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1. 예준 오피스텔 앞 / 밤 (17/25)

S#1. 예준 오피스텔 앞 / 밤

검은색 벤츠가 예준의 오피스텔 앞에서 비상등을 켠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가로등을 비스듬히 비낀다.

예준 들어갈게요.

호연 (깍지 낀 손을 힘주어 쥐며) 다음 주죠?

예준 (대답 없이 끄덕인다)

호연 하…, 어쩌죠. 나 또 설 것 같은데.

예준 일요일이에요, 아저씨.

예준은 깍지 껴 잡은 이호연의 손등에 입을 맞춘다.

예준 형.

호연 (픽 웃으며) 같이 올라가?

예준 (호연을 밀어내며) 아뇨, 그냥, 사랑한다고요.

예준이 안전벨트를 끄르며 후다닥 내린다.

Navigation(Rock, Paper, Scissors)

부동산에 정리 시기를 알리고, 집주인과도 짧은 통화를 마쳤다. 우연의 일치인진 모르겠지만 오피스텔 계약 만료 일자가 이호연의 생일과 맞물렸고, 10월 전주에 바로 그의 집으로 짐을 옮겼다. 유난일지 모르겠지만, 이사를 앞두고 3개월도 더 전부터 정리를 시작하길 잘한 것 같았다. 틈틈이 버릴 것을 버리고, 가구를 처분했다. 옷과 책이 전부라 30인치 캐리어 하나와 보조 가방, 박스 하나로 3년의 생활이 정리되었다.

이호연 집에 짐을 정리하는 것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휴가를 오후 반차만 써도 될 만큼 간소한 짐이었다. 책은 서재에, 옷은 드레스 룸에. 나만 이사를 준비한 게 아니라, 그 또한 내 짐을 둘 곳을 정리해 두었고 같이 살며 불편하지 않도록 여러모로 배려해 주었다.

연애와 동거는 확실히 다르다. 사귀는 동안 반 동거 가까이 살을 치대며 지냈다 해도, 같이 살아가는 건 다른 문제였다. 30여 년 넘게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걸 맞춰 나가야 하는 거니까.

깨끗한 거실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보다 옆에 앉은 이호연의 허벅지에 머리를 기대 누웠다.

분명 이전에도 이호연 집 소파에 누워 있거나, 그의 어깨에 기대어 TV를 시청하곤 했는데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돌아가지 않아도 되어서 그런가. 아니면 이곳에 계속 있어도 된다는 게 아직 와닿지 않아서 그런가. 가족을 제하고 누군가와 같이 사는 게 처음이라는 이유도 있을 터였다. 더구나 그 사람이 동성의 연인이라는 것도.

“기분이 이상해요.”

작게 중얼거리자 이호연은 내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다정히 말해 주었다. 이호연의 집이나 애인의 집이 아니라 내 집, 우리 집이 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이사도 했고, 큰일은 얼추 마무리되었으니까 어디 다녀올까.”

내 뺨과 목덜미를 부드럽게 훑으며 이호연이 물었다.

그러게, 한시름 덜었으니 바람이라도 쐬러 다녀오는 게 좋을까. 지난 1년 동안 주말이나 샌드위치 휴가 때면 늘 그와 함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지난겨울 다녀온 하와이 여행을 시작으로, 프로젝트 진행에 영향이 없는 선에서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일정만 맞으면 떠나고 보았다.

“호연 씨 생일 겸해서 다녀올까요?”

상체를 일으켜 바로 앉아 그의 뺨에 쪽 소리 나게 입술을 맞췄다. 다가오는 토요일이 생일이니 분위기 전환으로 호텔에서 하루 쉬다 오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늦게 챙겨서 미안.”

회사 일과 이사, 사이드 프로젝트 진행으로 연인의 생일을 미리 챙기지 못한 게 미안해 그의 목에 팔을 둘러 마주 안았다. 이호연은 괜찮다며 등을 쓸어 주었다. 자꾸 이렇게 받아 주니까 어리광만 느는 것 같단 말이지. 아무리 그래도 생일인데, 서운하지 않을 리 없었다.

“뭐 갖고 싶은 거 있어요?”

얼마 남지 않았지만, 갖고 싶은 게 명확하면 좋을 것 같아 직접 의견을 물었다.

“흠, 글쎄. 뭐가 좋을까.”

이미 받은 것 같다며 웃음 지은 그의 손이 꾸물꾸물 아래로 향했다. 내가 이 집에 들어온 게 그렇게나 좋은 걸까. 숙원 사업 하나를 해치운 것처럼 후련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티셔츠를 걷어 올린 이호연의 손끝이 가볍게 젖꼭지를 퉁겼다. 바르르 떠는 내 반응을 두 눈에 담은 그가 나지막이 희소했다.

“아으, 이따가요.”

“저번 예준 씨 생일처럼 집에서 보내도 좋고, 아니면 호캉스도 좋고.”

지분거리는 손을 밀어 내며 금세 차오른 숨을 몰아쉬었다.

“나가야 하잖아.”

눈가가 화득 찌푸려졌다. 가슴만 매만졌을 뿐인데 허리춤 아래가 움찔움찔 떨렸다. 더 하다간 아침에 갈아입은 속옷을 또 바꿔 입어야 할 것 같았다.

거부하는 내 엉덩이를 토닥거린 그가 손을 빼냈다.

나와 이호연은 전송이와 강준성의 퇴근 시간에 맞춰 1번 출구 앞으로 나섰다.

진행 중인 RTF 프로젝트가 1년 반의 준비를 마치고 오픈을 앞두고 있었다. 최근에는 메신저보다 주마다 한 번씩 만나 진행 상황과 잔여 업무를 공유하고 있었다.

솔직히 크라우드 펀딩이, 그것도 인디 게임이 1,300%의 달성률을 기록하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60일의 펀딩 기간 동안 1억 원이 넘게 모금된 것이다. RTF의 스토리텔링이나 아트워크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내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로그라이크 구현 방식의 귀여운 아트가 시선을 사로잡은 것이다. 게임업 현업자인 두 사람이 붙은 데다, 풀스텍 개발자인 이호연의 개발력도 한몫했고, 막바지를 앞두고 김사훈의 조력으로 완성도가 크게 올라갔다.

재미있을 것 같다는 사소한 이유에서 그가 도움을 주었는데, 단기 인력 충원에 그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네 사람 다 직장이 있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날 수 없는 부분들엔 김사훈이 나서 주었다. 음악 감독이 섭외되어 게임 사운드가 제작, 삽입되었고, 내가 작업한 UI의 밸런스를 맞춰 준 2D 아티스트도 그의 지인 중 하나였다. 심심하던 게임에 이펙트가 더해지며 감각적이고 역동적인 연출이 입혀졌다. 인력이 늘어난 건 좋은 일이었지만, 어쨌든 주요 핸들링은 이호연이나 전송이가 하였기에 내 일이 달라지거나 줄어든 건 아니었다.

역 근처 펍에 둘러앉아 버거와 피자를 주문하고 맥주까지 곁들였다. 음식보다 먼저 나온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켠 전송이가 깊게 숨을 내쉬었다.

“빨리 런칭하고 투자까지 가야 수정과의 잣 같은 회사를 때려치우든가 하는데.”

단숨에 잔을 반이나 비운 그녀가 입매를 비죽거렸다. 다른 세 사람과 달리 전송이는 이번 사이드 프로젝트가 기업 투자 유치 단계까지 간다면 그 즉시 다니는 회사를 그만두고 RTF에 전념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업계에서 사이드 프로젝트를 하는 사람들은 많다. 회사 생활을 하다 친해진 사람들끼리 개발 공수가 크지 않은 앱을 만들어 광고 수익만 나눈다거나, 스낵 게임을 만들어 배포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다만, 그것도 법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 진행됐다. 물론 허점은 있었다. 지인들끼리 알음알음 ‘걔 요즘 프젝한다더라’라거나, ‘투자까지 갔대’라는 가십이 술자리에서 종종 언급되곤 했으니까(반대로 ‘망해서 다시 사회의 품으로 돌아갔다더라’라는 말도 심심찮게 들려왔다).

무작정 사업 하나만 보고 달려들기엔 나를 비롯해 팀원들은 초년생이 아니었고 모험 정신이 투철하지도 않았다. 달리 말하면 사회의 쓴맛을 너무 많이 본 케이스였다. 스스로를 지킬 안전선이 필요한 거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회사 책상에 앉아 일한 만큼의 수당을 받고, 저녁부터 밤까지 미래에 시간을 투자한다.

이렇다 보니 다른 사람들에 비해 여유 시간이 부족한 건 당연한 결과였다. 특히나 전송이는 기획서 작업 완료 후 사업 PM을 도맡았던지라 몸이 열 개라도 부족했다. 마무리 작업에 속해 있는 브랜딩과 프로모션, 펀딩 참여자에게 발송할 키트 등 챙길 것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개발된 베타를 정교화하는 작업도 병행해야 했기에, 수정 요청에 따라 이호연과 나도 덩달아 바빠졌다. 사이드 프로젝트는 말 그대로 사이드. 원래 중장기로 일정을 본다지만, 그와 사귈 무렵부터 시작한 일이 1년이 다 되도록 끝날 듯 끝나지 않아 애가 타기는 마찬가지였다.

“다음 달이 오픈인데 이벤트로 미니 게임 하나 기획해서 티저에 띄울까요?”

전송이가 맥주를 한 잔 더 주문하며 의견을 물었다.

“바빠 죽는다면서 그거 기획할 여력은 되냐.”

이호연이 신종 셀프 고문이냐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니까 미니 게임. 인게임에 붙이는 거 말고요. 가위바위보나, 뽑기 간단한 거.”

때마침 주문한 피자가 테이블 중앙에 놓였다. 이호연이 피자를 내 앞접시에 먼저 덜어 주고, 제 접시에도 덜어 갔다. 제 몫의 피자를 덜어 간 전송이는 핫 소스를 듬뿍 뿌렸다.

“그럼 보상도 있어야 할 거 아냐.”

이호연이 맥주를 입으로 가져가며 물었다. 이벤트를 한다면 당연히 상품이 따라붙기 마련이다. 게임에 붙이지 않는 간단한 작업이라도 결국 계정에 쏴 주어야 하기 때문에 사이트에서 서버와 호환하든, 쿠폰 ID를 발행해 인게임 안에서 우편 처리하든 해야 했다.

“그냥 고급 곡괭이 정도 주면 되지 않나? 녹템은 좀 그런가? 파템으로 해야 후킹되려나.”

피자 도우를 씹던 그녀가 보상 아이템 레벨을 셈했다.

“오픈 이벤트니까 희귀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눈치를 보다 입을 열었다. 게임 UI 작업을 하다 보니, 자연히 기본적인 게임 시스템을 익히게 되었다. 고급 아이템이라면 축복 강화석도 하나, 희귀 아이템이라면 그것만 나가도 충분할 터였다. 이벤트로 받았는데 강화하다 실패하면 기분만 상할 테니까.

“그렇죠?”

내 긍정에 전송이가 반색하며 빨리 선배를 꼬셔 달라 부추겼다. 이벤트용 상자 하나 밀어 넣는 건 쉽지 않느냐며 쉬지 않고 설명을 더했다. 어차피 가입한 회원들 다수가 이벤트용 게임에 참여할 테고, 회원에서 참여자 DB만 추출해 실시간 배치로 쏘아 주면 그만이라고.

“…잠깐.”

잠시 고민하던 이호연이 두 눈을 빛내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획서 쓸 시간 없을 테니까 프로세스랑 정책만 짜서 가져와.”

“역시! 고마워요, 선배!”

환하게 웃는 전송이를 보며 옆에 앉은 이호연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괜찮겠어요? 회사도 바쁘다면서. 속살거리자 그가 테이블 밑으로 내 허벅지를 주물럭거렸다.

“재미있을 것 같아서.”

의도가 분명한 손길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노려보는 나를 향해 장난기 서린 화답이 돌아왔다.

**

전송이가 기획한 미니 게임은 사이트 내에서 즐길 수 있는 ‘가위바위보’ 게임으로, 계정당 한 번의 참여가 가능했다. 세 번의 기회 중 두 번 이상 이기면 이장님의 선물 상자를 보상으로 받을 수 있었다. 꼭 과반을 이기지 않아도 참가 보상이 뒤따랐다. 웹 작업이기 때문에 GUI 가이드가 나와야 했고, 자연히 내 일로 배정되었다. 바로 작업하면 좋겠지만, 이호연 생일 기념으로 준비한 호캉스가 있어 다음 주 월요일부터 작업에 착수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인천에 위치한 호텔까지 차로 이동하며 차창을 통해 흐르는 구름을 구경했다.

어영부영 10월. 회사 일이 바쁘지 않아 다행이지, 자칫 새 프로젝트라도 맡았다면 회사와 연애, 사이드 프로젝트로 정말 정신이 없었을 것 같았다. 진급 후 연봉이 올라 통장에 찍힌 금액이 달라진 걸 확인하고 0에 수렴하던 애사심이 1포인트 정도 오른 참이었다. 회사 일도 연애도 전부 잘 해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부가적인 일이 바쁘니 회사 일이 눈에 들어올 리가. 이채선의 회의실 호출이 없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다니는 중이었다.

“언제 다 준비했대.”

뻥 뚫린 도로를 타며 이호연이 눈매를 휘어 웃었다. 전날 야근을 핑계로 사 온 꽃다발을 몰래 뒷좌석에 두었다. 꽃을 본 이호연은 빨리 내려서 제대로 보고 싶다며 연신 뒤를 흘끔거렸다. 매일 바쁜 일상에 쫓기듯 살고 있는데, 생일이라고 호캉스를 준비한 내게 고맙다며 손을 뻗어 왔다. 그의 손을 깍지 껴 잡으며 마주 웃었다.

“호연 씨가 바쁘죠. 저는 괜찮아요. 맛있는 것도 먹고, 오늘 내일 재밌게 놀다 와요.”

아, 빨리 선물 보여 주고 싶다. 열어 보고 마음에 들어 하면 좋겠는데.

이호연의 손등을 쓰다듬으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호텔과 분리된 건물로 이호연을 이끌었다. 일반 호텔 건물이 아닌 프라이빗 부티크 호텔로, 이호연의 생일을 위해 특별히 예약한 곳이었다. 프로젝트 모임이 있던 날 밤, 운 좋게 예약 취소된 방을 구할 수 있었다. 웰컴 드링크를 마신 뒤 체크인을 하고 호텔리어의 안내를 받아 6층으로 이동했다.

방에 들어와 문을 닫기까지, 현대적인 감각으로 꾸며진 내부를 들여다보는 그를 흘끔 올려다봤다. 미니바, 테이블과 소파, 소품 하나하나에 시선을 둔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이전에 스마트 워치를 선물 받았을 때 내가 저런 표정을 지었을까? 놀란 기색과 감동한 표정을 보자 뿌듯함이 마음 한구석에서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팔을 벌려 고개를 까딱였다. 자, 빨리 내 품에 안겨요.

“안 비쌌어?”

선선히 다가와 나를 와락 끌어안은 이호연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쉿, 오늘은 돈 얘기하면 안 돼요.”

흠흠, 나도 쓸 땐 쓰는 애인이라고.

“어쩌지.”

너무 좋아. 벌써 흥분한 이호연의 팔에 불끈 힘이 솟았다. 단단히 죄어 안은 허리를 바짝 끌어당기자 그의 중심부가 허리께에 닿았다. 이호연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좋긴 한데, 으앗, 안 돼! 오늘 계획했던 일들 시작조차 못 했다고! 비비지 마아! 팔을 뿌리치며 멀찍이 거리를 두었다.

“이, 이따 밥 먹고…!”

덧붙인 외마디에 이호연이 아쉬운 듯 눈매를 이지러뜨렸다.

“큰 의미 두지 말고 그냥 뒹굴다 가면 좋을 텐데.”

그는 냉큼 빨리 품에 안기라고 손을 까딱거렸다.

이 아저씨가 진짜. 총알 장전한 것도 아니고, 세운 거 안 내릴래? 안 돼, 안 된다고. 같이 맛있는 저녁도 먹고, 선물 개봉식도 해야 한다고. 이 비싼 호텔에서 섹스만 하다 끝낼 순 없어!

주춤주춤 간을 보다 손으로 엑스 자를 그리며 도리질 쳤다.

“더 오면 나 소파에서 잘 거예요!”

생일날 호텔에서 독수공방하고 싶지 않으면 밤까지 기다리라는 엄포에, 이호연이 상처받은 눈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더 건드리지 않겠다는 대답을 듣고서야 가까이 다가가 그를 웰컴 와인이 있는 테이블로 데려갔다. 저녁으로 먹을 룸서비스를 주문하기 전에 가볍게 한잔하며 분위기를 잡아 볼 생각이었다.

“좋아요?”

“응. 몰랐는데 나 꽃 좋아하네.”

차에 두어도 될 꽃을 호텔 방까지 들고 온 이호연은 무척이나 만족한 것 같았다. 품에 안고 몇 번이나 향을 맡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다, 네가 줘서 좋은가 보다.”

“꽃 처음 사 봤어요.”

시선을 내리며 부연했다. 누군가를 위해 꽃을 사는 건 처음이었다. 스물 초반의 풋사과 같은 연애에서도 꽃다발을 선물한 적은 없었으니까.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다면 그동안 이벤트로 종종 시도해 볼 걸 그랬다. 지난 기념일을 머릿속으로 헤아렸다.

“처음이라 더 좋네.”

뒤집어서 벽에 걸어 둘지, 아니면 업체에 맡겨 무드 등을 만들어 달라고 할지 고민하는 그를 만류했다. 또, 또, 스케일이 저세상으로 가고 있다.

룸서비스로 버거와 스테이크를 주문해 먹고서야 부른 배를 두드리며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같이 거품 목욕을 하자는 그를 먼저 욕실로 밀어 넣고, 준비한 선물을 꺼내 따로 들어섰다. 욕조에 물을 채운 그가 입욕제를 풀고 있었다. 동그란 대리석 욕조 앞 소파에 케이스와 헝겊 꾸러미를 두고 입고 있던 옷을 천천히 벗었다.

“오늘은 드디어 처음부터 같이 목욕해 보나.”

“이게 뭐라고…….”

기대에 찬 눈으로 날 보는 이호연을 향해 쭈뼛대며 주억거렸다.

연애를 시작하고 곧 1년이 된다. 사귀며 별의별 체위도 해 보고, 기구도 써 봤지만 관장을 하거나 뒤를 씻는 일만큼은 그의 손을 타지 않았다. 목욕을 하더라도 후희를 즐길 때나 조심조심 이호연의 손에 몸을 맡기곤 했다. 사귄 이후 한결같이 나를 원하고, 내 모든 걸 먹어 치우고 싶다는 눈빛을 보내는 그를 볼 때마다, 그리고 늘 내가 상정한 한계를 쉽사리 무너뜨리고 끌어 올리는 그에게 오늘만큼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내어 주고 싶었다. 곧 1년이니까, 오늘 자정이 지나 내일이 되면 이호연의 생일이니까.

“이리 와요.”

따끈한 김이 올라오는 욕조에 발부터 적셔 나갔다. 종아리부터 무릎, 허벅지, 엉덩이까지 따뜻한 온기가 퍼졌다. 꾸물꾸물 이호연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엉덩이 부근에서 느껴지는 살덩이에 손과 발을 꼼지락거렸다. 늘 갖는 잠자리인데, 꼭 처음 밤을 보내는 것처럼 부끄러움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저건 뭐야, 또 뭘 준비했어.”

목에 물을 끼얹어 준 이호연이 내 목덜미에 코끝을 문지르듯 비볐다. 느껴지는 숨결에 다물린 입술이 절로 벌어지며 야트막한 탄성이 번졌다. 이호연의 손이 물 안에서 젖꼭지와 둥근 배를 쓰다듬었다. 나는 그에게 등을 기댄 채 점점 차오르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기만 했다. 관장약과 글리세린 튜브를 챙겨 왔지만, 막상 입 밖으로 그것들을 말하려니 두려움이 내 발목을 지그시 잡아 오는 것 같았다.

“…나 나갈까?”

주저하는 나를 위하는 목소리가 조곤조곤 들려왔다. 이호연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며 내 뒷목과 어깨선에 고루 뽀뽀해 주었다. 그가 몸을 일으키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허둥거리며 그를 붙잡았다.

“하, 할 거예요.”

이호연은 내 어떤 모습이든 좋겠지만, 나는 아직 두려웠다. 더러운 것도 있고, 어느 누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이런 모습까지 보여 주고 싶겠는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호연 앞에서 관장까진 못하겠어. 약을 넣고 배변감이 차오르는 걸 고스란히 보일 수는 없다. 그래도 평소에 늘 관리하고 있으니까, 손가락을 넣고 흐르는 물에 씻는 정도는 그에게 보여도 괜찮을 것 같았다.

고개를 내저으며 몸을 바로 세웠다. 욕조를 벗어나 바닥으로 내려와선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가 수전을 들어 올렸다. 엉덩이 주변을 더듬어 손가락 끝을 밀어 넣고 꼼꼼하게 씻어 냈다. 나를 바라보는 이호연의 집요한 눈빛에 가슴이 쿵쿵 뛰었다.

“으으, 읏…….”

허리를 튼 채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내벽 점막을 손가락 두 개로 훑어 나갔다.

앉아 있던 이호연이 벌떡 일어섰다.

“…예준아.”

“아흑!”

부스로 성큼 들어온 이호연이 조그맣게 벌어진 구멍에 제 손가락을 우악스레 밀어 넣었다. 부르르 떨며 붉어진 눈시울로 그를 올려다보자 반대편 손으로 턱을 거칠게 돌리며 내 입술을 물어 삼켰다. 안에서 얽힌 손가락과 파고든 혀에 정신이 혼몽해졌다. 축축하게 젖은 소리가 위아래에서 울려 퍼졌다.

“으응…, 후.”

“나가자.”

나를 안아 올린 이호연의 목에 팔을 둘렀다. 침대에 나를 눕힌 이호연이 욕조 앞 소파에서 케이스와 꾸러미를 챙겨 왔다.

“괜찮아?”

누운 채 고개를 끄덕였다. 웰컴 와인부터 식사에 곁들인 와인까지. 뜨거운 열기에 확 취기가 오른 것 같았다. 멍한 눈으로 호텔 천장을 올려다보다 끙끙대며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저게 메인인데, 정신을 놓을 수야 없지. 짧은 기간이지만 열심히 준비했단 말이야. 손끝에 걸린 케이스를 조심스레 열었다. 사실은 좀 더 무드를 잡고 주려고 했는데, 이래저래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반지?”

“형이 준 것들에 비하면 막 엄청 비싼 건 아니에요.”

백화점 브랜드 중에서도 무난한 편에 속했고, 웨딩 밴드로 구분되는 제품도 아니었다. 그렇다 해도 명품은 명품. 두 쌍에 근 1년을 모은 500만 원 돈이 훅 빠져나갔긴 했지만, 그간 이호연이 내게 준 선물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우리 사주와 공모주로 울적해하는 날 위해 자신의 성과급 전액을 통장에 보내 주기도 했고, 내 집을 따로 구했다면 더 큰 돈이 나갔을 텐데 주저 없이 같이 살자 권해 주었다. 단지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이호연에게 받은 것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그렇지만, 이호연은 반지만큼은 주저했다. 어쩌면 동성 연애가 처음인 내게 부담을 주기 싫었던 건지도 몰랐다. 첫 섹스를 앞두고 속도니 뭐니, 고민했던 걸 생각하면 내게 말하지 않았다 뿐이지 내심 혼자 속앓이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가끔, ‘왜 반지는 안 줘요?’라고 묻고 싶었던 순간이 더러 있었다(이미 속물 같은 면을 많이 보여 한마디 더 거든다고 날 싫어할 리는 없겠지만).

서로를 알아 가고, 취미를 공유하고, 함께 일하고 때로는 싸우며 발맞추어 나아가는 연애의 과정. 나 또한 이호연 못지않게 더 명확한 결속을 원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호연에게서 반지를 받을 날을 기다리느니 기회가 되면 그냥 내가 줘 버려야지, 생각했었다. 결심이 선 건 짐을 옮긴 다음 날이었지만. 회사에서 인터넷 전입 신고를 하고, 등본상 세대주 밑에 동거인으로 표기된 내 이름을 보며 가슴이 뭉글뭉글해졌다.

우리는 보통의 연인들관 좀 많이 다른 시작점이 있었다. 소개팅으로 만난 것도 아니고, 오랜 기간 알아 오다 연인으로 발전한 것도 아니다. 앱을 통해 만난 데다 성별까지 같았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걸 알기에,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고 싶기도 했다.

언젠가 서로의 길을 응원하며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더라도 나는 이호연이 아닌 다른 동성의 애인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오직 이호연에 한한다는 사실은 처음 그와 만나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변함이 없었다.

“마음에 들어요?”

이호연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며 뿌듯하게 웃음 지었다. 사이즈는 안 맞으면 교환해도 돼요. 일정이 좀 빠듯해서, 내 손에 가늠해 보고 샀거든요. 쑥스러워하며 살긋 웃어 보이자 이호연이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나 좀 울컥하는데.”

감동한 듯 이호연의 목소리가 미미하게 떨렸다.

“내년 내 생일엔 웨딩 밴드로, 알죠?”

이것보다 싼 거면 집에서 쫓아내고(내가 나갈 일은 없다) 가만두지 않겠노라 엄포를 놓았다. 나는 그의 너른 가슴에 이마를 부비며 키득거렸다.

“아무렴.”

이호연은 몇 백을 하든, 천만 원이 넘든 무조건 맞추어 바치겠다며 내 귓불을 핥아 주었다.

내 이벤트는 여기서 끝이었다. 행복해하는 이호연도 보았고, 이제 뜨거운 밤만 보내면 되겠거니 싶었는데, 나를 바라보는 이호연의 눈빛이 묘했다.

“오늘 내 마음대로 해도 되나.”

“응?”

“생일이니까.”

이호연이 음험하게 입매를 말아 올렸다. 잠자리에서 언제부터 허락을 받았다고 이러나. 이호연의 목에 팔을 두르고 상체를 허물어뜨렸다. 겹쳐 안고 그의 뺨에 입술을 맞췄다.

“뭔지 몰라도, 오늘은 다 해도 돼요.”

생일이니까. 뭘 해도 이해해 줘야지. 이호연의 너른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내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이호연이 손을 뻗어 베개 밑에서 금속의 사각 케이스를 꺼내 들었다. 술기운이 가신 눈을 댕그랗게 떴다. 베개 밑에 언제 저런 게. 가만, 저거 왜 이렇게 익숙하지? 언제 본 거였지?

“뭐, 뭐예요?”

“…카테터.”

이호연이 슬쩍 시선을 회피하며 우물쭈물했다. 충격으로 자연히 입이 헤벌어졌다. 저걸 아직도 안 버렸단 말이야? 저것 때문에 대판 했는데도?

반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지 얼마나 됐다고! 어떻게 바로 이럴 수 있어! 차게 식어 바들바들 떠는 나를 부둥켜안고 안달복달하는 이호연을 원망스레 노려보았다. 이호연이 부랴부랴 이마와 눈가, 콧대, 뺨 곳곳에 입을 맞추며 애교를 부려 왔다.

한 번만 해 보자, 응? 생일인데, 생일이잖아. 예준아, 예준아…….

어처구니없이 케이스와 이호연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해 보고 싶었으면 그토록 싫어하는 벌레와 이틀간 동거까지 하게 됐으면서 갖고 있었을까. 면도까지 해 봤는데 이것도 못 할까 싶어 체념한 듯 움츠린 다리를 벌렸다.

“아프면,”

“아플 일 없어. 진짜야. 넣자마자 가게 해 줄게.”

“그래도….”

“형 믿지?”

다치지 않게 하겠다며 케이스에서 기다란 금속을 꺼내 든 이호연의 눈에 어떠한 결의가 보였다. 머리를 숙인 이호연이 내 앞섶을 헤치고 자지를 입에 물었다. 뜨거운 숨결과 함께 혀가 귀두를 살살 훑자 허리가 움찔움찔 떨렸다. 쭙쭙대는 소리가 그가 입을 놀릴 때마다 선연히 퍼졌다. 볼이 홀쭉하게 패도록 빨아들였다가 놓아주고, 혀를 세워 요도를 콕콕 자극해 왔다. 욕조에서부터 예열된 몸은 금세 쾌감에 취했다. 새어 나오는 분비물을 단물처럼 빨아 삼킨 그가 시선을 들어 나를 올려다봤다.

“하으, 으, 나아…….”

강한 흡입에 사정감이 켜켜이 차올랐다. 바들바들 떨며 이호연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힘이 바짝 들어간 허벅지가 내 의지와 관계없이 후들거렸다. 사출을 앞두고 목을 뒤로 젖히자 이호연이 입을 떼고 만족한 듯 입매를 말아 올렸다. 사정을 허용치 않은 그가 붉게 달아올라 꺼덕이는 내 좆을 한 손에 쥐고 슬슬 문질렀다. 위아래로 쓸린 표피에서 맥박이 치는 것 같았다.

“갈 뻔했는데에….”

울먹이는 내게 고개를 저은 이호연이 팔을 뻗어 소독솜으로 날카로운 고리를 닦아 냈다.

“쉬이, 움직이지 말고.”

다리를 오므리면 안 된다며 어르는 이호연의 시선이 내 자지에 닿아 있었다. 그가 카테터 끝으로 요도를 툭 건드렸다. 길쭉한 고리에 점성의 체액이 질척하게 묻었다. 흐린 시야에 뾰족한 금속이 가물거렸다. 맺힌 눈물이 뺨을 타고 주룩 흘렀다. 저게 정말 들어갈 수 있는 거야? 긴장한 아랫배가 단단하게 굳었다. 꾸욱, 힘주어 누른 탓에 어깨가 빳빳해졌다. 두 눈을 부릅뜬 나는 알 수 없는 이물감과 찌릿한 둔통에 숨을 할딱였다.

“…앗, 응, 윽!”

“닿아? 느껴져?”

이호연의 어깨에 걸쳐진 채 뜬 다리가 흠칫흠칫 떨렸다. 다른 건 몰라도, 기다란 금속이 배 안쪽을 자극하는 것만큼은 알 것 같았다.

“으읏, 흐, 이, 이상해요…….”

바르작댈 때마다 건드려지는 감각에 정신이 어찔하게 뒤흔들렸다. 싸고 싶은데, 막혀서 쌀 수가 없는 상태. 아랫배에서 올라오는 요의는 꼭 사정을 앞둔 것처럼 느껴졌다.

어떡하지, 싸고 싶어. 입술을 잘근 짓씹으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파요?”

숨을 할딱이며 표정을 찌푸린 내 이마에 이호연의 이마가 맞닿았다. 도리질 치며 작게 웅얼거렸다.

“하으, 빼, 빼고 싶어요. 뭐, 뭔가 나올, 것, 같아. 화장실, 가고 싶어요.”

“기분 좋아서 그런 거예요. 더 기분 좋게 해 줄게.”

침대 위 굴러다니는 젤을 들어 손에 흠뻑 적신 이호연이 내 아래를 더듬거렸다. 치덕치덕 묻은 점성의 액체가 엉덩이 사이로 주룩 흘러내렸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이호연의 어깨를 밀어 냈다. 손가락이든 뭐든, 예민해진 몸으로 받아 낸다면 금방이라도 갈 것 같았다. 구멍 주변을 배회하던 손가락이 어렵지 않게 들어왔다. 하나, 둘, 셋까지 들어오며 질퍽질퍽 내벽을 찔러 대기 시작했다.

손가락 끝이 축축하게 젖은 내벽 점막을 가차 없이 긁어내렸다. 갈고리가 닿았던 전립선에 손가락이 닿자 파득파득 떨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시야가 하얗고 검게 점멸하기를 수차례, 짐승처럼 침을 질질 흘리며 이호연의 품에서 파들파들 떨었다.

“움직이면 안 돼.”

벌벌 떨며 허우적거리는 나를 달랜 그가 귀두 끝 고리에 반대편 손가락을 걸었다. 당겼다가 힘주어 누르는 탓에, 사출 없는 사정으로 재차 목이 뒤로 넘어갔다. 앞과 뒤가 꿰뚫린 채 한계치까지 달한 극렬한 쾌감에 몸서리가 쳐졌다.

“아흑, 흑! 아아! 그, 마안! 응!”

“…예준아, 안이 뜨거워.”

“하, 으아, 으응!”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나를 바라보는 이호연의 얼굴도 잔뜩 흥분한 것처럼 느껴졌다.

“빼, 빼 줘어…….”

“예쁘다, 예준아.”

“아냐아, 흑, 응, 나, 흐윽.”

훌쩍이는 내 뒤가 조금 더 벌어진 것처럼 부피감이 더해졌다. 허리가 굽어지며 분출이 막힌 요도에서 새어 나온 체액이 가슴을 타고 쇄골까지 주룩 흘러내렸다. 차츰 안을 파고드는 압력에 가슴이 쿵쿵 가쁘게 오르내렸다.

“뭐, 뭐 하는…! 아악! 으, 응!”

퍽, 하고 안을 때린 건 분명 손가락은 아니었다. 벌벌 떨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희부옇게 흐려진 의식에 불이 들었다. 지금 손을 다 넣은 거야? 손목까지 들어간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버, 벌어져어! 응! 형, 혀엉, 으아앗……!”

한계까지 벌어진 골반이 아려 왔다. 안을 세차게 후려치는 쾌감에 숨이 일순 멎었다. 요도를 막은 카테터만이라도 빼 달라고 하고 싶은데, 말은 쉽사리 언어의 형태로 맺어지지 않았다.

“예준아, 가위바위보. 이기면 빼 줄게.”

“미, 친놈, 으읏, 흐…….”

지금 이 상황에 가위바위보라니. 돌아도 단단히 돈 게 틀림없다. 도리질 치는 내 엉덩이를 가볍게 두드린 이호연이 다시 한번 고리를 만지작거렸다. 화들짝 놀란 내가 경련하며 이호연의 어깨를 붙들었다.

“보, 보오, 흑, 미친, 너어, 죽일 거야…….”

“예준이가 이겼네.”

내 안에서 손을 펼 시간조차 없었다며 이호연이 얄궂게 웃었다. 아래를 찧어 대던 이호연의 손이 느리게 꿈질거렸다. 나는 웅얼대며 싫다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웃음이 나와? 빨리 빼 줘, 빼 줘어. 빼 달란 말이야.

“아으, 흐으응……!”

내 완강한 거부에 이호연이 파묻은 손을 빼냄과 동시에 카테터 고리를 예고 없이 뽑아냈다. 요의와 함께 세찬 분비물이 가슴 위로 흩뿌려졌다. 꿰뚫릴 때와 마찬가지로 강한 쾌감에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전기에라도 맞은 사람처럼 축 늘어진 채 달달 떠는 내 다리를 벌린 이호연이 한껏 발기한 제 좆을 다물린 주름에 문질러 왔다.

“넣을게.”

“음, 후브, 흡.”

수월하게 삽입한 이호연이 상체를 내려 내 입술을 집어삼켰다. 콱콱 짓이길 때마다 분수처럼 찍찍 쏘아 대며 사정하는 통에, 배 부근이 흠뻑 젖었다. 밤은 이제부터라는 듯, 이호연이 허리 짓에 속도를 더했다.

이호연과 동이 틀 때까지 섹스하다 열 시가 넘어서야 간신히 눈을 떴다. 원래대로라면 조식을 먹고, 주변 산책을 하려고 했었는데, 세운 계획이 전부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옆에서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든 이호연의 뺨을 쓸었다. 간밤에 느꼈던 쾌감을 생각하면 아직도 아랫배가 지르르 떨렸다. 미국에서는 그런 걸 삽입해 자위하는 게 흔하다는 이호연의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님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가끔 (밤일로) 원하는 게 있다고 하면 들어줘야 하나.

그래도 가위바위보가 뭐야. 도대체 어떤 포인트에서 그걸 하겠다고. 얄밉기 그지없는 이호연의 얼굴을 냅다 꼬집었다. 볼에서 느껴지는 둔통 때문인지 이호연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해 보고 싶은 것을 다 해 봤다며 만족스럽게 웃음 지은 그는 나를 물고 핥아 대며 놓아주지 않았다. 젖꼭지가 따끔거리도록 깨물고, 꼬집어 댔다. 한동안 옷감에 스칠 때마다 움츠릴 것 같았다. 여태 수많은 밤을 보냈지만, 지난밤처럼 불타오른 이호연은 요 근래 오랜만이라 허리 아래로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까무룩 정신을 놓고, 다시 깨어날 때도 팽팽하게 부푼 좆이 내 안에 들어와 있었다. 힘들면 그만하고 자도 될 텐데, 기어이 나를 위에 앉히고 움직일 것을 종용하기도 했다. 아래에서 빠르게 치고 빠지는 뭉뚝한 살덩이에 짓이겨져 소변인지 정액인지 모를 분비물을 연달아 사출하고서야 창밖으로 드는 햇살을 보며 두 눈을 감았다.

“예준 씨…….”

일어났느냐며 나를 품으로 끌어당긴 이호연이 낮은 목소리를 냈다.

“예의 바른 이호연 모드네.”

툴툴거리는 내 이마에 입술이 닿았다.

“가위바위보 진짜, 못 잊는다, 내가.”

이호연과의 섹스가 기대되는 한편, 또 어떤 걸 준비했을까 무섭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뇌수를 녹일 것만 같은 쾌감을 생각하면 섹스하는 그 순간이 너무나 좋다가도, 팬티와 스타킹에 이어 면도와 구슬, 이제는 요도 자위까지 하게 된 걸 생각하면 보통의 커플이 다 이렇게 하나, 싶은 의문이 들기도 했다. 아니지, 하나 더 추가다. 가위바위보…….

그의 어깨를 가볍게 밀치자 이호연이 미안하다며 픽 웃었다. 전송이가 미니 게임을 언급할 때부터 생각은 했는데, 프로세스를 받고 꼭 한번 해 보고 싶었단다.

“…현생 가능해요?”

“하하, 근데 어제도 좋았어. 나는 매일 좋은데, 예준 씨는 안 좋았나?”

마주한 시선을 피했다. 어제는 나도 평소보다 더 열이 올랐던 게 사실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아저씨 손을 내 뒤로 전부 받았을 리 없지. 아직도 느껴지는 이물감에 꾸물꾸물 손가락으로 뒤를 짚어 보았다. 이호연의 자지를 받느라 팽팽하게 펴졌던 주름이 오밀조밀 다물려 있었다. 다음에 또 넣으려고 하면 당분간 각방 쓰자고 해야겠어.

“…같이 사는 걸 보류해야 할까 봐.”

“안 돼, 이미 동거인이야.”

서류상 묶였고, 못 나가게 가둬 두고 저만 보게 하겠다는 이호연을 향해 눈매를 가느스름하게 떴다.

“그, 그래도, 앞에…, 좋았어요.”

머뭇대며 말하자 이호연이 눈을 크게 떴다. 요도 자위가 그렇게 좋을 줄 몰랐다. 새벽, 카테터를 한 번 더 요도에 꽂고 바들바들 떠는 나를 끌어안은 이호연도 나 못지않게 평소보다 더 흥분해 있었다. 게다가 다시 넣을 때는 내가 넣어 달라고 애원할 정도로 허리를 뒤챘으니까. 차오른 배뇨감과 사정감으로 사출된 체액이 온몸을 다 적신 것 같았다. 특히나 귀두 끝에 매달린 고리를 뽑아 줄 때, 흰자위까지 내비치며 몸서리치는 날 내려다보던 이호연도 제어가 풀린 사람처럼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체크아웃하기 전에 한 번 더?”

“각방.”

“농담이야, 농담.”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귓바퀴를 돌았다. 사랑한다는 속삭임에 찬찬히 눈을 감았다. 월요일에 퇴근하고 반지 사이즈를 교환하러 가자는 이호연의 속살거림에 느리게 고갤 끄덕였다. 내년 생일 웨딩 밴드만이 아니라 올해 하반기 인센티브도 고스란히 바치겠다는 그의 약속에 설핏 웃음이 번졌다. 씻고 나가야 하는데, 침대와 맞닿은 창으로 들이치는 햇살이 너무나 온화해 한숨 더 자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30분 정도 더 자요. 나갈 때 깨워 줄게.”

“으응….”

“사랑해, 예준아.”

“나두…….”

사랑해, 이호연.

늘 사랑한다는 고백에 ‘나도’라는 말만 한 것 같아, 그의 이름을 부르며 사랑을 답했다. 토닥토닥, 규칙적이면서도 따스한 손길을 느끼며 그의 품에 더 깊이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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