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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플람베(Flambé)는 화려하게 (5/10)

Chapter 4. 플람베(Flambé)는 화려하게

전화벨이 두 번 울리고 끊어졌다.

수현은 가만히 휴대전화를 노려보았다. 빛도형이라는 선명한 세 글자가 머릿속에서 깜빡깜빡 빛나는 기분이 들었다. 잘못 걸린 전화일까. 메시지라면 종종 도형 쪽에서 먼저 보내올 때도 있지만 전화를 거는 일은 몹시 드문 일이기 때문에 수현은 허겁지겁 도형에게 전화를 거는 대신 잠시만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고작 부재중 전화 한 통에 이토록 평정이 무너질 일인가. 어두운 밤의 바다에서 희미한 달빛에 기대 위태롭게 흔들리는 쪽배처럼 수현의 가슴이 술렁술렁했다. 팔짱을 끼고 숫자를 딱 열까지 세어 보기로 했다. 열을 다 셀 때까지 다시 전화가 오지 않으면 그냥 수현이 전화를 걸면 되니까. 언제나처럼.

10, 9, 8, 7….

“당신의 강수현입니다.”

-저기요. 그 당신의 강수현이라는 말 좀 안 하면 안 돼요?

“게다가 마침 뻔하고 진부한 것을 하던 중이었는데요.”

건너편의 도형이 피식거리고 웃었다. 평소와 별다른 것도 없는 웃음소리였지만 묘하게 맥이 빠진 느낌이 들었다. 사실은 전혀 화가 나지 않았으면서 일부러 화난 척 버럭거리며 수현의 능청맞음을 꾸짖는 목소리도 따라오지 않았다. 유리창에 엷게 서린 살얼음처럼 연약한 고요가 전화 양쪽에 내렸다.

-바쁘죠?

“조금 전까지는 뻔하고 진부한 것을 하느라 바빴고, 지금은 형사님 목소리를 듣느라 바쁩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랬구나.

그러고는 도형이 무심결에 흘리듯 말을 이었다.

-나돈데.

도형의 말이 수현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 감정이 솔직하게 말이 되어 나왔다.

“제 생각을 하셨다고요?”

수현은 눈을 깜박였다.

-네. 갑자기 강수현 선생님 생각이 나더라고요?

격의 없고 친근한 말이었다. 도형의 붙임성 있는 표정, 사랑스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수현이 대답하지 않자 도형도 입을 다물었다. 짧은 침묵이 흐르다가 이윽고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강 선생님?

수현의 눈꺼풀 안쪽의 어둠에 작게 금이 가고 빛이 새어 들어왔다.

“아, 네. 김도형 형사님.”

한 호흡 쉬고 나서 "네. 김도형. 근데 내가 김도형 맞나?"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형사님 지금 어디 계세요?”

-저번에 강 선생님이 친구 혜택 있다고 했잖아요. 그거 오늘 받을 수 있어요?

“혜택이요?”

-나랑 놀래요?

수현은 도형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옷을 입고 자동차 키를 챙겼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제가요, 술을 조금 마셨는데요.

기운이 빠진 것처럼 느껴졌던 것은 역시 술 때문이었던 건가.

-많이 마신 건 아니고요.

수현은 차분하고 덤덤한 자세로 도형의 말을 기다렸다. 도형이 내뱉는 의미 없는 문장들의 의미를 찾아내려 애쓴 끝에 수현은 마침내 도형이 가느다란 실 같은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좀 어지러워서 그냥 걸었는데요.

“네.”

-걷다 보니까 강 선생님네 동네인 거예요.

“근처까지 오셨으면 그냥 바로 저희 집으로 오시지 그러셨어요.”

-초대받은 것도 아닌데 무작정 그러기는 좀….

“형사님께 늘 열린 것이 두 개 있죠. 제 마음과 저희 집 문.”

-아이, 진짜.

“지금 나가겠습니다. 정확히 어디세요?”

-잘 모르겠어요. 놀이터 같기도 하고 공원 같기도 한데. 벤치 뒤로 키 작은 나무랑 덤불이 있고, 가운데 작은 미끄럼틀이 있어요. 그리고 어디서 되게 좋은 꽃향기가 나는데…. 잠깐만요. 지도 볼게요.

“아, 어디 계신지 알겠어요. 라일락 공원. 금방 가겠습니다.”

밤의 고요함 속에서 수현은 도형이 홀로 자신을 기다리는 곳으로 내달렸다. 온갖 일이 마음에 떠올랐다가 사라져 갔다.

달려오는 수현을 보자마자 도형이 미소를 지었다. 무언가가 녹아내리는 듯한 웃음이었다. 수현은 안도감에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마저 들었다.

“우와.”

“어디 이상한 데라도?”

“선생님이 뛰는 거 처음 봐요. 강 선생님도 뛸 줄 아는구나. 등 뒤에서 불이 나도 우아하게 걸어올 것 같았는데.”

“저 매일 아침 10km씩 뛰고 있습니다.”

“오, 진짜요? 그 근육이 그냥 나온 게 아니구나.”

희미하게 웃으며 말하는 도형은 봄꽃도 이미 다 져 가는 마당에 혼자만 이상하게 추워 보였다.

“선생님 달린다는 이야기 들으니까 몸 움직이고 싶네요. 우리 야구 하러 갈래요?”

“야구요? 어디에서 할 수 있나요?”

“배트장이요.”

도형이 가상의 야구 배트를 휘휘 휘두르는 흉내를 냈다. 수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도형이 수현의 손목을 잡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수현은 약간 멍해진 상태로 흐릿한 가로등 아래 도형을 따라 걸었다. 앞서가는 도형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드문드문한 가로수를 살랑살랑 흔드는 밤의 바람 속에서 어렴풋하게 달콤한 향기가 났다.

수현은 도형에게 손목을 잡힌 채로 얌전하게 따라갔다. 그러나 몸 안쪽은 복잡했다. 온몸의 핏방울이 머리끝으로 몰려 올라와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피가 역류하는 소리에 귀가 먹먹했고 다리미로 두개골을 지지는 것처럼 머리가 뜨거웠다. 도형에게 붙잡힌 곳은 손목인데 이상하게도 도형의 손이 수현의 정수리에 달라붙어 그의 의식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기운 없이 떨리던 목소리에 비해 도형은 술을 많이 마신 건 아니었는지 걸음걸이며 말투가 모두 또랑또랑했다.

“이런 동네에 뜬금없이 야구 연습장이 있어서 신기하다고 생각했어요.”

언덕을 내려가자 번화가에 닿기 직전에 도형의 말대로 야구 연습장이 있었다. 수현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지나는 길인데도 이런 곳이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형사의 눈썰미는 과연 대단하다고 진심으로 감탄했다. 수현이 도형에게 감탄하는 부분이 한두 개냐마는….

도형은 배트를 잡고 시원스럽게 스윙 했다. 자세는 프로 못지않았지만, 타율은 형편없었다. 그래도 수현은 도형이 보스턴 레드X스 전설의 타자라도 되는 양 연신 손뼉을 치며 탄성을 질렀다. 생각만큼 공이 잘 안 맞는다며 도형은 조금 쑥스럽게 웃었다.

“선생님도 쳐 보세요. 운동 잘하실 것 같은데.”

“야구는 어릴 때 말고는 해 본 적 없어요.”

“미국 본토 야구 맛 좀 보여 줘요.”

도형의 강권에 수현은 배트를 두어 번 휘둘러 몸을 풀더니 바로 타격대에 섰다. 무서운 속도로 쏘아 들어오는 공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연속해서 묵직하게 장거리포로 쳐 낸 수현은 어느새 타격장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뭐야, 어릴 때 말고는 해 본 적 없다면서요?”

“오늘 좀 잘 맞았어요.”

“장난 아니다. 못 하는 게 대체 뭐예요?”

“형사님께 승은 입기?”

“아이, 미친. 진짜.”

도형은 수현을 정말 이상하지만 조금 멋있는 양반이라고 생각했다.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도형의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던 게 틀림없다. 수현이 도형을 보고 피식 웃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수현 역시 도형을 두고 재미있는 양반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비록 수현은 희고 고른 이를 드러낸 채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도형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잔잔한 바다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은 그의 깊은 눈에는 발갛게 상기된 도형의 얼굴만 크게 비쳐서 어떤 감정도 훔쳐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형사님은 눈도 좋고 발도 빠르시니, 1번 타자에 어울리실 것 같아요.”

“맞아요. 경찰학교 있을 때 야구팀 1번이었어요. 다른 건 몰라도 투수 약 올리는 거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했죠. 제 별명이 대도 김파울이었습니다.”

“뭐든지 잘 훔치시는군요.”

“내가요? 뭐를?”

“제 마음도 훔치시고….”

“오늘 자꾸 선 넘네?”

“저 목마른데. 뭐 마시러 가실래요?”

“술 마시러 갑시다. 좋았어. 내가 오늘 우리 강수현 선생님 첫 경험시켜 드려야지.”

도형은 모른다. 수현이 도형과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그에게는 전부 첫 경험이라는 사실을. 말하자면 강수현이라는 남자의 지난 시간이 전부 하나의 껍데기가 되어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러니까 흙 속에서 17년이나 웅크리고 있던 애벌레가 기어코 허물을 벗고 매미가 되어 너울거리는 푸른 잎 아래에서 구애의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말이다.

수현은 생각했다. 17년의 두 배가 넘는 시간 동안 인간의 욕구나 갈망 같은 것에 무심하게 살았던 것은 도형을 만나 그간 응축하고 숙성한 모든 감정을 일거에 폭발시키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충만한 기분이 사랑이라면 딱 한철 도형의 이름만 애타게 외치다 태양 빛에 바스러져도 좋다. 그런 엉터리 로맨티시스트 같은 생각을 하며 도형을 따라갔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모든 것이 지나치게 선명했다. 이제는 다정함의 표현이라는 걸 알게 된 속사포 같은 말투로 도형이 하늘을 보며 마시는 맥주 한 캔의 즐거움에 대해 조잘조잘 떠들었다.

“미국은 지붕 없는 데서 술 마시면 안 된다면서요?”

“아, 네. 그리고 술병이 보이도록 들고 다니는 것도 안 됩니다.”

“그럼 바깥에서 맥주 캔 늘어놓고 술 마시는 거 처음이겠네?”

“그렇죠.”

도형이 수현을 데려간 곳은 야구 연습장 바로 근처의 편의점이었다. 도형은 맥주 네 캔과 감자 칩을 사서 편의점 앞의 플라스틱 테이블에 늘어놓았다. 수현도 도형을 흉내 내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강수현 사장님 첫 경험에 건배.”

“건배.”

수현이 낯선 기분에 몸 둘 바를 몰라 움찔거리니 도형이 개구쟁이 같은 표정으로 눈을 접고 웃었다. 그 얼굴을 보니 마음이 누그러졌다. 그 얼굴은 수현에게 가장 익숙한 도형의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현은 그렇게 웃는 도형을 아주 좋아했다.

도형이 갑자기 웃음을 싹 지우고 정색했다.

“하루에 실종되는 사람이 몇 명일 거 같아요?”

“글쎄요…. 전혀 감이 안 잡히는데요.”

“180명 정도 돼요. 근데 대부분 그냥 가출이라서 내버려 두면 알아서 돌아와요.”

“그렇군요.”

“저 보면 아시겠지만, 경찰 바쁘잖아요? 작년에 실종 신고가 6만 건이 넘었는데 범죄로 연결된 건 열다섯 건이었어요. 그러니까 2%. 2%에 최선을 다하기에는 98%가 너무 무거워요.”

도형은 맥주 한 캔을 단숨에 절반 넘게 마시더니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한 사람의 생명이 꺼지는 건 하나의 우주가 소멸하는 거예요. 우리한테는 고작 열다섯 명이지만, 그 열다섯 명의 가족과 친구한테는….”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옳지 않은 건 알고 있지만, 목숨에도 우선순위가 있어요.”

“제가 지금 그 말 하려고 했는데. 선생님이랑 같이 있으면요, 자꾸 내 속을 읽히는 거 같아. 어떻게 이렇게 내 마음을 잘 알지? 혹시 앰브레이스 기술 중에서 남의 생각 읽는 것도 있나요?”

“기술이라기보다는 사랑의 힘이라고 부르죠, 보통은.”

“이 양반은 시도 때도 없이. 쯧.”

수현이 화사하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진심이어서 진심을 진심이라고 말했을 뿐인데 왜 진심이냐고 성을 내시면 어찌 대답하리까.

“자원이 한정되어 있을 때 인간이 택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선택과 집중이죠. 무얼 선택하느냐, 어디에 집중하느냐. 진짜 문제는 거기에서 시작합니다. 아직도 세상이 공정하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지나치게 순진한 겁니다.”

수현은 도형이 분명 동의하지 않을 법한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건넸다. 어쩌면 지금 도형이 바라는 것이 이런 시시한 자기 합리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었다. 수현은 결코 헝클어지는 법이 없는 도형의 다정함과 상냥함을 떠올리며 보이지 않는 손으로 그의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살살 매만졌다.

“강 선생님 만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잡생각이 계속 나네.”

“무슨 잡생각이 그리 나실까요?”

“친구 혜택 부탁해도 됩니까?”

수현은 당황했다. 그는 물끄러미 도형의 얼굴을 건너다보았다. 고작 며칠 만에 심하게 여위었고 핏기가 없었다. 큰 눈은 더 커지고 눈 아래가 거무스름해졌다.

“흐으.”

도형은 짧은 감탄사를 내뱉고는 고개를 갸우듬히 오른쪽으로 기울였다. 그 목소리의 표면에 차가운 유리컵에 매달린 물방울과 같이 잔잔하게 응결된 감정이 느껴졌다.

“잡생각에 무슨 내용이 있겠어요. 아무 내용이 없으니까 잡생각이지.”

수현은 남루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도형을 바라보다가 지난 몇 주 동안 단단히 빗장을 질러 억눌러 왔던 생생한 갈망이 단박에 심장을 찢고 튀어나온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친구 혜택 줄 거예요, 말 거예요?”

“친구 혜택이라면 혜택 주고받는 친구의 혜택 말씀이십니까?”

“네. 설마 그거 그냥 한 말이었어요?”

“저는 언제나 진심입니다.”

“그럼 그 혜택 오늘 좀 쓸게요.”

수현이 정말 진심이냐고 물으려던 순간 도형이 폭발했다. 바닥으로 냅다 내던져진 꽃병처럼 부서졌다. 꽃잎이 날리고, 줄기가 꺾이고, 유리 조각이 사방으로 튀듯이 도형의 취중 독백 같은 문장이 쏟아졌다.

“남매 둘이 살았는데, 누나가 모르는 사람한테 스토킹을 당한다고 신고를 했어요. 근데 경찰은 해 줄 수 없는 게 없다고 했어요. 그래서 동생이 매일 지하철역까지 누나를 데리러 갔는데.”

도형의 말에서 이상한 열기와 집요함이 느껴졌지만, 수현은 그를 가로막지 않았다.

“동생이 빗길에 미끄러진 바람에 발목을 심하게 삐어서…. 그래서 딱 하루 마중을 못 나갔는데….”

그때 수현의 오른손이 움직였다. 도형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의 긴 팔이 뻗어 나가더니 커다란 손을 도형의 뺨에 얹었다. 매끄러운 볼의 감촉이 수현에게 전해졌다. 커다랗게 치켜뜬 도형의 눈에 밤의 불빛이 술렁였다.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않던 도형은 수현의 잘게 떨리던 손이 미끄러지듯 뺨에서 떨어져 나간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죽었어요.”

“형사님.”

“역에서부터 따라와서, 아파트 현관에서 찔렀어요.”

“김도형 형사님.”

“누나가 기어서 계단을 올라갔는데, 계속 피가….”

“쉿, 그만.”

수현이 엄지로 도형의 입술을 꾹 눌렀지만, 도형은 수현의 손을 거칠게 쳐 내고 말을 이었다.

“동생이 누나 올 시간이 지났는데 안 와서 나갔더니….”

“아니에요, 형사님. 그런 게 아닙니다.”

“동생 눈앞에서 누나가….”

“형사님 탓이 아닙니다.”

“동생이 너무 서럽게, 너무 서럽게 울어서. 내 탓이라고, 내가 멍청하게 넘어지지만 않았어도 누나가 안 죽었을 거라고 너무, 너무 서럽게….”

“당신 탓이 아니에요.”

경찰 수십 명이 국회 의원 아들이며 장관 조카를 찾아다니는 동안에 무고한 사람이 죽었다. 우선순위에서 밀려서. 경찰 딱 한 명이라도 지켜보고 있었으면 살았을지도 모르는 사람이. 도형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으나 가슴을 쿵쿵 치는 그의 손짓은 분명한 오열이었다.

위에서 팥으로 메주를 쑤어 오라고 하면 “네.” 하고 대답해야 하고, 왜 팥으로 메주를 쑤었냐고 꾸짖으면 “죄송합니다.”라고 하는 것이 경찰이라지만,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도형은 자신의 존엄성이 조금씩 닳아 줄어든다고 느꼈다. 그런 감정이 눈으로 코로 입으로 스며 나와 도형의 얼굴을 뒤덮었다.

수현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도형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끌어당겨 가만가만 두드리는 것으로 조금 전까지 제 안에서 지독하게 휘몰아치던 격정을 억누르는 데 성공했다.

“내가 잡았어요. 내가 일주일 만에 그 새끼를 잡았는데, 그 새끼가 연쇄… 다른 사람도…. 수배자였어.”

“잘하셨습니다. 정말 고생하셨어요.”

“안 죽을 수도 있었는데….”

“당신은 최선을 다했어요.”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못하고, 동생은 죄책감에 시달리고…. 세상에… 그 사람은 경찰이 죽인….”

더는 도형이 말을 잇지 못하도록 수현은 그의 목덜미를 잡아 얼굴을 자기 가슴에 품듯이 바짝 끌어당겨 안았다. 가만 내버려 두었다가는 도형이 울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가 우는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도형을 울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끔거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조금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바람이 구름을 밀어내든 나뭇가지를 흔들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수현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도형 하나뿐이었다.

“당신은 경찰이지만, 경찰은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최선이 무슨 소용이에요. 매일 이렇게 비겁하게 살고 있는데."

“맞아요. 최선 따위 아무 소용없어요."

목을 비틀어 자신을 단단히 감싼 팔에서 간신히 얼굴만 빼꼼 내민 도형이 멍한 눈으로 수현을 올려다보았다.

“목숨보다 중요한 최선이 어디 있어요? 실패해도 됩니다. 최선 같은 거 다하지 않아도 됩니다. 비겁해도 됩니다. 살아 있기만 하면 됩니다.”

도형이 다시 수현의 가슴에 이마를 댔다.

“돌아가신 피해자는 당신이 아니고 홀로 남은 동생은 도진 학생이 아닙니다.”

“알아요.”

“당신도 도진 학생도 죽지 않았어요. 누구도 혼자 남지 않았습니다.”

“안다고요.”

“만약 비겁하게 살기 싫어서 무모하게 몸을 던지고 싶어지면 도진 학생 생각 한번, 제 생각 한번 해 주세요. 그래도 여전히 몸을 던지고 싶으면 그렇게 하십시오. 도진 학생은 제가 챙기겠습니다.”

“내 동생을 왜 선생님이 챙깁니까?”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기로 했으니까요. 수현은 대답 대신 도형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도형이 얇은 꽃잎 같은 눈꺼풀을 열고 수현을 쳐다보았다. 상냥한 위로로 가득한 아름다운 얼굴에는 도형의 감정을 공유하려는 배려가 남실거리고 있었다.

“선생님?"

도형은 가만히 불러 보았다.

“네.”

조용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나 너무 피곤해요.”

“힘들었지요?”

마음이 담긴 목소리를 듣자 응석을 부리고 싶은 충동이 치밀어 올랐다. 수현의 낮은 목소리는 도형을 부정하지도, 격려하지도 않았다. 단지 부드럽게 도형을 받아들여 감싸 주었다.

“열심히 하셨어요. 훌륭하셨습니다. 당신은 정말 대단해요."

그런 말을 듣자 몸이 가볍게 떠오르는 기분까지 들었다.

“아무 생각도 안 났으면 좋겠어요. 자꾸 머릿속에서 서럽게 우는 동생 생각이 나요.”

“제게 맡겨 주시겠습니까?”

수현의 목소리 밀도가 달라졌다. 귓가에 끈적하게 달라붙는 그의 말에 도형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전부 나에게 맡겨 달라고, 친구의 혜택을 전부 주겠다고. 그의 말은 마치 달콤한 주문처럼 들렸고 그 덕에 도형은 몸의 중심부가 녹아 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혜택을 주고받는 친구라는 말의 의미를 아십니까?”

“네?”

“영어로 혜택을 주고받는 친구는 섹스도 하는 친구 사이라는 뜻입니다.”

도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받고 더블로 주신다고 하셨죠.”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도형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약속드리죠. 다른 생각, 하나도 안 나게 해 드리겠습니다.“

오늘 밤은 내 생각만 하게 될 테니까.

“아, 장난치지 말아요.”

“장난으로 들리시나요?”

“친구끼리 세, 섹스하는 경우가 어디 있어요.”

“그런 말이 당연하게 사용된다는 건 섹스하는 친구 사이도 아주 평범하고 일반적이라는 뜻이겠지요.”

“진짜로?”

“진짜입니다.”

조금 전까지 울 것 같은 얼굴로 고통을 곱씹던 도형은 커다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혜택 주고받는 친구가 되자는 수현의 말을 덥석 받아들이다 못해 받고 더블로 주겠다고 말했던 것까지는 농담으로 치부할 수 있지만, 오늘 수현을 불러내 친구 혜택 좀 보자고 졸랐던 것은 대충 얼버무리기 어려웠다.

자신의 부탁이라면 수현이 절대로 거절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갑갑한 속을 털어놓으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못 할 경찰 흉도 보고, 틈을 봐서 어리광 좀 부리다가 술이나 한잔하자고 할 생각이었는데. 역시 지나치게 응석을 부린 걸까. 도형은 슬그머니 수현의 품에서 벗어나 슬쩍 그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수현의 호수 같기도 하고 바다 같기도 한 잔잔한 눈에 열정이 깃들어 있었다.

이 남자는 이렇게 뜨거운 눈으로 누구를 바라보는 걸까. 누구를 이렇게 갈급하게 애타하는 걸까. 도형은 바보같이 멍하게 입을 벌리고 그런 생각을 했지만, 다행히 몇 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차렸다. 수현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의 눈에서 일렁이는 정념은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저기, 계약서에는 뭐라고 쓰여 있어요? 그러니까 신체 접촉 같은….”

“쌍방이 동의하면 언제든지 가능합니다.”

“그렇구나.”

뭔가 그럴싸한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할수록 도형의 말수가 줄었다. 수현이 손을 다시 뻗어 도형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차가운 손끝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도형의 맥박이 빨라졌다.

“혜택받으시겠습니까?”

“아, 어…. 미국에서는 친구끼리 진짜 그, 그래요?”

수현은 대답 대신에 뭉근하게 웃었다.

도형에 대한 진짜 감정을 직시하게 된 이후로 수현은 매 순간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 사이에 생겨난 거리를 느꼈는데, 그렇다고 후회하거나 시간을 돌리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감정은 빛나는 환희에 가까웠다. 강수현의 모든 인간적인 면모가 그의 근사한 육신을 타고 흘러 짝사랑이라는 이름의 웅덩이에 남실남실 고였다가 기어코 흘러넘쳐 온 마음을 흠뻑 적시는 기묘한 경험이었다.

오늘만큼은 도형을 생각하지 말자고 자신을 타일러도 정신을 차려 보면 도형의 생각을 하고 있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또 기대하고, 멋대로 도형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고, 끊임없이 안달하고. 그 감정은 수현이 경험해 본 적 없는 격렬함을 동반했기에 자기 자신이 두려울 정도였다.

“형사님은 저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친구, 서로 하나밖에 없는 친구잖아요. 우리.”

“문서상으로는 연인이기도 하지요.”

“그, 그렇지.”

뺨을 발갛게 물들였던 열기가 점점 퍼지는지 도형은 목까지 발긋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허둥지둥하며 말을 잘 잇지 못하는 도형을 바라보고 있으니 수현은 잘박잘박 고여 있던 열띤 애정이 용암처럼 뿜어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저에게 뭘 바라시는 기색도 없고.”

“내가 강 선생님한테 바랄 게 뭐가 있겠어요.”

“그런 반면에 제게 늘 다정하게 대해 주시고.”

“사람이 사람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건 인간의 기본 성품이거든요? 칭찬하거나 높게 평가할 요소가 아니에요.”

“제가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랑 똑같은가요?”

여전히 도형의 눈썹과 뺨을 쓰다듬으며 수현이 간질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토라진 흉내를 냈지만, 지금의 수현은 분명 도형을 유혹하고 있었다.

“아니, 선생님은 내 친구잖아요. 그것도 그냥 친구보다는 조금 더 친하지 않나? 내가 친구가 없어서 남들은 어떤지 잘 모르지만, 아무튼 나한테 강 선생님은 그, 특별…한 사람이니까….”

“저의 무엇도 욕심내지 않으시지요.”

“욕심내서 뭐 해요.”

“제 돈과 이름값이 탐나지 않으십니까?”

“제 것도 아닌데 왜 탐을 내요.”

“제 것이 모두 형사님 것이 된다면요?”

“저는 크게 바라는 거 없어요. 몸 건강하고, 월급 꼬박꼬박 잘 나오고, 도진이 잘 자라고.”

도형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강 선생님 같은 친구도 있고….”

“그렇습니까.”

“없어지면 서운할 거예요. 진짜로. 처음…이에요. 친구가 이런 거구나. 있잖아요, 나는 사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몰랐거든요. 혼자라는 기분이 외로움인가? 그렇다면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외로웠어요. 그런데 강 선생님이랑 있으면 외롭지 않아요. 어떻게 알았냐면요….”

고개를 푹 숙이고 목덜미를 문지르던 도형이 번쩍 얼굴을 들더니 외치듯이 말했다.

“선생님이랑 같이 있다가 헤어지고 혼자가 되면 외로워요.”

역시 도형에게도 수현은 평범한 친구가 아니라 특별한 사람이라는 뜻이겠지. 수현은 입을 한일자로 꾹 다물고 도형을 내려다보았다. 얼마든지 어리광을 받아 줄 것처럼 사근사근하게 다정한 말을 건네다가도, 불현듯 남의 말 같은 건 절대 듣지 않겠다는 고집스러운 눈빛을 하는 도형을 보고 있으면 심장이 미친 말처럼 제멋대로 달려 나가다가 갑자기 나자빠지고는 했다. 역시 심장 클리닉 예약을 서둘러야겠다. 이런 극단적인 장기 반응이 정상일 리가 없다. 수현은 가슴이 벅차올라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선생님한테는 자꾸 미주알고주알 다 털어놓게 돼요. 그래서 뭐라고 해야 하나. 정화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니까, 뭘 바라니 돈이니 속물 같은 소리는 됐고 강 선생님도 자기 이야기나 좀 해요. 내가 전부 들어 드릴게. 슬프면 와서 울어요. 달래 줄게요. 화나면 와서 욕해요. 같이 화내 줄 테니까.”

“제 이야기는 친구 혜택부터 주고받은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그거 진짜로 하려고요?”

“형사님께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도록 친구 혜택을 달라고 하셨잖아요.”

“그건 제가 무슨 뜻인지 모르고 한 말이고요….”

“이제 아셨으니까.”

“아니, 그게….”

수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도형에게 손을 내밀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달빛을 받고 선 수현은 마치 무도회에서 춤을 청하는 왕자님처럼 도형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수현이 배경처럼 삼고 선 편의점 간판의 불빛마저 무도회장의 반짝거리는 샹들리에 조명처럼 보였다.

“저와 닿는 게 싫으세요?”

“아니요. 그런 게 아니고요.”

“저희 친구잖아요. 친구끼리 혜택 좀 주고받는다고 무슨 일이 있겠어요?”

“원래 친구끼리 막, 그래요? 진짜?”

“안 될 이유라도?”

여기까지 내려올 때는 내내 도형이 수현의 손목을 잡고 인도했는데, 다시 올라가는 길은 수현이 도형의 손을 잡았다. 수현은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도형을 살짝 끌어당겨 자신과 나란히 서게 한 뒤에 반대편 손으로 그의 입술을 가볍게 매만졌다. 세상에서 제일 연약한 설탕 공예를 쓰다듬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고, 세심하게.

“다른 생각할 틈도 없이 내내 제 생각만 하게 만들어 드릴게요.”

***

“왜 이렇게 긴장하셨어요.“

“아니, 그럼 긴장이 안 되게 생겼습니까?”

“무서우세요?”

“아니요?”

이런 경우 즉각적으로 튀어나오는 도형의 대답은 보통 거짓말이다. 수현은 도형의 머리카락에 손을 넣어 부드럽게 흐트러뜨렸다. 몸을 굽혀 도형과 눈높이를 맞추니 눈만 정처 없이 굴리던 도형이 고개를 수현의 목덜미에 묻었다. 마치 수현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체취를 들이마시는 듯한 모양새였다.

희고 매끈한 이마가 닿은 자리에서 열기가 흘러 들어오는 느낌에 수현이 살짝 몸서리쳤다. 도형의 머리가 무거워서도, 알코올 냄새가 섞인 숨결이 거북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너무 황홀해서,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아찔해서였다.

수현은 도형의 희지만 투박한 손가락을, 흉터 흔적도 아름다운 손등을, 동그란 손목뼈를, 걷어 올린 소매 아래로 탄탄한 근육이 길쭉하게 달라붙은 오른팔을 눈에 새기듯 바라보았다.

“저기요.”

도형의 미약한 부름을 못 들은 척하고 수현이 그를 소파로 끌어 깊숙하게 기대 앉히고는 얼굴 구석구석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극적으로 반듯한 이마와 그 아래 도도하게 솟은 콧날. 쳐다보고 있으면 영혼마저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새카만 눈동자. 눈을 깜빡일 때마다 비단 커튼처럼 차르륵 떨어지는 속눈썹. 무수한 비밀이 봉인된 도톰한 입술.

수현은 손을 뻗어 사랑스러운 얼굴을 조심스럽게 더듬었다. 몸 안에서 불꽃이 피어나는 기분이 들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형사님. 지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뭐가요?”

“혜택을 취소할 수 있는.”

도형이 눈을 가늘게 떴다. 끌로 길게 그어 놓은 듯 시원스럽게 빠진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쌕쌕거리는 더운 숨에서 달큼한 향기가 났다. 수현이 힘겹게 억눌러 온 성욕이 힘차게 솟아올라 바글바글 끓었다. 간신히 덮어 둔 이성의 뚜껑이 달그락거렸다.

“친구니까….”

“친구니까?”

“오늘은, 아무 생각도 안 들게….”

하얗고 매끄러운 살갗. 도형의 몸이 얼마나 흰지, 그 하얀 피부에 손이 닿으면 어떤 색으로 물드는지 아는 사람이 자신 외에 아무도 없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수현이 도형의 허리를 휘감아 자기 몸에 딱 붙이고 먹어 치울 듯이 강하게 입술을 부딪쳤다. 아랫입술을 세게 빨아 입을 벌리게 했다.

“하아.”

달콤한 소리와 함께 벌어진 붉은 입술 사이로 수현은 혀를 밀어 넣었다. 가지런한 이를, 단단한 입천장을, 여린 속살을 샅샅이 핥았다. 도형의 혀와 수현의 혀가 얽혔다. 수현이 뜨겁게 엉킨 혀를 조금씩 뒤로 물리니 도형의 혀가 수현을 따라 수현의 입으로 이동했다. 수현이 자기 입술 사이에 놓인 도형의 혀를 살짝 물었다.

“흐응….”

도형의 쉰 목소리가 수현의 호흡을 달뜨게 했다. 눈을 반짝 뜬 도형이 젖은 시선으로 수현을 올려다보았다. 흥분 때문인지 미지의 상태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도형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저에게 전부 맡겨 주세요.”

도형이 눈을 감고 팔을 뻗어 수현의 목을 안았다. 무언의 허락에 감사하며 수현이 도형의 이마에 작게 입을 맞췄다. 해는 한참 전에 저물었건만 도형에게서 늦봄의 햇살 냄새가 났다. 이파리가 점차 짙푸르게 물들어 가는 계절의 향긋한 냄새가.

늘 창백하게 하얀 도형의 피부가 온통 발그레했다. 복숭아처럼 잘 익은 뺨을 한 입 깨물면 달콤한 즙이 나올 것 같아서 수현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갈비뼈가 으스러지라 온 힘을 다해 도형을 껴안았다. 미약하게 꼼지락거리던 도형이 그대로 수현의 품에 몸을 의탁했다. 옷깃 사이로 드러난 상아 같은 목과 선명한 빗장뼈가 수현을 자극했다.

“함께 씻어요.”

“아, 아니요…. 선생님 먼저….”

“그러면 그사이에 다른 생각을 하실 거잖아요. 오늘은 제 생각만 하시기로 했으니.”

수현이 도형을 번쩍 안아 들었다.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자신을 가볍게 들어 올리고도 인상 하나 쓰지 않는 수현의 얼굴을 보며 도형은 이상하게 당황했다. 이렇게 심장이 펄떡거리고, 눈앞이 아뜩해지고, 뱃속이 간질거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수현이 흘리는 나직한 웃음소리가 호수 위로 퍼지는 파문처럼 도형의 세포 하나하나로 스며들었다. 온몸이 수현으로 가득 차 울리고 떨려서 도형은 수현의 목에 두른 팔에 힘을 주었다.

욕실 문을 발로 밀고 들어간 수현은 도형을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욕조에 물부터 받기 시작했다.

“간단하게 씻어도 되는데…. 뭐 그리 거창하게….”

“근육 이완에는 더운물만 한 게 없어요.”

그러고는 도형을 똑바로 내려다보며 입고 있던 스웨터를 훌렁 벗었다. 예전에 한 번 본 적 있는 조각 같은 육체는 도형의 기억보다 훨씬 장대했으며, 그를 구성하는 단단한 뼈대 하나하나, 선명한 근육 줄기 하나하나가 감탄이 나올 정도로 훌륭했다.

“벗겨 드릴까요?”

“아니, 아니요. 내가 벗을게요.”

잠시 넋을 잃었던 까닭일까. 손이 헛돌아 셔츠 단추를 제대로 풀지 못하자 도형의 손 위에 수현의 손이 겹쳐 올라왔다. 크다는 말과 섬세하다는 말이 동시에 쓰여도 되는 말일까. 수현의 손은 도형의 손을 전부 덮을 만큼 컸지만 기다란 손가락은 마치 프랑스 레이스처럼 화사했으며 마디마디가 귀족적으로 매끈했다.

도형의 셔츠 단추를 끝까지 푼 수현은 조각상을 덮었던 천을 걷어 평생의 역작을 처음으로 선보이는 거장처럼 조심스러운 손길로 셔츠를 벗겨 냈다. 맨살이 드러나자 도형은 피부가 오돌토돌 일어나는 오싹함에 가볍게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그 감각은 과연 추위 때문이었을까. 수현의 욕실은 이미 훈기로 가득했다.

손을 내리는 척하며 수현이 도형의 몸을 슬그머니 쓸었다. 도형의 얼굴이 바로 새빨개지는 걸로 보아 수현의 은근한 손길이 무슨 뜻인지 눈치챈 듯했다. 수현은 혀를 살짝 물어 비어져 나오려는 웃음을 목 안으로 밀어 넣었다.

새카맣고 커다란 눈동자가 수현의 입술에 떨어졌다가 화급히 갈 곳을 잃고 흔들렸다. 꿀꺽. 마른침이라도 삼키는 듯 울렁이는 목울대에 수현은 아까부터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던 뱃속의 덩어리가 참기 어려울 정도로 달아오른 것을 느꼈다.

“아직 욕조가 덜 찼으니 가볍게 샤워부터 할까요?”

수현이 도형의 바지 단추에 손을 올리니 도형이 세상 난리를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내가 벗을게요, 내가!”

수현은 예상하였다는 듯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이미 제가 두 번이나 벗겨 드렸는데 세 번이 뭐가 어려울까요.”

“왜 두 번이에요?”

“제 집에서 주무셨을 때 한 번, 약주가 과하셨던 날 형사님 댁으로 모셔다드렸을 때 한 번.”

“그, 그날은 제가 막 혼자서 옷 훌렁훌렁 벗었다면서요”

“상의만요.”

“아래는?”

“답답해하시길래 제가.”

“아니, 이 양반이 진짜….”

“인제 와서 부끄러워하시는 건가요?”

수현의 낮고 울림 좋은 목소리가 도형의 귓가에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음절 하나하나에 배어 있는 무르익은 관능에 도형의 솜털이 바짝 섰다. 수현은 바지를 꽉 붙든 도형의 손을 하나씩 떼어 자기 바지 단추 위에 올렸다.

“당신은 이쪽을 벗겨 주세요.”

결국 얼어붙은 것처럼 뻣뻣하게 선 도형은 자기의 바지도 수현의 바지도 벗기지 못했다. 사탕 껍질을 까듯 도형의 바지를 단숨에 쑥 벗겨 버린 수현은 거리낌 없이 자기 바지도 마저 벗고 말없이 도형의 속옷을 손가락질했다.

“전부 다 벗으라고요?”

“씻으려면 벗어야지요.”

“안 벗고 그냥 씻으면 안 돼요? 그, 그래. 수영복인 셈 치고.”

도형의 목소리가 볼썽사납게 흔들렸다. 수현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입꼬리를 한쪽만 올린 채 고개를 갸우듬히 기울였다. 대체 이 사람은 무엇을 위해 씻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수현의 눈빛이나 손길에 꼬박꼬박 반응하는 걸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는 아닌데.

“단체 생활하셨으니 공동 샤워실도 쓰셨을 텐데 무엇이 그리 꺼려지시는지? 역시 저와 몸이 닿는 것이 싫으신 거였나요?”

“그런 거 아니라고 했잖아요.”

벌거벗은 두 사람이 피부를 맞대고 있다고 에로틱한 분위기가 생기는 건 아니다. 나체 자체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 벗은 몸 자체가 에로틱하다면 지구는 목욕탕으로 인해 멸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에로틱한 건 눈빛이다. 두 사람이 은밀하게 주고받는 눈빛과 거기에 담긴 정념. 그러니까, 지금 도형은 수현의 농염한 시선 앞에서 맥을 추지 못하고 있었다.

“남이랑 같이 씻는 거 많이 했기는 한데…. 아니, 그래도….”

웃음을 참는 건지 울음을 참는 건지 이마를 잔뜩 찌푸린 도형이 속옷 밴드에 손을 올리고 엉거주춤하게 서서 수현을 쳐다보았다.

“어서.”

난감한 얼굴로 잠시 망설이던 도형은 수현의 요구대로 완전한 나체가 되어 제가 방금 벗은 팬티를 둘둘 말아 쥐고는 성기를 가렸다. 구중궁궐 심처만큼이나 깊숙이 자리한 대저택의 은밀한 욕실이다. 수현과 도형 두 사람 말고는 아무도 없고, 이곳을 훔쳐보는 사람이 있을 리도 없으니 도형의 미약한 반항은 수현에 대한 부끄러움 말고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자신을 흘겨보듯 올려다보는 도형의 샐쭉한 얼굴을 보며 수현은 작게 목을 울리는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물이 다 받아진 것 같으니 샤워는 건너뛰고 바로 욕조로 가요."

수현이 찰랑거리는 욕조에 무언가를 넣었다. 순식간에 물이 유백색으로 변하더니 싱그러운 꽃향기가 은은하게 풍겼다. 도형은 마음을 가라앉히려 숨을 크게 들이마셨지만, 욕실에 가득한 수증기 때문인지 오히려 숨이 더 막혔다. 도형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수현은 잽싸게 속옷을 벗고 욕조에 들어가 도형에게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자, 이러면 무엇도 보이지 않죠?”

주춤거리며 여전히 양손으로 앞을 가린 도형이 한 발씩 조심스럽게 욕조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어른 남자 둘이 들어가도 충분할 만큼 커다란 욕조였다. 도형은 양팔을 활짝 벌리고 자기를 부른 수현을 일부러 못 본 척하며 수현의 반대편에 앉아 다리를 쭉 뻗었다.

수현도 도형이 순순히 자기에게 안길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던 듯 바로 팔을 내리고 뿌연 물속을 더듬어 도형의 발을 찾았다. 그는 매일 뛰어다니느라 굳은살이 박인 거친 발을 고귀한 상아 조각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그쪽에 계시면 씻겨 드릴 수가 없는데요.”

“내가 씻을 수 있어요.”

“제게 맡겨 주시기로 했잖아요. 안 돼요. 이리 오세요.”

“괜찮아요!”

무릎을 굽혀 눅진하게 달라붙는 수현의 손으로부터 발을 멀리 떼어 낸 도형이 비명 지르듯 외쳤다.

“오지 않으시겠다면, 제가 가지요.”

수현이 무릎걸음으로 도형에게 다가왔다. 주린 맹수가 사냥감에 접근하는 듯한 압도적인 기세에 눌려 도형은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무릎을 껴안은 채 굳어 버렸다. 도형은 더운물에 앉아 있으면서도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 같이 오싹한 기분에 몸을 떨었다. 추운 것도 아닌데 왜 이러지.

그러나 덜덜 떨리는 것은 그의 몸이 아니라 심장이었다. 이렇게 심장이 빠르게 뛰다니 어디가 잘못된 걸까. 이 정도로 빠르게 피를 쥐어 짜내다가는 심장도 과부하가 걸려 고장 나 버릴지도 모르겠는데. 어차피 고장 날 심장이면 차라리 지금 멈춰 주면 좋겠다. 심장이 펄떡거리는 소리를 들키기 전에.

도형은 심장이 멈추면 죽는다는 생각을 떠올릴 틈도 없었다. 가까이 다가온 수현이 딱딱하게 얼어 버린 도형의 턱을 붙잡아 쪼듯이 입을 맞췄기 때문이었다. 입술에 와 닿는 뭉클한 촉감에 도형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니 바로 눈앞에서 수현이 싱긋 웃고 있었다. 수현은 말도 못 하고 숨만 허덕거리는 도형의 살짝 벌어진 입술을 혀로 핥았다.

재주도 좋게 도형을 빙글 돌린 수현이 욕조에 기대앉아 자기 허벅지 위에 그를 올리고 손바닥에 물을 받아 도형의 어깨 위로 흘렸다. 몸을 타고 흐르는 유백색 물의 꽃향기 때문에 도형은 머리가 핑핑 돌았다. 입욕제에 마취약 성분이 들었나. 제조사가 어디지. 압수 수색해야 할지도. 얼토당토않은 생각으로 현실을 외면하려던 도형이 몸을 고쳐 앉으려고 허리를 들었다가 내린 순간 그의 엉덩이 아래에….

“으악!”

도형은 비명을 지르며 용수철처럼 물 위로 솟구쳐 올랐다. 그러나 놀란 고양이의 무용한 저항은 수현의 손에 간단히 제압되었고, 다시 수현의 허벅지에 위에 올라탄 꼴이 된 도형은 엉덩이를 들썩였다가 몸을 배배 꼬았다가 하며 불편한 티를 있는 대로 냈다.

“아.”

약간 고개를 숙여 도형의 어깨에 턱을 기댄 수현이 달짝지근한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이러시면 곤란한데요.”

“내가 뭐, 뭘 어쨌다고.”

“제가 참기 힘들어지잖아요.”

꿀도 아니면서 이토록 달콤하고, 초콜릿도 아니면서 이토록 부드러울 일인가. 수현은 고막이 녹아내릴 것같이 감미로운 목소리로 도형의 귓가에 입을 바짝 대고 가만가만 속닥거렸다. 단둘밖에 없는데 은밀하게 속살거릴 건 또 뭐람. 온기를 머금은 숨이 예민한 귓바퀴를 간질이자 피가 반대 방향으로 도는 기분이 들어 도형은 수현의 어깨 너머를 보며 대리석 타일의 무늬를 눈으로 따라 그리기 시작했다.

“흐악!”

미주 신경이 바짝 일어나는 날카로운 통증이 도형의 상념을 깼다.

“미, 미치셨어요?”

“저를 보셔야지요. 다른 생각은 하지 말아요.”

수현이 도형의 유두를 제법 세게 꼬집었다. 양팔을 교차해 제 상체를 감싼 도형의 손을 천천히 하나씩 잡아뗀 수현이 도형의 양 손바닥을 자기 가슴 위에 올렸다.

“제가 당신을 씻겨 드릴 테니 당신은 저를 씻겨 주세요.”

손 아래에서 느껴지는 탄탄한 근육과 매끄러운 피부의 질감에 도형은 자기도 모르게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무심결에 남의 가슴을 주물러 버린 꼴이 된 도형은 고개를 숙인 채 슬쩍 눈만 들어 수현의 눈치를 살폈다. 수현이 반듯한 미간을 살짝 좁힌 채 들릴락 말락 한 소리를 흘리며 뜨거운 숨을 내쉬는 것을 보고 있자니 자신이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왔는지 새삼스럽게 의식되면서, 도형의 숨도 덩달아 가빠졌다.

“하아.”

수현이 저런 소리를 낸 적이 있던가. 저런 표정을 지었던 적이 있던가. 이 모든 것이 자신이 만든, 자신으로 인한 반응이라고 생각하니 도형은 괜스레 부끄

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수현은 씻긴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진득한 손놀림으로 도형의 몸을 어루만졌다. 물을 떠서 몸에 흘리며 젖은 상체를 뭉근하게 쓰다듬기를 반복했다. 수현의 손바닥이 너무 뜨거워서 닿은 곳마다 화상을 입을 것 같았다.

“근육이 길쭉하게 잡혀서 참 예뻐요.”

도형이 내내 눈을 내리깔고 있으니 수현이 그의 반쯤 감긴 눈꺼풀에 입을 맞췄다. 입술을 댄 채로 속삭이니 입술과 숨결과 수증기의 열기가 오로지 도형에게만 몰아닥친 듯 머리 꼭대기가 바글바글 끓었다.

“살결은 또 얼마나 보드라운지.”

배까지 내려간 수현의 손이 옆구리를 스쳐 도형의 몸 뒤로 돌아갔다. 도형은 수현이 올려 둔 그대로 수현의 가슴만 잡고 있었다.

“제 가슴이 그렇게 마음에 드세요?”

눈꺼풀에서 관자놀이로, 관자놀이에서 다시 귀로 옮겨간 수현의 입술이 목을 타고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목덜미의 여린 살을 잘근잘근 깨물듯이 애무하는 입술과 혀의 촉감에 도형은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무작정 수현의 목에 팔을 두르고 매달려 버렸다. 이렇게 하면 목을 깨무는 걸 그만두지 않을까.

그러나 몸이 바짝 달라붙자 하반신에서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이변이 일어났다. 두 사람의 중심이 서로를 비비듯이 압박했다. 도형은 몹시 부적절한 욕망이 다리 사이에 고이는 것을 느꼈다.

“흐읏….”

눈을 지그시 감은 수현이 악문 잇새로 신음을 흘렸다. 저 강수현이, 저런 표정으로…. 도형은 자신이 완전히 발기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다시 한번 얼어붙었다. 이번에는 당황이나 부끄러움 때문이 아니었다. 수현이 양손으로 도형의 엉덩이를 움켜쥐었기 때문이었다.

“당신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요.”

“저, 저기… 아니, 왜… 저기요?”

“조금만 참아요. 곧 좋아질 테니까요.”

엉덩이를 문지르듯 부드럽게 주무르던 수현의 양손이 불쑥 엉덩이를 양쪽으로 벌렸다. 다물려 있던 가운데 구멍이 벌어지는 느낌에 화들짝 놀라 도형은 수현의 목을 끌어안고 있던 팔을 떼어 반사적으로 그의 어깨를 밀었다.

뻣뻣하게 굳은 몸과 엉망진창으로 거칠어진 숨. 수현은 짧게 웃다가 목구멍 안쪽으로 웃음을 구겨 넣고 도형의 엉덩이에서 손을 뗐다. 늘 박력 있고 기 센 도형만 보다가 이런 모습을 대하니 괜히 몹쓸 짓을 하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그렇다고 수현이 손에 자비를 둔 것은 아니었다.

강제로 벌려졌던 구멍이 오므라드는 느낌에 도형이 안도한 것도 찰나, 길쭉하고 단단한 것이 밖에서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괴이한 감각에 크게 소스라쳤다.

“아앗!”

불안은 화살이 되어 날아왔다. 도형은 자기가 내었다고 믿을 수도, 인정할 수도 없는 날카로운 비명에 정신을 차렸다.

“제발 좀! 도대체 왜 이래요?”

목소리가 울먹거리는 것같이 들려 수치심이 몇 배로 치솟았다. 수현은 애원을 닮은 도형의 항의를 전혀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꾸물꾸물 손가락을 움직였다. 수현의 손가락이 도형이 평생을 출구라고 생각해 온 항문 안쪽으로 침입해 들어온 것이다. 단 한 번도, 무엇도 밖에서 안으로 들여온 적이 없는 곳이 벌어지는 느낌은 정말이지 괴이했다. 겨우 손가락 하나였지만 안을 가득 채운 이물감은 눈물이 찔끔 날 정도였다.

“쉿…. 몸에 힘 빼시고 저에게 완전히 기대세요.”

수현이 도형의 귓가에 속삭였다. 목덜미를 간질이는 물기 어린 숨결과 그윽한 온기에 도형은 오히려 더 긴장했다. 온몸의 털이 다 일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왜 이래요….”

“다치지 않으려면 충분히 풀어야 해요.”

“대체 뭐 때문에 이러시는 건데요….”

“섹스요.”

새삼스러운 충격이 도형을 후려쳤다. 바글바글 끓는 피에 성질낼 기운까지 기화되어 날아갔는지 수현이 시킨 대로 몸에 힘을 빼고 그의 어깨에 이마를 내려놓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현은 아직 침입을 허락하지 않은 긴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려 가며 안쪽 깊은 곳을 헤집었다. 고작 손가락 하나에 도형은 내장이 전부 뒤집히는 기분이 들었다. 입구가 제멋대로 뻐끔대며 손가락을 오물거리는 느낌에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았다

수현의 손가락이 하나 더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내벽을 문지르는 손가락에 점점 익숙해져 이물감이 덜해졌을 때 수현의 손끝이 어딘가를 쿡 찔렀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와 동시에 조금 전에 실수로 깔고 앉았던 엄청난 물건이 떠오르면서 갑자기 성질이 뻗쳤다.

도형은 늘어뜨리고 있던 손을 휘휘 저어 수현의 성기를 찾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양심 있나? 이게 들어갈 리가 없잖아요!”

“들어갑니다.”

“안 들어가!”

“내기할까요?”

“싫은데요.”

“자신 없으세요?”

낮게 긁히는 목소리의 수현이 도형의 호승심을 도발했다.

“만약에 안 들어가면?”

“들어갈 때까지 풀어 드릴게요.”

“그게 무슨 내기야. 안 들어가면 내가 넣을 거예요.”

“싫어요.” 

“내기하자면서요?”

“제 마음이에요.”

수현의 목소리에 짙게 깔린 쾌감이 맞닿은 피부를 통해 전이된 것일까. 도형은 등줄기가 바짝 서는 것을 느끼며 자기도 모르게 몸에 힘을 주었다.

“후우.”

수현이 눈을 가늘게 뜨고 벅찬 숨을 내쉬었다. 그가 숨과 함께 토해 낸 정념이 너무 뜨거워 도형은 불구덩이에라도 들어앉아 있는 것 같았다.

“벌써 그렇게 조르시면.”

자기도 모르게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나 보다. 본의 아니게 수현의 성기를 주무르게 된 꼴이 되어 도형은 어쩔 줄 모르고 수현의 성기를 쥐고 있었다. 손을 놓아 버리기도, 그렇다고 계속 잡고 있기도 곤란했다. 뿌연 입욕제 덕분에 그 꼴이 보이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나 시각은 감춰도 촉각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손 아래에서 느껴지는 수현의 남성은 분명 뜨거울 리가 없음에도 손바닥이 탈 듯이 뜨겁게 느껴졌으며, 아름답기만 한 그의 얼굴과 다르게 아주 사납게 성이 나 있었고, 굵고 긴 기둥 아래로 힘차게 맥동하는 혈관까지 또렷하게 느껴질 만큼 생생했다. 일단 컸다. 아주. 심하게. 많이. 저 얼굴에 저 몸에 저 머리에 돈도 그렇게 많은데 고추까지 크면 반칙 아닌가?

수현이 도형의 몸을 사랑스럽게 어루만지던 손을 앞으로 가져와 자신의 성기를 쥔 도형의 손등을 쓰다듬더니 도형의 성기를 잡아 겹쳐 쥐었다. 상상도 못 한 수현의 행동에 도형은 비명을 지를 정신도 없어 히끅히끅 딸꾹질만 했다.

결국 도형의 몸이 풀썩 앞으로 쓰러졌다. 수현의 손가락이 두 개나 들어간 엉덩이를 쑥 내밀고 수현의 목덜미에 이마를 처박은 도형이 버둥거렸다. 그러나 그의 필사적인 꿈틀거림은 잔뜩 발기한 성기를 수현의 손에 비비는 끔찍한 결과만 낳고 말았다.

몸 주인의 인격이나 자긍심, 존엄성 같은 것과 무관하게 도형의 성기는 두 개의 손등과 하나의 손바닥 사이에서 적당한 마찰과 적당한 압력을 더할 나위 없이 만끽하는 듯했다. 쾌감에 발가락이 절로 곱아들었다.

그때 뒤로 손가락이 하나 더 들어왔다. 수현은 세 손가락이 컴퍼스라도 되는 양 이렇게 저렇게 벌려 가면서 주름이 잔뜩 벌어진 입구와 녹진하게 풀려 가는 안쪽의 너비를 가늠했다. 이 감각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아픈 건 아니었다. 생소한 이물감이 거북하기는 했으나 못 참을 정도로 불쾌하지는 않았다. 도형의 미묘한 기분을 감지하기라도 한 양 수현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원래 이런 기관에는 쾌감을 느끼는 세포가 있어요. 그래야 기꺼이 배설하고 싶어지니까. 이상한 게 아닙니다. 자연스러운 신체 반응입니다.”

“시끄…. 아흑!”

수현의 손가락이 아까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내벽 깊은 곳을 스치자 비명이 터져 나왔다. 발가락이 쥐가 날 정도로 오므라들며 종아리부터 허벅지까지 다리 근육이 전부 뻣뻣해졌다. 도형은 자기도 모르게 수현의 성기를 꽉 쥐고 몸을 벌벌 떨었다.

“헉, 하으… 흑!”

사정감 같은 건 느끼지 못했는데. 사정 후의 진한 허무감이나 탈력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사정한 것은 아니다. 설마 모르는 사이에 실금한 건 아니겠지. 뭔가 배출하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으니 아마도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 한다. 다행이다. 물속이라서. 다행이다. 목욕물이 불투명한 흰색이라서.

어느새 네 개로 늘어난 수현의 손가락이 약하고 민감한 안쪽 점막을 계속 더듬으며 도로 수축해 버린 안쪽 근육을 다시 부드럽게 풀어 갔다. 섬세한 손끝이 미묘한 부위를 꾹꾹 누르니 도형의 몸에 힘이 들어가며 내벽이 꽉 조여들었다.

“여기인가요?”

집요한 손가락이 딱 그 지점을 찔렀다. 수현은 도형의 허리가 움찔하며 내벽이 조붓하게 오므라드는 것을 걸 시험해 보더니, 본격적으로 도형의 약점을 공략해 왔다.

잔뜩 민감해진 내벽을 더듬으며 예민한 지점을 자극하는 현란한 손놀림에 도형의 머리에서 불꽃이 튀었다. 정수리를 관통한 벼락이 단숨에 온몸을 관통해 발끝까지 흐르는 것 같았다.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이토록 강력한 자극이라니. 도형은 당장이라도 혀를 빼물고 기절할 것 같아 두려움까지 느꼈다.

“강수현!”

거칠게 수현의 이름을 외치며 저지해 보았지만 무자비한 손가락은 움직임을 멈추는 대신 더 빠르고 강하게 도형을 농락했다.

어느새 나오는 구멍에서 넣는 구멍으로 바뀐 비부가 수현의 손가락으로 가득 찼다. 처음에는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기 버겁게 밀착되어 있던 내벽이 크림처럼 풀렸다. 네 손가락으로 활짝 벌려진 입구가 오물거리며 조여드는 불쾌함과 내벽 전체가 경련하는 듯한 감각에 도형의 아랫배가 묵직해졌다.

“제발 그만해요. 못 견디겠어. 그만!”

도형의 허리와 엉덩이가 수현의 움직임을 따라 힘없이 흔들렸다. 도형은 진심으로 애원했다. 내내 힘을 주고 버티느라 온몸에서 감각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간신히 고개만 들어 수현을 바라보았다.

“부탁…이에요.”

수현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그만 나갈까요?”

수현이 도형의 뒤에서 손을 빼고 자신의 성기를 꽉 움켜쥐고 있던 도형의 손도 떼어 낸 뒤 도형을 물에 담가 둔 채 욕조에서 일어나 두툼한 수건을 가져왔다. 엉거주춤 일어난 것도 아니고 앉은 것도 아닌 도형의 어깨에 수건을 덮어 주고 손을 내밀었다.

“조심하세요. 미끄러지지 않도록.”

내가 애도 아니고,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평소처럼 버럭거리고 싶었으나 도형은 갓 태어난 영양처럼 다리가 후들거려 입을 다물었다. 짜증을 부리지 않기를 잘했지. 수현의 손을 뿌리쳤으면 대리석 바닥에 볼썽사납게 엎어져 혀를 씹었거나 턱이 깨졌거나 아무튼 끔찍한 꼴이 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도형은 아주 조그맣게 고맙다고 말했다. 수현과는 다르게 도형의 양심은 죽지 않았으니까. 아직은.

도형은 커다란 수건에 둘둘 감싸여 떠밀리듯 방으로 들어갔다. 얼굴까지 완전하게 수건에 파묻혀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으나 무릎 뒤에 무언가 단단한 것이 부딪혀 침실로 들어온 것을 알았다. 아마 수현이 침대 앞으로 도형을 데리고 온 모양이었다. 그제야 도형의 전신을 덮었던 수건이 걷혔다.

침대에 앉아 황망하게 방을 둘러보다가 지난번에 수현의 침실에서 신세를 졌을 때 미처 못 보았던 것을 발견했다.

“방에 그랜드 피아노가 원래 있었나?”

“네. 연주해 보고 싶으세요?”

“아니요. 저는 피아노 못 쳐요.”

도형은 일부러 방실방실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는 것을 수현에게 과시하고 싶은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났지만, 그래서 긴장했다는 게 더 두드러지게 티가 났다.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하려는 듯이 도형이 동그란 눈을 찌그러뜨리며 순진한 얼굴로 웃었다.

“아니요. 피아노 말고 저요.”

수현이 도형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직구를 던졌다. 바로 수현의 눈을 피하는 도형을 보면서 수현의 한쪽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웃음이 조소로 보이지 않도록 올라간 입매를 억지로 끌어 내렸다. 입을 벌린 채 말을 잃은 도형의 얼굴이 교태로웠다.

“연주가 별건가요. 형사님께서 원하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마음대로 만져 보세요. 어떤 음악이 듣고 싶으십니까?”

도형이 머뭇거리자 수현이 허리에 둘러매고 있던 타월을 스르륵 벗어 내렸다. 새카만 시선이 수현의 목에서 어깨, 가슴을 타고 내려오다가 배꼽 언저리에 머물렀다.

“어떠세요? 연주해 보고 싶지 않으세요?”

그 이상의 유혹은 필요하지 않았다. 도형이 수현의 손을 잡아끌었다. 자신이 오늘의 ‘친구 혜택’을 주도하려고 결정했는지, 도형은 수현을 침대에 밀어 눕히고 팔을 세워 흠잡을 데 없이 잘생긴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아무 예고도 없이 바로 입술을 겹쳤다.

수현은 밀착한 입술 사이로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기교라고는 하나도 없는 서툰 입맞춤에 이렇게까지 흥분할 수 있다니. 도형은 그저 제 입술을 수현의 것에 꼭 붙인 채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수현이 입술을 열어 도형의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가 놓았다.

“역시 박력이….”

“닥쳐요.”

살짝 갈라진 도형의 목소리에도 흥분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악기는 마음에 드십니까?”

“조금 더 봐야 알겠는데요.”

수현이 순식간에 자세를 바꿔 몽롱하게 웃는 도형을 침대에 내리 눕혔다. 그대로 무게를 실어 몸을 겹칠까 하다가 잠시 멈추고 도형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새카만 눈동자가 수막에 덮였다. 검고 투명한 눈동자. 맑은 물에 검은 먹을 담그면 저런 색이 나올까. 아니면 검은 항아리에 깨끗한 물을 가득 채우면 저렇게 보일까.

수현이 말없이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자 도형이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고개를 팩 돌려 시선을 피했다. 수현은 기뻤다. 도형의 커다란 눈에 비친 것이 오직 강수현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수현은 도형의 귓불을 입술로 가볍게 문 채 손바닥을 넓게 펴서 날씬한 상체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입술로 생생한 열기가 넘어 들어왔다. 입을 떼고 이를 세워 연골을 아프지 않게 잘근잘근 씹자 도형이 콧등을 찌푸리더니 연신 움찔거렸다.

“아프신가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수현을 올려다보는 도형의 눈에 엷은 물기가 스몄다.

“아픈 건 아닌데….”

발갛게 물든 피부에서 달콤한 맛이 느껴질 것 같아 목덜미를 길게 핥아 내리자 도형이 달큼한 숨을 내쉬었다. 수현은 그대로 입술을 미끄러뜨려 가슴으로 향했다. 하얀 피부에 수줍게 돋은 선명한 분홍색이 먹음직스러웠다. 유륜을 할짝거리며 간질이자 도형이 허리를 비틀며 수현을 밀어냈다.

“하지 마요. 기분 이상해.”

“기분 이상한 게 아니라 좋은 거예요.”

“이상해….”

수현은 도형의 호소에 대답하는 대신 볼록 솟은 유두를 덥석 물었다. 뜨거운 혀가 예민한 점막을 스치는 감각에 도형이 소스라치며 몸을 뒤틀었다. 수현이 젖은 소리를 내며 도형의 가슴을 빨면서 혀끝으로 유두를 밀어내듯 굴리자 도형이 더 버티지 못하고 펄쩍 뛰었다.

“강 선생님!”

수현은 도형의 몸부림을 무시하고 소름이 돋아 오돌토돌해진 반대쪽 가슴을 한 움큼 움켜쥐었다. 근육이 제법 탄탄하게 붙은 가슴이 손아귀에 가득 들어찼다. 손바닥 아래에서 느껴지는 탄력 있는 촉감이 기꺼워 두어 번 주물럭거리니 도형이 양손으로 수현의 어깨를 꽉 쥐었다. 한쪽 유두를 잘근잘근 씹으면서 다른 쪽 유두를 엄지와 검지 사이에 넣고 희롱하듯 비비자 신음이 조금 더 커졌다. 유두를 입술 사이에 넣고 둥글리다가 이로 딱딱해진 돌기를 꽤 아프도록 물었다.

도형이 허리를 둥글게 말아 위로 쳐올리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수현이 세게 물었던 유두를 혀끝으로 살살 달래자 꽉 묶였던 자리가 풀린 것처럼 갑자기 피가 도는 기분에 도형이 끙끙거렸다. 가슴이 간지러웠다. 유두가 근질근질해서 미칠 것 같아 당장이라도 잡아 뜯고 싶었지만, 도형은 그저 수현의 어깨를 부여잡고 덜덜 떨기만 했다.

수현은 도형의 유두가 빨갛게 부어오를 정도로 물고 빨고 핥아 대다 하얀 가슴팍을 온통 물어뜯었다. 입으로는 잇자국과 키스마크를 도장처럼 남기며 손으로는 도형의 늘씬한 허리를 더듬고 판판한 배를 문지르다가 갈비뼈를 쓰다듬기도 하면서 도형을 더없이 귀하고 소중하게 어루만졌다.

고개를 뒤로 꺾은 도형의 목이 하얗게 떠올랐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 눈꼬리에 어린 물기,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달큼한 숨. 지금 도형이 느끼는 모든 감각이 전부 자기가 만들어 준 것이라는 사실이 수현에게 정신이 아뜩해질 만큼의 만족을 안겨 주었다.

고양감을 주체하지 못해 자기도 모르게 손아귀에 힘을 주었는가 보다. 도형이 팔을 허우적대며 쾌감보다는 아픔 쪽의 농도가 조금 더 진한 신음을 흘렸다. 수현은 제 손자국이 선명한 가슴 곳곳에 쪼듯이 입을 맞추며 몸을 좀 더 아래쪽으로 내렸다.

도형은 수현 앞에서 알몸을 활짝 드러낸 것이 여전히 거북스러운지 꾸물꾸물 손을 내려 성기를 덮어 가렸다. 이미 알몸으로 한참을 끌어안고 있었으면서도 새삼스럽게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사랑스러워 수현이 근육 결이 선명한 허벅지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다리 벌리세요.”

“왜, 왜요?”

“집중하셔야죠.”

수현은 허벅지에 힘을 꽉 주고 다리를 오므린 채 고개를 도리도리 흔드는 도형의 무릎을 잡아 양쪽으로 넓게 벌리고 그 사이로 들어갔다. 성기를 가린 손을 잡아떼니 도형의 모양 좋은 성기는 이미 반쯤 발기해 꺼덕거리고 있었다.

“아, 진짜. 그렇게 보지 말아요.”

자꾸만 몸을 뒤집어 엎드리려는 도형의 골반을 힘주어 누르고 회음부 바로 아래의 야들야들한 살점을 크게 베어 물었다. 마치 잘 익은 과일의 무른 살을 깨물었을 때처럼 향긋한 단내가 훅 끼쳐 왔다. 뭉클한 살을 자국이 남을 정도로 세게 빨아들였지만 기대했던 과즙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 수현은 혀를 내밀어 도형의 성기를 핥으며 찝찌름한 정욕의 맛을 음미했다.

도형이 상체를 일으켜 손을 휘휘 내저으며 뻐끔거렸지만, 수현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도형의 어깨를 눌러 다시 침대에 눕혔다. 검지를 제 입술에 대고 “쉿.” 하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고는 몸을 쭉 뻗어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 서랍에서 반투명한 용기를 꺼냈다. 수현이 대체 뭘 하려는지 짐작도 되지 않아 도형은 숨만 할딱거리며 어리어리한 눈으로 그가 하는 양을 쳐다보았다.

다시 도형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은 수현은 황망함에 풀이 죽어 말랑해진 성기를 소중하게 그러쥐고 두어 번 아래위로 훑더니 단숨에 입에 넣어 굴렸다. 도리질하며 바닥에 뒤통수를 짓이기는 도형의 성기 기둥을 잡고 선단 전체를 삼켰다.

미끈거리는 점막에 비벼지고, 오돌토돌한 입천장에 긁히고, 두툼한 혀에 휘감긴 도형의 성기는 금세 단단함을 되찾았고, 도형은 수현의 머리를 잡아 뜯으려던 손을 얼굴로 올려 한쪽 팔로 눈을 가리고 다른 쪽 팔을 물어뜯으며 자꾸 튀어나오는 교성을 목 안으로 욱여넣었다.

재채기와 사랑은 숨길 수 없다고 했던가. 숨길 수 없는 것이 하나 더 있다. 흥분과 신음. 도형이 그렇게나 필사적으로 참아 보려고 애썼지만, 끙끙 앓는 소리가 기어코 앙다문 잇새로 새어 나왔다.

흘깃 눈을 들어 가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과 잇자국이 나도록 손목을 깨물어 극치감을 참는 도형을 확인한 수현이 가득 물고 있던 성기를 입에서 빼 성기 끝에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곧 녹아 없어질 별미를 음미하는 양 번들거리는 귀두를 할짝거리다가 갈라진 틈을 혀로 문질렀다.

성기가 입술을 스치는 소리, 입을 들락거릴 때마다 공기가 새는 소리, 혀가 귀두며 기둥을 할짝거리는 젖은 소리가 우레처럼 울렸다. 끊임없이 움찔거리는 도형의 허리를 한 손으로 짓누른 수현은 다른 쪽 손으로 회음부와 고환을 살살 만지며 도형의 잔뜩 부푼 성기를 세상 제일가는 진미인 양 고개를 돌려 가며 핥고 또 핥았다.

수현의 머리가 아래위로 오가며 꿀쩍거리는 소리를 냈다. 습기 찬 점막이 열 오른 점막과 마찰해 만드는 극도로 음란한 소리에 한도까지 팽창한 줄 알았던 도형의 성기가 새삼스럽게 다시 부풀어 올랐다.

얼굴에서 팔을 뗀 도형이 양손으로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콧등을 찡그리고 입을 빠끔거리며 가쁜 숨소리를 냈다. 눈물이라도 흘렸는지 묵직하게 젖은 속눈썹이 덩어리진 채 파들파들 떨렸다. 한계에 달한 몸을 급하게 움직여 수현의 입에서 성기를 빼내려고 했으나, 조금의 움직임도 허락하지 않는 수현의 강한 힘에 도형은 허리를 뒤로 물릴 새도 없이 사정했다.

“아흣….”

수현의 목울대가 움찔댔다. 도형이 꿈틀거리며 몇 번에 걸쳐 뿜어낸 정액을 전부 삼킨 수현은 도형이 몸에서 힘을 빼고 축 늘어지자 그제야 성기에서 입을 뗐다. 상체를 세우면서 가슬가슬한 목소리로 도형을 불렀다.

“다른 생각 하시면 안 되는데.”

도형이 억울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자 수현은 싱긋 웃으며 보란 듯이 엄지로 제 입가를 훔치더니 붉은 혀를 내밀어 손끝에 묻은 정액 방울을 핥았다.

“정말 미치셨어요? 그걸 왜….”

“정액에 최음 성분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비과학적인 소리라고만 생각했는데, 당신 것에는 정말로 최음 성분이 있는 것 같아요.”

“알 게 뭐야. 아, 진짜….”

도형이 수치심에 치를 떨었다. 막상 남의 정액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빨아 마신 수현은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도형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수현을 노려보던 도형이 벌떡 몸을 일으켜 수현을 뒤로 밀어 넘어뜨리더니 그 위에 올라탔다.

“각오해.”

수현의 성기는 이미 한참 전부터 꼿꼿하게 서 있었다. 수현은 도형이 미는 대로 털썩 드러누워 분한 표정으로 씩씩거리는 도형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지기 싫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호기롭게 수현의 위에 올라타기는 했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는 도형의 얼굴 위로 당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수현의 성기를 향해 도형의 손이 다가오다가 멈칫멈칫 주저하는 것이 보였다. 잘게 흔들리는 손끝, 자신의 감각도 그대로 믿지 못해 혼란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커다란 눈.

수현은 정말이지 즐거웠다. 이렇게까지 사람을 홀려도 되는 걸까. 도형과 함께 있으면 매분, 매초 새롭게 반한다. 온 우주를 뒤진다 한들 김도형처럼 흥미로운 존재를 또 만날 수 있을까.

서로에게 호감이 있는 성인 둘이서 벌거벗은 채 상대의 몸을 물고 빠는데 성적 쾌감을 느끼지 못하면 그야말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늘 지나칠 정도로 솔직한 도형이었으니 아마도 그는 정말 몰라서 저러는 것일 거다. 자신의 욕구와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수현의 피가 굉음을 내며 전신을 핑핑 돌았다. 해면체로 피가 훅 몰려간 모양인지 성기가 조금 더 팽창했다. 수현이 우왕좌왕하는 도형의 손을 끌어다가 제 성기 위에 올렸다. 양손으로 잡아도 길이가 남을 만큼 위용이 대단한 성기 위에 어설프게 손을 올린 도형이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각오했다는 듯 몸을 굽혀 수현의 성기 가까이 얼굴을 가져갔다. 수현은 도형의 어깨를 잡아 더 이상의 움직임을 저지하고 반짝 고개를 든 도형에게 머리를 흔들었다.

“손으로 부탁합니다.”

수현의 성기가 도형의 작은 입에 들어갈 리도 없고, 아마 저 입술에 닿는 순간 사정해 버리고 말 것이다. 첫날밤부터 그런 추태를 보여서야 면목이 없지. 처음은 무조건 달콤하고 부드럽게. 진짜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으니까.

도형은 고집을 부리지 않고 몸을 일으켜 앉아 양손으로 수현의 성기를 잡고 성실하게 아래위로 쓰다듬었다. 키스만큼이나 서툰 손놀림이었다. 그러나 수백 비빈을 거느린 황제도 하렘의 술탄도 지금의 수현만큼 황홀한 기분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굳은살로 살짝 거칠거칠한 손바닥에 표피가 쓸리는 감촉이 느껴지자 수현은 전신의 세포가 일렬로 늘어서 한 점을 향해 달려가는 감각이 들었다.

몸 안에서 뛰는 심장을 당신에게 쥐여 줄 수는 없지만, 피로 가득한 성기는 지금 당신 손안에서 이렇게 약동하고 있다.

도형이 몇 번 손을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수현은 입술을 앙다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흘끔흘끔 수현의 기색을 살피던 도형이 손을 좀 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늘 단정하던 수현의 입매가 느슨하게 풀어지고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억누른 한숨이 새어 나왔다. 머지않아 수현의 성기가 꿀렁거리며 흰 액체를 토했다.

굵은 핏줄이 불거진 굵고 길고 하여튼 무시무시한 생김새가 어디를 보아도 어여쁘기만 한 수현과 너무 딴판이라 성질머리도 다를 줄 알았는데, 역시 꼴은 그래도 강수현의 일부이기는 했는지 저놈의 성기는 정액 발사마저 무조건 직진이었다.

살짝 숙이고 있던 얼굴에 정통으로 수현의 정액을 뒤집어쓴 도형은 어처구니가 없어 비릿한 점액질을 닦을 생각도 못 하고 허망하게 앉아 있었다. 언제 일어났는지 수현이 도형의 턱을 가볍게 감싸 쥐고 이불을 끌어당겨 조심조심 얼굴을 닦아 주었다. 속눈썹에까지 끈적한 액체가 엉겨 붙어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한마디 할까 하다가 자기 정액을 마신 사람 앞에서 얼굴에 정액 좀 튀었다고 화내는 것도 강호의 도리가 아닌 것 같아 도형은 잠자코 수현의 손길에 얼굴을 맡겼다.

쪽쪽. 수현은 방금 자기 정액으로 범벅이 되었던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눈꺼풀을 핥고, 콧등을 입술로 훑고, 이마며 뺨에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다정하게 키스했다. 뭉클한 입술과 두툼한 혀가 닿은 곳마다 화르르 불타오르는 기분에 도형이 어깨를 살짝 떨었더니 추워서 그런다고 오해했는지 수현이 상냥하게 도형을 끌어안고 다시 침대에 눕혔다.

도형을 품에 안고 수현은 자꾸 거칠어지는 숨을 차분히 골랐다. 아무리 애를 써도 진정되지 않았다. 도형은 알고 있을까. 움찔거리는 허리가 얼마나 교태로운지, 가늘게 떨리는 속눈썹이 얼마나 신비로운지, 억누른 신음이 수현을 얼마나 몽롱하게 만드는지. 말 한마디 없어도 육체의 대화는 어째서 이리도 감미로운가.

수현은 다시 몸을 움직여 도형의 무릎뼈를 살살 쓰다듬었다. 무릎에서 올라온 손이 허벅지를 더듬다가 오목한 샅까지 올라와 회음부 바로 아래를 천천히 문지르자 다분히 의도를 띤 손놀림을 눈치챈 도형이 움찔움찔 몸을 비틀었다. 장난치듯이 회음부를 매만지다가 엄지로 연한 살을 꾹 누르니 도형이 이를 악물고 끙끙거리며 날갯짓하듯 팔다리를 파드닥거렸다.

회음부를 세게 누르자 새침하게 다물려 있던 비문이 슬며시 벌어지면서 연홍색 속살이 은근하게 드러났다. 지금 당장이라도 성난 살덩어리를 뿌리까지 박아 넣고 사정없이 허리를 흔들어 도형의 몸 가장 깊은 곳에 욕망을 뿌리고 싶었지만, 수현은 도형의 허벅지에 뺨을 대고 숨을 고르며 폭력적인 충동을 간신히 내리눌렀다. 회음부에서 손을 떼자 빠끔 벌어졌던 구멍이 오물오물 오므라들었다. 그 모양이 꼭 해 질 녘에 꽃잎을 말고 몸을 감추는 분홍색 꽃처럼 보여 수현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곧 화려하게 만개시켜 드리지요.

수현은 미리 꺼내 둔 실리콘 용기에서 투명한 젤을 듬뿍 짜 제 손바닥에 덜었다. 도형이 꾸물꾸물 상체를 반쯤 일으켜 뾰로통한 얼굴로 수현이 하는 양을 쳐다보길래 수현은 눈을 크게 휘어 웃었다.

“의료용 초음파 젤입니다. 무색무취이고 인체에 해가 없으며 체온에 반응해 금방 발열됩니다. 차갑지 않아요.”

“그런 게 왜 집에 있어요?”

“제가 누구입니까.”

“아, 바이오 회사….”

“늘 준비된 남자 강수현입니다.”

도형이 픽 웃으며 다시 드러누웠다. 은밀한 곳을 활짝 전개한 자세에 익숙해졌는지 아까처럼 성기나 항문을 가리지도 않고 다리를 벌린 채 무릎을 세워 발끝으로 수현을 톡톡 건드렸다.

“나 다른 사람이 쓰던 건 별로 안 좋아하는데.”

“네?”

“맨날 헌것 물려받기만 해서요. 중고 싫어해요.”

“중고 아닙니다.”

수현이 젤로 충분히 적신 손가락으로 주름 하나하나를 더듬듯 어루만졌다. 도형은 꿈지럭대며 엉덩이를 작게 움직였지만, 수현의 손을 피하지는 않았다.

“됐어요. 못 들은 걸로 해요. 내가 잠깐 미쳤었나 봐요.”

“새거예요.”

“네. 아까 밀봉 뜯는 소리 들었어요.”

수현은 도형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천천히 몸을 내려 도형과 나란히 누웠다. 자신과 마주 보도록 도형의 몸을 돌려 눕히고 한 손으로 가슴을 애무하며 반대편 손을 다리 사이에 묻었다. 이미 풀릴 만큼 풀린 밀부가 젖은 손가락 두 개를 쉽게 물었다. 손가락을 감싼 내벽의 탄력을 즐기면서 손가락을 벌려 가위질하듯 움직이자 도형의 허리가 펄쩍 뛰었다.

“저요. 제가 새거라고요.”

수현은 살아 있는 연체동물처럼 꿈틀거리는 내벽을 천천히 더듬었다. 눈 바로 앞에서 도형이 산소가 모자란 붕어처럼 입을 빠끔거리기에 그대로 입술을 맞대고 공기를 전해 주었다. 가슴을 더듬던 손을 도형의 몸 뒤로 둘러 세게 껴안고, 도형이 헐떡이는 소리에 맞춰 한껏 예민해진 안쪽을 다정하게 짓뭉갰다.

젤이 녹아 흘러 도형의 뒤는 홍수라도 난 양 질척거렸다.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나는 찔꺽찔꺽 음란한 마찰음이 수현의 손짓에 박차를 가했다.

침대 시트를 쥐어뜯던 도형의 손이 어느새 수현의 목을 휘감았다. 끙끙거리는 신음에 희락이 묻어 나온 지는 이미 오래. 수현은 도형이 반응했던 지점을 향해 조심스러운 탐구를 이어 나갔다. 여기쯤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 도형이 허리를 튕기며 절박하게 외쳤다.

“그만!”

발끝에서 정수리로 치받아 올라오는 사정감에 도형이 헐떡거렸다. 사지에서 힘이 전부 빠져나가는 듯한 무력감과 남의 손에 연달아 사정하는 수치심, 게다가 심지어 뒤로 느껴 버렸다는 당혹감. 그런데도 전신을 휘감은 쾌감에 혀를 콱 깨물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도형이 수현의 어깨를 밀며 버텼지만, 수현은 이번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도형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고 마지막 박차를 가했다.

“하윽!”

도형이 높고 짧은 교성을 내지르며 두 번째로 사정했다. 조붓한 내벽이 수현의 손가락을 강하게 조였다.

“그만하라고 했잖아요….”

도형이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사정의 여운에 부르르 떨었다. 수현은 손가락을 꽉꽉 씹어 대는 내벽을 달래듯이 문지르며 천천히 손을 빼 양팔로 도형을 껴안았다. 얼굴 곳곳을 쪼듯이 입 맞추며 허리께를 간질이자 도형이 흐응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몸을 축 늘어뜨렸다.

“거짓말이죠.”

“뭐가요?”

“새거 어쩌고.”

“예전에도 말씀드렸잖아요. 처음이라고.”

“거짓말.”

“진짜입니다.”

“근데….”

“네.”

“왜….”

수현이 어깻죽지를 잘근잘근 깨물자 도형이 갸릉갸릉 소리를 냈다. 도형의 뺨은 당혹이나 수치가 아닌 흥분으로 물들었고, 덜 마른 머리카락이 땀으로 젖은 이마에 어지러이 달라붙어 있었다. 뺨보다 더 빨간 입술이 살짝 벌어져 뜨거운 숨을 색색 내쉬었다. 수현은 발긋하게 물든 도형의 눈가를 상냥하게 핥아 주었다.

“…왜 이렇게 능숙해.”

“교과서 중심으로 하루에 8시간. 성실하게 공부했습니다.”

“한 마디를 안 져요.”

“저 새거니까, 이제 예뻐해 주실 건가요?”

수현이 도형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애무하며 입을 닫아 버린 밀부에 다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허리가 불쑥 튀어 오르며 높게 올라붙은 작은 엉덩이가 꽉 조여졌다. 제 몸에 압박하듯 문대는 수현의 선명한 부피감과 열기에 도형이 앞으로 다가올 것을 예감했는지 몸을 잘게 떨었다.

“하는 거 봐서요.“

도형이 냅다 엎드려 버리자 수현이 쿡쿡 웃었다. 계속 키득거리며 도드라진 척추뼈를 따라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침대 시트에 얼굴을 처박은 도형이 등을 눈에 띄게 오르락내리락하며 숨을 시근덕거렸다. 단지 하얀 피부를 드러내고 엎드려 있을 뿐인데도 수현의 아랫배가 뻐근해질 만큼 야했다.

간질간질한 터치가 쑥 파인 허리에 닿자 도형이 엉덩이 근육에 꽉 힘을 주고 버텼다. 수현의 웃음소리가 끊기고 대신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도형이 상체를 뒤틀어 뒤를 돌아보았다.

“뭐 해요?”

입으로 콘돔 포장지를 찢은 수현이 도형의 엉덩이를 움켜쥔 채 한 손으로 성기에 콘돔을 씌웠다.

“아니, 그건 또 언제….”

“언제나 당신을 위해 준비된 남자니까요.”

“그거 그냥… 안 해도 되는데….”

“네?”

수현이 도형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무 본격적으로 그러면… 진짜 섹스 같잖아요.”

그러면 가짜 섹스도 있다는 말인가. 지금 두 사람이 하는 건 뭐란 말인가. 수현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허탈하게 웃었다. 사실은 울고 싶었는데 울 수가 없어서 그냥 웃었다.

“그리고 그거 강 선생님한테 작아 보이는데…. 안 아파요?”

확실히 편의점에서 대충 손에 잡히는 대로 산 콘돔은 수현의 사이즈에 맞지 않았다. 돌돌 말린 끄트머리를 끝까지 펴도 손가락 두 마디 정도가 모자랐으니. 기둥 중간을 꽉 죈 것처럼 어정쩡하게 걸려 있는 콘돔 때문에 굵은 핏줄이 더 도드라져서 도형은 저러다가 성기나 콘돔 둘 중의 하나는 터지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마저 들었다.

“저를 미치게 하는 재주는 정말… 당신이 세계 제일입니다.”

“뭘 또 미쳐요.”

미치겠네. 수현은 당장 폭발할 것 같은 성기에게 참을성을 주문하며 양손으로 도형의 허리를 잡아 그의 몸을 거칠게 돌려 눕혔다.

“왜 그래요, 또….”

말꼬리가 길게 늘어지며 우는 소리가 섞였지만, 저 애원은 단지 부끄러움뿐인 것이 분명하다. 수현은 못 들은 척 콘돔을 벗겨 휙 던졌다.

“강수현 선생님….”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도형이 수현을 불렀다. 수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밤이 끝나기 전까지 도형은 수십, 수백 번 자신의 이름을 부를 것이고 자신은 그때마다 꼬박꼬박 도형의 부름에 대답해 줄 생각이었으니 한 번 정도는 무시해도 상관없을 터였다. 정신이 나갈 때까지 안을 예정이었다. 이게 진짜 섹스가 아니라면 세상의 다른 모든 섹스는 전부 가짜라는 걸 확실하게 알 수 있도록.

수현은 도형의 발목을 잡아 무릎을 굽혀 제 겨드랑이 아래에 끼우고 흉흉하게 발기한 성기를 잡아 입구에 대고 꾹 눌렀다. 도형이 히끅거리며 딸꾹질을 했다.

슬슬 주름을 문지르던 성기가 천천히 몸을 뚫고 들어오는 선연한 느낌에 도형이 급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손가락이 네 개나 들락날락했는데, 손가락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이물감이었다. 배 속의 모든 장기가 그대로 목구멍까지 밀려 올라오는 것 같았다.

눈으로 볼 때도 손으로 잡았을 때도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건 알았지만, 그 굵고 긴 살덩어리가 실제로 몸을 가르고 들어오는 공포는 상상을 초월했다. 이대로 아래가 찢어져서 영영 못쓰게 되는 것은 아닐까. 벌어진 뒤가 영영 다물려지지 않는 것은 아닐까. 고작 귀두가 입구 근처에서 깔짝대는 것뿐인데 벌써 배가 터질 것 같아 도형은 마구 고개를 저으며 제 아랫배를 꾹 눌렀다.

도형의 혼란과 두려움을 고스란히 내려다보며 수현은 가학적인 욕망이 목구멍 바로 아래까지 찰랑찰랑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겨드랑이 아래에 끼웠던 도형의 무릎을 더 접어 눌렀다. 엉덩이가 위로 뜨자 두 사람이 이어진 곳이 훤하게 보였다.

수현은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듯이 성기를 도형의 안으로 쑤셔 박았다. 한계까지 벌어진 입구는 주름 하나 없었다. 그는 좁은 내벽에 제 성기 모양의 길을 내며 단숨에 뿌리 끝까지 집어넣었다.

“으아, 흑. 이, 이상해. 그만, 여기까지. 응? 그만.”

“봐요. 전부 들어갔잖아요.”

수현은 헐떡거리며 괴로움을 호소하는 도형의 손을 끌어다 접합부를 만지게 했다. 첫 섹스의 충격에 더해 고통인지 쾌감인지 알 수 없는 미지의 감각이 몸을 관통하는 바람에 정신이 거의 나간 도형은 자기가 지금 어디를 만지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제발…. 나 토할 거 같아.”

“숨을 쉬어요. 천천히. 그래요. 그렇게.”

수현의 성기가 뱃가죽을 찢고 튀어나올 것 같았다. 벌어지면 안 되는 곳까지 벌리고 들어온 거대한 해면체가 닿으면 안 되는 곳까지 찌르고 들어왔다. 도형은 헛구역질하며 끊임없이 허덕거렸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아니야. 그만할래.”

“안 돼요.”

도형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수현은 본격적으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까지는 장난이었다는 듯, 그는 도형의 사정을 일절 봐주지 않고 허리를 쳐올렸다. 수현의 성기가 가장 깊은 곳을 짓찧고 헤집을 때마다, 내벽을 긁으며 물러날 때마다 도형은 몸을 뒤틀며 앓는 소리를 냈다. 제 벌어진 다리를 누른 수현의 손등을 할퀴며 거세게 도리질을 치다 신음과 비명을 번갈아 내질렀다.

퍽, 퍽. 고환이 샅에 부딪히고 음모가 회음부에 문질러질 정도로 수현은 도형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도형의 성기도 단단하게 일어선 지 오래였다. 정액으로 미끈미끈해진 모양 좋은 성기가 도형의 늘씬한 몸과 함께 흔들렸다.

“아, 아아, 싫, 으으….”

“여기?”

“아니, 그만, 흐읏! 아, 거기! 안 돼!”

손가락으로 문지른 것만으로도 절정에 이르렀을 정도로 민감하게 느끼는 지점에 성기가 처박히자 도형의 머리가 새하얗게 비워졌다. 정말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수현은 자신의 몸을 도형의 안에 심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콱콱 들이박았다.

도형의 앓는 소리가 점차 바뀌기 시작했다. 당혹과 수치가 완전히 사라지고 오롯이 쾌락과 희열로 물들었다. 열에 들뜬 눈으로 점도가 완전히 달라져 끈끈하게까지 들리는 신음을 흘리는 도형을 바라보며 수현은 거의 입구까지 성기를 물렸다가 제일 깊은 곳으로 세게 꽂기를 반복했다.

아랫배를 누르며 “튀어나와, 안 돼.” 하며 비명 같은 헛소리를 외친 도형이 수현을 잡으려는 것인지 팔을 허우적거렸다. 수현이 꽉 누르고 있던 도형의 다리를 놓아주자 도형이 다리로 수현의 허리를 휘감아 제 쪽으로 당겼다. 수현이 몸을 숙여 도형에게 상체를 바짝 붙이니 도형이 수현의 목을 끌어안고 정신없이 매달렸다.

“학… 조금만, 거기, 읏….”

쌕쌕거리며 달뜬 숨을 내뱉는 도형의 입술을 수현이 자기 입술로 덮어 막아 버렸다. 뜨거운 혀로 입안을 여기저기 문지르자 새카만 동공이 흐릿하게 풀리며 도형의 다리가 수현의 허리에 뱀처럼 달라붙어 꽉 죄었다.

도형이 수현의 성기를 물어 삼키고 있었다. 뜨거운 벽이 성기 전체를 씹듯이 조여 오는 극상의 쾌감에 수현은 정신이 흐리멍덩해졌다. 도형이 수현의 몸으로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손으로 한참을 풀고 또 성기로 그렇게나 휘저었는데도 도형의 안은 지나치게 좁고 뜨거웠다. 내벽이 성기에 척척 달라붙는 짜릿함에 수현은 머리와 성기 둘 중 하나는 곧 폭발하고 말겠다고 생각했다.

도형을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녹여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놓치지 않고 느긋하게 즐길 예정이었는데. 이럴 줄은 몰랐지. 녹아 버린 건 수현이었다.

가늘게 떨리던 도형의 목이 빳빳하게 굳으며 온몸으로 경직이 퍼져 나갔다. 수현을 휘감은 양팔과 다리에 바짝 힘이 들어감과 동시에 도형이 버거운 신음을 헐떡이며 몸 안쪽을 쥐어짰다.

“아, 아….”

빈틈없이 맞붙어 있던 두 사람의 배가 도형이 토해 낸 정액으로 축축해졌다. 절정의 여운으로 여전히 움찔거리는 내벽의 수축과 이완에 자극되어 수현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도형의 안에 길고 진하게 사정했다.

수현은 팔과 다리에서 힘을 빼고 느른하게 흐트러진 도형을 내려다보았다. 새빨갛게 달아올랐던 뺨이 원래의 흰 빛을 찾아가려는 듯 연한 분홍색이 번져 있었다. 여전히 호흡이 벅찬지 색색거리며 내쉬는 불규칙한 숨이 수현의 가슴에 와 부딪혔다. 심장이 간지러웠다.

여전히 도형과 이어진 곳으로 울컥울컥 열기가 쏟아져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수현의 착각만이 아니었는지 도형이 눈을 반짝 떴다.

“왜 또 커져요?”

“그러게요.”

수현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장난꾸러기처럼 웃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꼭꼭 씹어 먹고 싶은 마음을 힘들게 억누르고 도형의 뺨에 가만히 입을 맞췄다.

“연주는 어떠셨습니까?”

도형이 팔을 들어 수현의 입술을 매만졌다. 그의 손이 닿은 모든 곳이 불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수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도형의 엉덩이를 감싸 쥐고 삽입된 채 도로 발기한 성기를 끝까지 밀어 넣었다.

성기가 내벽을 훑으며 진입하는 감각이 싫지 않은 듯 도형이 흐응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뒤로 꺾었다. 수현이 허리를 움직이자 잔뜩 예민해진 속살이 처음부터 성기를 꽉꽉 조여 왔다. 조금 전에 토해 낸 정액 때문에 성기가 움직일 때마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음란하게 울렸다.

“잠깐만.”

“네?”

도형이 허리를 비틀고 다리에 힘을 주어 몸을 위로 밀더니 끙끙거리며 수현의 성기를 억지로 빼냈다. 섹스가 별로였던 걸까. 내 어디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역시 그만하겠다는 걸까. 뭘까. 벌떡 일어나 무릎으로 선 도형이 황망함에 굳어 버린 수현을 향해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심술궂게 웃었다. 턱을 치켜든 도형이 수현의 가슴을 세게 움켜쥐고 두어 번 주무르더니 그대로 그의 몸을 뒤로 밀었다.

“연주해 보라더니 혼자 달리고 있어.”

도형이 미는 대로 침대에 드러누운 수현의 위로 도형이 올라탔다.

“받고, 더블로. 내가 빈말하는 남자는 아니라서요.”

한 손으로 수현의 가슴을 짚은 도형이 다른 손으로 수현의 성기를 잡아 입구에 맞추고 천천히 제 안으로 넣었다. 온통 찌푸린 얼굴마저도 사랑스러웠다. 대담하게 수현을 깔아 눕히고도 쉬이 몸을 내리지 못하는 도형의 조심스러운 움직임을 보다 못한 수현이 기어코 도형의 골반을 잡아 강하게 내리찍듯이 자기 몸 위에 주저앉혔다.

“하윽.”

순식간에 가장 깊은 곳을 찔린 도형이 몸을 비틀며 신음했다. 수현이 그의 골반을 꽉 붙잡은 채 허리를 쳐올리자 도형이 바들바들 떨며 몸 안쪽을 꽉 조였다.

턱이 아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어금니를 세게 악문 도형이 천천히 허리를 세웠다. 꼬챙이에 꿰인 꼴을 하고 눈꼬리에 눈물방울을 매달고도 전혀 기가 죽지 않은 도형이 질 수 없다는 듯이 수현을 내려다보며 씩 웃었다.

“강수현 씨. 거, 귀여운 소리 좀 내 봐요. 이번에는 내가 연주할 거니까.”

***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조심스러운 손길에 도형이 부스스 눈을 떴다. 눈이 퉁퉁 부었는지 눈꺼풀을 전부 끌어 올렸는데도 시야가 반밖에 열리지 않았다.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이런. 깨워 버렸네요. 더 주무세요. 저는 잠깐 일 좀 보고 오겠습니다.”

“출근?”

도형이 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를 간신히 짜냈다. 수현이 싱그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난밤에 그토록 열정적으로 도형의 몸을 물고 빨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 맞나. 이글거리는 정욕이 싹 지워진 눈빛은 언제나와 같은 담담한 다정함으로 도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푹 쉬세요.”

수현이 상체를 가볍게 숙이기에 도형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키스를 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현은 흐트러진 이불을 끌어당겨 도형의 목까지 꼼꼼하게 덮어 주고 늘어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을 뿐이었다. 어젯밤의 일은 도형 혼자 꾼 꿈이기라도 했던 걸까. 온몸이 작신작신 두들겨 맞은 것 같은 걸 보면 분명 꿈은 아닌데. 또, 또 강수현 혼자만 산뜻하지. 치사하게. 미국 사람이란….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수현은 꿈도 안 꾸고 푹 자고 일어난 사람처럼 개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도형은 괜히 억울한 마음이 들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이불 위를 가볍게 토닥이는 손길에도 농염하게 자신을 애무하던 흔적 따위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강수현은 깔끔하게 다 털어 냈는데 자기만 여전히 질척거리는 것 같아 분하고 창피했다.

수현이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내며 방문을 닫고 나갔다.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이불을 올려 주고 어깨를 토닥이던 그 짧은 순간, 수현이 얼마나 많은 내면의 강수현을 발로 차고 때리고 밀치고 목을 졸랐는지 도형은 모른다.

그대로 입 맞추고 싶고, 회사 따위 어떻게 되든 말든 옷을 전부 벗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따뜻한 몸을 껴안고 싶고, 으스러지도록 품에 끌어안아 사랑한다고 천 번 만 번 속삭이고 싶었다. 간밤의 격정적인 정사로 퉁퉁 부어 있을 비부를 살살 매만지다가 심술궂게 쿡쿡 찌르고 싶고, 귀여운 소리를 내며 허리를 뒤트는 도형을 꼼짝 못 하게 내리누르고 터질 것 같은 자신을 가장 깊은 곳까지 단숨에 쑤셔 박아 짐승처럼 헉헉거리며 허리를 쳐올리고 싶은 더러운 욕망을 억누르느라 수현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도형은 아마 평생 모를 것이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저택에 혼자 누워 뒹굴뒹굴하며 도형은 지난밤을 천천히 되새겼다. 몸에 닿은 시트도 이불도 보송보송 보드라웠지만, 세탁실에 옮겨 놓은 천 더미를 온갖 액체로 축축하게 적셨던 기억은 날것처럼 생생했다.

처음 두 번은 전투라도 하듯이 격렬하게 살을 섞었고, 세 번째부터는 누가 먼저 상대방을 녹여 먹을지 대결하는 것처럼 느긋하고 진득하게 서로를 탐했다. 친구건 혜택이건 다 때려치우고, 그건 그냥 섹스였다. 진짜 섹스. 둘 다 지쳐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때까지 몇 번이나 몸을 겹쳤다.

질척한 시트가 불쾌할 법도 했으나 수현과 도형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위에 누워 젖은 피부를 바짝 붙이고 자기가 깨문 자리를 장난스럽게 입질하거나 할퀸 자리를 날름 핥거나 하면서 속닥속닥 별것도 아닌 이야기를 나누며 키득거렸다.

찝찝한 몸으로 잠이 드는 건 싫어서 도형이 먼저 씻으러 가겠다고 말했다. 수현은 아직 오늘이 끝나지 않았으니 자기가 아닌 다른 생각을 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며 꼭 같이 씻어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고, 도형은 혀를 쯧쯧 차며 마음대로 하라고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침대 밖으로 발을 딛자마자 미지근한 무언가가 허벅지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수현이 허겁지겁 따라 일어나 간신히 욕을 삼키고 얼굴을 찡그린 도형을 번쩍 안아 들었다.

「아, 진짜… 적당히 좀 하지….」

대체 얼마나 해 댄 건지. 물론 수현 혼자 한 건 아니지만, 엉덩이의 대참사는 수현이 만든 일이었으니 원망 정도는 들어도 쌌다. 엉덩이를 아래로 한 채 들려 있으니 달팽이가 점액을 흘리며 굼실굼실 다리를 기어가는 느낌은 나지 않았지만, 대신에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줄줄 흘리나 뚝뚝 떨어뜨리나 끔찍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으, 바닥 사정은 보지 않아도 훤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아니, 이게 아니라 발걸음 하나에 한 방울과 발걸음 하나에 한 덩어리와….

아, 지구에서 사라지고 싶다….

침대에서 욕실로 가는 길을 따라 허연 자국이 남았을 것이다. 입술을 꾹 씹은 도형을 샤워 부스에 조심스럽게 내려 준 수현은 부리나케 욕조 물부터 받기 시작했다. 차가운 타일에 털썩 주저앉으면 열 오른 엉덩이가 좀 식을까 싶었는데, 망할 놈의 부잣집은 화장실 타일 바닥까지 따끈따끈했다.

대리석 타일 벽을 짚고 젠장, 망할, 제기랄, 빌어먹을 하며 중얼중얼 욕지거리를 내뱉는 도형의 머리 위로 따뜻한 물이 쏟아졌다. 다리가 계속 후들후들해서 수현이 그의 뒤에 바짝 붙어 허리를 감싸 안았는데도 그냥 가만히 있었다.

「도와드릴게요.」

「뭐를요?」

「이거요.」

긴 손가락이 몸을 쑥 가르고 들어와 안을 벌리니 굳어 멍울진 덩어리와 더 안쪽에 고여 있던 액체가 후드득 떨어졌다.

 

「내가 사람 아니고 말이랑 잤나.」

「네?」

「뭐가 끝도 없이 나와….」

「말은 말이죠. 밤새 절 타셨으니.」

「죽고 싶으신가?」

「아니요.」

귀에 가까이 대고 속살거리며 안을 헤집으니 다 꺼진 줄 알았던 불씨가 화르르 피어올랐다. 도형의 불티가 수현에게 튀었는지 결국 다시 거세게 불이 붙어 버린 두 사람은 샤워 부스에 선 채로 한 번 더 몸을 섞었고, 바닥에 주저앉으려는 도형을 아기 달래듯 욕조로 데리고 간 수현이 제 몸 위에 도형을 앉혀 가슴에 기대게 했다.

「쿠션 질이 좋네. 편하다.」

「맞춤형입니다.」

제 가슴에 뺨이 뭉개진 채 웅얼거리는 도형의 등을 토닥토닥하며 수현이 형사님 전용 쿠션이니 소중하게 관리하겠다고 그윽한 목소리로 약속했다.

 

「나, 누가 안아서 재워 준 적이 없어요. 보육원은 늘 손이 모자라니까. 그게 너무 서글펐거든. 그래서 도진이는 꼭 안아서 재워 주려고 했는데 선생님이 몰래 불러서 말하더라고. 너무 도진이만 끼고돌지 말라고. 다른 애들이 속상해한다고. 그래서 남들 보는 앞에서는 도진이 안아 주지도 못했어요.」

「누가 안아서 재워 주는 기분 어떠세요?」

「좋아요. 친구 혜택이 좋긴 좋네. 되게 좋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탄탄하고.」

수현이 나지막하게 웃자 심장이 둥둥거리는 소리가 맞댄 피부를 타고 전해졌다.

「젖이라도 나왔으면 더 좋았을까요.」

「하여간 변태라니까.」

「빨아 보셔도 돼요.」

「왜 이러셔, 진짜!」

「제가 빨아 드렸을 때 하도 좋아하셔서 궁금했거든요.」

「아이, 진짜…. 간만에 평화로웠는데.」

수현의 웃음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입을 씰룩거리던 도형이 얼굴을 떼더니 혀를 내밀어 수현의 유두를 할짝 핥았다. 꼬리가 치켜 올라간 큰 눈을 위로 뜨고 도발적인 눈빛으로 물었다.

「어때요. 좋았어요?」

그리하여 욕조에서 한 번 더.

정신을 차리고 나니 이미 동틀 녘이었다. 수현이 새 침구를 가져오는 사이 도형은 침대 시트를 벗기고 제가 바닥에 흘린 수현의 흔적을 닦았다.

밤새도록 맨살을 비비다가 꼭 달라붙어 씻은 뒤에 깨끗한 시트가 깔린 거대한 침대에 알몸으로 들어가 한 이불을 덮고 베개를 나란히 하고 누웠다가, 결국 서로를 끌어안고 잠든 두 사람을 세간에서 무엇이라 부르던가. 친구? 이런 사이도 친구라고 하나?

잠깐 눈을 감았다 떴는데 2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대로 누워 있다가는 침대에 눌어붙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아 도형은 부들거리는 몸을 겨우 움직여 침대를 빠져나왔다. 베드 벤치에는 언젠가 도형이 두고 간 옷이 단정하게 개켜 올려져 있었다. 대충 팬티만 껴입고 욕실로 가서 칫솔을 입에 문 채 새 둥지처럼 뻗친 머리에 물을 발랐다.

비번이라 다행이지. 갓 태어난 고라니처럼 벌벌 떠는 몸으로 출근하느니 차라리 무단결근을 하는 쪽이 낫다. 누가 보아도 대단한 밤을 보낸 꼴인데,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가슴은 시선이 닿는 구석마다 울혈이 울긋불긋한 것이 단풍이 만개한 가을 산 같았다. 강수현 선생께서 야무지게도 씹어 놓았다. 몸을 돌려 가며 꼼꼼하게 살폈는데 엉망인 곳은 가슴과 어깨, 허벅지가 전부였다. 다행히 옷으로 가려지는 곳만 입질해 놔서 남에게 들킬까 봐 걱정할 일은 없었다. 아마 수현의 허벅지와 팔뚝, 등은 상태가 훨씬 더 안 좋을 것이다. 도형이 엄청나게 박박 긁어 놓았으니.

아이고 하고 한심한 소리를 내며 옷을 입었다. 혹시나 해서 식당 쪽으로 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아침상이 차려져 있었다. 예전에 도형이 예쁘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했는지, 수현은 도형을 초대한 날이면 꼭 풍염한 작약을 곳곳에 꽂아 두었다. 식탁 위에는 어김없이 연분홍 작약 다발이 화사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고, 크리스털 화병 앞에 살구색 카드가 놓여 있었다.

<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목이 깔깔하실 듯하여 이탈리아식 치킨 수프를 준비했습니다. 전자레인지에 들어 있으니 2분 30초 돌려서 드세요. 토스터에 버터 롤 넣어 두었으니 따뜻하게 데워 드시고요. 도자기 뚜껑 여시면 버터와 딸기잼 있습니다. 커피는 보라색 보온병에 내려 두었어요.

 

금방 오겠습니다. 편히 쉬고 계세요.

 

당신의 강수현 >

미국 사람 주제에 글씨도 조선 명필처럼 잘 썼다. 이 남자 대체 못하는 게 뭔가. 누구랑 결혼할지 몰라도 강수현 신부는 좋겠다. 신랑 잘생겼어, 돈도 많아, 요리도 잘해, 다정하고 섬세해, 밤일도… 끝내줘. 새삼스럽게 일등 신랑감이었다.

강수현 결혼하면 결혼식 사회는 내가 봐 줘야 하려나.

도형은 토스터에서 맨 빵을 꺼내 우물우물 씹다가 전자레인지가 띵 울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입맛이 뚝 떨어져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지만 차려 준 사람 정성을 생각해서 한술 떴다. 일단 한 입 먹으니 계속 들어갔다. 도형은 이유도 모르고 대상도 없는 짜증을 채소에 닭고기에 마카로니까지 건더기가 풍성한 수프와 함께 꼭꼭 씹어 삼켰다. 맛있었다. 하여간 강수현은 눈앞에 있으나 없으나 사람 쥐고 흔드는 재주 하나는 기가 막혔다.

그런데 기분이 왜 이렇게 자꾸 가라앉을까. 아직도 몸에 남은 절정의 여운 때문인가. 도형은 주먹을 말아 쥐고 허리를 팡팡 두드렸다. 밤새 안쪽이 조여졌다 풀어졌다 했던 탓인지 몸 여기저기가 계속 두근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수현은 도형이 자기 집에서 쉬면서 제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를 바란 모양인데, 도형은 곳곳이 수현으로 가득 찬 곳에서는 도저히 마음이 진정되지 않을 것 같아 그냥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수현이 남긴 살구색 카드를 주머니에 챙겨 넣은 후 메모지를 찾아 ‘잘 먹고 갑니다.’라고 짤막한 답을 남기고 나왔다. 집까지 천천히 걸어가려고 했는데 다리가 후들거려서 결국 중간에 택시를 탔다.

깜빡깜빡 졸다가 택시에서 내렸는데,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집이 없어졌다.

***

“오래 기다리셨어요?”

“혹시 일하다 말고 온 거예요?”

“아닙니다. 오늘은 어차피 잠깐 확인할 일이 있어서 나갔던 거라서요.”

청승맞게 쭈그리고 앉아 있던 도형의 옆에서 수현이 긴 다리를 구깃구깃 접고 옹그렸다. 아무렇지도 않게 바닥에 주저앉은 수현을 보며 도형이 피식 웃었다.

“비싼 양복 더러워지게 뭐 하는 거예요.”

“승은까지 입은 몸이 어찌 무엄하게 주상 전하를 내려다볼 수 있겠습니까.”

“미치셨나.”

커다란 남자 둘이 궁상맞게 골목길에 옹송그리고 앉아 벽과 기둥만 남고 시커멓게 타 버린 3층짜리 빌라를 올려다보았다.

도형이 잘 쉬고 있는지 확인차 전화했던 수현은 땅이 꺼질 것 같은 한숨 소리를 건너 듣고 무슨 일이라도 났는가 싶어 피가 마르는 줄 알았다. 우물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는 도형을 재촉한 끝에 진짜 무슨 일이 나 버렸다는 걸 알아내 당장 자리를 박차고 달려온 참이었다.

“나 이제 어떡하죠.”

“어떡하긴요. 희빈 강씨 처소로 오셔야죠.”

“저 심각하니까 장난치지 말아요.”

“장난 아닌데요.”

“저 진짜 선생님 댁에서 신세 져도 돼요?”

“제 집으로 안 오시고 다른 데 가시면 저 너무 서운하고 속상할 겁니다.”

도형이 무릎에 파묻고 있던 얼굴을 들어 물끄러미 수현을 바라보았다.

“불났을 때 형사님이 댁에 안 계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친구 혜택 거하게 받았네요.”

“네?”

“어제 강 선생님네 안 갔으면 저 타 죽었거나 터져 죽었을 수도 있던 거잖아요. 2층에서 부탄가스 통 다섯 개나 터졌다는데.”

지난 새벽 202호에서 누전으로 시작한 불이 베란다에 방치한 오래된 휴대용 가스 캔을 폭발시키며 베란다와 천장 일부를 날려 버렸다. 바닥과 외벽이 덩달아 날아간 바로 윗집 주민이 다름 아닌 김도형. 도형의 집은 활활 탄 것도 모자라 소화 분말과 물로 난리가 났고, 현관 입구에는 노란 출입 금지선이 쳐졌다.

집주인이 남의 집에서 밤을 불사르던 사이에 집도 불살라지고 있던 거다.

도형은 다시 무릎에 이마를 비비며 키득키득 웃었다. 분명 웃음소리였지만 수현의 귀에는 아무래도 울음소리로 들려 도형의 등을 가만가만 두드렸다.

“일단 옷부터 사러 가요.”

“출입 금지 해제되면 한번 들어가서 보려고요. 잘 찾으면 몇 벌은 건질 수 있지 않을까?”

“아니요. 못 건집니다.”

수현은 드물게 도형의 말을 자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도형이 시무룩해졌다.

“빨아도 안 될까요?”

“섬유에 한번 탄내가 배면 절대 안 빠져요.”

그러고는 수현이 뜬금없이 쿡 하고 웃었다. 본인도 머쓱했는지 큼큼 헛기침하며 딴청을 피웠지만, 도형의 까만 눈동자 앞에서 결국 머리를 꾸벅 숙여 사과했다.

“이거 집안 비밀이니까 아무에게도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사실 저희 집에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있어요. 이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미쳐도 보통 미친 게 아니라 취미가 연금술 실험이에요. 집에 불을 열일곱 번 냈습니다.”

“매드 사이언티스트요? 영화에 나오는 수상한 닥터 같은 사람이에요? 쫓아내요! 왜 그런 사람을 한집에 살게 하는데요!”

“안타깝게도 그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제 어머니셔서 쫓아낼 수는 없어요. 믿어지지 않으시겠지만 로켓 엔진 전문가이고 제 모교 교수세요. 엄청난 괴짜셔서 연구소에서 할 수 없는 실험을 집에서 하셨어요. 불탄 옷, 불탄 커튼, 불탄 카펫…. 참 많이도 태우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매사추세츠주 소방기사 자격증을 따셨을 정도니까요.”

여전히 무릎을 끌어안은 도형이 눈을 끔벅끔벅하며 수현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무언가 이상한 말이라도 한 걸까. 수현은 괜스레 몸 둘 바를 몰라 머리카락만 쓸어 넘겼다.

“강 선생님한테도 부모님이 있는 게 당연한데 왜 이렇게 알에서 태어난 사람 같지? 선생님은 태어났을 때부터 이랬을 거 같아요.”

“이런 게 어떤 건데요?”

“크고, 똑똑하고, 뭐든 잘하고. 믿음직하고….”

마지막 한마디는 기어드는 소리로 줄어들었지만, 수현을 함박웃음 짓게 하기는 충분했다.

“그럼 슬슬 가 볼까요?”

“어디를?”

“믿음직한 친구와 함께 옷 사러 가요.”

“대충 선배들한테 받아 입으면 돼요.”

“남이 쓰던 거 안 좋아하신다고 하셨잖아요. 중고 싫으시다고.”

“돈 없어요. 얼른 집부터 구해야지. 지금 내가 옷 살 돈이 어디 있어요.”

“보상금은요?”

“우리 같은 사람들 형편이야 뻔하지. 아랫집이라고 다르겠어요? 우리 집주인도 월세 받아 생활비 쓰는 노인네라서 보증금이나 제대로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툭툭 털고 일어난 도형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콧등을 찌푸리고 태연한 척 말했지만, 그 속이 말이 아니라는 건 굳이 까만 눈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친구 혜택 아직 안 끝났습니다.”

“아, 됐네요. 아직도 아릿아릿하거든요?”

“그 혜택만 있는 줄 아세요?”

수현이 통화 버튼을 눌러 신호가 가는 것만 확인하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 근처에서 수현의 호출만 기다리고 있었는지 예의 으리으리한 차가 두 사람 앞에 와 섰다. 좁은 골목길을 막고 있는 것도 민폐라며 수현은 도형을 억지로 뒷좌석에 끌어 앉히고 옆자리를 꿰찼다.

“도진이 책이 다 탔어요. 큰일이야.”

“형사님 귀중품은요?”

“전 그런 거 안 키워요. 아, 사진. 사진 다 탔겠네…. 몇 장 되지도 않지만….”

“사람 보내서 앨범 남아 있는지 확인하겠습니다.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전부 디지털 복원해 드릴게요.”

어지간히 속이 상했는지 도형은 수현이 손을 주물럭거리는데도 짜증 한번 내지 않고 창밖만 내다보며 잠자코 앉아 있었다.

백화점 앞에 차가 멈추고 어디서 달려 나온 검은 양복 직원들이 양쪽 문을 열어 주었다. 수현이 먼저 내려 반대편으로 가 활짝 웃으며 도형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늘도 모실 수 있어 신첩 성은이 망극합니다.”

“희빈 놀이 되게 좋아하신다니까. 하여간 강 선생님 진짜 이상한 사람이에요.”

있는 줄도 몰랐던 뒷문으로 들어가자마자 발걸음이며 손짓 하나하나가 전문적인 직원 두 명이 나와 허리를 90도로 꺾으며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하고 인사했다. 수현은 가볍게 고개만 까딱하고 도형과 보폭을 맞추어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사장님 아니고 회장님이었어요?”

“최고 경영자 겸 이사회 의장이라서 보통은 대표라고 하는데 사람에 따라서는 사장이나 회장이라고도 부릅니다.”

수현은 무릎을 살짝 구부려 고개를 주억이는 도형의 귓가에 입을 바짝 대고 “제일 좋아하는 호칭은 강수현 선생님입니다.”라고 아주 작게 속삭였다. 솜털이 일어날 만큼 간지러운 소리에 도형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손가락으로 귓구멍을 마구 쑤셨다.

“아이 진짜! 시도 때도 없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듯이 시치미를 뚝 뗀 수현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이것저것 분주하게 지시했다.

“브랜드 로고가 드러나지 않는 걸로 스포츠웨어, 간편한 평상복, 비즈니스 캐주얼, 격식 있는 자리에 입고 갈 수 있을 만한 가벼운 정장, 실내복, 운동화, 스니커즈, 슬립온, 보트 슈즈로 다양하게. 너무 튀지 않는 한도 내에서 피부색에 어울리는 색이면 뭐든 괜찮습니다. 시즌 오프 남은 제품도 다 보여 주세요. 사계절 옷 전부 필요하니까.”

직원들이 수현과 도형을 안내한 곳은 거울이 많이 달린 라운지 같은 곳이었는데, 수현이 고갯짓을 하자마자 대기하던 직원이 줄자를 들고 와 도형의 신체 치수를 쟀다.

“뭐, 뭔데요?”

“옷 사려면 치수부터 알아야죠. 아, 발 사이즈는 어떻게 되시죠?”

“운동화는 265, 구두는 260이요.”

모여 있던 직원들이 스스슥 흩어졌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몰라서 멍하니 서 있던 도형이 소파에 앉아 옆자리를 통통 두드리는 수현을 보며 입을 빠끔거렸다.

“뭐 하는 거예요?”

“이리 와서 앉으세요. 커피? 주스?”

“물.”

“탄산수 두 잔. 레몬 많이 넣어 주세요.”

어디선가 닌자처럼 나타난 직원이 탄산수 두 잔을 사이드 테이블에 올려놓고 다시 은밀하게 사라졌다.

“나 돈 없다니까?”

“제가 살 건데요.”

“아니, 그러니까 제 옷을 왜 선생님이 사요….”

“형사님. 부디 고깝게 듣지 말아 주세요.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저에게는 돈으로 해결하는 것만큼 쉽고 편한 일이 없습니다. 이 백화점에 진열된 제품을 모조리 사도 제 재산에는 흠집도 나지 않아요. 돈으로 살 수 있는 건 전부 제가 사겠다고 예전에 말씀드렸던 적이 있지요? 세상에는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아서 돈으로 때울 수 있는 건 전부 돈으로 처리하려고 합니다.”

“돈 많다고 함부로 낭비하지 말고. 그래도 좀 아껴 써요.”

세상천지에 강수현의 지갑 사정을 걱정해 주는 이가 김도형 말고 또 있을까. 이러니 수현이 도형을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돈이 이렇게 많아도 형사님 마음 하나 제대로 위로하지 못하는 못난 친구입니다.”

“위로는 무슨…. 같이 있어 주는 걸로 충분해요. 그거만 한 위로가 어디 있다고. 이야, 친구 좋네. 와… 진짜 좋다. 그, 음….”

도형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힘들 때 누가 옆에 있어 준 것도 처음이라. 진짜 다 처음이네. 고마워요. 진짜로. 저 혼자 있었으면 엉엉 울었을지도 몰라요. 강수현 선생님 최고다. 완전 최고예요. 저기, 그러면 강수현 선생님의 친구 김도형이 이번에는 염치없이 신세 좀 집니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꼭 갚을게요. 정말, 정말 고마워요.”

“제 기쁨입니다.”

수현은 진심으로 기쁘게 웃었다. 가을 다람쥐가 알뜰살뜰 모은 도토리 빼앗는 것도 아니고, 도형이 신세를 갚게 둘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어차피 도형의 월급으로 치를 수 있는 가격도 아니었다. 오늘 사는 옷만 해도 몇 년 치 연봉은 될 텐데. 수현이 도형에게 받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기 때문에 그냥 모른 척 고개를 주억거리며 웃었다.

그러고는 바로 흐뭇한 표정을 지우며 마치 젓지 않고 흔들어 만든 마티니를 마시는 비밀 요원처럼 알쏭달쏭한 얼굴로 탄산수를 홀짝거렸다.

오래지 않아 직원들이 옷이 가득 걸린 행거 열 몇 개를 라운지로 가져왔다. 소파에 앉은 도형의 앞에 신발 상자가 주르륵 놓였다. 직원들이 달라붙어 구두를 신겼다 벗겼다 운동화 끈을 묶었다 풀었다 하는 통에 혼이 쏙 빠진 도형을 내버려 두고 옷을 쓱 둘러본 수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행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도진 학생 사이즈가 어떻게 되죠?”

“도진이요? 발은 285이고 키는 184? 185? 허리가 32였던가…. 윗옷은 XL 입어요.”

수현이 신발 상자를 정리해 들고 나가던 직원을 손짓해 불렀다.

“허리 사이즈 32, 기장은 저보다 하나 아래, 상의 한 사이즈 아래 남자 대학생이 당장 입을 수 있는 옷 적당히 준비해 주세요. 185cm에 어깨가 넓고 슬림한 근육형입니다. 단정한 치노 팬츠와 버튼다운 셔츠, 얇은 브이넥 스웨터, 티셔츠는 피케 셔츠 위주로. 운동복과 실내복 각각 한 벌에 285 사이즈 얌전한 운동화, 짙은 갈색 슬립온도 한 켤레씩. 그리고 양말과 속옷도. 팬티 L 사이즈, 반팔 티셔츠 XL 사이즈. 지금 가져갈 겁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아까 옷에도 M 사이즈 팬티와 양말, 파자마 넉넉하게 추가해 주세요. 실내용 슬리퍼 두 켤레도."

“네, 회장님.”

그러고 보니 도진의 옷도 전부 타 버렸다. 도형은 머리를 감싸고 앉아 앓는 소리를 내다가 벌떡 일어나 수현에게 꾸벅 인사했다.

“강수현 선생님. 이 은혜는 죽어도 안 잊겠습니다. 꼭 갚을게요.”

“죽지는 마시고요."

“진짜 제가 평생 은인으로 모시겠습니다.”

“은인이 아니라 친구. 친구는 원래 어려울 때 서로 돕는 겁니다.”

“선생님 저한테 필요한 거 있으면 뭐든지 얘기하세요. 뭐든 전부 다 들어드릴 테니까.”

“진짜 뭐든지?”

도형이 입술을 꾹 다물고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든지.”

수현은 눈을 크게 휘어 웃었다. 그 화사하게 웃는 얼굴이 어쩐지 포식을 앞둔 맹수를 닮아 보였던 건 수현을 어려워하는 백화점 직원의 착각이었을까.

“밥 먹으러 갈까요.”

“벌써 밥때인가?”

“마음이 허할 때는 배를 든든히 채워야 하는 법이죠.”

“그럽시다. 밥은 내가 살… 아니다. 강 선생님, 저 맛있는 거 사 주세요.”

“극진히 모시겠습니다.”

강수현식 사고방식에 익숙해지기로 했는지 도형이 눈가가 벌게져서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맛있는 걸 사 달라고 말했다. 그 말이 수현에게는 고맙다는 말보다 조금 더 진심 어린 감사라는 걸 드디어 깨달은 모양이었다.

수현은 도형에게 장어를 먹였다. 원래 저녁으로 장어를 먹을 생각이었기 때문에 아침에 이미 예약해 두었다고 했다. 장어 먹었다고 어디 가서 헛심 쓸 생각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하라며 구시렁대는 도형을 향해 수현은 목젖까지 보이며 호쾌하게 웃었다.

“이제 중고품이라 다른 데 가서는 쓸래야 쓸 수도 없습니다.”

도형은 자기가 먼저 음담을 꺼낸 주제에 수현이 능청스럽게 받아치니 대꾸도 못 하고 벌건 얼굴로 찻물만 들이켜다가 어색하게 말을 돌렸다.

“그런데요. 원래 강 선생님은 쇼핑 그렇게 해요?”

“쇼핑이요?”

“나 백화점에 뒷문 있는 거 오늘 처음 알았잖아요. 엘리베이터도 막 따로 타고. 내가 돌아다니면서 고르는 게 아니라 앉아 있으면 직원들이 알아서 물건 찾아서 가져오고…. 거참 신기하데.”

“자본주의 세상이니까요.”

“아까 그 옷들 진짜 전부 다 샀어요?”

“네.”

분명히 할 말이 있는 얼굴이었지만, 도형은 다시 한번 찻물을 마시는 것으로 잔소리를 삼켰다. 알아서 속을 짐작한 수현이 방긋방긋 웃으며 덧붙여 말했다.

“사계절 옷을 전부 다 사서 그렇지, 계절별로 따져 보면 몇 벌 안 됩니다.”

“원래 배달까지 해 줘요?”

“보통은요. 오늘은 사람을 보내서 픽업하도록 했어요. 이것저것 손볼 게 있어서요.”

수현이 도형을 데리고 집에 돌아가기 전까지 가격표와 브랜드 태그를 전부 떼고, 속옷은 싹 빨고 나머지는 전부 깔끔하게 다려서 옷방에 착착 정리해 두려면 한두 명의 손으로는 어려울 테니까.

그렇게 젊은데 억만장자로 사는 기분이 어떠냐는 얄팍한 질문을 연달아 받던 때가 있었다. 수현은 하고 싶은 일을 하다 보니 돈이 따라왔을 뿐이라고 시큰둥하게 대답했던 과거의 자신에게 조용하게 일러 주고 싶었다. 돈은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는 없어도 최소한 짐을 같이 들어 줄 수는 있는 아주 편리한 녀석이라고. 그러니 강수현, 앞으로도 열심히 돈을 벌도록.

달은 몰라도 별 정도는 따 줄 수 있다. 이왕 이리된 김에 아직 이름이 붙지 않은 소행성의 명명권을 사서 김도형이라는 이름을 지어 줄까. 내 곁에서만 홀로 빛나도록 내내 숨겨 두고 싶지만, 요요히 빛나는 당신을 자랑하고도 싶으니까. 이토록 빛나는 당신의 이름을 받은 별이라면 아무리 어두운 밤도 눈부시게 밝힐 것이다.

수현과 도형이 말없이 각자의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식사가 나왔다. 윤기가 잘잘 흐르는 장어덮밥이 두 사람 앞에 놓였다. 수현이 나무 주걱으로 장어 위에 십자 모양을 내 4등분으로 갈라 빈 공기에 덜어 주면서 먹는 방법을 자상하게 설명했다.

“우선은 아무것도 더하지 말고 드셔 보세요. 장어를 한번 찐 다음에 양념을 발라 구운 거라 아주 부드럽습니다. 두 번째는 파를 넣어 드시고, 세 번째는 여기 장어 뼈를 우려낸 장국에 고추냉이를 더해 드셔 보세요. 마지막으로는 제일 입에 맞는 방법으로 한 번 더 드시는 겁니다.”

“강 선생님 파 싫어하잖아요. 이리 줘요. 내가 평생 선생님 파 대신 먹어 줄게요.”

도형이 수현의 상에서 파 그릇을 가져가더니 제 그릇에 붓고 대신에 고추냉이 종지를 수현에게 내밀었다.

“강 선생님 매운 거 좋아하죠? 이거 더 먹어요.”

당신이 싫어하는 것을 평생 대신해 준다니. 이런 장엄한 사랑 고백을 사랑인 줄도 고백인 줄도 모르고 내뱉는 남자가 있다. 수현은 도형이 저런 식으로 아무 자각 없이 자신을 뒤흔들 때마다 늘 그러는 것처럼 머리를 쓸어 넘기며 허망하게 웃었다. 미치겠군. 이대로라면 머리를 하루에 5천 번씩 쓸어 넘기다가 도진의 저주대로 대머리가 될지도 모르겠다.

“슬슬 도진 학생에게 연락합시다. 아마 지금쯤이면 저녁 회진 끝났을 것 같은데…. 어디 붙잡혀 있어도 제가 빼 올 수 있으니까 기숙사에서 보자고 전해 주세요.”

“도진이 많이 놀라겠죠?”

“형사님이 무사하시니까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을 겁니다."

“…저기.”

입술은 달싹달싹, 손가락은 꼼지락꼼지락. 도형이 차마 입 밖에 내지도 못하고 저렇게 안달하는 이유는 듣지 않아도 뻔했다.

“도진 학생 방은 2층입니다.”

“아….”

“갈까요?”

“고맙습니다. 저 하나만으로도 염치없는데 도진이까지.”

“당연한 일입니다. 형의 친구가 형인 것처럼 친구의 동생은 동생이니까요.”

콧등을 찌푸린 도형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수현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종종걸음으로 따라 나온 도형이 현관에서 차를 기다리는 동안 안절부절못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갑자기 수현을 덥석 끌어안았다. 상상도 못 한 도형의 행동에 수현은 순간 사망했다가 도형이 몸을 떼고 민망함에 귓불을 잡아당기는 걸 보며 간신히 부활했다.

“저번에 선생님이 신체 접촉을 통해서 제 행복 나눠 받고 싶다고 했잖아요. 달리 드릴 건 없고, 내 행복 절반 선생님 드릴게요."

여기서 더 행복해졌다가는 그 자리에서 바로 성불할 것 같은데. 수현이 대답할 말을 고르느라 잠자코 있자 도형이 중언부언하기 시작했다.

“평생 내가 느낄 행복의 절반은 강 선생님이 나 대신 느꼈으면 좋겠다. 제가요, 진짜 복이 많은 사람이거든요. 제 몫까지 더해서 우리 강수현 선생님 아주 많이 행복하게 지내시라고 기원할게요."

만약 제가 행복하다면, 그건 전부 당신 때문일 겁니다. 차마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어서 수현은 일부러 활짝 웃으며 과장되게 허리를 숙여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라고 능청을 떨었다. 도형은 그제야 굳은 얼굴을 풀고 머쓱하게 콧등을 긁었다.

도형은 병원으로 가는 내내 창밖만 멍하니 내다보며 연신 한숨을 쉬었다.

“저도 텅 빈 집으로 혼자 들어가는 거 별로거든요. 그 집에 온기가 더해진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아침저녁으로 형사님 용안을 찾아뵐 수 있게 해 주셔서 신첩 어찌나 감읍하였는지….”

“아, 그런 말 좀 하지 마요.”

“진심인데요.”

고개를 뒤로 젖힌 도형이 눈을 감고 느슨히 쥔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톡톡 쳤다. 호흡이 점점 더 가빠지고 있는 것처럼 가슴을 쫙 폈다 오므렸다 하던 도형이 큼큼 목청을 가다듬고 속삭이듯 말했다.

“아니요. 그게 아니고요…. 저 지금 눈물 날라 그러니까 잠깐만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봐요.”

달빛이 일렁일렁 번진 밤의 바다처럼 도형의 검은 눈에 수막이 엷게 끼었다. 기쁨과 즐거움으로만 빛나야 할 눈에 소금기 섞인 물이 번져서는 안 된다. 수현은 얼른 입을 닫고 대신 차창을 조금 열었다. 창틈으로 스미는 바람에 눈물이 마르기를 바라며.

***

“형!”

도진은 초조한 얼굴로 기숙사 건물 밖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전날 집을 비운 사이에 불이 났다고 말했는데도 도진은 도형을 보자마자 여기저기 살피며 혹시 다친 데는 없냐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어제 밖에서 잤다니까. 불난 것도 아침에 집에 가서 알았어."

“어제 당직이었어?”

“아니, 그건 아니고….”

“그럼?”

“어… 강수현 씨랑 놀다가 시간이 너무 늦어서….”

수현의 집에서 자고 온 날이 하루 이틀도 아닌데 도형의 얼굴이 갑자기 시뻘게졌다. 도진은 무언가를 눈치챈 듯 도끼눈으로 수현을 노려보았고, 수현은 시치미를 뚝 떼고 바리바리 들고 온 쇼핑 봉투 속 옷가지를 정리하는 척했다.

“형. 나 세미나 때문에 강수현이랑 잠깐 상의할 거 있거든. 교수님이 시키신 거라서. 잠깐만 저기 벤치에서 기다려 줄래?”

“앰브레이스 펠로우십 어쩌고 그거?”

“응. 형 들어 봐야 재미도 없는 내용이고. 피곤할 텐데 앉아서 바람 좀 쐬고 있어.”

“그래. 강 선생님, 이왕 밀어주기로 한 거 우리 도진이 팍팍 화끈하게 밀어줘요.”

“알겠습니다. 한국대 병원을 도진 학생 품에 안겨 주겠습니다.”

목까지 새빨개져서 도진과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도형이나 보란 듯이 도형을 향해 살살 눈웃음을 치는 수현이나 하는 꼴을 보니 분명히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다. 도진은 끓어오르는 울분을 심호흡으로 다스리고 도형이 벤치에 앉은 것을 확인하자마자 기숙사 로비 구석으로 수현을 끌고 들어갔다.

“야. 형 어제 너랑, 아니, 너희 집에서 잤어?”

“덕분에 화마를….”

“아, 시발….”

수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리 형제라도 사생활에 일일이 간섭하는 건 좋지 않아.”

“좀 닥치고 있어 봐. 지금 너 때려죽이고 싶은 거 간신히 참는 중이니까.”

“날 죽이면 도형이가 슬퍼할 텐데.”

“닥치라고 했다. 메스로 포 떠 버리기 전에 좀 닥쳐. 닥치라고.”

도진이 양손으로 얼굴을 벅벅 문지르고는 휙 고개를 들었다.

“너 도대체 형이랑 뭘 하고 싶은 거야.”

“결혼.”

“미친 새끼야, 지금 농담할 때야?”

“농담 아니야. 너 욕하는 거 습관 될라. 적당히 해.”

“지랄 염병 같은 소리 하지 말고 뒤지기 싫으면 똑바로 말해라. 너 형한테 왜 이렇게 집착하는 건데?”

“결혼하고 싶다고 했잖아. 도형이랑 평생 같이 살고 싶어.”

도진이 손등이 하얘지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고함을 지르고 싶은 얼굴이었지만 혹여 누가 들을까 잇새로 억누른 그르렁 소리만 냈다.

“김도진. 너야말로 앞으로 어떻게 처신할지 결정했어?”

“뭘 해, 하기는. 형제고 가족인데.”

“그런 거 치고는 간섭이 좀 과한 거 같은데.”

“동생이 형을 걱정하는 건 당연한 거야.”

수현이 몸을 살짝 숙여 도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래. 동생. 잊지 마. 넌 도형이 동생이야.”

“잊겠냐?”

“잊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도진이 반 발 뒤로 물러섰다.

“뭔 개소리야?”

“그래도 도형이가 널 내치지는 않겠지. 동생이니까. 도형이한테 너는 직접 씻기고 먹이고 안아 재운 귀한 동생이잖아. 자기 밥, 자기 학교, 자기 미래 전부 다 털어서 키운 소중한 동생. 너 하나만 바라보고, 네 행복이 자기 행복인 줄 알고 품어 왔어."

침침한 형광등 아래 도진의 핏기 없는 얼굴이 파르스름했다.

“그만큼 충격받겠지. 벌벌 떨지도 몰라. 밤에 혼자 울지도 모르겠다. 네가 도형이 앞에서 형 안고 싶다고 울면 한 번 정도는 안겨 주려나.”

“야. 내가 알아서 해. 이 새끼는 꼭 말을 해도….”

“그 순간 너는 ‘도형이 형’을 영원히 잃는 거야.”

“더 말하면 죽여 버린다.”

도진의 꽉 쥔 주먹이 파들파들 떨렸다.

“세상에는 입 밖에 나옴으로써 완성되는 종류의 감정도 있어. 네 마음은 아직 너 혼자만의 것이야. 현명한 결정을 했기를 바라. 그 마음, 곱게 간직하고 살지 아니면 들판에 망나니처럼 풀어서 너도 도형이도 물어뜯게 할지.”

수현의 눈빛이 깊어졌다.

“너야말로 제대로 말해. 너 아직 내 질문에 대답 안 했어.”

“이해할 수 없어서.”

“뭐라고?”

“내가, 천하의 강수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이 세상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무궁무진한 신비야. 미지의 영역이지. 웃는 김도형, 화내는 김도형, 기뻐하는 김도형, 슬퍼하는 김도형. 나는 도형이에 대해서 무엇 하나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어.”

“그래서 형을 이해하게 되면 꺼져 줄 거야?”

“아니. 더 깊이 사랑하게 되겠지.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도 이렇게나 빠져 버렸는데 이해까지 하게 되면 이 사랑이 얼마나 더 깊어질까 나조차도 두려울 정도야.”

“야. 너 언제 죽을 거야?”

도진의 뜬금없는 질문에 수현이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무병장수할 예정인데. 왜?”

“너 형사취수제라고 알아? 옛 전통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내가 한번 실천해 볼까 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군.”

“돈 많이 벌어 놓고 빨리 죽으라고.”

“바로 불로불사의 영약 개발 시작해야겠는데. 음, 이름은 진시황 프로젝트. 어때? 너도 끼워 줄까?”

수현이 도진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뭐라고 이야기하며 소리를 내 웃었다. 도진은 짜증스럽게 몸을 비틀며 수현을 밀쳐 내려고 했지만, 도형의 눈에는 사이좋은 형제가 투덕거리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두 사람이 드디어 친해졌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너무 들떠 도형은 집에 불이 나서 남에게 신세 지게 되었다고 전하러 온 주제에 복권 당첨을 알리러 온 사람처럼 신나게 손을 저었다.

“도진아, 도진아. 있잖아. 우리 집 새로 구할 때까지 강수현 씨가 자기 집에 있어도 된대.”

“응. 들었어.”

“고맙다고 인사했어?”

“고마워.”

“그게 뭐야. 제대로 인사해야지.”

수현이 흐뭇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이미 충분히 고맙다고 했어요.”

“강수현. 나 돈 좀 줘.”

도진의 뜬금없는 소리에 도형이 바싹 마른 통나무처럼 굳었다. 아니, 그런 식으로 친해지라는 말은 아니었다고.

“야, 김도진. 너 무슨 짓이야.”

“비상금 모아 놓은 거 다 탔어. 책도 다 탔고.”

허옇게 질린 도형에 아랑곳없이 도진은 뻔뻔스레 수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수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지갑에서 지폐를 잡히는 대로 꺼내 도진에게 쥐여 주었다.

“책 목록 알려 주면 집에 사다 놓을게요. 아, 그리고.”

수현은 다시 지갑을 꺼내 처음 도형을 찾아왔을 때 건넸던 개인 명함과 신용 카드를 도진에게 건넸다.

“제 번호는 여기. 가재도구가 전부 타서 필요한 물건 이것저것 많을 텐데 이걸로 사요. 형 친구가 개인적으로 주는 거니까 눈치 보지 말고 마음대로 써요.”

“고마워. 잘 쓸게.”

“김도진!”

“아까 강수현이 나한테 필요한 거 있으면 뭐든 말하라고 했어.”

“너 진짜 왜 이래? 용돈 필요하면 내가 줄게. 얼른 카드 돌려드려.”

“형 친구면 나한테도 형이라며. 나 이쪽 형한테 용돈 받을래.”

도형이 울 것 같은 얼굴로 도진의 팔을 주먹으로 퍽퍽 때렸다. 도진은 입을 꾹 다물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형사님. 도진 학생 말이 맞습니다. 제가 그러라고 했어요. 형사님의 사랑하는 동생인데다가 저희 앰브레이스의 미래, 앰브레이스의 보물인 김도진 학생에게 아까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아니, 그래도….”

“도진 학생, 메시지로 기사 연락처 보낼게요. 집에 올 때 초행길이니 기사 불러서 차 타고 오세요.”

“알았어. 형 잘 모셔. 조금만 피곤하면 살 쭉쭉 빠지니까 밥 맛있는 걸로 잘 챙기고.”

“명심하지요.”

둘이서 무슨 비밀스러운 맹약을 맺고 온 건지 도진의 태도가 이상하게 바뀌었다. 허물없이 친해져서 그렇다고 하기에는 아직 까칠함이 남았고, 단순한 심술이라고 하기에는 두 사람 죽이 척척 잘 맞는다. 도형은 혼란을 감추지 못한 눈으로 잘생긴 두 얼굴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다가 그냥 생각하기를 그만뒀다.

“김도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

“형이나 조심해. 맛있는 거 준다고 아무나 따라가지 말고, 망태 할배 조심하고. 누가 이상한 짓 하려고 그러면 불알 으깨 버려. 알겠지?”

도진이 수현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이를 갈았다. 수현은 먼 곳을 보는 척 딴청을 피웠다.

“이게 좀 컸다고 잔소리하네.”

“저거 내 옷이지? 이리 줘. 형 아침부터 놀라서 피곤할 텐데 얼른 가서 쉬어. 나 토요일 저녁에 갈게.”

“어, 어….”

도진은 쇼핑 봉투 더미를 양손에 들고 도형이 인사할 새도 없이 몸을 휙 돌려 성큼성큼 걸어가다가 갑자기 우뚝 멈추더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악을 썼다.

“강수현, 이 개새끼야!”

“김도진!”

도진의 갑작스러운 욕설에 눈이 휘둥그레져서 총알같이 튀어 나가려던 도형을 수현이 잽싸게 팔을 뻗어 허리를 감아 멈춰 세웠다.

“저 자식이 미쳤나! 강 선생님, 놔 봐요. 잠깐만. 정신머리 고쳐 놓고 올게요. 저런 놈한테는 매가 약이야. 김도진 오늘 진짜 뒤졌어."

“아니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저 정말 괜찮으니까 진정하세요.”

“내가 안 괜찮아! 아, 놔요. 쥐콩만한 놈이 어디서 욕지거리야. 그것도 형 친구한테.”

“저랑 도진 학생 형사님 생각보다 훨씬 더 친합니다. 그냥 친구 사이의 애정 어린 투덕거림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저 도진 학생이 왜 저러는지도 알아요.”

“왜요? 쟤 도대체 왜 저래요?”

“그건 인간 대 인간으로 한 약속이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자식 잘못 키운 아버지처럼 낯부끄러움과 자괴감에 어쩔 줄 몰라 씩씩거리는 도형을 한참 안아서 달랜 수현은 도형의 숨이 차분해지자 그제야 허리를 휘감았던 팔을 풀었다.

“강수현 선생님,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저놈 두들겨 패서라도 선생님께 싹싹 빌도록 할 테니까 오늘은 저 봐서 한 번만 넘어가 주시면 안 될까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이고…. 이게 다 제가 동생을 잘못 키워서….”

“괜찮아요. 정말로 괜찮습니다. 잘못 키우기는요. 이보다 더 잘 키울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게 키우셨어요. 형사님이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피식피식 웃는 수현은 불쾌해하기는커녕 진심으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과연 이 사람이 어디서 저런 상스러운 소리를 들어 본 적이나 있을까. 뜬금없이 막장 수준의 욕을 먹으니 너무 황당해서 웃음만 나오는 걸까. 안절부절못하는 도형의 정수리를 큰 손으로 쓱쓱 쓰다듬은 수현이 어깨를 감싸 안고 다정하게 얼렀다.

“도진 학생 볼수록 귀엽네요. 자, 우리는 이만 집에 가죠.”

***

관리인이 왔다 갔는지 수현의 집은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멀리서 보니 차분한 동네에서 혼자만 반짝거리는 것이 마치 크리스마스트리 같았다. 도형의 온통 깜깜하던 마음도 조명을 따라 조금 밝아졌다. 생각지도 못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정문 앞에 국산 SUV가 한 대 세워져 있어 도형이 눈을 흘기며 혀를 찼다. 뻔뻔스럽게 남의 집 정문을 가로막고 주차하다니, 불법 주정차 딱지를 붙이고 견인차 불러야 하는 거 아니냐며 집주인도 아니면서 차 주인을 흉봤다. 수현은 그냥 빙그레 웃기만 했다.

돌계단을 오르자 정원이 조금 달라진 느낌이 들어 도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정머리 없을 정도로 잘 가꿔진 것은 변함없는데, 어딘가 모르게 분위기가 부드러워진 것 같아 반사적으로 수현을 흘끔 올려다보았더니 수현이 “꽃나무를 심었어요.”라고 말했다.

“무슨 꽃?”

“작약을 심고 싶었는데 조경수로는 별로라고 해서 모란을 심었습니다. 무슨 꽃을 또 심어 볼까요? 수국 좋아하세요?”

“낮에는 없었던 거 같은데. 내가 못 봤나? 언제 심었어요?”

“오늘이요.”

도형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새카맣게 열린 동공을 애써 무시하고 수현이 도형을 집 안으로 데려갔다. 고작 이런 거에 놀라서야 곤란하지.

“집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지하에는 체력 단련실이 있어요. 제가 아침마다 10km를 뛰는 곳이지요. 트레드밀 한 대 더 들였습니다. 시간 나실 때 저랑 달리기 내기라도 해 볼까요? 웨이트 트레이닝 기구도 있고, 덤벨도 무게별로 있으니 자유롭게 쓰시면 됩니다. 건식 사우나, 습식 사우나도 딸려 있어요. 잠깐 가서 보시겠어요?”

“아, 아니요. 대단하네. 집에 그런 것도 있고.”

“1층에는 익히 아시는 대로 제 방과 드레스 룸, 서재, 주방, 식당, 거실이 있고 예전에 주무시고 가셨던 손님방을 형사님 방으로 바꿨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손님방은 예전에 도형이 알던 방이 아니었다. 벽지와 커튼이 바뀌었고, 단출하던 싱글 침대 대신 수현의 침실에 있는 것과 비슷하게 생긴 높은 침대가 들어왔고, 포근한 침구는 보기만 해도 잠이 솔솔 오는 기분이었다. 안목 없는 도형도 한눈에 최고급임을 알 수 있는 반지르르한 가구가 그득 들어찬 방은 분명 오늘 새로 꾸며진 것일 텐데도 누군가가 오랫동안 아끼고 가꾼 곳처럼 훈기 있고 아늑했다.

“이게 다 뭐래?”

단 반나절 만에 이게 가능하다니, 강수현은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인가 싶어 현기증까지 났다. 뭐 하는 사람이긴, 돈이 아주 많은 사람이지…. 금세 납득하는 것이 김도형의 장점이다.

“자주 입는 옷만 여기 두시고 드레스 룸은 저와 같이 쓰시죠. 시간이 부족해서 화장실은 제대로 손을 못 봤어요. 죄송합니다.”

손님방에 딸린 욕실만 해도 도형이 원래 살던 집 부엌과 마루를 합한 것보다 컸다. 지금 그 자체로도 충분히 호화로웠지만, 수현은 영 마뜩잖다는 듯이 미간을 좁히고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말했다. 세상에 미안할 것도 많아.

“집 새로 구할 때까지 잠깐만 지내면 되는데 뭐 이렇게 거창하게….”

“형사님이 머무시는 공간이니 하루든 평생이든 저에게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

“에구, 그래도 너무 폐 끼쳐서 미안하네요.”

“단,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강수현의 입에서 아주 오랜만에 나온 말이었다. 도형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얼마 전에 뭐든지 들어주겠다고 했던 것까지 생각나면서 펄떡펄떡 뛰던 심장이 덜컥 바닥으로 떨어졌다. 수현의 얼굴은 보기 드물게 딱딱했다. 그만큼 진지하다는 뜻이겠지.

“세 가지를 반드시 지켜 주셔야 합니다. 그러겠노라 약속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들어가면 안 되는 방이라도 있는 건가? 설마… 푸른 수염?

도형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푸른 수염, 아니 강수현이 도형에게 열쇠처럼 보이는 검은 뭉치를 내밀었다. 경악한 얼굴로 굳어 버린 도형이 영 이상한지 수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도형의 손을 잡아 손바닥에 열쇠를 올렸다.

“첫 번째 조건입니다. 이 차를 타세요. 여긴 마을버스도 다니지 않아서 경찰서까지 대중교통 출퇴근이 매우 어렵습니다.”

“네? 차요? 무슨 차?”

“아까 정문 앞에 세워져 있던 은색 차요.”

도형이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안 돼요. 그런 걸 어떻게 받아요.”

“사 드리는 거 아니고, 제 개인 명의로 리스 해서 제삼자 운전 보험 특약 들었어요. 편하게 타시면 됩니다.”

“그래도….”

“부담스러우시죠? 참으세요. 저도 검은색 독일제 스포츠 SUV를 리스 하고 싶었지만, 형사님의 공무원이라는 사회적 위치와 경장이라는 직급을 고려해 가장 무난하다는 국산 SUV로 준비한 겁니다. 저도 힘들게 참았으니 형사님도 참으세요.”

“아니, 선생님. 잠깐만요. 참는 수준이 너무 다르잖아요.”

도형은 차 키를 수현의 주머니에 쑤셔 넣으려고 왼쪽 바지 주머니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가 생각지도 못한 것을 건드리는 바람에 술 취한 사람처럼 퍼덕거리며 허겁지겁 손을 뺐다.

“거절하시면 빨주노초파남보 형광색 요란한 차로 아침저녁 모시겠습니다. 절대 피하지 못하도록 개인 경호원과 기사를 따로 붙일 겁니다. 저는 입 밖으로 낸 말은 반드시 실행합니다. 서른다섯 해 동안 단 한 번도 예외는 없었습니다.”

아무리 실수라지만 남이 급소를 더듬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할 말만 하는 걸 보면 강수현이 정말 난 인물은 난 인물이라고 도형은 살짝 감탄했다. 그러나 저 잘난 얼굴이 태연하게 내뱉는 말의 내용을 가만 들어 보니 제정신이 아닌 것도 확실했다. 어휴, 소름. 강수현은 그러고도 남았다. 번쩍거리는 풍뎅이 차를 타고 출근하는 상상만으로도 수치심에 관자놀이가 욱신욱신했다.

“고맙습니다. 여기서 지내는 동안 감사히 그 차 타겠습니다.”

수현은 도형이 넣고 도망친 차 키를 주머니에서 꺼내 다시 건넸다.

“왼쪽은 다른 것으로 꽉 차서 여유가 없으니 오른쪽 주머니를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 죄….”

만져진 사람은 웃고 만진 사람은 울고. 어딘가 좀 이상한 거 같은데 치한 짓은 본인이 한지라 도형은 얌전하게 사과하며 양손으로 차 키를 다시 받아 들었다.

“두 번째. 1주일에 세 번은 저와 함께 밥을 드셔 주세요. 아침, 점심, 저녁 언제든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횟수는 지켜 주세요. 세 번은 최소 횟수니까 열 번, 스무 번도 좋습니다. 하지만 세 번 아래는 안 됩니다. 최소 세 번입니다.”

“네.”

그 정도야 뭐. 도형은 수현과 같이 밥 먹는 것이라면 언제든 대환영이었다. 친구랑 맛있는 음식 먹는 거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세 번째. 여기가 형사님 댁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아니, 내 집이 아닌데 어떻게 내 집이라고 생각을 해요.”

뇌가 머리가 아니라 성대에 달렸나. 망할 놈의 주둥이가 주책맞게 필터도 없이 아무 말이나 내뱉는 통에 도형은 아주 죽을 노릇이었다.

“부담스러우시다는 뜻이죠?”

“솔직히 좀 그런 편이죠.”

“참으세요.”

“아, 왜 자꾸 참으래?”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이 집 명의를 형사님 앞으로 돌려드리고 싶은 마음과 한강이 보이는 펜트하우스를 한 채 사 드리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정말 온 힘을 다해 참고 있습니다. 형사님도 부담스러운 마음 꾹 참으시고 여기가 내 집이라는 마음으로 편히 지내도록 노력해 주세요.”

“그게 뭐가 참는 거예요. 아까부터 말이 이상하네?”

수현이 팔짱을 끼더니 눈을 감고 세 번 정도 호흡을 골랐다. 숨을 내쉴 때마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언제 봐도 천하절색이다 싶었다. 역시 경국지색이다. 나라는 몰라도 기어코 김도형 집은 무너지지 않았는가. 물론 수현이 불을 지른 건 아니지만.

“형사님. 한번 상황을 바꿔 보지요. 제가 허무하게 사기를 당해 빈털터리로 내쫓겼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럴 리가요.”

“믿음직한 친구인 김도형 형사님이 계시는데도 제가 경찰에 사기 신고도 안 할 것이며 노숙인 쉼터에서 지내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형사님 마음이 어떠시겠습니까?”

“그건 좀 그렇죠. 내가 그렇게 의지가 안 되나 싶어서 되게 속상하겠죠.”

“역시 그렇죠?”

“어, 네…. 무슨 뜻인지 알았어요.”

도형이 어물어물 말꼬리를 흐리자 수현이 팔짱을 풀고 희미하게 웃었다.

“어차피 제 것은 전부 형사님 것이나 마찬가지인걸요.”

“그게 또 왜 그렇게 됩니까.”

“제 마음이 형사님 것이니 제 것은 모두 형사님 것이지요.”

“아이, 진짜…. 쓸데없는 소리는 됐고요. 이 집에서 건들면 안 되는 거나 들어가면 안 되는 방이나 뭐 그런 거 있어요?”

수현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유쾌하게 웃었다.

“푸른 수염의 성이 아니라서 그런 곳은 없습니다. 피로 물든 열쇠 같은 건 굳이 찾지 않을 테니까 아무 데나 가셔도 됩니다. 아, 서재는 들어오시기 전에 노크 한번 부탁드릴게요. 미국 시각에 맞춰 화상 회의를 할 때가 많아서요.”

푸른 수염이라고 생각했던 걸 들켰나. 수현의 입에서 먼저 그 이야기가 나오자 도형은 속내를 읽힌 것 같아 순식간에 귀가 빨개졌다. 예, 아니지요. 푸른 수염 아니지요. 푸른 수염보다 그쪽이 훨씬 더 무서워요.

“네. 뭐, 책도 안 보는데 내가 서재 갈 일이 있겠나.”

“저 보러 오실 수도 있죠.”

“아유, 진짜.”

도형이 입을 불퉁스럽게 내밀고 구시렁거리자 수현이 도형의 입술에 긴 검지를 올려 가볍게 눌렀다.

“그리고 제가 출장으로 집을 비운 날은 제 침대에서 주무셔도 됩니다.”

“호응?”

손가락에 가로막힌 입술은 제대로 된 소리를 내는 대신 살짝 벌어진 틈으로 멍청이 같은 비음만 흘렸다.

“제가 그리우실 테니 익숙한 향기에 휩싸여 그리움을 달래시라는 의미로 관리인에게 이불과 시트를 갈지 말라고 전해 두겠습니다.”

“미쳤어, 미쳤어. 진짜 미쳤어!”

도형이 방방 뛰며 야단법석을 떨자 수현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목을 울리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 맞다. 제가 집안일이라도 좀 할까요?”

“안 됩니다.”

“아니…. 내가 너무 염치없는 거 같고, 마음이 불편해서 그래요.”

“계속 불편하게 계세요.”

“오늘 왜 이렇게 말을 삐딱하게 해요?”

“원래 마음이 불편한 일과 몸이 불편한 일이 있으면 마음이 불편한 일을 선택하는 겁니다. 몸이 불편한 일을 하다 보면 결국 마음마저 불편해지거든요. 마음이 불편한 정도는 곧 괜찮아집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서요.”

“친구가 집 좀 치워 주고 할 수도 있지.”

비록 소리 내어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수현은 온 얼굴로 “미치겠군.”이라고 표현하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형사님. 방을 쓰는 대가로 집안일을 하겠다 하시면…. 그건 특별한 사이가 아니라 거래죠.”

“전 그럼 손 놓고 그냥 퍼져 있으라고요?”

“그리고 이 집에는 종합 관리인, 전기 시설 담당자, 가사 도우미, 정원사가 별도로 있습니다. 그분들 일을 뺏지 마세요.”

“아…, 네….”

“오늘 여러모로 지치셨을 테니 얼른 주무시죠. 이번 주는 연가 받으셨다고 하셨으니 내일 아침에 깨우지 않을게요. 허리가 아플 때까지 늦잠 주무세요.”

***

똑똑- 

둘밖에 없는 집에서 다른 이의 침실 문을 두드릴 사람은 침실 주인이 아닌 사람이겠지. 수현은 다소 의아한 마음으로 “네.” 하고 아직 자고 있지 않음을 알렸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빼꼼 얼굴을 들이민 도형이 “일하는 중이에요?”라고 묻기에 수현은 보고 있던 태블릿 PC를 접어 사이드 테이블에 올려놓고 도형을 손짓해 불렀다.

“마침 딱 맞춰 끝났습니다.”

“들어가도 돼요?”

“물론이죠.”

옆구리에 베개를 낀 도형이 멀뚱하니 문간에 서서 머뭇거리기에 수현이 다시 한번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안 오시면 제가 갑니다.”

“아니, 그게요. 강 선생님. 제가 절대로 강 선생님한테 손 안 댈 테니까요. 진짜 손가락 하나 안 건드릴 테니까… 저 오늘만 여기서 자면 안 될까요?”

“안 될 리가요. 이리 오세요.”

수현이 이불을 젖히고 도형이 들어올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팔을 움직이자 상의를 벗고 있던 수현의 근육이 꿈틀거리며 약동했고, 이불이 걷히자 팬티 한 장 아래로 탄탄한 허벅지가 드러났다. 도형은 애써 못 본 척하며 꿈지럭꿈지럭 머리맡의 베개를 끌어다가 수현의 다리 옆에 두고 제가 가져온 베개를 침대 위로 올렸다.

“베개는 뭐 하러 가져오셨어요?”

“강 선생님 베게 끌어안고 주무신다면서요.”

“형사님 끌어안고 자면 되는데요.”

“저 진짜로 선생님 안 덮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생각보다 좀 충격을 받았나 봐요. 혼자 누워 있으려니까 별생각이 다 들어서 안 되겠더라고."

자신이 수현을 덮칠까 봐 수현이 무서워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지금 위험한 사람이 누군데. 수현은 자꾸 웃음이 나서 옆으로 누운 채 팔꿈치를 세워 고개를 괴고 똑바로 누운 도형을 내려다보았다.

당신이 와서 제가 위험해진 것이 아니라 당신이 위험한 곳에 온 겁니다.

“강 선생님.”

“네.”

“미국 사람은 다들 그렇게 남 돕는 거 좋아하고 동정심 많고 친절합니까?”

“네?”

“그렇잖아요. 어려운 나라에 봉사단 보내, 도로 닦아 줘, 식량 보내 줘, 학교 세워 줘. 우리 보육원도 옛날에 미국 어디에서 후원금 보내 준 적 있거든요."

“글쎄요. 왜요? 갑자기 미국이 좋아지셨어요?”

“강 선생님도 미국 사람이라서 이렇게 친절하고 나한테 잘해 주나 싶어서요.”

수현이 똑바로 누워 있던 도형의 몸을 잡아당겨 자신을 마주 바라보도록 모로 눕혔다.

“제가 형사님께 친절….”

도형이 검지를 들어 아까 수현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입술을 꾹 눌러 입을 막았다.

“그냥 미국 사람이라서 그런 걸로 해요.”

수현이 뚱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이 바삭바삭한 목소리로 도형이 말을 이었다.

“손가락 하나 안 대기로 약속해 놓고 바로 말 바꿔서 면목 없는데요…. 마음이 영 진정이 안 돼서 그러는데 혹시 키스해도 됩니까?”

도형의 손가락을 잡아떼어 손끝에 가볍게 입 맞춘 수현이 제 이마를 도형의 이마에 콩 부딪치고 얼굴을 맞댄 채 간질간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입술을 안 대겠다는 말씀은 안 하셨으니 약속 위반은 아니죠.”

말이 끝나자마자 도형이 성급하게 입술을 붙여 왔다. 제법 능숙한 키스였다. 혀로 수현의 입술을 할짝대다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게 물었다. 수현의 입이 벌어진 틈에 붉은 혀가 수현의 입술을 벌리고 이를 비집고 들어와 입안 구석구석을 헤집었다. 뒤로 물러서는 수현의 혀를 집요하게 따라온 도형의 혀가 기어코 두 살덩어리를 얽히게 하더니 혀 아래를 살살 간질이며 수현의 혀를 제 입으로 인도해 끌어들였다.

김도형은 발칙할 정도로 배움이 빠른 남자였다. 단 하룻밤만에 이 정도로 농밀함을 익히다니, 앞으로 얼마나 더 수현을 녹여 먹을 셈인가. 수현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도형의 몸에 팔을 둘러 그를 바짝 끌어안았다. 얇은 파자마 한 겹을 두고 두 사람의 체온이 섞였다.

긴 입맞춤에 숨이 모자랐는지 도형이 헐떡거리며 먼저 입을 뗐다. 굴러 들어온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수현은 도형을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두 사람 사이에 강처럼 놓인 베개를 발로 차서 밀어 버리고, 연신 쪽쪽 소리를 내며 사랑하는 얼굴 곳곳에 입술 도장을 찍었다.

“제 쪽에서 형사님께 손을 대지 않겠다는 약속 또한 하지 않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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