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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아주세요 3 (3/25)

잡아주세요 3

웹 버전이 배포된 후, 상용 환경에서의 디자인 QA까지 완료하며 프로젝트가 마무리되었다. 한동안 고생한 나를 위해 이채선은 후속 디자인 일정을 최소 일주일 정도로 산정하여 내 숨통을 트여 주었다. 프로모션 페이지 추가 건과 컴포넌트 작업이 몇 벌 남긴 했지만, 기획팀과 협의 후 모조리 뒤로 미뤄 버렸다. 느슨해진 김에 다음 순번으로 휴가를 다녀오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막상 쉬려니 갈 곳도 없고 귀찮기도 해서 최대한 끝까지 미루기로 했다.

업무적으로 여유가 생기면서 퇴근 시간도 7시 정각으로 맞춰지게 되었다. 나는 7시를 기점으로 주변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맥주 번개 어때요? 날씨 좋아서 야외에서 먹기 딱인데.”

김정우가 고개를 빠끔히 내밀며 물었다.

“저 오늘 다른 일 있어서…, 다음에 먹어요.”

젠장, 맥주 마시기 딱 좋은 가을밤인데, 벌레나 잡으러 가야 하다니. 나는 시무룩한 표정을 짓곤 사무실을 벗어났다. 회사 로비를 가로질러 밖으로 나와 이호연의 집 방향으로 걸음을 뗐다. 서늘한 가을바람이 두 뺨을 스쳤다. 맥주 번개, 재밌겠다. 원래 이런 날엔 야외에서 노가리나 까는 게 좋은데. 끙, 탄식을 내뱉으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이호연의 집에 도착한 나는 문을 똑똑 두드렸다. 문을 열고 나온 그가 나를 반갑게 맞았다.

“이번엔 작은가 보네요. 만 원이면.”

오랜만에 만 원짜리였다. 함께 집으로 들어서며 그는 내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작으면 뭐 합니까. 날개가 있는데.”

이호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긴, 벽이나 바닥에서 기어 다니는 것보다 점프하거나 날아다니는 게 더 싫을 것 같긴 했다. 그에게 훨씬 위협적으로 느껴질 테니까. 만 원짜리라고 한 걸 보면, 지난번 그 깔따구처럼 큰 건 아닌 것 같았다. 날개가 있을 만한 게 뭐가 있더라. 파리? 아니면 모기인가? 올해 모기를 못 본 것 같기는 한데….

복도 끝에서 걸음을 멈춘 내게 그가 턱짓했다.

“아, 2층이에요?”

“네, 2층 욕실에서 나왔습니다.”

2층에 트랩이나 약을 많이 쳐 두지 않았던가? 참 신기한 집이란 말이지. 나는 먼저 앞장서서 계단을 밟았다. 한 계단씩 올라서며 말을 이었다. 욕실에는 트랩이 없는지 물었고, 욕실이면 하수구나 환풍구를 통해 빠져나갔을 수 있다며 그를 달랬다.

이번엔 나방이었다. 여름도 다 지났건만, 웬 나방? 다시 벌레를 마주한 이호연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벽에 붙은 작은 크기의 나방을 바라보았다. 너도 참 팔자가 기구하다. 우리가 2층으로 올라오기 전에 나가지 그랬냐. 나 혼자 사는 집이었다면 저 정도 사이즈는 방생했을 텐데, 이호연의 집이니 죽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몸을 틀어 손을 내밀자, 이호연이 물티슈 두 장을 뽑아 건네주었다.

“혹시 뭔가 밟고 올라갈 만한 게 있을까요?”

팔을 뻗어도 안 닿을 것 같은 위치라 밟고 설 무언가가 필요해 보였다.

“딱히 없는데…, 아, 제가 올려 드리겠습니다.”

“…저를요?”

아니 네가 키가 큰 것도 알겠고, 덩치도 꽤 되는 걸 알고는 있는데…. 얼떨떨하게 선 내 뒤로 그가 바짝 다가섰다.

“으앗, 자, 잠깐.”

지금 말고! 내적 비명은 말로 이어지지 못했다. 상체를 굽힌 그가 내 허리춤과 허벅지를 양팔에 가두며 번쩍 들어 올렸다. 붕, 허공에 뜬 감각에 몸이 바짝 긴장했다. 나는 왼팔을 뒤로 빼서 이호연의 어깨를 짚었다.

“지금이 아니에요?”

아니 신호를 하고 들어 올려야지, 깜빡이도 없이 이러기야?

“꽉 잡아 줘요. 저 고소 공포증 있단 말이에요.”

너는 벌레가 무섭지? 나는 내 다리가 지면에 안 붙어 있는 게 더 무섭다. 일그러진 얼굴로 벽에 붙은 나방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물티슈로 간단히 처치가 가능한 정도라 순식간에 해치울 수 있었다.

“잡았어요.”

“죽은 거 맞습니까?”

“네, 한 방에 보냈어요. 이제 내려 주세요.”

빨리 내려 줘. 무섭다고. 벌레를 죽인 물티슈를 쥔 주먹이 하얗게 질렸다. “잠시만요.” 이호연이 나를 들어 올렸던 것처럼 허리를 굽히려던 순간이었다. 기우뚱, 균형이 깨지며 내 몸이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으, 으악!”

크게 터진 내 비명과 함께 몸이 아래로 쑤욱, 내려갔다. 머리를 위에 두고 온 것 같은 아찔한 감각을 느끼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분명 큰 충격이 가해지리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내 몸에는 그 어떤 충격이나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슬며시 눈을 떠 멀뚱멀뚱 이호연을 쳐다보았다. 바로 가까운 곳에서 나를 안은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제가 좀 더 힘줘서 잡았어야 했는데, 미안합니다.”

그가 눈매를 떨어뜨리며 사과했다. 숨결이 느껴질 만큼의 거리라 화들짝 놀라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괜찮, 괜찮아요. 일단 이것 좀 놔주세요.”

얼굴이 터질 것처럼 뜨거웠다. 일단 그의 품에서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다. 이호연은 내 부탁 아닌 부탁에 나를 세공품이라도 다루듯 욕실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 주었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손을 내밀었다. 강한 힘에 이끌려 몸이 일으켜 세워졌다. 나 진짜 운동이라도 해야 하나. 너무 쉽게 들어 올리니까 내 몸이 하찮게 느껴지네.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헬스나 PT라도 끊어 볼까…. 그나저나, 이 인간은 뭘 먹고 이렇게 힘이 센 거야? 미국에서 살다 오면 다 이렇게 벌크업 되는 거야? 나도 마르긴 했지만 종이 인형까지는 아닌데, 이호연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것 같았다.

잡은 벌레를 손에 쥐고 이호연과 함께 1층으로 내려왔다. 흠, 확실히 이젠 벌레를 잡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단 말이지. 삼시 세끼랑 번개 이후로는 큰 벌레가 나오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아마 날 더 추워지면 안 나올 거예요.”

이호연에게서 만 원을 받아 주머니에 챙겨 넣으며 말했다.

“다행이네요.”

우리나라에 겨울이 있는 게, 사계절이 뚜렷한 게 얼마나 다행인 일인지. 만약 사계절이 없었다면 이호연은 1년 내내 엄청난 크기의 벌레와 곤충들에 시각적 테러를 당하며 정신적으로 고통받았을 것이다.

“저 가 볼게요.”

“잠깐만요.”

이호연이 집을 나서려는 내 팔을 덥석 잡았다.

“네?”

무언가 더 할 말이 남은 건가? 벌레는 잡았고, 이제 집에 갈 시간인데. 내가 이호연의 얼굴을 응시하며 기다리자 머뭇거리던 그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같이 식사하시겠어요?”

“네…?”

“어차피 가셔서 식사하셔야 한다면, 같이 먹어도 좋지 않을까 싶은데.”

이런 적이 있었던가. 그가 지금까지 줄곧 식사 대접을 하겠다고 권해 오긴 했지만, 이건 무언가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기억을 더듬던 나는 이호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싫은가요?”

대답이 바로 돌아오지 않자 그가 내 눈치를 보듯 재차 물었다.

“여기서 먹어요?”

내가 손을 들어 보이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판교역 근처에서 드시죠. 다 먹고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나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조금 늦게 들어가는 게 귀찮다는 생각이 순간 들긴 했지만, 두 발 편하게 집까지 데려다준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오늘은 뭐 먹어요?”

“배 많이 안 고프면, 시간이 좀 늦었으니 펍은 어떠신가요.”

콥샐러드가 맛있는 펍이 있다며 그가 설명을 더했다. 버거도 있고, 피자도 있어서 간단한 식사가 가능한 곳이라고. 아메리칸 스타일의 펍이라며 자신이 자주 간다고 했다.

“그런데 펍이면 호연 씨가 술 못 마시지 않나요?”

같이 마시는 게 좋은데. 이호연이 취한 모습을 한 번쯤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번엔 나 혼자 취해서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게 조금 아쉽기도 하고. 내 목소리에 아쉬움이 번지자 이호연은 제 턱을 매만지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같이 마실까요?”

“저 혼자 마시기 조금….”

“그럼, 이렇게 하죠. 같이 마시고, 대리 불러서 예준 씨 집 들러서 예준 씨 내려 드리고, 저는 다시 돌아오는 걸로.”

해결책이랍시고 나온 게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픽, 하고 실소를 머금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마시자는 건 아니었는데. 판교에 사는 양반이 고작 십오 분 거리를 대리를 불러서 갔다가 다시 판교로 돌아온다고? 돈을 공중분해 하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호연 씨만 피곤하잖아요. 그럼 그냥 나중에,”

“괜찮습니다.”

그가 내 말을 가로채며 완강하게 답했다. 이상한 데에서 고집을 부리는 그를 한참이나 바라보다 이내 설설 고개를 저었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내 돈이냐? 네 돈이지.

이호연이 차 키를 챙긴다며 주방 의자에 걸쳐 둔 재킷을 가지러 갔다. 나는 그를 기다렸다가 함께 현관까지 걸어 나왔다. 이 집에서 같이 외출을 하는 것은 또 처음인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하도 들락거려서 그런가, 이 집에 좀 익숙해진 모양이다.

삐빅. 집 바로 앞에 세운 검은색 벤츠의 전조등이 강하게 켜졌다. 이호연이 운전석에 오르는 것을 보고 나도 조수석에 올랐다.

“…오늘이 금요일이면 좋았을 것 같네요.”

할까 말까 망설이다 나지막이 말을 흘렸다. 아무리 이호연이 내게 후한 편이라 하더라도 양심이 찔리는 건 어쩔 수 없다. 금요일이면 하룻밤 재워 달라고 할 수 있지 않겠나 싶어서. 굳이 야탑까지 갔다가 판교로 돌아오는 것보다, 둘이 같이 움직이는 게 비용이 절감되지 않을까 싶었다.

내 낮은 목소리에 이호연이 고개를 돌렸다. 나를 한참이나 응시하던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그럼 이번 주 금요일에 시간 괜찮으신가요?”

어두운 차 안에서 그의 눈동자가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왜요?”

내 물음에 이호연의 모양 좋은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영화표가 생겼는데, 같이 갈 사람이 없어서요. 영화 보고 같이 또 술 마시면 좋겠습니다.”

이호연이 느긋한 어조로 대꾸하며 주차된 차를 후진하여 빼냈다. 주택 단지를 서행하던 차량은 언덕을 넘어가자 속력을 차츰 올리기 시작했다. 영화라. 최근 본 영화가 뭐였었지. 고전이었던 영화가 재개봉하면서 혼자 보고 온 게 마지막이었던 것 같은데, 가장 최근 것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고민하다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간 제가 많이 얻어먹고 했으니까, 영화 보고 나서 술은 제가 살게요.”

이번엔 내가 사는 게 맞는 것 같았다. 계속 얻어먹기만 해서는 나도 불편하고 미안하니까.

금요일이 되어 나는 이호연과 약속한 영화 시간에 맞추어 판교역 앞의 백화점으로 향했다.

영화는 SF 장르로, 숲에 뒤덮인 멸망한 지구가 배경이었다. 모든 것을 뒤덮은 초록. 화성으로 이주해 살아남은 인류가 지구를 관찰하기 위해 탐색대를 보내며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멸망 전 기록으로 남은 과학의 보고寶庫를 찾아 대원들이 투입되고, 기이한 현상과 맞닥뜨린 그들은 포효하는 숲과 조우하게 된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전형적인 클리셰를 담고 있는 영화였으나, 영상미와 배우들의 연기가 뛰어나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어땠습니까.”

“어, 음…. 어려운데, 재미있었어요. 호연 씨는요?”

“개인적으로 스릴러와 SF를 좋아해서 재밌었습니다.”

이호연이 눈매를 휘며 웃었다. 평소에는 지나치게 담백해 보이는 그의 영화 취향이 스릴러라는 데에 은근히 놀랐다. SF까지는 공학도이자 개발자인 그가 선호하는 것이 이해가 갔지만, 스릴러가 취향이라니. 나는 딱히 취향을 두고 영화를 보는 타입은 아니어서, 이호연의 영화에 대한 견해를 들으며 두 눈을 빛냈다. 그와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며 백화점을 벗어나 1번 출구에 위치한 맥줏집을 찾았다.

“여기 코젤 다크 맛있어요.”

천장에서 떨어지는 어둑한 조명과 테이블마다 놓인 양초의 불빛이 거불거리고 있었다. 은은하게 들려오는 재즈 선율, 북적이는 사람들의 말소리를 지나쳐 안쪽 빈자리로 들어갔다.

흑맥주를 주문하고 잠시 끊겼던 대화를 이어 갔다. 삼시 세끼를 먹었던 때와 같았다. 쉼 없이 이어지는 다양한 주제. 인공 지능은 물론 새로 출시된 소프트웨어 등 IT 동향이나 철학이나, 인문학적으로도 그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전부터 느꼈지만, 참 아는 게 많은 것 같았다. 파편화된 지식들을 잘 활용한다고 해야 하나.

“예준 씨는 평소 주말에 뭘 하십니까.”

잔을 들어 올린 그가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눈을 빛냈다.

“저요? 저는….”

그동안 주말에 뭘 했지? 한 달에 한 번 정도 부모님을 뵈러 본가에 가고, 그 외에는 포트폴리오를 정리하거나 와인을 마시고 책이나 읽으며 한량처럼 보냈다. 친구들과 약속이 생기면 그 자리에 나갔다 오고, 지인들과 불금 내지 불토를 보내며 밤새 게임을 하기도 했다. 흔하디흔한 일상이지, 뭐.

“게임할 때도 있고, 약속 있으면 나가고. 그게 다예요.”

“게임 좋아하십니까.”

“네, 슈팅 게임도 좋아하고 아케이드나 퍼즐, 캐주얼도 가끔씩 하고…. 바빠지기 전에는 리니지에 빠져서 친구랑 밤새 했던 것 같아요. 두 시간인가 자고 쩔어서 회사 가서 일하고, 또 게임하고. 모바일도 하긴 하는데, 자동 사냥이 돼서 그런지 성취감이 좀 떨어지긴 하더라고요.”

모바일보단 PC를 더 선호했고, 전자 게임 클라이언트를 통해 그때그때 끌리는 게임을 친구들과 하곤 했다. 평소 관심이 많았던 분야였기에 최근 한 게임들에 대해 줄줄 늘어놓으며 조잘거렸다. 지인들과 분대를 만들어 배틀로얄을 즐기기도 했고, 트럭 운전 게임을 결제해 실제처럼 운전을 해 보기도 했다.

“말하고 보니 잡식에 가까운 거 같네요. 가리는 게 딱히 없어서….”

멋쩍게 뺨을 긁적였다. 취향의 폭이 넓어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불분명해 보이진 않을까 싶었다.

“관심사가 많은 건 좋은 겁니다.”

지루할 틈이 없다는 증거죠. 입매를 말아 올리는 그를 보자 괜히 부끄러워지는 기분이었다. 찰나의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입을 뗐다.

“호연 씨는요? 주말에 뭐 하세요?”

“저도 비슷합니다. 게임도 하고, 한국 온 김에 지인들도 보고. 예준 씨처럼 그날그날 끌리는 걸 합니다.”

이호연도 나와 비슷하구나. 상류층의 삶을 살 것 같은데, 특별할 것 없이 무난한 날을 보내고 있었다. 저번에 보니 요리를 좋아하는 것 같아 ‘요리는요?’ 하고 물었다. 그는 고개를 설설 저었다. 아, 벌레 때문에 그건 원치 않게 즐기지 못하고 있는 거구나. 피식, 절로 웃음이 나왔다. 내 웃음의 의미를 알아차린 그가 조용히 희소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김에 인디 게임이라도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인디 게임이요?”

귀가 쫑긋 서는 것 같았다. 뭐? 이호연이 인디 게임을 만든다고?

“네, 아는 후배가 게임 시나리오를 쓰는데, 괜찮은 시나리오가 있다면 같이 해 볼까 생각 중입니다.”

우와, 게임이라니. 나는 눈을 빛내며 그를 보았다. 게임 UI 디자인을 해 보고 싶어 관련해 포트폴리오를 준비했던 적이 있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회사들에 지원했었지. 기왕 판교로 회사를 옮기는 김에 게임 회사에 다니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바람에 부스러져 떨어지는 낙엽처럼 이력서를 넣는 족족 낙방을 면치 못했다. 3년 이상의 업계 종사자라든가 석사 이상이어야 한다는 우대 조건 앞에서 서류 합격의 장벽은 지나치게 높았다. 신입으로 입사해도 됐지만, 기대한 연봉도 아니고 그간의 경력을 쳐 주지 않아 밑바닥부터 다시 쌓아야 해서 결국 포기했다.

“멋있어요. 게임이라니.”

맥주를 홀짝이며 부러움을 내비쳤다. 미국에서 오래 생활한 걸로 알고 있는데, 국내로 돌아와서 바로 컨택 가능한 지인들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지인들과 무언가 합작하여 만든다는 것이 꼭 다른 세상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예준 씨가 GUI셨죠. 혹시 게임 쪽도 해 보신 적 있습니까.”

이호연이 물었다. 나는 맞은편에 앉은 그를 멀뚱히 바라보기만 했다.

“포트폴리오로 혼자 만들어 본 적은 있는데…, 현업으로는 해 본 적 없어요.”

어물어물 말미를 흐렸다.

“플레이짐 UI 하셨다고 했죠?”

부끄럽게 왜 자꾸 물어봐요. 대충 고개를 주억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색을 쓰는 데에 있어서는 크게 부족한 실력이 아니라 생각했지만, 꼬치꼬치 캐묻는 것 같아 쑥스러워졌다. 애꿎은 맥주잔만 쥐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나중에 포트폴리오 보여 주세요. 게임 여러 가지 해 보셨기도 하고, 시나리오가 나와 봐야 알겠지만, 잘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선뜻 들어온 제안에 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같은 UI라고 하더라도 게임은 결이 달랐다. 더구나 이호연이 하는 말로 보아, 게임 시나리오를 쓰는 동생이라는 사람도 현업 같은데…. 웬만한 스펙의 개발이 가능한 이호연과 시나리오 라이터인 지인, 그리고 앞으로 꾸려질 다른 팀원들도 난다 긴다 하는 실력자들일 것이 뻔했다.

빈말이겠지? 이호연은 꽤 신사적인 사람이니까. 요사이 종종 보게 된 내가 게임에 관심이 많아 보이니 그냥 흘린 말일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어물쩍 넘어가며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보여 주겠노라 대꾸했다.

몇 잔을 마셨는지 모르겠다. 금요일이라는 심리적 안도와 함께 이호연이 차를 두고 와서 그런지 더 편하게 술을 마실 수 있었다. 계산을 마치고 술집을 벗어나며 청명한 바람을 들이마셨다.

“덕분에 흑맥주 맛있게 먹었네요.”

이호연이 눈매를 접어 웃었다.

“저도 오랜만이라 맛있었어요.”

이호연을 마주보다 고개를 갸웃했다. 이대로 헤어지나? 저번에 생각했던 대로 하룻밤 정도 같이 놀면 좋겠다 싶었는데, 대뜸 집에 가서 더 마셔도 되는지, 자고 가도 되는지 말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데려다 드릴게요.”

알딸딸하게 달아오른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는 이호연을 만류했다. 그의 차에 오르는 대신 택시를 잡고 손을 휘휘 저었다. 만취 상태도 아니고, 다 큰 성인 남자가 자정도 안 넘은 시각에 집에 못 들어갈 리가 없지. 택시를 앞에 두고 몇 차례 실랑이 후 그를 뿌리치고 택시에 올랐다.

속력을 높인 택시가 판교를 벗어날 무렵, 그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다음에 또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이호연]

다음에 또 보자는 이호연의 메시지에 아쉬움이 좀 가시는 듯했다. 또 보게 되면 그땐 당신 집에서 한잔 하자고 해봐야지.

어쩐지 공과 사의 경계가 모호해진 것 같았다. 최근, 벌레를 잡아 달라는 모아 알림 메시지로 시작해서 조심히 들어가라는 문자 메시지로 하루가 끝이 나고 있었다. 오늘은 시작도 끝도 전부 사적인 연락이었다.

“…친구라도 사귄 기분이네.”

나는 술기운이 번지는 눈가를 손등으로 비볐다.

**

오전부터 더럽게 가지 않는 시간을 바라보며 퇴근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누군가 내 시간만 뒤로 감기를 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하루가 길게 느껴졌다. 아니면 내 하루의 끝을 손에 쥐고 팽팽히 잡아당긴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더딜 리가. 졸음이 몰려드는 3시부터는 정말이지 어찌나 시간이 가지 않던지, 졸린 눈만 끔벅대며 연신 하품을 내뱉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중간에 휴게실에서 쪽잠을 자고 오기도 했다. 뭘 한 것도 없는데 피곤함이 얼룩덜룩 몸을 뒤덮은 것 같아 당장에라도 퇴근 도장을 찍고 싶었다.

디자인 작업을 끝내고 컨펌을 올린 시각이 6시 40분. 이십 분 후면 퇴근이라 적당히 눈치를 보며 일하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메일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크롬 창의 탭을 하나씩 종료했다. 설마 지금 뭔가 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오진 않겠지. 느리게 움직이는 분침이 정각에 다다르기만을 숨죽여 기다렸다.

“끄으응.”

팔을 뻗어 길게 기지개를 켜며 찌뿌듯한 허리를 세워 앉았다.

“예준 님, 오늘 바로 가요?”

맞은편 김정우가 물었다. 나는 모니터 사이로 얼굴을 빠끔히 내밀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근로 시간만 채웠을 뿐인데도 수명이 여덟 시간쯤 줄어든 기분이라고요. 나는 심신 안정을 위해 가급적 빨리 떠나고 싶다는 표정으로 현재의 상태를 대변했다.

“정우 님은요?”

“케어랩 배너 해야 하는데. 예준 님 식사하시면 같이 먹으려고 했거든요. 어쩔 수 없네요.”

김정우가 급하게 들어온 배너 디자인을 처리해야 한다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하필 오늘은 송기현도, 정소랑도 자리에 없었다. 두 사람 다 SG솔루션 쪽에 IP 가이드를 듣기 위해 5시부터 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웬만하면 밥 친구가 되어 주겠지만, 입사 후 1년에 가까운 기간을 SG 10층 붙박이로 지내서 그런지 한동안은 야근 밥이고 뭐고, 1분 1초라도 일터와 멀어지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특히 지난 배포 후 매너리즘이라도 온 사람처럼 모든 게 지치고 지겨웠다. 김정우가 고개를 돌려 이채선을 바라봤다. 그러나 이채선도 선약이 있다며 곤란한 낯으로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죠. 개발팀에 물어봐야지.”

“일호 님이나 아영 님한테도 물어봐요. 기획팀은 거의 매일 하긴 하니까.”

흘끗 시선을 뒤로 보냈다가 거둬들였다. 김정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6시 53분. 빨리 7시가 되면 좋겠는데, 오늘따라 시간이 참 더딘 것 같다.

지잉. 뒤집어 둔 휴대폰 진동이 짧게 울렸다. 뭐지? 기기를 들어 액정에 보이는 알림 창을 내려다보았다.

[<모아> Bugkiller 님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이호연?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앱으로 진입해 그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3만 원. - Bugkiller]

[예준 씨, 아직 퇴근 전이시죠. - Bugkiller]

알면서 묻냐. 가느스름하게 치뜬 눈을 파르르 떨었다. 공수표가 아니라 부도 수표를 남발했구나, 내가. 주에 한 번씩 생존 신고하는 것도 아니고. 그 집이 무슨 이동 포탈이라도 되는 것처럼, 벌레들이 꼭 거기를 통과해야만 하는 이유라도 있는 것 같았다. 그냥 빙 둘러서 넘어가면 얼마나 좋냐고. 너희는 목숨 연명하고, 나는 편히 퇴근하고. 종류와 크기가 이렇게 다양할 수가 있는 거냔 말이야.

들어찬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 됐다, 됐어. 내가 아니면 안 될 것처럼 구는 사람을 매정하게 뿌리칠 수도 없고. 단순히 돈을 받고 벌레를 잡아주는 사이라고 하기엔 이미 그와의 유대가 깊어져 버렸다. 지난주에 같이 본 영화도, 함께 나눈 대화도 재미있었고.

지금 힘들고 피곤한 건 회사라는 공간에 붙들려 있는 이 상태인 거였다. 어쩌면 퇴근을 하고 회사 문을 나서는 순간, 로그아웃이라도 한 것처럼 홀가분해질지 몰랐다. 그래, 회사란 공간이 문제인 것 같아. 속으로 꿍얼대며 사무실 출입문을 흘끔 보았다. 출근하여 저 문을 넘는 순간 체력도 바닥을 찍는 것 같고, 괜히 무기력해지는 것 같단 말이지. 퇴근만 하면 그럭저럭 기분도 나아지고 지인과 약속이라도 잡아 볼까 싶기도 하니까.

[제가 예준 씨 회사로 갔다가 같이 오는 건…. - Bugkiller]

채팅창에 바로 다음 메시지가 추가되었다. 그의 떨림이 텍스트로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 같았다. 뭘 여기까지 와요. 오는 동안 출몰한 벌레가 2층으로 올라가거나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숨어 버리면 어떡하려고.

-끝나자마자 바로 갈게요. 보고 계세요.

나는 그에게 답장을 보내고 이채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채선 님, 저 오늘만 5분 정도 일찍 나서도 될까요?”

“응? 지금이 55분이네요. 그래요, 고생 많으셨어요. 내일 봬요.”

이채선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슬리퍼에서 운동화로 갈아 신었다. 고마워요, 팀장. 눈짓으로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며 통로를 가로질렀다.

-가려고 나왔어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출입문을 벗어나며 이호연에게 재차 메시지를 보냈다.

이호연이 현관문을 열어 주며 안도한 기색을 내비쳤다. 늘 그렇듯 실내화로 갈아 신고 거실로 들어섰다. 어디에 있는지 묻는 내게 그는 마치 범죄 현장을 감식한 과학 수사 팀원처럼 벌레가 현재 거실에 있는 것으로 확인되며, 누나의 부탁으로 새로 들인 수납장 근처에 있노라 답했다. 3만 원 정도는 항상 물티슈로 잡았었기에 이번에도 물티슈와 휴지를 함께 준비했단다. 이호연은 경건한 의식을 치르기라도 하듯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복도 끝 바닥에 둔 물티슈 곽을 내게 건네는 그를 보며 설핏 웃음을 머금었다.

“금방 잡아요. 아시잖아요.”

그를 달래기 위해 부러 다정한 어조로 말을 흘렸다.

나는 처음 그의 집에서 콩벌레를 잡았을 때처럼 몸을 낮추며 무릎을 굽혔다. 무릎걸음으로 수납장 가까이 다가가 주변을 꼼꼼히 살폈다. 짙은 원목의 2단 수납장 서랍을 하나씩 열어 보며 벌레가 숨은 위치를 파악하려 두 눈을 빛냈다.

“…있습니까?”

초조한 이호연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수납장 근처 맞는 거죠?”

나는 서랍을 다시 살펴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안 보이지.

“문 열어 드리기 전까지만 해도 있었습니다.”

힘없는 그의 음성에서 느껴지는 곤란함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서랍을 완전히 다 빼 볼까. 가장 밑 칸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손에 쥔 물티슈를 옆에 두고 밑단을 끄집어냈다. 마감 처리가 덜 된 모양인지 부스러기가 하얗게 일었다. 가늘게 뜬 눈으로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하얀 먼지 사이에 진갈색의 벌레가 미동조차 없이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저게 무슨 종이지? 수납장 그늘에 가려져 종류가 가늠되지 않았다. 그나저나, 잡힐 걸 알았던 걸까? 그 짧은 순간 구석으로 몸을 피한 것이 용했다.

“호연 씨, 찾긴 했는데…, 너무 구석이라 수납장을 다 뒤집어야 할 것 같아요.”

내가 산 가구도 아니고, 아무리 벌레를 잡기 위함이라지만 내 마음대로 뒤집을 수는 없어 이호연을 돌아보았다.

“뒤집어도 괜찮습니다. 잡을 수만 있다면.”

뒤집는 과정에서 엎어지거나 흠집이 나도 괜찮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그의 대답을 듣자마자 팔을 뻗어 바로 선 가구를 앞으로 기울였다. 균형이 무너진 가구를 비스듬히 반쯤 눕혀 살살 흔들었다. 이 집에서 별짓을 다 해 보네. 번지려는 실소를 꾹 참아 견디고 벌레가 조금이라도 자극을 받길 바라며 조금 더 힘주어 흔들어 보았다.

푸슬푸슬 거실 바닥으로 흩날리는 부스러기 사이로 톡, 하고 자그마한 벌레의 몸이 떨어졌다. 나는 기울였던 가구를 바로 세우며 오른편에 두었던 물티슈를 집어 빠르게 벌레 위를 덮었다.

평소처럼 벌레를 압박해 죽이려 손끝에 힘을 주었다. 짓눌림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그 순간, “윽.” 하고 눈가를 찡그렸다. 이게 무슨 냄새야. 알 수 없는 역한 냄새가 코를 찔러 왔다.

“호연 씨, 이거 노린재인 거 같아요.”

이 특유의 냄새. 노린재 냄새는 맡아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늘 익충만 잡다가 이렇게 해충을 보게 되니 잘 죽였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가, 이젠 하다 하다 이런 물가에 사는 종까지 이 집에서 맞닥뜨렸다는 현실에 어이가 없어졌다. 반대편 손으로 코를 막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방생하는 쪽으로 권해 볼 것을. 복도 벽에 기댄 이호연도 코를 막고 선 채로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짜증과 분노, 역겨움과 놀라움이 고루 섞인 잿빛 눈동자가 바람 앞 촛불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으으. 이거 어떡하지.”

“…….”

“호연 씨, 일단 2층으로 올라가 계세요. 제가 이놈 버리고 냄새 빼는 방법 좀 찾아볼게요.”

“…역하군요.”

이호연이 코를 막고 나지막이 중얼댔다.

그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맡아 보지 못한 냄새라고 말했다. 그러게. 나도 얼마 만에 맡아 보는지 모르겠네. 나는 이호연을 향해 고갯짓했다. 얼른 올라가요. 주춤대던 그가 계단 층계를 하나씩 오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노린재 사체를 휴지로 옮기고 1층 화장실 변기에 흘려보냈다. 물티슈를 휴지통에 버리고 벌레를 처리한 손을 박박 문질러 닦았다. 노린재가 남기고 간 냄새가 피부에 물들기라도 한 것 같았다.

행거에 걸린 수건에 물기를 닦아 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먼지로 어질러진 거실 바닥, 덩그러니 놓인 물티슈, 두루마리 휴지. 아이고, 두야. 이 냄새를 어떻게 빼지. 환기를 시키는 방법이 최선이겠지만, 지금 환기를 시켰다가 괜히 벌레라도 더 들어오면 이호연은 정신을 잃을지도 몰랐다. 휴대폰을 꺼내어 구글을 실행했다.

[노린재 냄새 없애는 법.]

검색어를 입력하고 결과를 확인했다. 리스트에 떠오른 제목은 대부분 죽이기 전 예방을 위한 방법들이었고, 당장 도움이 되는 건 없었다. 한참 서서 단말기 액정만 노려보듯 훑다 2층으로 발을 옮겼다. 2층은 그나마 냄새가 덜 들었겠지. 공간이 분리되어 있는 게 다행이었다. 만약 그가 지내는 저택이 복층이 아닌 단층이었다면 이호연은 오늘 호텔 신세를 져야 했을 것이다. 한 발 한 발 계단을 올랐다. 침실로 향하는 것은 꽤 오랜만이었다. 나는 그의 낯익은 방문 앞에 서서 노크를 했다. 똑똑, 하고 두드리자 안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호연 씨, 들어가도 되나요?”

“네, 들어오세요.”

기운 없이 울리는 대꾸를 들으며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어둑어둑한 이호연의 침실에 발을 들인 나는 노파심에 방문을 닫고 두 눈을 깜박였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가 곧 그를 찾아냈다. 침대맡에 앉은 그는 지친 얼굴로 나를 응시해 왔다. 그의 앞으로 다가가 조심스레 고개를 기울였다. 그동안은 벌레를 잡으면 바로 평화를 되찾았었는데, 노린재의 충격이 적잖이 큰 모양이었다.

“방법을 찾아보긴 했는데, 탈취제 같은 걸 뿌려야 할 거 같아요. 가장 좋은 방법은 환기이긴 한데…, 지금 환기는 좀…….”

“호텔로 가야겠군요. 1층에 내려갈 엄두가 안 납니다.”

고개를 떨군 그를 보자 무슨 말로 위로를 해 주어야 할지 막막해졌다. 힘내요? 아니지, 벌레 앞에서는 한없이 진지한 그에게 힘내란다고 힘이 나겠어.

“저, 호연 씨.”

내 부름에 이호연이 고개를 들었다.

“저녁은 드셨어요?”

“아직…, 전입니다.”

“그럼 저랑 같이 나가요. 같이 저녁 먹어요. 오늘은 제가 살게요.”

그의 어깨를 다독이며 눈매를 접어 웃었다. 맛있는 저녁도 먹고, 기분 전환 좀 한 다음에 푹 자고 나면 나아질 거예요. 너른 어깨가 움찔, 반응하더니 이호연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깨끗하고 말간 눈동자에 내가 비쳤다. 멍하니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잠시 동안 말없이 서로를 보는데, 문득 그가 내 손을 잡아 왔다. 따뜻한 체온이 눈처럼 포근하게 덮였다.

“호연 씨…?”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호연이 급하게 손을 거뒀다. 나는 반쯤 굽힌 무릎을 바로 펴며 문 가까이 다가갔다. 어둠에 잠긴 방 불부터 켜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탁, 천장에서부터 떨어지는 강한 조명에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나는 이호연을 돌아보며 서두르자 재촉하였다. 방충망이 튼튼한 작은 창문들만 열어 두고 나가면 이틀 정도면 빠지려나. 이틀 치 짐이면 가벼운 옷으로 위아래 두 벌 정도, 웃옷 한 벌 정도면 되겠지.

“속옷도 여기에 있어요? 못 돌아다니실 것 같으면 제가 작은 창문들만 열고 올게요. 아예 안 열 수는 없으니까.”

이호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속옷과 옷가지는 전부 침실과 옆방에 있어 스스로 챙길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내게 주방에서 속옷을 담을 위생 비닐과 1층 욕실 수납장에 있는 새 칫솔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침실에서 나와 2층 욕실과 방들을 돌아다니며 창문을 열고 1층으로 내려왔다. 부탁받은 것들을 챙기는 동안, 이호연은 나설 채비를 마쳤는지 속옷 두 장을 손에 들고 빈손으로는 제 코를 막으며 계단을 내려왔다. 자연스레 그에게서 속옷을 건네받아 비닐에 넣고 다시 전해 주었다.

짐을 챙기고 이호연의 차에 오르기까지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나는 차창 밖으로 이호연의 집을 보며 짤막한 토막 숨을 내쉬었다. 설마 했는데, 정말 벌레 때문에 집을 버리고 탈출하게 되다니.

이호연은 사옥 단지를 향해 차를 몰았다. 신호에 걸려 속력을 낮추던 그가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예준 씨.”

“네?”

“실례가 아니라면…, 아니, 이런 말 자체가 실례인 줄은 알지만.”

주저하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까닭 모를 망설임에 귓불의 솜털이 쭈뼛, 섰다.

“하루만 예준 씨 집에서 신세 질 수 있을까요.”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신호가 바뀌었다. 멈추었던 차량이 다시 서서히 도로를 가로질렀다. 가로등 불빛이 규칙적으로 비추며 그림자를 드리웠다. 나는 이호연의 얼굴을 살폈다. 무슨 생각인지 좀체 가늠이 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이 부근에 호텔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이전에 하룻밤을 보냈다던 코트야드 호텔도 있고, 차를 몰고 근처로 나간다면 1박 내지 2박을 할 수 있는 호텔을 잡을 수 있을 터였다. 일정 수준을 웃도는 청결함은 물론, 타인의 시선이나 간섭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런 편의를 두고 굳이 내가 지내는 오피스텔에 신세를 지겠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고등학교 동창이나 대학 동기를 집에 재운 적은 있었다. 오래 알고 지냈고 친하니까. 그렇다면 이호연은 어떤가. 오래 알고 지내진 않았다. 친한 것도 아니다. 이 사람과 나의 관계는 벌레 퇴치 아르바이트의 고용주와 피고용인에 가깝다. 0과 1로 설계된 이진법 코드처럼 명료하게 떨어지는.

야탑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이호연이 나를 돌아보았다. 수락이든 거절이든 답변을 기다리는 표정에서 어쩐지 초조함이 읽혔다. 분명 머리로는 명료하게 떨어지는데, 거절의 말이 입가에 맴돌아 쉽게 뱉어지지 않았다. 조금 전 상황을 함께 맞닥뜨려서 그런 걸까.

“죄송합니다. 과한 요구였던 것 같네요.”

“아니에요. 잠깐만요.”

그의 사과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희 집으로 가요. 그런데 많이 좁을 거예요. 호텔처럼 깨끗하지도 않고…….”

횡설수설 답했다. 0과 1. 그 사이에 변수가 하나 추가되었다. 정의되지 않은 값이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그가 친구들처럼 편할 순 없겠지만 다른 날도 아니고, 노린재에 집을 빼앗긴 날 아니던가. 내 긍정에 그의 입술 끝이 호선을 그렸다.

“혼자 사는 집이 다 그렇겠지만, 좁아요. 호연 씨가 하루 있다 가기에도 많이 불편할 거예요. 번화가 앞이라 시끄러울 수 있고요. 그래도 괜찮나요?”

널찍한 거실도 없고 방이 나뉘어 있지도 않다. 그가 지내는 주택과 내 오피스텔은 차이가 컸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우측에 욕실이 있고, 사각의 방 안에 침대와 책상이 있다. 그게 전부였다. 대부분의 가구와 수납은 붙박이장으로 되어 있어 넓은 듯 좁은 획일화된 구조였다.

“괜찮습니다. 하루 머물게 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이호연이 2차선으로 차를 붙이며 우회전 신호를 켰다.

밤에 젖은 거리는 번다했다. 야탑동으로 진입하니 8차선 도로가 버스와 택시로 뒤엉켜 있었다. 뒷길로 한 바퀴 돈 이호연의 차가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 입구의 과속 방지 턱을 넘었다.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린 이호연이 주차장 내부를 둘러보았다. 지어진 지 오래된 건물이고, 지하라 퀴퀴한 곰팡내가 났다. 오피스텔 입주 후 거의 와 본 적이 없는 주차장이었다. 이렇게나 낡았구나. 페인트가 벗겨진 낡은 외벽을 둘러보는 그의 옷자락을 손에 쥐었다. 저쪽이에요. 잡아끄는 내 손길에 선선히 그가 따라왔다.

쿵쿵 뛰는 맥박이 가슴에서 관자놀이로 타고 오르는 것 같았다.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거지. 단지 그와 내가 살아온 배경이 다르다는 생각에? 친한 친구도 아니고 사회 지인도 아니어서? 아닌가? 따져 본다면 사회 지인에 가까운가? 머릿속에서 울컥울컥 솟구친 생각이 제멋대로 엉켰다. 헤푸러진 생각의 실뭉치는 엘리베이터가 5층에 멈추고 나서야 차분히 가라앉았다.

규칙적인 보폭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걸었다. 그 뒤를 이호연이 따라오고 있었다. 504호, 505호, 506호…. 507호 앞에 다다라서야 걸음이 멈췄다. 나는 익숙하게 도어록 비밀번호를 눌렀다.

“많이 좁아요.”

누차 이르며 그를 안으로 들였다. 현관 센서 등이 켜지며 그의 어깨 위로 조명이 닿았다. 키가 커서 그런가. 조명도 높지 않은 것 같네. 슬쩍 던진 시선을 거두며 신발을 벗고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휘적휘적 걸어 불을 켜고 걸치고 있던 카디건을 벗으며 뒤를 돌았다. 우두커니 선 이호연은 오피스텔 내부를 구경하는 데 여념이 없어 보였다.

“실내화는 없어요. 그냥 들어오시면 돼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내 공간에 완전히 들어온 그를 잠시 물끄러미 보았다. 오피스텔은 혼자 있을 때는 좁다거나 빠듯한 느낌이 없었는데, 성인 남자 두 명이 들어와 있으니 여백 없이 꽉 찬 느낌을 주었다.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호연에게서 짐을 건네받아 의자 위에 올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확실히 그의 집에서보다, 차 안에서보다 지금이 훨씬 상태가 좋아 보였다.

“좁죠…?”

눈을 굴리며 이호연에게 물었다. 그가 지내는 주택에 비하면 민망할 정도로 작은 평수에,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흠집들도 군데군데 보였다. 내 눈에도 이렇게나 잘 보이는데, 그의 눈에 모난 구석들이 보이지 않을 리 없었다.

“아늑한데요. 혼자 사는 집이지 않습니까.”

중저음의 대꾸에는 조소나 조롱은 없었다. 그의 솔직한 감상에 얼굴이 상기되는 듯했다. 사실은 많이 좁을 텐데, 말만이라도 고마웠다.

“짐은 이쪽에 둘게요. 식사는 어쩌실래요? 지금 나갈까요? 근처에 보면 아시겠지만 식당은 많아요.”

“배가 많이 고프진 않아서, 예준 씨 따라가겠습니다.”

“음, 제가 사기로 했는데…….”

벌레 때문에 집까지 나온 이호연이다. 하루 머물게 해 달라고 부탁했고, 승낙하여 데리고 왔다. 혼자였다면 대충 먹거나 걸렀을 테지만 어쨌든 손님은 손님. 굶게 할 순 없었다. 골몰하는 나를 본 이호연이 정말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역한 냄새에 대한 충격으로 입맛이 없다고 힘없이 웃었다.

“그럼 맥주는 어떠세요? 출근도 해야 하니까, 캔 하나씩만 하고 자요. 맛있는 건 제가 다음에 살게요.”

다음을 기약하는 나를 보는 이호연의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생기가 돌았다.

나는 그에게 먼저 씻을 것을 권했다.

“바디 워시, 샴푸, 린스는 선반에 있고요. 일회용 면도기는 거울 슬라이드장 열면 여분으로 사 둔 거 있어요. 거기서 하나 꺼내 쓰면 되고, 수건도 같은 곳에. 아, 칫솔은 쓰시고 거치대 빈 곳에 걸어 두시면 돼요.”

그가 씻을 때 필요할 만한 것들을 속속들이 설명했다. 또 뭐가 필요하지? 전부 설명한 것 같은데.

“씻다가 필요한 거 있으면 문 열고 말씀해 주세요.”

“고맙습니다.”

이호연의 입꼬리가 보기 좋게 말려 올라갔다.

“…좋네요.”

그가 뒤에서 나지막이 뇌까렸다. 그가 중얼거리는 말마디의 의미를 알 수가 없어 “네?” 하고 되물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갸웃대는 내게 아무것도 아니라며 의미심장하게 웃음 짓고는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이호연이 씻는 동안 이부자리를 정리하며 분주하게 몸을 놀렸다. 바닥에 이불을 깔고 베개와 덮을 이불을 꺼내어 놓았다. 손님이니까 당연히 침대에서 재워야겠지.

씻고 나온 이호연에게 맥주를 건네고 바닥에 마주 보고 앉았다. 물기에 젖어 내려온 앞머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단정한 모습만 봐서 편안한 차림은 어색해 그런가 기분이 조금 이상하네. 제 캔을 딴 이호연이 내 손에 맥주를 쥐여 주고 내가 든 캔을 가져갔다. 고맙다며 눈짓을 보내자 이호연의 눈매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하나씩 나눠 마시고 함께 양치질을 했다. 거기까진 좋았으나, 바닥에 누우려는 나를 이호연이 제지하며 잠깐의 실랑이가 벌어졌다. 손님이니 당연히 바닥에서 자야 한다는 그와, 반대로 손님이니까 침대에서 자야 한다는 나의 의견이 대립한 것이다.

손님이잖아요.

손님이니까요.

제 마음이 불편한데요.

저도 마음이 불편합니다.

이호연은 제 마음대로 이 집에 들어왔으니 저가 바닥에서 자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상황이야 어쨌든, 하루 재워 주기로 한 이상 침대는 그가 써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이호연은 단호했다.

“그냥 같이 자는 건 어떠십니까.”

“이 침대에서요…?”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다 차치하더라도 침대 사이즈가 문제였다. 못 들은 셈 치겠다며 바닥으로 내려와 버린 나를 이호연이 곤란하단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몰라요. 그냥 거기서 자요.”

홱 돌아누운 등 뒤로 따끔따끔한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그를 외면한 채 잠을 청했다. 주인인 내가 이미 누워 버렸는데 뭘 어떡하겠어. 마음이 불편해도 자야지.

얼마 지나지 않아 노곤함에 느슨하게 풀린 몸이 꿈을 부유하기 시작했다.

잠에 취한 채 눈을 깜박였다. 따뜻해.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순간 허리에 둘러진 단단한 체온을 느꼈다. 분명 바닥에서 잤는데, 푹신함과 뒤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절로 나른한 숨이 차올랐다.

이호연이 옮겼구나.

고개를 슬쩍 돌렸다. 얼굴이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뒷덜미에서 느껴지는 고른 숨으로 그가 잠들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양반, 고집불통이네.

모르겠다. 그냥 더 자야지.

나는 이호연을 베개 삼아 다시 깊은 수마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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