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자각
주말의 강남역은 어딜 가나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유산호 없이 오랜만에 넷이서 가지는 술자리가 준형은 반가웠다. 유산호가 요즘 들어 자꾸 숨 막히게 군다. 자꾸 기어오르고 툭하면 삐친다. 아직도 저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귀찮고 거슬렸다.
그러나 유산호와의 섹스는 최고였다. 처음엔 아파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던 주제에 이제는 제법 허리에 다리를 감고 채근하기도 한다. 갈수록 물이 올라 질리지도 않았다. 그래서 웬만한 앙탈은 받아주고 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준형의 성격으로는 지금까지 참아준 것도 용했다. 석준과 시시한 장난을 치면서 골목 안쪽을 걷는 준형의 기분은 동물원을 탈출한 사자처럼 상쾌했다.
“아 나 담배 사야 된다. 편의점 좀.”
“어, 나도. 준형이 너는?”
준형은 대답 대신 후드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흔들어 보였다. 몇 발짝 뒤에서 걸어오던 성경이 준형의 옆에 멈춰 섰다. 성경은 석준과 동진이 편의점으로 들어가자 보고 있던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고 준형을 보았다. 그리고 아주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마치 잊었던 사실을 지금 기억해낸 것처럼.
“유산호 말인데,”
“…어. 걔 왜?”
“걔 존나 걸레 같더라.”
“뭐?”
“스스로 엉덩이 벌리고 박아달라고 하던데. 허리도 잘 흔들고.”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지껄이는 박성경의 목소리가 유난히 거슬렸다. 유산호가 박성경이랑 붙어먹었다고? 준형의 기분이 순식간에 좆 같아졌다.
“네가 왜 계속 데리고 다니는지 알 것 같아.”
“…….”
“귀엽더라.”
그렇지 않아도 유산호는 갈수록 변하고 있었다. 준형은 그게 제 덕이라 생각했다. 묘한 색기가 농익어서 무른 복숭아즙처럼 질질 흘러 나와 사람을 자꾸 안달 나게 했다. 싫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았다. 조금만 만져도 알아서 다리를 벌리며 안겨 오는 게.
그러나 유산호는 자꾸 준형의 신경을 긁었다. 밤마다 물어뜯어 붉게 터진 입술과 대조적으로 파리해진 안색은 목련 같아서 준형은 자주 산호를 꺾고 싶었다. 그대로 꺾어서 제 방에 숨겨놓고 매일 밤새도록 혀로 핥고 싶었다. 멍이 잘 드는 산호의 몸은 대체로 희고 건조했으나 주무를 때마다 분홍빛으로 물드는 엉덩이 사이는 언제나 축축했다.
준형이 그렇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그걸 저만 알았다면 흡족했을 텐데. 그 사이에 박성경한테 매달렸다고. 산호는 자꾸 준형의 인내심을 시험했다. 준형은 왜 자기가 이렇게까지 분노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준형은 짜증 섞인 얼굴로 말했다.
“야, 나 먼저 간다. 너네끼리 마셔.”
“…그래.”
성경은 이유를 묻지도 않고 담백하게 대답했다. 준형은 택시를 잡아타고 유산호의 집으로 향했다.
* * *
산호는 어쩐 일인지 저를 부르지 않은 준형 때문에 한껏 우울한 상태였다.
[오늘은 오지 마]
[왜? 무슨 일 있어?]
[ㄴㄴ애들이랑 넷이 보기로 함]
[알겠어. 재밌게 놀아]
낮에 그렇게 성의 없는 문자를 하고는 쭉 아무 연락이 없었다. 산호는 갑자기 조용해진 자신의 주변이 초조했다. 자신이 없는 곳에서도 웃고 있을 도준형이, 새삼 멀게 느껴졌다. 원래 그랬던 것처럼. 산호는 초조함을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섰다. 발길이 닿는 대로 걷다가 도착한 곳은 학교였다. 갈 곳이 없었다. 요즘은 늘 준형의 집에만 갔었기 때문에.
저도 모르는 사이에 길들여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심하고 바보 같았다. 시작부터 잘못됐다. 산호는 준형에게 처음부터 쉬운 상대였다. 한번 땅을 파고든 생각은 멈추지 않고 산호를 괴롭혔다. 캠퍼스를 걷는 사람들 중에 산호 자신이 제일 불쌍한 것 같았다. 제가 한심한 탓도 있었지만 모든 것이 제 탓만은 아니었다.
사실은 모르겠다. 도준형이 시키는 대로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굴었던 것은 자신이었다. 하지만…. 산호의 마음을 알면서 이용하는 도준형도 나쁘다. 아닌가. 나쁜가. 산호는 생각에 잠긴 채 하릴없이 걸었다. 도서관 건물을 지나 경영대 건물과 식당을 지나고 잔디밭을 빙 돌아 기숙사 건물 앞에 도착해서야 걸음을 멈췄다. 준형만으로도 복잡한 머릿속에 담배 연기를 뿜던 성경이 툭 끼어들었다. 금연 구역임에도 당당하게 담배를 피우던 성경이 떠오른 것은 누군가가 그 자리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심코 시선을 돌린 산호의 몸이 굳었다.
윤서영. 그 여자였다. 손가락 사이에 가느다란 담배를 끼운 채 웃으면서 통화를 하는 모습은 참 행복해 보였다.
“걱정 마, 걱정 마. 잘 되면 언니가 거하게 한 턱 낸다. 아 근데 뭐 입고 가지? 어? 아니, 나 소개팅은 처음이라 모르겠네. …그럴까? 그래, 그럼,”
“저기요.”
여자의 입에서 소개팅이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 산호는 저도 모르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야, 잠깐만. 누가 말 걸어서. …뭐야?”
“저 아시죠. 준형이 친구요.”
“…아, 저번에 봤던 그…. 근데 왜?”
“남친도 있는데 소개팅은 좀 아니지 않아요?”
“뭐라는 거야….”
“도준형은 그쪽한테….”
“뭐? 도준형이 그래? 내가 지 여친이라고?”
“…네?”
“그 새끼가 돌았나 진짜…. 별 거지 같은 소릴 다 듣네. 걔가 왜 내 남친이야. 친구인 것도 창피한데. 재수 털리게 그 새낄 왜 나한테 갖다 붙여. 또 그딴 소리 하고 다니면 내 손에 뒤진다고 전해줘.”
“…그럼 준형이 여자 친구는….”
“너 걔 친구라며. 근데 걔 모쏠인 것도 몰라? …보아하니 친구랍시고 뜯어먹히기만 하는 관계 같은데.”
서영의 말에 산호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서영이 의도한 뜻은 그게 아니겠지만 어쨌든 산호가 도준형에게 여기저기를 뜯어먹히는 건 맞았다. 산호가 당황한 얼굴로 입만 벙긋거리자 서영은 담배를 담벼락에 비벼껐다.
“하여간 남자들은 한심해. 등신 취급받으면서도 왜 그러고 살지….”
서영은 산호가 들으란 듯 혼잣말을 뱉고 자리를 떴다. 산호는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충격에 정신이 얼떨떨했다. 서영이 남긴 말들이 산호의 마음을 사방에서 찔렀다. 산호는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계속해서 저 사람을 부러워했었다. 절대로 내 손에 잡혀주지 않던 도준형. 그런 도준형을 가진 사람이라 생각해서 부러워하고 부러워하다, 졸렬한 질투에 혼자 눈물을 짜낸 밤이 손에 꼽을 수도 없었다. 언제나 도준형의 앞에서는 작아지는 저와 달리 서영은 당당해보였다. 그게 사랑을 가진 자의 여유라고 생각했는데. 산호는 어디든 숨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다.
산호는 비틀거리며 기숙사 건물을 지나쳤다. 충격이 가시자 산호에게는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도준형은 왜 나한테 거짓말을 했을까. 모쏠이라니. 그런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다. 그리고 한 번이라도 도준형과 자본 사람이라면 그 말을 믿을 수는 없을 것이다. 도준형은 왜 내게 여친이 있다고 거짓말을 했을까.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생각들은 전부 처참했다. 내가 좋아한다고 할까 봐? 사귀자고 매달릴까 봐? 귀찮게 굴까 봐? 그럼 그동안은 왜 나랑 섹스를 했던 걸까. 어떤 식으로 생각을 해봐도 결론은 잔인했다.
* * *
어둡고 좁은 자취방 앞에서 산호는 한참을 서성거렸다. 마음이 너무 쓰라려서 어디로든 달려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싶기도 했고 그대로 한강에라도 빠져 죽고 싶었다. 손에 쥔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박성경. 산호는 핸드폰을 꺼버렸다. 그게 산호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용기였다. 진동이 울렸을 때 산호가 떠올린 이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준형이어서, 산호도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동안 산호가 가지고 있었던 미묘한 망설임과 굴종, 불안들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멍청한 짝사랑을 두들겨 팼다. 차라리 윤서영이 진짜로 도준형의 여자 친구였다면 이렇게까지 비참하지는 않았을 텐데.
산호는 슬프고 부끄러워서 이대로 증발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산호는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었고 다리가 아파올 때쯤에는 집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익숙한 향기가 저를 반기자 다시 심장이 뛰었다. 도준형의 향수 냄새였다. 가까이 가면 그 차가움에 질식해 죽을 것 같은 냄새. 산호는 준형이 먼저 찾아왔다는 사실에 또 속절없이 설레고 말았지만 달콤한 착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디 갔다 오냐?”
“그냥 좀….”
준형의 목소리가 유난히 싸늘했다. 산호의 본능이 위험을 감지했다. 멈칫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산호의 팔을 성큼성큼 다가온 준형이 낚아챘다. 그대로 침대에 던져진 산호는 벽에 머리를 박았다. 눈물이 찔끔 고인 산호의 위로 준형이 거칠게 올라탔다.
“오늘은 누구한테 대줬어?”
“…뭐?”
“박성경 말고 또 누구한테 대줬냐고.”
산호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지자 준형의 행동은 더 거칠어졌다. 준형은 유산호의 대답을 들어줄 생각은 애초에 없었지만, 제가 기분이 나쁜 이유도 알 수 없었다. 유산호는 왜 다른 놈한테도 대주고 다닌 걸까. …존나 빡치게. 준형의 생각은 산호가 이해하기에는 조금 어려웠지만 나름대로 본인 스스로의 기준을 따라 흘러갔다. 내가 저한테만 박아주는데, 유산호는 왜. 충분히 예뻐해 주는데, 유산호는 왜.
“왜,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안, 아니야. 그게 아니라,”
“아니긴, 씨발. 박성경이 너 걸레 같대.”
“…….”
제 벨트를 풀어 산호의 두 손목을 묶으며 준형은 기가 찬다는 듯 하하 웃었다. 산호는 제가 왜 준형의 화풀이를 듣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귀찮게 굴지 말라던 것은 준형이었다. 산호의 망가진 마음에 작은 반항심이 불씨를 지폈다. 도준형이 내게, 화를 낼 자격이 있나. 산호의 얼굴이 찡그려지자 준형의 기분은 한층 더 거지 같아졌다.
“너 진짜 존나 무섭다.”
“…….”
“나 모르게 아무한테나 벌려주면서, 내가 좋다고?”
준형이 티셔츠를 벗어 꾸깃하게 뭉친 후 산호의 입에 우악스럽게 쑤셔 넣었다. 산호의 힘을 다한 반항은 준형에게는 미약한 방해조차 되지 못했다. 힘의 차이가 확연히 느껴지자 산호의 눈에 공포가 서렸다.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예뻐해줬네.”
“…으븝…!”
산호는 지금까지 준형이 정말로 자신을 배려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화풀이처럼 쏟아지는 섹스는 쾌락보다 고통이 더 컸다. 가죽 벨트에 묶인 손목은 잔뜩 쓸려서 벌겋게 부어올랐고 준형은 전희도 없이 박아넣은 성기를 난폭하게 휘둘렀다. 물기 없는 살덩이가 엉덩이 사이를 가르고 들어오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귀두가 안으로 들어가자 단번에 허리를 쳐올려 길고 두툼한 성기가 몽땅 산호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뻑뻑한 내벽을 억지로 쑤시자 펍, 펍, 건조한 소리가 들리다가 곧 촉촉해졌다. 겁에 질린 산호가 내벽을 있는 대로 조여서 준형이 프리컴을 흘린 탓이었다.
“울지 마.”
“으…브…흡!”
“왜 울어? 네가 좋아하는 내 좆 박아주고 있잖아.”
“으흑…!”
“나한테 박히고 싶어 했잖아. 응?”
꽤 오랜 시간 동안 산호는 힘없이 흔들리며 준형을 받아내야 했다. 준형이 산호를 깔아뭉갠 채 저 좋을 대로만 움직이는 탓에 산호는 조금 덜 아프도록 제 몸을 움직였다. 누구도 그게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허리를 급하게 구부린 탓에 내벽을 찔러오던 준형의 성기가 산호의 극점을 건드렸다. 고통으로 내내 힘없이 덜렁거리던 산호의 성기가 뻣뻣하게 일어섰고 준형의 그것이 준형의 심기를 건드렸다.
“박성경이 이런 거 가르쳤어?”
“으읍…!”
“이렇게 걸레 같이 굴라고?”
준형은 산호의 머리채를 붙잡고 그대로 산호의 몸을 뒤집었다. 뱃속에서 준형의 성기가 돌아가는 느낌에 산호가 무릎을 덜덜 떨었다. 산호의 몸을 손쉽게 뒤집어서 엎어놓은 준형은 엉덩이만 들어 올려 굴욕적인 자세로 만들었다. 준형의 허리가 뒤로 빠졌다. 하도 오래 넣고 있어서 불어터졌을 것 같은 성기는 애석하게도 여전히 힘이 넘쳤다.
준형의 성기가 뒤로 쑤욱 빠지며 산호의 내벽이 딸려갔다. 내벽이 제 좆을 붙잡고 늘어지듯 물어오는 느낌에 준형이 혀를 낮게 찼다. 그대로 다시 쾅 허리를 박아넣었다. 살 부딪치는 소리가 철벅 철벅 방을 울렸다. 동그란 엉덩이에 준형의 손이 내려쳐 졌다. 짝! 엉덩이를 때릴 때마다 흠칫거리며 자지를 씹어 무는 유산호가 나쁜 거다. 준형은 그렇게 생각하며 계속해서 산호의 엉덩이에 새빨간 손자국을 냈다.
“허으…. 흑, 으….”
“티셔츠 뱉지 마, 산호야.”
“으음, 으…!”
산호는 저절로 뱉어낸 티셔츠 뭉치를 다시 입에 물었다. 도준형이 시켰기 때문이 아니라, 바뀐 자세 탓에 쾌감이 몰려와 신음을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산호는 합리화했다. 준형은 귀신처럼 눈치가 빨랐다. 산호가 박히는 와중에 침대에 앞섶을 문지르는 것을 본 준형의 기분이 점점 더 뒤틀렸다.
“하윽!”
“아프라고 묶어놨는데 자지를 세우면 어쩌냐.”
“으, 으흑! 아!”
“티셔츠도 뱉지 말라니까, 이제 내 말은 다 좆으로 들리지. 어?”
“하으…. 잘, 모…. 잘못…해, 써어…!”
준형은 대답 없이 산호의 발기한 성기를 제 손으로 꽉 잡아서 뜯어버릴 듯이 당겼다. 산호가 급하게 숨을 들이켜며 몸을 떨었다.
“떼줄까?”
“…흐윽, 흐…!”
“쓸 일도 없는데 달고 다녀서 뭐하게.”
산호의 성기를 쥔 손이 점점 더 아프게 힘을 준다. 눌려서 터질 것처럼 아픈 와중에 준형이 허릿짓의 속도를 높이자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도준형이 모쏠일지는 몰라도 절대 동정은 아닐 거라고 산호는 생각했다. 준형과의 섹스는 언제나 지독한 쾌감과 고통이 함께 찾아와 산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오늘도 그렇다.
“제, 발…! 아흐으….”
“너 이제 뒤로, 후…. 안 쑤셔주면, 가지도 못하잖아. 그치.”
“아니, 아…! 살살…!”
산호의 귀두 끝을 거칠게 문지르던 준형의 손가락이 요도를 쑤시고 싶은 듯 구멍을 문질렀다. 그럴 때마다 산호가 몸을 파드득 떠는 것이 느껴져 준형은 잘게 웃었다.
“뭘 아니야. 너 내 여친 자리 뺏고 싶잖아.”
있지도 않은 여자 친구 타령을 하며 준형은 산호를 몰아붙였다. 산호는 묻고 싶었다. 너 여자 친구 없다며. 다 들었는데. 하지만 산호는 준형에게 따질 수 없었다. 끊임없이 앓는 소리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서 산호는 채 입을 떼지도 못했다.
“그래서 울었잖아. 응?”
“으, 흑….”
“존나 귀찮았는데 너.”
“후, 응…! 아! 그만…! 제발…!”
“지금은 좀 귀엽네.”
뱀처럼 산호의 성기를 움켜쥐었던 손가락이 떨어져 나갔다. 묶인 손을 애처롭게 바르작대며 준형이 박아대는 것을 피해 매트리스 위쪽으로 산호는 조금씩 무릎을 움직였다. 그러나 준형은 그깟 미미한 반항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앞으로 도망가는 산호의 발목을 확 잡아끌어서 깊게 제 성기를 밀어넣고 만족의 한숨을 쉬었다. 멍청하게도 산호는 그 짓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산호는 제 머리가 망가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산호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준형의 성기가 뱃속을 꿰뚫는 것을 피할 수가 없었다. 방향 감각을 상실한 산호는 지치지도 않고 무릎으로 기었지만 머리에 와 닿은 것은 딱딱한 벽이었다. 쾅. 산호의 머리를 들어 올린 준형이 매끈한 이마를 그대로 벽에 갖다 박았다. 산호의 눈에는 다시 눈물이 맺혔고 생경한 자세 때문에 몸은 어색하게 굳어졌다. 준형은 어떤 자세에도 당황하지 않는 것 같았다. 산호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산호는 그대로 납작한 꽃게처럼 벽에 밀어 붙여진 채로 벽과 준형의 사이에 끼어서 준형을 받아냈다.
“아, 좋아….”
준형의 목소리에 만족감이 진하게 묻어있었다. 준형의 사정액이 그대로 산호의 뱃속에 쏟아졌다. 준형은 산호가 앞으로 도망갈 수 없는 이 자세가 퍽 마음에 들었다. 미친 것처럼 날뛰던 성욕도 한번 쏟아내고 나니 조금 너그러워지기도 했다. 살짝 풀린 목소리로 준형이 말했다.
“멍청한 줄 알았는데 아니네.”
“흐으, 거기…. 아…!”
“나 좋다면서 다른 새끼 좆도 빨아주고.”
“히윽…!”
“어떻게 알았어? 내가 그런 거에 좀 환장해.”
빠르게 쳐올리던 허리도 은근하게 문지르는 탓에 산호의 눈과 성기에서 투명한 액체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준형의 손이 산호의 양쪽 유두를 꼬집었다.
“도망치는 걸 보면 이렇게,”
“하으, 안, 가슴, 아…!”
“머리채를 잡아다가 개처럼 묶어놓고 싶거든.”
“흐으응! 아학…!”
“다시 예뻐해줄게, 산호야.”
귓가에 쏟아지는 말은 다정한 목소리와는 정반대로 모두 잘 벼린 칼처럼 날카로웠다. 몸과 머리가 전부 엉망이 된 채로 산호는 그저 고개를 끄덕거렸다.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착하다, 우리 산호. 숨을 몰아쉬는 산호의 몸에 느리게 피스톤 질을 하던 준형은 산호의 머리채를 잡고 고개를 돌려 다짜고짜 입에 혀를 집어넣었다. 난폭한 키스였다. 동시에 허리를 마구 흔들어대서 산호는 숨을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었다.
구멍을 들쑤시는 성기에 의해 안에 싸질렀던 정액이 흘러나와 허벅지를 질척하게 적셨다. 산호가 앓는 소리를 내며 사정했다. 심술이 덜 풀린 준형이 산호의 성기를 잡고 마구잡이로 흔들어준 탓에 벽과 이불에 사정액이 요란하게 튀었다. 산호의 사정을 확인한 준형은 산호의 혀를 깨물며 거친 허릿짓을 계속했다. 격렬한 움직임에 입술과 혀가, 혀와 입술이 뒤엉켰다. 이를 내어 산호의 입술을 깨물다가 이가 부딪치기도 했다. 그 사이로 두 사람의 숨도 섞였다. 마른 입술 한쪽이 찢어져 비린 맛이 났다. 산호가 고개를 간신히 빼며 신음을 뱉었다.
“흐으…! 나, 아…! 미칠, 거, 가타…!”
“…그러니까 다른 새끼한테 또 벌려주면 죽어.”
“흑, 으….”
준형의 두 번째 사정액이 산호의 마른 뱃속을 채웠다. 헐떡거리는 숨은 전부 도준형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혹사당한 산호의 손목은 감각이 없었다. 준형은 묶어놓았던 벨트를 조심스럽게 풀었다.
“앙탈도 그만 부려. 봐주는 건 이번이 끝이야.”
지나치게 다정한 목소리였다. 고작 그런 말로 가장 끔찍하고 폭력적이었던 섹스를 용서해달라는 듯 당당한 태도였다. 그러나 산호가 그렇게 할 거라는 것을 준형도 산호도 알고 있었다. 벽에 부딪쳐 멍이 들었을 게 뻔한 산호의 이마에 준형의 입술이 쪽 성의 없는 입맞춤을 남기고 떨어졌다.
지독하게 뻔뻔했다. 너무 울어서 말라버린 것 같은 산호의 눈에서 또 왈칵 울음이 쏟아졌다. 산호는 그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준형의 품에 파고들어 안겼다. 부끄럽다거나 해서는 아니었다. 더 이상 부끄러울 일도 없었다. 다만 제 눈물을 본 준형이 전혀 신경 쓰지 않을까 봐, 그게 참을 수 없이 두려웠다. 여자 친구에 대해서 물어볼 마음은 감히 먹지도 못했다. 왜 거짓말을 했냐고. 내가 귀찮았냐고. 물어볼 수 있을 리가 없다. 대답을 들었다간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아서. 서영과 마주친 것은 고작 몇 시간 전의 일인데 벌써 까마득했다. 산호는 준형의 성기를 제 안에 넣은 채로 불편한 잠에 빠져들었다.
* * *
그리고 준형과 산호의 사이는 이전과 같이 돌아갔다. 준형이 성경에게 틱틱대기 시작한 것 말고는 변한 것이 별로 없었다. 성경은 산호에게 어이가 없을 정도로 담백한 사과 문자를 보낸 후, 더 이상 손을 대지도 않았고, 다시 연락을 해오지도 않았다. 산호는 잠시 고민했다. 그게 사과로 끝낼 일인가? 그러나 산호는 그런 걸 고민하기에는 이미 너무 지쳐있었다. 그렇게 지쳤는데도 준형을 향한 제 사랑은 끝나지 않는 것이 슬펐다.
준형이 시비를 걸어도 성경이 받아치지 않아서 다툼이 크게 번지지는 않았지만, 곧 석준과 동진도 뭔가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한 눈치였지만 산호는 그들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했다. 일부러가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던 것뿐이었지만.
단정한 것은 껍데기에 불과한 성경의 얼굴에는 종종 이 상황 자체가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산호는 그 미소를 볼 때마다 소름이 끼쳤다. 그러나 조용히 눈을 피하는 것 말고는 산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도준형은 늪처럼 산호를 끌어당기고 있었고, 늪 밖에서 산호를 지켜보는 박성경은 습기 가득한 여름날의 공기 같았다. 어느 쪽이든 산호에게는 절망적인 일이었다. 산호는 더 이상 성경이 제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고 있었지만, 산호에게 더 너그러워진 도준형은 산호를 점점 더 진창으로 쳐넣고 있는 게 분명했다.
도준형은 산호를 너무 잘 다뤘다. 얼마든지 강제로 굴복시키고 이길 수 있으면서도 어느 선까지는 오냐오냐 받아준다. 그러면 산호는 점점 들떠서 자신이 그에게 뭐라도 된 것처럼 우쭐해 하다가 결국 선을 넘어서 곧 잡아먹히고 만다. 산호는 그 선이 언제나 헷갈렸다. 어젯밤에는 산호가 아무리 기어올라도 넘지 못했던 선을 낮에는 그렇게나 쉽게 넘을 수 있었다. 산호가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선의 높이는 준형의 마음대로 바뀌었다. 그걸 맞추려는 시도는 언제나 무참히 실패했다.
사람들 틈에서 도준형은 산호가 제 권위에 도전하려는 기색만 보여도 그걸 가차 없이 짓밟았다. 그러나 둘만 있을 때는 산호가 아무리 기어올라도 너그럽게 받아주며 키스를 해온다. 산호도 모를 수가 없었다. 도준형은 고분고분한 것보다 적당히 기어오르는 것을 좋아한다. 친구 사이도 그랬다. 제가 가장 위에 있어야 했지만 저를 어려워하는 사람은 싫어했다.
석준과 동진의 격한 장난은 준형이 그것을 허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선을 넘으면 안 된다. 준형의 마음대로 움직이는 선. 하지만 그 선은 산호에게만 조금 더 높았다. 그 덕분에 산호는 계속해서 자신이 준형에게 조금은 특별한 존재라고 자위할 수 있게 되었다. 봐주는 건 그때가 끝이라고 했으면서. 산호는 고작 그 말 한 마디를 소중하게 간직하며 행복하게 진창에 쳐박혔다.
멍청한 유산호가 어떻게 그 달콤한 덫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도준형은 산호를 살살 달래서 스스로 엉덩이를 벌리게 하는 데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산호가 원하는 것을 미끼로 목줄을 걸면서도 결코 미끼를 전부 넘겨주지 않는다. 사람들 앞에서 미묘하게 산호를 챙긴 후에는 자리를 옮겨 다정한 얼굴로 산호의 입에 제 성기를 밀어 넣었다. 찰나의 다정함은 산호의 갈증을 아주 조금씩만 해소해주었다. 준형은 그 얄팍한 다정함에 산호가 매달리는 것을 기꺼워하면서도 제 기분이 상하면 아쉬울 것 없다는 듯 목줄을 던져버렸다. 그럴 때는 산호가 스스로 목줄을 입에 물고 그의 손에 쥐여 줘야만 화를 풀었다. 비참한 구걸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도준형이 받아주는 순간은 구원 같았다. 산호는 도저히 그런 도준형에게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산호가 유난히 아픈 것을 싫어하고, 겁이 많다는 점이었다. 산호는 차츰 마음을 죽였다. 제 사랑에 가망이 없다는 것을 체감할 때마다 조금씩 체념이 짙어졌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이별 따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은 사랑을 하면서도 지칠 수 있었다. 사람이 사랑을 하면 그 상대를 닮아간다던데 그게 맞는 말 같았다. 산호는 이제 사랑과 섹스를 조금씩 분리할 수 있게 되었다. 제가 몸이 닳도록 사랑했던 준형처럼. 그러니까 언젠가는 이 지지부진한 짝사랑의 끝도 산호를 찾아올 것이라 믿었다. 믿지 않으면 희망이 없었다.
* * *
그리고 산호의 체념이 짙어질수록 준형의 태도가 모호해졌다.
“간만에 짜장 땡기자니까?”
“산호 너는.”
“난 다 괜찮….”
“…….”
“…햄버거?”
“그래. 날도 더운데 뭔 짜장이야. 햄버거로 때우자.”
이전에는 이런 적이 없었다. 제가 먹고 싶은 것을 산호와 둘이 먹으러 가는 식으로 산호를 특별 대우하던 준형은 이제 산호가 먹고 싶은 걸 모두에게 먹이는 식으로 변했다. 곤란했다. 산호는 어떤 메뉴든 다 괜찮았다. 짜장이든 짬뽕이든 무얼 먹어도 입안이 깔깔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러나 준형의 미간이 찌푸려져서 대충 다른 메뉴를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도 처음에는 가시방석에 올라앉은 것 같았다. 짜장면을 먹자던 동진에게 눈짓으로 미안함을 전하던 것도 한두 번이었다. 산호는 이제 가시방석조차 익숙했다.
산호도 알았다. 준형의 마음이 산호의 마음과는 다르다는 것을. 그러나 산호는 쉽게 마음을 정리할 수 없었다. 실망과 체념으로 시퍼렇게 멍이 든 마음은 그래도 작은 희망을 놓지 못하고 끈질기게 산호를 흔들었다. 산호는 이제 폭력보다도 끈질기게 사라지지 않는 희망이 더 무서웠다.
“아, 나 시계 좀.”
“응?”
아직 완전한 여름도 아닌데 더워서 몸이 녹아내릴 것 같은 날씨였다. 산호는 패스트푸드점에 앉아 얼마 남지 않은 콜라를 마시고 있었다. 준형은 여전히 때때로 산호를 설레게 했다. 가만히 있다가 제 손목에 찬 메탈 시계를 풀어 산호에게 맡기고는 얼음이 녹아 미지근해진 콜라를 리필해 와서 산호의 앞에 놓아준다.
준형이 차고 다니는 시계는 산호가 인터넷으로만 보던 명품 브랜드의 제품이다. 준형이 산호에게 맡기지 않았다면 아마도 만져볼 기회조차 없었을. 산호는 준형이 다시 자리에 와 앉자마자 다시 시계를 내밀었다.
“자.”
“좀 가지고 있어. 손목에 땀 차서 그래.”
“이거 비싼 거 아니야? 내가 가지고 있다가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그럼 네가 차고 있던가.”
산호가 대답하기도 전에 준형의 손이 시계를 낚아채 산호의 손목에 철컥 채웠다. 차가운 메탈 재질의 시곗줄이 산호의 손목에서 헐렁하게 돌아갔다. 비싼 수갑을 찬 기분이 산호의 목을 조였다. 그리고 동진의 선망 어린 시선이 그 손목에 와 닿는 것이 느껴졌다. 산호는 날씨가 정말 참혹하다고 생각했다. 그날 저녁에도 산호는 준형의 침대에서 밤을 꼬박 새웠다. 도준형의 침대는 건조하고 시원했다. 에어컨 때문에 산호의 눈물은 말라붙었다. 학기가 끝나고도 비슷한 날들이 이어졌고, 산호는 계획했던 알바나 토익 학원에는 발도 들이지 못했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갔다.
* * *
마음이 조금씩 죽어가면서 산호는 가끔 생각했다. 사랑은 참 별 거 아니구나. 그렇게나 좋아했는데 이제는 좋아하는 마음만큼 원망이 커져서, 준형을 사랑하는 동시에 사랑을 끝내고 싶었다. 사랑을 하면서도 사랑이 싫었다. 그게 참 허무했다. 그러면서도 아직 완전히 마음을 접지 못한 것이 스스로의 첫사랑에 대한 미련인지, 도준형이 적선하듯 던져주는 한 줄기 희망 때문인지를 알 수 없어서 혼자 잠드는 밤이면 자주 울었다.
산호의 표정이 적어지고 말수가 줄어들수록 준형의 기분은 널을 뛰었다. 집요한 섹스와 제멋대로인 태도는 그대로였으나 그 점만이 달랐다. 산호는 준형의 기분이 제 태도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을 깨닫자 다시금 우쭐해졌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제 손에 준형을 쥔 것 같았다. 어쩌면 도준형의 마음도 이제 조금쯤은. 그런 건방진 기대가 산호의 콩닥거리는 가슴 속에서 조금씩 고개를 들었다.
“또 저녁 안 먹었지.”
“배 안 고파.”
준형이 산호의 식사에 집착하는 것은 딱히 친절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래 보일지 몰라도. 산호의 살이 빠질수록 준형은 불평했다. 처음엔 그게 저를 걱정하는 거라고 착각하기도 했었다. 순진하고 어리석었다.
너 살 빠지니까 엉덩이뼈에 찍혀서 아파. 살 좀 찌워. 준형의 그 말에 산호의 기대는 무참히 깨졌다. 비싼 돈을 주고 산 자위 기구도 그런 취급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산호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무서웠으니까. 제 배를 푹푹 찔러대는 준형의 성기가 저를 찢어버릴 것 같아서. 하지만 준형과 억지로 밥을 먹을 때를 빼면 산호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하찮은 반항이었다. 준형은 눈치가 빨랐다.
“살 좀 찌우라고 했잖아.”
“…….”
“왜 너는 좋게 말을 하면 안 들어.”
준형의 화는 여름이 끝나갈 무렵부터 차츰 폭발하는 횟수가 늘더니 이제는 발화점도 낮아졌다. 짜증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언제부턴가 고분고분하던 유산호가 사라졌다. 꼬박꼬박 대답은 하면서 제 말을 듣지 않는다. 깨작깨작 처먹는 것도 짜증이 나고 섹스를 거부하지 않는 것도 짜증이 났다. 그렇다고 거부하면 좋겠다는 건 아니었다. 다만 뭔가를 체념한 것 같은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준형도 제가 왜 이렇게 짜증이 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는데 무슨 일인지 때릴 마음은 들지 않아서 더 열이 받았다.
“좋게 말할 때 먹자, 응?”
“…….”
준형은 산호가 좋아하는 가게의 치킨을 두 마리나 사 온 참이었다. 산호의 좁은 자취방은 금세 양념치킨 냄새로 가득 찼다. 준형이 손에 일회용 비닐장갑을 끼고 서투르게 살을 발라내 산호의 입에 갖다 댔다. 산호는 늘 그렇듯이 무너졌다. 어째서 도준형은 이렇게 다정한가. 어째서 도준형은 제가 포기하려고 할 때마다 이렇게 다정해지는가. 저를 무너뜨리는 다정함에 속아 자주 정액 범벅이 된 채 잠드는 사람의 감상치고는 퍽 순진했다.
“…배불러.”
“뭐 별로 먹지도 않았구만.”
“그래도 배불러.”
“그럼 나머진 내일 아침에 먹어.”
비닐장갑을 내던진 준형이 매트리스에 풀썩 누웠다. 잠시 뒹굴던 준형은 짜증이 덜 가셨는지 온갖 것에 트집을 잡았다. 여긴 왜 이렇게 좁아. 덥고 짜증나. 에어컨 좀 틀어. 공과금 낼 돈 없으면 내가 준다고. 왜 그렇게 쳐다봐. 표정 왜 그러냐고. 아니, 뭐가 미안한데. 아…. 됐어. 애교 떨지 마. 참 나…. 귀엽게 구네 또. 그거 냅두고 이리 와봐. 그리고 준형은 산호에게 말했다.
“오늘은 네가 위에서 해봐.”
사실은 이제 산호도 준형과의 섹스를 좋아했다. 누구라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그런 쾌감을 느껴본다면 중독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부끄러워하던 시절은 이미 지나갔다. 늘 제 위에서 군림하던 준형이 애끓는 목소리로 달려드는 유일한 시간. 산호는 약물 중독자처럼 준형과의 관계를 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삐죽해진 마음이 무심코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그러려고 밥 먹여줬어?”
“왜 또 삐쳤어, 우리 산호.”
“…….”
삐죽한 마음은 고작 말 한 마디에 녹아버린다. 도준형의 다정함은 그저 변덕이거나 성욕 때문이라는 걸 안다. 알면서도 그 다정함이 저를 향할 때면 산호는 늘 헷갈렸다. 헷갈리고 싶었다. 조금쯤은 나를 배려하는 게 아닐까? 사랑은 아니더라도 우정 그 어딘가에는 내가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왜 필요도 없이 내게 다정한 걸까. 내가 거부하더라도 준형은 나를 강간할 힘이 있다. 혹은 내가 아니어도 될 텐데 나를 붙잡는 걸 보면 내가 마음에 들긴 하나 보다. 제 마음대로 해도 될 텐데 도준형은 왜 나에게 잘 해주는 걸까. 내게 아예 마음이 없는 건 아닌가 보다. 그렇게 스스로 비참해지는 생각까지 하면서도 산호는 그 다정함을 착각하고 싶었다.
“삐쳐 있지 말고 이리 와. 가슴 빨고 싶어.”
준형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산호를 휘둘렀다. 이게 아닌데. 휘두르는 건 저여야 하는데. 침대에서도 도준형에게 휘둘리기만 한다면 스스로가 너무 불쌍하다. 산호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준형의 목소리에도 서서히 화가 스며들었다.
“또 뭐가 문젠데.”
“…….”
“야. 너 나 좋다며.”
“…….”
“내가 부탁하잖아. 그거 하나 못 들어줘?”
“…….”
“아…. 너 요즘 자꾸 비싸게 군다.”
“…….”
산호가 가만히 바닥만 보고 앉아있자 준형의 목소리가 커졌다.
“왜, 이젠 나 아니야?”
“…….”
“너 설마 박성경이랑 계속 붙어먹냐?”
“…갑자기 걔 얘기가 왜 나와?”
산호가 발끈하자 준형이 으득 이를 갈았다. 이것 봐라. 박성경 얘기에는 잡힌 물고기처럼 파드득 떠는 꼴이 같잖다. 준형은 잠시 화를 가라앉히듯 눈을 감고 후욱 한숨을 내쉰 후에 말했다.
“내가 다른 새끼한테 대주지 말라고 했지.”
“그런 적 없어!”
“너 내가 우습냐?”
“그러는 너야말로!”
산호의 호흡이 가빠졌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눈물방울과 함께 쏟아졌다.
“너, 너 여자 친구 같은 거 없다며.”
“뭐?”
“난 뭐 듣는 귀도 없는 줄 알아?”
“아…. 그거 때문에 이 지랄이야?”
“…지랄? 넌 지금 내가,”
“말했지, 산호야.”
악을 쓰던 산호의 멱살이 준형의 손에 들어 올려졌다. 산호의 손이 준형의 손을 벅벅 긁었다. 숨이 막혀서 머리가 하얘진다.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준형의 손은 산호를 놓지 않았다.
“거짓말? 그래, 했다 쳐. 근데 내가 여친이 있든 없든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냐고.”
“윽…!”
“내가 여친 없으면 뭐, 너랑 연애질이라도 해줘야 돼?”
“흐윽….”
“별…. 진짜 어이가 없어서….”
“놔…아…! 숨, 막….”
“잘 들어, 산호야.”
“…….”
“앞으로도 넌 그냥 나를 좋아하면 돼. 알겠어?”
준형의 목소리는 쓰레기 같은 말도 달콤하게 하는 신기한 재주가 있었다. 말을 마친 준형은 산호의 멱살을 단번에 놓았다. 숨을 몰아쉬던 산호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이젠 비참해져도 어쩔 수 없다. 도준형의 마음이, 도준형의 생각이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다. 비참해지더라도 답을 듣고 싶었다. 산호는 제가 짝사랑을 하면서 가장 용기를 낸 순간이 상대에게 멱살을 잡힌 직후라는 것이 불쌍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산호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럼…. 그럼 받아줄 거야?”
“…….”
“내가, 계속…. 좋아하면 너는,”
산호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준형이 산호의 턱을 제 손으로 들어 저와 눈을 맞췄다.
“산호야, 너 처음에도 그렇게 계산적으로 나 좋아했어?”
산호는 숨이 막혔다. 준형은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안 받아주면 그만두고, 받아주면 계속하고 그런 게 네가 말하던 사랑이야?”
“…….”
“나 몰래 내 사진 보면서 자위나 하고, 나 좋다면서 내 친구랑 붙어먹고, 그런 게 네 사랑이야?”
“…나는, 나는 한 번도…!”
“산호야.”
산호야. 소름 끼칠 정도로 다정하게 산호를 부른 준형은 또 화를 참는 듯 제 눈가를 쓸었다. 손 밑으로 그림자 진 눈이 살기를 띤 채 산호를 본다. 저렇게 준형이 저를 부르던 목소리를 얼마나 좋아했던가. 도준형 특유의 말투에 얼마나 설레었던가. 다 지나간 얘기라고만 할 수는 없었다. 산호는 여전히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러나 준형은 화를 애써 억누르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산호야, 나 너 좀 때릴까?”
“…뭐?”
“그럼 말 들을래? 어?”
“…….”
“대답해 봐. 너도 처맞으면 내가 하라는 대로 할 거야?”
“…….”
산호는 준형의 집 거실에 있던 골프채를 떠올렸다. 저도 모르게 몸서리가 쳐졌다. 진짜로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준형은 충분히 저를 때려서라도 말을 듣게 할 것이다. 준형의 마음이 애정이건 장난이건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는 걸 산호는 그제야 알았다. 준형은 혹여나 산호를 사랑하게 된다고 해도 폭력 정도는 휘두를 수 있는 인간이었다. 나는 왜 그런 도준형을 좋아해버린 걸까.
그날도 산호는 머리채를 잡힌 채 매트리스 위에 얼굴을 처박고 엉덩이만 들린 상태로 준형을 받아내야 했다. 허리 밑을 쳐올리는 쾌감 때문에 엉망으로 눈물을 흘리면서도 산호는 진심을 다해 생각했다. 도망쳐야겠다. 이대로는 도준형에게 제 사랑을 모조리 빼앗겨서 말라죽을 것이 분명했다.
도망쳐야지. 꼭 도망을 쳐야지.
* * *
그러나 산호는 꽤 오랫동안 도망칠 수 없었다. 일단 2학기가 시작해서도 그랬고, 자취방의 계약 문제도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남들은 잘도 훌쩍훌쩍 도망치던데. 여전히 산호의 일상은 그대로였다. 전처럼 도준형과 어울려 수업을 들었고, 도준형과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다. 도망이라는 선택지가 산호에게 약간의 희망을 주었지만 변하는 게 없었다. 그게 산호를 점점 체념하고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었다.
반면 요즘 도준형은 기분이 좋았다. 산호가 다시 전처럼 고분고분해졌고, 성경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건 산호에게도 마음이 놓이는 일이었다. 성경의 습한 시선은 종종 산호에게 따라붙었으나 그게 전부였다. 신경 쓰이는 일이 하나 줄어드니 산호의 몸에도 살이 조금 올랐다. 준형이 끼니를 챙겨 먹인 덕도 있었다.
산호는 요즘만 같다면 졸업할 때까지 이렇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도준형의 심기를 건드리지만 않으면 된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한 자신에게 놀라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나는 도준형에게서 벗어날 것이다. 눈앞의 편안한 일상에 안주하고 싶어지는 스스로를 계속 채찍질했다. 그건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도준형이 산호에게 준 것들이 차라리 전부 고통뿐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도준형은 산호처럼 우유부단한 사람은 충분히 망설일 만큼 좋은 것들도 함께 주었다. 준형에게는 그다지 어려울 것도 없고, 수고할 필요도 없는 값싼 친절들. 그러나 산호처럼 바보 같은 사람은 충분히 특별한 애정이라고 착각할 만한 싸구려 다정함들.
“어, 석준이냐? 난데, 발표 오늘이지? 나 몸이 좀 안 좋아서 쉬려고. …어? 아니, 됐어. 유산호가 나 간호하는 중. …어, 잘 해. 나중에 밥 살게.”
석준은 질책 한 마디 없이 준형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명령과 다를 게 없었다. 준형은 감기조차 걸리지 않은 건강한 몸으로 침대에 퍼질러 누워있었다. 그리고 산호는 준형이 석준과 통화하는 내내 준형의 좆을 빨고 있어야 했다. 준형은 살이 차오른 산호의 엉덩이를 벗겨놓고 주무르면서 익숙하게 산호의 펠라치오를 받았다.
어제도 그제도 산호는 준형의 집에서 잠들었다. 준형과 함께 발표를 맡기로 했던 순간부터 아마 준형은 그럴 생각이었을 것이다. 덕분에 산호는 과제 생각은 할 수도 없을 만큼 녹초가 된 상태였다. 전화를 끊은 준형은 칭찬이라도 해달라는 듯 산호의 엉덩이에 코를 문지르며 잘게 웃었다. 산호는 그 비겁하고 알량한 값을 받고 준형의 정액을 삼켰다. 그리고 그 전화 덕분에 잊었던 수치심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벌써 날이 쌀쌀해지고 있었다. 이번 학기도 얼마 남지 않았다. 산호는 부동산에 들러 자취방 계약을 연장하지 않겠다고 말하려 했다. 부모님에게는 어떻게 둘러댈지 막막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부동산에서 성경을 마주친 것은 뜻밖이었다.
“…유산호?”
“…안녕.”
“오랜만이네. 여긴 웬일이야?”
무심한 얼굴로 물어오는 성경 때문에 산호는 얼떨결에 사실대로 답했다.
“자취방 계약 연장 안 하려고.”
“왜?”
“어….”
“휴학하게?”
“어? 아니?”
“근데 왜?”
“…집이 좀 어려워져서. 통학하려고.”
산호는 간신히 핑계를 찾아낸 스스로가 대견했다. 왠지 성경에게는 사실을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성경은 산호의 거짓말을 눈치채지 못한 듯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통학 힘들지 않겠어?”
“어쩔 수 없지 뭐.”
“그럼 내 오피스텔 잠깐 들어올래?”
“…어?”
“보증금은 안 받을게. 월세만 내.”
“아냐, 괜찮….”
“나도 다음 학기는 드랍이야. 그리고 한동안 미국에 있을 거라서, 집이 비거든. 세입자를 구할까 했는데 아는 사람이면 오히려 나도 마음이 놓일 것 같고.”
산호는 성경의 차분한 말투에 설득당했다. 준형이 산호의 본가를 아는 것은 아니지만 알려고 든다면 충분히 알 수 있다. 오히려 성경의 집이 더 안전할 수도 있었다. 성경이 한국에 없다면. 부모님에게 뭐라고 둘러대야 하나 고민할 필요도 없어진다. 이게 제일 나은 방법일지도 모른다. 산호는 인생을 쉽게 살고 싶어서, 언제나 진창에 처박혔다. 본인만 그걸 몰랐다.
“정말 그래도 돼?”
“그러려고 부동산까지 갔던 건데 뭘. 너한테는 미안한 일도 있었고.”
성경이 직접 그 일에 대해 언급하자 산호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정말로 나한테 미안한 걸까, 혹은 성경도 준형이 무서운 걸까. 산호는 쓸데없는 고민을 그만두고 굴러들어온 친절을 받기로 했다.
“…고마워.”
“이사는 언제 하게?”
“어…. 다음 주?”
“그럼 내일까지 짐 뺄게. 주소랑 비번은 문자로 보내주면 돼?”
“응. 계좌 번호도 같이 보내줘. 근데 미국은 왜 가?”
“고모가 거기 사셔서. 그냥 놀러 가는 거지 뭐.”
“그렇구나.”
“그럼 나 먼저 가볼게.”
“아, 응. …정말 고마워!”
“별 게 다.”
성경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돌아섰다. 그 담백한 인사에 산호는 안도했다. 도준형에게도 진짜 여자 친구가 있었다면 지금쯤 나를 버렸을까? 아니, 나를 놔주었을까? 그런데 그랬다면 나는 계속 도준형을 좋아했을까? 내가 도준형을 놓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산호는 무의미한 생각을 계속했다. 풋사랑의 끝은 더럽게 질척했다.
* * *
산호는 답지 않게 꽤 철저한 준비를 했다.
“공사한다고?”
“응. 일주일 정도 걸린대.”
“시끄럽겠네.”
“…그래서 말인데, 나 며칠만 여기서 지내도 돼?”
“좋지. 그럼 하루 종일 유산호랑 떡칠 수 있겠네.”
“너는 왜 항상 말을 그렇게 해?”
“좋아서 그러지, 좋아서.”
준형은 정말로 기쁜 것처럼 산호의 배에 머리를 비볐다. 그러나 그 진심 없는 다정함에 산호는 더 이상 속지 않는다. 도준형이 아무리 말끝을 늘리며 웃어준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인이 개에게 혀 짧은 소리를 내주는 것과 같았다. 우리 집 개가 나보다 상전이라니까. 산호는 그런 얘기를 하던 견주들을 떠올렸다. 그러나 아무리 주인이 개를 애지중지한다고 해도 개는 개다. 주인이 주는 먹이를 먹고, 주인이 시키는 훈련을 하고, 주인의 뜻에 따라 길들여져야 하는 게 개의 삶이다.
“그래서 짐까지 챙겨 온 거야?”
“다는 아니고 옷 몇 벌이랑….”
“오늘은 그럼 핫 젤 써도 되지.”
“…그거 싫어. 화끈거리는 게 씻어도 오래 간단 말이야.”
“괜찮아질 때까지 누워 있으면 되잖아.”
“밥은 어떻게 먹고 화장실은 어떻게 가.”
“내가 다 해줄게. 어?”
“…….”
“어? 괜찮지? 아, 유산호오. 어?”
산호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몰래 한숨을 쉬었다. 준형은 기분이 좋아진 듯 산호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준형이 산호의 옷을 벗기는 동안 산호는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일주일 동안 준형이 자취방에 오는 것은 막았다. 짐이 별로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섹스가 산호의 생각을 뚝뚝 끊어놓았다.
다음날 산호는 준형이 늦잠을 자는 틈을 타 자취방으로 갔다. 적당히 짐을 챙겨서 오피스텔을 몇 번 오간 것만으로 자취방은 황량해졌다. 산호는 제가 살게 될 오피스텔을 보자 마음 어딘가가 불편해졌다.
성경의 오피스텔은 산호의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학교에서 적당히 떨어진 거리였다. 대학생이 혼자 살기에는 지나치게 비싸고 고급스러운 오피스텔의 로열층. 가전과 가구가 풀옵션으로 갖춰진 오피스텔은 넓고 쾌적해서 맨몸으로 들어가도 될 것 같았다. 먼지 하나 없이 청소된 집에 들어서서 산호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아, 고맙다는 문자라도 하나 더 보내야지.
[지금 오피스텔 도착했어. 너무 좋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그런데 집이 너무 좋아서…. 월세는 정말 그 정도만 내도 되는 거야?]
망설이던 산호는 성경에게 문자를 전송했다. 답장은 빠르게 도착했다.
[괜찮아.]
명료한 답장이 성경다웠다. 대충 짐을 푼 산호는 준형의 집으로 돌아갔다. 조금쯤은 되갚아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제가 갑자기 사라지면 도준형도 꽤 곤란할 것이다. 그저 편하고 만만한 잠자리 상대에 불과하더라도, 있던 것이 없어지면 인간은 누구나 불편하다. 산호는 제 짝사랑에 고작 그 정도의 값을 매기며 준형의 품에 안겼다.
산호는 도저히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다. 내가 사라져도 슬퍼할 리 없는 도준형. 눈물을 얻을 수 없다면 짜증이라도 얻고 싶다. 그의 일상이라도 흐트러지게 만들고 싶다. 산호의 풋사랑이 곪고 농이 익어 간다. 이것은 명백히 도준형의 탓이다.
* * *
“누구랑 문자를 하는데 그렇게 웃어?”
“어, 친구.”
“…여자?”
“아니, 남자.”
성경의 대답에도 여자의 실금 그어진 미간은 풀리지 않았다. 그녀가 더 채근하기 전에 성경이 먼저 말했다.
“나 당분간 바빠질 것 같은데.”
“왜?”
“여행.”
“갑자기? 어디로?”
“미국.”
“너까지 가면 나 심심해서 어떡해. 우리 남편도 LA에 있는데.”
“누나.”
“왜.”
“오늘은 차에서 할래?”
“뭐야. 지금?”
“누나가 남편 얘기해서 섰어.”
성경은 여자의 대답을 듣지 않고 입을 맞췄다. 손톱이 정갈하게 깎인 성경의 손이 여자의 치마 밑으로 들어갔다. 남의 것을 뺏는 것은 성경의 취미였지만 역시 성가신 것은 싫었다. 저를 좋아하는 유부녀보다는 손만 대도 화들짝 놀라는 유산호 쪽이 훨씬 더 재미있다.
성경은 타인의 감정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성경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잘 젖는 남의 구멍뿐이다. 지난 몇 달 내내 성경의 머릿속에는 유산호의 구멍밖에 없었다. 도준형이 어찌나 싸고도는지 처음 한 번을 빼고는 어떻게 건드릴 수도 없었다. 덕분에 성경은 귀찮은 일들을 꽤 여러 가지로 해야 했다. 연애를 하는 척도 해야 했고, 유산호에게 관심을 끊은 척도 해야 했고, 겁먹은 유산호의 겁도 풀어줘야 했다. 골이 아플 정도로 짜증 나고 귀찮은 그 짓들을 다 해낸 이유는 하나였다. 유산호를 제 성에 찰 때까지 느긋하게 벗겨 먹는 것.
도박처럼 던진 성경의 말에 준형은 유산호를 몰아붙였다. 티가 날 정도로 심해서 성경은 자주 웃음을 참아야 했다. 유산호 같은 타입은 고통에 약해서 다루기가 쉽다. 도망치려는 것을 잡아다 한입에 삼키는 날을 상상하며 성경은 참고 또 참았다. 쌓인 정욕은 그럭저럭 마음이 맞는 유부녀를 만나 해소했다. 쌍방 합의로 이루어진 관계는 카섹스를 마지막으로 끝났다.
“어려서 그런가. 지치지도 않네.”
“누나, 우리 이제 슬슬 그만 볼까?”
“…분위기 깨는 데는 뭐 있다, 진짜.”
“아님 한 번 더 해?”
성경의 말에 여자가 성경의 어깨를 찰싹 내려치며 웃었다. 질척이지 않는 건조한 관계가 둘의 장점이었다. 담배를 나눠 피우고 여자는 성경을 떠났다. 그동안 재밌었어. 네가 싸가지는 없어도 꽤 쓸만했지. 잘 살아, 박성경.
성경은 여자의 차가 멀어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괜찮아. 유산호에게 보낸 마지막 문자를 떠올렸다. 괜찮아. 너는 월세보다 더 재밌을 테니까. 성경은 환하게 웃었다. 미국행 티켓은 취소한 지 오래였다.
* * *
산호는 마치 증발한 것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그 사실에 신경을 쓰는 것은 준형밖에 없었다. 석준과 동진은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에 꼭 여자 친구를 사귀겠다는 열정을 불태우느라 정신이 없었고, 성경은 여자 친구와 어디를 그렇게 다니는지 다 같이 모이는 자리에도 자주 빠졌다. 준형은 기분이 더러웠다. 이런 초조함은 대개 아버지에게 맞기 전에나 느꼈던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유산호가 감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럴 용기도 없고 이유도 없다. 무엇보다 유산호는 여전히 저를 좋아한다. 그러니까 저를 떠날 리가 없다. 유산호가 감히. 그러나 하루, 이틀, 시간이 흐를수록 분명해졌다. 유산호가 도망쳤다. 왜 그랬을까. 준형은 도저히 유산호의 생각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렇게 예뻐해줬는데, 대체 왜.
그렇게 산호가 없어지고서 준형의 생활은 조금 달라졌다. 처음엔 미친 사람처럼 유산호의 텅 빈 자취방을 뒤집어엎었고, 그다음엔 아버지의 인맥을 통해서 유산호의 핸드폰 기록을 뽑았다. 그러나 핸드폰은 며칠째 꺼져 있었다.
하루는 성경의 멱살을 잡기도 했다.
“너야?”
“…뭐가?”
“유산호.”
“찾는 거 도와줘?”
“…….”
“과 사무실 가면 걔네 부모님 연락처 있을 거 아냐. 가 봤어?”
준형은 성경의 멱살을 놓고 과 사무실을 찾아가 유산호의 본가 주소와 부모님 연락처를 얻어냈다. 그러나 얻은 것은 어리둥절한 중년 여성의 몇 마디가 전부였다.
‘산호? 자격증 시험 때문에 당분간 공부만 할 거라고 핸드폰도 꺼두겠다던데…. 그런데 산호 대학 친구니? 급한 일이면 자취방으로 가보렴.’
비어버린 유산호의 자취방은 진작 탈탈 털었다. 준형은 대충 감사의 인사를 내뱉고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몇 번의 실패가 반복되자 준형은 차츰 여유가 없어졌다. 사소한 일에도 화가 치밀었고 자주 주먹을 휘둘렀다. 고등학교 시절에 어울리던 질 나쁜 동창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아무 데나 화풀이를 했다. 준형의 세상에서 고작 유산호 하나가 사라진 것뿐인데 모든 것이 난장판이었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연결된 후에는….]
준형은 매일 유산호의 번호를 누르는 버릇이 생겼다. 아침에 눈을 뜨면 숙취로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아니면 술을 마시던 중에,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에서, 자주 그랬다. 잭나이프 같던 준형의 고등학생 시절만을 기억하던 동창들은 그런 준형을 신기해하고, 믿을 수 없어 했다.
“여친?”
“아니라니까.”
“그럼 썸녀?”
“아니라고.”
“그럼 전 여친?”
“…….”
“오오~! 맞나 본데.”
“아, 좀 닥쳐봐.”
“이열~! 누가 헤어지자고 했어?”
“…….”
“이 새낀 뭐 그런 당연한 걸 물어. 도준형이 어디서 차이고 다닐 놈이냐.”
준형이 대답하지 않자 동창 중 하나가 다른 하나의 어깨를 치며 웃었다. 준형은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그럼 설마 차 놓고 후회?”
“웃기고 있네. 야, 도준형이 퍽이나.”
준형의 귓가에서 또 시끌벅적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술병을 따고 얼음을 서로에게 던지는 꼴들이 이미 준형은 안중에도 없고 그저 신이 난 것처럼 보였다. 푹신한 소파에 거의 눕듯이 기댄 준형은 담배를 빼 물었다. 준형의 손이 재킷 주머니를 더듬자 옆에서 누군가가 대신 불을 붙여주었다. 준형은 볼이 푹 패이도록 깊게 연기를 빨아들였다.
그렇게 예뻐해 줬더니 도망을 쳐? 도준형이 으득, 이를 갈았다. 눈물 자국 번진 산호의 마지막 기억이 그의 머릿속에서 갈가리 찢어졌다.
준형은 태어나 처음으로 후회라는 걸 했다.
“…그러게. 이제 와서 후회가 되네.”
“야, 너 도준형 맞냐? 후회? 네가? 뭐, 더 잘해줄 걸 그런 거? 나 좀 충격인데….”
친구의 호들갑에 준형은 답하지 않았다. 아니. 진작 발목이라도 부러뜨려야 했다. 도망칠 엄두도 못 내도록. 왜 나는 그 짓을 못해서 유산호를 놓쳤을까. 하여간 아빠 말이 맞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잘 해주기만 하면 사람을 개좆으로 본다. 그걸 알면서도 왜 나는 유산호를….
아. 그제야 사소하지만 중요한 깨달음이 준형을 찾아왔다.
“야.”
“어?”
“이게 사랑인가 봐.”
룸 안에 정적이 흘렀다. 도준형의 표정은 무척 진지했다.
“야…. 너 진짜 도준형 아니지? 야, 얌마! 와! 미쳤다. 너네 들었냐? 사랑이래, 씨발…. 도준형이 사랑, 억!”
“시끄러워. 나 먼저 간다.”
“너 진짜 가? 와, 쟤 진짜 미친 거 아니냐? 소오름!”
다이아몬드 무늬가 새겨진 클럽의 벽이 어지러운 조명을 반사하고 있었다. 준형의 표정에 다시 가벼운 미소가 떠올랐다. 찾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유산호는 나를 벗어날 수 없다.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사실이었다.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준형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왼쪽이 나을까 오른쪽이 나을까. 그런 시시한 잡념이 준형의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금세 먼지처럼 흩어졌다.
아무렴 어때. 유산호는 우는 얼굴이 존나 꼴리니까 양다리를 다 부러뜨려도 좋겠지. 준형이 푸훗 웃음을 터뜨렸다. 다리 병신을 만들어놓으면 화장실 갈 때도 나한테 매달리겠네. 귀엽겠다. 준형의 손에서 차 키가 빙빙 돌았다. 산호의 남은 인생처럼 가볍고 아무렇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