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의도 및 프롤로그 – #CutScene]
(NA) 때는 20XX년 겨울, 여기 IT업에 종사하는 개미 두 마리가 있다. 한파에 모든 것이 얼어붙듯, 그들의 심신은 비트코인과 주식으로 팍팍하게 시들어 가는데….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요.’
IT 귀농인은 소주를 털어 마시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는 비트코인이 전국을 강타했을 때, 한 다리 건너의 지인이 8,000만 원을 벌었다는 소식에 가진 재산 전부를 털어 투자했으나 1원 한 장 건지지 못했다. 이러다 원금도 못 찾겠구나 싶어 부랴부랴 회수했으나, 이미 마이너스 12%를 찍은 후였다. 이후 주식으로 회생하고자 보증금을 빼서 우량주에 올인 하였지만 가까스로 본전치기만 할 수 있었다.
‘저도 망했는데, 부모님이 부르셔서 다행이에요.’
상속인이 어깨를 으쓱한다. 상속인의 부모는 시골에서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파산한 사실을 숨기고 부모님의 농장을 물려받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IT 귀농인은 그런 상속인의 손을 붙잡고 함께 가자 제안한다.
‘같이 가도 될까요? 농장으로.’
‘같이 가요, 농장으로.’
꿈도 희망도 없는 야근 지옥 판교를 벗어나 새로운 환경에서 펼쳐지는 리얼 귀농 라이프!
Return To the Farm!
비트코인 500만 원과 보증금이 지나치게 사실적이다. 파산한 귀농인과 상속인이라니. 농장으로 가게 된 배경이 쓸데없이 디테일해 읽는 내내 입꼬리가 들썩거렸다. 후배라는 사람이 실제 비트코인이나 주식으로 파산을 경험하기라도 한 것일까. 극적인 요소를 강조하기 위해 게임의 시작을 컷 신으로 처리하겠다는 것도 참신한 아이디어 같았다. 우리 사주 실패의 쓴맛을 본 경험 때문일까, 어쩐지 공감대가 형성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우측 화살표 버튼을 눌러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캐릭터 시트가 간략히 표로 정리되어 있었다.
기본 스탯이 합리적으로 배분되어 있었다. 귀농인이 가진 IT 기술력으로 생산성이 5%가 부여된다는 점도 그럴싸하고, 상속인도 부친 덕에 농가 텃세 없이 NPC 친화도를 기본으로 제공받는다는 것도 신박했다. 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 실제 개발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데모가 나오면 해 보고 싶어지는 스토리였다. 특히나 IT나 게임 업계 종사자들이라면 한 번쯤 관심이 가지 않을까. 꼭 IT 업종이 아니더라도 귀농 게임은 흔한 편이니, 비트코인이나 주식을 잘 모른다고 하더라도 주요 캐릭터 중 하나가 파산하여 내려간다는 스토리 정도는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버튼을 다시 눌러 슬라이드를 넘겼다. 언급된 캐릭터들의 직업에 대한 세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캐릭터를 선택한 후에 직업 세팅을 할 수 있는데, 양봉업자와 밭 주인, 돼지 농가 주인 중에 고를 수 있다. 직업을 보류해 농장주로 유예를 둘 수 있지만, 레벨이 올라갈수록 페널티를 받는다.
문서에는 초기 직업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양봉업자를 선택하면 꿀벌을 키워 꿀을 생산할 수 있으며, 꿀통을 확장해 나갈 수 있다. 그런데 이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다. 말벌이 때때로 들이닥쳐 꿀벌을 공격하거나 꿀을 갈취해 가는 것이다. 꿀벌을 잘 키우지 못하거나 꿀 생산이 원활하지 않다면 지구 온난화의 결말을 맞고 스타트 포인트로 돌아오게 된다. 말벌의 방해를 받지 않고 꿀을 잘 생산하기 위해서는 NPC인 두꺼비 선생과 친화도를 쌓는 방법이 있었다. 생산한 꿀을 그에게 선물하거나 말을 거는 등의 방법으로 친화도를 올릴 수 있는데, 두꺼비 선생과 친해지면 그가 출몰하는 말벌을 잡아먹어 주고, 꿀통에 버프를 걸어 주었다.
밭 주인은 양봉업자보다 비교적 쉬워 보였는데, 살펴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처음 주어지는 도구가 호미였기 때문이다. 밭을 가꿔 농작물을 팔아 수익을 벌 수 있는데, 여기서 발생한 수익으로 트랙터와 탈곡기 등 다양한 농기구를 사들일 수 있었다. 다만 꿀벌에게 말벌이 천적인 것처럼 밭 주인에게도 골칫거리가 있었는데, 바로 밭에서 나는 작물을 훔쳐 먹는 삵과 고라니를 막아 내야 했다. 또한 주기적으로 오는 가뭄과 장마를 피하기 위해 수익으로 농가 환경을 계속해 관리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돼지 농가 주인도 양봉업자나 밭 주인처럼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면 되는 직업이었다. 물론 앞선 두 직업보다 불행의 값이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았다. 밭 주인이 야생 동물과 천재지변으로 허덕이듯 돼지 농가 주인도 비슷한 처지긴 매한가지다. 돼지 열병과 콜레라가 터지면 키우는 돼지의 70%를 잃게 된다. 대신, 식용 돼지를 팔아 부지 확장이 가능하고, 친환경 레벨을 달성하면 돼지 사육장 마크를 취득하고 단계별 백신을 구매할 수 있었다.
설명 자체는 다소 복잡해 보일 수 있으나 결론은 선택한 캐릭터와 직업으로 열심히 수익을 만들어 내면 되는 거였다. 나는 초반 챕터와 미션들까지 읽은 후 노트북을 이호연에게 돌려주었다.
“…어떤 것 같습니까.”
이호연이 미묘하게 눈가를 찡그린 채 내게 물었다.
“게임이요? 재미있을 것 같은,”
말을 잇다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내 대답을 듣는 그의 표정이 썩 좋지 않다.
“왜, 왜요?”
“귀농 게임이라는 건 상관없는데, 직업에 양봉업자가 걸립니다.”
어렴풋이 짐작했던 이유가 그의 입에서 사실로 내뱉어지자 나는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참아야 해. 이호연은 벌레에 있어 진심이라고. 파르르 떨리는 입술에 힘을 주었다. 한국에 오자마자 유일하게 저를 꼼짝 못 하게 하는 벌레와 맞닥뜨렸고, 벌레 소굴에서 가까스로 벗어나긴 했지만 만들려는 게임 캐릭터의 주요 생산 코드가 꿀벌이라는 데에 충격을 금치 못한 것이다. 꿀벌이 주축이 아니라 캐릭터의 성장과 농장 수익이 게임의 핵심이었지만, 저가 만드는 게임 요소에 꿀벌이 있다는 걸 용납하고 싶지 않아 보였다. 생각해 보니 일리는 있네. 생물학적 분류 체계에 따르면 벌도 곤충에 속하긴 하니까.
“그, 그래도 게임 자체는 재밌어 보이는데요….”
아무렴, 후배가 알고 썼겠어? 이호연이 벌레를 싫어한다는 걸 알았으면 이렇게 쓰지도 않았겠지.
“꿀벌이 그래픽적으로 크게 나오거나 하진 않을 거예요.”
달래듯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벌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사실적으로 그려지진 않을 것이다. 인물 캐릭터가 게임 머니를 벌어들이는 수단인 셈이니, 벌이 나오는 횟수가 캐릭터보다는 많지 않으리라. 아니면 최소한으로 그려지거나. 3D에 대한 언급이 있었으니 아트는 클래시 오브 클랜과 유사한 느낌으로 가게 되지 않을까. 아니면 스타듀 밸리 같은 고전 느낌도 좋을 것 같은데. 머릿속으로 어울릴 만한 게임 UI를 떠올렸다. VR이 가능하다면 퍼스널 뷰어를 끼고 쪼그려 앉아 농작물 수확을 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결론은, 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거죠?”
“네, 재미있게 풀면 좋을 거 같아요. 비트코인이나 주식도 나왔으니까 게임 내에 거래소를 만들어서 블록체인으로 뭔가 해 봐도 좋을 거 같고. 아, 이건 그냥 제 개인적인 생각이라…….”
“안 그래도 다음 주 중에 후배랑 만나기로 했으니, 같이 나가서 이야기해 봅시다. 거래소도 좋은 것 같네요.”
“…네?”
“문서도 확인했으니, 본격적인 시작 전에 만나야죠.”
“응…? 저도요?”
멀뚱멀뚱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거길 왜 따라갑니까. 귀농 게임에서 내가 뭘 하는 것도 아니고, 소개라니.
“예준 씨, 이전에 게임 포트폴리오도 만들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그렇긴 한데. 자, 잠깐만요. 포트폴리오는 포트폴리오인데, 저도 같이 하는 거였어요?”
“같이 하자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러니까 언제! 혼자 생각하고 있었던 거 아니야? 합류가 당연하다고 말하는 그에게 입만 뻐끔거리며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게임 포트폴리오가 있긴 하지만, 무려 2년도 더 된 작업물이었다. 꽤 오래전에 스쳐 지나가듯 말한 것이라 잊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걸 기억하고 있다니. 게다가 나는 GUI라 게임이랑은 결이 다르다고. 어떻게 이런 시나리오에 아마추어 UI를 얹을 생각을 하냔 말이야.
“제 주력은 GUI….”
“가이드는 제 후배가 해 줄 거고, 어렵진 않을 겁니다.”
게임 UI는 원화에 대한 감도 있어야 하고, 툴도 잘 다뤄야 한다. 어찌어찌 스탯 창이나 인터미션, 게임에 필요한 화면을 디자인한다고 하더라도 게임 엔진에 대한 기본 이해도가 필요했다. 오토데스크는 물론이고 다른 게임 엔진에 대한 수업을 학부생 시절 듣기는 했지만, 당연히 현업 종사자들만큼 잘 다루지는 못했다. 과제 제출을 위해 잠깐 사용해 본 게 전부이고 강준성이 졸업 전시를 위해 컨셉 아트로 선보일 작품을 랜더링 하는 것을 어깨너머로 본 게 마지막이었다.
“누구한테 보일 만한 실력이 아닌데요….”
“그럴 리가.”
나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서, 연애 초반이라서 높게 평가해 주는 것 아니냐는 물음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물론 이호연과 함께하는 것이고,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게임도 해 보고 싶기는 하지만 나는 내 실력을 잘 알았다. 정확히는 내 주제를 잘 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면 작년에 게임 제작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나도 팀에 넣어 달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애초에 게임 업계 종사자도 아니고, 게임에 있어 뛰어난 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취미가 게임인 흔한 IT 업계 종사자일 뿐이라고. 그리고 내가 디자인의 모든 영역에서 월등했다면 SG플레이를 다니고 있었겠냐. 천재성을 인정받아 유명 IT 회사나 아마존이나 구글 본사에 다니고 있었겠지.
“원화 하는 친구 있어요. 아마 지금 S게이트라는 회사에 다니고 있을 텐데, 차라리 그 친구를 소개….”
“컨셉 아티스트는 당연히 팀에 넣을 거고, UI도 필요합니다. 아트는 아트에만 집중하게 해야죠.”
이호연이 어떻게든 나를 끼워 넣으려는 것이 보여 헛웃음이 터졌다.
“자신 없어요, 정말.”
“결정은 시나리오 쓴 후배가 할 겁니다.”
제 고집도 반은 섞일 테지만. 낮게 중얼거린 그의 목소리에 침음을 삼켰다.
“저 게임 엔진 다룰 줄도 몰라요.”
“유니티는 개발을 몰라도 금세 익힐 수 있습니다.”
몰라도 금방 익히는 건 개발 지식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어쨌든 나는 디자이너이고, 개발도 얕게 알 뿐인데 어떻게 보고 금방 익히느냔 말이야. 당신 같은 개발자나 가능한 거지! 민망함과 부끄러움은 결국 내 몫이 될 걸 아는데, 왜 이렇게 고집이 센 건지.
“예준 씨.”
그가 보채듯 내 무릎을 가볍게 쥐고 흔들었다. 날이 갈수록 애교가 느는 것 같은 건, 내 기분 탓이겠지. 손을 그의 이마로 가져갔다. 가려진 앞머리를 걷어 내자 반듯한 이마가 보였다. 곧은 시선이 그대로 내게 직선으로 닿았다. 내 손길이 기분이 좋다는 듯 그의 입매에 호선이 그려졌다. 나야 같이 해 주자고 하는 것 자체가 고마운 일이긴 하다. 이호연과 만나지 않았다면 이런 기회는 오지 않았을 테니까.
“…알겠어요. 대신 정말 아닌 것 같으면 못 한다고 말할 거예요.”
“너무 부담은 갖지 말고.”
“부담돼요….”
아니, 내 주력은 GUI라니까?
내게서 오케이 사인을 받았으니 된 것이라 생각한 걸까. 이호연이 제 얼굴을 내게 들이밀었다. 나는 못 이긴 척 그의 뺨을 쥐고 도장을 찍듯 입술을 맞췄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 했던가. 내 미온적인 수긍에도 이호연의 추진은 상당히 빨랐다. 나를 들들 볶아 받아 낸 포트폴리오를 바로 후배에게 전달했고, 그녀는 내가 합류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RTF팀에 합류하게 된 사람은 총 네 명으로 확정 지어졌다.
전체 시나리오와 전투 밸런스, PM을 맡을 게임 기획자 전송이,
유니티로 게임을 구현할 엔지니어 이호연,
캐릭터 및 게임 전반의 아트를 책임질 컨셉 아티스트 강준성,
마지막으로 게임 UI 디자인 작업자인 나까지.
대학 동기인 강준성을 추천한 것은 나였다. 정통 RPG 게임을 제작한 개발사 아트팀에 재직 중이고, 원화 스타일이 아닌 다른 작화도 가능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이호연에게 강준성이 참여한 게임을 알려 주었고, 몇 번의 검색만으로 스타일을 파악한 후 바로 오케이를 내렸다.
나는 나대로 강준성에게 인디 게임 제작에 합류할 것을 권했고, 이호연은 자신의 후배에게 컨셉 아티스트를 구했노라 전달했다. 이후 진행도 빠른 편이었다.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단체 채팅 방이 먼저 생겼고, 날짜를 잡아 퇴근 후 함께 모이게 되었다.
“사실 호연 선배가 시나리오 오케이 해 줄 줄 몰랐어요. 가볍게 기획한 거고 병맛에 가까워서.”
전송이가 고른 치아를 드러내며 환히 웃음 지었다. 시나리오 문서를 읽어 보았느냐는 물음에 이호연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여 제작은 물 건너간 것인가 싶었다는 말이다. 지인들 대부분이 재미있다고 해 준 시나리오라 엔지니어로 참가할 이호연도 흔쾌히 답해 줄 것이라 믿었다고.
그녀의 이야기에 이호연을 흘끗 바라봤다. 왜 시큰둥했었는지 알 것 같았다. 당연히 꿀벌 때문이었겠지만, 그걸 직접 입에 담지는 않았을 것이다.
“재미있어 보이던데요.”
나는 이호연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게임에 대한 감상을 솔직하게 말했다.
발상이 좋다고 봐야겠지. 재미 요소가 명확하고, 캐릭터가 해내야 하는 임무가 확실하다. PC나 콘솔이 아닌 모바일 게임은 지인들과 합심하여 만들기도 하고, 소재에 따라 펀딩도 비교적 쉽게 달성할 수 있다. RTF도 데모가 수월하게 나온다면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재미는 확실해 보여요. 비트코인은 남 일 같지 않아서 더 그렇고요. 우리끼리만 재미있을 수도 있겠지만, 만들면서 적정선을 찾아 가면 사람들도 좋아할 것 같고요. 저도 송이 님 기획대로 잘 그려 볼게요.”
강준성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탰다. 전송이는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완전 기대되네요. 아, 선배, 그럼 저희 수익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수익은.”
이호연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만약 수익이 나면 네 명이니까 2.5로 나누자. 시나리오는 네가 썼으니 저작권이나 게임 판권은 네가 갖되, 수익은 2.5씩.”
“와, 판권 저 주시는 거?”
“네가 기획했으니까 네 거지. 예준 씨나 준성 씨는 어떤가요?”
“저는 이견 없습니다. 수익 2.5만으로도 감사한 거죠.”
“저도요.”
강준성이 고개를 저었다. 각자 다니는 회사가 있고, 월급이 없는 것도 아니니 수익에 목맬 이유가 없다. 잘되면 좋은 거지만 반드시 얼마를 벌어야 한다는 건 아니었다. 더구나 나는 이호연 덕에 기회를 잡은 셈이니, 사실 수익이 없다고 하더라도 괜찮았다.
초기 서버 세팅비는 이호연이 우선 부담하는 것으로 하였는데, 나눠서 내는 것보다 한 사람이 부담하고 추후 펀딩 시 정산하는 편이 나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작업 방식과 중간 점검에 관련한 대화가 오갔다. 작업은 주로 주말에 진행될 예정이었다. 직장이 1순위였기 때문도 있었지만, 강준성이 신혼인 점과 전송이의 회사가 크런치 모드인 점을 고려해 각자 작업을 하여 채팅 창을 통해 공유하기로 하였다.
“전 다시 회사 들어가 봐야 해서요. 방향이 잡힌 것 같으니까 먼저 일어나 볼게요.”
전송이가 야상 재킷에 팔을 꿰고 노트북을 챙겨 들었다.
“다 같이 일어나죠.”
이호연도 자리를 털었다. 나는 그를 따라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다음에 어느 정도 진척되면 밥이나 먹어요.”
전송이는 나와 강준성에게 한 번씩 눈짓으로 인사하며 카페 출입구를 향해 바쁜 걸음을 옮겼다. 그녀에게 낯이라도 가렸던 모양인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강준성이 어느덧 내 옆으로 와 팔을 쭉, 잡아끌며 헤드록을 걸었다.
“아야, 왜 또.”
“오랜만에 봐서?”
“놔라.”
“반가워서 그렇지.”
강준성은 같은 판교에 있는데 어떻게 얼굴 한번 보기가 이렇게 힘든 것인지 이유를 말해 보라 쪼았다. 억울함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작년 10월부터, 아니, 8월 말부터 이호연과 붙어 다닌 것이 사실이긴 했지만, 강준성도 만만치 않게 신혼을 즐기고 있었다. 가끔 맥주 생각으로 불러내려 하면 집안일 때문에 바쁘다며 부리나케 뛰어가던 사람이 누군데. 볼썽사납게 허우적거리다 강준성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찌르며 벗어나려는 순간이었다.
“자, 이제 가실까요.”
바로 앞에 선 이호연이 딱딱하게 물었다. 느리게 내뱉어진 목소리에서 선득함을 느낀 것은 기분 탓일까.
“야, 야, 이거 놔 봐.”
“어…? 어어. 아, 네, 가야죠.”
강준성이 내 목에 두른 팔을 풀며 주춤, 뒤로 물러났다. 나만 이상한 분위기를 느낀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눈치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강준성이니 이호연이 내비치는 불편함을 읽은 것이다. 그 불편함의 원인이 되는 것은 아마도 나겠지.
“자, 잘 가!”
마주한 두 사람 사이를 갈라서며 강준성을 먼저 내보냈다. 눈치껏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친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이호연의 옆에 섰다.
“질투의 화신이네요.”
“…질투는요.”
그가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질투 나’라고 온몸으로 표출하는 이호연의 태도가 퍽 귀엽게 느껴졌다. 그의 옷자락을 쥐며 턱짓으로 그의 아파트가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쉬었다 가도 돼요? 내 물음에 이호연은 내 손을 따스하게 감싸 쥐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횡단보도를 건너 바로 아파트 단지 정문으로 들어왔다. 캄캄한 밤에 잠긴 단지는 오가는 사람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이번 주말부터 집에서 같이 작업할까요.”
어차피 주중이고 주말이고 할 것 없이 붙어 있는데. 작업을 따로 하게 되면 데이트를 하거나 같이 보내는 시간이 없어질 것을 염려하기라도 한 걸까. 뭐, 집에서 작업을 하나 이호연 집에서 하나 다를 건 없을 것 같긴 한데 말이지….
“서재에 책상 하나 더 놓고, 작업용 태블릿도 하나 구매하는 걸로.”
하여간 성격 급한 거 누가 모를까 봐서 서재에 책상을 놔 주겠단다. 그야말로 최적의 환경이긴 했다. 서재에서 같이 일하고, 쉴 때 함께 쉬고, 단란하게 주말을 보내고. 삼박자가 딱 맞아떨어지는 제안이라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흐음.”
“같이 하는 겁니다?”
“알겠어요. 그래도 책상은 사지 마요. 태블릿도요. 어차피 서재에 소파도 있고, 저는 거기서 해도 돼요.”
아파트 출입문 비밀번호를 누른 후 함께 자동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환히 밝아진 1층 복도에 길쭉하게 뻗은 두 인영의 그림자가 겹쳐졌다.
**
한 달 동안 이어진 작업은 제법 순조로웠다. 전송이의 요구 사항은 명확했고, 작업 순서 역시 그녀가 정해 주었기 때문에 그것대로 따라가면 되었다. 주인공인 IT 귀농인과 상속인에 대한 아트가 먼저 진행된 후 바로 첫 번째 직업인 양봉업자 스테이지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RTF는 게임 내에서 선택한 직업에 따라 게임 인터페이스의 디자인 색감이 조금씩 달라졌다. 양봉업자는 노란빛, 밭 주인은 초록빛, 돼지 농가 주인은 갈색빛을 띠었다. 나는 강준성이 그린 양봉업자 의상과 꿀벌 아트를 보고 인터페이스 내의 각각의 영역을 디자인해 나갔다.
“할 만합니까.”
이호연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찌뿌듯한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가까이 다가온 그가 소파 위로 올라오며 내 바로 뒤에 앉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허벅지에 머리를 기댔다.
“그럭저럭요. 송이 님이 가이드를 잘 주기도 하고, 준성이도 피드백이 빨라서 좋고요.”
나는 상체를 비스듬히 틀어 노트북 화면을 그에게 보여 주었다.
[꿀통 Radios 2 정도 더 키워 주세요.]
[꿀통 저장고는 육각형으로 작업하되 모서리에 광택이 나도록 해 주세요.]
[저장고 Radios는 꿀통과 같거나 작아야 합니다.(≦)]
[말벌 출몰 시의 Background Color가 공격적이면 좋겠어요.]
[꿀통 게이지는 색감 조정이 필요해 보입니다. 꿀벌 얼굴이랑 밸런스 맞춰 주세요.]
이호연의 시선이 공동 작업 화면에 전송이가 적은 피드백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수정이 많죠?”
괜히 부끄러워져 나지막이 웅얼거렸다.
이호연이 뒤에서 내 얼굴을 감싸며 부드럽게 쓸었다.
“처음인데 이 정도 피드백이면 잘한 겁니다.”
“저한테만 후한 거 아니고요?”
“그건 아닌데.”
“그렇다고 쳐요.”
해실 웃는 내 입술 위로 이호연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왔다. 짧게 입술을 맞춘 그가 멀어지며 귓불을 매만졌다.
“꿀통 수정만 하면 되겠네요.”
“네, 바로 해서 보내려고요. 말벌 출몰 부분만 준성이랑 상의하고,”
이호연의 입매에 희미한 웃음기가 맺혔다.
잠깐 앞으로 나와 보라며 그가 손짓했다. 옆에 자리도 넓은데 굳이? 눈을 동그랗게 뜬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는 의뭉스럽게 웃기만 했다. 꿈질대며 앞으로 비키자 양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이 테이블을 힘주어 밀어 냈다.
“갑자기 왜요?”
“그냥, 뒤에서 안고 있고 싶어서.”
내 허리를 끌어안은 그가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이러면 작업이.”
“마저 해요.”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그에게 저항하듯 몸을 뒤틀었다. 이러고 무슨 작업을 해. 놔 달라고 팔을 잡아 떼어 내려는데 뒷목에 그의 숨결이 닿았다. 당황하여 몸을 굳히자 그가 승모근에 코끝을 비비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십 분 안에 작업 끝내면,”
“끝내면?”
“저번에 갖고 싶다던 운동화 사 줄게요.”
운동화! 저번에 말했던 거라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재발매된 지는 제법 되었지만 사악한 가격에 포기했던 운동화였다. 얼룩말을 연상케 하는 디자인으로 유명한 운동화였는데.
“진짜죠?”
“물론.”
이호연이 득의만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분위기가 수상쩍다. 평소였다면 이런 조건을 내걸지 않고 그냥 내게 떠안겼을 텐데, 그가 원래 이렇게 조건을 걸었던가? 하지만…… 수상쩍으면 뭐 어때. 허투루 말하는 사람도 아니고. 나는 저항하던 손길을 거두며 손에 마우스를 쥐었다. 폴더에서 꿀통 디자인 파일을 실행해 바로 작업 창을 띄웠다.
꿀통 레이어 폴더에서 수정이 필요한 레이어를 선택한 순간이었다.
이호연의 손이 슬금슬금 아래로 내려가 입고 있는 티셔츠를 걷어 올렸다.
“자, 잠깐만요.”
“작업해요.”
“아니, 이러면, 잠깐.”
가슴으로 올라온 손가락이 젖꼭지를 튕겼다. 장난기 서린 손끝이 유륜을 덧그리며 자극을 유도했다. 간질간질한 감각에 상체가 바들바들 떨렸다.
“수정해야죠.”
“으…, 흐.”
그새 꼿꼿하게 선 유두에 집요한 손길이 이어졌다. 야속하게도 양쪽을 고루 괴롭힌다. 뜨거워진 숨이 귓가를 스쳤다. 손뿐 아니라 이호연의 입술도 분주해졌다. 귓바퀴와 뒷목을 오가던 그가 이를 세워 자국을 남기기 시작했다.
“호연 씨, 일부러…!”
이호연의 왼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대범한 손길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헉, 하고 헛숨을 들이켰다. 서서히 발기하기 시작한 성기가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이다. 오른손이 뒤이어 내려와 어쩔 줄 모르고 바르르 떠는 허벅지를 잡아 벌렸다. 그의 손이 힘없이 벌어진 다리 사이를 거침없이 주물렀다. 움찔대며 이호연의 가슴에 등을 기대고 거친 호흡을 뱉어 냈다. 찐득한 체액으로 팬티가 축축하게 젖은 것이 느껴졌다. 때를 놓치지 않고 바지 앞섶을 더듬던 손이 허리 고무줄을 늘여 안으로 파고들었다.
“찾았네요, 꿀통.”
그가 따끈하게 열이 오른 음경을 감싸 쥐고 위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우. 읏.”
기댄 등허리에 뜨겁고 묵직한 것이 닿아 왔다. 부풀어 오른 그의 성기가 허리춤을 찔렀다. UI 수정의 어느 부분에서 흥분한 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자꾸만 꿀통이라고 하는 걸로 보아 그 단어에 꽂혀서 이러는 것 같은데, 이게 사실이라면 이호연은 미쳐도 단단히 미친 거다. 사회생활이 가능한지 의심해 봐야 할 수준이 아니던가.
“꿀에 다 젖었어요.”
“그런 말, 하지 마, 아…!”
“사실인데 뭘.”
더 젖기 전에 벗어야 한다는 둥, 이러다 꿀에 옷을 다 버리겠다는 둥 태연히 속삭인 그가 손을 놀렸다. 끈적한 체액이 질금질금 흘러나온 탓에 이호연이 움직일 때마다 쿨쩍쿨쩍 울음을 토해 냈다. 결국 바지 앞섶까지 짙게 적시고 나서야 그는 성기를 붙든 손을 거둬 주었다. 나른함에 반쯤 풀어진 눈으로 가쁜 호흡을 몰아쉬었다. 사정까지 간 것도 아니건만, 계주라도 한 것처럼 숨이 찼다.
“일어나 봐요.”
이호연은 축 늘어진 나를 보채어 테이블 위로 엎드리게 했다. 차가운 테이블 유리의 촉감이 그대로 뺨에 닿았다. 멍한 눈으로 노트북 화면을 응시했다. 디스플레이 설정에 따라 일정 시간이 지나자 화면이 어둑하게 절전 모드로 전환되었다. 수정은커녕 오늘 이 이상의 작업은 무리일 것 같았다.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것은 그가 내 젖꼭지를 더듬을 때부터 예상했었는지도 모른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턱을 당겨 이호연을 보았다. 열기와 습기를 동반한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우악스레 바지가 끌어 내려졌다. 팬티까지 함께였다. 젖은 성기가 바깥에 그대로 드러나자 다리가 절로 모였다. 간밤에 괴롭힘 당한 엉덩이에는 아직 그의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창피함과 수치심에 말려 올라간 티셔츠를 내려 둔부를 가렸다.
“티셔츠도 적시고 싶습니까.”
그가 갸웃하며 내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원한다면 입고 있는 옷가지를 전부 적셔 주겠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했다.
“피부가 희어서 자국이 잘 남네요.”
아직도 빨간 걸 보면. 희소한 그의 손끝이 굴곡진 살덩이를 지나 부어오른 항문 주변을 더듬었다.
“여기도 부었습니다.”
발갛게 부어오른 구멍이 달려드는 시선에 흠칫, 오므라졌다. 밤새 그의 것을 받았다. 한 치의 어긋남도, 빈틈도 없이 오밀조밀 물어 삼키고는 몇 번이나 격정에 치달았었다. 몸에 남은 흔적이 아직 가시지 않았다.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었기에 예열된 몸이 달구어지는 것은 금세였다. 그래도 아직 대낮인데. 서재로 드는 채광이 기울어지며 테이블 위로 햇볕이 넘실거렸다. 피부 위로 투명하게 번지는 햇볕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다정하고 섬세하다가도 이렇게 짓궂어지는 때가 있었다. 침대 위에서 달콤한 키스를 나눈 후라든가, 섹스 전 나신으로 누운 나를 내려다볼 때라든가, 전희 과정에서 내 몸을 제 뜻대로 주무를 때라든가.
휘- 하는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귓전에 닿기 전, 철썩, 하고 볼기 위로 그의 손이 떨어졌다.
“아흑.”
“엉덩이 들어 봐요.”
이 이상 어떻게…. 곤란한 표정을 지어도 이호연은 묵묵부답이었다. 이미 엉덩이는 들릴 만큼 들려 있었다. 더 들어 올린다면 지금보다 더 적나라하게 보일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든 무릎을 펴 보려 했지만 다리가 달달 떨렸다.
“힘들어요…. 소파로 가면 안 돼요?”
“안 돼요. 다리에 힘주고 엉덩이 올려요.”
고개를 젓는 이호연이 야속했다. 목소리는 다정한데 어조만큼은 강경하여 말을 듣지 않으면 한 번 더 볼기에 손속이 가해질 것 같았다. 입술을 꾹 깨물고 접힌 무릎을 펴 엉덩이를 추켜올렸다.
“이제, 잘 보입니다.”
“으…….”
“뒤에서도 꿀이 나올 것 같은데.”
즐겁다는 듯 말하는 그에게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버석하게 마른 구멍에서 어떻게 꿀이 나오겠는가. 이호연이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사과처럼 붉어진 살집을 움켜잡으며 움찔움찔 반응하는 주름을 촘촘하게 훑었다. 마디 하나가 들어오고 나가는 장난기 어린 손길에 오금에서 힘이 풀려 몇 번이나 거꾸러질 뻔했다.
“흐으, 으.”
“핥아 줄까요.”
구체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어디를 핥겠다는 건지 알 것 같았다. 이제껏 그와 섹스를 하며 내 성기를 물고 핥았던 적은 많았다. 삽입하는 구멍까지 핥고 싶다던 그에게 눈물을 내비치며 싫다 말했었다. 그와 여러 밤을 보냈다 하더라도 아닌 것은 아니었다.
“싫어어. 싫어요. 안 돼.”
뜨거운 숨이, 근처에 닿는 입술이, 조심스럽게 내밀어진 혀끝이 기어코 입구를 핥아 올렸다.
“아아-…!”
내질러진 새된 비명이 마치 시발점이라도 되는 양 그의 혀가 끝을 세워 구멍을 쿡쿡 찔러 왔다. 움찔대던 구멍이 벌어지며 뜨거운 살덩이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엉덩이 살을 양옆으로 벌려 얼굴을 파묻고 있는 힘껏 빨아올리기도 하였다. 파고든 혀는 뜨겁고 습했다. 발기한 그의 것을 연상케 하는 단단함도 있었다. 구멍을 얕게 스치는 살덩이 탓에 그의 혀가 빠져나갈 때마다 추켜올린 엉덩이가 함께 올라가고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음, 아…! 으음!”
혀를 놀리는 그의 손이 고환과 성기 밑동을 그러쥐며 미처 끝내지 못한 사정을 유도하기 시작했다. 앞과 뒤가 동시에 자극당하자 머리가 새까맣게 번졌다가 하얀 폭죽이 눈앞에서 번쩍번쩍 터졌다. 할딱대는 숨소리 사이로 끼어든 신음이 불협화음처럼 이리저리 뒤섞였다. 미칠 것 같았다. 기둥을 쓸어내리는 손길도, 샅샅이 핥는 혓바닥도. 뭉글뭉글 맺힌 선액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성에 찰 때까지 내 구멍을 가지고 놀던 그가 한참 만에야 입술을 떨어뜨렸다. 간신히 버티고 있던 다리가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하아, 하….”
두 다리가 샐룩거리며 경련하듯 바들바들 떨렸다. 질질 흘린 점액질을 문질러 닦아 준 그가 제 손끝을 핥았다.
“달아요.”
묵직하게 내려앉은 눈꺼풀이 날갯짓처럼 파르르 떨렸다. 젖은 입가를 닦을 생각도 않는 그를 올려다보다 진저리 쳐지는 몸을 일으켰다.
“…더럽잖아요.”
엉망이 된 그의 입가를 손등으로 닦아 주었다.
“더럽지 않았습니다. 달았죠.”
정말 달았다고, 맛있었다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이리 와.”
“…….”
“어서요.”
재촉하는 그의 품에 안기자 그가 훌쩍, 가볍게 나를 들어 올렸다. 떨어지지 않으려 다리로 허리를 감싸고 그의 목에 팔을 둘러 매달렸다.
“한 달 동안 작업만 했잖아.”
“어제도 했고, 오늘도 이따 할 거잖아요….”
반박해 보았지만 그는 듣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어제는 어제고, 지금은 지금이고, 나중은 나중이지.”
그러면서 팽팽하게 발기한 제 것을 내 엉덩이 사이에 비벼 왔다. 넣지 않아도 느껴졌다. 성난 그의 성기가 부풀 대로 부풀었다는 것을. 이호연이 내 귀를 베어 물었다. 그의 숨결에 발가락이 절로 곱아들었다.
“네가 세웠으니까 가라앉히는 것도 해 줘야지, 응?”
“…읏.”
“꿀이 얼마나 나오는지도 보고.”
이호연이 싱글 웃으며 서재 문을 열었다.
나를 안은 그가 곧장 침실로 향했다.
한여름에도 암막 커튼이 쳐진 그의 침실은 유독 어두웠다. 환기할 때를 제외하고는 낮과 밤의 구분이 미비한 방이었다. 빛을 완전히 통제한 커튼 사이로 햇살이 꿈틀거렸다. 그는 바스락대는 이불 위로 내 몸을 조심스럽게 눕혔다.
“질질 싸는 거 보여 줘요.”
어둠 속에서 선득하게 울린 그의 목소리에 신경이 파드득 곤두섰다. 그는 남김없이 먹어 치우겠노라 덧붙였다.
“그런 말 좀 하지 말라니까요….”
왜 부끄러움은 나의 몫이 되어야 하냐고. 울 듯 찡그린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호연은 입고 있던 티셔츠를 단번에 벗어 던지고 바지 버클을 풀었다.
“꿀통을 보고 꿀이라 하는 걸.”
혀와 혀가 엉기며 비벼졌다. 세상이 기우는 것 같은 무게가 위에서 느껴졌다. 점막이 거칠게 마찰하며 긴장으로 배 속이 저릿하게 조였다. 로션이나 젤로 적실 필요는 없었다. 벌름대며 삽입을 기다리는 구멍은 이미 준비를 마친 참이었다.
내게 입을 맞추며 바지까지 벗어 던진 그가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는 제 성기를 조준하였다. 몸을 바싹 붙여 오며 위에서 아래로 힘주어 눌러 온다. 입구에 맞춰진 귀두가 그의 힘에 따라 구멍 안으로 삼켜졌다. 차츰차츰 안으로 들어오던 성기가 뒤로 한 번 물러났다가 단번에 밀려들었다. 숨을 들이켜는 순간 파고든 성기에 입만 벙긋거리며 허우적거렸다. 머릿속이 뭉개어지고 호흡이 가팔라졌다.
“아…! 앗!”
이호연이 허리를 움직이며 푹푹 쑤셔 올 때마다 안쪽이 꿈질대며 요동치는 것만 같았다. 예민하게 달아오른 내벽이 그의 것을 오물오물 삼켰지만, 더 깊은 곳을 찔러 주길 바랐다. 퍽퍽 살끼리 부딪치던 움직임이 잠시 멈추었다. 고환까지 박아 넣을 듯 빈틈없이 삽입한 채로 그의 손이 내 배 위를 훑었다.
“여기, 튀어나왔어요.”
“만지지, 마, 하윽…!”
그가 불룩 솟은 아랫배를 누르며 퍽, 하고 허리를 퉁겨 올렸다. 쓸려 나간 뒤 다시 뱃가죽이 솟아올랐다.
“거, 거기, 만지면…, 흐으, 흑.”
뇌수가 녹아내릴 것만 같다. 사고가 멈춰 버린 뇌가 열락에 취해 몽롱해졌다. 그가 삽입할 때마다 배가 나온 것 같다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배를 누르며 삽입한 적은 없었다. 추어올리며 파고드는 것은 더더욱. 경계에 선 것 같았다. 한 발자국만 더 디디면 지키고 있던 선이 엉켜 버릴 것만 같은 기분. 보이지 않는 한계가 와르르 무너지는 아찔한 감각이었다.
“어디. 여기? 여기 더 만져 줄까.”
이호연이 솟아오른 배를 다정하게 매만졌다.
아니야, 아니야아. 거기 만지면, 더 만지면….
뒤로 가는 것만으로 부족해지고 말 것 같아 덜컥 무섬증이 나 이가 덜덜 떨렸다. 두려워하는 내 기색을 읽었는지, 이호연이 혀를 깊게 섞어 왔다. 난잡하고 뭉크러진 키스였다. 넘어오는 그의 타액을 받아 마시다 미처 못 삼킨 타액이 턱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푸하,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이호연이 콜록대는 내 목덜미를 긁듯 이를 세워 짓씹었다.
“뭐가 무서워서, 응?”
되묻는 그를 응시했다. 입술을 내린 그가 퍽, 하고 허리를 움직였다. 한두 번 몸을 섞은 게 아니었다. 앞을 만지지 않아도 뒤로만 갈 수 있을 만큼 무수히 많은 밤을 보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두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이호연의 따뜻한 손이 허리춤을 감쌌다. 생각이 깊어질 여유조차 없었다. 그는 골반을 단단히 고정해 쥐었다. 아래에서 위로 푹푹 쑤시며 뭉뚝한 끝으로 한 점을 짓이기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불똥이 터졌다. 거칠게 뱉어지는 숨소리가 이리저리 흩어졌다.
“더 좋을 겁니다.”
“시, 싫어. 하윽, 아아…!”
관자놀이를 타고 흐른 눈물이 베개에 스몄다. 축축하게 젖은 얼굴이 마를 새도 없이 입맞춤이 별처럼 쏟아졌다. 입으로 숨통을 틀어막은 그가 집요하게 내 배를 쓸었다.
세차게 박아 올린 성기가 날카롭게 내벽을 난도질한다. 동시에 이호연이 내 배를 꾹, 눌렀다.
“…허억!”
퓨웃-.
점액질도, 정액도 아닌 세찬 물줄기가 얼굴까지 튀어 올랐다.
요의에 가까운 사정감에 시야가 희뿌옇게 번지고 현기증이 일었다. 한 번의 사출로도 부족했는지 귀두 끝에서 물줄기가 줄줄 흘렀다. 구멍이 우물대며 옴짝거렸다. 들썩이는 허리와 죄어드는 엉덩이로 그의 얼굴도 흥분으로 일그러졌다. 숨을 골라 낸 이호연이 감탄하여 나를 내려다봤다. 하얗게 질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수치심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무, 무섭다고, 흑, 무섭다고 했는데…. 이거, 싫어, 싫어요.”
목이 끓는 듯 뜨거웠다. 목에서 울리는 쇳소리에 울음이 섞였다. 이호연은 경련으로 덜덜 떠는 내 몸을 바짝 끌어당겨 안고는 가린 손등 위에 달콤한 입맞춤을 내렸다. 쪽, 쪽, 다정하게 입을 맞춘 그가 느리게 허리를 움직이다 멈추었다.
“정말 무서웠어?”
“흑….”
“좋지 않았어?”
“차, 창피하고…….”
“창피한 게 아니야. 계속 싸는 거 보여 줘. 다 적셔도 돼.”
눈물 번진 눈가를 혀로 핥아 주었다. 잘게 허리를 떨던 그가 다시 뒤로 물러났다. 겁내지 말라며 축축한 배를 쓰다듬었다.
“아직도 따끈합니다.”
“부끄러워서…, 울고 싶어요…….”
“한 번만 더 보여 줘요. 가는 거 또 보고 싶습니다.”
꿰뚫린 뒤가 벌름대며 그를 맞이했다. 두꺼운 귀두가 파고의 정점을 정확하게 찔렀다. 그의 몸짓에 나는 다시 한번 소변처럼 묽은 체액을 찍찍 쏘아 댔다. 끈적한 점액질이 물기와 뒤섞여 주룩 흐르며 고환까지 엉망으로 적셨다. 경직된 복근이 그의 흥분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이호연의 턱 끝에 맺힌 땀방울이 내 뺨 위로 툭툭 떨어졌다.
“흐읏, 으…. 호연 씨이-…….”
“너무 야하잖아.”
이호연이 눈가를 찡그렸다. 존대를 썼다가, 흥분에 못 이겨 반말을 짓씹듯 내뱉은 그의 눈동자가 빛난다. 새까만 거울 같기도 하고 잿빛 보석 같기도 하다. 오직 나를 향한 그것을 놓치고 싶지 않아졌다. 경계를 넘는 그 순간, 나를 경멸 어린 시선으로 보지 않을까 두려웠었다. 이제는 시도 때도 없이 아래를 세우고, 적시고, 허리를 뒤트는 나를, 혹시나 음탕하다 할까 싶어서.
“나, 나아….”
“계속 싸니까, 안 무섭지. 그렇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오줌처럼 이렇게 질질 싸는 것이 이상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더 보여 달라는 말을 한다. 이호연이 체액으로 얼룩진 엉덩이를 터뜨릴 듯 쥐며 어깨로 가슴팍을 짓눌러 왔다. 전립선 안쪽이 다시 자극되었다. 내장을 헤집는 성기와 눌린 아랫배에 물줄기가 쉬지 않고 울컥울컥 뿜어져 나왔다.
침대 시트가 흥건하게 젖고 귓가에 흩뿌려진 이호연의 거친 숨소리가 흥분을 부추겼다.
숨 막히도록 꽉 끌어안고 그의 쇄골을 아득, 깨물었다.
“안에 해도 돼요.”
뭉개진 숨소리에 섞인 열망에 추어올리던 왕복 운동이 속도를 더했다.
격정을 치닫던 사정의 여운이 한 철의 소낙비처럼 지났다. 이호연이 욕조에 물을 받는 동안 망가진 시트를 걷어 내 둘둘 말아 문 앞에 내려 두었다. 속옷만 걸친 그가 분주히 움직이며 캡슐 커피를 내려 왔다.
“받아요.”
따뜻한 머그잔을 받아 들고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몇 번을 쌌지. 처음 분수처럼 쏟아 낸 후에는 셈이 무의미할 정도였다. 몸 안의 수분이란 수분은 전부 그곳으로 분출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마지막 한 방울까지 사출하고 말았다. 싸는 이유도 여러 가지였다. 체위를 바꾸는 과정에서 배가 눌려서, 깊게 삽입한 구멍에 또 손가락을 밀어 넣어 예민해진 내벽을 긁어서, 앞과 뒤를 동시에 자극해서. 막바지에 다다라서는 꼭 아랫배를 누르지 않아도 성기가 알아서 묽은 사정액을 토해 냈다.
나는 나대로 싸고, 이호연은 이호연대로 내 안에 세 번을 사정하고서야 물고 빨아 대던 몸을 놓아주었다.
후룩,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며 나른하게 눈을 깜박였다.
나를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간 이호연이 암막 커튼을 걷어 내며 창문을 열었다. 선선하게 부는 바람에 눅진하게 가라앉았던 방 안 공기가 서늘하게 순환되었다.
“춥진 않죠? 물 거의 다 받았는데.”
“으응, 괜찮아요.”
“매트리스 커버까지 다 걷어 내야겠네.”
내 앞에 선 그가 찡긋 웃었다.
“…읏.”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수그렸다.
“왜 이리 부끄러워하나. 꿀통 게이지까지 다 채워 줬는데.”
또, 또 그런 소리를!
“이제 꿀통 작업 못 하겠어요.”
이제는 꿀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오늘 있었던 일이 떠오를 것 같았다.
“빨리 끝내고 밭 주인으로 넘어가죠.”
“…시나리오 쓴 송이 님한테 죄책감 들어요.”
“그런 생각 할 필요 없어요. 꼭 꿀통이 아니었어도 오늘 일은 일어났을 겁니다.”
궤변론자 같으니라고. 이호연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나 함께 욕실로 향했다.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욕조에 발을 밀어 넣었다. 맞은편 자리에 이호연이 들어오며 물이 넘쳐흘렀다. 출렁이는 수면 위에 두 사람의 인영이 그려졌다.
**
2주간의 추가 작업을 끝으로 양봉업자 1차 스펙 분이 마무리되었다.
바로 다음 작업으로 밭 주인 1차 스펙에 대한 작업 리스트가 전달되었다. 다양한 종류의 농작물 리스트와 어떤 것을 강조하고 싶은지, 밭 주인 맵에 대한 스펙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었다. 그녀가 요구한 농작물 아이콘은 꽤 여러 종류였다. 구황작물인 고구마나 감자를 비롯해 과일이나 제철 채소가 적혀 있었다. 나는 비교적 작업이 쉬운 수박이나 복숭아 따위를 먼저 마무리하고, 고추와 가지, 옥수수 등을 뒤로 미루었다.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네요.”
“지금 어디 하고 있습니까.”
“고추요.”
“흐음.”
이호연이 제 턱을 매만졌다. 1차로 전달한 양봉업자 UI에 대한 유니티 작업이 일부 끝났는지, 그는 내 옆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거의 다 됐어요. 다음에 바로 가지 해야 해요.”
고추 아이콘을 확대하여 디테일 작업을 하다 기지개를 쭉 켰다.
“가지. 가지라….”
나직하게 중얼거린 그가 어깨에 머리를 기대 오며 팔을 둘러 내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예준 씨는 가지 좋아합니까.”
“응? 좋아하죠. 가지볶음도 좋아하고, 튀김도 좋아하고…, 오랜만에 어향 가지 먹고 싶네요.”
아무 생각 없이 말을 잇다 기묘한 분위기에 흠칫, 고개를 들어 이호연을 보았다.
“가지 먹으러 갈까요.”
“응…? 아니, 자, 잠깐, 왜…!”
나를 단단히 옥죄어 안은 그가 번쩍, 내 몸을 들어 올렸다. 공중에 들린 채 그의 옷을 움켜쥐며 도리질 쳤다.
고추에 꽂힌 게 아니라 왜 가지에 꽂힌 거냐고!
침대 위에 내동댕이쳐진 나는 아연하여 눈을 부릅떴다. 달려드는 이호연의 어깨를 밀어 내도 밀려 나지 않았다. 열기로 번들거리는 눈동자는 흡사 육욕에 미친 사이코의 것처럼 느껴졌다.
“흐, 아읏!”
이, 이제 가지도 싫어…!
언제 발기했는지 모를 단단하게 선 그의 성기가 나를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