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아주세요 5
이호연과 사귀게 된 후 달라진 점은 많지 않았다. ‘우리 연애합시다’라는 언급으로 시작점에 대한 정의가 명확해진 것이지, 그와의 관계가 드라마틱하게 급변한 것은 아니었다. 나와 이호연의 관계가 ‘연인’으로 정의되고, 그를 만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연애’가 된 것뿐이었다.
굳이 변화를 꼽아 본다면, 내 안에서 이호연을 정의하는 감정의 스펙트럼이 조금 더 풍성해졌다는 것이다. 또한, 금요일 밤의 입맞춤은 ‘null’만 내뱉던 값을 ‘1’로 치환하며 자극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오직 이호연만을 호감의 대상으로 인지했기에 가능한 변화였다.
그 밖에도 공사 구분이라는 명목으로 선을 그었던 앱을 통한 연락이 아닌 개인 연락처로 바로 연락이 온다는 점과, 스킨십이 조금 더 농후해졌다는 점, 평일에 때때로 함께 식사할 것을 제안하거나, 영화표 내지 연극표를 들이미는 권유가 빈번해졌다는 점을 들 수 있었다.
아, 추가로, 내 캘린더에 그의 생일인 10월 1일이 국가 공휴일처럼 매년 알림으로 추가되었다는 점도.
그리고 나는 그가 주는 모든 외부 요인에 있어서 별도의 예외 처리 없이 Y만 존재하는 프로세스를 탔다.
언제나 그렇듯, 다시 한 주가 시작되었다.
“자, 또 돌아온 스크럼입니다. 다들 주말 잘 보내셨죠?”
이채선이 월요일 스크럼에 앞서 근황 토크를 시작했다.
“저는 이번 주말에 그냥 집콕했습니다. 날씨는 너무 좋은데, 같이 갈 사람이 없네요.”
그녀의 음울한 어조에 나를 비롯해 송기현과 정소랑, 김정우가 숙연하게 침음을 삼켰다.
“팀장님, 연애를 하세요….”
김정우가 눈치도 없이 질렀다.
“가만 보자, 정우 님 일이 모자란가….”
“연애가 문제가 아니지 싶습니다. 원래 가을 되고 하면 만사 귀찮은 법이에요. 집이 최고예요.”
그는 제 일이 늘어날까 봐 질겁하며 말을 보탰다.
“아니야, 정우 님 일이 좀 적은 것 같네. 정우 님이 다음 신규 프로젝트 키 잡는 걸로.”
이미 이채선은 마음을 굳힌 듯싶었다. 김정우의 얼굴에 절망감이 번졌다. 그러게 말이라도 안 하면 반이나 가지…. 나는 김정우를 애잔하게 바라보며 애꿎은 펜만 빙빙 굴렸다.
좌절하는 김정우를 보며 정소랑이 슬쩍 입을 열었다.
“일리 있는 말 같긴 해요. 연애하면 억지로라도 나가니까요.”
“그건 그렇죠.”
“팀장님, 염불 외워 보세요. 꾸준히 외우면 이루어져요.”
“염불?”
이채선이 귀를 쫑긋 세웠다. 저건 또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여. 나는 정소랑을 바라보며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전주 해장국에 이어 이건 또 무슨 궤변인가 싶어 상체를 바로 세우며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저 거의 1년을 핸섬 앤 톨러만 염불 외웠는데, 지금 남자 친구 나름 쓸 만해요. 팀장님도 영 앤 리치 앤 핸섬 앤 톨러 중 마음에 드는 걸로 염불 외워 봐요.”
잘생기고 키 큰 남자 친구를 만나고 싶다는 염불을 외워 실제로 잘생기고 키가 큰 남자 친구를 만나고 있다는 소리였다. 정소랑은 한 번에 네 개는 안 되는 것 같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당연하잖아. 민간인이 네 가지를 다 가진 사람을 만날 수 있겠어? 네 가지를 다 가졌다면 연예인이나 부유층이겠지. 두 눈을 깜박이다 문득 떠오르는 얼굴에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영은 아니지만, 리치 앤 핸섬 앤 톨러인 이호연이 있었다.
내가 하도 돈돈 거려서 이호연과 사귀게 된 건가. 벌레라는 매개가 있긴 하지만, 돈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만남을 이어 갈 수도 없었을 것이다. 처음으로 정소랑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나와는 반대로 다른 직원들은 김샜다는 얼굴을 했다.
“미덥진 않지만 오늘부터 외워야겠네요. 예준 님은 뭐 했어요?”
공이 나에게로 돌아왔다.
지난 주말, 나는 이호연과 과천 경마 공원에 단풍 구경을 다녀왔다. 한창이었지만 나들이를 나온 인파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한산한 공원 산책길을 거닐며 여유를 즐기다 올 수 있었다. 부는 바람에 따라 단풍이 꽃잎처럼 후드득 떨어지는 풍광. 산책로의 끝 즈음에, 단둘이 서서 맞는 단풍 비는 잊지 못할 절경을 선사했다. 이호연도 한국에서 맞는 첫 가을에 만족한 듯 내내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쌀쌀한 날씨라 벌레가 많이 보이지 않았고, 끽해야 개미 정도가 다였다. 드높아진 하늘을 한참이나 올려다보며 느긋한 한때를 보내다 판교로 넘어왔다.
나는 팀장의 눈치를 보았다. 솔직하게 경마 공원에 다녀왔다고 이야기를 해도 되겠지만, 하필 이채선의 다음 순번이라는 점이 좋지 않았다. 더구나 공식 집돌이인 내가 경마 공원을 다녀왔다고 한다면 이번에야말로 누구와 왜 갔는지 지겹도록 캐물을 것이 분명했다. 플레이짐 지옥에서 벗어난 후 이렇다 할 메인 업무 없이 개선 업무와 백업만 하고 있었지만 아무리 일이 없다고 해도 야근을 자처하는 마조히스트가 되고 싶진 않았다.
“저 집돌이잖아요. 팀장님처럼 집에만 있었어요.”
“휴, 그나마 동지가 있는 것 같아 다행이네요.”
이채선이 나를 보며 동지애를 드러냈다.
미안해요, 팀장. 이젠 나도 품절이에요. 희미하게 그녀를 향해 미소 지었다.
나는 속으로 당분간 연애의 연 자도 꺼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두어 번 곱씹었다.
집 계약 이후 언제 입주하나 싶었던 그는 도배가 끝나자마자 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벌레라면 질색을 하는 그였기에 도배하는 동안 역 근처의 호텔에서 머물 거라 생각했지만, 그는 입주 전까지 벽돌집에 머물렀다. 이유는 단순했다.
첫째로는 벽돌집과 SG플레이가 가깝다는 것이었고, 둘째로는 벌레를 직접 잡지 못하더라도 그들의 출몰이 만남의 구실을 톡톡히 해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퇴근하는 나를 불러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근사한 저녁 식사로 꼬신다거나, 한강 야경을 보러 가자거나, 값비싼 위스키나 주류를 선물 받았다며 함께 시음할 것을 제안하며 연락을 취해 왔다.
여하튼, 판교역 근처라고 하여 백현동이나 조금 더 밑으로 내려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초역세권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사 갈 곳이라며 처음 알려 주었을 때는 새삼 그의 재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3번과 4번 출구에서 걸어서 5분 정도였고, 엎어지면 코 닿는 거리에 백화점이 있었다. 부동산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역 근처의 아파트 단지라면 매수 시 비싼 값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그쪽을 잘 아는 김정우에게 슬쩍 물어본 결과 대략적인 시세를 가늠할 수 있었다. 김정우는 평수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손에 기본 20억은 쥐고 있어야 한다고 알려 주었다. 그는 알음알음으로 모기업인 SG솔루션의 이사가 그 아파트 단지의 50평대에 살고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나와 사귀는 사람이 이렇게나 돈이 많다니. 그의 재력이 대단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이렇게까지 많을 줄은 체감하지 못했다. 손에 20억이 있든 없든, 은행의 도움을 받았든 안 받았든, 20억을 당길 수 있는 사람이면 기본적으로 돈이 많은 사람인 것이다. 억이라는 단위 자체가 상상이 잘 되지 않아 이호연의 얼굴만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가늠조차 되지 않는 재산의 규모……. 정소랑 말이 맞았다. 나는 돈돈 거리다가 정말 돈 많은 사람을 잡게 된 거다.
“엄청 넓네요.”
휑한 거실을 둘러보았다. 새로 도배한 집 안은 깨끗하다 못해 광이 나는 듯했다. 처음 벽돌집 현관에서 느꼈던 감정을 데자뷔처럼 다시 느꼈다. 연회색의 벽지와 흠집 하나 없는 어두운 색감의 가구가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낙생원마을의 벽돌집이 외화에 나올 법한 이웃집 같은 느낌이라면, 이사한 아파트는 호텔이나 모델하우스 같은 느낌이 물씬 났다.
“신경 좀 썼습니다.”
그가 뿌듯해하며 나를 뒤에서 감싸 안았다. 묵직하게 누르는 무게감과 허리에 두른 팔이 단단하게 나를 옥죄어 왔다. 칭찬해 달라는 대형견 같아 손을 들어 그의 오른뺨을 쓸어내렸다. 아파트니까 벽돌집처럼 벌레가 대거 출몰하진 않을 것 같았다. 기본적인 방역도 되어 있을 테고 주상 복합도 아니니까. 이호연이 기뻐하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리 와 보세요.”
이호연이 넋을 잃고 인테리어를 살피는 나를 안으로 이끌었다. 거실만큼이나 널찍한 침실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무슨 침대가 저리 커? 내가 아는 킹사이즈가 저 사이즈가 맞나? 더 큰 거 같은데? 놀란 내가 입만 벙긋거리고 있자 그가 내 손을 감싸 쥐었다.
침대맡에 앉은 이호연이 가만히 나를 올려다봤다. 키도, 체격도 큰 사람이라 앉은키도 컸다. 내 가슴까지 오는 그의 얼굴에 기대감이 번져 있었다.
“어떤 것 같은가요.”
이호연이 내게 물었다. 침실이? 아니면 이 집이? 나는 두 눈을 깜박였다.
“음, 집이 정말 깨끗하고 넓어요. 일단 벌레는 안 나올 것 같아요.”
내가 눈을 데굴 굴리며 말하자 그가 조금 실망한 듯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뭐야,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건데. 나는 당황하여 그의 까만 눈을 들여다보았다. 침대도 아니고, 집도 아니고, 벌레도 아니면, 설마…, 설마 아니지…?
“누나네 집은 전에 둘이 누웠을 때 작았던 것 같아서 큰 걸로 했습니다.”
그가 내 허리에 팔을 두르며 가슴에 제 머리를 비벼 왔다. 침대 맞구나!
“…두, 둘이 굴러도 너끈하겠어요.”
이런 미친. 굴러도 너끈하겠다니. 오늘따라 내 입이 자아가 강한 모양이다. 아무 말이나 내지르고선 불에 덴 듯 홧홧해진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굴러 볼까요?”
그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짙게 깔린 음성에 묻어난 선명한 감정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맙소사. 아냐, 진지하게 받지 말라고. 게다가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단 말이야. 달아오른 얼굴을 어쩌지 못하고 바짝 긴장하여 어깨를 굳혔다.
“역시…, 귀엽네요. 예준 씨는.”
“제, 제가요…?”
살면서 귀엽다는 소리는 유년 시절을 제외하고 들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가끔 주변인들로부터 귀엽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지만, 전부 친구들이 나를 놀리려고 한 말이나 다름없었는데.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로는 입이나 안 열면 다행이라는 소리만 간간이 들었다. 내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던 이호연이 나를 당겨 제 허벅지에 앉혔다. 단단한 넓적다리가 흔들림 없이 안정적으로 내 몸을 받쳤다. 그가 턱을 들어 각도를 맞추더니 입술을 겹쳐 왔다. 아랫입술에 스치는 체온이 짧게 머물렀다 물러났다.
“우리 귀여운 예준 씨.”
속살거린 그가 짙은 웃음을 머금었다.
진짜 귀여워하는 거 맞는 거지…? 농익은 과실처럼 뭉개진 숨은 전혀 나를 귀여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어떤 의미로 귀여운 거냐고 다시 묻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정말 매트리스 위를 구를 것만 같아 말을 삼켰다. 당황한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눈만 굴리자 이호연이 빈틈없이 나를 품에 가두었다. 그러면서 그는 남자를 처음 사귀는 나와 속도를 맞추고 싶다고 덧붙였다. 머뭇대다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헛웃음이 번졌다. 만나 보자던 순간부터 입을 맞추고, 단둘이 있을 때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비비적거리고, 떨어질 생각은 하지도 않으면서 속도를 맞추겠다는 말을 내뱉는 건 뭐야. 의미가 분명한 기대와 믿음이 그의 눈동자 너머에 슬몃슬몃 보였다. 그렇게나 내가 좋은 걸까.
“오늘은 안에서 먹을까요? 양갈비를 좀 사 왔는데, 구워서 와인이랑 같이 먹읍시다.”
“무슨 와인인데요?”
나는 민망한 마음을 감추며 그의 장단에 맞춰 말을 돌렸다.
“이번엔 샌드맨으로 준비했습니다. 드라이가 낫긴 한데, 예준 씨는 포트 와인 좋아하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호연표 양갈비 구이에 기대감을 드러내며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