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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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 앞에 서서 늘어지게 하품하며 눈가를 쓱쓱 비볐다. 간밤에 게임 세상에서 삽질 좀 했다고 이렇게 피곤할 수가. 가상 현실이어도 안 쓰던 몸을 움직여서 그런가? 연신 하품하며 기지개를 켜도 졸음이 가시지 않았다.

“왜 그래?”

강준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근처 게임 회사에서 인턴 중인 준성은 과제를 제출하고 보상으로 오후 휴가를 얻었다. 겸사 저녁이나 먹자며 내가 퇴근할 때까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카페에 놀러 온 참이었다.

“어제 게임하다가 잤는데, 너무 졸려서.”

“무슨 게임? RTF 말고?”

“아, 그게….”

누군가 들을까 싶어 작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총괄 디렉터님이 VR 테스트 서버 열어 주셨거든. 속닥이자 강준성이 눈을 빛냈다.

“존나 부럽다. 어떤데?”

“재밌어. 오픈하면 확 뜰 것 같아.”

첫 퀘스트부터 아주 강력하다는 걸 굳이 지금 알려 줄 필요는 없겠지. 입매를 말아 올리며 히죽 웃었다.

“나중에 쩔 좀.”

“비밀임.”

“말할 데도 없다.”

키득대며 웃는 내 손을 붙든 준성이 좌우로 흔들며 보채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모아게임즈는 확실히 아르바이트에게도 관대한 것 같다며 부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아, 너랑 같이 밥 먹는다고 윤재한테 말해 둬야지.”

휴대폰을 꺼낸 준성이 권윤재에게 문자를 보냈다.

강준성, 권윤재. 두 사람의 유대가 나보다 조금 더 깊었던 이유를 처음엔 알지 못했는데, 졸업 후 알고 보니 서로가 각인 상대였다. 감쪽같이 속았던 과거를 떠올리면 아직도 어처구니없지만, 성향이 무척 다른 둘이기에 주변에서 들볶지 않아도 어련히 마음고생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운명의 짝이라.

느리게 숨을 몰아쉬었다. 새겨진 이름의 주인을 도대체 언제 만날 수 있는 걸까. 동명이인이 주변에 있다면 그 사람 주변을 배회하며 떠보기라도 할 텐데, 스물일곱 해의 절반이 지나도록 그 이름과의 접점은 많지 않았다.

물론…… 하나 있기는 하지. 나랑 인연이 아닌 것 같으니 물어볼 생각을 일찌감치 접은 거지만.

문자를 주고받으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 강준성을 보다 고개를 설설 내저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언제 만날 수 있는 걸까.

문자로는 부족해 전화 통화를 위해 일어난 준성이 눈짓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그래, 가라, 가. 징글징글한 놈들.

혀를 쯧, 차는데 저 반대편에서 남자 셋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예준 씨, 안녕하세요.”

UI 개발팀의 이대현이 서글서글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저희 아메리카노 세 잔이요.”

“네, 바로 드릴게요.”

결제 처리 후 음료를 만드는데 세 사람의 수다가 귓가에 머물렀다.

“…그래서, 모아읍은 데이터 안 날려요?”

“그러기로 했대요.”

“아니, 왜? 버그 로그만 남기고 다 날려야 하는 거 아냐?”

이대현과 김주영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표정을 구겼다. 그 옆에 선 성현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대표님이 그러라는데 뭐. 살펴볼 게 있다고 하셨다네요.”

성현호는 자신이 들은 바를 전하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직접 볼 게 있다며 모니터링도 멈추라는 지시가 내려왔단다. 나란히 선 세 사람의 얼굴이 꼭 연탄처럼 새까매졌다.

“뭐 발견한 거 아닐까요?”

“윽, 소름. 설마요. 지금이 몇 번째 테스트인데.”

지레 끔찍하다는 표정을 한 이대현이 말이 씨가 된다며 성현호의 입을 단속했다.

“이래서 대표가 개발자면…….”

“라떼 하긴 싫지만, 옆 블록 형 재떨이 던지던 시절을 생각해 봐요. 그치도 개발 출신이잖아.”

가만 듣고 있던 성현호가 툴툴대는 김주영을 타박했다. 전사 직원이 다 모인 타운홀 미팅에서 서슬 퍼런 안광을 빛내며 개발 수준이 이게 최선이냐, 오픈할 수 있겠냐 윽박지르는 대표도 있다는데, 이 업계에서 이호연 대표만큼 정중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 어디 있느냐 덧붙였다.

“그건 그렇지.”

“그럼 테스트 서버 증설해야 하나?”

“증설까진 아니고, 오픈 전에 초기화하면 되니까 의례읍에서 하라던데요.”

“거참, 귀찮게 됐네.”

개발자들은 각자 자신의 계정에 필요 데이터를 저장해 두고 편의대로 활용했다. 테스트 환경을 옮기는 데 많은 공수가 들진 않지만, 당장 오픈까지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환경을 바꿔 테스트한다는 게 부담으로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세 잔 나왔습니다!”

커피를 가져간 세 사람의 축 늘어진 등에 시선을 내던졌다.

때마침 준성이 통화를 마치고 돌아왔다. 그의 얼굴이 붉게 상기돼 있었다. 저놈 낯짝을 보고 있노라면 하루빨리 내 짝을 만나 사랑을 하고 싶다가도, 지금 내 상황에 무슨 연애인가 싶기도 했다.

“오늘 늦게 와도 된다고 허락 맡았어.”

“동거도 하냐?”

“어? 말 안 했나? 우리 같이 산 지 두 달 됐다. 흐흐.”

죽여야 하나. 뭐가 됐든 이 자식을 세게 때려 주지 않으면 오늘 밤 꿈자리가 사나울 것 같다.

“늦게 가도 된다니, 오랜만에 암바사나 말아야겠네.”

“윽, 갑자기?”

준성은 끔찍하다며 엑스 자를 긋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래, 오늘은 양껏 먹고, 내일 또 게임이나 해야지.

D-26

모노크롬의 오픈 시간은 아침 8시다. 모아게임즈가 8시부터 11시까지 자율로 출근하여 유연근무 하는 회사라 1층 카페도 준비가 일렀다. 인사팀으로부터 꼭 8시부터 열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길 들었지만, 매니저로 들어온 것도 아니고, 아르바이트 신분이니 굳이 근무 시간 변경을 요청할 건 아니라 일을 하는 동안 어떻게든 적응하며 다녔다.

알람 소리에 겨우 눈을 떴지만, 숙취로 한참을 끙끙대며 누워 있었고, 미적거린 탓에 7시 55분에 겨우 출근을 찍었다.

그나마 1층에 있는 모노크롬은 4층 모카보다 한산한 편이었다. 아무래도 모카는 사내에 있어 내부 직원들이 훨씬 많이 이용했고, 모노크롬은 로비 층에 있어 출근 시간 때를 제하면 신경 쓸 게 많지 않았다. 홀 청소는 시설 관리 업체에서 매일 저녁에 하기 때문에 마감도 머신기 청소와 작업대 주변만 치우면 됐다.

겨우 퇴근까지 버티고 가방을 챙겨 카페를 벗어나는데 멀리서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먼지 하나 없는 깨끗한 구두가 로비 대리석 타일을 가로지르며 삑삑거렸다. 귀가 먼저 반응하고, 시선이 좌에서 우로 기울었다. 훤칠한 키가 시야에 들어왔다. 남색 재킷을 걸친 널따란 어깨와 바르게 선 허리가 돋보였다.

회전문 대신 옆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려던 그가 느닷없이 뒤를 돌아 나를 보았다.

이호연 대표였다. 그는 내가 나올 수 있도록 문손잡이를 잡고 기다려 주었다.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그는 제 할 일을 마쳤다는 듯 바로 손을 거뒀다.

얼결에 함께 나오게 된 이호연 대표를 흘긋 올려다보았다. 널따란 어깨와 길쭉한 팔다리에 자연히 눈길이 갔다. 내 시선을 알아차린 그가 나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1층에서 근무하시죠?”

“아, 네…!”

“…이름이.”

“저는…,”

“레오!”

이름을 말하려던 그 순간, 멀지 않은 거리에서 이호연 대표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공동 대표로 알려진 김사훈 대표였다.

성큼성큼 다가온 김사훈 대표가 나와 이호연 대표를 번갈아 보며 갸웃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묻는 눈이었다. 이호연 대표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꾸벅 인사하고 버스 정거장을 향해 바쁜 걸음을 재촉했다.

**

공전하듯 반복되던 평일이 주말로 바통을 넘겼다.

주말이란 자고로 금요일부터지. 정확히는 금요일 저녁 6시부터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넘어가는 자정까지. 변주 없이 흐르는 일상은 사소한 사건 사고로 채워져 있고, 그 사건들은 익숙한 화음을 깨뜨릴 정도로 크진 않았다.

그나마 최근 발생한 이벤트라면, …RTF겠지?

처음 세 마리였던 꿀벌은 분봉에 성공해 아홉 마리로 늘어났다.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여느 게임 레벨 디자인이 그러하듯, 1에서 2로 오르는 난이도보다 2에서 3으로 오르는 난이도가 더 어렵기 마련이다. 다음 분봉은 더 오랜 시간 접속해 있어야 가능할 것 같았다.

버그맨 덕분에 골치를 썩이던 퀘스트를 해치우고 연계 퀘스트까지 바로 진행할 수 있었다. 맨 처음 태어난 벌부터 막 태어난 벌들까지 동원해 팜 머니를 벌어들이고서야 메인 1장이 완료됐다.

이 과정에서 가장 신기하고 당황스러웠던 건, (벌침 수납도 수납인데) 키우는 벌들이 학습된 언어로 말을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가장 언변이 뛰어난 건 먼저 태어난 벌 세 마리였는데, 오두막에서 쉬고 있는 내 옆을 지나며 ‘악덕 업주!’ 내지는 ‘여기가 탄광이냐!’ 하고 구시렁거렸다.

‘주인님, 우리 같이 살기 좋은 농장을 가꿔 봐요!’ 따위의 말을 기대했건만, 벌들은 (나름 주인인) 나와 마주칠 때마다 벌침에 남은 꿀을 가래침 뱉듯 퉤, 하고 뱉는다거나, 저들끼리 모여 무어라 쫑알거리기 바빴다.

1장을 깨기 위해 쌓은 업의 결과였다.

팜 머니를 벌려면 꿀을 모아 팔아야 하는데, 해가 떠 있을 때 부지런히 모아야지 어떡하겠어. 그렇잖아, 나는 1장 정도는 금방 깰 수 있을 줄 알았다고. 아무리 나중에 오픈하고 전부 다 즐길 수 있다지만 테스트 기간에 1장도 못 깨서야 되나. 뭐, 결과적으로 깨긴 깼으니까. 한숨을 내쉬며 보상으로 받은 아이템을 살펴보았다.

[일반] 두꺼비 선생 소환권(귀속) - 1 / 획득처: 농장, 미정슈퍼

[스킬북] 힐 – 모든 직업(캐릭터 귀속)

VR은 두꺼비를 직접 소환해 꿀벌을 지키고 천적인 말벌과 대적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소환권이 보상으로 나올 리는 없을 테니까.

그나저나, 새로 생긴 콘텐츠가 스킬 시스템이라는 광고는 보았는데, 이렇게 바로 줄 줄은 몰랐네. 사용 대상이 모든 직업이니 습득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바로 사용해 스킬을 익혔다.

[힐] 연계 스킬 ●○○

[영역 내 아군과 꿀벌의 HP를 회복시킵니다. 스킬 레벨에 따라 보유 장비 내구도를 조정하고 회복 대상 수가 증가합니다. 일정 확률로 상태 이상을 치유합니다.]

[소모 자원: 10MP]

[재사용 대기 시간: 10초]

[스킬 범위: 15m]

[최대 대상 수: 3]

[HP 회복: 최대 HP의 8.0% 회복]

[연계 스킬 정보: 힐-정화-찬란한 빛]

힐은 말벌에 다친 꿀벌도 구할 수 있고, 파티 중인 플레이어의 HP나 상태 이상을 일정 확률로 회복할 수 있다.

천적이나 대립 구도는 모바일이랑 비슷한데, 부가된 기능들이 상당하네. 스킬 전개를 통해 농기구 파손 걱정 없이 밭을 가꿀 수 있다는 건가. 설명을 쭉 훑어보다 창을 닫았다.

쪼그린 몸을 바로 세워 앉았다. 아이고 허리야, 실제 허리가 아픈 건 아니지만 일어날 때 꼭 곡소리를 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밭에서 걸어 나와 오두막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버그맨의 저택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시스템] Bugman 님이 ‘친구 요청’을 수락하였습니다.

2장을 새로 받고 수확한 농작물을 챙기는 동안 옆집 사는 버그맨과 친구가 되었다는 알림이 울렸다. 내심 거절하진 않을까 싶었는데, 역시 마냥 나쁜 사람은 아닌 모양이다. 인사라도 하고 들어갈까? 게임 세상이라지만 그래도 나름, 이웃인 거잖아. 미정슈퍼에서 구매한 것도 겸사 나눠 주면 좋을 것 같고.

인벤토리를 열어 슈퍼에서 구매한 아이템을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중형 회복 물약과 벌꿀 술, 기정떡이 순서대로 들어가 있었다. 세 아이템 모두 버그맨에게 보답하려 구매한 것들로, 덕분에 벌어들인 팜 머니와 골드를 거의 소진했다.

고민하던 나는 발길을 돌려 버그맨의 저택으로 향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비포장도로를 밟는 소리가 바삭바삭 울렸다. 주 대문과 보조 대문을 왔다 갔다 하다 턱을 세워 안을 들여다보았다. 마루에 은은한 불빛이 스미는 걸로 보아 아직 로그인 상태인 것 같은데, 조금의 기척도 없이 고요했다.

꼭 ‘이리 오너라!’ 하고 소리쳐야 할 것 같은 대문인데?

“크흠, 계십니까아!”

목을 가다듬고 문을 두드렸다. 아무도 없나? 고개를 갸웃거리다 친구 리스트를 띄워 음성 대화를 시도했다.

“안녕하세요? 계세요? 저 버리인데, 잠깐 인사 좀 드리려고요.”

[지금요? 아니, 잠깐, 문 열려 있어요. 그냥 밀면 됩니다. 들어오세요.]

버그맨의 음성이 떨리는 것처럼 느껴진 건 내 기분 탓인가? 그의 말대로 보조 대문을 살짝 밀고 문설주를 넘어 발을 들였다.

경계를 넘은 순간 버그맨의 위치가 눈앞에 화살표로 표시되었다. 들어오라고 해서 들어는 왔다만, 화살표를 따라가야 하는 건가? 쭈뼛대며 깜빡대는 화살표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뗐다.

나는 가이드에 따라 앞마당에서 뒤뜰로 향하다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파리하게 질린 낯으로 주저앉은 버그맨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두두두두.

아씨, 깜짝이야, 누가 게임에서 드론을 띄웠어?!

널브러진 그를 멍하니 내려다보다 뒤에서 들리는 커다란 소음에 놀라 몸을 틀었다. 세상에, 저게 뭐람? 드론이 아니라 날개 소리였어? 저거 날개 소리인 거 맞는 거지?

공격 태세를 취한 말벌의 눈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Lv 4. 장수말벌]

“저것 좀, 잡아 주세요.”

“제가요…?”

“네.”

“저걸요?”

“네, 빠, 빨리.”

이보세요, 어떻게 사람이 말벌을 잡아요. 그냥 말벌도 아니고 장수말벌인데? 상식적으로 아무리 게임이라도 저런 끔찍한 비주얼을 어떻게 잡습니까? 오랜 자취 경험으로 웬만한 벌레는 너끈하게 잡지만 말벌, 장수말벌, 꼽등이는 수용이 안 된단 말입니다. 그건 가상 현실이라도 마찬가지라고.

“쏘여서 죽으면 경험치 깎입니다, 빨리.”

그러니까 적으로 인식된 건 너님인데요? 왜 내가 저걸.

“굴삭기.”

빌려줬던 굴삭기에 대한 이자를 이렇게 받는다고?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버그맨과 장수말벌 사이를 막아섰다. 말벌의 새빨간 눈이 날 향하며 타깃 변경에 대한 시스템 경고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두, 두꺼비 선생 소환!”

1장 완료 보상으로 받은 소환권을 사용해 두꺼비 선생을 불러들였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두꺼비 한 마리가 소환진에 모습을 드러냈다. 구르륵 울음을 낸 두꺼비가 흘끗 나를 돌아보며 공격 사인을 기다렸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먹어 주세요? 잡아 주세요? 두꺼비 혓바닥 공격? 이럴 줄 알았으면 힐 말고 소환권 설명이나 자세히 읽어 볼걸!

“가, 가라!”

뭐든 말로 내뱉으면 알아듣겠거니 싶어 되는대로 소리치자 두꺼비 선생이 팔짝 뛰어올라 말벌 앞으로 다가섰다. 단순 공격 사인일 뿐인데 부끄러움은 왜 나의 몫이란 말인가.

두꺼비 선생이 말벌과 대치하는 동안 한 발 물러나 버그맨을 살폈다.

“괜찮으세요?”

“윽.”

눈살을 화득 찌푸린 그가 간신히 허리를 세워 앉았다.

“원래 말벌이 밤에도 나와요?”

“…….”

“아, 맞아, 힐!”

마침 적당한 스킬도 익혔겠다, 어떤 식으로 구현이 됐나 구경도 할 겸 힐 스킬을 사용했다. 부드러운 빛줄기가 나와 버그맨 주변을 감싸고, 소환된 두꺼비 선생에게도 닿아 체력이 올라갔다. 상태 이상에도 효과가 있었던 듯 남자의 낯에 생기가 돌아왔다. 말벌이 매우 충격적이게 생긴 건 맞는데, 그래도 이렇게 타격이 클 일인가.

정신을 차린 버그맨을 두고 다시 고개를 돌려 교전 중인 두꺼비의 늠름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진짜로 혀를 쓰네. 뭐, 두꺼비가 무기로 쓸 만한 게 혓바닥 말고는 없으니까.

소환된 두꺼비가 일반 등급이라 그런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말벌에 패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진짜 쏘여서 경 손실 나는 건 아니겠지….

꺼억.

머릿속에서 안 좋은 상황을 가정하며 주렁주렁 생각을 이어 가다 크게 울린 트림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앞을 보았다. 내 걱정이 무색하게도 아슬아슬하게 말벌을 낚아챈 두꺼비가 한입에 적을 꿀꺽 삼켜 냈다. 처치를 마친 두꺼비 등에 독이 올라 붉은 반점이 선명하게 번졌다.

긴박했던 상황이 마무리된 듯했다. 두꺼비가 역으로 소환되어 자취를 감추며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걸로 된 건가. 한숨을 내쉬고 버그맨을 흘끔 쳐다보았다. 그는 언제 주저앉아 있었냐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조금 전 상황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너무 대수롭지 않게 말하니까 가상 현실에서 또 가상을 본 것 같잖아.

내 대답을 기다리는 버그맨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입을 열었다.

“그게, 드릴 게 있어서.”

[시스템] Bugman 님에게 교환을 요청하시겠습니까? [요청]

거절할 줄 알았는데, 버그맨은 다행히 교환 수락을 해 주었다. 나는 바로 중형 회복 물약과 벌꿀 술, 기정떡을 슬롯에 채우며 확인 버튼을 눌렀다.

“굴삭기 덕에 1장 깼잖아요.”

버그맨은 수락을 갈등하다 슬롯에 두꺼비 선생 소환권 5장을 올렸다.

소환권이 있는데 왜 소환하지 않고 당하고 있었던 거지? 당황하여 그와 슬롯을 번갈아 보았다. 내 시선에 버그맨이 20만 골드까지 교환 창에 올리며 굳게 닫힌 입술을 달싹였다.

“…실제로 벌레를 좀 싫어해서.”

주저하는 버그맨의 음성이 낮게 울렸다.

“테스트다 보니 싫어도 봐야 하잖습니까.”

“그, 그건 그렇죠.”

맞는 말이지. 테스트니까 몬스터가 어떻게 생겼는지 볼 줄은 알아야지.

“아까는 급습당한 타격도 있었고.”

왜 주저앉아 있었나 했더니, 실제로 당했구나.

“그런데, 이거 20만 골드는….”

“받으세요. 말벌 퇴치 보수 같은 거니까.”

진짜 보수 주듯 말씀을 하시네. 실제 말벌이었으면 나도 못 잡는다고. 거기다 그냥 말벌도 아니고 장수말벌인데요.

흠, 그나저나 은혜 갚는 까치처럼 굴삭기 보답을 하려고 했는데, 역으로 이렇게 받아 버리면 좀 그렇지 않나? 20만 골드가 한두 푼도 아니고. 이 정도라면 파밍이 어려운 재료를 사들여 직접 제작까지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받으세요.”

누차 이르는 버그맨을 보고 확인 버튼을 꾹 눌렀다. 흠, 두 번이나 받으라 하는데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 나보다 가진 게 많아 보이기도 하고.

“저, 그럼 가 볼게요.”

인벤토리를 닫고 버그맨에게 꾸벅 인사했다.

“같이 먹죠.”

버그맨이 내게 받은 벌꿀 술과 기정떡을 들어 보였다. 나는 그의 누그러진 표정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버리 님.”

‘뭡니까’와 ‘어제 뵌 분’에서 이렇게 님이 붙게 될 줄이야. 어쩐지 감개무량했다. 나는 그의 푸른 눈을 바로 주시하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원래 이 시간에 접속합니까? 테스트 접속 시간은 따로 공지가 됐을 텐데요.”

접속 시간이 따로 있었구나! 그래서 처음에 서버 어쩌고 물어본 거였나?

예상치 못한 질문에 눈을 데굴 굴렸다. 정해진 시간대에 활동을 하고, 해당 시간대에서 발생한 버그나 이슈를 모아서 처리하는 듯했다. 아닌 것 같아도 지난 일주일 동안 내 접속 시간대를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제가, 낮에는 일을 하느라…….”

“서버실은 아닌 것 같고, 테스트 시간대 접속도 아니면 VR 조직 말고 다른 팀?”

일을 한다는 말 때문인지 나를 직원으로 오인한 버그맨이 내 말을 가로챘다. 테스터가 아닌 직원이라면 이 시간에 접속하는 게 말이 됐다. 근 일주일 동안 저녁부터 자정 전후까지만 접속하고 있으니 직원 입장에서 보면 초과 근무다 못해 철야를 겸하는 셈이다.

부정을 해야 하는데,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테스트는 엄연히 대외비로 규정된다. 실제 오픈 전까지 회사와 협의되지 않은 내용은 함구하는 게 원칙이다. CBT를 한 스트리머들이 개인 방송에서 송출하는 내용도 제작 후 개발사에 검토를 받고 내보내거나, 핵심 기술은 제하도록 되어 있다. 직원도, 테스터도 아닌 일개 사내 카페 아르바이트가 테스트 환경에 접속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전송이 디렉터에게 피해가 갈 수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깊게 생각하고 친구 신청하는 건데. 버그맨이 가진 장비나 저택만 봐도 ‘나 직원이오’라고 쓰여 있는데, 생각이 짧아도 너무 짧았다.

어쩌지, 어쩌면 좋지. 계속 숨기는 게 나을까. 마른 입술을 혀로 훑으며 어색한 웃음을 내비쳤다.

“이거, 참 뿌듯해해야 할지.”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테스트를 해 주니. 버그맨이 작게 중얼대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뭐야, 왜 갑자기 웃는 거지? 약간 꼰대 같은 웃음인데…, 일반 평사원 아니고 직급이 좀 있는 분인가? 묘하게 흐르는 분위기를 읽어낸 나는 긴장으로 땀이 밴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럼 테스트 기간 동안 부탁 하나 합시다.”

“네?”

“지금 제 메인이 벌레… 인데. 같이 좀 밀죠.”

버그맨이 말하는 요지는 이러했다. 정식 오픈까지 약 3주가 남은 상황이고, 그동안 아무리 내가 빨리 플레이하더라도 그가 진행 중인 5장까지 클리어하는 건 어려울 것이다.

개인 시간을 내 게임을 해 본다는 건 그만큼 RTF VR에 관심이 있다는 뜻인데, 버그맨이 밀고 있는 5장의 파티 플레이에 응한다면 여러 편의를 봐주겠다고. 그 밖에도 메인을 밀어주면 버그맨 캐릭터로 버리 캐릭터의 2장 퀘스트를 도와주겠다, 계정 토큰을 알려주면 저번에 주었던 굴삭기를 오픈 시 운영 서버로 옮겨 주겠다, 등등.

그런데 부탁하는 사람 태도가 왜 이렇게 명령처럼 느껴지지? 이거 맞는 거야? 같이 잡자는데 결국 내가 잡으라는 거 아냐? 아까처럼 뒤에서 구경만 하고 있는 거 아니냐고. 한쪽 눈썹이 찡긋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내 미적지근한 반응에 버그맨은 묘수라도 되는 양 마지막 조건을 붙였다.

“따로 고과에 반영될 수 있게 힘써 드릴 수도 있습니다.”

“자, 잠깐만요.”

뭐 이렇게 급해? 같이 메인을 미는 거야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오히려 조건만 들어서는 내게 더 유리하다. 2장을 밀어 준다고 하고, 굴삭기도 주고, (정규직이 아니라 어렵겠지만) 고과도 반영해 준다고 하니까. 다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좀체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음…, 어차피 메인을 같이 밀어도 코어는 버그맨 님이 깨야 하는데 괜찮나요?”

“그건 괜찮습니다.”

“그래요, 그럼. 대신 고과는 좀 그렇네요.”

“그럼 나중에 식사라도 대접하죠.”

뭐 이렇게 주는 걸 좋아해. 식사할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여기서 더 말을 보태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아 달싹대던 입을 다물었다.

“아, 그럴 일은 없겠지만 당연히 비밀 유지는 돼야 합니다. 제가 벌레를 싫어한다는 것도.”

“…말할 곳도 없어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이며 버그맨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 얼굴로 벌레가 싫다니. 설정을 통해 만들어진 외모라는 걸 알지만 이 체격에 이 목소리로 싫다고 하니 좀 신빙성이 떨어지는 것 같기도.

가만? 앞선 이야기들을 미루어 보면 아무래도 버그맨은 개발자이면서 동시에 임원 정도는 되는 모양이지? 이제야 앞뒤가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초면에 거만하게 소속을 묻던 태도도 그래서였던 거 아닐까.

그나저나 버그맨이 뭐야. 벌레를 잡을 수 있어야 버그맨 아냐? 개발 버그를 잡는다고 참작해도 이런 사기꾼 같은 닉네임을 잘도.

“버리 님, 생각보다 좋은 분 같네요.”

버그맨이 내게 한 발 가까이 다가왔다.

이제 와서? 눈매를 가느스름하게 뜨며 버그맨을 흘겼다.

“해 집니다. 들어오세요.”

괜히 멀거니 서 있다 벌레 그래픽 따위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말투에 실소가 번졌다.

“그럼, 신세 좀 질게요.”

꾸벅 인사한 나는 그의 집 안에 발을 들였다. 마루에 올라서자 실내에 들어왔음을 감지한 캐릭터의 신발이 자동으로 해제되었다.

버그맨의 집은 안락하고 넓었다. 외양만 기와가 아니라, 한옥을 개조한 인테리어로 한껏 뽐을 냈다. 복도를 지나 너른 대청으로 나오면 은은하게 깔린 조명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높은 천장이랑 서까래는 또 어떻고. 이 사람, 현질을 얼마나 한 거야. 아무리 테스트라도 너무하잖아. 이게 귀농이냐? 귀농 느낌 낸 한옥 스테이지.

대청 안쪽, 식탁으로 나를 안내한 버그맨이 옻칠한 탁자 위에 벌꿀 술을 올렸다.

“내일도 이 시간쯤 보죠.”

나는 그가 따라 준 벌꿀 술을 받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D-20

<토킹어바웃유> 소셜 네트워크에 예고 영상이 공개되었다. 영상은 로비 천장에 설치된 코닝 강화 유리 화면에 디지털 사이니지로 함께 송출되었는데, 모노크롬 카운터와 디스플레이가 마주 보는 위치라 일하는 중간중간 방송 화면이 시야에 들어왔다.

[토킹유 X 모아게임즈]

[RTF가 다락방에서 만들어졌다?]

[한국 게임의 선두 주자, 모아게임즈의 보석 같은 이야기들!]

빠르게 지나가는 자막 뒤로 이호연 얼굴이 클로즈업되었다. 여러 앵글에서 그 특유의 미소가 보였다. 서늘하면서도 담백한 눈빛을 멍하니 쳐다보다 이내 턱을 당겨 시선을 내렸다.

방송에 나온다는 사실 때문인지 몰라도, 꼭 연예인을 보는 기분이었다. 일하는 곳 대표자가 유명 방송에 출연하는 걸 보는 것 자체가 처음이니까.

때마침, 승강기 문이 열리며 모아게임즈 창립 멤버 세 사람과 리포터, 촬영 감독까지 다섯 명이 내려섰다.

인터뷰어가 로비를 둘러보다 한 편에 설치된 꿀벌 조형물을 가리켰다. 그는 몇 걸음 떨어져 있던 네 사람을 향해 목청을 높였다.

“…여기가 좋겠네요!”

촬영 감독 앞에 쭈뼛쭈뼛 세 사람이 섰다. 꿀벌 우측으로 이호연이, 좌측으로 전송이가, 전송이 옆에 김사훈이 자리를 잡고 포즈를 취했다. 셔터 눌리는 소리가 서너 번 울리는 동안 이호연은 뻣뻣하게 서 있었고, 전송이나 김사훈은 환하게 웃으며 손 모양을 이리저리 바꾸었다.

“좀 웃어 줄래, 친구야?”

김사훈이 이호연을 타박했다.

“이게 웃는 얼굴이야.”

“엄지라도 들어 봐요.”

보다 못한 전송이도 투덜거렸다.

“등산 동호회 단체 사진이냐?”

이호연은 툴툴대면서도 엄지를 들어 올렸다. 시큰둥하고 비협조적인 표정인 데에 반해 해 달라는 건 다 해 주는구나.

두어 번 더 셔터가 눌리고서야 촬영은 마무리됐다.

“고생하셨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김사훈 대표가 리포터에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기사 잘 써서 홍보실로 먼저 보낼게요.”

묵례하여 인사하는 리포터와 감독을 배웅한 세 사람의 얼굴은 긴장이 풀린 듯 다소 느슨해졌다. 승강기에 다시 오르기 전, 전송이가 우뚝 멈추어 서서 카페를 바라보며 고갯짓했다.

“선배들, 커피?”

“그럴까?”

전송이의 제안에 김사훈이 서글서글 웃었다.

“그만 좀 다녀. 직원들 이용하는 데 불편해해.”

미간을 찌푸린 이호연이 내가 선 곳을 쳐다보았다. 그와 내 시선이 일순 얽혔다 어긋났다.

“나도 직원인데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은 전송이가 내 앞에 섰다.

“예준 씨,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디렉터님! 사진 찍으시는 거 봤어요. 고생 많으셨어요.”

“고생은요. 이것도 다 요거지, 요거.”

그녀는 제 입을 가리키며 립 서비스라 말했다.

“저 아이스 아메리카노 샷 추가해서 부탁해요.”

“저도 아메리카노로.”

포스에 주문 정보를 입력하고 뒤에 선 이호연을 바라보았다.

“선배는?”

이호연 대표가 눈가를 찡그리며 카페 작업대 앞에 섰다.

“빨리빨리 골라요.”

“이젠 선배 아니고,”

“대표라는 호칭도 별로 안 좋아하면서.”

말을 자른 그녀가 이호연을 팔꿈치로 가볍게 쿡 찔렀다.

“레오라고 부르면 되는걸.”

“다른 직원들은 그냥 부르겠는데, 선배들 닉네임은 입에 잘 안 붙으니까. 그냥 전체 다 님으로 바꾸면 안 되나? 누구누구 님, 얼마나 정중하고 스윗해.”

“옆에 물주님 계시네. 물주한테 따져.”

“핸드릭스? 핸드릭스가 뭐야. 아유, 촌스러.”

옆에 선 김사훈이 상처받은 표정을 지으며 눈매를 아래로 푹 떨어뜨렸다.

“마상이야, 쏭이.”

“나도 마상이에요. 빨리 골라요!”

이호연이 턱을 당겨 나를 내려다봤다.

“아메리카노로 부탁해요.”

“네!”

준비한 음료를 픽업대에 올리지 않고 바로 포스 너머로 건네주었다. 전송이가 가운데에서 커피를 두 사람에게 대신 전하며 눈가를 찡긋했다.

“선배는 사람도 좀 만나고 해요. QA팀을 왜 뒀냐구. 게임에 처박혀 있으니까 아직까지 짝도 못 만나는 거 아냐.”

“관심 꺼라.”

커피를 받아 든 이호연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관심이 아니라 걱정이죠. 어디 흠이 있는 것두 아닌데 서른넷이나 됐으면.”

“…캘리.”

“네에, 네, 커피 잘 마실게요, 예준 씨!”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내게 이호연의 시선이 빠르게 달라붙었다. 무어라 말하려던 그는 옆에 선 두 사람에게 잠시 눈길을 주었다가 거두며 한숨을 내쉬었다.

“잘 마시겠습니다, …예준 씨.”

짤막하게 뱉어진 목소리에서 알 수 없는 기시감을 느꼈다. 뭐지? 두 눈을 깜박였다. 이호연이 내 이름을 불렀기 때문일까. 멀어지는 세 사람을 바라보다 시선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RTF의 마스코트 꿀벌 조형물을 바라보다, 나흘 전 일을 떠올리곤 픽 웃음을 터뜨렸다.

/Ins. 플래시백. D-24

RTF에서 꿀벌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다. 개체 수를 늘려 분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팜 머니를 벌어들이고, 성장 밸런스를 유지하는 데에 핵심 요소나 다름없다 해도 무방했다. 친밀도를 높여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벌의 도움 없이는 기본적인 성장이 불가능한 정도니까.

모바일과 마찬가지로 꿀벌의 천적은 말벌로 설정되어 있고, 말벌 습격 시 농장주는 벌집을 수호하고 꿀벌은 주인을 의지하며 상호 관계를 유지해 나가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장수말벌의 습격이 있던 날 버그맨 주변엔 꿀벌이 단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공격당해 부상당한 꿀벌도 없었고, 사체조차 눈에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단 말이지. 서로 돕고 돕는 관계여야 하는 게 맞는 건데.

나는 뒤뜰 벌집 앞에 서서 내 꿀벌들을 살폈다. 오늘은 10병의 꿀을 채집하는 게 목표였다.

“오늘 할당량은 꿀통 열 병이야. 잘 부탁해, 알겠지?”

[오냐아]

꿀벌 한 마리가 한쪽 날개를 파드득 떨며 거드름을 피웠다.

아무리 안달복달해도 친밀도는 20%에서 꼼짝을 하지 않았다. 이걸 어떻게 올리지. 밤마다 벌침을 닦아 놔도 반응들이 영 시원찮다. 게임 가이드에 검색해 봐야 하나. 고심하던 나는 빈둥대는 벌 한 마리의 자그마한 머리통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부탁 좀 하자, 부탁 좀.

[악, 내 머리!]

벌이 스타일을 구겼다며 진저리를 쳤다. 절로 코웃음이 터졌다. 다 동글동글하게 생겼구만 꿀벌 머리에 스타일이 어디 있다고?

[벌침 좀 줬다구 뭐라도 되는 줄 알아?]

팩 토라져 고개를 돌린 벌이 붕, 날아 제 친구들 무리에 섞이며 구시렁거렸다. 그래도 오늘처럼 안달복달 부탁하면 밤이 두 번 회전할 즈음엔 다 쓴 벌침과 함께 약속한 꿀을 가져다주니 이번에도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버그맨한테 물어봐야 할까? 거름 작업하기 전에 잠깐 들러서 친밀도 높이는 법 좀 전수받아 두면 좋을 것 같은데. 뒤뜰에서 벗어나 마당을 가로질러 곧장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 순간, 대문 안쪽에서 빼액 큰 소리가 났다. 또 사냥해야 할 천적이 나타난 건가 싶어 문 가까이 후다닥 다가서자 버그맨의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귓바퀴를 돌았다.

“다 없애 버리기 전에 꿀 가져와.”

[다 읎애 브르기 즌에 꿀 그즈와.]

“따라 하지 말고.”

차갑게 일갈한 버그맨을 비웃기라도 하듯 낄낄 웃는 웃음이 크게 번졌다.

[Fuck you!]

[Fuck!]

[키히히, Asshole!]

퍽, 뭐라고? 지금 내가 들은 게 퍽 유 맞는 건가? 왱왱대는 특유의 앳된 어조는 분명 벌의 목소리였다.

“하….”

뒤이어 들려오는 버그맨의 탄식에 나는 멍한 눈을 깜박였다.

[блять!(블럇찌!)]

[Bida-bida ka-(비다비다 까-)]

어떻게 길을 들였기에 귀여운 꿀벌 입에서…, 아니, 내 꿀벌들도 상태가 좀 이상하긴 한데, 저건 너무하잖아. 그리고 블랴? 뒤에 이어진 말마디는 알아듣지도 못했다. 이죽대는 것으로 보아 아마 욕이지 않을까 싶은데.

벌들과의 친밀도를 어떻게 올리는지 버그맨이 더 잘 알지 않을까 싶어 물어보려 했는데, 안 되겠다. 내 꿀벌들이 저런 상스러운 욕을 배운다고 상상하면, 으, 싫을 것 같다. 푸념하면서도 시키는(부탁하는) 꿀 채집은 곧잘 해 주고 있으니, 현재에 만족해야 하는 건가.

그보다, RTF가 이번 릴리즈에서 글로벌 서비스도 예고했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걸음을 돌려 밭으로 향했다. 정식 오픈되면 알게 되겠지, 뭐.

Re, D-15

VR 플레이가 재미있긴 하지만 오늘은 다른 일이 있었다. 첫째로 <토킹어바웃유> 본방송이 있는 날이라 옆에 켜 두고 틈틈이 볼 생각이었고, 둘째로 옆에서 방송이 돌아가는 동안 RTF 모바일 길드 침략전에 참가해야 했다.

최근 아침부터 낮까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퇴근 직후부터는 VR 세상에서 버그맨과 시간을 보내느라 길드 운영을 백현동버그킬러에게 맡겨 두고 있었다.

침략전을 미루고 차라리 VR 오픈 때 다 같이 가서 길드도 만들면 되지 않나 싶었지만, 다들 오랜만에 뭉치고 싶어 하는 눈치라 참가 결정을 내린 것이다. 때문에 신규 길드원 모집과 타 서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공식 카페를 뒤져 보고, 전투 전략을 세우느라 요 며칠 정신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현생이 없네, 현생이.

입속말을 중얼거리며 모바일 버전을 실행했다.

그래도 월드까지 가게 된 마당에, 길드 마스터가 공석일 순 없지.

[게임하기]

버튼을 탭해 관성적인 손짓으로 길드 출석과 일일 접속 보상을 챙긴 뒤 길드 채팅 창을 크게 키웠다.

[길드][버그킬러]: #안녕

[길드][버그킬러]: 계속 바쁘다는 이유로 못 챙겨 미안요.ㅠㅠ 우리 월드 가서 꿀장협 깃발 꽂고 옵시다.

[길드][아침엔커피]: #안녕

[길드][백현동버그킬러]: #화이팅

[길드][권윤재]: #화이팅

내 인사에 길드원들도 하나둘 채팅을 남기며 접속 여부를 밝혀 왔다.

[길드][장충동오함마]: 길마님, 저 엊그제 쟁기 10강 찍었습니다! 가서 다 조져 버리겠습니다! 장충동 쟁기로 따히!

[길드][버그킬러]: #깜짝

[길드][버그킬러]: 대박. 10강이요? 함마님 지금 장비만 팔아도 400은 버실 듯

[길드][qwer1234]: 레알 쌀먹이시네

[길드][장충동오함마]: #웃음

[길드][백현동버그킬러]: 오늘 데어코드 하나요?

백현동 버그킬러가 음성 채팅 여부를 물어 왔다. 아무래도 서버 간 이동이라 길드 채팅만 보고 있을 순 없으니, 즉각적으로 대응하기엔 타이핑보다 음성이 더 좋긴 하겠지?

[길드][버그킬러]: 네, 데어코드 전투방으로 들어오시면 돼요.

서버 간 침략전 시작까지 20분 정도 남은 상황이라 아직 여유가 있었다. 데어코드에 연결한 마이크 세팅을 맞추고 접속자 추이를 지켜보았다. 나와 강준성, 권윤재를 비롯해 길드 채팅에 인사한 멤버들이 우선 들어왔고, 시간차를 두고 14명이 더 데어코드에 접속해 인사를 해 왔다.

음성 슬롯이 빼곡하게 찬 UI를 보니 뭉클한 감각이 되살아났다.

그래, 이 맛에 게임하지.

RTF 모바일이 오래되어 뉴비보다 고인물이 더 많긴 하지만, 3년 차를 맞은 게임 서버가 거의 매일 혼잡 상태라면 정말 유저 친화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거니까.

“다들 반갑습니다.”

[길마님 목소리 오랜만이라 더 좋네요.]

[그러게요, 언제 안 바빠져요? 딱 보름 남았던데 VR.]

“하하, VR 오픈 때는 풀접해야죠. 우리 꿀장협 VR에도 만들어야 하니까.”

길드원들이 VR 오픈 소식을 알고 있는 건 당연한 건데,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괜스레 움찔, 어깨가 떨렸다. 나 같은 사람은 죄짓고는 못 살 인간이구나. VR에 대해 무언가 유출한 것도 아닌데 양심이 찔리는 걸 보면.

“저희 침략전 서버가 애향 2섭이죠? 피빕 되시는 분들은 강화 옵션 잘 체크해 주시고, 물약 설정 만피로 해 주세요. 만약 제가 선방에서 죽으면 백현동버그킬러 님 오더 따라 주시면 돼요. 피빕 잘 안 되는 분들 죽으면 텔지로 바로 가지 마시고 복지 센터 앞에서 고투력 분들이랑 같이 이동하는 걸로.”

부길마는 강준성이지만, 게임 오더나 컨트롤은 백현동버그킬러가 훨씬 잘했다. 듣자 하니 웬만한 MMO와 MO 다수 섭렵했고, 거기서 반왕도 하고 서버 통치도 해 봤다고 했다. 때문에 항상 서브 오더는 백현동버그킬러의 몫이었다. 강준성도 크게 이의는 없었고, 오히려 백현동버그킬러가 있어 안도하는 눈치였다. 이번에도 백현동버그킬러가 서브 오더 하리라 생각하고 말을 잇다 문득 너무 혼자 떠드는 것 같아 멈칫했다.

“백현동 님?”

[…아, 네.]

응? 뭐야, 원래 백현동버그킬러 목소리가 이랬던가?

[시작되면 다들 마이크 꺼 주시고, 죽는 상황이나 텔 탈 때 온오프 해 주시면 좋을 듯합니다. 보이스가 섞여서 오더가 잘 안 들릴 수 있으니까요.]

낮은 음성이 귓바퀴를 돌았다. 목소리가 다 거기서 거기라지만, 왜 이리 익숙한 느낌이지. 기분 탓인가.

“그것도 좋네요. 10분.”

[와, 떨려요, 진짜. 저 이런 거 한 번도 안 해 봤거든요. 힐링 귀농 게임에서 제 레기에 피를 묻히다니!]

[라일락 님 드디어 핏빛으로 물드나요.]

“약간 사신 느낌인데요?”

내 덧붙임에 길드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흙을 고르는 용도의 농기구인 레기로 상대를 찍어 죽인다면 좀 잔인할 것 같은데?

침략전은 아쉽게도 2위에 그쳤다. 월드에서 만난 애향읍 2서버의 ‘장수풍뎅이’ 길드가 너무나 막강했기 때문이다. 레벨 평균이 75 정도인 꿀장협과 비교해 장수풍뎅이 길드는 80 초중반이 다수 포진해 있었다. 1위와 2위 격차가 크게 벌어져 있다 보니 어떻게 싸워도 지는 싸움일 수밖에.

“아쉽네요. 그간 너무 소홀했나 봐요.”

[꿀벌이 풍뎅이에게 지다니….]

장충동오함마가 아쉬움을 내비쳤다.

[저 그래도 제 레기로 둘 정도 목 딴 것 같은데.]

잔뜩 흥분한 라일락꽃필무렵이 격양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서버 보상은 있네요. 다음 업데이트까지 생산량 2프로 증가.]

[농작인의 축복][생산량 2% 증가]

백현동버그킬러의 말대로 의례읍 서버로 돌아오자 축복 버프가 걸려 있었다. 1위와 3%나 차이가 나지만 그래도 서버 전체에 축복이 간 게 어딘가 싶었다.

오랜만에 길드원 다수가 모인 덕인지 자연스럽게 근황 토크로 넘어갔다. 근황이라고 해 봐야 최근 번개나 먹고사는 일, RTF VR 업데이트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안녕하세요! 벌써 끝났나요?!]

길드에서 제일 어린 래미콘힐스테이트가 다급하게 데어코드에 입장했다.

“네, 풍뎅이 길드 엄청 단단해서.”

왔어도 현타만 느끼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완패였다. 특히나 래미콘은 어려도 과금을 꽤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참가했다면 타 서버와의 격차 앞에 무릎을 꿇고 게임을 접었을지도 모른다.

힐링 귀농 게임에서 대체 무엇을 과금 하겠느냐 싶겠지만, 생산력을 높이기 위한 고급 무구를 단기간에 얻기 위해서는 과금 외에는 답이 없었다.

사실 길드원 하나 게임을 안 한다고 지구에 큰일이 생기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3년을 봐 왔는데, VR까지는 같이 가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지.

[으, 너무 아쉬워요. 저 알바하고 왔는데, 집 들어가자마자 리마 님이랑 딱 마주쳐서 그대로 얼어붙어 가지고….]

[리마 님?]

[리마 님이 뭐예요?]

리마 님은 또 뭐야? 나만 궁금한 게 아닌 듯 다들 래미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그리마요. 벌레. 그래서 접속이 늦었어요.]

“발 엄청 많은 그거요?”

어떤 기분일지 상상이 가서 절로 미간을 찌푸렸다. 나도 고작 1년에 한 번쯤 보는 벌레지만 워낙 강력한 놈이라 듣자마자 알았다. 으, 그거 보면 좀 찝찝하지. 생각하니 등줄기에 소름이 막 돋았다.

[그걸, 요즘엔…, 리, 리마 님이라고 부릅니까……?]

꽤 놀란 모양인지 백현동버그킬러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프 모임에는 나오지 않아 외모를 알 순 없지만, 목소리가 낮고 조곤조곤해 분명 잘생겼을 것이라는 추측이 항상 뒤에서 나돌았다. 목소리가 존잘이니 얼굴도 존잘일 거라나 뭐라나.

[너무 흉물스러워서 이름이라도 좀 귀엽게 지어 봤어요.]

아, 그래서 리마 님. 그 벌레에게 절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미지의 이름이지만…….

“가까이 살았다면 잡아 주러 갔을 텐데.”

[길마 형 분당이라고 했었죠? 이 순간만큼은 형이랑 같은 동네 살고 싶어요.]

울먹울먹하는 래미콘의 목소리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게, 같은 동네였으면 까짓거 잡아 주고 맥주라도 한잔했을 텐데.

[길마님, 그 벌레를 잡을 수 있다고요…?]

귀에 콕 박히는 음성은 백현동버그킬러였다. 정말로? 백현동은 믿기지 않는 듯 반복해 물었다.

“돈벌레라는 속설이 있어서 저는 주로 방생하긴 하는데, 잡을 수야 있죠…?”

[허…….]

원래도 백현동버그킬러가 이렇게 리액션이 좋았나? 채팅에서나 게임 이모티콘이 난무하지, 오더 내릴 때 아니면 늘 단답이었던 것 같은데.

[…존경스럽네요, 역시 길마님.]

응…? 조, 존경이요?

[하하하, 그게 무슨 말이에요.]

[백현동 님 2위 해서 충격받았나 보다.]

[다음번엔 꼭 이겨요. 저희도 길드 평균 80 만들어서.]

[백현동 님이 흥분하는 날도 다 있네요, 하하. 저는 시간 늦어서 들어갑니다!]

[저도 가 볼게요. 다들 고생 많으셨어요! 또 게임에서 봐요!]

“고, 고생 많으셨습니다.”

더 물어보려 했으나 모임이 마무리되는 분위기라 급히 인사를 보탰다. 데어코드에 떠 있던 백현동버그킬러의 슬롯이 빠져나간 걸 보며 두 눈을 멍하니 깜빡거렸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 나도 접속을 끊고 이어폰을 귀에서 빼냈다.

도대체 뭐가 존경스럽다는 거지? 이거…, 맥이는 건가? 에이, 아니겠지.

백현동버그킬러와 평소 서로 놀리고 장난을 걸던 사이였다면 또 모를까, 3년이 지나도록 이렇게 일정 거리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데 무슨.

기지개를 쭉 켜며 뭉친 허리를 두드렸다. 아, 방송도 끝났구나. 재생 대기 상태로 돌아간 화면을 내려다봤다. 인터뷰는 현장에서 다 들었으니까. 잠이나 자야겠다.

**

그간 VR 세상에서 있었던 일을 정리해 보자면,

하나, 버그맨과 버리는 파티를 맺었다. (공동 명의는 아님)

둘, 버그맨은 생각보다 더, 벌레를 싫어한다.

둘 반, 상기의 이유로 버그맨의 양봉 농사는 망한 듯 보인다.

셋, 버그맨은 로그인하자마자 (처음의 냉랭함은 오간 데 없이) 버리를 찾는다.

넷, 버그맨과 버리는 매일같이 벌꿀 술을 들며 하루를 마감한다.

RTF의 전경은 기본적으로 농장과 시골에 중점을 두고 있다. 컷 신 연출 또한 전반적으로 하이 앵글로 논이나 갈대숲이 더러 잡혔고, 풀벌레나 매미의 울음이 BGM으로 낮게 깔려 있었다. 음악이야 듣고 싶지 않다면 설정에서 오프 처리하면 되지만, 육안으로 보는 플레이 장면은 끄고 싶어도 끌 수가 없었다.

버그맨의 벌레 혐오는 일반인의 범주, 그러니까 일반인을 나로 상정했을 때의 기준에서 보면 신기할 정도로 과했다. 간헐적인 천적 출몰은 물론이거니와 퀘스트 진행만으로도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아 보였다. 이 정도로 괴로워한다면 테스트를 그만두어도 될 텐데, 그는 성실하게 로그인했고, 내 접속을 기다렸다.

RTF의 메인 퀘스트는 밭을 일구는 1장을 시작으로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 주며 단계를 밟아 나간다. 2장은 복자, 3장은 미정슈퍼 주인, 4장은 복지관 노인, 5장은 이장님의 고민이다.

6장부터는 직업 선택을 위한 퀘스트로 돌입하는데, 여기서부터는 전혀 다른 시나리오로 접어들게 된다. 가령, 양봉업자의 길로 접어들면 양봉업의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 관련 스킬이 개방되고 보유한 밭의 규모보다 벌집의 규모가 더 커지게 된다. 전직 이전이라면 농장 주인으로 표시되고, 버그맨처럼 보류 상태로 남는다.

여하튼, 버그맨의 퀘스트인 5장, 이장의 고민은 매우 단순했다.

최근 고민이 생겼고, 그 고민의 원흉은 모두 벌레라는 거였다. 아무리 날이 따뜻하다 해도 개체 수가 너무 많다는 푸념을 늘어놓으면서 5장이 시작된다. 이러다 귀농한 주민들이 농사나 생활에 지쳐서가 아니라 벌레 때문에 마을을 떠날 것 같다며 울상을 지었다.

메인에 붙어 있는 서브 퀘스트는 총 6개로 1장에 3개가 붙어 있었던 데에 비하면 난이도가 높은 편이었다. 6개의 서브 퀘스트를 완료하면 메인 5장의 보스인 곤충을 쓰러뜨려야 한다.

[메인] 5장. 이장님의 고민

[서브 1] 말벌 퇴치 (10/10)

[서브 2] 이장님은 귀뚜라미가 싫어 (15/15)

[서브 3] 이장님 밭 배추를 지켜라! 방아깨비 퇴치 (20/20)

[서브 4] 수면 부족 이장님, 밤마다 우는 매미 퇴치 (0/30)

[서브 5] 이장님 댁 앞 사마귀는 이장님을 좋아해 (0/35) - 연계 퀘스트

[서브 6] 어린 여치도 이장님을 좋아해 (0/10) - 연계 퀘스트

[코어] 내 자식들을 감히? 곤충계의 곤모님 갈색여치의 반란

그간 부지런히 한다고 했는데도 서브로 주어진 퀘스트만 3개가 남은 상황이었다. 이제 정식 오픈까지 2주 남짓 남았는데 이걸 다 깰 수 있을까. 말벌보다 귀뚜라미가 조금 더 강했고, 귀뚜라미보다 방아깨비가 더 강하게 느껴졌다. 이것도 아마 밸런스 조정이 들어간 거겠지? 5장 보스인 갈색여치한테 바로 도달하지 못하도록.

어휴, 도대체가 이장님은 뭐 하는 놈이기에 소똥에 벌레에. 이쯤 되면 귀농한 사람들이 떠나는 이유가 이장 때문이라고 해도 믿겠다.

[지금 로그인하셨죠?]

멀지 않은 곳에서 느껴지는 버그맨의 목소리에 귀가 움찔 떨렸다. 이 자식, 친구 목록에서 내 접속이 뜨나 안 뜨나 모니터링하고 있었나? 가만, 버그맨 목소리가 약간 백현동버그킬러 님이랑 비슷한 것 같네, 신기해라.

[버리 님?]

“아…, 네. 로그인했어요. 어디세요?”

재차 날 부르는 버그맨의 음성에 정신을 차렸다.

[잠깐 미정슈퍼 왔습니다. 곧 들어가요.]

버그맨의 ‘곧’은 5분이 채 되지 않았다. 빨리 해치우고 쉴 생각이었기에 귀환한 그를 이끌고 바로 이장 놈 저택 근처로 이동했다. 퀘스트 진행에 맞춰 필드에는 매미가 다수 포진해 있었다.

퀘스트 진행을 함께하기로 약속한 날부터 우리의 역할은 정해져 있었다. 퇴치는 나, 뒤에서 힐을 주거나 물약 조달은 버그맨. 꼭 전용 탱커가 된 기분이랄까.

[서브 4] 수면 부족 이장님, 밤마다 우는 매미 퇴치 (30/30)

[시스템][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30마리를 빠르게 퇴치하고 시스템 창을 보고서야 긴장했던 어깨가 반쯤 내려갔다. HP도 가득 채워져 있고, 레벨도 올랐는데 왜 이렇게 힘든 건지. 바로 오두막으로 돌아가 다음 낮 타임이 돌아올 때까지 쉬고 싶었다.

“버그맨 님, 사마귀는 내일 해도 될까요?”

“그러시죠.”

버그맨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바로 퇴치할 수 있도록 서브 5장의 컷 신을 확인하고 귀환하기로 했다.

서브 5장을 탭하자 암전된 듯 시야가 어둑하게 번졌다. 둥실둥실 떠오른 영상구에 이장이 보였다. 컷 신 영상에서 보이는 그의 낯빛은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이장]: (부들부들 떨며) 무려, 무려! 서른다섯 마리일세. (훌쩍, 소리를 낸다) 내 이 나이 먹고 사마귀 따위에게 고, 고, 고백…, (수치스러워 보인다) 부탁하네, 꼭 좀 잡아 주게나.

[시스템][서브 5] 이장님 댁 앞 사마귀는 이장님을 좋아해 (0/35) [이동]

시스템 창에 서브 5 정보가 떠올랐다.

이, 이, 이런 막장 게임을 보았나. 미치지 않고서야 처음 귀농 온 사람 부려 먹는 이장 놈이나 그런 이장이 좋다고 고백하는 사마귀나! 바로 필드로 이동을 할 수 있는 버튼이 보였지만, 이 이상 했다간 아무 생각 없던 나까지 벌레 포비아가 될 지경이라 냅다 닫기 버튼을 눌렀다.

“버리 님.”

밝아진 시야에 버그맨이 보였다. 걱정이 서린 푸른 눈동자가 날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네?”

“오늘도 잠깐 쉬었다 가시면.”

“그게….”

“벌꿀 술, 사 왔는데요.”

퀘스트 진행 전 미정슈퍼에서 벌꿀 술을 사 왔다고 그가 덧붙였다. 쉽사리 거절하지 못하고 눈만 굴리자 버그맨이 사례하고 싶다며 한마디 더 거들었다.

이건…, 고도의 전략인가. 오두막조차 가지 못하도록 나를 붙들어 놓으려는 심산인가. 게임에 접속해서 내 오두막보다 버그맨의 기와집을 더 자주 찾게 된 기분이 드는 건…….

결국 버그맨의 뒤를 따라 저택에 발을 들였다. 술상을 차려 온 그의 옆에 쭈뼛대며 다가가 앉았다.

“따라 드릴게요.”

술병을 단단히 막은 마개를 열어 그의 잔에 따라 주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구현을 꽤 잘해 놨단 말이야. 액체를 따르면 액체가 흐르는, 중력이 그대로 표현된 가상 현실이라니.

“잘 마시겠습니다, 버리 님.”

“제가 산 것도 아닌데요.”

작게 대꾸하다 묘한 기시감에 손을 멈칫했다. 어…? 이거 어디서…….

“그래도.”

“저도 잘 마실게요.”

나도 술잔을 받아 들고 입가로 가져갔다. 현실이 아니다 보니 맛도, 포만감도 느껴지진 않지만 행동을 통해 섭취할 수 있었다. 가령 인게임의 음식을 입가로 가져가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음식이 반으로 줄어들며 HP나 MP로 흡수되는 것이다. 현실에서의 오감과 게임의 오감은 다르지만 최대한 싱크를 맞추었기 때문에 크게 이질감이 느껴지진 않았다.

“그런데, 어제는 왜.”

나를 기다리다 다른 일을 했다며 아쉬움을 토로한 버그맨의 어조에서 투정이 느껴진다면 기분 탓인가. 모바일보다 더 시급해 보이는 VR 테스트를 두고 침략전 하고 왔다는 이야기는 차마 못 하겠네.

아이 씨, 자꾸 거짓말하면 안 되는데.

“…어제는 예능도 좀 보고 쉬느라고 못 들어왔어요.”

“아, <토킹어바웃유> 본방송이었죠.”

날 보는 푸른 눈동자가 일렁이는 것 같았다.

차라리 다른 핑계를 댈걸. 자꾸만 버그맨이 임원이라는 사실을 깜빡깜빡한다. 버그맨의 정확한 직책을 알진 못하지만 임원급이라는 건 확실한데, 그런 그가 테스터 신분인 나와 이렇게 나란히 앉아 술을 들며 게임이나 일상을 교환하는 일이 흔한 건 아니니까.

살살 눈치를 보다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후회하고 눈치를 봐서 뭐 하냐고. 이미 뱉은 말, 돌이킬 수도 없고.

“어땠습니까?”

버그맨이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네?”

“방송이요.”

“다락방… 이랑, 또….”

어제 방송이 어땠더라? 다짜고짜 어땠냐고 물으니까 뭐 생각이 나는 게 있어야지. 그리고 나는 침략전에 정신이 팔려서 편집된 방송은 거의 못 봤단 말이다. 애꿎은 술잔을 만지작대다 되는대로 입을 열었다.

“대, 대표님이 상대분 빨리 만나셨으면 좋겠어요!”

아직 짝이 없으시다고, 그러시더라고요. 웅얼웅얼 말을 덧붙이다 입을 꾹 다물었다. 오늘 아주 작정을 하고 산을 타는구나, 정예준. 언제 하산할래?

가짜 술이라 취한 것도 아닌데 머릿속이 어지러워지며 생각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나중에 진짜 찾아내는 거 아냐?

‘버리 본체 정예준, 모노크롬 아르바이트, 허용되지 않은 접속, 변명은 필요 없다, 해고 땅땅땅!’

안 돼! 화제를 돌리자! 아무 말 대잔치라도 각인이니 뭐니 하는 말보다는 낫겠지!

“사람도 많이! 많이 뽑으면 좋겠고요.”

클로징 때였나, 직원들이 고생해서 만들었다며. 이 정도 퀄리티면 당연히 오픈하고 서버 터질 텐데, 사람 더 뽑아야 운영도 수월하지 않겠어? 그래야 나한테도 기회라는 게 생길 거 아니냐.

“…사람?”

느닷없는 내 말에 버그맨이 되물었다.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눈매를 접어 보이자 버그맨이 내 쪽으로 완전히 몸을 돌려 앉았다. 가, 갑자기 왜 이래요?

“어느 본부 소속입니까. 짐작했겠지만 TO를 낼 정도는 되어서요, 제가.”

눈만 데굴거리다 침을 꿀꺽 삼켰다.

이것도 아냐? 각인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면 오늘은 그냥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하는 건가. 어쩐지 달아나고 싶어졌다. 은근한 시선에 얼굴에 열이 몰리는 기분이었다. 현실이었다면 홧홧해진 뺨이 티가 났을 것이다.

고개를 들어 훔쳐보듯 버그맨을 흘끔 살폈다. 잠길 듯 깊은 눈동자에 버리의 모습을 한 내가 비쳤다. 버그맨의 관심은 이미 내 소속에 확 쏠린 듯했다.

“VR 조직만 피로도가 높은 건 아닐 테니까, 편히 말해 보세요.”

편하게 하란다고 편해질 수 있겠냐고. 구시렁대며 다시 시선을 피했다.

“정말 궁금해서 그런데, 본부만이라도 알려 주면 좋겠습니다.”

“…….”

“VR 조직은 아니죠?”

버그맨은 VR 조직 내에서는 나와 비슷한 느낌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가 모아게임즈 내에서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날 리 없는 게 당연하다. VR에서 커스텀한 외모를 어떻게 현실에서 보겠는가. 머리 색도, 눈동자 색도 현실과 다르게 세팅했는데 알아보면 버그맨은 지금 회사를 다닐 게 아니라 점쟁이로 전직하셔야지.

“버리 님.”

누차 날 부른 버그맨이 거리를 좁혀 앉았다.

“그게, 어…….”

나는 슬그머니 잔을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부쩍 가까워진 거리에 절대 느껴질 리 없는 버그맨의 숨소리가 느껴지는 듯했다. 머리가 잘 돌지 않았다. 변명, 도망. 많지 않은 선택지 중 결국 고른 것은 줄행랑이었다.

시야 하단에 보이는 로그아웃 버튼을 탭하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종료 전, 버그맨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은 것 같았지만 일단은 자리를 피하는 게 우선이었다.

로그아웃 후 헤드셋을 벗어 던지다시피 내려 두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런 망할. 처음부터 직원 말고 테스터라고 해 둘걸. 아니다, 정해진 접속 시간이 있다고 했지. 하, 양치기 소년이 되면 이런 기분일까. 맨 처음 했던 거짓말이 돌고 돌아 연쇄 작용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다음에 만나면 대체 뭐라고 변명하지.

1. 보급형 콘솔임을 어필하여 크래시가 났다고 해 본다.

[버리]: 아하하, 제가 가진 VR이 좀 아파서요. (웃으며) 갑자기 꺼졌지 뭡니까, 선생님.

[버그맨]: 크래시가 났다고요? 로그 한번 까 볼까요?

[버리]: (다시 로그아웃)

2. 가상 현실에서 왜 자꾸 개인 정보를 물어보냐고 패기를 부려 본다.

[버리]: 왜 자꾸 게임에서 개인 정보를 물어보세요? 게임 매너 지키시죠?

[버그맨]: 로그 까기 전에 순순히 불어라.

[버리]: (구시렁대며) 로그 더럽게 좋아하네… (다시 로그아웃)

3. 진심으로 TO를 내 줄 줄 몰라 놀라서 꺼 버렸다.

[버리]: 아이구, 진심인 줄 몰랐어요. 감사는 한데, 그래도 좀….

[버그맨]: (말없이 주시)

[버리]: 노, 농담이고 정말 놀라서 껐습니다. 빨리 사마귀 잡으러 가시죠!

3번이 제일 무난해 보이는데…. 반은 진심이기도 하고. 이대로 잠적 타면 안 되겠지?

버그맨 스스로 자신이 직급이 있는 사람이고, TO를 낼 수 있는 능력은 된다 했으니 마음만 먹는다면 나를 찾아내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도 내게 직접 물어본 것은 나를 존중하는 태도가 드러난 것이기도 했다.

다음에 보면 그냥 솔직하게 말할까. 전송이 디렉터가 열어 줬다고.

아냐, 내 책임만이라면 밝혀도 오롯이 나 혼자 짊어지면 되지만, 링크를 알려 준 전송이가 난처해질 수 있었다. 임원이 디렉터보다는 높을 거 아냐. 그 정도 눈치는 나도 있다고.

버그맨한테 친구 요청하지 말걸. 내 업보다, 업보.

D-11

결국 나는 사흘간 게임에 접속하지 못했다. 생각해 둔 변명거리도 있고, 접속해서 버그맨과 부딪쳐 해결하면 되는데 그게 참 쉽지 않았다. 찝찝한 상태로 종료를 했기 때문에 내내 불안에 떨며 출퇴근할 수밖에 없었다. 퀭한 낯으로 손님이 없을 때마다 염불을 외듯 끙끙거리기만 했다. 가까이 다가오는 손님만 봐도 귀신을 본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기 일쑤였다.

도저히 못 견딜 만큼 불편하다면 여기서 관두어도 된다. 어차피 정직원도 아니고, 생활을 위한 아르바이트는 새로 구하면 된다. 게임도 중간에 하차하면 그만이었다.

계속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갈등하게 되는 건, 이러니저러니 해도 버그맨과 함께 게임 한 2주 동안 재미있었기 때문이겠지. 지스타에서 처음 RTF를 접했을 때처럼, 신선하고, 재미있고 계속 플레이해 보고 싶고.

오늘은 들어가야겠지? 버그맨은 나를 기다렸을까? 진행하던 메인은 그대로 멈춘 상태인 걸까?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억지로 멈추며 콘솔 전원 버튼을 누르고 헤드셋을 뒤집어썼다. 게임이 실행되는 동안 눈을 감고 있다 풀벌레 우는 BGM에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버그맨의 저택에서 강제로 종료를 했지만, 눈을 뜬 곳은 내 소유의 오두막이었다. 마당으로 걸어 내려온 나는 밖으로 나와 버그맨의 저택을 바라보며 친구 목록을 호출했다. 창 위에 뜬 닉네임 옆에 접속 중 표시가 떠 있었다.

[음성 대화]

머뭇거리다 버튼을 누르자 대화가 바로 수락되었다.

“저기, 버그맨 님?”

버그맨은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저택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는 눈살을 찌푸린 채 말을 고르는 것 같았다. 강제 종료 처리하고 평일 내내 접속하지 않은 내게 따지고 싶은 게 많은 눈치였다. 게임에서 한 약속이라 해도 약속은 약속. 푸른 눈동자에 서운함과 질책이 깃들었다 한숨과 함께 흩어졌다.

“오랜만이에요, 버그맨 님. RTF는 오늘도 날씨가 좋네요.”

어색함을 좀 풀어 보려 머쓱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캐릭터 기분에 따라 날씨도 바뀌면 좋겠네. 이러한 설정이 가능하다면 나는 천둥이나 번개로 설정해 두었을 것이다.

“농담이에요. 제가 TO 이야기에 놀라서, 예상은 했는데 정말 높은 분이실 줄 몰랐거든요.”

“그럼 화요일은요.”

“화요일은 바빴어요.”

“수요일은.”

“수요일도 바빴죠. 목요일도.”

냉큼 덧붙여 말하며 눈매를 가늘게 접었다.

“…그렇다고 칩시다.”

내가 내민 손을 맞잡아 준 그를 보며 환하게 웃음 지었다. 허술하긴 해도 내 변명을 믿어 주겠다는 거지? 버그맨은 저번처럼 내게 거리를 좁혀 다가왔다.

“소속은 더 안 물어보죠. 대신, 오픈 전까지는 매일 봤으면 하는데요.”

“네?”

“열흘 정도 남았는데 아직 서브잖습니까. 그리고 버리 님 메인도 밀려면 시간 없어요. 약속, 지켜주세요.”

버그맨은 잡은 내 손을 놓아주지 않고 대답을 재촉했다. 새파란 눈이 지척에서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너무 가까운 거 아닌가. 무미건조하게 대할 땐 언제고.

“…응?”

낮게 묻는 버그맨의 목소리에 가슴 한가운데에서 쿵, 하는 둔통이 느껴졌다. 늘 존대만 하던 그에게서 처음 듣는 반말이라 그런 것일까.

“사마귀 잡으러 가야죠.”

잡힌 손을 슬쩍 빼내며 버그맨의 저택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거기 아니고 이쪽.”

버그맨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사마귀가 모인 필드는 기와 방향이 아니라는 거였다. 눈치껏 뿌리친 손이 다시 잡혀 있었다.

“…계속 잡고 있어요?”

“또 로그아웃할까 봐.”

“아하.”

나 신뢰도가 0인 거구나.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렇게 된 거 전투할 때 빼고 쭉 잡고 있어 주마. 역으로 놔 달라고 할 때까지 계속 잡고 있어야지.

걸어가는 동안 버그맨은 내 소속에 대해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대신, 왜 이호연 대표가 빨리 짝을 만났으면 좋겠는지 물어 왔다. 회전문도 아니고 돌고 돌아 각인이라니. 사람이 참 집요하단 말이야. 속으로 툴툴대며 대답을 골랐다.

“전해 주려고.”

버그맨이 덧붙여 말했다. 그렇네, 임원이면 대표와도 가까울 테니 내 대답을 듣고 어느 정도 합리적인 답변이라면 전해 줄 생각인 것 같았다.

운명의 짝이라. 짝을 빨리 만났으면 한다는 말에 큰 의미를 둔 건 아니었다. 송출된 방송을 제대로 못 봤기 때문에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저 그 순간에, 그가 내 운명과 동명이라는 사실과 인터뷰가 떠올라 생각 없이 말했던 건데.

“…버리 님?”

“아, 음…, 그냥 잘되면 좋겠어서요. 주는 거 없이 미운 사람도 있지만 뭐든 잘됐으면 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대표면 이미 잘된 거 아닙니까.”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버그맨이 낮게 중얼거렸다. 대표니 돈도 잘 벌 테고,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부족함이 없을 테니까.

“제가 원래 사랑 예찬하거나 그런 사람은 아닌데요.”

멈춰 서서 그를 올려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버그맨에게 이 이상 나에 대해 알려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제 짝인 사람이랑 이름이 비슷해서, 오래도록 못 만났다고 하니까 마음이 갔나 봐요.”

가요. 이 정도 말했으면 된 거겠지. 버그맨의 손을 잡아당겨 걸음을 재촉했다.

“버리 님은 만났습니까.”

“저요?”

“네.”

“만났으면 불금에 버그맨 님이랑 이러고 있겠어요?”

피식 웃으며 답하자 버그맨도 희소하며 눈매를 기울였다.

텔지에 도착한 우리는 사마귀가 밀집한 필드로 한 번에 이동했다.

이장 놈 댁 앞 사마귀를 잡는 과정은 뭐랄까, 좀비 영화에서 인간 역이 아닌 좀비 역을 맡은 기분이었다. 왜 반대였냐면, 대체로 좀비 영화는 좀비가 인간을 향해 무자비한 살생을 하며 시작하니까. 아닌가, 좀비라면 이런 감정을 느낄 리 없지.

“버, 버리 님.”

사마귀의 안광을 마주한 버그맨이 내 이름을 부르며 손을 떨었다. 조금 전이랑 같은 사람 맞습니까?

“제 뒤로 오세요.”

쯧쯧, 그래픽에 이렇게 쫄아서야. 현실에서 저 덩치로 모기 한 마리 못 잡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니 이 양반을 어쩌면 좋을까 싶었다.

숨겨지는 사이즈는 아니지만 버그맨을 내 뒤에 숨기다시피 세우고 거대한 사마귀와 대적해 섰다. 나는 서둘러 인벤토리에서 무기를 꺼내 들었다.

[고급] 서릿발 장도리+6

그립을 여러 번 고쳐 쥐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버리, 버리 님.”

왜 자꾸 불러 대요. 지금 집중해야 한다고!

“…주, 죽였습니까?”

죽이긴 뭘 죽여요! 아직 시작도 안 했구만. 너무 정신이 없는 나머지 장도리 휘두르는 소리를 환청으로 들은 모양이다.

휘익- 퍽! 퍼억!

[CRITICAL!][347][빗맞음][280][420]

[서브 5] 이장님 댁 앞 사마귀는 이장님을 좋아해 (1/35)

사마귀가 도약을 준비하는 순간을 노려 먼저 장도리를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운 좋게 첫 타에 크리티컬이 떠서 피가 반으로 떨어진 게 다행이었다.

아니, 그런데 이거….

“버리 님, 죽인 거죠?”

“네, 한 마리는, 그런데 이거 비주얼이 좀.”

앞선 퀘스트 때도 좀 찝찝하긴 했는데, 사마귀는 찝찝함을 뛰어넘어 끔찍한 수준이었다. 100배쯤 커진 곤충이 나를 표적으로 삼아 죽이겠다고 덤비는데 살아남으려면 나도 맞서야 하는 것이다. 싫다고 도망가거나 또 로그아웃할 순 없으니까.

그나저나 아트 메인 담당자가 작업하면서 화가 많이 났던 게 아니고서야, 이게 컨펌이 되었다고? 랜더링하다 분노한 감정을 몬스터에 풀어낸 거지. 아트 수정 요청이 생길 때마다 크기가 조금 더 커지고, 더듬이나 눈이 강조된 거라면? 업무 스트레스의 결과물이 이런 거라면 사양하고 싶은데, 이 정도면 플레이하다 없던 무섬증도 생기겠다. 이게 무슨 귀농 시뮬레이션이야. 새로운 장르의 호러 시뮬레이션이지!

아니, 아니다. 모든 디자이너는 죄가 없다. 이건 지시를 내린 쪽의 문제다.

그때, 내 머리 위로 빨간 표식이 떠오르며 시야가 붉게 깜빡거렸다. 반경에 있는 사마귀들에게 일제히 타깃팅된 거였다. 가까이 있던 사마귀 한 마리가 장대한 앞가슴을 내밀며 괴성을 내질렀다. 필드에 선 사마귀들이 뒤따라 울기 시작했다.

포효한 사마귀가 공격 태세를 취했다. 반동을 주어 튀어 오른 사마귀는 곧장 나를 향해 거대한 팔을 휘둘렀다. 아이고, 정예준 죽는다! 버리 죽는다!

“으악!”

비명을 내지르며 사마귀의 공격을 피해 바닥을 나뒹굴었다. 손에 쥔 장도리를 휘두를 겨를도 없었다. 버그맨은 굳은 채 고장 난 카세트테이프처럼 내 닉네임만 애처롭게 되풀이해 부를 뿐이었다.

“-윽!”

사마귀의 팔이 내 허벅지를 깊게 할퀴었다. HP가 깎이며 다리 쪽 그래픽이 일렁거렸다.

“버리 님!”

한쪽 무릎이 꺾여 후들거리는 걸 보고 놀란 버그맨이 다급히 나를 불렀다.

“힐.”

[파티][Bugman 님이 힐을 사용하였습니다.]

[빗맞음!]

따스한 빛줄기가 버그맨의 손끝에서 번지다 뚝 멎었다. 힐이 빗맞을 수 있는 거였어?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터졌다. 필시 거리 때문일 것이다. 거기서 힐이 닿겠냐? 오줌도 그것보단 가까이에서 싸겠다!

광폭화에 휩싸인 사마귀가 한 번 더 튀어 오를 준비를 했다. 이름처럼 버벅거리는 버그맨을 살피다 다시 사마귀를 향해 장도리를 사선으로 크게 휘둘렀다.

[273][빗맞음][빗맞음][347][빗맞음][152]

조금 전처럼 크리티컬이 떠 주면 좋은데. 죽을 둥 살 둥 공격을 해도 결정타가 부족했다. 재빠르게 인벤토리를 열어 같은 강화 레벨이지만 명중이 높은 ‘지옥숲 괭이+6’를 꺼내 큰 동작으로 사마귀에게 일격을 가했다.

휙-! 퍽!

[CRITICAL!]

[서브 5] 이장님 댁 앞 사마귀는 이장님을 좋아해 (2/35)

[시스템] 사마귀 무리가 우두머리를 잃었습니다.

“하, 하아…….”

무릎을 짚고 숨을 헐떡거렸다. 광폭화했던 놈이 우두머리였어? 어쩐지, 너무 강하다 했다. 대장을 잃은 사마귀 무리가 우수수 흩어졌다. 이렇게 되면 다음은 쉽다. 흩어진 놈들을 하나씩 처치하면 될 터였다.

헤드셋을 끼고 신경 센서와 연결된 컨트롤러로 조작을 하는 것이지만 대적하며 긴장했던 모양인지 어깨가 결려 딱딱하게 굳은 것이 느껴졌다. 버리의 몸을 한 내가 바로 서지 못하고 있자 버그맨이 곁으로 다가왔다.

“힐.”

[파티][Bugman 님이 힐을 사용하였습니다.]

따스한 빛이 볕처럼 몸 위로 흩뿌려졌다. 지금 버리 몸이 문제가 아니라 본체 정예준이 문제라고요. 이 아저씨한테 말해서 뭘 알겠어. 헤드셋을 고쳐 쓰며 버리 컨트롤에 조금 더 집중했다.

“괜찮습니까. 나머지는 내일 할까요?”

“…지금 해야 돼요.”

진행을 멈추고 다시 접속했을 때 다른 우두머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오늘 내로 남은 서른세 마리를 잡아야 정신 건강에 이로울 터였다.

“힐, 그것만 제대로 해 주세요.”

“그게, 미, 미안합니다. 못 볼 광경이라서….”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버그맨을 노려봤다. 못 볼 광경?! 그럼 아까 그 힐은 눈을 감고 쓴 거라 이거야?

“그럼 제 눈은요!”

네 눈만 눈이냐? 내 눈은? 차마 뱉지 못한 말을 애써 삼키며 움켜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미안합니다.”

손을 뻗어 버그맨의 양 뺨을 쥐고 바짝 당겼다.

“사마귀 말고 딱 저만 보고, 저만 따라오세요. 제 HP만 보고 조금이라도 깎이면 바로 힐. 오키?”

끄덕끄덕하는 버그맨을 보고 다시 숨을 가다듬었다. 무섭다는 걸 어쩌겠어.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무서워한다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고. 한숨을 집어삼키며 발에 힘을 주었다.

필드 위를 뛰어다니며 장도리와 괭이를 번갈아 사용해 사마귀를 한 마리씩 처치해 나갔다.

서브 퀘스트를 마무리한 건 해가 질 무렵이었다. 사마귀부터는 코어에 가까워져서인지 보상이 두둑한 편에 속했다. 습득한 아이템을 배분하기 위해 인벤토리를 열었다.

[일반] 이장님에게 닿을 수 없던 사마귀 손 70개

[일반] 사마귀 더듬이 35개

[스킬북] 곤충의 가호 – 모든 직업(캐릭터 귀속)

이게 무슨 보상이냐. 나눠 가질 수도 없겠다.

눈가를 찡그린 나는 목록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사마귀 손이나 더듬이는 차치하고, 스킬북은 버그맨에게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는 스킬이었다. 벌레가 싫다는 사람한테 가호까지 내려 주면 퍽이나 좋아하겠다.

“배분은 어린 여치까지 하고 같이 정리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네.”

고생해서 사냥한 사마귀에 대한 보상을 나누는 일인데 버그맨은 좀 소극적으로 굴었다. 직접 잡은 게 아니어서 그런 건가 싶어 아예 인벤토리를 꺼 버렸다.

“버리 님, 벌꿀 술.”

쉬었다 가라는 의미다.

“네에, 네, 그럼 내일 어린 여치 하는 거죠?”

내 질문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근데, 퀘스트 순서가 조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어감상 어린 여치가 사마귀보다 귀엽… 지는 않겠지만 덜 비주얼 쇼크일 것 같은데. 내일 봐서 버그맨 의견은 어떤지 물어봐야겠네.

왔던 길을 되돌아 버그맨의 저택으로 향했다. 그의 게임 속 저택의 인테리어는 많은 부분이 달라져 있었다. 평수도 넓게 개축한 듯 예전에는 보조 대문 너머 바로 대청이 보였는데, 지금은 중간에 새로 중문이 추가돼 있었다. 사흘간 나를 기다리며 한 일은 현질뿐이었던 건가.

중문을 지나자 대청을 마주 본 인공 정원의 고즈넉한 풍경이 보였다. 이거 진짜 한옥 스테이일세. 혀를 내두르며 그를 따라 마루 위로 올라섰다.

금세 술상에 벌꿀 술과 기정떡, 약과를 내온 버그맨이 내 옆에 앉았다. 풀벌레 소리에 벌꿀 술이라니. 운치는 있네.

“…버리 님은 운명을 얼마나 믿습니까.”

나를 흘끔흘끔 내려다보던 버그맨이 입을 열었다. 도를 믿으십니까, 같은 소리에 멀뚱멀뚱 버그맨을 쳐다보았다. 푸른 눈동자가 올곧게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글쎄요, 딱 남들만큼?”

각인된 상대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스물여섯 해를 살아오며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스쳤지만, 그중 내 운명이 없다고 생각하면 씁쓸한 것도 사실이었다. 운명의 상대니 짝이니, 겉으로는 혀를 내둘러도 내심 기다리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내 사랑이 조금 늦는 거라고. 조금 더 서로의 삶을 살다, 적당한 때에 적당한 운명으로 만나게 될 것이라고. 그때까지는.

“저도 아직 못 만났습니다.”

“만날 수 있어요.”

“저도 빨리 만났으면 좋겠습니까?”

“음, 네.”

“이호연 대표처럼 짝과 동명도 아닌데?”

“어쨌든 우리가 만났잖아요.”

버그맨의 첫인상과 별개로, 우리는 지금 이렇게 나란히 앉아 게임을 즐기고 있다. 현실에서 어떤 이름과 어떤 얼굴을 하고 있든,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버그맨이었다. 짧은 기간이라도 그와 함께한 시간이 있으니, 내가 그의 단편적 고민을 응원할 수는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와 친분을 쌓고 서로를 알아간다는 건 그 사람의 삶을 알아간다는 것과 같으니까.

“다정하네요. 귀엽고.”

설핏 웃음을 머금은 버그맨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다정하다는 말은 처음 들어 봤다.

“빈말이라도 감사해요. 그런데, 대표님껜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왜요.”

“창피해서요. 안 그래도 인터뷰 이후 많이 들으신 것 같은데.”

“…뭐, 그건 그렇죠.”

빈 잔에 벌꿀 술을 채워 홀짝이는 내 손을 버그맨이 붙잡아 내렸다.

“한 가지 시험해 보고 싶은 게 있는데.”

“네…?”

“이번엔 로그아웃하지 마세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점점 가까워지는 거리에 뒷목이 뻣뻣해졌다. 입술이 닿은 건 그다음이었다. 분명 체온이 느껴질 리 없는데,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두 눈을 꾹 감고 한참을 입을 맞대고 있었다. 혀로 얽어 내는 키스가 아닌데도 무언가 입 안으로, 가슴속으로 들어온 것만 같았다.

쪽 소리가 나고서야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뒤로 한 뼘 물러난 버그맨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같이 있으면 좋아서.”

사흘 동안 날 기다리며 자신의 마음을 확신했다고 했다. 하루의 끝이 이렇게 기다려지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고. 실제 현실의 나를 만나 보고 싶었다는 버그맨은 내가 이미 소속을 밝히기를 거부했기에 좀 더 시간을 가져 보려 한다고 덧붙였다.

“이미 저질러 놓고 하는 말이라 못 믿겠는 건 알겠는데, 원래 이런 사람은 아닙니다.”

“제, 제 어디가 좋은데요.”

고작 2주 남짓인데, 내 어디가 좋았던 걸까? 막말로 우리는 시각 데이터로 출력된 가상의 존재들 아닌가. 그런데 왜 나는 버그맨이 입을 맞췄을 때 거부감이 들지 않았을까. 이젠 하다 하다 가상의 데이터에 마음이 기울게 된 것인가.

“귀엽고, 취향이라.”

가상 현실이지만 잘 잡기도 하고. 덧붙인 말에 헛웃음이 터졌다.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현실에서도 잘 잡네요. 그보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데 내가 귀엽고 취향인 건 어떻게 알고?

“부탁 하나만 하죠.”

버그맨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뭘 하든 로그아웃, 잠수는 타지 맙시다.”

집요한 눈길이 마치 나를 뚫고 지나는 것만 같았다. 버그맨을 밀어 내야 하는 걸 머리로는 인지하고 있었지만 밀어 낼 수 없었다. 그와의 입맞춤이 어떤 발화점이라도 된 것 같았다.

“이 이상도, 싫으면 이야기하고요.”

버그맨이 턱을 비스듬히 기울여 다시 입을 맞춰 왔다. 풀벌레 울음이 귓가에 선연했다. 매미가 우는 소리가 화음으로 얹어졌다.

왜 가슴이 두근거리는지 모르겠다. 분명 버그맨은 나의 운명도 아니고, 첫인상이 좋았던 것도 아닌데.

나는 느껴지지 않는 그의 입술을 느껴 보려 두 눈을 천천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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