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영성체송 Communio (8/8)
  • 8. 영성체송 Communio

    언제나 똑같은 정원이다.

    모래알이 굴러다니는 조부의 정원을 바라보면서 사헌이 찻잔을 비웠다.

    모처럼 정원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사헌을 불러다 앉히고도 종필은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사헌이 맞은편을 바라봤다.

    남의 생기를 빨아 먹는 것처럼 정정하던 노인은 몇 달 사이 팍삭 늙어 있었다. 주름이 깊어지고 눈은 흐릿하다.

    평생을 바친 제국이 갖은 수모를 당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한가. 사헌이 태연히 평하며 잔을 내려놓았다.

    “이쯤 접어.”

    종필이 명령했다. 그러나 노인의 음성에는 고작 몇 달 전과 달리 위엄 어린 무게가 희미했다.

    사헌이 답하지 않자 종필이 주먹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그래도 네 피붙이야! 네 아비 여동생이라고. 가족끼린 허물도 덮어 줘야 할 때가 있는 거다.”

    “제가 덮는다고 덮어질 일입니까.”

    틀린 말이 아니었다. 어디 첩첩산중이나 범운 사유지도 아니고,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산에서 총을 쏴 갈겼다. 들은 사람도 수두룩하고 심지어는 사헌 본인이 그 총에 맞아서 입원했다.

    의현이 벌인 일은 이제 더는 덮어 줄 수가 없는 꼴이었다. 범운이 아니라 누가 움직여도 이제는 한계다.

    그 사실을 모조리 알고 있는 노인의 늙은 뺨이 파르르 경련했다. 주름이 깊다. 저 나이에는 본래 정신력이 곧 기력이다. 사헌은 조부가 협심증으로 쓰러졌던 일을 기억해 낸다.

    이 정도는 돼야 몸을 던진 보람이 있지. 최종필의 죽은 안색을 보며 사헌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총구가 사헌을 향한 순간부터 의현은 빠져나갈 수 없는 덫에 걸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누가 뭐래도 최사헌은 범운의 내부인이며, 나아가서는 TY 우태영 회장의 하나밖에 없는 손자였다. 사고 치고 빠져나갈 수 있는 사이즈가 아니다.

    만일 거기서 사헌이 죽었더라도, 의현과 범운은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었을 거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으로 갔다. 최악을 상정하면서도, 목숨을 걸고 유성의 복수를 이루어 줄 작정으로. 유성과 약속했었으니까.

    뭐,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아서 다행이지만.

    최사헌은 일단 걸린 싸움에서는 뭐든 얻어 내고 마는 성미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최종필의 다음 주자라 일컬어지던 딸은 비리로 검찰에 드나들고, 덕택에 벌여 놓은 호텔 공사는 다른 계열사에서 덜어 와 메우는 판이었다. 연달아 토지를 사들이고 점포를 확장한 유통업은 말할 것도 없다.

    재무 비리뿐 아니라 지역 폭력 조직까지 연계된 판. 그쪽 조직원들을 제멋대로 부렸다는 재벌 3세 손자는 수술을 서너 차례 받고도 제대로 다리를 못 썼다.

    딸은 구치소에, 반병신 된 손자는 교도소에. 노인이 졸도 직전인 것도 이상하지 않다.

    이 정도 소득이라면 총상 정도야, 만족스러웠다. 유성을 계속 걱정하게 하는 건 마음 아팠지만.

    “주가가 바닥을 치는데, 너 그건 어쩔 셈이냐.”

    “이참에 계열사 정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죠.”

    본인도 다 예상한 바였을 터인데도 종필은 분기를 참지 못했다. 우태영 회장은 공격적으로 범운 유통과 레저 지분을 매수하고 있었다. 누가 시기를 일러 주기라도 한 듯 타이밍이 좋았다.

    “이제 회사 일에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건강에 안 좋습니다.”

    “뭐가 어째?”

    종필이 벌컥 성을 내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욱하는 성질대로 찻잔을 내던지려는 종필의 손목을 사헌이 먼저 붙잡았다.

    종필에게는 이미 병색이 완연했다. 저승꽃이 핀 질긴 살가죽을 관찰하며 사헌이 한때는 막일로 먹고살 정도로 굵고 힘 있던 노인의 팔을 손쉽게 잡아 내렸다.

    천년만년을 살 것처럼 구시더니.

    갑자기 당한 짓에 종필은 화가 나기에 앞서 황망한 반응이었다. 자기가 무슨 꼴을 당했는지 모르겠다는 듯 헛숨이 나오며 늙은 가슴팍이 들썩였다.

    벌컥대기 시작한 흉곽은 좀처럼 안정하지 못했다.

    종필이 상 위를 더듬거렸다. 사헌이 종필의 앞쪽에 놓여 있던 약통을 끌어왔다.

    “고모님이 그렇게 된 게 누구 탓이겠어요. 지금 할아버지께서 이러고 계시는 게, 도대체 누구 탓일까요?”

    약통 뚜껑을 열자 동그랗고 흰 혈관확장제가 굴러다녔다. 사헌은 노인의 안색이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울화 때문이라기에는 슬슬 지나친 모습이었다.

    “제 탓은 아닌 것 같은데요.”

    “너, 너…….”

    “절 이 집으로 불러들인 건 할아버지셨습니다.”

    사헌이 뚜껑을 돌려 닫은 약통을 종필의 앞에 내려놓았다. 종필이 마른 손가락으로 통을 붙잡았다.

    “왜 그러셨어요.”

    노인의 손이 닿기 무섭게 사헌이 바로 다시 약통을 빼앗았다.

    종필이 보랏빛으로 변한 얼굴을 문지르며 쿨럭댔다. 가슴을 긁기 시작한 종필을 사헌은 지켜보다가, 한 발자국 물러서서 휴대폰을 들었다.

    “회장님 쓰러지셨습니다. 당장 석등원으로 의료 인원 불러 주세요.”

    통화하는 동안에도 사헌의 그림자가 종필의 머리를 가로지르며 드리웠다. 사헌은 꿈틀대는 조부의 등허리를 빤히 보았다.

    “아직 말 다 안 끝났는데. 이제는 못 들으시려나.”

    비겁하고 지독한 모습도 보여 달라고는 했지만, 이런 모습은 역시 연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간 수고하셨습니다. 범운은 해체해서 제값 받고 팔 생각이니 걱정 마세요. 제가 알아서 잘할게요. 아, 참.”

    사헌이 쓰러진 어깨 밑에 구둣발을 넣어 종필의 몸을 뒤집었다.

    “제 결혼식엔 안 오셔도 됩니다.”

    어린 사헌을 잡아끌고 뒷좌석에 태웠던 노인이 시체 같은 몰골로 누워 있다. 무릎을 굽혀, 사헌이 가죽만 남은 손가락에 비로소 약통을 제대로 쥐여 주었다.

    바깥에서 허둥지둥 사람들이 들이닥치는 소리가 들렸다. 사헌이 가뿐히 일어서 문을 열러 나갔다.

    밖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 사위에 펼쳐진 정원이 비로소 아름다웠다.

    * * *

    피아노 선율이 들려왔다.

    익숙한 곡조에 사헌이 가벼운 허밍을 읊조리며 소파에서 피아노 쪽으로 몸을 푹 숙였다.

    “모차르트 「레퀴엠」이네요.”

    “마지막 곡이요. 연습하는 거예요.”

    동생의 기일에 피아노를 치러 가기로 했다더니 유성은 근래 틈이 나면 피아노에 앉았다. 아침마다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마치 우연조와 함께 살 때같이.

    그 여자가 기분이 끔찍할 때 쳤던 곡인데. 연주하는 유성의 표정은 안정되어 있고, 사헌 역시 아무 불편함 없이 곡을 듣는다.

    “이거 정말 팔아요?”

    연습을 마쳤는지 유성이 일어나 피아노를 매만졌다.

    “아쉬워요? 새 걸로 사 줄게요. 결혼 패물 삼아.”

    “됐어요. 아쉽다기보다, 그냥.”

    “그냥?”

    “유품이라길래.”

    유성이 우물거렸다. 사헌은 잠시 대답을 고민했다. 사헌의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유성은 짧게 사과했다.

    “역시 집에 피아노는 있어야겠네요.”

    유성의 손을 가볍게 잡으면서 사헌이 결론 내렸다. 손의 감촉은 이제 보드랍지만은 않았다. 잔 상처는 아물었으나 손목에 움푹 팬 흉터는 아직 다 가시지 않았다.

    “대신 새 걸로. 당신이 고른 걸로요.”

    사헌의 말에 유성이 이내 웃었다. 최사헌은 그 미소를 위해 무엇이든 버릴 수 있고, 또 무엇이든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의 진행을 위해 우태영 회장과 만난 사헌은 아침에 유성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호텔 부지 매각 얘기를 하다 피아노 얘기가 튀어나온 것은 그래서였다.

    “우연조 씨가 왜 그 피아노를 저한테 주고 갔는지 아십니까?”

    갑작스러운 소리에 우 회장의 눈가에 주름이 생겼다.

    “걔 변덕을 일일이 아나, 내가.”

    먼저 죽은 딸 얘기만 나오면 우태영은 씁쓸한 것을 깨문 듯한 표정을 했다. 사헌은 그 불편한 내색을 간단히 무시했다.

    “원래는 우연조 씨 어머니 물건이라더군요, 우 회장님 때문에 돌아가신. 이거면 우 회장님한테 뭐든 부탁할 수 있을 거라고 했죠.”

    “…….”

    “피아노도 팔았으니 이제는 저한테 우연조 씨 얘기, 더는 꺼내지 마세요. 우 회장님도 죽을 때까지 우연조 씨한테 용서 못 받으셨으니까요.”

    그 여자는 사헌에게 무기만 주고 갔다. 나름의 애정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사헌은 생각을 끊었다. 용서하지 않을 것은 용서치 않을 것이다.

    그냥 버릴 뿐이다.

    신혼집을 고르고 있는 참이었고, 사헌은 그 집에 무덤을 가지고 가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끌고 가고 싶지 않다.

    현재를 만든 모든 과거를 질질 끌면서 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등질 필요도 있다.

    물론 그냥 잊어 줄 수는 없고.

    사헌이 태영의 뒤에 조아려 있던 남자에게 시선을 옮겼다.

    짝귀의 남자는 이제 살이 좀 붙었다. 복장도 멀끔한 정장이다. 궁지에 몰린 듯 어두침침한 기색은 바뀌지 않았는데, 성미 지독하기로 유명한 우태영의 수족이 되었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잡힌 약점 탓에 도망갈 수도 없는 신세였다.

    “그래서 말인데, 부탁이 하나 더 있습니다.”

    사헌에게 정기승이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비굴한 미소가 기승의 입가에 흘렀다.

    버려야 할 것들은 버릴 것이다.

    용서치 않을 것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고.

    * * *

    “좋아 보인다.”

    사헌이 웃으면서 의현의 앞에 마주 앉았다.

    의현은 모든 것이 나빠 보였다.

    근육과 살이 한꺼번에 내려 전보다 왜소해 보이는 건 물론, 퀭하게 파인 눈두덩은 절박한 인상을 주었다.

    면회실의 회백색 벽과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수갑을 차고서 사헌을 노려보는 눈동자만 의현의 신체 중 유일하게 산 부분 같았다. 생선을 볼 때도 눈알부터 보라던데. 저기만 싱싱하면 됐지. 사헌이 미소 지었다.

    “다리는 좀 나아? 할아버지 일로 다들 바쁘기도 하고, 고모가 조사받느라 정신없으셔서 너까지 못 챙길까 걱정되더라.”

    “약 올리러 왔냐?”

    으르렁대는 의현에게 사헌이 미소 띤 그대로 고개를 저었다.

    면회실 테이블에 납작한 상자가 올라왔다.

    의현의 시선이 저절로 상자로 향했다. 사헌이 상자를 열었다.

    주사기와 앰플을 발견한 순간 의현의 눈살이 구겨졌다. 사헌은 아무렇지 않게 주사기에 앰플액을 채웠다.

    교도관이 조용히 돌아섰다. 천장에 달린 CCTV에는 어느새 빨간불이 꺼져 있었다.

    사헌이 자리에서 일어나 의현에게로 갔다. 등 뒤에 사헌이 서자 의현은 섬찟한 위기감에 일어나려 들었다. 철제 의자가 덜컹대고, 다리는 여전히 바로 서지 못했다.

    손바닥이 의현의 옆통수를 짓누른다. 다른 쪽 귀가 차가운 테이블 표면에 찧어졌다. 그대로 사헌이 주삿바늘을 근육에 찔러 넣었다.

    “씨발, 안 놔!”

    몸부림치는 의현을 사헌이 체중으로 짓뭉갰다.

    “형질 변환제, 들어 봤지?”

    사헌의 속삭임에 의현의 눈알이 위로 굴렀다. 흰자위가 반은 되게 돌아간 눈이 희번덕인다.

    “너도 몸 망치는 게 어떤 건지 겪어 봐. 속에서부터 망가지는 게 어떤 기분인지, 좀 알아야지.”

    “씹새끼가……!”

    “백유성만큼은 알아야지. 안 그래?”

    “백유성이 이러래? 걔가 너한테 시켰어?”

    약 기운이 벌써 도는지 아니면 백유성 이름에 눈이 돌았는지, 의현이 숨을 껄떡대며 물었다.

    “유성이는 요즘 너 같은 거 입에 올리지도 않아.”

    사헌이 냉소했다.

    “궁금해하지도 않아. 네가 살아는 있는지도.”

    “웃기지 마. 백유성이?”

    “그래. 백유성이.”

    의현의 머리를 누르던 손이 떨어졌다. 더러운 것이라도 만진 듯 사헌이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는다.

    “앞으로 약을 좀 먹게 될 거야. 방금 맞은 것도 포함해서. 너 아프잖아. 변호사들이 주장하는 정신병 목록이 끝도 없던데.”

    테이블 모서리에 가서 선 사헌이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일률적으로 이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의현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잠시 후 그가 발작하듯 고함을 지르기 시작하자 교도관들이 달려와 의현을 제압했다. 사헌은 그저 보고 있었다. 역시, 보여 주고 싶은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면회실을 빠져나오자 공기가 한층 쌀쌀했다. 사헌이 복도 벽에 기대어 선 익숙한 인영을 보며 쓴웃음 지었다.

    “안에 들어가서 구경하고 싶어요?”

    사헌의 질문에 유성이 바닥에 던져 놓고 있던 시선을 올렸다.

    머플러를 두른 약혼자는 추운 계절을 맞아 털이 부푼 동물처럼 귀여웠다. 사촌 동생을 짓밟아 놓고 연인의 사랑스러움에 취한다. 무도한 짓이지만 사헌은 죄책감 따위는 느끼지 않았다.

    “누구 좋으라고요. 나 여기 온 거 아는 순간 역시 백유성은 날 못 잊었다느니 헛소리만 할 텐데. 최의현이 좋아하는 모습은 꿈에서도 보기 싫어요.”

    유성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움직이느라 머플러가 풀어졌다.

    “기다렸어요?”

    사헌은 유성의 앞으로 다가가 머플러 끝을 고쳐 매 주었다.

    “조금요.”

    “오라고 한 적 없는데.”

    “오지 말라고도 한 적 없잖아요.”

    “그러게. 비밀로 했었지.”

    “그런다고 모르는 것도 아닌데요.”

    입가를 다 덮도록 올라온 머플러를 내리자 유성의 뚱한 얼굴이 드러났다. 사헌이 웃었다.

    “안에서 무슨 짓 했는지는 안 물어봅니까?”

    “대충 알아요.”

    “무섭네.”

    산뜻하게 말했으나 반 정도는 진심이었다. 백유성에게 무언가를 온전히 숨기기란 생각보다도 훨씬 어려운 일이지 싶다.

    “이런 건 안 보여 주고 싶었는데.”

    “비겁하고 지독한 모습?”

    유성이 장난스레 물었다.

    “이제 공범이에요.”

    유성의 말에 사헌의 미소가 한결 진해졌다.

    “집에 가요, 이제.”

    유성이 손을 내밀었다. 결코 잡아서는 안 된다고 되뇌던 이성을 꺾고 그 손을 잡았을 때처럼, 사헌이 유성과 손을 맞잡는다.

    교도소를 빠져나가기 직전 유성은 단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언젠가 뼈까지 살라 버릴 듯 거세게 타오르던 불길은 유성의 눈동자 속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유성의 입매가 아주 약간 움직였다. 웃는지 우는지도 모르게 몹시 잠깐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 * *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따라서 빛이 오색으로 내리쬔다.

    피아노 연주는 오랜만이다. 경찰 조사며, 이런저런 문제로 바빴던 탓에 연습도 몇 번 못 해서 잘할 수 있을지 긴장됐다.

    유민이의 기일에 열린 미사의 가장 앞자리에는 어머니가 앉아 있었다.

    어머니는 내게 청첩장이 아름답더라는 소리를 했고, 몸은 괜찮은지 물었다. 또, 부탁을 들어주어 고맙다고 말했다.

    유민이가 가장 좋아하던 곡을 나는 훌륭히 연주했다.

    미사를 마치고 나가는 길에 유민이를 보았다. 늘 거울에, 시야 귀퉁이에, 그림자에서 나를 따라다니던 유민이의 모습이었다. 이번에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뒷모습이다.

    유민아.

    부를 뻔했다. 그러나 곧이어 돌아본 이는 유민이와 비슷할 뿐, 다른 얼굴이었다. 그는 자신의 가족으로 보이는 이들과 성당 앞마당을 나섰다.

    다른 사람이다.

    유민이는 없다.

    슬픔과 홀가분함을 함께 느꼈다. 죄책감이 가슴을 내리눌렀다가 물러섰다.

    바깥의 바람에서는 무거운 풀 냄새가 풍겼다.

    돌로 된 바닥을 밟아 나가자 담장에 덩굴장미가 어지럽게 피어 있었다. 진분홍 꽃송이가 바람을 따라 흔들댄다. 키가 큰 나무의 가지들도 함께 움직였다.

    나무 밑의 남자가 입은 얇은 트렌치코트 자락이 날린다. 나뭇잎 사이로 자잘하게 쪼개진 햇빛이 남자의 위로 은하수처럼 흘렀다.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빛이 그의 얼굴을 완전히 덮었다.

    남자는 내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구름이 빛을 한 겹 가리자 서서히 이목구비가 드러난다.

    눈부신 햇살이 걷힌 자리에서 최사헌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왔어요?”

    내민 손에는 시계가 없고, 대신 그 자리에 다 알고 보아야만 발견할 수 있을 만한 흉터가 있었다.

    “일이 늦는 바람에. 미사 중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밖에서 기다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바닥에 발을 디디게 할 수 있는 중력처럼 사람을 삶에 붙잡아 놓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이토록 피곤하고 지난한 생을 지속하게 하는가.

    버티면 다치고 죽지 않으면 나이테 같은 흉터가 생기는, 상처투성이의 삶을.

    생각한다.

    주위의 것들이 죽고 그로 인해 울면서 살게 되는 것은 나의 운명이 아니라 그저 살아 있는 자들의 운명일 것이다.

    삶은 기억이고, 고통은 호흡으로부터 온다. 부상을 피할 수는 없다. 상처는 삶을 영원히 변질시킨다. 모두 불가피한 일이다.

    죽지 않으면 살아야 한다.

    모든 것을 끝내고 싶었지만 나는 여러 번 붙들렸다.

    “왔어요.”

    나를 붙잡아 두었던 그 손을 나는 마주 잡는다.

    최사헌이 웃으며 내게 고개를 기울였다. 입 맞춘다. 입술은 따뜻하고 부드럽다. 살결을 타고 흐르는 체온이 생생했다. 햇빛과 함께 머리에서 발끝으로 가느다란 전율이 흘러내렸다.

    가장 죽고 싶은 순간에도 몇 번이고 이 사람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당신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고통.

    눈부신 실패.

    내 최선의 상처.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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