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통곡의 날 Lacrimosa (6/8)

6. 통곡의 날 Lacrimosa

새벽 공항은 꼭 멸망한 세상의 유일한 안식처 같다.

유민이를 따라 공항에 드나들 때 나는 멈춰 있는 주변 풍경 속 유일하게 빛을 내는 공항을 보며 폐허 속 피난처를 떠올리곤 했다.

빛 없는 하늘에 비행기 불빛이 점멸했다.

창 너머를 바라보던 시선을 내리자, 내 어깨를 누군가 매만졌다.

“뭐 보고 있어?”

최사헌은 요즘 종종 비슷한 질문을 한다.

어깨에 올라온 최사헌의 손을 감싸면서 만지던 비단 주머니를 들어 올렸다.

“요즘 그거 계속 가지고 다니네.”

“만지고 있으면 안정이 돼요.”

어머니가 준 실 팔찌가 든 주머니였다. 겉면에 수가 놓인 비단 주머니는 감촉이 매끄러웠다.

“부적 같은 느낌?”

“팔찌는 꺼내지도 않으면서.”

“닳으면 안 되잖아요.”

주머니는 몰라도 내용물은 내 손으로 만지고 싶지 않다.

“선물이니까, 태어났을 때 새 걸로 줘야지. 누구 손도 닿지 않은 걸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 애한테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으면 싶다. 산 자의 손은 모두 조금씩은 더러우니까. 특히 내 손은.

“이제 들어가야죠.”

진작 들어가 탑승을 기다려야 했는데, 벌써 시간이 아슬아슬했다.

출국장으로 향하는 방향을 가리키자 최사헌은 자동문을 힐긋 보다가 다시 나를 보았다.

“혼자서 식사는 잘 챙길 수 있겠어요?”

“아니요.”

내 대답에 최사헌이 순간 말문이 막힌 듯했다. 어찌나 순식간에 막막한 표정을 짓는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겨우 3박 4일 나가 있으면서 뭐가 그렇게 걱정되는데요.”

“나흘이면 길지.”

최사헌은 진지했다.

“혼자 있는 거 무서워하잖아.”

저런 말까지 진지하게 할 필요는 없었는데.

“무서워하면서 기다리고 있을게.”

내 말에 최사헌은 순간 얻어맞은 듯 황망히 나를 쳐다보았다. 내게로 다시 발을 디디려는 최사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뒤돌아보는 최사헌을 닫힌 문이 가렸다.

천천히 닫히는 유리문으로 뛰어가지 않기 위해 발에 힘을 주어야 했다.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불안했다.

임신 이후로 파도치는 컨디션 탓이다. 그렇게 스스로 달래 봐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한참을 공항에 앉아 끝내 최사헌이 탄 비행기가 이륙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깜빡이는 비행기의 불빛이 먼 하늘을 향해 사라졌다. 내 속에서 반짝대던 것도 사그라지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떨어지는 게 처음이라 그렇겠지. 나흘. 겨우 3박 4일인데 유난하게 길었다.

공항을 빠져나오기 전에도 나는 자주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면 이미 가 버린 최사헌이 거기 나타나기라도 할 것처럼.

부적을 만지는 사람같이, 자꾸만 뒤돌아 그를 찾았다.

공항의 출입구를 지나자 싸늘한 바람이 덮쳐 왔다.

몇 발자국 지나지 않아 갑작스러운 충격이 나를 밀쳐 냈다.

어깨를 세게 부딪치자 시야가 휙 돌았다.

나를 넘어뜨린 행인은 사과도 하지 않고 공항으로 뛰어 들어갔다. 숨 가쁜 뒷모습은 쫓기기라도 하는 듯했다.

내 발치에 비단 주머니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아직 눈이 다 녹지 않은 땅이 비단에 짙은 얼룩을 만들었다.

미처 줍지 못하고 보고 있었을 때, 분주한 발걸음이 하나 더 다가왔다. 구두가 주머니를 밟고 지나쳤다.

소중한 건데. 지나가 버린 사람의 등을 돌아봐 불러 세워도 주머니에 생긴 얼룩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포기하고 일어서려 할 때였다.

“괜찮으십니까?”

내 앞에 멈춰 선 사람이 발자국이 찍힌 주머니를 주워 들었다.

고개를 들면서 한순간 최사헌이 보이기를 바랐다.

“…….”

아무리 사소하고 말도 안 되는 것이라도 바람이 사그라지는 순간은 차갑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인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기가 매웠다.

* * *

“온도 올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고개를 젓자 자동차 히터를 만지던 지서희가 손을 거뒀다. 신호에 잡혀 잠시 멈췄던 차가 다시 나아갔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몰라도 최사헌이 출국하기 전부터도 지서희는 내 곁을 철저히 지켰다. 운전기사 노릇마저 본인이 하는 형국이었다.

“별장으로 바로 가시는 거 맞습니까?”

“예. 박연이 회장님 뵙기로 했어요.”

어머니가 넘긴 지분 얘기를 본격적으로 나눌 시기였다.

“몇 시간 걸릴 텐데 눈이라도 붙이시죠.”

공항에서 별장에 도착하려면 두어 시간은 걸린다. 안 그래도 요즘은 아무리 자도 잠이 온다. 지서희도 내 상태를 알기에 한 권유일 터였다.

“아니에요. 아직 잠이 안 와서.”

나는 버릇처럼 주머니를 더듬었다. 혹시 오염되었을까 주머니에서 조심스레 꺼내 본 실 팔찌는 다행히 깨끗했으나, 맨손으로 팔찌를 만지게 된 게 불안했다.

“장명루네요.”

지서희가 말했다. 오방색 실로 짠 팔찌를 부르는 말이었다.

“애들한테 주는 거죠? 미리 사신 겁니까?”

“선물받았어요.”

나도 모르게 대답에 짐짓 자랑스러움이 담기는 바람에 뒤늦게 멋쩍었다.

누군가 이 아이의 삶을 빌어 주고 있다. 그게 좋았다.

나와는 달리 축복을 받으며 자라는 아이다. 축하와 환호 속에서 태어날 거다.

“저도 어릴 때 차고 다녔는데. 절에 가서 어머니가 만들어 주셨어요.”

“절에 다녔어요? 나돈데.”

첫 만남 즈음과 달리 지서희와는 이제는 어린 시절 얘기를 나눠도 어색하지 않았다.

“아이 이름은요?”

지서희가 다시 물었다.

“이름은 회장님이 지어 주시기로 했어요.”

“태명은 없습니까?”

“……그런 건 생각 안 해 봤는데.”

태명이라니. 지금껏 떠올리지도 못했다.

“앞으로 7개월도 더 남지 않았나요? 상무님 돌아오면 상의해 보시죠.”

이름. 이 애한테.

최사헌과 나란히 앉아 이름을 상의하는 장면을 상상하자, 손발이 간지러워졌다.

“졸리면 주무세요.”

“……아.”

언제 졸았는지도 모르게 고개가 내려가고 있었다. 분명 대화에 집중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이렇듯 정신이 끊기다시피 잠들곤 했다.

“도착 전에 깨워 주세요.”

“조용히 주무시겠습니까? 아니면 음악이라도 틀어 드릴까요.”

입술이 저절로 움직였다. 뭐라고 대답했는지 모르겠다.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잔잔한 선율이었다. 소품곡이 기분 좋게 귓전을 건드렸다.

멜로디는 불시에 끊어졌다.

쾅.

건반을 내리찍는 소리에 화들짝 잠에서 깨어났다.

물기가 부족한 눈동자가 눈꺼풀에 빡빡하게 밀렸다. 눈을 뜨는 순간 어디서 왔는지 모를 오한이 등을 기어올랐다.

오랜만에 맛보는 기이한 예감이었다.

유민이가 탔던 차가 박살 날 때 느꼈던 섬찟함.

온몸의 땀구멍이 수축했다.

나는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깜빡였다. 각막이 깎여 나가듯 쓰라렸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앞 유리창으로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차가 보였다.

그러니까, 역주행으로 오고 있다는 소리였다.

뒤쪽 창을 확인하자 뒤꽁무니에 붙어 있는 다른 차도 보였다.

목구멍에서 식식대는 숨이 빠져나왔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지? 어디부터? 알아봤자 돌이킬 수도 없건만 생각이 마구 뒤챘다.

포위됐다.

“지 팀장님.”

내 부름에 지서희가 침음을 흘렸다. 운전석에 앉은 지서희의 뒷모습은 척 보기에도 딱딱하게 굳은 채였다.

“갓길로 따돌려 보겠습니다.”

그러나 주변은 길이랄 게 없었다. 내가 깨어나기 전부터 추격전을 벌였는지 내비게이션에는 경로 이탈을 알리는 경고등이 연신 깜빡였다.

자칫하면 앞에서 오는 차에 가로막혀 더 나아가지도 못할 판이었다. 지서희가 핸들을 틀었다.

“꽉 잡으세요!”

우리가 탄 세단이 포장된 도로를 벗어나 울퉁불퉁한 흙길로 머리를 돌렸다.

차체가 심하게 흔들렸다. 나는 뒷좌석 천장의 손잡이를 무작정 움켰다.

돌이라도 채였는지 덜컹거리며 차가 위로 떴다. 머리가 천장에 부딪히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비포장도로를 나아가면서 속도는 더 느려졌다. 지서희가 안간힘으로 밟고 있는데도 마찬가지였다.

반면에 우리를 쫓는 차는 스포츠 차량이었다.

이파리가 달린 나뭇가지들이 유리창을 쓸고 지나갔다. 긁힌 대로 흰색 얼룩이 차량에 죽죽 그어졌다.

차량 두 대에 쫓기는 탓에 빠질 수 있는 길은 한정되어 있었고 주변 풍경은 점차 험해졌다. 나는 패배를 직감했다.

그런데도 돌이킬 수 있는 길은 없었다.

멈출 수도 없었다.

차체가 다시 강하게 흔들렸다. 이번에는 차량 측면에서 온 충격이었다.

따라붙은 지프가 밀어붙이고 있었다.

“손잡이 놓지 말아요!”

지서희가 찢어지는 소리로 외쳤다.

세상이 뒤집혀 돌아갔다.

빙글빙글.

거꾸로. 똑바로.

다시 거꾸로.

굴러가는 통 속에 들어 있는 기분이었다. 온몸의 뼈가 함께 흔들렸다.

굉음이 차 안을 찢었다.

머리가 웅웅 울렸다. 두개골 안에서 아직도 뇌가 회전하며 반죽이 되는 중인 것만 같았다.

어지러웠고, 폐가 찡하게 쑤셨다.

벨트가 가슴을 졸랐다. 쿨럭, 나는 기침을 토하며 더듬더듬 벨트의 잠금쇠를 만졌다.

“쿨럭…….”

뼈가 부러진 건 아닐까, 걱정될 정도의 압박감이었다. 고통이 어디서 느껴지는지조차 확실치 않았다.

어딘가 낀 건지 벨트가 풀리지 않았다. 나는 기다시피 머리를 빼냈다. 벨트에 붙잡혀 있던 몸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상의 소매 부분이 축축해졌다. 피였다. 부서진 차창 파편이 살을 찌른 듯했다. 움직일 때마다 어딘가가 뜨거웠다.

일그러진 차의 골격에 갇혀 문밖으로 나가고자 기려고 할 때였다.

차의 어둠 속에서 누가 나를 바라보며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나는 엎드린 채 숨죽였다.

누군가 바닥에 목을 꺾고 누워 있다. 그림자 사이로 얼굴 윤곽이 보였다.

유민이었다.

숨통이 꽉 틀어막혔다. 가슴을 쇳덩이로 얻어맞은 듯했다.

어그러진 차 내부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동생을 구하려 나는 팔을 허우적거렸다. 환각이라는 사실을 아는 주제에.

“유성 씨.”

다급한 부름이 내 정신을 다시 차 바깥으로 낚아챘다.

뒤집힌 차 밖에서 지서희가 엎드려 내게 팔을 내밀었다.

지서희는 나를 우그러진 문틈으로 끄집어냈다.

바깥으로 나오자 비로소 기침이 터져 나오며 공기가 폐부로 들어찼다.

“다친 곳은요?”

“지금은 모르겠어요.”

지서희 역시 당장 내 부상을 챙길 정신은 없어 보였다. 주변을 둘러보자 흙과 나무만 비슷비슷한 지형을 이루고 있었다.

“빨리 벗어나죠.”

나와 지서희가 발을 뗐을 때는 이미 늦었다. 우리가 차에서 나오기를 기다린 양 지프 근처에 서 있던 남자 서넛이 경사를 따라 내려왔다.

개중 가장 덩치 큰 남자가 선두로 다가섰다. 지서희는 이미 나를 뒤에 두고 걸어 나가고 있었다.

지서희보다 몸집이 두 배는 커 보이는 남자는 지서희를 보며 잠시 코웃음 쳤다.

지서희는 재빠르게 튀어 나갔다.

손날이 남자의 목을 강하게 후려쳤다. 둔중한 몸이 흔들렸다. 곧장 목에 팔을 걸면서 이를 악물고 조르는 지서희의 눈이 번뜩였다.

앞서 나간 남자가 붙잡히자 나머지 둘이 서둘러 붙었다. 누구 하나 연장이라도 꺼내 들면 어쩌나 싶었는데 셋 모두 빈손이었다.

“씨발, 이거 잡아!”

욕설, 고함, 부딪히는 소리. 지서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날래게 움직였다. 팔꿈치로 마른 남자의 안면을 강타한 지서희가 비틀대는 남자의 재킷에서 주머니칼을 빼냈다.

날붙이가 휘둘러지자 유일하게 일어서 있던 남자 둘이 주춤대며 물러섰다.

이 정도로 물러선다고?

뒤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위화감에 휩싸였다. 저쪽은 넷이다. 차가 두 대였음을 고려할 때 아마 더 많을 거다.

이렇게까지 준비해 덮쳐 놓고, 조그마한 칼 하나에 무서워할 리가.

이상했다.

지서희가 뒷걸음질 쳐 내게로 왔다. 지 팀장님, 내가 부르기도 전에 지서희가 헐떡이며 나를 붙잡았다.

“빨리, 저쪽으로…….”

지서희의 어깨에서 피가 터졌다.

폭발이라도 하듯이.

핏방울이 점점이 날아오르는 광경이 느릿하게 펼쳐졌다.

꼭 조악하게 꾸며 낸 영상 같았다.

다음 순간, 탁한 피 냄새와 지서희의 고통에 찬 신음이 오감을 마구 쑤셨다.

누가 실을 꿰어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듯 고개가 억지로 돌아갔다. 뻣뻣하게 움직이는 목에서 삐걱삐걱 소리가 날 것 같았다.

시선이 멈춘 순간.

한 사람만이 보였다.

기다란 총신이 이쪽을 노린다. 하늘에서 서서히 비쳐 오는 햇빛이 총신에 날카로운 반사광을 새겼다.

검은 랜드로버 차량에 기대듯 한쪽 팔을 걸치고 남자는 우리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내 시선을 알아차리자 그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가볍게 흔드는 손에서는 반가움마저 묻어 나왔다.

“최의현…….”

최의현의 미소가 한층 환해졌다.

최의현의 입술이 벙긋벙긋 벌어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최의현의 입 모양을 따라 했다.

“조, 심……해.”

내 입술이 닫히기 직전 조그마한 소음이 폭발했다.

이번에는 다리였다.

바닥에 쓰러진 지서희가 무릎을 움켜쥐고 악을 질렀다.

지서희를 쳐다볼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내가 최의현에게서 눈을 돌리는 순간 지서희에게 다시 총탄이 날아들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내 시선을 고스란히 받으며 최의현은 만족스럽게 입매를 끌어올리고는, 내 쪽으로 걸어왔다.

“어디, 보자.”

저벅저벅 다가오는 소리가 땅을 울리는 듯했다.

최의현이 점차 가까워짐에 따라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아무것도 닿지 않은 살갗이 따가웠다.

“안녕.”

바로 앞에서 인사가 들렸으나 나는 움직이지 못했다. 움직일 수 없었다.

“누나, 나 알죠? 우리 구면이네. 항상 최사헌 뒤꽁무니 따라다니던 가드 누나잖아.”

최의현이 총구로 지서희의 귓가를 건드렸다. 머리끈이 끊어지면서 풀린 긴 머리카락이 총구에 걸려 귀 뒤로 넘어갔다.

지서희는 말없이 최의현을 노려보았다.

방아쇠에 손가락이 걸렸다.

당장이라도 당겨질 것 같았다. 지서희의 관자놀이에 구멍이 나고, 피와 골수가 흘러나오는 모습이 마구잡이로 연상됐다.

“그만해.”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나 때문에 이러는 거잖아.”

이를 악물고 말해도 최의현은 지서희의 머리에서 총을 치우지 않았다.

“지 팀장님은 건드릴 필요 없잖아. 그만해.”

“죽이면?”

나를 보면서 최의현은 들으란 듯 죽이면, 이라고 힘주어 발음했다.

“미안. 잘못 말했네. 안 죽이면?”

대답을 못 하는 내게 최의현이 씩 웃으며 다시 말했다.

너 정말 인간이 아니구나. 나는 유민이의 장례식장에서 했던 말을 똑같이 주워섬겼다.

“이 누나 안 죽이면 어쩔 거냐고, 백유성.”

최의현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지서희의 다친 어깨를 짓밟았다. 순간 난 소음이 뼈가 어긋나는 소리는 아닐까 겁날 정도로 거센 발길이었다.

신발 밑창 아래로 피가 흘러나왔다. 지서희는 이를 악물고 견뎠으나 비어져 나오는 신음을 다 삼키지는 못했다.

피가 불꽃처럼 몸을 돌아다녔다. 머릿속이 익숙한 분노로 타들어 갔다.

죽이고 싶다.

“……시키는 대로 할게.”

드글대는 살의를 누르며 나는 고개 숙였다.

최의현은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항복 선언이 듣고 싶은 거다. 한 번 더.

“네가 시키는 대로 한다고, 최의현.”

“하라는 대로 하겠다고?”

“그래.”

눈물은 나지 않았다.

단지 생각이 났다.

최사헌이.

지금 어디에 있을지, 뭘 하고 있을지. 내 생각은 하고 있을지.

다시 볼 수 있을지.

최의현이 내 손을 쥐고 끌어당겼다. 일어서면서도 나는 끌려 내려가는 듯했다.

예상대로 주변에는 아까 지서희를 견제하던 이들보다 많은 수가 서 있었다.

엇비슷한 차림의 사람들 사이에는 낯익은 얼굴도 있었다.

정기승 실장이 나를 향해 까딱 목인사를 했다. 신물이 치밀었다.

지프에서 뒤따라 내린 것 역시 아는 얼굴이었다.

흥신소에서 적잖이 마주치던 임기주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입술을 깨물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임기주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배신감조차 들지 않았다. 삶에 뒤통수를 맞는 일은 흔했다.

정기승은 미림의 아버지 밑에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최의현은 이번 일에 인천의 불법 조직을 끌어들인 거다.

“하지 마.”

늘어서 있던 사람 중 몇은 지서희를 보고 있었다. 그들 중 누가 마무리를 맡을지 가늠 중일 게 뻔했다.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고 했잖아.”

“오늘 너랑 지서희는 차 사고로 죽은 거야.”

최의현이 담담히 읊조렸다. 사감 없는 사실이라도 알리는 투였다.

차가 뒤집힐 때와 똑같은 현기증이 머리를 쳤다. 박살 난 차 안을 굴러다니는 기분이었다.

“너는 진짜, 제정신이 아니야. 미쳤어…….”

“미친놈인 줄 알았으면 무사히 빠져나갈 생각은 말았어야지.”

최의현은 질 나쁜 농담이라도 하듯 설렁설렁 대꾸했다. 최의현의 엄지가 허공에서 딱, 소리를 내며 튕겼다.

“네 실수야.”

최의현의 뒤로 정기승이 움직였다. 바닥에 쓰러진 지서희의 머리채를 움켜 끌어올린 정기승이 떨어진 칼을 집어 들었다.

차라리 눈 돌리고 싶었건만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한 뼘 길이의 날붙이가 지서희의 가슴에 꽂혔다.

“그만!”

몸부림치는 나를 최의현이 붙잡았다.

“그만해, 그만! 놔!”

지서희가 짧게 경련했다. 흙투성이인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칼이 지서희의 흉곽을 헤집는 동안 어깻죽지를 흠뻑 적신 피가 흘러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눈알이 빠질 듯 묵직하게 뜨거웠다. 누군가 내 머리도 날 선 물건으로 쑤셔 대고 있는 듯했다.

“지 팀장님은 아무 잘못 없잖아! 그만, 제발!”

목구멍에 여벌 구멍이라도 난 듯 소리가 찢어지며 새어 나갔다. 내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있다는 양 주변에 선 사람들은 그 누구도 반응하지 않았다.

악을 썼으나 주변은 지독하게 고요했다.

칼날이 빠져나갔다. 지서희의 몸이 바닥으로 푹 가라앉았다.

무릎이 꺾였다. 최의현의 팔이 나를 옥죄고 있지 않았더라면 쓰러졌을 거다.

“시체는 어쩔까요.”

남자 중 하나가 물었다.

“남겨야지.”

최의현이 답했다.

“다른 시체는 적당히 근처에서 발견하게 하면 되고.”

다른 시체. 그건 내 시체를 일컫는 말일 터였다.

“해 다 뜨기 전에 출발합시다.”

나를 잡아끌며 최의현이 주변 사람들에게 고갯짓했다. 눈앞이 탁해 주위가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 발이 끌리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고개를 들 힘도 없어 나는 내가 만드는 지저분한 흔적을 고스란히 지켜보며 끌려갔다.

* * *

이럴 줄 알았다. 기주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른 새벽 기승이 다짜고짜 불러냈을 때부터 일이 이 지경으로 꼬일 줄 알았다.

민간인 담그는 것도 모자라 유성을 이런 곳에서 대면하게 될 줄이야. 기주는 정기승의 사람 부리는 법에 새삼 치를 떨었다.

“여기 제가 정리하고 따라갈게요.”

모자챙을 만지며 기주가 자진했다. 시체는 남기라고 했으니 따로 작업 칠 필요도 없었고, 현장만 좀 만져 놓으면 되는 일이라 다들 성가셔하는 눈치였다.

“먼저들 가세요. 가서도 할 일 있다면서요.”

선심 쓰듯 말하자 기승이 멈춰서 기주를 훑었다. 속 모를 눈빛이었다.

여기서 움츠러들면 끝장이다. 기주가 가슴이 부풀도록 숨을 마셨다.

“그래라, 그럼.”

기승은 싱겁게 허락하고 차에 올랐다. 자동차 배기음이 멀어짐과 동시에 기주의 어깨가 가라앉았다.

후으. 한숨을 흘리며 기주가 발을 움직였다.

핏물로 질척해진 흙이 발치에 채였다. 야트막하게 고인 피 웅덩이 앞에서 기주가 무릎을 굽혔다.

팔, 다리, 가슴. 온통 피투성이인 여자가 검붉은 진흙에 널브러져 있었다.

“아아, 씨발. 기주야, 기주야……. 어쩌다 네 인생은 이 지랄이 난 거냐.”

기주가 이마를 문지르며 연신 앓았다.

화교를 중심으로 뭉친 용역 집단에 들어갔을 때부터 기실 임기주의 삶이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당시 조실부모한 어린애가 할 짓이 뭐 있었겠냐고. 이를 갈며 기주가 시체 같은 낯빛의 서희를 응시했다.

사람 죽는 모습을 보는 게 처음도 아니건만 기분이 좆같았다.

서희의 코 밑에 손을 댄 기주가 눈을 질끈 감았다. 씹.

기주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끄집어냈다.

번호를 누르는 손끝에서 피가 묻어 나와 번졌다. 미끄러지는 손가락을 기주가 액정에 짓눌렀다.

연결음이 들리는 동안 기주는 심호흡을 반복했다. 입에서 모래가 깔깔하게 굴러다녔다.

전화가 연결되었다.

기주가 흙 맛이 나는 침을 삼켰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그들은 도착할 곳에서 할 일로 바쁠 테니 시간이 꽤 있다는 것뿐이다.

여기서 다른 의미의 작업을 할 시간이.

“곽지경, 딱 한 번만 말할 테니까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놓치지 말고 들어.”

* * *

플라스틱 끈이 손목을 조였다.

속박은 그게 다였다. 그러나 나는 전신을 사슬로 감아 놓은 듯한 압박을 느꼈다.

“어디로 가는 거야.”

겨우 목구멍에서 꺼낸 소리가 바스러졌다. 입을 열기는커녕 숨도 쉬고 싶지 않았으나 어떤 정보라도 알아내야만 했다.

꽤 오래 운전 중이니 지방으로 빠지고 있음은 분명했다.

그러나 뒷좌석에 갇혀 최의현과 마주 앉은 채로는 어디로 향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내 바로 앞에 앉아 무릎을 맞대고서 최의현은 능청스러운 미소만 지었다. 손에 칼이 들려 있었다면 당장 달려들어 찢어 놓고 싶은 웃음이었다.

나는 무릎 위에 올린 손을 꽉 움켰다.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그걸 말해 주면 재미없지.”

이 상황에서 수습할 방도라는 게, 나로서는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이대로 숨겨 두겠다고? 언제까지?

영원히 꼬리가 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는 것일까. 아니. 아무리 경우의 수를 따져 봐도 그런 건 불가능했다.

날 어디 묻어 버리는 게 아니고서야.

자연히 아랫배로 손이 향했다.

그리고 바로 후회했다. 최의현의 눈길이 내 손을 따라 복부로 향했다.

더 시선을 끌 게 뻔해 쉽사리 손을 치울 수도 없었다. 포식자와 대치할 때처럼 온 근육이 굳었다.

“몇 개월이었지?”

“…….”

“나 조카 처음 가져 보거든. 사촌 조카지만, 뭐.”

아이를 걸고넘어지는 이유는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다. 그것뿐이다. 정말 흥미가 있는 건 아닐 거다.

스스로 안심시키려 되뇌면서도 나는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의 공포심을 어쩌지 못했다. 심장이 흉곽에 몸통을 내던지며 뛰었다.

“내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어?”

아무 말이나 해야 했다. 최의현의 신경을 돌릴 수 있다면 뭐든.

“네가 나한테 뭔가를 잘못해서 이러는 게 아니야. 그냥…….”

최의현이 고개를 옆으로 툭 꺾었다. 입가와 달리 웃음기가 비치지 않는 눈동자는 그저 새카맸다.

“이런 일도 일어나는 거지.”

최의현의 곁에는 아직도 공기총이 놓여 있었다. 차가 흔들릴 때마다 조마조마했다.

“혀라도 깨물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고분고분하네.”

“…….”

“내가 아는 백유성이었으면 나한테 잡히느니 진작에 차 문 열고 뛰어내리기라도 해야 했는데.”

그랬을 것이다. 시늉이라도 했겠지. 예전이었다면.

차에 오르기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지서희가 당했을 때 무슨 짓이든 벌였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살려 줘.”

최의현이 눈을 홉떴다. 검은 눈동자가 한층 뚜렷해졌다.

“살고 싶어.”

그 말에 최의현의 눈동자에서 불티가 튀었다.

최의현이 바닥에 괴어 놓고 있던 총을 번개처럼 집어 들었다.

이번에 총구가 향한 곳은 나였다.

턱 밑에 딱딱한 금속의 감촉이 느껴졌다. 총 끝이 하악을 위로 눌러 고개를 치켜들게 하는 짓거리를 나는 묵묵히 견뎌 냈다.

“이래야 백유성이지.”

중얼거리더니, 최의현이 뜻 모를 웃음소리를 냈다.

총구가 느리게 내려와 내 배를 겨누었다.

침조차 제대로 삼키지 못하고 침묵했다. 생각을, 해야 했다.

생각을.

비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다. 최의현을 더 자극할 거다.

“애 때문인 거야?”

옷으로 감싸인 아랫배를 길쭉한 쇳덩이가 압박한다. 당장 일어나 비명을 지르고 싶은 기분을 간신히 참았다.

“아니면 이게 최사헌 애라서야?”

듣는 것만으로 울고 싶어지는 이름이 둘 있다. 하나는 유민이고, 하나는 지금 들은 이름이다.

울음은 참았지만 눈자위가 축축해지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최의현은 나와 끈질기게 눈싸움을 벌였다. 영원 같은 시간이었다.

“마음이 바뀌었어.”

배를 누르던 총이 떨어져 나갔다.

“최사헌한테 마지막 편지는 쓰게 해 줄게.”

대단한 선심이라도 쓴다는 투였다.

물론 그게 나를 위한 제안이 아니리라는 것쯤은 예상이 갔다. 당장 총구가 멀어졌어도 긴장을 풀 수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최사헌 애가 아니라고 써.”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알 수 있었지만 의도를 납득할 수가 없었다.

“지서희하고 가진 애다. 죄책감을 못 이겨서 둘이 도망간다.”

최의현이 또박또박 내가 쓸 편지의 내용을 읊어 주었다.

“너는, 그딴,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최사헌이 믿을 것 같아?”

“믿든 말든 상관없어. 중요한 건 사고 현장에서 그런 내용의 편지가 발견된다는 사실이니까.”

최의현의 조악한 악의에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최사헌은 몰라도 최종필 회장에게는 분명 효과가 있을 것이다. 최의현은 지금, 나와 아이를 무기로 써서 최사헌을 떨어뜨리고 싶은 거다. 내가 최사헌을 택한 걸 앙갚음하려고.

“야, 아까 거기 누구 남았어. 걔한테 연락해.”

앞좌석 방향으로 고개를 꺾고 일갈하는 최의현은 자기 수족이라도 부리듯 건방졌다.

“거기 누구 있냐?”

“정 실장님네 애요. 지금 전화 중입니다.”

앞좌석에서 두런두런 나누는 대화가 들렸다. 조수석에 탄 누군가가 귀에 휴대폰을 붙이고 있었다.

“실장님, 임기주 전화 안 받는데요.”

이윽고 조수석에서 난감한 보고가 이어졌다.

“뭐?”

7인승 랜드로버의 가운데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던 정기승이 비로소 입을 뗐다. 차에 미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정기승은 바로 자기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미세한 연결음이 묵직한 공기를 헤엄쳐 다녔다.

“어, 임기주.”

차 내부를 숨 막히게 만들던 긴장은 정기승의 입이 열리자 느슨해졌다.

“인마, 너 왜 방금 성진이 전화 안 받았어? ……그래? 뭐, 알았고. 세팅 바꾼다.”

정기승은 심드렁하게 통화를 이어 갔다.

“뭘 기겁을 해. 많이 안 건드려. 부려 먹긴. 애들 당연히 더 보낼 거야. 그걸 어떻게 너 혼자 하라고 하냐.”

흙바닥으로 쓰러지던 지서희를 생각하자 불쾌한 멀미가 일었다. 나는 애써 정신을 가다듬었다.

“왜 하필 미림이네 아버지 회사야?”

기계적으로 입을 움직였다. 무슨 말이라도 해서 정신을 가누어야 했다.

“여미림이 어떻게 학교 다닐 수 있었는지 알면서, 뭘.”

난다 긴다 하는 집 자제들 사이에서도 미림의 출생 신분이 꼬투리 잡히지 않았던 것은, 그 대단한 집안들이 묵인해 주어서다.

여미림의 가족 사업이 필요했으니까.

“여미림이 교내에서 떨 팔았던 거 모르는 놈도 있어? 너도 알았잖아.”

알면서 어울렸지. 너라고 깨끗한 거 아니잖아. 언제 들어도 기분 더러워지게 하는 최의현 특유의 화법이었다.

“학교 다닐 때부터 말이야, 넌…….”

최의현이 학교 얘기를 꺼내고 나서야 우리가 같은 학교 출신임이 인식되었다.

유민이의 약혼자로 소개받기 전에는 최의현을 신경에 둔 일이 없다. 얼굴이건 행실이건, 교내에서 나름대로 유명했을 테지만 일탈에 빠진 도련님들이야 주변에 이미 많았다.

그러나 최의현의 지금 분위기는 어떤가.

학창 시절의 나를 최의현은 선명히 기억하는 듯했다.

“그때부터였어?”

그러리라고는 상상도 해 보지 않았다.

이 지겨운 악연이 그때부터 시작되었을 줄은.

“너 혹시 옛날부터 나한테.”

싱글싱글 웃기만 하던 최의현의 표정이 굳었다. 동시에 내 말도 끊겼다. 대답은 이미 들은 것이나 다름없다.

비웃고 싶었다. 지켜야 할 것이 없었더라면 이 자리에서 총을 맞는 한이 있어도 솟구치는 비아냥을 참지 않았을 것이다.

징그러운 새끼.

입 밖으로 내지 않았어도 내 눈에 선명히 떠올랐을 경멸을 읽었는지 최의현이 다시 입매를 비틀었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최의현의 입술이 움직였다. 고등학교 시절의 이야기나 주워섬기지 않을까 했었는데, 차가 멈췄다.

최의현의 입이 도로 닫혔다. 그리 크지 않은 차의 엔진음이 으르렁거림처럼 낮게 울렸다.

“다 왔다. 내려.”

말이 들리자마자 억지로 고개를 틀어 창밖을 확인하려 했다.

그러나 낯선 풍경이 보이는 대신 어두운 천이 갑자기 내려와 시야를 덮었다.

* * *

“세팅을 바꾸라고요? 지금요?”

기주가 목소리를 높이다 흠칫했다. 기주의 앞에 쭈그려 앉은 지경이 기주의 팔을 지그시 붙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 혼자 처음부터 다시 하라는 건가 싶어서. ……네. 아무튼 알겠습니다.”

급하게 대화를 갈무리한 기주가 훅, 숨을 내뿜었다.

앞에 앉은 두 사람이 전화를 끊는 기주를 주시했다. 병원 옆에 세운 밴 안에는 기주를 포함한 셋이 모여 앉아 있었다.

“뭐래.”

지경의 옆에 앉아 창에 머리를 대고 있던 조그마한 체구의 여자가 물었다. 낙낙한 후드 티셔츠 덕에 왜소함이 두드러졌다.

“지금 현장으로 애들 보낸대요.”

기주가 휴대폰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어떻게 할까요, 사장님.”

“뭘 어떡해.”

샛노란 후드를 벗은 미림이 초식동물처럼 순한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어차피 그쪽에서 알아차리는 거 시간문제였어.”

미림의 눈이 빛났다. 지경과 함께 내려온 후 미림은 내내 굳은 얼굴로 조용했다.

여미림은 평소에는 미소도, 말도 많았으나 중요한 결단을 내릴 때면 극도로 말수가 적어졌다. 말 대신 행동을 했다.

그럴 때 지경은 미림이 어린 나이에 지독한 아버지 밑에서 독립할 수 있었던 원천을 보고는 했다.

“우리가 선수 쳐야지.”

* * *

머리를 덮은 천은 질기고 갑갑했다. 직물의 코 사이로 들어오는 빛과 공기로는 야외인지, 실내인지만 간신히 구분할 만했다.

최의현은 내 뒤에 바짝 붙어 나를 밀며 걸었다. 자칫하다가는 넘어질 것 같아 나는 바짝 긴장한 상태로 발을 디뎠다.

어깨가 붙잡혀 풀썩 주저앉혀진다. 딱딱한 등받이가 등에 부딪혔다.

드디어 머리에 씌었던 천이 벗겨졌다.

빛이 한꺼번에 들어와 눈이 시렸다. 급히 숨을 들이켜니 가슴이 욱신거렸다. 슬슬 교통사고의 통증이 몰려오는지도 몰랐다.

고통을 무시하고 서둘러 주변을 훑었다. 내가 앉은 의자와 테이블, 매트리스 정도만 갖춰진 좁고 간소한 공간이었다.

최의현이 테이블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상자가 달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안에는 일회용 주사기가 들어 있었다. 조그만 병에 담긴 주사제 앰플도. 내가 가지고 다녔던 형질 변환제 구성과 비슷했다.

더불어 비닐에 따로 소포장된 가루가 보였다. 경구 투약용 알약도 함께였다.

불행히도 나는 바로 그게 뭐 하는 물건인지 알 수 있었다.

유민이가 쓰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너도 많이 보던 거지. 이렇게 보니까 반가워?”

최의현이 주사기를 꺼내 흔들었다.

“하지 마.”

힘주어 일어섰으나 주변에 나갈 구석은 보이지 않았다.

문은 최의현의 등 뒤에 있다. 문밖에도 사람이 있을 테고, 손이 묶인 상태로 멀리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얌전히 있을게.”

길이 많지 않다. 안 그래도 의사가 너덜너덜하다고 경고했던 몸이다.

임신 초기에 혈관에 항정신성 마약을 꽂고 나면 어떻게 될지는 뻔했다. 최의현이 내 쪽을 보며 앰플을 꺼냈다.

“나 정말 네가 시키는 대로 조용히 있을게. 최의현. 부탁이야.”

주사기 피스톤이 당겨졌다. 실린더에 약물이 차올랐다.

내게는 마치 방아쇠가 조이는 광경처럼 보였다.

“아이만!”

목에 괴롭도록 힘이 들어갔다. 허벅지에 걸린 테이블이 덜컹거렸다.

“아이만 무사히 낳게 해 주면 다음에는 어떻게 해도 좋아. 부탁, 할게.”

“부탁하지 마.”

최의현이 다감하게 들릴 정도로 느리게 속삭였다. 두피에 맺혔던 땀이 목으로 흘러내렸다.

뭐든 해야 할 때였다.

“의현아.”

누그러진 말투로 이름만을 부르자 최의현이 멈칫했다.

“이 애, 너랑 나랑 기를까? 여기서.”

내가 지금 제대로 말하고 있나. 궁리한 대로 보기 좋게 웃고 있을까.

최의현의 얼굴이 두 개로 흔들려 보였다. 혹시나 지금 쓰러지는 건 죽어도 안 돼. 나는 세차게 눈을 깜빡였다.

“왜? 시간 끌려고 헛소리한다 싶어? 나는 가둬 놓고 애는 인질로 삼으면 돼. 최사헌한테 들킬 것 같으면 해외로 보내. 너 벨기에에 페이퍼컴퍼니 있잖아.”

늘어놓는 얘기를 듣던 최의현이 얼핏 고개를 흔들었다. 거절이 아니라, 질렸다는 기색이었다.

“백유민 다음에는 애야?”

최의현 입에서 유민이 이름이 나오자 속이 뒤집혔다. 최의현은 내 얼굴을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너도 진짜…….”

흐려진 말끝에 따라올 말이 무엇이었는지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최의현이 곧 다른 주제로 입을 뗐다.

“딴 남자 애를 같이 기르자고?”

“최사헌 애 아니라고 할게, 최사헌한테. 네가 말한 대로.”

지금은 달리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또 죽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거 말고도 하라는 대로 할게. 최사헌 애라서 이러냐고 물어봤지. 아니? 최사헌이 무슨 상관이야.”

최의현은 끼어들지 않고 나를 지켜보았다. 내가 어디까지 하는지 보겠다는 것 같아 욕지기가 치밀었다.

“애만 지킬 수 있으면 돼.”

나 스스로도 내 말에 실린 광기를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되든 좋으니까 애만. 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애가 그렇게 좋으면, 그냥 그건 없애고 나랑 새로 만드는 건 어때?”

얼음물을 퍼붓듯 최의현의 말이 귓속을 타고 흘러들었다. 몸의 구멍을 따라 얼음 알갱이가 돌아다녔다.

“농담이야. 쫄기는.”

치켜 올라가려는 고개를 처박고서 일부러 아래만 응시했다.

묶인 손이 덜덜 떨렸다.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분노 때문이었다.

“사장님, 전홥니다.”

다행히 바깥에서 최의현을 불렀다.

상자를 닫고 집어 든 최의현의 발소리가 문밖으로 멀어졌다.

최의현이 사라지자 무릎에서부터 힘이 빠져나갔다. 쓰러지듯 의자에 앉아 나는 원목 테이블에 이마를 기댔다.

차갑고 단단한 나무가 이마의 열을 빼앗는다. 오한이 계속됐다.

혈관에 서리가 끼고 잔 얼음이 내장을 굴러다녔다. 대항하듯 살갗에 체열이 돌았다.

망가진 신체, 불규칙한 사이클.

배우자의 알파 페로몬으로 안정시켜야 하는 발작적인 히트.

내 몸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차분히 짚던 주치의의 충고를 떠올린다.

나는 히트 사이클이 다시 돌아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 * *

“얼굴 한번 존나게 반반하다.”

길게 늘어진 담뱃재를 바닥으로 툭툭 떨구면서 덩치 큰 남자가 잇새로 휘파람을 불었다.

“안 그러냐?”

“그러게요.”

덩치의 옆에 버티고 선 청년이 문 너머를 힐끔거렸다.

두 사람은 작은 방 앞에 서서 유성을 감시하는 중이었다.

안에서 무슨 짓을 하나 지켜보라는 얘기가 있었으나, 들어가지는 말라는 조건이 붙는 바람에 문을 열어 놓고 방 안을 살피는 형편이었다. 무슨 삽질인지.

어쨌든 문지방 너머로 보이는 ‘목표물’의 얼굴은 인상 깊을 정도로 곱상했다. 이 짜증스러운 짓거리들이 조금은 이해가 갈 정도로.

“그래도 함부로 깔짝대진 마라. 아까 도련님 그거 지랄하는 거 봤지.”

덩치가 부르는 ‘도련님’에는 빈정거림이 깃들어 있었다. 웬 곱게 자란 재벌집 도련님이 주인 행세를 하며 휘젓고 다니는 꼴이었으니 당연했다.

그러나 이번은 회장이 직접 사람을 추려 보내며 지휘하고 있는 건수였다. 암만 성질이 불뚝한 건달 출신이라도, 저 새파랗게 어린 도련님에게 사려야 한다는 정도는 알았다.

“근데 아까부터 무슨 냄새 나지 않아요?”

“참아. 촌에 박혀 있는 데라 그래.”

“아뇨. 그런 거 말고.”

그런 거 말고 뭐. 낯빛으로 꾸중하는 덩치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청년이 방에 연신 눈길을 보냈다.

“오메가 냄새.”

청년이 중얼거렸다. 덩치가 청년을 위아래로 훑었다.

“너 알파냐?”

“예, 뭐. 근데 열성이에요.”

약한 수준의 형질 보유자는 그리 드물지만도 않다. 그리고 그리 예민하지 않은 알파의 신경을 사로잡을 정도라면 뭔가 이상이 생겼다는 소리일 터였다.

“아무튼 좀 이상한데. 잠깐 들어가서 볼게요.”

“조심해.”

뭘 조심하라는지 모를 충고에 청년이 서름서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문 안으로 들어섰다.

* * *

열기가 스멀스멀 정신을 물들인다. 발가락이 양말 안에서 곱아들었다.

히트 사이클의 전조는 선명했다. 몸살기를 느끼는 환자처럼 나는 테이블에 엎드린 몸을 더 바짝 웅크렸다.

손가락에 쥔 펜촉으로 손바닥을 찌르자 고통이 잠시 머리를 선명하게 했다.

감시역일 문가의 두 남자가 가져다준 종이와 펜은 이 상황을 더욱 촌극처럼 만들었다.

내용이 정해진 반성문을 쓰러 교실에 남은 아이처럼 나는 백지를 보며 몇 번이고 펜을 고쳐 쥐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생각해. 생각하라고. 채찍질당한 뇌가 내놓은 대답은 뻔하고 초라한 것뿐이었다.

최의현을, 어떻게든.

그 마음을 무기이자 방패로 삼아서.

펜이 종이에 몇 글자를 적다 멈췄다. 최사헌의 이름을 적고 나자 더는 쓸 수가 없었다.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의 철골을 빼내고 뒤흔들어 버리는 이름이었다.

숨을 들이켜면 특유의 황홀한 체향이 맡아지는 듯했다. 최사헌에게 기대 있으면 많은 것을 잊을 수 있었다.

복수심도, 모멸감도, 죄악감도. 내가 하잘것없는 인간이라는 것도.

자국이 남도록 이마를 테이블에 짓눌렀다. 결국에 나는 이렇게 되려고 여기까지 온 건가. 끝내 짓밟히려고.

테이블 표면의 나뭇결이 눈앞에서 어지럽게 흩어졌다. 침이 식도를 긁으면서 내려갔다.

일부러 최사헌 생각은 하지 않았다. 대신 최의현 생각을 하기로 했다. 흔들리느니 비참하도록.

나는 무너지고 싶지 않다. 무너져서는 안 되었다. 아직은.

벌써 빨갛게 줄이 나 따끔거리는 손목을 움직여 보며 언제쯤 본격적인 히트 사이클이 시작될지 가늠했다.

최의현과 히트를 보내게 될까. 하고 싶지 않은 가정이었으나 타당한 생각이기도 했다.

일부러 케이블 타이가 살을 파고들도록 손을 힘주어 당겼다. 찌릿거리는 아픔이 손목을 휘감았다.

나 따위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머리 위로 섬뜩한 기척이 느껴졌다.

소스라치며 고개를 들었다. 의자가 밀리며 듣기 싫게 끽끽댔고, 내 앞에는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손등으로 입가를 막은 채 나를 보았다. 숨소리가 들렸다.

알파. 희미하기는 하지만 분명 느껴졌다.

본능적인 경계와 위기감으로 상체가 뒤로 밀렸다. 나를 보는 남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남자가 내게로 팔을 뻗었다.

손이 붙잡히는 순간 어깨가 굳었다. 가슴이 놀란 토끼처럼 뛰었다.

남자는 내 손에서 펜을 빼앗아 갔다.

그러고는 종이에 휘갈기듯 숫자 두 개를 그렸다.

[33]

붙어 있는 숫자 둘을 보는 순간 고개가 확 위로 올라갔다.

남자는 이제 스물 초입이나 됐을까 싶은 앳된 얼굴이었다. 전에는 본 적 없는 낯선 사람이기도 했다.

미림이가 보낸 건가.

드나들 때마다 눈길을 끌었던 흥신소 이름 외에는, 굳이 3, 3이라는 숫자를 적어 보인 이유로 맞아떨어지는 게 없었다.

혼란스러워하는 내 앞에 남자가 무언가를 툭 내려놓았다.

네 면이 갈려 있는 면도날이었다.

“사장님이…….”

남자가 내게로 고개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한 단어도 놓치고 싶지 않아 나 역시 남자를 따라 몸이 기울었다.

입술이 동그랗게 말리며 무슨 단어를 만들었다. 곧?

제대로 발음되기 전, 갑작스레 남자의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우악스럽게 상체가 젖혀지면서 남자가 엇, 탄식을 뱉었다.

최의현이 남자의 덜미를 움키고는 주먹을 날렸다. 뻑, 소리가 날 정도로 그악한 타격이었다. 휘청거리는 남자의 안면으로 거친 주먹질이 쏟아졌다.

“주제에 알파라고, 씹새끼가.”

욕설을 퍼부으며 주먹을 내리꽂는 최의현에게 남자는 대항하지 못했다.

“어디다 함부로 손을 대!”

분을 못 이긴 고함을 듣자 온몸의 잔털이 삐쭉하게 섰다. 최의현의 주먹이 나를 후려갈기는 것처럼 어깨가 움찔댔다.

“손댄 적 없어.”

나는 최의현의 말에서 생략된 단어를 쉽게 찾아냈다. 어디 ‘내 물건’에 손을 대. 감히 네가.

히트 사이클을 맞기 직전 가장 같이 있기 싫은 사람은 오늘 처음 보는 남자보다는 단연 최의현이었다.

“의현아, 그만하고 이리 와.”

그래도 나는 최의현을 불렀다.

주의가 내게로 다 돌아오지 않은 사이 뜨거운 침을 삼키며 33, 숫자가 쓰인 부분을 조심히 구기고 찢었다.

최의현이 멈추더니 고개를 뒤로 돌렸다. 번질대는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이 꼬라지가 뭐야, 백유성.”

내가 불러서 오는 것인데도 가까워질수록 꺼림칙했다. 머리 뒤꼭지에서 적신호가 깜빡인다.

“임신이라며. 근데 단내나 질질 흘리고 있네.”

“그래서 맡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왔어?”

기어이 내게서 새어 나온 빈정거림을 듣고 최의현은 반갑게 웃었다.

“너 그 정도로 망가졌냐?”

재밌어하는 얼굴이다. 내가 왜 형질이 이 모양이 됐는지 알면서. 진절머리가 났다.

“너한테 돌려줄 거 가져왔어.”

“뭔데?”

유민이 목숨이라도 가져왔어?

정작 하고 싶은 말은 삼키면서 최대한 나긋하게 물었다. 사람을 치느라 붉게 까진 주먹을 펴 최의현이 내 앞에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이거.”

챙.

자그마한 금속음과 함께 조그마한 고리가 테이블에 떨어졌다.

전에 내 약지에 끼워졌던 반지였다.

최의현과 내 약혼반지.

반지 표면에 묻은 피는 내 것이 아니었지만, 반지를 빼낼 때 유리로 손가락을 긁던 감촉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약지 마지막 마디의 흉터가 욱신거렸다.

“끼라고?”

내가 오피스텔 바닥에 내던졌던 반지가 왜 지금 네 손에 있냐고 물어볼 기운도 나지 않았다.

물을 필요도 없다. 그냥 손을 내밀었다.

면도날을 말아 쥔 채 나는 약지를 폈다. 손을 베지 않도록 주먹에 의식적으로 힘을 빼야 했다.

최의현이 바로 내 손을 쥐고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서늘한 금속이 흉터 자리에 맞춰졌다.

흉터를 가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반지가 더 큰 흉터처럼 보였다.

최의현은 기뻐 보였다.

어떻게 해야 저렇게 머리가 망가질 수 있지.

자꾸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는 바람에 곤란했다. 피라도 나면 최의현이 면도날의 존재를 눈치챌 거다.

“너는 내가 왜 좋아?”

처음부터 이렇게 물었어야 했다. 관심받고 싶어 하는 애새끼랑 다를 게 없다. 원하는 방식으로 관심이나 주면 된다.

내 질문을 들은 최의현이 내 약지에서 시선을 뗐다.

“학교에서 처음 너 봤을 때.”

당시를 회상하는 듯 최의현의 미간이 느리게 조였다.

“인생이 아주 좆같아 보였거든.”

뭐가 그렇게 대단하게 좆같아 보였길래 근 10년의 악연이 됐을까.

최의현의 시선을 사로잡았을 내 모습을 그려 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졸업 전이라고 유난하게 힘들지는 않았다. 학창 시절은 오히려 기억이 희미했다.

성적을 유지하는 것만 제외하면 그저 반복되는 나날이었다. 삶은 여전한 강도로 지겨웠다.

당시의 내가 뭐가 그렇게 인상 깊었는지 몰라도, 나는 최의현 따위 기억나지 않는다.

근데 너 같은 게 뭘 안다고 나한테 마음이 생겨. 왜 내 인생에 엉겨 붙어. 왜. 유민이한테.

증오와 경멸로 일그러지려는 미소를 유지하느라 입매가 파들파들 떨렸다.

“그래, 그런 얼굴.”

최의현은 웃으며 말했다.

저 정신 나간 자식은 내가 모멸감에 허덕이는 얼굴을 보는 게 좋은 모양이었다. 바닥에 처박혀 죽어 가는 얼굴을 보는 게.

윗니로 아랫입술을 짓이기며 나는 끓어오르는 울화를 진정시켰다. 생각을 해야 했다.

“키스할래?”

깨물고 있던 입술을 놓으며 내가 소곤거렸다.

최의현의 목울대가 눈에 띄게 움직였다.

더 뭐라고 할 틈도 없이 멱살이 잡혔다.

몸이 위로 끌려가 의자에서 허벅지가 떴다. 무릎이 테이블을 쳐 덜컹거렸다.

일어서지도, 않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자세로 성급하게 가해지는 입맞춤을 버텨야 했다.

말린 옷깃이 목의 살갗을 조여들었다. 이렇듯 무식하게 다뤄진 게 오랜만이라 더 아팠다.

최사헌의 키스를 생각하니 어디라고 짚을 수도 없는 부분이 쓰라렸다.

정중하고 달콤한 것들에 익숙해지지 말았어야 했다.

입술 사이로 성급하게 혀가 침입했다. 옴짝달싹 못 하게 혀를 얽고는 빨아 대는 바람에 가빠진 숨이 코로 빠졌다.

“흐…… 으응.”

볼썽사나운 신음이 울린 것은 실수였다. 최의현은 열렬히 반응했다.

내 목을 받쳐 쥐고서 고개를 틀며 몇 번이고 입술을 삼켰다. 입술부터 입 안의 혀까지 모조리 먹히는 기분이었다.

“잠까, 응, 만.”

주먹 쥔 손으로 최의현의 가슴을 밀어냈다. 최의현은 밀려 주지 않으려 했으나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입술을 깨물자 못 이긴 척 물러났다.

하아, 입술 사이로 질척한 숨이 흘러나왔다. 숨이 모자라 붉어진 목덜미가 잘 보이도록 고개를 외틀었다.

“문은 안 닫아?”

말꼬리가 들척지근하게 늘어졌다. 무슨 뜻인지 최의현이라고 못 알아들었을 리 없다.

실컷 얻어맞은 남자는 벌써 사라진 지 오래였다. 최의현이 성급한 동작으로 문을 닫고 돌아오자 방에는 나와 최의현, 오로지 둘만 남았다.

꿈에서도 피하고 싶었던 상황이다.

나는 피하는 대신 비척거리며 일어나 최의현과 눈을 맞추고 뒷걸음질 쳤다. 곧 내가 앉은 곳은 매트리스였다.

최의현은 달려들다시피 했다. 히트 사이클에 몹시 가까워진 오메가가 내는 페로몬이 원래 얼마 안 되는 최의현의 이성을 닳게 하는 데 한몫했을 것이다.

옷 안으로 성급하게 손이 들어왔다. 달구어진 인두처럼 뜨거운 손바닥이 옆구리를 쓸며 올라왔다.

가슴이 억센 손아귀에 콱 잡힌다. 동시에 예민한 허벅지 안쪽이 함부로 만져졌다.

진저리가 쳐지는 소름과 흥분이 함께 느껴졌다.

최의현은 이미 방을 난폭한 페로몬으로 채우고 있었다. 머리가 띵하게 울렸다. 배 안쪽이 저릿했다.

정신을 가누려 면도날을 쥔 손에 힘을 실었다. 날카로운 모서리가 살을 파고들었다.

조금이라도 승산을 높이려면 나보다 최의현이 흥분해야 한다.

손을 뱀처럼 느리게 움직여 최의현의 허벅지에 댔다.

터질 듯 부푼 허벅지를 매만지고 있으려니 윗옷이 마구 뭉쳐져 올라갔다. 더운 입김이 예민한 가슴에 닿았다.

가슴에 고개를 들이박고 빨아 대는 최의현을 나는 할딱대며 내려다보았다. 생리적인 눈물이 속눈썹을 축축이 뭉쳤다.

“다시 키스해 줘.”

나를 보려 위로 움직이는 최의현의 눈동자가 음습하게 들끓었다.

최의현은 기꺼이 내 말에 따랐다.

젖혀진 목. 무방비하게 드러난 목.

축축한 입술을 한데 녹일 듯 겹치면서 나는 얕은 상처가 이리저리 팬 손을 움직였다.

면도날이 손금을 길게 베면서 손가락 틈으로 이동했다. 날붙이가 자리에 들어오자 손가락이 단단히 맞붙었다.

근육에 열이 나도록 힘주어 팔을 움직였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운 면도날이 최의현의 목을 갈랐다.

최의현은 잠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흥분에 녹아 있던 눈이 부릅뜨였다. 시야에 비치는 모든 것이 느렸다.

커다래진 최의현의 눈동자도, 최의현이 목을 감싸 쥐는 것도.

살갗을 따라 흐르는 핏방울도.

쇼크 때문인지 최의현이 움직임을 멈췄다.

죽었을까.

아니. 죽일 정도로 깊이 베지 못했다는 사실을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렇다면 더 빨리 움직여야 한다.

손목을 감은 케이블 타이를 급히 끊어내느라 면도날이 내 손바닥 살을 베어 냈다. 흥분 탓인지 통증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새빨갛게 젖은 플라스틱 줄이 바닥에 떨어졌다. 묶인 손이 풀어지며 찰나의 해방감이 찾아왔다.

나는 크게 호흡하며 면도날을 주머니에 넣었다. 아무리 산소를 들이켜도 어지러웠다. 쇳내가 코에 달라붙는 것만 같다.

최대한 힘주어 쑤셔 넣느라 면도날을 잡았던 두 손가락 사이의 살은 깊게 찢어진 채였다. 손은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나도 모르게 얼굴을 훔치는 바람에 미끈거리는 손바닥이 볼에 핏자국을 만들었다. 역한 피 냄새가 끼쳤다.

불쑥 구역질이 올라왔다. 뒤집히는 속을 억누르느라 턱에 힘을 주면서도 애가 피 냄새는 싫어하는 것 같아 다행이란 생각 따위를 했다.

제정신은 아니구나, 나도.

“너…….”

최의현이 꺽꺽거리며 일어섰다. 칼날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몰라도 목을 감싼 손가락 사이에서 아직도 선혈이 흘러나오는 걸로 보아 걱정만큼 얕지는 않은 듯했다.

“움직이면 출혈 심해져. 죽기 싫으면 얌전히 앉아서 지혈하고 병원이나 가.”

혹시라도 최의현이 당장 달려올까 경계하면서 나는 방 모서리에 괴어 놓은 공기소총을 집었다.

“따라오면 정말 죽일 거야.”

소총을 최의현에게 겨누어 보았다. 심장이 쿵쿵, 온몸을 울렸다.

최의현은 피투성이였다. 방아쇠만 당기면 된다.

죽여 버리고 싶다.

당장.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관자놀이 부근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착각을 맛보며 방아쇠를 검지로 더듬었다.

이마에 구멍이 뚫려 쓰러지는 최의현이 보인다. 나를 향해 번들거리던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최의현은 영영 세상에서 사라진다.

드디어.

손가락 관절이 삐걱거렸다. 눈이 뽑혀 나올 듯 뻑적지근했다.

최의현은 생생히 산 채로 피 흘리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를 쏘는 대신 문고리를 잡았다.

쏘지 않겠다. 여기서 벗어날 거다.

아이를 살인자의 자식으로 태어나게 할 수는 없다.

총을 겨누며 문을 열었지만 문밖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등 뒤로 재빨리 한 손을 움직여 문을 잠갔다. 피 때문에 손가락이 미끄러웠다.

멀지 않은 거실에 두 인영이 보였다.

최의현에게 두들겨 맞은 남자와 그보다 덩치가 큰 남자였다.

상처를 보는지 덩치가 남자 쪽으로 몸을 숙이고 뭐라고 중얼대다, 갑자기 내가 있는 쪽으로 몸을 틀었다.

덩치는 주춤거리며 다가오려는 기색이었으나 내가 더 빨랐다.

방아쇠는 가벼웠다.

그리 힘주어 당길 필요도 없었다. 덩치의 무릎에서 피가 튀었다.

큼직한 몸집이 그대로 고꾸라졌다. 청년은 퉁퉁 부어오른 얼굴로 나를 황망히 보았다.

“차 키 넘겨.”

“예? 예?”

“너 말이야. 차 키 넘기라고.”

총구를 청년에게 향하며 윽박지르자 청년이 더듬더듬 주머니를 뒤졌다. 나는 그가 키를 제대로 내밀기도 전에 낚아챘다.

여기 있는 인원은 얼마나 될까. 나와 최의현을 제외하면 랜드로버에 탄 사람은 총 넷이었다.

여미림과 연결된 듯한 저 청년을 제외하면 셋.

혹시 그보다 더 많이 있다면 솔직히 가망이 없었다. 탄환이 몇 발이나 남았는지도 제대로 모른다.

긴장으로 오감이 곤두서고, 점점 번지는 히트 사이클의 혼탁한 열기가 머리를 갉아먹는다. 진탕이었다.

뒤를 경계하며 무거운 발을 억지로 움직였다. 목조로 된 주택 내부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다.

현관이 바로 보인다. 문을 열면 바깥이었다.

내가 다가서기 전에 문이 열렸다.

현관에 막 들어온 남자 둘이 나를 발견하고 멈췄다.

둘 중 하나는 아는 얼굴이었다.

정기승 실장. 내게 형질 변환제를 팔았던 남자가 당혹해 주춤거렸다.

“비켜.”

나는 둘을 똑바로 바라보며 총구를 올렸다. 손끝이 떨렸으나 방아쇠는 얼마든지 당길 수 있다.

“백유성 씨, 일단 진정합시다.”

정기승이 양손을 들어 보였다.

“비키라고 했어.”

정기승의 옆에 붙어 서 있던 남자가 신중히 손을 움직이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두 번째는 처음보다 더 쉬웠다.

어깨를 맞은 남자가 괴악한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총이란 아주 간편한 살상 도구였다. 완력 차이는 무의미하다.

이렇게 가까우면 못 맞힐 가능성도 별로 없다. 노려보는 내게 긴장된 시선을 보내던 정기승이 결국 남자를 부축하며 조심히 문가에서 물러났다.

“문 열어.”

여기서 벗어날 때까지 총을 내릴 마음은 없었다.

정기승이 나를 쏘아보다 현관문을 열었다. 바람이 쐐기처럼 살에 박혔다.

나가려는데 어깨가 현관 안으로 당겨졌다.

정기승은 총신을 붙잡고서 나를 벽으로 밀쳤다.

총을 빼앗기지 않고자 온 힘으로 손가락을 옹송그렸다. 손가락 마디마다 송곳이 쑤셔져 들어오듯 아팠다.

격발음이 고막을 뒤흔들었다.

전신을 붙잡혀 마구 흔들어 댄 것처럼 시야가 쪼개지고 어지러움이 밀려왔다.

어깨가 무섭게 쑤셨다. 양팔도 마찬가지였다.

정기승이 한쪽 귀를 감싸고서 입술을 뻐끔댔다. 손가락 사이로 길쭉한 귀 연골이 튀어나와 있었다.

기절하듯 무너지는 정기승의 밑으로 부서진 살점이 보였다. 일부러 자세히 보지 않았다.

목구멍에서 올라온 위액과 섞인 시큼한 침을 뱉어 가며 나는 절뚝절뚝 문밖으로 나아갔다.

와 닿는 바람의 세기로 보아 추울 게 분명했으나 거의 체감할 수 없었다. 살갗이 화상을 입은 듯 얼얼했다.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구역질이 치밀었다. 배 속에서 항의라도 하는 것만 같았다.

“알아. 미안해.”

속삭이면서도 나는 뻣뻣한 다리를 억지로 움직였다. 근육에서 삐걱삐걱 소리가 나는 듯했다.

바깥은 지리를 알기 어려운 숲이었다.

나왔는데도 어디일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모래와 풀만 어지럽게 눈에 박혔다.

랜드로버는 주택 옆에 세워져 있었다. 뛰면서도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잡히면 어떻게 되지?

흐르는 줄도 몰랐던 눈물이 턱 밑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뜨거운 액체가 목을 적셔 내가 피를 흘리는 줄 알았다.

랜드로버를 앞에 두고 차 키를 누르려 총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백유성!”

뒤에서 우레와 같은 고함이 허공을 흔들었다. 인간의 것 같지 않을 정도로 쉰 소리였다.

돌아보면 안 된다. 나는 랜드로버의 운전석 문을 열었다.

그리고 총성이 귀를 찢었다.

누가 옆구리를 쇠망치로 짓이긴 것만 같았다.

온몸이 통째로 흔들렸다. 순간적으로 뒤를 보았다.

목에 새빨갛게 물든 천을 감은 최의현이 나를 향해 라이플을 겨누고 있었다. 개조한 공기총 따위가 아니라 진짜 화약총이었다.

천을 다 적시고도 남은 시뻘건 피가 최의현의 목으로 줄줄 흘렀다. 시체 같은 안색과 달리 안광은 퍼렇게 불탔다.

죽여도 죽지 않을 괴물 같았다.

막혀 있던 숨을 뱉으며 나는 정지에서 풀려난 듯 운전석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소총이 조수석에 던져졌다.

안전벨트를 조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액셀을 밟았다. 다행히 차는 문제없이 움직였다.

총성이 다시 울렸다. 소리가 커 마치 내 뒤통수에 대고 쏘는 것만 같았다.

뒷유리창이 깨져 파열음을 냈다. 유리가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무작정 액셀을 밟았다.

돌을 밟느라 차가 덜컹거리며 나아갔다. 두개골이 함께 덜컹대는 듯했다.

제대로 포장되지도 않은 길이 이어졌다. 주변은 잡목과 수풀이 우거져 어지러웠다.

이런 정신으로는 아는 길이어도 어려웠을 것이다.

내 페로몬에 내가 질식할 것 같았다. 폐에 진득거리는 점액질이 차오르고 있는 기분이다.

히트 사이클이란 본래 불쾌하기 짝이 없는 기간이었으나 지금은 내 뒤통수에 총을 겨눈 또 하나의 적이나 다름없었다.

정신없이 액셀만 밟았다. 얼마나 달렸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이 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지는 않나 의심할 무렵 앞에서 오는 차가 보였다.

길은 하나였다. 주변은 나무라 방향을 돌릴 곳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다가오는 차와 대치하느라 미적거리다가는 따라오는 최의현에게 붙잡히고 말 거다. 아니면 저 차도 최의현이 부른 차일까?

“비켜.”

눈앞이 흐려졌다 했더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시야가 연한 분홍색으로 깜빡였다.

배 속에서부터 비명이 올라왔다. 꺼져. 총을 맞은 옆구리의 통각 세포가 덩달아 절규하는 듯했다.

“비켜, 제발 좀!”

나는 악을 쓰면서 액셀을 밟은 발을 떨었다. 여기서 사고로 죽을 수는 없었다. 멈추면 잡힌다. 어떻게도 할 수가 없다.

앞차가 속도를 줄였다.

시시각각 닥치는 일을 피할 수가 없다.

차가 멈췄다. 앞좌석 문이 열리는 것을 보며 나는 조수석을 더듬어 소총을 잡았다.

이어서 내린 사람은 예상보다 몸집이 작았다.

“유성아!”

여미림이 달려와 운전석 문을 두들겼다.

환각인가? 눈을 끔뻑여 보았지만 차창 바깥으로 보이는 미림의 얼굴은 그대로였다.

내가 더듬거리며 잠금을 풀자마자 미림이 문을 열고 나를 붙잡았다.

히트 사이클이 드디어 내 머리통에 방아쇠를 당긴 듯했다. 뇌수가 주르륵 흘러나오듯 불쾌한 피로가 뒷덜미를 적셨다.

“유성아, 괜찮아? 너 피가, 여기 왜 이래.”

“병원…… 병원부터.”

횡설수설 지껄이는 입술이 내 것 같지 않았다.

“연락…… 어. 금방 ……도 올 테니까, 조금만…….”

나를 부축한 미림이 뭐라고 더 말하는 것 같았으나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정신이 구멍으로 빨려 들어갔다.

“꼭, 아이 먼저…….”

눈꺼풀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의식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 * *

어디선가 큰 소리가 들렸다.

사헌이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공장 안에서 들렸는지, 바깥에서 났는지 알 수 없는 소음은 금세 사그라졌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현지 공장장이 사헌에게 정중히 권했다.

범운의 유럽 내 배터리 생산은 폴란드 남서부의 브로츠와프를 거점 삼고 있었다.

일전에 왔을 때는 공사가 한창이던 부지도 이제 증설된 공장이 들어앉아 있다. 우중충한 하늘 아래 자리한 새하얀 직사각형 건물을 응시하던 사헌이 안내를 따라 걸음을 뗐다.

모든 게 예정대로 돼 가고 있다.

도착한 날 이미 경제부 국장과 시장과 함께 만찬을 가졌다. 책임자가 나와 시늉을 하는 것만으로 이야기는 생각보다 부드럽게 진척되었다.

브로츠와프 인근에는 이미 범운 전자에서 가동 중인 공장들도 있었다. 어머니와의 평온한 생활을 저버린 대가로 사헌의 아버지가 갖게 된 것들이다.

인도네시아의 전기차 생산 공장도 건설 막바지고, 이제 곧 생산에 들어간다. 사헌이 맡은 일은 대체로 순조로웠다.

핵심 사업의 책임자까지 오르는 동안 나름의 인맥과 거점은 사헌 역시 마련해 놓았다.

문제는 최종필의 존재감이 너무 크다는 점이었다. 범운은 최종필의 왕국이었다.

왕위를 갖는 데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왕에게 자리를 물려받거나.

빼앗거나.

정교하게 돌아가는 믹싱 장비를 바라보며 사헌이 입술을 축였다. TY 우태영 회장의 원조, 아버지의 몫, 사헌의 준비와 노쇠한 왕.

승산은, 있다.

돌아가서 치를 결혼은 계획의 시작을 알리는 성대한 축포가 되어 줄 것이다.

그런데 왜일까.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기계를 보면서도 사헌은 불길한 예감을 떨치지 못했다.

“왜 그러십니까, 상무님.”

사헌의 옆에 서 있던 공장장이 조심히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전전긍긍하는 태도에 사헌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저 기분일 따름이다. 업무에 차질을 줄 필요는 없었다.

‘무서워하면서 기다리고 있을게.’

혼자 남겨 두고 온 약혼자가 걱정돼서일 것이다. 몸도, 마음도 위태로운 사람이다. 생각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조였다.

공장 내방을 마치고 예약한 숙소로 돌아가는 사이 먹구름이 하늘을 덮었다.

유럽의 길목은 스산했다. 새벽부터 날이 차더니 실비를 따라 안개가 피어올라 시야를 가렸다.

해외에 나와 있으면 어린 시절의 기억이 쉽게 떠오른다. 이렇듯 날이 안 좋으면 특히.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도 걷히지 않는 한기에, 사헌이 거실을 서성였다. 업무가 바빠 종일 연락 한 통 하지 못했는데 지금이라도 유성에게 전화할까 싶다가도, 시차를 떠올리면 생각을 접게 됐다.

커튼을 걷고 비에 젖은 풍경을 바라보던 사헌이 창 앞에 자리한 테이블을 짚었다.

고풍스러운 우드 테이블은 예전에 우연조의 집에서 썼던 것과 비슷했다.

흐린 날이면 우연조는 사헌과 체스를 두곤 했다.

‘너희 아버지는 나한테 약속을 했어.’

사헌의 폰을 게임판 바깥으로 밀어 버리면서 우연조가 읊조렸다.

‘지켜 주겠다고.’

사헌의 말들은 하나둘씩 죽어 가고 있었다. 우연조는 평소보다 공격적으로 게임을 진행했다.

‘집에서 벗어나게 해 주겠다고 했어. 그래서 네 아버지하고 결혼한 거야. 하지만, 봐. 그 사람은 약속을 깼어.’

사헌이 대답하지 않아도 우연조의 말은 이어졌다. 대답했더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거다.

‘다른 사람을 지키느라 자기가 끌어들인 이 진창에 나를 버려뒀어.’

사헌이 우연조의 비숍을 쓰러뜨리려다 전진을 멈췄다.

그렇다. 아버지는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지키려고 다른 사람들은 스스로 도망쳐 나온 구덩이에 아무렇게나 처박아 두었다.

우연조와 사헌은 같은 진흙탕에 있었다.

‘나는 너희 할아버지 때문에 널 맡은 게 아냐. 대가를 받은 거지.’

우연조는 어느덧 말을 움직이지도 않고 다만 사헌을 응시했다. 우연조의 여왕이 사헌의 왕 앞으로 와 있었다.

‘지키지 못할 맹세는 하지 말았어야 해.’

고전극의 배우처럼 우연조는 비장하게 뇌까렸다.

약속에는 대가가 따른다.

게임판에 서 있던 사헌의 말들이 모두 쓰러졌다.

어렴풋이나마, 사헌은 그때 깨달았다.

이것은 복수다.

사헌을 기르면서 우연조는 한 발자국씩 복수에 다가서고 있었다. 자신의 생명을 연료로 쓰며, 뼛속까지 미움으로 불태우면서. 끝내 몸속에서 자란 병마가 자신을 살라 버릴 때까지.

진동음이 두개골을 득득, 갈았다.

사헌이 몸서리치며 눈을 떴다. 상념에 잠겼는지, 선잠에 빠졌었는지 모를 일이다.

손을 뻗어 바로 붙잡은 휴대폰이 손아귀에서 몸부림쳤다. 살아 있는 생물이 꿈틀거리는 듯했다.

모르는 번호 열한 자리가 문득 불길했다.

― 안녕하세요, 최사헌 씨. 여미림이라고 합니다.

전화를 건 이는 사헌이 아는 이름이었다. 분명 유성의 고등학교 친구였을 것이다.

이 시간에 유성도 아니고 그 친구가 제게 직접 연락할 만한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사헌은 말없이 미림의 용건을 기다렸다.

― 유성이 일로 연락했어요.

이어지는 미림의 이야기를 들으며 사헌은 숨도 쉬지 않았다. 쉬어지지 않았다.

체스판 위에 단정히 올라가 있던 사헌의 말들은 어느덧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다. 쿵, 소리가 들렸다.

아니다. 무너진 건 사헌이다.

원목 책상을 내리친 사헌의 주먹에 찌릿한 고통이 감돌았다. 반들대는 나뭇결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사헌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았다.

* * *

눈꺼풀이 안구에 들러붙은 것만 같다.

눈썹뼈가 지글지글 녹아내려 눈자위가 통째로 불타는 듯했다. 비행기에서부터 심해진 두통은 이제 머리를 다 메우도록 팽창했다.

병원의 소독약 냄새가 지독하게 느껴진다. 의사의 진단을 듣고 나온 길이었다.

사헌은 오래 걷지 못하고 진료실 앞의 의자에 걸터앉았다. 모든 것이 환각같이 느껴졌다.

일정을 닥치는 대로 소화하고 절반 이상 캔슬해 가며 비행기를 탄 것, 비행 내내 불붙은 엔진을 노려보며 날아가는 듯 한순간도 안정하지 못한 것, 마침내 귀국해 미림과 통화하면서 운전기사조차 물리고 창원으로 차를 몰아 온 것도.

‘충격이 컸을 거고 워낙 초기여서. 부상이 아니라도 원래 형질 관련으로 상태가 좋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요.’

의사에게 들었던 말들도.

‘유산 직후에는 원래 경우에 따라 이런저런 후유증들이 많이 보입니다…….’

관자놀이를 타고 두통이 폭죽놀이처럼 퍼져 나간다. 일어나서 병실에 가 봐야 한다는 생각조차 떠올리기가 힘에 부쳤다.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어느덧 옆에 와 앉은 앳된 얼굴의 여자가 사헌에게 물었다. 미림이었다.

“사내 정치는 예상했죠. 회사 일 움직일 깜냥은 못 되는 놈이니 자기 어머니 통해서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했고요.”

“납치에 감금은요?”

미림의 물음에 사헌이 무표정하게 입을 다물었다.

손바닥으로 마른세수하던 사헌의 고개가 아래로 꺾였다. 손으로 얼굴을 덮어 표정은 드러나지 않았다.

“예상, 못 했습니다.”

왜였을까.

삶은 항상 예측보다 훨씬 나쁜 곳으로 굴러떨어지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으면서도.

자신은 어째서 이토록 안이했을까?

질문은 끝도 없이 이어졌으나 무용했다. 답 같은 건 아무런 쓸모가 없다.

어차피 되돌릴 수 없는데.

“유성이, 깨어났어요.”

미림이 말했다.

사헌이 움찔했다. 당장 가서 보고 싶은 마음과 나쁜 소식을 알려야 한다는 비참함이 교차했다.

“유성이는 제 하나뿐인 가족이에요. 친구기도 하구요. 유성이는 고등학교 때 절 지켜 줬어요. 구해 줬어요, 저를.”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는 사헌을 지켜보다 미림이 주머니를 뒤졌다.

“그러니까 전 유성이한테 제가 당연히 해 줘야 할 것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곧 미림이 사헌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이처럼 흰 손가락 마디 사이에 깊은 흉터가 보였다. 칼자국이었다.

미림의 손바닥에는 마이크로 SD 칩이 놓여 있었다.

“유성이랑 지서희 씨가 타고 있던 차 블랙박스 영상이에요. 저희 쪽에서 먼저 확인해 봤는데 최의현 얼굴은 제대로 안 잡혔어요. 음성만 확인 가능한데, 이것만으로는 어렵겠죠.”

SD 칩이 미림에게서 사헌의 손으로 옮겨 갔다.

“지금껏 최의현이 저지른 사고들이 어떤 식으로 흐지부지됐는지 저도 잘 알아요. 고등학교 때부터 봤거든요.”

사촌 동생이 얼마나 난폭하게 사는지는 사헌의 귀에도 왕왕 들려왔다.

알면서 왜, 대비하지 못했을까.

“잘 생각하셔야 할 거라고요.”

뭘 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할 것인지.

사헌이 SD 칩을 꽉 쥐었다. 작고 딱딱한 플라스틱이 살을 파고들었다.

* * *

유성이 있는 개인 병실에서는 문 바깥에서부터 달콤한 냄새가 감돌았다.

끈적거리는 공기 탓에 문 너머가 일종의 덫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문고리를 잡고서 사헌이 숨을 골랐다.

문을 열자 유성은 헤드를 세운 침대에 앉아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입 다문 옆모습은 파리한 안색에도 화려한 느낌이 있다.

가까이 다가서자 유성의 눈가가 얼마나 떨리는지 보였다. 살갗에는 식은땀이 반짝였다.

“왔어요?”

사헌이 입을 떼기도 전, 유성이 태연히 말을 걸었다.

“원래 벌써 한국에 들어오면 안 되잖아요.”

쉬어 버린 목소리만 아니면 집에서 나누는 대화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유성은 무리해서 말하고 있었다. 소리를 내기도 힘든데 쥐어 짜내는 음색이었다.

“나 때문에 바로 귀국한 거예요? 최사헌 씨도 놀랐겠네요.”

“……백유성 씨.”

“팔찌요.”

사헌이 무슨 말을 꺼내려 들기도 전에 유성이 막아섰다.

“이거 말고. 애한테 주려고 했던 거. 어딨는지 몰라서요. 찾고 있는데, 혹시 봤어요?”

손목에 걸린 염주를 만지며 유성이 물었다. 흑색 염주는 용케도 멀쩡히 유성의 손목에 걸린 채였다.

염주보다 눈에 띄는 건 붉은 상처였다.

새빨간 줄이 유성의 손목을 죽죽 가로질렀다. 염주 아래에 붉은 실로 된 팔찌를 몇 겹씩 더 차고 있는 것만 같았다.

“사고 났을 때 떨어뜨렸으려나. 잠깐만 가서 찾아보고 올게요.”

중얼거리던 유성이 침대에서 내려서려 들었다. 발이 채 바닥을 디디기도 전에 유성은 휘청거렸다. 사헌이 곧장 유성을 부축했다.

“어딜 가겠다는 겁니까.”

“차…… 사고 났던 곳. 거기 있을 것 같아서.”

“절대 안정이라는 말 못 들었어요? 다시 침대로 가요.”

“가서 잠깐 보기만 할게요. 잠깐만.”

이 병원에서 사고 난 곳까지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는 아냐고, 언성을 높이며 묻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눌렀다.

유성은 아무렇지 않은 듯, 그러나 정신 나간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깨진 인형처럼 넋이 나간 모습 앞에서 사헌은 어떻게 해 주어야 할지 몰랐다.

고집스레 걸으려 드는 유성을 사헌이 끌어안았다. 혹여나 상처에 압박이 될까 봐 힘을 주지도 못하고 안았다.

살갗에 맺힌 끈적한 땀이 기묘하게 단내를 풍긴다. 안 그래도 병실을 메우고 있던 오메가 페로몬이 사헌의 이성에 직접 달라붙었다.

유성의 등에 감긴 손이 떨렸다.

유성이 벗어나려던 몸부림을 멈췄다. 색색대는 숨이 사헌의 목덜미를 문질렀다.

“죽은 거죠?”

유성은 묻는다기보다 혼잣말을 하는 듯했다.

“유민이에 이어서, 그 애도.”

“…….”

“나 때문에.”

“아니야.”

유성을 끌어안은 팔이 더욱 옥죄었다.

“당신 때문, 아니야.”

“그럼 누구 때문인데요?”

유성이 온 힘으로 사헌을 밀어냈다. 식은땀으로 번들대는 이마 아래 기이한 열기가 넘실대는 눈동자가 사헌을 노렸다.

“당신 때문이야, 그럼?”

유성의 눈자위에 물기가 스몄다.

“지켜 주겠다고 했으면서.”

자그맣게 샌 말소리가 사헌의 가슴을 가르며 들어왔다.

꽂힌 칼을 빼낼 엄두를 내지 못하는 이처럼 사헌이 벅차게 호흡했다. 장기가 차디찬 날붙이로 뚫린 양 숨쉬기 어려웠다.

“몰랐습니다.”

이렇게 될 줄.

인정하기가 뼈아팠다. 무엇을 잃기란 왜 이다지도 순식간인가.

“미안합니다.”

“미안하다고 해도 바뀌는 건 없잖아요.”

나달나달하게 닳아 버린 유성의 음색은 겨울에 부는 바람 소리 같았다. 메마르고 온기 없는 말씨와 달리 맞닿은 체온이 지극히 뜨거웠다.

“짐승 같아.”

부푼 사헌의 허벅지 한쪽에 손을 얹고서 유성이 중얼거렸다. 사헌의 목에 핏줄이 새파랗게 돋았다.

“당신이나 나나.”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사이클에 정신이 나가서 발정하는 꼴이라니. 유성의 함의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유성은 멈추지 않고 사헌을 자극했다. 마르고 상처 입은 손이 정장 바지를 부지런하게 쓸었다.

결국 사헌이 유성의 손목을 쥐었다. 이번에도 조심스럽게. 그러나 기어이 손끝에 닿고 만 상처의 감촉이 생생했다.

“해요.”

유성이 사헌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혼이 빠져 있던 유성의 눈동자에는 생기가 돌아와 있었다.

광인들에게서 보이는 그악하고 괴괴한 열기가 모양 좋은 눈자위 안에서 뛰어놀았다. 히트 사이클이 한창인 오메가가 억제제 없이 이성을 유지하는 일은 분명 버겁지만, 유성은 사이클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었다.

“이제 애도 없는데 상관없잖아.”

유성이 사헌의 셔츠 깃을 구겨 쥐었다. 힘이라곤 조금도 없는 손길에 사헌은 속수무책으로 끌려가 주었다.

“그럼 당신 몸은.”

사헌이 토해 내다시피 말했다. 용케 장기는 피해 갔다지만 출혈이 심했다. 수술 시간 동안 사헌은 유성이 흘린 만큼 자신의 피가 마르는 기분을 견뎌야 했다.

유성의 마른 입술이 달싹였다. 웃으려고 한 것 같았다.

“원래부터 상관없었어, 이딴.”

이딴, 거. 힘주어 말하느라 끊긴 음성을 따라 유성의 눈자위에서 눈물이 굴러떨어졌다.

유성이 젖은 눈가를 사헌의 목덜미에 비볐다.

병실이었다. 아픈 사람이다.

되뇌면서도 사헌은 착실히 흥분했다. 농도가 짙은 오메가 페로몬은 결심만으로는 떨쳐 낼 수 없는 것이었다.

입 맞추려는 사헌을 유성이 고개를 틀어 피했다.

유성이 원하는 바는 확고했다. 교묘한 손놀림으로 벨트 버클을 풀고 바지 섶 안으로 손을 밀어 넣으면서 유성은 끈질기게 애무했다.

지금 유성이 사헌에게 원하는 것은 그것밖에 없는 듯 보였다.

짐승처럼 붙어먹는 것. 욕정으로 뻣뻣이 세운 살덩이를 처넣고 뒹구는 짓거리.

모멸감과 흥분이 거부할 기회를 주지 않고 사헌을 덮쳤다.

“……안 돼.”

환자한테 삽입할 수는 없었다. 유성이 사헌의 어깨를 내리눌러 병실 침대에 눕혔다.

이번에도 힘이랄 게 없는 손길이었으나 사헌은 유성의 뜻대로 밀렸다. 쓰러진 사헌을 내려다보는 유성은 슬프게 웃었다가, 이내 무표정해졌다.

감질나는 자극이 하단전을 연이어 긴장시켰다. 제발. 사헌은 무슨 뜻인지도 모를 애원을 삼켰다.

웅크린 채로 사헌의 가슴에 엎드려 유성이 등을 들썩였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아래로 젖은 이마와 꽉 깨문 입술이 드러났다.

“내가 잘못했어.”

“…….”

“유성아…… 내가 다 잘못했어.”

머리카락을 걷어 주려 손을 뻗어도 유성은 고개를 흔들어 사헌의 손길을 거절했다. 푹 숙인 유성의 귓가가 붉었다.

우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성은 울고 있지 않았다.

울지 않았다.

* * *

끈적거리는 다리 사이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다가 유성이 젖은 손가락을 입에 넣었다. 탁한 체액이 유성의 입술 사이로 들어갔다.

아무런 의도도 없어 보이는 행동이 지독히 야해 보여 사헌이 마른침을 삼켰다.

“닦아 줄게요.”

따뜻한 물에 적셔 온 수건으로 허벅지를 조심조심 닦는 동안에도 유성은 별 반응 없이 다리를 벌려 주기만 했다.

격정적인 정사가 없던 일인 양 유성의 태도는 건조했다. 눅눅하고 텁텁한 병실의 공기가 되레 부자연스러웠다.

“최사헌 상무님.”

직급으로 불리자 사헌이 수건을 지그시 우그러뜨렸다. 얼마 안 되는 물기가 손가락 사이에 맺혔다.

“우리 파혼해요.”

차분한 제안이 사헌에게 내리꽂혔다.

사헌은 반응하지 않고 동그란 무릎을 닦아 나갔다. 뛰다 다쳤는지 발도 엉망이었다.

비가 쏟아지던 새벽, 맨발로 그의 앞에 나타났던 유성이 떠올랐다.

“이제 다 그만두려고요.”

지금의 유성도 그때만큼이나 창백했다.

아무 감정도 깃들지 않은 유성의 얼굴을 사헌은 붙잡힌 듯 응시한다. 사헌이 아무 대답이 없자 유성의 태도가 한결 공격적으로 변했다.

“끝내죠. 당신한테 도움이 안 되잖아. 애도 없다는 데 당신네 회장님이 나 같은 거랑 살게 두겠어요? 애지중지하는 맏손자를.”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내가 최사헌 씨한테 주기로 한 것들, 전부 의미가 없어졌잖아요.”

“그만.”

미처 다 빠져나가지 않은 체액의 냄새, 달아오른 공기, 오메가 페로몬이, 담담한 유성과는 다르게 사헌의 오감에 질척질척하게 엉켰다.

이것이 대가다.

사헌은 인정한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한 대가. 그날, 늪에 빠질 것을 알았음에도 유성의 손을 잡고 만 값.

“내가 어떤 마음인지 알면서.”

모를 리 없을 터였다. 유성도 저와 똑같은 눈으로 바라보곤 했으니까.

아니면 모두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이만 끝내요.”

유성이 고개를 저었다.

늪에 빠진 것은 나 혼자였을까.

사헌이 유성의 발목을 움켰다. 생각 이전에 나온 행동이었다.

“유성아.”

애끓는 음성에 사헌 스스로도 놀랐다.

유성은 흔들리지 않았다.

“내가 싫어요.”

사헌은 유성의 단호한 태도보다 자신의 반응에 더 놀라는 중이었다. 환영받지 못하는 태생이었던 덕에 미움받는 데는 익숙했다. 인정이나 사랑을 바란 적도 없다.

“최사헌 씨가 어떤 마음이든, 나는 아니에요. 처음부터 아니었어요.”

그러니 이 말에도 이처럼 속 쓰리지 않아야 했다.

“이용 못 할 거면 필요 없어요.”

유성이 사헌의 손아귀에서 발을 뺐다.

“나는 좋아한 적 없어요.”

냉엄한 선고가 떨어지는 중에도 사헌은 유성을 올려 보았다.

“단 한순간도.”

얄쌍한 발이 완전히 빠져나갔다.

마침내 손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자 사헌이 비틀비틀 몸을 일으켜 유성이 앉은 침대 가장자리를 붙들었다. 사헌이 완전히 일어서지 않아 코앞에서 둘의 시선이 부딪혔다.

“백유성, 넌 왜 이렇게.”

말이 끊겼다. 사헌은 턱이 경직되도록 어금니를 사리물고 숨을 참았다.

“대체 왜 이렇게, 도대체!”

그 이상 말하지 못했다. 탓할 수 없다.

사헌을 노려보는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했다. 이미 이리저리 금이 가 있었다.

주먹을 쥐고 사헌이 크게 심호흡했다. 흉곽이 부풀고 등이 함께 오르내렸다.

생각한다.

움켜쥐고 몰아세워, 차라리 다 터뜨려 버리고 싶다고.

함께 깨지고 싶다고.

“당신도 알고 있었잖아. 내가 좋아한다고 해도 코웃음 쳤으면서. 다 알면서 이해관계가 맞아서 결혼하기로 한 거잖아?”

“…….”

“그동안 무슨 착각이라도 했어요? 나는 당신 같은 인간…….”

“그래도 상관없다면?”

울부짖는 대신 사헌은 숨을 가라앉혔다. 유성의 앞에서 좀처럼 보인 적 없던 적대적인 태도가 감돌았다.

“파혼은 못 해.”

먼저 손을 내민 건 유성이었다. 그러니 내치는 것까지 유성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놔주지 않겠다.

사헌의 선언에도 유성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단지 모호하게 일그러진 눈매가 피로해 보였을 뿐.

“하게 될 거예요.”

* * *

병원은 어디나 그렇듯 적당히 소란했다. 겉이든, 안이든 상처 입은 이들이 치료를 받고자 기다리고 있다.

김혜령, 지금은 이름보다 최문경 사장 곁붙이인 김 실장으로 더 많이 불리는 여자가 한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프라이버시를 위해 다른 병실과 아예 떨어진 위치였다.

병실 침대에 걸터앉은 의현은 처음 실려 왔을 때보다 훨씬 혈색이 돌았다. 그대로인 건 피거품을 뱉으면서도 기세가 꺾이지 않던 광기 쪽일 터였다.

혜령이 들어왔음에도 의현은 알은체도 없이 침대 모서리를 노려보았다. 병실 상태를 체크하는 동안에도 잠잠하던 의현이 입술을 열었다.

“거울.”

턱에 너무 힘을 주어 이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혜령이 창가에 놓인 거울을 들어 의현의 얼굴 앞에 대 주었다.

거울을 노려보며 의현이 목에 감긴 붕대를 마구 잡아 뜯었다. 다친 부분이 아프건, 붕대가 목을 조이며 살갗을 쓸건 아랑곳하지 않았다.

붕대가 뜯기고 드러난 의현의 목에는 짐승이 발톱으로 할퀴고 지나간 듯 긴 상처가 나 있었다.

갈라진 피부를 봉합한 실이 거멓게 보였다. 벌그데데한 상처 부위를 더듬던 의현이 혜령의 손에서 거울을 빼앗아 집어 던졌다.

“백유성 지금 어디 있어?”

거울이 부서지며 나는 파열음과 의현의 고함이 겹쳤다.

“어디 있냐고!”

의현이 악을 질렀다. 목에 핏대가 서며 상처 부위가 불뚝거렸다.

“연락 시도 중입니다. 일단 안정하세요.”

“당장 내 앞으로 끌고 와.”

충혈된 눈이 혜령의 코앞에서 번들댔다. 의현이 손톱으로 목을 긁으며 봉합사를 잡아 뜯으려 들었다.

금세 피가 배어 나왔다. 혜령이 의현의 손목을 붙잡았다.

“도련님 원하시는 대로 될 겁니다.”

상처 입어 날뛰는 개처럼 발작하는 의현을 두고 혜령은 약속했다.

“바라시는 대로요.”

“내가 아니라 엄마가 원하는 대로겠지.”

비웃으면서도 의현은 목을 긁던 손을 멈추었다. 잘난 어머니가 원하는 일이 지금 그가 바라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알아서였다.

의현이 혜령의 손을 세차게 쳐냈다. 고개를 떨군 의현의 얼굴을 그날의 기억이 휩쓸었다.

안아 줘. 만져 줘. 다디달게 속삭이며 살을 붙여 오던 백유성. 썩은 과일처럼 달콤하고 일그러진 백유성.

목을 뚫고 들어오던 칼날의 감촉. 예리하고 극렬한 통증.

손바닥을 뜨듯하게 적시며 쏟아지는 피. 막아도, 막아도 떨어지는 핏줄기.

발걸음을 따라 비틀대는 세상에서 똑같이 기울어져 있던 백유성.

흔들리는 총구로나마 틀림없이 쏘아 맞히었음에도 쓰러지지 않던 백유성.

백유성, 백유성, 백유성.

의현이 소리 지르며 시트를 잡아 뜯었다. 병실 문밖으로 괴성이 쏟아져 나왔다.

혜령이 의현을 뒤로하고 병실을 나섰다.

“사장님.”

문 앞에 선 사람에게 혜령이 깍듯이 인사를 했다.

“가자.”

병실 앞에 기대 있던 최문경 사장이 선글라스를 고쳐 썼다. 아들의 절규는 귀에도 담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 동네는 어떻게 처리했니.”

주차장에 접어들자 문경이 입을 열었다.

의현이 유성을 끌고 갔던 집과 거기 동석했던 사람들 얘기였다. 혜령은 일단 조수석 문을 열었다. 둘이 탈 때 문경은 앞을 곧장 볼 수 있는 자리를 선호했다.

“건물은 태웠고 말 안 새게 입도 잘 막았습니다.”

“산 사람 입 막아 봤자.”

“예. 사장님이 염려하시는 일 없을 방식으로 잘 막아 뒀습니다.”

혜령의 덤덤한 보고에 문경의 입술이 둥그런 곡선을 그렸다. 김 실장의 일 처리 능력이라면 문경도 믿는 바였다.

“제일 힘든 게 자식 농사라지만 쟤는 어쩌다 저렇게 자랐을까.”

한시름 덜고 나자 새삼 짜증이 올라왔다. 문경이 이기죽거렸다.

“감히 이따위 사고를 벌여. 감히. 정신 나간 새끼.”

두들겨 패서라도 고쳐 놓고 싶다만 그럴수록 더 어긋나는 애라는 걸 지난 세월 동안 물리게 깨달았다. 그래서 저가 박박 우긴 대로 백유성하고 결혼도 승낙했던 건데, 팔푼이가 눈 뜨고 뺏겨선.

“씨가 문제였나?”

그 약해 빠진 찌질이. 결함 덩어리. 문경이 선글라스를 벗어 집어 던졌다.

글로브 박스에 맞고 떨어지는 선글라스를 혜령이 주워 들었다. 굳게 다문 문경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쩌겠어? 일은 이미 벌어졌고, 저것도 자식이라고 죽여 놓을 수도 없는데.”

미쳤든 돌았든, 천하의 머저리라도 최의현은 최문경의 아들이었다. 아버지가 바라 마지않던 후계자였다.

“백유성은 문제도 아냐. 해신에서 사람으로 쳐 주지도 않는 쭉정이가 무슨 문제겠어. 최사헌이, 하자 중 하자는 걔 아니겠니.”

최사헌은 성가신 애였다. 태생부터가 그랬다.

최문혁. 오빠는 얼마나 복에 겹고 약해 빠진 인간인가.

아버지가 안 된다고 못 박은 출신 모를 여자와 애를 낳아 왔을 때부터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우연조의 밑에 두겠다는 아버지의 의견을 문경은 사실 반대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그딴 짓거리까지 하시면서 범운에 밀어 넣은 하자품. 문경과 의현이 있음에도 미국에 건너가 굳이, 굳이 데려온 장남의 아들.

사헌을 떠올리면 울화가 치밀었다.

“그래, 의현일 위해서라도 최사헌 걔는 언제고 뿌리를 뽑아야 했어.”

섣부르게 행동하면 바로 잘라 내려고 했더니 묵묵히 일하며 내실을 다지는 모습에 속에서 무시로 천불이 일었다.

하필이면 머리도 제법, 수완도 제법. 사고만 치느라 바쁜 아들놈과는 달라서 여러 번 쳐내려고 해도 거머리처럼 살아남아 이때껏 기어 올라왔다.

그러나 이번에야말로 떨쳐 내야 할 때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번에는 그 눈엣가시를 파내야 했다. 문경이 눈을 번득였다.

차는 조용히 병원을 떠나고 있었다. 별안간 걸려 온 전화만 아니었더라도 문경은 조카를 갈기갈기 찢어 놓을 생각에 잠겨 돌아갈 수 있었을 터였다.

“아버지?”

그러나 통화는 문경이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사람에게서 걸려 왔다. 발신인을 확인하고 바로 전화를 받은 문경이 허리를 펴고 어깨를 긴장시켰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문경의 안색이 시시각각 질렸다. 노한 음성이 전화기 바깥으로 흘러나올 지경이었다.

“김 실장, 석등원으로 차 돌려.”

전화를 끊은 문경이 가방에서 손거울을 꺼내 매무새를 정돈했다. 신경질에 가까운 동작 끝에, 차에서 내릴 무렵 문경의 복장은 오히려 다듬어져 있었다.

석등원의 판판한 돌길을 밟아 나아가며 문경이 입술을 감쳐물었다. 급히 바른 립스틱이 뭉개졌다.

구두를 벗고 아버지의 서재로 들어서는 문경의 종아리에 근육이 연신 곤두섰다.

“아버지, 문경이에요.”

닫혀 있는 문을 열기 전에는 심호흡해야 했다.

문이 열리고 바위처럼 단단한 부친의 등이 보이자 그마저도 소용없이 숨이 막혔지만.

“넌 자식 관리를 어떻게 하는 애냐?”

최종필 회장은 문경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혀를 찼다.

문경은 아버지의 앞에 무릎을 꿇고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등으로 식은땀이 한 줄기 흘렀다.

종필의 뒤에 대기하고 있던 남자가 오동나무 테이블에 패드를 세웠다.

블랙박스 영상이 화면 속에서 돌아갔다. 앞에서 역주행하며 달려오는 차와, 제대로 닦이지도 않은 길을 달리는 화면이 덜컹대며 이어졌다.

차가 뒤집히는 사고가 났으나 문경은 놀라지 않고 화면을 보았다. 진짜 문제는 차 사고 다음에 있었다.

발소리와 총소리 뒤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렸다.

의현의 목소리임을 문경은 바로 알아차렸다.

아버지 역시 알았을 것이다. 무릎에 올려놓은 문경의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의현이 내보내.”

“아버지.”

문경이 다급히 소리를 높였다. 스물 초입도 아니고, 이제 막 본사에서 내실을 다지는 중인 애를 내보내라니? 사실상 유배였다.

“나 죽기 전에는 한국 땅에 발붙일 생각도 말라고 해라.”

“아버지 하나뿐인 손자예요!”

“하나?”

“사헌이 걘 적자도 못 되잖아요. 애 엄마 이름만 갈아 끼웠다고 피가 어디 가나요?”

“앞으로 전자하고 통신 부문 네가 말한 그 적자도 못 되는 놈한테 넘어갈 거다.”

“아버지, 정말 왜 이러세요.”

문경은 목 졸린 새처럼 꽥꽥댔다. 그도 그럴 것이 말이 되는 소리냔 말이다. 범운의 주요 사업 분야, 포진된 신사업들이 모조리 최사헌한테 넘어간다고?

“어디서 사사건건 말대꾸야!”

탁자에 있던 옥으로 된 문진이 내던져졌다. 청둥오리 문진이 문경의 가슴에 맞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헉. 숨이 턱 막히며 찾아드는 통증에 문경이 급히 웅크렸다. 호흡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아프다는 시늉을 하면 더 큰 불호령이 떨어질 테다. 문경이 억지로 허리를 폈다.

순식간에 분기가 가셨다. 집 거실에 앉아 아버지의 호통을 들으며 숨죽여 떨던 여섯 살배기가 된 듯했다.

“네가 자식새끼 잘 키웠으면 이렇게 될 일도 없었어. 의현이 놈, 그게 지금 사람 꼴이냐? 그게 사람이야?”

이어지는 꾸중에 눈자위로 열이 쏠렸으나 무슨 말을 하시냐 대거리할 수도 없었다. 아버지는 절대적인 우위였으며, 실제로 이번에 의현이 벌인 일은 그만치 정신 나간 짓거리였다.

하필이면 제 사촌 형 약혼자를 건드려. 하필이면 제 할아버지 손에 들어갈 증거를 남겨. 하필, 하필.

“그딴 물건한테 기업 물려줄 생각을 했으니, 내가!”

고래고래 소리치던 종필이 가슴께를 부여잡으며 오만상을 썼다.

“아버지, 괜찮으세요?”

허옇게 질려 달려오는 문경을 밀쳐 내고는, 종필이 뒤의 남자에게 약을 가져오라는 시늉을 했다. 문경을 보는 종필의 눈빛이 싸늘했다.

“다시는 군말 붙이지 말고 하라는 대로 해.”

문경이 떨리는 다리를 펴고 비틀비틀 걸어 나갔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되었지? 의현이가 큰 사고를 치긴 했다. 그러나 그 애는 누가 뭐래도 이 집의 손자였다. 그간 있었던 사고도 잘만 덮이지 않았나.

누가 영상을 주었지? 아버지는 왜 그걸 받아 들고 저에게 보이며 질책한 걸까.

정신없이 걷던 문경이 흠칫, 놀라 멈췄다.

정원을 밝히는 석등 밑에 누가 서 있었다.

“회장님 뵙고 가시는 길인가 봅니다.”

최사헌.

문경의 붉은 입술이 사헌의 이름을 따라 움직였다.

“너구나.”

“저도 문안 인사드리고 나온 참이었거든요.”

“너였어. 네가 한 짓이야.”

뜬금없는 지적에도 사헌은 태연했다.

“블랙박스는 어디서 구했니?”

“의현이 상처는 좀 괜찮습니까?”

평소 같지 않게 아예 대놓고 본론으로 찔러 들어오는 제 고모를 사헌은 가볍게 무시했다. 볼수록 괘씸한 작태였다.

“제 약혼자는 곧 퇴원합니다.”

그렇겠지. 아무렴. 남의 아들 목까지 따려고 든 지독한 물건이 쉽게 고꾸라질 리가.

“한국에서 다시는 둘이 마주칠 일 없었으면 좋겠는데요.”

사헌이 쐐기를 박았다.

“우리 식구도 아닌 네가 범운을 가질 수는 없어. 네 뜻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설마요.”

잘그락, 사헌의 구둣발 밑에서 자갈이 서로 부딪혔다.

“제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면 지금 의현이는 살아 있지도 못할 텐데요.”

사헌은 어느덧 문경의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팔을 뻗으면 거머쥘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문경은 아버지 앞에 꿇어앉았을 때처럼 분노로 깩깩대거나 떨지 않았다. 대신 서릿발 같은 눈빛으로 사헌을 노렸다.

“다음 분기에 아버지 전자 통신 지분 저한테로 넘어옵니다. TY하고 AI 자율 주행 시스템 협력 개발, 계약 구체화 단계인데, 우 회장님께서 할아버지한테 제 얘기를 많이 하신 모양이에요.”

“TY?”

문경의 눈빛이 흔들렸다. TY 우태영 회장이 이제 와서 왜?

장남 최문혁이 나가떨어진 후에도, 남들이 범운의 다음 주자는 최문경이겠거니 인정할 즈음에도 아버지는 그룹 내 주요 사업을 문경에게 온전히 맡기지 않았다.

자기가 관리한 능구렁이 같은 중역들에게 맡겨 놓고 뒤에서는 그 연세가 되도록 주물러 왔단 말이다.

그러나 그것도 의현이 완전히 인정받기만 하면 자연히 문경의 것이 되고, 다시 의현에게로 대물림되었을 터다.

그런데 그게 다 최사헌에게로 넘어간다고? 손주 취급도 안 하던 TY 우 회장이 갑자기 저 자식 편을 들어?

“그러고 보니 올림픽 맞춰서 리조트 새로 까신다고요. 레저든 유통업이든, 원래 경영 스타일 공격적이신 건 알지만 최근에 확장이 너무 빠르지 않나 싶네요. 어디서든 오너 독주는 위험하다고들 하잖습니까. 알아서 잘하시겠지만.”

“너, 누구한테…….”

“충심으로 드린 조언입니다.”

문경의 언성이 높아지기 전 사헌이 말을 끊어 냈다.

더 말을 붙일 기회도 없었다. 사헌은 타이밍 좋게 울리는 핸드폰을 확인하고는 목인사를 건넸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일이 많아져서. 의현이가 준 선물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안부 전해 주세요.”

대답을 듣지도 않고 유유히 사라지는 사헌의 뒷모습을 보며 문경이 아랫입술을 질겅거렸다. 앞니에 붉은 립스틱이 덩어리져 번졌다.

차로 돌아와 앉은 문경의 턱이 덜덜 떨렸다. 운전석을 지키던 혜령이 손수건을 건네자 문경이 거칠게 쳐냈다.

“충심? 조언? 제까짓 게.”

피도 안 마른 게 감히. 저 자식이 대학에서 교수가 하는 말이나 받아 적고 있을 때 문경은 이미 경영에 뛰어들었다.

“다시 병원으로 가.”

“……도련님 계시는 병원으로요?”

“그래, 당장.”

문경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많은 것 중에는 다혈질도 포함됐다. 문경은 평생 최종필을 닮고자 했고, 의현은 문경을 닮았다.

병원에 도착하자 이번에는 혜령을 뒤로하고 문경이 내달리는 전차처럼 병실로 들어섰다.

다가오는 문경을 의현은 무표정하게 주시했다.

뒤이어 문경을 따른 혜령이 끼어들 틈도 없이, 문경이 대차게 의현의 뺨을 올려붙였다.

“너! 어쩔 셈이야.”

매섭게 쏟아지는 고함을 들으며 의현이 얻어맞은 볼을 실룩였다. 눈동자가 위로 굴러 문경을 향했다.

“회장님이 뭐라고 하셨나 봐?”

“네 꼴 더는 보기도 싫으니 바다 건너로 보내란다.”

손바닥째로 머리를 내리치는 통에 퍽퍽, 소리가 울렸다. 손힘에 고개가 절로 꺾이고 머리가 흐트러지는데도 의현은 막지 않고 맞고만 있었다.

혜령이 슬그머니 문에 등을 대고 섰다. 혹시라도 들어올 사람을 막기 위해서였다.

“백유성? 그까짓 백유성이 뭐길래. 다 떠먹여 주는데도 그거 하날 못 받아먹고 이 짓거리를, 이 정신 나간 새끼야! 이 등신!”

이제는 숫제 주먹질이었다. 다부지게 쥔 주먹을 후려갈길 때면 아까보다 더 소리가 크게 났다.

“추저분한 알파 놈까지 사서 애썼는데 겨우 나온 게 이거야. 씨가 암만 나빠도 그렇지. 그나마 형질 말고는 볼 것도 없고.”

문경이 씩씩거리며 주먹을 거둬들일 때까지도 의현은 고개를 처박다시피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던 문경이 다시 손을 치켜들었다가 부르르 떨며 아래로 내렸다.

“어떻게 뭐 하나 똑바로 하는 게 없어.”

“똑바로 하면 돼?”

다친 자리를 긁으며 의현이 고개 숙인 채 뇌까렸다. 손가락이 자벌레처럼 징그럽게 움직이며 목덜미의 상처를 긁적댔다.

“하나라도 똑바로 하면 되냐고.”

비스듬히 고개를 든 의현의 얼굴 한 면에 불긋한 멍이 번져 가고 있었다. 혈관이 터져 눈 밑이 벌그데데해진 모습이 그로테스크했다.

“엄마 말대로 시작하면 끝을 봐야지.”

이내 간지럽지도 않다는 듯 의현이 씩 웃었다.

“나 언제 출국해야 하는데.”

“너…….”

“가기 전에 끝내야 하지 않겠어?”

무언가 잘못 돌아갔다. 문경은 느꼈다. 고치기 위해 공구로 물건을 손보다가 끼긱, 기분 나쁜 소음과 함께 느껴지는 어긋난 손맛 같은 것.

“나 같은 등신도 생각은 한단 말이지.”

눈을 잘못 맞았는지 의현의 흰자위에서 실핏줄이 터져 붉은 얼룩을 그렸다.

“생각해 봤는데, 최사헌만 없어지면 할아버지도 나 말고는 없어.”

“…….”

문경이 반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병실에는 문지기처럼 버티고 선 혜령뿐이었다.

문경과 의현, 모자의 시선이 어긋났다가, 맞붙었다. 드물게 완벽한 눈 맞춤이었다.

* * *

꿈을 꿨다.

나는 갈대 씨앗이 금빛으로 날아다니는 강변에 앉아 있었다.

저 멀리서 조그만 발소리가 들려온다.

말랑말랑하고 포근한 것, 자그맣고 연약한 것, 눈부신 것이 내 품으로 뛰어 들어와 안긴다. 금빛 털 오라기들이 사방으로 나풀나풀 흩날린다.

나는 그 애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뒤이어 내걸어온 최사헌은 다정히 웃는다.

그 애를 안은 나를 최사헌은 안아 주었다.

꿈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그래서,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조그마한 어린애가 내 품에서 빠져나가 다시 강변으로 달음박질친다.

이름을 불러 돌려세우고 싶은데 부를 수가 없었다.

이름을 몰라서 부르지 못했다.

어떻게든 작달막한 등을 붙잡으려 덩달아 뛰었다. 조금만 더 힘껏 뻗으면 손끝에 소매가 걸릴 것도 같았다.

총성이 뒤울렸다.

갈대밭이 바람을 따라 허리를 꺾고 누웠다. 끔찍한 고통이 덮쳐 왔다.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떴다. 천장에 금색 무늬가 일렁였다.

눈꺼풀에 남은 황금의 잔영을 조금이라도 더 붙잡아 두고자 잠시라도 눈을 감고 싶었으나, 연이어 총성이 들렸다.

귀를 찢는 소음에 머리를 흔들며 일어나 앉았다.

병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 혼자다. 생에 언제나 그랬듯이. 더듬거리며 아랫배를 짚고서 입술로 중얼거렸다. 혼자.

대꾸하듯 배 속에서 움직임이 느껴졌다. 확고한 태동이었다.

나는 경악인지, 환희인지 모를 놀라움에 사로잡혔다. 벌떡 일어나 비명이라도 지르면서 최사헌을 부르고 싶었다.

태동이 사그라지자마자 눈물이 났다.

진짜가 아니다.

진짜일 수가 없다.

거짓말이다. 가끔 똑똑히 보이는 유민이처럼.

그저 내 삶에 붙은 유령이 늘어난 것뿐이다.

“으, 욱…….”

울음을 집어삼키려 해 보았으나 구역질처럼 다시 올라왔다.

이 모든 건 벌이다.

다 잊고 행복해지고 싶다고 생각해 버렸으니까. 살고 싶어 했으니까.

유민이와의 약속을 어겼기 때문에.

이명이 귀를 울렸다. 드릴을 귀에 대고 돌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고개를 돌리고 나서야 아까부터 청각을 괴롭히던 굉음이 어디서 났는지 깨달았다.

침대 옆 간이 테이블에 놓인 핸드폰이 덜걱덜걱 울었다.

받을 때까지 멈추지 않겠다는 양 끈질겼다.

머리가 통째로 진동하는 느낌을 더 버틸 수 없었다. 나는 핸드폰을 들어 마구 액정을 문질렀다.

― 이제야 받았네.

엄지가 미끄러지며 통화를 연결했다. 다음으로 들린 목소리는 총소리보다도 더욱 나를 소스라치게 했다.

― 몸은 어떠니?

최문경이 내게 몸 상태를 묻고 있음이 믿기지 않았다.

반응하지 않아도 최문경은 천연덕스레 말을 이었다.

― 병원에라도 한번 찾아갔어야 했는데 시간을 못 냈네. 의현이가 이번에 출국 앞두고 준비 중이라 내가 바빠서. 그래도 너한테 알릴 건 알려 줘야 할 것 같아서 전화했어.

“출국을 한다고요? 최의현이?”

막혔던 말이 튀어 나갔다. 외국으로 나간다고. 이런 짓을 벌여 놓고도, 그게 전부라고.

배에서 다시 태동이 느껴져 입을 틀어막았다.

― 사촌 동생 지극히 생각하는 사헌이 덕분에.

발이 제대로 자라지도 않았을 아이인데 발길질이 느껴졌다. 지독한 환상이었다.

― 얼마 자라지도 못한 자식 팔아서 장사하는 꼴이 제법이야. 하여간 머리는 비상해. 몇 개월이었지? 겨우 반년도 안 품고 회사 지분 그만큼 챙겼으면 그야말로 남는 장사지.

날을 세운 혓바닥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무슨 반응을 원하는지 훤히 보였으나 알면서도 속수무책으로 덫에 걸렸다.

소리가 울리더니 멀어졌다. 언제 전화를 끊었는지도 몰랐다. 생각 이전에 발이 병실 침대 밖으로 움직였다.

나는 휘청대며 걸었다. 일어서자 머리가 핑 돌았다. 문까지 가지도 못했는데 무릎이 꺾였다.

“거짓말…….”

흘러나온 혼잣말이 내 목소리 같지 않았다.

사실일 것이다. 알고 있다.

사실이니까 최문경이 직접 전화까지 해서 알려 준 거다. 내가 가장 약해졌을 때, 처참히 상처 입도록.

아이의 죽음이 진짜이듯 최의현이 바다 건너에서 편히 살리라는 것도 진짜였다.

그런 건 단 한 번도 바라지 않았다.

이따위 결말을 위해서 최사헌을 찾아갔던 게 아니다.

고작 이렇게 끝날 줄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시작하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최사헌을 만나지도 않았다.

알았더라면!

내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것조차 후회로 변한다.

바닥에 널브러진 손끝이 빳빳하게 서며 손톱이 돌바닥을 긁었다. 통증이 살갗을 타고 흘렀다. 손가락의 뼈가 조각조각 시큰거렸다.

불현듯 병실 문이 열렸다.

고개를 들자 가장 지독했던 순간 절실히 떠올렸던, 떠올리지 않으려고 절박하게 노력했던 그가 보였다.

최사헌은 내가 그를 필요로 하는 순간에 놀라우리만치 쉽게 나타난다.

가장 절실했던 한 번을 제외하고는.

“무슨 일이에요.”

바닥에 쓰러진 나를 발견한 최사헌이 사색이 되어 내 어깨를 부축했다.

최사헌을 보자마자 가슴이 펄떡댔다. 분노인지, 사랑인지 헷갈릴 정도로 강한 고동이었다.

살을 에던 고통이 더욱 강렬하고 선명해졌다. 상실감이 사무쳤다. 복부를 걷어차인 듯했다. 갈비뼈가 부러져 장기를 파고드는 아픔이 분명 이럴 것이었다.

나는 아이도 잃었고, 최사헌도 잃었다.

“왜.”

잡히는 대로 최사헌의 셔츠를 붙잡았다. 멱살을 잡힌 최사헌이 급히 내 등을 받쳤다.

“왜 그랬어요.”

“유성 씨…….”

“당신이 뭔데.”

잠시 당혹하던 최사헌의 낯빛이 서서히 침착함을 되찾았다. 내가 뭐 때문에 이러는지 알고 있는 거다.

“네가 뭔데, 최의현을. 당신이 뭔데?!”

“……누가 알려 줬습니까. 안정될 때까지는 입 다물라고 했는데.”

내게 비밀로 할 생각이었다. 누워서 눈물이나 짜다가 최의현이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 버리게 둘 뻔했다.

열이 치솟아 통증을 희석하고 흐리던 정신을 달구었다. 혀가 마구 돌아갔다.

“걔 뭘로 치웠어요? 나랑 지서희 씨 사고가 거래 주재료였을 거고, 어차피 법적인 처벌은 당신네 회장님이 막아 냈을 테고. 집안 내에서 내린 엄벌이 어디 유럽에라도 보내서 술이나 마시면서 흥청망청 살게 하는 거였나 보네.”

“일단 앉아요. 앉아서 얘기해.”

“그 최문경이 순순히 당했을 리가 없는데. 뭔가 있었죠, 증거?”

“……여미림 씨한테 사건 현장 블랙박스 영상 받았습니다.”

“그걸로 거래를 했어? 내 뒤에서?”

최사헌의 입술이 망연히 벌어졌다. 애써 설명하고자 하는 기색을 나는 무시했다.

“그게 최선이었다는 말은 하지도 마요.”

그 말을 들으면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최사헌은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해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

눈길이 어디로 향했는지 알고 나자 비참해졌다. 어느새 나는 한쪽 팔로 내 배를 감싸 안고 있었다. 최사헌은 그걸 보고 있었다.

“미안하다고 하려고 했습니다.”

“미안할 짓을 왜 해?”

수치심 때문에 더 화가 났다. 억지로 나를 침대에 앉히기를 포기했는지 최사헌이 팔에서 힘을 뺐다. 나는 휘청대면서도 최사헌을 뿌리치고 물러섰다.

기어이 거리를 벌리는 나를 최사헌이 다시 잡으려 들었으나, 잡혀 주지 않았다.

“이대로 두면 무슨 꼴일지 뻔히 보이니까!”

허공을 움키며 최사헌이 언성을 높였다.

“최의현, 최의현. 그 생각밖에 없지. 당신은 당신 자신은 안중에도 없잖아.”

최의현. 이름을 말할 때마다 최사헌이 한 발씩 발을 디뎠다.

다가오는 최사헌을 피하느라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쫓기기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그런데 나는, 당신이 최의현 때문에 다치는 꼴 더는 못 보겠어. 이대로 한국에 뒀으면 최의현이 안 움직여도 당신이 먼저 찾아갔을 거야. 내 말 틀려?”

“변명하지 마.”

최사헌이 뭐라고 하는지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챙길 거 다 챙겨 놓고, 나 위한 척하지 말라고.”

뭐라고 이유를 갖다 붙이든 내 사고를, 유산(流産)을, 최사헌은 거래 도구로 썼다.

최사헌이 멈췄다. 이미 나와 그는 병실 귀퉁이까지 몰려 있었다.

최사헌의 입술이 떨렸다. 잠시 나는 그의 부서진 얼굴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순간이었다. 눈을 깜빡이자 환각은 씻긴 듯 사라졌다.

“그래. 차라리 미워해. 최의현 대신 내 생각이나 해.”

기가 차 최사헌을 노려보았으나 그는 놀라울 정도로 냉정한 표정을 잘 유지했다.

“내가 왜, 네 생각을 해.”

그 반듯한 얼굴을 진창으로 만들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다.

손이 자꾸만 배로 향하려고 들었다. 웃기지만 정작 거기 애가 있을 때는 태동을 제대로 느껴 보지 못했다. 그러니 지금 느껴지는 게 진짜 태동하고 비슷하기라도 한지, 사실 나는 모른다.

“이제 계산 끝났잖아요. 최문경 말이 맞아. 결혼도 하기 전에 그만큼 이득 봤으면 최사헌 씨는 얻을 만큼 얻은 거죠.”

몰라서 억울했고, 몰라서 화가 났다.

“정작 나는 원하던 건 하나도 못 받았고.”

최사헌한테 화가 나는지 나한테 화가 나는 건지, 그것조차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제 끝내자고요.”

“……우린 아직도 양가 합의하에 약혼한 사이고, 정리된 건 아무것도 없어요. 유성 씨 혼자 끝내기로 마음먹는다고 끝나진 않는다는 소립니다. 알 텐데.”

지긋지긋했다. 나는 최사헌을 지나쳐 미림이 가져다주었던 가방에 침대 곁에 있는 짐을 막무가내로 쑤셔 넣었다.

“오늘 퇴원할래요.”

“…….”

“퇴원해서, 최의현이 있는 병원에 갈 거예요. 어떤 꼴인지 봐야겠어요.”

“가서 어떻게 하려고요.”

“……죽여 버릴 거야.”

“어떻게.”

“어떻게든. 그리고 나도 죽어 버릴 거야.”

“말 함부로 하지 마.”

옷가지가 비어져 나온 짐가방을 최사헌이 손으로 덮었다. 커다란 손바닥 아래 가방이 납작하게 눌린다. 나는 발작하듯 가방을 끄집어내 폈다.

“그냥 하는 말 같아? 최의현 내보내겠다고 결정한 건 당신이고, 당신 가족이야. 이제 알겠어. 나 같은 게 무슨 짓을 해도 그 새끼 바닥에 끌어내릴 수는 없다는 거.”

전부 뺏고 싶었다. 나처럼 비참하게 나뒹굴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면, 적어도 평온하게 살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다.

“그러니까 하자고 할 때 파혼해. 당신 이름까지 지저분해지기 싫으면.”

어서 버려라. 최사헌의 면전에 그렇게 내던지고 싶었다.

다 이용했으면 버려 달라고. 그러면 정말로 아무것도 남지 않으니까.

아무것도 없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으니까.

눈에 잔뜩 힘을 주어도 시야가 흐려졌다. 혹시라도 눈물이 방울지지 않게 나는 억지로 눈을 부릅떴다.

최사헌이 한숨 쉬며 팔을 늘어뜨렸다.

“좋아. 퇴원합시다. 집에 가서 쉬는 게 낫겠네.”

“최사헌 씨랑 같이 안 가요.”

“그럼 어디로 가려고요.”

“미림이네 있으면 돼요.”

“내가 허락 못 합니다. 가죠.”

최사헌이 내 짐가방을 빼앗아 들었다. 뒤늦게 가방끈을 붙잡았지만 도로 가져오기는 무리였다.

“당신이 뭔데 허락을 해?”

“당신 약혼자.”

태연한 대답이 듣기 싫었다.

최사헌은 사무적으로 보일 정도로 잠잠한 낯빛이었다.

나는 두 팔을 다 써서 짐가방을 당겼다. 힘을 주다 못해 내가 제풀에 넘어질 듯하자 최사헌이 내 팔뚝을 붙잡고는 겨우 가방을 넘겨주었다.

그마저 침착한 몸짓이라 이마가 뜨거워졌다.

미쳐 날뛰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꼴 보기 싫어.”

“…….”

“같이 있기 싫다구.”

“어쩔 수 없어, 싫어도.”

최사헌이 단칼에 내 말을 잘랐다.

“우린 결혼할 거야. 당신 아버지한테 물어봐. 이 결합을 깨고 싶은 마음이 있는지.”

“…….”

“이젠 내가 하겠다고 하는 한 내 조부도 우리 결혼에 입 못 대. 당신이 나하고 파혼할 방법? 그런 건 없어.”

한순간 숨통이 조이는 느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들고 있던 가방을 힘껏 내던졌다.

“어떻게 당신이 감히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최사헌의 가슴에 맞은 짐가방이 바닥에 떨어져 옷가지를 뱉어 냈다.

“이게 지켜 주는 거야?”

“그래.”

최사헌은 굳건했다. 가방을 집어 들고 먼지를 털어 내게 건네는 손등에 핏줄이 곤두섰다.

“이게 지켜 주는 거야.”

그의 손끝에도 닿기 싫어 가방을 받지도 않고 노려보기만 했다.

최사헌이 미웠다.

이 남자를 이토록 미워할 수 있는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해 보지 않았다.

* * *

우태영 회장의 독실은 사헌이 기억하는 최종필의 공간과 비슷하되 달랐다.

둘 다 돈 냄새가 비어져 나오는 건 같았으나 사헌의 친조부가 격식을 따졌다면, 우태영의 사무실은 마음에 드는 것들을 아무렇게 놓아둔 듯 분방한 감이 있었다.

벽면에 커다랗게 걸린 채도 높은 판화나, 유리 테이블에 불쑥 놓인 기괴한 조각상 따위가 그랬다.

개가 내장을 쏟아 내는 형태의 황동 조각상을 더듬으며 사헌이 고개를 갸웃했다.

“자기 아내를 위해서 자식을 팔아 버리면서 아버지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궁금했었거든요. 원망도 원망이었지만, 정말 대체 뭐였을까 싶기도 해서.”

사헌이 입을 뗐으나 맞은편 소파에 앉은 우태영은 심드렁했다. 정장을 갖추어 입은 우태영은 방파제에서 낚싯대를 드리우던 지저분한 노인과는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데 막상 겪어 보니까…… 그렇더라고요. 애 생각은 결국 그 사람이 더 다칠까 걱정되는 데에 비하면 별로 나지도 않더라고. 부전자전인지.”

사헌이 조각상에서 시선을 떼고 테이블 옆으로 고개를 틀었다.

“내가 형편없는 놈이라 그런가. 몇 년씩 기른 애였으면 달랐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유리 테이블 옆에는 얼떨떨한 얼굴의 남자가 무릎 꿇고 있었다.

“잘 안 들리셨으려나.”

사헌이 남자의 얼굴 바로 앞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귀가 그래서.”

며칠은 굶은 듯 해쓱한 안색도 안색이었으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따로 있었다. 남자의 한쪽 귀는 뭉텅이로 날아가 밋밋했다.

관자놀이에서 광대 위편까지 약하게 일그러진 화상 자국이 있었고, 덕분에 짝눈으로 보였다.

단지 그것뿐인데도 남자의 인상은 묘하게 궁핍하고 음침해 보였다. 때가 탄 옷도 한몫했다.

“이놈 확실해?”

우태영 회장이 구둣발로 남자의 무르팍을 걷어찼다.

“맞아요.”

대답은 다른 곳에서 나왔다.

우태영과 사헌이 앉은 소파 옆에 서 있던 여자가 모자를 벗었다. 높이 묶은 머리카락이 등판에 박힌 <삼삼 흥신소> 자수 위에서 흔들렸다. 짝귀 남자를 보며 임기주가 큼, 목을 가다듬었다.

“청음 물산, 정기승 실장님.”

이번에 남자를 부른 것은 사헌이었다.

“최문경 사장하고 무슨 사입니까.”

최문경으로부터 꼬리 자르기를 당한 정기승을 끌어낸 건 여미림과 임기주의 공이었다. 유성이 끌려갔던 자리에 있었던 나머지 인원은 행방이 묘연하고 장소 역시 제대로 남지 않았다.

알량한 증거랄 건 블랙박스, 그리고 이 남자 정도. 사헌이 일어나 기승에게로 다가갔다.

“최의현하고는요?”

“그으…….”

워낙에 장신인지라 사헌의 그림자는 길고 큼직했다. 기승을 다 덮어 버릴 만큼.

“최문경 사장이 범운 물류 전무로 있을 때, 청음은 회사 꼴도 못 갖춘 데였더라고요. 몰래 들여온 대마나 알음알음 팔고 일수놀이나 하고 있었지.”

기승이 입을 떼기도 전에 사헌이 미리 말을 시작했다.

어차피 대답을 들으려고 한 질문도 아니다. 정기승을 빼낼 때 이미 얼추 조사는 끝낸 뒤였다. 어디서 보낸 치들이었는지, 의현과 무슨 관계인지.

“그런데 최문경이가 물류 키우면서 재미를 크게 봤을 때하고 청음이 컸을 때랑 시기가 겹친다, 그 말이지. 절묘하게.”

듣고 있던 우태영이 말을 거들었다. 머릿속에서 뭘 계산하는지 정기승은 자꾸만 말라붙은 자기 입술을 빨았다.

“최의현이 사고 치면서 흘리고 다닌 부스러기 청소하는 것도, 회장님이 아시면 안 되는 것들도 청음에서 처리했겠죠.”

이건 청음 사장의 딸인 여미림이 직접 일러 준 얘기였다. 미림이 의현과 같은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데도 문경의 입김이 작용했다.

“정기승 씨 귀, 제 약혼자가 한 거라면서요.”

사헌이 허리를 굽혀 기승의 밋밋한 귓가를 만졌다. 어깨가 귀에 닿도록 기승이 상체를 바짝 움츠렸다.

뱀처럼 매끄럽게 감긴 손길이 이내 머리채를 쥐었다.

“머리가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입니까.”

사헌이 기승의 머리를 유리 테이블에 내리찍었다.

쾅, 혹은 퍽, 소리가 단조로우리만큼 규칙적으로 울렸다. 테이블의 유리 상판이 덜걱덜걱 흔들렸다.

유리에 시붉은 얼룩이 생겼다. 짓이겨진 이마에서 흐른 피가 기승의 눈꺼풀을 적시며 흐른다.

기주가 미간을 구기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쿵, 쿵, 소리는 몇 번 더 이어졌다.

“이번 일로 정기승 씨가 청음에서 잘려 나간 건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오래 일했으니까 아는 것들은 좀 있겠죠.”

사헌이 기승의 머리를 다시 위로 잡아 올릴 때, 기승의 이마에서는 콧잔등으로 줄줄 흐를 정도로 피가 떨어졌다.

우악스러운 폭행에 익숙한 사람답게 기승은 머리가 깨진 채로도 바쁘게 눈을 굴리고 있었다. 피에 젖은 눈꺼풀이 사헌을 향해 열렸다.

“그래서 제가 제안을 할까 하는데요.”

기승의 멀쩡한 귀에다 대고 사헌이 느리게 말을 부어 넣었다.

총을 쏴 갈기는 것만이 사냥은 아니다.

덫을 놓아 움직이지 못하게 된 사냥물을 잡는 것.

그거야말로 가장 신선한 살과 피를 취하는 방법이 아니겠나.

사헌이 찡그리듯 웃었다.

눈 앞머리가 구겨져 가느다란 골이 팬다. 날렵한 눈매에 그늘이 날카롭게 졌다.

이제 더는 안이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것도 잃지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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