. 낮과 저녁의 경계는 온갖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노을이 번질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다.
굵은 스트라이프 무늬의 연한 회색 더블브레스트 슈트에 짜임이 독특한 검은 넥타이를 맨 장신의 남자가 창가에 기대 샴페인의 황금색 기포를 바라보는 모습은 창문틀을 액자로 삼은 사진 작품 같았다. 역광으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두운 윤곽만으로도 충분히 근사했다.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얼굴이 발개진 도형이 커다란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가슴이 달싹거리고 훅훅 숨을 내쉬는 것이 전력 질주라도 하고 온 사람 같았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재킷을 의자에 걸치고 연신 손바람을 부쳤다. 하얀 헨리넥 셔츠가 땀에 젖어 살짝 달라붙은 탓에 도형이 종이봉투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몸을 숙이니 조밀한 등 근육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쨍한 코발트블루 색의 캐주얼 정장은 도형의 늘씬한 몸매와 흰 피부를 한층 돋보이게 했고, 구두 대신 신은 하얀 스니커즈가 그의 활기찬 개성을 대변하는 듯하여 수현은 퍽 흡족했다. 도형은 딱히 취향이랄 것이 없는 사람이라 수현이 사다 놓은 옷을 손에 집히는 대로 입었고, 덕분에 수현은 도형도 모르는 사이에 그를 자신의 색으로 물들일 수 있었다. 속옷부터 신발까지 전부 수현의 손이 닿은 것이니 도형이 무얼 걸쳐도 흐뭇했다. 물론 제일 마음에 드는 건 아무것도 안 입은 김도형일 테지만.
“뛰어오셨어요?”
“택시를 탔는데 길이 너무 막혀서요. 저 손 좀 닦고 올게요.”
수현은 자리에 앉아 도형이 조심조심 들고 온 종이봉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저 안에 뭐가 들었을까. 역시 선물이려나. 무엇이길래 저토록 귀하게 모셔 왔을까. 내용물이 뭐가 되었든 도형이 자신에게 줄 무언가를 소중하게 대했다는 사실만으로 수현의 마음이 갓 찐 고구마처럼 따끈해졌다.
세수까지 했는지 앞머리가 살짝 젖은 도형이 해사한 얼굴로 돌아오자 수현은 군고구마처럼 달콤한 웃음을 지었고, 수현의 웃는 얼굴을 본 도형은 뜨거운 고구마가 목에 걸린 사람처럼 이상한 표정을 했다.
“식전주 한잔하시겠어요?”
“맥주 됩니까?”
“물론이죠.”
수현이 맥주를 주문하는 사이 도형은 요모조모 수현을 뜯어보았다. 평소와 사뭇 다른 인상이었다. 옆 가르마를 타서 말끔하게 뒤로 넘긴 머리 모양도 더블브레스트 양복도 까만 넥타이도 본 적 없는 스타일링이었다. 껍데기는 정중한 영국 신사지만 이상하게 위압감이 느껴지는 것이, 알맹이는 속내를 감춘 음험한 이탈리아 마피아 같다고나 할까. 빛과 그림자처럼 극명한 대비가 오싹오싹할 정도로 야했다. 설마 저 차림새마저 역할극의 일부인 건가.
“생일 축하드립니다!”
차가운 맥주를 단숨에 반 잔이나 마신 도형이 벌떡 일어나 종이봉투에서 상자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도형의 정성스러운 손길에 수현은 그저 흐뭇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상자에서 나온 것은 영화 소품 같은 생일 케이크였다.
“짠!”
케이크 정중앙에는 푸른 정장을 입고 노란 스포츠카에 기대선 남자의 모형이 서 있고 옆면에는 알약, 주사기, 셰프 모자, 컵케이크, 무지개, 그리고 수갑 모양의 장식이 아기자기하게 붙어 있었다.
“아…. 이건 정말….”
상상도 못 한 선물에 수현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오직 강수현만을 위한, 오직 강수현과 김도형 둘만 알고 있는 기억이 체화된 생일 케이크였다. 케이크를 구상하고 장식을 하나하나 신중하게 선택해 주문을 넣고 완성된 케이크를 찾아 이 자리까지 오는 과정마다 도형이 자신을 떠올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 숨이 가빠졌다.
“강 선생님 닮았죠? 내가 특별히 다리 길게 해 달라고 했어요. 주사기랑 알약은 앰브레이스 강수현 회장님, 셰프 모자랑 컵케이크는 요리 잘하는 강수현 선생님, 무지개는 요란뻑적지근한 자동차 취향, 그리고 수갑은…. 좀 쑥스럽다. 제가 선생님 오인 체포해서 수갑 채우는 바람에 그, 인연이 닿은 거잖아요? 그래서 여기에는 사심 좀 넣었어요. 김도형의 친구 강수현.”
“감사합니다. 이렇게 감동적인 선물은 처음입니다.”
“맨날 처음이래.”
“그러고 보니 제 처음은 전부 형사님이 가져가셨군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도형의 귀 끝이 빨개졌다.
“태어나서 다행이에요. 태어난 덕에 형사님도 만날 수 있었고.”
“아이, 민망하게 왜 그래요.”
수현은 휴대전화를 꺼내 케이크 사진을 꼼꼼하게 찍었다. 위에서도 찍고 옆에서도 찍고 둥근 케이크를 한 바퀴 둘러 수십 장이나 찍은 뒤에 도형에게 케이크를 들고 서 달라고 부탁했다. 흔쾌히 케이크를 들고 환하게 웃는 도형의 사진도 몇 장이나 찍었다.
“노래 부르고 촛불 꺼야죠. 고깔모자도 사 올걸.”
도형이 주섬주섬 긴 초를 꺼내 모형 뒤에 조심스레 꽂고 불을 붙였다. 서른다섯 살 생일인데 초가 왜 하나뿐인지 의아해하는 수현의 속마음이 얼굴로 드러났는지 도형이 씩 웃었다.
“내가 축하해 주는 첫 번째 생일이니까 초는 한 개.”
수현이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이 도형은 손뼉까지 치며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도형이 ‘사랑하는 강수현.’이라고 불렀을 때, 수현은 녹음기를 가져오지 않았음을 통탄하며 후회했다. 도형이 전화를 걸 때마다 그의 목소리로 사랑하는 강수현이라는 벨 소리가 울린다면 얼마나 황홀할까. 수현은 아쉬움을 머금고 촛불을 껐다. 소원은 빌지 않았다.
급속 냉동을 해서 동결 건조를 하면 어떨까. 유지방이 분리되려나.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수현에게 도형이 플라스틱 칼을 건넸다.
“마법 주문 읊어요? 자 이거.”
“케이크를 온전히 영구 보존하는 방안을 구상 중이었습니다.”
“뭔 소리야. 먹어야죠! 안쪽은 당근 파운드케이크고 위에는 버터크림인데, 여기 장식도 다 아몬드 가루랑 설탕으로 만든 거라 전부 먹어도 된대요.”
“먹어요?”
“케이크를 먹지, 그럼 몸에 바르나?”
수현이 수상한 표정으로 웃자 도형이 미간을 찌푸리고 왁 소리를 질렀다.
“안 발라! 바를 생각도 하지 마!”
“저한테 바르셔도 되는데.”
“닥치세요.”
수현은 직원을 불러 케이크를 맡기고 디저트로 내 달라 부탁했다. 그러더니 휴대전화 사진첩을 한참 뒤적이다 끄덕끄덕하며 이 정도 자료면 가능하겠다고 중얼거렸다.
“왜요? 또 뭐요?”
“3D 모델링으로 레플리카를 만들면 될 것 같군요.”
“진짜 부끄럽게 왜 그래요.”
“평생 소중하게 간직하다가 제 장례식 때 같이 묻어 달라고 하겠습니다. 고인이 생전에 가장 아꼈던 부장품으로.”
“강 선생님 오늘 유난히 미친 거 같아요.”
수현은 의자에 기대앉아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나른하게 웃었다. 저녁놀이 비쳐 들어 윤곽이 주황색으로 물든 얼굴이 지독하게 외설스러워 도형은 목덜미가 오싹해지는 기분에 슬그머니 눈을 떼고 남은 맥주를 마저 마셨다.
수석 웨이터와 소믈리에가 두 번째 요리와 와인을 들고 왔을 때 검지로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리던 수현이 가볍게 손을 들어 와인을 설명하려던 소믈리에를 가로막았다.
“죄송합니다. 예의가 아닌 것은 알고 있지만, 남은 코스와 와인을 전부 한 번에 가져다주세요. 셰프님께는 제가 따로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매니저님과 소믈리에님께도 사과드립니다. 중요한 대화 중이라서요. 부디 너그러운 양해 부탁드립니다.”
와인을 홀짝거리던 도형이 미간을 모으고 수현을 쳐다보았다. 중요한 이야기는 또 뭐람. 제대로 된 대화조차 나누지 않았는데. 그러나 매니저와 소믈리에는 말없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방을 나갔다.
“크게 잘못 생각했습니다. 로맨틱한 디너는 분위기나 음식이 아니라 단둘이 보내는 시간이 만드는 것을.”
“왜요? 빵도 맛있고 요리 맛있고 와인도 좋은데.”
“차라리 룸서비스를 시킬 걸 그랬어요. 형사님과 보내는 시간에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게 싫습니다.”
수현은 와인 잔을 빙글빙글 돌리다가 글라스 표면에 맺힌 물방울을 엄지로 쓱 훑었다. 와인 잔을 매만지는 긴 손가락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던 도형의 뱃속이 와인 잔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연둣빛 띤 황금색 액체처럼 소용돌이쳤다. 강수현의 엄지가 훑어 내린 것이 마치 도형 자신의 입술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졌기에.
도형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도형의 목울대가 꿀렁이는 모양을 바라보던 수현이 엄지와 검지로 와인 잔 다리를 잡고 입술 안으로 액체를 흘려 넣었다. 붉은 혀를 내밀어 와인에 젖어 번들거리는 입술을 천천히 핥은 수현은 눈을 가늘게 접고 도형을 향해 와인 잔을 들어 보였다. 도형도 엉겁결에 와인 잔을 들어 허공에서 건배하는 흉내를 냈다.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가 드리운 음영 탓에 수현의 높은 콧대와 깊은 눈이 도드라져 퇴폐미까지 느껴졌다. 도형은 목 안쪽이 바싹 마르는 기분에 와인을 전부 한입에 털어 넣었다. 묘한 분위기를 애써 모른 척하고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며 실없이 웃었다.
그럴싸하게 화제를 돌릴 만한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할수록 뇌가 엉켜 아무래도 좋을 사건 이야기를 기계처럼 떠들다가 테이블 중앙에 놓인 꽃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 수현도 동시에 팔을 내밀어 꽃병을 잡아 도형 쪽으로 살짝 밀어 주었는데, 수현의 손가락이 도형의 손등을 살짝 스쳤다. 맥박이 도도도도 빨라졌다.
형사 생활을 몇 년이나 했는데도 이럴 때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배운 적이 없다. 삐딱하게 앉아 있으니 삐딱한 생각만 드는 게 아닌가. 도형은 허리를 곧추세우고 재킷 밑자락을 잡아당겨 몸가짐을 바르게 했다. 수현은 오히려 의자에 몸을 느른하게 기대고 팔 받침에 팔꿈치를 괸 채 고개를 갸우듬히 기울여 은근한 눈빛과 부드러운 웃음으로 도형의 횡설수설에 맞장구를 쳤다.
속이 울렁거려 화장실이라도 갈까 했는데 직원 셋이 커다란 카트를 끌고 들어왔다. 일사불란하게 테이블 위에 여섯 가지 요리를 착착 올리고 수현에게 와인병을 하나씩 보여 주고는 와인 잔 여섯 개를 하나씩 채웠다. 레몬과 허브가 담긴 물병과 도형이 가져온 케이크를 단정한 조각으로 잘라 식용 꽃과 초콜릿 레터링으로 장식한 접시를 마지막으로 테이블 세팅이 끝났다.
수현은 가볍게 묵례하며 감사를 표했고, 남은 케이크를 찾아갈 사람을 보낼 테니 그쪽에 전달해 달라 부탁했다. 나란히 인사한 세 사람이 조용하게 방을 나가자 공기가 순식간에 농밀해졌다.
“이렇게 요리에 술까지 차리니까 로마 황제 연회 같네요.”
자리에서 일어나 화려한 테이블 차림을 찰칵찰칵 촬영하던 도형을 노골적인 시선으로 훑어보던 수현이 턱을 괸 채 느릿느릿 물었다.
“주지육림에 빠진 다음에 로마 귀족들은 뭘 했을까요?”
탐미주의자의 이데아 같은 얼굴로 저런 음흉한 표정을 짓다니. 짓궂음을 넘어 사악하게까지 보이는 눈웃음에 도형은 바짝 긴장했다. 이런 놀림에 휘둘려서 얼굴 붉히는 건 애송이나 하는 짓이지. 도형은 수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 음절 한 음절 힘을 주어 대답했다.
“섹스 했겠죠. 난잡하게.”
역할극이 막을 올렸다.
***
와인을 너무 마셨나. 차가운 물을 연신 끼얹었는데도 뺨에 열감이 가시지 않아 도형은 핸드 타월을 적셔 얼굴에 얹었다. 타월에서 흐른 물이 셔츠를 적시는 느낌에 수건을 떼고 거울을 보았다. 여전히 볼 빨간 청년이 그를 마주 보았다.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룸으로 돌아갔는데 수현이 없었다. 화장실 가는 길이 엇갈렸나. 자리에 앉아 물을 한 잔 마시고 심호흡을 세 번 하니 그제야 플레이트 위에 놓인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3701이라는 숫자만 달랑 쓰인 종이 냅킨과 카드 키였다.
콘셉트 한번 지독하네. 도형은 피식 웃으며 카드 키와 메모를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룸에서 나오자 매니저가 도형을 엘리베이터까지 안내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인사하는 그를 향해 엉겁결에 마주 인사를 하는 사이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호화로운 연회 뒤에는 당연히 난잡한 섹스 아니겠냐고 호기롭게 말하기는 했으나 솔직히 도형은 토할 것처럼 긴장했다. 난잡한 섹스든 정숙한 섹스든 겨우 동정을 면했을 뿐인 도형이 무얼 알겠나. 게다가 첫 번째도 두 번째도 같은 상대인데.
나는 내가 아니다. 나는 김도형이 아니다. 저기 있는 사람은 강수현이 아닐… 리가 있나! 됐고, 나는 김도형이고 오늘 강수현이랑 섹스 할 거다. 밤새도록 난잡하고 방탕하게.
37층에는 객실이 두 개밖에 없었다. 3701호 문에 카드를 대자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가 났다. 문고리에 손을 대지도 않았는데 벌컥 문이 열리더니 강한 힘이 도형의 손목을 잡아 안으로 끌어 들였다.
어어 하며 문 반대편으로 끌려 들어가자마자 거칠게 벽으로 떠밀렸다. 몸이 쿵 하고 벽에 부딪혔지만, 뒤통수를 감싼 커다란 손 덕분에 머리를 찧지는 않았다. 도형은 크고 묵직한 몸과 벽 사이에 납작하게 눌린 상태로 입이 범해졌다. 두툼한 살덩이가 도형의 입안 구석구석을 헤집었다. 마치 교미하는 뱀처럼 진득하게 얽힌 혀 때문에 입매가 흐물흐물 벌어져 틈새로 침이 새어 나왔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허덕거리는 와중에 도형의 뒤통수를 받쳤던 수현의 손이 목으로 내려오고 벽을 밀듯이 버티던 팔이 도형의 허리를 감쌌다. 몸을 더듬는 부드러운 손길이 닿은 자리마다 열꽃이 피어올라 그 열기가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졌다. 그대로라면 금세 녹아 버릴 것이 분명했다.
도형은 몸에 바짝 힘을 주고 수현의 아랫입술을 제법 세게 깨물었다. 당황인지 아픔인지 순간적으로 얼어붙은 수현에게 기술을 걸어 그를 메치듯이 벽으로 떠밀고는 자세를 역전했다.
의기양양하게 제 팔 안에 수현을 가둔 채 그를 올려다보며 도형이 씩 웃었다. 도형의 젖은 입술을 바라보는 수현의 눈이 기묘하게 번들거렸다. 도형은 단정하게 여며진 수현의 재킷 단추를 풀고 성급하게 벗겨 냈다. 동시에 넥타이 매듭에 손가락을 걸어 잡아당겼지만 어찌 된 일인지 넥타이가 도통 풀리지를 않았다.
“안 그래도 죽을 것 같은데 목까지 조르시면.”
수현은 도형의 귀에 입을 가까이 붙이고 느릿느릿하게 말하며 직접 넥타이를 풀어 바닥에 던졌다. 귀를 간질이는 달짝지근한 목소리와 습한 숨결 때문에 도형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는 양팔로 수현을 벽에 밀어 세우고 셔츠 자락을 끌어 올려 아래에서부터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수현은 팔을 늘어뜨리고 얌전하게 선 채 도형의 서툰 손놀림을 기다려 주었다. 수현의 집요한 시선 때문인지 손이 자꾸만 헛돌아 단추가 잘 풀리지 않았다. 이런 데에서 소중한 인내심을 낭비할 필요는 없지. 도형은 신경질적으로 셔츠 자락을 양쪽으로 잡아 벌렸다.
우두둑 단추가 뜯어지는 소리, 톡톡거리며 단추가 여기저기로 튕기는 소리, 쿵 하고 제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가 도형의 귓가에 윙윙 울렸다. 셔츠 깃을 잡아 난폭하게 벗겨 내렸으나 소매를 고정한 커프스 버튼 때문에 셔츠는 완전히 벗겨지는 대신 수현의 손목에 걸려 버렸다.
“화끈하시군요.”
“그쪽이야말로.”
도형은 수현의 왼쪽 허벅지를 꽉 붙잡고 그를 비스듬하게 쳐다보았다.
“점잖은 신사인 줄 알았더니.”
도형이 도발적으로 웃었다. 발긋하게 물든 눈매가 도형의 흥분을 여실하게 보여 주었다. 수현은 손이 묶인 사람처럼 팔을 뒤로 한 채 끄트머리가 갈라진 목소리로 낮게 속삭였다.
“아랫도리는 망나니거든요.”
그러고는 한참 물고 빠느라 통통하게 부은 도형의 입술을 혀로 핥았다. 움찔 어깨가 흔들려 뒤로 물러서는가 싶었는데 도형은 도리어 수현의 바지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렸다. 수현은 도형의 아랫입술을 살짝 문 채로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단숨에 목구멍에 닿도록 혀를 밀어 넣었다.
벗겨진 바지가 발목에 걸리자 수현은 손과 발을 모두 묶인 채 유일하게 자유로운 혀로 도형의 입안을 마구 헤집었다. 망나니처럼 옷을 풀어 헤친 자신과 단정하게 옷을 갖춰 입은 도형. 척추뼈를 타고 솟구치는 짜릿함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묶이는 게 취향이신지?”
수현의 얼굴을 잡고 입술을 떼어 낸 도형이 장난꾸러기처럼 웃으며 목덜미와 쇄골을 삭삭 핥았다. 수현을 빤히 올려다보며 일부러 혀를 길게 내밀고 얇은 피부를 깃털처럼 간질였다. 수현의 입에서 기어코 탄성 같은 숨소리가 터지자 만족스럽게 코를 울리며 웃은 도형이 본격적으로 수현의 몸 아래쪽으로 입술을 미끄러뜨렸다. 골반을 붙잡고 가슴골을 핥아 내리던 혀가 오른쪽으로 향하더니 유륜을 크게 물고 깊게 빨아들였다.
낯선 감각에 수현이 헉 숨을 들이켜자 도형이 혀를 뾰족하게 세워 유두 끝을 할짝거렸다. 허리께에 머무르던 손이 어느새 가슴으로 올라와 두툼한 가슴을 주물럭거리며 엄지로 왼쪽 유두를 슬쩍슬쩍 건드렸다. 수현이 허리를 앞으로 내밀어 도형의 몸에 붙이자 도형이 수현의 유두를 콱 깨물었다.
“망나니.”
엉성하게 벗겨진 채 현관에 서서 몸 여기저기를 만져지고 핥아지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도형이 야살스럽기 그지없는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자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던 수현의 이성이 뚝 끊겼다.
수현은 팔을 뒤로 한 채 커프스 버튼을 풀어 셔츠를 몸에서 털어 내고 구두를 벗어 던진 뒤 허물처럼 바닥에 널려 있는 바지에서 걸어 나왔다. 팬티에 삭스 가터라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꼴로 도형을 번쩍 안아 마스터 베드룸으로 다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난데없이 침대에 내던져진 도형이 팔꿈치로 상체를 지탱한 채 콧등을 찌푸렸다.
“망나니가 아니라 시정잡배네.”
“제가 좀 급해서.”
“나는 하나도 안 급한데 이를 어쩌나.”
바지 위로 두둑하게 부푼 중심부가 여실하게 드러나는데도 도형은 천연덕스럽게 발끝을 까딱까딱 움직였다.
“급하게 만들어 보시던가요.”
당신을 어떡하면 좋을까. 무릎으로 선 수현이 요사스럽게 눈을 치켜뜬 도형을 잠시 내려다보다 그를 향해 몸을 낮추는데, 도형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앉았다. 하마터면 머리를 세게 부딪힐 뻔해서 몸을 뒤로 빼다가 엉거주춤 주저앉은 수현의 앞에 도형이 쭈그리고 앉았다.
“이거 뭐예요?”
삭스 가터 밴드에 손가락을 끼워 넣으며 도형이 물었다.
“양말 흘러내리지 않게 잡아 주는 겁니다.”
도형은 “좀 야하네.”라며 중얼거리더니 대뜸 “벗겨도 돼요?” 하고 물었다.
“급해지셨나요.”
“약간?”
단숨에 삭스 가터와 양말을 벗겨 버린 도형이 수현의 허벅지 위에 올라타 박력 있게 재킷을 벗어 휙 집어 던졌다. 일부러 그 자리를 딱 골라 앉은 건지 도형의 엉덩이 아래 깔린 수현의 성기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부피를 더 키웠다. 도형은 셔츠 단추를 끄르다 말고 제 엉덩이 아래를 더듬거렸다.
“윽.”
“뭐야, 왜 이래?”
엉덩이로 문지르고 손으로 쓰다듬으니 커지지 않을 수가 있나. 수현의 속옷은 흘러나온 프리컴으로 이미 축축하게 젖었다. 봐주는 것도 정도가 있지. 수현은 양손으로 도형의 엉덩이를 잡아 그대로 들어 올려 침대에 떠밀어 눕힌 뒤 체중을 실어 깔아뭉갰다.
벗다 만 셔츠 사이로 보이는 하얀 살결에 절로 군침이 돌았다. 아래를 바짝 맞대고 뭉근하게 비비니 도형의 바지 속에서도 아우성이 벌어졌다. 섬유에 쓸리면서도 착실하게 열기를 더해 가는 하반신이 거북한지 도형은 연신 끙끙거리며 어떻게든 수현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다. 그러나 긴 팔다리로 움직임을 완전히 봉쇄당한 도형은 몇 번 더 버둥거리다가 이내 포기하고는 주춤주춤 수현의 목을 안았다.
도형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하얀 목을 길게 핥아 올리다가 귀 바로 아래를 갉작갉작 이로 긁자 도형이 흐읏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수현의 목을 끌어당겼다. 고통에는 강하지만 쾌락에는 약한 김도형. 수현은 도형의 알기 쉬운 반응에 자못 흥분이 치밀어 셔츠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납작한 배를 두어 번 쓰다듬고 바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허리를 비틀며 다시 몸을 빼내려고 하길래 하체를 꾹 눌러 붙이고는 아래위로 비비며 도형의 신경을 아래로 몰았다.
“흐, 아….”
“…후.”
손가락으로 볼록 솟은 유두를 문질렀더니 도형이 곧바로 신음을 토했다. 역시 예민한 몸이다. 도형이 했던 것처럼 셔츠를 양쪽으로 잡아 벌려 억지로 단추를 뜯어 냈다. 하얗게 드러난 가슴에 입을 대고 손가락으로 문지르던 쪽의 반대편 유두를 입에 댔다. 유두를 세게 물었다가 쪽 소리가 나도록 빨아 올리니 늘씬한 몸이 파드득 튀어 올랐다. 그러고 보니 가슴 빨리는 것을 좋아했었지. 금세 선홍색으로 붉어진 돌기를 핥다가 빨고, 손가락 사이에 넣고 굴리면서 도형을 관찰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신음이 점점 커졌다.
“하, 으응, 아, 흣….”
어느 순간 자신이 야한 소리를 내뱉고 있음을 알아차렸는지 도형은 이를 악물고 입술을 앙다물었다. 이런. 입을 다물어 버리면 곤란한데. 수현이 몸을 올려 도형의 다문 입술을 억지로 파고들어 이를 벌리게 하고 혀를 빨았다. 수현의 혀를 밀어낸 도형이 고개를 옆으로 팩 돌려 할딱할딱 가쁜 숨을 내쉬었다.
여기저기 옅은 입술 자국이 남은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야해 수현은 더 망설이지 않고 도형의 바지와 속옷을 단숨에 무릎까지 끌어 내리고 빳빳하게 성난 성기를 덥석 움켜쥐었다.
“아, 그거, 안, 으, 하으….”
자신만만하게 덤빌 때는 언제고 금방 허물어져서는. 처음에는 천천히 도형의 성기를 아래위로 쓰다듬었지만 금세 수현도 참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속옷을 내리고 자신의 성기를 꺼내 도형의 성기와 겹쳐 쥐었다. 열 오른 점막이 문질러지는 쾌감이 혈관을 내달렸다. 두 사람 모두 이미 미끈미끈하게 젖은 상태여서 수현이 손을 움직일 때마다 음란하게 젖은 소리가 났다.
“아, 갈 거 같아…. 그만, 아니, 계속, 아…학!”
도형의 손이 수현의 손목을 붙잡았다. 손힘이 꽤 억셌다. 뒤통수를 침대에 비비며 도형이 허리를 들썩이면서 움직임을 보챘다. 수현은 양손으로 성기를 감싸고 엄지로 도형의 귀두를 문질렀다. 여린 표피가 아래위로 밀리며 피로 가득 찬 해면체가 문질러지는 느낌이 굉장했다.
신음을 흘리던 도형이 이를 꽉 깨물고 몸을 바짝 굳히더니 움찔거리며 흰 액체를 쏟아 냈다. 경련하듯 허리를 꿈틀대며 꽤 오래 사정했다. 수현의 손을 흠뻑 적신 정액은 두 사람의 배와 가슴까지 튀어 있었다.
“저는 아직 못 갔는데 이를 어쩌나.”
도형이 했던 말을 따라 하며 수현이 몸을 일으켜 도형의 몸 위에서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늘어져 있던 도형이 눈동자를 굴려 수현의 우아한 손가락과 그 손가락이 쥐고 있는 거대한 성기를 흘끔거렸다. 검붉게 성난 성기가 힘줄이 도드라진 모습은 어딜 보아도 아름답기만 한 수현의 신체와 동떨어진 느낌이라 마치 외계 생물과도 같이 느껴졌다. 새삼스럽지만 정말 경악스럽게 컸다.
“어, 어쩌라고요.”
“구경하시라고요.”
수현은 도형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제 성기를 천천히 문지르기 시작했다. 도형이 눈을 돌리자 수현이 탁한 목소리로 “저 보세요.”라고 말했다. 음산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에 도형은 어쩔 수 없이 수현을 바라보았다.
수현의 얼굴이 땀으로 젖었다. 매끈한 미간을 찌푸린 채 잇새로 억눌린 신음을 냈다. 결코 흐트러지는 법이 없는 평소의 수현을 생각하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허물어진 표정이었다. 심장이 간질거리는 기분에 입술을 말아 물고 있는 도형을 보며 수현이 나른하게 웃었다.
“이제 눈 감아요.”
찔꺽거리는 소리가 빨라지며 수현의 숨소리도 거칠어졌다. 반사적으로 눈을 꽉 감은 도형의 얼굴 위로 미지근한 액체가 몇 번에 걸쳐 후드득 떨어졌다. 염소 소독제 냄새가 섞인 비릿한 냄새가 짙게 풍겼다.
“미, 미친!”
입을 벌리자 미끄덩한 액체가 주르륵 입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얼결에 정액을 마신 도형이 베개를 끌어다 베갯잇으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눈을 떴는데도 앞이 뿌연 것을 보니 속눈썹에 엉겨 붙었나 보다.
도형은 피아가 겨우 식별될 정도로만 눈을 가늘게 떴다. 귀와 목까지 정액이 흘러 찝찝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얼른 씻어야지. 욕실로 가려고 몸을 일으키자마자 어깨를 잡혀 다시 침대에 눕혀졌다. 좁은 시야에 비치는 건 온통 살색. 짙은 밤색이 가까이 내려와 이마를 간질인다 했는데 뜨끈하고 축축한 무언가가 눈두덩이를 뭉근하게 핥았다.
설마, 자기가 싼 걸 자기가 빨아 먹는 건가. 미친 거 아닌가. 진짜 돌았나.
“깨끗하게 해 줄게요.”
“됐어요, 됐으니까….”
눈, 코, 뺨을 연신 핥고 빨던 입술이 도형의 입을 막았다. 무람없이 입안을 탐하는 수현의 혀에서 정액 맛이 났다. 도형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그래도 여전히 빨판처럼 제게 달라붙은 수현을 떼어 내려 그의 어깨와 등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제가 정액 묻은 입으로 키스해서 화났어요?”
“미치셨어요?”
“아니요.”
“무슨 짓이야!”
수현은 도형의 신경질은 아랑곳없이 다정하게 뺨을 쓰다듬으며 삐뚜름하게 웃었다. 진짜 단단히 미친 사람 같았다.
“씻으러 갈까요? 같이.”
“혼자 씻을 수 있거든요.”
“저도 혼자 씻을 수 있어요. 같이 씻고 싶어서요.”
말을 해도 들을 생각이 없으니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 도형은 종아리에 걸쳐져 있던 바지를 훌렁 차 버리고 셔츠와 양말까지 모두 벗은 뒤에 욕실로 들어갔다. 마찬가지로 당당한 알몸을 자랑하며 수현이 도형을 뒤따라왔다. 도형이 샤워 부스로 냉큼 들어가자 수현은 당연하다는 듯이 샤워 부스에 들어와 도형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좀 떨어져요.”
“먼저 유혹했으면서 이러기에요?”
아하. 그런 각본이었나. 도형은 더운물을 맞으며 일단 끈끈한 얼굴부터 닦았다. 샴푸를 짜서 제 머리에 거품을 내고 몸을 돌려 팔을 올렸더니 수현이 냉큼 고개를 숙였다.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걸레 빨듯이 박박 감겼다.
샴푸 거품은 위에서 떨어지는 물에 씻겨 내려가도록 두고 샤워 젤을 제 몸 앞판에 바른 다음 수현을 껴안고 그의 가슴을 제 몸으로 슬슬 문질렀다. 손에 묻은 거품으로 넓은 등판을 쓱쓱 닦고 단단한 엉덩이를 꽉 쥐었다가 토닥였다가 찰흙처럼 주무르기도 하면서 마음껏 사심을 채웠다.
배를 찌르는 흉악한 살덩어리가 더는 모른 척할 수 없을 만큼 커졌을 때야 도형은 손장난을 그만두고 재빨리 제 몸을 마저 씻고 수현의 하체도 대충 문질러 씻겼다.
“다 놀았어요?”
“네, 네?”
“나가죠. 저도 놀고 싶으니까.”
도형은 커다란 수건에 감싸인 도롱이 벌레가 되어 침실로 떠밀려 들어갔다.
내가 먼저 유혹한 시나리오로 놀고 싶은 모양인데. 적극적으로 꼬시고 그러면 되는 건가. 근데 꼬시는 건 어떻게 하는 거지. 막 올라타서 여기저기 만지고 그러면 되나. 적당히 난잡하면서도 너무 저질스럽지는 않은 플레이가 뭐가 있을까. 음. 빨아 주면 될까.
도형이 침대 머리맡을 톡톡 치며 수현에게 헤드에 기대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도형을 뒤에서 끌어안고 거대한 살덩어리를 은근히 허리에 비벼 대던 수현이 말 잘 듣는 대형견처럼 침대에 올라 흥미로운 눈으로 도형을 바라보았다.
“다리 벌려요.”
도형은 수현의 다리 사이에 꿇어앉아 넓은 어깨와 반듯한 쇄골, 제 종아리만큼이나 굵은 상완과 힘줄이 선명한 팔뚝을 천천히 어루만지다가 느닷없이 배꼽을 쿡 찔렀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수현이 몸을 앞으로 기울인 순간, 도형이 고개를 숙여 수현의 번들번들한 귀두와 토출구를 혀로 콕 찍었다.
“큭.”
수현이 다리를 오므려 피하려고 하자 도형은 허벅지 안쪽의 부드러운 살을 찰싹 때리고 이미 배에 닿을 만큼 흉포하게 달아올라 있던 성기를 삼켰다. 도형은 입이 바싹 마르는 기분에 혀를 굴려 침을 내고, 그 침을 수현의 성기에 돌려가며 발랐다. 그제야 입술의 움직임이 부드러워졌다.
“아….”
단단한 근육질 허벅지가 살짝살짝 경련했다. 슬쩍 눈만 들어 올려다보니 수현이 한 손으로 입을 막고 다른 손으로 침대 시트를 꽉 쥐고 있었다. 두툼한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게 어쩐지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도형은 조금 더 깊게 성기를 삼키는 동시에 바짝 올라붙은 고환을 손에 넣고 살살 굴렸다.
“잠깐, 잠깐만….”
“암감웅 우숭.”
마음에 드나 보네. 성기 끝이 목젖에 닿을 만큼 고개를 깊게 숙이고 성기 뿌리를 양손으로 잡았다. 낮게 갈라진 목소리가 뭉개진 발음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머리카락을 가볍게 쥐었다가 머리를 쓰다듬고 귀 끝을 만지는 수현의 조심스러운 손길에 장난기가 솟았다.
이렇게 차분해서야 이쪽이 재미가 없지.
도형은 일부러 춥춥 소리를 내면서 성기를 빨았다. 굵은 성기를 컥컥 구역질이 날 정도로 목구멍 깊은 곳까지 밀어 넣었다가 물방울 터지는 소리를 내며 잡아 빼고 혀를 내밀어 힘줄이 불거진 기둥을 핥기도 하면서 수현을 안달복달하게 만들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한창 집중해서 수현의 성기를 희롱하고 있는데 수현이 도형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 그를 일으켰다.
“이쪽 입이 심심해요.”
수현은 그대로 도형을 한 바퀴 돌려 엉덩이가 자신의 얼굴 쪽을 향하게 앉혔다. 황망함에 수현을 돌아보는 도형을 향해 “같이 기분 좋아지고 싶어서요.”라며 음험한 웃음을 짓더니 도형의 얼굴이 제 고간에 처박히도록 무릎을 뒤로 당겼다.
“엉덩이 드세요.”
“왜, 왜요?”
“이렇게 세워 놓고 방치하면 불쌍하잖아요.”
수현이 어느새 발기한 도형의 성기를 툭 건드렸다.
“하던 거 마저 하세요. 저도 제 할 일 할 테니까.”
도형이 주춤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자 수현이 도형의 엉덩이를 찰싹 내리쳤다. 허리가 펄쩍 튀어 오르며 그 반동으로 도형의 얼굴이 다시 한번 수현의 가랑이 사이로 떨어졌다. 수현은 지체 없이 도형의 성기를 쥐고 아래위로 흔들었다. 읏, 신음을 억누른 도형이 허겁지겁 수현의 성기를 입에 물었다.
매끈하고 탄력 있는 엉덩이를 도닥거리자 대둔근이 움찔움찔 떨렸다. 그 가운데 위치한 선홍색 구멍은 완전히 다물린 상태로, 과연 여기에 손가락보다 굵은 것이 들어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수현은 알고 있었다. 천천히 정성 들여 이완시킨 이 안쪽이 얼마나 탐욕스럽게 제 성기를 먹어 치우는지. 자잘하게 떨리는 따뜻한 점막과 성기에 달라붙어 오물오물 물어 대는 탄력 있는 근육. 황홀했던 기억을 되새기는 것만으로 수현은 사정할 것 같았다.
수현의 흥분이 아래로 전달되었는지 도형이 컥 하고 성기를 뱉어 냈다. 할딱거리는 숨소리를 배경 음악 삼아 수현은 비문에 쪽 소리 내 키스한 뒤 조붓한 틈으로 혀를 욱여넣고 천천히 혀를 돌려 안쪽을 타액으로 적셨다.
“흐, 진짜 미치셨어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미치지 않았습니다. 할 일 하시라니까요.”
수현은 뻔뻔스럽게 대답한 뒤 도형의 모양 좋은 성기를 아래위로 훑으며 귀두를 빙글빙글 문질렀다.
“아으, 흣….”
도형은 다시 성기를 무는 대신 양손으로 수현의 성기 뿌리를 쥔 채 고개를 바닥에 대고 몸을 떨었다. 그 또한 지극히 보기 좋은 광경이었으므로 수현은 뿌듯한 마음으로 마음껏 도형의 비부를 맛보았다.
주름 하나하나를 펴듯이 혀로 매만지다가 혀를 쭉 내밀어 제법 깊은 곳까지 넣기를 반복했다. 입구가 적당히 풀어진 후로는 손가락을 하나씩 더해 가며 안쪽을 늘렸다. 내벽이 쩍쩍 손에 감기는 느낌이 끝내줬다. 손가락을 넣으면 그만 들어오라는 듯이 꽉 조이고 밖으로 빼려고 하면 안타까운 듯이 조물조물 씹어 대는 구멍은 딱 제 주인의 성질머리를 닮았다.
“아, 그만, 잠깐.”
쉴 새 없이 앓는 소리를 내며 등을 움찔거리던 도형이 새된 비명을 지르며 무릎으로 기어 도망가려고 했다. 하지만 수현이 그의 허리 아래에 팔을 넣어 제 가까이 끌어당기고 손가락 세 개로 안쪽을 빙글빙글 휘젓다가 어느 지점을 누르자 도형이 다시 자지러졌다.
“여기? 여기가 좋아요?”
“아, 그만, 나, 진짜… 흐아, 흡….”
예민하게 반응한 자리를 집요하게 문지르고 찔러 대니 끙끙대며 신음하던 도형이 이마를 침대에 문지르며 애원했다.
“제발, 아…. 싫은, 그만, 나, 윽!”
도형이 허리를 파르르 떨더니 사정했다. 손가락을 빼내려 하자 강하게 수축한 내벽이 수현의 손가락에 쩍쩍 달라붙어 잡아당겼다. 수현은 사정 후의 탈력감으로 침대에 엎드려 누운 도형을 위에서 덮어 눌렀다.
“으, 무거워….”
도형의 찡얼거림을 못 들은 척하고 수현은 그대로 도형의 엉덩이를 양손으로 잡아 벌리고 구멍에 귀두를 맞췄다.
“잠깐, 아직 안 돼요. 진짜 안 돼.”
“돼요.”
“아, 아… 아파….”
“아직 넣지도 않았어요. 엄살 부리지 말아요.”
느릿느릿 허리를 움직여 조금씩 성기를 밀었다. 가장 굵은 부분이 조붓한 틈을 벌리고 들어가자 성기를 강하게 찔러 넣었다. 충분히 풀어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오랜만이라 그런지 도형의 안은 지나치게 좁았다. 아직 절반도 안 넣었는데 벌써 이렇게 조여 대면 곤란하지. 결국 수현은 도형의 골반을 붙들고 강제로 길을 내며 성기를 끝까지 처박았다.
“흐, 아윽!”
도형은 도리질 치며 비명을 닮은 신음을 내질렀다.
“잠깐, 움직이지 말고, 아, 흑….”
“싫은데요.”
“으….”
“당신이 바라는 걸 바로 들어주기에는 이쪽의 원한이 워낙 깊어서.”
수현은 도형의 안에 몸을 묻은 채 도형의 허리를 들어 올렸다. 엉덩이만 높이 치켜든 도형이 나지막하게 욕설을 지껄이며 앞으로 기어가려고 했지만, 허리를 꽉 잡은 수현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수현은 변함없이 성기를 진득하게 감아 당기는 내벽의 촉감을 즐기며 천천히 허리를 뒤로 물려 귀두만 간신히 걸릴 정도로 성기를 빼냈다가 단숨에 뿌리까지 박아 넣었다.
“윽, 흐아!”
도형의 가장 깊은 곳이 성기에 뭉개지면서 꽉 다물려 있던 틈새마저 벌어져 예민한 귀두를 잘근잘근 씹어 대는 감각에 수현이 이를 악물었다.
“하, 좋아요… 정말….”
진심으로 성기가 녹아 버릴 것 같았다. 수현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도형의 내벽이 꿈틀거리며 성기를 더 세게 조였다. 안구 뒤에서 폭죽이 터질 것 같은 쾌감에 수현은 성기를 깊이 처박은 채 허리를 흔들었다. 도형은 침대 시트를 박박 긁으며 허덕허덕 버거운 신음만 흘렸다.
당신이 느끼는 얼굴이 보고 싶어. 수현은 도형의 몸을 뒤집어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어디 한 군데 모자라지도 과하지도 않은 늘씬한 몸. 직각으로 떨어지는 어깨와 움푹 팬 빗장뼈, 겉보기로는 마른 듯하지만 의외로 두툼한 가슴 근육과 수줍게 아래를 향해 있는 작은 유두, 그리고 제법 또렷한 결을 자랑하는 복근까지. 미끈한 근육이 빠짐없이 자리 잡은 탄력 있는 저 몸이 수현에게 육체의 기쁨을 알려 주었다.
지나친 쾌감에 입술을 악물고 찌푸린 발간 얼굴은 또 어떠한가. 가는 붓으로 그려 낸 듯이 섬세한 이목구비가 수현이 선사한 쾌락에 물들어 있다. 도형을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절정에 오를 것 같았다.
수현은 짧게 짧게 성기를 넣었다 뺐다 하며 움쭉대는 내벽의 찰진 촉감을 즐겼다. 여기에 제 성기 모양의 자국이 남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느릿하게 빼냈던 성기를 푹 꽂아 넣자 도형이 고개를 꺾으며 허리를 비틀었다.
“아, 흐읏, 으, 흐, 아아….”
도형의 종아리를 잡아 무릎을 굽혀 제 겨드랑이 아래에 끼고 수현은 본격적으로 추삽질을 시작했다. 깊이 찌른 뒤에 중간까지 성기를 뺐다가 다시 뿌리까지 박아 넣고 그다음에는 입구까지 길게 빼며 귀두로 내벽을 긁으면 조밀한 안쪽 근육이 쫙쫙 오므라들며 나가지 말라는 듯이 점막이 성기에 착 달라붙는다.
“너무, 조르지 말아요. 흣, 조금 더 박다가… 가고, 싶으니까…. 윽….”
긴 다리가 수현의 허리를 감아 왔다. 발목을 엇갈리게 꼰 도형이 마치 수현을 자신에게 가까이 붙이려는 것처럼 다리에 힘을 주었다. 기대에 부응하듯 수현은 더 거세고 빠르게 허리를 움직였다. 도형의 엉덩이에 수현의 치골이 부딪칠 때마다 도형이 몸을 들썩거렸다.
“하, 아아!”
숫제 교성에 가까운 신음이 터져 나오며 도형이 허리를 왼쪽으로 크게 비틀었다. 수현을 휘감고 있던 다리가 바들바들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다리의 떨림이 점점 전신으로 퍼지더니 도형이 온몸을 벌벌 떨었다. 진동은 내벽까지 고스란히 전해져 성기를 문 안쪽이 꿈틀거리며 수현의 성기를 세게 물었다. 지나친 자극에 수현이 움직임을 멈추고 숨을 고르는데, 도형의 성기에서 흰 액체가 뚝뚝 흘러나왔다. 그날의 세 번째 사정이었다. 도형의 배와 가슴은 물론이고 수현의 배까지 점점이 튀었다.
“후아, 흐… 하, 하아….”
정액을 남김없이 싸고 몇 번 숨을 고른 뒤에야 도형의 몸이 경련을 멈췄다.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색색거리는 도형을 지그시 내려다보던 수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 잠깐, 쉬었다가… 잠깐만….”
“제가 급하다니까요.”
“아으, 지금, 그렇게… 아, 흐응….”
본격적으로 몸을 움직이기 위해 도형의 발목을 잡아 어깨 위에 걸쳤다. 굵은 성기를 잔뜩 문 구멍은 주름이 모두 펴진 채 팽팽하게 늘어나 있었다. 수현은 성기를 천천히 뒤로 물려 도형의 몸에서 자신의 성기가 빠져나오는 모양을 관찰했다. 번들거리는 검붉은 살덩어리가 빠져나오고도 도형의 구멍은 바로 다물리는 대신 입술처럼 오물거렸다. 지독하게 외설스러웠다.
빠져나간 성기를 다시 달라고 부르는 것처럼 빠끔거리는 구멍에 귀두를 맞추고 단숨에 수직으로 찔러 넣었다.
“아아아, 아아!”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수현은 무시하고 계속 허리를 움직였다. 몸을 굽혀 도형의 배꼽 바로 아래에 손바닥을 얹었다.
“읏, 여기, 느껴져요?”
“하아, 하아, 으으….”
“여기까지 들어와 있어요.”
도형의 배를 쓰다듬다 보니 어쩐지 제 성기의 윤곽이 느껴지는 것도 같아 수현이 손에 힘을 주어 꾹 눌렀다. 정말로 거기까지 수현의 성기가 들어찼던 것인지, 도형의 내벽이 바특하게 수축하며 성기를 꽉 조였다.
“당신도, 아… 느끼나 보네요.”
도형의 몸을 파고들었다는 희열이 수현을 떨리게 했다. 수현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도형의 점막이 살아 있는 연체동물처럼 성기를 주물러 댔다.
“…후.”
불쑥 성기가 부풀었다가 잔뜩 고였던 액체를 배출하는 감각이 지나치게 선명했다. 수현은 눈을 질끈 감고 훅훅 거친 숨을 내쉬며 도형의 안에 정액을 남김없이 쏟았다. 자신의 체액이 도형의 안을 적시고 있다는 정신적 충족감이 말단의 쾌감을 압도했다. 성기가 절로 꿀렁거렸다.
눈을 뜨고도 잠시 시야가 하얗게 보여 눈을 몇 번 깜빡거린 후에 도형의 다리를 내려 주었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도형이 보였다. 그는 수현이 성기를 빼고 털썩 엎어질 때까지도 몸을 추스르지 못하고 그대로 누워 있었다. 팔을 괴고 여전히 뾰족하게 서 있던 유두를 손가락 사이에 넣고 비비다가 세게 잡아당기니 그제야 도형이 수현의 손을 매섭게 쳐 내며 눈을 흘겼다.
“미친 변태.”
“그 미친 변태를 꼬신 사람이 누구였더라.”
“이런 변태일 줄 알았으면 안 했거든요?”
“이제 알았으니까 계속하죠.”
수현이 검지를 세워 도형의 꼬리뼈부터 목뼈까지 쑥 파인 척추를 따라 선을 그으며 물었다.
“우리 다음에 또 만나지 않을래요?”
“싫어요.”
도형은 팔을 괴고 엎드린 채 얼굴을 들지도 않고 쌀쌀맞게 거절했다.
“얼굴도 제 취향이시고, 몸도 제 취향이시고….”
“꼴려요?”
수현은 뭉근하게 웃으며 도형의 삐딱한 반응을 즐겼다.
“성격도 제 취향이시고.”
“이런 식으로 몇 명이나 꼬셨어요?”
다른 사람인 척하는 거 잘한다고 하더니, 도형은 사람 마음 애태우는 데에 천재적인 소질이 있는 밀당 고수 연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수현은 그저 좋았다.
“이런 말 자체를 처음 하는 건데요.”
도형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있자 수현은 가만히 도형의 대답을 기다렸다. 도형은 몸을 돌려 똑바로 눕더니 또랑또랑한 눈으로 천장을 노려보았다. 무슨 기막힌 답을 내놓으시려고 저리도 고민하시나.
“저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호오. 수현은 쾌재를 불렀다. 연기인 척 아닌 척 은근슬쩍 진심을 흘리고, 수현이 먼저 낚여 열렬하게 고백하기를 기다리는 방향으로 시나리오를 수정했나 보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렸다. 인내하는 자에게 과실이 있나니. 드디어 고대하던 그 날이 왔도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여기 계신 거 보면 그 사람이랑 잘되는 중은 아닌가 봐요.”
“그쪽이 알 바예요?”
“제가 더 잘해 드릴게요. 그 사람 별로인 것 같은데.”
“맞아요. 별로예요.”
별로? 내가 별로라고? 진심으로? 수현은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연기라고 해도 저렇게 단호하게 별로라고 하면 조금 서운한데.
“사람 우습게 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남의 마음 가지고 놀고.”
수현은 턱이 아릴 정도로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하며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못난 소리를 할 것 같아서 입술까지 말아 물었다. 마른침을 삼키고 숨을 고른 뒤에 수현이 입을 열었다. 끄트머리가 갈라진 목소리에 묻어난 동요를 도형이 눈치채지 못하기를 바라면서.
“그런 사람을 왜 좋아하세요?”
“내가 등신이라서?”
아니, 그게 아니잖아요. 수현은 변명과 해명과 설명을 하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좋아하는 데 이유가 있냐고 해 주시면 좋을 텐데. 하다못해 돈이 많아서 그렇다는 말도 괜찮은데. 도형이 저런 말을 하는 것이 슬펐다. 자기 연민을 품거나 함부로 자기 비하를 하지 않는 도형이 자기 스스로를 등신이라고 부르게 만들었다는 안타까움과 죄책감에 수현은 내장이 불타는 것처럼 마음이 죄였다.
“제가 더 좋은…”
도형이 손바닥을 넓게 펴서 수현의 입을 막고 어깨를 떠밀어 눕힌 뒤에 몸 위로 올라왔다.
“아직도 시답잖은 수작질할 기운이 남았나 봐요?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하기로 했잖아요. 누가 이기나 해 봅시다. 어차피 우리 아침 되면 모르는 사이…. 하읏….”
“하루 먹고 버리기는 아깝지 않아요? 오래 두고 먹고 싶지 않아요?”
“입 좀 닥쳐요, 윽.”
***
“제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요.”
전복미역국에 밥을 말아 씩씩하게 먹던 도형이 진중하게 운을 뗐다. 수현이 미리 준비한 새 옷으로 말끔하게 갈아입은 두 사람은 거대한 식당을 마다하고 일부러 스위트룸 창가에서 룸서비스를 받았다.
무슨 생각을 했으려나. 농밀했던 저녁 식사. 도형의 뜨거웠던 유혹. 황홀했던 밤. 다정했던 새벽. 그리고 이토록 찬란한 아침.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밖에 없지 않을까. 수현의 가슴이 꿈과 희망으로 부풀었다.
“좀 아닌 거 같아요.”
“네?”
부풀었던 가슴에 누가 바늘을 찔렀는지 푸시시 바람이 새기 시작했다.
“이제 강 선생님이랑 이런 거 안 하려고요.”
“이런 거라면 무엇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섹스요.”
제 가슴이 풍선처럼 연약했던가. 바람이 빠져 순식간에 쪼글쪼글하게 줄어든 꿈과 희망 앞에서 수현은 얼빠진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나 한 번, 선생님 한 번. 사이좋게 한 번씩 주고받았으니까 앞으로는 공평하게 혜택 없는 거로 해요. 미국 사람들은 어떤지 몰라도 역시 나는 한국 사람이라 그런지 친구 사이에 그러는 건 아닌 거 같아요. 좀 그래. 우리 혜택 같은 거 없는 보통 친구 해요.”
역시 별로라는 말이 진심이었던 걸까. 갑작스러운 심경의 변화는 대체 언제 일어난 걸까. 우리 분위기 좋지 않았나요. 이제 해피 엔딩까지 딱 한 단원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말만 안 했지, 이미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니었나. 그래서 오늘 말하려고 했는데.
“제가 형사님의 친구이기 때문에 ‘그런 거’는 안 하신다고요.”
“네.”
“그럼 친구를 그만하면 되지 않을까요?”
도형은 전복 껍데기라도 씹은 것 같은 얼굴을 했다.
“형사님, 저희 친구 말고….”
“그런 말 되게 쉽게 하시네요.”
“그러니까 제 말은….”
“당장 대답하기 어려우니까 생각할 시간 좀 주세요.”
“형사님, 잠시만요. 잠깐만. 제 말 좀 끝까지….”
“잘 먹었습니다.”
도형은 수현의 애타는 부름을 뒤로하고 산뜻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해명도, 설명도, 변명도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잽싸게 화장실로 들어갔다. 수현은 넋을 잃고 보조 주방의 거대한 냉장고 안에서 그의 부름만 기다리고 있는 아름답고 거대한 꽃다발을 생각했다.
솜사탕 빼앗긴 너구리처럼 넋 없이 널브러져 있는 건 천재 미남 억만장자의 완벽한 계획에 들어 있지 않았다. 바로 이 순간, 그는 도형에게 한쪽 무릎을 꿇고 사랑을 고백하며 꽃다발을 안겨 주었어야 했다. 동그란 눈을 접어 웃으며 도형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강수현 생일 이벤트를 완벽하게 마무리해야 했다. 그리고 친구 아닌 연인으로서의 첫날을 축하하며 달콤한 키스를 해야 했는데. 분명 그렇게 되어야 했는데.
설마 내내 헛다리 짚고 있었던 건가. 도형이 좋아하는 사람이 수현이 아니었던 걸까. 수현이 도형을 좋아하는 것만큼은 아닐지라도 도형도 수현을 좋아하는 것은 틀림없었다. 그것마저도 혼자만의 착각이라면 너무 비참하고 괴로워서 꼴깍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런데 도형은 왜 갑자기 화가 났을까. 화가 난 걸 넘어 수현과 말을 섞는 것조차 싫어 보였다. 분명 마음이 통했다고 생각했는데, 대체 어디서 틀어진 걸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라더니, 강수현이 개발한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심장 이상을 감지하는 기술과 뇌 질환을 사전 예측하는 기술은 김도형의 마음과 생각을 읽는 데에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강수현은 그 순간 세계에서 제일 멍청하고 불행한 남자가 되었다.
“저 지금 나갈 건데. 강 선생님은 더 쉬다 오시든지.”
“아니요. 형사님과 함께 나가겠습니다.”
“경찰서 들어가 보려고요.”
“오늘 휴가 아니세요?”
“그렇긴 한데요. 한동안 특별 대우도 받았고 어제도 일찍 퇴근해서 슬슬 밀린 일 좀 봐야 할 것 같아요.”
“경찰서까지 모셔다드릴게요.”
도형은 수현의 필사적인 애원까지 거절하지는 않았다. 허둥지둥 지갑과 휴대전화를 챙기며 수현은 구질구질하게 매달린다고 도형이 자신을 더 싫어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방금 먹은 걸 전부 토할 뻔했다.
***
“데이빗.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보고를 마치고 나가려던 데이빗을 붙잡은 수현이 상담을 빙자한 하소연을 시작했다.
“네. 말씀하십시오.”
“분명 전날 밤까지는 뜨거웠던 사이가 아침이 되자마자 갑자기 차갑게 식었다면 그 이유가 뭘까요?”
“음…. 실은 둘 중 한쪽은 이미 한참 전에 마음이 식었는데 모종의 이유로 꾹 참았다가 그날 아침에 표현한 게 아닐까요?”
“꼭 그렇게 부정적인 이야기를 해야겠습니까?”
자기가 정해 둔 답이 나올 때까지 사람을 들들 볶는 짓을 또 하려나 보다. 데이빗이 수현 몰래 작게 한숨을 쉬었다. 수현이 도형에게 정신 못 차리고 푹 빠져 있다는 것 정도는 데이빗도 이미 알고 있었다. 도형이 수현의 성격을 잘 받아 줘서 그런 건지 아니면 성질머리를 아예 뜯어고쳐 놓아서 그런 건지 한동안 수현이 잠잠해서 안심했는데 이번에는 뭐 때문에 심기가 틀어져서 저러나. 출근 예정도 없던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 애꿎은 사람이나 괴롭히고.
“대표님.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자나플라본을 상시 복용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자나플라본을 끊었다고 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자나플라본에 내성이 생겼거나, 효과가 더 좋은 약을 찾았거나.”
“그렇습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마음이 식은 이유라면 아마도 상대에게 질렸다거나 상대보다 더 좋은 사람을 찾았다거나 둘 중 하나이겠지요.”
“데이빗이 이렇게 냉정한 사람인 줄 미처 몰랐네요.”
“네?”
수현의 성격은 빈말로라도 좋다고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공사 구분이 확실하고 정중함으로 선을 긋는 사람이기에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서만 행동했다. 그런데 그 강수현이 간식 금지당한 어린애처럼 책상에 턱을 괴고 한숨을 쉬고 있다. 골수까지 파고드는 섬찟함에 데이빗은 수현이 먼 산을 보는 사이에 잽싸게 도망쳤다.
***
“김도진.”
-아, 왜!
“물어볼 게 있어.”
-짧게 해.
“아는 사람이 데이트를 했어, 밤에는 분위기가 굉장히 좋았는데 아침 되니까 상대가 차가워졌다고 해. 네 생각에는 이유가 뭐 같아?”
-형한테 까였어?
“내 이야기 아니야.”
-하긴 형이 너 오래 참아 줬지. 꼴 좋다, 강수현.
“내 이야기 아니라니까. 네 생각에는 어떻게 해야 다시 사이가 좋아질 수 있을 것 같아?”
-좋아질 일 없어.
“아니, 그렇게 성의 없이 대답하지 말고 생각 좀 해 봐.”
-밤과 아침 사이에 심경의 변화가 있었겠지. 네 행실을 돌이켜 봐. 네 더러운 성질 드러냈으면 아무리 형이라도 빡쳤을걸.
“자기 전까지는 정말 분위기 좋았다…고 하던데.”
-그럼 어젯밤에 네가 존나 별로였나 보지.
“내 이야기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후, 시발…. 개짜증 나네. 야! 이딴 거로 나한테 전화하지 마. 미친 새끼 아니야, 이거.
***
중얼거리거나 한숨을 쉬어 정적을 깨면 그 소리로 인해 혼자라는 걸 실감하게 되므로 수현은 애써 침묵을 지켰다. 중요한 생각을 할 틈이 없도록 쓸데없는 것들로 머릿속을 꽉꽉 채우고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나 마침내 하루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 현관문을 열고 있노라면 낮은 신음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도형의 얼굴이 어느새 수현의 의식을 비집고 들어와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입을 꾹 다물고 무언가를 서러워하는 눈길로 도형은 다만 수현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수현은 어두운 거실에 멍하니 앉아 길고도 괴로웠던 하루를 되새겼다. 도형이 자신에게 질렸다. 어쩌면 도형에게 자신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도형은 다시 자신에게 돌아와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 시발. 깜짝 놀랐네.”
어두운 걸 싫어하는 것이 도형과 꼭 닮은 도진은 들어오자마자 온 집 안 등을 전부 켰다.
“뭐야, 왜 삶은 청경채 꼴이야.”
“밥 먹었어?”
“아니. 바로 나가 봐야 해.”
“이 밤에 어디를?”
“경찰서. 형이 며칠 못 들어온다고 갈아입을 거 가지고 오래.”
“그걸 왜 너한테 부탁해?”
“그럼 누구한테 부탁해?”
“나.”
도진이 짜증스럽게 혀를 차고 한심한 눈으로 수현을 흘겨보았다.
“왜 나한테 부탁 안 했을까? 나는 한참 전부터 집에 있었는데.”
“형이 너한테 어떻게 심부름을 시키냐?”
“왜 안 돼? 너는 되는데 나는 왜 안 돼?”
애새끼도 아니고 집요하기는. 도진이 수현 들으라는 듯 욕설을 지껄이다가 이마를 짚고 짜증을 냈다.
“아니, 하… 시발…. 야. 내가 너한테 이런 말까지 해야겠냐?”
“뭔데. 말해 봐. 들어는 줄게.”
“형이 너한테 오라 가라 심부름을 어떻게 시켜. 아, 개답답하게 구네. 너는 좋아하는 사람한테 귀찮은 일 시키고 마음대로 부려 먹을 수 있어?”
“도형이가 나 좋아해?”
오만상을 찌푸린 도진이 삿대질하며 언성을 높였다.
“진짜 미친놈 아니야? 그러면 싫어하겠냐? 아, 강수현 존나 재수 없고 존나 꼴 보기 싫어. 짐 싸야 하니까 방해하지 말고 가서 잠이나 처자.”
“같이 가. 데려다줄게.”
“택시 타면 돼.”
“나도 저녁 안 먹었어. 도형이 짐 가져다주고 오는 길에 밥이나 먹자.”
불만스럽게 입을 삐죽거리던 도진이 슬쩍 운을 뗐다.
“그럼 혹시 집에 간단하게 먹을 거 있어? 야식거리.”
“왜?”
“형이 배고프다고 편의점에서 뭐 좀 사 오라고 했거든.”
도자기 인형처럼 무감했던 수현의 얼굴에 반짝 생기가 올라왔다.
“샌드위치 재료 있어. 금방 돼. 기다려.”
“천천히 해. 너무 천천히는 말고. 난 좀 씻는다.”
뚜벅뚜벅 주방으로 걸어가는 수현의 뒷모습을 보며 도진은 전혀 어울리지 않게도 기운 없는 병아리를 떠올렸다. 그리고 곧바로 웩 구역질하는 흉내를 냈다.
개운하게 씻은 도진이 도형의 짐을 챙겨 주방으로 가자 수현이 피크닉 바구니에 예쁜 포장지로 싼 샌드위치를 차곡차곡 담고 있었다.
“하여간 저 컨셉충….”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은 법이지.”
“떡 아무거나 집어 먹다가 목에 걸리면 뒤지는 거야.”
“재수 없는 소리 좀 하지 마. 가자.”
***
침통한 표정으로 운전대를 잡고 있던 수현이 칼칼한 목소리로 도진을 불렀다.
“진짜 도형이가 나 좋아해?”
“뭐 잘못 처먹었나. 오늘 왜 이래?”
“대답이나 해.”
“진짜 몰라서 묻냐?”
“모르니까 물어보지.”
“그 집 나 주면 가르쳐 줄게.”
“내일 변호사 불러서 양도할게. 증여세는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 명의만 너 주고 관리는 계속 내가 할게. 팔든지 말든지 네 마음대로 해.”
도진이 할 말을 잃고 숨만 씩씩대고 있는데 수현의 휴대전화가 부르르 떨렸다. 운전 중인데도 서슴없이 휴대전화 화면을 확인한 수현이 갑자기 입가를 씰룩거렸다.
빛도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