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ENUS (18/25)

VENUS

[창작자] RTF팀 | 20XX.10.11

안녕하세요, RTF팀입니다.

오늘은 기쁜 소식 두 가지를 전하려 합니다.

첫 번째, 여러분의 많은 성원으로 후원금 1,300%를 달성했습니다!

프로젝트 막바지 작업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라 공지가 늦었습니다. 1,300%의 달성 기념 선물은 팀원들과 아이디어를 모아 즐거운 귀농 여행이 될 수 있도록 준비해 보겠습니다. 또한, 목표한 금액보다 큰 후원금이 모인 만큼, 양질의 콘텐츠를 제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두 번째, 곧 다가올 에 데모 버전으로 참가합니다.

참가 당일 현장에서는 한 챕터를 체험해 볼 수 있고, 온라인에서는 데모 버전을 다운로드 받을 수 있는 링크가 활성화됩니다! 계절의 끝에서 “Return to The Farm”을 즐겨 보세요!

데모 버전 피드백을 취합하여 내년 상반기 정식 출시 목표로 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이호연의 생일 직후 게임 출시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들이 휘몰아쳤다. 가위바위보 스낵 게임이 걸린 티저 사이트부터 펀딩 종료 일정이 맞물린 것이다. 전송이는 어영부영 또 한 주를 흘려보내기 전에 오늘만큼은 반드시 데모 버전 출시 방향을 정해야겠다며 세 사람을 소집했다.

클로즈베타로 가까운 지인 몇몇에게 시험 운영을 해 볼지, 아니면 오픈베타로 펀딩 커뮤니티 회원 200명을 대상으로 초대 링크를 배부할지 의견이 분분했다. 클로즈베타는 모수가 적었고, 오픈베타라고 해 봐야 이미 관심을 둔 유저를 대상으로 하지만 얼마나 참여할지 미지수였다. 실제 테스트를 해 봐야 알겠지만, 베타에서 효용 가능한 데이터가 모일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회사에 뿌려 봐? 업계의 블루칩 전송이의 시나리오가 녹아난 대작!”

“사업 준비 중이라고 아주 광고를 하지 그러냐.”

전송이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호연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안 되지, 안 돼. 내 월급 구멍을 벌써 놓을 순 없지.”

머리를 쥐어뜯는 전송이를 측은하게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커뮤니티 공지는 공지대로 하고, 인디 게임 카페 같은 데에 올려 보는 건요?”

“괜찮은데?”

내 의견에 강준성이 나쁘지 않은 의견이라며 동의했다. 제작자 카테고리도 있으니, 업계 관계자들도 분명 있을 테고, 아마추어 게임에 관심을 둔 라이트 유저나 헤비 유저도 다수 모일 것 같았다. 어떤 점이 진입 장벽이 되고, 어떤 점이 이탈에 크게 작용하는지 확인할 수 있을 터였다.

“예준 씨 의견도 좋아요. 그런데 공개된 곳에 올릴 거면 차라리 판을 더 키우는 게 어떤가 싶은데.”

“어떻게요?”

이호연을 돌아보며 묻자 그가 손끝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전송이와 강준성을 바라보았다.

“작년에도 이때쯤이었던 것 같은데…, 스토어 게임 페스티벌.”

이호연이 말한 인디 게임 페스티벌은 휴대폰 소프트웨어 플랫폼인 G 스토어 코리아에서 진행하는 게임 행사로, 인디 게임을 제작한 개인이나 법인이 참가할 수 있었다. 참가 게임 중 TOP 20 내에만 들어도 스토어에서 지원하는 엑셀러레이터 프로그램 참가 기회를 얻을 수 있고, 상위권에 들면 상금까지 거머쥘 수 있었다.

“좋은데요?”

전송이가 제일 먼저 긍정했다.

“그러게요. 진짜 판이 커지는데?”

강준성도 머릿속으로 이것저것 계산해 보았는지 눈을 굴리기 바빴다.

“근데 저희 참가할 수 있어요?”

“참가 자체는 문제가 아닌데.”

내가 어떤 부분을 걱정하는지 이호연도 수긍한 눈치였다. 펀딩이야 특정 유저 층을 이룬다지만, 페스티벌은 규모부터 다르다.

“일단 참가 기간인지 한번 볼게요.”

전송이가 노트북을 켜서 바로 참가 신청 기간을 확인했다.

“와, 마침 신청 기간!”

“그럼 신청부터 넣자.”

이호연의 대꾸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참가 신청 URL을 채팅 방에 올렸다.

“개발자 센터 통해서 하는 거라 신청은 선배가 하고 알려 주세요. 음, 만약 이거 되면 대표자 준비도 해야 하네.”

전송이가 눈가를 찡그리며 입술을 잘근 짓씹었다. 그녀는 타자로 무언가 적어 내린 뒤, 노트북을 덮고 쭉 기지개를 켰다.

전송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그녀가 어떤 기분일지 조금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련함과 두려움, 기대감이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었다.

데모 버전이 나온다고 끝이 나는 게 아니었다. 데모를 준비하며 걸린 시간보다 더 오랜 기간이 걸릴 수 있었다. 투자 유치까지 성공해 직장을 그만두어도, 대표자로서 책임질 일들이 무수히 많을 터였다.

프로젝트를 하며 겪은 전송이는 돈에 얽매이지 않는 것 같았다. 순전히 좋다는 마음 하나로 움직이는 사람. 그건 이호연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도 충분한 연봉을 받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처음에야 막연한 호기심과 이호연의 부추김으로 시작했지만, 단계별로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부터는 어느새 나도 진심이 되어 있었다. 팀원 간에 합이 잘 맞았던 것도 있고, 전송이의 꼼꼼한 오더와 이호연의 지지, 그리고 오랜 친구인 강준성 덕에 퍼포먼스를 낼 수 있었다.

내심 나는, SG플레이를 그만두고 RTF에 합류할까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오래전부터 게임 관련 일을 해 보고 싶기도 했고, 현업보다 더 마음이 기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호연의 반응이 부정적이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든 항상 지지해 주고 독려해 준 그였기 때문에 넌지시 드러낸 마음을 이번에도 응원해 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조금 더 생각해 봐요.’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할 텐데, 괜찮겠어요?’

그에게서 나온 답은 의외로 부정에 가까웠지만, 모두 날 염려한 답변이었다.

똑같은 IT라도 GUI와 게임 UI는 차이가 있었다. 웹디자인으로 사회 첫 스타트를 끊은 내가 포트폴리오를 수십 번 다듬어도 게임 회사에 취업할 수 없었던 현실적인 여러 이유들이 있었고, 이호연도 그걸 너무나 잘 알기에 진심으로 걱정해서 나를 말린 거였다. 지금껏 쌓은 커리어도 있고, 서른 중반에 직무를 바꾸겠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니까.

“그럼.”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혼자 상념에 잠겨 있다가, 이호연의 목소리가 들려 정신을 차렸다.

“페스티벌 참가 시기 맞춰서 다 같이 제주 여행이나 가 볼까요? 워크샵 겸, 데모 출시 파티 겸.”

그는 팀원들에게 의견을 물으며 내게 시선을 맞췄다.

“제주도…!”

데모 버전 논의가 끝나기 무섭게 숙소 위치, 먹거리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이호연은 김사훈에게 받은 투자비에서 남는 돈으로 비행기 삯을 하고, 숙소나 식대 등 나머지 비용은 각자 부담하면 될 것 같다며 설명을 더했다.

“저 혹시 안 불편하면,”

강준성이 눈치를 보며 주저하다 말을 꺼냈다.

“와이프 같이 가도 되나요? 와이프 비용은 제가 대고요.”

“그럼 난 친구랑!”

“한 사람당 파트너는 한 명씩만.”

떨어진 답변에 신이 난 강준성과 전송이가 각자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간 고생한 만큼 뽕을 뽑겠다는 의지가 느껴질 정도로 들뜬 모습이었다.

“너는? 넌 안 데려와?”

강준성의 물음에 눈을 데굴 굴리며 손사래 쳤다. 나는 흘끔 시선을 들어 이호연을 살폈다. 내 눈빛을 알아차린 그가 고개를 기울여 작게 속삭였다.

“둘이 재밌게 놀다 와요.”

나지막이 속삭인 그의 입매에 호선이 그려졌다.

또 하나의 추억이 담길 캔버스 위에 탐스러운 코스모스가 개화하고 있었다.

**

출발 인원은 7명으로, 기존 멤버 4명과 강준성의 아내인 권윤화, 그리고 전송이 친구 최지서가 함께했다. 여기까진 사전에 언급된 인원이라 괜찮았지만, 이호연이 휴가 사실을 통보하는 과정에서 김사훈이 알게 되어 자신도 따라가겠다고 생떼 아닌 생떼를 부려 그도 워크샵 멤버에 포함되었다.

서로 인사를 나누는 동안, 이호연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확히는 한 사람을 향한 불만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이라 유독 시선이 가는 남자. 트렌치코트를 입고 밀짚모자를 눌러쓴 그는 이호연의 친구이자 전송이의 선배인 모아 대표 김사훈이었다.

“넌 진짜.”

“아 왜애, 투자자가 자기가 투자한 개발사 파티에는 얼굴 비춰야지.”

싱글싱글 웃음을 흘리던 김사훈이 내 옆에 다가와 서며 친근하게 어깨에 팔을 걸쳐 왔다. 고개를 숙인 그의 얼굴이 귓가에 닿는 것 같았다. 화들짝 놀라 뻣뻣하게 몸을 굳히자 이호연의 눈빛이 서슬 퍼렇게 빛났다.

“호연이 껌딱지 씨네, 반갑습니다. 잘 부탁해요.”

“어, 어어.”

주변에 들리지 않게 작게 속삭인 말마디에 당황한 내가 눈을 데굴 굴렸다. 장난기가 가득 묻어난 어조에 몸이 배배 꼬이는 것 같았다. 이호연이랑 꽤 오래 붙어 다니긴 했지만 껌딱지라니! 얼굴에 홧홧한 열이 몰렸다. 대학 동기이자 실리콘밸리에서 내도록 본 사이이니만큼, 이호연의 성향을 알고 있으리라 짐작하긴 했지만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올 줄이야.

“얼마나 좋아, 풀 빌라 독채까지 지원해 주는 투자자님이 어디 있어.”

“알겠고, 예준이부터 놔.”

으르렁대듯 짓씹어 말한 이호연이 김사훈을 낚아채어 멀찍이 떨어뜨렸다.

“이번엔 또 뭐예요? 둘이 진짜 만나기만 하면, 아주.”

전송이가 깊게 팬 미간을 꾹꾹 누르며 피곤하단 기색을 내비쳤다. 학부 시절부터 지겹지도 않느냐며 묻는 그녀의 태도에서 장난기가 느껴졌다. 투닥거리지만 서로가 서로를 너무나 잘 아는 사이. 어떻게 보면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다 가슴과 배 사이를 쓱쓱 문질렀다. 뭐지?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예준 씨, 이쪽으로.”

이호연이 큰 덩치로 나와 김사훈 사이를 막아섰다. 친구보다 먼저 나를 챙긴 게 내심 기분이 좋다가도, 이번 여행에서 이호연의 몰랐던 점을 더 많이 알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순간 머릿속을 스쳤다.

공항에서 곧장 숙소로 이동하며 장을 보고 체크인을 마쳤다. 연예인이나 공인이 예약하거나, 촬영 장소로 자주 이용된다는 숙소는 비싼 숙박료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무척이나 넓고 깨끗했다. 방도 많은데 인테리어가 조금씩 다른 데다 전부 침대가 있어 어디를 써도 좋을 것 같았다. 독채에 딸린 온수 풀장과 불을 피울 수 있는 너른 테라스가 따스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방 배정은 둘이 온 사람은 둘이, 혼자인 사람은 혼자 쓰는 것으로 정해졌다. 1층 큰 방은 강준성, 권윤화 부부가, 중간 방은 전송이, 최지서가 쓰고, 2층 작은 방 세 개는 나, 이호연, 김사훈이 쓰게 되었다.

배정받은 방에 짐을 두고 1층으로 내려와 냉장고를 정리 중인 이호연 옆에 다가섰다.

“호연 씨, 이따 같이 수영해요.”

“수영복 가져왔어요?”

야채 칸에 채소를 넣던 이호연의 손이 멈칫했다.

“네, 풀장 있다고 해서 챙겼는데….”

“수영복 보자마자 서면 안 될 텐데.”

낮게 웃는 이호연의 팔뚝을 꼬집으며 얼굴을 붉혔다. 둘이 온 것도 아니고, 이 인간이 못 하는 말이 없어. 목소리를 낮추며 이호연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다음에 동남아 여행 가서 수영복 입고, 입고…….”

“입고 물속에서 하자고?”

굽혔던 무릎을 펴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무슨 물속에서 그걸 해요?! 미쳤나 봐, 진짜!

“…두 사람 1년 넘지 않았나.”

뒤에서 느껴진 기척과 툭 뱉어진 목소리에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라 헛숨을 들이켰다. 심장이 발목까지 한 번에 추락하는 기분이 이런 걸까. 자이로드롭을 탔을 때 이런 기분일 것 같았다.

김사훈이 팔을 쭉 뻗어 생수를 꺼내 뚜껑을 따 벌컥벌컥 들이켰다.

“다 티 난다, 다 티 나.”

다 같이 온 여행지에서 징글징글하다는 타박이 이어졌다. 다른 팀원들도 알면서 모른 체하고 있을 게 틀림없단다. 그런가? 강준성이나 송기현도 얼마 전부터 끼고 다닌 반지를 궁금해하긴 했었는데. 괜스레 낯이 뜨거워 구시렁대는 그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해요.”

“껌딱지가 죄송할 건 아닌데, 다 저 도둑놈 잘못이지.”

그는 4살 차이도 도둑은 도둑이라며 이호연을 향해 혀를 내둘렀다.

“김사훈.”

매섭게 떨어진 일갈에 김사훈이 투덜대며 뒤를 돌았다.

“네에, 네, 갑니다, 가요. 아오, 나도 누구 데려올 걸 그랬나.”

거실로 나간 김사훈은 소파에 늘어져서 TV를 시청 중인 전송이와 최지서에게 말을 걸며 자연히 섞여 들었고, 나도 이호연 옆에 있다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한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휴식을 보내는 방법은 저마다 제각각이었다. 따뜻한 풀장에서 수영을 하고, 선선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선베드에 기대어 낮잠을 자거나 챙겨 온 비디오 게임을 거실 TV와 연결해 편을 나눠 즐겼다.

워크샵이라 페스티벌 참여 이후 상용 버전에 대한 논의가 이뤄질까도 싶었지만, 심사 진행 중인 게임 페스티벌에 대해선 거의 언급이 없었다. 가볍게 스치듯 ‘언감생심, 순위권에만 들면 좋겠다’라거나 ‘노출이나 많이 되면 좋겠다’는 말이 툭툭 뱉어지는 게 고작이었다. 이호연도 챙겨 온 노트북으로 서버나 트래픽, 다른 이슈가 없는지 잠깐 체크만 하고 그대로 덮어 버렸다.

준비된 바비큐에 가져온 와인과 술을 곁들이고, 테라스에 불을 피워 2차로 위스키를 취향껏 마셨다. 깜깜한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으며 한밤의 공기가 냉랭하게 날을 세웠다. 테라스를 정리하고 거실에 모인 사람들 얼굴이 전부 울긋불긋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때쯤, 전송이와 최지서는 먼저 방으로 들어가 버렸고 강준성은 억지로 버팅기다 취기가 올라 권윤화의 부축을 받으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이호연과 김사훈 그리고 나, 셋이 남고서야 김사훈이 취기가 오른 얼굴로 입매를 샐그러뜨렸다. 나와 이호연을 번갈아 바라보던 그가 해죽 웃으며 콧소리를 냈다.

“진작 사석 좀 만들지 그랬냐아.”

말끝을 늘어뜨린 김사훈이 이호연을 타박했다. 제일 친한 친구에게조차 1년 가까이 꽁꽁 숨기고 보여 주지 않은 게 못내 섭섭한 모양이었다. 이호연이 워낙 이런 쪽으론 말이 없긴 하니까. 나에 대한 감정 표현은 진솔한데, 연애 초반엔 그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입 밖으로 통 내질 않아 많이 답답했었다. 지금은 어떤 스타일의 옷을 선호하고, 어떤 음식을 못 먹고, 즐기는지 함께한 시간으로 알게 되었지만.

“조심해야지. 넌 이쪽도 아닌데.”

이호연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날카로우면서도 섬세한, 이호연다운 배려인 셈이었다. 김사훈이 서운해하더라도 그의 위치는 공인에 가까웠다. 아래에 직원만 500여 명인데, 대표자 주변에서 불필요한 가십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더구나 모아 플랫폼이 급격하게 커지며 IT 뉴스 일면에 ‘실리콘밸리에서 영입된 개발자’로 몇 차례 이호연도 대외에 알려졌다. 길을 오갈 때 사람들이 알아볼 정도는 아니어도(알아보면 연예인이지), 업계가 좁으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김사훈을 집으로 초대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이호연은 자기 영역에 대한 구분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내게 같이 살자고 한 이상 그 아파트에 나를 제외한 누군가를, 설령 절친한 친구라고 해도 들이려 하지 않을 터였다.

“야, 그래도 친군데….”

입술을 비죽거린 김사훈이 서운해하며 스트레이트로 잔을 꺾어 마셨다.

“1순위 친구지.”

“정말?”

“0순위가 예준 씨라 그렇지.”

당연한 걸 말하게 한다며 이호연이 시큰둥하게 답했다.

“으웩.”

김사훈이 진심으로 짜증 난다며 잔을 테이블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껌딱지 씨는 이호연 어디가 좋아? 성격 나쁘기로는 세상 제일인데.”

타깃을 나로 바꾼 모양인지 김사훈이 나를 보았다.

글쎄, 어디가 좋은 걸까. 김사훈 말마따나 처음엔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나 싶었는데, 어느덧 내가 아니면 모든 것이 무용한 것처럼 구는 다정한 이호연만 남아 있었다. 성격 나쁜 거야, 섹스할 때만 집요하다 싶은 구석이 있는 거지 다른 건 뭐. 이제는 내 삶에 완전히 스며들어 버린 이호연이라서, 어떤 점이 좋은지 물으면 뻔하디 뻔한 답만 나올 수밖에 없었다.

“다 좋아요.”

“…바퀴벌레들 같으니라구.”

눈가를 화득 찌푸린 김사훈이 툴툴거렸다. 바퀴벌레라는 지칭에 이호연의 주먹이 잘게 떨렸다. 진솔한 반응에 나는 설핏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1년 동안 이미지 메이킹 한 건 아니겠지?”

김사훈은 내가 알면 이호연과의 연애를 여러모로 다시 생각할 에피소드가 제법 많다며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귀가 쫑긋 섰다. 이호연의 학부 시절부터 실리콘밸리 생활을 속속들이 아는 사람이라 그런가. 정확히는 학부 때 어땠는지 궁금했다. 티 하나 없이 깨끗하고 서늘한 눈빛은 그때도 마찬가지였을까. 서른이 아니라 스물 초중반에 만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풋풋하고 여물지 않은 이호연이 알고 싶어졌다.

“궁금하지? 알려 줄까?”

“어땠는데요?”

“이놈이 처음엔 너무 재수가 없는 거야. 말투도 싸가지가, 어휴.”

“야.”

이호연이 적당히 하라며 김사훈을 노려보았다.

“맞잖아. 아직도 기억한다고. 예준 씨한테도 그랬어요?”

“저는, 어어-.”

내 대꾸에 김사훈이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고개를 살짝 돌려 이호연을 바라보자 그가 삐친 듯 입매를 비죽거렸다. 아니, 첫인상이 안 좋았던 건 사실이잖아요.

잡고, 300미터를 어찌 잊으리오.

“얘는 술자리도 잘 안 나왔어.”

이호연의 신입생이 언제였는지 머릿속으로 셈하여 거슬러 올라갔다. 그 시절만 하더라도 선배들 말이 곧 법이었다. 그건 내가 신입생이던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예술 대학이라 군기를 잡는 일도 타과보다 심했고, 술자리도 빈번했다. 참가비가 없다 해도 선배들이 낸다며 부득불 끌고 가 술을 진탕 들이부었다. 과 동아리를 비롯해 인맥을 위해 들었던 연합 동아리와 총회 등 술을 마시기 위한 명분으로 삼을 각종 모임이 학기와 방학을 가리지 않고 이어진 것이다. 1학년 때를 생각하면 술밖에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호연은 시험을 앞두고 있거나 불필요한 인맥이라 생각되는 모임에는 걸음조차 하지 않았다고 했다. 소외될 법도 한데, 이상하게 이호연 주변에는 사람과 일거리가 넘쳤다고.

김사훈은 신입생 환영회부터 인사도 퉁명스럽고 뻣뻣한 놈이라 가까이 지내지 말자고 생각했는데, 같이 제대한 동기가 둘뿐이라 어쩔 수 없이 함께 다니게 되었다고 했다. 제대 후에는 정보만 쏙쏙 빼먹거나, 과제나 스틸할 생각으로 친하게 지냈다며 낄낄 웃었다. 나중에는 그런 계산 없이 이호연이 좋아졌다며 낯 뜨거운 말을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다.

“제대하고 3학년 때였나. 과제로 자체 소프트웨어를 개발해서 냈는데, 그거 보고 신은 공평하구나. 성격을 앗아 가고 능력을 줬구나, 생각했다니까.”

김사훈에게 집중한 나를 못마땅한 듯 쳐다보던 이호연은 결국 술만 홀짝였다.

“송이도 얘랑 못 해 먹겠다고 운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개과천선했지.”

처음부터 게임 기획으로 방향을 잡은 전송이가 게임 기획서나 전투 밸런스 안을 짜 오면 그 자리에서 면박을 주고 빠진 확률과 대미지 처리는 어찌할 것인지 달달 읊어 쫓아냈다고 했다.

“술이나 마셔. 더 마셔라, 더.”

이호연은 포기한 듯 김사훈의 잔에 거듭 술을 채웠다.

김사훈은 이호연이 한국에서 미국으로, 다시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며 연애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 것 같았다고 말했다. 무른 맛도 없고 꼬일 대로 꼬인 인간을 누가 데려갈 것이며, 데려가더라도 이호연과 오랜 연애가 가능할까 의심했었노라 덧붙였다. 성향을 알게 된 건 실리콘밸리에서였고, 커밍아웃인지 아웃팅인지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이성보다 동성과 더 가깝게 지내는 모습이 자주 보여 한참 후에 동성애자인 걸 알았을 때도 그러려니 했다고.

“아무트은, 이놈이 못살게 굴면 오라구우.”

“이 새끼가?”

“아, 아야, 수작 아냐, 새끼야, 동생 같아서 그렇지.”

그리고 난 이성애자라고. 있는 힘껏 꼬집힘 당한 김사훈이 불콰해진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팔을 문질렀다.

“호연 씨, 저도 올라가 볼게요.”

“벌써요?”

아쉬움을 내비친 그에게 눈매를 접어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김사훈이 더 취하기 전에, 자리를 피해 주는 게 맞을 것 같아서였다. 항상 내게 맞춰 생활하는 이호연도 이런 자리는 오랜만일 것이다. 계단을 오르며 흘끔 뒤를 돌았다. 무덤덤하고 냉정해 보이지만 입매에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더 빨리 비켜 줄 걸 그랬나. 저렇게 좋아하는 모습 보니 좋긴 하네.

2층으로 올라와 침대에 드러누워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평소보다 더 빨리 취기가 오른 것 같았다. 처음 보는 사람도 있고, 긴장해서 그런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내게도 오랜 친구들이 있다. 윤상우와 강준성 두 사람이 있고, 그들과 연결된 동기들도 여럿 있었다. 가끔 놀자는 연락에 나가서 논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호연과 전송이, 김사훈의 친분에 어쩐지 가슴 한구석에 멍울이 진 기분이 들었다. 나도 그 안에 같이 있고 싶다는 그런 욕심. 최진우 기획자에게서 느꼈던 질투와는 또 다른 감정이었다. 입 밖으로 내면, 이호연은 그런 생각 하지 말라고, 더 잘하겠다고 스스로를 통제할 게 분명했다.

“…창피해.”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폭신한 베개에 뺨을 부볐다. 아냐, 자야지. 혼자 괜히 이상한 감정에 젖어서는.

침대맡 탁자에 꽂아 둔 충전기 케이블을 끌어다 휴대폰과 연결하려는 순간, 화면 알림창이 뜨며 알림 UI가 겹쳐 보였다. 살며시 고개를 든 졸음이 뒷걸음질 치며 자취를 감춰 버렸다.

[<모아> Bugkiller 님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모아> Bugkiller 님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모아?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멍한 표정으로 알림창을 탭 해 앱을 실행했다.

[3. - Bugkiller]

[잡아 줘요. - Bugkiller]

“뭐야, 이게.”

실없는 웃음이 절로 입가에 맺혔다. 친구랑 술이나 마시라고 자릴 피해 준 지 얼마나 됐다고.

-어떤 벌레예요?

새록새록 추억이 머릿속에 풍선처럼 둥둥 떠다녔다. 메신저로 보내도 되는 내용인데 굳이 모아 앱을 이용한 이호연이 귀여워 웃음이 가시질 않았다. 키득거리며 답장을 보내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가을이 저물고 곧 겨울이 오는데, 제주라 그런가.

[5?? - Bugkiller]

5만 원이면 꽤 큰데? 문자 내용을 확인하며 복도를 살펴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맞은편 방문을 똑똑 두드리자 닫힌 문이 벌컥 열리며 몸이 기울어졌다. 나를 붙든 이호연은 술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벌레를 보고 놀란 건지 불그스름하게 얼굴이 상기돼 있었다.

“진짜 벌레예요?”

“봤는데, 분명 봤는데 어디론가 갔어요.”

미간을 찌푸린 그가 나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러니까 저랑 같이 자요.”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지만(찾고 싶지도 않고) 벌레가 나온 방에선 못 잔다. 그러니 네 방에서 같이 자자. 예준아, 예준 씨, 응? 제발. 안달복달 매달리는 그를 보며 눈매를 가느스름하게 떴다.

“진짜…?”

또 무슨 술수 같은 거 꾸미는 거 아니지? 나랑 같은 방에서 자 보겠다고 없던 벌레를 만들어서 모아 앱까지 이용하고, 그런 건 아니겠지.

“응. 내가 왜 예준 씨한테 거짓말을 해.”

“흐음-.”

“예준아, 응?”

“좋아요. 이리 와요. 근데 김사훈 대표님이 알면 난 몰라요.”

이호연을 끌고 내 방으로 돌아와 문을 걸어 잠갔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아침에 깨우려고 문을 열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뒤를 돌아 손을 뻗어 이호연의 뺨을 쓰다듬었다. 긴장이 풀린 그의 얼굴이 이제야 평온해 보였다. 정말 뭐라도 나타났던 모양이네. 그의 옷자락을 쥐고 까치발을 들었다. 쪽, 하고 입을 맞추자 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아 받쳐 주었다. 쪼듯 가벼웠던 입맞춤이 깊은 키스로 이어진 건 찰나의 순간이었다. 내가 먼저 그의 입을 가르고 혀를 집어넣었다. 알싸한 치약 냄새와 함께 숨결에서 느껴지는 독한 위스키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가쁜 호흡이 오가며 숨결이 금세 뜨겁게 달아올랐다.

한참 서로의 입술을 탐하다 반걸음 뒤로 내가 먼저 물러났다.

“하아…. 불 끌게요. 먼저 누워요.”

“아쉽다.”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린 이호연은 단둘이 왔어야 했다며 투덜거렸다. 아니면 처음부터 독채가 아니라 호텔로 잡아 별실을 쓰든 했어야 잠자리를 갖기 수월했을 거라고 툴툴댔다.

“빨리 누워요. 안고 자요.”

아쉬운 대로 안고 자자는 내 제안에 후다닥 침대 벽면에 등을 대고 누운 이호연이 팔을 벌렸다. 품으로 들어오라는 제스처에 못 이긴 척 파고들었다. 그의 가슴에 이마를 대고 꼼지락거렸다. 조금 전까지 되지도 않는 질투를 하고 있었던 걸 그가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한참 후, 고른 숨소리가 느껴졌다. 이호연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규칙적으로 뛰는 박동을 자장가 삼아 눈을 감았다.

“…사훈이가 예준 씨를 많이 궁금해했어.”

자는 줄 알았던 이호연의 목소리가 머리맡에서 들려왔다.

“대표님이요?”

이호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1년 정도 되면 나를 주변에 소개를 할까 싶었다고 말했다. 가까운 사람들부터 한 명씩. 내가 부담스러워하지 않는 선에서 자기 사람들을 보여 주려 했다고. 강릉 바닷가에서 내 시간을 저에게 달라 고백했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함께하고 싶은데 내 생각은 다를까 봐 고민이 많았다는 그에게 나는 두 눈을 멍하니 끄먹거렸다.

“호연 씨….”

창피하게도 나는 이호연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서, 그 안에 들어가고 싶어서 혼자 끙끙거리고 있었는데, 결과적으론 그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에도 말했잖아요.”

“…….”

“형이랑 하는 모든 것들, 프로젝트, 같이 살게 된 거 다 좋아요. 계속 함께 있고 싶어요.”

언젠가 말했던 진심이었다.

어떻게 연애가 매일 새로울 수 있을까. 때로는 타오르는 불꽃같이 사랑하고, 때로는 서로의 감정을 할퀴어 다툴 수 있다. 삶에 섞여 드는 과정에 언제나 즐겁고 행복한 일만 가득할 순 없는데, 신기하게도 나는 이호연과 연애를 시작하고 항상 새로운 세상을 맞닥뜨린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게 마냥 좋고, 행복하고, 놓치고 싶지 않았다. 다시없을 경험이라 더 소중한지도 몰랐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저 따라갔을 뿐인데, 그저 손을 잡고 뒤따랐을 뿐인데 이호연은 내가 한 걸음 내디디면 열 걸음만큼 다가와 주었다. 계기는 사소했다. 지금 생각해도 웃긴 벌레, 고작 벌레로 만난 인연. 누군가 ‘두 사람은 어떻게 만났어요?’라고 물으면 웃음부터 번질 것 같은 유쾌한 만남이었다. 작은 생명체가 나와 이호연을 만나게 해 주었고, 일상의 사소함이 쌓이고 쌓여 내 미래를 전부 바꾸어 준 것 같았다.

“역시 빨리 분당으로 가야겠다.”

나를 품에 안고 빈틈없이 옥죈 이호연이 중심부를 가볍게 치대어 왔다. 등골을 지분대던 이호연의 큰 손이 엉덩이를 움켜쥐며 옆으로 벌리려 했다. 달아오른 열감이 그대로 느껴져 얕은 신음을 내뱉었다.

“올라가면, 저번에 한 거…, 또 해 봐요.”

부끄러워져 두 눈을 꼭 감았다.

“어떤 거?”

해 본 게 워낙 많아야지. 장난기 서린 음성에 이호연의 가슴팍을 밀어 내며 엉덩이를 뒤로 움찔 내뺐다.

“그, 그러니까, 묶는 거……, 아 몰라, 잘 거예요.”

“사랑해.”

귓바퀴를 도는 따스한 고백이 가슴 깊숙이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RTF(Return to The Farm) - 20XX G 인디 게임 페스티벌 Top 3 선정작]

[게임즈데일리 – 인디 게임 탐방! 새로운 귀농의 정의, RTF 모바일]

[전송이 다락방스튜디오 PM 인터뷰, 리얼리즘을 강조한 매력적인 스토리 라인과 소소한 즐거움이 담긴 IP 꿈꿔

‘RTF’는 지난 12월 인디 게임 업체 다락방스튜디오가 공개한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친근한 주제인 주식과 코인으로 주저앉은 주인공이 귀농을 결심하며 이야기는 전개된다. 데모 버전 스타트 캐릭터는 두 가지로, IT 귀농인과 상속인이 게임 스토리를 끌고 간다.

#후원자들의 관심과 애정으로 태어난 게임

후원은 8월부터 시작되었지만 실 개발은 그보다 이르다. 약 1년간 집요하고 또 꾸준하게 개발된 RTF는 개발을 진행하며 후원을 받았다. 후원은 초기 목표 금액에서 1,300%를 달성하며 1억 3천만 원을 모금하였다. 후원과 함께 지역 기반 플랫폼 ‘모아’의 김사훈 대표도 사비 투자 의지를 밝히며 업계 관계자들의 손길을 두루 거치게 되었다. (중략)

#인디 게임의 도약, 그리고.

전부가 알지는 못하겠지만 게임 회사를 다니는 사람들은 전송이라는 이름을 간혹 들어 보았을 것이다. 듣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3N 개발사를 거친 그녀의 이력에는 관심이 쏠린다. 수익화 시점에 퇴사 의지를 밝힌 그녀는 한국 게임 회사에서 게임 시나리오 라이터이자 기획자로, 그리고 디렉터로 활약해 왔다. 자신의 모든 경험을 RTF에 녹여 유저들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주기 위해 나아가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후략)]

성황리에 종료된 인디 게임 페스티벌은 우리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후보에 오른 RTF 모바일은 유저 심사단과 전문가 심사 위원 투표를 거쳐 3위에 오르며 시상식에 참여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렇게 이목이 집중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후보에만 들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근데 그게 정말로 이루어질 줄이야. 펀딩 1,300% 달성 때에도 믿기지 않아 어리바리하게 모니터만 바라보며 꼭 사이버 머니 같다는 우스갯소리를 했었는데.

전송이의 퇴사 소식이 들려온 건 시상식 후 일주일이 지나 보도 자료가 송출되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여러분! 좋은 소식 전해요! 투자 제안 받았습니다! - 전송이]

[저 내일 사직서 올려요! - 전송이]

대표자 인터뷰에서 대리인을 세우지 않고 본인이 직접 나선 것을 보고 퇴사가 내정됐구나 싶었다. 먼저 아는 체할 수 없어 직접 전해 줄 때 축하해 주려 기다리고 있었다.

인디 게임 페스티벌 상금 3천만 원과 펀딩 후원금 1억 3천만 원, 시리즈 A 투자 유치로 300억 원이 모이며 본격적인 상용화 작업이 시작되었다. 전송이의 업계 지인 몇몇과 소개로 합류한 사람들이 대거 세팅되며 기업체의 모습으로 발돋움한 것이다.

‘여러분, 같이 한 작업은 포트폴리오에 써도 됩니다!’

전송이의 퇴사 겸 창업을 축하하기 위한 술자리에서, 그녀는 팀원들을 향해 긴 시간 무보수로 최선을 다해 도와준 만큼 RTF 프로젝트가 다방면에서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간 사용한 비용에 대한 정산부터 마무리하고 수익률을 배분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나는 그녀가 사직서를 내고 며칠 지나지 않아 오후 반차를 냈다. 야근할 때를 제하면 항상 나보다 먼저 퇴근해 있던 이호연이 없는 아파트는 무척이나 조용했다.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다 머신기에서 커피를 내려 곧장 서재로 향했다. 서랍에서 꺼낸 외장 하드를 노트북에 연결해 파일을 찾아냈다.

[Portfolio_20XX_07]

업데이트 날짜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호연을 만난 게 8월. 그때부터 전혀 정리되지 않은 걸 보면, 그와 만나면서부터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이 많이 달라졌는지를을 체감하게 된다. 거의 2년에 가까운 작업물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정리할지 막막해 손으로 이마를 꾹 짚어 냈다. 이 프로젝트는 회사에 있는 자료니까 내일 가져오고, 이 부분은 대외비니 모자이크로. RTF는 디자인 시스템 전체보단 컨셉만 보일 수 있도록.

페이지별로 문서를 가다듬다 보니 이호연의 퇴근 시간이 다가온 것도, 그가 연락을 해 온 것도, 답장이 없는 나를 걱정해 퇴근을 하자마자 집에 들어온 것도 몰랐다. 나를 찾아 서재 문을 연 그가 성큼성큼 다가와 낮게 숨을 몰아쉬었다.

“연락이 없어서 무슨 일 있나 했어.”

차로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살면서, 오후 내내 연락이 안 되었다고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걸 보며 얼떨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어린애도 아닌데 이런 과보호라니.

“집중하느라고 몰랐어요.”

“별일 없었으면 됐고. 오늘은 간단하게 해 먹을까요?”

“좋아요. 거들게요.”

손만 씻고 나오겠다는 그의 뒤를 따라 거실을 가로질렀다. 앞서 걷는 너른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괜스레 코끝이 아려 왔다. 개수대 앞에 나란히 서서 나는 채소를 흐르는 물에 씻어 내고, 이호연은 내게서 받은 채소를 모양 좋게 썰어 접시에 올렸다. 소쿠리에 담긴 채소를 전부 씻은 후 고개를 들어 이호연을 바라봤다.

“형, 있잖아요.”

“열심히 해 봐.”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싱그레 웃음 지은 그는 내가 무슨 말을 꺼낼지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손 젖었는데 안아도 돼요?”

“어차피 이따 다 벗을 텐데.”

저녁을 먹는 것도 내가 체력에 부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농담을 짓궂게 해 왔다. 눈매를 휘어 웃는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내 무게를 안정적으로 받친 그가 등허리를 문지르듯 쓸어 주었다.

“뒤처지지 않게 잘해 볼게요.”

“언제든 돌아와도 돼. 원하면 모아 추천서 써 줄게.”

너는 이런 거 싫어하겠지만. 덧붙인 속삭임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내 자존심이나 성격을 이렇게 잘 아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또 있을까. 오랜 친구들조차 내 깊은 속내를 전부 알진 못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게 얼마나 고맙고 또 감동으로 다가오는지, 이호연은 알까.

“너만 힘들지 않으면 돼.”

전송이가 대표 자리로 올라가게 되면 지금처럼 챙겨 주지는 못하리라는 걸 나도 알았다. 이호연과 지금처럼 시간을 보내지 못할 수도 있었다.

혼자 이겨 내야 하고, 쟁쟁한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배우고 치열하게 덤벼야 겨우 따라갈 수 있을 터였다. 이용할 수 있는 만큼 이용해 달라며, 내 뺨에 입술을 비벼 오는 그의 품에 더 깊이 파고들었다. 뒤를 돌았을 때 이호연이 있다는 사실 하나로 나는 다시 한번 모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랑해요.”

“더 노력해야겠네.”

나에게 사랑받기 위해 더 노력하겠다는 이호연이 내 이마에 입술을 내렸다.

고민하고, 탐구하고, 계속해 질문을 던지고 싶었던 그날.

지금 당장 정답을 내릴 수 없지만 이호연과 함께라면 정답을 찾아낼 수 있을 것만 같았던 그날.

이호연에게 만나 보자며 내 마음을 전했던 그날.

어쩌면 나는 그날 이미 답을 알고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대책 없고 혼란스럽던 마음을 구체적으로 만들어 준 이호연이라는 사람의 정답을.

[Job Description – From. 전송이]

Want to Join the DARAKBANG Studio?

You love games and can’t wait to build the future of entertainment.

Job Type: Full-time

Job Requirements:

RTF Mobile Game UI/UX Design,

Unity or Game Engine Skills,

Passion for games and immersive entertainment!

같이 일합시다, 예준 씨!

*리얼리즘을 강조하기 위해 인디 게임 페스티벌을 그대로 가져왔으나 시기적 차이가 있습니다.

<잡아주세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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