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조각들 2
바람처럼 흐르는 시간은 우리를 봄에서 여름으로, 여름에서 가을 어귀로 데려다 놓았다. 이호연과 가을, 겨울을 보내고 봄과 여름까지 꼬박 사계절을 함께한 것이다.
“어땠습니까.”
“저는 미술관 좋아해서, 덕분에 잘 봤어요.”
싱긋 웃어 보이자 이호연이 담백한 미소를 지었다.
전시실에서 나와 미술관 밖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주변에 심긴 꽃들로 시선을 던졌다.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한 날이어서 그런지, 유독 피어난 꽃들의 색채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게 느껴졌다. 꽃잎 하나하나에 빛이 스미는 절경에 절로 기분이 구름처럼 폭신하게 들떠 올랐다.
이호연이 벌레를 싫어하다 보니, 함께 꽃구경이나 공원 나들이를 하는 일은 손에 꼽았다. 그 덕에 어딘가를 다닐 때에 자연히 시선이 조경이나 풍경으로 향하게 되었다. 홀로 충족감을 채우는 행위랄까. 느리게 걸음을 떼며 계단을 한 발 내딛는 순간, 강한 바람이 불어오며 귀가 먹먹해졌다. 주변 모든 풍경이 바람의 권속이라도 된 듯 붕, 떠올랐다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느닷없는 강풍에 가지에 매달린 꽃잎이 소낙비처럼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희미한 잔상처럼 번지는 그 장면 속으로 뛰어들며 환하게 웃었다. 꽃과 바람, 햇살이 몸을 감싸는 기분이다.
“시원해요.”
“카메라나 영상 말고, 눈으로 본 순간을 저장할 수 있는 저장 장치가 더 있다면 좋겠습니다.”
이호연이 내가 선 곳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그러게. 그런 저장 장치가 있다면, 뇌파의 영향을 받아서 재생, 일시 정지, 녹화를 거듭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클라우드 서비스처럼 개개인마다 저장할 수 있는 용량이 정해져 있는 거지. 가칭으로 정한다면 ‘뇌파에 따른 순간 기억 저장 장치’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기술이 발달한다면 나는 내가 살아온 서른 해 동안의 기록보다 최근 1년간 더 많은 양을 저장했을 것이다. 제공된 모든 용량을 전부 사용하고, 스토리지 확보를 위해 추가로 크레딧을 결제했을 터다. 그렇게 기록된 추억을 훗날 꺼내어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롱테이크로 촬영된 기록물은 과거를 생생하게 전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카메라로 시작한 대화가 생체, 화학, 인공 지능으로 주제를 확대해 뻗어 나갔다. 늘 비슷한 패턴이었다. 하나의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범위가 확대된다.
기술이 발달하기 전에 이 세상을 떠날 것 같다는 농담을 마지막으로 조수석 문을 열었다.
“정말 이렇게 보내도 괜찮습니까?”
“네?”
“생일인데.”
“딱 좋아요. 전시도 보고, 같이 밥도 먹고.”
생일이니 여행이라도 다녀오자는 제안을 받았지만 고개를 내저었다. 조용하고 안온한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고 해야 하나. 여행이 싫은 건 아니었지만, 다녀오고 나면 꼭 꿈처럼 현실감이 떨어져 며칠간 여운에 잠겨 있곤 했다. 하와이 때도 마찬가지였다. 와이키키 해변을 걸으며 수놓아진 별을 보고 사진에 담아 왔는데, 되짚어 떠올리려 하면 아른아른한 기분이 들었다.
“레스토랑도 예약 못 하게 하고….”
시무룩하게 답한 그가 시동을 걸었다.
조용하게 보내기로 작정하였으니, 식사도 당연히 집에서 해야 한다는 주장에 이호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전방 주차된 차를 매끄럽게 후진하여 빼냈다. 아트 센터 주차장을 빠져나온 차가 한적한 도로를 탔다. 주말인데도 도로는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
야탑역 방면으로 나아가던 차가 그대로 좌회전하여 판교를 향했다.
“스테이크라도 굽죠. 와인도 좋은 거로 따고.”
“그건 좋아요.”
“지금까지 다 반대였는데, 유일하게 찬성이네.”
비죽이는 그의 손등을 포개어 잡았다.
미디엄 레어로 구운 스테이크에 와인을 곁들였다. 집에 있는 재료로 간단히 만들었지만 소스나 플레이팅은 레스토랑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었다. 구운 아스파라거스를 우물거리며 마주 앉은 이호연을 향해 빙긋 웃었다.
“요리나 플레이팅 보면 호연 씨는 개발자 말고 셰프를 했어도 됐을 거 같아요. 아니면 화가나.”
“셰프는 정년퇴직하면 생각해 보겠지만, 화가는 예술에 대한 모욕일 겁니다.”
“모욕일 것까지야.”
킥킥 웃음을 터뜨리자 그가 정말이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다니는 것은 좋아하지만, 단지 조용하고 생각을 정리하기에 최적의 장소일 뿐이라고 선호의 이유를 덧붙였다. 붓을 쥐거나 연필을 쥔다면 추상화를 뛰어넘는 제3세계의 그림이 나오고 말 거라며 그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잠깐만요.”
이호연이 식사를 하다말고 벌떡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 이내 선반에 올려 둔 쇼핑백을 가지고 자리로 돌아왔다. 봉투를 내게 건네며 뜯어보라 고갯짓했다. 리본을 풀어 봉투 속을 들여다보니 자그마한 박스가 담겨 있었다. 고급스러운 재질의 박스 포장까지 뜯어내자 가죽 소재의 지갑이 단아한 디자인을 뽐내고 있었다.
“고마워요. 잘 쓸게요.”
매끄러운 가죽 표면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다가오는 10월, 그의 생일에 무엇을 해 주면 좋을까. 다 가진 양반이라, 뭘 주어도 있을 것 같은데. 어떤 걸 좋아할까. 으음, 아직 두 달 남았으니까 천천히 고민해 봐야겠네.
와인으로 고기의 텁텁함을 헹궈 낸 후 물까지 한 모금 마시고서야 식사를 마쳤다.
“밥도 다 먹었으니까 후식으로 케이크 자를까요?”
의자를 뒤로 빼내며 그에게 물었다.
“아니, 조금 이따가.”
이호연이 아직 중요한 게 남았다며 나를 침실로 이끌었다. 어둠이 스며든 침실은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서로 마주 보고 있다 고개를 갸웃했다. 이벤트가 또 있는 건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그가 직사각의 작은 상자를 꺼내었다. 스마트 워치 때를 떠올리며 다른 선물인가 보다, 싶었는데, 박스에서 꺼내 든 것은 울퉁불퉁하고 기다란 금속 막대였다.
“응…?”
“해 봅시다.”
“그, 그게 뭔데요?”
“예전에 말했던 재미있는 놀이.”
과거의 기억을 되짚었다. 나중으로 예고됐던 놀이는 이미 기억의 백로그로 아카이빙된 지 오래였다. 기다란 금속과 놀이가 무슨 상관관계인 거지. 저걸 뒤에 넣나? 날카로워서 위험해 보이는데. 눈살을 찌푸린 내 시선이 막대에 머물러 있다 불현듯 스치는 생각에 어깨를 흠칫 떨었다.
완벽하게 마무리될 것만 같던 생일이 실패한 생일로 탈바꿈되기까지 한 발짝만을 남겨 두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서, 설마.”
“그렇게 안 아파요.”
“미쳤어요…?”
“정말입니다. 요도 자위는 미국에서도 많이 하는 편이고. 예준 씨가 전에 사 왔던 팬티나 에그랑 비슷합니다.”
이 미친 인간아. 어떻게 요도 자위가 팬티랑 비슷한 레벨인 건데요. 그리고 그 에그는 내가 안 샀다니까? 아연하여 뒷걸음질을 쳤다. 훠이, 저리 가요. 저런 엄한 물건을 다른 날도 아니고 왜 생일날에 들이미냐. 살 떨리게.
“예준아.”
“안 돼. 이름 부르지 마요.”
“예준,”
“아아-! 안 들려요. 저리 가.”
이호연을 피해 달아나다 등 뒤로 벽이 닿았다. 그는 나를 벽에 가둔 후 다리 사이에 제 허벅지를 밀어 넣어 버둥대는 움직임을 완전히 봉쇄해 버렸다. 중심부에 닿는 단단한 근육에 앓는 신음이 반사적으로 터져 나왔다. 이호연은 내 목덜미에 더운 숨을 문지르듯 뱉으며 답지 않게 애교를 부렸다. 안 아플 거야. 생일 축하 기념으로, 응? 쪽쪽 입을 맞춰 오며 비비적거렸다.
왜 내 생일 축하 기념인데 저걸? 발버둥 치기도 전에 거듭 이어진 자극으로 중심부가 아릿한 둔통을 호소했다. 성기가 발기하며 귀두 끝에서 새어 나온 선액으로 바지 앞섶이 습하게 젖었다.
저항하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알아차린 그가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고개를 숙이자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그가 입을 벌려 혀를 내밀었다. 키스가 이어지는 동안 이호연이 나를 침대에 눕혔다.
“저거 싫어요. 진짜로.”
나 진지하다, 궁서체야. 그러니까 저 흉물스러운 거 치우라고.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알겠어요. 알겠으니까 허리 들어 봐요. 빨아 줄게. 바지 벗자.”
누가 봐도 미온적으로 뭉개려는 것 같은데. 의심을 거두지 못한 채 허리를 살짝 들어 올렸다. 그에 맞추어 이호연이 속옷과 바지를 단숨에 무릎까지 끌어 내렸다. 그가 내 바로 옆에 자리를 잡았다. 빨아 주겠다며 상체를 숙인 그가 내 성기를 입 안 가득 머금어 삼켰다. 분비물이 새어 나오는 귀두 끝을 뜨거운 살덩이가 부드럽게 휘감았다. 씻지 않아 큼큼하고 더러울 텐데, 그는 개의치 않고 빠는 행위에 집중했다.
“으, 으응.”
힘없이 다리가 벌어지며 허리가 들썩였다. 집요하게 혀를 놀리던 이호연이 기둥을 한 손으로 감싸 쥐고 흔들며 입술을 떼어 냈다. 아쉬운 마음에 보채듯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조금 더 핥아 주었으면 했다.
“더 해 줄까요.”
“으응. 좋아….”
멀어진 그가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성기 근처에서 느껴지는 숨결에 나른함이 번졌다.
기둥을 붙든 손과 뭉개지는 호흡, 고조되어 가는 분위기 속에 내 다리에 머리를 파묻은 이호연이 쭉쭉 성기를 빨아올리다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예준아….”
“흐, 으응.”
여린 표피를 손톱을 세워 자극하던 그가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한 번만 해 보면 안 될까…?”
뭘…? 어안이 벙벙해져 멀뚱멀뚱 바라보자 그가 조그맣게 ‘요도 자위’라고 중얼거렸다. 다른 곳으로 치운 줄 알았던 요도구를 주머니에서 슬그머니 꺼내는 모습에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시, 싫어!”
거리를 좁혀 다가오는 이호연의 가슴팍을 냅다 발로 차 버렸다.
“윽, 예준 씨.”
“가까이 오지 마요!”
버럭 소리 지른 나는 나뒹구는 그를 침실에 둔 채 바지를 추어올리고 거실로 달아났다. 미친 인간 같으니라고. 싫다고 했는데 기어이 해 보자고 해? 돈 거 아냐? 씩씩 치미는 화를 누르며 거실을 한 바퀴 돌아 그대로 주방으로 향했다.
“예준 씨.”
“오, 오지 마요.”
“안 할게요. 안 합니다. 정말로.”
“뻥쟁이 같으니라고!”
한입 가지고 두 말을 하다니! 노발대발하여 삿대질하다 말고 눈을 굴렸다. 차라리 욕실로 도망가서 문을 잠가 버릴 걸 그랬나. 이호연이 한 발자국씩 가까이 다가왔다. 마치 체포 직전의 용의자처럼 두 손을 들고 조심스레 거리를 좁혀 왔다. 잡히면 안 된다는 불안감과 두려움에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어…!”
눈앞에 손톱만 한 무언가가 꿈질대며 바닥을 기고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것을 향해 몸을 날렸다. 놀라 눈을 뜬 이호연이 내 이름을 불렀지만,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바닥에 손을 모은 채 웅크리고 그대로 고개를 들어 이호연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제 손에 벌레 있어요! 가까이 오지 마요! 가까이 오면 이거 풀어 줄 거예요!”
“지, 진정하고. 예준 씨…!”
벌레라는 말에 겁을 집어먹은 이호연이 뒷걸음질을 쳤다. 아파트에 등장한 첫 벌레였다. 파리하게 질린 낯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가 침을 꿀꺽 삼켰다. 손가락 사이로 벌레의 생사를 확인했다. 낙생원마을에서 이미 한 번 맞닥뜨린 전적이 있는 종이었다. 권연벌레. 권연벌레는 이호연이 거품을 물 정도는 아니지만 겁을 주기에는 적절한 벌레였다. 마침 시기적절하게 출몰한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손에 든 거 치워요.”
“아, 알겠으니까.”
“빨리!”
바락, 소리치는 나를 두고 이호연이 완전히 물러났다.
그가 기구를 치우는 동안 나는 빈 소스 통 뚜껑을 찾아 자그마한 벌레를 가두었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털썩 주저앉았다. 때아닌 추격전에 이마에 땀이 흥건했다. 이게 무슨 난리야. 섹스하려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고. 내 생일은 어떻게 된 거지. 넋을 잃고 중얼거리는 내 앞에 이호연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헐떡이는 나를 달래려 가까이 다가오려다 바닥에 놓인 병뚜껑을 보고 우뚝 멈추어 섰다. 황망한 시선이 잠시 허공을 배회했다.
“예준 씨…? 이건….”
“당분간 섹스 금지. 접근 금지예요.”
보이지 않는 경계가 병뚜껑을 기점으로 그어지기라도 한 것 같았다. 충격을 받은 그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잘못했다며 초라하게 중얼대는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미안해요. 미안합니다.”
“이 벌레 이름이 뭔 줄 알아요? 권연벌레예요. 똑같이 연으로 떨어지네.”
하하, 실없는 웃음을 터뜨린 나는 병뚜껑을 향해 “연아.” 하고 벌레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벌레와 같은 돌림자라는 사실에 이호연이 재차 넋두리 같은 혼잣말을 되뇌었다.
“아이구, 우리 연이…, 부모님은 어디 가고 혼자 여기에 왔니. 요즘 먹이 구하기가 쉽지 않나 보네. 그렇지…? 원래 사는 게 다 그래. 당분간 형아가 밥도 주고, 데리고 살아야겠다.”
“예, 예준아…. 지금, 벌레를…, 여기서 키우겠다고…? 이 집에서…?”
경악하는 그를 노려보았다가 다시 벌레로 눈길을 옮겼다.
“연아, 형아 조금 전에 고추 뚫릴 뻔했다?”
고추가 반으로 쪼개질 뻔했어. 저어기,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저 덩치 큰 아저씨 때문에 말이야. 들으라고 떠드는 내 한탄에 이호연이 움찔하였다. 나는 뚜껑을 들 수 없어 그대로 구석으로 옮겼다.
“연이 건드리지 마요. 어차피 건드릴 수도 없겠지만. 충분히 반성하면 잡아줄게요.”
“…예준아…….”
“혼나야 해. 자꾸 못된 것만 배워 와 가지고.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원망의 눈길을 이호연에게 보냈다.
“잘못했어.”
“…….”
“집에 갈 거야…?”
이 와중에 내가 가 버릴까 싶었는지, 이호연이 내 눈치를 살살 보았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처음에야 식겁하여 고래고래 소리 지르긴 했지만, 이게 집까지 갈 정도로 화날 일인가. 이대로 집에 가면 더 싸우자는 것밖에 안 되는 거지.
“안 갈게요. 씻고 나와요.”
“으응…….”
주저앉았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터덜터덜 욕실로 향했다.
힘없이 처진 어깨와 궁상맞은 뒷모습에 안쓰러운 감정이 들었다가,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여름이 완전히 가기 전에 바다를 보고 싶다는 내 바람에 이호연은 바로 강릉에 위치한 리조트를 예약했다. 사람이 많은 숙소 앞이 아니라, 차를 끌고 조금 먼 인적이 드문 모래사장을 찾았다.
“…신기해요.”
내 나지막한 목소리에 파랑이 비친 그의 눈동자에 온전히 내가 담겼다.
“그냥. 신기해서요. 호연 씨랑 이렇게 여행 온 것도 신기하고 게임 만드는 것도 그렇고.”
항상 새로운 것들로 가득한 매일이 신기하다. 이호연이라는 사람과 함께한 과거와 현재는 항상 설렘으로 가득했다. 미래에도 그와 함께라면 지루할 틈 없이 사랑스럽고 즐거운 날들이 가득하지 않을까. 달싹이는 입술 끝에 그를 향한 애정이 묻어났다.
“크라우드 펀딩도 잘 돼서 투자까지 이어지면 좋겠고, 아직 아파트에서 작은 벌레 말고 다른 벌레를 본 건 아니지만 계속 안 나왔으면 좋겠어요. 저는 호연 씨가 그걸로 스트레스 안 받았으면 좋겠거든요.”
조곤조곤, 서툰 감정을 숨기며 최대한 차분히 말을 이었다.
“예준 씨.”
이호연이 우뚝 멈추어 섰다. 붙들린 팔이 당겨지며 자연히 그의 품으로 몸이 기울었다. 쓰러지듯 안긴 내 몸을 그가 옥죄듯 감싸 안았다.
“…같이 살면.”
함께 출근하고 퇴근하는 일상. “다녀왔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상대가 있는 날들. 지금도 충분하지만, 서로의 교집합이 조금 더 많아졌으면 하는 마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언제나 곁에 있다는 것. 그런 따스함이 차곡차곡 쌓였으면 했다.
“지금도 거의 같이 사는 거 아닌가….”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평일의 반을, 주말을 온전히 그와 보낸 지도 오래되었다. 평일은 힘들다고 밀어내는 것도 이제는 그러려니 했다. 감았던 눈을 뜨는 순간 보이는 게 오피스텔 천장이 아니라 그의 아파트 천장이라는 것도.
“7일 168시간 중에 일하는 시간을 제외한 약 116시간 내내 붙어 있고 싶다는 말입니다.”
“배, 백이십….”
이건 또 무슨 신박한 고백이야. 얼떨떨한 표정으로 시간 계산을 하는 내게 이호연이 쐐기를 박았다.
“한 달이면 약 460시간이고, 일 년이면 5,500시간이 넘습니다. 거의 주말에만 자고 가니까, 금요일이나 토요일만이라고 가정하면 반 토막도 안 되는 수치죠.”
예상치 못한 계산 공격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잠깐만, 말은 똑바로 해야지. 왜 평일은 계산을 안 하는 건데요?! 어버버 하는 순간 이호연의 시선이 나를 관통했다.
“그러니까, 5,500시간은 안 되더라도 백번 양보해서 5,000시간 정도는 제게 주시죠.”
“…….”
“같이 살자고.”
졌다, 졌어. 제안도 아니고 통보에 가까운 이호연의 고백은 내 계산 범위 밖의 것이라, 그의 뻔뻔스러움에 그저 헛웃음만 번졌다.
“다 계산해 두고 말한 거죠.”
이호연이 볼멘소리를 중얼대는 내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이 덩치에 이런 귀여움은 반칙 아닙니까? 귓불이 붉어진 이호연이 먼저 모래사장 위에 커다란 발자국을 남기며 뒤돌아 걸어갔다. 그의 발자국 위를 부표 삼아 한 발짝 한 발짝 그에게 다가갔다.
“호연 씨.”
“…….”
“저 3개월 후면 오피스텔 계약 만료돼요.”
3개월이 남은 상황이었고, 보증금으로 받은 대출도 두 달 정도만 더 갚으면 완전히 상환할 수 있었다. 양재에서 분당으로 넘어온 후 3년 만에 보증금 2천만 원을 손에 쥔 것이다. 판교에서의 생활 3년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집이라 막상 정리하려니 뭐부터 손을 대어야 할지 막막했다. 더구나 가끔 찾아오는 이호연 덕에 사소한 즐거움이 추억으로 남은 곳이기도 하고. 사귀기 전, 벌레를 피해 피신 온 그와 함께 자던 날, 사귄 후에 둘이 붙어 있기 좋은 넓이라며 불쑥불쑥 찾아왔던 날들까지. 내가 그의 집에서 머문 시간에 비하면 적긴 했지만, 그와 함께한 시간이 그 집에 있었다.
그래도 조만간 같이 살면 어떤가 하는 질문을 넌지시 던져 볼까 했는데.
“3개월 있다가 만료되면.”
앞서 느리게 걸어가며 내 목소리가 닿을 만한 거리를 유지하던 그가 뒤를 돌았다.
“같이 살까요.”
5,000시간, 10,000시간, 모든 시간들이 우리의 관계형 데이터베이스에 쌓여 간다. 그와 내가 쌓아 가는 추억은 매 순간 기록되고 병합되며 데이터로서 구조화한다. 그것은 사진으로, 때로는 영상으로 서로의 기억에 남게 된다.
이 바다 앞에 서서 서로를 마주 보는 지금을 언젠가의 미래에서 꺼내어 볼 수 있기를 바랐다.
“사랑해요.”
환희하여 쏟아지는 햇살,
아름답게 춤추며 부서지는 윤슬,
나의 모든 행복과 진심을 담아 그에게 전했다.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