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21/25)

지켜주세요

[Intro or Outro]

D. Reincarnation

Virtual Reality, 가상 현실.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공간.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정말 가상일 뿐인 걸까?

혹자는 가상 현실의 경험 또한 간접 경험이 아닌 직접 경험으로 체득되는 것이라 말했다. 다중 우주론의 어떤 세계처럼, 공존하는 모든 가능성이 가상 현실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얼굴, 같은 이름이 아닌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과 이름으로 다시 만난다 하더라도 반드시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

무수한 충돌과 생성의 반복 속에서 당신을 사랑했던 경험이 내 안에 그대로 남아 있을 테니까.

[거시 세계(Macroscopic world)]

D-10210

이 세상에는 운명이 있다. 자신의 운명을 몸 어딘가에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각인이라 칭했고, 필연과도 가까운 운명론적 사랑을 기대하며 살아갔다.

내가 세상 밖으로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부모님은 포대에 싸인 쭈글쭈글하고 붉은 살덩이를 이리저리 뒤집으며 각인된 이름부터 찾아보셨다.

“이거 맞지?”

하필 위치가 이런 곳이람. 온몸을 구석구석 살펴도 보이지 않아 각인이 없는 건가 싶었는데, 마지막으로 살펴본 곳에 희미하게 새겨진 각인이 보였다고. 검지 한 마디도 채 되지 않는 자그마한 음경, 고환에 보일 듯 말 듯 작게 새겨진 이름을 보며 아빠는 너털웃음을 지었다고 말했다.

“이, 이… 호? 뒤는 잘 안 보여.”

뭐야, 이게. 이름이야, 주름이야. 눈매를 가느스름하게 뜬 아빠가 투덜거렸다.

“그래도 있는 게 어디야.”

“그러게.”

정말 다행이야. 나를 꼭 끌어안은 엄마가 동글동글 포도알 같은 발가락에 코끝을 부비며 속삭였다.

부모님은 여러 차례 시도 후 어렵사리 나를 가졌다. 이 세상의 감동이라며 지어 준 태명 ‘감동이’로 10개월을 꼬박 엄마 배 속에 있는 동안, 나는 내 운명이라는 이름과 함께 자란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스운 경험이다. 정예준이라는 이름보다 우선이 된 이름이 따로 있었던 셈이니까.

신기한 일이지 않은가. 내 이름이 지어지기도 전에 누군가의 표식을 몸에 새긴 채 난다는 사실이.

“둘 다 이름이 동글동글한 것 같아.”

“그러게.”

동글동글한 어감. 부드럽고 유순한 곡선으로 가득 채워진 이름.

부모님은 일면식도 없는 아들의 운명에게 막연한 애정을 느끼는 듯했다.

“사랑해, 아들.”

다른 건 필요치 않으니, 건강하게만 자라길 바라는 마음으로 부모님은 내 작은 손을 꼭 쥐었다고 한다(중학생이 될 즈음부터는 커서 밥벌이만 하라는 타박으로 바뀌었지만).

D-1414

과학 기술은 지난 수년간 인간의 삶을 다방면으로 바꾸어 놓았다. 의료 시스템은 물론이거니와 수소 차와 자율 주행 자동차가 발전해 AI 안전망 내 무면허 운전이 허가되었고, 양자 암호 통신의 새로운 기술이 발견돼 서울에서 부산까지 게이트를 통해 물체 이동이 가능해졌다. 비현실에 가까운 일들이 현실에서도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과학의 발전은 발전이었고,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발전한 기술을 민간인이 이용하기엔 막대한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상용화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구구절절 설명했지만, 쉽게 말하면 평범한 서민이 최첨단 과학 기술의 전신인 순간 이동 기술을 이용하려면 말년에나 가능하다는 뜻이다.

여하튼, 내 전공도 이러한 시대 흐름을 피할 순 없었지만, 이공 계열이나 다른 전공에 비하면 걸음이 느린 편에 속했다. 미디어 아트와 과학 기술을 접목한 설치 기법을 전시에 활용하더라도 기조 자체는 느린 항해를 닮아 있었으니까.

나는 캠퍼스 부지 벤치에 앉아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량처럼 있었다. 벤치 바로 옆에 서 있는 나무 덕에 볕이 들다 그늘이 드리우고, 다시 볕이 들었다. 따사로운 볕에 눈을 감고, 따끔따끔한 감각이 사그라지면 눈을 떠 뭉글뭉글 무리 지어 나아가는 구름을 헤아렸다.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이렇게 한량처럼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원하게 트인 산책로 너머에서 신경질적인 발소리가 들려왔다. 점차 가까워지는 소리 위에 씨근대는 호흡이 더해졌다. 나른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려 내 앞에 우뚝 멈춰 선 인영을 보기 위해 턱을 당겼다.

“퇴물 새끼가, 씨발.”

사납게 욕설을 내뱉는 강준성의 얼굴은 잔뜩 상기돼 있었다.

“그러게 가지 말라니까.”

축 늘어뜨린 상체를 바로 세워 준성을 마주 보았다. 강준성은 중간 과제에 대한 평가를 정정하기 위해 교수의 연구실을 찾았으나 결국 원하는 점수를 받아 오지 못한 듯했다.

“평가를, 씹, 됐다. 말해 뭐 하냐. 내 기분만 잡치지.”

한숨을 푹 내쉰 강준성이 주먹을 움켜쥐고 두둑 소리를 냈다.

박교진 주임 교수의 평가는 이미 학과 내에 악명이 날 대로 나 있었다. 입학하자마자 선배들로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으니까.

예술에 평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던 그는 모든 예술에 100점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름만 대면 알 법한 화가들의 작품도 100점은 아니라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은 99점부터 시작되며, 수작이라는 작품들도 99점을 가져가지 못하기 때문에 고작 학생의 작품에는 98점도 후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인데 왜 본인 작품이 99점인지는 모르겠다만.

수석이 98점을 가져가고 차석이 97점을 가져가면, 남은 인원은 원치 않게 하향 평준화된 점수를 나눠 가져야 하는 것이다.

“나처럼 걍 포기해.”

처음에야 나도 따지고 들긴 했다. 비싼 재료로 시간을 들여 나름대로 최선의 작품을 제출해도 B+, 영감님 조우 실패로 무난한 작품을 제출하면 C나 C+ 따위가 성적표에 찍혀 있었다.

이렇게 되면 내 잘못이 아니라 교수 잘못으로 합리화할 수밖에 없다. 내 실력도 실력이지만, 사이코패스인 박교진 교수는 상종하지 않고 피하는 거라고. 게다가 재수강하기도 찝찝한 학점이라 다른 과목에 열과 성을 다할 수밖에. 어차피 전공과목 하나 정도 성적이 썩 좋지 않더라도 졸업을 못 하거나 취업을 못 하진 않을 것이다.

“그보다, 생각해 봤어?”

“응? 아아, 지스타?”

되묻는 준성을 향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부산에서 열리는 국내 최대 규모의 게임 전시 지스타가 코앞으로 다가온 참이었다. 작년까지는 계속 타이밍이 맞지 않는 바람에 아쉬움이 컸었다. 인터넷 뉴스에서만 결과를 접했기 때문에 올해만큼은 꼭 가 보리라 다짐하며 준성을 꼬시는 중이었다.

“너 진짜 게임으로 틀 거야?”

강준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몇 번을 말하게 하냐. 지겹다는 표정으로 강준성을 흘겼다. 시각디자인 졸업 후 나아갈 방향은 여러 가지가 있다. 디자인이라도 순수 미술을 바탕으로 작품 활동을 해도 되고, 대학원 진학을 하거나 사학으로 틀어 교편에 서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3학년을 앞두고 진로를 고민하는 선배들과 동기들이 많아졌지만, 내 선택은 게임 직군이었다.

처음부터 게임 직군이나 그래픽으로 빠진다고 했다면 모두가 그러려니 했겠지만, 조용히 작품에 전념하며 단체전에 간간이 이름을 올리던 내가 느닷없이 진로를 틀어 버리니 지도 교수는 물론 조교들도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내 선택에 번복은 없었다. 이제 와 이런 결정을 한 내가 불효자 같지만 어쩔 수 없다. 천재성이 돋보였다면 중학생 때 소질을 보일 게 아니라 더 어릴 때 두드러졌겠지.

매년 전공과마다 난다 긴다 하는 천재들이 하나쯤은 있었다. 1학년부터 4학년까지 치면 최소 4명의 괴물들과 같은 학기를 보내야 하는 것이다. 차라리 군대에 가 있는 동안 이들이 졸업을 했다면 참 좋은데, 괴물님들은 정상적으로 학교를 졸업하지도 않는다. 자유분방한 예술의 혼을 가진 이들이기 때문에 느닷없이 휴학하여 구천을 떠돌거나 교환 학생이니, 부모 인맥의 수혜로 어느 날 천상계에 올라가 버리곤 했다.

후자는 애초에 경쟁할 의지조차 들지 않아 배제하면 되지만, 전자는 다르다. 나는 불행히도 10명 가까이 되는 괴물들과 3학년을 보내고 있었다. 야속하게도 내가 군 복무 후 복학할 시기에 그들도 복학을 했다. 플러스알파로 우후죽순 늘어난 괴물들이 본인들 의사와 무관하게 내 학점에 치명적인 대미지를 입히는 것이다.

내 운이 안 좋은 걸 누굴 탓하리.

순수 미술을 한 기간보다 포기를 고민한 날이 짧았지만, 이 또한 운명이겠거니 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원래 인생은 복불복, 될놈될, 살놈살, 죽놈죽 아니던가. 각인이라는 운명도 있는데, 이 또한 신이라는 존재의 계획일지도 몰랐다.

‘야, 미안하다. 네놈 팔자가 원래는 창작 계열이 아닌데 내가 실수 좀 했다. 그러니까 순수 미술 그만하면 안 되겠니? 적당히 다리라도 걸치게 해 줄게’라고.

우스운 상상이라 해도 수긍하고 받아들이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렇다고 배드 엔딩이냐, 그건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모두가 이렇게 살아간다. 현실을 조금이라도 어릴 때 깨우치는 편이 더 낫지 않은가. 꿈에 젖어 이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할 때는 지났으니까.

“혹시 알아? 갔다가 괜찮은 부스 보고 가고 싶은 회사 리스트업해 볼 수 있을지.”

미술을 하지 못한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아트 직군이라면 좋아하는 게임 관련 일을 하면서 미술에 다리라도 걸치고 있는 것이니 된 거 아니겠어?

“잠만, 윤재한테 물어보고 되면 같이 가자.”

“권윤재?”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되묻자 강준성이 허둥대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권윤재도 게임 좋아했나?”

조소과 권윤재가 게임에 관심을 두고 있었던가. 멍하니 권윤재의 얼굴을 떠올렸다. 피부가 희어서인지 전체적으로 희끄무레한 인상을 주는 권윤재는 평소 책이나 읽고, 작품 궁리나 하는 은둔 타입이다.

생김으로 모든 걸 판단할 수는 없지만, 인상에 비해 그의 손끝에서 나오는 작품들은 전부 굵직한 편이었다. 천재 과에 속하는 권윤재는 재학 중임에도 이미 큰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 경험도 있어 조소과 교수들도 눈여겨보고 있다지.

순수 미술 지향인 권윤재와 게임을 나란히 두어 보았다. 드라이 와인과 된장찌개를 같이 먹는 것 같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기분이 드는 건 나뿐인 걸까. 물론 취향이니 꼭 먹지 말란 법은 없지만.

“그, 걔, 걔 진짜 겜 덕후야. 니가 몰라서 그래.”

당황한 강준성이 나와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버벅거렸다.

“흐음, 그럼 부산행 티켓 세 명 끊는다?”

“메신저에 금액 올려 줘.”

“그래, 밥이나 먹으러 가자.”

기지개를 켜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하게 불어온 바람에 붉게 물든 단풍이 첫눈처럼 하나둘 떨어졌다. 떨어지는 단풍은 수직을 향하고, 나는 수평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중력과 시공간이 묘하게 어그러지는 이 순간이 싫지 않았다.

**

부산에 도착하고 이틀째 되던 날, 나는 두 사람과 함께 벡스코로 향했다.

이벤트 광장에는 유명 개발사의 게임 캐릭터가 스마트 필름에 영사되며 살아 있는 것처럼 생동감 있게 뛰어놀았고, 코스튬 플레이어와 함께 사진을 찍는 관람객으로 북새통을 이뤘다.

인산인해인 전시관을 질린 눈으로 훑다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물 반, 고기 반일세.”

“그러게, 부스 다섯 개만 둘러봐도 많이 본 거겠다.”

내 투덜거림에 강준성이 옆에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렇게 되면 엑기스만 뽑아서 보고 시간 여유가 조금이라도 되기를 바라야겠는데?

강준성과 권윤재를 번갈아 보다 쭈뼛대며 주변을 살피는 권윤재와 눈이 딱 마주쳤다. 어제 부산으로 내려오는 기차 안에서도 그렇고, 도착해서도 그렇고 평소에 무슨 게임을 하는지 물어보지 못한 것 같았다. 흐음, 아무리 생각해도 게임을 막 좋아하는 것 같진 않은데. 강준성이 억지로 데려온 거 아냐?

“왜, 왜?”

물끄러미 쳐다보는 내 시선에 외려 강준성이 당황했다.

“아냐, 아무것도. 시간 없으니까 일단 들어가자.”

행사장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시간만 끄는 것보다 들어가서 어딜 둘러볼지 정하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관람객용 목걸이를 각자 걸고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N소프트 부스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입구에서부터 느꼈지만, 세 사람이 붙어서 이 부스, 저 부스 둘러보기엔 복도도 좁을뿐더러 서로를 기다리느라 소모될 시간이 상당할 것 같았다.

“셋이 같이 움직이지 말고 각자 둘러보다가 매표소 앞에서 볼까?”

“그럴까?”

내 제안에 강준성이 반색했다. 뭐야, 따로 보자니까 왜 이렇게 좋아하는 것 같지.

“응, 한 시간 정도 있다가 입구에서.”

강준성을 슬쩍 흘기곤 맨 끝 부스를 향해 걸어갔다. 나는 끝에서부터 돌며 거의 모든 부스의 브로슈어를 가방에 챙겨 넣었다. 대기업 부스 대부분은 스킵 했는데, 큰 회사의 게임들은 둘러보면 좋지만 규모가 큰 만큼 어디에서나 정보를 얻기도 쉬웠다. 좋게 말하면 흥행 보증 수표나 다름없고, 안 좋게 말하면 뻔하달까.

정해진 시간 내에서 둘러보려면 인디 게임 개발사나 중형 스튜디오 위주로 보는 게 나중 커리어를 위해 좋을 것 같았다. 졸업 후 바로 대기업에 준하는 게임 회사에 다닐 수 있다는 가정과 그렇지 못하리라는 가정, 두 가지 케이스를 전부 고려해야 실패를 하더라도 심리적인 완충이 될 테니까.

소규모 팀과 스튜디오 부스가 즐비한 구간으로 넘어오니 바글대던 인파가 조금은 뜸해졌다.

“선배, 인디 게임이 무슨 광고입니까.”

딱딱한 말투를 흉내 낸 말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쏭이, 인디는 광고하면 안 된다는 법이 있습니까.”

남자가 여자와 비슷한 말투로 답했다.

“그런 법은 없지만…,”

“IT인이라면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죠, 휴먼.”

[RTF-Return To the Farm]

[다락방스튜디오]

아무리 소규모 개발사 네이밍이 다양하다 해도 다락방이라니. 귀여우면서도 친근한 작명 센스에 속웃음을 짓고는 부스 가까이 한 발 다가섰다.

“편혀업? 나 안 편협하거든요? 인디, 의미 몰라요? 소규모 예산으로 활동하는!”

“무슨 말이야, 송이송이 송송이야. 우리 소규모 맞아. 잡스가 창고에서 머리 쥐어 싸매고 만든 것처럼 우리도 소소하게 다락방에서.”

“그 소규모가 인력이냐고요….”

“돈은 내가, 시나리오는 네가, 개발은 이호연이. 소규모 맞는데에.”

따져 묻는 여자와 상반된 분위기의 남자가 싱글싱글 답했다.

“호연 선배, 선배라도 말렸어야죠. 천만 원이 껌값도 아니고. 그 돈이면 이펙트랑 사운드에 더 할당할 수 있었을 거라고요. 그리고 어제만 반짝 사람 많았지 이게 뭐예요. 사람이 몰려도 문제, 안 몰려도 문제라고요. 처음부터 참가에 의의를 두자고…….”

잠깐, 호연? 세 사람의 대화를 홀린 듯 듣고 있던 나는 호연이라는 이름에 움찔 반응했다. 운명에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살긴 했으나, 그것이 자신의 몸에 각인된 이름에도 아무 감정이 안 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나는 확실하게 내 각인 위치를 알고 있었고, 운명의 상대 이름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 이름을 중성적으로 보라면 볼 순 있겠지만, 남성에 가까운 이름이긴 하니까. 이희연이나 이효연이었으면 남자의 이름을 듣고 이렇게까지 반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느 날 나타난 제3세계의 존재 이름이 이호연이라고 하더라도 반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여튼, 일찌감치 정체성에 대한 확립을 마쳐서인지 상대의 성별이 같을 수도 있다는 것은 내게 크게 상관없는 문제였다.

“냅 둬. 물주님이 광고 세게 때리고 싶다는데.”

호연이라 불린 남자는 가만 듣고 있다 시큰둥하게 대꾸하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래! 시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는 말도 있잖아? 그걸 위한 초석인 셈이지.”

남자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른 스튜디오는 서버 비용도 십시일반 모아 충당하는데, 우리 프로젝트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으니 얼마나 좋으냐며 크게 웃음 지었다.

“그만, 그만하고, 둘이 밥이나 먹고 와.”

“선배는요?”

“이따 따로 먹든 할게.”

실랑이를 벌이던 둘을 부스 밖으로 밀어 낸 남자가 부스에 설치한 공기계의 배터리 케이블을 살폈다. 주춤대며 가까이 다가가자 기척을 알아차린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한 발 멀리서 지켜보았을 때보다 훨씬 큰 덩치와 무덤덤한 표정에서 풍기는 냉소적인 분위기에 선뜻 더 다가서지 못하고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어서 오세요.”

쭈뼛대며 부스에 들어선 내게 형식적으로 인사한 그가 관성적인 몸짓으로 테이블 위에서 브로슈어와 리플릿을 한 부씩 집어 건네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하며 공기계가 비치된 좌석에 앉자 남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해 보시게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럼 해 보려고 앉았지 여기 왜 앉았겠습니까. 인디 게임 부스에서 플레이를 하는 경우가 흔치는 않지만, 남자의 이름과 더불어 게임 자체에 흥미가 인 것도 사실이었다.

“오픈 베타 버전이에요.”

덧붙여진 말에 왜 그가 묘한 표정을 지었는지 알 것 같았다. 남자 입장에선 출시된 게임도 아니고 출시 예정작인 오픈 베타 버전의 게임을 해 보겠다는 내가 신기할 법도 했다. 작은 부스들은 홍보물 배부만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니까. 그러고 보니 조금 전 부스에서 여자가 광고에 대해 말했었지.

완성작도 아닌 게임에 사람이 몰려도 문제, 안 몰려도 문제라고.

한참 나를 내려다보던 남자가 몸을 돌려 작업대 안쪽에서 음료수를 꺼내 왔다. 음료를 건네받은 내게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해 보시고 어떤지 말씀해 주세요.”

고개를 끄덕이며 공기계를 양손에 움켜잡았다.

게임 아이콘을 탭해 인게임으로 진입하자 제작사 명과 게임 타이틀이 화면에 떠올랐다.

[다락방스튜디오]

[RTF-Return To the Farm-]

[화면을 터치해 주세요]

화면을 터치하라는 안내에 따라 탭하자 화려한 색채와 아기자기한 픽셀 아트로 표현된 시네마틱이 재생되었다. 처음엔 시골 경관의 단편을 보여 주었다가, 화면이 전환되며 마천루가 즐비한 회색 도시를 보여 주었다. 캐릭터가 울먹이며 다른 캐릭터를 붙드는 애니메이션은 꼭 해외 제작사에서 만든 영화 같았다.

“농장 시뮬레이션인가 봐요.”

내 옆에 서서 그림자를 드리운 남자에게 물었다.

“네, 정확히는 귀농.”

“아하.”

“한 번 더 탭하면 계정을 만들 수 있습니다.”

남자의 설명에 따라 계정을 만들고 캐릭터 선택 화면에 진입했다. 로그인 전 재생된 애니메이션에 보였던 두 캐릭터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한쪽은 IT 귀농인으로, 주식과 코인으로 빚을 졌단다. 다른 한쪽은 대지주의 상속인으로 IT업에 대한 기대로 상경했다가 야근과 철야의 빨간 맛을 보고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다고.

옆에서 최선을 다해 부연하는 남자는 사람 대하는 일이 영 서툴러 보였다. 고저 없고 뚝뚝 끊기는 말투만 어떻게 하면 좋을 텐데, 이걸 이렇게 노잼으로 설명한단 말이야?

내 떨떠름한 반응에 남자는 잇던 말을 멈추고 화제를 돌렸다. 정식 출시 때는 서버를 확장할 계획이지만, 지금은 단일 서버이고 캐릭터도 IT 귀농인과 상속인 중에서만 선택이 가능하다고.

“저는 IT 귀농인으로 할래요.”

“닉네임은….”

캐릭터를 고르고 닉네임 설정 창에서 잠시 고민을 했다. 귀농, 시골, 흠. 역시 시골 하면 벌레 아니겠어? 에프킬라 같은 건 유치하기도 하고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 보면 창피할 테니까…, 음, 버그킬러로 할까.

[버그킬러]

설정을 완료한 내가 눈을 들어 남자를 올려다보자 그는 어쩐지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상한가요?”

“아, 아닙니다. 그럼 다음으로….”

1장으로 진입하기 전 한 번 더 컷 신 애니메이션이 재생되고, 곧 시골에 무사 안착한 버그킬러 캐릭터가 노인 행정 복지 센터 앞에 서 있는 화면이 떠올랐다.

[시스템] 여왕벌이 벌집에 상주를 시작합니다.

[시스템] 아기 꿀벌 세 마리가 태어났어요!

[시스템] 꿀벌이 세상을 구한다!

꿀벌? 시스템 창에 뜬 알림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무슨 의미예요?”

“꿀벌이 사라지면 지구가 멸망하니까요.”

진지하게 말하는 그를 멀뚱멀뚱 쳐다보다 시선을 내려 UI 좌측을 바라보았다. 육각으로 표현된 꿀통 아이콘에 숫자 3이 적혀 있었다. 하긴, 아인슈타인도 꿀벌이 지구상에서 사라지면 인류는 4년을 채 버티지 못할 거라고 했으니까. 은근히 사실적인데?

꿀벌 아이콘과 함께 좌측에 월드맵과 마을 귀환 숏컷 등 편의 기능이 제공돼 있고, 우측에는 인벤토리와 퀘스트, 상점, 제작 아이콘이 작게 표시돼 있었다.

“다른 건 시중 오픈한 게임이랑 비슷한 구조고, 재료를 모아 농기구를 제작할 수도 있습니다.”

곡괭이나 삽, 호미도 만들 수 있고, 레벨이 올라가고 생산력에 따라 트랙터나 포클레인도 제작이 가능하다고. 지금은 트랙터나 포클레인이 제작 가능한 아이템으로 구분돼 있지만, 탑승 펫 시스템, 그러니까 탈 것으로 구분할지 논의 중이라고 덧붙였다.

게임 진입 후 짧게나마 플레이해 본 소감은 솔직히 신선하고 좋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직업까진 선택해 보지 못했지만, 농장 귀농 후 즐길 콘텐츠가 다양했다. 게임 자체가 어렵지도 않아 라이트 유저도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20분 남짓,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겼다. 게임은 확실히 재미있었다.

“…어떠셨는지.”

“재밌어요. 빈말 아니고 진짜로요. 농기구 만들어서 무기처럼 쓰는 것도 그렇고, 꿀벌도 그렇고, 신선하고 좋아요.”

농장 시뮬레이션이지만 여러모로 시스템 확장의 여지가 있어 보였다. 두 눈을 빛내는 나를 본 남자가 멋쩍게 제 뒷목을 매만졌다.

남자가 다시 작업대로 갔다가 내 앞으로 왔다. 손에는 클리어 파일이 들려 있었다.

“테스터 방명록 같은 건데, 적어 주시면 정식 출시 때 메일 드리겠습니다.”

테스트를 해 본 사람들에게 권하는 모양이었다. 앞서 다녀간 사람들의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나는 그에게서 파일과 펜을 받아 공란에 이름과 이메일을 적기 시작했다. 1원도 안 되는 개인 정보인데, 이거 하나 적는 게 뭐 어렵다고.

점예준.

받치고 쓰지 않아 성이 오타가 났다. 점이 뭐야, 점이. 점씨가 세상에 어디 있냐고. 네모 위를 덧그리니 점점 동글동글해졌지만 미음도, 동그라미도 아니게 된 것 같았다.

“새로 쓰면 안 되죠?”

“네?”

“아, 아니에요.”

창피해져 허둥대며 파일과 펜을 전달했다. 이름 잘못 썼다고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이메일은 틀리지 않게 썼으니까 발송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파일을 열어 내 이름과 연락처를 확인한 남자가 입매를 달싹였다. 무언가 말하려던 입이 굳게 다물렸다 벌어졌다.

“브로슈어에 큐알 코드도 있습니다.”

“집 가서 또 해 볼게요.”

그는 브로슈어에 접속 가능한 코드가 인쇄되어 있으니 플레이해 보고, 괜찮다면 베타 테스트 완료 후 설문에 참여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아, 전체적으로 텍스트가 작진 않죠?”

남자가 물으며 내 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가까워진 숨결에 지르르한 감각이 등허리를 타고 승모에 멎었다. 얼굴과 목에 열이 몰려 어딘가에 비춰 보지 않아도 상기되어 있을 뺨이 느껴졌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나를 내려다본 그가 뒤로 한 발 물러났다.

“너무 가까웠네요. 죄송합니다.”

“아, 아니에요. 그보다, 텍스트 안 작아요. 잘 보여요.”

공기계를 내려 두고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잰걸음을 놀리며 부스를 벗어나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다락방스튜디오]

[RTF-Return To the Farm-]

“다락방.”

작게 중얼거리며 서울로 돌아가면 게임을 더 해 보리라 다짐했다.

D-1256

진로를 틀고 난 뒤 남은 학교생활은 비교적 단순해졌다. 남는 시간에 돈이나 벌 겸 집 근처 입시 미술 학원에서 학생들 소묘를 봐 주는 시간제 강사로 일했는데, 제법 벌이가 쏠쏠했다.

미술 학원이 입주한 상가 구조는 단순했다. 이십 년은 족히 넘은 낡은 건물 1층에 편의점과 분식집이 있었고, 2층부터 3층까지는 각 진료과의 1차 병원과 운동 시설, 4층부터 5층에 내가 일하는 입시 미술 학원이 입주해 있었다. 그 안에서도 나는 주로 5층, 저학년 실기실에서 1학년과 2학년 소묘나 건식 재료 표현을 가르쳤다.

“쌤!”

사각대는 연필 소리만 울리는 실기실 한편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막 2학년이 된 김승규가 까맣게 탄 손을 붕붕 흔들어 댔다. 플라스틱 의자를 들고 가 승규 옆에 자리를 잡았다.

승규가 그린 석고 소묘 앞에 앉아 수정 범위를 훑었다. 크게 수정할 건 없어 보였다. 굳이 손을 댄다면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세부 묘사 정도?

힐긋 시선을 내리자 승규가 자신감 넘치던 조금 전과 달리 내 눈치를 살살 보기 시작했다.

“왜?”

“수정 많이 들어가야 하나 해서요.”

오랜 시간을 들여 그렸기 때문에 더는 수정하고 싶지 않다는 어조가 짙게 깔려 있었다.

“많지는 않아. 근데 머리카락 부분은 손으로만 문지르지 말고 앞으로는 지우개도 활용하는 걸로.”

말로 설명하며 까만 검댕이 묻은 지우개를 칼로 잘라 동강 냈다. 눈을 바쁘게 움직여 석고상과 묘사 위치를 짚어 내 날카롭게 끝을 세운 지우개로 비너스 머리카락을 파도 타듯 지워 나갔다. 음영을 적확하게 그려 내자 옆에 앉은 승규가 탄성을 내질렀다. 모세의 기적처럼 깔끔하게 갈라 낸 하얀 지우개선 위에 연필 선을 덧그려 경계를 허물어뜨렸다.

“쌤처럼 그리면 예종도 갈 수 있어요?”

“예종은…, 지금보다 더 열심히 그리면.”

끄응, 침음을 삼켰다. 어떤 놈이 미술 하면 다 예종 간다고 그랬냐. 자라나는 새싹에게 차마 현실을 알려 주지는 못하고 속으로 툴툴대며 지우개를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나도 예고를 다닐 때만 하더라도 현대 미술에 한 획을 그어 보겠다는 꿈이 있었는데, 준재에도 미치지 못하는 이런 실력으로는 수도권 4년제 대학도 감지덕지해야 했다.

“쌤?”

움직이던 손길이 멈추자 승규가 시선을 들어 나를 보았다.

“…응? 아, 이건 여기까지 하자.”

지우개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실기실 구석 책상에서 이미지 자료 파일을 챙겨 왔다.

“다음엔 주름 표현해 볼까?”

“쌤, 오늘은요오.”

손끝을 꼼지락대던 승규가 앞치마 끝을 붙들고 말미를 늘어뜨렸다.

“오늘은 일찍 마무리하면 안 돼요?”

승규는 여느 때보다 초롱초롱 눈을 빛냈다. ‘일찍’과 ‘마무리’라는 단어에 주변에 앉은 아이들이 전부 이쪽을 쳐다봤다. 모두 아닌 척 귀를 쫑긋 세우고 내 입에서 나올 답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아하, 오늘 총대는 너구나?

“쌔엠.”

승규가 일찍 가야 하는 이유를 하나씩 꼽기 시작했다. 이번 주 내내 아그리파, 아리아스, 비너스 석고 삼 인방에 시달려 더는 못 그리겠다는 게 가장 컸고, 시간이 한 시간 반밖에 남지 않아 새로 그림을 그리더라도 스케치와 덩어리 단계에서 정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다음 수업에 꺼내면 흐름이 끊긴다나. 그 밖에도 여러 이유를 진지한 표정으로 읊어 나갔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못 이긴 척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 그린 거 마무리되면 가도 좋아.”

“아싸!”

“와아- 쌤 최고!”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덜컹대는 소리가 곳곳에서 울렸다. 아직 3학년 수업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입가에 손가락을 대고 어수선한 분위기를 단속하며 주의를 주었다. 짐을 정리한 아이들이 하나둘 빠져나가자 북적거리던 실기실이 텅 비어 버렸다.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들이었는지 어설프게 정리된 의자와 이젤을 한 번 더 정돈한 뒤 내부를 둘러보았다.

복도 화장실 수채 세면대에서 대걸레를 가져오는데, 뒤에서 누군가 계단을 올라와 내 어깨를 툭 두드렸다. 뒤를 돌아보고 입매를 말아 올렸다. 고등학교 졸업 후 서로 바쁘다는 이유로 얼굴 한번 보지 못했던 윤상우가 비뚜름한 자세로 서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벌써 쫑?”

목소리도, 특유의 껄렁함도 여전했다.

“금방 왔네?”

“요 앞인데, 뭘.”

어깨를 으쓱한 윤상우가 거리를 좁혀 다가오며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수년 만에 보았는데도 익숙한 느낌이 드는 건, 짧았지만 같은 시간을 공유했기 때문이리라.

“날씨도 우중충한데 막걸리에 파전 어때?”

저녁 메뉴를 골라 의견을 묻자 윤상우가 뭐든 좋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쭈니, 고삐리 땐 술이 뭐야.”

윤상우가 헤벌쭉 웃었다. 그도 그럴 게, 미성년자이긴 하지만 섹스 염불을 외고 술 담배에 전 무리들 사이에서 나는 유일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졸업했다. 사소한 일탈조차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그랬던 내가 이제는 술을 곧잘 마시니 신기하게 보이기도 하겠지.

대걸레가 지나간 물길 위로 발자국을 남기며 장난을 치는 윤상우를 향해 눈을 세모로 떴다.

“야, 정신 사나우니까 저리 가 있어.”

애도 아니고. 손을 휘휘 젓는 제스처에 윤상우가 하하 소리 내 웃다 벽으로 바짝 붙어 섰다.

5분 남짓, 청소를 마무리하는 동안 상우는 제 휴대폰을 가로로 돌려 양손에 쥐고 무언가를 조작하고 있었다. 처음엔 영상을 보나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게임을 하는 모양이었다. 닦은 걸레를 치대어 빨고 용구함에 기대어 세운 뒤 다시 실기실로 돌아왔다.

“뭐 해?”

가방을 챙겨 윤상우 앞에 섰다.

“게임. 나 잠깐만, 한 마리만 더 잡고.”

상우는 눈을 화면에 둔 채 답했다. 무슨 게임인가 싶어 고개를 빠끔히 내밀어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봤다. 어디선가 본 익숙한 색채가 시야에 들어왔다.

“무슨 게임인데?”

“어젠가? 새로 나옴. 농장 시뮬레이션.”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는 윤상우의 말을 들으며, 나는 꼭 과거로 이끌려 간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가을에서 겨울로, 겨울에서 다시 봄으로. 출시일을 따로 메모해 두기까지 했는데,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꿀벌이 세상을 구한다.’

귀여운 꿀벌이 그려진 브로슈어와 게임 인터페이스가 잔상처럼 떠올랐다.

“…RTF?”

낮게 중얼거리자 상우가 화면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보았다.

“이거 알아? 스토리가 미묘하게 웃겨.”

“응, 작년에 지스타에서 봤어.”

물기가 묻은 손을 앞치마에 닦아 내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해 보시고 어떤지 말씀해 주세요.’

남자의 얼굴이 어렴풋하다가 점점 선명하게 윤곽을 찾아 갔다.

작은 부스에 서서 농담을 주고받던 세 사람, 혼자 남아 애정 어린 눈빛으로 게임에 대해 소개해 주던 사람, 농장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귀농이라고 짚어 주던 사람.

또렷한 색감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픽셀의 애니메이션. 광고의 효과인지는 몰라도 지스타 행사가 끝난 후 출시 기대작으로 선정된 게임이었다. 광고를 하는 게임 대부분이 대기업 위주다 보니 다락방스튜디오가 투자를 받았다는 추측성 보도도 있을 만큼 관심을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나조차도 서울로 돌아와서 일주일 동안 베타 버전을 해 보고 설문도 남길 만큼 인상이 깊어서 제작팀에 대한 정보도 찾아볼 정도였다.

스토어에 접속한 나는 게임 부문 1위에 랭크된 게임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소개 영상을 탭해 확인했다. 익숙한 UI와 귀여운 캐릭터들이 열연하는 시네마틱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꿈을 꾸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RTF-Return To the Farm]

[모아게임즈 X 다락방스튜디오]

게임 타이틀과 아래 개발사 명이 보였다. 정식 출시를 준비하며 사명이 정해진 모양이었다.

다락방.

괜스레 실소가 터졌다. 분명 고딕의 조합인데, 동글동글한 느낌이다.

머릿속을 부유하는 담백한 표정과 냉랭한 듯 차분한 말투가 손에 잡힐 듯 희미했다.

D-42

사람들은 타인의 성공에 관심이 많다. 특히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성공해 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더더욱.

RTF가 우여곡절 끝에 성공한 게임은 아니었지만(인디 게임 개발사가 광고비에 천만 원을 쓴다는 것부터) 소규모 개발사가 개발한 게임이 정식 출시 세 달 만에 100만 다운로드를 돌파했다는 사실은 대중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게임을 잘 모르는 유저도 콘텐츠 자체를 즐기기에 어려움이 없었고, 군데군데 녹아난 현실적인 스토리텔링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다. 내가 베타 버전을 처음 해 보고 느꼈던 감상대로였다.

이후 모아게임즈는 대표작인 RTF의 성공에서 멈추지 않고 자체 개발 퍼즐 게임과 다양한 인디 게임의 퍼블리싱을 맡아 차근차근 규모를 키워 갔다. 소규모 개발사에서 게임 직군을 꿈꾸는 취업 준비생이 가고 싶은 회사에 꼽힐 정도로 성장한 것이다.

서버 확장과 이벤트를 거듭하던 RTF 공식 카페에 VR 버전 출시에 대한 공지 글이 올라왔다.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VR 게임이 될 것이라는 포부가 디렉터 인터뷰에 실려 있었다.

**

방송 촬영으로 모아게임즈 로비가 시끌시끌했다. 단순 인터뷰였다면 이렇게 관심을 모으지 못했겠지만, 현재 인기리에 방송 중인 토크 예능 <토킹어바웃유>의 촬영이었다.

촬영 진행은 내가 아르바이트하는 사내 카페 ‘모노크롬’의 한쪽 구석에서 진행됐다.

내가 인터뷰 당사자도 아니건만 출근한 직후부터 괜스레 손에 땀이 뱄다. 한쪽에 설치된 조명과 카메라 장비를 멍하니 바라보며 어쩐지 꿈꾸는 기분이 들어 연신 눈을 깜박거렸다.

촬영을 앞두고 이호연 대표와 전송이 디렉터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에 즐겨 입는 캐주얼 정장 차림이 유독 두드러져 보였다.

이호연 대표. 수년 전 부산에서 처음 닿았던 인연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지스타 행사장에서 한 번, 그리고 아르바이트로 일하게 되며 또 한 번. 로비나 회사 부근에서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자연히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 해도 그가 내 짝은 아닐 터였다. 원래 끼리끼리,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이 만나는 거니까.

어수선하던 로비에 일순 정적이 감돌았다. 얼마 뒤 슬레이트 소리와 함께 방송인 예성하와 정세민이 오프닝 멘트를 주고받았다.

“세민 씨, 귀농에 관심 있으세요?”

“아아, 제가 대학 때부터 귀농 꿈나무 아니었겠습니까!”

“정말?”

“그럼요.”

“그럼 이것도 해 보셨겠네요?”

“당연한 말씀을.”

정세민이 가슴을 펴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몇 년 되지 않았어요?”

“3년 정도? 됐는데 꾸준히 하게 되더라고요.”

정세민의 답변에 예성하가 그렇게 재미있느냐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들리는 대화에 나 또한 고개를 주억거렸다.

재밌긴 하지. 유사 게임이 나와도 결국 돌고 돌아 RTF로 복귀하게 되니까. 이런 표현이 맞나 싶은데, 게임 자체가 섬세하다고 해야 하나? 즐길 거리가 계속 업데이트되기도 하고, 정식 오픈 때부터 만든 길드에 모인 사람들이 있어 같이 하다 보니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를 만큼 그냥 계속 하게 되었다.

2021 지스타 기대작, 2022 게임 포커스 어워드 인디 게임 부문 대상, 2023 대한민국 게임 대상! 수상 이력을 읊은 예성하가 게스트를 호명했다.

“RTF, 리턴 투 더 팜의 부모님이시죠, 이호연 대표님, 전송이 디렉터님 모셔 보겠습니다!”

카메라 바깥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호연과 전송이가 어색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한 채 촬영장 가운데로 걸음을 옮겼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전송이가 먼저 활달하게 인사하고, 이호연이 입매를 말아 올려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나는 상체를 낮추어 팔꿈치를 작업대에 두고 귀를 쫑긋 세웠다.

토크는 대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며 시작됐다. 창립 멤버 세 사람이 같은 대학, 같은 전산학부 내 컴퓨터공학과 선후배 사이인 건 공연한 사실이었고, 이는 모아게임즈에서 일하는 사람들 모두가 알았다. 투자자이자 공동 대표인 김사훈까지 삼 인방으로 통했다고 했으니까.

예성하는 김사훈이 출연하지 않은 점을 아쉬워하며 차근차근 대화를 이어 갔다.

“세 분이 처음 합을 맞춘 건 언제실까요?”

“제가 4학년 됐을 때가 처음이었어요.”

생글생글 웃으며 답한 전송이가 기억을 되짚으며 질문에 응했다. 선배들을 대면하기 전부터 어딜 가나 두 사람의 실력에 대해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고. 학부 내에서도 이호연, 김사훈 두 사람은 분명 글로벌 기업이나 해외 연구소로 가게 되리라 장담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동방에 들어가려는데, 딱 두 분이 문 앞에 서 있는 거예요. 갑자기 가입하고 싶다면서.”

“교내에서 유명한 동아리였나 보죠?”

잇단 질문에 전송이가 고개를 설설 저었다.

“별 볼 일 없는 과 내 동아리였어요. 이력서에 쓸 대외 활동용 동아리요.”

유명한 동아리였다면 매년 폐부 위기와 현행 유지를 오가지 않았을 것이다. 1학년들은 교내 연합 동아리에서 이성과의 교류나 각인 상대를 찾는 데 혈안이었고, 2학년이 되면 개인 공부나 프로젝트에 열을 올렸다. 3학년부터는 졸업 과제와 포트폴리오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에 과 내 동아리는 말 그대로 발만 걸쳐 두는 용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 안에서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있었으나, 열의는 1년을 채 넘기지 못했다.

“어차피 인원은 필요해서 받았는데, 와서 뭔가 하시더라고요.”

유령으로 지내다 졸업 성불하리라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둘은 활동에 꽤 진심이었다고 한다. 동방에 깜빡 잊고 두고 간 전송이의 게임 시나리오를 보고 개발해 보자는 제안을 먼저 해 왔다며 그녀는 눈매를 휘었다. 이후 스낵 게임을 만들어 가을 축제에서 배포하였다는 대화를 끝으로 학부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일단락되었다.

잠시 쉬었다가 재촬영에 들어갔을 때, 정세민이 손에 쥔 대본을 뒤집어 내려 두며 입매를 묘하게 비틀었다.

“대표님과 디렉터님, 두 분 혹시…?”

“아뇨, 이 친구랑은 선후배 사이일 뿐입니다. 각인된 이름도 다르고요.”

너스레를 떠는 정세민에게 이호연이 고개를 저었다.

“맞아요, 지금은 고용주와 피고용인 사이기도 하죠.”

전송이도 한 번 선배는 영원한 선배일 뿐이라며 단호히 선을 그었다.

“그럼 각인된 분과 만나셨나요?”

“아직 못 만났습니다.”

명료하게 답한 이호연은 만나지 못한 게 당연한 것 같다며 질문을 적당히 받아 주었다. 미국에서 생활하던 기간이 무척이나 길었기도 하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바쁘게 지내느라 각인 상대에 대해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고 했다.

“워낙 인물들이 되셔서 실례를 무릅쓰고 여쭤 보게 됐네요. 개인사는 여기까지 하고, 계속 가겠습니다.”

이후는 타임라인대로였다. 김사훈과 이호연은 실리콘밸리 IT 회사에, 전송이는 국내 굵직한 게임 회사를 다니며 착실히 커리어를 쌓았고, 각자 최고의 퍼포먼스를 낼 수 있다는 판단이 섰을 때 다락방스튜디오에 합류 의사를 밝혔다고 했다. 공동 대표 두 사람의 이력이 워낙 화려해 전송이가 묻히는 것 같지만, 총괄 디렉터인 전송이도 둘 못지않게 대단한 스펙을 보유하고 있었다. 다락방스튜디오에서 베타로 제작될 당시에도 대기업에 재직 중이었던 걸로 알고 있으니까.

대단한 사람들이지 싶다. 난 다시 태어나도 저렇게 계획적으로는 못 살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말씀 있으시면 해 주세요!”

“10월에 인사드리게 될 RTF 새로운 버전도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전송이의 말에 이호연이 이어 대답했다.

“저희 직원들이 고생해 만든 게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네 사람이 악수를 주고받았다. 철수하는 제작진 전부와 인사를 나눈 이호연과 전송이는 마지막으로 CP와 한 번 더 인사한 후 그들을 배웅했다.

정문으로 나섰던 두 사람 중 전송이만 다시 돌아와 카운터 앞에 섰다.

“예준 씨,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요. 얼음 완전 많이.”

단발을 쓸어 올린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부스스 헤집어진 머리카락이 헝클어졌다. 피로감이 짙게 깔린 전송이의 낯은 인터뷰에 응할 때와는 완전히 상반되어 보였다. 커피를 내리며 힐긋 그녀를 살폈다. 어디선가 전화가 온 듯, 전송이는 주문을 마치고 몇 걸음 물러났다.

“네, OBT까지는 끝내고, 응, 그래요.”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다. 게임 회사 1층에서 일한 지 반년이 조금 넘은 덕인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들이 제법 되었다. 그녀가 말한 OBT는 오픈 베타 테스트의 준말로, 외부 테스터를 모집해 오픈 테스트를 한다는 말이었다.

전화를 끊고 주머니에 휴대폰을 찔러 넣은 그녀가 다시 픽업대 앞으로 다가왔다.

“디렉터님, 아까 인터뷰요. 대박 멋있었어요.”

“그래 보였다면 다행인데.”

끄응, 앓는 소리를 낸 전송이가 픽 웃음을 머금었다.

“예준 씨가 이 카페에서 일한 지 7개월 정도 됐나요?”

“네!”

“전공이 뭐예요?”

“시각디자인이요.”

“흐응.”

그렇구나아, 말끝을 흐린 그녀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지그시 바라보는 시선에 눈을 끔벅이다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저 RTF 좋아해요!”

“눈치도 있는 것 같고.”

생긋 웃은 전송이가 한 걸음 물러났다.

“방송 인터뷰 말고, 잡 인터뷰였다면 사심 담아서 합격인데.”

빈말인 건 안다. 그녀는 내 포트폴리오도 모르고, 실력도 알지 못한다. 아무리 사심을 담았다 한들 실제 면접에서 조우한다면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었다. 그럼에도 절로 얼굴이 폈다. 낙방만 거듭해서인지 자존감이 바닥을 치던 차였다. 물론 날 떨어뜨린 곳 중 모아게임즈도 있었지만(서류에서 떨어져서 회사 문턱조차 못 넘었다) 총괄 디렉터인 전송이가 합격이라고 하니 날아가기라도 할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그럼, 수고해요.”

빙글 돌아서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날 밤, 카페를 마감하고 로비를 가로지르는 내 옆으로 장신의 남자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자연히 시선이 기우려는 것을 애써 막으며 정면을 보았다.

이호연 대표였다.

D-30

[RTF의 VR 버전이 곧 출시됩니다! 사전 예약 OPEN!]

[사전 예약 시 90일 이용 가능한 꿀벌 이모티콘 100% 지급!]

[서버 선점 등록하면 밭일 필수품 ‘이장님의 스타일리시 방충 모자’ 즉시 지급!]

[VR에서만 공개되는 새로운 몬스터와 스킬을 만나 보세요!]

릴리즈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수도권 역사 내 미디어필러 광고 영역에 RTF의 온갖 광고가 붙었고, 개발사인 모아게임즈 1층 로비에도 곧 오픈 예정인 VR 버전의 홍보 배너와 포스터가 곳곳에 보였다.

준비 기간만 3년. 게임과 과학 기술을 녹여 냈다는 기대를 업고 드디어 사전 예약에 들어간 것이다.

나 역시 코앞으로 다가온 오픈 소식에 들떠 서버 선점을 신청하고 보급형 VR 기기도 구매해 두었다. 빨리 해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예준 씨?”

언제 다가왔는지, 카운터 앞에 선 전송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잰걸음으로 포스 기기 앞으로 다가가 머쓱한 웃음을 내비쳤다.

“안녕하세요, 디렉터님.”

“곧 마감이죠? 지금 주문되나요?”

“네네, 물론이죠.”

“그럼 아이스 아메리카노 톨 사이즈 하나요.”

“얼음 많이요?”

덧붙인 물음에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포스에 주문을 입력하고 결제 후 바로 그라인더 버튼을 눌렀다. 윙, 소리와 함께 분쇄된 원두가 포터필터에 떨어졌다. 에스프레소 원액을 추출하자 금세 향긋한 커피 내음이 퍼졌다.

픽업대에 커피를 내려놓으며 눈매를 휘어 웃었다.

“디렉터님, 딱 한 달 남았죠? 축하드려요.”

“고마워요, 예준 씨.”

“저 진짜 기대 많이 하고 있어요. VR 기기도 샀거든요.”

“그래요?”

나는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폰 좀 줘 볼래요?”

전송이가 손짓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나는 앞치마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메모 앱을 실행해 달라는 그녀에게 애플리케이션 실행 후 빈 화면을 보여 주었다. 자판에 무언갈 입력한 그녀가 기기를 다시 돌려주며 싱그레 미소 지었다.

“이거, CBT 초대 링크인데, 시간 되면 들어가 봐요.”

“전 직원도 아닌데 알려 주셔도 괜찮나요?”

깜짝 놀라 묻자 그녀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총괄이 괜찮다는데요. 예준 씨가 남도 아니고. 우리 야근 좀비들 커피는 다 예준 씨가 해 준 건데.”

그렇게 말하니 꼭 마약상이라도 된 기분이네. 싱글싱글 웃는 그녀에게 건네받은 초대 코드를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해 보고 평가해 주면 더 좋고요.”

커피를 들고 유유히 사라지는 전송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게임 폴더 첫 번째 슬롯을 차지한 RTF를 실행했다.

[Return To the Farm]

[화면을 터치해 주세요]

[서버 | 의례읍 3 - 혼잡]

터치하고 들어간 캐릭터 선택 창에는 내가 그동안 공들여 키운 캐릭터가 반짝반짝 빛을 발하며 서 있었다. 캐릭터가 착용한 옷도 금사를 모아 제작한 값비싼 옷이었고, 들고 있는 로타리 삽도 전설 등급이었다.

[버그킬러]

[길드] 꿀벌키우기장인협회

[캐릭터] IT 귀농인

[레벨] 78

[생산력] 152,083

[최종접속] 13시간 전

[생성일자] 2020.10.XX

베타 때부터 사용해 온 캐릭터라 생성 일자도 이르고 생산력도 높은 편에 속했다. 또, 상위 길드에 속해 있어 서버에서 받는 보정치가 상당했다. 꿀벌키우기장인협회, 그러니까 꿀장협은 내가 만든 길드로, 초창기에 생성한 장수 길드였다. 윤상우를 비롯해 고등학교 친구들, 강준성, (유형 회원 같은 느낌의) 권윤재가 속해 있었다. 지금은 규모가 제법 되어 오프 모임도 간혹 가졌다.

[게임하기]

버튼을 탭해 접속하며 로딩 창을 내려다봤다. 전환된 화면 속 내 캐릭터가 늠름한 모습을 뽐내며 서 있었다.

[길드][백현동버그킬러]: #안녕

길드원인 백현동버그킬러가 내 접속 알림을 보고 채팅에 이모티콘 인사를 해 왔다. 나와 닉네임이 비슷한 백현동버그킬러는 길드 창설 시기에 들어와 3주년을 맞이한 지금까지 같이 게임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반기마다 진행하는 정모에는 늘 불참이었지만, 온라인 활동만큼은 그를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로 활동량이 어마어마했다.

[길드][버그킬러]: #안녕

[길드][버그킬러]: 안녕하세요, 백현동님.

[길드][백현동버그킬러]: 낮에 들어온 건 오랜만이네요, 길마님.

[길드][버그킬러]: 네, 요즘 낮에 일하느라.

[길드][버그킬러]: #눈물

[길드][백현동버그킬러]: #눈물

[길드][버그킬러]: 뭐 특별한 일 없죠?

[길드][백현동버그킬러]: 다음 주 업데이트가 꽤 있더라고요. VR 버전 앞두고 모바일도 뭔가 많아요.

[길드][버그킬러]: 오, 이번엔 없데이트 아닌 거네요.

[길드][백현동버그킬러]: #웃음

[길드][아침엔커피]: 마을 침략전도 한대요. 길마님 저희도 할 거죠?

[길드][라일락꽃필무렵]: #오호라

또 다른 장수 멤버인 아침엔커피와 라일락꽃필무렵도 오랜만에 인사를 건네 왔다.

[길드][버그킬러]: 흠, 고민해 봐야겠네요. 살펴보고 오늘 밤중에 정해서 말씀드릴게요. 한다고 하면 오랜만에 길드원 정리하고 새로 모집해서 가시죠.

[길드][백현동버그킬러]: #화이팅

[길드][백현동버그킬러]: 오랜만에 사람들 많이 모이겠네요.

현재 길드에 남은 이들은 대부분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함께해 온 사람들로, 이제는 게임이나 길드원들 모두가 각자의 일상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오래된 사람들이다 보니 현실 지인을 데려와 가입시키는 경우도 있었고, 게임에서 만났긴 하지만 인접한 곳에 사는 사람들은 정기적으로 만나 술도 마시며 친분을 다지기도 했다.

[길드][라일락꽃필무렵]: #지켜보고있다

[길드][버그킬러]: #웃음

[길드][라일락꽃필무렵]: 공지 사항 보니까 서버 내 상위 침략 길드는 월드 진출해서 타 서버 마을도 먹을 수 있대요. 공성전 진화된 느낌쓰.

RTF는 기본적으로 시뮬레이션 게임을 지향한다. 그런데 1주년 무렵부터는 다른 시뮬레이션에서는 볼 수 없는 RPG 요소가 조금씩 추가되었다. 이렇게 되면 밸런스가 깨지거나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기 마련인데, 3년 동안 경험한 느낌을 말하자면, 사소한 부분 하나하나 잘 맞춰져 있다고 해야 하나.

소유의 농장을 관리하고 꿀벌 수를 늘리며 퀘스트를 달성하는 일만 반복하다 보면 금세 흥미를 잃을 수 있는데, 이벤트성으로 RPG 요소가 툭툭 튀어나오니 지루할 새가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흥미를 잃었다면 다른 사람에게 길드장을 넘기고 접었겠지만, 아직까지 하는 이유는 순전히 게임이 재미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딸린 식구들이 있기도 하고.

손가락이 관성적으로 길드 메뉴로 향했다. 기부만 하고 누가 미접인지 한번 보고 꺼야지.

[G림][최종접속 – 5일 전]

[qwer1234][최종접속 – 3일 전]

[권윤재][최종접속 – 2일 전]

[이장과트위스트][최종접속 – 1일 전]

길드원 리스트에 보이는 두 사람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것들이 3일이나 출석을 안 해? 한동안 바빠 접속을 챙기지 못했는데, 이렇게 오만방자해지다니.

백현동버그킬러에게는 길드에 무슨 일이 있다면 오픈 채팅 메시지를 달라 이야기하고 게임 창을 종료했다.

그러고는 곧장 메신저 화면을 띄워 극악무도하기 짝이 없는 두 사람을 호출했다.

[3일 동안 여행 가 있었어. 너무한다 너무해. - 시디 강준성]

-여행 가서 5분이 없었습니까? 화장실에 폰 안 가져가요?

[지금 들어간다. - 시디 강준성]

[나도 들어가고 있어. - 조소 권윤재]

내가 레벨을 올리라고 강요하기를 해, 길드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고 하기를 해. 나처럼 좋은 길드장이 어디 있다고.

내 입으로 말하긴 조금 부끄럽지만, 꿀장협은 서버 내에서 정통성 있는 길드로 통했다. 초창기 운영 길드라는 점과 랭커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어 보유 농장 부지만 500만 평이 넘었다. 지인이라는 이유로 봐주기 시작하면 길드 내에서 형평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것이기 때문에 가끔 이렇게 채찍질을 해 주어야 했다.

-한 번만 더 소홀해 봐라. 강준성 너는 부길마에서 내리는 수가 있어?

[이제라도 백현동님한테 넘기는 건? - 시디 강준성]

준성의 주장도 일리는 있었다. 현실이 아닌 게임이지만 오래도록 보았고, 이미 정예 길드원이라 다른 길드원들의 신임도 받고 있었다. 나도 그를 게임 안에서는 믿고 있는 편이고. 길드 던전이나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하는 이벤트가 있을 때 데어코드를 이용해 음성 채팅도 해 봤다지만, 그래도 확실히 부길마 자리는 사적인 연락이 가능하고, 오프라인에서 한 번 정도 얼굴을 본 사람이 나을 것 같았다.

길드 내 팜 머니도 어쨌든 현금화할 수 있으니, 금전적인 부분이 걸려 있기도 하고.

강준성에게 모호한 답변을 짤막하게 보내고 휴대폰을 앞치마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나저나, VR 버전은 어떨까? 베타니까 개발자들도 접속해 있을 테니 버그킬러라는 닉네임은 좀 그렇겠지?

**

VR 콘솔의 전원을 켜고 전송이가 알려 준 테스트 URL을 주소창에 입력하자 소프트웨어 설치 화면이 전면에 떠올랐다. 테스트 모드의 코드를 입력하라는 입력 폼에 커서가 깜박거렸다.

코드를 입력한 후 화면이 전환되는 동안 헤드셋을 머리에 뒤집어썼다. 모니터에만 작게 보이던 아트와 액션이 생동감 있게 눈앞에 펼쳐졌다. 보급형 콘솔이라 사운드가 그리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풀벌레가 낮게 우는 사운드가 전방위에서 느껴지는 듯했다. 영화에서 주로 사용되는 입체 사운드 기술을 계약해 적용했다더니, 정말인가 보네.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끼며 적응을 위해 허공을 더듬었다.

“오오, 대박….”

두 주먹을 쥐었다 펴며 소리를 내 보았다.

울리듯 귓가에 맴도는 음성이 꼭 메아리처럼 멀리 닿았다 되돌아왔다.

[박복자]

자신을 복자로 소개한 복자 캐릭터는 모바일에도 있던 NPC로, 게임 스토리 초반, IT 귀농인과 상속인을 돕는 역할을 수행했고, 마을 의뢰를 주는 인물이었다. 가만, 모바일에서는 성이 없었던 것 같은데, 성이 박씨였어?

-안녕하세요, 친애하는 모험가님. 모아게임즈의 RTF를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모험가님을 도울 전령, 노인 행정 복지 센터 소속의 복자입니다.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복자 아이콘을 탭하거나 ‘복자야’라고 불러 주세요!

또랑또랑 맑은 목소리에 귀가 쫑긋 서다가도, NPC 머리 위에 떠 있는 이름을 보니 괜히 웃음이 터질 것 같아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나 원래 일차원적인 거에 잘 웃는 인간이었던 건가.

-모험가님의 이름을 알려 주세요.

“크흠, 나는, 음…, 버리?”

-‘버리’로 사용자 등록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진행 허용하시겠습니까?

“응.”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상상력 부족으로 꿀벌키우기장인협회의 꿀벌에서 벌을 따왔다. 꿀벌을 쓸 수는 없고, 그렇다고 벌 그대로 쓰자니 닉네임이 입에 붙지 않아 두 자로 늘렸다.

나는 모바일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IT 귀농인을 선택하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옷차림만 꾸밀 수 있던 모바일과 달리 VR에선 외양까지 커스터마이징 할 수 있었는데, 외모와 키, 골격 등을 설정할 수 있었다. 나는 머리 기장과 눈동자 색, 피부색만 손보고 바로 다음으로 넘어갔다.

게임 시작을 알리는 시네마틱이 눈앞에서 생동감 있게 펼쳐졌다.

(NA) 판교역 앞, 빨간 포장마차는 반짝반짝 빛이 나는 판교의 분위기와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영등포와 남대문 시장에서 보았던 빨간 천막이 판교의 화려한 건물을 등지고 외로이 불을 밝힌다.

여기, 외로운 등잔불 같은 두 사람이 있다.

S#1. 판교 전경 (N. 몽타주)

- 역 앞 전경이 화면에 잡힌다.

- 날짜와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그래픽.

- 그 위로 수치 그래프가 들쭉날쭉 요동치다 파란불이 들어오며 수치가 수직 하락하고.

- 휴대폰을 들고 불안한 표정을 한 IT 귀농인의 모습.

S#2. 포장마차 (N)

IT 귀농인 (소주를 털어 마시며)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요.

상속인 (조용히 술잔을 기울인다)

IT 귀농인 화성 갈 수 있을 거라는 말만 믿고 전 재산을 털었는데.

상속인 저두요. 부모님이 아시면 등짝 스매싱이 떨어지겠죠.

IT 귀농인 어유, (울상 지으며) 우리 어쩌면 좋을까요?

상속인 저는 부모님 계신 시골로 가려고요. 지긋지긋한 판교 노예에서 탈출이죠.

IT 귀농인 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상속인 (한쪽 눈을 찡긋) 그래요, 같이 가요.

(NA) 과연 귀농인과 상속인은 무탈히 귀농할 수 있을까?

또, 거기서 만나게 될 농가 사람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

Fade out

3D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시네마틱이 지나간 후 나는 모아읍 서버 노인 행정 복지 센터 앞에서 눈을 떴다. 고개를 숙여 내 몸부터 내려다봤다. 커스텀을 한 외양과 달리 수수한 베이지색 기본 티셔츠는 다소 허름해 보였고, 회색 면바지는 흡사 교복을 연상케 했다. 팜 머니나 골드를 벌어들이면 옷부터 갈아입어야겠는데? 아무리 게임이라도 너무 없어 보이잖아. 거지라고 해도 믿겠다.

두 눈을 깜박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2D로만 보던 그래픽이 사실처럼 구현돼 있었다.

[미정슈퍼]

빨간 글씨로 쓰인 상점 입간판을 보고 푸하, 웃음을 터뜨렸다. 비포장된 도로 끝, 시동이 꺼진 트랙터와 굴삭기가 보였다.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시선이 멀리까지 닿았다 되돌아왔다.

멍하니 서 있던 내 옆으로 누군가 스쳐 지나갔다. 큰 키, 회색빛 머리카락. 단정한 외모가 돋보였다. CBT 환경이니까 당연히 개발자나 UX 리서처겠지?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는 남자의 뒤를 따라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VR 버전은 기본적으로 모바일 버전과 마찬가지로 농장을 가꿀 수 있고, 벌집에서 벌을 키워 꿀을 내다 팔아 게임 머니를 버는 구조로 되어 있다. 게임 머니로 할당된 저택을 꾸미고, 확장하고, 농장을 키워 나간다. 테스트 환경이라 제한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개인 소유의 저택이 속한 월드맵과 길드원들의 저택을 한곳에 모아 볼 수 있는 길드맵이 편의로 제공된다고 도움말에 적혀 있었다.

특히 내가 느낀 모바일과의 차이점은, 터치로 진행했던 말벌 사냥과 각종 퀘스트를 직접 해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또, 유저 간 대화를 타이핑이 아닌 말로 직접 할 수 있고, 헤드셋 센서를 통해 유저 간 스킨십이 거의 실제 촉각처럼 느껴졌다. VR게임 특성상 인게임에서의 커뮤니티 기능이 극대화된 것이다.

일정 레벨이 되면 ‘공동 명의’ 플레이가 가능한 것도 눈길을 끌었다. 언뜻 파티 플레이와 비슷하지만, 농장을 함께 가꾸고 경험치를 나눠 가지며 보다 깊은 관계성을 갖는다. 가상 현실에서의 만남까지도 고려한 시스템 같았다.

길드원과 농가별 액션 전투를 즐길 수 있다고 하니, 상용화되면 꿀장협에도 같이 해 보자고 말이나 꺼내 봐야지.

이 정도의 스케일이라니. 개발 기간이 3년이라는 게 괜한 소리가 아니구나. 남자의 뒤를 따라 걸으며 살펴본 게임 정보에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기사화된 부분보다 즐길 거리가 많아 보이는 건 확실하다.

그런데 농가별 액션 전투면…… 곡괭이 같은 걸 들고 떼로 전쟁을 하는 건가? 웃음이 피식피식 흘러나왔다.

걸어오는 동안 일정 수준의 활동을 감지한 시스템이 아기 꿀벌의 탄생을 알려 왔다.

[시스템] 여왕벌이 벌집에 상주를 시작합니다.

[시스템] 아기 꿀벌 세 마리가 태어났어요!

[시스템] 꿀벌이 세상을 구한다! 꿀벌과 친밀도를 쌓아 채집 효율을 높이세요.

친밀도? NPC나 꿀벌과 친밀도를 쌓아야 한다는 말인가? 키우는 꿀벌과 친밀도라면 걔네를 전부 내 수족처럼 다룰 수 있다는 건가. 뭐가 됐든 신기하네.

시스템 창을 확인하다 우뚝 멈추어 섰다.

“어…?”

앞서 걷던 남자가 내 소유로 배정받은 주택 옆집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테스트 서버라 그런가? 테스터들끼리 가까운 곳으로 배정되는 건가 보네. 전송이가 OBT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으니, 같은 테스터겠지? 한 달 동안 혼자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른 테스터와도 대화해 볼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었다.

쭈뼛대며 남자 소유의 농장 앞을 기웃거렸다.

덜컹, 쿠구궁.

남자의 저택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까치발을 들어 담장 너머를 살펴보니 창고 문을 연 그가 이앙기에 올라타고 있었다. 아니, 저게 뭐야. 테스트 환경에서 저런 게 된단 말이야? 두 눈을 크게 뜨고 그가 탄 농기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대문 문턱을 넘은 남자가 담장 너머를 훔쳐보고 있던 나를 알아차리곤 눈살을 찌푸렸다.

[Bugman]

위에서 날 내려다보는 남자의 머리 위에 닉네임이 보였다. 버그맨, 이라고 읽는 거 맞지? 그의 이름을 입 속으로 두어 번 발음해 보는 사이, 버그맨이 한숨을 낮게 내쉬었다.

“뭡니까?”

“안녕하세요.”

그를 향해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변환된 음성 데이터가 실제 말소리로 울려 퍼졌다. 진짜 유저 간 대화가 되네? 음성 시스템이야 다른 게임에서도 구축된 게 많지만, 마이크를 통해 말하는 것과 VR 환경에서 내 입으로 말하는 건 차이가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소속.”

덜덜덜, 크게 울리는 이앙기 시동을 끈 버그맨의 말투가 퍽 냉랭했다.

“서버 접속 안내 못 받았습니까?”

“서버요?”

“퀸 스튜디오 모니터링?”

디렉터한테 따로 전달 못 받았는데. 미간을 구긴 버그맨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퀸 스튜디오는 모아게임즈 소속의 서버 개발실로, RTF 게임과 자체 개발한 소규모 퍼즐게임을 비롯해 전체 서버를 관리하는 조직이다. 카페를 찾는 직원 중 과반이 퀸 스튜디오 소속이라 그가 뱉은 말 중 그것만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다.

“됐고, 나오세요. 모 심으러 가게.”

그는 운전에 방해되니 비키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당황하여 뒤로 주춤 물러난 나를 힐긋, 내려다본 남자가 다시 시동을 걸었다.

초면에 무례하기 짝이 없는 남자의 태도에 얼이 빠진 채 한참을 서서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D-29

첫날엔 기본적인 플레이 세팅만 해 두고 게임을 종료했다.

상용까지의 기간이 꽤 남았고, 오늘 낮에 카페를 찾은 전송이가 특별한 이슈가 없는 한 초대 링크로 계속 접속할 수 있다는 귀띔도 주었기 때문에 게임 진행에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었다. 못 해 본 콘텐츠는 한 달 후 운영 서버에서 해 보면 되는 거고.

퇴근 후 간단히 저녁을 먹고 콘솔 전원을 켰다. 눈을 뜬 곳은 어제 종료했던 내 소유의 오두막집 마당이었다.

그러고 보니, 현실의 하루가 게임에선 이틀이니까 어제 못 둘러본 벌집을 봐야 할 것 같은데. 아기 꿀벌이라 했지? 총 세 마리. 좌측 벌집 현황을 탭해 상세 내용을 살펴보았다.

보유한 벌집은 아직 한 개뿐으로, 태어난 지 이틀 된 벌 세 마리가 부지런히 꿀을 채집해 저장하고 있는 듯했다. 접속 시간에 따라 꿀벌도 활동하기 때문에, 실제 접속을 해서 플레이를 하든, 방치 모드 8시간을 전부 돌리든 해야 벌도 성장하고 꿀통도 채울 수 있을 터였다.

[분봉][EXP. 68%]

벌들이 어리기 때문인지 어제 잠깐, 그리고 오늘 로그인하고부터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벌써 68%의 경험치를 획득한 상태였다. 벌집 수를 늘리기까지 32%만 더 채우면 된다는 말이었다. 방치 모드와 플레이 시간만 잘 조절하면 테스트 종료 전까지 로열 젤리 생산도 가능할 것 같은데.

뒷마당에 있는 벌집과 아기 벌들을 먼저 둘러볼까, 고민하다 밭을 향해 걸음을 뗐다. 어차피 해가 지면 벌침을(넣고 빼는 게 가능했다) 닦아 두어야 하니까, 종료 전에만 확인해 보면 되겠지.

그러고 보니, 어제 메인 퀘스트도 안 받고 옆집 사는 테스터랑 짧게 대화한 이후 몇 가지 설정만 바꾸고 바로 종료한 것이 생각이 났다. 오늘은 퀘스트를 받고 게임 진행을 좀 해 볼까 싶어 우측 퀘스트 영역을 탭하자 띠링, 소리와 함께 바로 앞에 영상구가 나타났다.

[이장]: 버리, 날세. 귀농하면 농사 아니겠나. 위에서 살다 온 사람들이 뭘 알고 시작하겠어. 내 자네가 주민 등록했다는 소식에 이것저것 일러 주러 왔다네. [확인]

[이장]: …원래 자네가 살던 곳은 (어쩌고저쩌고) 내 소들이 뛰놀던 (어쩌고저쩌고) 묶어 키우지 않아 정말 순하고, 주면 주는 대로 잘 먹고 (어쩌고저쩌고) 여하튼 이것들이 도움이 될 걸세. 그럼, 잘 부탁허네. [확인]

중간 생략된 대화들이 전부 빨리 감기 처리되어 하나도 듣지 못했다. 분명한 건, 이장이 농사에 도움이 될 만한 기본 아이템을 보내 주었다는 것과, 퀘스트가 이장네 소와 연관이 있다는 거였다.

[메인] 1장. 이제 시작, 귀농의 첫발!

[서브 1] 이장님 댁 소들이 싸고 간 소똥을 치우자 (0/200)

[서브 2] 밭을 일궈 씨를 뿌리자 (0/300) - 연계 퀘스트

[서브 3] 꿀을 팔아 팜 머니를 획득하자 (0/50,000) - 연계 퀘스트

똥이라니, 소똥이라니……! 무슨 1장부터 똥을 치우라는 거야! 모바일 첫 퀘스트가 뭐였지? 벙 찐 채 퀘스트 창만 멍하니 바라보다 인벤토리를 열어 이장이 보낸 아이템 슬롯을 확인했다.

[호미 – 일반 등급 / 수확능력 10]

[곡괭이 – 일반 등급 / 수확능력 8]

[삽 – 일반 등급]

[소형 HP 회복 물약 – 소모성 / 50개]

이장이 준 아이템은 전부 일반 등급으로, 회복 물약을 제외하면 소똥을 치우는 데 사용할 만한 아이템은 삽뿐이었다. 아무리 가상 현실이라도 호미나 곡괭이로 똥을 치우고 싶진 않았다. 소환한 일반 등급의 삽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내구도가 심히 걱정되었으나,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어쨌든 퀘스트는 퀘스트. 미션을 수행해야 캐릭터를 성장시켜 직업을 정할 수 있고, 테스트도 진행할 수 있다. 손에 든 삽을 어깨에 걸치고 소똥을 퍼내기 위해 밭을 가로질렀다.

“헉, 허억, 미, 미친….”

퍽퍽 삽질해 대기 시작한 지 10여 분, 인게임에서의 체력이 깎이는 것뿐인데 어쩐지 실제 체력이 소모되는 기분이 들었다. 미친 이장 놈 소들은 왜 남의 밭에다가 똥을 싸질러 놓고 간 거야. 자연 친화적으로 키운 소든, 아니든 내 입장에서는 그저 망할 소들일 뿐이다.

이게 다큐야 게임이야?!

가쁜 숨을 몰아쉬다 옆 농장에서 들려오는 이앙기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덜덜덜. 쿠르르. 덜덜덜덜.

멀리 남자의 이앙기가 종횡무진 밭을 누비고 있었다. 꽤 오랜 기간 테스트해 온 모양인지, 남자가 갖춘 도구나 장비들은 멀리서 보아도 상위 등급의 아이템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땅에 박아 둔 삽은 내 삽과 비교할 때 내구도나 디자인 면에서 월등한 고급 등급이었고, 타고 있는 이앙기도 사륜구동인 것으로 보아 웬만한 유저는 쉽게 구할 수 없는 전설 등급의 농기계였다.

직원인 거겠지? 꼭 테스터만 이 서버에 있을 리는 없으니까. 게다가 퀸 스튜디오를 언급한 걸로 보아 내부인일 게 분명했다.

에라이, 테스트고 뭐고, 게임에서조차, 그것도 귀농 VR에서조차 빈익빈 부익부라니. 더러운 세상!

나도 직원이나 정규 테스터였다면 남자가 보유한 수준만큼은 아니어도 상점에서 적당한 내구성을 갖춘 기구나 기계를 구매했을 텐데. 전송이 디렉터는 테스트 URL만 알려 주었을 뿐, 상점 결제에 대한 부분을 따로 언질 주진 않았기에 무턱대고 현질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적어도 삽질만 아니라면 이런 소똥쯤은 금방 치웠을 텐데.

힐끔, 다시 남자를 쳐다보았다. 저 사람한테 빌릴 수 있을까? 버그맨도 첫 퀘스트를 진행했을 테니까.

광원을 부유하던 자줏빛 구름이 어둑어둑 번져 가고 있었다. 일정 비율로 해와 달이 교차하는 시점이 다가온 거였다. 밤에도 일을 할 순 있지만, 사위가 어두워 장비 내구도가 떨어지는 속도가 빨랐다. 때문에 자신의 저택에서 복자가 데일리로 주는 의뢰 중 나물 다듬기나 지푸라기 꿰기 등 말 그대로 소일거리나 하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게다가 밤이 되면 벌들이 휴식을 취하므로, 가서 벌침도 닦아 놓아야 한다. 그래야 다음 날 또는 다음 접속 시 바로 꿀 채집에 사용할 수 있을 테니까(청결한 벌침 관리는 꿀벌들의 친밀도에 영향을 주었다).

해가 지기까지 한…… 20분 정도 남았나. 다른 할 일도 많은데, 시간을 더 지체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고심하던 나는 삽을 바닥에 내려 두고 남자의 농장을 향해 발을 뗐다. 울타리 근처로 다가가 기웃거리며 버그맨이 나를 보아 주길 기다렸다. 그러나 이렇게 저렇게 목을 빼 움직여 보아도 발견하지 못한 건지 그는 운전에 몰두할 뿐이었다.

“저기, 저기요!”

투르르르, 투두르르르.

“저기요! 아, 아저씨!”

마땅한 호칭이 떠오르지 않아 냅다 소리를 질렀다. 서너 번을 더 부르고서야 멀리서 악을 쓰는 나를 본 버그맨이 시동을 끄고 이앙기에서 내렸다.

“아저씨?”

시끄러운 이앙기 소음에서도 용케 부르는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호칭이 불쾌했던 듯, 그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나를 흘겼다.

“안녕하세요, 저는 버리라고 하는데요.”

“예, 어제 뵌 분.”

말본새 봐라? 나는 가느스름하게 눈을 흘겼다. 툭툭 뱉는 말투는 여전히 냉랭했지만, 그래도 쌩하니 가 버렸던 어제보다는 들어 줄 만했다. 어제는 말로만 안 했다 뿐이지 꺼지라는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일단 굴삭기가 목표니 굽히고 들어가자. 자본주의 미소를 입가에 두르며 눈매를 휘었다.

“다른 게 아니라요. 제가 어제부터 시작했는데.”

“…그런데요?”

자본주의, 자본주의.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한 번 더 싱긋 웃음 지었다.

“굴삭기 있으신가요?”

“굴삭기…?”

가만 듣고 있던 버그맨의 얼굴에 황당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느닷없이 찾아와 굴삭기를 빌려 달라는 게 좀 이상해 보이긴 하지.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나는 저 똥을 치워야만 한다. 안 된다고 하면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늘어질 기세로 발에 꾹 힘을 주었다.

“있으면 좀 빌려주세요. 삽질로는 도저히.”

너도 해 봐서 알 거 아니냐. 이장이 준 삽으로 저게 되겠니? 삽질만 하다 한 달 테스트 다 끝날 수 있는데, 당신이 직원이면 테스터가 좀 쉽게 갈 수 있게 도와주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상부상조 아니겠어?

필살기로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남자를 바라봤다. 제발…! 제발……!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남자가 입술을 달싹였다. Yes or No?

“…알겠습니다. 버리 님이라고 하셨죠.”

그가 시스템 창을 제어해 교환을 요청해 왔다.

[시스템] Bugman 님의 교환 요청을 수락하시겠습니까? [확인]

내 시야에도 남자가 보는 창과 동일한 창이 보였다. 슬롯에 올라간 희귀 등급의 굴삭기를 보고 눈을 깜빡거렸다. 혹시나 버그맨이 마음을 돌릴까 싶어 교환 창에서 서둘러 확인 버튼을 눌렀다.

[시스템] Bugman 님이 아이템을 등록하였습니다.

[시스템] 천자총통 굴삭기+9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천, 천자, 이게 뭐야. 모바일에서도 본 적 없는 아이템인 데다 무려 9강이다. 가진 아이템이 상상 이상이었다. 적당한 걸로 빌려주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런……. 내구도가 1포인트만 깎여도 살 떨릴 것 같은데.

“가, 감사합니다, 버그맨 님! 깨고 바로 돌려 드릴게요.”

거듭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버그맨의 눈치를 살살 보았다.

“됐습니다.”

짧게 답한 그가 고개를 저었다.

어디서 파밍을 했기에 이런 아이템이 나온 걸까. 게임 초반이라 희귀 등급이 나올 만한 필드까지 가려면 아직 멀었을 텐데. 아니면 테스트 환경에도 매물이 있는 건가? 더미로 올려둔 건가? 그걸 현금 구매하고 강화한 건가? 머릿속에 물음표가 둥둥 떠다녔다.

이앙기에 올라타려던 버그맨이 고개를 돌려 나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해, 지고 있으니까 적당히 하고 들어가세요.”

해가 지고 있음을 상기시켜 준 버그맨이 시동을 걸었다.

투두두, 투두르르르.

땅까지 울릴 정도로 큰 소음을 낸 이앙기가 차츰 멀어져 갔다. 해가 지고 있으니 효율이 좋은 아이템을 빌려준 건 아닐까? 억양이나 말투가 좀 퉁명스럽고, 현실에서 만나면 뒤통수 한 대 쳐 주고 싶은 싸가지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밭 한가운데로 돌아온 나는 버그맨의 굴삭기를 소환해 바로 기계에 올라탔다. 왜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비싼 장비와 무구, 그리고 펫이나 탈 것에 집착하는지 새삼 알 것 같았다. 나도 오랜 기간 모바일 RTF를 해 오며 꽤 좋은 장비를 갖췄다고 생각했는데, VR에서 체험해 보니 차원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버그맨이 빌려준 굴삭기는 퀘스트 달성에 아주 효과적이었다. 희귀 등급인데다 강화까지 한 아이템이라 기본 스탯 보정은 물론이고,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소똥 치우기도 20분 만에 전부 마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속전속결이었다.

서브 퀘스트를 마치고 오두막집 옆 한쪽에 굴삭기를 주차한 뒤 마루에 걸터앉았다. 버그맨의 집이 보일 리 없는데도 그쪽으로 자연스레 시선이 닿았다. 퀘스트 진행이 급급해 아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버그맨의 집에는 기와가 한 장 한 장 조밀하게 덮여 있었다.

아무리 직원이어도 저렇게 키우는 게 가능한 건가. 게임 내 친구 검색 기능으로 버그맨의 닉네임을 조회해 보았다.

[Bugman]

버그맨이라. 닉네임을 탭해 보자 비활성 상태로 전환돼 있었다. 내게 굴삭기를 빌려주고 로그아웃한 모양이었다.

[친구 신청]

친구 신청 버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좋든 싫든 근거리에 있으니 테스트하는 동안 그를 자주 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벨이 높으니 오늘처럼 도움을 청할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한 가지 걸리는 건 직원일 것 같다는 점인데, 그냥 신청해 두고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할까. 어차피 내가 아르바이트인지는 모를 테고, OBT 중이라면 나 말고도 외부인이 분명 있을 테니까.

모르겠다. 일단 신청해 두고, 안 받아 주면 어쩔 수 없는 거지.

손가락 끝에 힘을 주어 ‘친구 신청’ 버튼을 꾹 눌렀다.

깊어 가는 밤하늘은 여느 시골 풍경 같았다. 촘촘히 박힌 별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넘실거렸다. 그래픽이라는 걸 분명 인지하고 있는데도, 꼭 시골에 내려와 농촌 체험이라도 한 기분이었다.

반짝반짝 광이 나도록 닦은 벌침을 전용 소켓에 넣어 두고 게임을 종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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