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Epilogue – underwater
LA의 낮은 서울의 낮보다 지루하다. 태양이 내리쬐는 탓에 체력이 약한 산호는 에어컨 근처를 떠날 생각도 하지 못한다. 면허가 없으니 준형과 함께가 아니면 차를 몰고 나갈 수도 없다. 미국에서의 매일은 산호의 생각보다 더 나빴다. 아카데미에서는 자주 수업을 빠지는 두 사람에게 과제를 산더미처럼 내주었고, 도준형은 그딴 과제를 하지 않아도 유창한 영어를 내뱉는 것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물론 산호는 도준형에게 시달리며 간신히 에세이를 쓰는 나날들을 보내야 했다.
엄마는 음식을 가장 걱정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한인 마켓에는 온갖 라면과 김치, 간장과 고추장까지 없는 게 없었다. 미국의 기름진 음식들도 산호의 입에는 잘 맞았다. 도준형은 매일 산호에게 고기나 치즈, 아니면 튀긴 음식을 먹이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굴었다. 산호는 중국식 볶음면과 치즈가 늘어지는 파스타를 좋아했다. 그게 가장 먹기 편했기 때문이다.
도준형이 산호를 데려간 집은 한남동의 저택보다 좋으면 좋았지 더 나쁠 리는 없는 이층집이었다. 입을 딱 벌린 산호를 보며 도준형은 픽 웃었다. 앞마당의 수영장과 연녹색 현관문이 산호의 새로운 생활을 축복해주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한국과 가장 많이 다른 것은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다. 높아 봐야 삼 층이 고작인 낮은 지붕의 건물들, 밝은 파스텔톤 외벽을 가진 저택과 낯선 야자수, 멀리 보이는 수평선과 잔디밭,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멀리 떨어진 이웃집.
그리고 도준형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산호는 조금 변했다. 좋은 일은 아니었다. 색이 연한 머리칼은 푸석해졌고 눈의 흰자위에는 실핏줄이 섰다. 그리고 자주 몽롱해졌다. 시작은 도준형이 억지로 먹인 엑스터시였다.
미국에서는 돈만 있으면 약을 살 수 있었다. 준형은 마치 성인용품을 고르듯 신중하게 약을 사다 날랐다. 그리고 저는 손도 대지 않으면서 산호에게만 여러 가지 약들을 처발랐다. 어디서 비타민을 샀다며 가져온 것은 엑스터시였다.
산호는 정말로 죽는 줄 알았다. 그걸 처음으로 먹고 도준형과 섹스를 했을 때는. 산호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죽을 뻔 했다는 추상적인 감각 말고는 기억나는 게 없었다. 점점 머릿속의 용량이 줄어드는 기분이다. 산호는 눈을 감고 기억을 되살리려 애를 썼다.
* * *
LA에 도착한 지도 한 달이 넘어 슬슬 생활이 익숙해질 때였다. 한남동의 저택보다 훨씬 커다란 이층집은 산호의 새로운 감옥이었다. 도준형 없이는 벗어날 수 없는. 넓은 집안 어디에서도 산호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하루는 도준형이 수상한 알약을 내밀며 말했다.
“비타민 먹어.”
“…갑자기 웬 비타민?”
“먹어보고 괜찮으면 더 사줄게.”
산호는 아무런 의심 없이 물 한 모금과 함께 그 알약을 삼켰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혀 뒤쪽으로 씁쓰름한 맛이 느껴졌다. 약에 면역이 없는 산호의 머리가 이상함을 느낄 새도 없이 온몸에 약 기운이 퍼졌다. 머리가 핑핑 돌고 뱃속에서 기분 좋은 열기가 올라왔다. 도준형이 둘로 보였다.
“이게 뭐….”
“효과가 금방 나오네.”
“어지러워….”
“그건 엑스터시야.”
“준형아. 나 이상해….”
“기분이 별로야?”
“아니. 좋은데. 좋은데 무서워.”
“좋은데 왜 무서워.”
엑스터시라는 비타민 브랜드가 있었나? 둘로 나눠진 도준형의 모습이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반짝거리는 도준형의 눈빛이 아름답다. 잘생긴 도준형. 산호는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살면서 마약을 해볼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도준형과 함께 있으면 언제나 산호는 새로운 경험을 했다. 기분이 급격하게 좋아진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갑자기 솟아난다.
“조심.”
다리가 풀린 것도 괜찮았다. 도준형이 잡아주니까. 산호는 미친 사람처럼 실실 웃었다. 도준형의 시선이 산호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기분 좋아?”
“응! 준형이 너는 안 좋아?”
“나는,”
산호가 준형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고 제 얼굴 가까이로 끌어당겼다. 좀처럼 당황하는 법이 없던 준형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서린다. 산호가 잘게 웃으며 도준형의 입술에 쪽, 제 입술을 맞댄 뒤 얼굴을 놔준다.
“아….”
“너랑 뽀뽀하는 거 좋아.”
“존나 귀엽게 구네.”
산호를 빤히 내려다보던 준형의 얼굴에 허탈한 웃음이 걸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먹일걸. 준형은 산호와 관련된 일에는 언제나 바보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런 기분마저 싫지 않아서, 그럴 때마다 사랑의 위대함을 실감했다. 유산호를 만나기 전에는 세상에 사랑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좋은데 왜 지금까진 안 해줬어?”
“그것도 몰라?”
“모르겠는데.”
준형의 목소리에 피식피식 웃음기가 묻어난다. 산호는 짐짓 엄숙하고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자주 해주면 권태기가 빨리 온대.”
준형이 참지 못하고 산호의 티셔츠를 벗기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앙큼한 소리는 어디서 배웠어. 산호는 제 배를 간지럽히는 준형의 혀 때문에 꺄하하 하는 꼴사나운 소리를 내며 웃었다.
“간지러!”
“기분 좋게 해줄게.”
산호는 준형의 혀가 제 젖꼭지를 건드리자 몸을 떨었다. 평소보다 몸이 몇 배는 민감해진 것 같았다. 살갗을 핥는 혀의 돌기들마저 하나하나 느껴지는 기분이다. 이래서 예술가들이 마약을 하는 걸까? 산호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목에 걸쳐진 티셔츠를 완전히 벗어 던졌다. 준형이 한숨을 내뱉는 것을 끝으로 기억이 끊겼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누워있는 준형의 위에서 스스로 쭈그리고 앉은 채 엉덩이를 흔들고 있었다.
“하으…! 아! 응! 좋아…!”
정신이 돌아옴과 함께 쾌감이 뇌를 조각조각 쪼개는 기분이었다. 내벽을 쑤시는 도준형의 성기가 너무 좋아서 산호는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왜 멈춰야 하지? 이렇게 기분이 좋은데. 미국에 와서 살이 좀 오른 산호의 엉덩이가 쫀득하게 준형의 성기를 삼켰다. 준형의 눈은 약에 취한 산호만큼이나 풀려있었다. 준형의 성기를 구멍에 넣고 주저앉을 때마다 전립선액을 뿜어내는 산호의 성기 때문에 도준형의 배는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히…! 아, 핫…! 응, 으응…!”
도준형의 손이 산호의 목에 채워진 목줄을 잡아당겼다. 산호는 도준형의 몸 위로 엎어졌다. 쪼개진 사과처럼 벌어진 산호의 엉덩이를 준형의 커다란 손이 감쌌다. 산호가 내려앉던 속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허리를 쳐올리는 덕분에 산호는 솔직하게 신음을 내질렀다. 몇 번이나 절정을 느꼈는지 온몸이 물에 젖은 것처럼 늘어지는데 준형은 멈추지 않았다.
산호가 헉헉대며 준형의 손에 깍지를 꼈다. 준형이 또 미친 사람처럼 피식피식 웃었다. 산호의 손이 준형의 가슴을 퍽퍽 때렸는데도 준형의 웃음은 그치지 않았다. 뭐가 그렇게 웃겨. 산호의 말은 중간에 끊겼다. 도준형의 혀가 산호의 입안으로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약에 취한 유산호는 엄청나게 솔직하고 난잡했다. 준형은 그게 너무 좋았다. 짜릿해서 손바닥에 땀이 맺혔다. 준형의 손이 산호의 젖은 성기를 쥐고 흔들었다.
“기분 좋아?”
“응…. 좋아, 더, 더….”
“평소에도 이러면 얼마나 좋아.”
“아학! 아! 너무…!”
“너무?”
“쌀…거 가타아…!”
“솔직하게 구니까 얼마나 예뻐.”
도준형의 손이 산호의 사정을 도왔다. 엄지손가락에 묻은 산호의 정액을 빨아먹기까지 했다. 뇌가 녹을 것처럼 황홀한 섹스였다.
이런 미친…. 정신이 완전히 나갔던 게 틀림없다. 산호는 드문드문 기억 나는 그 섹스가 지금까지 했던 모든 섹스 중에 가장 끔찍하고 가장 황홀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도준형이 주는 모든 알약을 필사적으로 피했다. 술에 취하면 기억이라도 잃을 수 있지만 약은 그렇지 않았다. 제가 했던 낯 간지러운 소리와 수치스러운 짓들이 모조리 떠올랐다.
그러나 준형은 그만두지 않았다. 알약을 먹지 않으면 사탕이나 젤리 형태로 만든 것을 사다 먹였고 그런 날은 성기에 리본 달린 고양이 방울 같은 것을 묶거나, 누드 에이프런 같은 치욕스러운 의상을 걸친 채 도준형과 끝내주는 섹스를 했다.
산호가 군것질을 일체 거부하자 준형은 가루 형태의 약을 음료수에 타서 먹였다. 그 날은 세 번쯤 싸지른 도준형의 정액이 흘러나오지 않도록 스스로 엉덩이를 흔들며 애널 플러그를 꽂은 날이었다. 도준형이 애지중지하는 그 비싼 애널 플러그는 구멍에 꽂으면 꼭 토끼처럼 동그란 털로 된 꼬리가 엉덩이 가운데에 돋아난 것처럼 보였다. 써지컬 스틸로 만들어져서 몸에 해롭지도 않다고 했다. 눈물 나는 친절이다. 다음날 정신을 차린 산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플러그를 빼냈다.
“권태기가 안 오려면 노력을 해야지. 안 그래, 산호야?”
개소리다. 어째서 제가 망사 스타킹을 신은 채 엉덩이 부분만 찢겨진 채로 박히는 게 그 노력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이성이 돌아왔을 때만 그랬다. 약에 취한 상태로는 모든 것이 성적 흥분을 자극했다. 이성이 돌아오면 산호는 죽고 싶어지는 날이 늘어났다.
아무튼 산호가 음식을 거부하면 준형은 산호의 입을 억지로 벌려서라도 약을 먹일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산호는 차츰 무뎌졌다. 마리화나는 담배보다 중독성이 적고…. 엑스터시는 소변으로 배출되면 끝이고…. 그런 달콤한 말들은 진실을 따지지 않고 모조리 믿기로 했다.
* * *
약에 중독되면 사람은 차츰 정상적인 사고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까 산호가 도준형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도준형의 탓이었다. 도준형이 억지로 먹인 엑스터시들이 산호의 정신을 빠르게 망가뜨렸다. 왼쪽 발목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심하게.
다행히 일말의 양심은 남아있는지 도준형이 산호에게 먹이는 것은 주로 파티 필이었다. 어떤 미친 새끼가 파티 필이라는 이름을 지었는지 알면 산호는 그놈에게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마약에 그런 가벼운 이름을 붙이다니. 어쨌거나 도준형의 판단으로도 더 강한 약은 아닌 모양이었다. 도준형이 코카인이나 헤로인을 살 돈이 없을 리가 없다. 하기야 주인도 개가 죽으면 슬플 테니까.
마리화나는 처음 한 번을 제외하면 권하지도 않았다. 산호는 마약에도 기분을 ‘high’ 하게 만드는 것과 ‘down’ 되게 만드는 것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살면서 필요하거나 알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한 것들이었다. 어쨌든 준형은 산호가 ‘high’ 해진 상태를 아주 좋아했다.
“너 생일이 언제였더라.”
“…다음 주.”
무심코 대답한 산호는 도준형이 왜 이제야 제 생일을 묻는지 궁금해졌다. 그러나 생일날 아침에 도준형이 내민 작은 상자를 보자 조금 놀라웠다. 이건 미안함의 표출일까. 그러나 흰색 리본으로 묶인 검은 상자 안에는 백금으로 만들어진 요도 비즈가 들어있었다. 산호는 사치스러운 백금 비즈를 요도에 꽂은 채 준형에게 다리를 벌렸다. 물론 그날도 준형의 뜻대로 약을 먹었다.
물론 매일 섹스만 한 것은 아니었다. 반강제로 아카데미를 관둔 후에는 시간이 남아돌았다. 준형은 신혼 흉내라도 내고 싶었는지 집 근처의 해변이나 월마트, 인앤아웃 버거로 산호를 데리고 돌아다녔다. 해변에서는 서핑이 해보고 싶다는 산호의 말은 무시했지만, 흰 말을 타고 긴 해변을 산책하는 승마 체험을 하게 해주기도 했다. 언제 무슨 일을 했는지는 이미 산호의 머릿속에서 뒤죽박죽으로 섞였지만 준형은 모두 제가 기억하고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산호는 도준형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자신의 미래를 생각했다. 살인범으로 몰리지 않는다고 해도 도준형을 죽이고 나서 잘 살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준형이 산호에게 복용시키는 알약이 한 개에서 두 개로, 두 개에서 세 개로 늘어나자 차츰 산호의 사고가 꼬였다.
내가 죽였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서 산호는 도준형에게 몰래 약을 먹이기로 했다. 치사량의 마리화나, 치사량의 헤로인, 그런 것들을 산호는 구글에서 배웠다. 떨리는 손가락은 노트북 자판을 치는데도 몇 번이나 오타가 났다.
치사량이 가장 적은 것은 헤로인이었다. 가격도 다른 마약에 비하면 싼 편이었다. 그러나 싸다고는 해도 마약은 마약이다. 0.1kg에 육천오백 달러를 호가하는 백색 가루를 살 돈이 산호에게 있을 리 만무했다.
산호는 구할 수 있는 약을 모조리 섞어 치사량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약에 절여진 머리로 한 생각치고는 꽤 그럴싸했다. 산호는 도준형에게 더 많은 약을 조르기 시작했다. 산호는 준형이 약을 보관하던 상자에서 한 알, 두 알씩 빼돌린 알약을 티슈에 곱게 싸서 제 방의 서랍 구석에 숨겼다. 나쁜 짓을 한 것처럼 심장이 뛰었다.
그러나 약 때문에 지능이 현저히 낮아진 산호가 준형에게 그것을 들키는 일은 시간문제였다. 산호가 약을 조르자 처음엔 적당히 내주던 것을 점점 의아하게 여겼다. 산호의 행동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는 준형의 사랑이 마침내 서랍에서 산호의 비밀을 발견했다. 티슈에 곱게 싼 채 숨겨둔 알약은 제 상자에서 빼돌린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준형을 화나게 한 것은 제가 준 적 없는 싸구려 헤로인의 존재였다.
짝! 겁을 줄 용도로 샀던 가죽 패들이 산호의 등에 거침없이 붉은 자국을 만들었다.
“이거 어디서 났어?”
“흐으….”
“어떤 새끼가 줬어?”
준형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짝! 짝! 산호의 등에 금방 피가 맺혔다. 엉덩이도 상황은 비슷했다.
“네가 샀어?”
“아으으! 아프, 아파…. 아파….”
“아니면 또 걸레처럼 벌려주고 받아왔어?”
산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갈색 분말은 도준형을 따라갔던 하우스 파티에서 훔친 것이었다. 그걸 곧이곧대로 말하면 안 된다는 걸 산호는 알았다. 그랬다간 다시는 그 자리에 데려가지 않을 것이다.
도준형은 미국에도 친구들이 있었다. 중학교 시절에 알고 지내던 친구들이라는데 산호가 볼 때는 다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망나니들 같았다. 부모의 돈으로 렌트한 대저택에서 약을 빨거나 난교 파티를 벌이는 도준형의 친구들. 세상은 참 불공평했다. 어쨌거나 그날도 그런 파티 중의 하루였다. 준형이 산호에게 먹인 약들은 그 친구들 중 하나에게서 산 것이었다.
지미, 아닌가, 제이미인가. 어쨌든 그런 이름을 가진 남자에게선 퀴퀴한 냄새가 났다. 먼지 낀 레게 머리를 한 남자의 팔목에는 징그러울 정도로 많은 주사 자국이 있었다. 딱지가 앉은 상처도 있었고 진물이 흐르는 상처도 있었다. 술에 약을 섞어 먹고 소파 위에 쓰러진 제이미의 품에서 산호는 그 갈색 분말을 훔쳤다.
그날은 녹초가 된 몸으로도 행복하게 잠들었다.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걸로 내가 뭘 하려고 했더라. 산호는 잠시 고민했다. 아, 도준형에게 먹이려고 했었지. 그런데 왜 먹이려고 했었지. 아, 도준형을 내가 죽이지 않기 위해서였지. 그런데 왜 내가 죽이면 안 되는 거지. 왜…? 산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다.
“산호야. 더 맞고 싶어? 왜 대답을 안 해.”
짝! 산호는 패들로 얻어맞는 제 등에도 그런 진물이 흐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약의 부작용 중 하나는 약을 하지 않았을 때의 감각이 이전보다 현저히 떨어지는 것이었다. 산호가 끅끅대며 아픔을 견뎌내자 결국 준형은 대답 듣기를 포기했다.
그리고 산호는 제가 숨겼던 알약을 먹은 채 계속해서 등과 엉덩이를 맞으며 강간을 당했다. 순도 낮은 싸구려 헤로인을 숨긴 죗값이라기에는 과했다. 언젠가부터는 산호도 준형과의 섹스에 거부감을 별로 느끼지 않았지만 그날의 관계는 분명 강간이었다. 한국에서의 일들을 모조리 일깨우는 강간.
심하게 얻어맞으며 당한 탓에 산호는 일주일 동안 꼼짝없이 침대에 엎드린 채 지내야 했다. 엄마가 챙겨준 연고가 도준형의 손가락을 타고 산호의 등에 발라진다. 따끔따끔한 그 감각은 처참했다. 준형은 어디서 났는지 기억이 안 난다는 산호의 말을 믿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다. 어쩌면 산호가 뭘 하든 준형의 손바닥 안일 테니 더 신경 쓰고 싶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럼 약은 왜 숨겼는데?”
“…네가 약을 조금밖에 안 주잖아.”
이성이 돌아왔을 때 물어봐서 다행이다. 산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이기로 했다. 계획과 준비는 신중해야 했다. 다행히 도준형은 산호가 약에 완전히 중독되어서 몰래 약을 숨겨둔 거라고 여기는 듯 했다.
“…차라리 마리화나를 더 많이 피워. 아님 엑스터시를 빨던가. 헤로인은 안 돼.”
“헤로인은 왜 안 돼?”
“몸 망가져.”
그렇게 말하며 도준형은 산호의 엉덩이에도 연고를 발라주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친절이었다.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몇 주가 지나고 등의 상처에 딱지가 앉은 뒤에야 산호는 찌든 몸을 씻을 수 있었다. 준형은 아끼는 인형을 씻기듯 커다란 월풀 욕조에 물을 받아놓고 산호를 안아서 데려다 놓았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욕조에서 산호의 머리를 감기고 몸을 씻겨준다. 가죽 패들로 인정사정없이 때릴 때와는 달리 다정하고 조심스러운 손길이다. 산호는 노곤해졌다.
빨리 도준형이 제게 질려서 저를 버리고, 제 인생이 원래의 자리를 찾길 바라는 것은 일찌감치 그만뒀다. 산호는 이제 도준형이 제게 질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제가 도준형을 죽이기 전까지 도준형은 저를 사랑했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깨끗하게 씻어야지.
* * *
그리고 산호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침내 치사량의 헤로인을 손에 넣었다. 성공이다. 성공했다. 기뻐서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발로 땅을 몇 번 차는 것으로 참았다.
기회는 정말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찾아왔다. 산호는 도준형과 함께 다운타운으로 나가더라도 떨어져 있는 날이 없다. 오늘은 운이 좋았다. 한동안 집 밖으로 산호를 데리고 나가지 않던 준형이 산호를 데리고 나왔을 때부터 산호는 심장이 뛰었다. 익숙한 대저택이 가까워질수록 산호는 긴장했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집 밖으로도 울려 퍼졌다. 파티는 이미 한창이었다. 담배 연기와 독한 술 냄새, 그리고 퀴퀴한 마리화나 냄새가 미러볼 조명 밑에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
“여기서 기다려.”
“어디 가게?”
“다른 딜러를 찾았어. 새로운 약이 있대.”
준형이 산호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사람들 틈으로 사라졌다. 산호는 준형이 사라지자마자 플로어를 정신없이 두리번거렸다. 지미, 아니, 제이미, 뭐가 됐든 제발. 어디 있을까. 침침한 조명 사이로 산호는 간절하게 지미를 찾아 헤맸다. 시간이 없었다. 준형이 돌아오기 전에 지미를 찾아서 약을 훔칠 수 있을까? 산호가 입술을 물어뜯으며 복도의 코너를 돌았을 때, 멀리 레게 머리가 보였다. 산호는 믿지도 않는 신에게 감사했다. 지미는 복도의 끝에 놓인 일인용 소파에 앉아 고개를 까딱거리고 있었다. 늘어진 폼이 술이든 약이든 잔뜩 취한 모습이다. 가까이 다가가니 구역질이 났다. 지미에게서 나는 퀴퀴한 냄새에 더해 토사물의 냄새가 났다. 산호는 숨을 참으며 지미를 흔들어보았다. 고개를 반대쪽으로 천천히 돌리는 것 말고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산호는 지미의 품에서 백색 결정들과 알록달록한 파티 필 뭉치를 찾았다. 산호가 처음 보는 알록달록한 여러 가지 파티 필들은 양이 너무 어마어마해서 차마 손을 댈 수도 없었다. 그리고 산호의 시선을 끈 것은 갈색이 아닌 흰색을 띤 결정들이었다. 구글이 그랬다. 순도 높은 헤로인은 백색을 띤다고. 헤로인의 치사량이 얼마였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저 정도의 양이면 어쨌든 충분할 것 같았다.
산호는 백색 가루가 담긴 봉투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푸르스름한 네온 조명이 쏟아지는 사이로 백색 가루가 빛을 냈다. 구원의 빛이다. 검푸른 물 밑에서 고개를 처들어야만 간신히 보이는 한 줄기 빛이다. 닿지 않을 것 같은 수면 위의 빛처럼 눈부시게 새하얀 가루가 산호의 손에 들어왔다. 산호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을 느끼며 그것을 제 신발에 숨겼다. 쿵쿵. 쿵쿵. 알록달록한 파티 필들은 다시 제이미의 품속에 쑤셔 넣었다. 심장 소리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올 것 같다. 산호는 얼른 몸을 일으켜 복도를 되돌아갔다. 도준형이 저를 두고 갔던 그 자리로 가야 한다. 빨리, 더 빨리. 뒤엉켜있는 사람들과 부딪치며 산호는 간신히 제 자리로 돌아왔다. 주저앉은 채 한참 동안 심호흡을 했다.
다행히 들키지 않았다. 다들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고 도준형은 돌아오기 전이었다. 기쁨을 참지 못한 산호가 숨을 억누르며 발을 굴렀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산호는 숨을 고르며 얌전한 애완견처럼 준형을 맞이했다.
“표정이 왜 그래?”
“나 몸이 안 좋아….”
산호는 준형에게 기대며 칭얼거렸고 준형은 익숙하게 산호를 안아 들어 차에 태웠다. 산호의 머릿속에 성공이라는 단어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한 뒤에는 준형이 목욕물을 받는 동안 약을 숨겼다. 어디에 숨겨야 하지? 서랍은 안 된다. 아니, 내 방은 안 된다. 산호는 거실로 나갔다. 책들이 빽빽하게 꽂힌 책장. 도준형이 단 한 번도 펼치는 것을 본 적이 없는 두꺼운 백과사전들. 시간이 없었다. 산호는 사전 하나를 빼들고 그 안에 봉투를 욱여넣었다. 그 하얀 가루가 산호의 새로운 희망이 되었다.
도준형이 물을 다 받았다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산호는 욕실로 걸어가며 마음속으로 도준형을 실컷 비웃었다. 멍청한 도준형. 그렇게 괴롭히던 내 손에 죽을 도준형. 나를 우습게 아는 도준형. 내가 죽일 도준형. 죽이고 싶은 도준형….
그리고 나는 언제든 도준형을 벗어날 수 있고 도준형을 죽일 수 있다. 산호는 그렇게 자위하며 도준형에게 안겼다. 도준형은 내가 마음만 먹으면 끝이다. 나는 도준형에게 더 이상 끌려다니지 않는다. 산호는 행복한 꿈을 꾸었다. 일어났을 때는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행복한 꿈이었다.
다음날부터 산호는 매일 저의 비밀스러운 희망을 생각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같은 생각을 하며 킥킥 웃었다.
“왜 그렇게 웃어?”
“기분이 좋아서.”
도준형이 구운 토스트와 베이컨을 입안에 쑤셔 넣은 산호가 활짝 웃었다.
“계란도 남기지 말고 먹어. 너 요즘 몸에 멍이 너무 많이 들더라.”
“응, 응.”
“다 먹고 수영장에서 놀래?”
“응.”
“수영복은 필요 없지? 어차피 둘인데.”
“응, 응.”
산호는 정신이 다른 곳에 팔린 것을 숨길 생각도 없었다. 준형은 조금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꿀꺽꿀꺽. 준형이 제 몫의 오렌지 주스를 들이켰다. 산호는 그것을 보며 히죽 웃었다. 나는 도준형이 마시는 저 오렌지 주스에 당장 그걸 타버릴 수도 있다. 그러면 도준형은 내 사랑처럼 시체가 될 것이다. 차갑게 식고 굳은 상태로 여전히 사랑을 외치는 시체. 그리고 나는 죽은 도준형의 입술을 핥고 같이 죽을 수도 있겠지. 산호는 히죽 웃으며 노른자가 터진 계란을 입에 넣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아직은 아니다. 왜?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이유는…. 조금이라도 도준형의 마음이 더 힘들기를. 조금 더…. 조금 더…. 산호는 오지 않은 미래를 상상하며 하루종일 실실 웃었다. 마당의 수영장에는 준형이 바람을 넣어둔 오리 모양의 튜브가 둥둥 떠다녔다. 산호는 준비운동도 하지 않고 수영장에 뛰어들려고 했다가 준형에게 혼이 났다. 그러면서도 산호는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숨길 수 없었다. 준형은 그런 산호를 몇 번 흘끗 보았을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준형이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산호를 더 행복하게 만들었다.
* * *
LA의 밤은 아주 조용했다. 내내 히죽거리던 산호가 잠들자 준형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유령처럼 표정 없는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조각처럼 매끄럽다. 2층의 침실에서 조용히 계단을 내려온 준형은 망설임도 없이 거실 책장으로 다가갔다. 바보 같은 유산호.
흐트러진 책장에서 덜 꽂혀져 삐죽 나온 사전을 꺼냈다. 얇은 책장이 준형의 손끝에서 팔락이며 넘어갔다. 준형의 얼굴에는 실소 하나 흐르지 않았다. 사전의 중간쯤에 납작한 봉투가 들어있었다. 준형은 그것을 천천히 제 눈높이로 들어 올렸다. 창밖에서 들이치는 달빛이 봉투 속의 가루들을 비췄다. 산호가 얌전히 보관해둔 희망이 창백하게 빛났다.
“…귀엽기는.”
무표정하던 준형의 얼굴에 다정한 미소가 떠올랐다. 유산호는 정말 깜찍했다. 지미에게 다리를 벌려주고 받아온 게 아니라 훔쳐온 거라는 사실이 흡족하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기특하다. 준형은 가만히 웃다가 부엌으로 갔다.
준형의 손에 들린 봉투는 산호의 다리처럼 쉽게 벌려져 부엌 싱크대로 한 톨도 남김없이 쏟아졌다. 물에 녹은 헤로인이 흔적도 없이 흘러갔다. 산호의 유일한 희망, 지미의 도둑맞은 30만 달러어치 꿈, 도준형의 목에 걸리지 못한 목줄.
그리고 텅 비어버린 산호의 희망은 슈가파우더를 섞은 밀가루로 다시 채워졌다. 준형은 산호의 희망을 없애고 싶지 않았다. 실망하는 유산호의 얼굴은 마음이 아프다. 앞으로도 오늘처럼 유산호가 저를 보며 웃어주기만 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텐데. 준형은 처음과 같은 모습으로 사전을 책장에 꽂아넣으며 생각했다.
그렇다고 죽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제가 죽으면 불쌍하고 사랑스러운 유산호를 누가 돌봐준단 말인가. 귀엽고 바보 같고 멍청한 유산호. 사랑하는 유산호. 온종일 도준형만 생각하는 유산호. 그리고 도준형이 사랑하는, 유산호.
그래서 다시 채워진 산호의 희망은 원래처럼 제자리로 돌아갔다. 아무도 손대지 않은 것처럼 감쪽같이, 그러나 완전히 간파당한 채. 두꺼운 사전의 가운데 즈음, maddish와 madrigal이 쓰여진 페이지 사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