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us Track 2 – 새해에는
“이게 회사냐.”
한숨을 내쉬며 무료한 표정으로 턱을 괬다.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사무 공간은 평소보다 더 조용하고 한적했다. 이채선은 한 해 동안 너무나 힘들었다며 12월 20일부터 장기 휴가에 돌입했고, 정소랑도 연말에는 원래 일하지 않는다며 잔여 휴가와 내년 휴가를 당겨 일찌감치 해외로 뜬 참이었다. 다른 팀원들도 마찬가지였고.
SG플레이도 본사와 관계사 방침에 따라 연말 휴가 소진을 권고하였지만, 과거의 내가 쌓은 업으로 현재의 내가 고통받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호연과 놀기 위한 휴가 남발로 연말에 몰아 쓸 휴가가 전혀 남지 않은 상황이라는 말이다. 해가 바뀌어서 빨리 휴가가 생겨야 할 텐데.
“그러게 적당히 썼어야죠.”
혀를 내두르는 송기현은 휴대폰 게임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게나 말이다. 왜 과거의 나는 미래의 나를 믿었던 걸까. 어차피 그놈이 그놈인데. 현재의 나는 분간 없이 신나게 놀았던 과거의 나를 맹렬히 욕하고 있으니까. 그렇다 해도,
“기현 님한테 그런 이야기 들으니까 영.”
기분이 좋지가 않네. 미간을 모으고 툴툴거렸다.
본부에서 제일 바쁜 기획팀 자리조차 한산했고, 개발실도 서버 개발자 몇을 제하곤 듬성듬성 자리가 비어 있었다.
“점심 뭐 먹. 빨리 메뉴나 골라 봐요.”
법카 탕진이나 하게. 눈조차 마주하지 않은 채 송기현이 낮게 말했다. 출근 후 내리 게임만 하다 11시가 넘으니 밥을 먹자는 그의 모니터는 손을 대지 않아 절전 모드가 된 지 오래였다. 어쩌면 돌아도 이렇게 단단히 돈 놈이 있을 수 있담. 뭐, 나서서 매일 끼니와 커피 타임을 챙겨 주니 나쁘진 않다만.
“기현 님은 새해인데 어디 안 가요?”
“갔으면 님이랑 이러고 있겠소.”
이 자식이 진짜. 세모로 뜬 눈을 흘기자 송기현은 낄낄 웃기만 했다. 새해부터는 상종을 말아야지, 정말. 한숨을 삼키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12월 30일. 그쯤. 항상 연말이 되면 본가에 가서 아빠표 떡국과 집밥을 원 없이 먹고 분당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올해는 왜 시큰둥한 것인지.
이호연과 처음 맞는 연말연시여서인지, 아니면 의미 부여를 하고 싶은 것인지. 저번 잔소리도 있고, 부모님이 보고 싶긴 하지만, 한편으론 항상 보는 아들, 한 해쯤이야, 하는 불효한 마음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2시쯤 퇴근하나? - 이도비]
겨울 잠투정을 부리는 나를 일으켜 회사까지 데려다준 이호연의 회사는 크리스마스부터 자체적으로 휴무였다. 청년들이 가고 싶은 회사 1위에 꼽힌다는 말이 괜한 낭설은 아닌 모양으로, 갖춰진 복지가 상당한 편에 속했다. 대기업도 아닌데 대기업 재직자들조차 탐낼 수준이라나.
SG플레이도 알아서 좀, 어? 한 해 고생 많으셨고, 서로 공적인 관계니 거리를 좀 두었다가 다시 만나자는 의미로 사나흘 쉬게 해 주면 얼마나 좋아. 일도 없고, 휴가자도 많아서 진행도 안 되는데 꼭 이렇게 앉혀 놔야겠냐?
“…모아로 이직해 버릴까.”
모아에는 (물론 티 내는 순간 파국이겠다만) 이호연도 있으니 연애도 좀 더 스릴 있을 거고, 조삼모사 복지가 아니라 찐 복지에다가 트렌디한 영어 닉네임. 얼마나 좋아.
“응?”
잘 못 들었다며 되묻는 송기현을 한심하게 바라봤다. 아니지, 모아가 아니라 곧 다락방으로 가야지. 거취에 대한 부분을 입에 함부로 올릴 순 없는 노릇이지. 암, 그렇고말고.
“…됐다. 게임이나 하쇼.”
고개를 팩 돌리곤 다시 휴대폰 화면으로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잇단 문자가 다음 말풍선으로 떠올랐다.
[내일 본가까지 데려다줄까? - 이도비]
내 쪽 본가가 있는 화곡동까지 갔다가 수원으로 내려가겠다는 이호연의 다정함에 미안함이나 고마움보다 투정을 부리고 싶다는 청개구리 심보가 앞섰다. 내가 투정을 부리면 나를 달래기 위해 이호연은 손을 잡아줄 테고, 자연스레 입을 맞춰 줄 것이다. 그 후엔……. 생각이 엄한 곳으로 향하려는 것을 멈추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일이 없으니 회사에서 별생각을 다 하는구나.
-안 피곤하겠어요?
[전혀. - 이도비]
[정 뭐하면, 가는 길에 드라이브스루에서 커피나 사 줘요. - 이도비]
와락 끌어안는 이모티콘을 그에게 보내고 PC 화면 하단을 잠시 바라보았다. 디지털시계에 멎은 시선이 남은 시간을 헤아렸다. 두 시간 남짓. 이호연이 무척이나 보고 싶어졌다.
**
어슴푸레한 빛이 커튼 사이로 스몄다. 멍한 눈을 깜박이며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부터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와 함께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남겨져 있었다. 씻고 이호연의 도착 시간을 가늠하다 그대로 잠든 모양이었다. 어둑어둑한 방을 둘러보다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잠들었노라며 연락이 늦어 미안하다는 답장을 그에게 보내 두고 바로 방문을 열었다. 매콤한 닭볶음탕 냄새가 바로 코끝을 찔러 왔다.
“뭐가 그리 피곤해서 얼굴도 안 보고 자?”
귀한 외동아들이 왔다고 앞치마까지 둘러멘 아빠는 저녁 식사 준비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명절 상차림도 아니건만, 아일랜드 식탁에는 막 만들어진 찬거리가 수북했다. 내일 아침이나 점심 먹고 가면 또 한동안은 안 올 텐데, 가짓수가 왜 이리 많아. 마음 불편하게시리.
“사무실은?”
아빠의 등을 바라보며 가게는 어쩌고 집에 있느냐 물었다.
“연말인데 일찍 정리했지. 이 시기에는 손님도 없어. 오늘은 이거 먹고, 내일 아침에 떡국 끓일 테니까 먹고 가라.”
“응.”
“더 누워 있어.”
“엄마는?”
“네 엄마 오려면 멀었지. 배 많이 고프면 먼저 먹으라는데 어떡할래?”
“아냐, 엄마 오면 같이 먹을게.”
도울 게 있느냐는 물음에 아빠는 고개를 저었다.
다시 방으로 돌아와 불을 켜고, 꿈꾸듯 방 안을 둘러보았다. 낯설게 느껴지는 내음을 폐부 깊숙이 느꼈다. 신기한 일이다. 연애 후 그의 집에서 산 건 불과 몇 개월이 안 되었는데, 익숙함을 느끼는 건 가족이 아닌 타인의 체취라는 사실이.
내 키보다 반 뼘 작은 매트리스는 고등학교 때 한 번 교체한 뒤 그대로였고, 낯설고, 서툰 흔적들이 곳곳에 보였다. 책장 한편 빼곡하게 꽂힌 월간 미술, 드로잉 북이 빠진 이처럼 들쑥날쑥 손끝에 걸렸다.
보고 싶다. 반나절도 채 되지 않았는데, 이상한 일이지.
부모님께 넌지시 말이라도 꺼내 볼까.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아는 형으로 얼버무린 이호연에 대해 전부 다 말할 순 없지만 그 정돈 얘기해 둘 수 있지 않을까.
이호연은 말했나? 나이가 있으니 주변에서도 물어볼 것 같은데. 생각해 보면 서로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깊게 나누지 않았던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서로의 취향, 호불호를 알아 가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삼십여 년을 달리 살아온 완전한 타인이었으므로, 과도기적 관계 확장을 해 온 것이다.
가족들은 알고 있을까. 결혼 생각이 없다고 하더라도 주변에서 가만히 안 둘 것 같은데. 생각의 타래를 쫓아가다 침대맡에 대충 던져둔 휴대폰이 징징 울리는 소리에 화득, 정신을 차렸다.
[이도비]
화면에 뜬 수신인을 보고 잔류한 졸음기가 장막처럼 거두어졌다.
“호연 씨?”
「잘 잤어요?」
귓바퀴를 도는 다정한 음색에 가슴이 쿵쿵 뛰었다.
“호연 씨는요? 도착한 거죠?”
「응, 씻고, 쉬다가 깼을까 싶어서.」
보고 싶다는 간질간질한 목소리가 덧붙여졌다. 나도요. 짧게 대꾸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반쯤 열린 문을 조심스레 닫았다. 이호연의 누나와 매형은 내일 낮에나 온다며, 그동안 자신은 자유라며 그가 유쾌하게 말했다. 사소하지만 단란한 일상이 조각조각 이어졌다.
「지금 혼자 있어요?」
“네, 방에 혼자요.”
「부모님은?」
“아버지는 저녁 준비 중이고, 어머니는 아직.”
「그럼 잠깐만 같이 놀까?」
장난기 가득한 그의 음성에 고개를 갸웃했다. 수화기 너머 그의 발소리가 분주하게 들려왔다.
「문 닫혀 있죠?」
“문? 닫혀는 있는데….”
「잘됐네.」
소음이 완전히 사라지고, 그의 조곤조곤한 목소리만 귓가에 맴돌다 돌연 침묵이 이어져 이호연의 이름을 불렀다. 무슨 일인지 되묻는 사이, 지익, 하는 소리가 오체의 모든 감각을 일깨웠다.
「아래 만져 봐요.」
같이 놀자는 의미가 이런 거였냐!
이미 나와 통화하며 예열하기라도 한 모양인지, 이호연의 호흡이 거칠게 느껴졌다.
「빨리, 응?」
내가 이호연에게 유독 약하다는 걸, 그는 알고 있을까. 보채는 그를 난 항상 이길 수 없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느리게 숨을 몰아쉬며 잠옷 바지를 들추어 드로즈 앞섶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하, 아….”
「예준아.」
가쁜 숨소리와, 뭉크러진 단어의 조각들이 수화기를 사이에 두고 오갔다. 변태 같으니라고. 어떻게 이렇게. 아니지, 나도 변태지. 이제껏 이호연이 하자는 것들에, 크게 거부감이 없는 걸 보면…….
“형…….”
평소에는 낯 뜨거워 쉽사리 뱉지 못할 호칭을 달뜬 분위기에 흘려보내듯 나직이 중얼거렸다. 내 부름에 탁, 탁, 손으로 기둥을 훑는 소리가 선연히 울렸다. 날 상상하며 자위하는 그를 떠올리자 내 자지 또한 못 견디게 한계까지 부풀어 올랐다.
「하아.
“읏….”
물감처럼 뒤섞인 원색적인 소음들이 규칙적으로, 또 불규칙적으로 거듭됐다. 첨단에 맺힌 점액질이 끈적하게 손바닥을 적셨다. 엉덩이가 잘게 경련하며 꿈질거리기 시작했다. 더한 자극을 원하는 거였다. 크고, 길고, 뭉뚝한 그의 자지가 정신을 아찔하게 했다. 끙끙대던 나는 자세를 옆으로 돌리고 휴대폰을 베개와 얼굴 사이에 대고 할딱거렸다.
들쑤셔지는 상상과 체액을 흩뿌리며 엉망이 된 몸을 사랑스럽다는 듯 내려다보는 그를 머릿속으로 그리며 곧 절정이 머지않았음을 직감하였다.
「…흣, 후.」
허리가 안으로 말리며 판판한 배가 단단하게 뭉쳤다. 고환을 주물 대던 왼손을 뒤로 빼 엉덩이 사이를 더듬었다.
“너, 넣고 싶….”
「예준아…, 뒤로 하고 있어?」
“…아아, 으으응.”
다물린 주름이 움찔거렸다. 윤활제도 없이 주름 주변을 거칠게 긁어냈다. 빨갛게 부풀어 오른 살집에 손가락을 파묻었다. 오른손으로는 앞을, 왼손으로는 뒤를 번갈아 자극하며 흥분을 부추겼다.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얼굴로 연신 훌쩍거리자 이호연이 피식 웃음을 흘려 왔다. 나중에 자위하는 걸 보여 달라는 파렴치한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탁, 탁, 탁!
“…으읏!”
바들바들 떨며 끈적한 체액을 손바닥 위에 사출했다. 이호연 또한 내 사정과 맞추어 내보낸 듯, 정제되지 않은 호흡이 물보라처럼 일었다. 젖은 손을 멍하니 바라보며 숨을 골랐다. 사정을 하긴 했지만 부족한 느낌이었다. 엉덩이 부근이 간질간질한 감각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마지막 날에 폰섹스를 하다니. 섹스가 맞나. 한숨을 내쉰 나는 팔을 뻗어 침대맡 갑 티슈에서 휴지를 몇 장 뽑아다 손과 축축하게 젖은 자지를 훔쳐 닦았다.
“이게 뭐예요….”
「좋네요. 안 보이니까 더 보고 싶고, 상상하니까 더 꼴리고.」
그렇긴 하지. 나도 이호연이 자위하는 걸 본 적이 없으니까. 크게 꺼덕이는 좆이 아른거려 한 번 내보낸 자지에 다시 피가 도는 것 같았다. 미쳤지, 정말. 이러다 내일 집에 가자마자 덮치고 보겠네.
「체력 잘 아껴 놔요.」
“내일모레 출근인데요.”
「그래도.」
새해 첫날 밤인데 그냥 넘어갈 순 없지. 장난기 가득한 그에게 응하며 키득거렸다.
새벽 세 시까지만이에요. 새해 초장부터 좀비는 싫다고요.
그때까진 버틸 수 있다?
이호연은 내가 세 시까지 버티면 원하는 걸 해 주겠다고 했다. 승부욕을 자극하는 그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며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현관문 비밀번호 눌리는 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닭볶음탕과 불고기, 잡채, 각종 무친 나물로 세 식구가 둘러앉은 상이 빈 곳 없이 가득 찼다. 세월의 흐름이 설핏 느껴지는 부모님의 얼굴을 말끄러미 바라보다 오랜만에 먹는 집밥에 분주히 손을 놀렸다.
“아들, 서운하다?”
“응?”
“이전처럼 자주 안 오고, 전화도 뜸하고.”
“두 분 오붓하게 보내라고 안 한 거지 뭐. 나보다 이게 더 좋은 거 아냐?”
따로 챙겨 온 현금 봉투를 각각 내밀었다.
“새해 복 많이들 받으셔.”
봉투 금액을 확인하는 부모님 얼굴이 환해졌다.
“그, 그리고, 음.”
고민하다 수저를 내려놓고 눈을 굴렸다. 지금인가? 아닌가? 어쩐지 지금이 아니면 흐지부지 넘어가게 될 것 같았다. 진지하게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동성이고 같이 산다는 말은 하지 못하더라도, 연인의 유무는 밝혀 두어야 자주 오지 못하거나 소홀한 점들을 이해해 줄 것 같았다. 한참 말을 고르고 고르다,
“뭐, 연애한다고?”
내 말을 가로챈 엄마가 싱긋 웃었다.
엄마는 작년부터 연락도 뜸하고, 오가는 거리가 귀찮아도 집밥이 먹고 싶다며 주기적으로 오던 애가 발길이 뚝 끊기니 연애밖에 없지 않겠냐며 보탰다. 그래도 더 빨리 알려 주면 좋지 않았겠느냐는 타박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엄마와 아빠를 번갈아 보았다.
“가만, 그럼 저번에 하와이 간 것도?”
“윽.”
신정 연휴에 하와이를 가느라 본가에 오지 못한 걸 정확히 짚어 낸 엄마가 나를 흘겨보았다.
그다음부터는 언제부터 사귀기 시작한 건지, (강요는 아니지만) 언제 소개해 줄 건지, 성격은 어떤지, 얼굴은 예쁜지, 연애한다고 저축을 소홀히 하면 안 된다는 잔소리까지 쉬지 않고 이어졌다.
나는 부모님이 이호연에 대해 막연한 호감이라도 느꼈으면 했다. 두 분이 궁금해하는 점들을 되짚으며 답해 주었다. 만난 건 작년, 아니, 해가 바뀌었으니 재작년 8월, 사귄 건 10월 중순, 소개는 준비가 되면, 성격은 다정하고 섬세한 편, 미국에서 살다 왔고 일도 잘하는 사람이라고. 얼굴이 예쁜 건진 모르겠지만 내가 볼 땐 잘난 외모라 부연했다. 그 밖에도 능력이 좋아 많이 배우고 의지하고 있음을 두 분에게 전하였다.
엄마와 내가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을 가만 듣고 있던 아빠도 기분이 좋은 모양인지 고개를 쭉 내밀고는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좋아?”
못 말린다며 웃는 엄마에게 홧홧하게 열이 오른 얼굴로 끄덕거렸다.
“으이구, 부족하면 밥 더 떠 줄까? 너 고사리 좋아하지? 싸 줄 테니까 내일 챙겨 가.”
“어어, 응….”
옆에 둔 휴대폰이 짧게 진동한 건 그때였다.
[지금 저녁 먹나? - 이도비]
[보고 싶다. - 이도비]
[안 되겠다. 보러 갈게. - 이도비]
띠용? 지금요? 아니 이 인간이? 조금 전에 폰으로, 그, 했잖아요! 그리고 여기가 어디라고 와? 아니 온다 치더라도 지금 와서 어떡하려고?!
“왜?”
맞은편에 앉은 아빠가 시시각각 변하는 내 얼굴을 보며 물었다.
“어, 어어, 아니, 아, 아는 형이 잠깐 보자고.”
“아는 형?”
이런 미친. 이 동네에 지인이 어디 있다고. 아는 형은 개뿔. 중고등학교도 예체능 준비를 하느라 친한 친구가 많지 않았다. 고작해야 윤상우와 윤상우 데칼코마니인 친구들 몇인데, 사회생활을 시작할 무렵부터는 윤상우와만 연락하고 있었다. 모임도 윤상우가 있는 모임만 나갔었기에 부모님도 내 인간관계를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있을 터다. 본가에 있다가 잠깐 나갈 때도 거의 윤상우와 본다는 답을 했으니까. 또, 대부분의 인맥이 사회 지인이라는 점과 소수의 사람들과 깊게 사귀는 타입이라는 사실도 어렴풋이는 알지 않을까 싶었다.
머리가 빠르게 돌았다. 수원에서 화곡동까지 얼마나 걸리지. 눈을 데굴 굴렸다.
“지금?”
“아는 형은 가족들이랑 안 보낸대?”
이것저것 물어 오는 부모님께 횡설수설 답한 뒤 이호연에게 위치를 물었다. 이미 출발했다는 그는 삼십 분 정도 뒤에 도착한다는 연락만 남기고 그 어떤 문자에도 답이 없었다. 계획적인 사람 같다가도, 가끔 이렇게 불쑥불쑥 버그처럼 튀어나오는 이상한 이호연이었다. 즉흥적이라고 해야 할지, 의사 결정이 빠르다고 해야 할지.
내려 둔 수저를 들며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이따 잠깐 내려갔다 올게.”
어쩌겠나. 사실은 나도 보고 싶은걸. 이럴 땐 그냥 이호연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면 되는 거겠지. 오래 있을 것도 아닐 테고.
이호연은 정확히 34분 후에 빌라 주차장에 차를 댔다. 시간에 맞추어 내려가 있던 나는 그의 차를 발견하고 조수석에 얼른 올라탔다.
“여기.”
개구쟁이처럼 오른뺨을 슥 내미는 이호연에게 주저하다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서프라이즈?”
서프라이즈 같은 소리 하네. 눈매를 가느스름하게 치뜨고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통화에서나 느꼈던 그의 숨결과 목소리가 귓가에 닿자 허리께가 지르르했다.
“오래는 못 있어요.”
마음 같아선 근처 호텔을 잡고 싶지만, 멀쩡한 집 놔두고 아는 형이 왔다며 놀고 외박을 하겠다고 하는 건 모양새가 퍽 이상해 보이니까. 더구나 신정인걸. 나는 이호연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눈매를 살긋 휘어 웃음 지었다. 한 번 더 얼굴 보았으니 그걸로 되었다. 내일 낮에 분당으로 넘어가서 또 보면, 하루도 빠짐없이 보는 것 아닌가.
한참 입을 맞추고 체온을 나누다 어영부영 흐르는 시간을 확인한 뒤 이호연의 어깨를 밀어 냈다.
“그럼 이제….”
“재워 주면 안 되나.”
멀리서 왔다. 다시 가는 데 한 시간이다. 집에는 이야기하고 왔다. 반대로 추석 때는 자기 집에 가자는 궤변을 쉬지 않고 쏟아 내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피스텔에서도 잘 잤다며, 본가의 내 방이 궁금하다는 어리광을 부려 왔다.
이 양반이 왜 이래? 다른 날도 아니고 12월 31일에, 격의 없이 지내는 사이라도 남의 집에 난입해서 자고 가는 인간이 세상에 어디 있냐!
“응…? 예준아.”
“아, 안 돼요!”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부모님께는 뭐라고 변명할 건데. 멀쩡한 집 놔두고 왜 여기에 있냐고 생각할 거 아니야. 물론 엄마나 아빠가 쫓아내거나 그럴 분들은 아니지만….
“예준 씨, 예준아.”
“아냐, 아무리 생각해도 안 돼.”
보채는 그에게 단호히 선을 긋자 그가 아쉬운 듯 구시렁대기 시작했다.
멀리서 왔다. (내가 오라고 했냐고.)
보고 싶어서 왔는데 매정하다. (나도 보고 싶긴 했지만 앞뒤 안 재고 온 네가 더 매정하다.)
같이 새해 떡국 먹고 싶다. (내일 저녁으로 또 먹으면 그만 아니냐.)
다정한 맛이 없다. (네가 내 몫까지 더 다정해지면 도합 120%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자위하는 거 실제로 보고 싶다. (내가 보고 싶었던 게 아니라?)
투닥거림이 한참 이어지다 결국 이호연이 백기를 들었다. 두 번 세 번 조르면 결국엔 들어주던 내가 이렇게까지 완강하게 거부하니 결국 꼬리를 내린 것이다.
“부모님께 이야긴 해 볼게요. 내일 낮에 아는 형, 같이 떡국.”
조수석에서 내리기 전 이호연을 달랬다. 누나네 내일 온다며. 가족끼리 모이는 일이 호연 씨네도 쉽지 않을 텐데, 같이 아침 떡국 먹고 나 보러 와요. 이호연의 손을 깍지 껴 잡고 입가로 가져갔다. 손등에 쪽쪽 입을 맞췄다. 근데 두 끼 연속 떡국은 좀 물리지 않나. 그나저나, 부모님께 뭐라고 둘러대지. 아는 형이 내내 미국에서 살다 귀국 후 떡국 투어 중이라 우리 집 떡국도 먹고 싶다고 했다고?
“그럼 내일 낮에.”
내일 또 오겠다는 이호연의 입술에 도장 찍듯 힘주어 키스했다.
“새해 복 많이 받아요.”
“예준 씨도. 새해 복 많이.”
“자정에 또 인사해요.”
지금도 인사하고, 자정에 또 인사하자며 부드럽게 웃음 지었다.
“사랑해, 예준아.”
“응, 나두, 사랑해요. 가요.”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차체를 멍하니 바라보다 외투 앞섶을 단단히 여몄다.
그가 남긴 온기를 조금이라도 더 느껴 보려는 몸짓이었다.
**
“안녕하세요, 어머님, 아버님. 이호연이라고 합니다.”
부모님 두 분 표정이 멍했다. 새해부터 들이닥친 장정 때문이었다. 24평 빌라 한가운데에 거구가 들어서니 여유 공간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훌쩍 큰 키의 이호연을 올려다보는 부모님을 향해 머쓱한 웃음을 흘렸다.
“이분이 아는 형?”
“으응.”
“떡국?”
창피함에 몸서리가 쳐지는 걸 간신히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작 이호연은 아무렇지 않아 보여 더 부끄러워졌다.
IF
-그가 만약
[위치를 등록하면 내 주변의 많은 이웃과 만날 수 있어요! 위치 설정에 동의하시겠어요?]
동의 버튼을 눌렀다. GPS가 앱과 자동으로 연동되며 인디게이터가 돌았다. 내가 서 있는 위치를 기반으로 백현동과 판교동의 거래 리스트가 출력되기 시작했다. 작게는 옷이며 생필품 따위가 올라와 있고, 크게는 냉장고며 세탁기 등의 생활 가전도 게시되어 있었다. 구조 자체는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며 스크롤을 아래로, 아래로 계속해서 내렸다.
그렇게 한참을 내리다가, 나는 여타의 글들과는 다른 특이한 제목을 보고 찬물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우뚝 멈추어 섰다.
벌레 잡아주실 분
낙생원마을 근처 거주. 채팅에서 거주지 공개. 사기 치면 고소.
*현금 즉시 지급 가능
뭐지. 이 구체적이고도 이상한 구매 글은. 고작 벌레 하나 잡겠다고 중고 장터에 글을 써 둔 건가.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걸음까지 멈춘 채 화면을 응시했다. 현금 즉시 지급이라는 메모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조건도 상세한 편인 데다, 먼저 사기에 대해 언급한 것으로 보아 벌레를 잡아주면 정말로 돈을 줄 것 같았다. 누군가 선점할까 싶어 얼른 작성자에게 채팅 요청을 보냈다.
-지원 가능한가요? 잡아 드릴게요.
채팅을 보내자마자 읽음 처리로 전환된 아이콘 표시가 빠르게 떠올랐다.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다. 나는 실소가 터지려는 것을 참으며 몸을 틀었다. 낙생원마을이면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했다. 멈췄던 걸음에 속도를 더하며 다시 회사 사옥이 있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서판교로 XX번 길. 바로 옆 블록에 브런치 카페 있고 주택 단지 길 바로 앞입니다. 밤이라 잘 보이지는 않겠지만 베이지색 벽돌로 된 집입니다. - Bugkiller]
오타 하나 없는 정갈한 답변이 돌아왔다. 그가 말하는 브런치 카페가 어디인지 대강 알 것 같았다. 이채선의 생일이었던 날, 그녀의 요청에 다 함께 택시를 타고 가서 브런치를 먹었던 곳이었다.
-10분 정도 걸리는데 괜찮으신가요?
[네, 최대한 빨리. - Bugkiller]
-거래 중으로 돌려주세요. 빨리 가겠습니다. 아, 잡을 수 있을 만한 게 있나요? 비닐이나 휴지, 물티슈…, 그런 것들이요.
내 요구에 성격 급한 구매자는 바로 상태를 거래 중으로 돌렸다.
[네, 드려요. 말 그만하고 빨리요. - Bugkiller]
짜증 서린 말투에 나는 순간 눈가를 찡그렸다. 말투가 좀 거슬리긴 해도, 일단 가기로 했으니까…. 투덜거리며 보폭을 넓혀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크기별 금액을 산정해 둔 걸 보니 자주 출몰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쪽은 부자 동네 아니던가? 서울보다 땅값이 비싸다는 것을 들은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근린공원이 있고 조경이 잘 조성되어 있다고…. 그래서 벌레도 많은 건가? 머릿속을 떠다니는 물음표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뭐, 가서 보면 알겠지.
서둘러 걸으며 시간을 확인했다. 딱 십 분 컷일 것 같았다.
헉헉 가쁘게 차오르는 숨을 간헐적으로 내쉬었다. 벌레 하나 잡겠다고 여기까지 오게 되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참 궁색 맞다 싶었다.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낙생원마을 근처에 도달했다. 판매자가 언급했던 카페가 눈앞에 보였다. 고요하기만 할 뿐인 골목 안쪽을 향해 고개를 빠끔히 내밀었다. 베이지색 벽돌로 지은 집. 이 근처가 맞는데, 주변이 어두워 색 구별이 잘 되지 않았다.
결국 나는 다시 ‘모아’를 실행했다. 연락을 취해 보기 위함이었다. 메인 우측 상단의 알림 아이콘에 빨갛게 점이 찍혀 있었다. 메시지가 온 거였다.
[어디쯤입니까. - Bugkiller]
[저기요. - Bugkiller]
[10분까지 1분 남았습니다. - Bugkiller]
언제는 말 그만하고 빨리 오라며. 툴툴거린 나는 판매자가 메시지를 보낸 시간을 확인했다. 각 메시지는 7분 전과 5분 전, 그리고 1분 전에 도착해 있었다. ‘사기 치면 고소’라고 했지. 채팅 하나로 고소까지는 힘들겠지만, 약속한 시각보다 늦는다면 정말 신고라도 할 기세였다. 나는 서둘러 위치를 찍어 보내며 판매자가 현관 밖으로 나오길 기다렸다.
그렇게 2분 남짓을 기다렸을까, 바로 앞 단독 주택 현관문이 열리며 장신의 남자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환한 불빛을 등진 그가 주변을 두리번대다 나를 발견하고는 턱짓으로 가까이 다가오란 제스처를 했다.
“딱 맞춰 오셨네요. 그대로 잠수신가 했습니다.”
딱딱하고 냉소적인 어조가 사무적으로 느껴졌다. 주춤주춤 남자의 앞으로 다가섰다. 침을 꿀꺽 삼키며 그의 눈치를 보았다.
“집 가는 길에 다시 돌아온 거라 조금 늦었어요.”
우물쭈물 대답했다. 늦은 것도 아니고 십 분 정도 걸린다고 미리 말해 두었는데, 어쩐지 변명을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남자가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서 읽히는 묘한 분위기에 침이 꿀꺽 삼켜졌다. 차게 식은 눈동자를 정면으로 응시하다 등골이 선득해지는 감각에 고개를 푹 숙였다.
“어서 들어오세요.”
남자가 현관문을 활짝 열었다. 나는 그의 안내에 따라 발을 떼었다. 신발을 벗고 마루 위에 올라서며 눈을 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길쭉하게 뻗은 복도가 바로 시야에 들어왔다. 넓고 쾌적했다. 외화에나 나올 법한 주택 구조였다. 복도 끝으로 시선이 닿았다. 정면에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보이고, 좌측과 우측으로 공간이 나누어져 있었다. 입구부터 눈이 안 부신 곳이 없다. 높은 천장에서 떨어지는 조명이 구석구석을 밝혀 주었고, 복도 벽면에는 임파스토 기법으로 그려진 묵직하고 고고한 기품이 느껴지는 유화들이 일정 간격을 두고 걸려 있었다. 미끄러지듯 시선이 기울었다. 먼지 하나 없는 액자 틀은 반질반질 깨끗하기만 했다.
잠시 숨을 죽였다. 이런 곳에 벌레? 가당키나 한 일인가.
현관문이 쿵, 하고 완전히 닫혔다.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뒤를 돌았다. 어두운 곳에서 역광으로 비추어진 모습을 보았을 때는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부분인데, 남자의 얼굴은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하고 단정했다. 모난 구석도 없어 보이는 말끔한 남자는 족히 190은 되어 보였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냉소적인 분위기와 체격에서 오는 위압감에 주눅이 들었다. 그의 새까만 눈동자가 건조하게 나를 바라봤다.
“아, 그, 저기….”
당황한 내가 말을 더듬자 남자가 거리를 좁혀 왔다.
벌레 잡는 게 맞나?
한 발.
정말 이런 곳에 벌레가 나온다고?
또 한 발.
이렇게 깨끗한데?
마지막으로 한 발.
벌레가 들어왔다가 발을 헛디뎌 미끄러져 죽을지도 모를 만큼 깔끔한데?
머릿속을 뒤덮는 온갖 생각들이 남자가 코앞까지 다가오도록 계속 이어졌다.
미, 미친. 사실 벌레는 미끼였고 연쇄 살인마나 범죄자 아냐? 요즘 범죄자들 인상이 얼마나 선한데. 사이코패스들이 우락부락하지 않고 이웃 주민처럼 친근하게 생겼다며. 크게 부릅뜬 눈이 긴장으로 잘게 떨렸다. 뻐끔뻐끔 아가미 호흡을 하듯 입만 벙긋대고 있자 남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 벌레는 어디에.”
“…이쪽으로 오세요.”
남자가 나지막이 뇌까렸다. 먼저 앞서 걷는 남자의 뒤를 뒤따랐다. 혹시나 내 발소리가 거슬릴까 싶어 한 걸음 내딛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길쭉하게 뻗은 복도를 가로질러 양쪽으로 난 공간 앞에서 남자가 멈춰 섰다. 그는 잠시 뒤를 돌아 나를 힐끔 내려다보다 바로 좌측 주방으로 방향을 틀었다. 주방에 벌레가 있나 봐요. 분위기를 풀어 보려 말문을 열었으나 남자는 묵묵부답이었다. 일언반구 없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스산하면서도 고요한 분위기에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훔쳐 냈다.
“저, 저기.”
고압적인 분위기를 가르며 떨리는 목소리가 허공에 흩어졌다.
주방 안쪽, 베란다 문 가까이 다가선 그가 문고리를 힘주어 돌렸다. 음산하게 삐걱대는 문소리가 흡사 비명처럼 느껴졌다. 그는 힐끔 나를 보았다가 베란다 문을 완전히 열어젖혔다. 벌레가 안에 있는 게 아니라, 베란다 밖에 있는 건가.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쫓았다. 문턱을 넘어 고개를 갸웃했다. 실내에서 드는 조명 외에 베란다는 어둑어둑했다.
“…저기요?”
떨리는 목소리로 남자를 불렀다. 그가 천천히 뒤를 돌며 피식,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과 눈빛, 입매에 비스듬히 내걸린 웃음에 긴장으로 뒷목이 뻣뻣하게 굳었다.
남자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다가온 만큼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문턱에 발뒤꿈치가 걸려 휘청하다가 가까스로 손을 뻗어 벽을 짚었다. 그사이, 코앞까지 다가온 남자가 나를 건조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남자의 눈동자는 지나치게 검었다. 검게 그을린 재 같았다. 다 타고 신회만 남은 것처럼.
“아…, 그, 저기….”
벌레는 어디에…. 멍청하게 중얼거리는 내 말마디가 먼지처럼 부서졌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냥 보냈을 텐데.”
남자는 뜻 모를 말을 여상하게 내뱉었다.
“그게, 무슨….”
그 순간, 남자가 내 입을 축축한 액체가 묻은 손수건으로 틀어막았다. 무방비하게 들이켜진 싸한 내음이 코와 목구멍으로 흡입되었다. 두 눈을 짓부릅뜨자 뒤통수에서 얼얼한 둔통이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뻑, 하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시야가 흐려지며 마주 선 남자의 품으로 힘없이 거꾸러졌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힘겹게 들어 올린 눈꺼풀이 반사적으로 빛을 좇았으나, 시야는 암전 속에 있는 듯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맸다. 무언가가 눈을 가리고 있다고 자각한 것은 그다음이었다. 거센 파도처럼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씨근대며 거친 숨을 몰아쉬다 고개를 좌우로 돌려 보았다. 어떻게…, 어떻게 된 거지. 두통이 이는 머리로 기억을 되짚어 정신을 잃기 이전을 떠올렸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냥 보냈을 텐데.’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지는 낮은 목소리에 몸을 거칠게 뒤챘다.
-덜그럭!
“윽….”
원하는 만큼 들리지 않은 손이 관성으로 팽팽하게 당겨졌다. 나 지금 묶여 있는 건가. 손목과 발목에서 이질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묶여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자유를 잃고 묶여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 남자인가. 마지막에 본 사람도 그이고, 내 입을 막은 것도 그다.
거꾸러지는 내 몸을 받아 준 사람 역시….
무감해 보이던 남자의 얼굴이 머릿속에 희미하게 그려졌다. 잡티 하나 없는 깨끗한 이마를 가린 앞머리와 그 사이에 끝없는 어둠으로 침잠하는 눈동자.
“…정신이 들었나 봅니다.”
멀지 않은 거리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쁘게 내쉬던 숨이 순간 멎으며 오싹함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누, 누구세요.”
“누구인지 말해도 모를 겁니다.”
“살려, 살려 주세요. 저를 왜…, 저를, 저는….”
그래도 이름은 알려 줄까. 희소한 그가 자신을 이호연이라 소개했다. 예민하게 선 귓가에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앞에 섰다는 존재감이 느껴졌다. 그는 내 목덜미에 느린 숨을 흘렸다. 파르르 어깨를 떨자 쇳소리가 절겅거리며 크게 울렸다. 내 떨림과 두려움, 무섬증, 절박함을 느낀 그가 커다란 손으로 뺨과 귓불을 살살 문질러 왔다. 그의 손길이 시발점이 되어 눈가가 뜨거워지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눈을 가린 헝겊이 축축하게 젖었고, 숨 또한 물기에 젖어 들었다.
“쉬-.”
달래는 그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차분하고 지나치게 다정했다. 마치 연인을 대하는 듯 따스한 손길이 이어졌다. 그는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을 꼼꼼하게 닦아 주었다.
“왜, 흑…, 읏.”
“말했잖습니까. 다른 사람이었다면 적당히 돌려보냈을 거라고.”
남자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갖고 싶게 생겨서.”
그게 이유의 전부라는 듯 말한다. 그것만으로 남자인 나를 상대로 이런 짓을 벌였다는 걸 납득할 수 없었다.
“자, 이제 서로 알아 가 볼까요.”
“…사, 살려 주세요. 잘못, 했어요.”
“괜찮아요. 별일 없을 겁니다.”
“…….”
“이름.”
“…….”
“이름, 말해야죠.”
남자의 숨결이 지척에서 느껴졌다.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는 순간, 화들짝 놀라 몸서리치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반항하는 내 턱을 강하게 옥죄어 쥐며 낮게 속삭였다.
“물지 마세요. 아프고 싶다면 물어도 좋고.”
밀고 들어오는 뜨거운 살덩이에 숨이 막혀 왔다. 컥컥대며 그의 혀를 받고, 구석구석 집요하게 훑는 행위에 밭은 숨을 할딱거렸다.
“하, 하아…, 하…….”
악력에 강제로 벌어진 턱이 빠질 듯 아팠다. 남자는 내 턱을 놓고 귓바퀴 부근을 엄지로 문지르며 낮게 웃었다. 천천히 귓불로 내려온 그의 손가락이 턱을 쓸어내렸다.
“이름.”
“…예준, 정예준이에요….”
“정예준. 이름도 예쁘네. 잘 지내 봐요, 우리.”
남자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느껴졌다.
부드럽고도 우아한 어조였다.
After and Too Much Information
1. 이호연은 주식을 놓친 정예준을 위로하기 위해 상반기 인센티브 전액을 예준의 통장으로 이체해 주었다.
2. 이호연이 정예준의 생일, 카테터 시도 실패 후 권연벌레와 함께 지낸 기간은 3일이다.
3. 정예준은 권연벌레에게 밥풀 두 알을 제공했다.
4. 정예준은 카테터의 신세계를 맛본 후 윤상우에게 넌지시 물어보기도 했다.
5. 윤상우는 여자 친구인 강은아와의 관계에서 밑에 깔리는 입장이다.(여공남수)
Play list
밤하늘 잡아주세요(Title)
데이무드 VENUS
페퍼톤스 공원여행, 계절의 끝에서, Salary
Postscript
All For You.
정예준이 벌레를 잡는 순간과
이호연이 정예준을 잡는 순간에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