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잠식 (5/7)

5. 잠식


“그게 그렇게 중요해?”

“…무슨 말이야?”

“진짜 이해할 수가 없네. 뭐, 아무튼 알겠어.”

“…….”

“나도 너 좋아해.”

“…….”

“됐지?”

도준형은 적선이라도 하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숨을 참던 산호는 정말로 숨이 턱 막혔다. 준형에게서 좋아한다는 말을 들으면 행복해서 숨이 멎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틀렸다. 좋아한다는 말이 이렇게 잔인할 줄 몰랐다. 산호의 가슴이 준형의 목소리에 그극 그극 긁혀 피가 맺힌다.

“반응이 왜 그래. 이거 말고?”

“…….”

“존나 까다롭다, 유산호.”

“…….”

“야, 사랑해.”

“…뭐?”

“사랑한다고.”

도준형의 고백은 산호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준형은 대답 없는 산호의 목덜미를 핥으며 무신경한 고백을 반복했다.

“사랑해.”

산호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도준형의 손이 산호의 엉덩이를 주물렀다. 목덜미에서 준형의 목소리가 웅웅댄다. 아, 사랑한다고. 다른 손이 산호의 다리를 벌렸다. 아, 좀 알아서 벌리면 안 되냐, 이제? 사랑한다고 했잖아. 준형의 입술이 산호의 유두를 지분거렸다. 야, 사랑한다니까? 안 들려?

대충 젤을 바른 준형의 성기가 산호의 회음부를 문질렀다. 산호의 입에서 기어코 신음이 흘렀다. 이렇게 성의 없는 고백마저 달콤하다 느끼는 스스로가 너무 딱하고 비참해서 산호는 죽고 싶었다. 준형의 손이 산호의 턱을 잡아 저를 보게 만들었다. 눈부시게 잘생긴 도준형의 얼굴에서 잔인한 고백이 산호에게 뚝뚝 떨어졌다. 방울방울, 얼룩진 고백이 산호를 짓눌렀다.

“듣고 싶다며. 말해 주잖아.”

“…아, 으…!”

“여친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어.”

“…하으, 응! 아!”

“네가 우는 게 좋아서 그랬지.”

“아! 아읏…!”

“그러니까 내 옆에 있어.”

산호는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게 진짜라고 해도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산호는 이미 엉망진창이었는데. 그런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은 지난 봄이었다. 인적 드문 화장실에서 도준형의 사진이나 보며 유치한 연애를 상상하던 지난봄. 이미 아득해진 과거에 불과한. 산호의 사랑이 시퍼런 시체가 되기 전.

그러나 준형은 조금 기분이 상했다. 쪽팔림을 무릅쓰고 유산호가 바라는 말을 해줬는데 반응은 영 떨떠름하다. 좋아한다느니 사랑한다느니 하는 말은 체질적으로 저와 맞지 않았다. 그딴 말을 내뱉은 것은 오직 유산호가 그걸 듣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응이 저 따위라니 열이 안 받을 수가 없다. 팽팽하게 일어선 제 좆처럼 화가 끓어오른다. 원래도 쉽게 타오르는 성정은 주로 폭력적인 방식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대답 안 하지, 또.”

“아악!”

준형의 손이 깁스한 발목을 아프게 쥐었다. 이제 막 뼈가 붙기 시작했는데 그걸 다시 부러뜨리려는 듯 거침없는 행동이었다. 산호는 고통에 눈물을 뚝뚝 흘리며 미친 사람처럼 외쳤다. 안 그럴게. 다시는 안 그럴게. 내가 잘못했어. 내가 다 잘못했어….

“내 생각엔 네가 아직 뭘 잘 모르는 것 같아.”

“아니야…. 제발…. 다시는 안 그럴게. 제발…. 네 옆에 있을게. 절대로….”

준형은 허리를 쳐올리다 말고 산호의 발목에 집중했다. 발목을 아예 못 쓰게 만들어버릴까. 그러면 유산호가 다시는 감히 도망칠 생각도 못하지 않을까. 사랑하니까 가두고 싶은 게 당연했다. 제 사랑을 거부하는 유산호를 때려서라도 받아들이게 하고 싶다. 준형은 산호의 눈을 손으로 덮었다. 산호는 제게 닥칠 일을 짐작이라도 한 듯 엉엉 울며 준형에게 빌었지만 준형은 듣지 않았다.

“산호야. 너는 내 마음이 우스워?”

“아니야…. 아니야…. 제발, 나는…!”

“내가,”

으드득. 준형의 손에 꺾인 산호의 다리가 벽에 밀쳐진다. 깁스가 쿵쿵 벽을 울린다.

“사랑한다고 했잖아.”

산호의 얼굴이 눈물로 얼룩진다. 짧은 손톱이 준형의 어깨에 박혔다. 준형은 다리에 힘을 주어 산호의 깁스를 꾹 눌렀다. 산호를 내려다보는 준형의 표정이 애처로웠지만 고통으로 찡그린 산호는 보지 못했다.

“네가 듣고 싶다며, 응?”

아물지 않은 발목에 다시 힘이 가해지자 산호가 마치 사정하기 직전처럼 파들파들 몸을 떨었다. 끅끅 숨넘어가는 소리도 난다. 준형이 제 손등을 산호에게 물려주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산호의 눈앞이 하얗게 타들어 갔다. 산호의 이가 준형의 손을 파고든다. 타는 듯한 고통이 발목을 타고 올라오더니 다리의 감각이 모조리 살려달라고 악을 쓴다. 분노할 법도 한데 산호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의문만이 남았다.

도준형의 적선 같은 고백에 기뻐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나? 그게 이렇게 화를 낼 일인가. 도준형이 또 다리를 부러뜨릴 정도로 잘못했나? 어째서 도준형은 나를. 어째서 도준형이 나를.

* * *

정신을 차렸을 때 엄마의 우는 얼굴을 본 산호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산호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엄마가 산호를 다시 눕혔다. 이상하다. 다리에 감각이 없다. 산호의 마른 입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비명처럼 터져 나왔다.

“엄마….”

“우리 산호….”

“…왜, 왜 그래? 엄마, 나….”

엄마의 눈가가 붉었다. 잔뜩 부어버린 엄마의 눈을 보자 산호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산호가 채 말을 잇기 전에 병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것은 침통한 표정의 도준형과 풍채 좋은 중년의 사내였다. 콧대가 도준형과 지나치게 닮아서 산호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중후한 낯의 저 남성이 준형의 아버지라는 것을.

“어머님. 잠시 저랑 얘기를….”

“…네, 그래요.”

사내는 아들놈의 뒤치다꺼리가 익숙한 듯 산호의 엄마를 향해 말했다. 두 사람이 병실 밖으로 나가자 준형이 산호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많이 아팠지.”

“…….”

“이제 괜찮아.”

그렇게 말하는 도준형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해사하다. 산호는 그 얼굴을 제 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었다. 뭐가? 대체 뭐가 괜찮다는 것인지 산호는 알 수 없었다. 산호가 입만 벙긋거리자 준형이 산호의 이불을 정리해주며 말했다.

“어머님 놀라실까 봐, 네 발목은 우리 둘이 장난치다가 다쳤다고 말씀드렸어. 치료비는 우리 아빠가 댈 거고.”

“…고작 그걸로 엄마가 저런다고?”

“음…. 앞으로 다리를 절게 될 거래. 아, 가만히 누워 있어. 의사가 절대 안정이라고 했으니까. 걷는 건 재활 받으면 할 수 있대. 앞으로 달리기는 못 하겠지만.”

산호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실감이 나지 않아서 눈물도 나지 않았다. 도준형은 그것을 저 편할 대로 해석했다. 절망 어린 유산호의 표정은 제가 품에 안고 달래주면 된다. 그깟 발목. 내가 업어주면 될 텐데 왜 저렇게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짓는지 알 수가 없다. 준형은 유산호를 사랑한다고 자각한 순간부터 내내 유산호가 어려웠다. 도저히 제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수식처럼 복잡했다.

“치료비 말고도 너 학비나 뭐…. 그런 것도 다 아빠가 댄다고 했어.”

발목이 골절되면 보통은 최소 세 달 정도는 지나야 뼈가 붙는다. 부러진 지 고작 한 달 조금 넘은 발목을 다시 만신창이로 으깨놨으니 다리를 저는 것 정도로 끝나는 것이 다행이다. 아킬레스건이 끊어졌다면 다시 걷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유산호는 다행인 줄도 모르고 망연자실해서 제 말을 씹어먹는다. 건방지게 굴어도 때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준형의 사랑은 날로 커져갔다.

병실 문이 다시 열리고 산호의 엄마가 준형의 아버지와 함께 들어왔다. 산호는 멍하니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의 저런 표정을 본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엄마가 산호에게 다가오자 준형이 일어서서 꾸벅 인사를 하고 제 아비 앞으로 갔다.

짝! 솥뚜껑 같은 남자의 손이 준형의 뺨을 가차 없이 후려쳤다. 준형은 익숙한 듯 고개를 꺾어 반대쪽 뺨을 내밀었다. 짝! 요란한 소리가 다시 병실을 울렸다. 두 부자는 그런 행동에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당황한 것은 오히려 산호와 엄마였다. 남자는 준형의 뺨을 때리자 볼 일을 다 봤다는 듯 병실을 나갔고, 엄마는 준형에게 다가갔다.

“준형 학생, 괜찮아?”

“…괜찮습니다.”

“…….”

“저도 오늘은 들어가 볼게요. 산호야, 내일 봐.”

준형은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엄마가 난감한 얼굴을 했다. 산호는 시선을 피했다. 도준형의 대수롭지 않은 태도처럼 이깟 발목이 문제가 아니다. 도준형은 산호를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이 괴롭혔다. 부러진 발목은 사람들 앞에 내보이고 동정이라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산호가 당한 짓은…. 산호의 생각이 잠시 멈칫했다. 준형이 병실을 나가자 무거운 공기가 산호와 엄마를 감쌌다.

“…도대체 무슨 장난을 쳤길래 다리가 이 꼴이 됐어.”

이제야 눈치챘지만 엄마의 목소리는 여전히 피곤이 묻어있었다. 하나뿐인 아들에게 벌어진 사고가 그녀의 얼굴을 한층 더 수심에 잠기게 했다. 산호는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엄마에게 모든 일을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할 것 같았다. 자랑할 만한 효자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불효자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산호가 눈을 감아버리자 엄마는 산호의 이마를 쓸어주었다. 깃털처럼 가볍고 간지러운 엄마의 손길이 닿자 목구멍으로 넘어오려는 울음을 산호는 간신히 참았다.

준형은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산호의 병실을 찾아와 얌전히 산호를 간호했다. 적어도 한 달은 병실에서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말에 엄마가 난감한 얼굴을 하자 준형이 간병을 하겠다고 나섰다. 엄마는 회사 일을 마냥 손 놓고 있을 수 없어서 준형에게 산호를 맡기고 돌아갔다. 엄마가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었는데도 산호는 버려진 기분이었다. 산호는 도준형이 그렇게 예의 바른 태도를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엄마는 도준형에게 웃어주곤 가버렸다.

매일 누워있기만 하니 몸이 근질거렸다. 짧은 봄은 산호가 퇴원하기도 전에 가버릴 모양이다. 등록금을 도준형의 아버지가 대준다니. 한 학기 수업을 죄다 빼먹고 싶을 정도로 반감이 들었다. 그러나 도준형이 적선처럼 내뱉은 고백조차 거절할 용기가 없는 산호가 어떻게 그 진짜 적선을 거절할 수 있을까.

산호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눈을 뜨면 짜증과 울분이 치솟았고 도준형의 얼굴을 보면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겁을 먹고 갈 곳을 잃은 산호의 울화가 산호의 가슴속을 내내 맴돌았다. 고통을 오래 겪다 보면 아무리 선한 사람이어도 악과 분이 남는 법이다. 산호는 점점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투정을 부렸다.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도준형의 반응은 의외였다. 산호는 이제 도준형이 왜 저러는지 의문을 가지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알 수 없었으니까.

“돈가스 먹고 싶어.”

“시킬까?”

“냉면도.”

“둘 다 시키지 뭐.”

“…….”

“왜? 먹고 싶은 거 더 있어?”

“…….”

산호는 바보가 아니었다. 아니, 바보가 맞을지도 모른다. 다 타버린 재밖에 남지 않은 아궁이에 도준형이 불씨를 불어넣는다. 자꾸 마음이 일렁인다. 어쩌면 산호의 발목을 완전히 망가뜨린 것이 준형을 반성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이제야 산호의 소중함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산호는 다시 스스로를 아궁이에 밀어넣었다. 어쩌면 도준형도 조금쯤은 저를 좋아하게 된 게 아닐까. 도준형도 예전의 나처럼 괴로워할까.

산호는 이제 도준형의 질 나쁜 다정함을 알아서, 전과 같은 풋풋하고 순진한 마음은 아니었다. 산호는 이제 고작 이 정도로 우쭐하지 않았다. 도준형이 변한 거라면, 과거의 제가 그랬듯 저 때문에 한 번이라도 힘들고 괴로워하기를 바랐다. 산호는 그러기 위해서 이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랑하는 만큼 도준형이 미웠다. 어느 날은 찢어 죽이고 싶었고 어느 날은 얼굴에 침을 뱉어주고 싶었다. 그러고 나면 저처럼 사랑을 말하는 도준형의 입술에 키스를 하고 싶었다. 도준형이 부러뜨린 발목 덕분에 평생 도준형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은 일이 아닐까. 산호는 이런 끔찍한 생각마저 아무렇지 않게 하게 된 스스로가 무서웠다.

퇴원을 한 다음에는 당연스레 준형의 부축을 받으며 준형의 집으로 갔다. 산호는 도준형의 넓고 푹신한 침대에 누워 제가 살던 자취방을 떠올렸다. 시끄럽고 지저분한 골목 안쪽의 낡은 원룸. 그 좁은 방에 살던 것이 아주 오래전처럼 느껴졌다. 한번 편리함을 겪은 몸은 다시 불편함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았다. 여름이 다가오면서 습해진 공기 때문에 준형의 방 천장에 달린 에어컨은 밤새도록 돌아갔다.

준형은 산호의 발목을 망가뜨린 것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아마도 사과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을 거라고 산호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실제로도 맞았다. 준형은 산호에게 전혀 미안하지 않았다. 그저 이제는 얌전히 제게 기대오는 유산호가 만족스러웠을 뿐이다.

그렇게 망가진 발목으로 준형에게 기대 걸으며 두 계절을 더 흘려보낸 산호는 많이 변했다. 덜 빠진 젖살이 사라진 얼굴은 갸름해졌고, 창백한 피부 위로 나풀거리는 옅은 갈색의 머리카락은 산호의 눈가에 그늘을 만들었다. 준형이 산호에게 집착하면 할수록 산호는 생기가 없어졌다.

짝사랑보다 슬픈 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쓰레기 같은 놈이라는 것을 하나하나 몸으로 부딪쳐서 깨닫는 것만큼 슬픈 건 없다. 가장 슬픈 것은 다 알게 되었으면서도 관성처럼 흔들리고 마는 스스로의 멍청함이었다. 지긋지긋한 미련을 뿌리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그래서 산호는 점점 표정을 숨기는 데에 익숙해졌다. 닳아서 가루만 남은 자존심마저 모조리 잃으면 그대로 말라 죽을 것 같았다. 불쌍한 짝사랑을 끝낼 수 없다면 적어도 사랑을 구걸하지는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산호는 가끔 그런 제 마음마저 의심스러웠다. 사실은 도준형이 안달 내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가 아닌지, 자존심이 아니라 도준형이 제게 질리지 않도록 적당히 밀어내는 것이 아닌지. 산호는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준형은 산호의 변화를 빠르게 눈치챘다. 산호의 마음을 제 마음대로 휘두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준형은 다른 방법을 찾아냈다. 교묘하고 비열한 방식이었다. 오직 도준형만이 할 수 있는 뻔뻔한 짓이기도 했다.

“저기, 너희들 유산호랑 친하지? 걔가 연락을 안 받아서 그런데, 이번 여름 엠티….”

“걔 건드리지 마세요.”

“뭐?”

“아직도 유산호가 내 전용 걸레인 거 모르는 사람이 있네.”

“…….”

“석준아, 소문 좀 내라. 이젠 입 아프다.”

그러나 석준이 굳이 나서지 않아도 소문은 금방 퍼졌다. 애초에 준형이 백 명 넘는 수강 인원이 있는 강의실에서 큰 소리로 지껄인 덕분이다. 애초부터 준형의 의도도 그랬다. 그리고 남자들의 세계는 잔인하고 미개했다. 벌써부터 키스방 따위를 드나드는 싹수 노란 남자 동기들에게 산호는 질 낮은 농담거리로 소비되었고, 준형은 제 앞에서 그러는 게 아니라면 모른 척 방관했다. 기분은 더럽지만 유산호에게 저 아닌 다른 사람이 다가오는 것보다는 나았으니까.

그리고 산호를 불쌍히 여기던 여자 동기들은 준형에게 바른 소리를 하던 한 동기의 머리채가 잡힌 후 조금씩 그들을 피했다. 그들의 잘못은 아니었다. 잘못이 있다면 도준형이 지나치게 미친놈이라는 것뿐이다.

산호가 없을 때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된 뒤로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준형의 무리와 함께 다니기 전에도 산호에게 그리 친한 사람은 없었지만 조별 과제를 같이 했거나, 자주 마주쳐서 얼굴을 익힌 사람들도 산호를 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을 피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산호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준형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무슨 짓을 했을까. 물어보지 않아도 짐작이 갈 것 같아서 산호의 몸이 떨렸다.

목발을 짚고 캠퍼스를 걷는 동안 산호는 단 한 번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심장이 아플 정도로 요란하게 뛰었다. 입안은 바짝바짝 말랐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모두가 저에 대해 아는 것 같았다. 수군거리는 소리는 모두 제 이야기 같았고, 제가 걸어가면 모두 저를 따갑게 쳐다보는 것 같았다.

이젠 방법이 없다. 도준형에게 가서 매달리는 수밖에. 도준형이 만족할 때까지 그의 커다란 성기를 빨아주고, 도준형의 기분이 나른하게 풀어지면, 그 모든 사람들을 제 앞에서 치워달라고 해야겠다. 적선처럼 내던지는 사랑 고백에도 기쁜 듯이 웃어주고, 도준형의 사랑을 구걸하는 것처럼 매달려서 그를 기쁘게 하고…. 그리고 내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들을 모조리 없애달라고 해야지. 그것 말고는 아무런 방법이 없는 것 같았다. 더 좋은 생각은 나지 않았다. 그러다 도준형이 내게 질리면? 나를 버리면? 그러지 않으려면 더 끝내주는 신음을 연습해야 하나? 아니면 더 능숙한 펠라치오를 연습해야 하나?

머릿속이 온갖 쓰레기 같은 생각으로 뒤덮인다. 산호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절뚝거리는 산호의 앞에 도준형이 얼마 전에 산 스포츠카가 구원처럼 나타났다. 그 상황이 지독한 농담 같아서 산호는 하하 웃었다. 산호를 구해줄 사람은 준형밖에 없었다. 산호를 구렁텅이에 쳐넣은 것도 준형이었기 때문에.

* * *

준형은 산호가 제 차 앞에서 엉엉 울던 그 날의 일이 나름대로 신경이 쓰였는지 종강을 하자마자 어학연수를 돌림노래처럼 불러댔다. 산호가 울던 것 때문인지 그날따라 열심이었던 펠라치오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황당해하는 산호에게 준형이 말했다.

“내가 말했었잖아. 계속 내 옆에 있으라고.”

“…….”

“네가 알겠다며.”

준형은 풍채 좋던 제 아버지는 이미 설득했는지 산호를 다그쳐 기어코 엄마에게 전화를 걸게 만들었다. 망가진 산호의 다리 때문에 걱정이 컸는지 엄마는 흔쾌히 허락했다. 하긴. 어떤 미친놈이 유학 비용을 다 대주는데도 안 가겠다고 하겠는가. 처음엔 이상하게 여긴 아빠도 엄마에게서 산호의 발목에 대해 듣고는 무거운 목소리로 허락을 내렸다.

대학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산호는 이제 제 인생의 키를 자신이 쥐게 되었다는 설렘을 만끽했었다. 그러나 타륜은 어느샌가 준형에게 넘어가 있었다. 제가 넘겨준 적도 없는데 준형은 마치 제 인생처럼 산호의 인생을 몰았다. 처음에는 그것을 돌려받고 싶었으나 이제는 준형이 손을 떼고 사라져버리지 않기만을 바랐다.

“산호야.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

“나도 너 좋다니까?”

“…….”

“같이 가면 좋잖아. 뭐가 문젠데.”

준형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너무 여상한 말투에 산호는 답을 할 의지마저 잃고 말았다. 준형의 손가락이 또 톡, 산호의 볼을 찌른다. 산호는 정말로 노력했다. 다시 도준형에게 사랑을 구걸하고, 자존심을 내다 버렸다. 오직 도준형 하나를 사랑하기 위해 스스로를 다 타버린 재 속에 내던졌다. 준형의 말처럼 이것은 사랑이어야 했다. 그러나 준형이 바라는 것은 너무 많았고 산호는 그걸 따라가기 위해 숨을 헐떡거렸다. 그런데…. 그러다 네가 나한테 질리면?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야? 산호의 속에는 여전히 답이 두려워 묻지 못한 질문들이 쌓여있었다. 산호가 어색한 웃음을 짓자 준형이 말을 돌렸다.

“어머님한테 언제 간다고 말씀은 드렸어?”

“…응.”

“뭐라셔?”

“그냥 알겠다고 하지 뭐. 근데 아빠가 계속…. 너무 민폐 아니냐고.”

“너 걱정 많은 건 아버님 닮았나 보다.”

또 대수롭지 않은 얼굴이었다. 도준형은 늘 그랬다. 결국엔 모든 일이 제 뜻대로 될 거라는 것을 아는 자들만 가질 수 있는 여유. 산호는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태도였다. 산호가 생각에 잠긴 사이에 준형의 손이 산호의 잠옷 단추를 풀었다. 익숙한 손길이 금방 산호를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더운 숨이 쩍쩍 달라붙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준형의 방은 언제나 시원했다.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에어컨 밑에서는 땀이 나도 금방 식어버린다. 등 뒤에서 준형의 신음이 밀려온다.

날이 다시 더워지면서 준형의 성욕은 비이성적으로 폭발했다. 잠이 들기 전까지 준형이 산호의 유두를 빨아대는 탓이 연한 살갗은 자주 부르텄다. 몸 여기저기에는 준형의 잇자국이 가실 날이 없었다. 잠에 들었다 깨어나면 땀 범벅이 된 몸이 준형의 좆에 박히며 흔들리고 있는 경우도 허다했다. 언제나 끝에는 산호도 절정을 느꼈기 때문에 제지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배고픔을 채우듯 정욕을 채우고 나면 준형은 곧잘 산호에게 듣기 좋은 말을 했다. 왜 넌 질리지도 않지. 박고 있어도 박고 싶어. 평생 나한테만 대줘. 되도 않는 자존심을 버리니 준형이 주는 모든 것이 행복했다.

사실은 도준형이 여전히 제게만 발정한다는 사실이 산호를 안도하게 했다. 내벽이 부어서 아파도 도준형을 밀어낼 수 없었다. 도준형이 제 입술을 짓씹으며 사정할 때마다 안도감이 들었다.

“어차피 아빠는 내가 뭘 하든 반대 안 해.”

“…근데 난 영어도 잘 못 하고….”

“내가 잘 하니까 됐어. 어차피 네가 나 없이 어디 갈 일도 없고.”

“…너희 어머님은?”

“엄마는 좋아할걸. 한국보다 외국에서 지내는 시간이 더 많은 사람이라.”

“그렇구나.”

“내가 미국에 있다 그럼 놀러 올지도 모르겠다. 오지 말라고 해야지.”

“왜? 오시면 좋지 않아?”

“너랑 떡 치고 있을 때 오면 어떡해.”

“…….”

“아니면 보는 사람 있는 쪽이 취향이야?”

“…….”

산호가 대답하지 않자 준형은 뭐가 웃긴지 웃음을 터뜨렸다. 의외로 도준형은 영어를 잘 했다. 산호가 궁금해하자 준형은 어릴 적에 엄마와 함께 미국에서 살았다고 했다. 왜 고등학교는 한국에서 나왔어? 그건 우리 아빠 미련이지. S대 가라고 노래를 불렀거든. 결국 못 갔지만. 왜 못 갔어? 너 성적도 좋은 편 아냐? 산호의 질문은 준형의 입술 사이로 사라졌다. 준형이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산호는 아직도 답을 모른다.

산호가 준형의 어머니를 보게 된 것은 그 다음 주였다. 산호는 준형에게 그렇게 많은 설명을 들은 적이 없었다. 준형이 누군가를 설명할 때 그렇게 말이 많은 것도 처음 봤다. 사실 산호는 준형에게 부모님이 있다는 당연한 사실마저 가끔 이상하게 여겨질 때가 있었다. 그건 도준형이 언제나 산호의 윗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준형과 산호의 관계는 친구나 애인보다는 주종관계에 가까웠으니까. 산호의 안에 싸고 싶다고 칭얼댈 때마저도 준형은 산호의 주인이었다. 산호는 준형이 저를 버릴까 봐 늘 전전긍긍했다.

“엄마가 뭐 물어보면 그냥 적당히 대답해. 애매하면 그냥 웃고. 엄마한테는 나 때문에 너 발목 이렇게 됐다고 해놨으니까 별로 부담 가질 것도 없어.”

준형은 사실을 사실이 아닌 것처럼 말하는 재주가 있었다. 산호는 잠시 제 발목을 망가뜨린 것이 준형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나 착각할 뻔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것에 일일이 화를 낼 기운도 없었다. 준형의 어머니는 화려한 미인이었다. TV에서나 볼 법한 연예인처럼 크고 뚜렷한 이목구비와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옷차림. 높은 하이힐 굽에는 명품 브랜드의 로고가 찍힌 진주가 박혀 있었다. 산호가 뻣뻣하게 굳은 채 그녀에게 인사를 하자 준형이 산호의 귓가에 속삭였다.

“너랑 같이 살 거니까 놀러 오지 말라는 얘기나 하려고 보는 거야. 어차피 일 년에 세 번 이상 보면 많이 보는 건데.”

고급스러운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산호는 처음 먹어보는 음식들에 당황하고 말았다. 레몬과 허브로 만든 향긋한 소스 위에 튀긴 게살을 올린 애피타이저가 산호의 입에서 녹아내렸다. 바삭하고 얇은 튀김에서 게살의 진한 맛이 느껴진다. 이런 걸 익숙하게 먹는 사람도 있구나. 준형의 어머니를 본 산호의 감상이었다. 그녀는 준형과 달리 활발한 성격이었지만 취향은 비슷한 것 같았다.

“준형이 친구 중에 이렇게 얌전한 친구는 잘 없는데. 맘에 드네.”

“아, 감사합니다.”

“많이 먹어. 여기 음식 다 괜찮아.”

“네. 잘 먹겠습니다.”

“전에 그…. 누구더라. 성경이? 걔도 어른스럽고 참했는데.”

그녀는 준형이 성경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준형의 말에 따르면 일 년의 반을 해외에 사는 애인의 집에서 지낸다니 그럴 만도 했다. 준형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박성경이라는 이름은 둘 사이에서 금기나 다름없었다. 누구도 먼저 그 이름을 꺼내지 않았다. 산호가 가슴을 졸이는 동안 다행히 메인 메뉴를 서빙하는 직원이 들어와 자칫 망가질 뻔 했던 분위기는 흩어졌다.

산호는 병실에서 보았던 준형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준형과 같은 틀로 찍어낸 것 같던 높은 콧대. 알쏭달쏭했다. 준형의 뒤치다꺼리는 전부 하는 걸 보면 아들을 사랑하는 것 같기도 했고, 다른 사람이 있는 앞에서도 망설임 없이 때리는 걸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준형과 그녀의 대화도 그랬다. 엄마와 자식이라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 건조한 대화였다.

“그래서 그놈이랑은 헤어졌어?”

“헤어지긴? 그냥 좀 싸운 거지….”

“그래서 한국 온 거야? 언제 다시 갈 건데?”

“그거야 모르지. 넌 엄마 보자마자 다시 보내고 싶니?”

“내가 가란다고 갈 것도 아니면서.”

“근데 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미국을 다시 가겠대?”

“그냥.”

“성격하고는…. 지 아빠랑 쏙 닮아가지고.”

“흥.”

“이런 놈이랑 같이 지낼 수 있겠어?”

“…네?”

“내 아들이지만 좀 재수 없는 성격 아니니?”

그녀의 톡톡 튀는 목소리가 갑작스레 방향을 틀어 산호에게로 튀었다. 멍하니 포크로 스테이크를 으깨던 산호가 화들짝 놀라자 그녀는 호탕하게 웃었다. 사레가 들려서 콜록대는 산호의 등을 준형이 두드리며 대신 답했다.

“왜 애를 놀려.”

“귀여워서? 이왕 아들이 있을 거면 저 친구 같은 쪽이 좋았을걸. 준형이 너는 애가 너무 싸가지가 없어.”

산호는 식사를 마치자 도준형을 다섯 번쯤 상대한 것처럼 진이 빠졌다. 친절하고 아름다운 도준형의 어머니. 불편했던 것은 그녀 때문이 아니다. 도준형 때문이다. 산호는 체념이 빠른 성격 탓에 자주 준형과 제 관계를 깜빡했다. 우리는 연인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다. 도준형이 내 인생을 망쳤고, 나는 그것을 빌미로 도준형의 발목을 잡게 된 것을 남몰래 기뻐하는 혐오스러운 관계에 불과하다.

그런데 도준형을 낳은 사람의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웃으며 식사를 했다. 걸을 때마다 뭉툭한 통증이 울리는 산호의 왼쪽 발목에 대해 준형이 얘기하자, 그녀는 진심으로 산호를 안쓰러워했다. 그게 전부였다. 그녀에게는 도준형이 누구를 죽인다 해도 모두 남의 일 같을 것이 분명했다. 산호는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녀의 탓이 아니긴 했다. 도준형의 성정이 저 모양인 것은 천성이다. 부모라고 해서 자식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산호에게는 금전적으로나마 보상을 한 아버지 쪽이 조금 더 와닿았다. 다시 만나라고 한다면 어느 쪽이든 싫을 것 같았다. 불편해서 속이 더부룩했다.

다행히 그런 만남은 다시 없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바쁘고 정신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산호가 어버버 하는 사이에 도준형은 차곡차곡 미국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제 앞에서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치워달라고는 했지만 제가 떠나는 것은 선택지에 없었다. 산호는 준형에게 내내 끌려다니기만 했다.

어학연수 준비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뭐 그렇게 준비할 것이 많은지. 혼자 준비했다면 산호는 분명 제가 중간에 포기했을 거라 생각했다. 여름이 깊어간다. 습기 때문에 숨을 쉴 때마다 물속에 가라앉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짧은 가을 내내 산호는 준형과 붙어먹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별로 산호의 의사와는 상관없었다. 단지 준형이 도구를 사용하는 것에 재미가 들려서 산호의 몸이 버티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밤새 침대에 묶이거나 목줄을 한 채로 고개를 꺾이다 보면 다음날은 녹초가 되어 하루종일 골골댔다. 말 그대로 뼈가 삭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시달린 다음날이면 준형은 산호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사다가 직접 먹여주었다. 포장부터가 비싸 보이는 전문점의 초밥, 차를 타도 세 시간은 걸리는 거리에 있는 유명한 맛집의 장어 덮밥, 하다 못해 산호가 집밥이 먹고 싶다고 칭얼거리면 일하는 여사님에게 웃돈을 주고 금방 밥상을 차려냈다. 힘이 하나도 없는 몸으로 침대에 기대서 도준형이 주는 대로 음식을 받아먹었다. 때로는 제 입에 음식을 넣어주는 도준형의 손길이 사랑처럼 느껴져서 몸서리쳐질 때도 있었다. 고작 그 정도의 애정에도 산호는 감격했다. 사랑을 먹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많이 먹어도 성에 차지 않아, 터무니없이 부족한.

때때로 준형의 기분이 좋지 않으면 재활이라는 핑계로 왼쪽 다리만으로 몸을 지탱한 채 뒤에서 박아오는 것을 견뎌야 하기도 했다. 제대로 회복이 될 리가 없었지만 살고 싶다는 산호의 열망은 강했다. 늦은 여름이 되자 산호는 조금 절뚝거리기는 했지만 준형의 부축 없이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나아졌다. 그리고 준형은 바로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심기가 불편했다.

“업어줘?”

“…방에서 부엌까지 가는데?”

“…….”

준형의 눈이 매섭다. 어쩔 수 없이 산호는 준형의 팔짱을 낀 채 우스운 폼으로 방을 나왔다.

“…….”

“…….”

“…왜?”

뭘 하는지 핸드폰을 쥐고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던 준형이 흘끗 산호가 먹는 것을 보았다.

“잘 먹네.”

“…….”

“원래 너 밥도 내가 먹여줬었는데.”

준형은 꼭 밥이 맛있네, 따위의 말을 하는 것처럼 평이하게 말했다. 그러나 준형의 말에 산호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 산호는 또 아프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그래서 산호는 제 입으로 가져가려던 닭강정을 집어 준형의 입에 갖다 댔다. 준형이 그것을 흘끗 보더니 천천히 입을 벌려 받아먹을 때까지 산호의 심장은 긴장으로 쿵쾅거렸다.

“…맛있지?”

“그럭저럭 괜찮네.”

“하나 더 줄까?”

“…그러든가.”

준형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산호는 그제야 안도했다. 그동안 산호가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는데, 준형의 이기심이었다. 준형은 산호가 사랑을 구걸하며 매달리면 다정해졌다. 산호는 이제 안다. 도준형에게 얌전히 굴종하면 보상이 따라온다. 사랑한다는 말도 그랬다. 덜 끝난 사랑과 두려움의 경계는 그런 준형의 행동 탓에 흐려졌다.

원체 영리한 편은 아니었던 산호는 속절없이 준형에게 끌려갔다. 준형은 산호가 저에게 매달리는 것을 특히 좋아했다. 섹스를 할 때에도 절정 직전까지 산호를 몰아붙인 뒤 애원의 눈물을 보여야만 절정으로 보내준다. 산호는 언제나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어야 했다. 준형은 유산호가 저를 포기하지 못하게 적절한 때에 당근과 채찍을 쓸 줄 알았다. 주인이 되려면 그런 덕목쯤은 본능적으로 타고나야 하는지도 몰랐다.

산호가 하루종일 준형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하는 이유는 또 있다. 요즘 준형의 성벽이 점점 위험해지고 있었다. 허접한 수갑이나 안대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이제는 직접적인 성인용품까지 사들이고 있었다.

“…이게 뭐야?”

산호가 들어 올린 것은 얇고 긴 플라스틱이었는데 비비탄 총알처럼 작은 알들이 세 가지의 크기로 줄줄이 이어진 모양이었다. 그 끝에는 손가락을 걸도록 만들어진 것 같은 고리가 달려있었는데 산호는 도저히 그것의 용도를 알 수가 없었다. 준형이 그것을 보며 픽 웃었다.

“궁금해? 지금 써볼까?”

“…아니, 잠깐! 읏….”

산호는 빌어먹을 제 호기심을 욕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수갑이 산호의 양 손목을 침대 끝에 묶었다. 산호는 반항하지 않은 것을 곧 후회하게 되었다. 반항한다고 준형이 사정을 봐주었을 리는 만무하지만. 어쨌든 분했다.

준형은 순식간에 산호의 하반신을 나체로 만들고는 혀를 세워 산호의 귀두 끝, 벌렁거리는 요도를 꾹꾹 눌러댔다. 기둥을 감싸 쥔 손은 껍질을 벗기기라도 하듯 구멍이 잘 드러나도록 연신 산호의 귀두를 쓸어내렸다. 민감한 부분을 질척한 혀가 계속해서 건드리자 산호의 성기가 금세 빳빳하게 일어섰다. 산호의 손에서 알알이 엮인 요도 비즈를 낚아챈 준형이 그것을 산호의 요도에 조금씩 밀어넣었다. 그제야 그 물건의 용도를 깨달은 산호의 낯이 파랗게 질렸다.

“아! 싫, 싫어…! 아프, 하앗…! 아아! 아!”

“아직 다 안 넣었어.”

산호가 몸을 바르작댔지만 준형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정교한 과학 실험이라도 하듯 준형은 집중해서 산호의 요도에 비즈를 끝까지 밀어넣었다.

“제발! 넣지, 마아! 흐윽! 흐…. 힉!”

“우리 산호, 양쪽 구멍 다 아다는 내가 땄네.”

산호의 요도에 비즈를 전부 밀어넣은 준형이 씩 웃으며 산호의 고환을 문질렀다. 준형은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는 말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유산호의 첫 섹스는 전부 저였다. 앞도 뒤도 입도. 박성경이 유산호의 앞 구멍에 박은 적 없다는 것은 유산호의 반응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 만족감이 준형을 짜릿하게 했다. 마치 처음 제 앞에서 다리를 벌리던 때처럼 긴장으로 팽팽해진 유산호의 허벅지가 심히 만족스러웠다. 아, 존나 꼴려. 산호의 입에서 거친 숨과 함께 침이 흘렀다.

“벌써 갔어? 왜 벌써부터 침을 흘려. 아깝게.”

“으으응! 히…윽…! 빼, 줘….”

산호의 애원은 준형의 흥분을 달구는 기폭제에 불과했다. 준형은 산호의 턱으로 흐르는 침을 혀로 핥았다. 이미 흥분으로 젖은 제 좆을 꺼내 유산호의 좆과 함께 쥐고 비벼댔다. 비즈가 요도 속에서 자극을 주는 덕분에 유산호는 요란한 신음을 뱉으며 허리를 들썩였다. 준형은 손에 쥔 두 개의 성기를 내려다보다가 유산호의 요도에 꽂혀있는 비즈의 고리에 손가락을 걸었다. 조금 가학적인 설렘이 준형의 가슴을 뛰게 했다. 준형이 고리에 손가락을 걸고 그대로 비즈를 잡아당겼다가 반쯤 나온 비즈를 다시 산호의 요도에 밀어넣었다. 그 짓을 빠르게 반복하자 마치 피스톤 질을 하는 듯한 기묘한 흥분감이 들었다.

“아아아아! 아흐윽!”

어느 때보다 요란한 신음이 유산호의 입에서 튀어나온다. 수갑에 묶인 손목이 벌겋게 부은 것이 보였다. 비즈가 나왔다가 들어갈 때마다 유산호의 몸이 흔들리고 비즈는 차츰 젖어서 반질반질해졌다. 지독하게 야한 광경에 준형은 사춘기 고등학생으로 돌아간 것처럼 침을 꿀꺽 삼켰다.

“산호야, 좋아? 어?”

“하으으…. 살살…. 아아…!”

산호는 찌릿한 통증이 요도에서부터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감각에 솜털이 곤두섰다. 발끝이 차가웠다가 뜨거워지기를 반복했다. 정신이 깜빡거릴 정도로 강한 쾌감이 몰아쳤다. 그 사이에 엉덩이 안쪽으로는 도준형의 손가락이 푹 파고들었다. 숨 쉬어. 준형의 말이 들릴 때까지 산호는 자기가 숨을 참은 것도 몰랐다.

“왜 앞에 박히는데 뒤가 이렇게 벌렁거려. 응?”

“아흑…! 하, 앗…! 흐….”

“빨리 뒤에도 박아주면 좋겠어?”

“아응! 응! 아!”

“앞뒤로 동시에 박히고 싶구나. 우리 산호는.”

도준형이 뭐라고 지껄이는지 산호는 신경 쓸 정신도 없었다. 눈앞에 번개가 내려친다. 그런데 그 번개를 맞을 때마다 오줌싸개가 된 기분이다. 허벅지는 이미 질척하게 젖어있었다.

“응…! 으아! 아, 안 돼!”

“손가락 싫어?”

“빼…! 읏, 빼주, 세…요…! 응…! 아읏….”

지독한 쾌감 때문에 산호의 볼은 엉망으로 달아올랐다. 짠 눈물이 말라붙어 따가운 볼에 준형이 쪽쪽 입을 맞췄다. 비즈를 넣었다 뺐다 하면서 요도를 괴롭히는 동시에 뒤로는 손을 넣어 내벽을 꾹꾹 누르자 좁은 구멍이 손가락을 꽉 물어온다. 자극이 너무 강했다. 준형은 인내심을 내던지기로 했다. 손가락 말고 내 자지에 박히고 싶어? 응, 응. 산호는 내벽을 긁어대는 손가락이라도 어떻게 하고 싶었다.

요도에 박힌 비즈 때문에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거기에 뭘 넣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다. 준형은 번들거리는 제 귀두 끝을 움찔거리는 산호의 구멍에 맞췄다. 벌어진 유산호의 입에 손을 넣어 작은 혀를 콱 움켜쥔 채 단숨에 속을 꿰뚫었다. 뻑 소리와 함께 덜 풀어진 구멍이 준형의 성기를 모조리 삼켰다.

“흑, 으…. 아! 아! 천, 천히…!”

“아…. 진짜 아다 같아, 오늘.”

“하응! 아! 흣!”

준형의 손톱이 산호의 부푼 젖꼭지를 간지럽게 긁어댔다. 그러나 손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 듯 준형의 입이 꼿꼿하게 선 젖꼭지로 다가갔다. 유연하게 쳐올리는 허리 위에 유산호의 말랑한 다리가 휘감긴다. 준형이 낮게 웃으며 다른 손으로는 산호의 성기를 움켜쥐었다. 네 손가락으로는 귀두와 기둥 윗부분을 감싼 채, 요도 비즈의 고리에 엄지손가락을 걸고 쓸어올렸다 쓸어내리면 내벽이 제 좆을 조여 물었다. 황홀한 감각이다. 준형은 누군지 모를 요도 비즈 개발자에게 속으로 감사를 표했다.

“미안.”

“흐, 으! 아…!”

“앞 구멍도 진작 뚫어줄 걸 그랬다. 이렇게 잘 느낄 줄 알았으면.”

산호는 제 몸 안에서 불꽃이 터지는 기분이었다. 내벽을 찌르는 도준형의 성기가 멈추지 않고 쾌감을 증폭시켰다. 요도 비즈에 배출구를 막힌 성기는 잔뜩 부풀어서 당장이라도 쌀 것 같은 느낌에 괴로웠다. 비즈를 빼는 순간 꼴사납게 사정할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이 경악스러운 쾌감이 너무 좋아서 산호는 미칠 것 같았다. 차라리 미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이런 감각을 알게 된 후에는 절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도준형이 저를 길들이는 방법으로 고통보다 쾌감을 택했다면 그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산호는 절망과 함께 피어오르는 쾌감에 자신을 맡겼다.

“내 자지 맛있어?”

“응…! 응, 아!”

“제대로, 대답해. 어?”

“흑…! 맛…아! 흐으…. 좋아…!”

준형은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팔랑거리는 산호의 머리칼이 좋았다. 분홍색으로 달아오른 얼굴도 좋았다. 젖은 속눈썹에 맺힌 눈물도 좋았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제 팔을 잡고 매달리는 것이 좋았다. 상앗빛 다리가 제 허리를 감는 것이 좋았다. 비즈로 쑤실 때마다 칠칠맞게 앞을 적시는 분홍색 자지도 좋았다. 제가 망가뜨린 다리가 도망치지 못하고 힘없이 흔들리는 것이 좋았다. 좋으면서 좋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는 제 애인이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너를 계속 내 옆에 묶어두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남은 한쪽 다리도 부러뜨려버릴까.

“아으응…! 그만, 아…! 갈 거 같…. 흐으…!”

준형도 한계였다. 유산호의 팔을 제 목에 감게 하고 몸을 일으켰다. 졸지에 준형의 몸 위에서 그대로 박히게 된 산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유난히 크고 두꺼운 성기가 온 내벽을 다 휘젓는다. 준형은 산호의 허리를 단단히 잡았다. 그리고 반쯤 찔러넣고 있던 요도 비즈를 단번에 확 빼내며 허리를 쳐올렸다. 준형의 성기에 거의 뱃속을 꿰뚫리다시피 한 채 헐떡이는 숨을 뱉던 산호는 준형의 가슴팍에 제 뺨을 비비며 사정했다. 내내 비즈에 막혀있던 요도에 해방감이 몰려왔다. 준형의 단단한 팔이 산호의 엉덩이를 아프게 주물렀다. 쾌감이 너무 강해서인지 산호의 내벽은 한참 동안 움찔거리며 준형을 여운에 잠기게 했다. 산호의 물기 어린 입술이 투정하듯 준형의 어깨를 물었다.

늦은 여름의 밤은 대부분 그렇게 흘러갔다. 가끔 산호를 발기시킨 채 묶어놓고 사정하지 못하게 괴롭히기도 했지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밤뿐만 아니라 낮이나 새벽에도 대부분 그랬다. 혈기왕성한 스무 살의 도준형은 산호의 몸을 안고 편안한 잠에 빠져들었다. 미국에 간다고 해도 둘의 생활은 별로 달라질 것 같지 않다는 게 산호의 생각이었다.

산호는 제 선택을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미국에는 산호가 좋아하는 것들이 있었다. 기름진 음식, 커다란 아이스크림,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 특히 둘이 살게 될 로스앤젤레스는 일 년 내내 날씨가 좋다고도 했다. 운이 좋거나, 도준형의 기분이 좋다면 놀이공원이나 해변에 놀러 갈 수도 있겠지. 그러나 산호는 그게 저의 희망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 *

희고 거대한 공항에 들어서자 후덥지근한 공기가 사라지고 달라졌다. 커다란 공항을 빼곡히 채운 사람들은 이국으로 떠나는 설렘과 기대로 제각기 홍조를 띠고 있었다. 그 거대한 유기물 같은 설렘 속에서 오직 산호만이 해초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발목이 내내 욱씬거렸기 때문에 산호의 기분은 최악이었다. 이미 망가진 왼쪽 발목을 도준형이 지난 밤새 건드린 탓에 산호의 움직임은 두 배로 불편했다.

평생 전처럼 걷지 못하게 된 왼쪽 발목은 겉으로는 멀쩡해보였다. 그 왼쪽 발목은 재활 치료를 계속 받았는데도 제 기능을 완전히 다 하지 못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멀쩡해보이는 왼발에 힘을 싣고 땅을 내디딜 때마다 찌르르 울리는 통증이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울컥, 통증과 함께 속에서 뭔가가 목구멍으로 올라오기도 했지만 산호는 이제 그것들을 다시 잘 삼킬 줄 안다.

그나마 걸을 수라도 있는 게 다행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자 산호의 기분은 더 곤두박질쳤다. 그리고 도준형은 잔뜩 신이 나서 그런 산호 대신 두 배로 즐겁게 공항을 돌아다녔다. 준형이 면세점에서 산 담배와 술, 홍삼 따위를 기내용 캐리어에 욱여넣고 신나게 공항을 활보하는 동안 산호는 목발에 의지해 간신히 준형을 따라갔다.

산호는 자신이 덫에 걸린 쥐 같다고 생각했다. 미국에 가면 이제 2년 동안은 돌아올 수도 없고 도망칠 수도 없다. 그런 생각이 산호를 다시금 초조하게 만들었다.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수백 번도 더 같은 생각을 했다. 그러나 결론은 언제나 하나였다. 다시 잡힐 것이 분명했다. 이미 겪었던 실패의 기억이 족쇄가 되어 산호를 묶었다. 그러는 사이에 준형에게 이끌려 보딩 패스를 발급받고 이미그레이션을 지났다.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입에 물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저게 우리가 탈 비행기야.”

준형의 입에서 흘러나온 중동의 항공사는 산호도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미국엘 가는데 왜 중동 국적기를 타는 거지. 산호는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금세 생각을 멈췄다. 도준형이 골랐으니까. 궁금해해봤자 나는 영원히 모를 거다. 도준형은 그런 놈이다.

“비행기를 열두 시간이나 어떻게 타냐. 벌써 짜증 나네.”

“…그러게.”

“산호야.”

“응?”

준형은 설렘이 가득한 얼굴로 산호에게 물었다.

“이거 다 먹고 공항 화장실에서 한 판 뜰까?”

“어?”

“나 공항에서 해보고 싶었어.”

“…화장실에서?”

산호는 정말로 몸이 불편했다. 내내 쑤시는 발목도, 억지로 삼킨 햄버거 때문에 니글거리는 뱃속도. 준형이 싫어서가 아니라 지금은 싫었다. 산호가 머뭇거리자 준형이 말을 이었다.

“장애인 화장실은 칸도 넓잖아. 너 다리도 병신이고.”

“…….”

“…싫어?”

“…아냐. 좋아.”

산호의 힘없는 목소리는 허락의 뜻을 담고 있었지만 준형의 표정은 굳어졌다. 감자튀김을 집던 손이 그대로 그것을 트레이 위에 내려놓았다. 물건 하나 던지지 않고도 준형은 산호를 긴장하게 할 수 있었다.

“산호야.”

낮게 깔린 준형의 목소리에 산호가 흠칫 몸을 떨었다. 왼쪽 발목은 여전히 욱씬거렸다. 뼈에 박힌 나사 근처에서 심장이라도 뛰는 것처럼.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좋다고 하면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돼, 그거를?”

“아니, 난….”

“내가 나만 좋자고 그래?”

“준형아….”

“막상 박아주면 더 쑤셔달라고 질질 싸면서 왜 나만 발정 난 개새끼 취급을 해?”

준형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바로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듣기에는 충분한 크기였다. 산호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달아올랐다. 그러나 산호는 이제 그런 수치심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안다. 저렇게 빈정대는 준형을 그대로 두면 산호의 몸이 힘들어진다.

산호의 행동이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준형은 조금 음습한 방식으로 산호를 괴롭혔다. 산호의 성기를 발기시킨 채 묶어놓고 방치하는 것은 그중 그나마 덜한 짓이다. 준형이 저런 표정을 지은 날은 대개 몇 시간이고 준형이 만족할 때까지 침대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산호의 입에서 제발 가게 해달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준형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준형의 눈썹이 찌푸려지자 산호의 행동이 다급해졌다. 반도 먹지 못한 햄버거를 내려놓고 준형의 팔을 매만졌다.

“지금 갈까?”

산호는 준형을 보며 최대한 웃어보였다. 준형의 표정이 언제 굳었냐는 듯 풀어지며 평소처럼 가벼운 말투로 말을 걸었다.

“솔직히 말해봐, 유산호. 너 나보다 내 자지가 더 좋지.”

“밖에서 자꾸 그런 말 하지 마.”

“아, 왜. 부끄러워? 어? 우리 산호, 얼굴 또 빨개졌다.”

준형의 장난스러운 말들이 전부 비수가 되어 산호를 찔렀다. 준형은 언젠가부터 산호가 제게 매달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것은 관계에 있어서도 그랬고, 섹스에 있어서도 그랬다. 산호가 준형과 가까워지면서 는 것은 눈치뿐이다. 셀 수도 없을 만큼 자주 몸을 섞어왔으니 그 상대의 취향을 파악하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하기 싫을 때에도 싫은 티를 내지 않는 것도, 이제는 익숙했다.

그러나 준형도 산호가 이제 그 정도로는 괴롭지 않다는 것을 아는지, 꼭 지금처럼 산호가 먼저 섹스를 조르도록 상황을 만들고 그것을 조롱하며 즐거워했다. 유산호가 얼마나 발정이 났는지, 얼마나 도준형의 좆을 좋아하는지, 얼마나 걸레 같이 좆을 빠는지, 얼마나 잘 느끼는지…. 얼마나…. 얼마나…. 산호는 이런 수치심에는 도저히 익숙해질 것 같지 않았다.

“컨셉은 뭐로 할까?”

“무슨 컨셉?”

“발정 난 유산호가 나한테 강간당하는 컨셉은 어때.”

“그게 뭐야….”

“왜? 별로야? 난 뒤로 박으면서 네 머리채 잡는 거 생각만 해도 서는데.”

“…얼굴 보고 하면 안 돼?”

산호의 말에 준형의 걸음이 잠시 멈췄다. 산호가 당황한 얼굴로 준형을 보며 물었다.

“…싫어?”

“이게 또 애교 부리네. 사람 홀릴라고.”

“내가 뭘….”

산호는 애써 시선을 피하며 얼굴을 붉혔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이 가증스럽다고 생각했다. 산호는 이제 준형이 자신을 나름대로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게 사랑이 아니라 애완동물을 아끼는 마음에 더 가깝다는 사실이 산호에게는 불행이었지만.

하기야 요즘은 동물들도 무려 반려로 레벨 업 한 세상이다. 자신은 개만도 못한 신세였다. 그렇게 폭력적이고 제멋대로인 아낌에 고통받으면서도 거기서 떨어지는 달콤한 과실을 거부하지도 못한다. 망가진 발목만이 문제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결국 이런 꼴이 되고 말았다.

섹스를 하면서도 집요하게 산호의 눈을 따라 맞추는 그 정체 모를 마음 덕분에 산호는 불행해졌고, 또 그 안에서 숨통이 트였다.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 준형의 마음을 간질이면 준형은 기분이 풀어져선 바짝 세웠던 성기를 가라앉혔다. 산호는 절대로 그걸 사랑이라 부르지 않기로 했다. 제가 준형의 비위를 맞추는 것은 그저 미련과 생존본능이었다.

준형이 바라는 말을 하며 준형에게 안기고, 제 감정을 꾸며내면서 산호는 그를 조금씩 짓밟는 듯한 우월감을 느꼈다. 넌 네가 나를 전부 다 안다고 생각하지. 틀렸어. 그런 생각을 하면 저열하지만 통쾌한 기쁨이 산호의 안을 채웠다. 곧 그렇게 끔찍해진 스스로에게 짙은 혐오감이 들었지만 어쨌거나 산호에게도 매일을 버틸 힘은 필요했다. 그래서 산호는 그 짓을 멈추지 않았다. 산호의 마음은 여전히 이름이 없었다. 다만 조금 더 추해졌다. 시작은 풋풋했던 짝사랑이 이제는 역겹기 그지없는 냄새를 풍긴다. 준형과의 관계가 언제나 그랬듯, 절대로 산호의 잘못은 아니었다.

아무튼 산호의 행동은 옳았다. 대충 말을 골라 준형의 기분을 맞춘다. 이제는 아주 쉬웠다. 준형은 언제 짜증을 냈냐는 듯 산호에게 기대 싱글벙글 웃었고, 덕분에 공항 화장실에서 꼴사납게 박히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준형은 좌석에 앉자마자 말했다.

“LA 공항 도착하면 도착 기념으로 거기 화장실에서 떡 치자.”

산호는 자기가 고개를 끄덕이는 줄도 몰랐다. 저열한 기쁨은 순간에 불과했다. 준형이 마음만 먹으면 자신이 무엇을 해도 그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호는 천천히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일어나면 또 준형을 받아내야 할 테니까 체력을 비축해야 한다.

감은 눈앞이 제 미래처럼 어두웠다. 그 옆에 언제나 도준형이 있다. 제가 반했고 좋아했던 그 모습 그대로. 산호의 사랑은 증오와 굴종과 체념에 잠식당해 원래의 모습을 잃은 지 오래인데 제 옆에 있는 도준형은 처음 만난 그 모습 그대로였다. 산호의 속을 몽땅 썩어들어 가게 만든 잘생긴 얼굴이 산호를 보며 나른하게 미소를 지었다. 산호는 그 미소에서 애써 위안을 찾으며 순응했다. 견뎌야 했다. 견딜 수 없어지면 결국 도준형이 자신을 죽일 것 같았다.

* * *

처음 타보는 일등석은 좌석과 좌석 사이의 공간이 무척 넓었다. 그러나 산호는 이제 이런 달콤한 과실에도 별 감흥이 없는 스스로에게 조금 놀라고 말았다. 이륙을 알리는 외국의 언어가 기내에 울려 퍼졌고 곧 기체는 하늘을 날았다. 주는 대로 호화로운 기내식을 먹고 화장실에 다녀오자 좌석은 침대로 바뀌어 있었다. 산호는 무심코 마신 맥주와 비행기라는 장소의 특수성이 주는 안정감 덕분에 금방 잠이 들었다.

준형은 정신없이 잠든 산호의 좌석으로 넘어와 그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담요 한 장을 덮고 잠든 산호는 전혀 깨어날 생각이 없어보였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뱀처럼 차가운 손이 담요 밑에서 산호의 반바지를 끌어 내렸다. 비행기는 어두운 창공을 날고 있었고 사람들은 잠들어 조용했다. 창가 쪽의 퍼스트 클래스 좌석은 복도 가운데의 좌석과 달리 파티션이 천장까지 닫는 형태로, 좌석 바깥과 완전히 분리된 형태라서 아무도 산호를 건져내 줄 수 없었다. 사실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해도 준형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을 테지만, 어쨌든 준형은 산호를 배려해서 그 자리를 골랐다.

일등석이라고는 해도 두 사람이 들어가자 파티션 안은 비좁았다. 그 덕에 준형은 한층 빨리 흥분했다. 준형의 머리가 기어코 담요 밑으로 들어갔다. 비누냄새가 나는 팬티를 쉽게 벗겨내고 잠든 산호의 다리를 쫙 벌렸다. 예쁜 유산호. 온몸이 하얗고 분홍색인 유산호. 원래 별로 없던 털마저 어젯밤 준형의 손에 이끌려 왁싱을 당한 유산호.

‘미국에선 다 한대. 너 부끄럼 많으니까 내가 해준다고. 그래서 꿀로 만든 왁스도 사 왔잖아, 내가.’

산호는 겁먹은 얼굴이었으나 거부하지 않았다. 털이 별로 없는 산호의 몸 덕분에 왁싱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래 걸린 것은 그 후의 정사였다. 만족스러웠던 어젯밤을 떠올리니 준형의 성기가 금세 뻐근해졌다. 빳빳하게 일어선 성기를 만지며 주변을 둘러보던 준형의 눈에 마시다 남은 맥주 캔이 보였다. 찰랑거리는 맥주를 입에 머금은 준형의 얼굴이 아래로 내려갔다.

문득 잠을 깬 산호는 침침한 눈을 애써 비볐다. 아래에서 뜨겁고 짜릿한 느낌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준형의 입안에서 탄산이 터지며 산호의 성기가 일어섰다. 털이 없어진 맨살은 침과 맥주가 섞여 흘러서 쩌덕쩌덕한 소리를 내며 살 기둥과 들러붙었다.

“깼어? 이거 봐. 존나 야하다. 벌써 질질 싸네.”

신이 난 얼굴로 산호의 벌린 다리 사이를 내려다보는 준형의 목소리가 잔뜩 들떠있었다. 별안간 맥주 캔 옆에 있던 작은 요거트를 집어 든 준형이 이로 껍질을 뜯었다. 정액처럼 희멀건 한 요거트가 준형의 얼굴에 몇 방울 튀었고 곧 산호의 마른 뱃가죽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차가운 감각에 화들짝 놀란 산호에게 준형이 말했다.

“칠칠맞게 벌써 싸면 어떡해. 이제 시작인데.”

산호는 이제 이런 놀림에도 익숙해져야 한다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준형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제 입가에 튄 요거트를 핥았다. 내가 바람 펴도 넌 절대 피지 마. 지나간 유행가의 가사가 지나치게 준형 같아 산호는 잠시 제가 처한 상황도 잊고 실소를 흘릴 뻔 했다. 준형은 제 성기를 잡고 요거트 범벅이 된 산호의 배를 문질렀다가 그대로 잡아 회음부를 탁탁 내리쳤다.

어두운 기내는 물속처럼 조용해서 산호는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잘 분간할 수가 없었다. 뻑뻑한 눈을 애써 치켜떠보지만 실내는 이미 어두워진 상태였다. 작은 조명이 별처럼 점점이 박힌 천장은 숙면에 좋으며 이 항공사의 특징이라 들었다. 조도가 낮은 조명은 산호가 잡을 수 없는 등대처럼 멀었고 그마저도 자꾸 준형의 몸에 가려졌다.

서늘한 실내와 달리 뜨겁고 축축한 준형의 몸이 산호를 내리눌렀다. 회음부 근처에 비벼지는 준형의 성기는 산호의 안을 꿰뚫을 듯 말듯 구멍 앞에서만 움직였다. 두껍고 힘센 준형의 혀가 산호의 유두를 찾아 요란하게 빨았다. 산호의 몸이 헐떡이자 준형의 성기가 꼿꼿하게 선 채로 산호의 회음부를 찔렀다. 연한 살을 아플 정도로 꾹 밀어 찌르는 탓에 산호의 숨이 끅끅거리며 넘어갔다.

“왜, 왜 안 넣고….”

아픔과 쾌감에 떨던 산호의 말에 준형이 퍽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그냥 찢어서 구멍 하나 더 만들면 어떨까.”

산호가 힉 숨을 들이켜며 고개를 저었다.

“왜, 싫어?”

“싫…. 흐으….”

“왜? 내 자지 모양대로 뚫어줄게. 너 내 자지 좋아하잖아.”

“싫…어…. 흐읍….”

“그럼 여기다 박아줄까?”

“응, 응…. 거기…. 흣…!”

준형은 제 성기를 잡고 단번에 뿌리까지 쑤셔 넣었다. 애초부터 산호의 대답을 들을 생각은 없었다. 피를 보는 취미는 준형도 없다. 무엇보다 유산호에게 상처가 생기는 것이 싫었다. 발목을 완전히 망가뜨린 것도 요즘은 후회하고 있었다. 거울 앞에 세워놓고 뒤에서 박으면 유산호의 발뒤꿈치가 땅에서 떨어져 점점 까치발을 딛게 되는데, 왼쪽 발목을 못 쓰게 된 후로는 유산호가 까치발을 잘 들지 못하게 됐기 때문이다. 준형은 유산호의 매끈한 살을 오래도록 핥고 싶었다.

그러나 동시에, 겁먹은 유산호의 얼굴이 좋다. 저런 얼굴을 한 유산호는 절대 제게서 도망치지 못할 거라는 확신을 준다. 자지로 살을 뚫는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에도 겁에 질려서 매달리는 유산호의 얼굴이 보고 싶었을 뿐이다. 흡족했다.

“아흐…. 으…. 응…!”

“야, 밖에 사람들 자잖아. 조용히 못 해?”

웃기는 말이다. 준형은 사람들의 눈이나 귀를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런 데에 신경을 쓰는 것은 산호뿐이다. 시끄러운 것은 산호의 신음 소리가 아니라 요거트를 바른 채 요란하게 구멍을 쑤셔대는 준형의 몸짓이었다. 찰박거리는 소리가 집요하게 산호의 귀를 찔렀다.

“으흐응…! 응, 읏…!”

“그렇게 좋아?”

“응, 아! 으읏….”

산호가 대답 대신 입술을 깨물며 준형의 가슴팍에 얼굴을 문질렀다. 다분히 의도된 행동이었으나 준형의 몸은 좀 더 다급해졌다. 산호가 주인의 애정을 갈구하는 개처럼 굴수록 준형의 사정은 빨라졌다. 산호가 입술을 깨문 보람도 없이 준형의 성기가 배 안쪽을 찌를 때마다 질척하게 흘러내린 요거트가 음란한 소리를 증폭시켰다. 준형이 뿌리까지 텅텅 쑤셔 박을 때마다 준형의 불알이 민둥하게 제모 된 산호의 회음부 살과 짜악, 짜악 찐득하게 부딪쳤다 떨어지는 소리로 파티션 내부를 채웠다. 준형이 아래를 쳐올릴수록 산호의 발끝이 하얗게 질렸다. 뻑뻑하던 눈가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 맺혀 멀리 보이는 조명이 아롱아롱 번져보였다.

산호는 문득 준형이 미국에서 바람을 피우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흐릿한 정신은 금방 산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엄밀히 말하면 도준형이 저와 사귀는 사이는 아니니까 바람은 아니다. 하지만 산호가 그랬다간 바람을 피운 괘씸죄로 도준형에게 끝없이 괴롭힘을 당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도준형이 바람을 피우면 어쩌지. 그래서 도준형이 이제 와서 나를 버리면 어쩌지.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

산호는 제 뺨에 닿은 도준형의 손가락을 입에 넣고 빨았다. 도준형의 숨이 더 거칠어지는 것이 느껴지자 조금 안도감이 들었다. 도준형이 눈을 돌릴 새도 없이 애교를 부리고 좆을 빨아주면 도준형이 계속 나만 봐줄까? 그러나 산호의 멍청한 생각은 곧 끊겼다. 준형의 밑에서 정신없이 흔들리는 사이에 섬광 같은 절정이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다가왔다. 준형의 복근과 제 배 사이에 낀 채 비벼지던 성기는 이미 몇 번이나 뱉어낸 사정액에 범벅이 된 채 정체도 알 수 없는 투명한 액을 줄줄 흘리고 있다. 안에 남은 것이 모조리 쾌감에 의해 쥐어짜내진 기분이었다. 준형도 사정감이 다가오는지 박는 속도가 빨라졌다.

산호의 얼굴을 잡고 입을 맞춰오는 준형의 손이 다급했다. 아래에서 두툼한 살덩이가 구멍을 집요하게 꿰뚫는 동시에 입안으로도 두툼한 혀가 들어와 산호를 헤집었다. 위아래 모두가 준형의 핏줄 선 살덩이들에 유린당하며 흔들린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쾌감이 산호의 머리를 차츰 잠식해갔다. 숨이 모자라 준형의 등을 긁어댔지만 준형은 개의치 않았다. 산소가 부족해지자 머리가 물에 빠진 것처럼 무거워졌다. 온 사방이 어둡고 먹먹했다. 아득해지는 정신 사이로 준형이 욕을 뱉으며 사정하는 것이 느껴졌다.

간신히 입술에 찬 공기가 닿았다.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 같아서 산호는 다급하게 팔을 휘저었다. 도준형의 목덜미가 팔에 닿았다. 산호는 구명줄처럼 준형의 목을 끌어안고 허겁지겁 숨을 들이켰다. 콧속으로 들어오는 공기마저 온통 준형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산호는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계속해서 숨을 쉬었다. 폐 속도 전부 준형의 냄새로 가득 찬 것 같았다. 더 이상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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