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현실
순환하는 계절은 시간의 흐름을 투영한다. 기다려도 피지 않을 것 같던 꽃망울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 개화하는 것처럼 말이다. 앙상한 가지에서 움튼 새순은 아침저녁으로 부는 날 선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차츰차츰 번져 갔다. 초록이 번지며 자연이 변화하는 찰나의 순간을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불현듯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나는 다가온 봄을 한가로이 만끽할 수 없었다.
겨우내 잠잠해졌던 SG솔루션 IPO 공모주 일정이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를 비롯해 각종 포털에는 SG솔루션 공모주 신청을 앞두고 내부 분위기를 묻는 글들이 지속해서 올라왔다.
각종 증권사와 주식 포털에 내달 일정이 업데이트되면서 서비스 관련주들도 요 며칠 덩달아 상승세를 탔다. 실 공모주 신청 일자가 도래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오랜만에 주식 시장에 활황이 찾아왔다. SG솔루션 홈페이지 공지 사항에 게재된 내용이 그대로 SG플레이에도 전해지게 되었는데, 공모주 청약 세부 일정과 납입일, 상장일과 함께 IR 자료가 첨부되어 있었다.
신호를 받아 대기 중인 버스 안에서 멍한 눈으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서비스 회사일 뿐인 SG솔루션이 상장하는 게 이렇게 주목받을 일인 것인가. 소프트웨어 공급과 서비스를 내거는 흔한 IT 회사가 실시간 검색 차트에 오르내린다는 게 말이 되는 거냐고.
고개를 비스듬히 내려 휴대폰 전원 버튼을 눌러 화면에 들어온 불빛을 내려다봤다. 알림 창에 메시지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UI가 겹쳐져 떠 있었다.
[출근 중이죠? 이따 맥주나 먹으러 갈까요. - 쫄탱이호연]
이호연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다정하게 나를 대했고,
[네가 놓쳤다는 우리 사주가 SG솔루션 맞지? - 새성고 윤상우]
[따상 전망이던데 괜찮냐? 하긴 괜찮았으면 자랑부터 했겠지. - 새성고 윤상우]
[똑똑, 우리 사주 놓친 정예준 씨 전화 맞습니까? - 시디 강준성]
[멍청함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공모주 넣을 거냐? - 시디 강준성]
나를 놀리는 데에 도가 튼 윤상우나 강준성은 빈정거림을 아끼지 않았다.
[예준 씨네 회사 실검 떴더라. 당연히 했겠죠? 부럽네요. - NVC테크 김현성]
전 직장 동료인 김현성부터 시작해 사회에서 알고 지낸 몇몇 지인들이 SG솔루션 상장에 관해 물어 왔다. 내가 사주를 놓친 줄 모르는 지인들은 인생 역전이라느니, 돈만 좇던 내가 돈으로 흥하게 되었다는 축하를 건네기도 했다. 가슴이 갑갑했다. 턱턱 막히는 숨을 토해 내며 눈가를 찌푸렸다. 메시지 하나하나에 답장해 줄 기운도 없었다. 이호연에게만 긍정을 표한 후 바로 포털을 실행했다.
급상승 검색어와 뉴스 토픽, 경제 카테고리 일면에 보이는 SG솔루션 관련 뉴스 기사가 시야에 잡혔다. 살다 살다 주식으로 한숨짓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주식은 인생을 망치는 지름길이라 여겼건만. 미간을 좁히며 뉴스 상단에 위치한 기사 하나를 클릭해 보았다.
[대박 공모주 뜬다! SG솔루션으로 몰려든 “20-30”
올해 IPO 시장 청약 열기가 뜨겁다. 증시 활황 속에 주식을 배정받기만 하면 ‘따상’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따상의 주인공으로 떠오른 SG솔루션은(연결 자회사 총 11개, 지분법 회사 총 5개, 지분 투자 회사 총 13개) 상장을 앞두고 전년도 사업 전반을 다진 바 있다.
김 씨(31, 서비스업)는 “이번에 영혼까지 끌어모았다. 단 1주라도 받고 싶다.”라며 SG솔루션 따상에 대한 기대를 드러냈다. 안 씨(33, 제조업)는 “결혼 자금 다 당겼다. 이번이 마지막이라 생각한다.”라며 인터뷰 내내 흥분한 기색을 드러냈다.]
우리 사주만 제때 신청했었다면 이 이름 모를 김 씨, 안 씨들과 경쟁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나는 인터넷 창을 끄며 눈매를 아래로 푹 이지러뜨렸다. 갑갑한 속을 두드리고 싶었다. 언론이 이렇게 떠들썩한데 괜찮을까. 주식 관련 카페나 커뮤니티 자유 게시판에는 온통 SG솔루션에 대한 글뿐이었다. SG솔루션이 상장할 줄 알았다면 돈을 더 모아 둘 걸 그랬다는 글, 자랑하듯 몇 억씩 넣을 거라는 글들이 혼재해 있었다. 여기 있는 글들이 매크로가 아니고서야, 전부 2주 후의 경쟁자라는 말이다.
내가 청약 증거금으로 융통할 수 있는 최대치는 400만 원 정도가 마지노선이었다. 그렇지 않겠는가. 자취하는 가난한 직장인이 무슨 돈이 있어서 몇 백, 몇 천만 원씩 당기겠는가. 부모님 집에 내 한 몸 위탁해 살았더라면 1천만 원까지는 어떻게 해 보겠는데, 나와 사는 이상 산재해 있는 현금성 자산을 아무리 긁어모아 봐도 400만 원이 맥시멈이었다.
회사에 도착해서도 침울한 기색을 가감 없이 표출하는 내 어깨를 송기현이 툭툭 두드렸다. 바람이나 쐴 겸 회사 주변 한 바퀴를 돌고 오자는 그의 제안에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털었다.
“예준 님, 정말 공모주 청약할 거예요?”
평소답지 않게 차분한 어조였다. 주식 외에 관심사가 없는 송기현은 우리 사주 신청 이후에도 다른 종목에서 소소하게 수익을 거뒀다. 매일 주식 관련 기사만 들여다보는 그가 최근 주식 시장 분위기를 모를 리 없었다. 고(GO)를 외치는 언론과 여론은 공모 일정만 손꼽아 기다리듯 새로운 가십을 이전보다 더 가열하게 쏟아 냈다. 이런 상황에서 송기현은 우리 사주를 놓친 가련한 개미인 나를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 안으로 걸음을 옮기며 로비 층 버튼을 눌렀다.
“신청은 해 봐야죠….”
작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알죠? 보통 둘째 날에 넣는 거.”
“인터넷 찾아보니까 그렇다고들 하더라고요.”
“증거금으로 얼마 정도까지 생각하는데요?”
“음…, 400 정도…? 희망가가 2만 원이니까, 200주 정도는 신청할 수 있겠죠?”
“400주죠. 증거금률이 50%니까, 800만 원어치만큼 매수할 수 있을 거예요.”
송기현의 조언에 숙였던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이게 무슨 말이야. 가진 돈이 400만 원인데 왜 두 배만큼 매수할 수 있는 건데. 멀뚱멀뚱 송기현을 바라보자 그는 제 휴대폰 계산기를 보여 주며 내게 설명을 이어 갔다. SG솔루션의 희망 공모가는 1만 7천 원에서 2만 원으로 책정되어 있다. 확정 공모가가 2만 원이라고 가정한다면 증거금률이 50%이니 800만 원만큼 신청할 수 있다는 거였다. 만약 증거금률이 100%라면 400만 원에 맞춰서 200주만 신청하는 게 맞다고.
“어렵다.”
“일단 청약 증거금부터 확보해 두고, 경쟁률 잘 보고요. 둘째 날에 경쟁률 보고 1주도 배정 못 받겠다 싶으면 그냥 신청하지 말고…. 아니다. 다다음주에 같이 봐 줄게요.”
송기현의 도움을 받게 되다니. 그것도 주식으로. 울멍울멍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주식의 주 자도 꺼내지 말라며 파리 쫓듯 쫓아내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지금까지 꺼지라느니, 개미 따위라며 그를 얕잡아 보았던 것이 괜스레 미안하게 느껴졌다.
그날, 이호연과 함께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도 공모주 신청이 화두로 올랐다. 방문한 펍 옆자리에 앉은 남자들이 주식에 대해 열과 성을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호연도 내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 역력했다. 작년 10월, 내가 공모주 신청 기간을 놓친 것을 아직도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괜찮다며 손을 휘휘 저었다. 입 안이 쓰긴 했지만, 명백하게 이호연의 잘못이 아닌걸. 따지고 보면 신청 전날 그를 덮치다시피 한 건 나였다. 책임 소재를 굳이 따지자면 제대로 일정을 체크하지 못한 내게 있었다.
“기현 님 말로는 400만 원이면 증거금률 계산해서 800주 신청할 수 있대요.”
경쟁률에 따라 1주도 안 될 수 있지만, 가진 예산에서 신청해 볼 생각이었다.
“…경쟁률이 치열할 거라는 전망은 들었습니다.”
“호연 씨도 신청할 거예요…?”
이호연도 주식을 꽤 하는 걸로 알고 있다. 그의 자금의 원천이 주식과 부동산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에 있을 때부터 여윳돈으로 국내외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해 왔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다. 종종 그가 증권사 앱을 켜서 보유한 주식을 살피는 것을 어깨너머로 보기도 했다. 미국에 있는 동안 가질 수 있는 취미가 많지 않아 주식을 공부했다고 들었는데. 그런 그가 SG솔루션의 공모주 청약을 놓칠 리 없었다.
“으음.”
곤란한 웃음이 귓바퀴를 돌았다. 내 집요한 시선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넣을 건데요…?”
“정하진 않았습니다. 경쟁률 보면서 넣어야겠죠.”
이호연은 고민 중이라며 제 턱을 매만졌다.
예산이 얼마나 될까. 400만 원 정도의 예산인 나와 달리 이호연이라면 한 1천만 원은 넣지 않을까. 어쩌면 집을 구하느라 돈을 많이 써서 나와 비슷한 수준일 수 있다.
“주말에도 장이 열리면 호연 씨랑 같이 보고 넣는 건데, 청약일이 하필 월요일, 화요일이라….”
아쉬움에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송기현도 주식을 잘 보는 것 같지만, 아무래도 이호연이 봐 주는 게 더 믿음이 가는데. 비교하자면, 송기현은 일개미 느낌이고 이호연은 여왕개미 느낌이랄까.
“아마 그날은 회사에서 사훈이나 다른 팀장들이랑 같이 보지 않을까 싶습니다.”
회의를 빙자하여 주식 투자를 할 것 같다며 그가 눈매를 휘어 웃었다. 두 사람을 비롯해 리더급이 전부 3시에서 4시 사이에 자리를 비우면 직원들도 알아서 공모주 신청을 하든, 무엇이든 하지 않겠느냐고.
“저는 기현 님이랑 봐야겠네요.”
“두 시나 세 시만 되어도 가닥이 잡힐 겁니다.”
“1주라도 되면 좋겠어요.”
“될 겁니다.”
이호연이 손을 들어 웨이터를 불렀다. 나를 대신해 수박 맥주를 추가 주문해 준 그가 싱글 미소 지었다.
**
~주린이의 공모주 청약 일지~
월요일, 오후 5시.
퇴근까지 두 시간을 남기고 허망한 눈으로 사무실 천장만 올려다보았다.
“기운 내요, 예준 님….”
옆자리 개미가 나를 달랬다. 첫날 공모주 신청자 수가 400명을 넘은 것이다. 정신이 혼몽해졌다. 세상에 김 씨와 안 씨가 이렇게나 많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따상으로 등극하여 코스닥 시총 4위에 랭크되었다는 기사가 줄줄이 쏟아졌다. 청약 증거금만 14조가 몰렸단다. 최대치로 사주를 신청한 직원들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환희를 내질렀다. 다들 나 빼고 중산층인 거지? 그런 거지? 충격이 가시지 않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호연 씨, 경쟁률이….
부들부들 떨며 이호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끝나고 데리러 갈게요. 술 마실까요? 아니면 바로 집으로? - 쫄탱이호연]
-술….
지금 기분이라면 암바사를 열 잔도 더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화요일, 점심시간.
점심을 먹고 근처 카페에서 팀원들과 쉬는 중이었다. 송기현은 도전의 기회조차 상실한 내가 어지간히도 불쌍했는지 음료를 대신 계산해 주었다.
“어제는 잘 쉬었어요?”
그는 내 손에 잔을 쥐여 주며 안타까움을 담아 물었다.
“…하하, 아, 네? 아아- 어제 잘 들어갔죠. 술도 마시고….”
멍하니 있다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며 송기현의 물음에 대꾸했다. 술도 마셨고, 오랜만에 이호연과 야탑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내가 말미를 흐린 것이 주식 때문이라고 생각한 송기현이 침음을 삼켰다. 조용해진 분위기에 가만히 앉아 있던 정소랑이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아참, 채선 님, 디도스 말하는 거 보셨어요. 너무 재수 없어서 놀랐잖아요, 진짜.”
국어책 읽듯 또박또박한 말투였다. 평소와 달리 고저 없는 목소리에 송기현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김정우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든 웃음을 터뜨리지 않으려 시선을 피했다.
“아, 동수 님이 지라 코멘트 써 놓은 거 봤어요. 으, 왕 재수. 바이러스 같은 놈. 사업부는 꼭 우리 월급을 본인들이 주는 것처럼 굴어요.”
정소랑의 국어책 읽기를 받아 준 것은 이채선이었다.
“다들 왜 그래요? 나 진짜 괜찮은데….”
내가 팀원들을 향해 항변하자 찬물 끼얹은 듯 모두가 침묵했다.
“예준 님, 라떼 하나 더 사 줄까요? 아니면 디저트?”
송기현이 애잔하게 나를 바라봤다. 됐어, 됐다고. 왜 다들 나를 그렇게 보는 건데요. 그런 눈빛은 넣어 두라고. 세모로 치켜뜬 눈을 흘기며 옆자리에 앉은 송기현의 팔뚝만 꼬집었다.
오후 내내 바빴던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일이라도 안 바빴다면 종일 공모주의 여파로 울적함을 감추지 못했을 테니까. 나는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야 겨우 업무를 마무리하고 짐을 챙겨 나올 수 있었다. 청약에 도전조차 하지 못한 나와 달리 이호연이라면 1주 정도는 건지지 않았을까. 아니면 어제 장렬히 실패한 나를 보고 그도 포기했을 수 있다. 경쟁률이 어마무시하게 솟구치는 걸 그도 보았을 테니까. 여느 때처럼 그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로비로 내려와 그의 차가 있는 정문 앞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뗐다. 관성적으로 손을 뻗어 조수석 문을 열었다.
“고생했어요.”
“호연 씨도요.”
조수석 문이 닫히자마자 몸을 빼내 바로 옆까지 다가온 이호연이 내 얼굴에 쪽, 하고 입술을 맞추었다. 그와 가벼운 입맞춤을 나눈 후 벨트를 맸다.
“어땠어요? 호연 씨는 넣었어요?”
내 물음에 시동을 걸기 위해 뻗은 그의 손이 허공에서 우뚝 멈췄다.
“아….”
“아?”
“넣긴 했습니다.”
“경쟁률 천삼백 정도 되지 않았어요…?”
“많이 몰려서 마지막까지 고민이 많긴 했습니다.”
이호연이 시동 버튼을 눌렀다. 차체가 잘게 진동하기 시작한다. 그 울림에 가슴이 쿵쿵 뛰었다. 고민이 많았는데, 그래서, 넣었다고 안 넣었다고?!
“그럼 얼마를…. 아니, 넣긴 한 거죠?”
“네…, 1억 정도.”
주저하다 말을 잇는 그를 얼이 빠진 채 바라보기만 했다.
“1억….”
1억. 1억……. 1억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그렇게 쉽게 융통할 수 있는 돈이었던 거야? 1천만 원 정도로 그의 예산을 폄하한 스스로에 탄식이 터졌다. 당신 집 매매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 어디서 1억이 뿅, 하고 나타난 거냐고. 입만 벙긋대며 그를 보자 허허, 웃기만 한다. 금전적인 부분에 한해 스케일이 남다른 사람이라는 건 알았다. 벌레를 잡기 위해 수표를 꺼낼 때부터 씀씀이가 컸으니까. 그가 주는 선물도 고가품이 대부분이고. 내가 원한다고 하면 무엇이 되었든 갖다 줄 수 있는 통 큰 사람인 건 진작부터 알았는데, 이 씁쓸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란 말인가.
“우리 예준 씨 맛있는 것도 사 주고, 노트북도 새것으로 바꿔 줄 생각입니다. 예준 씨는 저를 가졌으니까, 제 건 예준 씨 거고, 예준 씨 건 예준 씨 거 아니겠습니까.”
궤변 아닌 궤변을 조곤조곤 잇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뭐, 그 말도 맞는 말이긴 한데…, 그거 말고 내 개인 재산이 조금 더 늘어나면 안 되는 거야? 당신 말마따나 원래부터 내 건 내 거니까, 내 게 조금 더 많아지고, 커지면 좋은 거잖아.
“…원래 주식은 있는 사람들이나 하는 거죠.”
힘없이 중얼대는 내게 그가 그건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억 소리 나는 돈을 증거금으로 넣은 사람이랑 탈탈 턴 전 재산 400만 원도 경쟁률에 밀려 못 넣은 사람이랑 같을 리가 없잖아. 이래서 있는 사람들이 서민들을 보고 개미, 개미 하는 거구나. 단타로 치고 빠지는 개미들과 달리 제대로 주식 하는 사람들은 매수 단가부터 다르다고 들었는데. 고개를 돌려 이호연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매끄럽게 뻗은 콧날과 호선을 그리는 단정한 입매에 헛웃음이 터졌다.
아주 예전에 누군가 말했었던 것이 생각났다. 살아가면서 기회는 세 번 온다고. 내 기회는 GUI 디자이너로 전직을 했던 때에 한 번, 이호연을 만나게 된 것으로 또 한 번을 쓰게 된 것 같았다. 세 번째 기회가 주식이었다면 좋았겠지만, 앞으로 약 오십 년 정도는 더 살아가야 하니 아껴 두라는 신의 계시로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술도.”
“네, 귀하다는 몰트도 많이 사 줄게요.”
이호연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핸들을 꺾었다.
“주식도 가르쳐 줘요. 호연 씨 넣고 있는 국내 종목도 알려 주고 다음에 뜰 공모주 같은 것도….”
배운 만큼 보인다고 했으니 이참에 주식도 배워 둬야지.
오늘 하루는 예스맨이 되기로 작정하기라도 한 것인지, 이호연은 내 말에 무조건 긍정을 표했다. 그에게 주식을 배우는 동안 휴대폰에 저장된 이름이라도 바꿔 놔야 하나. 증거금 1억의 여파가 가실 때까지 ‘일억이’나, ‘일억이호연’ 정도로.
수요일, 일하는 중.
“…1억, 아하하.”
실없는 웃음이 절로 터지는 것을 그대로 흘려버렸다. 문득 전날 이호연이 증거금으로 넣은 1억이 생각난 거였다. 피식피식 터지는 실소와 함께 옆자리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예준 님, 간식 타임…?”
송기현이 의자를 빼내어 내 옆으로 바짝 붙으며 안색을 살폈다.
“뭐래요. 이제 괜찮아요. 가까이 붙지 말고 저리 가요.”
손을 휘휘 저으며 그를 쫓아내 원래 자리로 돌아가게 했다. 송기현은 내가 개미 포비아로 돌아왔다며 김정우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목요일, 4시경 카페테리아에서.
직장인으로서 3시와 5시 사이에는 반드시 쉬어 주어야 하는 규칙이 있다. 일이 아무리 많아도 환기를 시켜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채선과 정소랑은 여자들끼리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3시 30분이 되자마자 어디론가 나가 버렸고, 자리에 남은 나와 송기현, 김정우도 슬금슬금 일어나 4층으로 내려왔다.
사내 카페에서 음료를 주문한 후 창가 자리에 일렬로 앉아 초점 없는 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떠다니는 구름, 느린 바람에 거불대는 나뭇잎에서 완연한 봄이 느껴졌다.
송기현이 음료 석 잔을 쟁반으로 옮겨 오며 하나씩 나눠 주었다. 그는 자리에 앉으며 김정우 옆으로 몸을 기울였다.
“정우 님, 우리 금요일 저녁에 주식 강의 들으러 갈래요? 저 채선 님처럼 해외 주식까지 해 보려는데, 마침 지인한테 괜찮은 강의라고 추천받았거든요. 족보도 준대요.”
“진짜요? 어디서 하는데요?”
눈을 빛내며 주식에 대해 논하는 두 사람을 심드렁하게 지켜보았다. 이것들은 지치지도 않나.
“잠시만요. 메모장에 적어 뒀는데….”
송기현은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 둔 것을 뒤적거리다 나와 김정우에게 제 화면을 들이밀었다.
[신림동 전세방에서 시작한 주린이의 해외 주식 성공 신화!
주식 차익으로 청담동 아파트 두 채 매매 비법 대방출!
장소, 강남역 OO카페 저녁 8시, 코칭 비용 10만 원, 족보 포함.]
사짜 느낌이 물씬 풍기는데, 송기현은 쉼 없이 입을 놀리며 강사의 이력을 읊기 시작했다. 해외 주식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라면 전부 이 강사를 통한다고 할 정도로 이 바닥에서는 신에 가까운 존재란다. 족보도 풀린 게 없어서 강의를 직접 들으러 가야 겨우 구할 수 있다고.
“예준 님도 같이 갈래요?”
광신도처럼 떠들던 송기현의 마수가 내게로 뻗어졌다. 이참에 불안정한 국내 주식 말고 해외 주식으로 한탕 거둬 보라는 조언을 늘어놓는다. 디자이너가 아니라 흡사 펀드 매니저 같아 보이기도 한다. 나중에 디자이너 때려치우고 여의도 어딘가에서 펀드 매니저를 하고 있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자식 정도의 관심이라면 진짜 광기 수준이니.
“강남까지 가는 것도 귀찮아서 갈까 말까인데, 개미핥기한테 십만 원이나 주고 들으라고요.”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욕을 눈으로 쏘아 대며 송기현을 매섭게 노려봤다.
“개미핥기래. 하하하.”
송기현은 대소하며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한참을 낄낄거렸다.
“정우 님, 기현 님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듯요. 하다 하다 개미핥기한테까지 갈 정도면.”
나는 김정우의 팔을 툭툭 두드리며 고개를 저었다. 저건 글렀어. 온갖 별명을 지어 주고, 수치를 자극해도 점점 완전체가 되어 가는 것 같다. 지금까지 많은 회사를 다녔고, 많은 사람들을 스쳤지만 이 정도로 주식에 미친 놈을 만난 적은 없었는데. 이호연도 주식을 하긴 하지만 너처럼 강의를 들으러 강남까지 가진 않는단 말이다.
“10만 원이면 고민 좀 해 봐야겠네요.”
김정우는 손가락을 꼬물거렸다. 이미 주식에 발을 들인 김정우는 송기현을 주식 선생이라도 되는 것처럼 전적으로 신뢰했다. 주식은 위험하지 않느냐며 중립적인 태도를 고수하던 김정우의 변화가 납득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이채선이나 송기현은 오래전부터 주식을 해 왔고, 상장의 흐름을 타며 회사 전체에 주식이 유행처럼 번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송기현의 말대로 SG솔루션은 따상의 아이콘으로 떠올랐고, 경제지에서는 1인당 평가 차익을 셈하여 기사화하였다. 1인당 5천만 원 선, 임원이라면 억 단위의 평가 차익을 손에 거머쥐게 되는 거였다.
주식에 대해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두고 깊게 한숨을 몰아쉬며 시선을 옮겼다. 앙상궂은 나무에 새순이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화랑공원은 초록의 물결이 넘실대고 있었다. 온기를 머금은 바람이 장난이라도 걸듯 나뭇가지와 실랑이를 벌였다. 조금 더 멀리 시선을 내던졌다. 길을 따라 걷듯 이어진 시선이 아파트 단지로 향했다.
주식이나 펀드 같은 것 말고 뭐 건질 만한 거 없나.
혼잣말을 입 안에서 굴려 보았다.
연봉협상 때마다 월급을 IRP와 비과세 보험에 조금씩 더 할애하다 보니, 수중에 남는 현금이 많지가 않다. 그렇다고 이제 와 주식에 올인하자니, 송기현처럼 부지런히 증권 시장을 들여다볼 자신도 없다. 잘 모르기도 하고.
흐음, 작년처럼 수익이 쏠쏠한 아르바이트라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지잉. 순간 손에 쥔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화면을 내려다본 나는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사진) 끝나고 브라질 술이나 맛볼까요? - 일억이♥]
이호연이 ‘Cachaca 51’이라는 상표가 보이는 투명한 술병을 찍어 보내왔다. 실리콘밸리에서 친하게 지냈던 브라질리안 개발자가 회사로 놀러 왔다고 했다. 김사훈 대표와도 아는 사이라며 한국에 놀러 온 김에 선물로 사 왔다는 설명을 더했다. 메시지에서 느껴지는 그의 들뜬 기색에 나는 그저 웃기만 했다.
알겠다는 긍정을 그에게 표하며 다시 고개를 들어 아파트 단지를 바라보았다.
저 아파트에는 벌레가 나오지 않겠지?
청결에 신경을 쓰는 이호연이니만큼, 외부 유입조차 허락하지 않을 것 같다.
한 마리 정도 나오면 좋겠는데….
또 나온다면 이번엔 크기나 능력치가 아니라 마리당으로 딜을 걸어서, 이호연한테 용돈이나 달라고 해야지 안 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