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 (1)
별일 없이 사흘이 흘렀다. 굳이 꼽아 보자면 도형이 매일 밤 수현의 침대에서 잤다는 정도일까. 수현은 충격적인 일을 겪은 직후에는 괜찮은 것처럼 느껴져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남을 수 있다며 상담 치료를 권했다. 도형이 부득불 괜찮다며 사양하자 수현은 그 대신 도형의 특별 휴가가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옆에서 자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도형이 베개를 들고 재워 달라 찾아왔던 첫날 밤, 악몽도 꾸지 않고 푹 잤었다며. 내심 혼자 자기 싫었던 도형은 선선히 알겠다고 했고, 수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새 이불과 베개를 잔뜩 사들였다.
도형이 먼저 수현의 침대에 누워 휴대전화로 게임을 하고 있으면 전화나 화상 회의로 업무를 본 수현이 방으로 들어와 태블릿 PC를 침대에 툭 던져 놓고 씻을 준비를 했다. 욕실에 들어가서 옷을 벗어도 될 것 같은데 수현은 구태여 도형이 보는 앞에서 속옷까지 훌렁 벗었다. 눈을 둘 데가 없어서 휴대전화에 얼굴을 처박아도 강수현이라는 남자의 존재감은 쉬이 모른 척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도형은 어쩔 수 없이 옷을 벗는 수현을 흘끔거리곤 했다.
그저 씻으려고 옷을 벗는 것뿐인데 손끝 하나까지 어쩌면 그리도 교태롭고 요염한지, 마치 스트립쇼를 생방송으로 보는 기분에 순식간에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르고 마는 도형이었다. 강수현, 존재가 포르노인 죄 많은 남자….
수현은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몸을 씻었다. 욕실로부터 밀려 들어오는 후끈한 열기가 아직 화끈거림이 덜 식은 도형의 뺨에 내려앉으면 허리에 수건 한 장만 두른 수현이 나왔다. 인간의 신체가 구현할 수 있는 최상급의 조형미를 자랑하는 몸에서는 향수라기에는 은은하고 체향이라기에는 지나치게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매사에 철두철미한 수현에게도 나쁜 습관이 하나 있는데, 머리를 감고 제대로 말리지 않는 것이었다. 물에 젖어 색이 짙어진 머리카락 끝에서 시작한 물방울이 또르르 가슴을 타고 흐르다가 떨어져 발치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이쯤 되면 졸려서 가물가물한 눈을 끔뻑거리던 도형이 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욕실에서 수건과 드라이어를 가지고 나왔다.
“아니, 애도 아니면서 머리도 제대로 못 말리고! 여기 앉아 봐요. 하여간 진짜 손 많이 가는 양반이라니까.”
입으로는 잔소리를 퍼부으면서도 착실하게 수현을 끌어다 침대 옆에 앉히고 자신은 침대에 걸터앉아 휴대전화 충전기를 뽑은 자리에 드라이어를 꽂아 수현의 머리카락을 말려 주었다.
“사자 갈기 말리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어? 강 선생님 머리도 축축하게 안 말리고 옷도 안 입고 자니까 자꾸 감기 걸리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내가 진짜 못 산다.”
“형사님 약손으로 몇 번만 문질러 주시면 금방 낫는걸요.”
“시끄러워요.”
“네.”
수현의 숱 많은 짙은 밤색 머리는 도형의 생머리와 다르게 살짝 곱슬기가 있었다. 미인은 머릿결까지 미인인가 싶을 정도로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로 흘리면 마치 비단실처럼 사르르 흘러내리는데, 도형은 그 촉감이 좋아 항상 빗 대신 제 손가락으로 수현의 머리카락을 빗으며 구석구석 꼼꼼하게 드라이했다.
손끝으로 두피를 마사지하듯 꼭꼭 눌러 습기가 하나도 남지 않은 것을 확인한 도형이 머리 말리기가 끝났다는 신호로 수현의 머리를 와르르 흩트리면 수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젖은 수건과 드라이어를 정리하고 허리에 두른 수건 대신 팬티를 꺼내 입고 도형 옆으로 들어와 앉았다.
그렇게 한 침대에 누워 수현은 태블릿 PC로 일을 마저 하고 도형은 휴대전화를 좀 더 들여다보다 까무룩 잠이 든다. 수현이 언제 자는지는 모르지만, 아침에 일어나 보면 도형이 잠들기 직전까지 손에 쥐고 있던 휴대전화는 얌전히 사이드 테이블에 올려져 있고 그의 몸은 어김없이 수현의 긴 팔다리에 칭칭 감긴 채, 마치 껍데기를 뒤집어쓴 소라게처럼 따끈한 품에 폭삭 안겨 있다.
도형은 타인의 체온이 정서 안정에 도움이 된다는 수현의 말을 반쯤은 수작질로 치부했으나, 역시 전문가는 전문가인지 수현이 옆에 있는 동안은 꿈도 안 꾸고 아침까지 한 번도 깨는 일 없이 푹 잤다.
그리고 며칠 사이에 도형이 수현에 대해 새로 알게 된 것이 몇 가지 있었다.
수현은 아침에 일어나면 눈꺼풀이 살짝 붓는다. 잠에서 깬 도형이 수현의 품에서 꼼지락거리면 수현도 그를 따라 부스스 일어났다. 살짝 부은 탓에 날카로운 인상이 누그러져 훨씬 부드러워 보이는 눈매를 휘게 접고 낮게 가라앉아 한층 달콤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안녕히 주무셨어요?” 하며 사르르 무방비하게 웃었다.
동화 속 왕자님 같은 무구한 표정을 보면서 어쩌면 이 얼굴을 아는 사람이 세상에서 자기 하나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마다 도형의 심장과 폐 어름이 간질간질했다. 그래서 괜한 쑥스러움에 어수선하게 손을 놀리다 더듬더듬 수현의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으며 “선생님도 잘 잤어요?” 하고 대답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강수현은 무지무지 바쁜 사람이었다. 할 일 진짜 없으신가 보다고 비아냥거렸던 과거의 김도형을 때려 주고 싶을 정도로. 수현은 하루를 시간도 아니라 분 단위로 쪼개 썼다. 하루 매출이 36억이랬으니까 1시간에 1억 5천, 1분에 무려 250만 원이다. 얄팍하게 돈으로만 따지면 강수현의 1분에는 도형의 한 달보다 큰 가치가 있는 셈인데, 그런 남자가 자신에게 도대체 왜 그토록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지 도형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웠다.
「저한테 그렇게 신경 안 쓰셔도 되는데.」
도형이 지나가는 말로 슬쩍 흘렸더니 수현은 잘못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사님에게 신경을 안 쓰면 제 신경은 대체 어디에 써야 하죠?」
평소와 같은 평범한 플러팅이었지만, 막상 수현이 자기에게 베푸는 호의가 절대 평범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도형은 평범하게 구박하며 넘길 수 없었다.
「부담스럽다는 의미가 아니고요, 강 선생님 진짜 일도 많고 바쁜 사람인데 저 때문에 시간 뺏기는 게 미안해서요.」
「이전에 제가 말씀드렸죠. 인생의 우선순위. 제 인생의 최우선순위는 형사님입니다. 다른 일은 그저 해야 하니까 하는 일일 뿐이고, 솔직히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에요. 진심으로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건 형사님과 보내는 시간뿐이니 혹시라도 제게 미안한 마음 같은 건 절대 품지 마세요. 설마 제 유일한 기쁨을 빼앗지는 않으시겠지요?」
그렇게까지 말하니 도형도 별수 없었다.
놀고먹고 자는 한량 생활을 며칠이나 했더니 도형의 해쓱했던 얼굴에 윤기가 돌아오고 창백하게 질렸던 피부색도 귀한 진주처럼 빛났다. 그새 볼살이 조금 오른 도형이 활짝 웃으면 반지르르한 광대가 봉긋하게 솟아 정원에 심은 꽃보다 더 활짝 피었다. 수현의 가슴을 춘삼월 꽃구경에 설렌 이팔청춘처럼 슴벅대게 할 정도로.
토요일 저녁에 오기로 한 도진이 늦을 것 같다고 해서 수현과 도형 둘이서 저녁을 먹었다. 첫 주말을 축하해야 한다며 수현이 엄청나게 맛 좋은 와인을 꺼내 와 둘이서 한 병씩 마시고 거실에서 영화를 보며 도진을 기다리기로 했다.
몸이 앞으로 확 쏟아지는 느낌에 도형이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자기도 모르게 졸고 있었나 보다. 배도 부르고 취기도 오르고 몸과 마음이 모두 말랑말랑 풀어져서 허리를 세우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자꾸 무너지는 도형을 본 수현이 자기 허벅지를 톡톡 치며 편하게 누우라고 신호했다. 도형은 일단 수현의 허벅지를 조심조심 더듬어 수납한 쪽이 아님을 확인하고 벌러덩 드러누웠다.
“이쪽은 오른쪽이라 안전한 허벅지예요.”
수현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베개치고는 좀 높았지만, 그럭저럭 편한 근육 베개를 베고 눕자 수현의 크고 따뜻한 손이 도형의 이마며 뒤통수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기분 좋은 체온과 익숙한 향기에 까무룩 잠이 쏟아졌다.
주위를 둘러싼 소음이 잦아드는 걸 보니 수현이 음량을 줄였나 보다. 속닥거리는 낯선 목소리들 사이로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오더니 애잔한 목소리가 노래를 불렀다. 영어는 아닌데 코 먹는 소리가 나는 걸 보니 샹송인가보다. 가사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작게 노래를 따라 부르는 수현의 목소리가 아까 마신 와인처럼 깊고 향긋해 다시 취할 것 같다고 도형은 잠결에 생각했다.
달콤한 자장가처럼 마음에 스미는 목소리를 듣고 있는데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진이 왔다. 그러나 열린 귀로 들어온 꿀 같은 수현의 노랫소리가 반대쪽 귀로 흘러나와 도형의 머리와 수현의 허벅지를 딱 붙여 버렸는지 도형은 도저히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려 만든 실금 같은 틈으로 수현이 보였다. 그는 자기 입술에 검지를 대더니 2층을 가리켰다. 도진이 살금살금 계단을 올라가는 소리가 들려 도형은 안심하고 눈꺼풀에 힘을 뺐다.
눈을 떴더니 아침이었다. 익숙한 무게가 느껴지지 않아 몸을 꼼지락거리니 이불이 어깨 아래로 떨어졌다. 수현의 방이 아니었다. 아무리 강수현이라도 도진이 있는 집에서 도형을 자기 방에서 재우기는 부담스러웠겠지.
살짝 부은 눈도, 이상하게 뻗친 갈색 머리도, 나지막한 인사도 없는 아침이 어색했다. 이상하게 허전한 마음에 얼른 일어나려고 몸을 일으키는데 도형의 품에서 솜뭉치가 툭 떨어졌다. 수현의 티셔츠를 뒤집어쓴 길쭉한 베개였다. 자기 대신 끼고 자라고 안겨 준 건가. 귀엽기는. 도형은 키득키득 웃으며 베개에 코를 박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쌉쌀하고 묵직한 내음이 비강을 가득 채워 기분이 좋아졌다. 수현의 향기였다.
***
“둘이서 무슨 역적모의하고 있어?”
“내가 도형이 쓰린 마음을 위로할 특급 처방전을 가지고 왔지.”
“뭔데?”
“얘 소개팅시켜 주려고.”
유선이 눈썹을 치켜뜨고 도형을 쳐다보았다. 도형은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야, 이준연. 저번에 너 도형이한테 집에 불나서 옷 얻어 입고 왔냐고 놀렸지. 네가 입방정 떨어서 불났잖아.”
“이 새끼는 매일 나한테만 지랄이야. 그래서 내가 책임감 느끼고 소개팅 주선하잖아.”
“인간적으로 그게 도형이 좋자고 시켜 주는 거야? 프로 뚜쟁이, 너 소개비 얼마 받았어.”
“정유선 경사님, 남의 영업 방해하지 말고 꺼지세요.”
“너나 꺼져. 도형아, 나 좀 보자.”
“나 아직 도형이랑 말 안 끝났어! 정유선, 야!”
도형은 준연에게 고개를 엉성하게 숙여 보이고 유선을 따라 나갔다.
“너 지금 어디에서 지내?”
“친구 집이요.”
“어떤 친구?”
“있어요. 선배는 잘 모르는 사람.”
“강수현 사장?”
목덜미를 손으로 감싼 도형이 음, 어, 하면서 어눌하게 더듬거렸다.
“거기 있지 말고 우리 집으로 와.”
“거기가 집입니까? 방이지.”
“그래도 강 사장 집보다는 편할걸.”
“저 지금 하나도 안 불편해요. 정말인데.”
유선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도형의 말을 믿는 표정은 아니었다.
“너 강 사장 좋아해?”
“좋아하죠.”
“딴청 피우지 말고.”
“뭐…. 싫어하지는 않아요.”
“강 사장은 너 좋아해?”
“싫어하면 자기 집에 오라고 했겠어요?”
“그런 속 편한 소리 듣자고 물어본 거 아니잖아. 제대로 생각하고 제대로 대답해. 만약에 강 사장이 너를 그쪽 의미로 좋아하는 거면 어떡할 건데? 받아 줄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요.”
유선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숨을 골랐다.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티가 역력했다.
“세상에 그럴 리 없는 일이 어디 있어? 지금은 너 어떻게 해 보려고 잘해 주는 거고, 흥미 없어지면 내쳐 버릴지 누가 알아. 그 사람 너무 믿지 마. 대체 네가 그 사람 어디를 그렇게 좋게 보았는지 모르겠는데, 보기랑 다른 사람이다. 솔직히 너도 느꼈잖아. 강수현,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야. 애초에 제대로 감정을 느끼는 사람인지도 의문스러워. 그 나이에 그 정도까지 성공한 사람은 거의 다 미친놈이야.”
“…….”
“직접 만나 보고 확신했어. 강수현, 정상 아니야. 일부러 화낼 만한 말 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웃더라. 네 이야기 하면 귀신처럼 반응하는데 막상 자기 욕은 들은 척도 안 해. 개소리라고 무시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아무 생각도 없어 보여. 꾸며 낸 게 아니라 정말로 자기가 듣고 싶은 말이 아니면 안 들리는 거야. 그게 소시오패스고 사이코패스야.”
“…….”
“김도형. 너 진짜로 강수현이 멀쩡하다고 생각해? 평범한 사람 아닌 거 알잖아.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변덕에 기대서 불안하게 지내지 말고 우리 집으로 와. 도진이 데리고.”
순식간에 도형의 귀가 새빨개졌다. 도형은 콧속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입으로 내뱉으며 턱을 높이 치켜들었다. 이를 앙다문 탓인지 예리한 턱선이 제법 다부져 보였고, 그 아래 훤히 드러난 목선은 여린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언제 변할지 모르는 변덕이 아니에요. 저희 그냥 평범한 친구예요. 친구가 친구 돕는 게 이상해요? 선배가 도진이 데리고 선배 집으로 오라고 하는 거랑 강수현 씨가 저랑 도진이 자기 집에서 지내라고 한 거랑 다를 거 하나 없어요. 선배 눈에는 어떤지 몰라도 강수현 씨 저한테는 정말 좋은 친구예요.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 하. 정말 너무하시네요. 그 사람,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 남들한테 드러내지 않을 뿐이에요. 감정이 왜 없어요. 다른 사람보다 열 배는 섬세하고….”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지 도형은 씩씩거리는 숨을 가다듬었다.
“그 사람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선배는 강수현 씨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시잖아요.”
“도형아.”
“저처럼 별 볼 일 없는 사람은 강수현 씨처럼 돈 많고 유명한 사람하고 친구이면 안 돼요? 우리가 평범하게 친한 게 그렇게 못 믿을 일이에요?”
“도형아. 그런 뜻이 아니라.”
도형이 주먹으로 입을 눌렀다가 검지와 엄지로 입술을 쥐어뜯었다.
“그런 뜻으로 하신 말씀 아닌 거 알아요. 민감하게 반응해서 죄송해요.”
“나야말로 알지도 못하면서 네 친구 나쁘게 말해서 미안하다.”
막상 유선이 선선하게 사과하자 도형은 콧등을 긁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유선은 손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고 가벼운 말투로 화제를 돌렸다.
“불편한 거 있으면 언제든 얘기하고.”
“네.”
“강 사장이 이상한 짓 하려고 하면 엎어 메치기로 자빠뜨린 다음에, 알지?”
“뭘요?”
“뒤꿈치로 불알 밟아서 터트려 버려.”
다짜고짜 방으로 쳐들어가서 키스했던 밤의 일이 떠올라 도형의 얼굴이 벌게졌다.
이상한 짓은 그쪽이 아니라 제가 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제 불알을 터트릴 수는 없잖아요?
“아, 진짜. 강수현 씨 그런 사람 아니라니까요.”
왜 다들 강수현 고환을 부수지 못해 안달인 건지. 둘 사이에 무슨 짓이 벌어졌기는 하지만, 그 짓에 직접 관여한 건 고환이 아니라 그 위에 달린 거대한 원통 모양의 돌기형 남성 생식기인데.
“알았다. 네가 잘 지낸다니 됐다. 근데 소개팅은 안 할 거지?”
“모르겠어요. 별로 생각 없긴 한데요.”
“소개팅 나가지 마. 피 보기 싫다.”
“피를 왜 봐요?”
“네 피 말고. 진심으로 충고하는데, 하지 마.”
유선과 도형의 대화가 생각보다 길어지자 기다리다 못한 준연이 빼꼼 문을 열고 나와 끼어들었다.
“말 끝났어?”
“이준연. 너 목숨 안 아깝나?”
준연이 몸을 홱 돌려서 유선을 향해 대거리를 했다.
“또 왜 개소리야. 도형아, 쟤 오늘 왜 저래?”
“뒷감당할 자신도 없으면서 왜 일을 만들어.”
“에이, 소개팅 한 번에 목숨에 뒷감당이 왜 나옵니까. 선배도 너무 나가시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강수현이 사 준 것이 분명한 명품으로 휘감은 도형은 생글생글 웃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 해맑은 얼굴에 유선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살다 살다 속이 시커먼 냉혈 재벌을 안타깝게 여기는 날이 올 줄이야.
흠잡을 데 없이 잘생긴 얼굴로 지독한 독설을 내뱉는 강수현을 상상하자 한숨이 나왔다. 독설만 퍼부으면 다행이지. 용수경찰서 이준연 경사 열흘째 행방 묘연. 현직 경찰관 의문의 실종. 유선의 눈앞에 온갖 자극적인 뉴스 꼭지가 번쩍거리며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안 될 말이다. 유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보통 아닌 성질머리에 제대로 성질부릴 수 있는 돈과 권력까지 가진 남자에게 성질부릴 이유까지 만들어 주면 어쩌자는 건가.
“도형이 너 혹시 아직 정숙 씨랑 만나?”
“정숙이가 누군데요?”
“깨졌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랑 무슨 수로 깨져요?”
“그 있잖아. 꽃 보내고 간식 보내고 그러던.”
아무래도 준연이 말하는 정숙 씨는 강수현인 듯했다.
“그 사람 이름 정숙이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에요. 그냥 친구라고 몇 번을 말해요.”
“그럼 지금 여자 친구 없는 거지?”
도형은 잠깐 고민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없어요.”
“야, 김도형. 하지 말랬다.”
“정유선 너는 좀 조용히 해. 네가 도형이 여자 친구야? 왜 자꾸 끼어들어?”
“너 진짜 죽고 싶어?”
“내가 왜 죽어? 도형아, 그럼 소개팅하는 거지?”
“별로 생각 없는데요.”
“되게 예뻐.”
“저 얼굴 안 봐요.”
“사귀는 사람 없다며. 눈 딱 감고 한 번만 만나 봐. 원래 슬픔은 사랑으로 잊는 거야.”
여자 친구는 없지만 사귀는 사람이 없느냐 하면, 그건 좀 대답하기 미묘했다. 곧이곧대로 강수현이라는 사람과 연애 계약을 체결했다고 말할 수도 없고. 사귀는 것도 사귀지 않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도형은 대답 대신 발끝으로 바닥을 콕콕 찍었다. 계약서에 뭐라고 쓰여 있으려나. 계약 중에 다른 사람과 교제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과 교제하는 즉시 계약은 해지된다?
“사귀는 사람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제가 사정이 있어서 그래요. 당분간 누구 만날 생각 없어요.”
“아니, 누가 당장 예식장 잡으래? 그냥 가볍게 만나 보라는 거지.”
집요하게 조르는 준연을 빤히 바라보던 도형이 피식 웃었다.
“형님 또 저 팔아먹었죠?”
“미안…. 이미 약속을 해 버렸네?”
“그러면 얼굴만 비추고 바로 나옵니다? 형님이 알아서 거절하고 저 대신 욕 많이 드세요.”
“어, 어. 그냥 얼굴만 보여 주고 와. 야, 너랑 다리 좀 놔 달라고 몇 달을 조르는데 당할 수가 없더라.”
“이준연. 너 도형이 좀 그만 팔아먹으랬지. 그러다가 비명횡사하는 수가 있어.”
“정유선 너 일 없냐? 좀 가라, 가.”
“아니요. 형님, 유선 선배 말대로 저 좀 그만 팔아먹어요. 개인사라 말은 못 하는데 진짜 심각한 사정이 있어요."
“알았어, 알았어. 미안해. 이번이 마지막.”
영 찝찝함이 가시지 않아 도형은 햇살이 눈부시다는 핑계로 눈살을 찌푸렸다. 강수현과 결혼한 사이가 아니니 불륜도 아니고, 진짜 사귀는 것도 아니니 바람피우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속이 거북한 걸까. 죄책감을 닮은 불순물이 자꾸 양심을 더럽혀서 마음이 온통 진창이 된 느낌이었다.
선배가 말도 없이 약속을 잡아 버려서 어쩔 수 없다면서 잠깐 체면만 살려 주고 오겠다고 솔직하게 얘기할까. 사귈 생각은 조금도 없고, 그냥 얼굴만 잠깐 비추고 오는 거라고. 아이고, 구차해라. 도형은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말을 안 할 뿐인 거지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니까. 속이는 것도 아니다. 하긴, 도형이나 전전긍긍하지, 수현은 도형이 누구를 만나든 딱히 관심도 없을 것이다. 조금 친하다고는 해도 어차피 친구 사이 아닌가.
도형의 기분이 가라앉았다.
< 정의로운 미식생활 >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