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하루, 나의 밤 (9/25)

나의 하루, 나의 밤

“몸살은 다 나았어요?”

1층 로비에서 만난 송기현이 내 몸 상태를 체크했다. 뜬금없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당혹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몸살이었다면서요.”

덧붙인 설명에 그제야 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지난주 목요일 밤부터 이호연에게 내리 시달린 것이 떠올랐다. 그야말로 삼 일 밤낮으로 그 짓만 한 것이다.

“아…, 이제 괜찮아요.”

멋쩍은 웃음을 입매에 내걸었다.

다행히 송기현은 어디가 좋지 않은지 더 캐묻지 않았다. 주말에 쉬었는데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면 오늘도 연차를 썼을 테고, 지금은 괜찮다 하니 묻지 않는 것 같았다. 만약 이것저것 캐물었다면 난감했을 테지. 섹스로 일 년 치 운동을 다 한 기분이라는 말을 어찌 할 수 있겠는가.

“서른 줄 넘어가면 하루하루 다르다니까요. 예준 님도 미리 관리 좀 해요. 영양제 같은 것도 자리에 두고 챙겨 먹고.”

송기현이 미주알고주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렇지 않아도 체력 관리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던 참이었다. 몇 날 며칠 과제를 하며 밤을 지새워도 너끈하던 이십 대의 체력은 어디로 가고, 이제는 조금만 무리하면 알이 배겼고 어깨는 담이 온 듯 묵직했다. 거죽만 남았다고 해야 하나. 구체적인 시기를 따져 보면 3개월 전, 오피스텔에서 낙생원마을의 벽돌집까지 자전거를 타고 갔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사나흘 간 후들대는 다리로 출퇴근하던 것을 떠올리니 입 안이 썼다.

이호연은 괜찮은가. 같은 삼십 대인데 이렇게 차이가 나도 되는 것인지. 고작 네 살 차이인데, 그의 체력은 대단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미국에 머무는 동안 개발이 아니라 운동을 하고 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기초 대사량도 높고 체력도 좋았다. 꾸준히 운동한 티가 나는 몸은 용광로의 이글대는 불꽃 같았다. 근력 또한 종잇장 같은 내 몸과는 달랐다. 알이 덜 빠진 뱃가죽을 슬슬 문질렀다. 엉덩이 둔통이 아직도 어릿하게 남아 있었다. 모아에 완전히 적응될 즈음 PT를 다닐 계획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끊게 되면 같이 다니자던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건만. 이호연의 체력이 지금보다 더 좋아지면 그땐 감당할 수 있을까.

「문이 열립니다」

익숙한 기계음이 울리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승강기에 올라 10층 버튼을 누르고 벽에 기대어 섰다.

“기현 님.”

엘리베이터 거울을 통해 머리를 다듬는 송기현을 불렀다.

“네?”

“…회사 헬스장, 아직 신청 받죠?”

내 물음에 송기현이 눈을 크게 떴다.

“아직 받을걸요? 다니려고요?”

“프로젝트도 끝났겠다, 여유 있을 때 다녀 보려고요.”

“잘 생각했어요. 점심 먹고 다녀오면 되겠네. 아니면 아침에 저랑 만나서 하든가.”

서른 줄에 하루하루 다르다면 내 사십 대는 불 보듯 뻔했다. 지인들을 만나 오랜 야근과 노동으로 은퇴 무렵에는 휠체어나 지팡이가 필요하게 될 것이라는 우스갯소리를 늘어놓은 적이 있었는데, 이대로 가다가는 가볍게 던진 농이 머지않아 현실로 다가올 것만 같았다. 안 되겠어. 생각난 김에 사무실 들어가자마자 인사팀에 신청서부터 제출해야지.

“흐흥.”

웬일로 송기현이 콧소리를 다 내었다. 의아한 눈으로 힐끗 올려다보자 내 어깨에 팔을 걸치며 해죽, 웃음을 흘렸다. 그러면서 어서 무슨 일인지 물어봐 달라는 뉘앙스를 풀풀 풍겨 왔다.

“좋은 일 있어요?”

“있죠. 기분이 참 좋아요. 월요일이 좋을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는 거 아닙니까, 제가.”

“월요일이?”

이 또라이가 월요일부터 왜 이래? 직장인에게 월요일이 좋을 수도 있는 거였나? 믿을 수 없다는 시선을 그에게 마구 쏘아 댔다. 유년기부터 시작해 월요일이 좋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학생 때는 물론이거니와 직장 생활을 하는 지금도 끔찍하게 싫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진심으로 좋다고 말하는 인간은 살면서 본 적이 없었다. 월요일은 스펀지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나 좋아하는 거 아니었냐고. 그리고 출근을 좋아하는 건 회사 대표나 임원들 아냐? 우리 같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아니라.

되묻는 나를 보며 외려 송기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때맞춰 10층에 도착한 승강기 문이 열렸다. 먼저 내린 내 뒤로 송기현이 따라 내리며 팔뚝을 붙들어 세웠다.

“예준 님, 제가 무슨 말 하는지 몰라요?”

“뭔데요.”

송기현의 이마에 굵은 골이 파였다.

“농담 아니고 진짜로?”

“뭐냐니까요.”

“설마 안 했어요?!”

“그러니까 뭔데….”

“허, 지난주 대출 지원 신청이랑 사주 신청 마감이었잖아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런 대답도 못 한 채 우뚝 섰다. 붙들린 팔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진짜 안 했다니.”

송기현은 믿을 수 없다며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연차를 냈어도 신청서 양식이 사내 메신저에 올라왔기 때문에 VPN을 통하지 않아도 다운로드를 받아 접수할 수 있었다.

“…깜빡했어요.”

“허얼.”

충격을 받은 듯 송기현이 짧게 탄식을 내뱉었다. 깜빡할 게 따로 있지. 어떻게 그걸 까먹을 수 있느냐는 눈빛이 곧이곧대로 달려들었다. 할 수나 있었겠는가. 주말 내내 이호연에게 시달리며 곤죽이 되어 있었는데. 일요일 저녁이 되어서야 간신히 오피스텔로 생환할 수 있었다. 수전증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달달 떨리는 손으로 현관문을 열고 곧장 침대 위로 쓰러졌다.

“공모주도 있으니까…, 신청 기간에 하면 되겠죠.”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며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종업원이 자기 회사 주식을 놓쳐 공모주로 사는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라니. 그래도 시기 봐서 사면 그만이겠지. 공모주 청약이 치열하면 얼마나 치열하겠어. SG솔루션이 제약주도 아니고. 자회사로 SG게임즈가 있긴 하지만 기껏해야 퍼즐 게임이나 가끔 출시하는 정도니까.

“흐음, 그렇게 안 쉬울 것 같은데.”

송기현이 콧소리를 내며 입매를 비틀었다.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안면 인식 태블릿에 얼굴을 비추었다.

『플랫폼 본부 GUI디자인팀, 정예준, 09:47, 출근 기록 확인.』

그가 뒤이어 출근 도장을 찍는 사이 자리에 앉기 위해 통로를 지났다. 여느 때와 달리 모여 있는 직원들의 웅성거림에 귀가 쫑긋 섰다. 나는 소리의 근원으로 고개를 돌렸다. 개발실 자리가 어수선했다. 플레이짐 서비스 오픈을 준비했을 때와 달리 한껏 들뜬 분위기였다. 주영수를 비롯해 이대현, 성현호 등 일찍 출근한 개발자들이 모기업에 대한 전망이나 종목에 대한 열띤 토론을 나누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그날그날의 업무를 정리하고 있을 윤아영까지 가세해 주식 전망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중이었다.

진짜 나만 안 한 건가…?

엄지 옆에 난 거스러미를 뜯어내며 눈을 굴렸다. 에이, 설마…. 송기현이야 주식 노래를 불렀다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런 내색도 거의 없어 보였는데. 주식이 무슨 동네 슈퍼에 파는 껌이나 과자 따위도 아니고, 진입 장벽이 이렇게 낮은 거였어? 초조함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쩐지 밀려드는 불안감에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좌악 끼쳤다. 약삭빠른 송기현은 개미 군단에 접근하여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처럼 금세 스며들었다.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옹기종기 모여 있던 개미들은 10시를 기점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채선과 팀장급들이 출근했기 때문이다. 이채선은 제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수첩을 들고 곧장 회의실로 향했다. 나를 비롯해 팀원들도 바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한 주가 돌아왔음을 알리는 스크럼의 시작이었다.

나는 회의실 좌석에 착석한 팀원들의 면면을 하나씩 뜯어보았다.

주식을 하느니 강원랜드에 가겠다는 너스레를 떨었지만, 해외 주식으로 크게 벌어들인 전적이 있는 어불성설의 끝판왕 이채선,

개미 숙주답게 장이 열린 후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송기현,

언제나 그래 왔듯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속을 통 알 수 없는 정소랑,

연신 하품만 하며 아닌 척 시침을 떼고 있는 김정우.

이렇게 모아 놓고 보니 안 한 사람은 정말 나밖에 없는데? 이런 나쁜 인간들. 연차였다지만 언질이라도 주지!

“주말 잘들 보냈죠? 저는 날이 추워져서 어제부터 온수 매트 켰어요.”

이채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정소랑도 침구를 교체했다며 맞장구쳤다.

“예준 님, 몸은 좀 어때요? 몸살이래서 걱정했는데.”

“몸은 괜찮은데…….”

“몸보다 마음이 아프지 않을까요? 예준 님 우리 사주 놓쳤대요.”

송기현이 말을 가로채며 낄낄거렸다. 평소였다면 매섭게 반박이라도 했을 텐데, 놓친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입술만 꾹 다물 뿐인 내게 팀원들의 시선이 모였다.

“안 했어요? 사업지원본부에 말하면 안 되나? 금요일에 연차였다고 하고.”

“솔루션에 이미 명단 넘겼대요.”

김정우가 말을 보태었다.

“저런, 예준 님은 할 줄 알았는데. 물질 만능주의자계의 선두 주자라.”

이채선이 딱하다는 듯 나를 보았다.

그래요. 저도 제가 물질 만능주의자이자 그 누구보다 실리와 배금을 실천해 온 사람이라 짧게 고민하고 넣을 줄 알았습니다.

“기운 내요, 예준 님. 원래 주식은 기현 님 같은 악성 개미들이나 하는 거예요. 저는 대출은 안 받고 소액만 신청했는데, 서민이 해 봐야 서민이죠. 보호 예수로 바로 찾지도 못하는데요, 뭘.”

“악성 개미라뇨? 나 되게 바이러스 같다.”

위로랍시고 말하는 정소랑도, 제 험담인 줄 모르고 유산태평으로 껄껄 웃는 송기현도 모두 한패 같았다. 들떠 보이는 팀원들은 저마다 알아온 정보를 교환했다.

“그으렇게 회사 잘나간다고 말해 줬는데도, 쯧쯧.”

송기현이 내 팔뚝을 툭툭 치며 과장스레 혀를 내둘렀다. 뾰족한 시선으로 송기현을 노려보며 입매를 비죽거리다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침울해하는 나를 두고 근황 토크가 이어졌다. 지인의 결혼식을 다녀왔다는 이채선과 남자 친구와 정동진으로 1박을 다녀온 정소랑, 소개팅 후 애프터에 성공했다는 송기현, 이번 주는 집에서 쉬었다는 김정우까지. 저마다의 주말을 공유하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나에게로 다시 공이 돌아오긴 했으나 집에만 있었노라 힘없이 대꾸하고 말았다.

잡담으로만 십여 분을 보낸 후, 이채선이 시간을 확인하며 업무에 관한 내용을 입에 담았다.

“이번 주는 공유할 사항이 몇 가지 있어요. 본부별, 팀별로 KPI 제출하라는 지시가 있었어요. 디자인팀 KPI는 기획팀 방향에 맞춰 따라가면 되는 거라, 일호 님이랑 논의해서 제출하고 팀 내 공유할 거예요. 그리고 눈치껏 알아차린 사람도 있겠지만, 곧 평가 시즌이라 인사팀에서 피어 리뷰 관련 메일 보낼 예정이라고 해요. 팀 리뷰 후에는 저와 개인 면담할 거고요.”

수첩에 적어 온 내용을 하나씩 공유하며 그녀가 팀원들과 눈을 맞췄다. 평가 이야기에 풀어졌던 분위기가 진중하게 가라앉았다.

눈을 굴려 이채선을 바라보았다. 나와 시선이 얽히자 그녀가 눈매를 접어 싱긋 웃었다. 그래, 이런 강약 조절은 배울 만한 점이긴 하지. 가끔 악덕 업주 같긴 하지만, 팀 세팅 후 관리에 대한 이슈가 전혀 없는 그녀였다. 팀워크를 위해 비교적 편안한 분위기를 고수했고 디자인 감각도 좋은 리더였다. 현업에서 일하면서 실무와 매니징의 균형을 잘 맞추는 리더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나마 지금 회사를 오래 다니는 이유 중 하나는 ‘사람’인데, 일도 힘들고 사람도 좋지 않았다면 조금 더 공격적으로 이직을 준비했을 것이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예준 님만 잠깐 남아 주세요. 다른 분들은 오늘 점심에 뭐 먹을지 고민해 주시고.”

이채선이 펜을 내려놓으며 다른 팀원들을 내보냈다.

뭐, 뭐야. 왜 나만 남겨? 불안하게시리. 또 신규 사업 같은 거 맡으라는 건 아니겠지? 팀원들은 내 불안과 동요를 아는지 모르는지 순서대로 회의실을 나섰다. 이채선은 문이 닫힐 때까지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채 침묵을 지켰다. 그녀는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내년에 예준 님을 시니어로 올릴 계획인데.”

“네?”

“말 그대로예요. 기현 님과 예준 님 중 누구 하나는 시니어로 올라가야 팀 밸런스가 맞아요. 우리 팀만 리드 하나에 주니어 셋이잖아요. 내년 TO를 위해서도 그렇고요. 신입도 주니어인데 가이드해 줄 시니어가 한 명 정도는 있어야죠. 두 사람 경력이나 작업 완성도 보고 금요일에 본부장님이랑 의논해서 정한 거예요. 슬슬 올라갈 연차이기도 하고.”

이게 무슨 일이야. 시니어라니.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이채선을 바라보았다.

“알죠? 시니어는 연봉 테이블부터 다른 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를 리가 있나. 테이블이 나누어져 있다는 것은 구간별 격차를 무시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시선을 기울여 긴장으로 차게 식은 손가락 끝을 응시했다. 무엇이 되었든 돈을 많이 준다는 것은 중요한 거다. 땅 파서 십 원 한 장 나오지 않는 세상에 연차가 되었으니 진급을 시켜 준다는 것이 얼마나 솔깃한 제안인가. 아무 조건 없이 연봉을 올려 줄 리는 없겠지만 올릴 수 있을 때 올려놔야 다음 스텝을 위해서도 좋았다.

침을 꿀꺽 삼키며 마른 입술을 혀로 훔쳤다. 시니어로 올라가면 연봉 재계약을 할 테고, 재계약을 한 다음 달에는 월급이 달라지게 될 것이다. 가만, 얼마나 올릴 수 있지? 5%? 10%에서 20% 이상 올릴 수 있나? 머릿속에 계산되지 않는 숫자들이 두서없이 떠다녔다. 내가 탈출 각을 재고 있는 것 같아서 도망가지 못하게 잡아 두려는 건 아닐까? 평소 잘 쓰지 않던 반반차와 연차 휴가를 이틀 연속으로 쓰겠다고 한 데다,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내가 우리 사주도 신청하지 않았다. 일하는 수족 1호 내지 N호가 대열을 이탈하지 않게 하기 위한 제안일 수 있었다.

“부담 갖지 않아도 돼요. 하는 일은 같을 거예요.”

이채선이 태평스레 의자에 등을 기댔다.

실무를 하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고, 당장 진급을 하는 것도 아니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전 계열사가 연봉 협상을 하는 4월이 되어야 인사 발령이 날 것이라며 여상하게 설명했다.

누군가를 매니징 하는 게 아니라 지금과 같다면 괜찮지 않을까. 바로 시니어가 되는 것도 아니고, 4월이면 시간적 여유도 있다. 의심의 눈초리를 슬그머니 거두었다. 좋게 생각해도 되는 거겠지. 원래 행운과 불행은 한 끗 차이라잖아. 주식은 얻을 수도 있고 잃을 수도 있지만, 시니어로 올라 연봉이 오르면 이득만 있는 거니까. 올해 내가 얼마나 분골쇄신하여 서비스에 이바지했으면 시니어로 올리자는 이야기까지 나왔겠어.

“됐죠? 식사나 하러 갑시다.”

이채선이 기댔던 몸을 바로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또한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녀의 뒤를 쫓았다.

**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송기현은 SG솔루션 상장과 관련한 글이 올라올 때마다 팀 채팅 방에 나를 태깅 하여 링크를 올리곤 했다. 나를 놀리기 위해 과장된 기쁨을 표출하는 것도 알았고, 동요를 드러내면 더 할 것이라는 것도 알았지만 감정 컨트롤이 쉽지 않았다. 차익을 놓치게 된 것에 대한 아쉬움과 개미에게 놀림 받는 날이 오게 된 것에 대한 복합적 감정이 엉킨 거였다.

[(링크)[단독] SG솔루션, 자회사에도 우리 사주 조합 개방… IPO 앞두고 우리 사주 배정 – SG 송기현]

[(링크) SG솔루션, 내년 4월 상장 예고…, 예상 시총 1조 5,000억 원 – SG 송기현]

“작작 좀 올리지?”

“예준 님 반응이 너무 웃겨서.”

“닥쳐요.”

송기현이 짜증을 툭 내뱉는 나를 보며 실실 웃었다. 웃기냐? 나는 속이 쓰리는구만.

“패가망신 언제 하나.”

“하하하, 말했잖아요. 운중동에 집 살 거라니까.”

씨알도 안 먹힐 악담이라며 껄껄 웃기만 한다. 그 모습이 더 얄미웠다.

반면, 내가 우리 사주를 놓친 것을 안타까워한 이도 있었다. 다름 아닌 이호연이었는데, 신청 기간에 접수하지 못했다는 것을 전해 듣자마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기간이 금요일까지라는 것도. 팀원들이 놀랐던 것처럼 그 역시 “예준 씨는 돈 좋아하니까, 사내 공지 떴을 시점에 넣었을 줄 알았죠.”라며 눈매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는 무척이나 미안해하기도 했다. 금요일에 연차를 내지 않았다면 신청을 하지 않았겠느냐며 말미를 흐렸다.

그러나 이호연이 사과할 일이 아니었고, 잘못도 아니었다.

내 팔자가 돈을 피해 간 게지.

고민하고 또 생각해도 결론은 그거였다. 팔자. 내 팔자가 우리 사주를 놓칠 팔자였던 거다. 아마 이호연과 함께 있지 않았더라도 까먹었거나, 다른 이유로 신청할 수 없었을 것이다.

며칠간 이어지던 축제 분위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누그러졌다. 이채선이 예고한 대로 피어 리뷰와 면담 일정이 코앞으로 다가온 게 가장 큰 이유였고, 상장 주체인 SG솔루션이 아니기 때문도 있었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퇴근을 위해 자리를 정리하며 점퍼를 오른팔에 걸쳤다.

『플랫폼 본부 GUI디자인팀, 정예준, 19:02, 퇴근 기록 확인.』

태블릿에 얼굴을 인식한 후 곧장 사무실을 벗어났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오자마자 건물 정문을 향해 잰걸음을 놀렸다. 육중한 문을 밀어 내자 매서운 칼바람이 머리칼과 옷깃 사이사이로 파고들었다. 해가 짧아진 사옥 단지는 사방이 어두웠다. 눈을 굴려 짙은 그림자가 드리운 맞은편 길가를 살폈다. 그늘에 몸을 감추듯 검은 차체가 갓길에 세워져 있었다. 길을 건너는 나를 발견한 모양인지, 전조등이 강한 빛을 발하며 점멸했다.

차량 가까이 다가가 번호판을 확인하고 조수석 문을 열었다. 얼굴을 마주한 이호연이 싱글 웃었다. 차에 올라 화답해 입매를 끌어당겼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시트에 몸을 파묻고 깊게 숨을 몰아쉬었다.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내가 추울까 염려하여 미리 열선 시트에 전원을 올려 둔 그의 배려가 고마웠다.

“따뜻해요.”

배시시 웃는 내게 이호연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 그의 손에 내 손가락을 얽었다. 물감처럼 번지는 온기에 눈매를 접었다.

“바빴어요?”

내 물음에 이호연이 고개를 저었다.

“예준 씨는.”

“저야 뭐, 비슷해요.”

웹 버전 오픈 후에는 모든 업무들이 적당한 강도로 주어지고 있었다. 연말에 가까워진 것도 한몫하는 것 같고. 점심시간을 제외하고 딱 여덟 시간에 맞춰 일하면 되었다. 일이 몰리더라도 부지런히 처리하면 정시 퇴근이 가능한, 딱 그 정도의 여유가 연일 이어졌다. 작년 겨울부터 올해 상반기, 이호연을 만나기 전까지 10시, 11시까지 초과 근무를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계속 안 바쁘면 좋겠네요.”

나직하게 대꾸한 그가 상체를 기울여 거리를 좁혀 왔다. 가까워진 얼굴과 코끝에 머무는 체취에 반사적으로 숨을 집어삼켰다. 그가 내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놓아주며 혀로 입술 사이를 갈랐다. 젖은 살덩이를 받아들이기 위해 입을 벌리는 순간, 이호연이 혀를 물리며 돌연 입술을 강하게 빨아들였다.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에 절로 탄성이 뱉어졌다. 경직되어 빳빳하게 굳은 목덜미 위로 따스한 체온이 닿았다.

“음, 응….”

벌어진 틈새로 축축한 혀가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입 안을 가득 메운 살덩이가 점막을 스치며 자극을 더했다. 갈빗대가 저릿저릿한 기분이 들었다. 열기에 젖은 호흡으로 가슴과 어깨가 오르내렸다.

“집에,”

“…….”

“저녁 먹고 가요.”

고요한 속삭임에 눈가가 파르르 떨린다. 처음 한 번이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쉽다. 과연 저녁만일까 싶은 생각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오늘 밤을 함께 보내자는 제안 같아 대답이 망설여졌다. 그동안은 숱하게 저녁을 먹고, 그의 집에서 TV를 보며 시간을 보냈었는데 섹스를 하기 전과 후가 이렇게 달라져도 될 일인가. 심장 부근이 빠르게 뛰었다. ‘우리 오늘도 자요?’라는 물음을 삼켜 내며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저녁만이죠…?”

“그렇죠. 평일이니까.”

이호연이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대꾸했다. 그러면서 내 뺨에 쪽 소리 나게 입술을 내렸다.

“후식도.”

“후식?”

다시 마주한 짙은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쳤다.

“제가 후식이지 않겠습니까, 예준 씨한테는.”

능글맞게 웃는 그를 밀어 내며 화끈거리는 얼굴을 손등으로 가렸다. 이 아저씨가 못 하는 말이 없어. 날이 갈수록 이상한 장난만 늘어 간다니까? 도대체 이런 능청은 어디서 배워 오는 걸까.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그를 흘겼다.

“회사에서나 다른 사람들한테도 이래요?”

“그럴 리가.”

이호연이 딱 잘라 말했다.

입을 굳게 다문 이호연의 인상은 과묵하고 차분해 보인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때를 떠올리면, 첫인상이 썩 좋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날 선 분위기와 툭툭 내뱉는 말투가 전부 벌레로 기인했다 하더라도 말이다. 초면에서 구면으로, 그의 연락이 빈번해짐에 따라 일상에 이호연이라는 사람이 스며들 즈음부터는 달라지긴 했지만.

여하튼, 나는 이호연이 나를 제외한 다른 누군가를 대하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 김사훈 대표와 화가인 지인. 딱 두 사람 보았다. 김사훈 대표야 대학부터 실리콘밸리까지 친구였다고 하니 두 사람의 허물없는 유대가 느껴졌지만, 화가인 지인은 짧게 인사하고 바로 헤어졌기 때문에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없었다.

내게 보이는 애정과 가감 없는 욕심은 나를 만나기 이전의 이호연이라는 사람을 상상하게 했다. 목석같은 그가 내게 드러내는 감정 그대로, 누군가를 욕심냈던 때가 있었을까? 미국에 있을 당시, 사택에 거주했다는 이야기는 곧잘 들었지만, 그가 한국을 떠나 긴 시간을 보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일상을 보냈는지 세세하게 아는 것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결국 이방인일 뿐이었다던 그의 곁에 정말 아무도 없었던 걸까. 누군가 곁에 있었다면 이렇듯 다정한 웃음과 애정을 상대에게 주었을까? 때론 장난기 어린 모습으로, 때론 사심이 짙게 깔린 음성을 귓가에 흘려 주면서 사랑을 속삭였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누구를 제대로 만난 건,”

느린 말마디가 내 생각의 흐름을 끊어 냈다.

“팔구 년 정도 됐을 겁니다.”

기억을 더듬던 그가 대략적인 기간을 가늠했다. 이호연의 잡티 하나 없는 얼굴에 시선이 머물렀다. 이목구비도 선명하고, 키도 크고,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사람인데 그렇게나 오랫동안 연애를 하지 않았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진짠데.”

내가 의심하고 있는 것을 인지한 그가 믿어 달라는 시선을 보내왔다.

“헤어져서 미국으로 간 거예요?”

“헤어져서 간 건 아니었습니다.”

추억 속에 묻어 둔 오래된 감정을 들추어 낸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왜 헤어지게 되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했다. 서로 싫었던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헤어지게 되었다고. 시간이 흐르며 각자의 길로 물 흐르듯 흘러가게 된 것 같았다.

“거기는 그…, 같은 성향의 사람이 없었어요?”

물으면서도 낯이 뜨거워져 괜스레 고개를 숙였다.

“많았죠. 제 성향을 이해해 주는 사람도 비교적 많은 편이었고. 그래도 그것과 별개로 연애나 감정적인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습니다.”

이호연은 낯선 이국땅에서 적응하기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며 과거를 회상했다.

처음엔 모든 것이 좋았다고 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파격적인 인사였다고. 한국에서 받던 페이의 두 배 이상을 받게 되었고, 거주나 교육 등 각종 지원에 부족함 없는 날들을 보냈지만, 물질적 풍요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순 없었다.

이호연으로 살던 스물여섯 해를 뒤로하고 레오로서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분명 같은 사람인데 누군가는 그를 ‘호연’으로 부르고, 누군가는 ‘레오’라 불렀다. 뒤섞인 호칭처럼 이도 저도 아닌 채로 적응에 힘쓰며 첫해를 보냈다. 본사에 근무하는 아시아인은 많지 않았다. 건물 한 층에 근무하는 근로자는 삼백여 명인데 그중 아시아계는 대여섯 명이었다. 그만큼 수가 적었다. 다른 아시아계는 스텝이거나 기술 영업이라 섞일 수도 없고, 업무 구간이 달라 마주칠 일도 없었다. 개발 인력 중 유일한 한국인이었던지라 속에 안고 있던 고충을 누군가에게 말할 여유조차 없었다고. 그 당시 김사훈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같은 회사는 아니어도 같은 주 내에 있어 가끔 볼 수 있었고,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고 했다.

월마다 들어오는 급여는 써도 줄지 않았고,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생활했는데도 행성을 떠도는 잔해가 된 기분이었노라 말했다. 바람 한 점 없는 바다에 돛을 펼친 나룻배가 된 느낌이었다고. 그나마 당시 주니어였기 때문에 업무적으로 많은 것을 요구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다행으로 꼽았다. 같은 개발 언어를 사용하고 실력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입사한 지 반년 남짓 된 주니어 개발자에게 주요 프로젝트를 맡길 리 만무했으니까. 처음 속한 팀 역시 유지 보수를 담당하는 백업 부서였는데, 전 세계에서 인입되는 시스템 오류 건이나 애널리틱스 데이터가 제대로 동작하지 않는 건들을 보수하는 작업을 주로 맡아 진행했다. 심리적으로 지쳐 있는 상황에 업무에서까지 매너리즘이 왔다면 기나긴 시간을 버티지 못했으리라.

“…고생 많았어요.”

말을 고르다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은 내가 고생했다는 말을 한다는 게 좀 우습단 것도, 그리고 내 말로 그의 십 년이 보상될 수 없다는 것도 머리로는 아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꼭 암전된 것처럼 캄캄했다.

“그만큼 얻은 건 많죠. 결국 돌아오기도 했고.”

이호연이 내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이마를 매만져 주었다.

“모아에서도 레오라는 닉네임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새로 지을까 하다가.”

이호연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맞아, 모아는 영어 닉네임을 쓰는 회사였지.

“대단해요.”

대단하긴요. 그의 눈가에 웃음이 맺혔다. 나는 그의 손등을 힘주어 잡았다. 새삼 그가 강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느껴졌다. 심지가 굳다고 해야 하나. 익숙한 모든 것들을 뒤로하고 낯설고 생소한 곳에 유리된 채로 10년 가까이 버틴 거니까. 혼자라는 것에 익숙하다 해도 나였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튼, 예준 씨도 마지막 연애가 칠 년 전이지 않습니까. 비슷합니다.”

화제가 원점으로 돌아왔다. 갈무리된 대화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더 물어보지 않는 게 맞겠지. 충분하기도 하고.

“그런데 그건 왜.”

“그냥요. 저만 보면…, 그러니까….”

말미를 흐렸다. 애써 그의 시선을 피하며 모로 앉아 벨트 끈을 만지작거렸다.

“다른 데에선 절대 안 그럽니다. 귀엽잖아요, 예준 씨는.”

그가 강하게 부정하며 나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재차 어필했다. 콩깍지가 끼어도 단단히 낀 게 아닐까. 다 큰 성인 남성이 귀엽다니. 이호연만 나를 귀엽다, 귀엽다 하지. 어디에서도 나를 보고 그런 소릴 안 하는데.

“그럼, 저녁은 먹고 가는 걸로?”

“…으응, 그래요.”

고민하다 긍정을 답하는 내게 그가 만족한 듯 입매를 말아 올렸다.

“후식도.”

집요한 시선이 엉겼다.

“한 시간 정도면 좋겠어요. 내일 출근도 해야 하니까….”

창피함을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이 사람은 부끄러운 내색 없이 잘만 말하는데, 왜 나는 그게 안 되는 걸까.

“한 시간.”

이호연이 되뇌어 중얼거렸다. 마치 무언가 입력이라도 된 사람 같았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듯 그가 바로 시동을 걸었다. 단순한 듯, 아닌 듯. 목적이 분명한 그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나는 그의 얼굴을 감상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평일은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근 2주 만이면 오랜만인 게 맞는 거지…?

누워서 도리질 치며 흐느끼는 내 뺨에 이호연이 거듭 입을 맞췄다.

음경과 고환을 비롯해 회음부가 끈적끈적했다. 미끈거리는 오일과 뒤섞여 그의 성기가 가랑이 사이를 들락거릴 때마다 하얀 거품이 일며 찔걱거렸다. 그가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허리를 짓쳐 올렸다. 다리를 오므려 그의 허리를 감싸 고정해도 힘이 빠져 금세 풀려 버렸다. 반쯤 들려 올라간 종아리가 허공에서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호연이 느닷없이 자세를 바꾸고는 골반을 와락, 부여잡았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하반신이 그대로 딸려 올라가며 성기가 거세게 치대졌다. 밑에서부터 위로, 쉬지 않고 추삽질했다. 뱃가죽이 울릴 만큼 깊은 삽입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거대한 폭풍이 휘몰아치는 기분이었다. 삽입된 접합부가 두근거렸다. 마치 상처 부위의 혈류가 증가해 그 주변이 맥박 치는 것처럼 그의 것을 꽉 움켜 물고 들썩거렸다. 눈앞이 까맣게 번졌다 다시 빛이 드문드문 들었다.

“아앗…!”

퍽-, 철벅, 퍼억, 철퍽.

허리가 침대 위에 얕게 뜬 채 부들부들 떨렸다. 그 떨림은 곧 전신으로 옮겨 갔다.

“흐읏, 아! 아흑.”

울컥 복받친 눈물이 얼굴을 엉망으로 적셨다. 아래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울음을 터뜨렸다. 숨통을 조이는 감각이 몇 번이나 멀어지려는 의식을 후려쳤다. 살 몽둥이가 그의 허리 짓에 따라 내장을 휘저어 댔다. 쓸리고, 짓이겨지며, 마구 문질러졌다.

“나, 나아….”

아뜩한 사정감에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갈 것 같아?”

낮게 묻는 그에게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빨리…. 조금 더 빨리 움직여 달라며 그를 보챘다.

고지를 눈앞에 두고 스스로 허리를 움직여 그의 사타구니와 맞붙은 엉덩이를 뭉개듯 좌우로 비볐다. 극점에 닿은 뭉뚝한 귀두에 쾌감이 수문을 세차게 밀고 올랐다. 바들바들 떨며 허리를 들고 내리기를 반복하자, 이호연이 으르렁대듯 낮게 숨을 토해 냈다. 살끼리 부딪치며 차닥대는 소리가 무거워진 공기와 얽히고설켰다. 사정에 다다른 순간, 이호연이 내 팔뚝을 끌어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흔드는 대로 흔들리던 몸이 부지불식간에 일으켜 세워진 것이다. 사정의 기회를 놓친 나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허리를 들썩였다. 해소되지 않는 갈증에 입술이 바짝 타들어 갔다.

이호연이 나를 제 위에 올린 채 침대 밖으로 다리를 빼내었다. 그가 오금으로 팔을 밀어 넣자 다리가 활짝 벌어지며 무릎이 가슴과 바짝 맞붙었다.

“아, 안….”

“가고 싶잖아. 가게 해 줄게.”

흥분이 번들거리는 그의 탁한 목소리가 환청처럼 울렸다. 몸이 들린 건 그다음이었다.

“허윽…! 하악!”

자지러지는 신음이 허공을 맹렬히 찢어 놓았다. 화들짝 놀란 팔뚝에 핏줄이 서고 근육이 팽팽하게 부푼 듯 단단해졌다. 공중에 몸이 떠 있다는 두려움보다 내벽을 묵직하고 날카롭게 찔러 오는 자극에 대한 무섬증이 더 컸다. 안을 헤치고 들어오는 무자비한 자극에 시야로 불꽃이 튀었다. 이호연의 손이 내 엉덩이를 감싸 쥐고 반동을 이용해 들고 내리기를 반복했다. 차닥, 차닥, 물웅덩이를 밟는 소리가 여러 갈래로 울려 퍼졌다. 이호연의 어깨에 머리를 묻고 속절없이 눈물만 흘렸다. 경직되어 단단한 근육이 불거진 배에 성기가 위아래로 쓸리며 마구 비벼졌다. 앞뒤로 주어지는 자극에 미칠 것만 같았다.

“가, 가아…! 하으윽!”

그의 배 위에 정액을 진하게 흩뿌리며 잔류한 여운에 부르르 떨었다. 탁한 정액이 아래로 주룩 흘러내렸다. 절정으로 치달은 쾌감을 견디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경련을 일으키는 허벅지가 벌벌 떨리고 곱아든 발가락으로 종아리 근육이 딱딱하게 뭉쳤다.

이호연은 내가 사정한 후에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한 점만을 짓이기는 무자비한 행위가 거듭 반복되었다. 흐릿하게 어른거리는 시야가 몇 번이나 불을 꺼뜨렸다.

이호연의 뒷목에 땀이 맺혔다. 매달린 팔이 미끄러져 떨어질 것 같은 아찔함이 수반됐다. 등에도 땀이 촉촉하게 방울졌다. 거칠게 내쉬어지는 호흡이 앓는 탄성 사이사이 섞여 들었다. 이호연이 다시 침대 가까이 다가섰다. 내 몸을 조심스럽게 내리며 그 위로 땀에 젖은 몸을 겹쳐 왔다. 족쇄와도 같은 그의 팔이 풀리자 접힌 오금이 얼얼하게 쥐가 난 듯 저렸다.

“좋았죠.”

이호연이 내 귀를 혀로 핥아 올렸다.

“…흐으, 으읏.”

쾌감이 아직도 전신을 휘감고 있는 듯했다. 내장에는 아직 이호연의 성기가 빠듯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는 귓가를 배회하던 입술을 옮겨 관자놀이와 눈가, 뺨, 입매 곳곳에 제 입술을 도장 찍듯 꾹꾹 눌러 왔다. 그러면서도 들썩이는 허리의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나 아직 안 갔는데.”

“호연 씨…, 흐윽, 한 시간…, 지났…, 앗.”

이호연이 손을 아래로 내려 제 성기를 움켜 문 구멍을 더듬었다. 빈틈없이 맞물린 항문 주변을 손끝을 세워 힘주어 눌렀다. 체액과 젤로 인해 구멍이 쉽사리 열리며 손가락이 입구를 벌렸다.

“버, 벌어져어, 흐윽, 흑.”

“후식, 아직 남았습니다. 남김없이 먹어야죠.”

얕게 움직이던 이호연이 거세게 부딪쳐 오며 허리를 추어올렸다. 거대한 폭풍 같았다. 엉긴 몸이 들썩일 때마다 커다란 침대가 덜컥대며 흔들거렸다. 손가락 때문에 맞물리지 못한 접합부에서 성기가 들락거리며 푹푹 찧는 소리를 내었다. 어떻게든 원래 형태를 회복하려는 입구가 오물오물 들썩거렸다.

“응, 읏, 흐극.”

퍽, 퍼억, 탁, 차닥, 퍽!

힘이 쪽 빠진 가랑이 사이로 뜨거운 정액이 꿀럭꿀럭 안을 적셨다. 사정과 동시에 그의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오므라든 구멍이 수축 운동을 하며 그의 성기를 쥐어짜 냈다. 흐으응, 앓으며 허리를 뒤챘다.

이호연이 나를 꼭 안고는 숨을 골랐다.

“…매일 가둬 두고 이러고 있으면 좋겠네.”

나른한 목소리에 두 눈을 감았다. 흐물거리는 손을 들어 휘휘 흔들었다. 항복이야, 항복. 이 이상 가면 범죄예요, 이호연 씨. 가둬 두면 얼마나 더 괴롭히려고. 내 뺨에 입을 맞춘 그가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먹인 대로 그냥 뒀으면 좋겠네요.”

안에 사정한 대로 그냥 두고 싶다는 그를 질색하며 노려보았다. 영역 표시하는 사냥개도 아니고.

“씻겨 줄게요.”

이호연이 내게서 몸을 떨어뜨리며 침대맡에 섰다. 나를 가볍게 들어 올린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진짜, 씻기만 할 거야….”

눈매를 샐그러뜨리며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잠에서 깨어난 후, 시야에 맺힌 낯익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피로와 나른함이 덕지덕지 눌어붙은 눈두덩을 비볐다. 뻐근한 몸을 돌아누우며 휴대폰으로 손을 뻗었다. 지금이 몇 시지. 전원 버튼을 눌러 액정에 떠오른 시간을 확인했다. 환한 액정에 발갛게 부은 눈이 따끔거렸다.

[9:11, 금요일.]

졸음이 가시지 않은 눈을 두어 번 느리게 깜박였다. 9시 11분. 11분이네. 멍하니 웅얼거렸다.

가만, 9시? 9시 11분이라고?! 미친 거 아냐? 지금까지 잤다고? 알람 울리는 것도 못 들었는데?!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 알람 이력을 확인했다. 끈 기억조차 없는데, 모든 알람의 토글이 ‘OFF’로 전환되어 있었다. 모르고 더 잤으면 오전 반차를 내거나 입사 후 처음으로 지각을 하는 사태를 맞이했을 터였다. 다급하게 이불을 걷어 내고 한쪽 다리를 침대 밖으로 끄집어냈다. 찌릿한 허리 통증에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늑장 부릴 여유가 없었다. 침구 정리도 못 한 채 욕실로 냅다 뛰어들었다. 양치질을 먼저 하고 세수까지는 평소와 같았다. 실수로 샴푸를 샤워볼에 짜내지만 않았더라도 말이다. 정해진 루틴이 깨져 버린 것에 짜증이 솟구쳤다. 시스템 오류라도 난 사람처럼 그 자리에 서서 멈칫대다 흐르는 물에 샤워볼을 헹궈 냈다.

전쟁이라도 치른 것 같았다. 허둥지둥 씻고 나와 수건으로 물기를 대충 닦아 내는 와중, 침대 위에 올려 둔 휴대폰이 징징 우는 소리를 냈다. 이 시간에 전화가 올 곳은 한 곳뿐이었다.

“안 돼, 안 된다고. 지금 못 받아.”

표정을 구긴 채 혼잣말을 씨근거렸다. 옷장 문을 열고 켜켜이 개어진 바지와 맨투맨을 끄집어냈다. 우르르 쏟아진 옷가지들에 한숨이 치밀었다. 맨투맨에 팔을 먼저 꿰고 그다음 머리를 들이밀었다. 제대로 닦아 내지 못해 물기가 남은 등 위로 기모 소재의 상의가 닿았다. 찝찝함을 털어 낼 겨를도 없이 곧장 바지를 챙겨 입었다.

외투 주머니에 휴대폰과 지갑을 대충 쑤셔 넣고 현관을 향해 그대로 몸을 던졌다.

야탑역 앞에서 회사로 가는 버스에 바로 올랐다. 번잡한 시간대를 벗어났기 때문이었는지, 다행히 버스는 막히지 않고 제시간에 사옥 앞에 나를 떨어뜨려 주었다. 엘리베이터 역시 내가 도착했을 때에 2층에서 하향하고 있었던 터라, 늦지 않게 승강기에 몸을 실었다. 운이 좋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헐떡거리며 사무실 문을 열어젖혔다. 입 안 가득 쓴 물이 올라오고 가슴이 뻐근했다. 패드에 지친 얼굴이 찍혔다. 아슬아슬하게 10시 00분이 기록되고 나서야 그대로 주저앉아 호흡을 정돈했다.

“예준 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정소랑이 눈을 끔벅였다. 그녀의 손엔 사내 카페에서 사 온 커피가 들려 있었다. 후들거리는 무릎을 짚고 일어나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지각할 뻔해서요…. 뛰었는데 너무 힘들어서……. 채선 님 아직 안 온 거죠?”

“채선 님 오늘 인천으로 디자인 포럼 갔어요.”

“포, 포럼요?”

정말 다행이었다. 하필 지각 위기인 날에 그녀가 자리를 비워서.

“네, 저희도 몰랐는데 팀 채널에 써 두셨더라고요.”

출근하자마자 사내 메신저를 확인해 보니 그녀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고 했다. 비척대며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앉았다. 하, 죽겠다. 이러다 진짜 수명이 줄어들 것 같아. 주어진 명까지 못 살 것 같다고.

“그래서 오늘 어른이 날이에요.”

“거리상 복귀 못 하시겠죠?”

“헤헤, 오늘 점심 열한 시 반 각.”

송기현과 정소랑이 벌써부터 점심에 대한 기대를 드러냈다. 팀원들은 모두 들뜬 듯 기분이 좋아 보였다. 흔치 않게 금요일이 어른이 날이 된 것이다. 이채선의 부재로 디자인팀의 점심시간은 앞으로 한 시간 반밖에 남지 않았다. 팀원들 모두가 그녀를 잘 따른다 하더라도, 그녀가 리더인 이상 심리적 거리감이 있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사이가 좋아도 팀장인 윗사람인 것이다.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지는 건 매우 중요한 거니까.

나는 호흡을 가다듬다 컴퓨터 전원을 켜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요? 4층?”

김정우가 물었다. 사내 카페에 가는 거면 같이 가자며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화 한 통만 하고 오려고요. 먼저 다녀와요.”

“아니에요. 그냥 점심 먹고 마시지 뭐.”

대충 고개를 주억대며 바깥으로 걸음을 뗐다. 조급한 마음에 버스에서도 이호연과 통화하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지각을 면하긴 했으니, 그에게 연락해 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비상구 층계를 올라 최근 통화 목록 상위에 있는 연락처로 바로 전화를 걸었다. 짧은 신호음이 이어진 후, ‘자기야’ 하는 장난기 서린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자기 같은 소리 하네! 진짜 지각하는 줄 알고 마음 졸였단 말이야!

옥상 문을 열고 흡출기가 즐비한 구석으로 숨듯 걸음을 옮겼다.

“…한 시간이라고 했잖아요. 지각할 뻔했어요.”

뾰족하게 날을 세우자 수화기 너머에서 후후,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웃어어? 웃었어, 지금?!

「계속 같이 있고 싶은 걸 어떡합니까. 어제 후식도 잘만 먹던데, 억울하네요.」

능청스레 답하는 이호연이 얄미워 씩씩거렸다. 앞으로 후식이라는 단어는 금지어야, 금지어.

그러니까, 어제.

집으로 바로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욕실로 들어서 따뜻한 온수에 몸을 적시는 순간까지만 해도 그랬다. 거품을 내어 씻는 나를 내려다보던 이호연의 눈빛이 일렁거렸지만, 수증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뒤를 돌아 그를 부르는 순간, 손가락이 쇄골 부근으로 다가와 얼룩진 울혈 위를 문질러 왔다. 손이 지난 자리에 입술이 닿았다. 그 입술이 단초가 되었다. 충분하다는데도 아직 부족하다며, 배불리 먹여 주겠다는 그를 앞에 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었다. 그저 서서 그를 받을 뿐. 그는 키 차이 탓에 몇 번이나 미끄러져 힘없이 거꾸러지는 나를 들어 올렸고, 나는 혼미해진 정신으로 울며 매달렸다. 몸이 허공에 들린 채 하는 체위가 이렇게 큰 쾌감을 가져다주리라곤 상상도 못 했었다. 관통당하는 그 감각. 간밤의 기억에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앞으로 평일은 금지예요.”

「자고 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으면 내가 아침에 데려다줬을 텐데.」

“계속 그러면 습관 될 것 같단 말이에요….”

「습관이 되면 뭐 어때서요. 그렇다고 평일 금지는 너무한 거 아닙니까.」

야유하는 음성에도 여전히 장난기가 다분했다. 너무하다고? 나라고 당신 집이 안 편한 줄 알아? 사귀고 나서 얼마나 자주 드나들었는지, 이제는 야탑동 오피스텔보다 당신 집이 더 내 집 같단 말이야. 주말마다 그 너른 침대에 누워서 뒹굴거리는 게 얼마나 좋은지. 소파 쿠션감은 또 어찌나 안락한지. 누워 있으면 잠이 솔솔 오고, 심신에 평화가 온단 말이다. 게다가 사옥 단지와 걸어서 15분, 차로 5분도 안 걸리는데 당연히 좋지. 그래도 사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반 동거를 해. 그리고 계속 붙어 있다 보면, 몸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다고.

“…몰라. 당분간 평일 금지예요.”

「그럼 오늘 금요일이니까, 같이 자동차 극장이나 가죠. 갔다 와서 오랜만에 럼도 마시고.」

“…럼…?”

지난번 테킬라 이후 오랜만에 술을 마시자는 제안에 귀가 쫑긋 섰다. 럼이면 럼주 맞지?

「사훈이가 버카디를 갖고 있더라고요. 미국에서는 곧잘 먹었는데, 국내에는 몇 년 전에 단종되었더군요. 국내에서 구하기 어렵고 귀한 술이라 예준 씨 생각나서 같이 맛보려고 뺏어 왔습니다.」

“버카디….”

무슨 술인지는 몰라도 그가 뺏어 올 정도라면 좋은 술인 것은 확실해 보였다. 그런데 그렇게 막 뺏어 와도 되는 거야?

“막 뺏어 와도 되는 거예요?”

「아, 김사훈이라고, 친구라 괜찮습니다.」

친근함이 묻어난 그의 목소리를 듣다 나도 웃음을 흘렸다. 그때 그 사람 맞는 거겠지? 스퀘어 건물에서 이호연과 식사했던. 하긴 친구면 그럴 수 있지. 진정한 친구라면 친구의 것은 내 것, 내 것은 당연히 내 것이지. 그에게 빨리 먹어 보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어떻게 먹는 게 맛있을까? 테킬라를 마셨던 때처럼 가르쳐 주겠지?

「예준 씨, 오른쪽으로 고개 돌려 봐요.」

이호연의 음성에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멀리 보이는 모아 사옥 옥상에 실루엣이 보였다. 시선 끝에 머문 낯익은 모습에 입가가 씰룩거렸다.

“올라온 거예요?”

「옥상 문 여는 소리가 들리기에. 보고 싶어서 올라왔습니다.」

“…회사 사람들이 보면 어떡해요.”

「대표 친구라는 위치가 꽤 쓸 만하죠.」

어련히 알아서 피한다는 소리였다. 다소 거만한 어조로 느물대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 너 잘났다. 돈도 많고 이제 권력도 있다 이거지?

“저도 보고 싶어요.”

얼굴로 열이 몰려 홧홧했다. 고개를 수그리며 눈만 데굴 굴렸다. 민망하고 부끄럽기 짝이 없다. 풋사랑도 아닌데 서로 보겠다고 옥상에 올라와 있는 지금 이 상황이. 그대로 쪼그려 앉아 몸을 숨겼다. 상체가 아래로 쑥 꺼지자 이호연이 그러지 말라며 투덜거렸다. 멀리서나마 나를 보겠다는 그의 확고함에 다시 일어서서 그가 선 방향을 바라봤다. 보이긴 보이는 걸까. 그나저나 나를 너무 좋아하는 거 아냐? 어젯밤까지 살도 맞대고 있었는데…. 건물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있자니 마음속 한구석이 간질간질했다. 꼭 현대판 견우직녀, 아니, 견우직남 같았다.

“이따 봐요. 내려가 볼게요.”

「점심에 연락해요.」

“응.”

나는 휴대폰을 귀에 대고 반대편 손을 흔들어 보였다. 수화기 너머에서 귀엽다며 웃는 키득거림이 들려왔다. 아쉬움에 두어 번 뒤를 돌아보며 겨우 옥상에서 벗어났다.

사무실로 내려와 다시 자리에 앉기 무섭게 사내 메신저에 불이 들어왔다.

[마침 예준 님 왔네요. 저희 사료 같은 거 말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 SG 정소랑]

[콜. - SG 송기현]

정소랑이 말하는 사료란 국밥이나 덮밥류, 구내식당을 뜻하는 것이리라.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주 바람직하다. 밥 49%, 돈 49%, 일 2%. 도합 100%의 하루란 이런 것 아닐까.

[함박스테이크 어때요? H스퀘어 근처에 무슨 키친? 있던데. - SG 김정우]

-아, LP판 있는 거기 말하는 거죠?

[네, 거기. 분위기도 좋고 맛도 있고. - SG 김정우]

[열한 시 반에 나가면 줄 안 서고 바로 앉을 수 있겠네요. - SG 정소랑]

어디인지 알 것 같았다. 이전에 이호연과 퇴근 후 가려다 만석이라 못 갔던 곳이었다. 흐음, 오늘 가 보고 어땠는지 알려 줘야지. 괜찮으면 다음에 같이 가고.

-그럼 딱 30분 되면 알아서 엘베 앞으로 나오는 겁니다?

팀 전체가 우르르 나가면 눈치가 보이니 각자 시간을 보고 움직이자는 거였다. 팀원들의 답변을 확인하며 바로 인터넷 창을 띄웠다. 금요일이라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아 포털 검색 필드에 ‘자동차 극장’을 검색했다. 가는 길, 각종 리뷰들, 현재 상영작에 대한 내용들이 결과 리스트에 출력되었다. 끌리는 제목의 링크를 하나씩 클릭해 찬찬히 살펴보았다. 영화야 상영작이 정해져 있으니 넘어가고, 위치와 편의 시설들 위주로 둘러보며 바쁘게 눈을 굴렸다.

바로 이호연 집으로 가려나? 럼주 이야기도 했으니까…, 또 자게 될까?

열이 올라 화끈대는 얼굴을 푹 숙였다. 이호연이 미친 게 아니라 내가 미친 거 아닐까? 발정이 난 것도 아니고. 아까까지만 해도 평일 금지라고 그렇게 못을 박았는데, 이러면 내가 더 안달 난 사람 같잖아. 아니지. 금요일은 주중과 주말의 경계인 거잖아? 다음 날 출근 안 하니까 주말로 봐야 맞는 거 아냐…?

책상 위에 올려 둔 휴대폰에서 이채선의 연락처를 찾았다.

-채선 님, 저 오늘 급한 일이 있어서…, 반반차 결재 좀 올려도 될까요?

나는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낸 후 바로 사내 기안 시스템을 실행했다. 회사에 반반차 제도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 이러다 몹쓸 버릇을 들이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도 어쩌겠어. 딱 두 시간이면 될 것 같은걸.

차는 곧장 큰길로 접어들어 대왕판교로를 타다 고속화도로로 넘어갔다. 판교를 벗어나며 우측으로 저수지와 수목원 불빛이 반딧불처럼 어룽지는 것이 보였다. 차창 밖을 응시하다 픽 웃음을 터뜨렸다. 웃겼지, 삼시 세끼. 그때는 이렇게 같이 시간을 보내리라곤 상상도 못 했었는데.

판교와 잠실을 중심으로 함께 다닌 곳들이 점점 범위를 넓혀 갔다. 추억이 하나씩 늘어 간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오늘 가는 자동차 극장도 그중 하나일 터였다.

“호연 씨, 저 자동차 극장 처음 가 봐요.”

“저도 처음입니다. 예준 씨랑 금요일에 뭐 할까 찾아보다 같이 오자고 한 거거든요.”

이호연도 자동차 극장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처음이라는 사실이 이렇게 좋을 일인가.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면허를 땄던 친구들과 달리 나는 그쪽으로 관심이 없었다.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면허 시험을 치를 돈이 없어서 준비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고 하는 게 맞는 말이리라. 면허가 없으니 당연히 차도 없었다.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버스와 지하철을 타며 그 안에서 긴 시간을 보냈었다. 그런 순간들이 이십 대의 흔적으로 남았다. 상념에 물든 기억의 파편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첫 직장을 다닐 때,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해 편도로 두 시간여에 가까운 거리를 출퇴근했었지.

이후에 자취와 자동차 중 고민을 했지만, 어차피 대출이라면 집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집을 선택했다. 매매가 아니라는 맹점이 있지만, 어쨌든 두 다리 펴고 지낼 수 있고 회사와 가까우니 된 것 아닌가 싶었다. 딱히 불편함을 느끼며 살지는 않았는데, 이제는 멀리 나가는데 차가 없으면 얼마나 걸릴지 계산부터 하게 됐다. 집에서 출발해 얼마나 걸릴지, 몇 번을 환승해야 하는지 따위가 출발도 전부터 머릿속을 메웠다.

그런 의미에서 이호연이 차가 있고, 어디를 가든 편히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데이트에 큰 이점으로 작용했다. 가령, 빨간 불이 켜졌을 때에 그와 입을 맞춘다거나 손을 잡을 수 있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둘만의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었다.

누군가 내 이상형을 묻거든 ‘내 다리가 되어 줄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저 노래 틀어도 돼요?”

“듣고 싶은 걸로 아무거나 틀어도 좋습니다.”

거치대에 고정된 이호연의 휴대폰을 가져다 음악 앱을 실행했다. 차분한 분위기의 어쿠스틱 사운드가 흘러나오는 인디 밴드의 음악을 일시 중지하고 5 Seconds of Summer의 를 검색해 재생했다. 달라진 분위기에 이호연의 눈매가 부드럽게 호를 그렸다. 경쾌한 멜로디가 카 오디오를 통해 흘러나왔다. 나는 Alan Walker가 부른 이나 OneRepublic의 와 같은 친근하고 밝은 곡을 계속해 플레이 리스트에 추가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다음에는 어디 여행이라도 갑시다.”

“여행이요?”

“여행지에서 듣기 좋은 노래니까요.”

기분 좋게 웃는 그에게 화답했다. 좋아요. 이호연과의 여행은 어떨까. 어디든 그와 함께라면 좋을 것 같았다. 준비성이 철저한 그라면 여행 준비도 전부 제가 하겠다며 두 팔을 걷어붙일 것 같은데.

국내라면 제주도일까? 아니면 한적한 시골 마을? 아, 시골은 안 되지. 가급적 시각적 테러가 일어나지 않는 곳을 골라야 할 것이다. 해외도 좋을 것 같긴 한데, 휴가를 뺄 수 있으려나. 12월로 미뤄 둔 휴가를 아예 내년까지 미루어 합쳐서 사용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막연하게 떠오르는 여행지를 머릿속에 두서없이 나열하다 해실, 웃음을 머금었다.

여행과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탄천 주차장 입구에 다다라 천천히 차 속도를 줄였다. 이호연은 창문을 내려 매표소에서 표를 구매하고 스크린이 잘 보이는 앞쪽에 차를 세웠다. 그를 뒤따라 내리며 적막이 내려앉은 극장을 두리번거렸다. 우측 스크린에서는 이미 다른 영화가 상영 중이었다. 커다란 스크린 앞에 자동차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 퍽 귀엽게 느껴졌다. 일반 극장만 다녔었는데, 이런 곳이 있다는 게 신기하긴 하네. 게다가 주파수로 사운드를 듣는 것도 생소하고.

“스낵바에서 이것저것 사 올까요?”

이호연이 스낵바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줄레줄레 그를 따라 스낵바로 향했다. 한강 매점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내부를 둘러보며 다양한 종류의 과자들을 훑어보았다.

“팝콘이랑, 콜라…. 아, 이것도 살까요?”

그가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들었다.

“먹어도 저만 먹어야 하잖아요. 그리고 이따가 버…, 뭐였지? 아무튼 럼주. 그거 같이 먹어요.”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이호연이 아쉬워하며 꺼낸 맥주를 다시 냉장고에 돌려놓았다. 운전만 아니라면 한 캔 정도야 괜찮았을 테지만, 상영이 끝난 후 바로 출차를 해야 했다.

계산을 마치고 다시 차로 돌아와 좌석을 뒤로 빼 관람 준비를 했다.

오늘 볼 영화는 범죄 스릴러로, 연쇄 살인 용의자로 몰린 남자가 국과수에 근무하는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게 되며 진범을 밝혀 나가는 이야기였다. 이전부터 느낀 거지만, 은근히 이런 장르를 좋아하는 것 같단 말이야. 스릴러를 좋아한다곤 했지만 데이트에서도 고른 걸 보면 취향이 꽤 확고하구나, 싶었다. 이호연을 흘끗대다 시트에 반쯤 누워 차량 대시보드 너머로 보이는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했다.

영화 시간에 가까워지자 맞춰 둔 주파를 통해 광고 사운드가 흘러나왔다.

“소리가 가깝네요.”

“그러게요. 신기하다.”

주파로 듣는 거라 음향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집중한다면 못 들어 줄 정도는 아니었다.

“빨리 시작하면 좋겠어요.”

제작사와 배급사에 대한 리드필름이 나온 직후 침을 꿀꺽 삼켰다. 이호연도 집중한 듯 정면만을 주시했다.

을씨년스러운 풍광을 카메라 앵글이 천천히 훑었다. 여러 줄로 걸쳐진 전선이 얼기설기 엉켜 있다. 낮은 건물들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낡고 삭았다. 수거되지 않은 쓰레기 더미가 짐짝처럼 버려진 골목에는 악취가 풍겨 오는 것처럼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였다. 세상의 모든 오물을 모아 놓은 곳. 더럽고 빈한한 동네를 훑던 앵글이 이윽고 한 남자를 비추었다. 그림자를 닮은, 새까만 옷차림의 남자를 살금살금 뒤쫓는다.

남자는 뒷골목 출신이었다. 태어나자마자 시설에 버려졌고 적응하지 못해 중학교 3학년이 되던 해에 시설을 나와 뒷골목으로 스며들었다. 스스로 오물이 되기를 자처했다. 골목 생활을 하는 형들을 통해 약을 하기도 하고 소매치기나 도둑질로 하루하루를 연명해 살았다.

그는 그날도 누군가의 지갑을 훔쳐 달아났다. 두툼한 지갑에서 현금만 빼내어 주머니에 꾸겨 넣고, 빈지갑을 길가에 버렸다. 피해자가 죽지 않았다면, 단순 소매치기로 끝났을 일이었다.

다음 날, 남자는 자신이 머무는 골목 근처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피해자는 그도 잘 아는 얼굴이었다. 피해자가 택시에서 내린 지점과 도둑맞은 지갑의 발견 지점이 300미터 반경 내에 겹치게 되며 불행히도 살인 사건 용의 선상에 오르게 됐다. 따라붙은 경찰에게 검거된 후 다행스럽게도 영장은 발부되지 않았다. 알리바이에 대한 증명을 조서로 작성한 그에게 묘한 시선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그 장면을 기점으로 영화의 전개는 다른 국면을 맞이했다. 왜 범인이 아닌 남자가 쫓기게 되는지 의아한 면이 없잖아 있었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장면에 깊게 생각할 수 없었다.

누군가 남자를 추격하고 그로 인해 부상당하기를 거듭했다. 쫓기는 와중 국과수 소속의 주인공과 우연히 맞닥뜨리게 되는데, 이 장면을 통해 주인공은 남자가 진범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거 전개가 왜 이러지. 처음의 긴장감과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남자의 삶이 전개에 따라 이도 저도 아니게 뭉개지는 기분이 들었다.

완전히 스토리가 무너져 누아르인지 스릴러의 탈을 쓴 로맨스인지 구분이 모호해졌다. 막바지에 다다라 범인의 타깃이 주인공으로 바뀌며 그를 지키기 위해 남자가 칼을 맞게 되는데, 종국엔 경찰 협조와 DNA 분석을 통해 진범을 잡게 된다. 빠르게 전환된 화면에서 남자와 주인공은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꽤 끈적하게 맞붙은 두 주연의 입맞춤이 주파를 통해 차 내부에 크게 울렸다. 남자가 키스하며 주인공이 입고 있는 셔츠에 손을 밀어 넣어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어둑한 병실을 훔쳐보듯, 간격을 둔 카메라 워킹이 긴장감을 부추겼다. 주인공이 남자의 위로 올라갔다. 생명수라도 마시듯 남자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통증을 호소하는 남자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주인공을 안아 옥죈 팔에 단단한 힘을 더하며 남자는 촘촘한 연기를 선보였다.

「하아, 하…. 해도 돼-….」

갑자기요? 멍한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갑자기 이런 신이라고? 실제 준비된 스크립트가 맞는 걸까, 아니면 애드리브일까. 그도 아니라면 정말 느낀 걸까. 배우의 대사에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하얗게 질리도록 짓씹었다. 병상 밑으로 옷가지가 후드득 떨어졌다. 진짜 하는 장면까지 나오나? 영화 흐름상 하는 건 하는 건데, 이호연이랑 이런 걸 본 적은 없단 말이다. 이런 짓 저런 짓 다 해 본 사이라고 해도 창피하다고. 나는 당황해서 고개를 돌려 이호연을 보았다. 그는 너무나 평온한 표정으로 영화를 감상하고 있었다.

뭐야, 왜 이리 담담해?

병동이라는 환경적 특성상 주인공은 누군가에게 들킬까 봐 입을 틀어막았다.

새까만 화면이 디졸브되며 시간과 공간이 자연스럽게 허물어졌다.

일정 시간이 지난 후, 법정에서 변론하는 남자와 증인으로 출석한 주인공의 모습이 비쳤다. 재판이 끝난 후 두 사람은 잠시 시선을 교환했다. 그들의 얼굴이 번갈아 앵글에 잡히며 서로를 향한 애틋한 감정이 전해졌다. 영화는 다소 허무하게 찝찝한 여운을 남기며 끝이 났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것을 바라보며 긴장했던 어깨에 힘을 풀었다.

“끝났네요. 어땠습니까. 초반부는 볼만했던 것 같은데.”

“그러게요. 중간부터 조금….”

내 대꾸에 이호연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마지막의 섹스 장면은 억지스러웠다고 생각했던 걸까. 이호연이 뒤로 뺀 시트를 다시 당겨 앉았다.

“다 못 먹었네요.”

절반도 채 먹지 못한 팝콘과 포장조차 뜯지 않은 과자들에 시선을 두었다.

“챙겨 가죠.”

품에 안고 있을 수 없어 뒷좌석으로 넘긴 후 안전벨트를 맸다. 이호연이 차를 바로 출발시켰다. 스크린 앞쪽에 주차를 해 두었기 때문에 출차도 먼저였다. 조금 더 늦게 왔거나 차가 막혀 뒤쪽에 자릴 잡았다면 빠져나가는 것도 늦었을 것이다. 차가 공영 주차장 출구를 향해 느리게 나아갔다. 속력을 조금씩 올리던 차량이 느닷없이 좌회전하며 내비게이션이 알려 준 방향이 아닌 막다른 길을 향하기 시작했다. 경로를 이탈하였다는 안내에도 불구하고 이호연은 묵묵부답으로 차를 몰았다.

“응? 호연 씨, 여기 길이….”

“맞는 길이죠.”

우리한테는. 이호연이 뜻 모를 답변을 툭 내뱉었다.

막다른 길 앞에서 차 시동이 꺼졌다. 어리둥절하게 눈만 깜박이는 동안 이호연의 몸이 내 쪽으로 기울었다. 비스듬히 고개를 숙인 그가 다급히 입을 맞추며 제 혀를 밀어 넣었다. 츕, 츄읍. 입 안을 가득 헤집는 그의 혀 때문에 호흡이 아무렇게나 엉켰다.

“흐…, 하아….”

“콜라 맛.”

입에서 느껴지는 콜라의 단맛에 그가 눈가를 찡긋거렸다.

“갑자기 왜….”

“하고 싶어서.”

여기서? 황당함에 두 눈을 끄먹거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 반응 없었잖아…!

“이리 올라와 보세요. 그 배우처럼.”

내가 넘어올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시트를 뒤로 빼낸 그가 제 허벅지를 두드렸다. 주인공이 남자 위에 올라탔듯, 제 위로 올라오라는 거였다. 조금 전 보았던 영화 장면이 되감기라도 한 것처럼 잔상으로 떠올랐다.

“차, 차에서….”

말을 잇지 못하고 버벅대며 끝을 흐렸다.

“아까 귀엽던데요.”

“우읏. 놀리지 마요.”

그것 봐, 다 보고 있었잖아. 어쩐지 억울해서 주먹을 꾹 쥐었다. 이래서 아까 일부러 눈도 안 마주친 거지? 마주치면 이럴까 봐. 이렇게 나를 놀리고, 나한테 키스할까 봐.

“…예준아.”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망설였다.

“예준아, 올라와.”

“그렇게 부르지 마요.”

툴툴대며 불만을 토로했다. 꼭 마음 약해지게 이런 순간에만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부른단 말이야. 밀어낼 도리가 없도록 따뜻하고 부드러운 어조다. 흘끔 운전석을 살폈다. 어찌어찌 넘어가더라도 시동이 잘못 눌린다거나, 경적이라도 울리면 어떡하지. 그보다, 차에서는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데…. 머뭇대는 내 팔뚝을 이호연이 잡아 쥐었다. 보채는 그의 팔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나는 신고 있던 신발을 벗고 운전석으로 넘어가 그의 허벅지 위로 조심스럽게 올랐다.

“…안 무거워요?”

“적당하죠. 살을 좀 더 찌울 필요가 있습니다, 예준 씨는.”

“누가 보면 어떡해요….”

시동이 꺼져 있다고 하더라도 여기서 움직이면 누군가 알아차리지 않을까. 혹시라도 길을 잘못 든 운전자가 흔들리는 차체를 보기라도 한다면. 서슴서슴 망설이는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호연이 내 맨투맨을 걷어 올렸다. 맨살에 닿는 체온 탓에 긴장으로 허리가 꼿꼿이 섰다. 그의 손이 허리를 지나 갈빗대를 슬슬 문질러 왔다. 영화 속 장면과 같았다.

“기억하죠. 이 다음 장면.”

이호연이 내 귓불을 깨물며 작게 읊조렸다. 귓바퀴를 타고 그의 흥분이 느껴졌다. 위로 움직인 손바닥이 등을 살며시 눌러 왔다. 고요하고 삭막하다시피 한 병동. 그 안에서 뜨겁게 맞부딪친 두 사람의 입맞춤. 그가 두 배우가 선보였던 연기처럼 키스를 종용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이호연의 뺨을 그러쥐었다. 그가 손길을 느끼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나를 기다리는 이호연을 보자 갈증이 이는 듯 목이 탔다.

“예준아.”

나른한 목소리가 나를 재촉했다. 뜸을 들이다 그대로 머리를 수그렸다. 혀로 그의 아랫입술을 훑고, 살짝 벌어져 드러난 고른 치열을 핥았다. 까끌까끌한 혀에 닿는 그의 이를 하나씩 덧그려 보았다. 긁히는 감각이 싫지 않았다. 점막이 쓸리며 오히려 자극을 부채질하는 기분이다. 조금 더 대담하게 입을 벌렸다. 그의 혀를 빨아올리고, 구석구석을 들쑤시며 탐했다. 입가가 금세 타액으로 번들거렸다.

“하아….”

키스만으로 차 안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몽롱하게 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병상 밑으로 떨어진 건 누구 옷이었을까.”

으악, 그런 거 하나하나 기억해서 말하지 말라고요. 이호연은 영화 속 장면 그대로, 내가 입고 있는 맨투맨을 벗기려 했다. 잘게 몸서리치는 나를 보는 얼굴에 즐거움이 묻어나 있었다. 말려 올라간 상의가 그대로 벗겨졌다. 차가운 냉기가 어깨 위를 내달렸다. 선득한 기운에 웅크리려는 내 몸을 그가 빈틈없이 꽉 안아 주었다. 맞닿은 중심부에서 흥분으로 부푼 그의 것이 느껴졌다. 이호연은 한 손으로 내 날갯죽지를, 다른 한 손으로 등골을 훑어 내렸다. 달음질치는 맥박이 쿵쿵 뛰고, 더운 숨이 가쁘게 몰아쉬어졌다. 구석구석을 훑던 손이 내려와 바지와 브리프를 건드렸다.

“이다음.”

“…안 나왔잖아요.”

그의 목을 끌어안고 아이처럼 웅얼대었다. 영화에서는 디졸브 기법으로 두 사람이 무얼 했는지 관객의 상상에 여지를 남겼다.

“이렇게 했을 겁니다.”

아래로 내려간 그의 손아귀에 왼쪽 엉덩이가 쥐어졌다.

“지, 진짜 차에서 할 거예요?”

기겁하여 바르작거린 내가 저지하며 물었다. 차에서, 그것도 이런 곳에서 나를 원할 줄은 몰랐다. 주물대던 손이 자연스레 엉덩이 사이로 향했다. 마치 내 물음에 대한 답변 같았다.

“으응, 잠, 잠깐만,”

기다란 중지가 구멍 주변을 배회하다 꾹, 하고 힘을 주었다. 습한 구멍은 손가락을 잘도 받아먹었다. 삽입된 중지가 타원을 그리며 내벽을 얕게 쓸었다. 턱이 들리며 긁는 신음이 잇새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반쯤 빠져나간 중지에 검지가 더해졌다. 손가락이 다물린 입구를 강제로 벌렸다. 상체가 부들부들 떨리고 허벅지가 꿈질거렸다. 이호연이 빈손으로 내 뒷목을 감싸 왔다. 당겨진 머리가 아래로 기울어지며 정신없이 키스가 이어졌다. 위와 아래에서 질척이는 소리가 한데 엉켰다. 그는 위에서 아래로 턱 끝을 타고 흐르는 타액을 혀로 샅샅이 핥았다.

“읍, 으응….”

나는 그대로 상체를 허물어뜨렸다. 풀어 헤쳐진 바지와 속옷 앞섶이 미끌미끌한 점액질로 끈적거렸다.

“…젖어 있습니다.”

이호연이 미간을 좁혔다. 시간이 제법 흘렀는데도 씻어 낸 내벽은 습기로 젖어 있었다.

“누가 손을 댄 건 아니겠죠.”

세 개로 늘어난 손가락이 내벽을 거칠게 들쑤셨다. 날카로운 통증에 눈물이 핑 돌았다. 억울했다. 만지긴 누가 만진다고. 남자인 나를 상대로 성욕을 드러낼 사람이 누가 있다고. 이호연이 아닌 누군가와 이런 행위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흣…. 씻고, 왔어요. 반반차…….”

울먹대며 변명했다. 나는 단지, 자동차 극장에서 바로 그의 집으로 갈 것 같다고 판단했기에 휴가 승인 결재를 올린 거였다. 전날 무리하긴 했지만, 금요일이니만큼 함께 럼주를 맛보고 자연히 침실로 향하리라 생각한 것이다.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씻는 것보다, 먼저 씻고 만나면 조금 더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반반차를 내고 집까지 가서, 준비를 다 하고 온 거다.”

“흐윽, 으읏…. 자꾸, 그만…….”

도리질 치는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이호연의 손길은 집요했다.

“앞이랑 뒤, 이렇게 다 젖어서야.”

이젠 적실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 서늘하게 웃은 그가 내 귓불을 농익은 과실을 물듯, 한입 크게 물었다. 뜨거운 숨이 귓가를 간질이자 성기가 팽팽하게 부풀었다. 한껏 달아오른 내벽이 촘촘히 맞물리며 그의 손가락을 움켜 물었다. 충족되지 않는 쾌감에 허리를 뒤채며 이호연의 중심부에 발기한 성기를 비볐다.

“하으, 흐응….”

“어떻게 해 줄까요.”

그가 느리게 손을 빼냈다.

“예준 씨.”

“아, 으읏, 왜, 왜애…….”

시야가 부옇게 흐려졌다. 조금 전처럼 깊숙하게 휘저어 주면 좋겠는데, 그는 내가 원하는 만큼 움직여 주지 않았다.

“기획 배웠다고 했죠. 요구 사항 정의는 명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느닷없이 정의서를 내놓으라는 그에게 원망 어린 눈길을 보냈다. 요구 사항 정의를 토대로 명령을 이행하겠다는 어처구니없는 궤변에 코를 훌쩍였다. 미친 게 틀림없다. 갑자기 요구 사항 정의서라니! 악취미잖아!

흐린 시야 너머에 이호연의 얼굴이 보였다. 여유를 부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또한 발기하여 앞섶이 불룩 솟은 상태였다. 두 사람이 뜨겁게 뱉은 호흡이 이미 차 내부를 후덥지근하게 데워 놓았다. 나는 어름더듬 입술을 달싹였다.

“나, 흑….”

떨리는 손으로 발기한 이호연의 중심부를 매만졌다. 흘러나온 체액이 그의 속옷을 엉망으로 적시고 있었다. 끈끈한 촉감을 느끼며 하의를 끌어 내렸다. 단단하게 선 좆이 고개를 꺼덕였다. 불거진 혈관이 꿈틀거린다. 불그죽죽한 성기에 손끝이 닿았다. 이호연의 고운 미간에 빗금이 그어졌다. 불기둥과 같은 그의 것에 내 성기를 마찰하며 허리를 들썩거렸다. 미끈거리는 선액으로 질척질척 외설스러운 소음이 번졌다.

“하.”

이호연이 실소를 터뜨렸다. 뒤를 대신하여 앞으로라도 가 보려는 의중을 파악한 것 같았다. 그는 터뜨릴 듯 옥죄어 쥐고 있던 볼기에서 손을 거두고 대신 허리춤을 붙들었다. 거센 악력에 허리가 반쯤 들렸다. 쥐고 있던 그의 성기를 놓치며 안타까운 탄성을 내질렀다.

“말해 줘.”

“호연 씨…, 나, 힘들…, 힘들어요….”

끙끙 앓으며 상체를 수그렸다. 애원하듯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골반을 강하게 움켜쥔 그가 회음부에 제 성기를 비볐다. 움츠러든 입구가 가해진 자극으로 벌름 숨을 내쉬었다.

“말해야지.”

단호한 그의 어조에 절레절레 도리질을 쳤다.

철썩, 가볍게 두드린 마찰음이 귓전을 때렸다. 유독 크게 느껴진 소리에 엉덩이가 지르르 떨렸다. 찹쌀떡처럼 둥글게 오른 볼기 위를 살살 문지른 이호연이 툭툭 나를 보챘다. 얕은 자극에도 허리가 절로 휘며 뒤로 넘어갈 것 같았다. 등허리를 쓸어 주는 손길에 앞으로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납작 엎드려 끙끙 앓는 내 귓가에 다시 한 번 그가 종용했다.

달싹이던 입술을 바르르 떨며 작게 중얼거렸다.

“나, 나아….”

넣어 주세요. 팔을 뻗어 이호연의 목을 감싸 안았다. 안달 난 허리가 반쯤 들렸다. 입구를 조준한 성기가 단숨에 삽입되었다. 두꺼운 살덩이가 그대로 몸을 반으로 쪼개고 들어왔다.

“하윽! 아…!”

젤이나 윤활제 없이 삽입했음에도 막힘은 없었으나, 좁고 빡빡한 내벽에 오히려 흥분이 더 고조되었다. 이호연의 성기를 뿌리까지 먹어 치운 구멍이 뻐끔거렸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배 위를 더듬었다. 배 한가운데가 툭 튀어나온 것 같았다. 욕지기가 치밀 만큼 꽉 채워진 존재감을 느끼며 흐느꼈다.

“흑, 웃…, 이, 있어…….”

“윽.”

“허윽, 하으으…….”

애걸복걸했던 만큼 달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바래질 만큼 강한 성감이었다. 내장을 헤치고 들어온 귀두 끝으로 느꼈던 지점을 문질러 자극했다. 화마와도 같은 자극이 무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문드러질 때까지 짓이겨지길 바랐다. 배 속이 뜨겁게 달구어지며 열기가 경추를 타고 빠르게 뇌리를 강타했다. 시야가 깜박깜박 점멸하며 열락에 취해 몸을 흔들었다.

“아, 읏, 아아!”

이호연이 하체 반동을 이용해 퍽퍽 추켜올렸다. 빠져나가고 들어차기를 반복하는 행위에 뇌수가 녹을 듯 어찔했다. 쾌락의 해수면이 점차 수위를 높여 가고 있었다. 나를 위에 올린 그가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찌푸린 눈가와 감내하는 표정을 보며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 울리는 듯했다. 섹스할 때마다 대부분 정상위로 해 왔었기에 내려다보는 기분이 이런 것인 줄 몰랐다. 달뜬 호흡으로 차창에 뜨거운 김이 서렸다.

좌석이 조금 더 뒤로 밀려났다. 쑥 꺼진 상체를 따라 내 몸 역시 기울어졌다. 그러면서 삽입한 각도가 어긋나 비명과도 같은 신음이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호연이 나를 떼어 내며 내 몸을 틀었다. 바로 앉아 보라는 거였다. 좌석을 뒤로 빼내며 공간이 확보되어 몸을 모로 돌리는 데에는 어렵지 않았다. 그의 가슴에 등을 대고, 다시 깊숙하게 삽입의 감각을 맛보았다. 오금 뒤로 팔을 두른 그가 밑에서 위로 추삽질을 했다. 몸이 둥글게 말린 채 그가 흔드는 대로 맞추어 숨을 할딱였다.

“응, 읏, 으응…!”

“안에 하고 싶어.”

내 목덜미를 지분대던 이호연이 여린 살갗을 콰득 짓씹었다.

“으응, 호연, 씨, 아아….”

가고 싶어요. 발갛게 물든 성기가 잘름대며 액을 토해 냈다. 앞까지 함께 자극하면 금방 사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손을 내려 내 것을 쥐고 탁탁 소리가 나도록 위아래로 쓸어내렸다. 오금을 감싸 지탱하고 있던 그가 내 손을 치우며 달큰하게 열이 오른 기둥을 잡아챘다. 아, 안 돼. 막으면, 안 돼. 괴로움에 진저리 치며 고개를 저었다. 귀두 끝을 막은 손가락을 떼어 내려 해도 그는 나를 쉬이 놓아주지 않았다.

“으읏, 안 돼애, 싫어요, 싫어…. 가고 싶어…….”

분출이 막힌 성기가 한계까지 부풀었다. 이 이상 커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의 어깨에 머리를 늘어뜨리며 울음을 쥐어짜 냈다.

“이대로 집으로 갈까. 넣은 채로.”

희읍하던 나는 이호연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닿을 듯 말 듯 머지않은 곳에 사정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호연이 내 목에 재차 이를 박아 넣으며 퍽, 하고 짓쳐 올렸다.

“…하으윽.”

“집에 가자, 예준아.”

그가 요도를 누른 손가락을 거둬 주었다. 사정감이 차오른 성기가 두근, 맥박 치며 그의 손바닥 위에 뜨거운 정액을 토해 냈다. 막혔던 여파로 인해 사출은 길었다.

“하…, 그냥 집으로 갈 걸 그랬습니다.”

이호연은 잇자국이 남은 목을 꼼꼼히 핥아 주며 작게 투덜거렸다. 그는 아직 가지 못한 채였다. 참지 못하고 같이 사정했더라면, 가는 내내 내가 불편해할 것을 알고 참은 것 같았다.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진 상체를 가까스로 세워 그를 돌아보았다. 나만 간 것이 괜스레 미안해져, 그의 목을 당겨 입을 맞추었다.

바지를 추슬러 올리고 조수석으로 돌아왔다. 차량 대시보드에 있던 물티슈로 손을 닦아 낸 그가 시동 버튼을 눌렀다. 차체가 미미하게 진동하다 급발진이라도 하듯 부우웅, 하고 크게 소리 내며 뒤로 후진했다. 나는 안전벨트 끈을 손에 꼭 쥔 채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순식간에 골목 어귀로 빠져나온 차가 바로 우회전하였다. 핸들을 거칠게 꺾은 차가 곧장 탄천동로로 진입했다. 쫓기는 사람처럼 속력을 높였다. 바깥에 보이는 풍경이 죄 이지러졌다. 내비게이션에 찍힌 예상 시간보다 십 분 빠르게 판교에 도착했다. 딱지를 떼어도 이상하지 않을 속도였다.

아파트 단지 주차장에 아무렇게나 차를 세워 두고, 이호연이 먼저 운전석에서 내렸다. 어리바리하게 조수석에 앉아 있던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뒤따라 차 문을 열었다. 조수석 근처까지 다가온 그가 내 손목을 거칠게 낚아챘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느냐는 투덜거림은 나오지 않았다. 그의 다급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집까지 다다르는 동안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땡, 소리가 나며 승강기 문이 열렸다.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른 그는 현관문이 열리기 무섭게 안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읍, 읏!”

그가 어둠 속에서 거칠게 입술을 부딪쳐 왔다. 현관 센서가 뒤늦게 반응하며 빛이 쏟아졌다. 그제야 눈을 감고 키스에 몰두한 그의 얼굴이 보였다. 허리를 옥죄어 안으며 부푼 중심부를 문질러 왔다.

“예준아.”

숨을 토해 낸 그가 나를 끌어안고 거듭 내 이름을 불렀다. 애틋하고 다정한 음성이 귓가에 울릴 때마다 선득하고 찌릿한 감각이 등줄기를 탔다. 센서 등이 꺼지며 다시 어둠이 번졌다. 맞붙은 몸을 슬며시 떼어 내자 내려앉은 적막 속에서도 이호연의 까만 눈동자가 선명히 보였다. 너무나 또렷하여 시선만으로 꿰뚫리는 기분이었다. 발기한 그의 것을 쓰다듬었다.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다. 무릎을 꿇고 그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지퍼를 내리고, 브리프까지 한 번에 내리자 두껍고 기다란 성기가 툭 하고 얼굴을 쳤다. 나는 이호연의 성기를 손에 쥐고 그 끝에 입술을 가져갔다.

“으윽….”

더운 숨에 허벅지 근육이 잘게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다시 한번 센서에 불이 들어왔다. 나는 눈을 들어 위를 올려 보았다. 일그러진 이호연의 얼굴을 보며 혀를 내밀어 끝과 기둥을 핥았다. 날 바라보는 탁한 눈동자에 하얀 불꽃이 일었다. 큼큼한 맛과 짙은 체취에 코가 시큰거렸다.

“무리하지 마.”

이호연은 내가 빨아 주는 것이 싫지는 않지만, 무리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하였다. 온화하고 따스한 손이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헤집었다. 입을 크게 벌려 그의 것을 물었다. 턱을 앞으로 내밀어 깊게 흡입했다 뒤로 물러나며 쭉쭉 소리가 나게 빨았다. 삼킨 성기가 점점 부푸는 것이 느껴졌다. 한입에 품어지지 않는 크기였다. 입천장을 찔러 오는 귀두에 눈물이 찔끔 솟았다.

“윽, 하아…….”

이호연의 손이 내 머리가 뒤로 넘어가지 않도록 받쳐 주었다.

쭈웁, 츗, 쯔윽,

한계치로 벌어진 하악으로 턱이 얼얼했다. 흥분한 이호연이 내 머리를 쥐고 허리를 앞뒤로 흔들며 더욱 깊숙이 박아 넣었다. 숨구멍이 막히며 괴로운 신음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끕, 크흣.”

목구멍을 찔러 오는 두꺼운 좆에 참았던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경직된 그의 허벅지를 쥐고 바르르 떨었다. 점차 빨라지는 피스톤질에 눈을 질끈 감았다. 감각을 잃은 입 안에 이호연의 성기가 빠르게 들락거리다 퍼억, 하며 세게 추켜올렸다. 헛구역질이 날 만큼 강한 왕복 운동 끝에 그가 내 목구멍 깊이 사정했다. 뱉을 겨를도 없이 삼켜 낸 나는 놀라 콜록거렸다.

“후….”

“흐, 읏…. 무리하지 말라고….”

이렇게 몰아붙일 줄은 몰랐다. 이호연이 한쪽 무릎을 굽혀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의 얼굴엔 당혹감과 미안함이 뒤섞여 있었다. 미안하다며 사과하는 그는 내 입 안이 뜨겁고 또 좁아서, 그게 너무 좋았다고 했다. 구강 성교를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내가 선뜻 해 줄 줄 몰랐고 사정 전에 끊으려고 했다는 변명 아닌 변명을 덧붙였다. 나는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온 입술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넘어온 혀가 치아 구석구석을 핥아 주었다. 씻겨 주기라도 하듯, 꼼꼼하게 치열을 훑는다. 입맞춤의 여운에 젖어 눈꺼풀을 바르르 떨었다. 쪽, 하고 입술이 떨어지며 밤을 닮은 새까만 눈동자가 나를 지그시 응시해 온다.

“버카디 마시고 한 번만 더 합시다.”

“…힘든데.”

이호연은 웅얼대는 나를 안아 올려 신발을 벗기고 제 신발도 벗었다.

다시 돌아온 주말이었다.

**

23번째 절기인 소한小寒이 지나며 바람이 매섭게 날을 세웠다. 혹한의 날씨에 살을 에는 추위가 연일 이어졌다. 판교 일대에 심긴 가로수와 화랑공원의 상징인 메타세쿼이아 나뭇가지는 잎이 사그라지며 앙상한 뼈대만 남았다.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로 칼바람이 부는 바깥과 달리, 이호연의 집은 온화한 기운이 넘실대고 있었다.

빛 한 줌 들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고른 호흡이 규칙적으로 퍼진다.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체온이 등 뒤에서 느껴졌다. 칭칭 감긴 두꺼운 이불 위로 이호연의 팔이 둘러져 있었다. 옴짝대는 나로 인해 가깝게 붙어 있던 그도 깬 것 같았다.

“깼어?”

졸음에 잠긴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번데기처럼 둘둘 말고 있는 이불에서 간신히 벗어나 그를 향해 돌아누웠다. 옅게 드리운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이호연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손을 뻗어 그의 눈가를 조심스레 매만져 보았다. 보드라운 속눈썹이 손끝에 감겼다. 간지러운 모양인지 일정하게 내쉬어지던 호흡에 웃음기가 서렸다.

따끈한 어묵탕에 핫 토디를 만들어 먹자는 꼬드김에 넘어간 게 발단이었다. 쌀쌀하고 시린 날씨에 어울리는 국물에 따뜻한 위스키라니. 거절이 불가한 제안이었다. 그의 집에 있는 위스키에 꿀과 따뜻한 물, 레몬 조각을 넣어 홀짝홀짝 마시다 보니 분위기에 취해 또다시 침실행이었다. 평일은 힘들다고 고개를 저어도, 정신을 차려 보면 발가벗은 채 그의 밑에 깔려 있었다. 그렇게 다음 날이면 데자뷔처럼 구시렁대는 상황이 반복되는 거였다. 알코올성 치매가 아니라 알코올성 섹스 같았다. 이쯤 되면 일부러 술을 먹이는 건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투덜거리기는 하지만 결국 좋아서 울고 매달리게 되니, 강경하게 말을 하지 못하고 침음만 삼켰다.

“데려다줄게요.”

달래는 목소리가 달다. 이호연의 손이 토닥토닥 규칙적으로 내 등을 두드렸다.

무어라 말을 보태고 싶었지만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나른한 숨을 토해 내며 꿈결로 한 발 다가섰다.

아침 식사를 마친 뒤였다. 이호연과 나는 출근하기 위해 드레스 룸에서 옷을 고르고 있었다. 붙박이장과 행거, 수납 선반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그는 내 옆에 서서 어떤 옷을 내어 줄지 이 옷, 저 옷 색을 비교하며 대어 보았다. 입고 왔던 옷이 상태가 괜찮았더라면 그대로 입고 갔을 텐데, 애석하게도 이물질이 묻어 어쩔 수 없이 세탁을 돌려야 했다.

“편한 옷은 없는 거죠?”

“네, 트레이닝복이 전부 어딜 갔는지.”

뜨끔하여 눈을 굴렸다. 어디 갔긴. 항상 빌려 입고 그대로 집에 가니까 내 집에 있겠지.

“그럼 다른 옷….”

후다닥 말을 바꾸며 꺼내 준 옷들을 뒤적거렸다.

체격 차이 탓에 어떤 옷을 가져다 대어도 어깨선이나 밑위길이가 맞지 않았다. 더구나 스타일에도 차이가 있었다. 셔츠나 니트 등을 단정하게 입는 그와 체크 성애자나 다름없는 판교 직장인의 옷차림이 비슷할 리 없었다.

“이게 그나마 작은 옷인데.”

이호연이 옷장 깊숙한 곳에서 밤색 니트를 꺼냈다. 흰색 셔츠에 덧대어 입으면 괜찮지 않겠냐는 거였다. 그래, 꺼낸 옷들 중 그나마 낫긴 하네. 나는 그에게서 옷을 받아 들고 몸을 틀었다. 욕실이나 침실로 가서 갈아입으려는 것을 그가 붙잡았다.

“여기서 갈아입어요.”

벗어야 하는데요? 눈짓으로 물었다가 눈치껏 데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나가야 하는데 설마…, 아니겠지. 망설이다 걸치고 있던 잠옷 상의 단추를 하나씩 끌러 내렸다. 풀어진 잠옷 사이로 간밤의 흔적이 얼룩덜룩하게 남은 쇄골과 가슴이 드러났다. 기존에 있던 잔흔이 채 사라지기 전, 새로 덧칠된 자국이 울혈로 남았다. 이호연이 새긴 잇자국이었다. 낯이 뜨거워 후다닥 셔츠에 팔을 꿰었다. 보드라운 재질의 잠옷과 달리 빳빳한 셔츠가 젖꼭지를 스치자 미미한 둔통이 일었다. 무지근한 통증에 눈꺼풀이 움찔 떨렸다. 서둘러 셔츠 단추를 채우고 그 위에 니트를 입었다. 길게 내려온 소매와 사타구니를 덮은 밑위길이가 꼭 나이 터울이 크게 나는 형제의 옷을 뺏어 입은 것 같다. 이호연은 니트와 맞춰 입을 베이지색 면바지를 꺼내 주었다.

“엄청 커 보여요.”

“허리가 밴딩이라 괜찮을 겁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호연도 고심해서 이 옷을 꺼내 준 것일 테지. 한숨을 삼키며 허리끈을 당겨 단단히 동여맸다. 허리를 굽혀 질질 끌리는 바지 끝단을 두 번 접어 올렸다. 아슬아슬하게 고정된 허리를 제외하고는 8, 90년대에 유행했던 통바지를 입은 것 같았다. 서태지와 아이들을 따라 했다고 해도 믿겠는데?

“집에 예준 씨 옷 좀 몇 벌 사 둬야겠네요.”

이호연이 내가 입을 여벌 옷을 둬야겠다며 조만간 옷장 한 칸을 비워 두겠다 덤덤하게 말했다. 오피스텔에 있는 옷들을 잠시 떠올렸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말려도 소용없겠지. 주말이면 다 치워 둘 게 뻔했다.

“예준 씨, 잠깐만.”

옷도 다 입었겠다, 나서려는 나를 이호연이 붙잡았다. 그는 수납장에서 사각의 케이스를 꺼내 내 앞에 내보였다.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기다란 직사각의 박스 한가운데에는 브랜드의 로고가 인쇄되어 있었다.

“갖고 싶다고 했잖습니까. 홈페이지에서 결제하고 매장에서 받아 왔습니다. 어제 주려고 했었는데….”

이호연이 말미를 흐렸다. 어묵탕과 핫 토디만 아니었어도 술기운에 서로 엉겨 붙지 않았겠지. 눈만 마주치면 입부터 맞추고 보는 날들의 연속이라 창피함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의 손에 들린 박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최근 출시된 스마트 워치였다. TV와 포털 광고 지면에서 출시 광고만 몇 번을 보았는지 모른다.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갖고 싶다기에 준비했어’라고 쉽게 말하기엔 너무나 고가의 제품이었다. 다소곳이 붙이고 선 팔이 꿈질거렸다. 선선히 받기에는 부담스럽고, 안 받자니 가지고는 싶고. 양면의 마음이 간사하게 손바닥을 이리저리 뒤집는다. 친한 친구들에게서조차 이런 고가품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생일이나 오랜만에 만나서도 밥이나 술을 서로 한 번씩 번갈아 사는 걸로 때웠고, 만약 선물을 하더라도 10만 원 내외였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았던 무선 이어폰도 고이 모셔 두고 있건만. 무어라 입을 떼어야 할지 막막했다.

“받아요.”

워치를 들이미는 이호연에게서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비, 비싸잖아요.”

사람이 양심이 있지. 아무리 갖고 싶어도 이건 아니다.

“얼마 안 합니다.”

거야 당신 월급에선 얼마 안 하겠지. 태연하게 말하는 그에게 입을 샐쭉 내밀어 보였다. 가격대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손.”

“…….”

“예준 씨, 손.”

이호연이 반려동물을 대하듯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저도 같은 색으로 맞췄습니다.”

이호연은 쉽사리 받아 들지 못하는 나를 보며 소매를 걷어 제 손목을 보여 주었다. 금색의 워치와 밀레니즈 루프가 그의 손목에서 영롱히 빛나고 있었다.

마지못해 박스를 건네받은 나는 포장을 뜯어보라는 종용에 못 이겨 조심스럽게 비닐을 벗겨 냈다. 두 개로 분리된 케이스에서 각각 워치와 루프를 꺼내었다. 딸깍, 소리가 나도록 이음매를 맞추어 끼웠다. 워치 본체를 도로 가져간 그가 내 손목에 둘러 주며 뿌듯하게 미소 지었다.

“커플이네요.”

싱글 웃는 그를 향해 눈만 깜박였다.

커플 아이템 좋지. 연애하며 같은 물건을 지닌다는 것은 서로를 묶어 주는 것과 동시에 물질을 통한 정서적 교류를 확대시킨다. 상징성이 부여되며 감정에 불을 지피기에 최적의 수단인 셈이다. 나 역시 그와 같이 할 수 있는 매개체를 찾고 있던 참이었다. 날씨를 고려해 커플 패딩이나 스니커즈 같은 것을 염두에 두었었다. 패딩도 고가라고 생각했었건만. 터지려는 탄식을 가까스로 누르며 빛을 발하는 워치에 시선을 주었다. 첫 커플 아이템이 100만 원가량의 스마트 워치가 되다니.

“고맙죠.”

이호연이 다정히 물었다.

“고맙죠, 당연히.”

알고 있다. 그가 듣고 싶은 말은 비싸다거나 과하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내가 좋아할 것을 상상하며 주문했을 것이고, 두 사람을 이어 줄 수 있는 매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제 것도 추가로 구매했을 것이다.

“회사 가서 충전도 하고 주변 기기랑 연결도 해 봐요.”

자랑도 하고. 이호연이 양팔을 벌리며 고개를 까닥였다. 픽 웃음을 터뜨리며 좁은 보폭으로 다가가 그의 품에 안겼다.

“이 정도면 평일에 괴롭혀도 되겠습니까.”

“…능구렁이 같으니라고.”

이호연의 가슴에 머리를 비볐다.

이호연이 입고 갈 옷을 내 취향대로 골라 준 후 9시 40분이 다 되어서야 아파트 주차장 출구를 벗어났다. 야탑에서 이 시간에 출발했다면 지각은 따 놓은 당상이었을 것이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난 차량이 매끄럽게 도로를 탔다. 통근 버스와 일반 버스로 복잡한 판교역 앞을 지나 바로 큰 도로로 진입했다. 차창을 통해 바쁜 걸음을 재촉하는 직장인들을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플래닛 건물 앞에서 버스를 타고 통근하였기에 매일 걷진 않았지만, 나 역시 수개월 전까지만 하더라도 저들처럼 걸어 다녔다. 바깥을 훑던 눈길을 거두며 고개를 돌렸다. 좌회전 신호를 받은 차가 바로 사옥 근처에 다다랐다. 5분 남짓 걸린 것이다.

이런 식으로 출퇴근하다가는 다리에 퇴행성 관절염이라도 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너무 편한 나머지 직립 보행을 포기한 다리가 퇴화하기 시작하는 거지. 이러다 내가 먼저 같이 살면 안 되겠냐고 말하게 되는 거 아니야? 인간적으로 너무 가깝잖아. 정신 차리자. 멀쩡한 내 집 놔두고 무슨. 이게 전부 이호연의 큰 그림일 수도 있어. 자꾸 좋은 점만 보여 주려고 하는 거지.

“예준 씨.”

상념이 깊어질 즈음, 이호연의 목소리가 나를 깨웠다.

“오늘 SG플레이랑 API 미팅이 있는 거 알고 있습니까.”

“오늘요? 몰랐어요.”

“플레이짐이라고 해서 예준 씨도 나오나 했습니다.”

그가 아쉬움을 드러냈다. 미팅 자리에서 나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모양이었다.

“저는 디자이너라 외부 미팅은 거의 없어서요.”

IT 조직에서, 그것도 기술과 유관한 조직 내에서 가장 말단이라고 볼 수 있는 디자인 파트는 외부 미팅이 드물었다. SG플레이에서 디자이너가 외부 미팅을 간다면, 모회사인 SG솔루션에서 IP 통합가이드가 내려올 때나, 포럼 정도가 전부 아닐까. 아마 모아와의 미팅은 구일호 팀장이나 윤아영 쪽에서 잡았으리라. 개발자와 미팅을 하는 거라면 계약 진행 후 실무자 미팅일 가능성이 컸다. 지난주에 기획팀으로부터 진행 예정 업무 리스트를 받았던 것 같은데. SG계열사 계정 통합 건은 당연히 아닐 것이고, 배너 구좌 추가 건도 아니다. 모아와 미팅을 할 만한 것을 떠올리다 “아.” 하고 눈을 크게 떴다.

“모아페이?”

입으로 뱉고 나서야 이호연이 페이 시스템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네, 예준 씨도 오면 좋을 것 같았는데, 아쉽네요.”

“한번 물어볼까요? 먼 것도 아니고 바로 옆옆인데.”

디자인팀에서 백업할 것이 있는지 따라가도 되냐고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 지금까지 디자인 백업을 핑계로 미팅에 따라간 적은 없었는데. 앞으로 백업을 더 열심히 하겠다고 하면…?

“물어보고 연락할게요.”

이호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SG플레이 건물 맞은편 갓길에 차를 세우며 비상등을 켰다.

“아, 예준 씨, 휴가는 냈습니까.”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연휴 앞에 하나, 뒤에 다섯 개 쓰는 걸로 승인받았어요. 딱 2주 쉬는 걸로. 호연 씨는요? 이직하고 얼마 안 됐는데 가도 괜찮아요?”

“급한 건들은 이미 어느 정도 끝내 놓은 데다, 연휴 전에 들어가는 건 SG랑 진행하는 연동 건 말고는 없습니다.”

그는 연휴 전후로는 배포 일정이 없기 때문에 자리를 비워도 괜찮을 것이라 답했다.

자동차 극장을 다녀온 바로 다음 날, 연휴 중 여행을 가자던 이호연은 실행력 좋게도 가고 싶은 여행지 리스트를 뽑아 전달해 주었다. 그가 엑셀 시트로 정리한 문서에는 1순위부터 4순위까지의 여행지가 각 행에 기재돼 있었는데, 세부 일정이 마치 개발 연동 문서처럼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화폐 단위부터 시작해 우리가 여행할 시기의 평년 온도, 투숙할 호텔 등이 빼곡하게 메모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1순위 희망 여행지로 적어 둔 뉴질랜드를 보며 나는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여행지를 정리해 보았다고 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했는데, 막상 예상보다 더한 상황이 닥치니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기간도 일반적인 여행 기간에 비해 훨씬 길었다. 출발 일정은 연휴가 시작되는 전 주 금요일이고, 돌아오는 건 그로부터 열흘 후 주말이었다. 신혼여행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일정에 그를 외계인이라도 되는 양 바라보자 그는 잠시 생각하다 “조금 짧은 감이 있긴 합니다.” 따위의 말을 하며 내 두통을 배가시켰다. 2주간의 여행이 싫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장기간의 여행으로 리프레시를 할 수 있을 터였다. 다만 내 입장에서는 비용적인 부분에서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상대적으로 그가 비용을 더 많이 낸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하여튼, 보편적인 통념에서 미묘하게 어긋난 듯 보이는 이호연 앞에서 최대한 합리적인 선택을 해야만 했다. 뉴질랜드나 이탈리아는 애초에 무리일 것 같았고, 그나마 만만한 것이 하와이나 괌이었는데, 이호연은 내가 1순위와 2순위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3순위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며 나를 구슬리기 시작했다.

예준 씨, 괌은 가족 단위 여행객들이 많고 볼거리가 많지 않다고 합니다.

예준 씨, 하와이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오션 보드카를 맛보고 싶지 않습니까.

예준 씨, 하와이 H호텔에 투숙하면 매주 금요일마다 불꽃놀이를 볼 수 있고….

예준 씨, 운이 좋으면 개체 수가 많지 않은 혹등고래도 볼 수…….

하와이를 가야만 하는 이유를 매크로처럼 읊는 그 때문에 결국 하와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내가 괌을 선택한다면 귀에서 피를 볼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였다. 그의 의견을 따르는 대신 일정을 대폭 줄이기로 하였는데, 일주일 정도만 다녀오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비용 역시 예약 명세를 바탕으로 반씩 부담하는 것으로 못을 박았다.

“가까이.”

이호연이 눈짓했다. 내리기 전 그의 입술에 쪽 소리 나게 입술을 맞췄다. 만족한 그의 눈매가 가늘어지며 휘어졌다.

“들어가요. 미팅에서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송기현이 출근하기만을 기다렸다. 팀원들 중 그 누구보다 먼저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출입문만 흘끔거리기를 몇 분, 송기현이 사무실로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입가에 웃음이 해죽 내걸렸다. 가까이 다가오는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허허실실 웃고 있는 나를 보며 그의 눈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뭐예요, 아침부터.”

송기현이 가방을 자리에 올리며 퉁명스레 내뱉었다.

나는 의자에 등을 파묻고는 다리를 꼬고 앉아 거만하게 손목을 들어 올렸다. 내 제스처를 바로 이해하지 못한 그가 미친 사람 보듯 눈을 흘겼다.

“안 보여요?”

송기현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다 뒤늦게 손목에 둘러진 밀레니즈 루프를 보며 크게 소리를 내질렀다.

“워치?! 이거 이번에 새로 나온 모델 맞죠?”

조용한 사무실에 송기현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퍼지자, 디자인팀은 물론 개발팀 곳곳에서 삐죽빼죽 머리가 올라왔다. 전자 기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이대현이 홀린 듯 다가와 내 뒤에 섰다. 김정우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스마트 워치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때, 짱이지? 멋지지? 있어 보이지? 이거 호연 씨가 사 준 거다? 무려 커플 템이라 이거야. 송기현 너는 이호연 없지? 나는 이호연 있다? 득의양양해진 나를 보는 그의 눈동자에 금세 부러움이 가득 차오르며 일렁이기 시작했다.

“와, 대박, 졸부 룩의 완성이라니.”

송기현이 중얼거렸다.

“졸부 룩이라뇨. 세련되고 부티 난다고 해 주세요.”

“부티라니. 지금 입고 있는 옷이면 80년대 아이돌도 소환 가능할 텐데요? 그나저나 너무 부러워서 갑자기 배가 아픈 것 같다.”

제 배를 움켜쥐고 앓는 시늉을 하는 송기현에게 빼죽 눈을 흘겼다. 졸부 룩이 뭐야, 졸부 룩이. 호연 씨 옷이고, 호연 씨가 사 준 스마트 워치인데. 평소에도 편하게 입고 다니긴 했지만, 이 옷은 다르단 말이다. 부루퉁하게 볼을 부풀렸다.

“회사 열심히 다녀야겠네요. 할부금 내려면.”

“원래 열심히 다니는데요.”

할부금이 아니더라도 회사는 열심히 다니고 있는데. 구시렁대며 툴툴거렸다. 두 사람은 당연히 할부로 긁었으리라 생각하는 듯했다. 일반적인 반응이라면 이게 맞는 거겠지. 연애도 안 하는 거로 알고 있는데.

“정말 열심히 다니고 있어요?”

송기현이 코웃음 쳤다. 이대현도 킥킥 웃으며 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원래 이직한다고 노래 부르는 사람이 제일 엉덩이가 무거운 법이죠.”

“노래 안 불렀다고요.”

입매를 비죽거렸다. 이 인간들아, JD 들어오는 메일 안 들어간 지 수개월이거든요? 연봉 빵빵하게 올려 주고 워라밸 좋은 곳을 제안받았다면 억울하지도 않지. 더군다나 아직 적기가 아니라고. 좀 더 연차를 채워야 다른 데 올라갈 때 수월해진단 말이다. 게다가 시니어로 진급하면 연봉 재계약도 하게 될 텐데,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닐 수야 없지. 업계가 좁기 때문에 두세 번 찔러 보는 것도 나중에 말이 나온다. 지금 옮기면 직전 연봉이거나 동결인데, 내 사전에 연봉을 올리는 일은 있어도 한번 오른 연봉을 깎는 일은 절대 없다고.

“예준 님이 주기적으로 큰 거 하나씩 지르기를 바라야겠네요.”

“왜요?”

“그야, 한 회사에서 오래 보려면 예준 님이 할부 노예여야 하니까?”

송기현이 능글대자 이대현과 김정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스마트 워치로 시작한 잡담은 이채선이 출근하며 끝이 났다.

나는 어제까지 작업하던 프로모션 페이지와 B2B 관리자 페이지 가이드 작업을 완료하여 윤아영에게 전달하고 피드백을 요청했다.

잠시 후, 확인을 마친 윤아영에게서 DM이 날아들었다.

[아직 일정 좀 남았는데 감사해요. - SG 윤아영]

-수정할 거 있으면 알려 주세요.

[음, 훑어보기만 했을 때는 딱히 없는 것 같아요. 기획한 대로 작업해 주시기도 했고, 사업부에서만 수정 오더 없으면 이대로 진행할게요. - SG 윤아영]

-그럼 사업부에서 확인하기 전까지 조금 더 다듬고 있을게요. 참고로 저는 A안을 밀고 싶긴 해요. 피드백 오면 전달 부탁드려요.

확실히 윤아영이랑은 업무적으로 합이 잘 맞는 것 같다니까. 커뮤니케이션도 좋은 편이고. 기분 좋게 미소 지으며 기지개를 켜다 문득 이호연이 언급했던 미팅을 떠올렸다. 닫았던 채팅 창을 열어 바로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아영 님, 오늘 모아랑 미팅 있죠?

[네, 이따 3시에요. 왜요? - SG 윤아영]

거두절미하고 ‘나도 데려가 줘’라고 말하고 싶다. 모아 사옥도 궁금하고, 이호연이 어떻게 일하는지도 알고 싶다고! 실무 이전까지의 밑 작업은 전부 기획자의 몫이라 디자이너나 개발자가 굳이 동행하지 않아도 되지만, 보고 싶은 걸 어찌한단 말인가. 나는 같이 가면 안 되느냐는 내용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 - SG 윤아영]

타이핑 인터랙션이 화면에 나타났으나 실제 메시지가 오지 않자 그녀가 물음표를 보내왔다. 아오, 어쩌지? 어떡하지? 눈만 굴리다 이내 아무 말이나 내지르며 타자를 두드렸다.

-저도 따라가도 돼요? 사옥이 너무너무 궁금합니다.

[아…, 사옥이……. 어차피 근처라 상관은 없는데, 모아 쪽 담당자한테도 물어볼게요. - SG 윤아영]

5분 후, 그녀는 모아 담당자의 답변을 들고 나타났다. 연동에 따른 계약 관련 미팅이었다면 사업부가 동행해야 하기에 어렵겠지만, 계약 직후 실무자들 간의 미팅이기 때문에 견학 삼아 방문을 하는 것도 괜찮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했다. 다만 너무 많은 인원이 오면 부담이 되니 다섯 명 내로만 인원수를 맞춰 달라고.

[일호 님한테도 이야기하고 플레이짐 채널에 올릴게요 - SG 윤아영]

플레이짐에 참여했거나, 현재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 중 같이 갈 사람을 추려 보자는 의미였다. 채널에까지 올려도 되나. 괜히 일이 커지는 것 같았다. 내가 고민하는 사이, 채팅 알림이 모니터 하단에 떠올랐다. 벌써 일호 님한테 물어본 건가? 뭐 이리 빨라? 나는 후다닥 ‘#dev_play’ 채널을 열어 그녀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

요지는 간략했다. 3시에 ‘모아페이’ 관련 미팅이 모아 사옥에서 진행될 예정이며, 거리가 가까운 만큼 기획자와 담당 개발자 외에 함께 가고 싶은 인원이 있다면 알려 달라는 거였다.

[됐죠? 채널에 댓글 주세요. - SG 윤아영]

개인 메시지로 댓글을 달라는 윤아영에게 내심 감탄하며 모른 척 채널에 댓글을 남겼다.

“응? 예준 님 세 시 미팅 따라가려고요?”

“네, 그때쯤이면 졸릴 시간이기도 하고, 사옥을 구경해 보고 싶기도 하고….”

속닥여 답하는 나를 보던 송기현이 피식 웃었다.

“저도 갈래요.”

저 역시 따라가겠다는 답변을 단다.

“그럼 갔다가 오면서 편의점 호빵 고?”

“콜.”

돌아오는 길에 먹을 간식 설계까지 완벽했다.

사옥은 올해 초 공사를 마친 건물답게 세련된 인테리어를 자랑했다. 로비에는 모아 앱 아이콘이 스테인리스 스틸로 제작되어 곳곳에 설치돼 있었다. 로비 정중앙에 인포 데스크가 있고 좌측으로는 컨퍼런스 룸 입구, 우측으로는 외부인도 이용 가능한 사내 카페 ‘모노크롬’이 보였다. 명도에만 변주를 준 단색화처럼 흑과 백이 적절히 어우러진 건물과 어울리는 명칭이었다. 내부에 시선을 두다 고개를 돌려 송기현을 보았다. 감탄이 묻어나다 못해 뚝뚝 떨어지는 송기현의 얼굴을 보고 냅다 옆구리를 찔렀다. 점심때만 해도 다른 회사 사옥을 구경 간다며 분당 촌놈이라 놀리던 그였는데, 나보다 더 격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이럴 거면 놀리지나 말지.

“확실히 좋긴 하다. 그죠.”

윤아영도 고개를 들어 은은히 쏟아지는 조명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SG솔루션이 사옥을 판교역 앞으로 옮기면서 비어 있는 건물에 그대로 들어간 SG플레이와는 차원이 달랐다. SG플레이도 지티켓으로 투자를 꽤 받은 걸로 알고 있는데, 그 많은 투자금은 어디로 간 것인가. 일할 맛 좀 나게 이런 사옥으로 이전하면 얼마나 좋아. 뭐, 실상 사옥이 바뀐다고 해도 업무 효율은 미미하겠다만.

로비 인포 데스크에서 방문 시각과 이름, 연락처를 각각 기입하고 출입 카드를 받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4층 라운지에 내리자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SG에서 오셨죠?”

“안녕하세요. 저는 SG플레이 서비스 기획자 윤아영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페이 연동 맡아 주실 백엔드 개발자 성현호 님이시고 두 분은 GUI디자이너인 정예준 님, 송기현 님이에요.”

윤아영이 대표로 인사 후 성현호와 나, 송기현을 차례로 소개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모아 정산 시스템 기획자 최진우입니다. 저희가 내부에서는 영어 닉네임을 쓰고 있어서요. 편하게 제이슨이라고 불러 주셔도 괜찮습니다.”

자신을 최진우라 소개한 남자가 윤아영과 가볍게 악수하며 눈인사를 건넸다.

최진우의 안내에 따라 라운지 안쪽 사내 카페로 발을 옮겼다. 너른 공간에 소파가 일정 간격에 따라 놓여 있고, 테이블 역시 빠듯하지 않게 배치되어 있었다. SG 계열 외의 다른 회사 사내 카페를 구경하는 것은 처음이라 눈만 굴리기 바빴다. 1층 카페가 모노톤으로 깔끔하고 세련된 분위기를 내었다면, 4층 직원 전용 카페는 짙은 밤색의 원목으로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카페 이름도 각각의 특색을 따라 1층은 ‘모노크롬’, 4층은 ‘모카’로, 작명 센스가 좋은 것 같았다.

진동 벨을 받아 음료가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최진우는 나를 비롯해 동료들을 미팅 부스로 데리고 갔다.

“저희 개발팀장님이 앞선 유닛 미팅으로 조금 늦는데 페이 연동 안내는 팀장님이 오시면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음료 가지고 올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최진우가 기다란 책상 위에 제 노트북을 두고 나갔다. 그가 말한 개발팀장이 이호연이겠지? 언제쯤 오려나. 그가 나가자마자 성현호와 송기현이 요란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원래 스타트업이 이런 거였어요?”

“듣자 하니 대표가 실리콘밸리 출신이래요. 국내외 투자도 많이 당겼다고 들었어요.”

“맙소사, 지역 커뮤니티가 국내외 투자를.”

“지역 기반이라 이것저것 할 게 많은 거 아닐까요. 사람이 모이면 돈이 되는 게 시장 구조니까요. 한창 카페 활성화되었을 때에도 사람 모아 두고 거기서 광고하고, 판매하고 했잖아요. 플랫폼만 바뀐 거죠. 페이도 서비스 오픈하고 두 달 만인가 MAUMonthly Active Users 확 늘었을걸요. CF도 나오고, 옥외 광고도 하고, 리다이렉트 광고도 많이 본 거 같아요. 듣기로는 딜리버리 서비스나 모빌리티 서비스도 한다는데,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질만 하면 그만인 사업들이잖아요.”

귀가 쫑긋 섰다. 그와 함께 회사 관련 이야기를 할 때, 가끔 이호연이 회사가 커질 예정이라 말을 흘리기도 했다. 해외 서비스도 준비 중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스타트업이지만 초기 자본과 투자금, 그리고 친구가 쥐고 있는 유동 자산이 많다고 했던가. 꼭 신규 사업으로 확장을 하지 않더라도 모아 앱 내의 지역 커머스나 아파트 관리비 수수료, 페이 서비스 수수료만으로도 최소 일 년 정도 살림이 너끈하다고 했던 것 같다.

구시렁대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다 유리문에 비친 실루엣에 “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주의를 끌었다. 이어, 장신의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SG플레이 분들이시죠. 늦어서 죄송합니다. 개발 3팀 팀장, 이호연이라고 합니다. 영문 닉네임은 레오인데, 어느 쪽이든 편하게 불러 주세요.”

가볍게 묵례한 이호연과 시선이 얽혔다. 일어서서 인사하는 동료들을 따라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며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는 좌측부터 순서대로 악수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끝에 앉은 내 앞까지 온 그의 손이 내밀어졌다. 머뭇대며 그의 손을 잡았다. 잡은 손은 익숙한데, 어쩐지 낯선 기분이 들었다. 앞선 미팅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는 이따 보자며 연락을 주고받았었다. 그런데 막상 공적 상황에 놓이니 내가 아는 이호연이 아닌 것만 같은 이 기분은 뭘까.

미묘한 거리감을 느끼며 자리에 앉았다. 다시 한번 그의 시선이 내게 기울었다 다른 곳을 향했다. 어젯밤만 하더라도 너른 품에 나를 끌어안고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않던 그였다. 집요한 눈빛과 손길은 족쇄처럼 나를 붙들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도. 커플 시계라며 스마트 워치를 손목에 감아 주고 회사에 데려다주기까지 했는데, 모든 것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이호연이 입고 있는 옷으로 시선을 내렸다. 와인색 넥니트와 그 위에 걸친 패턴 카디건은 분명 집을 나서기 전 내 취향대로 고른 것이었다. 단정하면서도 온후해 보이는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무감한 얼굴이 퍽 차가워 보였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따스해 보이면 좋겠기에 권한 거였다. 흘끔대는 눈길을 거두며 애꿎은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혼자만 의식하는 것 같아 괜스레 낯이 뜨거워졌다.

“레오 오셨네요? 레오 음료는 아메리카노로 했는데 괜찮으시죠?”

최진우가 어깨로 문을 밀고 들어오며 자리에 앉아 있는 이호연에게 반색했다.

“네, 챙겨 줘서 고맙습니다.”

이호연이 입매를 말아 올렸다. 나는 퍽 친근한 듯한 두 사람을 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나에게만 다정하고 나를 특정해서만 반응한다던 그였기에 회사에서는 건조한 모습만 볼 줄 알았다. 이내 정신을 차리려 책상 밑에서 주먹을 힘주어 쥐었다. 이호연이 사회생활을 아예 안 하는 것도 아니고, 회사 사람인데 당연히 친할 수 있지. 이게 무슨 유치한 생각이람.

미팅의 주요 안건은 모아와 SG플레이 간 페이 시스템 계약 체결에 따른 API 호출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호연은 사전에 협의한 대로 API 호출 전 각 OS별 SDK를 통해 고유 토큰을 발급받을 수 있도록 연동을 돕겠다고 말했다.

“…그럼 실제 연동할 때의 팔로우업을 위해 금일 중으로 단체 채팅 방 개설하겠습니다.”

최진우가 미팅을 마무리하며 노트북을 덮었다.

“와 주셔서 감사드려요.”

그는 윤아영을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아니에요, 덕분에 맛있는 커피도 마실 수 있었는데요. 그나저나 회사가 참 좋은 것 같아요.”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 가며 두 사람이 대화를 이끌어 갔다. 송기현도 긴장이 풀렸는지 서글서글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어…? 그런데 팀장님도 스마트 워치 하고 계시네요?”

성현호가 눈을 빛냈다. 동시에, 최진우와 윤아영, 송기현의 시선이 그의 손목으로 향했다.

“예준 님, 소매 걷어 봐요. 예준 님도 이호연 팀장님 거랑 같은 거 아니에요?”

송기현이 문득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게요, 같은 모델인 것 같습니다. 예준 씨라고 하셨죠?”

개발과 관련한 이야기 외에는 말 한마디 없던 이호연이 희미하게 웃으며 나를 보았다.

으악, 이름을 부르면 어떡해요. 티 날 것 같다고요. 넌지시 던져진 시선과 말투에 뜨끔해진 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짧게 대꾸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슬슬 일어나실까요? 오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적당한 타이밍에 최진우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싱글거렸다. 그가 회의실 문을 열고 나서자 성현호와 윤아영, 송기현이 뒤를 따랐다.

나 역시 그들에 섞여 회의실을 나서려던 순간이었다.

“잠깐 화장실로.”

내 뒤에 선 이호연이 내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자 그는 시침을 뚝 떼고 모르는 척 앞만 보고 있었다. 화끈거리는 얼굴로 회의실을 벗어나 라운지까지 쭈뼛대며 걸음을 옮겼다.

“제이슨, 미안한데 이것 좀 제 자리에…….”

“자리에 두면 되죠?”

“네, 부탁합니다.”

이호연은 아무렇지 않은 척 나와 동료들에게 먼저 가 보겠다며 인사 후 뒤를 돌았다. 최진우는 나와 동료들을 엘리베이터 앞으로 이끌었다. 나는 옆으로 길게 뻗은 복도를 흘긋, 바라보다 앞서 걷는 송기현의 옷자락을 다급하게 움켜잡았다.

“저,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될까요!”

크게 울린 목소리에 당황한 송기현과 하행 버튼을 누른 최진우가 눈을 깜박거리며 나를 보았다.

“아…, 당연하죠. 방금 레오가 간 방향이 남자 화장실이에요. 다른 분들은 잠깐 라운지에서 쉬었다 가실래요?”

나는 허둥지둥 고맙다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는 남자 화장실로 잰걸음을 놀리기 시작했다. 아씨, 나중에 회사 복귀하면 또 놀림 받는 거 아니야? 남의 회사에서 화장실 가겠다고 광고를 한다고. 입술을 잘근 씹으며 화장실 문을 열어젖혔다. 화장실 내부로 발을 들이자마자 큰 덩치의 남자가 와락 덮쳐 왔다. 헉, 하고 단발이 터지려는 찰나, 내 허리를 받친 그가 나를 칸 안으로 밀어붙였다. 변기 위로 나자빠지려는 것을 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싸 옥죄며 지탱해 주었다. 덜컹, 소리가 나며 벽으로 등이 붙었다.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우며 다급하게 입술이 겹쳐졌다.

“흣, 읍…!”

숨이 채 뱉어지지 못하고 거칠게 틀어 막혔다. 입맞춤에 몰두한 이호연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들어온 사람이 내가 아니면 어쩌려고 이렇게 달려든 것일까.

익숙한 체취에 정신이 아뜩해졌다. 공적 공간이라는 것이, 누구도 우리가 구면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 누군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회사 화장실에서 이렇게 입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 흥분을 부추기는 발화점이 되었다. 으응, 앓는 소리를 내며 팔을 뻗어 이호연의 목에 매달려 안겼다. 그가 길게 내려온 니트와 셔츠를 말아 올려 판판한 배를 어루만졌다. 단단한 허벅다리가 다리 사이를 가르며 중심부를 꾹꾹 눌러 왔다. 아래에 가해지는 자극에 놀랄 겨를도 없이, 가슴까지 올라온 손가락이 밤새 시달린 젖꼭지를 스쳤다. 뭉근한 감각에 입술을 떼어 내며 도리질 쳤다.

“읏…, 아, 안 돼요. 회사인데….”

“같은 공간에 있으니 미치겠네요.”

이호연이 더운 숨을 뱉었다. 그의 숨결이 귓바퀴를 돌았다. 그가 제 숨을 좇듯 내 귓불을 잘근 짓씹었다. 입술이 스치는 곳들이 전부 낙인이 새겨지는 것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어깨를 둥글게 말아 움츠리며 열감이 어린 그의 두 눈동자를 응시했다. 홧홧하게 열이 오른 새까만 눈에서 이글거리는 감정이 느껴졌다.

“내색도 없었잖아요.”

당연한 건데도 툴툴거리는 음성이 비죽 솟았다. 나를 보며 미칠 것 같다고 말했지만, 그렇다고 하기에 그는 너무나 담담해 보였다.

“얼굴 보면 못 참을 것 같아서.”

말은 잘해. 속으로 투덜거리며 그의 목에 이마를 묻었다.

“…최진우 기획자랑 친해요?”

“친하다기보다, 회사 동료니까요.”

일을 잘한다고 했다. 컴퓨터 공학이나 소프트웨어를 전공하지 않았음에도 퀵 리뷰나 스펙 관련 논의에서도 대화가 잘 통하고, 지금껏 본 기획자들 중에 기획서도 예외 처리가 잘 되어 있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최진우에 대해 말을 잇던 이호연이 내 등을 토닥였다.

“제이슨은 왜.”

“동료라기엔…, 호연 씨가 너무 친절한 것 같아서.”

얼굴을 들지 못한 채 이호연의 품에 파고들었다. 유치하기 짝이 없다. 나 역시 동료인 송기현과 친하고, 나머지 회사 사람들과도 잘 지내건만, 그가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다는 이유로 볼멘소리나 늘어놓는다는 것이.

연애라는 것은 어느 한쪽만의 감정이나 행위만으로는 결코 성립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한쪽의 감정적 질량이 더 크고 무거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어쩌면 이호연과의 모든 관계에서 내가 감정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그가 먼저 마음을 고백해 왔기도 하고, 연애를 시작한 작년 가을부터 날 향한 그의 감정은 언제나 일직선을 그렸기 때문이다.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아 더 애틋한 것일 수 있고 거리가 가까워 부담이 덜한 걸 수도 있겠지만, 야근이 있던 날을 제외하고 하루도 잊지 않고 날 데리러 왔다.

반면 나는 단순한 끌림과 호감으로 만남에 결정을 내렸다. 처음부터 연애 감정을 갖고 있지도 않았고 그가 가진 감정의 무게와 비교한다면 더없이 가벼웠다. 어느 관계든 마찰이 있을 수밖에 없겠지만, 나는 이호연과 만나는 것을 결정했을 때부터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단순하게 넘어가려 했다.

고개를 숙인 채 이호연의 옷자락을 손에 꾹 쥐었다. 결 좋은 카디건의 촉감이 손가락 사이로 휘감겼다. 부드러운 옷감에 이마를 비비며 감은 두 눈에 힘을 주었다.

연차가 쌓이며 사회생활에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지 않게 된 것처럼, 연애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했다. 일희일비했던 이십 대의 풋사랑을 지나 삼십 대가 되면 감정적으로 무던하고 담백한 연애를 하게 되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그런 연애는 무채색의 팔레트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안일한 생각과 모순되는 부분이기도 했다.

“예준 씨, 얼굴 좀 봅시다.”

이호연이 뒤로 물러나며 허리를 숙였지만, 나는 그에게 얼굴을 보일 수 없었다.

“질투하는 거 맞죠. 제이슨한테.”

질투가 맞다. 그가 오로지 나에게만 다정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니까. 단둘이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회사에서 만나니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내 감정의 무게가 조금 더 무거워졌음을. 애정의 파선이 점차 그 범위를 확대해 나가고 있다는 것도. 진동원과 같은 거리에 있는 그에게 내 변화가 확실히 느껴졌으리라는 것 역시.

“예준 씨.”

“질투 맞는 것 같아요.”

가까운 동료라고 해도 다정하게 웃어 주지 않았으면 했다. 다른 사람들을 전부 배제한다 하더라도 그의 모든 관계성이 나에게만 국한되기를 원했다. 이기적인 마음이었다.

“곤란한데.”

이호연이 내 등줄기를 쓸어내리며 낮게 속삭였다. 그의 숨, 목소리 하나하나에 반응한 가슴이 배 속 깊숙한 곳으로 수직 하강하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해 주면 좋겠습니까.”

나는 아무 대답 없이 꾸물대며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열이 올라 붉어진 얼굴로 이호연을 바라봤다. 그가 가까이 다가와 내 눈가에 입술을 내렸다. 쪽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춰 주었다. 어떻게 해 주면 좋을지 묻는 그는 웃음기 하나 없는 표정으로 오직 나만을 그 두 눈에 담고 있었다.

내가 원한다면 그는 재택으로 전환하여 집에서만 일을 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내가 원한다면 회사 동료들과 업무적 커뮤니케이션을 제외한 그 어떤 교류조차 하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그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정말 내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 줄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어깨를 밀어 내며 고개를 저었다.

“질투는 맞는데, 너무 극단적이에요. 사회생활은 해야죠.”

성격도 급하고, 극단적이고, 중간이 없는 이호연.

“사람들 기다리겠어요. 너무 오래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이호연이 나를 놓아주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의 손이 빠져나가며 말려 올라간 셔츠와 니트가 아래로 떨어졌다. 구김진 옷을 잠시 내려다보다 이호연의 손을 잡았다.

“…이따가, 저녁에요.”

밥 먹으러 가도 돼요? 웅얼대는 내 물음에 픽, 하는 가벼운 웃음이 돌아왔다.

“잘됐습니다. 라가불린을 언제 따야 하나 싶었는데.”

“라가불린?”

“위스킵니다. 16년산인데, 2003년부터 귀하게 취급되는 몰트 중 하나죠.”

“맛있어요…?”

“맛이라. 아무리 그래도 예준 씨보다 맛있을 리는 없겠죠.”

눈가를 찡긋하는 그를 제대로 올려다볼 수 없었다. 이름조차 생소한 각종 술들. 옅게 오른 취기에 정신없이 몸을 맡기고 그가 주는 쾌락에 여물도록 진저리 치는 밤. 그 밤은 어쩌면 전 세계의 모든 술을 다 마셔 볼 날까지 계속될 것 같았다. 나는 화끈거리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세 시간 남았네요. 끝나고 데리러 가겠습니다.”

이호연이 스마트 워치로 현재 시각을 체크했다. 그의 머릿속에 종료 시각을 알리는 로직이 추가되었음을 확인했다. 나는 키득거리며 화장실 칸을 벗어났다.

“연락할게요.”

고개를 돌려 그에게 인사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 라운지로 걸음을 옮겼다.

배너 디자인 시안 작업과 함께 업무를 하나씩 처리해 가며 퇴근 시간만을 기다렸다. 4시께에 사무실로 복귀하여 퇴근만 기다리는 동안 판교의 하늘은 다홍색과 파란색, 보라색과 진청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여러 개의 층으로 분리되었던 하늘의 파편들이 퍼즐처럼 맞물리며 완전한 밤으로 감겨들었다. 빛을 가둔 어둠이 소리도 없이 내려와 앉은 것이다. 언제나 같은 자리, 그늘에 감춰진 검은색 벤츠가 보였다. 그의 차가 보이자 한 걸음 한 걸음에 조급함이 실렸다.

조수석에 올라 그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오후 내내 가슴을 답답하게 하고 뱃속을 울렁이게 한 뜨거운 감정이 복받쳐 턱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분명한 건 아파서라거나 화가 났을 때의 울컥거림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복잡하게 엉킨 말들 중 하나가 입술을 달싹이자 새어 나왔다.

보고 싶었어요.

넘쳐흐르는 감정이 형태로 빚어져 공간을 가로질렀다. 느닷없는 내 고백에 이호연은 잠시 벙찐 듯 나를 보았다가 싱글거리며 웃음을 머금었다. 호연 씨는요, 하고 묻는 내게 그는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해요.”

다시 감정을 내비쳤다. 이호연과 연애를 시작한 날부터 지금까지 그에게 좋다는 표현을 제대로 해 준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꿀을 담뿍 머금은 약과라도 되는 것처럼 내 입술을 집어삼킬 때도, 그의 밑에서 주로를 질주하는 경주마가 되어 끝없는 쾌감에 몸서리칠 때 역시. 언제나 그가 주는 모든 것들을 받기만 하고 그에게는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전해야 한다는 생각에 좋다는 말만 머릿속에 가득 찼다.

“호연 씨가 좋아요.”

“저도.”

화답한 이호연이 내게 손을 뻗었다. 커다란 손바닥에 뺨을 비비며 눈을 감았다. 차게 식은 내 얼굴을 연신 쓰다듬는 그의 다정한 손길에 노곤함이 밀려들었다.

“매일 회사로 불러야 하나.”

이호연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감은 눈을 뜨며 그에게 왜냐고 묻자 ‘질투하는 정예준도 가끔은 좋은 것 같아서’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적당한 침묵을 지키다 그의 손끝에서 전해진 따스한 온도와 내 체온이 맞추어질 즈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호연 씨도 질투해요?”

“당연한걸.”

내 질문에 이호연이 픽, 바람이 새는 소리를 냈다.

“누구한테요?”

“미팅에서 본 예준 씨 직장 동료들. 특히 송기현 씨는 예준 씨랑 가까워 보여서 질투 나죠. 그리고 예준 씨 동창이나 동기도. 아니, 어쩌면 친한 사람들 모두에게 질투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호연의 진지한 어조에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의 사회생활을 걱정할 게 아니라, 내 사회생활을 걱정해야 할 때 같았다.

“기현 님은 그냥 동료예요.”

“압니다.”

“저는 호연 씨가 제일 좋아요.”

“그것도 알고.”

나는 그와 만난 후부터, 그와 지내는 내내 일정 수준을 상회하는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다. 비약일지 모르겠지만, 그의 존재가 남자든 여자든 제3의 생명체든 전혀 상관없었다. 그건 확신할 수 있었다. 만약 그가 인간의 탈을 쓴 휴머노이드였다면 그건 그것대로 웃기고 이상하다며 만나 보자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출발할까요.”

“응, 그래요.”

“배고프죠. 기다리는 동안 안주를 어떤 걸 만들까 생각해 봤는데, 안주가 무거우면 위스키 특유의 맛을 즐길 수 없으니 관자 버터구이를 메인으로 만들고 사이드로 카나페도 곁들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예준 씨는 어떻습니까.”

시동을 걸며 이호연이 저녁 식사 메뉴를 제안했다. 위스키에 관자 버터구이라. 뭐가 되었든 상관없었다. 늘 그렇듯 그의 음식은 맛있을 테니까.

“좋아요. 호연 씨가 관자 구이 만드는 동안 저는 카나페 거들게요.”

이호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체가 매끄럽게 앞으로 나아가며 어둠에 감싸인 사옥 단지를 빠져나갔다. 크래프톤 타워와 알파돔 타워의 투광등이 역 근처를 환히 밝히고 있었다. 차량 전방으로 쏘여진 빛에 내부가 환하게 밝아졌다. 이호연의 손등 위에 내 손을 얹었다. 깍지를 끼기도 하고, 그의 피부 위를 부드럽게 쓸기도 했다. 장난치듯 건드리는 나를 보며 그가 다정하게 웃음 지었다.

하루의 끝이 바로 앞에 있었다.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한 줄기 가느다란 선으로 실내에 스민다. 눅진해진 몸을 뒤채다 의식이 들었다. 이불 위를 수놓아 가로지른 희미한 불빛을 멍하니 응시했다. 몽롱한 눈이 느리게 주변을 훑었다. 허리에 둘린 단단한 팔이 시야에 들어왔다. 인지와 함께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몸속 깊숙이 채워졌던 정액과 뱃가죽을 적셨던 체액은 흔적도 없이 깨끗했다. 엉망으로 젖은 시트 또한 내가 쓰러져 잠든 사이 이호연이 전부 치운 듯했다.

이호연이 누운 방향으로 돌아누웠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그의 얼굴이 보였다. 감은 두 눈과 뻗은 콧날. 드리운 음영을 관찰하듯 들여다봤다.

“…깼어?”

잠긴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끄덕이는 고갯짓에 베개에서 사각대는 소리가 났다. 내 움직임을 파악한 이호연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직도, 있는 것 같아요.”

뒤에 아직도 그의 것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격렬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애욕의 시간이었다.

“지금이라도.”

그는 원한다면 기꺼이 품고 자게 해 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 어느 때라도 그의 것을 삼키고, 자극하고, 그가 쏟아 낸 정액을 먹어 치울 수 있도록 돕겠노라고. 내리깔린 그의 눈꺼풀이 천천히 열리며 새까만 고요 속에 내가 담겼다.

“지금 또 하면 출근도 못 해요.”

평일은 안 된다고 했던 말이 무색했다. 내가 먼저 저녁을 먹으러 가도 되겠느냐고 물었으니까.

“같이 휴가나 내고 쉴까요.”

“이제 휴가 없어…….”

작년 하반기부터 시작해 연차와 반반차를 몇 개를 썼는지 모르겠다. 해가 바뀌며 열다섯 개가 생기긴 했지만, 이렇게 그와 밤을 보내는 족족 쓰게 된다면 상반기가 지나기 전에 전부 소진하게 될 것 같았다. 이 이상 사용하게 된다면 아무리 나라도 이채선이나 본부장의 눈치가 보인다.

하와이 가서 쉬고, 좋은 시간 보내고 와요.

이호연에게 가까이 몸을 붙이며 속삭였다. 숨을 내쉴 때마다 그의 체취가 몸속 깊숙이 파고드는 기분이 들었다. 그 감각이 싫지 않다. 섞이는 느낌. 그에게 내가 섞이고, 나에게 그가 섞이는 이 감각을 무어라 설명하면 좋을까. 화학적으로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호연 씨.

응.

그냥.

그냥?

안아 주면 잘게요. 아침에 같이 출근해요.

꼬물꼬물 팔을 벌려 그의 가슴에 두르고 머리를 묻었다. 나를 품에 가두어 마주 안은 그가 내 머리칼과 등허리를 큰 손으로 쓰다듬으며 토닥토닥 다독여 주었다. 나 또한 그의 등을 규칙적으로 다독였다.

형이라고 불러 봐.

귓가에 속삭이는 그의 말마디가 달았다.

으응.

형이라고, 한 번만.

낮은 울림. 고동을 닮은 목소리에 느린 숨이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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