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발각
끝이다. 나는 끝났다. 도준형이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제 어쩌지. 그 자리에서 미친 듯이 도망치지 않았다면 도준형은 나를 그대로 죽였을지도 모른다. 이제 정말 어떡하지? 여름방학은 아직도 한참 남았다. …종강까지 남은 시간 동안 도준형을 피해 다닐 수 있을까. 하얗게 질린 산호의 얼굴은 한참 동안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정말 너무나도 멍청하고 바보 같은 실수였다. 집으로 돌아온 산호는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내가 왜 그랬을까. 자취방이 바로 학교 앞인데 왜 참지 못했을까. 그러나 후회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한 가지 확실히 하고 싶은 게 있다. 산호가 그 짓을 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절대로 그런 변태 같은 짓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는 파렴치한 사람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산호의 이성을 끊어버린 것은 도준형의 사진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문제를 푸느라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인상을 찌푸린 도준형의 옆모습을 몰래 찍은 사진.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보고 싶을 때 사진이라도 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같은 강의를 들을 때, 간신히 찍은 사진이었다. 도준형과 산호의 거리는 엄청나게 멀었고 접점도 없었다. 짝사랑을 고백할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 도준형의 주변에는 예쁜 여자애들이 많았다. 첫사랑도 스무 살 먹고 처음 하는 산호처럼 조용하고 재미없는 남자에게 그가 관심을 가질 리가 없었다. 산호가 필요한 건, 그저 마음을 정리할 때까지 닳도록 보고 애달파 할 사진 한 장이었다. 그러나 몰래 찍은 사진은 산호의 생각보다 선정적이었다. 지나치게.
뭐에 홀린 것처럼 산호는 강의실을 나와 인적이 적은 구석의 화장실로 들어갔다. 잠금 고리가 고장 난 낡은 화장실. 그때라도 멈췄어야 했다. 적어도 문을 잠글 수 있는 화장실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산호는 한 손에 핸드폰을 들고 다급하게 수음을 시작했다. 화면에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인상을 찌푸린 도준형이 둥둥 떠 있었다.
황홀했다. 자신의 손을 그의 손이라 망상하며 사정 직전에 이르렀을 때, 산호는 절망해야 했다.
“사람 있…. 뭐야, 고등학생도 아니고 화장실에서 딸을 치냐.”
도준형의 목소리. 휭하니 열린 화장실 문. 툭. 산호의 손에서 핸드폰이 떨어졌다. 산호는 멍하니 앉아 옷을 추스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침을 삼켰다.
“야, 너 폰 떨어졌다.”
난생처음 보는 사내놈의 자위 장면이 생각만큼 역겹지는 않다는 것이 준형의 감상이었다. 하얗고 깨끗하게 생긴 외모 탓도 있으려나. 수염 자국도 없는 얼굴과 순하게 생긴 눈. 그래서 준형은 나름대로 친절을 베풀었다. 그리고 주워든 핸드폰 화면을 무심코 본 준형의 표정은 아까처럼 살짝 찡그려졌다. 바닥에 떨어진 산호의 핸드폰 화면은 아까처럼 그대로, 도준형이었다.
“내 사진이네.”
“…미, 미안해. 그게….”
“…너 뭐냐?”
“정말 미안해. 내가….”
“와, 내가 살다 살다 남의 딸감도 되어본다, 별….”
어떻게 그 상황을 빠져나왔는지 산호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젖은 성기를 닦지도 못하고 황급히 옷을 추스른 뒤, 준형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아서 정신없이 달렸다.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붙잡히지 않고 자취방에 도착했을 때에야 산호는 정신이 들었다. 산호의 단정했던 손톱은 초조한 이에 물어 뜯겨 피딱지가 앉았다. 나는 이제 어떻게 될까. 도준형은 더럽다며 욕을 할까. 아니면 소문을 냈을까. 어느 쪽이든 절망적이었다. 산호가 알기로 도준형의 성격은 그리 좋지 않았다. 개강 총회에서 후배들에게 억지로 술을 권하던 선배의 머리에 생맥주잔을 그대로 엎어버린 도준형은, 너무 심한 게 아니냐는 다른 선배의 말을 비웃으며 술집을 떠났다. 그 선배에게 준형의 첫인상은 최악이었겠지만 산호에게는 아니었다. 짝사랑의 시작이었다.
선배들에게 단단히 밉보인 탓에 준형에 대한 소문은 자주 악의를 품고 퍼졌다. 고등학생 때 알아주는 양아치였대. 어쩐지. 얼굴값 하게 생겼던데. 아직도 싸움질하고 돌아다니는 거 아니야? 저번에 보니까 손에 붕대 감았던데. 쟤 성적은 좋대? 아니, 잔디 깔아주고 들어왔대. 고작 우리 학교를? 야 우리 학교가 어때서! 인 서울 하기가 쉬운 줄 아나. 걔 부모가 사채업자라던데. 진짜? 하긴 비싼 것만 걸치고 다니더라. 에이, 진짜 돈 많으면 유학을 갔겠지. 하긴. 근데 성격 별로던데. 내가 말 걸었더니 그대로 씹더라. 그 많은 소문 속에서 산호에게 와 닿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산호가 직접 겪은 일은 없었으니까. 지나치듯 보게 된 준형의 모습은 물론 사근사근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천사 같은 얼굴에 제멋대로인 성격이라니. 처음에 산호는 도준형을 살짝 동경하기 시작했다. 동경이 사랑이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준형은 어울려 다니는 몇몇 말고 다른 사람들과는 말도 잘 섞지 않았다. 그 몇몇도 같은 과 동기들이었는데 산호와는 말을 섞어본 적도 없었다. 스치기만 했던 산호가 느끼기에도 그들은 오래전부터 알던 것처럼 친해 보였다. 또, 준형은 자주 고백을 받았다. 기분이 좋을 때는 그저 무시 정도로 끝났지만 준형의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대놓고 폭언을 퍼부으며 퇴짜를 놓았다. 우연히 그것을 목격했던 산호는 절대로 고백 같은 건 욕심 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학교 대나무 숲에는 준형을 찾는 글이 매주 올라오곤 했다. 진지하게 만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지만 실은 잘 모르겠다. 그건 산호의 희망 사항이었기 때문에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아무튼, 동기들에게도 준형의 평판은 좋지 않았지만 준형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산호는 그 점도 좋았다. 소심한 자신과는 달리 대범해 보여서 멀리서 조용히 좋아하기만 하는 것으로도 좋았다.
그런데 왜 나는 그 사진을 찍었을까. 왜 그 화장실에서, 왜 하필이면…. 그런데 왜 준형은 그 화장실에 왔던 걸까. 산호는 물어뜯을 손톱이 남아있지 않자 이제 입술을 뜯었다. 피딱지가 앉은 손톱은 제가 저지른 일처럼 추해보였다. 그렇게 뜬눈으로 밤을 꼬박 새웠다. 다음날은 전공 수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모자를 눌러 쓰고 학교에 갔다. 그러나 전공 수업을 마친 뒤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왔다. 강의실로 들어서던 도준형이 누군가를 찾는 듯 강의실 안을 둘러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산호는 그게 저를 찾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교양 수업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무서워서 머리까지 아파왔다. 눈앞에 놓인 현실이 너무 아득해서 마시지도 못하는 소주를 꾸역꾸역 들이마셨다. 한 병을 다 비웠더니 몸이 으슬으슬해졌고, 기어코 눈물을 짜내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내가 자길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면 도준형은 이제까지보다 더 심하게 폭언을 퍼부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남자니까 몇 대 맞을지도 모른다. 산호는 이틀 동안 소주병 몇 개를 끌어안고 혼자 끙끙 앓으며 자체 휴강을 했다. 곧 기말고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합리화가 아니라 정말로 그만큼 두려웠다.
부모님께는 죄송했다. 없는 살림에 자취방도 구해주시고 등록금도 내주시는데. 한숨이 나왔다. 술을 마시면서도 마음이 불안했다. 도준형을 찾아가서 무릎이라도 꿇고 빌어야지. 그러면 용서는 해줄까. 시험은 봐야 한다. 힘들게 들어온 학교를 그만둘 수는 없다. 용서해주지 않으면 어쩌지. 다음 학기까지 버틸 수는 있을까. 군대라도 다녀오면 도준형이 나를 잊어줄까. 생각할수록 눈앞이 캄캄했다. 내가 왜 그랬을까. 산호는 술병이 전부 비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틀 내내 술 말고는 먹은 게 없어 속도 허했다. 편의점에 가야겠다. 술기운이 남아 어지러운 정신을 애써 다잡으며 간신히 샤워를 하고 집을 나선 산호는 그 선택을 바로 후회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 덕분에 술기운은 한층 더 심해진 것 같았고 자취방을 학교와 가까운 골목에 잡은 것이 후회스러웠다. 번화가가 가까워 안전하다던 주인아저씨의 말을 왜 좋다고만 여겼을까. 편의점으로 가는 길목은 산호가 다니는 대학의 학생들이 즐겨 찾는 값싼 술집과 식당들이 모여 있다. 자취방과 편의점은 몇 걸음 떨어져 있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비좁고 복잡하고 시끄러운 골목에서 산호는 이제까지 피해왔던 준형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현관문을 닫고 채 열 걸음도 떼기 전이었다. 산호의 머릿속이 하얗게 휘발되었다. 어떻게 피할 새도 없었다. 준형이 느릿느릿 눈을 깜박이며 산호에게 말했다.
“너, 이 근처 살아?”
“어? 응….”
“그럼 미안한데 나 물 좀 주라.”
준형은 술 냄새를 잔뜩 풍기며 곧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산호보다 훨씬 더 많이 취한 것처럼 보였다. 다행일까. 적어도 산호에게 주먹을 휘두를 생각은 없어 보였다. 산호는 망설이다가 준형을 부축해 집으로 들어왔다. 좁은 원룸은 두 청년이 마땅히 앉을 자리가 없어서 산호는 준형을 바닥에 놓인 매트리스 위에 앉게 했다. 침대를 놓으면 집이 더 좁아 보여서 매트리스만 바닥에 놓았었다. 그런데 준형이 그 위에서 긴 다리를 불편하게 구부린 채 앉아있는 것을 보니 산호는 조금 부끄러웠다.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 물을 따라주고 나자 갑자기 잠에서 깬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도준형이 내 방에 들어왔다. 산호는 두근거리는 가슴 때문에 애써 숨을 참았다.
“혼자 살아?”
그렇게 묻는 목소리는 아까와 달리 취한 기색이 없었다. 금세 비워버린 컵을 바닥에 내려놓은 준형이 산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산호는 저도 모르게 황급히 대답했다.
“아, 응. 자취해.”
“…….”
준형은 말없이 산호를 쳐다보았고 산호는 식은땀이 흘렀다. 잠깐의 대치 상태가 억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사과를 하려면 지금밖에 없다. 받아주지 않으면 붙잡고 싹싹 빌기라도 해야지. 복잡한 머릿속을 허둥지둥 추스른 산호가 입을 뗐다.
“저기….”
“아. 너 나 좋아해?”
“…어? 아니! 절대!”
“근데 왜 내 사진 보면서 자위했어?”
“…….”
“나 남자한테 관심 없는데.”
“…미안해. 기분 나빴지. 난 그냥….”
“근데 넌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말하며 살짝 고개를 꺾는 준형에게서 묘한 코롱 향이 났다. 어른스럽고 위험한 냄새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산호의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뛰었다. 덜 깬 술기운이 다시 악마처럼 날뛰었다. 날이 더워서는 아니었다. 갑자기 이 상황이 살갗 위에 달라붙은 습기처럼 훅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내 방에, 도준형이, 나와 단둘이 있는 낯선 상황. 그러나 너무나도 자주 상상했던.
산호는 자신의 뛰어난 상상력이 원망스러웠다. 어색하게 준형의 시선을 피했다. 저를 보는 준형의 얼굴이 너무, 지나치게 잘생겼다. 준형의 갑작스런 말에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입만 뻥긋거렸다. 별안간 준형의 손이 산호의 발목을 잡아당겼다.
“앗…!”
준형의 손이 끌어당기는 대로 산호는 발을 내디뎠다. 넘어지지 않기 위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산호는 어릴 적부터 그런 류의 행동이 빨랐다. 엄마가 만지지 말라고 했던 성냥은 친구가 아무리 꼬셔도 만지지 않았고 선생님이 내준 숙제는 꼬박꼬박 빼먹지 않고 해갔다. 겁이 많은 덕분에 생존본능이 강했다, 뭐 그런 얘기다. 맨살에 닿은 뜨겁고 큰 손은 산호에겐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산호는 최대한 다른 생각을 하려 애썼지만 실패였다. 준형은 엄지손가락으로 산호의 복숭아뼈를 천천히 문지르며 말했다.
“…넌 무릎도 분홍색이고 다리털도 없고….”
준형의 시선과 손가락이 발목에서 종아리로, 종아리에서 허벅지로 물 흐르듯 타고 올라왔다. 허벅지를 누르듯 쓰다듬는 손길에 산호는 굳어버렸다. 노골적인 평가에 얼굴이 화끈거려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저께 보니까 자지도 분홍색이던데.”
산호는 부끄러움에 입술을 깨물면서도 도준형이 신기했다. 노골적인 얘기를 하면서도 태도는 일상적이고 말투는 평이하다. 당황하고 부끄러워하는 것은 산호뿐이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산호는 알 수가 없었다. 산호의 첫사랑은 조금 직설적이었다. 도준형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럼 너 혹시 젖꼭지도 분홍색이야?”
“…….”
“농담. 근데 너 진짜 나 안 좋아해?”
“그….”
“말 해봐. 나 좋아하지도 않는데 왜 내 사진 보면서 자위했어?”
“정말 미안해. 내가 잘못했….”
“아니, 내가 딸감이 된 건 처음이라 궁금해서 그래. 몇 번이나 했어?”
“그게 처음이었어…. 정말 미안해! 앞으로 안 그럴…!”
“좋았어?”
“…….”
“왜 대답이 없어.”
“…미안해.”
“미안해? 정말?”
“정말이야. 내가 정말 미안해. 다시는….”
“미안하면 아까 하던 거, 마저 해봐. 내 앞에서.”
“무슨….”
“사진 말고 진짜 얼굴 보여주잖아. 해 봐, 얼른.”
한쪽 입술을 끌어올려 웃던 도준형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산호야.”
등줄기에 소름이 쭉 돋았다. 도준형이 내 이름을 알았던가. 알고 있었다고 해도 저렇게 친근하게 부를 리가 없는데. 도준형의 얼굴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제는 내쉬는 숨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도준형의 숨이 내 윗입술에 훅 끼쳤다.
“산호야, 대답해.”
“…응.”
“학교에 소문나고 싶어?”
“아니! 제발 부탁이야…. 그러지 말아줘, 제발….”""
“그럼 마저 해보라니까? 이렇게 쉬운데 왜 말을 못 알아듣지.”
도준형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찌푸린 얼굴도 침이 절로 삼켜질 만큼 잘났다. 그래서 산호는 자신이 졌다고 생각했다. 산호는 천천히 바지를 벗었다. 도준형의 찌푸린 얼굴이 그제야 펴졌다. 산호는 시선을 피하며 손을 움직였다. 어쩌면 조금쯤 도준형이 이런 짓을 시키는 이유에 대해 기대를 했는지도 모른다. 말의 앞뒤가 맞지 않았다. 남자에게 관심 없다고 했으면서 왜 남자에게 자위를 하라고 하는 걸까. 산호는 미약한 기대가 제 안에서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짝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산호는 긴장감이 흥분의 촉매라는 것을 깨달았다. 입술에 닿던 도준형의 날숨. 내 침대에 앉아 물끄러미 저를 바라보는 도준형. 그 단순한 상황만으로도 산호는 발기했다. 창피함과 흥분은 곧 구분할 수도 없게 뒤섞였다. 그다음부터는 본능의 영역이었다. 아. 도준형. 도준형. 산호의 숨이 가빠졌다. 이건 꿈일까? 머릿속은 이미 이성을 잃었다. 흥미로운 표정으로 저를 보는 준형에게 산호가 말했다.
“얼굴….”
“얼굴 뭐.”
“찌푸려주면 안 돼…?”
준형은 픽 웃더니 아까처럼 미간을 찌푸려주었다. 그리고는 일부러인지 무심결인지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을 느리게 핥았다. 산호는 그런 준형을 보며 신음했다. 아아. 좋아. 터질 것처럼 팽팽하게 발기한 성기를 손에 쥐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땅한 것이 없었다.
“왜?”
“그…. 로션 좀….”
“이거?”
준형이 책상에 놓여있던 바디 로션을 산호에게 건넸다. 산호는 바짝 선 성기 위로 로션을 쥐어짜냈다. 로션 통에서 공기가 로션과 함께 쏟아지며 부지직 소리가 났다. 희고 묽은 로션이 정액처럼 느리게 흘러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준형이 침을 꿀꺽 삼켰다. 산호는 급하게 로션을 손으로 비볐다. 질척이는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하….”
“야, 너….”
“…흐, 응? 왜….”
“원래 뒤로 쑤시면서 자위해?”
“으, 응, 응….”
“왜 화장실에선 안 쑤셨어?”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산호의 손가락이 로션 범벅이 된 채로 뒤를 쑤셨다. 준형이 머리를 쓸어 올렸다. 도준형의 입에서 하, 한숨 같은 웃음이 터져나왔다.
“내가 쑤셔줄까?”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산호는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몸은 이미 쾌감으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준형이 산호에게 손을 내밀자 산호는 준형의 손을 낚아채듯 잡아서 제 구멍에 넣었다. 가만히 산호가 이끄는 대로 손을 빌려주던 준형이 별안간 난폭하게 안을 쑤셨다.
“너 진짜 개 쩐다.”
“아…! 그렇게 세게, 움직이면…!”
산호는 제가 어느 틈에 등을 깔고 누웠는지도 몰랐다. 제 위를 누르는 준형의 손가락이 내벽을 요란하게 쑤셔대고 있었다. 성에 차지 않는지 로션 뚜껑을 입으로 연 준형은 그대로 로션을 짜냈다. 아까보다 많은 양의 로션이 급하게 짜져 퓻퓻 소리를 내며 준형의 손과 산호의 엉덩이 틈 사이로 쏟아졌다.
“물 존나 많아. 걸레 같이.”
“하으….”
준형의 손이 빨라졌고 산호의 신음도 덩달아 빨라졌다. 숨을 쉴 틈도 없어 힉힉대며 얼굴을 붉혔다. 로션 때문에 질척한 소리가 귀에 쩍쩍 달라붙었다.
“분수 터진 것 같네. 난 너처럼 잘 젖는 애들이 좋더라.”
“으으응…! 응! 아!”
그렇게 말하며 준형은 부러 찔꺽거리는 소리를 더 크게 내도록 손을 움직였다. 산호는 준형의 다른 손을 붙잡고 매달리며 고개를 저었다. 준형은 그 손을 매정하게 떼어내고 로션이 짓뭉개진 산호의 엉덩이를 때렸다.
“아!”
“피부가 이렇게 하야면 자국도 잘 남겠다. 그치.”
“아으…. 힉…! 그만….”
“좋은데 왜.”
“으응…! 으….”
그러나 절정은 오지 않았다. 산호의 안을 쑤시던 준형의 손이 별안간 휙 빠져나갔다. 산호는 빨개진 눈으로 준형을 보았다. 준형은 숨을 몰아쉬며 바지를 벗었다. 그 행동의 의미는 뚜렷했다. 산호는 이러다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이건 꿈일까.
준형의 성기는 제 것보다 훨씬 거대했다. 질 나쁜 인터넷 광고에서나 볼 법한 딜도처럼 무지막지한 크기여서 산호는 잠깐 숨 쉬는 것도 잊을 뻔 했다. 준형의 성기는 투명한 액으로 끝을 적신 채 꺼떡이고 있었다. 산호의 아랫배가 긴장으로 뻣뻣해졌다.
“넣어 봐도 돼?”
산호가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너무 크다. 저걸 넣었다간 찢어질지도 모른다.
“뭘 그렇게 기겁해. 진짜 자지 박혀본 적은 없어?”
“어, 없어…!”
“아…. 그럼 살살 할게. 어?”
준형이 산호 위로 올라타 제 성기 끝을 구멍에 문지르며 칭얼거렸다. 매끈하고 통통한 귀두가 당장이라도 찔러올 듯 구멍을 지분거렸다.
“한 번만, 어? 안 아프게 한다니까.”
산호가 고개를 끄덕인 것은 애원하는 준형의 얼굴 때문이었다. 도준형이 내게 앓는 소리로 삽입을 조르고 있었다. 힘으로 제압하려 들면 이길 수 없었을 게 뻔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그게 산호의 비어있던 마음 한구석을 채우고 우쭐하게 만들었다. 그 어리석은 짝사랑 덕분에 산호의 몸은 조금 고달파졌다.
준형은 산호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양손으로 산호의 허벅지를 벌리고 밑을 찍어 눌렀다. 손가락과 로션으로 풀어놓긴 했지만 안은 뻑뻑했다. 준형의 눈이 약이라도 빤 것처럼 풀어졌다. 쫀득하게 성기를 감싸는 내벽이 준형의 마지막 남은 이성을 후려갈겼다. 푹, 푹 찍어 누르는 허릿짓이 무자비했다. 산호가 소리 없는 신음을 뱉는 동안 준형은 난생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푹 젖어 들었다.
“아…!”
“그만, 흣…. 너무 깊,”
“더 깊게?”
“아니, 아…! 아으…!”
“알았어, 더 깊게 박아줄게.”
준형의 성기는 산호의 안을 더 파고들었고 산호의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준형은 산호의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미친 사람처럼 헉헉대며 몸을 부딪쳐 오고 얇은 티셔츠 위로 젖꼭지를 긁어댔다. 입안이 바짝 마르고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뱃속에 가스 불을 켠 것처럼 불꽃이 확 일어난다. 준형의 손이 산호의 티셔츠 안으로 들어왔다. 얇은 티셔츠는 금세 젖혀지고 판판한 가슴이 드러나자 준형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 진짜 분홍색이네.”
“흐윽…! 아, 하읏…!”
잠시 망설이던 준형의 혀가 유두에 와 닿았다. 산호가 몸을 파드득 떨었다. 혀는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힘을 주어 유두를 꾹꾹 문질렀다. 온몸이 떨렸다.
“하으…!”
산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준형의 머리칼을 쥐었다. 그러자 준형의 허릿짓이 난폭해졌다. 쾅쾅 내리찍는 몸은 단단하고 뜨거웠다. 정신없이 흔들리던 산호는 맞붙은 배 사이가 흥건해지는 것을 느꼈다. 안쪽을 계속 찌르는 탓인지 정액을 다 쏟아내자 물처럼 투명한 액이 질질 흘렀다.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쾌감이 산호를 몰아붙였다.
“안에 싼다. 괜찮지?”
“으…! 안 돼…!”
“왜. 어차피 임신도 안 하잖아.”
준형은 산호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다는 듯 입을 손으로 막은 채 산호의 성기를 움켜쥐었다. 덕분에 바짝 조여든 내벽은 준형의 성기를 촘촘하게 감싸 물었다. 폭풍 같은 정사였다. 준형의 사정은 길었다. 그러나 여운은 길지 않았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배출을 마친 제 성기를 빼낸 준형은 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
“휴지 어디 있어?”
“어…. 욕실에….”
“아 존나 귀찮게…. 그냥 여기 닦는다? 빨래하면 되잖아.”
아까 벗겨낸 산호의 티셔츠를 손에 쥔 준형이 말했다. 산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얇은 여름 티셔츠는 준형의 손에 구겨져 휴지 대신 그의 성기를 꼼꼼히 닦았다. 그리고 가차 없이 바닥으로 던져졌다. 젖은 바닥 위로 떨어진 티셔츠를 보며 산호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어째서 엉망이 된 티셔츠가 제 마음 같아 보였는지 모르겠다.
산호가 멍하니 앉아있는 사이에 옷을 다시 챙겨 입은 준형이 냉장고를 열며 물었다.
“먹을 거 없어?”
“아, 그게….”
“뭔 집에 술병만 굴러다니냐.”
산호가 뭐라고 대답할 새도 없이 준형은 현관으로 향했다. 이대로 가버리는 건가? 준형과 마주친 이후의 순간들은 당황의 연속이었다. 쾅 하고 문이 닫히자 산호는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도 못한 채 그대로 주저앉아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삐리릭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잠겼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지. 도준형은 왜 갑자기 가버렸지. 이게 뭐지. 별로 기분 좋은 생각들은 아니었다. 산호의 기분이 최악으로 가라앉았을 즈음, 준형이 현관문을 두드렸다.
“문 열어.”
산호는 홀린 듯이 일어나 문을 열었다. 준형은 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아, 깜짝이야. 왜 아직도 벗고 있어? 한 번 더 하고 싶어?”
건들건들. 가벼운 말투와 걸음걸이. 준형은 망설임도 없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어디 갔다 왔어?”
“도시락 사러 편의점. 야, 이거 전자레인지에 하나씩 돌려야 돼?”
“아…. 내가 할게. 이리 줘.”
준형은 부스럭거리며 편의점 도시락 두 개를 꺼냈다. 산호가 물끄러미 그것을 보자 준형이 물었다.
“왜? 불고기 싫어? 귀찮아서 똑같은 걸로 두 개 사 왔는데. 그냥 먹지.”
“…고마워.”
준형은 사람 다루는 법을 안다. 산호처럼 어리숙한 사람은 공들일 필요도 없다. 첫사랑은 끝났다. 산호는 준형의 행동에 속수무책으로 정신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엉망이 된 티셔츠 때문에 가라앉았던 기분은 고작 사천 원짜리 도시락 하나에 풍선처럼 둥실둥실 떠올랐다. 산호가 황급히 옷을 걸치고 전자레인지에 도시락을 데우는 동안 준형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벽에 세워져 있던 접이식 탁자를 펼쳤다.
산호는 제 자취방에서 준형과 몸을 섞고, 마주 보고 앉아 준형이 사 온 도시락을 까먹는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더럽다고 욕을 하거나, 학교에 소문을 내거나, 그도 아니면 몇 대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간신히 각오를 다지고 있었는데 산호의 예상은 완전히 박살 났다. 그래서 도시락을 다 먹고, 준형이 돌아갈 때까지 산호는 그저 상황에 이끌려 시간을 보냈다.
“너 교양 나랑 같은 거 듣지 않냐. 영화와 영어?”
“어? 어….”
“내일 보자.”
현관문이 닫히고 산호는 제 얼굴을 꼬집어보았다. 정말로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사소하지만 중요한 물음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준형과 말 한 번 섞어본 적 없는데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았을까. 우리 집 근처엔 왜 왔던 걸까. 왜 나랑 섹스한 걸까. 왜 도시락을 사다 준 걸까. 왜 나랑 밥을 먹고, 왜 내일 보자고 말한 걸까. 준형과 나는, 우리는 이제 무슨 관계가 되는 걸까.
산호의 마음은 어쩔 수 없이 부풀었다. 짝사랑이란 이렇게 사람의 판단력을 흐린다.
* * *
“…점심을 같이 먹자고?”
“싫음 말고.”
산호의 가슴은 준형 때문에 계속 두근거렸다. 다음날 준형은 강의실 옆자리에 앉아 수업 내내 배가 고프다며 칭얼댔다. 벌써 몇 번이나 들었던 수업이지만 준형이 산호의 옆에 앉은 것은 처음이다. 아니, 그 전까지는 아예 아는 척도 한 적이 없었다. 산호는 준형이 제 팔을 잡으며 치댈 때마다 뱃속이 간지러웠다. 준형이 남자를 좋아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지만, 어쨌든 저를 대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예 없는 것 같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착각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수업을 마친 후 준형은 자연스레 산호의 집으로 왔다. 자연스럽게 몸을 섞고, 학교에선 같이 수업을 듣고 밥을 먹었다. 그런 하루가 며칠이 되고, 일주일이 넘고, 보름 가까이 되자 산호는 완전히 마음을 놓아버렸다.
“산호 너는 얘랑 어쩌다 친해졌냐.”
석준의 말에 준형이 웃으며 발차기를 날렸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표정을 굳혔을 만한 말도 준형은 장난처럼 넘겼다. 박성경과 윤석준, 김동진까지 넷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준형과 친했다고 들었다. 조금 이상한 조합이기는 했다.
박성경은 과에서 가장 성적이 좋았지만 준형보다 더 대하기 어려웠다. 준형이 제게 고백한 사람에게 폭언을 퍼붓는 타입이라면 성경은 경멸하는 눈빛만 보내는 타입이었다. 둘 다 어렵긴 했지만 결이 달랐다. 무리에서 유일하게 조용하고 잘 나서지도 않는 성경이 산호는 신기했다.
사람을 빤히 보는 눈과 단정하지만 권태로운 얼굴. 행동이 느릿느릿하고 말수도 적었지만 산호는 알 수 있었다. 이 무리의 서열은 준형 다음이 성경이라는 걸. 준형은 비속어를 자주 썼지만 성경은 입을 여는 것 자체를 별로 못 봤다. 반면 석준과 동진은 시끄럽고 눈에 띄고 놀기 좋아해서 무리의 분위기를 좋게 유지했다. 아무튼 준형의 툴툴거림에 눈에 띄게 안절부절못하는 것은 산호뿐이었다.
“뭘 어쩌다야. 사람이 친해지는데 이유 있냐.”
준형의 말에 산호는 또 조금 우쭐해졌다. 준형의 인간관계는 산호의 예상보다 협소했다. 준형을 무서워하거나 친해지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준형이 말을 섞는 사람은 저 셋과 산호가 다였다. 준형의 친구들은 낯도 가리지 않고 산호를 무리에 받아주었다. 그 어려운 박성경마저도. 단지 준형과 산호가 친해졌다는 이유로.
자기들끼리의 서열이 어쨌든 간에 적어도 그 넷은 산호보다는 훨씬 위에 있었다. 그런데 산호가 뜬금없이 끼어들었는데도 말을 섞고 어울려준다. 산호는 준형 덕분에 얻게 된 이 유치하고 조악한 출세마저도 좋았다. 그러지 않기에는 준형이 산호에게 너무 관대했다. 그러니까 산호가 우쭐해진 것은 전적으로 산호의 탓만은 아니다.
“…학식 싫어?”
“존나 맛없잖아.”
그러나 석준이 산호에게 어깨동무를 하자 준형이 그 손을 탁 쳐내며 말했다.
“야, 꺼져. 난 얘랑 고기 먹으러 갈 거야.”
친해 보이는 것과 별개로 무리의 서열은 확실했다. 산호가 아무리 무리에 끼어든 지 얼마 되지 않았다지만 그걸 모를 수는 없었다. 너무나도 명백했으니까. 준형은 네 사람 사이에서도 가장 위에 있었다. 보고 있으면 껄끄러웠다. 서로 농담을 하고 장난을 치는 것은 같았지만, 준형은 그들에게 주먹질을 할 수 있었고 그들은 할 수 없었다. 성경은 애초에 누구에게도 시비를 걸지 않았으므로 배제되어 있는 편이었다. 남들이 치고받고 싸우건 일방적으로 얻어맞건 별로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하지만 동준과 석진이 성경에게 시비를 걸지 못하는 걸 보면 관계의 우열은 뚜렷했다. 그리고 준형은 산호에게는 서열 정리 없이 너그러웠다. 석준이 조금 지나친 농담을 하면 대신 발로 차주고, 밥을 먹을 땐 산호의 몫을 대신 계산해주었다. 꼭…. 사귀는 것처럼. 그러니까 산호가 착각에 빠지고 우쭐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석준이 삐친 거 아냐?”
“뭐 하러 신경 써. 그냥 둬.”
도준형은 고기를 잘 구웠다. 그런 건 잘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산호는 도준형이 구워서 제 앞에 놔주는 고기들을 집어먹으며 행복한 상상에 부풀었다. 산호는 그런 게 좋았다. 천성이 다정한 사람보다는, 나에게만 다정한 사람. 그래서 그 다정함을 온전히 혼자 독점할 수 있는 사람. 참으로 유치하고 사춘기에나 할 법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도준형과 지내다보면 저에게 그런 유치한 행운이 찾아온 것 같았다. 도준형의 행동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그래서 준형과 둘이 있으면 산호는 우쭐하고 행복해서 도저히 진정할 수가 없었다. 바뀐 것은 준형 하나인데, 산호의 세상은 여러모로 훨씬 달라졌다. 꼭 준형과의 관계에서만이 아니었다.
“뭐?”
“너 유산호한테 일 맡겨놨냐고. 교수님이 그러라고 조별 과제 내주신 줄 아나.”
“아니, 난 그게 아니고….”
“그럼 왜 얘만 다 하냐? 존나 어이 없네.”
평소에도 조별 과제는 산호를 괴롭히는 일이었다. 남한테 맡기는 게 불안해서 일을 도맡아 하다 보니 무임승차에 도가 튼 놈들은 꼭 산호와 같은 조를 하겠다고 매달렸다. 싫은 소리를 잘 하지 못하는 성격 탓도 있었는데 그것을 준형이 너무 손쉽게 끊어주었다. 별 것 아닌 일인데도 도준형이 해주었다는 것이 산호를 설레게 했다.
“유산호 나랑 같은 조 할 거니까 넌 딴 사람 알아봐.”
“갑자기 조원을 빼 가면 우리는…!”
“꼬우면 너도 빼 가보던가.”
“…….”
동기는 꼬리를 말고 사라졌다. 도준형이 그렇게 무서운가. 산호는 얼마 전의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고 멍청한 생각을 했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산호의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도준형이었는데.
“그리고 너네, 우리 조는 제대로 참여 안 하면 이름 뺄 테니까 그렇게 알아.”
“워. 도준형 카리스마.”
“아, 닥쳐 새끼야.”
“시끄럽고, 너희 다 앉아. 내가 파트 나눠봤는데….”
굳어진 분위기는 석준과 동진이 웃어서 풀어버렸고 성경은 조장을 맡아 파트를 분배했다. 덕분에 산호는 편한 마음으로 과제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산호는 곧 서열이라는 것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모두 불만 없이 성경이 나눈 파트를 받아들였고, 산호가 조별 과제를 해본 이래 처음으로 무임승차자가 없었다.
“와, 너 필기 대박이다. 나 좀 빌려주라.”
“그래.”
“야야, 꺼져. 네가 왜 얘 필기를 빌려. 성경이 저 새끼한테 빌려달라고 해.”
“아 왜. 얘 정리 진짜 잘 해놨는데.”
“그거 본다고 네 성적이 올라갈 것 같냐. 그냥 하던 대로 해.”
“와. 너 나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냐?”
산호는 즐거웠다. 화장실에서 준형과 마주쳤을 땐 세상이 끝날 줄 알았는데, 세상은 오히려 전보다 행복해졌다. 그래서 가끔 찝찝한 기분이 드는 것쯤은 무시할 수 있었다.
“여보세요. 어, 웬일이냐.”
전화를 받은 준형이 잠시 산호를 쳐다보다가 일어나서 나가버렸다. 별 거 아닌데도 기분이 이상했다. 산호는 제가 긴장한 것처럼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석준에게 물었다.
“근데 너넨 여친 없어?”
“왜? 너 설마 있냐?”
“아니, 나는 없는데.”
“그럼 갑자기 왜? 설마 도준형 여자 생김?”
석준이 지나치게 분개했고 동진이 장단을 맞췄다. 그리고 조용히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박성경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산호를 보았다.
“도준형 여친 없어.”
“…….”
“내가 알기로는.”
성경의 까만 눈동자가 저를 응시하자 산호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산호가 궁금해했던 것을 정확히 꿰뚫어 본 것처럼 날카로운 대답이었다. 산호의 심장이 죄라도 지은 것처럼 쿵쿵거렸다. 다행히 전화를 끊은 준형이 금방 자리에 돌아왔기 때문에 산호는 어색하게 웃었고 화제는 다시 과제로 돌아갔다.
성경의 말에 산호는 한없이 안도하면서 동시에 불안해졌다. 언제나 한 발짝 뒤에서 관조하듯 무리를 내려다보는 박성경. 제가 준형에게 품은 감정도 눈치챈 걸까. 알면서도 눈감아주는 걸까. 그럴 리가 없다. 산호는 사람들 앞에서 단 한번도 도준형을 좋아하는 티를 낸 적이 없다. 그러나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어서 산호는 속으로 삼켜야 했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준형에게 직접 물어볼 용기는 없었지만 다른 사람이 없다는 걸 알게 되니 안절부절못하던 관계에 조금 숨통이 트였다. 그날도 산호는 좁은 제 원룸에서 준형과 몸을 섞었다. 달라진 것은 준형이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산호의 침대에서 잔 것뿐이었지만 산호의 마음은 사랑으로 충만했다.
* * *
조금 트였던 숨통이 다시 막힌 것은 며칠 뒤 점심쯤이었다. 준형과 그의 친구들은 산호와 달리 대부분의 수업을 함께 들었다. 겹치는 수업이 몇 개 있는 터라 산호도 오늘은 그 사이에 껴서 걷고 있었다. 준형이 그러자고 했기 때문에 아무도 싫다고 하지 않았다.
“오늘은 웬일로 학식 먹게?”
“그러게. 오올. 웬일이냐?”
“머리 아프니까 좀 닥쳐, 씨발.”
준형의 기분은 저기압이었다. 석준과 동진은 금세 분위기를 파악하고 입을 다물었다. 성경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옆에서 걸었고 산호는 준형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느라 식당에 도착해서야 남은 식권을 저번에 이미 써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나 식권 사야 되는데.”
“됐어. 나 두 장 있어.”
아까보다 한결 풀린 준형의 목소리가 산호를 붙잡았다. 산호의 기분은 준형 덕분에 요즘 늘 롤러코스터를 탔다. 밥을 다 먹고 나오자 누군가 준형을 불러 세웠다.
“뭐야.”
“아니. 저번에는 내가 미안했다고….”
“너 누군데?”
준형의 목소리에 짜증이 실리자 산호가 나섰다.
“저번에 조별 과제….”
“아.”
“그…. 아이스크림 먹을래? 내가 살게. 사과의 뜻으로.”
조별 과제 때문에 준형에게 산호를 뺏긴 동기였다. 산호는 조금 당황했다. 도준형과 친해지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이 많은 것은 알지만 이건 정말 이상했다. 쟤는 왜 내가 아니라 도준형한테 사과를 하는 걸까. 다행히 옆에 있던 산호가 민망해질 정도로 빤히 동기를 바라보던 준형이 산호에게 물었다.
“넌 뭐 먹을래?”
“어? 나? 나 괜찮은데….”
“나 메로나 먹을 건데, 너도 그거 먹어. 야, 살 거면 두 개 사라?”
“어, 으응.”
떨떠름한 얼굴을 한 동기와 편의점까지 걷는 것은 불편한 일이었다. 그러나 준형에게 건네받은 메로나의 맛은 꿀처럼 달았다. 이전 같았다면 산호도 셔틀과 다름없는 짓이라며 속으로 욕을 삼켰을 것이다. 그러나 편했다. 어쩌면 이런 게 연애가 아닐까. 산호는 속 편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편안한 생활에 익숙해지는 것은 본능이었다. 자꾸 웃음이 났다. 바보가 된 것처럼.
그래서 산호는 멍청하게도 동아리방에서 하고 싶다는 준형의 말을 거절하지 못했다. 준형의 말을 들을 때마다 산호의 일상은 계단을 오르듯 조금씩 나아졌다. 준형은 산호가 뭔가를 거절할 때마다 능숙하게 산호를 달랬다. 강요 같지 않은 부탁은 들어주지 않으면 산호가 매정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조금만 정신을 빼놓고 있으면 산호는 준형이 하라는 대로 하게 된다. 아주 싫은 것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산호도 들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준형이 시키는 대로 하면 결국은 산호도 좋아서 눈물을 글썽이게 되곤 했다. 준형에게 반항할 이유가 없다.
“아, 사람 안 온다니까.”
“그래도 불안한데….”
“그래서 하기 싫다고?”
“그건 아니지만….”
“앙탈 그만 떨고 여기 앉아봐.”
의자에 걸터앉은 준형이 제 허벅지를 툭툭 쳤다. 산호는 잠겨있지만 허술해 보이는 문을 한 번 더 만져보고는 준형에게 다가갔다. 사실은 시간이 갈수록 불안감이 커졌다. 산호를 특별 취급하면서도 준형은 결코 사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원래 그런 말을 하지 않는 건가? 아니면 나와의 관계를 진지하지 않게 생각하는 걸까? 우리는 그럼 무슨 관계지? 친구도 아니고 연인도 아니다. 이름 조차 없는 관계가 산호는 불안하고 싫었다. 하라는 대로 하면 상처럼 주어지는 특별 취급이 조금 더 특별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산호는 그래서 조급해졌다. 지금 당장은 나와 몸을 섞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준형이 언제 내게 질릴지 모른다. 여자 친구가 없다는 것은 성경에게 들어 알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내게 사귀자는 말을 한 것도 아니다. 확답을 받지 못한 관계는 산호가 준형에게 더 매달리는 원인이었다.
“왜 이렇게 안절부절못해?”
“으응…! 하아….”
흐트러짐 없이 바지 지퍼만 내린 채로 앉아있는 준형의 위에서 산호는 희롱당했다. 준형과 달리 아래가 다 벗겨진 채로 푹푹 쑤셔지는 엉덩이는 빨갛게 손자국이 남았다. 티셔츠는 절대 벗지 않겠다는 산호의 말에 준형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곤 티셔츠 안으로 제 머리를 넣었다.
“너 젖꼭지도 존나 섰어.”
“흣, 아, 아…!”
“아으…. 빨아줄 때마다 구멍 쪼이는 것 좀 봐.”
“읏, 으, 흐윽! 아!”
붉게 달아오른 준형의 성기가 흰 엉덩이 사이를 파고드는 것이 반대편의 창문에 흐리게 비쳤다. 대체 누가 닦아놓은 건지 먼지 한 톨 없는 유리에는, 준형의 성기 군데군데 푸르게 돋은 핏줄까지 그대로 보였다. 준형의 손이 산호의 머리채를 잡았다. 고개가 팍 꺾어진 산호의 눈에도 구름 낀 하늘과 함께 비춰지는 둘의 모습이 보였다.
“아…. 창문 봐, 씨발.”
“으흐응…. 응! 응! 아!”
중증이다. 산호는 준형의 입에서 쏟아지는 욕설마저도 좋았다. 저렇게 잘생긴 입술로 욕을 하는 이유가 저와의 섹스 때문이라니. 산호가 반쯤 정신을 놓았다. 준형은 매번 아다처럼 구는 유산호가 생각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다. 빠르게 안을 쑤시는 기분이 환장하게 좋았다. 유산호의 내벽은 아무리 쑤셔도 쫀쫀하게 달라붙어 박는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준형은 산호의 아랫입술을 깨물며 뭉개지는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진작 박아줄 걸 그랬지.”
“아! 아…!”
“왜 혼자 딸이나 쳤어. 나한테, 박아달라고, 하지, 어?”
대답을 듣자고 한 소리는 아니었다. 이렇게 야한 줄 알았으면 정말 진작 박아줬을 텐데. 진심이었다. 준형은 산호의 생각보다 훨씬 더 산호가 마음에 들었다. 다음 강의가 있다는 말을 무시하고는 그대로 두 번이나 안에 싸버린 뒤에도 부족했다. 결국 테이블 위에 유산호를 엎어놓고 정액을 긁어내 준다며 손으로 구멍을 후벼 팠다. 준형의 손가락이 들락날락할 때마다 산호는 몸을 떨었다.
“손가락보다 자지로 쑤셔주는 게 더 좋지?”
“흐, 으응…!”
원래 희었던 엉덩이가 빨개진 채 제 손가락이 들어가는 대로 움찔움찔 떨렸다. 조금 전까지 제 좆을 받아내던 구멍이 좁아 들었다가 펴질 때마다 안에 싸지른 정액이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렇게 준형이 조금 일방적인 후희를 즐기고 있을 때였다.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준형의 핸드폰이 울렸다. 지이잉, 지이잉. 진동 소리에 먼저 눈길을 준 것은 산호였다.
“읏…. 너, 전화….”
“누군데?”
“아으…. 그만,”
몸을 일으키려던 산호가 그대로 굳었다. 핸드폰에 뜬 이름은 산호가 모르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여자 이름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굳이 말하자면 그건 짝사랑을 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일종의 촉이었다.
[윤서영]
준형이 산호의 안을 쑤시던 손가락을 엉덩이 살에 쓱 비벼 닦고는 핸드폰을 들었다. 산호는 파랗게 질린 채 바닥에 널브러진 바지와 속옷을 주워 입었다. 안은 화끈거렸고 닦지 못한 탓에 금방 팬티가 끈적해졌다. 그러나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통화를 하는 준형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조금 들떠있었다. 그동안 산호가 느꼈던 자그마한 찝찝함들이 모두 모여서 거대해진 기분이었다. 뜨거웠던 공기가 순식간에 식었다.
“괜찮아. 말 해. …어, 어. 그래, 그럼. 이따가 보든가. 어. 끊는다.”
“…….”
“…아, 뭐야. 바지 왜 입었어.”
“누구야?”
“윤서영?”
“…….”
“표정 왜 그러냐?”
“…누구냐니까?”
산호는 거의 울먹거리고 있었다. 준형은 별안간 기분이 좆같아짐을 느꼈다. 유산호가 저를 좋아한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귀찮게 구는 것은 딱 질색이다. 여자든 남자든 애인 삼을 생각은 한 톨도 없다. 무슨 오해를 하는 건지 뻔했다.
“…여자 친구는 아니지?”
“누가? 얘가?”
산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눈꼬리에 길게 눈물방울이 늘어졌다. 그리고 준형은 울먹이는 유산호의 얼굴이 꽤 구미를 당긴다고 생각했다. 질투하는 유산호는 좀 재미있을 것 같았다.
“여자 친구면 뭐. 어쩔 건데.”
“…여자 친구야?”
“그게 중요해?”
“성경이가 너 여친 없다고 했는데….”
“있든 없든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산호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준형의 대답이 너무 어이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도 나랑 몸을 비벼놓고 뻔뻔한 얼굴로 여자 친구의 존재를 얘기한다. 그간 내내 우쭐했던 스스로가 한심하고 분해서 어쩔 줄 모르고 몸을 떨었다.
“개새끼….”
“뭐?”
유산호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온 것은 처음이다. 그건 준형의 예상 밖이었다. 기분이 더러워졌다. 준형이 계속 해보라는 듯 산호를 바라보았다. 산호는 목소리를 떨면서도 준형에게 화를 냈다.
“나쁜 새끼…. 난 너 여자 친구 없는 줄 알았어.”
“야, 유산호.”
“근데….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나한테 한 마디도 안 했잖아! 너 그렇게….”
“유산호.”
“흐윽….”
“많이 컸다? 너 이제 내가 만만하지. 어?”
준형의 싸늘한 표정에 산호는 덜컥 겁이 났다. 그러나 겁이 나는 와중에도 분하고 억울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산호는 부들부들 떨면서 눈물을 닦았다.
“나쁜 새끼….”
“적당히 해라. 처맞기 싫으면.”
“너 다 알았잖아!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아….”
준형의 손이 산호의 머리채를 잡았다. 아까처럼 욕망이 담긴 손길은 아니었다. 두피가 뜯어질 것처럼 아팠다. 그러나 마음이 더 아파서 산호는 고래고래 악을 썼다. 저랑 내내 몸을 섞으면서도 여자 친구가 있다는 말은 안 했다. 그게 거짓말과 뭐가 다른가. 내내 설레고 기대하던 자신이 바보 같아서 서럽고 분했다. 장밋빛 미래는 전부 저 혼자서만 꾸던 꿈이었다는 걸 깨닫자 비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다 알면서 어떻게 사람이 그래! 어떻게…. 악!”
“근데 이 씨발….”
“아악…!”
“내가 너한테 좋아해달라고 했어? 별…. 어이가 없네.”
“놔…. 이거 놔!”
“내가 잘해주니까 뭐 된 거 같지, 응?”
눈앞에 불꽃이 튀었다. 준형이 잡았던 머리채를 테이블에 그대로 갖다 박았다. 얼얼해진 뺨으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산호는 비참해서 죽고 싶었다. 몇 번 더 산호의 머리를 테이블에 쾅쾅 내려친 준형이 동아리방을 나서며 말했다.
“너 앞으로 내 눈에 띄지 마라.”
“…….”
쾅. 산호는 문이 닫히고도 한참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 머리가 아팠다. 모든 게 끝났다. 이젠 정말 끝이었다. 얻어맞은 머리보다 마음이 더 아팠다. 얼마나 우스웠을까. 바보처럼 도준형이 주는 콩고물을 얌전히 받아먹으며 다리를 벌려주던 자신이. 도준형은 그런 산호를 알고 있었을까. 생각이 뻗어 나갈수록 비참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을 맞대고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한없이 멀었다. 욱씬거리는 엉덩이 사이보다 가슴이 더 아팠다. 도준형이 미워서 죽고 싶었다. 그런데도 산호는 한참동안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이 불쌍했다. 혹시라도 도준형이 다시 돌아와서 저를 잡아줄까봐, 미안하다고, 장난이었다고. 그 말 한 마디면 산호는 다시 도준형의 품에 안겼을 텐데.
* * *
준형은 화가 가라앉자 짜증이 났다. 유산호가 귀엽게 질투만 했었어도 그렇게 머리를 처박을 생각은 아니었다. 여자 친구 같은 건 없었다. 윤서영은 그냥 아는 여자애였다. 그리고 유산호와 붙어먹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편하고 편리했고 제 손짓 하나에도 벌벌 떨면서 가끔은 제 눈치를 살피며 기어오르는 게 꽤 귀엽기도 했다. …그랬는데 주제도 모르고 제게 욕을 하니 핀이 나가버렸다. 아. 짜증 나네. 준형은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산호는 몸을 추스르고 동아리방을 나왔다. 구름 한 점 없이 파랗던 하늘은 불그죽죽하게 노을이 지고 있었다. 마음이 아프면 사람은 감상적으로 변한다. 산호는 노을을 보며 제 처지를 비관했다. 도준형 때문에 결국 빼먹은 수업 뒤에도 또 남은 수업이 하나 더 있었지만 도저히 이런 상태로는 들을 수 없었다.
캠퍼스 끄트머리에 붙은 기숙사 건물을 지날 때, 산호는 반갑지 않은 얼굴을 마주쳤다. 건물 뒤쪽 담장 아래에서 성경이 혼자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단정하게 생겼다고 여겼던 그 얼굴은 담배 연기와 함께 보니 몰랐던 게 신기할 정도로 불량해 보였다. 산호가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고 있을 때, 성경이 먼저 산호를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안녕.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
“어? 아니…. 그, 근데 여기 금연 아니야?”
“맞아. 집에 벌써 가?”
“경비 아저씨한테 들키면….”
“안 들키면 되지.”
성경이 산호를 보며 픽 웃었다. 비웃음은 아니었지만 어딘가 내려다보는 것 같은 웃음이었다. 산호는 기분이 이상했다. 방금 전에 도준형에게 머리채를 잡혀놓고 그의 친구와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하는 상황이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도 들키면….”
“들켜도 나한테 뭐라고 못해. 우리 아빠가 이사장이거든.”
산호의 입이 딱 벌어졌다. 처음 알았다. 얼빠진 산호를 보며 성경이 또 웃었다.
“너 표정 진짜 웃기다.”
산호의 귀가 확 뜨거워졌다. 기분이 이상했다. 뭔가 잘못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도망치고 싶었다.
“어…. 어어…. 나 먼저 갈게. 너도 빨리 들어가!”
“조심히 들어가.”
성경이 담배 연기를 훅 뿜으며 말했다. 나지막한 목소리는 껌처럼 산호의 귓가에 달라붙었다.
* * *
그리고 산호는 약 일주일 동안 열심히 준형을 피해 다녔다. 준형과 겹치는 교양 수업은 아예 들어가지 않았고, 전공 수업 때는 강의실에 가장 늦게 들어가서 가장 일찍 나왔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면 집에 들어가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마음은 조각조각 부서진 채로 전혀 괜찮아지지 않았다. 산호는 다시 정물처럼 조용한 학생 1 정도로 돌아갔다. 준형이 준 것들은 준형이 다시 가져갔다. 아무것도 아닌 걸 손에 쥔 양, 우쭐해 했던 것을 돌이켜 보니 부끄러워서 숨고 싶었다.
그래서 준형이 제게 말을 걸었을 때 산호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직도 삐쳐있냐?”
“…….”
“미안하다니까.”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준형은 산호의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그러고는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나가자며 산호에게 어깨동무를 해왔다.
“너 왜 그래?”
“잠깐 좀 나가자.”
“교수님 곧 들어오실 텐데 어딜….”
“말로 할 때 나가자, 좀. 응?”
“…….”
산호는 눈을 감았다 떴다. 준형은 권유가 아니라 명령을 하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석준과 동진이 서로 장난을 치며 웃고 있다. 산호와 눈이 마주칠 정도로 빤히 이쪽을 보고 있던 성경은 곧 무심하게 시선을 돌렸다. 준형의 손아귀에서 산호를 구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너네 나가게?”
“어, 나 얘랑 할 얘기 있어.”
“무슨 얘기?”
“아 있어, 새끼야. 넌 몰라도 돼.”
준형의 대꾸에 석준은 시선을 산호에게 돌렸지만 산호는 눈을 피했다. 죽고 싶었다. 저들 중 하나라도 나와 도준형의 진짜 관계에 대해 아는 사람이 생긴다면 혀를 깨물고 죽을 거다. 산호는 절망했다. 준형은 산호를 끌고 강의실 바로 옆 화장실로 갔다.
정해진 수순처럼 당연하게 산호의 바지를 벗겨내는 준형은, 제가 지난주에 산호의 머리채를 잡고 테이블에 갖다 박았다는 사실은 모조리 잊은 듯했다.
“표정 좀 풀어.”
“할 얘기가 이거였어?”
“그럼?”
“놔. 이제 너랑 이런 짓 안 할….”
산호의 말은 도중에 끊겼다. 우악스럽게 산호의 손목을 잡아챈 것과 달리 간지러운 키스가 이어졌다. 산호가 계속해서 준형을 밀쳐내자 준형의 표정이 굳었다.
“존나 비싸게 구네.”
“뭐?”
“언제는 좋다고 박아달라고 하더니.”
“너….”
“미안하다고 했잖아.”
“…….”
“사람이 사과를 하는데 왜 무시해?”
“…….”
“아, 미안하다고. 어? 이제 안 때릴게. 나 존나 꼴려 지금.”
산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게 사과야? 묻고 싶었다. 그러나 제 몸을 끌어안고 얼굴을 부비며 말끝을 늘리는 준형을 보자 망설여졌다. 사과를 받아주고 다시 준형과 몸을 섞으면 전처럼 돌아갈 수 있나? 그렇게 될까? 그러나 산호의 망설임을 준형은 오해한 모양이었다.
“존나 매정하네. 유산호.”
“아니, 잠깐….”
“왜 좋게 말하면 안 들을까, 너는.”
준형의 손가락이 산호의 앞섶을 파고들었다. 산호는 변기 뚜껑을 닫고 앉은 준형의 위에 수치스럽게 안긴 채 사정할 때까지 성기를 희롱당했다. 준형은 산호의 정액이 묻은 제 손가락을 그대로 엉덩이 틈에 문질렀다.
“아, 싫…!”
“반항하면 더 흥분되는 거 알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
“읏…! 시, 싫어, 그만…!”
별로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산호의 입에서 거부의 말이 계속 튀어나오자 준형의 손은 다시 매서워졌다. 엉덩이 틈에 정액을 대충 바른 뒤 바로 제 성기를 쑤셔 넣고는 산호의 어깨를 깨물며 목을 졸랐다. 꺽, 꺽, 숨이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눈앞이 하얘졌다. 밑에서 텅텅 쳐올리는 성기에 꿰뚫려 죽을 것 같았다.
“아, 아파…!”
“꽉꽉 물면서 아프긴, 지랄….”
“흐으…. 응! 으, 아…!”
산호는 하염없이 준형의 좆에 박히며 위아래로 울었다. 안타깝게도 준형은 섹스에 재능이 있었다. 제멋대로 박아대는가 싶다가도 전립선을 꾹꾹 눌러 기어코 산호의 성기에서 액이 질질 흘러나오게 만들었다. 산호는 소리를 참던 것도 중간부터는 잊고 준형의 위에서 울부짖었다. 짐승처럼 지독하고 난폭한 섹스였다.
“하으으….”
“야, 누가 듣겠다.”
준형의 손가락이 산호의 입속으로 들어왔다. 아까 산호의 정액을 받아낸 탓에 씁쓸한 맛이 그대로 묻어있었다. 산호는 몇 번 헛구역질을 했으나 준형은 손가락을 빼지 않았다.
“욱…! 하아, 하아….”
산호의 사정에는 관심도 없던 준형이 다른 손으로 산호의 유두를 꼬집었다.
“히윽…!”
“아…. 넌 젖꼭지 만지면 꼭 쪼이더라.”
“응! 아! 천, 천히…! 아! 아, 아, 아으응!”
준형이 빠르게 안쪽을 쳐올리며 산호의 어깨에 숨을 뱉었다. 산호는 절정이 온 뒤에도 멈추지 않고 박아대는 준형 때문에 몸의 떨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준형이 팔로 산호를 꽉 끌어안고 있지 않았다면 꼴사납게 화장실 바닥에 굴렀을지도 몰랐다. 곧이어 준형도 사정했다. 착각이겠지만 내벽 안이 온통 질척하게 젖어 드는 느낌이었다. 길고 집요한 사정 끝에 준형이 말했다.
“아…. 살 것 같다. 너 없어서 일주일 넘게 못 쌌어.”
그런 저속한 말에도 기대를 가져버리는 자신이 싫었다. 산호의 눈에서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격한 섹스가 끝나자 산호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준형의 손에 이끌려 더럽게 젖은 팬티를 그대로 입고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화장실을 나왔다.
쏟아지는 햇빛이 산호를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다행히 아는 사람을 마주치지 않고 캠퍼스를 빠져나올 수 있었는데, 준형은 전처럼 산호의 집으로 가지 않았다. 택시를 잡아타고 목적지를 말하는 준형의 태도는 여유로웠다. 산호는 힘이 쭉 빠져서 잠자코 앉아있었다. 어딜 가냐고 물을 기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