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천 원 (Skit)
Skit 1. 2005.03.02
높은 담벼락을 감싼 벚나무에서 꽃망울이 움트기 시작했다. 꽃샘추위가 닥쳐올 것이라는 예보와 달리 온화한 날씨에 교정을 거니는 학생들의 옷차림은 가벼웠다. 춘추복을 입고 재킷을 팔에 걸친 예준은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2학년 교실이 있는 별관 건물을 흘끔 올려다봤다.
벌써 2학년이라니. 예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눈을 감았다 떴을 때 대학 생활 중이면 얼마나 좋을까? 기왕이면 전역한 2학년 1학기 정도면 딱 좋겠는데.
예준은 층계를 올라 배정된 반으로 향했다. 희뿌연 먼지가 둥둥 떠다니는 교실을 둘러보았다. 새 학기를 맞이한 교실은 어수선하고 시끄러웠다.
“어? 정예준이다!”
누군가 맨 끝자리에서 예준의 이름을 불렀다.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본 곳에는 송기현이 앉아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예준은 징글징글하다는 표정으로 송기현을 흘겼다. 매사 장난조인 송기현은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예준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고 있었다. 열여섯, 열일곱을 지나 이제 막 열여덟이 되었는데 애늙은이처럼 인생무상, 무념무상의 태도인 예준이 웃기다나 뭐라나.
손을 휘휘 흔드는 송기현에게 예준이 가까이 다가갔다.
“같은 반이라 다행이다.”
투덜거린 예준이 마지못해 옆자리 책상에 가방을 올렸다.
“왜 맨 뒷자리야.”
“방학 중에 책에서 봤는데, 나무만 보면 안 되고 숲을 봐야 한대.”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도 가지가지였다. 숲을 보겠다고 맨 뒷자리에 앉겠다는 게 말이 되냐. 예준이 송기현의 옷자락을 쭉 잡아당겨 거리를 바짝 좁혔다.
“일진 애들이 나오라고 하면 어떡해.”
목소리를 한껏 낮춘 예준이 속닥였다. 송기현을 구슬려 비교적 한산한 앞자리로 이동하려는 생각도 있었지만, 고등학교 생활이란 사회의 축소판과 다름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도 있었다. 그건 2학년이 되며 학업 비중이 커졌다고 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이라는 말인데. 괜히 밉보였다가 남은 2년이 피곤해지는 건 극구 사양이었다. 눈에 안 띄는 게 제일 좋은 법이지. 입속말을 중얼거린 예준이 기현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오라고 하면! 나가 주면 되는 거지.”
송기현은 잠시 고민하더니 대수롭지 않게 답하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일진이 아니라 누구라도 와서 자리를 비켜 달라고 하면 비켜 줄 용의가 있다고. 강약약강이 아닌 강약약약이라고 해야 하나. 한편으로는 가늘고 길게 살고 싶은 예준의 성정과 기현의 이런 부분이 꽤 잘 맞아 계속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송기현이 예준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저기 보임?”
“응?”
“쟤가 걔야. 미국에서 살다 온 애.”
책상 위에 엎드려 누운 커다란 덩치가 예준의 시야에 들어왔다. 바로 옆 분단, 창가 자리를 차지한 놈의 어깨가 고르게 오르내렸다. 볕이 내려앉은 등이 유독 따스해 보였다.
예준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입학식 날부터 일진들에 대한 숱한 악명보다 더 많이 들려온 소문의 주인공이니까. 미국에서 살다 왔고, 과고에 진학하려다 일반고로 입학한 놈. 머리가 비상할 정도로 좋고, 건장한 체격인 만큼 싸움도 잘한다고 했다. 조용하다 못해 싸늘한 말주변 탓에 일진들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한다고.
“당장 눈에 보이는 놈부터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
송기현이 눈매를 살긋 휘었다.
맞지. 가늘고 길게 살려면 저런 놈부터 피해야지. 예준이 입속말을 중얼거렸다.
Skit 2. 2005.03.10
“으악!”
“이런 미친!”
곳곳에서 큰 소리가 번졌다. 책걸상이 드르륵 끌리는 소리와 비명에 교실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검지와 중지를 합친 정도 크기의 그리마가 주변 소음에도 아랑곳 않고 교실 한가운데에서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존나 커, 시발.”
반사적으로 터진 욕설에 누군가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좀 잡아 봐!”
“씨발, 저걸 어케 잡아!”
송기현이 예준을 툭툭 건드렸다. 너 저런 거 잘 잡지 않아? 눈짓으로 묻는 그를 슬쩍 흘기다가 예준이 한숨을 푹 내쉬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슬리퍼를 벗어 한 손에 쥔 예준이 그리마와 거리를 천천히 좁혔다.
툭툭 건드리다 퍽, 하고 때려잡은 예준의 등 뒤에서 환호성과 휘파람 소리가 울렸다. 누군가 예준에게 휴지 뭉치를 건넸고, 벌레 사체를 수습한 예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자리에 앉았다(쉬는 시간이 되면 벌레 검댕이 묻은 슬리퍼를 흐르는 물에 씻어 낼 생각이었다).
이호연은 충격이 가시지 않은 낯을 하고 비칠대며 뒷문을 나섰다.
벌레가 사라진 뒤에도 쿵쿵 뛰는 가슴은 멎지 않았다.
Skit 3. 2005.03.28
이호연의 MP3 플레이어는 한 곡을 재생했다 다시 같은 곡을 되풀이했다. 자그마한 기기를 만지작대는 손끝이 자꾸만 리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느릿느릿 매점을 갔다 돌아온 호연의 귓가에 걸쭉한 래퍼의 노랫말이 울려 퍼졌다.
‘분명히 오천 원을 꺼내서 건네줬는데 오 아줌마 왜 날 울리는 거야(울고 있어 난) 오- 아줌마 내 전 재산인데(내 전 재산인데) 오오천 원, 오천 원, 오천 원, 오천 원 내 오오천 원, 오천 원 오천 원 나의 나의 나의 오천 원 소중한 오천 원’
나지막이 콧노래를 흥얼대던 호연이 앞문을 열고 빈 교실에 들어섰다. 문득 느껴지는 기척에 자연히 시선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희게 드러난 등허리가 잘록했다.
“어, 어어.”
미닫이문이 여닫히는 소리에 예준이 상의를 입다 뒤를 돌았다.
“체육인가.”
“으응. 빨리 입어, 너도.”
쭈뼛대며 대답한 예준에게로 이호연이 가까이 다가섰다. 그는 한 손으로 타이를 내리고 반대편 손으로 단추를 끌렀다. 벌어진 단추 사이로 단단한 골격이 드러났다. 널찍한 어깨를 멍하니 바라보던 예준이 두 눈을 끔벅였다. 같은 나이 맞아? 무슨 몸이 저리 커? 예준은 자신의 물렁살이 창피해져 괜스레 뱃가죽을 슬슬 문질러 보았다.
예준은 문설주에 기대어 서서 이호연을 기다렸다.
앞문을 잠근 예준이 호연과 나란히 복도를 가로질렀다. 늘 고만고만한 녀석들과 다녀 그런지 유독 옆에 선 이호연의 키가 크게 느껴졌다.
별관 1층 계단은 세 군데에 있다. 본관과 잇는 우측 복도 끝 계단과 중앙 현관 계단, 그리고 체육 창고와 주차장, 교문과 닿는 좌측 계단. 좌측 계단으로 향하며 예준은 거듭 뒤를 흘끔대었다. 미국에서 도대체 뭘 먹고 살았나. 5센티미터만 저를 줘도 부족하지 않겠다고 예준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조용해서 좋네.”
2층에서 1층 계단참에 다다라 나머지 층계를 한 발 한 발 내려가던 중이었다. 그림자를 밟아 걷듯 뒤따르던 이호연이 입매를 달싹였다.
“응?”
멈춰 선 예준을 내려다보는 시선은 직선을 닮아 있었다.
“보통 어디에서 왔냐, 영어 잘할 테니 해 봐라, 언니들 예쁘냐, 그런 걸 묻거든.”
아이들의 호기심은 선과 악에 대한 경계가 모호하다. 악의 없는 악의가 더 무서운 법을 학습하지 않았다. 아무리 호연의 체력이 크고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라 해도 순간의 궁금함을 참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희끄무레한 형체의 판타지를 묻는 것이다.
“뭐….”
예준이 고개를 갸웃하며 제 뺨을 긁었다. 영어권 나라에서 살다 온 이호연에게 막연한 호기심과 부러움이 이는 건 사실이었지만 전부 단순한 이유였다.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나라의 음식이나 문화에 대한 호기심이 전부였고, 조금 전 느낀 것처럼 비죽 솟아나 자연히 눈길이 가는 훤칠한 키. 그것 말고는 딱히 그에게 시새움을 느낄 것도, 투기를 느낄 것도 없었다. 단지 저 키에서 5센티미터만 받았으면 더할 나위 없겠다며 구시렁대었을 뿐.
날을 세우던 분위기가 누그러지며 이호연이 예준 옆에 섰다. 1층까지 내려와 차고 습한 공기가 서린 연결 통로를 지나려는 순간, 이호연이 갑자기 숨을 깊게 들이켜곤 아연한 낯으로 뒷걸음질 쳤다. 부들부들 떠는 호연이 예준의 뒤로 큰 몸을 숨기며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이호연이 가리킨 곳에는 날개 달린 바퀴벌레가 열심히 벽을 타고 있었다.
“날 따뜻해서 나왔나 보네.”
대수롭지 않게 쳐다보고 넘긴 예준이 체육관으로 가기 위해 걸음을 떼려 했다.
“어딜 가.”
“응?”
“저거 잡아야지.”
“어…?”
벌레를? 지금? 체육 가야 하는데? 되묻는 예준을 꽉 붙잡은 이호연은 요지부동이었다.
“2분 남았는데?”
“…난 못 지나가.”
이게 무슨 소리야. 예준이 눈가를 찡그렸다.
“저거 때문에?”
벽 타기 중인 벌레 하나로 사람이 못 지나가다니요.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표정을 일그러뜨린 예준이 기가 차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늦었는데.”
“어쨌든 난 못 가.”
“음…….”
“너도 못 가.”
이호연은 당연하다는 듯 덧붙였다. 자신이 못 가니 너 또한 못 간다며 붙든 어깨를 놓아주지 않았다.
“혼나는데….”
웅얼거린 예준이 울상을 지었다. 이놈 원래 이런 캐릭터였어?! 옴짝 못 하게 붙들린 어깨에 아귀힘이 느껴졌다.
“저, 저거, 잡으면 놔줄게.”
벌벌 떨다가도,
“그냥 가면 알지?”
돌연 선득한 음성이 귓바퀴를 돌았다.
놓아줘야 잡을 수 있다며 설득하고서야 예준은 이호연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예준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꿈질대며 벽을 타는 벌레를 잡을 수 있는 마땅한 도구가 없었다. 주저하다 허리를 반쯤 굽혀 신고 있던 삼선 슬리퍼에서 오른발을 빼냈다. 차가운 복도 바닥에 발이 그대로 닿았다. 예준이 두 눈을 데룩 굴렸다.
Inspector. Block Name: Choice System
[Menu][Narrative]
[Target Block][선택 1. 벌레를 잡는다]
[Target Block][선택 2. (갑자기 분위기) 이호연의 손을 잡고 달린다]
[Target Block][선택 3. 혼자 줄행랑친다]
[Target Block][선택 4. Hidden Card]
선택지는 네 가지였다. 잡는다면 바퀴벌레가 벽 끝까지 닿기 전에 빠르게 슬리퍼로 내리찍어야 잡을 수 있고, 이호연의 손을 잡고 달리는 건…, 잠시 상상을 해 본 예준이 하얗게 질린 낯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예준이 마지막으로 이호연의 눈치를 살폈다. 혼자 줄행랑친다면 졸업까지 도망자 신세를 면치 못할 터였다. 어림 반 푼어치 없는 결정이었다. ‘선택 3’을 고르는 순간 온갖 버그들과 사이드 이펙트로 얼룩질 2년을 떠올리니 기분이 암울해졌다. 선택지들 전부 Error 아닌가. 엔진 Inspector의 도움으로 디버그를 시도해도 해결되지 않는 오류.
4번은…, 아니 도대체 ‘Hidden Card’는 뭐야.
툴툴댄 예준이 4번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손에 쥔 슬리퍼에 힘을 주었다. 그대로 들린 손이 붕, 하는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갈랐다.
찰싹!
벽면을 후려친 예준이 두어 번 더 벽을 내리쳤다. 납작하게 짜부라진 벌레 시신이 슬리퍼 밑창에 들러붙었다. 하얀 벽에 검댕처럼 흔적이 남았다.
시시각각 변하던 이호연의 낯이 평온해진 것은 그다음이었다.
Skit 4. 2005.04.01
일주일이 채 흐르지 않은 만우절. 아니, 예준이 좋아하고 존경했던 홍콩의 유명 배우가 작고한 4월의 첫날. 느리게 부는 미풍이 손가락과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헤집었다.
예준이 턱을 들어 정면을 보았다. 드리운 햇살을 가린 그늘에 시야가 또렷했다. 이호연. 호연의 얼굴이 너무나 가까웠다. 내쉬어지는 숨결이 뺨을 간질일 정도의 거리였다. 호연은 제 팔 안에 가둔 예준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양옆의 벽을 짚고 섰다.
“그러니까….”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올려다보는 얼굴은 퍽 결연해 보였다.
“이거.”
부스럭대는 비닐에 담긴 건 분명 새 삼선 슬리퍼였다.
좀 멀쩡하게 주면 안 되는 건가. 꼭 이런 자세로…. 예준이 속으로 툴툴거렸다.
“고마워서.”
두 번 고마웠다가는 눈빛으로 사람을 팰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 어어, 별일 아니었는데…. 자, 잘 쓸게.”
예준이 손을 뻗어 새 슬리퍼를 받았다. 용건은 이걸로 끝인 건가 싶어 벗어나려 하는데, 이호연이 바짝 거리를 좁혀 왔다.
“오천 원.”
“어?”
“앞으로 벌레 나올 때마다 잡아 주면 오천 원씩 줄게.”
고백하듯 뇌까린 목소리는 단호했다. 어쩌면 교실에 출몰한 흉물스럽기 그지없던 벌레를 능수능란하게 잡는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해 버렸는지도 몰랐다.
얼떨떨한 표정을 한 예준은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Skit 5. 2005.07.08
한낮의 여름 바람이 불었다. 안단테를 닮은 느리지만 분명한 걸음걸이의 바람이었다.
예준은 호연과 나란히 물탱크가 드리운 그늘 아래에 앉았다. 탱크보이를 입에 문 예준이 힐긋 옆에 앉은 호연을 바라보았다.
“왜 오천 원이었어?”
예준이 물었다.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눈가를 찡그린 호연의 귓불이 붉어졌다. 그때 계속 듣던 노래 가사에 오천 원이 있어서, 라고 말하면 예준은 크게 웃을 것이다.
“오천 원 정도면 잡아 줄 것 같아서.”
바퀴벌레보다 더 큰 벌레였다면 증액도 생각했다며 단호히 말했다.
호연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물탱크 그림자 밖으로 비죽 솟은 이호연의 머리카락이 빛이 반사되어 갈색으로, 또 회색빛으로 찬란히 빛났다.
“이건 얼마인지 모르겠네.”
달짝지근한 아이스크림이 입가를 적셨다.
Skit 5. 2007.02.08.
니트 스웨터 위에 두툼한 외투를 입은 이호연이 교문을 지나 운동장을 성큼성큼 가로질렀다. 그는 북적이는 인파를 헤치고 예준을 찾아냈다. 부모님과 함께 선 예준은 꽃다발을 들고 부친과 모친, 돌아가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간 호연이 예준 앞에 섰다.
“딱 맞춰 왔네?”
이호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있던 제 꽃다발을 예준에게 떠안겼다. 추워서인지, 아니면 느닷없는 선물에 놀란 것인지 예준의 두 뺨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두 팔에 가득 안은 꽃다발에서는 향기가 넘실거렸다.
“안녕하셨어요.”
호연이 뒤를 돌아 예준의 부모님에게 허리를 숙였다.
“아유, 호연이는 어른 같네.”
우리 예준이는 아직도 애 같은데. 모친의 너스레에 예준이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어른 같아 보여서 좋겠다.”
“늙어 보인다는 거야?”
“조금?”
모친이 말하지 않았어도 이호연은 또래보다 덩치가 크고 표정이 풍부하지 않아 분명 동갑인데 형처럼 느껴질 때가 종종 있었다. 오늘은 학교에서 사복 차림을 하고 있어 더 그런 것 같았다.
“이대로 한 5년 지나면 네가 위너야. 그때 되면 동안이라고 할 수도?”
그땐 둘 다 비슷한 나이로 보이지 않겠느냐는 예준의 농담에 호연의 입매에 피식, 가벼운 웃음이 걸렸다.
“…같은 과면 좋은데.”
“그래도 학교는 같잖아.”
미술 대학 지망인 예준과 달리 호연은 컴퓨터 공학을 희망했다. 예준이 장갑 낀 손으로 호연의 옷자락을 쥐었다. 같은 대학이니 연합 동아리에 들어 활동해도 되고, 교양도 맞춰 들을 수 있다. 부모님 허락이 떨어진다면 같이 자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준은 고등학교 때보다 함께할 시간이 많으니, 서운해 말라며 호연을 달랬다.
“나 군대 갈 때 같이 휴학해.”
“알겠어, 알겠다구.”
특이하고 유난스러운 성격인 건 알았지만, 군대까지 같은 시기에 다녀와 복학하자는 말을 고등학교 졸업식 때 듣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예준은 이호연과 그날 이후로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친해진 계기는 다시 생각해도 신기하긴 했다. 이렇게 서로를 스스럼없이 대하게 될 줄도 몰랐고. 송기현이 배신자라 놀릴 만큼 만 2년을 꽉 채워 붙어 다닌 덕분에 지금은 둘도 없는 사이가 되었다. 때론 형처럼, 때론 가족처럼, 때론 연인처럼 다가오는 호연과 앞으로도 이렇게 계속 함께하고 싶었다.
“이호연! 무슨 애가, 걸음이 이렇게 빨라?!”
멀리서 이호수가 뛰다시피 다가와 숨을 헐떡거렸다. 이런 불효자 같으니! 이호수는 부모님과 저를 내팽개치고 운동장을 가로지른 이호연을 한껏 째려보았다. 교문에서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져 어찌나 놀랐던지. 부모님은 그냥 두라 하였지만, 철딱서니 없는 티를 아직 벗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누나.”
예준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오냐. 어휴, 엄마! 이쪽이야, 이쪽!”
“안녕하세요, 아줌마, 아저씨.”
이호수 뒤로 보이는 중년 부부를 향해 예준이 연달아 묵례 했다. 호연과 예준을 두고 둘러선 가족들이 서로 인사를 나눴다.
“인사는 레스토랑 가서 하고, 사진부터! 얘들아, 이쪽에 서 봐!”
이호수가 카메라를 들고 두 사람을 불렀다. 예준의 어깨에 팔을 두른 호연이 거리를 바짝 좁혔다. 꽃내음이 진하게 풍겨 와 겨울이 아닌 봄 풍경에 흠뻑 젖어 드는 기분이었다.
“졸업 축하해.”
“응, 너도 축하해.”
찰칵! 서로를 향해 웃는 모습이 사진에 담겼다.
**
If. [Target Block][선택 4. Hidden Card]
선택한 카드가 순간 핏빛으로 번지며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동시에 자그마한 크기의 바퀴벌레가 움찔움찔 제 몸체를 뒤흔들었다.
[시스템] [Hidden Card] 선택으로 ‘바퀴벌레’가 진화를 시작합니다.
[시스템] 세상에, 바퀴벌레가 꼽등이로 진화하였습니다.
불룩불룩 돋아난 다리를 본 예준이 화들짝 놀라 호연의 손목을 틀어쥐었다. 호연이 얼어붙은 채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뭐 해? 빨리 뛰어!”
“아…….”
“저건 아무리 나라도 못 잡는다고!”
별관 1층을 벗어나 운동장을 향해 냅다 달리기 시작한 예준과 호연의 등 뒤에서, 진화한 꼽등이가 힘차게 뛰어올랐다.
방榜이 붙었다.
명문가로 정평이 난 이 대감 댁에서 낸 방이었다. 몸종을 구한다며 써 붙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손재주가 좋을 것.
둘째, 입이 무겁고 사리 분별할 줄 알 것.
셋째, 대감 댁에 기거하며 막내 도령을 도울 수 있어야 할 것.
저잣거리 소문은 발 없는 말이다. 흐르는 구름처럼 떠돌던 말에는 하루아침에 살이 붙었다. 예준의 귀에 닿을 때는 꽤 낯 뜨거운 내용으로 부풀어져 있었다.
“손재주가 좋고 입이 무겁고, 양반 댁에 기거해야 한다는 게 어떤 의미겠는가.”
옆 동네 살며 행상으로 오가는 송기현이 예준을 떠보았다.
예준은 기현을 흘겨보며 입매를 비죽거렸다. 뭐긴 뭐겠냐. 명문가 도련님 모시는데 아무렴, 입이 무거워야지. 손재주가 좋아야 할 일이 마땅히 떠오르진 않지만, 몸종이 하는 일이라는 것이 뭐 다 결국 몸 쓰고 손 쓰는 일 아니겠는가.
“훠이, 저리 가아.”
가뜩이나 요즘 장사도 안 되는데. 예준이 송기현을 파리 쫓듯 쫓아내며 고개를 팩 돌려 버렸다.
“내 저런 모호한 조건만 아니었다면 냉큼 지원했을 것이야.”
송기현이 늘어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지주이자 명문가 자제인 이호연 도령의 몸종 자리를 마다할 이유는 없으니까.
“투전이나 하러 감세.”
“자꾸 치근덕대지 말고.”
짜증 서린 예준의 대꾸에도 아랑곳 않고 송기현은 계속해서 말을 붙여 왔다. 저번에 갔을 때만 해도 제 덕에 솔찬히 챙기지 않았느냐며 구시렁거렸다.
예준은 콧방귀를 뀌며 눈가를 찡그렸다. 투전에 몰두하던 때는 작년이었다. 정확히는 직접 하는 것이 아니라, 승자에 판돈을 거는 놀이였다. 송가 놈이 한 일은 노름이나 다름없는 판에서 이기는 쪽에 걸라고 부추겨 몇 푼 벌게 해 준 게 다였는데, 해가 넘었는데도 그때 일을 들먹이고 있는 거였다.
쯧, 예준이 혀를 찼다. 돈은 좋아하지만 그래도 그런 걸로 버는 건 떳떳하지 못한 것 같단 말이야. 그보다, 돈을 더 벌어야 올해 겨울을 무사히 날 터인데.
“매몰차기는.”
서너 번을 졸라도 꼼짝 않는 예준을 두고 송기현은 봇짐을 둘러멨다. 토라져 걸음을 옮기는 송기현의 등을 예준은 멀거니 바라보았다. 저리 가도 내일이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또 들러붙어 오겠지.
조각품을 나열한 평상을 정리하기 위해 예준도 자리를 털었다. 야무진 손길이 깃든 조각품이었다. 처음엔 아이들 장난감을 만들어 팔았고, 판 수익으로 고향 근처 사찰 스님에게 영험한 부적을 써 왔다. 부적은 십이지신을 본떠 만든 조각상에 넣어 판매하였는데, 당시에는 나름대로 획기적이라 볼 수 있는 전략이었다.
부적 조각상이 인기를 얻은 후, 이것저것 판매 종류를 늘려 나가던 참이었다. 손님의 연령대는 다양했다. 마음에 둔 이에게 선물하겠다며 찾아오는 앳된 자제들도 있었고, 나무를 깎는 모습을 구경 오는 아이들, 참빗이나 저가의 구슬 목걸이, 팔찌를 구매하기 위해 오는 아낙들까지.
그렇다고 매번 장사가 잘 되는 건 아니었다. 조각품이 실생활에 늘 필요한 건 아니니까. 그나마 부적 조각이 팔리는 것도 마을에서 치러지는 큰 행사가 있거나 과거가 있는 시기뿐으로, 한철 장사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이놈의 팔자, 언제 편담.
예준이 구시렁대며 보자기에 조각품을 하나하나 조심스레 옮겨 담아 봇짐을 꾸렸다. 어귀로 빠져나온 예준의 시야 멀리, 너른 대지를 차지한 이 대감 댁 저택이 보였다.
이승호 대감.
이 마을에서 가장 유명한 이를 꼽으라면 단연 이 대감 가문이 아닐까. 가문 대대로 정1품과 종1품 관직을 지냈고, 상감 또한 혜안을 얻고자 할 적마다 이승호 대감에 서찰을 보낸다고 하였다. 이씨 가문이 청렴하고 검소하며, 또 강직한 성품을 지녔음을 예준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런 소문이 돌았을까.
‘잘 듣게, 막내 도령이 남자를 좋아한다지 않나.’
흥분한 송기현의 얼굴이 순간 떠올랐다.
‘그러니 방도 그런 내용으로 붙은 것이지.’
옆 동네 사는 송기현보다 이 동네에서 내내 장사해 온 저가 더 그 가문을 잘 알았다. 어려서부터 바닷길 너머 이국땅에서 공부하다 작년쯤 조선 땅으로 돌아왔다고 했었지. 행차하던 그날, 먼발치에서 도령의 모습을 본 것도 같았다.
청렴한 가문에 그런 몹쓸 소문이라니.
예준은 잠시 고민하다 짐을 고쳐 메고 타박타박 걸음을 옮겼다.
**
돌담길이 끝없이 이어졌다. 이미 해가 져 어둑한 길가를 얼마나 걸어왔는지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예준이 돌담길 아래 드리운 그늘을 징검다리 넘듯 사뿐 뛰어넘었다. 얼마나 가야 하는 거야. 대문도 엄청 머네. 툴툴대던 예준은 한참 만에야 두 팔을 벌려도 닿지 않는 크나큰 대문 앞에서 멈춰 섰다.
쿵쿵. 사위가 어둡고 고요해서인지 유독 문 두드리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뉘시오.”
문 안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예준은 긴장하여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방을 보고 찾아왔습니다.”
예준의 대꾸에 남자가 잠시만 기다리라 이른 후 걸음을 바삐 옮겼다. 한참 후 육중한 문이 열리며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몸종에 지원한다 하였소?”
“그, 그렇습니다.”
“들어오시오.”
자신을 김 씨라 소개한 노인이 예준을 이끌었다. 예준은 뒤쫓아 걸으며 주변을 살폈다. 넓다는 말 외엔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었다. 사랑채로 들어서 신을 벗고 마루 위에 올랐다.
“도련님, 방을 보고 지원한 자가 왔습니다.”
환한 불빛이 어룽지는 방 앞에서 김 씨가 아뢰었다.
“들이거라.”
안에서 흘러나온 음성은 서릿발처럼 차갑고 냉랭했다. 노인이 옆으로 한 발짝 물러나며 문을 열었다. 그의 눈짓에 예준은 방 안으로 쭈뼛대며 들어갔다. 온화한 기운이 넘실대는 방 한가운데, 두툼한 침의에 앉은 남자가 편안한 자세로 객을 맞았다. 상투를 틀어 올린 단정한 얼굴에 홀린 듯 예준의 시선이 그대로 머물렀다. 한참 이호연의 얼굴을 바라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허둥대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양반집 도령 얼굴이 뭐 저리 곱단 말인가. 생김 자체가 시원시원하고 흠결 하나 없어 예준은 적잖이 당황했다.
“…가까이 오거라.”
이호연이 예준을 불렀다.
‘같은 남자를 좋아한다지 않나.’
머릿속에 박힌 송기현의 말이 빠지지 않았다. 정말로? 그런 기색은 전혀 없어 보이는데.
“가까이 오래두?”
재차 부르는 소리에 예준이 눈치를 보다 호연의 앞에 다소곳이 앉았다. 제 턱을 매만진 호연이 예준을 꼼꼼히 뜯어보았다.
“손을 줘 보거라.”
손? 손은 왜 달라는 거죠? 크게 놀란 예준이 숨을 참고 눈을 질끈 감으며 짐승에게 내놓듯 손을 불쑥 내밀었다.
호연은 예준의 야무진 손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며 살폈다. 이런 작은 손으로 뭘 할 수 있나 싶었다. 방을 붙인 뒤 시일이 제법 되었으나 마음에 차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이 이상 끌 순 없기 때문에 슬슬 결정을 내려야 했다.
때마침, 호연과 예준 사이로 날벌레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애써 놀라지 않은 척하며 주먹을 꾹 움켜쥔 호연이 예준을 다급히 불렀다.
“마, 마침 잘됐구나. 저걸 잡아 보아라.”
“예?”
“잡아 보래두.”
“…아……?”
“얼른!”
호통과도 같은 외침에 예준이 맨손으로 날벌레를 낚아챘다. 이런 벌레는 손으로 잡아 붕붕 흔들기만 해도 정신을 못 차린다. 약한 자극에도 죽는 것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벌레를 잡으라고……. 양반들은 보통 작은 생명이라도 귀하게 여겨야 함을 배우지 않나? 도령이 수학하고 온 이국땅은 조선과 다른 것인가.
예준은 벌레를 아귀에 쥔 채 호연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맨손으로, 그걸…….”
넋이 나간 듯 작게 중얼거린 호연이 예준의 주먹을 내려다봤다. 헝겊도 없이 맨손으로 낚아채는 잽싼 움직임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당장 들이라 이르겠다.”
“예…?”
“이름이 무엇이냐.”
“…정예준이라 합니다.”
정예준, 예준이라. 예준의 이름을 입속말로 중얼거린 호연이 눈매를 휘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처음 보는 웃음기에 예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게 있느냐.”
호연이 방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노인을 불렀다. 호연은 문을 열고 들어온 노인에게 예준에게 옆방을 내어 주라 일렀다. 주저하는가 싶던 노인은 작은 주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뒤로 물러났다.
도련님 방 바로 옆이라고? 예준은 당연히 행랑채에 머물게 될 줄 알았다. 몸종으로 오래 머물 생각도 없었고, 하인들이 쓰는 방만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나 조금 전 무슨…… 시험 같은 것에 통과한 건가? 남자를 좋아하긴 무슨. 송가 놈 만나기만 해 봐라. 그놈의 혀를 아주 그냥.’
노인의 안내를 따라 방에 들어선 예준이 구석에 봇짐을 내려놓았다. 따스한 침구를 보니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폭신한 이부자리에 뺨을 비빈 예준이 늘어지게 하품했다.
**
정예준이 이 대감 댁에 몸종으로 들고 아흐레 날이 지났다. 그간 예준이 한 일이라곤 매우 단순했다. 눈곱조차 떼지 않고 이호연의 방에 가서 아침 죽을 먹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고, 따끈한 김이 올라오는 세숫물에 막내 도령이 씻는 동안 연못에 가 제 몸을 씻었다.
예준이 호연의 방으로 돌아오면 그때부터 일과가 시작되었다. 해가 완전히 뜨기 전, 서실에서 독서하는 이호연 옆에 앉아 조각도로 목각 상을 만들거나 그가 내어 준 먹으로 그림을 그리며 아침 식사를 기다렸다.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진 아침 본상은 이호연만을 위한 식사가 아니었다. 몸종인 예준의 몫도 함께였는데, 그간 푸짐하게 먹은 덕분인지 푸석했던 피부에 윤기가 흐르고 눈동자는 또렷하게 빛이 나게 되었다.
며칠 후, 이호연의 벗인 김사훈이 찾아왔다. 진시 내내 이호연 옆에 붙어 있던 예준은 쪽방에 있다 행랑 주변을 배회하며 시간을 보냈다. 널찍한 마당을 가로지른 예준은 방향을 잃고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저택 내 어디든 돌아다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지만, 옆에 이호연이 없으니 주저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예준이 아니야? 도련님은?”
때마침 경주댁이 마당을 가로지르며 예준을 보았다.
“후원 정자에 계세요.”
“아직 드시는구나.”
예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훈 도령이라고 들었다. 이국땅에서 함께 공부하였던 이가.
“도련님 드시고 남은 곶감이랑 수정과가 있는데 이리 오렴, 같이 들자.”
약과보다 곶감이 더 달콤하다는 귀띔에 예준이 관심을 보였다. 호연과 함께 지낸 동안 그가 부지런히 입에 넣어 준 약과와 양갱은 너무나 달고 맛있어, 매일 이렇게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수정과라면 생강 물인데 달큼한 음료였지, 아마. 간식에 홀린 예준이 경주댁을 쫄래쫄래 쫓아 부엌 문주를 넘었다.
“이 친구여?”
쪼그려 앉아 있다 고개를 든 양주댁과 한양댁이 예준을 올려다봤다.
“응, 도련님이 새로 들인.”
“이리 와서 앉어.”
엉덩이를 꿈질대며 공간을 터 준 양주댁이 예준에게 잘 말린 곶감을 내밀었다. 한 손에 집어 든 곶감은 아직 입에 넣지도 않았건만 벌써부터 단내가 진하게 퍼졌다.
“그, 도련님 말여, 또 기절하셨댜.”
“에구머니, 또?”
목소리를 낮춘 두 여자가 미간을 좁히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 집에서 도련님이라 하면 이호연뿐인데, 그가 기절을? 눈을 크게 뜬 예준이 야금야금 곶감을 씹으며 양주댁과 한양댁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축시에 잠시 나오다 그만.”
“…하이고.”
경주댁이 탄식했다.
“그랴두 금세 정신이 드셨댜.”
약방에서 삼이나 다른 약재라도 구해 와 달여야 하는 것 아니냐며 곳곳에서 염려가 번졌다. 예준은 곶감을 우물대다 향긋한 수정과를 후룩 들이켰다. 씹고 삼키는 소리에 경주댁이 예준을 흘끔 보았다.
“같이 있을 적엔 괜찮으신가?”
“야가 뭘 알겄어. 우리끼리만 아는 얘기여. 늬 어디 가서 함부로 입 놀리거나 하면 안 돼야. 알겄냐.”
떨어진 당부에 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겉으론 건강하고 강직해 보이는 도련님 건강이 생각보다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부엌 아낙들은 예준의 먹음새가 좋다며 곶감을 비롯해 소반 위 간식 대부분을 예준 앞에 밀어 주었다. 양껏 배를 채운 예준은 웅크렸던 몸을 바로 펴며 동그랗게 솟은 뱃가죽을 슬슬 문질렀다. 주는 대로 받아먹다 보니 입에서 단내가 나고 배가 동산처럼 불러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예준이 어디 가누?”
미주알고주알 떠들던 경주댁이 부엌을 나서려는 예준을 붙들었다.
“어어, 저 뒷산 좀 다녀오려고요.”
배가 너무 불러 조금 걸어야 할 것 같았다. 겸사 조각을 할 나무를 해 와도 좋을 터였다.
“잘됐다, 가서 복숭아 좀 따 올 수 있으면 따 오렴.”
건네받은 소쿠리를 품에 안은 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힘주어 눌렀을 때 푹 꺼지는 게 아니라 단단한 과실을 골라 따 와야 한다는 당부를 머릿속에 새기고 지게와 도끼를 챙겨 타박타박 걸음을 옮겼다.
이승호 대감 저택 뒤편에는 대감댁에서 관리하는 복숭아 과원이 너른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무르익은 향기는 과원을 지날 때마다 달콤하게 퍼졌다. 느린 걸음을 재촉하던 예준이 입맛을 다셨다. 조금 전 배가 터지도록 먹었는데도 복숭아를 떠올리니 군침이 돌았다. 그러다 문득, 우뚝 멈춰 서서는 제 배를 내려다보았다.
너, 며칠 새 배가 불렀지?
꼬륵.
마치 대답하듯 배 속이 요란했다. 얼굴을 붉힌 예준이 보폭을 좁혀 앞으로 나아갔다. 그래, 잘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는데. 이런 기회가 흔한 것도 아니고. 중얼거리며 뒤뜰을 지나 과원으로 오르려던 참이었다.
중턱 부근, 고즈넉한 풍광이 내려앉은 정자에 사람 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린 예준의 시선이 자연히 먹으로 그려 낸 듯 뚜렷한 인영에 멎었다. 태산 같은 큰 풍채의 주인은 예준도 아는 이였다.
귀한 막내 도령 이호연.
그의 친우인 김사훈은 수시로 값비싼 술을 들고 문턱이 닳도록 이곳을 드나들었다. 오늘도 그런 날 중 하루였으리라. 예준이 부엌 이모들에게 전해 듣기로 사훈 도령이 가져오는 술은 높은 분들이 즐기는 것들이라 하였다.
예준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두리번거렸다. 사훈 도령이 정자에 없는 것으로 보아 이미 자리를 턴 듯했다. 이대로 나아가자니 수풀이 바스락대는 소리 때문에 호연이 깰 것만 같았다. 예준이 조심조심 뒷걸음질 치다 몸을 틀어 언덕을 오르려던 순간,
“…예준아.”
뒤에서 들려온 낯익은 음성에 예준은 우뚝 멈추어 섰다. 취한 목소리는 아니었으나 쇠로 벽을 긁어 내듯 탁하게 가라앉은 어조였다.
“네, 도련님.”
예준이 틀었던 몸을 도로 정자를 향해 돌리며 이호연을 바라보았다.
“어딜 가니.”
“복숭아도 따고, 나무도 하러요.”
또박또박 말을 잇는 예준을 보며 이호연이 픽 웃음을 흘렸다. 나무는 제 일이 맞지만, 복숭아는 부엌 아낙들이 부탁한 것 같았다. 짧지 않은 기간 지켜본 예준은 순하고 말을 잘 듣는 이였다. 외양으로 사람을 평가할 순 없지만, 한없이 가벼워 보이고, 한없이 속물처럼 느껴지다가도 무겁게 입을 닫을 줄 알았다. 부러 서실에 앉혀 두고 집안에 대한 이야기를 던지기도 했고, 약과를 입에 물려 주며 하인들이 혹할 소문을 흘리기도 하였다.
그가 본 예준은 재물을 밝히지만 필요 이상의 것을 탐하지 않는 이였다. 과분하다 싶으면 몸을 사리는 것이다. 희미하게 미소 짓던 호연이 상체를 일으켜 앉으며 예준을 똑바로 쳐다봤다. 사슴처럼 순한 눈매가 꼭 화선지에 유려하게 그려 넣은 난 같았다.
몸종 하난 잘 고른 것 같단 말이지.
낮게 읊조리던 호연이 예준의 얼굴을 뜯어보다 눈을 크게 흡떴다.
“…헉.”
예준의 어깨 부근에 나방이 하나 붙어 있었다. 호연은 그대로 몸을 굳혔다.
“도련님?”
예준이 이호연을 불렀지만 그는 들리지 않는 듯 경직돼 있었다.
‘도련님 말여, 또 기절하셨댜.’
부엌에서 아주머니 둘이 속닥이던 말을 떠올리며 예준은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거, 거기,”
“네?”
숨넘어갈 듯 하얗게 질린 이호연의 손가락 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손끝이 향한 곳은 예준이었고, 당황한 예준이 눈을 굴리며 제 몸을 보았다. 어깨에 붙어 있던 검은 벌레가 가슴팍으로 슬금슬금 내려가고 있었다. 설마 이것 때문인가? 짧게 고민한 예준이 손가락을 퉁겨 벌레를 내쳤다. 붙어 있던 나방이 옆으로 툭 떨어지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주, 죽인 것이냐.”
“아마도? 세게 퉁겨서 죽었을 거예요.”
손을 들어 보인 예준이 개구쟁이처럼 해실 웃었다. 호연은 그 순진하기 짝이 없는 웃음에 어쩐지 맥이 풀렸다.
“하…, 그런 걸 잘도 잡는구나.”
처음 본 날도 그렇고, 저 작은 손으로 못 하는 게 없다. 기가 막히다는 이호연을 보며 외려 예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손톱보다 작은 크기의 나방인데, 그런 거라니. 도련님이 보시기에 벌레가 하찮은 생물이라 그런 걸까. 예준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어깨를 으쓱했다.
“작기도 하고, 해는 안 되니까요.”
자그마한 나방 따위가 위협이 될 리 없다. 끽해야 얕게 물리는 정도? 가려움을 동반하지만 피부가 뒤집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이호연이 무덤덤한 예준을 감탄 어린 눈으로 응시했다. 어디서 이런 놈이 툭 떨어졌을까. 기다림의 시간이 길었던 만큼 주어진 보상인가. 그간 고생하였다고 천지신명이 저를 불쌍하게 여겨 이 아이를 보내 준 것 같았다.
반쯤 늘어져 있던 이호연이 겨우 자리를 털었다. 장대한 몸이 그늘을 드리웠다.
“과원에서 벌레를 보면 잡아다오. 그리하면 내 섭섭지 않게 챙겨 주겠다.”
그가 품에서 금화를 꺼내어 예준의 손에 직접 쥐여 주었다.
“도, 도련님?”
고백하듯 나직이 말하는 호연을 보며 예준이 두 눈을 깜박였다. 양반 자제가 평민의 손을 이리도 쉽게 잡다니. 금화에 홀린 것인지, 아니면 낮고 고요한 이호연의 목소리에 홀린 것인지 예준은 그의 제안에 어리바리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도령의 눈에 띄는) 벌레를 잡아 주면 마리당 금화를 챙겨 주겠다는 호연의 말은 사실이었다. 손재주가 좋아야 한다는 조건이 왜 방에 붙었는지 예준은 어림짐작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왜 축시에 까부라졌는지도, 입이 무거워야 하는 이유도.
추분을 지나 한로를 맞으며 따스한 아랫목에 숨어든 벌레들은 전부 예준의 손에 생을 마감하였다.
이호연은 점차 행동반경을 넓혀 갔는데, 가는 곳마다 예준을 데리고 다녔다. 하루에 적게는 한 마리, 많게는 서너 마리라 예준은 꽤 많은 금화를 챙길 수 있었다.
오늘은 호연의 산책 날이었다. 늘 풀벌레 때문에 과원에 오르지 못했었는데, 예준이 있으니 오랜만에 가을 나들이를 결심한 것이다. 호연의 뒤에서 쫄래쫄래 쫓아가던 예준이 허리끈을 당겨 올리자 묵직해진 주머니가 절그렁 소리를 냈다. 한 푼 두 푼 주는 금화를 챙기다 보니 바지가 이대로 주룩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비탈을 오르며 잡은 벌레만 다섯 마리였다. 새끼손톱보다 작은 크기의 벌레도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이호연의 명에 따라 예준은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챙겨 온 헝겊의 반이 벌레 잡기에 쓰였다.
“예준아.”
호연이 부르는 소리에 예준은 귀가 쫑긋 섰다. 또 벌레인가.
“실은 말이다.”
머뭇대던 호연이 입술을 달싹였다. 벌레가 무서워 소유의 과원에도 오르지 못한다는 그는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부모님과 누님뿐이라 했다. 김 노인조차도 호연이 의식을 놓는 이유까지는 모른다고.
“알고 있는 게지?”
“…네, 종으로 지내며 벌레만 잡은 것 같아서요.”
어느 몸종이 양반집 다섯 끼를 똑같이 챙겨 먹겠는가. 예준은 대감 댁에 짐을 푼 뒤로 살이 오르도록 먹기만 하고, 명에 따라 움직인 건 벌레를 잡을 적밖에 없었다.
향긋한 단내가 밀려드는 과원 입구에 다다랐다. 코끝을 간질이는 과실은 입에 물지 않아도 다디달았다. 코로 내음을 맡는 예준을 보며 호연이 피식 입매를 말아 올렸다. 처음 보았을 때도 느꼈지만, 사내답지 않게 희고 고운 얼굴이었다.
어느 설화에 따르면, 복숭아는 남자아이를 칭하기도 한다고 하였다. 또, 축귀의 힘이 있다고 했다. 귀신뿐 아니라 부정한 것의 접근을 막는다고. 오르지 못했던 과원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어쩌면 복숭아를 닮은 예준이 제 곁으로 와 주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맛을 보련?”
이호연이 눈매를 휘며 물었다. 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겪을수록 다정한 도련님이다. 하인에게 이렇게 살가운 분이 세상에 또 있을까. 처음 풍겼던 싸늘함은 오간 데 없었다.
예준과 마주 선 호연이 길게 팔을 뻗어 잘 익은 복숭아를 하나 땄다. 연분홍빛을 띠는 껍질 겉을 도포에 슥슥 닦아 낸 호연이 시선을 예준에게 고정한 채 과육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입 안 가득 번지는 달큰한 과즙에 눈꺼풀이 떨렸다. 씹어 삼키기 전에 호연의 발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예준을 복숭아나무가 드리운 그늘 아래,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두고 턱을 당겨 비스듬히 내려다보았다.
“…도련님?”
지척에 선 호연을 올려다보며 예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계속 같이 있고 싶구나.”
호연이 예준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물렁해진 복숭아 과육을 밀어 넣었다. 복숭아가 혀에 닿아 눈 녹듯 삼켜졌다.
“싫으냐.”
“…아, 그, 그게.”
더듬더듬 말을 잇지 못한 예준이 고개를 푹 숙였다. 막내 도령이 같은 남자를 좋아한다던 송가 놈 말이 사실임을 확인한 셈인데, 닿은 입술이 싫지 않았다. 시선을 들어 올린 예준은 호연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네게만 연심이 있는 거란다.”
입 안 가득 퍼진 복숭아처럼 이호연의 목소리가 예준의 귓바퀴를 돌아 가슴을 크게 울렸다.
그때, 바람이 불며 단풍이 후드득 떨어졌다. 도련님 곁에 머문 지 고작 한 계절인데, 벌써 색색으로 물이 들었다.
“가자.”
호연이 손을 내밀었다. 과원을 둘러보았고, 예준에게 마음도 표했다. 저택으로 돌아가 함께 저녁을 들고 하루를 마감할 생각이었다. 평범하지만 따뜻한 날들. 호연은 조선 땅에 돌아와 이런 순간이 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예준은 주저하다 호연의 큰 손바닥 위에 제 손을 올렸다.
‘고민해서 뭐 해. 나중으로 미뤄도 답은 하나일 것 같은데.’
너른 어깨를 올려다보며 짧게 한숨을 삼켜 냈다. 이놈의 팔자, 언제 펴나 싶었는데, 이런 식으로도 펴지는 건가.
“…약과가 먹고 싶습니다.”
예준이 호연의 손을 꾹 힘주어 쥐며 말했다.
“저녁 먼저 먹고 후식으로 먹자꾸나.”
호연이 돌아보며 화답해 웃음 지었다.
Import pandas as pd
# Path of the file to read
hoyeon_file_path = “../input/hoyeon-daily-memory/20XX_data.csv”
hoyeon_data = pd.read_csv
hoyeon_data.columns
사랑하는 사이라도 동거인 간의 규칙은 사소한 다툼을 줄여 주는 중요한 장치가 된다. 이건 나뿐 아니라 이호연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거였다.
예를 들면, 집안일은 대체로 같이 하지만 저녁 설거지와 주말 청소는 주로 내가 하는 등의 약속처럼 지켜지는 규칙들 말이다. 또, 회사 일뿐 아니라 가족 행사가 있거나 각자 외출을 해야 하는 경우 미리 일정을 서로 공유하는 것 같은(채팅방 공지 기능을 꽤 유용하게 사용했다).
그날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날들 중 하나였다.
이호연이 반찬을 담았던 접시와 밥그릇을 정리해 가져왔다. 접시를 건네받으며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어쩐지 뚱해 보이는 표정이다. 식사 때마다 회사에서 있던 일이나 아니면 다음엔 뭘 해 먹을지 시시콜콜 이야기하던 그인데, 오늘은 유독 조용했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물었지만 대답을 고르기만 할 뿐 명료한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호연 씨.”
뜨거운 물로 헹궈 낸 식기를 세척기에 밀어 넣으며 그를 불렀다.
“무슨 일 있었어요?”
나를 뒤에서 끌어안은 이호연이 내 목덜미에 이마를 묻고 잠시 뜸을 들였다.
“그게,”
“응?”
“사훈이가….”
주저하는 그를 돌아보며 시선을 맞췄다. 뭔데 이렇게 망설이는 건지.
“대표님이 뭐라고 했어요?”
보채듯 묻자 이호연이 입술을 달싹였다.
“같이 밥 좀 먹자고 노래를 불러서.”
한숨 섞인 목소리에 귀찮음이 뚝뚝 떨어졌다.
아, 여태 볶이고 있는 모양이네. 입속말을 중얼거렸다.
“회사에서도 눈만 마주치면 난리야.”
이호연이 앓는 소리를 냈다. 유닛 미팅을 비롯해 각종 회의에서도 눈만 마주치면 불퉁한 낯으로 노려본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H 스퀘어에서 봤다던데.”
“아, 그날.”
깜빡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판교는 넓은 듯 좁다. 특히나 사옥 단지가 포진한 테크노밸리나 유스페이스 부근에서 아는 사람을 우연히 마주치는 일은 흔한 편이었다. 워크샵 이후 이호연의 야근이 있던 날, 송기현과 9홀 스크린 골프를 치러 H 스퀘어 지하에 갔었고, 안내 데스크에서 김사훈 대표를 만난 적이 있다.
‘껌딱지야, 레오한테 말 좀 해 봐, 응?’
그는 제 일행이 있는 룸으로 들어가기 전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같이 밥 한번 먹을까요?”
내가 먼저 넌지시 물었다. 토요일이나 일요일 점심 한 끼 같이 먹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나? 아니면 점심 겸 저녁으로 이르게 먹어도 좋을 것 같다. 나와 이호연 사이를 아는 유일한 사람이니 부담 가질 필요도 없을 테고.
“흠.”
“바깥에서 먹기 좀 그러면, 음, 초대를 해도 되고요.”
그의 표정을 살피며 초대하자는 말을 덧붙였다. 자기 영역이 명확한 사람이지만, 김사훈은 그와 오래 본 친구이니 괜찮지 않을까? 외부에서 식사를 해도 좋겠지만 편안한 대화가 오가기는 어려울 테고, 장소 선정도 쉽지 않다. 식사 한번 하자고 서울로 나가거나 교외로 빠지는 건 물리적인 시간만 소요될 뿐 효율적이지 못하다.
어쩌면 이호연도 내심 절친한 친구인 김사훈을 초대하고 싶었을지 몰랐다. 어쨌든 같이 사는 동거인인 내가 있으니 허락이 필요하다 생각하는 건지도.
“바깥보단 집이 낫긴 한데.”
고민하던 이호연이 나직하게 답했다. 여러모로 고민이 되는 모양이었다.
“이참에 날 잡고 대접해요.”
“…안 피곤하겠어? 집에 부르면 신경 쓸 것도 많을 텐데.”
“나중에 더 피곤해져요.”
얼마나 시달렸으면 이호연이 먼저 말을 꺼내겠어.
게다가 입장을 바꿔 보면 내가 김사훈 대표였어도 서운할 것 같긴 했다. 10년을 넘게 본 친구이고 같은 회사까지 다니는데 미국에서 귀국하고 1년이 넘도록 사귀는 애인을 보여 주지도 않고 꽁꽁 숨겨 둔 걸로도 모자라, 워크샵이 끝나고 서울에서 뒤풀이라도 할 줄 알았건만 그대로 분당으로 직행했으니 섭섭할 법도 하지.
기왕 이렇게 된 거 여행 가기 전에 빨리빨리 해치우는 게 낫지 않겠어?
다음 날, 이호연과 내 메신저 상단에는 새로운 공지가 추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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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4일 (호연) 본가
◉ 11월 11일 (호연/예준) 부산 아난티
◉ 11월 18일 집들이
◉ 12월 31일 (호연/예준) 각자 본가
◉ 1월 9일~1월 19일 (호연/예준) 싱가포르&몰디브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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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연은 귀찮았겠지만 집들이 준비 과정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환기 요소가 되었달까? 만사 닥치면 생각하는 나와 달리 준비에 철저한 성격인 이호연이 메뉴를 고민하는 모습을 옆에서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고, 태어나 지금까지 집들이라는 걸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서인지 흥미가 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두 번, 세 번 하고 싶진 않지만).
목요일 저녁, 이호연이 최종으로 정한 메뉴를 내게 알려 주었다. 나는 저세상 집들이 스펙에 멍한 눈을 깜박이며 태블릿 화면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이렇게…, 많이 해요?”
손님은 한 명인데 메뉴는 뷔페 저리 가라였다.
데자뷔인가. 순간 삼시 세끼와 하와이 여행에 대한 기억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이호연이 나에 대한 호감을 떠나 대접을 세끼나 하고, 매사 계획에 진심인 사람이라는 사실을.
집들이 스케일이 원래 이런가. 파스타에 샐러드, 가리비찜과 가지 라자냐까지만 내놓아도 성인 남성 한 사람이 먹기에 많아 보이는데, 2차로 구성된 수육과 어묵탕, 후식에 배치된 감바스를 보고 말문이 절로 막혔다.
집에 있는 재료와 새로 사야 할 재료를 꼼꼼하게 기재해 둔 이호연을 흘겨보았다. 말로는 싫다, 귀찮다더니 막상 온다니까 좋은 거 아냐? 아니면 새로운 전략, 뭐 그런 건가? 양식과 한식의 콜라보로 김사훈 대표 배를 터지게 할 생각인 게 아니고서야.
“…잘 먹는 놈이라, 다 먹을 수 있을 거야.”
내 표정을 읽어 낸 이호연이 덧붙여 말했다. 미국에서의 오랜 생활로 식사량이 어마무시하다는 설명에 애써 수긍하며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하기야, 이호연도 꽤 많이 먹는 편이긴 하지.
“그래도 좀 걸러 내요. 형도 준비하는 데 오래 걸리고, 여차하면 배달도 있고요.”
이호연의 동의를 구하고 가지 라자냐와 감바스를 리스트에서 지워 버렸다. 집들이 한 번 하는데 이렇게 손이 많이 가서야 쓰겠어? 회사 동료 몇몇에게 물으니 요즘엔 밀키트도 잘 나와서 그걸로 조리하고 배달도 시킨다는데, 아무리 요리를 잘해도 이건 아니지 싶었다.
“내일 퇴근하고 장 보러 갈까?”
태블릿을 건네받은 이호연이 내 의사를 물어 왔다.
“그럴까요?”
가리비나 수육용 고기만 사면 될 것 같은데, 간 김에 푸드 코트에서 저녁을 먹고 와도 좋을 것 같았다.
“시간 되면 장 다 보고서 심야 영화나 볼까?”
이호연의 제안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금요일 밤 심야 영화 데이트 좋지.
가만, 나 반반차 또 쓸 수 있던가? 쓸 수 있으면 5시에 퇴근하고 장 보고 저녁 먹고 영화 보면 딱인데. 여행 일정에 맞춰 쓰고 남은 휴가 개수를 머릿속으로 헤아리며 두 눈을 데굴 굴렸다.
휴, 또 휴가 마이너스 통장 되는 건가. 분명 장기근속으로 연초에 연차 3개가 추가로 생겼는데 왜 체감이 안 되는 것 같지?
모르겠다, 내일 출근해서 되면 반반차나 올려야지.
김사훈 대표는 분양 전 집을 보러 온 사람처럼 들뜬 얼굴이었다. 얼마나 와 보고 싶었으면. 호선을 그리는 눈매를 보니 나까지 기분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이야, 사람 사는 냄새가 나.”
정확히는 맛있는 냄새가. 킁킁, 콧김을 내쉰 김사훈은 현관을 열 때부터 느껴진 훈기와 음식 냄새에 허기가 진다며 배를 슥슥 문질렀다.
“뭐래.”
이호연이 피식 웃으며 김사훈이 건넨 선물을 받아 들었다.
나는 이호연이 음식을 마저 준비하는 동안 김사훈에게 침실을 제하고 서재와 옷 방, 손님방, 주방과 이어진 펜트리를 보여 주었다. 유독 김사훈이 관심을 가진 건 주류 장식장이었는데, 누가 친구 아니랄까 봐 그 앞에 한참 동안이나 서 있었다.
식탁에서 먹은 1차를 정리하고 거실 테이블로 자리를 옮기며 김사훈이 한 번 더 주변을 둘러보았다.
“진짜 잘 해 놓고 사네.”
김사훈이 반복해 중얼거렸다. 그는 얼마 전 갔던 신혼집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감상은 어찌 보면 당연한 거였다. 같이 산 지 제법 되었는데 내부는 둘이 살림을 합칠 때와 달라진 게 거의 없었다. 벌레를 싫어하고 결벽에 가까운 이호연이 더러워지는 걸 가만히 두고 볼 리 없고, 나 역시 오랜 자취 경험으로 물건을 늘어놓는 성격은 아니었다.
수시로 쓸고 닦다 보니 깨끗할 수밖에. 게다가 집이 넓어서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으면 하루 안에 청소가 안 끝난단 말이다. 이삼일만 지나도 먼지가 쌓여서 얼마나 힘든데.
이제는 벌레보다 청소와의 전쟁이라는 말이 더 맞지 않나 싶다. 넓은 집에 대한 로망이 있었는데, 살다 보니 감흥조차 없어졌다. 무엇이든 과유불급이라고, 남자 둘이 살기엔 삼십 평대만 되었어도 쾌적하지 않았을까?
“펜트리랑 서재는 너희 집이 짱인 듯.”
공들인 공간은 다른 사람 눈에도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다. 집 안 곳곳에 이호연의 손길이 닿아 있지만, 펜트리는 요리가 취미인 이호연이 자주 찾는 곳이기도 하니까. 서재도 마찬가지고.
“생각해 보니까, 두 사람은 나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냐?”
“뭘.”
“네?”
김사훈이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며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미국에서 얘 안 데리고 왔으면 둘이 만날 수도 없었을 거 아냐.”
김사훈의 주장은 이러했다. 주선 후 성사되면 사례를 하는 게 보통인데, 배은망덕하기 짝이 없는 이호연, 정예준은 사례는커녕 밥 한번 먹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고.
틀린 말은 아니지. 인연이라면 어떤 형태로든 만났겠지만, 결과적으로 이호연과 만날 시기를 당긴 건 모아 앱이 맞고, 김사훈이 앱의 대표자나 다름없으니 사례를 한다면 그에게 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렇게 먹어 주잖아.”
이호연이 들을 가치조차 없다며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안달복달한 거잖아!”
“됐고, 더 먹을 거지?”
억울해하는 김사훈의 말을 끊고 이호연이 몸을 일으키려 했다. 나는 이호연의 어깨를 가볍게 눌러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가져올게요, 형.”
오전부터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김사훈과 대화도 하고 쉬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물론 이호연이 전부 다 해 놓았기 때문에 내가 한 일은 삶아진 고기를 적당한 크기로 썰어 접시에 옮기고, 탕과 찬거리를 나르는 것뿐이지만.
김치냉장고에서 김치 통을 꺼내다 손이 멈칫했다.
“그래, 이게 있었지.”
본가에서 가져온 아빠표 깻잎장아찌가 보였기 때문이다.
2주 전, 이호연이 본가에 갔던 날 나도 화곡동에 가서 부모님을 보고 왔다. 아빠는 요즘 젊은 사람들이 어련히 챙겨 먹는 건 알지만, 가끔 집 반찬이 생각날 때가 있는 법이라며 장아찌 통을 봉투에 담아 주셨다.
깻잎에 수육을 같이 싸 먹어도 되는 거 아닌가? 나는 잠시 고민하다 깻잎까지 소분해 거실로 가져갔다.
“수육? 완전 좋다.”
김사훈이 등받이에 기댔던 허리를 바로 세워 앉으며 두 눈을 빛냈다.
“좋겠다, 예준이는. 얘가 성격은 더러워도 손맛은 좋거든.”
김치에 싼 고기를 한 입 크게 삼킨 그가 행복한 표정으로 우물거렸다. 청하 한 잔, 수육 한 입, 번갈아 먹던 김사훈의 손이 깻잎으로 향했다.
“나 이것 좀.”
두 장이 겹친 깻잎을 들어 올리며 김사훈이 이호연을 보았다.
“제가 잡아 드릴게요.”
옆에서 움찔한 이호연보다 먼저 내 젓가락이 깻잎지에 닿았다.
“이 조합도 괜찮은데? 깻잎 맛있다. 나 조금만 싸 주면 안 되나?”
“아, 이거 저희 아버지가 담근 거예요. 조금 싸 드릴…,”
“현백에서 사 먹어.”
싹둑, 잘라 내듯 냉랭하게 대꾸한 이호연의 미간에 선명한 빗금이 그어져 있었다.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하게 식은 분위기에 눈을 깜빡이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무안할 법도 한데 술이 오른 김사훈은 불콰해진 낯으로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계속했다.
“부모님 반찬도 둬? 진짜 부부네. 같이 사는 거 아셔?”
김사훈의 물음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껜 사회생활 하며 알게 된 형과 같이 살게 되었다고 얼버무려 두긴 했다.
오피스텔 계약이 만료됐음을 알리자 차라리 본가로 돌아와 출퇴근하는 건 어떻겠냐고 물었는데, 이미 짐을 옮겼다는 이야기에 아쉬움과 함께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셨다. 아무래도 회사가 판교다 보니, 화곡동에서 출퇴근하기보다 지척인 판교가 나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둘이 연초에 싱가포르 간다며? 나도 따라가면 안 되나? 아니, 방해하겠다는 건 아니고….”
대화가 느닷없이 뱃머리를 틀었다. 김사훈은 입출국과, 패키지나 액티비티만 같이 하면 안 되겠느냐며 말끝을 흐렸다.
“그건…….”
김사훈의 시선을 피한 내 입매가 파르르 떨렸다. 이호연이 일개 직원도 아니고, 리더 급이라 당연히 대표자가 휴가를 결재한다지만, 그렇다 해도 직원 개개인의 휴가에 너무 관심이 많은 거 아냐?
“이것 좀.”
김사훈이 눈짓으로 깻잎 접시를 가리켰다. 젓가락을 들어 두 장이 겹쳐진 깻잎지를 떼어 주자 옆에서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이거 진짜 별미네.”
김치나 쌈무에는 자주 싸 먹어 봤어도 깻잎은 처음이라며 김사훈은 연신 신기해했다. 미국에서의 오랜 생활로 이것저것 신기한 게 많은 모양이었다. 내가 전부 준비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잘 먹는 모습을 보니 좋네. 나는 김사훈이 깻잎 접시로 손을 뻗는 걸 보며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가 이번엔 한 장이 떼어져 다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야.”
어쩐지 조금 전부터 심기가 불편해 보이던 이호연이 김사훈을 불렀다.
“응?”
“깻잎 일일 권장량이,”
“응? 권장량?”
“백팔십 장이라더라. 두 장이든 세 장이든 처먹어, 그냥.”
자신을 향한 일갈에 갸웃대던 김사훈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한참 웃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예능에 나왔던 그 논란을 지금 말하는 거냐고 물었다.
나 또한 뒤늦게 이호연의 빈정이 상한 부분을 알아차리곤 테이블 밑에서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잠시도 쉬지 않고 떠들던 김사훈이 돌아간 뒤, 조용해진 집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대접을 1차와 2차로 나눈 데다 술도 곁들인 만큼 밤늦게 끝날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이르게 정리가 되었다.
주방과 거실을 부지런히 치우고 따뜻한 물로 샤워까지 마치고서야 먼저 씻고 누운 이호연 옆에 꼬물꼬물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지난주 부산 좋았죠.”
이호연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가슴팍에 이마를 비볐다. 식사 중 김사훈 깻잎을 잡아 준 걸로 삐친 모양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귀여워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규칙이 있었으면 내가 잡았을 텐데.”
“응?”
프로그래밍 코드처럼 규칙이 있었다면, 한 장이 떨어진 뒤 두 장이 떨어질 때에 저가 김사훈 깻잎을 잡아 주었을 것이라고 입술을 비죽거렸다.
“형.”
“…….”
“가끔 형 보면, 진짜 귀여운 거 알아요?”
느닷없이 불쑥, 모서리처럼 툭 튀어나와 나를 당황하게 할 때도 많지만, 모든 행동이 전부 나로 기인한다는 사실이 마음 한구석을 간질간질하게 한다.
“앞으로 깻잎은 형만 떼어 줄게요.”
“부모님 반찬도 우리만 먹는 걸로.”
“약속.”
손을 뻗어 이호연의 새끼손가락에 내 새끼손가락을 얽었다.
Import pandas as pd d = {“집들이메뉴”:[‘채끝살명란크림파스타’, ‘리코타치즈샐러드’, ‘가리비찜’, ‘수육’, ‘어묵탕’, ‘겉절이김치’, ‘깻잎장아찌’, ‘술’]}
df = pd.DataFrame(data=d)
df = loc[df.집들이메뉴 !=‘깻잎장아찌’]
print(df)
*시기는 ‘VENUS’와 ‘새해에는’ 사이입니다.
이직 절차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인트라넷에서 사직서 양식을 받아 작성하고 전자 서명을 하면 팀장에게 이관되었고, 이후는 면담과 면담의 연속이었다. 나 하나 빠진다고 조직이 굴러가지 않는 것도 아니기에 퇴사 자체에 두려움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아쉽네요. 예준 님 잘해 줘서 나중에 어디든 데리고 가려고 했는데.”
여행을 다녀와 퇴사 의사를 구두로 밝히고 결재 문서가 올라가자마자, 이채선은 내게 면담을 요청해 왔다. 그녀는 퍽 씁쓸한 표정이었다. 그러게, 나도 채선 님 같은 팀장을 어디에서 또 만나겠어요.
“어디로 가요, 서울 쪽? 아니면 계속 판교? 직무는 GUI로?”
“게임 UI고 판교예요. 제가 어딜 가겠어요. 이 바닥에서 더 벌어야죠.”
“도르마무 판교, 좋다.”
모 액션 영화에서 나온 대사를 따라 한 그녀가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어쨌든 면담이긴 하니까,”
이채선이 회의실 맞은편 본부장실을 향해 시선을 들어 올리며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시간이나 좀 죽이고 나가죠. 직군이 달라서 레퍼 체크 들어올지는 모르겠는데, 들어오면 잘 말해 줄게요. 예준 님 실력 아니까.”
프로 이직러로 살다 보니 별별 사람 다 만나 봤지만, 이채선 같은 리더를 만난 건 운이 좋았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업계가 좁다 보니 결국 몇 년 지나고 보면 지인의 지인과 일하는 경우가 많은데, 만약 서비스 직군으로 돌아온다면 이채선과 다시 일하고 싶을 정도로 그녀는 좋은 사람이었다.
주변에 디자이너를 구인, 구직하는 지인이 있다면 그녀에게 소개해 주고 싶을 정도로.
화답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의미에서 한 달 동안 점심은 법카 탕진으로 갈까요?”
“팀장님 사랑해요.”
“법카도 예준 님 사랑한대요.”
이채선과 회의실을 나와 팀원들을 바라봤다. 시원섭섭한 면면들을 보며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송기현에게 장난을 걸었다.
**
출근 마지막 날, 사용하던 장비와 사원증을 인사팀에 반납하고 본부에 인사를 전하는 것으로 일과가 끝났다. 2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사옥 단지를 벗어난 나는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내 퇴사일에 맞춰 이호연도 오후 반차를 사용했는데, 그는 이미 퇴근하고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파트 단지에 들어설 때쯤,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어디쯤? -이호랭이♥]
-단지 통과했어요. 5분 내 도착!
답장을 보내고 걸음을 재촉했다. 저녁은 뭐 해 먹지. 평소에 이호연이 많이 해 줬으니 퇴사 기념 정예준표 저녁 식사도 괜찮고. 아니면 차려 먹기 귀찮기도 하니까 그냥 외식 나가자고 할까? 평일이니 4시쯤 한가롭게 교외로 빠져도 좋을 것 같은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관성적으로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형, 저 왔어요.”
실내화로 갈아 신고 복도를 가로질렀다.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소파에 내려 두며 두리번거렸다.
“형?”
분명 조금 전까지 메시지를 주고받았는데 어딜 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밖으로 나갔다면 입구에서 마주쳤을 텐데. 옷 방과 거실을 동선대로 살펴보며 주방, 펜트리, 내 방, 서재를 순서대로 훑었다. 침실에 있나 싶어 닫힌 문 앞에 서자 안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형?”
문고리를 아래로 내려 보았지만 잠긴 모양인지 덜컥대기만 할 뿐이었다.
“왔어? 잠시만.”
안에서 들려온 이호연의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 잠그고 뭘 하는 거지.
“형, 오랜만에 외식할까요?”
“아, 아니, 준비만 하면 돼. 씻고 와.”
질문에 대답은 곧잘 하는데, 왜 안 나오는 거야. 나는 잠깐 문 앞에 서 있다 뒤로 물러났다. 어차피 이따 나올 테니, 그때 물어봐도 되겠지.
따뜻한 물로 꼼꼼하게 씻고 목에 수건을 두른 채 욕실 문을 안으로 당겨 열었다. 씻는 동안 나와 있을 줄 알았는데, 아직도 침실 문은 닫혀 있었다.
나는 냉장고에서 딸기를 꺼내 와 소파에 두 발을 올리고 웅크려 앉았다. 한 손으로는 부지런히 딸기를 입으로 가져가고, 반대편 손으로 채널을 돌리는 와중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TV에 고정된 시선을 미끄러뜨린 나는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딸기가 담긴 소쿠리로 향하던 손도 같이 멎었다.
그도 그럴 게, 이호연이 수건으로 중요 부위만을 겨우 가린 채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혀, 형?”
당황한 내가 그를 불렀지만, 이호연은 결연한 표정으로 내 앞에 서서 가만히 날 내려다볼 뿐이었다. 서로 시선을 주고받다 이호연이 허리춤에 고정한 수건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멍한 눈을 깜빡이며 이호연의 나신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변함없이 탄탄한 몸에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왔다.
“좀 지난 거긴 한데, 유행했다고 해서.”
오래전 SNS에서 유행했던 챌린지인데, 애인 앞에 알몸으로 나타나는 거란다. 나도 웹 서핑하다 본 것 같은데, 이걸 이렇게 활용하는 거구나. 이호연은 내 퇴사 기념으로 준비했다며 우물쭈물 덧붙였다. 실없는 웃음이 입가에 번졌다. 능글맞을 때가 많지만 뻣뻣한 면도, 엉뚱한 면도 많은 이 사람이 몸으로 유혹하는 이벤트를 하는 날도 오는구나.
윤아영이나 정소랑은 개발자 연인은 절대 싫다 말했지만, 내 입장에선 복잡한 것 없이 딱 인풋에 맞춰 아웃풋이 바로 나와 주니 솔직하고 귀엽게 느껴져 좋았다. 내 퇴사에 맞춰 반차를 쓰고, 연인 사이에 유행한다는 이벤트를 찾아봤을 걸 상상하니 저 큰 덩치가 새삼 귀엽게 느껴졌다.
연락처 이름을 또 바꿔야 하나? 이호랭이 말고 댕댕이호연으로.
“싫어…?”
답지 않게 애교를 부리는 이호연을 올려다보았다. 정확히는 점점 발기하기 시작한 그곳에 시선이 머물렀다. 느리게 배회하는 내 눈길을 알아차린 그의 눈가가 미미하게 떨리고, 닿는 호흡도 뜨겁게 느껴졌다.
곧장 손을 뻗었다. 밥이고 뭐고, 일단 이 불기둥부터 가라앉히고 뭔 말을 하든 해야지, 원. 위아래로 쓸어 주자 허리가 움찔 떨리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즉각적인 반응에 마른침이 꿀꺽 삼켜졌다. 괜스레 다리가 움칠거린다. 지금까지 여러 체위와 각종 도구들을 즐기고 있는데도 내 손길에 처음처럼 흥분하는 이호연을 보면 나 또한 몸이 뜨끈하게 달구어지는 기분이다. 손으로 훑다 선액이 맺힌 자지 위에 입술을 가져갔다. 귀두를 한입에 머금어 삼키며 소리 내어 쭉쭉 빨아들였다.
“하아, 하….”
헐떡이는 이호연의 숨소리를 들으니 내 중심부에서도 뜨거운 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호연이 나를 원하는 이런 것 때문 아닐까. 호흡과 반응에서 오는 애정이 너무 선명해서.
목구멍을 깊게 찔렀다 빠져나가는 살덩이로 벌어진 입가에 체액이 엉망으로 흘러내렸다. 살끼리 맞부딪치는 소리가 탁탁 울리다 이호연이 허리를 뒤로 쭉 빼냈다. 아직 사정할 때가 아닌데 물러난 이호연을 얼떨떨하게 쳐다봤다.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있는 내 허리에 이호연의 팔이 감겨 왔다. 나를 번쩍 들어 어깨에 올린 그가 침실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침대 위에 날 내려놓은 이호연이 입매를 말아 올려 다정히 웃었다.
“예준이 그간 고생 많았으니까, 형이 오늘은 해 달라는 거 다 해 줄게.”
낮은 목소리가 지나치게 달았다. 이마와 콧잔등, 눈가와 뺨에 고루 입을 맞춰 준 그가 내 가슴팍을 지분대며 흥분을 유도했다. 꼬집고 비튼 젖꼭지가 금세 발갛게 부풀었다. 앓는 탄성이 절로 터졌다. 입술을 깨물며 허리를 움찔움찔 떨자 내 목덜미를 잘근잘근 씹던 이호연이 아래로 내려가 자리를 잡았다.
뜨겁고 축축한 혀가 한입에 내 좆을 물어 삼켰다. 등과 허리를 파드득 떨며 그가 주는 자극에 몸서리쳤다. 깊게 빨아들인 그가 입 안에서 혀를 세워 귀두 끝을 쿡쿡 찔러 왔다.
금방이라도 사출할 것처럼 사정감이 켜켜이 차올랐다. 갈 것 같은데…, 빼 줬으면 하는 마음에 이호연의 머리칼을 휘감아 가볍게 쥐었다.
“으응, 흐, 빼, 빼요. 나와, 나와요.”
바들바들 떨며 도리질 쳐 봐도 이호연은 꿈쩍을 않았다. 오히려 고환을 주무르고 물고 있는 입에 힘을 주며 내 사정을 부추겼다. 쾌감 때문에 고개가 절로 젖혀졌다. 결국 이호연의 입에 그대로 정액을 내보냈다.
꿀꺽, 달콤한 과즙이라도 마신 사람처럼 입에 있던 정액을 삼킨 이호연의 얼굴에 특유의 웃음이 번져 있었다. 왜 먹었느냐고 잔소리할 기운도 없다. 한 발 뺐을 뿐인데 왜 이렇게 힘들지. 나른하게 퍼진 내 위로 이호연의 무게가 더해졌다.
“적실 걸 내가 먹어 버렸네.”
베개 밑에서 젤을 꺼낸 이호연의 눈매가 호선을 그렸다. 한 손으로 뚜껑을 딴 그가 튜브를 쭉 짜내며 내 중심부에 고루 펴 발랐다.
“읏, 자꾸.”
잠자리에서 툭툭 건네 오는 이호연의 장난들을 몇 년째 듣고 있지만 매번 적응이 되지 않았다. 눈가를 찡그리며 이호연의 팔뚝을 움켜잡았다.
“이거 해외 직구 한 겁니다.”
콘돔 포장을 뜯은 그의 목소리에 어떠한 기대감이 느껴졌다. 나는 곧, 그가 왜 굳이 콘돔에 대한 설명을 더했는지 알 수 있었다. 평소 접하던 콘돔이 아니었다. 울퉁불퉁한 돌기가 박혀 있는 콘돔을 씌운 이호연의 자지는 평소보다 훨씬 커 보였다.
“미, 미쳤,”
“쉬.”
나를 달래는 이호연을 보며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게 누굴 위한 이벤트야? 날 위한 이벤트 아니었냐고! 저게 어떻게 들어가요?!
충격을 받아 아무 말도 못 하는 나와 달리 이호연은 제 것에도 젤을 바르며 자리를 잡았다.
“예준 씨, 이번에도 좋을 거예요.”
미, 미친놈아, 누굴 죽이려고 저런. 아, 안 돼, 아직 넣으면…!
이호연이 입술을 겹쳐 오며 내 엉덩이를 힘주어 벌렸다. 천천히 삽입이 이어졌다. 이호연의 좆이 생각보다 수월하게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벅찬 압력에 허우적거리며 이호연 목이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힘껏 매달렸다.
“아아, 으읏…!”
울퉁불퉁한 돌기가 내벽을 강하게 할퀴는 감각에 다리가 절로 덜덜 떨렸다. 진퇴를 반복하던 이호연이 뭉근하게 짓누르며 양옆으로 벌어진 내 허벅지를 그러모아 발목을 제 어깨에 걸쳤다. 골반 아래가 들리며 좆이 조금 전보다 더 깊게 들어왔다.
“허윽.”
순간 시야가 암전됐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새된 신음성을 내는 내 위로 이호연이 가차 없이 허리를 쿵쿵 내리찍었다. 젤을 발라서인지 살 몽둥이가 치고 빠질 때마다 쿨쩍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몸 곳곳에서 나는 소음들로 정신이 혼미해졌다.
퍽-!
이호연이 허리를 추어올리며 내 아랫배를 힘주어 눌렀다. 해일처럼 밀려들던 쾌감이 파고의 정점을 찍은 것만 같았다. 압박이 느껴지는 아랫배 탓에 또다시 사정을 해 버렸다. 축 늘어진 나는 가쁘게 오르내리는 숨을 간헐적으로 내쉬며 이호연을 노려보았다.
“…그거, 빼고 해요.”
자극이 너무 세서 박아 넣는 족족 사정하는 것 같았다. 원래도 이호연과 섹스할 때면 금방 가곤 했지만, 이래서는 더 나올 것도 없겠다. 배 위에 말랑하게 늘어진 성기를 조물대던 이호연이 제 몸을 물리며 콘돔을 벗겨 냈다.
“예준 씨가 너무 금방 가긴 해서.”
“…닥치고, 빨리.”
짓궂은 음성에 발꿈치로 이호연의 엉덩이를 가볍게 후려쳤다. 내가 금방 가는 게 아니라 저것까지 하면 말이 안 되는 사이즈라 그렇지!
다시 아래에서 느껴지는 이물감에 두 눈을 천천히 감고 이호연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침대에 나란히 누워 손장난을 쳤다. 큰 손바닥을 긁어 내고, 길쭉한 손가락에 내 손을 얽었다.
“이직하고 예준이 안 바빴으면 좋겠다.”
이호연이 장난치던 손을 깍지 껴 잡으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플레이짐 앱 출시를 앞두고 야근에 시달리던 때에 비하면 지금은 일하는 법을 잊어버린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워라밸을 잘 챙기고 있으니까. 다락방 합류 후 얼마나 바빠질지 전혀 가늠이 되지 않긴 했다. 같은 디자인이더라도 직군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세부 업무의 결도 다를 것이다.
SG플레이에 계속 다니며 안정적인 일상을 누려도 되겠지만, 이미 결정을 내린 이상 뒤를 돌아보고 싶진 않았다. 혼자였다면 막막했을 테지만, 옆에 이호연이 있어 두려움은 없었다. 더구나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니 분명 괜찮을 것이라는 긍정이 내 안에 가득 차 있었다.
무어라 답하려던 나를 그가 당겨 안았다. 함께한 시간이 있기에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나는 너른 가슴에 이마를 부비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다음엔 에이프런 같은 거 입고 있어 봐요.”
자주 방문하는 성인 용품 사이트에서도 에이프런 코스튬을 파는 걸 본 기억이 났다. 이벤트를 만족스럽게 마무리한 이호연이 다음엔 전라에 앞치마만 메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럴까?”
“요섹남인 거지. 요리하는 섹시한 남자 아니고 요리하다 섹스하는 남, 으음!”
내 입술을 막은 이호연의 입술에 뒷말을 더 하진 못했지만, 어쩐지 이호연의 어떠한 알고리즘에 에이프런이 추가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이겠지?
[RTF VR: 1주년 대규모 업데이트 미리 보기]
안녕하세요, RTF VR의 CM 복자입니다.
12월 찾아올 대규모 업데이트를 앞두고, 기쁜 소식을 모험가님들께 전합니다.
UPDATE 01 농민 봉기
시골의 정취가 묻어난 아름다운 RTF의 풍광. 귀농을 결심한 모험가님에게 전투의 재미를 드리기 위해 PVP 콘텐츠를 제공합니다. 봉기를 일으키고 진압하며 길드원들 간의 끈끈한 정을 느껴 보세요!
UPDATE 02 여왕벌의 성
서버 내 유일한 여왕벌의 성. 성을 차지한 길드에게 주어지는 ‘여왕벌의 축복’을 쟁취하세요.
성을 차지하기 위한 길드 간 적대와 연합! PVP 콘텐츠를 즐길 모험가님이라면 언제든 전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UPDATE 03 Re-wind
당신이 가장 행복했던, 가장 그리워하는.
RTF VR을 선택해 주신 모험가님, 인생의 어느 지점에 핀을 꽂고 싶으신가요.
RTF VR에서는 현실감 있는 플레이를 제공하고, 현실에 지친 모험가님을 위로하기 위해 부단히 애써 왔습니다.
꿈을 VR로, VR을 다시 현실로.
인생에 리와인더가 될 RTF VR을 기대해 주세요.
슬라이드를 끝까지 넘긴 전송이가 리모컨을 조작해 프로젝터 전원을 껐다. 스크린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은 그녀가 박수를 짝, 하고 치며 내부를 환기했다.
“업데이트 두 가지는 RPG 요소라 넘기고, 리와인드 대상자는 딱 쉰네 명이더라고요.”
지스타에 부스를 냈던 다락방스튜디오, 그곳에서 배부된 브로슈어 QR 코드로 게임과 설문에 참여한 유저의 수였다. 지금의 모아게임즈를 있게 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전송이는 회의 참석자들의 질의를 받으며 남은 회의를 진행해 나갔다.
3번 업데이트 사항은 VR 기술로 과거의 그 어느 때든 54명이 기억하고자 하는 콘텐츠를 가상 현실로 구현해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제작 동의 절차를 밟을 예정이고, 제작된 콘텐츠의 소유는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된다. 개발을 지원한 모아게임즈에 게임 콘텐츠로 제공해도 되고, 꼭 제공하지 않아도 오로지 자신만의 메모리로 프라이빗 서버에 저장되는 것이다. 때문에 언젠가 모아게임즈라는 회사가 세상에서 사라진다 하더라도 원할 때마다 기록물을 꺼내어 볼 수 있다.
“이 자리에도 한 분 계신데, 새삼 느끼지만 세상이 참 좁아요. 그렇죠?”
전송이가 예준을 보며 눈가를 찡긋했다.
회의를 마치고 뿔뿔이 흩어지는 사람들 사이에서 예준의 휴대폰이 징, 하고 울렸다.
[제이, 대표실로. - 내 대표님♥]
예준은 호연의 문자에 주변 눈치를 살피다 대표실로 걸음을 옮겼다. 대표실 문을 열고 들어간 예준이 호연 앞에 섰다.
“언제로 돌아가고 싶어요.”
“답정너 질문인데.”
입매를 말아 올린 예준이 호연의 품에 기댔다.
“답정너니까 빨리.”
“대표님이랑 처음 만났을 때로요.”
싱그레 웃은 예준은 주저함이 없었다.
지스타였을까, 아니면 어느 날의 하나였을까.
호연이 예준의 허리를 단단히 옥죄어 안았다.
**
[오늘의 앱 – 모아]
‘모아?’
화면을 바라보다 입속말을 중얼거렸다. 앱 스토어 투데이 탭에서 관성적으로 스크롤을 내리다 시선이 툭, 한 구간에 걸렸다. 이용자가 쉽고 편리하게 기능을 사용할 수 있도록 적절한 색과 폰트, 아이콘 등을 배치해 시스템 가이드로 만드는 GUI디자인팀 직무 특성상 몸에 밴 탐색을 하던 중이었다. 새로 출시된 게임인가 싶어 홀린 듯 배너를 눌러 상세 페이지로 진입했다.
<이웃과 즐겁게, 모아!>
다음 중 하나라도 해당한다면 <모아>를 시작해 보세요.
1.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고 싶은 사람.
2. 지역 기반의 동호회로 동네 지인도 사귀고 취미도 즐길 이 구역 엔터테이너.
3. 아파트, 오피스텔 공과금과 각종 관리비를 하나로 끝낼 스마트한 알뜰 살림꾼.
[위치를 등록하면 내 주변의 많은 이웃과 만날 수 있어요! 위치 설정에 동의하시겠어요?]
동의 버튼을 눌렀다. GPS가 앱과 자동으로 연동되며 인디게이터가 돌았다. 내가 서 있는 위치를 기반으로 백현동과 판교동의 거래 리스트가 출력되기 시작했다. 작게는 옷이며 생필품 따위가 올라와 있고, 크게는 냉장고며 세탁기 등의 생활 가전도 게시되어 있었다. 구조 자체는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며 스크롤을 아래로, 아래로 계속해서 내렸다.
그렇게 한참을 내리다가, 나는 여타의 글들과는 다른 특이한 제목을 보고 찬물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우뚝 멈추어 섰다.
벌레 잡아 주실 분
낙생원마을 근처 거주. 채팅에서 거주지 공개. 사기 치면 고소.
조건
-새끼손톱 반만 한 크기 1만 원
-검지 크기 3만 원
-그 이상의 크기 5만 원
-비행 능력이나 아이 컨택, 위협 등등 포획 레벨에 따라 [email protected] 추가 지급
*현금 즉시 지급 가능
뭐지. 이 구체적이고도 이상한 구매 글은.
땅 파서 10원 한 장 안 나오는 세상 아닌가. 지독하게 피곤했지만 누군가 선점할까 싶어 얼른 작성자에게 채팅 요청을 보냈다.
-지원 가능한가요? 잡아 드릴게요.
멈췄던 걸음에 속도를 더하며 다시 회사 사옥이 있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잡아주세요: 운동
스포츠 센터에 등록을 마친 예준은 회원 카드를 보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센터는 모아 사옥과 다락방스튜디오 근처로, 화랑 공원 근처에 있어 멀지 않은 거리였다. SG플레이 재직 때부터 해야지, 해야지 마음만 먹고 실행하지 못했던 운동 결심을 행동으로 옮길 때가 된 것이다. 갈수록 체력이 떨어져 지금이라도 다져 두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예준은 해가 바뀌고, 이직도 했으니 올해야말로 운동을 꼭 하고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전신 운동은 매주 시켜주는데.”
“응?”
나지막이 말한 탓에 잘 듣지 못한 예준이 고개를 돌려 호연을 쳐다봤다.
“아니, 아무것도. 그럼 퇴근하고 바로 가겠네?”
“그래야겠죠? 야근하는 날은 빼고.”
초과 근무하게 되더라도 운동을 하고 복귀하거나 집에서 잔업을 해도 될 거리였다.
“그럼 퇴근 때 연락해. 같이 가게.”
호연은 기존에 운동하던 PT 샵을 이달까지만 다니기로 하고 센터를 따라 옮기겠다고 했다. 그는 헬스 초보인 예준의 자세를 옆에서 봐 주고, 웨이트도 알려 줄 생각이었다.
“같이 해서 좋은 것 같아요.”
매 순간 함께해 주는 호연이 너무나 좋았다. 건강하게 연애하는 기분이 이런 걸까. 입속말을 중얼거린 예준의 눈매가 살긋 휘었다.
잡아주세요: 시시콜콜한 1
아침부터 표정이 어두운 이호연은 고민이 많아 보였다. 씻고 나온 예준을 뒤에서 끌어안으며 목덜미에 코를 문질렀다.
“무슨 일 있어요?”
“응, 아버지가 산 땅에 고구마 심었는데, 그거 곧 캐야 한대.”
호연의 누나인 이호수와 매형 박민재도 일손을 거들러 간다고 했다. 일손이 부족하면 당연히 가야 하는 게 맞는데, 주저하는 모습을 보고 예준이 웃음을 눌러 참았다.
“거기 지렁이도 나오고 벌레도 많을 텐데, 할 수 있겠어요?”
“안 가. 못 간다고 할 거야.”
“불효자네. 손 부족해서 누구든 가도 상관없으면 저 가서 도울래요.”
예준이 포슬포슬 웃으며 호연을 달랬다.
잡아주세요: 시시콜콜한 2
“김사훈 대표님한테 제대로 사례를 해야……,”
앞서 집들이를 하긴 했지만 어쩐지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았다.
“걔한테 사례할 거면, 나한테 해.”
정색하며 표정을 굳힌 호연이 눈짓으로 침실을 가리켰다.
하여간, 이호연 질투는 못 말린다니까. 질투쟁이라 생각한 예준이 소파에서 일어나 거실을 가로질렀다. 커다란 강아지가 주인을 쫓듯 호연이 그 뒤를 따라붙었다.
잡아주세요: 명절
“명절 잘 쇠고 와요.”
“응, 너도.”
예준은 본가 근처에서 내려 준 호연의 볼에 입술을 붙였다 떨어뜨렸다.
도로를 빠져나가는 이호연의 차 꽁무니를 바라보다 시선을 거뒀다. 길을 건너 빌라 계단을 오르는 예준의 보폭이 좁게 이어졌다. 공동 출입문을 지나 계단을 오른 예준의 앞에 큰 박스가 보였다.
[받는 분: 정예준]
뭔가 싶어 집에 발을 들이자마자 택배를 들이고 뜯어보았다. 마장동 한우와 굴비, 장뇌삼, 유과 세트였다. 주문한 상품을 받아 한 박스에 다시 포장한 모양이었다. 명절 전 택배 물량이 많아 일정을 맞추는 게 여간 쉽지 않았을 텐데, 섬세한 배려에 뜨거운 무언가가 뭉글뭉글 배 속을 채우는 기분이었다. 상품권이 담긴 봉투 두 매까지 확인한 예준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봤어?
“저는 형네 부모님께 아무것도 준비 못 했다고요.”
-내가 하면 되지.
“다음 설엔 제가 할 거예요.”
-응, 사랑해.
“저두 사랑해요. 조심히 가요.”
예준은 전화를 끊고 택배를 아일랜드 식탁에 옮겨 올렸다. 장을 보러 나간 부모님이 이걸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이 가 한숨 같은 웃음이 입가에 내걸렸다.
잡아주세요: 학습 능력
TV를 보던 이호연이 순간 흠칫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편한 자세로 그에게 반쯤 기대어 있던 예준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테이블에 놓인 물티슈 갑에서 뭉텅이로 뽑은 그가 마른침을 삼키며 거실 한편으로 주춤 다가섰다.
부들부들 떨던 그가 바닥을 쿵 하고 내리쳤다. 덮기만 하고 그대로 굳어 버린 이호연이 고개를 돌려 예준을 봤다.
뭔가 있는 줄도 몰랐는데, 벌레라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기민하게 반응한 그 가까이 예준이 느릿느릿 걸음을 뗐다. 이제는 콩알만 한 벌레는 곧잘 잡는 이호연이었다. 한 갑에 80장이 든 물티슈를 거의 반 이상 쓰긴 하지만, 트라우마가 있는 그에게는 장족의 발전이나 다름없었다.
“잡았어요?”
“……응.”
예준은 참았던 숨을 내쉬는 이호연을 내려다봤다. 송골송골 이마에 땀까지 맺혀 있었다. 널따란 어깨를 다독여 주며 잘했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지켜주세요: RTF VR - 모아게임즈 상장
우리사주 신청 조건을 본 예준이 아쉬움을 표했다. 간발의 차로 상반기 입사자들까지만 신청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제 막 취업해 모은 돈도 많지는 않았지만 기회조차 없다는 사실이 더 큰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이호연은 시무룩해하는 예준의 머리를 연신 쓸어 주며 위로해 주었다. 일순 그의 눈에 빛이 스몄다. 무언가 떠오른 그가 손을 아래로 내려 예준의 뺨을 엄지로 어루만졌다.
“고과 말인데.”
“고과요?”
“비밀 지켜 줬으니까.”
장수말벌을 퇴치하고 메인 5장을 같이 밀어 달라 부탁했던 때, 버그맨의 모습으로 고과에 반영될 수 있게 힘을 써 주겠다 말했었다.
“회사 차원에선 안 되겠지만.”
이호연이 휴대폰을 꺼내 들어 은행 앱을 실행했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입금 알림 메시지가 예준의 휴대폰 화면에 떠올랐다. 깜짝 놀란 예준이 두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제 휴대폰에 찍힌 숫자와 호연을 번갈아 보았다.
지켜주세요: 게임 세상에서는 게임만
[공지사항] 운영정책 위반 계정 제재 및 보호조치 안내
영구제재: 7,824명
보호조치: 17,439명
정신적 보상처리: 47,293명
*아래와 같은 사유로 영구제재 하오니 관련하여 문의가 있을 경우 고객센터를 통해 접수 부탁드립니다.
<사유>
1. 농촌 내 공연 음란죄
2. 게임사가 제공하지 않은 불법 프로그램 사용으로 접속한 이력 확인
엥? 공연 음란죄? 어떤 미친놈들이 신성한 게임에서 음란죄를?! VR 접속 후 초기 화면에서 뜬 공지 사항 팝업을 확인한 예준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게임에서는 게임만 해야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기에 공연 음란죄로 영구제재까지 당한단 말인가.
“왜?”
옆에 앉아 같은 화면을 본 호연이 예준을 돌아봤다.
“어이가 없어서요. 공연 음란죄라는 게…….”
말끝을 흐린 예준의 얼굴이 느닷없이 확 붉어졌다. 이전에 있었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테스트 환경에서였긴 하지만 공연 음란죄에 해당하는 건 저나 이호연이나 매한가지긴 했다. 갈대숲에서 벗고 좋다고 그런 짓을 했으니.
“야외에서 하고 싶으면 의례읍에서 다시 할까?”
이 양반이 지금 무슨 말을?! 예준은 능글맞게 웃는 호연을 밀어내며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때 그거, 지운 거 맞죠?!”
“테섭 로그는 당연히 날렸지. 꿀벌 연동하고 다 지웠는데.”
호연이 싱그레 웃었다. 갈대숲에서 했던 날, 예준이 무척이나 귀여웠던 건 사실이다. 그날 예준이 한 말들이나 행동을 전부 데이터화 하여 백업해두고 싶을 정도로.
그렇지만 이제는 현실에서, 이렇게 바로 옆에서 볼 수 있었다. 가상이든 현실이든 보고 싶을 때 보고, 만지고 싶을 때 손을 뻗으면 되니까.
<지켜주세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