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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자맥질 (4/7)

4. 자맥질


세상은 참 편리했다. 산호는 그간 준형 덕분에 굳은 식비를 긁어모아 인터넷으로 레토르트 식품과 물을 샀다. 밖에 나가지 않아도 문 앞까지 배달해주는 덕분에 산호는 오피스텔을 벗어나지 않고도 불편함 없는 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다. 노트북으로 인터넷 강의를 듣고, 심심하면 TV를 본다. 배가 고프면 대충 냉장고를 뒤져 배를 채우고, 꾸역꾸역 배를 불렸는데도 이유 없는 초조함이 가시지 않을 때는 침대에 모로 누워 서툴게 자위를 했다.

핸드폰은 한 번도 켜지 않았다. 연락이 오건 오지 않건 어느 쪽이든 슬플 것 같아서였다. 특별히 연락이 올 사람도 없었다. 마음 한구석은 불안하면서도 산호의 일상은 대체로 평온했다. 그러나 아무도 마주치지 않는 그 일상은 고작 일주일 뒤에 사라졌다.

삐. 삐. 삐. 삐. 띠링.

목이 말라서 잠에서 깬 산호의 귀에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위험을 감지한 것처럼 뒷목이 서늘해졌다. 꿈을 꾸는 것처럼 느리게 문이 열렸다.

“…안 자고 있었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찬 겨울바람 냄새를 풍기는 박성경이었다. 산호의 머리가 생각하는 것을 멈췄다. 그동안의 이유 없는 초조함들은 사실 경고였던 걸까? 산호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자 성경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왜 그래? 섭섭하게.”

“…미국 간다고 하지 않았어?”

“아. 너랑 노는 게 더 재밌을 것 같아서.”

“…….”

“그렇게 벌레 보듯 보면 기분 나쁜데.”

피할 새도 없이 성경의 손이 산호의 뒷목을 잡아챘다. 어디선가 맡아본 익숙한 향이 산호의 코를 찔렀다. 차가운 손이 닿자 산호는 파드득 몸을 떨었다. 성경의 손은 느긋하고 진득하게 산호의 목덜미를 주물렀다. 어째서 찬 손이 닿았는데 체온이 올라가는지 산호는 알 수 없었다.

“내가 무서워?”

“…….”

“이상하네.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는데.”

산호가 덜덜 떨건 말건 성경은 말을 이었다.

“근데 왜 안 자고 있었어?”

“…….”

“사실은 너도 나 기다리고 있던 거 아니야?”

“…뭐?”

“그렇잖아. 무슨 짓을 당할 줄 알고 함부로 남의 집에 들어와.”

“하….”

“난 나한테 또 당하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알았지.”

산호의 말문이 막혔다. 뻔뻔하게 헛소리를 늘어놓는 것이 도준형과 꼭 닮았다. 둘이 어떻게 친구가 됐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과거의 자신은 바보 같았다.

“너 여자 친구는,”

“있는 척 하느라 피곤했어.”

“거짓말.”

“진짜야. 왜 안 믿지?”

“…….”

“왜 사람을 그렇게 봐. 꼴리게.”

“…뭐?”

“버릇이야? 너 그때도 그랬잖아.”

“…무슨 말이야.”

산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성경은 기분 좋은 추억이라도 떠올리는 듯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언제였더라….”

“…….”

“아, 도준형네 집에서.”

“…….”

“네가 계속 나 힐끔거리면서 유혹했잖아.”

“…내가 언제!”

“그래서 너 한번 따먹으려고 그 새끼한테 계속 폭탄주 먹였어. 알아?”

“…….”

“난 너처럼 앙큼한 애들 좋아해. 도준형은 별로 안 좋아하겠지만.”

“…너, 너….”

“먼저 꼬셔놓고 아닌 척 반항하는 너 같은 애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적 없다고? 나는 네 장난감이 아니라고? 산호의 표정이 굳자 성경은 손가락을 뻗어 산호의 볼을 톡톡 쳤다.

“표정 좀 풀어. 이제 와서 놀라는 척 하지 말고.”

“…….”

“말했잖아. 난 남의 손 좀 탄 거 좋아한다고. 순진한 척은 별로야.”

“…너, 너는 도준형 친구잖아. 근데 어떻게,”

“친구는 남 아니야?”

“…….”

“내 취향이 이런 걸 어쩌겠어.”

“…….”

“그리고 네가 자꾸 내 눈앞에서 알짱댔잖아. 나보고 어쩌라고.”

성경에게서는 도준형의 것과 같은 코롱 냄새가 짙게 났다. 질리도록 맡아왔던 그 향을 이제야 떠올린 산호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박성경의 취향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악취미였다. 산호가 저도 모르게 흡, 숨을 참았다. 그걸 눈치챈 성경이 픽 웃으며 물었다.

“일부러 네 남친이랑 같은 향수 뿌렸는데, 맘에 들어?”

“…놔! 이거,”

“아…. 현관에서 하고 싶어? 무릎 다 깨질 텐데.”

성경의 단단한 팔이 산호의 몸을 끌어안고 티셔츠 안으로 슬금슬금 들어왔다. 산호는 빠져나오려 했지만 성경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성경은 벌써 바짝 선 제 성기를 산호의 엉덩이 사이에 넣고 비벼댔다. 산호는 무릎이 깨지는 것보다 자존심을 버리는 쪽을 택했다.

성경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침대로 가는 동안 산호는 멍청한 스스로를 죽이고 싶었다. 왜 이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걸까. 혼자 쓰기엔 너무 넓었던 침대가 지금은 너무 좁았다. 별안간 성경의 손이 산호의 얼굴을 우악스럽게 잡아챘다. 청바지에 쓸린 볼이 얼얼했다. 산호가 성경의 손을 쳐내자 성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때리기 싫은데, 왜 자꾸 화를 돋워.”

“…싫, 싫어…!”

산호가 고개를 저었지만 성경은 개의치 않았다. 어느새 버클이 풀린 성경의 청바지가 벗겨졌다. 산호의 헐렁한 잠옷은 아무런 방패도 될 수 없었다. 침대 구석에 허물처럼 뭉쳐진 이불이 처량했다.

성경의 손이 산호의 얼굴을 잡아 제 성기 가까이 들이밀었다. 산호가 고개를 뒤로 빼자 매서운 손바닥이 그대로 산호의 뺨을 내리쳤다. 짝! 산호는 아픈 게 싫었다. 미약한 저항을 관두고 성경의 다리 위에 올라타 그의 손이 이끄는 대로 성기를 입에 물었다.

“저번처럼 잘 빨아봐.”

“아, 웁…!”

“짜증 나게 하지 말고.”

성경의 성기가 산호의 입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몇 번을 겪어도 구역질이 나는 행위였다. 도준형의 성기를 물 때와는 기분부터 달랐다. 물컹하던 살덩어리는 산호의 목구멍까지 단번에 퍽, 파고들었다. 제 입안에서 단단하게 부풀어 오르는 성기 덕분에 산호의 턱은 뻐근해졌다. 불끈거리는 핏줄이 고스란히 혓바닥 위를 문질렀다.

잔뜩 팽창한 성기에서는 옅은 비누 냄새가 났다. 표리부동한 새끼. 산호는 욕을 삼키며 입안을 조인 채 목에는 힘을 풀었다. 제가 빨지 않아도 성경은 이제 알아서 산호의 머리를 잡고 왕복운동을 했다. 도준형의 것만큼 길고 커다란 성기가 산호의 목젖을 텅, 텅, 텅 찔러댔다. 어떻게 움직여볼 틈도 없었다. 입안이 성경의 성기로 가득 차서 다물 수도 없고 깨물 수도 없었다. 마치 배가 고파서 입안 가득 음식을 쑤셔 넣으면 씹기도 힘든 것처럼.

성경이 산호의 머리를 잡고 움직일 때마다 음모와 함께 성경의 고환이 산호의 뺨과 턱에 와 부딪쳤다. 숨이 찬 산호의 눈에 생리적인 눈물이 고일 때쯤 성경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도준형과 시도 때도 없이 붙어먹은 덕에 산호는 그 움직임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박성경의 사정이 임박했다.

“후…. 뱉지 말고 다 먹어.”

“으으읍!”

성경은 갑자기 몸을 일으켜 산호를 눕히고 그 위에 올라탔다. 위에서 누르듯이 찍어내리는 성기가 아까보다 훨씬 깊게 목구멍을 유린했다. 점점 더 숨이 막혀왔다. 성경은 산호의 사정이 어떻건 산호의 얼굴 위에서 제 성기를 쑤셔 넣는 데에 집중했다. 산호의 날숨과 성경의 땀이 습기 가득한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산호의 손은 애처롭게 성경의 허벅지를 할퀴었지만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아….”

빠르게 쳐내리던 성경이 산호의 머리채를 양손으로 잡은 채 제 성기를 끝까지 쑤셔 박았다. 산호는 성경의 복근에 눌린 코 때문에 숨이 막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성경은 성기를 끝까지 밀어넣은 채로 허리를 느리게 돌렸다. 묽고 쓴 정액이 길게 흘러나왔다. 혀를 누르고 목구멍을 향한 귀두 때문에 산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대로 정액이 목구멍을 타고 흘렀다. 산호는 머리채가 잡힌 채로 꿀럭꿀럭 흘러나오는 성경의 정액을 삼켰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긴 사정이었다.

성경의 성기가 덜 싸지른 정액을 흔적이라도 남기듯 질질 흘리며 산호의 입을 빠져나갔다. 덕분에 산호는 눅진한 정액의 맛을 고스란히 느껴야만 했다. 입안은 전부 헐어버린 것처럼 뜨거웠다. 혀끝으로 입천장을 아무리 긁어도 입안에서 정액의 맛이 났다. 산호가 구역질을 했다.

“우욱…!”

“맛은 어때? 맘에 들어?”

산호는 도준형보다 더 나쁜 새끼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통탄했다. 산호가 그러거나 말거나 성경은 조금 불이 붙었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유산호는 강제로 좆을 빨면서도 프리컴을 질질 흘리는 칠칠맞은 타입이다. 잘 체념하는 점이 조금 못마땅했지만 잘 느끼는 몸 덕분에 붉어진 얼굴로 눈물을 흘리는 것이 성경의 취향에 딱 들어맞는다.

힘없이 벌어진 유산호의 허벅지를 잡아 누르고 젖은 팬티 위를 입으로 물었다. 또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젖은 천에 싸인 산호의 성기가 그대로 성경의 입안에 들어갔다.

“하으으…! 안, 아…!”

“뭐 얼마나 빨아줬다고 벌써 질질 싸냐.”

“으응! 으! 아!”

성경의 비웃음이 산호를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너처럼 잘 느끼는 애는 처음이야.”

순식간에 산호의 팬티를 벗겨낸 성경은 평소보다 색이 짙어진 산호의 성기를 손으로 쥐고 혀로는 귀두 끝부분만을 할짝였다. 산호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투명한 액체가 작은 방울을 만들어가며 흘러나왔다. 일부러 괴롭히려던 것은 아니지만 성경이 팬티를 벗기다 말고 산호의 무릎에 걸쳐둔 탓에 산호의 다리는 자유롭지 못했다.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다리를 버둥거리던 산호의 고개가 뒤로 푹푹 꺾였다. 결국 산호는 성경의 손에 사정하고 말았다.

산호는 억울했다. 나는 왜 이렇게 쾌감에 약한 몸을 가지고 있을까. 머릿속이 다시 하얘진다. 이미 사정한 성기를 가만두지 않는 성경 때문에 산호의 정신은 계속 깜빡거렸다.

“하아…. 아아, 아…. 아흐흑…!”

“도준형은 어디서 널 건졌을까.”

성경의 손가락은 흰 편이다. 희멀건한 정액을 잔뜩 묻힌 채 벌겋게 달아오른 산호의 성기를 감싸 쥐고 움직이는데도 그 주인의 얼굴처럼 해사해서 되려 음탕해빠진 것처럼 보였다. 산호의 목에서 앓는 소리가 계속 흘러나왔다. 성경은 사정한 뒤 예민해져 있던 산호의 성기를 조금 더 괴롭히다 말고 정액 범벅이 된 제 손가락을 엉덩이 사이에 문질렀다. 사정의 여운에 젖어 침입을 예상하지 못했던 구멍에 빠르게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아!”

“왜 여기도 젖었어?”

그럴 리가. 말도 안 되는 개소리다. 산호가 고개를 붕붕 휘저었다. 그러나 성경의 목적은 오직 희롱이었기 때문에 산호의 반응은 그저 허공으로 흩어졌다. 산호의 정액으로 질척이는 손가락이 내벽을 찌걱찌걱 긁었다. 몸 전체가 저릿저릿했다. 길고 곧은 성경의 손가락은 내벽 여기저기를 제멋대로 휘저었다. 한 개였던 손가락은 금방 두 개가 되었고 산호의 반응을 보던 성경은 곧 전립선을 집요하게 문질러댔다. 산호의 성기에서 정액도 소변도 아닌 투명한 전립선액이 볼썽사납게 찌익, 찌익 쏟아졌다.

성경의 입이 다시 산호의 성기를 물었다. 힘없이 늘어진 채 전립선액을 뿜던 성기를 사탕 빨 듯이 빨다가 이로 잘근잘근 누르며 강제로 발기시켰다. 그러는 와중에도 성경의 손가락은 성실하게 산호의 내벽을 푹푹 쑤시고 있었다. 산호는 지독한 쾌감에 떨며 성경에게 매달렸다. 앞뒤가 모두 뜨거운 물에 담금질 당하는 것 같았다. 산호가 물 같은 정액을 간신히 성경의 입안에 토해내자 성경이 그대로 얼굴을 들었다.

젖은 입술이 산호의 입술을 깨물고 벌려온다. 씁쓸한 정액 맛이 그대로 산호의 입안을 타고 넘어왔다. 산호의 눈이 경악과 역겨움으로 번쩍 뜨였다. 그러나 반항할 새도 없이 산호의 양 손목을 잡은 성경은 그대로 제 성기를 산호의 안에 쑤셔 박았다. 미친 것 같은 박성경. 미친 것 같은 키스. 지독한 맛이 나는 정액. 그러나 내벽을 질퍽하게 쑤시는 성경의 성기 때문에 산호는 쾌감을 떨칠 수 없었다. 버릇처럼 다리를 성경의 허리에 감고 잡아당겼다.

더, 더 깊게…. 산호의 얼굴에서 지울 수 없는 열망과 정염이 흘러넘쳤다. 성경은 마침내 제게 매달리는 산호의 모습에 조금 흥이 식었다. 유산호의 내벽은 오싹할 정도로 좋았지만. 여전히 혐오하는 눈빛으로 저를 보는 주제에 더 깊게 박아달라는 듯 허리를 비튼다. 산호의 팔이 성경의 목에 감기자 성경이 잠시 몸을 기울였다. 벗어 던졌던 재킷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입에 무는 모습이 지나치게 위험했다.

“요령 피우지 마. 도준형은 그런 거 좋아했나 봐?”

“읏…!”

성경이 훅 뱉어낸 담배 연기가 산호의 얼굴로 날아왔다. 성경은 연신 담배를 빨아들이며 웃었다. 금방 담배 한 대를 피운 성경은 침대 옆에 있던 반쯤 찬 물컵에 그대로 담배를 튕겨 넣었다. 치지직. 불 꺼지는 소리와 함께 산호에게 입을 맞춘다. 성경의 폐 속에 머무르던 담배 연기가 숨을 타고 산호의 입안으로 불어 넣어졌다.

“읍…! 콜록, 콜록…!”

발작처럼 기침과 눈물이 터져 나왔다. 성경은 웃음을 터뜨리며 허리를 쳐올렸다. 무식하게 길고 굵은 성기가 산호의 밑을 계속 뚫었다. 내벽을 뻑뻑하게 채운 탓에 박았다 뺄 때마다 붉고 촘촘한 내벽의 살이 성기를 붙잡듯 딸려 나왔다.

“차라리 남친한테 보내달라고 울어봐. 난 그편이 더 꼴리니까.”

“하으, 앗…! 남친, 아! 아니…야!”

“네 남친 앞에서 이렇게 박고 싶다. 어?”

“힉…! 아! 아아앙…!”

“그래도 돼? 산호야, 응?”

“아, 아! 좋아! 아!”

“도준형 눈깔 돌아가는 꼴 보면 또 쌀 것 같아.”

“흡…. 하아…. 거기, 흐으…!”

“준형아 구해줘 하면서 울어봐.”

“아! 아, 아응…! 싫…!”

“싫어?”

“조, 아아…! 거기, 좀, 더…!”

“걸레처럼 굴지 말라니까.”

“허으…. 으응, 이제, 흣…! 안, 좋…아…!”

정신없이 흔들리던 산호의 입에서 신음과 함께 쏟아진 것은 풋사랑의 말로였다. 성경은 김이 팍 새는 것을 느꼈다.

“아, 재미없게….”

산호는 어안이 벙벙했다. 쾌감이 절정으로 치달아가다가 갑작스레 멈춘 덕분에 제대로 된 생각이 불가능했다. 왜 갑자기 멈추지? 가기 직전인데? 울컥 짜증마저 솟았다. 산호가 울먹이며 허리 아래를 떨었다.

“왜…? 왜….”

“가고 싶어?”

“…흐윽, 제발….”

“지금까지 뭐 들었어.”

“…….”

“난 다른 새끼 좋다고 우는 애한테 박는 게 좋다니까.”

“…….”

“못 알아들어? 재미없다고.”

“…내가 어떻게, 하면, 돼?”

“도준형이라고 불러봐.”

나쁜 새끼. 박성경은 도준형보다 훨씬 더 나쁜 새끼였다. 타고나길 개새끼로 타고난 새끼. 산호의 입에서 더듬더듬 거부의 말이 흘러나왔다.

“…못…, 못하겠어….”

“그럼 그만할까?”

산호는 언제나 졌다. 살면서 누구에게도 이겨본 적이 없으니 어쩌면 이것도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아직 산호 안에 박힌 성경의 성기는 다행히 그대로여서 산호는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색함은 이미 예전에 가신 산호의 몸이 쿵쿵 아래를 찧었다. 엉덩이로 성기를 물고 반쯤 풀린 눈으로 성경에게 입을 맞춘다.

“뭐 하냐, 너?”

“하…응! 아, 키스, 응! 키….”

산호의 입술이 칭얼대듯 성경의 아랫입술을 물고 빨아온다. 성경이 픽 웃으며 산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렇게 박히고 싶어 환장했어?”

“으응…! 으!”

“근데 왜 아닌 척 했어.”

산호는 대답 없이 내벽을 조였다.

“아, 씹….”

성경의 손이 산호의 머리채를 다시 잡았다. 결 좋은 연갈색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를 간지럽힌다. 머리채가 잡힌 산호의 고개가 뒤로 휙 꺾어졌다. 성경이 산호의 목덜미를 아프게 깨물었다. 분명 잇자국이 생겼을 것이다. 허리 아래는 끊임없이 쳐올려서 산호는 머리가 찌르르 찌르르 울렸다. 이건 도준형이다. 산호는 천장을 보며 상상했다. 이건 도준형이다. 땀과 눈물이 섞여 머리카락을 적셨다.

“따라 해.”

“아…!”

“안에 싸면 안 돼.”

“…힉!”

“따라 해보라니까.”

“아, 안에 싸면, 흐…. 안, 돼…!”

“왜 안 돼?”

“흐…. 모, 몰라…!”

“모르는 게 아니지. 남친이 알면 큰일 나. 해 봐.”

“나, 남친…. 아응! 흐, 으! 천천히…. 좀!”

“남친 뭐?”

산호가 말끝을 흐리자 성경이 뿌리까지 밀어넣고 퍽퍽 쳐올리던 허리를 잘게 움직이며 산호를 안달 나게 했다. 산호는 이제 더 이상 무슨 말을 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절정이 필요했다.

“아으으…. 남친, 알면 흣…. 너 죽어어…. 흐읏!”

성경이 산호의 이마에 쪽 입을 맞추며 중얼거렸다. 그건 네 생각이지. 내가 왜 죽어. 성경은 손으로 산호의 마른 뱃가죽을 누른 채 피스톤 질을 이었다. 뱃가죽을 누른 성경의 손이 어느새 다시 일어선 산호의 성기를 함께 문질렀다.

“하…. 너 내가 뺏어올까.”

“히으윽…!”

“이렇게 야한데, 후….”

“아…! 하으, 앙!”

“어떻게 도준형 말고는, 아무한테도 안 따먹혔어?”

“으응, 읏! 아….”

“아…. 쌀 것 같아.”

“흐읏! 안, 에 안 돼…!”

산호의 입에서 착실한 대답이 나오자 성경이 손깍지를 끼며 산호를 몰아붙였다. 절정이 다가오는 듯 내벽이 할딱거리며 조여든다. 성경이 이를 악물었다.

“왜 안 돼, 어?”

“아흐흑…! 응! 남친…!”

산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경의 손가락이 산호의 입안을 후벼팠다. 동시에 성경의 이가 다시 산호의 유두를 깨물었다. 민감해진 유두가 아프게 깨물렸다. 산호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한계까지 몰아붙여진 쾌감이 산호의 몸에서 고통을 지웠다.

“이제 남친 좆 빨 때도 내 생각해야 돼? 응?”

“학…! 하, 읏…!”

“대답해, 씨발….”

“으응! 응!”

“너 같은 애들은 찢어질 때까지 박아줘야 만족하지?”

성경은 제 성기를 뿌리까지 쑤셔 넣고 유산호의 내벽에 정액을 쏟아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쏟아낸 뒤에야 성경은 산호의 젖꼭지에 박아넣었던 이를 떼냈다.

“하아…. 하아….”

“어디 가서 남친 있다고 하지마. 나 같은 새끼한테 박히고 싶어 환장한 거 아니면.”

절정이 지나가자 그제야 이성이 돌아왔다. 도준형이 보고 싶었다. 웃기는 일이다. 그러나 산호는 그게 웃기는 생각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없을 만큼 지쳐있었다. 머릿속은 온통 도준형뿐이다. 도준형이 그리웠다. 산호를 일으키는 성경의 손목에서 그리운 도준형의 냄새가 났다. 무서워서 도망친 상대를 그리워하다니. 이건 다 박성경 때문이다. 산호는 애써 그렇게 생각했다.

산호는 세 번 정도 더 엉망으로 박히고 엉덩이로 정액을 받아낸 뒤에야 잠들 수 있었다.

* * *

깨어났을 때는 혼자였다. 블라인드를 치지 않아 넓은 거실의 창으로 오후의 햇살이 그대로 들이닥쳤다. 불그죽죽한 주황색 노을이 산호의 기분을 한층 더 가라앉게 만들었다.

그리고 잠에서 깬 산호는 제가 입고 있는 것이 처음 보는 티셔츠라는 것을 깨닫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무런 프린팅도 없는 회색 티셔츠는 바람이 숭숭 통할 정도로 큰 사이즈였다. 바지를 입혀놓지 않은 것도 박성경의 악취미였을 것이다. 산호는 옷장을 열었지만 챙겨왔던 제 옷들이 싸그리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하아….”

무심코 내려다본 하체에는 어디서 났는지 짐작하고 싶지 않은 천조각이 입혀져 있었다. 수치스러운 분홍색 망사 팬티였다. 연분홍색 레이스가 망사와 엮인 팬티는 어떻게 보더라도 산호에게 수치를 주려는 목적밖에 없었다. 심지어 레이스는 앞 부분만이고 뒤는 티 팬티였다. 모양을 보면 남성용인 것은 확실했으나 어떤 미친놈이 이딴 팬티를 입는단 말인가. 산호는 이딴 팬티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기가 막혔다. 미친 새끼. 미친 새끼. 산호는 욕을 중얼거리며 집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온몸의 근육들이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목을 돌리자 우드득 소리가 났다. 로봇처럼 삐걱거리며 산호는 집안을 한바탕 뒤집었다. 그러나 산호의 많지 않은 짐 중에서 지갑과 옷들만 사라진 채였다. 속옷 한 장 남기지 않고 모조리. 망연자실한 산호는 잠시 앉아있다가 다른 짐들을 살폈다. 노트북과 꺼진 핸드폰, 토익 교재들은 손도 대지 않은 듯 그 자리에 있었다.

제가 없는 사이에 산호가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산호는 이 창피한 팬티라도 벗을까 고민했지만 결국 참았다. 불편하고 수치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언제 박성경이 다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거지같은 팬티마저 벗고 아래를 드러낸 상태로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박성경이 해온 짓들을 보면 그럴 때 어떻게 반응할지 안 봐도 뻔했다.

산호는 대신 침대에 앉아 이불을 둘둘 감은 채 마음을 진정시켰다. 박성경은 곧 돌아올 것이다. 아마도 내 옷을 숨기러 갔겠지. 피곤이 덜 풀렸던 탓에 산호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산호는 틀렸다. 박성경은 금방 돌아오지 않았다. 푹 자고 일어난 산호가 시계를 봤을 때는 이미 새벽이었다. 그리고 몇 시간이 더 지나서도 돌아올 낌새가 없었다. 그리고 출출해진 산호는 부엌도 비어버린 것을 발견했다. 잔뜩 쟁여놓았던 라면이나 레토르트 식품 따위는 흔적도 없었다. 이건 또 무슨 꿍꿍이지. 냉장고 안도 비어있었다. 산호가 먹을 수 있는 것은 물 몇 병이 전부였다.

그렇게 사흘이 지났다. 박성경이 돌아오면 시원하게 욕이라도 퍼부으려 했던 산호의 의지가 힘없이 꺾였다. 배고픔이 너무 심해서 하루종일 먹고 싶은 음식을 떠올렸다. 피자, 치킨, 짜장면, 햄버거…. 도준형이 억지로 먹일 때는 그렇게 싫던 음식들이 간절해졌다. 굶으면 머리도 일을 안 한다더니. 산호는 식물처럼 말라 죽어갔다.

나흘째에 성경이 돌아왔다. 산호는 화를 낼 힘도 없어서 침대에 누운 채 물끄러미 성경을 바라보았다.

“잘 지냈어?”

“…….”

“팬티 잘 어울린다.”

“…….”

산호는 이불을 들어 제 다리를 가렸다.

“네 젖꼭지랑 같은 색이라 그걸로 골랐는데.”

“…….”

성경이 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치욕스럽다. 산호의 표정이 구겨졌다.

“별로야?”

“…그걸 말이라고 해?”

“그럼 벗지 그랬어.”

말이 안 통한다. 산호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성경이 코트를 벗고 소파에 앉았다. 산호는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고개를 돌리기도 귀찮았기 때문이다.

“내 옷이랑 지갑은 어쨌어?”

“글쎄.”

“줘.”

“야.”

“돌려줘.”

“네 마음대로 할 거면 왜 내 집에 들어왔어.”

“…뭐?”

“나는 너한테 잘 해주려고 하는데, 넌 왜 나한테 요구하는 게 그렇게 많아.”

산호가 몸을 일으켰다. 어지러워서 머리가 핑 돌았지만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성경은 그런 산호를 빤히 지켜보았다. 산호는 제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쥐었다. 성경의 표정에 살짝 비웃음이 걸렸다.

“그거 켜면 도준형이 바로 찾아올걸.”

“…….”

“전원을 꺼놨길래 그래도 뭘 좀 아는 줄 알았더니.”

“…….”

“걔네 부모님이 대부업 하시잖아. 사람 찾기가 제일 쉬울 텐데.”

“…….”

…아. 전원을 켜던 산호의 손에서 핸드폰이 미끄러졌다. 산호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박성경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다. 제가 도준형을 피하기 위해 휴학했다는 것을. 소름이 끼쳤다. 성경이 소파에서 일어나 천천히 침대로 다가왔다.

“야, 내가 도준형처럼 등신인 줄 알아?”

“…….”

“내가 네 남친이면 밖에 내보내지도 않았어.”

“…….”

“너 같이 엉덩이 가벼운 애를 뭘 믿고 밖에 내보내.”

“하….”

산호는 결심했다. 이불이라도 두른 채로 집을 나가 경찰을 찾아가자. 진작 그랬어야 했다. 적어도 자취방으로 돌아갈 수는 있을 것이다. 뺏긴 지갑은 잃어버린 셈 치고 체크카드는 다시 발급받으면 된다. 옷가지들은 어차피 그리 비싼 것도 아니었다. 산호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움켜쥐자 성경이 하하 웃었다.

“그거 들고 나가게? 밑은 다 벗고?”

“…….”

“그거야 네 자유지만…. 난 나가게 둘 생각이 없는데.”

“…싫,”

“너무 배은망덕하지 않아?”

성경이 돌아온 뒤로 산호는 뱃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배고픔도 문제였고 온 신경을 성경에게 기울이느라 점점 더 몸에 힘이 없어졌다. 간신히 현관문을 잡고 열었을 때, 성경은 손쉽게 산호를 잡아 소파 위에 내동댕이쳤다. 육중한 철문은 천천히 닫히고 삐리릭,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밖에서 들어오던 찬 공기가 다시 산호에게서 멀어졌다.

“네 마음대로 할 거면 왜 내 집에 들어왔어?”

“…뭐? 그건 네가 월세를,”

“나가고 싶을 때 나가는 곳이야, 내 집이? 나는 너한테 그래?”

성경의 표정이 싸늘했다. 산호는 오한이 들어 몸을 덜덜 떨었다. 성경은 산호를 끌고 다시 침대로 갔다. 산호의 눈앞이 잠시 점멸했다. 발을 헛디뎌 넘어지기 직전에 성경의 어깨에 코를 박았다. 쯧. 성경이 혀를 차며 산호를 벽에 기대앉게 했다.

“그나저나 배는 안 고파?”

“놔…아! 그만, 읏…!”

성경의 손이 망사 팬티를 젖히고 산호의 성기를 꺼내 쥔다. 힘없이 꺾인 산호의 목이 성경의 정욕을 자극했다. 산호의 생각처럼 별로 좋은 취향은 아니었다.

“배고프라고 혼자 뒀는데 그 한 마디를 안 하고 버티네.”

“하윽…. 비켜!”

“…배고프면 내 정액이라도 먹여줄까 했는데.”

“미친 새끼…!”

“맛이라도 볼래?”

준비도 없이 성경의 손가락이 산호의 구멍을 파고들었다. 파들파들 떠는 산호는 끅끅거리며 신음조차 제대로 뱉지 못했다.

“아! 손…가락, 빼….”

“안 먹기는 아깝잖아. 난 너 배고플까 봐 며칠 동안 부추랑 굴까지 챙겨 먹었는데.”

“흣…!”

“그거 알아? 부추랑 굴이 정액 양을 늘려준대.”

“하으…! 아, 으…!”

“배부를 때까지 먹여줄게. 좋지?”

“아! 놔, 아으…! 흣…!”

“넌 항상 잘 느껴서 좋아.”

“응, 아! 으….”

“며칠을 굶겼는데도 질질 싸네.”

얇은 망사 팬티는 산호의 프리컴으로 금세 젖어 엉망이 되었다. 오래 굶은 몸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성경의 손이 이끄는 대로 휘둘렸다. 산호는 곧 벽에 뒤통수를 박은 채 며칠 전처럼 억지로 성경의 성기를 빨았다. 정신이 흐릿해서 좋은 점도 있었다. 숨이 금방 차서 시야가 흐려졌고 입안은 깔깔해서 거대한 살덩이의 맛이 덜 느껴졌다. 미뢰들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이 이렇게 다행인 적이 없었다.

그 며칠간 박성경의 음침한 성벽은 한층 발전했는지 이번에는 목구멍 깊숙이 박아 넣고 싸지 않았다. 성경은 입안 가득 정액이 퍼지도록 산호의 혀끝에 귀두만 물린 채 길게 사정했다. 역겨운 맛은 둘째 치고 양이 많아서 산호가 혀를 조금만 움직여도 입 밖으로 삐져나와 턱을 타고 흘렀다. 망할. 산호는 앞으로 다시는 부추나 굴 따위를 먹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누군가 산호에게 세상에서 딱 두 가지를 없앨 수 있게 해준다면 산호는 망설이지 않고 부추와 굴을 고를 것이다. 젖은 입안에서 독한 비린내가 퍼진다.

잠깐 눈을 깜박이면 제 몸이 취한 자세가 멋대로 바뀌어 있었다. 배 밑에 베개와 이불을 깐 채 엉덩이 사이로 드나드는 살기둥을 느끼기도 했고, 숨이 막힐 것 같은 키스를 당하며 유두를 물어뜯기기도 했다. 산호는 제가 울고 있는 줄도 몰랐다. 어느 순간 외친 것은 도준형의 이름이었다. 살려줘. 제발 살려줘.

산호는 저를 짓누르던 몸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는 걸 느꼈다. 눈앞은 여전히 흐렸다. 방울방울 흘러내리는 눈물과 헐떡이는 숨 사이로 도준형의 냄새가 났다. 아니다. 이건 도준형의 냄새가 아니다. 도준형이 여기 있을 리가 없다. 그러면 이건 또 박성경의 악취미인가. 산호의 정신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 * *

준형은 만신창이가 된 유산호가 제 품에 안기자 기묘한 만족감이 들었다. 매일 꺼져있던 유산호의 핸드폰 기록을 빼내느라 아버지 몰래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게 다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유산호가 박성경의 집에 있다는 걸 알았을 때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오피스텔 앞에 도착하자 조금 이성을 찾을 수 있었다.

둘이 붙어먹은 거라면 둘 다 가만두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속이 풀릴 때까지 박성경을 패고 유산호는 발목 하나를 아작내서 가둬놓기라도 해야지. 준형은 이렇게까지 화가 났는데도 유산호에게는 관대해지는 스스로가 신기했다. 그러니까 이게 사랑이 아닐 리가 없다.

자주 놀러 가도 매번 까먹어서 석준이 대신 누르던 박성경의 집 비밀번호가 저도 놀랄 정도로 또렷하게 떠올랐다. 유산호를 찾으러 가는 걸음 걸음이 모두 사랑이다. 준형은 그렇게 생각했다.

문을 열고 들어선 박성경의 오피스텔은 기분 나쁜 공기가 가득했다. 사랑을 하면 육감이 발달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준형은 박성경의 벗은 등 옆으로 달랑거리는 허연 다리를 보았다. 간신히 가라앉혔던 분노가 다시 치솟았다. 죽여버릴까. 머리가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준형의 손이 성경의 뒷목을 잡았다. 그대로 테이블이 있는 쪽으로 던져버리고 달려가 발로 박성경의 배를 걷어찼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테이블 위에 놓인 유리 재떨이로 박성경의 머리를 몇 번 더 내려쳤다.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성경이 미처 반항할 새도 없었다. 준형의 폭력에는 망설임이 없다. 대가리라도 깨져서 죽었으면 더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이 준형의 머리를 채웠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가 묻어나올 때쯤 준형은 헉헉대며 재떨이를 내려놓았다.

지금쯤이면 유산호도 저를 봤을 텐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 겁이 많아서 소리라도 질렀을 텐데. 준형은 의아함에 고개를 돌렸다. 다리를 활짝 벌린 채 흰 거품이 질척하게 묻은 구멍을 빠끔거리는 유산호가 보였다. 준형은 조금 핼쑥해진 유산호의 몸을 일으켜 안았다. 환자처럼 떨리는 팔다리가 그대로 준형의 품에 쏟아졌다. 웅얼거리는 유산호의 목소리가 그제야 준형의 귓가로 파고들었다.

살려줘…. 준형…아…. 도…준형…. 그 목소리를 듣자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렸다. 어쩌면 박성경 덕분에 곧 유산호가 완전히 제 것이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건 준형이 믿는 사랑의 육감이었다. 준형은 산호를 용서하기로 했다. 제 이름을 부르는 애처로운 목소리가 마음에 쏙 들었기 때문이다.

“산호야, 유산호.”

“…흐으….”

“괜찮아?”

“으….”

“그러게 내가….”

아무한테나 벌려주지 말라고 했잖아. 내 말을 안 들으니까 이 꼴이 났지. 준형은 뒷말을 삼키며 산호의 이마를 손으로 쓸었다. 제가 없다고 고작 열흘 사이에 이렇게 됐을 줄은 몰랐다. 준형은 산호를 들어 안았다. 소중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침대에 눕히고 흘끗 박성경을 봤다. 정신을 잃은 채 쓰러진 모습이 꼴사나웠다. 검붉은 피가 바닥에도 튀어 있었으나 준형은 금방 시선을 거뒀다.

“여보세요. 네, 사람이 쓰러져서요. 구급차가 필요할 것 같은데요. 네, …네. 알겠습니다. 여기 주소가….”

전화를 끊은 준형은 산호를 업고 성경의 집을 나섰다. 구급차는 준형의 생각보다 빠르게 도착했다. 그냥 택시를 탈까 고민하던 차에 도착한 구급차에 유산호를 태우면서 준형은 생각에 잠겼다. 일단 유산호를 병원에 데려다 놓고…. 그다음엔, 어떻게 할까. 준형의 표정이 사뭇 심각해 보여서 구급차 안은 조용했다.

* * *

산호가 깨어난 것은 꼬박 하루가 지난 뒤였다. 뻑뻑한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마자 보인 것은 간호사에게 성질을 부리는 도준형이었다. 산호는 멍한 머리로 애써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산호가 깨어난 것을 본 간호사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유산호 환자분 깨어나셨네요.”

“…….”

죄 없는 간호사를 한 번 더 노려본 도준형이 침대로 다가왔다. 도준형의 무례한 행태에 창피해진 것은 산호였다. 진상에게 잘못 걸렸다는 듯 굳은 얼굴을 하던 간호사는 한숨을 내쉬며 병실을 나갔다.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개인 병실. 산호는 도준형이 제게 채운 족쇄가 또 늘어난 기분이 들었다.

“…나 왜 병원에 있어?”

“기억 안 나?”

“…….”

“그리고 지금 네가 나한테 할 말은 그게 아니지, 산호야.”

“…….”

“왜 그랬어?”

“…….”

“박성경이랑 붙어먹는 게 그렇게 좋았어?”

“아니야!”

산호가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준형의 목소리에서 분노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산호는 잔뜩 겁을 먹었다.

“나…. 내가, 내가 그런 거 아니야. 그렇게 안 하면 가만히 안 둔다고 했어. 자기는 네 친구니까 내 말은 안 믿을 거라고, 흐윽….”

거짓말이 술술 흘러나왔다. 더듬더듬 내뱉은 핑계는 의외로 그럴싸했다. 산호는 본능적으로 준형의 분노가 방향을 바꾼 것을 알 수 있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도준형이 박성경을 어떻게 할지 몰라서 두려웠다. 그러나 그 분노가 모조리 저에게만 쏟아지는 것은 더 두려웠다.

머릿속에서 생각들이 제멋대로 뒤엉켰다. 박성경은 나쁜 새끼다. 도준형에게 무슨 짓을 당해도 싸다. 산호는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하지만 도준형의 핏발 선 눈을 보면 뒷일이 걱정된다. 산호의 겁은 끝까지 산호의 입을 막았다. 산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자 준형이 다정한 손으로 그것을 닦았다.

“알았으니까 울지 마.”

“흡, 흐어…. 흑…!”

“그래. 일단 좀 더 누워서 쉬어.”

산호는 그 말에 안도하는 자신이 불쌍하고 역겨웠다. 도준형이 병실을 나갔고 산호는 눈물을 흘리며 다시 잠을 청했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은 모두 꿈이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잠든 산호는 내내 악몽을 꾸었다.

준형은 스스로에게 당황했다. 유산호가 눈을 뜨면 무슨 말을 지껄이든 가만두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준형은 눈을 뜨자마자 제 눈치를 살피며 거짓말만 내뱉는 유산호가 사랑스러워서 무슨 말을 하든 믿어주고 싶었다. 유산호가 도망치려던 것을 모두 박성경에게 들어 알고 있으면서도, 유산호의 말만을 믿어주고 싶었다. 사랑을 하면 사람이 멍청해진다더니. 준형은 스스로가 한심했지만 그런 자신이 싫지 않았다.

* * *

산호는 병원에 사흘 동안 있었다. 돌아온 자취방은 살림살이가 죄다 부서지거나 엉망으로 흩어진 것을 빼면 바뀐 게 없었다. 여전히 비좁고 어둑했다. 준형은 산호의 가방을 대충 던져놓고는 산호를 끌고 나왔다.

“역시 저기선 못 살겠다, 그치?”

“…응.”

“당분간 내 방에 있어.”

“…고마워.”

“…….”

“…….”

“진짜 고마운 거 맞아?”

산호는 애써 웃어 보였으나 준형은 무표정했다. 사실은 박성경에 대해 묻고 싶었다. 걔는 어떻게 됐냐고. 네가 나를 데리고 병원에 갔을 때,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냐고. 그러나 산호는 진실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오랜만에 보는 도준형의 얼굴은 제가 처음 반했던 순간처럼 빛이 났다. 그린 것처럼 쭉 뻗은 눈썹이나 잘생긴 콧대, 저열한 단어나 욕은 하나도 내뱉지 않을 것처럼 보기 좋은 입술. 박성경의 집에서 내내 산호는 준형을 그리워했다. 억울하고 분했지만 산호는 제 마음을 인정해야 했다. 멍청한 유산호는 아직도 도준형을 사랑한다.

눈물이 왈칵 터질 것 같아서 산호는 눈을 감았다. 부모님이 보고 싶었다. 다 컸다고 뒷전으로 여길 때는 언제고. 하지만 가족의 존재란 그런 거였으니까.

그러나 산호는 한 달이 넘도록 준형의 집에서 얌전히 시간을 보냈다. 준형은 하루종일 산호와 뒹굴기도 했고 며칠씩 집을 비우기도 했다. 밖에 나가지 말라는 말과 함께.

“…응. 근데 너희 부모님은 안 오셔?”

“각자 애인 집에서 살아서 여긴 잘 안 와.”

“…아. 미안.”

“뭐가?”

준형은 산호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사과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산호는 할 말이 없어졌다. 너는 어디 가? 또 며칠 뒤에 올 거야? 누굴 만나? 그것도 나는 알면 안 돼? 묻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산호는 전부 참았다. 그런 건 준형의 기분이 좋을 때나 흘러가듯이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준형의 기분은 산호가 짐작할 수 없도록 자주 좋았다 나빠졌기 때문에 산호는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곧 신학기가 다가오는 2월 말이었다. 오랜만에 만족할만 한 섹스 후 널브러진 준형을 보며 산호는 몇 주 동안 고민하던 말을 꺼냈다. 있잖아. 왜. 나 부모님 집에 좀 다녀와도 돼? 조심스러운 산호의 말에 준형은 이상할 정도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다녀와도 돼?”

“…말을 왜 그렇게 해, 산호야.”

“…….”

“내가 박성경이야? 꼭 내가 널 가두기라도 한다는 것처럼 들리네.”

“난 그게 아니라…. …미안.”

“기분 좀 별로다.”

“미안. 나는 그런 뜻이 아니라,”

“미안하면 나 펠라 해줘. 입에 싸고 싶어.”

기다렸다는 듯 뻔뻔한 요구를 쏟아내는 도준형은 거침이 없었다. 산호는 도준형의 눈치를 보며 거대한 성기를 입에 물었다. 산호는 그날도 밤새도록 도준형의 좆을 받아냈다. 언제부턴가 그런 관계에도 고통은 없었다. 오히려 산호를 굴복시키는 쾌감만이 가득해서 다른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다. 산호는 짝사랑이 끝나더라도 준형을 끊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 * *

오랜만에 보는 엄마는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짧은 단발머리, 회색 정장과 피곤에 지친 얼굴, 그리고 잔소리까지. 산호는 어쩐지 눈물 나게 반가웠다.

“너는 올 거면 미리미리 연락을 좀 하지. 요즘 회사도 바빠 죽겠는데.”

“…아빠는?”

“출장. 왜 밥을 그렇게 깨작거려? 먹기 싫으면 젓가락 놔.”

“…엄마.”

“왜?”

“나 휴학하면 안 돼?”

“네 등록금은 땅 파서 나오는 줄 알지? 나랑 네 아빠 정년 전에 졸업해서 취업할 생각을 해도 빠듯한데 철딱서니 없는 소리 좀 그만해.”

엄마의 잔소리가 반가웠던 것은 채 십 분도 가지 않았다. 피곤이 덕지덕지 묻은 엄마의 얼굴에 대고 투정이나 부리는 어린애가 된 기분이었다. 산호는 웅얼거리며 변명을 주워 삼켰다.

“아니…. 휴학하고 자격증도 좀 따고, 대외 활동도 하고….”

“건강 관리나 똑바로 해, 이것아. 저번에도 네 친구 전화 받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니?”

“무슨…. 누구?”

“말이 나온 김에 좀 묻자. 너는 건강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니? 네 대학 친구가 자취방에서 너 쓰러졌다고 연락했었어. 복통이 심하면 바로 병원엘 가야지 장염이라니. 이그, 미련퉁아.”

산호의 머릿속이 다시 표백되었다. 흔쾌히 집에 다녀오라던 도준형의 얼굴이 불쑥 떠오르자 심장이 또 빠르게 뛰었다. 장염이라니. 이런 거짓말을 할 사람은 도준형밖에 없다. 그나마 도준형이 엄마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장염?”

“너, 그 친구가 대신 연락 안 했으면 엄마한테 말도 안 할 생각이었지?”

“…….”

“엄마가 아무리 바빠도 그런 것까지 모르면 되겠어? 이러려고 자취하는 거면 차라리 집으로 들어와서 통학,”

“내가 아팠다는데 엄마는 할 말이 그것밖에 없어?”

산호의 섭섭함과 억울함이 엉뚱하게 엄마에게로 튀었다. 이게 아닌데. 괜스레 젓가락으로 밥그릇을 뒤적거렸다.

“얘 좀 봐? 왜 엄마한테 짜증이야. 성인이면 네 몸 관리는 네가 알아서 해야지.”

“그래서 엄마한테 말 안 하고 내가 알아서 한 거 잖아!”

“병원 갈 일을 만들지 말란 소리지. 너 오늘 유난히 엄마한테 말대꾸가 심하다?”

“…….”

“…그 친구한테 고마운 줄이나 알아. 그래도 대학에서 그런 친구라도 하나 사귀었으니 맘은 좀 놓이네.”

산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입안에서 씹던 멸치 볶음이 까끌까끌하게 느껴졌다. 젓가락을 식탁에 탁 내려놓자 엄마가 도끼눈을 떴다.

“너….”

“엄마가 뭘 알아!”

“뭐?”

“엄마가 뭘 그렇게 잘 아냐고!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관심이 있었으면 진작…!”

산호는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진작 뭐? 엄마가 물어도 솔직하게 답할 자신은 없다. 그런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산호는 어안이 벙벙한 엄마가 저를 잡기 전에 집을 나와서 숨이 차도록 달렸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산호의 뺨을 때린다. 눈물들이 그대로 긴 자국을 남기며 흘러 떨어졌다.

최악이다. 도준형이 내 인생을 망칠수록 내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은 도준형밖에 남지 않는다. 뫼비우스의 띠 같다.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산호는 홧김에 택시를 잡아타고 경기도에서 준형의 집이 있는 한남동까지 갔다. 준형이 선심 쓰듯 던져준 준형의 카드가 삼만 원이 넘는 요금을 계산했다. 정말로 최악이었다.

* * *

성경이 어떻게 됐는지 산호가 알게 된 것은 새 학기였다. 날씨는 여전히 싸늘해서 봄이 다가오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준형의 뜻에 따라 산호의 휴학은 없던 일이 되었고 산호는 석준과 동진을 다시 만났다. 분위기는 전과 달랐다. 석준과 동진은 전보다 더 준형의 눈치를 보고 있었고 준형이 말을 한 마디 할 때마다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둘은 뭔가 알고 있는 눈치였다.

산호는 한참이나 기회를 기다렸지만 수강 정정 기간이 끝난 후에야 그럴 기회가 생겼다. 준형이 산호를 혼자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적처럼 준형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성경에 대해 물어보려던 산호는 동진의 말을 듣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야, 산호 넌 알아? 둘이 왜…. 그랬는지?”

“…둘이 싸웠어?”

“모르면 됐고.”

동진이 준형을 무서워한다고 해서 산호까지 무서워하는 것은 아니다. 준형이 없을 때면 부러움과 멸시가 섞인 기묘한 눈으로 산호를 본다. 마치 네가 준형에게 뭘 해주는지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산호는 그게 저의 기우라고 애써 믿었다. 대화를 끊어버린 동진에게 산호가 다시 물었다.

“싸워서 같이 안 다니기로 한 거야?”

“아, 알 거 없다고. 그냥 너도 입조심이나 해.”

“야야, 동진아. 쟤도 알아야지. 눈치 없게 굴다가 준형이 성질 긁으면….”

“…….”

동진은 떨떠름한 얼굴로 석준에게 턱짓을 했다. 네가 말하든가. 석준의 입에서 나온 얘기들은 산호의 상상보다 더 심했다.

아니,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준형이가 박성경을 졸라 팼다는 거야. …뭔 이유? 거야 우리도 모르지. 근데 걔네 부모님이 경찰에 신고해서 난리도 아니었어. 우리도 나중에 알았는데 한쪽 눈이 완전히 끽. 가버렸대. 내가 부모여도 빡쳤을 거 같긴 한데…. 아니, 근데 어떻게 팼길래 눈이 병신이 됐대냐. 어? 아, 준형이 부모님이 그래서 박성경한테 합의금 엄청 많이 줬대. 아니, 직접 들은 건 아니고…. 내가 미쳤냐? 박성경은 휴학하고 어디 외국으로 날랐다는데 연락은 안 돼. 너 같으면 하겠냐. 아무튼 너도 입 조심해. 저번에 어떤 새끼가 준형이한테 박성경 얘기 꺼냈다가 맞을 뻔….

산호는 동진의 말을 듣다 말고 구역질을 하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변기를 붙잡고 토악질을 하는데 환청이 들리는 것 같았다. 다 네 탓이야. 성경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먹은 것을 전부 게워내고 세면대 앞으로 나왔을 때 산호는 저를 기다리는 준형과 마주쳤다. 세상은 잔혹했다.

준형의 손이 산호의 볼을 톡 건드렸다. 산호가 몸을 떨며 물었다. 다 쉬어버린 목소리가 애처로웠다.

“왜…. 왜 그렇게까지 했어?”

“글쎄…. 내가 왜 그랬을까.”

“…….”

“모르겠어, 산호야?”

“…….”

“난 네가 뭘 하든 상관없어. 그런데…. 내 허락도 없이 도망치는 건 용서 못해.”

“…어?”

“네가 가끔 거짓말을 하는 것 정도는 귀엽게 봐줄 수 있다고.”

“…….”

“알겠어?”

준형의 손가락이 다시 산호의 볼을 톡톡 쳤다. 도준형은 산호가 내뱉은 거짓 핑계를 이미 알고 있었다. 산호의 말을 믿지 않았는데도 그것을 빌미로 박성경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말이었다. 파랗게 질린 산호의 얼굴을 보며 준형이 환하게 웃었다.

“앞으론 말 잘 들을 거지?”

산호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서워. 무섭다. 산호는 도준형이 진심으로 무서웠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박성경이 그렇게 된 것은 제 탓도 있었다. 도준형이 미친놈이라는 걸 알면서도, 박성경이 심한 꼴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면서…. 그런데도 도준형의 화가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 싫어서…. 도준형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였다. 아무리 변명을 하려 해도 다른 이유는 없었다.

산호가 눈을 질끈 감았다. 준형은 즐거운 듯 웃으며 산호에게 키스를 했다. 크고 체온이 높아서 존재감이 뚜렷한 준형의 손이 산호의 티셔츠를 들추고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산호는 반항의 의지를 잃고 얌전히 순응했다. 방금 전까지 토악질을 하던 화장실 칸막이 안으로 끌려들어간 산호는 한참 동안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한쪽 다리를 준형의 허리에 감은 채로 박히던 산호는 그날 두 번째 도망을 결심했다. 이대로 도준형의 곁에 있다간 제가 완전히 변해버릴 것 같았다. 눈먼 사랑에 미쳐 도준형에게 구걸을 하고 말 것이다. 제 주변의 모든 것들이 도준형의 손에 부서지면 산호는 제 몸마저 도준형이 부술 수 있게 매달리고 말 것이다. 상상만 해도 비참했다. 도망쳐야 한다. 도준형의 곁에 더 있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런 산호의 마음을 비웃듯 산호의 몸은 준형의 손안에서 완전히 녹아 쾌락에 몸부림쳤다.

* * *

하지만 산호의 두 번째 도망은 조금 더 빨리 꼬리를 밟혔다. 초조한 마음이 문제였을까. 산호의 도망 계획은 그 시작부터 고스란히 준형에게 들켜버렸다. 산호의 경황 없는 태도가 의심을 불러일으킨 탓도 있을 것이다. 이유가 뭐가 됐든 들켰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했다. 그리고 준형은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성격답게 산호의 도망을 막았다. 아주 쉽고 물리적인 방법이었다.

“으읍! 으으읍!”

“나도 별로 이러고 싶진 않았어.”

“…읍!”

“수건 꽉 물어. 좀 아플 거야.”

준형의 발이 산호의 발목을 가늠하듯 밟아보았다. 산호가 겁에 질린 눈으로 준형을 본다. 준형의 다리를 붙잡았다가 양손을 모아 빌어댄다. 생으로 발목을 부러뜨리는 짓은 역시 준형도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그냥 두면 유산호는 제게서 또 도망치고 말 것이다.

“그러게 내 말을 좀 잘 듣지 그랬어, 산호야.”

“…으으.”

“넌 왜 항상 나를 화나게 해?”

“…흐읍….”

나는 너를 이렇게 사랑하는데. 준형은 수줍은 고백을 마음속에 묻어버리고 산호의 발목을 밟은 발에 힘을 실었다. 직접 들려주기에는 너무 간지러운 말이었다. 산호의 얼굴이 고통으로 하얗게 일그러졌다. 축 늘어진 산호를 내려다보며 확실하게 뼈가 나가도록 발목을 으깨면서 준형은 슬퍼졌다. 나를 먼저 좋아한 건 저였으면서. 내가 이렇게 너를 사랑하는데, 왜 너는. 왜 유산호는 점점 멀어지는지.

준형은 기절한 산호의 입에 물렸던 수건을 빼내고 벌어진 아랫입술을 한번 빨았다. 피가 터진 입술에서 비린 맛이 났다. 꺾인 발목이 애처롭다. 유산호를 사랑하게 된 후 벌써 두 번이나 구급차를 불렀다. 준형이 신경 써서 으깬 덕분에 산호의 발목뼈는 완전히 골절되었다. 주변의 뼈까지 으스러져 깁스를 꽤 오래 해야 한다는 의사의 진단이 내려졌다. 준형은 안도했다. 유산호의 발목을 부러뜨리는 짓을 자주 하지는 않아도 될 것 같아서였다. 마음이 놓이자 불쑥 원망이 들었다. 내 말만 잘 들으면 될 텐데. 유산호는 왜. 준형의 머릿속에서 의문이 떠나질 않았다.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깁스를 한 제 왼쪽 발목을 보며 산호는 완전히 체념했다. 도망이라니. 건방지고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자신은 도준형이 제게 질리기 전까지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도준형은 왜 산호의 발목을 부러뜨리면서까지 산호를 붙잡는 것일까. 산호의 썩어가는 마음에 희망은 지치지도 않고 싹을 틔웠다. 남은 것은 증오로 변한 풋사랑의 찌꺼기뿐인데도 산호는 자꾸 의문이 들었다. 그 의문을 해결하기 전까지는 도준형을 떠나 도망치는 데에 성공한다고 해도 영영 도준형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퇴원한 산호는 도준형의 부축을 받으며 도준형의 집으로 돌아갔다. 도준형은 왜. 사흘에 한 번 병원을 가고, 꼬박꼬박 약을 타 먹는다. 산호가 약을 빼먹으면 준형이 귀신같이 알고 나서서 약을 먹였다. 도준형은 왜. 산호의 의문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병원에 갈 때는 도준형이 꼭 목발을 챙겨 들고 따라온다. 도준형은 왜.

“뼈가 많이 붙었네요.”

“…깁스는 언제 풀 수 있을까요?”

“아직 한두 달은 더 지나야겠는데요.”

의사의 말에 준형이 살짝 표정을 찌푸렸다. 산호는 가끔 준형이 제 발목을 밟았던 게 꿈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극정성으로 산호를 보살피는 모습을 보면 헷갈릴 만도 했다. 도준형은 왜 나에게. 산호는 계속 그 의문에 매달렸다. 사랑은 이토록 한심했다.

준형의 머릿속은 깁스를 푼 뒤에 또 유산호의 발목을 으깨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괴로움이 가득했다. 차라리 유산호가 이대로 쭉 발목 한쪽을 못 쓰게 되면 차라리 좋을 것 같았다. 기적이라도 일어나서 유산호의 발목이 몇 달 후에도 깁스를 풀지 못하면 좋겠다. 준형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면 유산호는 제 곁에서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짜릿했다. 저 없이 아무것도 못하는 유산호를 떠올리기만 해도 준형은 발기했다.

고난 끝에 영광 있으리. 준형은 아버지가 채무자들을 만나러 갈 때마다 입버릇처럼 뱉던 가훈을 떠올렸다. 고통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준형은 유산호를 완전히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그 과정이 조금 마음 아픈 것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사랑은 이토록 위대하다.

준형의 몸이 산호의 몸을 지탱한다. 두 사람과는 관계없는 봄빛들로 가득한 거리를 한 발짝씩 내디딜 때마다 준형의 마음은 충만해졌고 산호의 마음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버석해졌다.

“춥다.”

“…오늘 따뜻하지 않아?”

준형의 밑도 끝도 없는 말에 산호가 의아한 듯 대꾸했다. 준형은 산호의 허리를 더 끌어안았다. 손바닥이 산호의 옆구리를 슥슥 문지른다. 산호의 표정은 여전히 의아했다. 별 것 아닌 행동에도 얼굴을 붉히던 유산호가 사라졌다. 이전 같았다면 얼굴을 붉혔을 텐데 유산호는 가만히 속눈썹을 내리깐다. 준형의 기분은 여전히 추웠다.

산호는 준형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요즘 같아서는 정말 위험했다. 도준형은 산호의 발목을 똑 부러뜨린 뒤로는 내내 신경이 예민했다. 평소에는 산호가 건드리면 깨지는 유리컵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고, 섹스를 하는 와중에도 산호의 반응을 살폈다. 집요하게 몰아붙여서 결국 좋다는 말을 들은 후에야 산호를 놔주었다. 산호가 아무리 눈치가 없다고 해도 준형의 심사가 뒤틀렸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멍하니 허공을 보다가 고개를 돌리면 산호를 빤히 보고 있던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왜 저러지. 도준형은 왜. 왜 나를. 산호의 머릿속에서 멍청한 희망과 두려움이 엎치락뒤치락 싸움을 했다. 아니면 내가 또 뭘 잘못했나. 내가 도준형의 심기를 거슬렀나. 그러나 산호에게 화를 내는 일이 현저히 줄어든 것을 보면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준형이 화를 낼 때는 산호가 스킨쉽을 거부할 때뿐이었다. 그 외에는 이래도 저래도 관대했다.

“왜 또. 하기 싫어?”

“…너는 내 몸이 왜 좋아?”

절대로 유산호에게 저딴 소리를 들을 만큼 발정 난 상태는 아니었다.

“너 좋아하는 애들도 많았잖아. 그런데 왜,”

“뭐라고?”

준형도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사랑은 위대하며 동시에 개좆 같다. 유산호가 왜 저를 보며 그렇게 불쌍한 개새끼 같은 표정을 지어댔는지 알 것도 같았다. 저를 보는 유산호의 눈에 더 이상 전과 같은 열망이 없었다. 준형은 그걸 깨달았을 때 아주 마음이 아팠다.

이기적인 유산호. 못된 유산호. 제가 먼저 사람을 홀려놓고 이러는 법은 없어야 한다. 준형이 다가갈수록 유산호는 멀어졌다. 준형이 유산호의 몸에 집착하게 된 것은 그런 이유가 있었다.

“아…. 너 아직도 그런 거 신경 써?”

“…….”

“그래서 이러는 거야?”

“…….”

준형의 얼굴에 비스듬히 걸린 냉소가 장난스럽게 빛났다. 저런 얼굴을 한 도준형은 날카로운 말을 쏟아내곤 한다. 산호는 잠시 숨을 참았다. 저런 표정을 보면 여전히 가슴이 아팠다. 이런 마음은 뭐라고 부르는 걸까. 산호의 사랑은 억지로 살해당해서 남은 것이 시체뿐인데 시체가 되어서도 계속 그 살인자를 사랑하는 것 같았다. 한심하고 비참해서 입 밖으로 꺼낼 수도 없는 마음. 세상의 수많은 단어 중에 이런 마음을 뜻하는 단어가 하나도 없다니. 믿을 수 없다. 산호는 이름조차 없는 제 마음이 가엾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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