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외전 (7/7)

7. 외전


산호는 안개 낀 해안을 걷고 있었다. 짙은 안개 때문에 준형과 제가 사는 저택은커녕 바로 다섯 발자국 앞도 보이지 않았다. 산호는 아무도 없는 해안을 걷다가, 조금씩 걸음을 빨리했다. 불안한 바람 소리가 산호의 귀를 찔렀다. LA의 날씨가 이랬던 적이 있었나? 해안에 사람이 한 명도 없을 수가 있나? 산호의 걸음이 점점 빨라지다가 달리기를 시작했다. 산호는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으나 안개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없어요? 여기요! 누구 없어요?”

산호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멀리 울려 퍼졌다. 온 사방이 고요했다. 문득 산호는 이상함을 느꼈다. 안개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소리는 들려야 했다. 발밑에는 고운 모래가 분명히 느껴지는데 아까부터 파도치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여긴 어디지? 내가 아는 그 해안이 맞나? 산호는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돌아가야 한다. 어디로? 집으로? 도준형과 둘이 사는 그 집으로? 산호의 머릿속은 명쾌했다. 약에 절어버린 이후 처음 느끼는 상쾌함이었다. 그 집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숨이 차도록 달린 산호는 잠시 멈춰 숨을 골랐다.

잠시 멈췄던 산호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희미한 불빛이 보였기 때문이다. 산호가 그쪽으로 다가가려 하자 불빛도 산호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불빛 쪽으로 다가간 산호는 마침내 그 빛의 정체를 깨닫고 토악질을 했다. 산호가 모래 위에 쏟은 토사물은 잠깐 고개를 돌렸던 순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부드러운 모래가 발밑을 간질이던 감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앗 하는 사이에 산호는 모래밭이 아니라 푹신한 침대 위에 있었다. 아니, 처음부터 해안이 아니라 침대 위를 걸어 다녔는지도 모른다. 그럴 리 없다. 모래의 감각과 침대 시트의 감각은 전혀 다르다. 산호가 혼란에 젖었을 때, 빛이 산호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 빛은 안광이었다. 의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도 안광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가까이서 보면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 의안이 빙그르르 돌아가다가 산호의 얼굴에서 멈췄다. 산호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준형의 향수 냄새를 지독할 정도로 강하게 풍기는 성경이 픽 웃으며 산호에게 다가왔다.

“잘 지냈어?”

“너…. 너….”

“뭘 그렇게 놀라. 도준형이랑 같이 유학 왔다며?”

“…오, 오지 마.”

그러나 산호의 말은 성경에게 아주 조금도 위협이 되지 못했다. 성경은 성큼성큼 다가와서 산호의 턱을 움켜쥐었다. 산호는 이상하게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뿌리치고 도망 가야 하는데 마치 성경에게 지배라도 받는 것처럼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성경은 산호의 얼굴을 빤히 관찰하다가 산호의 배를 쓰다듬었다. 차갑고 곧은 손가락이 산호의 배를 쓰다듬자 산호는 몸을 떨었다. 그리고 성경이 물었다.

“도준형도 알아?”

“…….”

“네가 내 새끼 밴 거.”

그 순간 산호는 혀를 깨물 뻔했다. 미친 소리다. 남자인 자신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묻고 싶었지만 산호의 목에서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악을 질러보지만 쉭쉭대는 숨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제 몸의 변화였다. 성경의 손이 배를 쓸자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히 그럴 리가 없는데 제 배가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마치 성경의 손을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산호의 배는 풍선이라도 넣은 것처럼 둥글게 불렀다.

아아, 산호의 정신이 다시 아득해진다. 이게 무슨 일이지. 이런 꼴을 준형에게 들키면 또 맞을 것이다. 성경이 무슨 짓을 했는지 빨리 준형에게 알려야 했다. 알리고 저를, 불쌍한 유산호를 구해달라고 매달려야 한다. 산호의 눈에 공포가 서렸다. 성경은 물끄러미 그런 산호를 바라보다가 킥킥 웃었다.

“도준형한테 보여줄까?”

성경이 손가락을 딱 맞부딪치자 두 사람은 저택에 있었다. 언제나 산호가 잠드는 준형의 침실, 준형의 침대 위였다. 막힌 것 같은 산호의 목에서 애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준형아…. 어디 있어…. 도와줘, 박성경이 나를…. 또 나를….

“그렇게 불러도 도준형은 안 와.”

“흐윽….”

“그거 알아? 여긴 네 꿈이야.”

산호의 눈물 고인 눈이 성경을 노려보았다. 그럴 리 없다. 제가 왜 박성경이 나오는 꿈 따위를 꾸겠는가. 게다가 차가운 손가락이 제 허벅지 사이를 주무르는 이 감각은 너무나 현실적이었다. 이게 내 꿈이라고? 그럴 리 없다. 성경의 목소리가 악마처럼 산호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내가 말했잖아. 날 꼬신 건 너라고.”

“으…. 흐윽….”

“네 남친, 아니지. 이제 남편인가?”

“놔…. 이거…!”

“남편 침대에서 나한테 박히고 싶었을 거야.”

산호는 몸이 움직이지 않아 눈물만 흘렸다. 성경의 손이 제 몸을 뒤집어엎고 개구리처럼 다리를 벌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성경에게서는 여전히 도준형의 향수 냄새가 났고, 이제는 도준형의 흉내라도 내는 것처럼 준형이 부르던 노래를 흥얼거렸다.

“난 너 같은 애들을 잘 알아.”

성경의 손가락이 젤을 바른 채 산호의 구멍 안쪽으로 들어왔다. 숨이 턱 막혔다.

“누구한테 박히더라도 마냥 좋아서 질질 싸는 애들.”

“읏…! 싫, 하읏…!”

“난 도준형처럼 화낼 생각은 없어. 음란한 게 잘못은 아니지. 안 그래?”

“흡…!”

성경의 손가락이 대충 안쪽을 쑤시다 말고 빠져나갔다. 산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다음에 벌어질 일을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성경의 팔이 여전히 부풀어있는 산호의 배를 감쌌고, 성경의 성기가 산호의 안을 찔렀다. 귓가에 닿는 성경의 숨이 거칠었다.

“흐! 아! 흐윽…!”

“하….”

난폭한 피스톤질 끝에 성경의 허릿짓이 빨라졌고 산호는 아찔해졌다. 안 돼. 뭐가 안 되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안 된다는 생각이 산호의 머릿속을 뒤덮었다. 그리고 산호는 성경의 사정과 함께, 악몽에서 깨어났다.

환하던 침실의 불은 어둑하게 꺼져있었다. 등 뒤에서 준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씨…. 깼어?”

“…읏….”

“너 일어나니까 갑자기 조인다. 방금 쌌는데.”

그 목소리를 듣고서야 산호는 지금까지의 일이 모두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꿈이었구나. 산호는 다급하게 팔을 움직여 제 배를 쓰다듬었다. 꿈에서와 달리 배는 홀쭉했다. 산호는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떨리던 손끝이 차츰 잦아들었다. 준형은 땀에 젖은 산호의 등에 쪽쪽 입술을 부딪치며 말했다.

“너 자면서도 신음소리 내더라. 존나 꼴리게.”

“…….”

“꿈에서도 나한테 대줬어?”

준형이 키들거리며 산호의 성기를 잡고 허리를 한번 쳐올렸다. 산호는 제 엉덩이에 박혀있는 것이 박성경이 아니라 도준형의 성기라서 다행이라 여기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러나 그런 말을 준형에게 할 수는 없었다. 산호가 신음을 삼키자 준형은 다시 느리게 허릿짓을 했고 산호는 고개를 돌려 준형에게 입을 맞췄다. 어두워서 입술 근처에 혀가 부딪치고 나서야 제대로 된 키스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산호가 제 품으로 파고들자 준형의 허릿짓이 다시 빨라졌다.

“흣, 아, 아! 아응!”

“씨발….”

준형이 욕을 뱉으며 산호의 머리채를 잡았다. 산호의 손이 준형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새벽 내내 이어진 정사가 끝나자 준형의 기분은 최상이었다. 이제 유산호는 종종 섹스하는 중에 먼저 입을 맞추거나 품을 파고든다. 그럴 때마다 준형은 유산호의 다른 쪽 발목을 씹어먹고 싶었다. 기묘한 정복감과 소유욕이 준형의 머릿속에서 유산호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런 낯선 감정이 뭔지 모르던 준형은 이제 그게 무엇인지 안다. 그게 유산호를 향한 저의 사랑이라는 것을.

유산호는 며칠 동안 먼저 준형의 품을 파고들었다. 귀찮아야 하는데 준형은 하나도 귀찮지 않았다. 칭얼대는 유산호 때문에 준형의 기분은 나날이 좋아졌다. 반면 산호의 정신은 계속해서 무너지고 있었다. 준형이 모르는 꿈속에서, 산호의 어긋난 자책과 죄책감이 성경의 모습으로 나타나 산호를 계속 유린했다. 악몽이 길어질수록 산호는 더 자주 준형에게 매달렸다. 어쩌면 산호의 멍청한 머리보다 생존본능이 먼저 위험을 감지했을지도 모른다. 준형이 없으면 이제 산호는 살아남기 힘들었다.

어쨌든 그 덕분에 준형과 산호의 관계는 전에 없이 좋았다. 하지만 산호의 온전한 정신은 점점 사라졌다. 그건 준형이 산호에게 약을 먹인 순간부터 예견된 결과와도 같았다. 쾌감에 약한 산호의 체질과 도준형의 어긋난 다정함 때문에.

이제 약 기운이 떨어지면 산호는 손을 떨었다. 온몸에 벌레가 기어가는 것 같아서 핏방울이 맺힐 때까지 손톱으로 몸을 긁어대기도 했다. 도준형은 조금 후회했다. 약이 아니라 다른 방법만 있었더라도 유산호를 저렇게 만들지는 않았을 텐데. 준형이 후회하는 방식은 제 탓이 아니라 남 탓을 하는 것에 가까웠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을 지적해줄 사람은 없었다.

* * *

준형은 둘밖에 없는 저택이 마음에 쏙 들었다. 요즘은 유산호도 고분고분해져서 마치 신혼살림이라도 차린 것 같았다. 손을 떠는 유산호를 식탁에 앉혀놓고 제 손으로 음식을 먹여줄 때면 가슴팍이 간질간질했다. 부스러기가 묻은 유산호의 입가를 핥는 것도, 유산호가 먹다 남긴 식빵 테두리를 먹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산호는 얼마 남지 않은 맨정신 속에서 후회나 미련 같은 복잡한 감정들을 곱씹고, 생각하는 짓을 그만두었다. 더 이상 한 가지 생각에 몰두할 수 없었다. 점점 바보가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매일 저녁, 도준형이 저를 씻길 물을 욕조에 받는 동안 거실에서 순백색 희망을 몰래 꺼내보는 것은 머리가 아니라 몸에 남은 습관이었다. 그 가루만이 산호의 희망이었다. 판도라의 상자 같은 백과사전을 열고 닫으면서 산호는 그 희망을 꺼내지 못했다. 조금만 더, 하루만 더, 하면서 미룬 것도 벌써 몇 달째인지 잊었다.

요즘 산호는 자다가도 화들짝 깨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일쑤였다. 달빛이 시퍼렇게 들이치는 도준형의 침대 위에서 산호는 온기를 찾아 몸을 웅크렸다. 아무도 모르는 세상에 뚝 떨어진 것처럼 황망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분명히 뭔가를 잊었다는 감각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는 전혀 생각나지 않아서 매일 불안했다. 산호가 잠든 준형의 품에 파고들면 준형은 습관처럼 산호를 껴안았다. 긴 다리를 산호의 엉덩이에 감고 숱이 적어진 산호의 머리통을 제 턱으로 누른다. 그 무게가 느껴지면 산호는 간신히 잠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산호는 참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왜 이상한지는 몰랐지만 이상했다.

* * *

어느 날 산호는 갑작스레 엄마가 보고 싶었다. 통화를 한 지도 꽤나 오래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그렇게 생각하자 신경이 모조리 그쪽으로 몰렸다. 다행히도 요즘 준형은 산호에게 지나칠 정도로 다정했기 때문에, 산호는 말을 꺼내보기로 했다.

“있잖아.”

“어.”

“…….”

“왜.”

파스타를 깨작거리다가 불쑥 말을 꺼낸 산호가 우물쭈물하자 준형의 시선이 산호에게 꽂혔다.

“너는 한국 다시 안 가고 싶어?”

“…왜?”

“그냥….”

“가고 싶어?”

“…….”

“갔다 올까?”

“정말?”

준형은 흔쾌히 답했다. 유산호가 가고 싶어 하니까, 별다른 고민 없이 한 대답이었다. 산호는 정말로 기뻤다. 그러나 심하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자 준형은 기분이 복잡해졌다. 아직도 유산호는 저 말고 다른 것들에 관심을 둔다. 유산호가 저한테만 신경을 썼으면 좋겠는데. 유산호의 마른 얼굴이 기쁜 듯이 활짝 웃는 것은 보기 좋았다. 보기 좋긴 한데…. 그 이유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쨌든 준형은 귀찮음을 감수하고 유산호와 함께 한국에 다녀오기로 했다. 딱 거기까지였으면 좋았을 텐데.

점점 의존적으로 변해가던 유산호의 상태가 호전되기 시작했다. 중독자의 금단 증상이 정신력만으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닌데도, 유산호의 기분이 나날이 좋아서인지 아프다고 칭얼대는 날이 줄었다. 준형의 기분은 나날이 더러워졌다. 산호의 이성이나 눈치가 약간이라도 더 남아있었다면 준형이 폭발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산호는 전보다 둔하고 멍청해진 상태여서, 위험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엄마가 떡볶이 해준대.”

“그래?”

“응, 그리고 오징어 튀김이랑, 어, 또….”

“…그렇게 좋아?”

“응! 나 엄마 떡볶이 진짜 먹고 싶었는데.”

준형의 머릿속에서 인내심이 뚝 끊기고 말았다. 저와 둘이 지내면서 떡볶이 같은 게 먹고 싶다는 얘길 한 적은 없었다. 말했으면 당연히 구해다주었을 것이다. 간신히 참고 있던 것이 끊어지자 준형의 생각은 난폭하게 틀어졌다.

“야. 아주 살 판 났다?”

“…어?”

“나랑 둘이 있는 게 싫었나 봐.”

“…아니야….”

산호는 그제야 싸늘해진 분위기를 읽고 몸을 떨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준형은 화를 내고 있었다. 몸이 떨리는 것은 산호의 뇌리에 새겨진 그동안의 고통 때문이다. 기억이 희미해졌다고 해도 두려움은 본능처럼 찾아왔다. 그리고 그 떨림이 준형의 화를 더 부추겼다.

“싫어도 그렇게 티를 내면 안 되지, 산호야. 네가 그러면 내 기분이 어떻겠어. 응?”

“미, 미안해…. 난 그냥…!”

너 때문에 내 기분이 좆 같잖아. 그렇게 말한 준형이 포크를 내던지고 자리를 떴다. 안절부절못하던 산호가 준형을 따라갔다. 준형은 거실로 가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화를 가라앉힐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준형의 눈에 들어온 것은 유산호의 희망이 숨겨진 사전이었다. 아, 그래. 저게 있었지. 준형이 차갑게 웃었다.

* * *

산호는 준형의 손가락이 사전을 집어 들었을 때,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눈앞이 아찔해지고 저도 모르게 헛숨을 삼켰다. 준형은 팔랑거리며 넘어가는 책장 사이에서 순백색 가루가 담긴 봉투를 끄집어내며 산호를 보았다.

“산호야.”

“…….”

“이게 뭐야?”

준형은 어쩐지 기쁜 표정으로 웃었다. 들이치던 노을이 준형의 얼굴에 부딪쳐 산란했다. 깨진 빛의 조각들이 눈부시게 빛나며 산호를 옥죄여왔다. 산호는 그 끔찍한 순간에 못 박힌 채 준형의 손이 제 머리채를 잡을 때까지 굳어있었다. 당연히 그대로 바닥에 내팽개쳐지거나 할 줄 알았다. 그러나 틀렸다. 준형은 산호를 질질 끌고 침실로 데려갔다. 그리고 밤은 악몽처럼 찾아왔다.

준형은 스스로에게 조금 놀랐다. 겁먹은 얼굴로 얌전히 제게 끌려오는 유산호를 보니 맹렬히 타오르던 분노가 슬쩍 가라앉았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당장이라도 유산호와 함께 죽고 싶었지만 유산호의 모든 행동들이 저를 멈추게 한다. 손에 감기는 유산호의 머리칼은 늘 정성스레 감겨주는데도 버석버석하게 메말라 있었다.

산호의 가벼운 몸은 힘없이 침대 위에 던져졌다. 그리고 준형은 제가 섞어둔 그 밀가루와 슈가파우더를, 지퍼백을 이로 찢었다. 산호는 당황했다. 이럴 수는 없다. 도준형을 죽이는 것은 자신이어야 했다. 저렇게 제멋대로….

“아, 안 돼…! 그거 너무 많… 읏…!”

준형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지퍼백을 문 채로 산호의 몸 위에 올라탄 준형이 손쉽게 산호의 옷을 벗겨냈다. 맨살에 닿는 시트의 촉감이 차가웠다. 준형은 산호를 보며 물었다.

“이걸로 나 죽이면 그다음엔 어쩌려고 했어, 산호야.”

산호의 눈은 경악으로 커졌다. 어떻게 도준형이 눈치를 챘는지 산호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부주의했었나? 아니면 지미가 말했나? 노트북의 검색 기록을 덜 지웠나? 산호가 눈알을 굴리는 사이에 준형은 산호를 침대에 묶었다.

“네가 나 없이 어떻게 살려고 그래.”

“…나, 나는 그런…. 악!”

준형의 이가 산호의 유두를 아프게 깨물었다. 피가 날 정도로 세게 깨문 탓에 산호는 시트를 꽉 쥐며 비명을 질렀다. 준형은 찡그린 표정으로 산호의 뺨을 때렸다. 짝, 소리와 함께 산호의 뺨이 붉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시끄럽다, 산호야.”

준형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산호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제 안다. 준형의 화가 가라앉을 때까지 뭐든 시키는 대로 하고, 아파도 소리를 내지 말고 참아야 한다. 잘 버티고 나면 준형은 상을 주듯 다시 다정해졌다. 제가 낸 상처에 약을 발라주고, 산호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그 순간을 기다리며 산호는 또 튀어나올 것 같은 비명을 참았다. 배에 힘을 준 탓에 마른 뱃가죽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준형은 제가 새로 만들었던 유산호의 희망을 살짝 유산호의 유두에 뿌렸다.

“젖꼭지도 점막인가?”

“…흐…으….”

“이게 그렇게 끝내준다며. 그래서 훔쳤지?”

산호의 대답을 기대하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준형은 텁텁한 밀가루와 섞인 슈가파우더를 산호의 유두와 함께 빨았다. 침이 섞이자 가루는 끈적하게 젖어 그대로 산호의 유두에 달라붙었다. 잇자국이 난 산호의 유두는 준형이 빠는 대로 말랑하게 부풀었다. 분명히 화풀이를 할 셈이었는데 유산호의 젖을 빨고 있자니 몸이 먼저 달아올랐다. 준형이 욕을 삼키며 제 옷을 벗어 던졌다. 피부가 건조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유산호의 살은 말랑말랑했다. 가죽밖에 남지 않은 몸에 살을 찌우려고 제가 얼마나 공을 들였던가. 준형의 손이 산호의 엉덩이를 아플 정도로 꽉 잡았다. 손에 가득 차는 엉덩이의 살이 준형을 흡족하게 만들었다.

준형은 산호의 얼굴을 잡아 저와 눈을 맞춘 채로, 지퍼백 안에 남아있던 가루를 혀로 핥았다. 저를 보는 유산호의 눈빛이 흔들린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도, 눈물이 고인 눈도 준형을 자극했다. 유산호의 모든 것이 짜릿했다. 유산호는 여전히 이게 헤로인이라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다. 준형은 가루 묻은 혀를 유산호의 성기에 문질렀다. 유산호의 몸이 팔딱거리며 튀어 올랐으나 팔 하나로도 고정시킬 수 있었다. 부러 요란한 소리를 내며 유산호의 귀두 끝을 이로 긁었다. 혀는 뾰족하게 세운 채 요도를 파고들 것처럼 눌러댔다. 힉힉대는 소리와 함께 유산호의 목이 꺾였다.

준형은 몸을 일으켜, 익숙한 듯이 침대 옆의 서랍에서 요도 비즈를 꺼냈다. 유산호의 생일을 기념해 주문 제작한 비즈는 제 마음에도 꼭 들었고, 유산호도 아주 좋아했다. 제 가슴팍을 박박 할퀴어대며 제발 싸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유산호는 지나치게 사랑스러웠다. 오늘도 빨리 그 모습을 보고 싶다. 그래서 준형은 가루와 침으로 더러워진 유산호의 요도 끝에 비즈를 박아넣었다. 망설임도 배려도 없는 정확한 손놀림이었다. 유산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렇게 좋아?”

“…아으….”

“너 이제 나 없으면 싸지도 못하겠다.”

“읏, 하, 흐으…. 하악….”

준형은 그렇게 말하며 지퍼백 안에 남아있던 가루들을 모조리 산호의 얼굴에 뿌렸다. 산호가 콜록거리는 동안 준형은 유산호의 눈과 입술, 볼과 턱을 모조리 핥았다. 기침하는 유산호의 입에 엉겨붙은 가루를 제 혀로 밀어넣으면서 준형은 몸부림치는 유산호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죽으면 저도 죽고 싶을 텐데 왜 아직도 유산호는 저렇게 살고 싶어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준형은 뻣뻣해진 제 성기를 유산호의 허벅지에 문지르며 산호의 귓불을 잘근잘근 씹었다. 준형의 성기가 막무가내로 산호의 엉덩이 사이를 찔러댔다. 당장이라도 유산호 안에 쑤셔 넣고 싶은 마음과 유산호가 애원할 때까지 박아주기 싫은 마음이 준형의 속에서 대립했다.

“말해봐. 산호야.”

“아으, 흣! 으, 흐윽…!”

“나 죽으면 누가 너한테 박아줄 것 같아? 어? 대답해봐 씨발….”

“하윽…! 아, 아…!”

산호는 이제 곧 죽을 것 같았다. 그리고 드디어 죽는다는 생각에 짜릿해졌다. 준형은 산호의 몸과 얼굴에 새하얀 가루들을 뿌려댔다. 이제 다 끝났다. 도준형을 죽이는 것은 실패했지만 대신 도준형이 나를 죽이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산호는 끝을 알 수 없는 쾌감 속에서도 정신을 놓지 않을 수 있었다. 목이 아플 정도로 기침이 나는 것은 약 때문이겠지. 성기가 불에 덴 것처럼 뜨거운 것은 준형이 약 묻은 혀로 핥았기 때문이겠지. 유두가 아픈 것도 스며든 약 때문일까? 산호는 구글에서 보았던 약의 효과들을 하나도 기억할 수가 없었다. 머리가 이상했다. 준형의 정액이 제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진다. 따뜻하고 축축했다. 이대로 약에 취해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죽는다면 차라리 행복할 것 같았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정신은 몽롱해지지 않았다.

산호가 멍청해진 머리로도 문득 이상함을 느낄 때쯤, 준형의 손이 산호의 뒤통수를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준형은 그대로 유산호의 입에 제 좆을 처넣고 허리를 흔들어댔다. 참을 수 없이 화가 나면서 동시에 짜릿했다. 유산호처럼 순하고 겁 많은 녀석이 잠깐이라도 저를 죽이려는 생각을 품다니. 유산호에게 그런 마음을 먹게 할 수 있는 것은 나밖에 없다. 그런 생각이 준형의 흥분을 부추겼다. 하지만 동시에 분노도 멈추지 않았다. 저 없이는 이제 아무것도 못하는 주제에 감히. 어떻게 유산호는 저 없이 살아갈 결심을 했을까. 그런 꼴을 보려고 데려와 키운 게 아닌데. 산호의 턱이 빠질 것처럼 아파올 때 준형이 사정했다. 말라서 쇳소리가 나던 산호의 목구멍이 준형의 정액으로 미끄덩하게 젖어 든다.

“하아…. 하아….”

“나 죽으면 다른 새끼 좆도 이렇게 빨아줄 거야?”

“안… 아니야…. 아니야….”

산호는 정신없이 고개를 저었다. 채 삼키지 못한 정액이 칠칠맞게 입가에 흐르고 있었다. 준형은 한 차례 사정을 한 뒤에도 기묘한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래서 아까 박아둔 비즈의 고리에 손가락을 끼웠다. 단번에 잡아빼자 막혀있던 요도에서 울컥거리는 액체가 실금하듯 쏟아졌다. 준형은 가차없이 비즈를 다시 쑤셔 넣었다. 한 손으로는 유산호의 말랑한 좆을 잡고 한 손으로는 그 안을 집요하게 후볐다. 작은 원형의 돌기들이 길게 이어진 형태의 비즈가 산호의 안을 푹푹 쑤셨다. 산호의 입가로 침과 눈물이 함께 흘러내린다. 정액과 함께 말라붙은 밀가루가 다시 젖어 든다.

“하으! 아으응! 응! 아! 그, 마안…!”

준형은 산호의 손이 힘없이 제 팔을 붙드는 것을 쳐내고 기어이 산호가 사정할 때까지 안쪽을 쑤셨다. 준형의 손이 흥건하게 젖고 나서야 산호는 가쁜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산호의 정신은 요즘 그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뭔가 잘못됐다. 잘못된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산호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너를 죽이려고 준비했던 약이 아무 효과가 없었다고? 그게 나를 절망하게 한다고? 눈물이 그치지 않는 것은 쾌감의 잔상이 아니라 억울함이라고? 산호는 제 울음소리가 준형을 자극하지 않기를 바라며 애써 숨을 참았다.

“산호야.”

“흐윽….”

“너 나밖에 없잖아. 그치?”

“흐으으….”

준형의 손이 다정하게 산호의 볼을 쓰다듬었다. 산호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어서 대답을 해야 한다. 준형의 화는 한번에 가라앉지 않는다. 가라앉으려는 낌새가 보일 때, 산호가 거슬리는 행동을 하지 말아야 했다. 산호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너밖에 없어…. 좋아, 흑, 좋아해, 준형, 흐으….”

준형은 담백하게 대답했다. 나도 알아. 준형의 손가락이 산호의 볼을 훑었다. 제가 싸지른 정액과 눈물이 섞여 축축하게 젖은 볼을 쓰다듬으며 준형이 물었다.

“내가 얼마나 좋은데?”

산호가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해 입을 몇 번 벙끗거리다가 간신히 내뱉었다.

“…엄청 많이.”

준형이 산호의 입술을 잘근, 씹으며 속삭였다. 그러면,

“…나 죽으면 너도 같이 죽을 거야?”

산호는 대답할 수 없었다. 준형의 무릎이 아래에서 산호의 성기를 문지르고 있었기 때문에 신음이 먼저 튀어나왔다.

“흐….”

신음을 내뱉자 준형이 재차 물었다.

“같이 죽을 거냐고, 산호야. 어?”

“으응…! 으!”

산호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온몸의 물이 다 짜내진 것처럼 힘이 없었다. 더 이상 자극을 받았다가는 정말 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쌀 게 없어서 내장을 쥐어짜는 느낌이 들었다. 산호의 간절한 승낙에도 불구하고 준형은 멈추지 않았다.

“약속했다?”

“하으, 아…!”

“어기면 네 젖꼭지에 내 거라고 이름 새겨도 돼?”

“아읏, 아, 응! 으흑…!”

산호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지만 준형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제 손으로 산호의 성기를 꽉 쥐는 동시에, 풀어진 구멍에 다시 단단해진 제 성기를 밀어넣었다. 더 이상 쌀 수 없을 거라는 산호의 생각과는 다르게 준형이 안쪽을 쳐올리자마자 산호의 성기 끄트머리에서 투명한 액체가 방울방울 흘러나왔다. 뱃속이 다시 끓어올랐다. 팽팽하게 부푼 성기가 준형의 움직임에 따라 덜렁거리며 흔들렸다. 흘러나온 액체는 단정치 못하게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단단한 준형의 성기가 아까의 비즈처럼 산호의 안을 모조리 헤집었다. 비밀 같은 것은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산호에게 솔직함을 강요했다. 산호는 다시 굴복하고 말았다.

“아…! 좋아…! 으응…!”

좋아서 죽을 것 같다고 준형을 붙든 채 울었다. 준형이 주는 쾌감에 매달려 결국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왜 제 가슴에 준형의 이름을 새겨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준형이 바라는 것을 산호는 언제나 이해할 수 없었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세차게 젓던 고개를 끄덕이면서 산호는 합리화를 했다. 이름을 새긴다는 것은 적어도 산호를 버리지는 않겠다는 말이었다.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산호는 준형의 몸 위에서 스스로를 위로했다. 도준형은 내가 저를 죽이려 했던 것을 알면서도 나를 버리지 않았다. 버리지 않을 것이다. 대체 왜 그 사실이 저를 안도하게 하는지. 산호는 견딜 수가 없었다. 무엇을 견딜 수 없는지도 모르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도준형의 얼굴을 마주 보았으나 눈물 때문에 번진 그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볼 수가 없었다. 산호가 입을 벌리자 준형의 얼굴이 성큼 가까워졌다. 따뜻하고 힘센 혀가 산호의 입안을 휘젓자 산호의 머릿속을 괴롭히던 복잡한 생각들은 모두 사라졌다. 새하얗게.

그리고 네 번쯤 더 지독한 절정을 느끼고 나서 산호는 기절했다. 준형은 잠든 산호의 콧등에 키스하며 생각했다. 한 번만 봐주지, 뭐. 이렇게 귀여운데.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한 것이 멋쩍어서 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이번에도 저는 유산호에게 졌다. 분노는 이미 유산호가 고개를 끄덕인 순간부터 가라앉았다. 이번에도 유산호가 이겼다. 이번만이 아니다. 자신은 평생 유산호를 이기지 못할 것 같았다. 불공평하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준형은 핸드폰을 꺼냈다. 분명 근처에 타투 샵이 있을 것이다. 쇠뿔도 단숨에 빼랬다고, 준형은 반강제로 받아낸 산호의 허락을 미룰 생각이 없었다. 유산호의 민감한 몸에 새겨질 제 이름을 상상하자 만족감이 피어올랐다. 유산호의 발목에 이어 가슴도 온전히 제 것이었다.

타투가 끝나면 유산호가 바라는 대로 한국에 다녀올 생각이다. 떡볶이를 질리도록 먹인 후에 돌아와야지. 준형은 언젠가 유산호의 머리통 속도 온전히 제 것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저 시간이 조금 걸릴 뿐이다. 준형은 사랑하는 유산호를 위해 인내하고 기다리기로 했다. 귀찮고 답답하지만 사랑은 그런 것이니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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