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 형사가 식탐을 못 숨김(1권) (1/10)
  • Chapter 1. 형사가 식탐을 못 숨김

    수현은 유난히 볕이 사납던 초여름 그날, 충동적으로 길을 건너는 대신 곧장 발길을 돌려 회사로 돌아갔으면 어땠을까 생각하게 된다. 물론 그것은 모든 사건이 전부 지나가고 나서도 한참이나 지난 뒤의 일이었다.

    분명 여기쯤이었는데 말이야. 가물가물한 옛 추억을 더듬으며 수현이 엄지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10년이면 강산이 바뀐다는 대한민국에서 30년이 지났으면 들이 산이 되고 평야가 바다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터. 수현이 기억하는 고즈넉한 주택가는 이미 월 스트리트 부럽지 않은 마천루로 바뀐 지 오래였다.

    혹시 저쪽이었나. 아마도 해가 너무 뜨거워 올바른 판단력을 잃었던 것이 분명했다. 알 수 없는 열기에 휩싸인 수현은 휑할 정도로 고요한 길 건너편을 노려보았다. 한낮의 태양에 지나치게 달궈진 탓인지 어른어른한 시야를 미간을 좁히는 것으로 애써 고정한 수현은 진득하게 따라붙는 햇살을 등지고 다소 조급하게 길을 건너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불길한 예감은 어긋나는 법이 없지. 길 건너편은 대문마다 철거 딱지가 덕지덕지 붙은 재개발 구역이었다. 두 사람이 마주치면 어깨가 스칠 정도로 좁은 골목 한가운데에서 수현은 연신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길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꽤 깊이 들어온 모양이었다. GPS 지도에도 거미줄 같은 샛길은 표시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길을 지나는 사람도 없어 수현은 거미줄에 감겨 언제 올지 모르는 포식자만 기다리는 불운한 곤충이 된 기분이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과자 조각이라도 뿌리면서 들어올 걸 그랬지.

    -2팀, 11시 방향 수색 시작.

    -6팀, 운반책 꼬리 잡았습니다. 계속 추적 중.

    -6팀, 전방 골목에서 좌회전합니다. 회색 옷에 검은 가방입니다.

    멀리 보이는 고층 건물을 기준으로 삼아 방향을 가늠하던 수현의 귀에 여러 명이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2팀, 회색 옷에 검은 가방 발견.”

    멀게 들리던 소리가 가까워졌다. 수현은 걸음을 멈추고 미로의 구원자를 기다렸다. 막다른 길인 줄 알았던 회벽에서 불쑥 사람이 튀어나왔다. 얼마 만에 만나는 사람인가. 수현은 반색할 틈도 없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수현의 세상이 뒤집혔다.

    ***

    회색 옷에 검은 가방. 회색 옷에 검은 가방. 저놈이다. 도형은 전방에서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남자를 발견하고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용수경찰서 경제범죄수사과 세 팀이 한 달째 쫓고 있는 보이스 피싱 조직의 두목, 부진호. 저놈은 반드시 내 손으로 잡는다. 개새끼, 넌 뒤졌어.

    “너 때문에 우리 애 생일도 못 챙겨 줬잖아!”

    도형은 자신이 어릴 때 젖을 먹지 못했던 것은 미처 쓰지 못했던 젖 먹는 힘을 바로 오늘 짜내라는 신의 안배였음을 깨달았다.

    오늘의 기분, 용마동 미친 버펄로.

    나비처럼 날아서 전갈처럼 쏜다. 전갈이 아닌가? 아니면 어떤가. 저놈은 여기서 끝인데. 도형은 투우사에게 돌격하는 싸움소처럼 온몸을 던져 어깨로 남자의 등을 밀었다. 저 덩치에 밥을 날로 먹지는 않았는지 놈은 제법 힘이 좋아서 도형이 몸무게를 실어 날린 일격에도 넘어지지 않고 약간 비틀거리는 정도에 그쳤다. 결국 도형은 놈을 뒤에서 껴안고 허리 후리기 기술을 걸어 바닥으로 메쳤다. 도형보다 놈이 키도 덩치도 훨씬 컸지만, 도형도 태권도 4단과 유도 초단, 합기도 3단, 검도 2단, 도합 10단의 단증을 날로 딴 것은 아니다.

    “아, 내가 기술까지는 안 쓰려고 했는데….”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자빠진 부진호를 깔고 눌렀다. 끈질기게 버둥거리는 것이, 역시 천하의 김도형을 몇 달이나 엿 먹인 놈 아니랄까 봐 부진호는 한 손으로 수갑 채우기가 버거울 만큼 힘이 셌다. 도형은 원한을 담아 팔꿈치로 부진호의 등 가운데 급소를 쿡 눌렀다. 그제야 놈이 겨우 몸에서 힘을 뺐다.

    “부진호 씨. 사기, 공문서 위조, 범죄 단체 가입 및 활동 혐의로 긴급 체포합니다.”

    도형은 바로 무전기에 대고 검거 완료의 기쁨을 전했다.

    “2팀, 용의자 부진호 검거 완료.”

    -김도형! 야, 인마! 안 돼! 동작 그만!

    “부진호 씨.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지금부터 하는 말은 불리한 증거가 될 수 있으며,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습니다.”

    엎드린 놈은 미동조차 없었다. 저항해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이제 깨닫다니. 어리석은 범죄자의 말로는… 기절했나? 저기요. 혹시 죽은 척? 도형은 남자의 옆에 쭈그리고 앉아 어깨를 콕콕 찔렀다.

    “꾀병 소용없어요. 자자, 일어납시다.”

    멀리에서 보았을 때도 크다고는 생각했지만, 길게 엎어져 있는 놈은 도형의 예상보다 훨씬 컸다. 부진호가 이렇게 컸던가. 도형은 갑자기 서늘해진 뒷목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부진호 키가 168cm라고 했던 거 같은데. 눈앞의 남자는 대충 가늠해 보아도 그보다 20cm는 넘게 길었다.

    설마. 에이, 설마.

    “으음….”

    이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부진호가 미약하게 앓는 소리를 냈다.

    “부진호 씨.”

    “…….”

    “부진호… 씨…?”

    “…….”

    지축을 울리는 발소리와 함께 도착한 팀장과 동료들이 도형을 에워쌌다. 동시에 무전기에서 생각지도 못한 전음이 흘러나왔다.

    -6팀, 부진호 검거 완료.

    -11팀, 인출조 및 전달조 전원 검거 완료.

    “이 미치광이야, 11시라고 했는데 1시로 가면 어떡해!”

    “헉.”

    “헉? 허억? 헉 소리가 나와, 지금? 헉은 내 숨넘어가는 소리다. 이 새끼야. 내가 너 때문에 수명이….”

    “이거 부진호 아니에요?”

    도형이 벌벌 떨리는 손가락으로 엎드려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아, 미친….”

    2팀 팀장 선우진이 눈을 부라리며 당장 남자를 일으켜 세우라고 소리 없이 윽박질렀다. 도형의 손끝에서 시작한 떨림이 전신으로 퍼지기까지 단 10초. 도형은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물건을 만지는 손길로 조심조심 남자를 부축해 일으켰다.

    한눈에 보아도 고급스러운 회색 양복은 흙투성이 걸레가 되었고 남색 넥타이는 망나니의 머리띠처럼 대충 풀려 오른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남자가 살짝 고개를 흔들자 이마로 쏟아져 내린 짙은 밤색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분명 30분 전만 하더라도 멋들어지게 손질되어 단정하게 고정되어 있었을 것이 분명한 머리카락이 흩어지자 상아색 이마가 드러났다.

    죄책감과 불안감과 공포와 충격이 뒤섞여 이성이 반쯤 날아간 상태로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본 도형은 나머지 절반의 이성이 그대로 휘발되는 소리를 들었다.

    조각상처럼 높은 콧대와 어디 한 군데 휘거나 눌린 곳 없이 곧게 뻗은 콧날, 콧대만큼이나 반듯한 눈썹 뼈 아래 자리한 기름한 눈매. 눈을 천천히 깜빡일 때마다 팽팽한 뺨에는 기다란 속눈썹 그림자가 드리웠고, 잘생긴 귀에서부터 날렵하게 빠진 턱선은 맵시 있는 이탈리아제 스포츠카처럼 관능적이었다. 산이 또렷한 입술은 산뜻한 선홍빛이었고 윗입술보다 살짝 도톰한 아랫입술은 여름의 과일을 닮았다.

    남자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도형의 가슴이 스포츠카 배기음처럼 웅장해졌다. 그러니까 방금 도형이 때려눕힌 남자는 엄청난, 그야말로 혼을 쏙 빼놓을 만큼 어마어마한 미남이었던 것이다.

    미남의 입에서 나지막한 한숨이 흘러나오자 도형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디가 아픈가? 불편한가? 넋을 잃고 바라볼 때는 미처 몰랐는데, 아름다운 유백색 관자놀이에 살짝 붉은 기운이 비쳤다. 아무래도 거칠게 메쳐질 때 바닥에 긁힌 자국인 듯했다. 도형은 저 백옥 같은 얼굴에 한 점 티를 남긴 대역죄인을 광화문 네거리에 매달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정말이지 용서할 수 없었다. 비록 제가 한 짓이지만.

    “일으켜 주셔서 고맙습니다.”

    “죄송합니다!”

    선우 팀장이 도형보다 빠르게 허리를 굽혀 사과했다. 그는 도형의 뒤통수를 바닥을 향해 내리꽂듯이 후려쳤다.

    “김도형 경장. 뭘 멍청하게 서 있어!”

    “아, 아… 죄송합니다!”

    “일단 이것부터 풀어 주시겠습니까?”

    우수에 젖은 눈동자가 도형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또 한 번 홀릴 뻔했던 도형은 선우진이 내뿜는 짙은 살기에 화들짝 정신을 부여잡고 주머니를 뒤적이다가 퍼렇게 질려서는 허둥지둥 말을 더듬었다.

    “어, 어디, 어, 왜 없지? 어? 이상한데? 어… 왜 이러지? 저기, 저, 여, 열쇠를 부, 분실한 것 같습니다.”

    “하아. 가지가지 한다, 진짜. 수갑 열쇠 있는 사람? 얼른 풀어 드려.”

    “도형이 수갑 신형이라 제 것이랑 모델 달라서요. 저희 열쇠로는 안 열립니다.”

    시체 같은 안색을 한 도형이 주먹을 쥐었다 풀었다 하며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선생님. 정말, 너무 면목이 없습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너무 죄송한데요…. 경찰서로 모셔서 풀어 드리면, 경찰서로 함께 가 주시면, 그게… 혹시 안 되겠습니까?”

    “아.”

    영혼이 탈탈 털린 사람은 그 하나뿐이 아니었다. 선우 팀장의 까무잡잡한 얼굴이 시퍼렇게 질린 것을 본 도형이 눈꺼풀을 질끈 닫았다. 길지 않았던 경찰 공무원의 인생, 오늘 이 자리에서 끝이구나. 용마동 미친 버펄로의 끝은 도축장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용수경찰서 관할 구역 내에는 축산 시장도 있다. 어쩐지 오늘 아침에 뜯은 라면에 다시마가 두 개 들어 있더라니. 아마도 그게 도형의 마지막을 위로하는 작지만 확실한 행운이었나 보다.

    하필이면 도형이 수갑을 뒤로 채운지라 불운한 피해자는 경찰차를 타고 가는 내내 어깨를 작게 움찔거렸다. 어쩌면 도형이 냅다 바닥으로 메다꽂았을 때 관절이나 인대를 다쳤을지도 모른다. 그가 불편한 티를 안 내려고 참는 중이라는 것이 느껴졌기에 도형의 마음은 백배로 더 불편해졌다. 차라리 욕을 하시지. 발로 걷어차셔도 괜찮은데.

    하필이면 회색 양복을 입고 검은 가죽 서류 가방을 들고 계실 건 뭐람…. 나는 그냥 회색 옷에 검은 가방만 보고 돌진한 건데….

    아무리 변명을 궁리해 봐도 그저 옹색하기만 할 뿐. 도형은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누구를 탓하겠나, 스스로 불러온 재앙인 것을. 저 하늘 위로 날아간 공무원 연금에 작별을 고하며 제발 그가 소송만 걸지 않기를 간절하게 빌었다. 아, 경찰 잘리면 뭐 먹고살지….

    “용수경찰서 경제범죄수사 2팀 선우진 팀장입니다.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용수경찰서 경제범죄수사 2팀 김도형 경장입니다.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부하의 실책은 팀장인 저의 실책입니다. 부디 김도형 경장이 아니라 저를 꾸짖어 주십시오. 전부 제 책임입니다.”

    “아닙니다. 지시를 불이행하고 일탈 행동을 한 제 잘못, 제 책임입니다. 제발 팀장님께는 불이익이 가지 않도록 선처해 주시기를 간절하게 부탁드립니다.”

    수현은 허리가 꺾어져라 사과하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상대를 감싸려 애쓰는 팀장과 도형을 평평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화를 내지도, 그렇다고 괜찮다든지 별일 아니라든지 하는 용서의 말을 하지도 않고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도형의 머리꼭지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수갑, 부탁합니다.”

    아직 떨림이 멎지 않은 도형은 손을 덜덜 떠느라 수갑 열쇠를 제대로 끼워 맞추지도 못했다. 도형의 긴장이 전해진 걸까. 수현이 등 뒤에서 큼큼 어색한 밭은기침을 하는 도형에게 말을 건넸다.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그 말이 주문이라도 되었나 보다. 수갑이 찰그랑 소리를 내며 풀렸다. 수현은 손목을 몇 번 털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침착하게 서서 일선 경찰서 시찰 나온 치안총감 같은 위엄을 뽐냈다.

    “김 경장. 가방 드려야지.”

    “아, 넵!”

    도형이 여전히 잘게 떨리는 두 손으로 검은 서류 가방을 공손하게 바쳤다. 여전히 수현과 눈을 못 맞추고 발끝만 바라보는 도형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수현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한숨에서 무슨 기미를 느낀 건지 도형이 눈에 뜨이게 움찔했다. 수현은 말없이 가방을 받아 들고 고개를 살짝 기울여 바짝 긴장한 도형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창백해 보일 정도로 새하얀 뺨은 누적된 피로 때문인지 해쓱했고 눈 아래는 다크서클이 번져 푸르스름했다. 광대 언저리와 턱에 갓 생긴 얕은 생채기가 있는 거로 보아 아까처럼 범인을 쫓다가 넘어지고 구르는 일은 일상다반사인 듯했다. 마르고 갈라진 입술은 오른쪽 끝이 찢어져 피딱지가 앉은 것이, 보기만 해도 한숨이 나오는 몰골이었다.

    “형사님. 미식축구 잘하실 것 같아요.”

    “네?”

    그제야 도형이 내내 내리깔고 있던 눈을 치켜뜨고 수현을 마주 쳐다보았다.

    “돌진 실력이 대단하시던데요. 스피드도 파워도 나무랄 데가 없었습니다.”

    “윽.”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선생님, 존함이라도 알려 주시면….”

    대답 대신 가볍게 웃음을 머금자 수현의 보기 좋은 입술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장면이 저렇게 아름다운 모습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도형은 침을 꿀꺽 삼켰다. 역시 저 사람이 가려는 곳은 서장실일 테지. 도형은 귀에 들릴 만큼 큰 소리로 숨을 몰아쉬며 꼴깍거렸다.

    그러나 수현은 서장실을 그대로 지나쳐 1층으로 내려갔다. 그렇다면 곧장 민원실로 가려는 건가. 수현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르는 도형과 선우 팀장의 속내는 용마 2D 재개발 구역 골목길보다 5억 배는 더 복잡했다. 그런 두 사람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현은 늘씬한 다리를 우아하게 움직여 순식간에 현관으로 직진했다.

    “바쁘실 텐데 여기까지 배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현은 살짝 고개를 까딱하고 바로 사뿐 몸을 돌렸고, 도형은 뱃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을 담아 우렁차게 외쳤다.

    “조심히 살펴 가십시오!”

    현관 계단을 다 내려가기도 전에 퍽 하고 납작한 표면이 단단한 물체에 세게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잠깐 멈칫했던 수현은 그사이에 익숙해진 목소리가 귀청을 때리자 안심한 듯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아, 팀장님! 아파요.”

    “아프라고 팼다. 김도형, 너 이 새끼야, 움직이기 전에 생각 좀 하랬지.”

    “차라리 조인트를 까시라니까? 자꾸 뒤통수만 패니까 머리가 계속 나빠져서 생각을 못 하잖아요.”

    “이 새끼가?”

    수현의 입가에 희미하게 스쳤다가 바로 사라진 미소는 다행히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

    철썩하고 피부와 피부가 차지게 부딪치는 소리가 오후 3시 반의 어수선한 호텔 로비에 울려 퍼졌다. 고급스러운 라운지 바를 가득 메운 손님도 화려한 로비에서 어정거리던 손님도 일시에 소리가 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수십 개의 눈알이 도르르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 식충아!”

    곱게 차려입은 여자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자 찰랑찰랑한 생머리가 어깨 위에서 흔들렸다. 분을 못 이겨 큰소리를 냈지만 자기를 향해 쏟아지는 시선이 무거웠는지 여자는 입술을 앙다물고 곧장 자리를 떴다. 치정 싸움인가. 호되게 뺨을 맞은 남자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버럭 화를 낼까. 여자를 따라 나가 붙잡을까. 고개를 들고 잠깐 천장 샹들리에를 바라보던 남자는 테이블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설마 우는 건 아니겠지.

    “대표님.”

    수현은 가까이 다가온 수행 비서의 기척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몸을 돌렸다.

    “정문에 차 대기 중입니다.”

    “주말까지 수고 많았습니다. 데이빗은 이만 들어가요. 난 여기서 볼일이 있어서요. 차는 발레 맡기고 번호만 문자로 찍어 줘요.”

    “대표님, 어떤 일정이신지….”

    수현은 가볍게 손을 내저어 데이빗의 말을 막았다.

    “개인 일정입니다.”

    유능한 비서는 즉각 상사의 뜻을 이해하고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데이빗이 호텔 정문을 나서는 것을 확인한 수현은 다시 라운지 바로 시선을 돌렸다. 남자는 어쩌고 있으려나. 의기소침한 얼굴로 테이블만 노려보고 있으려나.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수현이 눈꺼풀을 빠르게 껌뻑였다. 말문이 막혔다. 수려한 얼굴에 허탈한 미소가 번졌다.

    남자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얼굴로 망고 빙수를 먹고 있었다.

    수현은 느리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순간적으로 그의 뇌리에 스쳤다가 곧장 휘발된 단어는 다름 아닌 실망. 왜일까. 저 행복하게 웃는 얼굴을 보고 왜 실망이란 두 글자를 떠올린 걸까. 아랫배가 조여 오는 기분이었다. 마치 무의식에 이끌리기라도 한 양 수현의 발걸음이 라운지 쪽으로 향했다.

    “김도형 형사님, 안녕하십니까.”

    “에?”

    세상을 다 얻은 사람처럼, 아니 모든 것을 다 이루고 우화등선하기 직전의 도인처럼 무념무상 빙수에 빠져 있던 남자가 하얀 얼굴을 들어 수현을 쳐다보았다. 입가에 묻은 우유 얼음이 체온에 녹아 하얗게 번졌고, 새빨간 혀가 날름 튀어나와 추위로 약간 보랏빛이 도는 입술을 핥았다. 은은하게 붉은 손바닥 자국이 남은 오른뺨이 이상할 정도로 선정적이었다.

    새카만 눈으로 수현을 멍하니 올려다보던 김도형 형사의 얼굴 위로 홍조가 진하게 번졌다. 움찔 놀란 도형이 일부러 이를 드러내고 크게 웃음을 지어 보이려다가 이내 입술을 꾹 다물고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아… 선생님. 저번에는 정말 실례가 많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일하시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

    “너그럽게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앉으세요.”

    어른의 품격을 보여 줄 때이다. 수현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살래살래 흔들었다. 도형은 몇 번이나 허리를 굽신거리며 부담스러울 정도의 큰 목소리로 사과와 감사를 번갈아 외쳤다.

    “그게, 제가 큰 무례를 범해서. 어디 다치신 데는 없는지 먼저 사죄 뵙고 찾아 드렸어야 하는데, 아니, 인사드렸어야… 아니, 찾아뵙고 사죄를….”

    연신 횡설수설하며 고개를 들지 못하는 도형을 향해 주변의 시선이 점점 모여들었다.

    “아니에요. 앉으시죠. 앉으세요.”

    수현은 마치 원래부터 자기 자리였던 양 뻔뻔하게 도형의 앞자리를 차지하고는 도형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권했다. 당황에 이성이 날아가 버린 도형은 갑자기 다가와 허락도 없이 냉큼 합석한 수현을 수상하다 여기지도 못하는 듯했다.

    “선생님, 정말 너무너무 죄송했습니다. 그날은 제가 정신이 어떻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도형의 커다란 눈은 순하게 둥글둥글한 것이 아니라 눈꼬리가 살짝 치켜 올라간 데다가 눈 아래가 도톰하니 은근하게 불그스름해서 묘하게 색기가 돌았다. 쌍꺼풀도 없는 눈이 이렇게 클 수 있구나. 거기다 피부는 늘 밖으로 도는 사람답지 않게 뽀얗고, 턱과 코 아래는 사춘기를 맞기 전의 남자아이처럼 보송보송해서 전체적으로 말간 느낌이 들었다. 세간에서는 이런 얼굴을 고양이상이라고 부르던가.

    하지만 내가 보고 싶은 얼굴은 저런 게 아니라….

    수현은 다시 손을 내저어 도형에게 하던 일을 마저 하라는 뜻을 전했다. 동공이 새카맣게 벌어진 눈으로 수현의 손끝을 따라가던 도형은 어깨를 움찔 떨더니 한낮의 눈사람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한 눈꽃 얼음을 아련하게 바라보았다.

    “녹기 전에 어서.”

    흘끔 눈만 들어 수현을 쳐다보는 도형에게서 망설임이 읽혔다. 의무 교육이 길러 낸 교양인의 상식과 본능에 충실한 먹보의 영혼이 격하게 충돌하는 중인지 조막만 한 얼굴에 총천연색 표정이 선명한 그러데이션을 그렸다. 그야말로 호화찬란한 감정의 향연에 눈이 부셨다.

    수현은 작게 손을 올려 라운지 직원을 불렀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도형을 향해 “차가운 건 잘 못 먹어서요.”라고 말하며 웃자 도형이 그제야 안심한 듯 수현을 따라 웃었다. 도형은 자기 앞으로 그릇을 끌어오더니 참말로 소담스럽게 빙수를 먹기 시작했다.

    수현은 연신 눈을 찡긋거리는 도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몇 번이나 눈을 깜빡거리길래 어디가 아파서 그러는가 싶었는데, 단지 차가운 것을 많이 먹어서 그런 것이었다. 찬 기운에 익숙해진 도형의 둥근 눈이 큰 호선을 그리며 부드럽게 휘었다.

    아아. 혼자 먹기 민망해서 쳐다본 게 아니라 나눠 먹기 싫어서 그랬던 거구나.

    수현은 실소가 새어 나와 탁자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괴는 척하며 입을 가리고 웃었다. 절로 들썩이는 어깨를 진중하게 눌렀다. 재미있다. 정말로 재미있었다. 열혈 형사께서는 식탐이 강한 모양이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도형은 빙수 그릇을 싹싹 비우고 만면에 그득한 미소를 지었다. 생기가 너울거리는 눈은 행복의 색으로 환하게 빛났다. 그렇게 좋을까. 어린아이가 투레질하듯 도형이 제 양팔을 감싸 안고 작게 부르르 떨었다. 아까도 살짝 보랏빛이 돌던 입술이 파랗게 얼었다.

    “추우신가 봐요.”

    “아, 조금 춥네요. 얼음을 퍼먹었더니. 하하.”

    “따뜻한 차 한잔하시겠습니까?”

    수현이 다시 손을 들어 직원을 불렀다.

    “따뜻한 아메리….”

    “아이스 화이트초콜릿 라테 바닐라 엑스트라요. 생크림 넉넉하게 부탁합니다.”

    “차가운 걸 또 드시게요?”

    “아까 메뉴에서 봤는데 맛있을 것 같아서요.”

    수현에게는 마법사의 주문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긴 이름을 매끄럽게 발음한 도형은 새침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것, 참. 그는 식탐뿐이 아니라 호기심도 많은 듯했다. 고양이를 닮은 건 눈만이 아니었나.

    “그럼 저도 한 잔 더 할까요.”

    게이샤 원두 드립 커피를 시키려던 수현이 주문을 바꾸어 루왁 커피를 시켰다. 순전히 도형 때문이었다. 아무리 봐도 고양이를 닮았기에. 사향고양이도 어쨌든 고양이 아니겠는가. 수현은 우아하게 입꼬리를 살짝 누르는 것으로 갑작스럽게 터져 나오려던 웃음을 억눌렀다. 눈앞의 사람 고양이에게 커피콩을 먹이면 어쩌려나. 쓰다고 울려나, 아니면 털을 세우고 화를 내려나.

    “형사님 혼자 빙수 드시러 오신 건가요?”

    수현은 능청스럽게 물었다. 아무것도 못 본 척 태연하게. 도형은 머쓱하게 웃으며 콧등을 살살 긁었다. 아무래도 당황하면 콧등을 긁는 습관이 있는 듯했다. 도형의 손은 얼굴만큼이나 하얬으나 곱상한 얼굴 생김새와 다르게 손가락 마디가 제법 굵었고, 말보다 몸이 먼저 나가는 과격한 형사답게 손등에는 진한 흉터가 몇 개나 있었다.

    “아니요. 사실은 데이트하러 온 건데….”

    데이트라. 역시 아까의 소동은 과격한 사랑싸움이었던 건가.

    “차였어요.”

    “아, 이런.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슬프거나 괴롭거나 그런 건 없어요. 그분이랑 소개팅으로 만나서 오늘이 세 번째 보는 거였거든요. 세 번 만나면 앞으로 진지하게 사귈지 그냥 안 볼지 결정해야 한다면서요? 저는 잘 모르겠던데. 세 번 만나서 뭘 압니까. 뭐, 따귀까지 맞고 차였으니 이제 그런 고민 안 해도 되고 좋네요.”

    할 말을 가늠해 보려는 듯 고개를 한쪽으로 살짝 기울인 수현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어쩌다 그 여성분께서 그렇게까지 화를 내셨는지 여쭈어보아도 될까요?”

    “제가 빙수 혼자 먹는다고요.”

    “네?”

    그러고 보니 도형의 데이트 상대는 머리끝까지 화가 난 목소리로 식충이라고 외쳤더랬다.

    “아니, 선생님. 제 말 좀 들어 보십시오.”

    “강수현입니다.”

    “아, 네. 강 선생님.”

    이름을 알려 주었는데도 굳이 선생님이라고 부르다니. 눈치가 없는 건지, 고집이 센 건지.

    “빙수는 원래 1인 1빙 아닙니까? 침 묻은 숟가락 한 그릇에 같이 넣고 먹는 거, 좀 그렇잖아요. 제가 다른 사람이랑 한 뚝배기로 찌개 같이 먹고 그러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도형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뾰로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눈꼬리가 샐쭉하게 접히는 것이 성격이 제법 앙칼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니지. 다시 보니 앙칼진 것이 아니라 앙큼한 것 같기도 했다.

    “근데 말이죠. 더 싫은 게 있습니다.”

    “뭘까요, 그게.”

    “빙수 비비는 거요.”

    “그렇군요.”

    “그걸 왜 비벼? 그럴 거면 슬러시를 마시지. 빙수라 하면 자고로 얼음 위에 연유, 그 위에 과일을 얹어서 겹겹이 조화롭게 쌓인 맛을 즐기는 거 아닙니까? 숟가락으로 쓱쓱 비비면 우유가 다 녹아서 질척질척 눈 녹은 도로처럼 되잖아요. 심지어 그걸 침 묻은 숟가락으로…. 어휴, 그건 빙수 만든 사람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요. 저 그거 너무 싫습니다. 진짜 싫어요.”

    그가 빙수의 미학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사이 주문한 음료가 나왔다. 도형은 흐뭇한 얼굴로 아이스 어쩌고 위에 수북하게 올라간 생크림부터 한입 크게 떠먹었다. 당도며 농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높이 치켜든 턱선과 훤히 드러난 목선이 눈부셨다.

    “으아, 뒤통수 시려.”

    도형이 눈을 찡긋거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호텔 카페는 이게 문제예요. 아주 그냥 한 번 빨면 없어요. 야박해, 야박해.”

    “맛은 어떠십니까?”

    “만구천 원짜리가 맛까지 없으면 되겠습니까. 바로 주방 압수 수색하고 주방장 구속해야죠. 아, 맞다. 선생님, 그래서 말입니다. 제가 그 여성분께 빙수를 따로 하나 시켜 드시라고 했죠. 그랬더니 뭐라고 하신 줄 아십니까? 한 입만 먹으면 된다는 겁니다.”

    “한 입만.”

    “네. 한 입만. 제가 두 번째로 싫어하는 게 “한 입만.”이거든요. 아니, 왜 남의 음식에 탐을 내. 저는 부족하게 먹는 거 딱 싫습니다. 먹고 죽은 귀신도 때깔이 좋다는데 먹고 산 사람 때깔은 오죽 좋겠습니까?”

    얼마나 열정적인 웅변인지 피도 눈물도 없는 냉철한 사업가 강수현마저 설득되지 않을 수 없었다. 수현은 도형의 그럴싸한 말에 그저 고개만 주억거렸다.

    “그렇죠. 저도 감질나게 먹는 건 별로입니다.”

    “강 선생님이 뭘 좀 아시네.”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우쭐거리던 도형이 양옆으로 두 팔을 길게 늘어뜨렸다.

    “한 입 주기 싫다고 했더니, 뭐.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는 뭐 어쩌란 말이냐 하는 투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지만, 아랫입술을 계속 잘근잘근 씹었다.

    “단지 빙수를 먹는 방법에 대한 의견 차이라기보다는 두 분의 가치관이 안 맞으셨던 거겠죠. 그런 경우에는 삶의 다른 부분에 대한 시각도 다를 확률이 높으니까요.”

    “강 선생님 말씀 진짜 잘하신다. 뭘 팔아도 잘되실 거 같아요. 저, 정수기는 돈이 없어서 무리지만 옥 장판 정도는 살게요.”

    정신을 쏙 빼놓을 정도로 현란하게 말을 잘하는 사람이 과연 누구 쪽인가.

    “형사님. 혹시 제가 정말로 다단계나, 그, 보이스 피싱 사기꾼 같습니까?”

    “에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그거는 정말 100% 제 잘못입니다. 철거 예정이라 아무도 없는 동네에, 심지어 그 더운 날에 넥타이까지 딱 채워 맨 사람이 또 있겠나 싶어서…. 하필이면 그때 딱 우리 강 선생님께서 회색 정장에 검은 서류 가방을 들고 계시는 바람에…. 아니, 그게 아니고… 죄송합니다. 제가 또 궁색하게 변명을….”

    “아닙니다. 저도 딱히 형사님 탓하려고 드린 말씀은 아닙니다.”

    “설마 제가 무의식중에 강 선생님께 뛰어들고 싶었나?”

    “네?”

    도형이 몸을 앞으로 쭉 내밀더니 빙글빙글 웃으며 손등으로 제 턱 아래를 가볍게 두 번 쳤다.

    “왜 모르는 척하십니까. 얼굴이요, 얼굴. 이제까지 강 선생님 미모에 반해서 어떻게든 엮여 보려고 일부러 돌진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을 것 같은데. 맞죠?”

    “그 정도는 아닙니다만.”

    “아이고, 겸손하시기까지.”

    분명 오늘 두 번째로 얼굴을 보는 사이인데도 오래간만에 만난 옛 친구를 대하듯 허물없이 말을 건다. 수현 정도로 단련된 사람이 아니고서는 조상 대대로 물려 내려온 가문의 비기까지 탈탈 털어놓을지도 모른다. 도형은 정말이지 방심할 수 없는 상대였다. 지금이야 말간 얼굴로 무해하게 웃고 있지만, 수현은 그가 필요하다면 언제든 난폭하기 그지없는 맹수로 돌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바로 그 맹수에게 두들겨 맞은 당사자이니까.

    도형이 갑자기 입술을 꾹 다물고 잠시 시선을 내려뜨렸다가 촉촉하게 젖은 눈을 들었다.

    “저기, 말씀드리다 보니 생각이 좀 정리가 되네요.”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요?”

    “처맞을 만했네요.”

    “네?”

    “저요. 진짜 싸가지 없었네요. 그분께 진심으로 사과해야겠어요. 선생님 덕분에 깨달음 얻었습니다. 소인배였어요. 얼마나 무안하셨을까. 아이고. 죽일 놈입니다, 제가. 네. 더 맞아야 해요.”

    “그럴 것까지는….”

    “말씀으로 위로 안 해 주셔도 됩니다. 선생님 얼굴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수현이 눈썹을 씰룩거렸다. 형사라는 사람들은 대체로 저렇게 넉살이 좋은 건가, 아니면 김도형이라는 인간이 특별히 사람을 즐겁게 하는 재주가 좋은 건가.

    “저 먼저 일어나도 될까요? 솔직히 조금 우울해질 뻔했는데 강 선생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말 잘 보내십시오.”

    도형이 직원을 불러 계산서를 요청하자 직원이 “이미 결제하셨습니다.”라고 정중하게 대답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콧등을 찡그린 도형이 수현을 쏘아보았다. 동공이 세로로 쫙 갈라진 것처럼 보일 정도로 기세가 돌변했다.

    그의 화난 얼굴은 수현이 상상했던 것과 똑같았다. 수현은 치아가 다 드러나도록 환하게 웃으며 도형을 향해 가볍게 고갯짓했다. 잔뜩 노기에 찬 불그스름한 눈매가 얼마나 도발적인지 도형은 알까. 도형은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며 얼굴을 찡그렸다가 풀기를 반복해 평정심을 찾으려 했다.

    “아니, 이걸 강 선생님이 내시면 어떡합니까?”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화를 억제하려는 것처럼 도형은 이를 악물며 말을 내뱉었다.

    “빨리 카드 취소하세요.”

    “이 정도는 제가 대접….”

    “세상에는 해도 되는 일이 있고,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험상궂은 표정의 도형이 꽉 쥔 주먹으로 이마를 꾹꾹 눌렀다. 자신을 박봉의 말단 공무원이라고 무시했다 생각하는 걸까. 그렇다고는 해도 이 정도로 화를 낼 일인가. 수현은 변명을 하려다가 도형의 붉게 상기된 얼굴을 보고 입술을 꼭 다물었다. 가슴에서 뭔가 퍼덕거리는 느낌이 들어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고 손을 무릎 위에 두었다.

    “대한민국은 법치 국가이고, 저는 그 법률을 수호하는 법 집행 기관에 종사하는 경찰 공무원입니다.”

    “네.”

    그게 어떻다는 거지.

    “김영란법 위반입니다!“

    “제가 실례… 했습니까?”

    “실례가 아니고 위법입니다. 법을 위반하신 거라고요. 여기 보세요. 빙수 하나가 이미 3만 원 넘지요? 설마 김영란법, 아니 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 금지에 관한 법률 모르십니까?”

    “들어 본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형사님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을 뿐이고 딱히 대가성은 없었는데요.”

    “대가성이 있었으면 풍선껌 하나도 안 됩니다. 대가 여부와 상관없이 음식은 3만 원까지. 청탁 금지법 시행령에 딱 적혀 있거든요?”

    도형이 갸름한 턱을 치켜든 채 팔짱을 꼈다.

    “그렇습니까.”

    “빨리 취소하세요. 강 선생님 가만두면 큰일 내실 분이네.”

    “죄송합니다.”

    수현이 다시 손을 들자마자 직원이 잽싸게 다가왔다. 커피를 주문하며 했던 결제를 취소하고 계산서를 두 개로 분리해 달라고 부탁했다.

    “제가 오늘 강 선생님께 위로를 많이 받아서 이번만 그냥 넘어가 드립니다. 앞으로 공무원한테 함부로 뭐 사 주고 그러지 마세요. 이거 아주 위험한 행동이라고요. 아시겠습니까?”

    도형은 팔짱을 낀 채 의기양양하게 수현을 꾸짖었다. 수현은 용맹한 준법 고양이에게 다시 한번 고개를 깊숙이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수현에게 꾸벅 인사한 도형이 라운지 카페 바로 앞의 베이커리로 들어갔다. 수현도 잽싸게 일어나 도형의 뒤를 따랐다. 화려한 진열장을 꼼꼼하게 살피며 조각 케이크를 고르는 도형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다. 집중하면 입술이 튀어나오는 습관이 있는지 오리처럼 입을 쭉 내민 얼굴은 제법 볼만한 구경거리였다.

    “여기 체리 타르트 맛있습니다. 초콜릿 쇼트브레드 베이스에 달콤한 생체리가 잘 어울려요. 고급스러운 블랙 포레스트 케이크 맛이 나지요.”

    도형이 헛숨 들이켜는 소리를 내며 펄쩍 뛰었다. 마치 꼬리가 펑 터진 고양이 같아 수현은 입술을 깨물어 웃음을 참았다.

    “아, 깜짝이야. 기척이라도 좀 내세요.”

    이제는 숫제 짜증까지 낸다.

    “죄송합니다. 아시는 줄 알고.”

    “체리 타르트 맛있다고요? 많이 달지는 않나요?”

    도형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베이커리 직원이 말을 붙여 왔다.

    “다크초콜릿으로 타르트 필링을 채웠고 체리에도 설탕 코팅을 하지 않아서 별로 달지 않아요.”

    “그럼 이거 하나 포장해 주세요.”

    수현도 질세라 끼어들었다.

    “망고 쇼트케이크 한 조각 포장 부탁합니다.”

    도형이 고개를 팩 돌려 수현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따로 계산할 겁니다.”

    도형은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이 계산대로 갔다. 직원이 케이크를 포장하는 동안 수현은 입을 딱 다물고 도형의 정수리만 내려다보았다. 도형의 동글동글한 머리에는 소용돌이 모양의 가마가 두 개 있었다. 옛말에 가마가 두 개면 장가를 두 번 간다고 하던데. 가마가 두 개인 김도형.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청순한 얼굴을 해서는 장가를 두 번이나 갈 김도형. 저 남자는 진짜로 색시를 두 명이나 얻으려나.

    “리본 예쁘다.”

    하얀 케이크 상자를 흐뭇하게 받아 든 도형의 눈앞으로 하얀 상자 하나가 더 들이밀어졌다.

    “뭡니까?”

    “망고 쇼트케이크는 2만천 원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고요.”

    “귀한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저도 형사님 만나기 전에 아주 끔찍한 시간을 보냈던 터라. 그대로 집에 갔으면 참 기분 나쁜 주말이 될 뻔했습니다. 형사님 덕분에 좋은 추억이 생겼습니다.”

    도형은 동그란 눈으로 수현을 올려다보았다. 정말로 놀란 고양이 같았다. 이것은 딱히 도형이 고양이를 닮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눈을 치켜뜨고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사람은 누구든 고양이처럼 보일 것이다. 아니라면 어쩔 수 없고.

    “제가 뭘 했는데요?”

    “제 말동무를 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제가요?”

    “아무튼, 고맙습니다. 아, 댁까지 어떻게 가십니까?”

    “지하철이요.”

    “날이 제법 더운데 지하철역까지 모셔다드려도 될까요?”

    “호텔 정문 나가면 바로 지하철역인데요.”

    “꽤 가파른 언덕이지 않습니까.”

    “저 형사입니다. 그 정도는 강 선생님 업고도 뛸 수 있거든요?”

    “하하. 그러시군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형사님과 여기서 헤어지기가 영 아쉬워서요.”

    속내야 어쨌건 의뭉스러울 정도로 뻔뻔하게 굴던 도형의 얼굴이 벌게졌다. 뽀얀 뺨에 붉은 기가 올라오니 얼굴 전체에 분홍 물이 들었다. 수현은 제 심장 박동이 격해지는 것을 강하게 의식하고는 애써 느긋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진짜. 뭡니까.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오해 삽니다. 저 방금 살짝 떨렸거든요?”

    “진심인데요.”

    “그 얼굴로 그렇게 진지하게 말하지 말라고요. 속눈썹 팔랑거리지 마시라니까? 옥 장판 플러스 종합 영양제도 살 뻔했잖아요.”

    “그럼 역까지 모시는 건 허락해 주시는 건가요?”

    “뭘 모셔요, 모시기는. 후궁이야 뭐야.”

    “이왕이면 귀비 첩지로 내려 주시죠. 정실이면 더 좋았겠지만, 황상께서 그리 정하셨으니 소첩이 어쩔 수 있나요.”

    “미치셨습니까? 진짜 뭐라는 거야.”

    살가움을 넘어 험한 말까지 내뱉는 데도 이상하게 불쾌하지 않았다. 거친 표면 아래 은은하게 스민 친근함 때문일까. 수현은 도형과 고즈넉하게 눈을 맞추고 엷은 웃음을 지어 제 쪽에서도 친밀함을 느끼고 있음을 은근하게 전했다.

    “갑시다.”

    수현은 위풍당당하게 팔을 휘두르며 성큼성큼 로비를 가로지르는 도형을 진짜 귀비처럼 세 발짝 뒤에서 조신하게 따라 나갔다. 차를 기다리는 동안 도형의 옆모습을 계속 훔쳐보았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오후 바람에 자연스럽게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날려 흩어지니 새하얀 이마가 톡 튀어나왔다. 수현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도형의 앞머리를 위로 쓸어 넘겼다.

    이마도 눈썹도 예쁘니 머리를 올려서 얼굴을 시원스럽게 드러내도 잘 어울릴 텐데. 쌍꺼풀이 없는 줄 알았는데 속쌍꺼풀이 있었구나. 머리카락만 까마귀 깃털 같은 게 아니라 속눈썹도 새까맣네. 피부는 화선지처럼 하얗고, 체모는 먹색이고. 그래. 이 사람은 마치 수묵화 같구나.

    “지금 뭐 하시는 거죠?”

    고양이가 발톱을 세우고 으르렁거렸다.

    “머리카락에 먼지가 묻어서요. 이제 됐습니다.”

    “선생님. 제발 말로 하세요, 말로. 심장 떨어지겠네.”

    “형사님. 선생님 말고 다른 호칭으로 불러 주시면 안 될까요?”

    “초면…은 아니고, 이제 두 번 본 사이에 형님은 좀 그렇지 않나요?”

    연상의 남자는 모조리 형님이라고 부르는 타입이었나. 강수현 형님이라니, 나쁘지 않다. 수현은 비실비실 나오는 웃음을 침착하게 억누르고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두 번 본 사이에 별말을 다 하는 사람은 어느 쪽이던가.

    “그럼 앞으로 자주 보는 사이가 되면 되지요.”

    “아오, 진짜…. 그런 말은 대체 어디서 배워 오시는 겁니까?”

    “자연스럽게 나오네요. 형사님 얼굴을 대하고 있으니.”

    “으으….”

    도형이 체머리를 떨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진심으로 불쾌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아무튼. 강수현 선생님, 주신 케이크는 감사히 먹겠습니다.”

    도형이 케이크 상자를 들어 보였다.

    “두 개 다 드시면 배부르시겠어요. 디저트 배가 따로 있다고는 하지만.”

    “에이, 당연히 나눠 먹어야죠. 입에 맞으려나.”

    도형이 빙수를 먹던 때처럼 눈꼬리를 한껏 휘며 웃었다. 다른 사람과 음식을 나눠 먹는 걸 아주 싫어하는 것처럼 말해 놓고서 누군가와 함께 케이크를 나눠 먹을 생각만으로 저렇게 즐거운 얼굴을 하다니. 심지어 망고 빙수를 먹을 때보다 더 기쁜 얼굴이었다.

    어찌나 행복해 보이는지 대뜸 누구랑 나눠 드실 거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강수현은 지켜야 할 체면이라는 것이 있는 남자. 두 번째 만남에 사생활까지 캐묻는 건 상식적인 사회인이 할 만한 행동이 아니다.

    찡그렸다가, 신났다가, 화냈다가, 웃었다가. 어쩌면 저렇게 매사가 극적이고 제 속을 드러내는 데에 거리낌이 없을까. 아무리 범인으로 오해했다지만 무고한 시민을 사정없이 두들겨 팬 주제에 청탁 금지법은 사수하려는 모순부터 귀티 흐르는 청신한 얼굴로 50대 육체노동자 같은 걸걸한 말투를 거침없이 구사하는 점까지, 김도형은 존재가 거대한 불협화음이었다. 불협화음 그 자체인 김도형이 어째서 하르모니아 여신처럼 보이는 걸까.

    신기했다. 알고 싶고, 파헤치고 싶고, 이해하고 싶었다. 이건 대체 어떻게 작동하는 물건일까. 하필 인간이라 리버스 엔지니어링을 할 수도 없고. 김도형을 살짝 갈랐다가 도로 덮으면… 역시 안 되겠지. 이토록 흥미로운 존재를 또 만날 수 있을까. 수현의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절대 놓칠 수 없다.

    “타시죠.”

    “우와… 대박. 이런 차는 보통 운전기사 두고 타지 않나요?”

    “보통은 그렇죠. 오늘은 빌린 차라서요.”

    거짓말은 아니다. 법인 차량이니까. 회사의 법인격이 부인되지 않는 이상 회사의 소유물은 대표 본인의 소유물이 아니다.

    “빌린 차예요?”

    “저도 오늘 여기 잘 보여야 할 사람이 있었거든요.”

    “아하.”

    도형은 수현도 맞선을 보러 왔다고 오해한 듯했다. 그리고 맞선이 잘 풀리지 않아 수현의 기분이 저조했던 거라고 이해했는지 동정과 공감 사이 어딘가의 자애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두어 번 주억거렸다.

    “근데 강 선생님은 방긋 웃으면서 눈만 깜빡깜빡해도 잘되셨을 것 같은데.”

    “어디서나 통하지는 않더군요.”

    “그건 저쪽이 눈이 삔 거지. 강 선생님 얼굴로도 안 되면 대한민국 누구도 안 되는 겁니다.”

    위험한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튀어나온다. 도형은 자기가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알까. 수현이 방긋 웃으며 눈을 깜빡거리면 홀랑 넘어갈 거라고 자백한 거나 마찬가지란 걸 꿈에도 모를 것이다. 대한민국 형사가 이렇게나 허술해서야. 아주 좋은 일이다. 물론 강수현에게.

    “차 진짜 좋다. 이런 차는 어떤 사람이 타나.”

    “형사님 같은 분이 타죠.”

    “네?”

    “이 차가 형사님을 태우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딱 어울리십니다.”

    “제가 그런 말 하지 말랬죠. 업보 쌓지 마세요. 어디 가서 칼침 맞기 딱 좋아. 치정 사건이 왜 나는 줄 아십니까? 예?”

    도형이 혼자 파르르 떨고 있는데 수현이 갑자기 도형 위로 무너지듯 몸을 붙여 왔다. 피부 솜털이 보일 정도로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도형은 몸을 빳빳하게 굳혔다. 순간 그대로 얼어붙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더듬더듬 입을 뗐다.

    “뭐, 뭐예요? 왜요?”

    “안전벨트요.”

    “아니, 말로 하시라니까. 말로 합시다. 제발요….”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요. 정성껏 모셔야죠.”

    수현의 묵직하면서도 시원한 향수 냄새가 코끝에 맴돌아 도형은 숨을 멈췄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수현의 체취가 스며드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산소가 모자라니 절로 머리가 아찔해졌고, 성급한 심장이 발버둥 치며 떼를 썼다. 이러다 죽겠구나 싶어 걸어갈 테니 차를 세워 달라고 말하려는 순간 차가 멈췄다. 지하철역이었다.

    “김도형 형사님.”

    수현의 큰 손이 도형의 손목을 살짝 잡았다.

    “네?”

    “명함 한 장 받을 수 있을까요?”

    “어, 명함이… 없는데요?”

    “그러시군요. 아쉽네요.”

    바로 손을 놓은 수현이 도형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산뜻하게 웃었다.

    “연락드리겠습니다.”

    연락처를 모르는데 무슨 수로 연락을 하겠다는 소리인가. 그러나 도형은 수현의 말이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수현이 손목을 잡았을 때 잘게 떨렸던 손을 들킨 건 아닐까. 그것이 그 순간 도형의 유일한 걱정이었다.

    ***

    솔직하게 말하면 도형은 그날 아침까지도 뭐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못 했다. 지난 주말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강수현을 만나기는 했지만, 그저 맛있는 것을 먹으며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이 아닌가. 심지어 계산도 딱딱 나눠서 했다.

    괜찮지 않나? 그런데 왜 갑자기 난리인가. 물론 난리가 날 만한 일을 하기는 했다. 멀쩡한 시민을 때려눕히고 수갑까지 채운 데다가 수갑 열쇠를 잃어버려서 경찰서로 연행하다시피 했으니 어마어마하게 난리 나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지. 하지만 이미 다 지난 일이 아닌가. 아닌가? 안 지나갔나? 괜찮은 거 아니었나? 괜찮으니까 케이크도 사 주고 차도 태워 줬던 거 아니었나?

    도형은 머리를 쥐어뜯다가 책상 위에 머리카락이 몇 가닥 떨어지자 깜짝 놀라 손을 뗐다. 빠지는 건 책상으로 족하다. 일자리가 없으면 머리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괜찮기는, 개뿔. 괜찮을 리가 없지. 호텔 로비든 광화문 네거리이든 일단 수현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무릎부터 꿇었어야 했다. 소용없었으려나. 무릎 꿇고 빌기의 묘미는 뻣뻣하게 굴던 사람이 귀한 무릎을 꺾어 바닥에 대는 데에 있는 법이니, 애초에 가치가 없는 도형의 무릎이 아스팔트에 갈리든 스무디가 되든 아무 의미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정성이라는 게 있잖아….

    대명천지에 무고한 시민을 두들겨 팬 주제에 뭘 잘했다고 호텔 카페에서 망고 빙수나 처먹고 앉았단 말인가. 심지어 아이스 화이트초콜릿 어쩌고에 생크림까지 추가해서 쪽쪽 빨아 마셨다. 그것뿐인가. 청탁 금지법 위반이 어쩌고저쩌고 잘난 척 큰소리까지 쳤다. 자기는 불과 사흘 전에 경찰관 직무 집행법을 위반한 주제에. 사람인가? 이게 사람 새끼의 신경줄로 가능한 일인가?

    도형은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며 다리를 달달 떨다가 결국 벌떡 일어나 제자리를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도형이 왜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게 되었냐 하면, 점심 먹고 들어오자마자 서장이 도형의 팀장을 호출했기 때문이었다. 과장도 아닌 서장이. 경찰서장이 일개 팀장을 직접 부를 일이 또 뭐가 있겠는가. 역시 그거 아니겠나, 그거. 김도형 부고장 전달.

    “도형아, 팀장님이 너 얼른 서장실로 오라는데?”

    “저요? 왜요?”

    “글쎄. 그냥 너 데려오라고만 하셔서.”

    저승사자는 도형의 선배였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는 우연히 서장실 앞에서 팀장을 마주쳤을 뿐이라고 했다. 도형의 사수이기도 한 정유선 형사는 거의 항상 웃는 얼굴이라서 지금 그 입가에 걸린 미소가 동정인지 불쌍함인지 그것도 아니면 고소함인지 도형은 도대체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선배, 뭐예요? 왜요? 왜 그렇게 웃어요? 얼른 말해 줘요.”

    “가서 들어.”

    “아, 매정하게 굴지 마시고. 저 마음의 준비 좀 하게.”

    “모른다니까.”

    도형은 일부러 이를 딱딱 부딪치며 신경 거슬리는 소리를 냈지만, 도형이 형사 1일 차일 때부터 내내 보아 온 유선에게 불쌍한 척은 통하지 않았다.

    “선배. 우리 도진이 학교 졸업하려면 아직 3년 남았거든요.”

    “응.”

    “혹시 치킨집 낼 생각 없어요?”

    “없는데?”

    “진지하게 한번 생각해 봐요. 선배도 제2의 인생 준비할 때 되었잖아요. 제가 가게 자리 잡힐 때까지 딱 최저 임금만 받고 일할게요. 대신 4대 보험만 좀 들어 줘요. 저 닭도 잘 튀기고 설거지도 잘하고 오토바이도 잘 타요. 시키면 하긴 할 건데, 홀 서빙은 좀 그래요. 술 취한 꼰대가 시비 걸면 싸울 거 같아서.”

    동네 개 짖는 소리도 이보다는 더 주목받을 거다. 거기 개 짖는 소리 좀 안 나게 하라고 소리 지르는 사람이라도 있지 않나. 유선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서장실 앞에 도형을 버려두고 쌩하니 돌아갔다.

    도형은 문을 열자마자 대뜸 큰 소리로 사과부터 했다.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한데?”

    골수까지 얼어붙는 빙결 지옥이나 발톱까지 태워 버릴 염화 지옥을 예상했는데, 서장실 문 안쪽은 휴일 전날 퇴근 10분 전의 사무실 분위기였다. 끝내주게 화기애애했다는 뜻이다. 용수경찰서 서장과 경제범죄수사과 과장, 그리고 도형의 팀장이 따스한 표정으로 그를 맞아 주었다. 도형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선우진 팀장의 옆자리에 앉았다.

    “보이스 피싱 일제 단속 수고 많았어.”

    “2팀이 은신처 적발부터 잠복까지 다 했습니다. 접선책 꼬리 잡은 것도 2팀이고요. 고생 제일 많이 했습니다.”

    서장과 과장의 치하에 도형은 점점 더 어리둥절해졌다.

    “감사합니다. 첩보 수집부터 동선 예상까지 김 경장이 애 많이 썼습니다.”

    “그러니까. 김도형 경장 고생이 많았다면서.”

    제가요?

    “바깥에까지 소문이 났는지 시민의 칭찬이 들어왔어.”

    갑자기요?

    “불철주야 국민을 위해 애쓰는 훌륭한 경찰관이 몸을 사리지 않고 범인을 추격해 결국 검거하는 모습에 깊이 감명을 받으셨다네. 그 와중에 서로를 아끼는 동료애가 아주 빛났다던데.”

    “그 경찰관이 저 맞습니까?”

    “용수경찰서 경제범죄수사 2팀 김도형 형사가 자네 말고 또 있나?”

    장원 급제하고 돌아온 막내아들을 바라보는 자애로운 아버지의 눈빛으로 서장이 도형을 바라보았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찔려서 도형이 운동화 속 발가락을 꼼질거렸다. 잘못한 것이 없지는 않았다. 사실은 많았다. 서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과장이 하얀 봉투를 서장에게 내밀었고, 서장은 그 봉투를 그대로 선우진에게 전달했다.

    “내가 개인적으로 준비한 거야. 얼마 안 되니까 다른 팀 모르게 2팀끼리 소주 한잔해.”

    2팀의 지혜 주머니, 2팀의 제갈량, 2팀의 히틀, 아니 나폴레옹 선우진도 금일봉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약 1초 정도 어리벙벙하게 앉아 있다가 잽싸게 몸을 일으켜 일단 함박웃음을 보여 준 뒤 허리를 깊숙하게 숙여 인사하면서 두툼한 봉투를 황공하게 받아 들었다. 저 짧은 순간에 기쁨과 존경과 감사와 겸손을 모두 표현할 수 있다니. 도형은 그것만으로도 선우진을 존경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들어갈 때와 정반대의 발랄한 스텝으로 서장실을 나온 도형이 선우진에게 소곤소곤 물었다.

    “뭔 소리예요? 저 하나도 이해 못 했는데.”

    “네가 오인 체포했던 미남 있잖아. 경찰청 홈페이지에 용비어천가를 올렸다더라. 용수서 김 형사 나르샤.”

    “왜요?”

    “난들 알겠니? 얼굴이 고와서 마음씨도 곱나?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나? 떡 처먹다가 목 막혀 죽으라고? 그래도 좀 이상하지 않아? 아니면… 흠…. 그렇게까지 잘생기면 반대로 마음에 뭔가 어둠 같은 게 생기나? 바닥에 깔려서 처맞고 수갑 묶이는 게 취향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던데요.”

    “네가 어떻게 알아?”

    “나쁜 사람은 아닌 거 같았어요. 좀 이상한 사람인 건 맞아요.”

    의아한 눈으로 흘겨보는 선우진에게 지난 주말 우연히 강수현을 만났다고 말하려는 찰나, 동료가 도형을 찾으러 왔다.

    “도형아, 손님 왔어. 민원실에서 기다리신다. 빨리 가 봐.”

    ***

    “저기, 혹시, 그게….”

    “명함 받으러 왔습니다.”

    지중해 배경의 탄산수 광고에 딱 어울리는 싱그러운 미소가 이다지도 두렵게 느껴질 일인가. 수현의 압도적인 미모는 과연 파괴력이 대단했다. 무엇이 파괴되었냐 하면, 김도형 형사의 정신력, 어휘력, 순발력. 도형은 손가락으로 찌르기만 해도 푹푹 파일 것 같은 순두부처럼 맥없이 흐느적거렸다.

    수현이 연락을 하겠다고 말했던 것 같기는 한데, 그냥 의례적으로 하는 말인 줄로만 알았지 명함을 받으러 직접 찾아올 거라고는 정말이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세상일이 도형의 빈약한 상상력 범주 안에서 돌아간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그게, 제가 방금 서장님께 들었는데요. 강 선생님께서 경찰청 홈페이지에다가 제 칭찬을 해 주셨다고.”

    “아, 예. 형사님의 활약이 참으로 인상 깊었기에. 더 빨리 올렸어야 했는데 주말에서야 겨우 시간이 났습니다.”

    “제가 그, 어, 솔직히 까놓고 말씀드리면요,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오인 체포도 모자라 과잉 진압이었고, 선생님께서 공권력 남용에 의한 인권 유린으로 저를 고발하셔도 저는 딱히 항변할 것도 없이 그냥 “네, 맞습니다. 저를 죽여주시옵소서.” 하고 처맞아야 하는 그런… 다시 있어서는 안 되는 아주 비극적인 사고였거든요. 입이 열 개라도 제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네. 근데 선생님께서 칭찬하는 글을 올리셨다고 하니까.”

    “그 정도는 드문 일도 아니고….”

    “드문데요. 대한민국 경찰을 뭐로 보시는 겁니까?”

    정신줄을 아주 완벽히 놓아 버렸는지, 바로 전까지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던 도형의 눈꼬리가 비죽 치켜 올라갔다.

    “대한민국 경찰이라는 말은 안 했습니다.”

    “아니, 여기가 무슨 미국도 아니고.”

    “그러게요. 그나저나, 명함 안 주십니까?”

    “네?”

    “명함 받으러 왔다고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도형이 자기도 모르게 울상을 지었다.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기도 한 데다가, 수현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자꾸 방긋방긋 웃는 바람에 무슨 말을 하려다가도 금세 까먹어서 천하의 멍청이가 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역시 선우진에게 뒤통수를 너무 자주, 너무 세게 맞은 탓에 머리가 나빠진 것이 분명하다.

    도형은 얼굴을 쓱쓱 문지르다가 이상하게 축축한 느낌에 혹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울었는가 싶어 눈가를 비볐다. 축축한 것은 눈가가 아니라 손바닥이었다. 경찰서장 앞에서도 안 하는 긴장을 손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했다는 걸 깨닫자마자 마법처럼 긴장이 풀리며 작게 한숨이 나왔다.

    “여기 있습니다.”

    도형은 업무 수첩에 딱 세 장만 끼워 다니는 명함을 한 장 꺼내 공손하게 내밀었다. 마찬가지로 공손하게 도형의 명함을 받아 든 수현이 대뜸 자기 명함을 건넸다.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종이에 수현의 이름이 한글과 영어로 쓰여 있고 맨 밑에 핸드폰 번호만 달랑 적힌 수상쩍은 물건이었다.

    “앞으로 자주 보자고 하셨잖아요. 자주 보려면 제 연락처도 드려야지요.”

    “제가 언제 자주 보자고 그랬어요.”

    너무 당황해서 목소리가 떨린 바람에 삑사리를 냈다. 거짓말을 하려면 입술에 침이나 바르고 하시지. 아니, 바르지 마시죠. 혀 내밀지 마세요. 입술 핥지 마십시오. 공공장소에서 무슨 짓입니까! 도형은 내면의 에스컬레이터식 비명이 형상화된 표정으로 수현을 쳐다보다가 추태를 깨닫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형사님께서 저를 후궁으로….”

    “미치셨어요? 진짜 왜 이러시는 거예요!”

    겨우 진정했는데 이 무슨 일인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를 감출 기력도 없어서 되는대로 내뱉었다. 도형은 꼬리가 펑 터진 고양이처럼 펄쩍 뛰어 수현의 입을 막고는 슬슬 뒤로 밀어 사람이 오지 않는 구석 자리로 몰고 갔다. 고개를 살짝 흔들어 도형의 손을 떼어 낸 수현이 그윽한 눈으로 도형을 바라보며 또다시 활짝 웃었다.

    “실은 어느 정도가 적절한 수준의 배상일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고 없이 패스트 볼 던지시면 몹시 곤란하지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아직 정확한 피해 산출이 끝나지 않아서.”

    “정말 죄송합니다. 뭐든지 하겠습니다.”

    “뭐든지.”

    자신의 처지를 그제야 자각한 도형이 태도를 싹 바꿔 얌전하게 손을 모으고 섰다. 수현이 그 잠깐 사이에도 수십 번 휙휙 바뀐 제 표정을 집요하게 곁눈질한 것을 도형은 알까.

    “일단 이것부터 받으시죠.”

    “이게 뭔가요?”

    “케이크를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요.”

    “저한테 이걸 왜 주시나요?”

    “그날, 저희의 운명적인 첫 만남 때 형사님께서 우리 애 생일이라고 말씀하셨던 것 같은데. 맞나요?”

    “아, 예…. 생각만 한 줄 알았는데 말했나 봐요. 그런데요, 그 운명이라느니 그런 말씀은 좀…. 남들이 들으면 오해할 수도 있고요, 제가 듣기도 좀 거북해서요.”

    도형의 불평은 아랑곳없이 수현은 화사한 미소를 만면에 머금고 “드시면서 이야기 계속하시죠.”라며 지난 주말 도형에게 안겨 주었던 케이크 상자보다 좀 더 큰 하늘색 상자를 떠넘기고 꽤 멀리 있던 테이블과 의자를 가볍게 끌고 오더니, 자리에 사뿐 앉았다. 빌어먹게도 우아한 몸짓이었다.

    “이런 거 못 받아요. 아시잖아요.”

    “직무 관련성이 없으면 1회 백만 원, 회계 연도 내에 누적 3백만 원까지.”

    “직무 관련성은 언제 생길지 모르죠.”

    “원활한 직무 수행, 사교 및 의례 목적으로 제공되는 5만 원 이하의 선물은 수수 금지 금품 등의 예외 사유로 허용.”

    수현이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메모를 읽었다. 청탁 금지법에 대한 조사라도 해 온 모양이었다.

    “음식은 3만 원이거든요.”

    “아차.”

    의기양양하게 턱을 치켜든 도형 앞에서 수현은 망설이지 않고 케이크 포장을 풀었다.

    “같이 먹으면 되겠지요? 그럼 3만 원 이하니까.”

    그대로 수현이 항복하고 철수하리라 생각했던 모양인데, 또다시 예상과 다르게 일이 돌아가자 도형의 얼굴에서 우쭐함이 사라지고 난감, 당혹, 민망함이 그 빈자리를 채웠다. 수현은 보란 듯이 포크를 네 개 꺼내 새하얀 반구형 무스케이크, 마시멜로를 구름처럼 얹은 레몬 타르트, 밤 무스를 털실 타래처럼 쌓은 몽블랑을 딱 한 입씩 먹었다.

    “침 안 묻혔습니다.”

    저 밉살스러운 한 마디는 굳이 안 붙였어도 되었는데. 도형은 하얀 무스가 갈라진 틈으로 흘러나온 과일 콩포트의 매혹적인 진홍색을 홀린 듯 바라보다가, 결국 수현이 내민 포크를 받아 들었다. 거부하기에는 너무 맛있어 보이는 케이크였다.

    “사과와 감사를 동시에 하실 기회를 드리면 어떨까 해요.”

    “아, 예….”

    떨떠름한 기색을 읽은 걸까. 수현이 곧바로 눈썹을 늘어뜨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누구였더라, 찌푸린 얼굴마저도 아름다웠다는 미인이. 물고기가 그 모습을 보고 헤엄치는 걸 까먹고 가라앉았다기에 나뭇잎 타고 강을 건너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드는 이야기 취급했는데 진짜였나 보다. 도형은 순간 케이크를 씹는 법과 목구멍 안쪽으로 삼키는 법이 기억나지 않아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채 수현의 살짝 좁혀진 미간만 바라보았다.

    “제가 뭐든지 한다고 말씀드리긴 했는데요…. 할 건데요…. 선생님께서 분명 드문 일도 아니라 괜찮다 하지 않으셨나요?”

    “괜찮다고는 안 했습니다.”

    “말이 달라지시는데?”

    “팔이 아파서 잠을 잘 자지 못해요. 뒤로 꺾였을 때 어깨 회전근이 상했는지도 모릅니다. 상완 이두근이 뜨끔뜨끔하고 견봉 통증이….”

    “잘못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돌이킬 수 없는 것. 수현이 요구한 것의 이름이었다. 도형의 가장 귀한 것, 유일한 것을 자신에게 달라고 했다. 썩 달갑잖은 도형의 눈빛이 마치 변태를 본 사람의 그것과도 같았기에 수현이 헛기침을 하며 주의를 환기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시고.”

    가장 귀한 것을 달라는 말이 혹시 장기를 하나 떼어 달라는 뜻인가. 보이스 피싱 조직이 아니라 장기 밀매 조직이었나. 그것도 아니면 인육 요리사? 더럽게 기품 있는 손놀림으로 사람 고기를 조리하는 수현을 상상하니 엄청나게 그럴싸한 그림이 나왔다.

    “저 하다못해 푸아그라도 못 먹는 사람입니다.”

    “죄송합니다.”

    “시간. 시간을 내 주셨으면 해요.”

    “저 죽이실 거예요?”

    수현의 깊숙하고 그윽한 눈매가 기이한 곡선을 그렸다. 가늘게 뜬 눈 안쪽에서 번쩍거리는 빛이 예사롭지 않아 도형이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수현이 테이블에 팔꿈치를 세워 손날로 입을 가리더니 뺨을 작게 실룩거렸다.

    “시간…. 시체 간음이 아니라 타임이요. 시, 분, 초의 그 시간. 제가 그렇게 미덥지 못하신가요?”

    도형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어물어물 사과하는 도형에게 수현은 그 정도면 서로 즐거운 수준에서 사죄와 선의를 표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도형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했다.

    “형사님께서 제 얼굴을 제법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아서.”

    “네?”

    “정수기도 옥 장판도 종합 영양제도 강매하지 않을 테니까요.”

    도형이 그제야 얼굴을 풀고 웃었다.

    “아니, 그걸 여태껏 신경 쓰고 계셨습니까?”

    “그러면 제 마음이 풀릴 때까지 형사님께서 시간을 내 주시는 거로 알겠습니다.”

    “남아 일언 중천금입니다.”

    “오늘 저녁 선약 있으신가요?”

    “없는데요.”

    “그럼 저녁 6시에 경찰서로 모시러 오겠습니다.”

    “잠깐만요. 제가 무슨 칼퇴근 직장인인 줄 아십니까? 못 나가요, 6시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야. 강 선생님 혹시 어디 꿈과 희망의 나라에서 오셨어요?”

    수현이 순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일부러 예쁜 척을 한 것은 아닐 테지만, 오른쪽으로 갸우듬히 기울인 자태가 심히 어여뻤다.

    “안 되나요?”

    “턱도 없습니다.”

    “근로 기준법상….”

    “공무원은 근로 기준법 대상 아닙니다. 근로 3권 보호 못 받아요.”

    순간적으로 살짝 일그러졌던 수현의 눈매가 곧바로 본래의 고상한 모습을 되찾았다.

    “경찰 노조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습니까?”

    “노동자가 아닌데 노동조합이 있겠어요? 한국 사람 맞아요? 아니면 사상이 빨간 맛인가? 공무원 노조 빌미로 공작하는 그런 거 아니죠? 저, 미인계 이런 거 안 통합니다.”

    “아닌데요.”

    “뭐가요?”

    “전부 다요. 한국계는 맞지만 한국 국적은 아니고, 사상은 빨간 맛이 아니라 자유의 맛이고, 미인계 쓰는 공작원도 아닙니다.”

    “강 선생님, 검머외였어요?”

    그게 뭐냐고 묻는 듯 수현이 눈을 깜빡거렸다. 긴 속눈썹이 팔랑거리며 일으킨 바람이 도형의 가슴으로 불어왔다.

    “검은 머리 외국인이요.”

    “한국인 중에도 검은 머리가 아닌 사람이 있고, 외국인 중에도 검은 머리가 있습니다.”

    무심결에 비하하는 표현을 내뱉은 걸 알아차리고 아차 실수했다 싶어 민망해하는 도형에게 수현은 일요일에 만나자 제안했고, 도형은 구차하게 변명하는 대신 시원스럽게 알겠다고 대답했다. 어디에서 만나면 좋겠냐는 물음에는 고민하지 않고 경찰서 정문을 지정했다.

    “네. 일요일 12시 용수경찰서 정문에서 뵙겠습니다.”

    “귀곡 산장 갑니까? 그 밤에?”

    “아니요. 자정이 아니라 정오, 낮 12시요.”

    “왜요? 왜 그 시간에? 뭐 하는데요?”

    “그럼 11시 30분.”

    황당함에 입을 쩍 벌린 도형을 내버려 두고 수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연락하겠다며 작별 인사를 건네는 수현의 얼굴은 얄미울 정도로 매끈했다. 한갓 풀꽃조차 자세히 보면 예쁘고 오래 보면 사랑스럽다는데 하물며 사람이야 오죽할까. 수현은 싱긋 웃으며 손바닥을 쫙 폈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

    신경이 곤두선 바람에 늦잠도 못 자고 새벽같이 깨어난 도형은 방바닥에서 꿈지럭거리다 결국 7시 반에 경찰서로 나갔다. 수현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도형의 시간을 요구했는지 모르겠지만, 더는 수현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았으므로 오늘 하루의 봉사로 남은 원한을 청산해 달라 빌어 볼 요량이었다.

    인간은 고릿적부터 유구하게 낯선 것을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다 못해 배척해 왔다. 도형도 한갓 연약한 인간인지라 익숙한 평온을 깨뜨리는 존재가 달갑지 않았다. 오래 입어 해어진 옷처럼 보잘것없지만 도형에게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평범한 일상이었다. 그런 제 일상에 개입하기 시작한 강수현은 비록 두려울 정도는 아니어도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했다.

    불길하다고나 할까. 무서울 정도로 잘생겼고, 목소리도 소름 끼치게 좋고, 돈도 엄청나게 많아 보였단 말이지. 어딜 봐도 평범한 구석이 없다. 그런 사람과 엮여 봤자 좋을 일이 없다는 건 누구보다 도형이 제일 잘 안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지 않은가. 공짜 호의는 없다. 수상하게 돈이 많은 미남이 일개 형사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는 더더욱 없다. 분명 불순한 의도가 있을 것이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그러나. 그러나, 누구를 탓하리. 순간의 선택은 10년을 좌우하고, 순간의 혈기는 평생을 조진다고 하지 않나요. 터벅터벅 경찰서를 향해 걸으며 도형은 확실하게 깨달았다. 좆 됐다. 좆은 이미 실한 놈으로 하나 달려있으니 또 좆이 되었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으나, 아무튼 도형의 인생이 좆 된 것은 분명했다. 그것도 짜증 나게 뚜렷한 강수현의 존재감만큼이나 큰 좆이 되었다, 이 말이다.

    도형은 출근한 김에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11시 25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관을 나오자마자 정문 바로 앞에 선 미끈한 스포츠카가 눈에 확 들어왔다. 설마 저 한숨 나오게 야한 차가 강수현 선생님의 차는 아니겠지. 그래도 양식은 있는 사람 같던데. 아닌가? 없었나? 아무리 미국 사람이라도 저런 차를 타고 다닐 정도는 아닐 거야. 에이, 설마. 도형은 연신 구시렁거리며 주차장을 가로질렀다. 약속 시각까지 아직 3분이 남았으니 수현이 도착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며 목을 길게 빼 도로 쪽을 내다보았다.

    바로 그때, 양쪽 문이 풍뎅이 날개 펴듯 하늘을 향해 활짝 열리며 운전석에서 긴 다리가 천천히 뻗어져 나왔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도형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수치심에 마른세수하며 작게 욕설을 짓씹었다. 아, 노망나셨나.

    하지만 도형의 의도적인 외면은 오래가지 못했다. 샛노란 스포츠카에서 내리는 수현이 남성 패션지 모델 같았기 때문이었다. 연한 베이지색 보트 슈즈가 아스팔트 바닥을 디디고, 잘 빠진 다리를 감싼 아이보리색 바지와 은은한 하늘색 셔츠가 정점을 향해 올라가는 태양 아래 화사하게 빛났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으로 카키색 재킷 자락이 가볍게 날리자 수현을 둘러싼 공기에서 상쾌한 바다 내음이 느껴졌다.

    도형은 어디 요트 화보에서 튀어나온 듯한 수현의 모습이 너무 근사해서 화가 났다. 왜냐하면, 보는 것만으로도 화가 흐물흐물 녹아 버려서 적정 농도의 분노를 유지하려면 풀무질하듯이 계속 화를 충전해야 했기 때문이다. 도형이 왜 화가 났는지, 그 전에 도형에게 화를 낼 이유나 자격이 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아무튼.

    수현이 선글라스를 벗고 화사하게 웃으며 도형을 향해 가볍게 손을 들어 보였다. 성숙한 어른의 지갑 두께가 느껴지는 수현을 보니 도형은 새삼스럽게 자기 차림새에 신경이 쓰였다. 물 빠진 청바지에 하얀 운동화, 회색 후드티는 너무 어린애 같지 않나. 하지만 동시에 잘되었다는 생각도 했다. 같이 다니기 부끄럽다는 이유로 수현이 도형을 일찍 놓아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이미 버린 하루다. 도형은 자신의 안에 깊이 뿌리박은 유교 청년의 창피함을 잠시 덮어 두고 해탈한 표정으로 수현의 옆자리에 올라탔다.

    “지난번 그 차랑 다른 차네요.”

    “아, 그건 회사 차여서요.”

    “빌렸다고 하셨잖아요?”

    “제 차가 아니라 회사 차니까 빌린 것이 맞지요.”

    몇 번이나 입을 뗐다 붙였다 망설이던 도형이 심호흡을 하고는 조심스러운 견제구를 던졌다.

    “저기, 선생님. 제가 진짜 실례를 무릅쓰고 여쭐 게 있는데요. 혹시 그… 어둠의 세계하고는 관계가 없으시지요?”

    수현이 뺨을 허물어뜨리고 목을 울리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미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온 지는 얼마 안 되었어요. 합작 투자가 결정된 김에 한국 법인 확장도 할 겸.”

    “미국에서 하신다는 사업이 막, 그, FBI랑 자주 봐야 하는 그런 거 아니죠? 진짜죠?”

    “FBI가 아니라 FDA랑 자주 봐야 하는 사업입니다. 완벽하게 합법적인 회사이고, 한국 파트너 회사도 건실한 곳입니다. 아마 형사님께서도 아시는 회사일 거예요.”

    도형의 표정에 안도가 스쳤나 보다. 곁눈질로 흘끔 도형을 바라본 수현이 그게 그렇게도 걱정되었냐며 놀리듯 물었다. 도형은 아니라고 둘러대는 대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솔직히 잠도 안 왔다고 털어놓았고, 수현은 유쾌하게 웃었다.

    뒤 세계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으면서 약속 장소에 나온 것도, 어디로 데려갈 줄 알고 덜렁 차에 올라탄 것도, 무슨 대답을 기대한 건지 어둠의 세계 사람이냐고 대뜸 물어본 것도 실은 수현이 위험한 사람이 아니기를 바랐기에 가능한 행동이었겠지. 그래서 수현은 즐거웠다. 역시 김도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세상의 그 누가 강수현을 이토록 하찮게 취급한단 말인가.

    수현이 도형을 데려간 곳은 작은 한옥을 개조한 레스토랑이었다. 벨기에의 유명한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에서 근무했던 셰프가 귀국하여 개업한 곳이라 자리를 잡는 게 만만치 않았다면서 수현이 어렵게 잡은 예약임을 은근히 어필했다.

    “내년에 브뤼셀은 미슐랭 스타를 하나 잃고, 서울은 미슐랭 스타를 하나 얻겠네요.”

    “네? 미스 리요? 여기 사장님이 이씨세요?”

    뜬금없는 대답에 수현은 드물게 당황한 표정으로 도형을 쳐다보았다가 실없이 웃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도형이 레스토랑을 휘휘 둘러보느라 넋이 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현의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마음에 드세요?”

    “네? 아, 네…. 실내 장식이 아주 우아하네요.”

    “그렇지요?”

    “강 선생님 닮은 것 같아요.”

    바닥에는 기름을 먹인 것처럼 반질반질한 짙은 색 나무를 깔고 벽에는 기하학적 무늬가 살짝 비쳐 보이는 와인색 실크 벽지를 붙였다. 주름 하나 없는 새하얀 식탁보가 단정하게 깔린 테이블에는 묵직한 광택이 흐르는 은 식기와 청초한 꽃이 딱 한 송이씩 꽂힌 크리스털 화병이 놓여 있었다.

    가벼운 손짓으로 웨이터를 물린 수현이 직접 도형의 의자를 빼 주었다. 쭈뼛거리며 의자에 앉은 도형이 보드라운 벨벳 커버를 손가락으로 쓸며 말을 이었다.

    “이거 뭐라고 하지요? 벨루어? 의자에도 이런 거 하나하나 붙일 정도로 꼼꼼하게 화려하고, 전체적으로 엄청나게 비싸 보이는데 고급스럽게 점잖고, 샹들리에는 불이 반짝반짝하는 게 어쩐지 강수현 선생님 느낌 난다고 생각해서….”

    수현의 나지막한 웃음소리에 도형의 어깨가 눈에 뜨이게 움찔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또 주책맞은 소리를 했네요.”

    “아니요, 전혀. 오히려 감사합니다. 형사님께 제가 그렇게 근사해 보인다니 영광입니다.”

    도형의 뺨이 벌게졌다.

    “맛도 좋습니다.”

    맛이 좋다니. 누가, 아니 뭐가? 도형의 눈꼬리가 삐죽 위로 솟구친 것이, 저건 분명 신중하게 각을 재는 얼굴이었다. 지금 자기가 들은 말에 괴상망측한 숨은 뜻이 있는 것이 확실한지, 버럭 성을 내도 될지, 화를 낸다면 어느 수준까지 표출해도 될지. 오호라, 안 그래도 쌓인 것 많았는데 건수 하나 잡았고. 도형의 보이지 않는 꼬리가 공기를 휙휙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수현은 태연하게 메뉴판을 펼쳐 긴 손가락으로 요리 몇 가지를 짚으며 개인적으로 이것과 이것을 추천한다면서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도형은 능숙하게 꼬리를 잡아 누른 수현을 흘겨보다가 때마침 나온 식전 빵에 손을 뻗었다.

    과연 맛이 좋았다.

    식사 시간은 평범하게 흘러갔다. 나온 요리는 평범하지 않았다. 수현은 평범하게 자상한 말투로 요리를 설명했고 그의 가이드를 따라 요리를 맛본 도형이 황홀한 표정을 지을 때마다 평범하지 않은 미소를 보여 주었다. 그러니까 종합적으로 평가하자면 두 사람 모두에게 제법 괜찮은 경험이었다는 말이다.

    “여기는 커피까지 맛있네요.”

    “커피 좋아하세요?”

    “아니요. 사실은 잘 안 마셔요. 당 충전용으로 커피믹스 가끔? 싸구려 아메리카노는 쓰기만 해서요. 인생도 쓴데 커피까지 쓴 걸 마셔야 하나 싶어서.”

    도형이 커피를 한 모금 머금고는 눈을 감고 잔향을 음미했다. 꽤 마음에 들었는지 도형은 직원을 불러서 한 잔을 더 청했다.

    “커피콩이 열매가 아니라 씨앗이라면서요? 기껏 잘 익은 열매에서 과육은 전부 발라 버리고 씨만 빼서 태운 걸 누가 처음 먹을 생각을 했지?”

    “예전에는 커피 열매를 악마의 열매라고 했대요.”

    “악마? 커피가 시커메서?”

    “야생 커피 열매를 먹은 가축들이 씨앗의 카페인 때문에 밤새 잠도 안 자고 날뛰니까 악마가 깃든 열매를 먹었다면서 커피 덤불을 전부 불태웠다고 해요. 아마 그때 과육은 타고 콩만 남지 않았을까요?”

    “악마의 열매를 누가 기어코 집어 먹었구만.”

    “아마 그랬겠죠.”

    “이야. 역시 인류의 역사는 용감한 또라이가 개척한다니까요.”

    수현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용기는 중요하죠.”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수현과 만나는 것은 이번이 고작 네 번째였지만, 도형은 비록 눈치는 좀 떨어져도 감이 비상할 정도로 좋은 남자였으므로 저 은근한 눈빛 뒤에 따라올 말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수현이 입을 떼자마자 바로 막아 버렸다.

    “저도 용기를 내서 형사님의 승은을….”

    “쓰읍.”

    “네.”

    도형이 단칼에 말을 잘랐지만, 수현은 전혀 개의치 않고 생글생글 웃으며 자기 몫의 디저트를 도형 앞으로 슬그머니 밀어 주었다. 도형은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얹은 사과파이를 막 먹어 치운 참이었는데, 달콤한 시럽에 촉촉하게 적신 케이크를 보니 식욕이 또 동했다.

    “왜 안 드시고?”

    “배불러서요.”

    “그래도 선생님 몫으로 시키신 건데 한 입만 드셔 보시지. 되게 맛있을 것 같은데.”

    수현도 놀랐다. 도형이 제일 싫어한다던 ‘한 입만’을 먼저 제안하다니. 혹시 그냥 예의상 던져 본 말인가? 미끼를 냉큼 물었다가 미움만 받는 건 아닐까 싶어 수현이 눈만 깜빡거리고 있자 도형이 수현의 디저트 포크로 케이크를 큼지막하게 잘라 크림까지 듬뿍 얹어 수현에게 내밀었다.

    “아.”

    럼 향이 훅 끼칠 만큼 얼굴 가까이 들이밀어진 케이크를 가만히 노려보자 도형이 포크를 살짝 흔들며 재촉했다. 입을 벌리라는 뜻인 것 같아 수현이 맞붙었던 입술을 뗐다. 케이크가 입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향긋하고, 부드럽고, 이건 마치….

    “바바 오 럼(Baba au Rhum).”

    “네?”

    입가에 묻은 크림을 냅킨으로 훔치며 수현이 눈웃음을 쳤다. 도형의 귀 끝이 살짝 움찔거린 것은 수현의 눈이 그린 착각일까 아니면 소망의 발현일까.

    “이 케이크 이름을 바바 오 럼이라고 해요. 건포도가 없으니 사바랭(Savarin)이라고 하는 쪽이 맞겠지만.”

    “원래는 건포도가 들어가요?”

    “네. 건포도를 넣은 케이크를 설탕이랑 럼주를 끓인 시럽에 적셔서 크림이랑 같이 먹는 디저트예요.”

    “저 건포도 싫어하는데. 없어서 다행이다.”

    프랑스어 바바(baba)에는 ‘생각지도 못한 것에 깜짝 놀라다.’라는 뜻이 있다. 지금의 수현을 표현하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단어가 있을까.

    오늘의 기분, 바바 오 수현.

    포크 날을 세워 크림까지 싹싹 긁어 먹은 도형이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쉬며 배를 통통 두드렸다. 수현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도형의 만족스러운 얼굴을 바라보다가 퍼뜩 깨달음을 얻었다. 한 입 주느니 따귀를 맞는 쪽을 택하는 남자가 그 귀한 한 입을 흔쾌히 나눠 준 의미를. 하마터면 떠먹여 줘도 모르는 멍청이가 될 뻔했다.

    “형사님. 혹시 혼혈이신가요?”

    “혼혈이요? 아니요? 아니, 아니. 몰라요. 왜요? 저한테 다른 인종의 특징이 보여요? 저 뿌리 찾기나 유전자 지도 이런 데 관심 되게 많거든요. 제가 어디랑 어디 혼혈 같아요?”

    당연히 장난으로 받을 줄 알았던 도형이 진지하게 흥미를 보이자 수현이 눈을 내리깔고 망연히 물만 마셨다.

    “저는 형사님 처음 뵙자마자 혼혈이시구나 생각해서….”

    “그런 말 처음 들어 보는데. 저 진짜 혼혈 같아요? 어디랑 어디?”

    “한국과 천국이요.”

    잠시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게 앉아 있던 도형이 수현의 말이 농담이었던 것을 그제야 알아차리고 몸을 앞뒤로 흔들며 웃었다.

    “아, 진짜 미치셨나 봐. 누가 농담을 그런 얼굴로 해요!”

    도형이 손사래를 치며 웃다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신통치 못한 농담에도 웃어 준 배려가 고마워 수현도 같이 웃었다. 도형의 말끝이 얼렁뚱땅 짧아지고 있다는 것마저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케이크도 한 입 주고 안 웃긴 농담에도 웃어 주는 마음이라면 역시 그것이지. 수현의 비약은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았다.

    ***

    그날의 고비는 예상보다 이르게 왔다. 청구서를 부탁한 도형에게 “이미 결제하셨습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을 때였다. 순식간에 얼굴이 시뻘게진 도형이 수현을 향해 눈을 뾰족하게 떴다.

    “제가 이러시면 안 된다고 했어요, 안 했어요.”

    “일부러 그랬는데요.”

    “왜요. 들어나 봅시다.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빚을 지우려고요.”

    “무슨 빚?”

    “마음의 빚.”

    “아니, 무슨.”

    “그래야 형사님께서 “오늘 시간 내 드렸으니 이걸로 앙금 훌훌 털고 각자 갈 길 갑시다.” 같은 말씀 대신 “다음에는 제가 살 테니까 또 봅시다.”라고 하실 테니까요.”

    사람은 사실을 지적당하면 입을 다물거나 화를 낸다. 도형은 성격은 급해도 성질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으므로 화는 내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아, 진짜…. 그럼 반반이라도 합시다.”

    “안 됩니다.”

    “왜죠?”

    “제 마음입니다.”

    “제 의견도 존중해 주세요.”

    “존중합니다.”

    “그럼 반띵.”

    “싫어요.”

    “왜! 존중한다며!”

    “형사님 의견도 존중하지만, 형사님 의견이 제 마음과 충돌할 때는 제 마음을 좀 더 존중하니까요.”

    공기가 모자란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뻐끔하던 도형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가 접대 요구했다고 고발하시는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요. 소중한 비밀로 간직하겠습니다. 저희 두 사람만의 은밀한….”

    “저기요, 선생님. 단어 선택에 좀 주의해 주시겠어요?”

    “한국말이 서툴러서요.”

    도형이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수현이 얼른 다음 주말, 같은 시간에 경찰서로 모시러 가겠다고 말했다. 도형은 일고의 여지 없이 고개를 흔들었고, 수현이 이유를 묻는 표정으로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였다.

    “일요일은 당직이고 토요일은 소개팅 있어요.”

    “연애에 관심이 많으신가 보네요.”

    “아니요. 딱히.”

    따귀 맞고 차인 지 한 달도 안 되어 다른 사람을 만나러 가면서 연애에 관심이 없다니, 그 말을 누가 믿겠나. 수현의 얼굴에 떠오른 묘한 표정은 책망까지는 아니었으나 도형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충분히 의구심을 품을 만한 상황이었으므로 속내를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맛있는 것 먹고 싶어서요. 애프터눈 티 세트가 기가 막힌 곳을 찾았거든요. 2인 세트부터 예약 가능하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혼자 가긴 좀 그렇잖아요.”

    수현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애프터눈 티 세트를 먹고 싶어서 소개팅을 수락하셨다고요?”

    “네. 왜요? 안 됩니까? 어차피 저쪽 여성분이 저를 마음에 들어 하실 리는 없으니까 맛있는 거라도 사 드려야죠.”

    “왜 형사님을 마음에 안 들어 하실 거라고 단언하세요?”

    도형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저는 강수현 선생님이 아니에요.”

    “저 강수현은 어떻게든 형사님께 잘 보이고 싶은 생각뿐인데요.”

    “아이, 진짜. 그런 소리 좀 하지 말라니까.”

    “정말 그 이유뿐이라면 소개팅은 취소하세요.”

    “왜 남의 사생활에 간섭하세요?”

    “연애에 관심 없는데도 애프터눈 티 세트를 함께 먹을 사람이 없어 소개팅을 나가시는 거라면, 저랑 드시면 되잖아요. 기가 막힌 애프터눈 티도 같이 있어서 즐거운 사람이랑 먹어야 기가 막히지, 어색한 분위기에서 맛이 제대로 느껴지겠습니까? 숨 안 막히면 다행이게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네.”

    “저랑 같이 밥 먹고 커피 마시는 거 즐겁지 않으셨습니까? 저희 농담 코드도 제법 잘 맞고, 심지어 제게 케이크도 한 입 주셨죠.”

    둑이 한번 터지니 물살을 막을 길이 없다. 수현은 방금 전에 한국말이 서투르다고 핑계를 댔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막힘없는 언변을 자랑했고, 도형은 삐딱한 속내를 숨길 생각도 없는지 한번 들어는 보자는 자세로 팔짱을 끼고 수현을 쳐다보았다.

    “그 맛있다는 애프터눈 티 세트, 저 사 주세요.”

    “아니, 강수현 선생님. 일은 안 하십니까? 한국 법인 확장하신다며? 합작 투자 언제 할 거예요?”

    “형사님 요새 바쁘시죠?”

    “저야 늘 바쁘죠.”

    “그렇지만 저와 만나 주셨잖아요.”

    “지금 비꼬시는 거예요?”

    “아니요. 아무리 바빠도 시간은 만들기 나름이라는 뜻입니다. 인생에는 우선순위가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리고 제 우선순위는.”

    수현이 생긋 웃는 얼굴로 도형을 향해 손바닥을 내보이자 도형이 팔짱을 풀고 테이블 위에 양손을 올렸다. 테이블을 짚어 절반쯤 몸을 일으켰다가 수현이 가련한 표정으로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하자 얌전하게 앉아 무릎을 모았다.

    “아오, 진짜…. 알았어요, 알았어. 토요일 오후 3시?”

    “2시. 경찰서로 모시러 갈게요.”

    “그러시든가요.”

    수현이 어깨를 주무르던 손으로 소매를 걷어 시계를 보았다. 도형이 힐끔 수현의 손목을 곁눈질했다. 수현이 입고 두른 것에는 딱히 관심이 없어 보이는 도형이었으나, 손목 폭만큼이나 커다란 시계 알과 다이얼이 몇 개나 달린 신기한 모양에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나 보다. 수현은 도형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머리를 쓸어 넘기는 척하며 시계 판이 잘 보이도록 팔을 들어 올렸다. 도형의 관심을 조금이라도 더 붙들어 둘 수 있다면 옷이라고 못 벗겠는가.

    “자, 그럼 일어날까요.”

    “다음 주는 반반, 아니 제가 삽니다. 아시겠어요? 아무튼, 밥은 맛있었어요. 조심히 들어가십쇼.”

    “들어가기는요. 진짜 일정은 이제 시작인데요.”

    가슴이 무거워서 체할 것 같다며 가슴을 쿵쿵 두드리던 도형이 입을 벌리고 수현을 올려다보았다.

    “그럼 지금까지 한 건 뭔데요?”

    “준비 운동?”

    수현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시간을 내 주기로 약속한 사람이 다름 아닌 자신이었으므로 도형은 찝찝한 표정으로 수현을 따라나섰다. 아직 마음이 안 풀렸다는데 어쩌겠는가.

    ***

    수현이 도형을 데려간 곳은 극장이었다. 밥 먹고 영화 보고. 이건 그냥 평범한 데이트 코스 아닌가? 도형은 수현이 어지간히 심심했나 보다고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솔직히 좋게 생각했다기보다는 살짝 안됐다고 생각했다.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했으니 만날 사람도 없고 쓸쓸했나 보지. 그러니까 도형에게 손해 배상을 핑계 삼아 주말마다 같이 놀자고 떼를 쓰는 것이 아닌가. 식사에 영화 관람이 시커먼 남자 둘이 시간을 보내기에 어울리는 코스는 아니지만 외로운 외국인을 위로한다고 생각하면 흔쾌히 어울려 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극장 분위기가 좀 묘했다. 관객이 도형과 수현 단 두 명이었다. 스크린이 일반 상영관보다 조금 작고 의자가 과하게 고급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저기요, 강 선생님. 설마 영화표 전부 다 샀어요?”

    “아니요.”

    “거짓말.”

    “대관했습니다. 잠깐만요, 금방 올게요.”

    갑자기 수현이 상영관을 나가 버려서 도형은 어리둥절 서 있다가 그냥 한가운데 자리에 털썩 앉았다. 영화 한번 보겠다고 대관까지 한다니. 외로움은 타면서 사람 많은 곳은 싫어하는 성격인가. 얼굴값 하시나. 까탈스럽기는. 도형은 영화관 의자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푹신하고 편안한 의자에 푹 기대 몸을 늘어뜨렸다. 눈이 절로 감겼다.

    잠이 올락 말락 하는데 달콤하기도 하고 고소하기도 한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혀서 눈을 번쩍 떴다.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 일단 다 가져왔어요. 캐러멜, 체더치즈, 오리지널. 음료는 콜라로 괜찮으시죠?”

    수현이 팝콘이며 콜라를 한 아름 안고 돌아왔다. 도형은 소용없는 것을 알면서도 수현에게 시위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청탁 금지법을 들먹이며 성질을 부렸다.

    “오늘은 무법자 하기로 이미 결심했습니다.”

    “경찰한테 할 말입니까, 그게?”

    “갑자기 체포당하고 싶어지는데요. 아, 영화 시작합니다.”

    사실은 도형도 영화 보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느긋하게 영화 볼 여유가 없어서 그렇지. 어릴 때는 돈이 없어서, 커서는 시간이 없어서. 경찰이 되고 난 뒤로는 아무리 비번이라도 2시간 넘게 휴대전화를 확인하지 못하는 상황이 부담스러워서 의식적으로 영화관을 피했다. 수현이 그런 것을 알고 상영관을 대관한 건 아닐 테지만…. 에이, 됐다. 도형은 쓸데없는 포용력은 그만 발휘하고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기로 했다. 영화나 보고 팝콘이나 먹겠다는 뜻이었다.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 장르로, 사고 현장에서 우연히 마주친 남녀가 중첩된 오해를 풀고 결국 사랑에 빠지는 내용이었다. 뻔하디뻔해서 다음 장면이 더 궁금하고, 무슨 맛인지 알아서 더 먹고 싶은 그런 영화였다. 도형은 중반으로 넘어간 뒤부터는 완전히 몰입해 넋을 잃고 영화를 보았다. 수현이 스크린 대신 자기 얼굴만 쳐다본 것도, 도형이 팝콘을 집을 때마다 수현도 팝콘을 집는 척하며 팝콘 통에 손을 넣어 자꾸만 손등을 스친 것도 모를 정도로.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며 도형을 관찰하던 수현은 입술을 살짝 벌리고 영화에 빠진 도형의 입에 팝콘을 한 알 물려 주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팝콘을 받아먹기에 각각 다른 맛의 팝콘을 골라 두세 알씩 천천히 넣어 주었다. 혹시 목이 멜까 봐 빨대를 대 주니 쪽쪽 잘도 빨아 마셨다. 털을 바싹 세우고 경계하던 고양이는 어디 갔는지, 무방비하게 주는 대로 받아먹는 도형 때문에 웃음이 났다. 귀에 대고 “네 콜라에 독을 탔어.”라고 속삭이면 꽥 소리를 지를까? 영화보다 도형이 훨씬 재미있었다.

    도형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얼굴 바로 앞에 팝콘을 쥔 수현의 커다란 손이 있었다. 도형이 호들갑스럽게 퍼드덕거리자 수현은 천연덕스럽게 팝콘을 자기 입으로 가져갔다.

    “조금 이른 감은 있지만, 저녁 먹으러 갈까요?”

    “네? 또 먹어요? 소 사육하는 것도 아니고, 팝콘이 배에서 부풀고 있구만.”

    수현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유쾌하게 웃었다.

    “소 사육할 때 마블링 만들려고 옥수수를 먹인다고 하더군요.”

    역시 식인마였나. 도형의 경악한 표정에 수현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잡아먹기에는 살이 아직 덜 올라서.”

    도형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렸다.

    “마녀도 헨젤과 그레텔이 살찔 때까지 기다려 줬어요. 너무 튼튼해진 바람에 역습당했지만요.”

    “농담… 맞죠?”

    “이래 봬도 바이오 기업 대표입니다.”

    “그 바이오가, 인육 가공, 뭐 이런 거 아니죠? 저 경찰입니다. 솔직히 얘기하세요.”

    “사람을 살리는 생명 과학 기술을 개발하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을 리가요. 진짜입니다. 믿어 주세요. 지난번에 드린 명함은 아주 소수의 믿을 수 있는 친밀한 분께만 드리는 명함이고, 이쪽이 대외적으로 쓰는 명함입니다.”

    수현은 명함을 두 장 더 내밀었다. 은은하게 반짝거리는 미색 명함에는 BMD-앰브레이스 대표 이사 강수현이라 쓰여 있었고, 약간 푸른 빛이 도는 명함은 해외용인지 영어로 앰브레이스의 사명과 미국 보스턴 본사 주소, 그리고 CEO 겸 회장 강수현이라고 쓰여 있었다.

    “BMD가 설마 그 BMD? 얼마 전에 SW에서 인수한 그 BMD?”

    “그 BMD가 제 회사 앰브레이스의 한국 진출 파트너입니다. 합작 법인 설립 겸 기존 한국 법인 확장 때문에 한국에 왔다가 형사님과 운명적으로….”

    도형의 눈꼬리가 빼쭉해졌다.

    “우연히, 인연의 이끌림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기, 그… 의심해서 미안합니다.”

    “이제 믿어 주시는 거죠?”

    “아, 예. 뭐 처음부터 아주 완벽히 믿지 않았던 건 아닌데요.”

    수현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가볍게 웃었다. 눈언저리에 장난기가 묻어나는 웃음이었다. 혼자서 무언가를 납득한 듯 만족스러운 표정을 하는 수현을 보니 도형의 배알이 괜히 뒤틀렸다.

    “저 이제 집에 가도 되나요?”

    “아직 하루가 안 끝났는데요. 댁에 가셔야 하는 이유를 여쭈어보아도 될까요?”

    “밥도 맛있었고 영화도 재미있었어요. 그런데….”

    “그런데?”

    “아, 나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좀 부담스러워요.”

    수현은 손을 모으고 가만히 선 채 도형이 던진 말의 여운을 곱씹었다. 그리고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부담스럽다.”

    “자꾸 뭐 사 주시고, 막… 이러시는 거요.”

    “형사님 부담스러우시라고 하는 건데요.”

    도형은 대답 대신 숨을 들이마셨다. 수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망연해진 상태로 눈만 깜빡거렸다.

    “손해 배상 겸 피해 보상이니까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형사님이 즐거우시든 괴로우시든 별 상관없습니다. 만약 오늘 형사님이 즐거우셨다면 그건 순전히 제 배려입니다. 손해 배상을 대체한 시간인 걸요. 형사님도 동의하셨잖아요.”

    “이런 식으로 보복하시기예요?”

    “보복이라니요. 정당하게….”

    “선생님, 제가 진짜 간절하게 부탁드립니다. 여기서 그만하시면 안 됩니까? 무릎 꿇고 빌까요? 제가 어떻게 해야 마음이 풀리시겠어요?”

    “저녁 먹으러 가시죠.”

    수현이 레이디를 에스코트하는 기사처럼 손을 내밀었으나 도형은 자리에 못 박혀 움직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한 거 압니다. 바로 용서해 달라고는 하지 않을게요. 그런데….”

    그 말을 하는 도형의 눈가가 천천히 붉어졌다. 수현은 어깨를 늘어뜨리고 자신을 조용히 바라보는 도형의 불안한 표정을 보며 코가 찌릿해지는 통증을 느꼈다. 도형이 진심으로 자신을 지긋지긋하게 여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져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몰아붙일 생각은 아니었는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죄송하지요. 형사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너무 즐거워서 장난이 도를 지나쳤습니다. 저는 농담으로 드린 말씀이었는데 형사님께서 불편하셨다면 더는 농담이 아니지요. 저야말로 용서를 빕니다.”

    수현이 허리를 굽혀 사과했다. 웃음기가 싹 빠진 수현의 진지한 사과에 도형도 고개를 마주 숙였다.

    “강수현 선생님, 그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다시는 그 일을 언급하면서 형사님을 불편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약속드립니다.”

    “네?”

    “대신.”

    그럼 그렇지. 단서가 달리지 않을 리가 없지. 도형이 터져 나오려던 한숨을 억지로 삼켰다.

    “형사님께서 괜찮으시다면 선의로, 순수한 호의로 저와 종종 어울려 주시겠습니까.”

    까만 바둑알 같은 눈동자가 수현을 올려다보았다. 바로 저 얼굴이었다고 수현은 생각했다. 도형을 처음 본 날, 자신이 때려눕힌 수현을 부축해 일으키던 도형의 얼굴에 떠오른 당혹스러운 표정에 수현은 조금 흥분했다. 세상에서 가장 기운찬 전사처럼 돌진한 주제에 순식간에 잘못을 들킨 어린애처럼 변해서는 황황히 수현의 눈길을 피하는 모습이 수현의 호기심에 불을 붙였다. 그다음에 도형을 만났을 때 복스럽게 빙수를 먹으며 해맑게 웃는 그를 보며 수현은 무슨 생각을 했던가.

    도형이 우는 얼굴은 어떨까. 우는 얼굴도 저렇게 예쁠까. 더 정확하게는, 울려 보고 싶다.

    그러나 이런 식은 아니었다. 수현은 악수를 청하는 손을 내밀고 도형이 손을 마주 잡아 줄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도형은 잠시 그대로 서서 수현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큰 손이었다. 하지만 손가락은 희고 가늘었다. 그는 숨을 멈추고 천천히 오른손을 내밀어 수현이 내민 오른손을 맞잡았다.

    “청탁 금지법도 잘 지키겠습니다.”

    “네. 부탁드립니다.”

    “그럼 이렇게 할까요? 오늘 저녁은 밖에서 먹는 대신 제가 만들어 드리면 어떨까 싶은데.”

    도형은 무심결에 눈살을 찌푸렸다가 지금은 짜증이나 신경질을 부릴 때가 아니라는 자각이 들어 코를 훌쩍였다. 수현은 자기 요리 실력에 꽤 자부심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돈을 내고 밥을 사는 것이 아니니까 청탁 금지법 위반은 아니지 않느냐며 자신의 완벽한 계획에 동참할 것을 종용했다.

    “그게요…. 집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요. 밥 해 줘야 해요.”

    “그러고 보니 누구 생일을 못 챙기셨다고 하셨죠. 혹시 아이가 있으십니까?”

    도형이 소개팅에 실패할 거라고 단언한 이유가 아이가 딸린 남자였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수현에게는 더 좋은 일이 아닌가. 두 개의 가마, 두 번의 장가, 두 명의 색시, 두 번째의….

    “동생이요. 아직 애라서요.”

    수현이 그토록 궁금해했던, 도형이 활짝 핀 표정으로 소중하게 들고 간 케이크를 나누어 먹은 사람은 바로 그의 동생이었다.

    “저번에 선생님이 주신 케이크로 같이 생일 파티 했어요. 아주 좋아하더라고요. 고맙습니다. 선물을 아직 못 사서 고민 중이었는데…. 저, 죄송한데요, 시계 좀 봐도 될까요?”

    수현이 순순히 손목을 내밀자 도형은 수현의 손을 잡고 한참이나 시계를 구경했다. 자기 시계를 구경하는 도형을 구경하며 수현은 그 시계를 골랐던 아침의 자신에게 힘찬 내면의 박수를 보냈다. 왜냐하면, 도형의 손이 몹시도 따뜻했고, 무언가에 집중하면 여지없이 튀어나오는 도톰한 아랫입술이….

    강수현 보시기에 참 좋았더라.

    “이렇게 다이얼 여러 개 달리고 달, 별 그려진 시계는 뭐라고 찾으면 됩니까?”

    “문 페이즈 시계라고 합니다.”

    “문 페이즈…. 고맙습니다. 잘 봤어요.”

    수현은 대승적 차원에서 자신이 먼저 한발 뒤로 물러나 도형을 집으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도형의 얼굴에 올라왔다가 순식간에 지워진 웃음에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해졌기 때문이다. 도형이 웃은 것과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무슨 상관이냐 물으신다면, 웃으며 안녕. 가야 할 때가 언제인지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만이 아름다운 법이니까.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는 수현과 버스를 타고 가겠다는 도형이 팽팽히 대립한 끝에 경찰서 정문까지 데려다주고 거기에서 헤어지는 것으로 타협했다. 옆자리에 올라탄 도형에게서 미묘하게 거북한 기색이 읽혀 수현이 조심스럽게 몸이 좋지 않으시냐 물었고, 도형은 콧등을 긁고 목덜미를 만지는 등 한참을 망설이다 속내를 툭 털어놓았다.

    “저기, 선생님 차가 조금, 아주 쪼끔 요란한 편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용?”

    “요란한가요?”

    “색도 요란하고 문 열리는 것도 요란하고 배기음도 요란하고.”

    “그렇군요. 참고하겠습니다.”

    “참고하실 것까지는 없고요. 저는 선생님 취향 존중합니다.”

    수현이 말없이 운전하다가 뜬금없이 고맙다고 말했다. 무엇이 고마웠냐 하면.

    “수상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셨는데도 약속 장소에 나와 주시고.”

    “뭐, 총만 없으면 어떻게든 제압할 자신은 있었어요.”

    그러니까 수현을 믿어서가 아니라 여차하면 때려눕히겠다는 각오로 오셨다는 말씀이신가.

    “케이크도 한 입 나눠 주셨고.”

    “애초에 선생님 몫이었으니 나눠 준 건 아니죠.”

    그런 건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강수현의 것은 강수현에게. 수현이 탈력한 표정으로 요란한 차의 요란한 문을 열었다. 차에서 내리는 도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불쑥 팔을 내밀어 도형의 후드를 잡았다.

    “네?”

    “그냥 가시길래.”

    “저 뭐 두고 내렸어요? 전화 있고, 지갑 있고….”

    “저 두고 가셨잖아요.”

    “아이, 진짜.”

    수현이 마음을 다잡고 상큼하게 웃어 보였다.

    “왜, 또 뭐요! 굿 나잇 키스라도 해 드려요?”

    “네.”

    도형이 펄펄 뛰며 요란을 떨었다.

    “미쳤어. 진짜 미치셨나 봐. 얼른 집에 들어가서 샤워하고 양치하고 주무세요. 영 외롭고 쓸쓸하고 심심하고 그러면 메신저 하시든지.”

    “네.”

    “조심히 들어가십쇼.”

    씩씩하게 걸어가는 도형의 뒷모습을 보며 수현이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랬다 이거지. 천하의 강수현이 혼자서 헛다리 짚었다 이거지. 도형은 정말이지 만만치 않은 강적이었다. 그러나 수현이 누구인가. 없는 길을 만들어서 알프스를 넘은 한니발 장군, 에베레스트산이 거기 있어서 올라갔다는 힐러리 경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모험가, 도전자, 정복자가 아닌가. 예측 불가능의 김도형을 기어코 이해하고야 말 남자, 그것이 강수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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