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아주세요 2
SG플레이의 플랫폼 본부 GUI디자인팀은 매주 월요일 10시에 주간 스크럼을 진행한다. 스크럼 마스터는 팀장, 참석자는 팀원들로, 주중에 할 일과 이슈 사항을 공유하는 자리였다. 내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지 어필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워크플로우 시트를 프로젝터에 켜 두기 때문에 주중에 진행되는 작업물과 예정 업무를 꼼꼼히 기록해 놓아야 한다. 조금이라도 여유가 보이면 즉각 다른 일이 배분되었으므로, 하고 있는 일을 부풀리되 현실성 있게 말하는 게 핵심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부풀릴 필요 없이 사실 그대로를 말해도 상관없었다. 정말 바쁘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그나마 점심시간과 3시 즈음의 휴식 타임을 챙길 수 있었던 야근이었다면, 이번엔 점심시간을 쪼개든, 휴식 타임을 빼든 해야 야근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릴리즈 전까지 엄청 바빴는데, 또 야근이라니.
“다들 주말 잘 보냈어요?”
이채선이 물었다. 그녀가 먼저 자신의 주말을 공유했다. 날이 제법 선선해져 친구와 한강에서 맥주를 마시며 바람을 쐬고 왔다고 말했다.
“저는 주말에 남자 친구랑 전주 다녀왔어요.”
“멀리 다녀왔네요. 소랑 님 진짜 부지런하다. 나는 주말만 되면 아무 데도 못 가겠던데.”
이채선은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나 또한 그녀를 보며 입을 반쯤 벌렸다. 주중에 야근하고 바쁜 건 다 똑같은데, 혼자 참 대단한 체력이지 싶었다. 이게 바로 이십 대 체력인 건가. 지난주 스크럼에서도 어디 다녀왔다고 말하지 않았나? 전국 투어 뺨치는 데이트 스케일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전주에 뭐 있어요?”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연애를 안 한 지 너무 오래되어 요즘 데이트는 뭘 하는지 궁금했다.
“기차 타고 둘러보고, 그게 다죠. 사실 거의 먹자 투어예요.”
“전주까지 가서…?”
“그럼 뭘 해요.”
“…뭐 먹었는데요?”
“뼈다귀 해장국이요. 다른 것도 맛있긴 했는데, 역시 전주는 뼈다귀 해장국인 것 같아요.”
여상하게 대답한 그녀가 아이스 음료의 스트로를 입에 물며 쪼르륵 빨아들였다. 뼈다귀 해장국을 전주까지 가서 먹고 오는 사람도 있구나. 식도락 중요하지, 그래.
최근 들어 내 상식선과 약간 어긋난 사람들이 주변에 꼬이는 듯한 건, 순전히 기분 탓인 걸까. 벌레를 못 잡아서 앱에다 글을 쓰는 사람, 초면에 상대방을 마구 부려 먹는 사람, 벌레가 지나간 모든 흔적을 찾아내 커튼과 커버를 바꾸고, 가구도 바꿀 기세인 사람. 아, 전부 같은 사람이구나.
“근데 거기 진짜 맛있어요. 예준 님도 전주 갈 일 있으면 거긴 꼭 가 봐요. 전주는 한옥마을 말고 대학 옆에 있는 해장국집이 맛집이에요. 저도 들은 건데, 전주 토박이들은 한옥마을 잘 안 간대요. 예준 님은요? 주말에 뭐 하셨어요?”
정소랑이 내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듯 설명한 후 평범하기 짝이 없는 질문을 끝에 덧붙였다.
“저요? 저, 그냥…, 아는 사람 도와줬어요.”
그러나 그 평범한 질문이 내겐 참 당황스러웠다. 나는 적당한 답변으로 둘러대며 말끝을 흐렸다. 이호연을 아는 사람으로 구분하는 게 맞는 거겠지? 알게 된 기간이 길진 않지만 이름 석 자와 거주지까지 알고 있으니 완전한 타인은 아니었다.
“아는 사람?”
“네, 뭣 좀 도와 달라고 해서.”
아무리 돈을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버젓이 직장이 있는데 돈에 혹해서 벌레를 잡고 보수를 받았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뭐가 됐든 도와준 건 맞잖아. 그 사람이 못 하는 걸 내가 해결해 준 셈이니까.
물론 주중처럼 벌레를 잡고 집까지 무사 귀가했다면 좋았겠지만, 어제는 너무 무리한 나머지 온몸이 다 아팠다. 그를 도운 후 짐짝이나 다름없는 자전거를 회사에 가져다 두고 버스를 탔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다리가 후들거린 건 물론이고, 알이 배긴 탓에 밤새 끙끙 앓으며 잠을 설쳤다. 근육이 놀라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지금도 하반신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기다란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려 힘 빠진 허벅지를 꾹꾹 주물렀다. 이제 정말 운동을 해야 할 나이에 다다른 걸까. 아직 서른 초반밖에 안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운동 없이 숨만 쉬어 온 지난 십 년에 역풍을 맞는 것 같았다.
김정우까지 자신의 주말 라이프를 이야기한 후 이채선이 회의를 진행했다. 작업 중인 일들에 대해 공유하고 일정 조율이 필요한 일들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내 할 일은 이미 지난주에 정해진 상황이라 자연스럽게 웹 버전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해서, 아영 님이 웹 기획안 주면 작업 들어갈 거고, 그전까지는 지난주에 말씀하신 것처럼 모아 쪽 웹 버전 보면서 아이데이션 들어갈 겁니다. 다만, 두 플랫폼 디자인 톤 앤 매너가 달라서 절충안을 찾아야 할 것 같아요. 아영 님이랑 진행하면서 중간중간 공유해 드릴게요. 그리고 추가로 플레이짐 앱 프론트랑 백엔드 추가 수정 들어갈 예정입니다.”
“또 수정이 있어요?”
이채선은 지겹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반응에 나 역시 눈가를 모으며 입매를 씰룩였다. 나도 지겨워요, 팀장.
“네, 대표님이 지나가다 보시고 아영 님한테 숨 쉬듯이 수정하라고 했답니다. 아침에 메일 들어와 있는 거 대충 살펴보기만 했는데, 아마 지라에 올라가 있을 거예요.”
“어휴, 공기가 아깝다, 아까워.”
이채선이 눈가를 찡그렸다. 나도 이번엔 참지 못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도대체 4층에 대표실이 있는데 굳이 10층까지 올라오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제 말이요.”
물론 그럴 일은 극히 드물겠지만, 나중에 사업을 하거나 임원급으로 올라가면 꼭 방 안에만 처박혀 있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지금 회사의 대표와 이사는 두 다리가 너무 자유로운 사람들인 것 같으니까. 나는 회식비, 복후비나 늘려 주고, 휴게실, 수면실, 안마 의자 등등 직원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근무 시간도 35시간으로 조정해 주는 아주 선한 관리자가 되어야지.
“스프린트로 끊어서 가나요?”
“네, 앱이랑 같은 방식으로 진행될 것 같아요.”
“기획안은 언제 나온대요?”
“이번 주에 나온다고는 했어요. 오늘 확인해 보고 팀 내 공유해 드릴게요.”
나는 수첩에 일정 확인에 대한 메모를 추가했다. 리드급 회의의 여파로 내 업무는 ASAP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As Soon As Posible’이 아니라 ‘As Slowly As Posible’이면 얼마나 좋을까.
다른 주제는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일정이 빡빡하다는 투덜거림과 언제 사람을 뽑을 수 있냐는 아우성은 수개월 동안 같은 레퍼토리였다.
“다른 이슈 없죠? 이제 슬슬 마무리합시다. 회의만 했을 뿐인데 점심시간이군요.”
이채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11시 40분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을 보며 다들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월요일 스크럼마다 직원의 주말 일정을 묻는 것은, 회의 시간을 어떻게든 끌어 점심시간까지 버텨 보겠다는 심산이 틀림없다. 이채선의 뒤를 따라 정소랑과 김정우가 자리를 털었다. 나 역시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테이블을 짚었다.
“응? 예준 님, 왜 그래요?”
“…다리에 알이 좀…….”
갑작스레 움직인 다리는 머리에서 내려온 명령어에 불복하며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주말에 누굴 도왔기에….”
김정우가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왔다. 앞서 회의실을 벗어난 두 쌍의 눈도 나를 향했다. 그러게요. 제가 주말에 뭘 했다고 다리가 이 모양일까요. 나는 힘없이 웃었다. 절뚝거리는 다리로는 도저히 오래 걸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돈과 먹을 것을 좋아한다고 해도 이 다리로 외식은 무리였다. 육교를 건너 유스페이스 건물로 넘어가는 것도 힘들 것 같았다. 절룩대며 자리로 돌아와 수첩을 내려놓고 지라 창을 새로 고침 했다. 이슈 보드에 내 이름이 실시간 태그되며 디자인 작업물에 대한 피드백이 댓글로 달리기 시작했다. 920번 이슈, 922번 이슈, 웹 버전 컴포넌트 추가, 웹용 광고 가이드, 웹과 앱 2차 스펙 초안에 대한 시스템 가이드 논의…….
“저 오늘은 편의점으로 갈게요.”
“편의점으로 되겠어요?”
정소랑이 물었다. 하긴, 그녀는 식사에 있어서는 언제나 진중한 사람이니까.
“괜찮아요. 사실, 다리가 너무 아파서 걷는 것도 힘들어요.”
눈매가 아래로 푹 떨어졌다. 김정우가 제 어깨에 기대라며 나를 부축하려 했다. 나는 정중히 거절하며 엘리베이터 난간을 꼭 붙들었다.
“그냥 천천히 걸어갔다가 와도 되는데. 어차피 야근이잖아요.”
김정우가 위로인지, 저주인지 모를 말을 지껄였다. 저게 점점 송기현을 닮아 간단 말이지. 내 걸음걸이를 놀리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해 빼죽 솟은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일찍 나온 덕에 엘리베이터는 7층에서 한 번 멈춘 후 바로 1층으로 떨어졌다.
다시 한번 나를 붙잡는 팀원들에게 손을 휘휘 저어 준 후 편의점에서 삼각김밥과 샌드위치를 사 와 자리에 앉았다. 모아를 처음 설치했던 날도 이렇게 혼자 식사를 때웠던 것 같은데. 포장을 뜯은 샌드위치 끝을 한 입 베어 물며 대표가 언급했던 웹 버전을 살펴보기 위해 포털에 서비스명을 검색했다. 사이트 링크를 클릭해 들어가 찬찬히 둘러보았다.
나는 디자인 가이드가 몇 장이나 나와야 할지 가늠하다 이내 등을 의자에 깊숙이 기대었다. 지겹다, 지겨워. 모아도 지겹고, 플레이짐도 지겹다.
휴대폰을 들고 화면을 넘겨 보다 모아를 실행하였다. 알림 아이콘에서 빨간 점이 사라지지 않아 들어가 보니, 읽지 않은 메시지 표시가 떠 있었다. 그날, 자전거를 타고 가다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메시지였다. 채팅으로 진입해 미확인 메시지를 확인했다.
[예준 씨? 오고 있는 거죠? 곧 25분인데요. - Bugkiller]
[이대로 잠수면 곤란합니다. 사람이 도리가 있어야죠. - Bugkiller]
모든 상황이 짜증스러워 모였던 미간이 한순간 풀어지며 픽, 웃음이 터졌다. 덜덜 떨며 시간만 보고 있었을 이호연이 떠올랐다. 평소엔 냉소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사람이 벌레만 보면 그 큰 덩치로 말을 더듬고, 애원했다가 화를 내었다. 벌레를 맞닥뜨리고 패닉에 빠진 그는 내가 30분만 기다려 달라는 말에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 기본 아이템이랍시고 물티슈와 휴지, 비닐장갑을 꺼내어 두며 위치까지 체크했다.
어쩌다 이런 사람이 툭 튀어나왔을까. 미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는데, 거기는 벌레 사이즈가 한국보다 더 크지 않나? 기후에 따라 자그마한 벌레도 거기선 주먹만 하다던데. 피식 소리 내어 웃으며 채팅 창에서 나왔다.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일지 궁금해졌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그가 벌레를 맞닥뜨렸을 때 보이는 행동과 표정을 알까?
그를 떠올리며 웃음 짓던 나는 곧 앱을 종료하고 기댔던 몸을 세워 바로 앉았다.
점심시간이 끝나 가고 있었다.
며칠 동안 업무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틀 정도를 아이데이션에 집중하여 자료만 수집했다. 플레이짐 앱의 수정 요청 사항도 처리하며 시간을 쪼개어 썼다. 최대한 모아와 유사한 디자인 레퍼런스를 찾아보며 팀원들과 공유하여 피드백을 받고, 그걸 다시 정리해 윤아영과 작업 방향을 합의했다. 현재 서비스 중인 앱의 분위기와 크게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가이드를 잡을 예정이었다. 최대한 대표의 의사를 반영해 모아의 느낌도 일부 차용할 계획이니, 꼭 컨셉안에 대한 대표 컨펌을 받아 달라는 코멘트도 잊지 않았다.
“끄응.” 쭈욱 기지개를 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창밖으로 캄캄해진 사옥 단지 일대가 보였다. 일주일 내내 계속 9시 반, 10시 정도에 퇴근하고 있었다. 처음 플레이짐 가이드를 엎었을 때처럼 빡세게 야근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에 쫓기다 보니 날이 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예준 님, 디자인 언제 나올 거 같아요?”
개발 1팀의 이대현과 김주영이 가까이 다가왔다.
“다음 주에 스프린트 1이나 2 정도 분량은 나올 수 있을 것 같아요.”
의자를 돌려 그들을 보며 말했다.
“그런데, 원래 플레이짐은 2팀에서 하는 거 아니었어요?”
“앱 쪽 백엔드 리소스 부족하다고 그래서 저희 투입.”
“고생이 많으시네요.”
나날이 관리할 서비스가 많아지고 있었다. 사람을 뽑으면 좋으련만, 모회사 상장 준비로 인해 TO가 타이트하게 내려와 당분간은 채용이 동결된다는 본부장의 공지가 있었다. 주식이니 상장이니, 잘 알지 못하는 분야라 윗선에서 하는 말은 대충 흘려듣기만 했다. 그렇다 해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업들이 너무나 많았다. 사람을 뽑을 수 없으니 내부 인력을 계속 돌려쓰고 있는 실정이었다.
“다음 주에 기현 님 오면 번개라도 합시다.”
이대현이 우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개발 일정 괜찮아요?”
“구조는 IA 보면서 어느 정도 짜 놨어요. 어차피 앱이랑 기능도 같고 회원도 같으니까 테이블은 당겨 오면 되는 거고.”
김주영이 대신 답했다.
“그래요. 기현 님 오면, 기획팀도 같이 날짜 맞춰서 세 팀이서 술이나 마셔요.”
화답하며 웃어 보이자 두 사람이 자리로 돌아갔다.
8시 34분. 슬슬 가야 할 시간이었다. 금요일인데 이 시간까지 남아 있는 건,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이지 최선을 다한 것이다. 언제나 금요일만큼은 7시 땡 치는 순간 짐을 싸서 회사를 떴다. 각종 프로그램과 인터넷 사이트를 하나둘 꺼 나가며 업무용 메신저까지 종료 처리했다. 그 후 찌뿌듯한 허리를 쭉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버스가 막히지 않으면 9시, 막히면 9시 반 정도 될 것 같았다. 진짜 이번 주말엔 어디도 가지 말고 집구석에 처박혀서 잠이나 자고, 피자나 시켜 먹어야지. 휴게실 개수대에 마시다 만 음료를 버리고, 텀블러를 닦아 뒤집어 놓았다.
자리로 돌아와 짐을 챙기려다 책상 위에 뒤집어 둔 휴대폰을 들어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8시 42분. 메인 화면을 가득 메운 시간 표시 아래로, 진동과 함께 알림 창이 떴다.
[<모아> Bugkiller 님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일주일 만에 이호연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침음을 삼킨 나는 떨리는 손으로 알림 창을 눌러 앱으로 진입했다.
[정말 참았는데,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이대로는 못 살아요. - Bugkiller]
이호연의 메시지는 퍽 절실해 보였다. 노력한다는 게 연락을 참는다는 거였냐? 나는 주먹을 꾹 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이대로 못 살면 뭐 어쩌라고. 살지 마, 그냥. 호텔이라도 가라고! 내가 진짜 이번 주는 쉬려고 했는데. 쉬려고 했는데…! 조금만 더 빨리 부르든가. 지금 당신네 집 갔다가 오피스텔로 돌아가면 10시가 넘는다고. 그러고도 네가 도리를 논할 자격이 있는 인간이냐?!
아니지, 진정하자.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머릿속으로 시간을 다시 계산했다. 지금 바로 나가서 이호연의 집에 도착하면 9시 정도. 벌레는 5분 컷으로 해치우고, 다시 회사 앞까지 오면 약 9시 15분. 집에 가면 9시 30분. 늦어지면 40분. 좋아, 대충 계산했던 10시도 아니니 허용 못 할 범위는 아니다.
게다가,
[3만 원. - Bugkiller]
이렇게 깔끔하게 떨어지는 돈벌이가 어디 구하기 쉬운 것도 아니고.
“하아.”
내가 보살이다, 보살이야. 당신이 조금 웃기고, 이상하고, 딱하지만 않았어도 안 갔을 거라고. 회사에서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이기도 하니까.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 사무실 밖으로 나오며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
-야근 수당 주나요.
[당연하죠. 빨리 오면. - Bugkiller]
그는 칼같이 답했다. 그래, 젊어서 벌어 두지 언제 또 벌겠어. 야근 수당까지 준다는데, 가 줘야지. 그리고 이호연만큼 돈 잘 쓰는 고용주가 세상에 어디 있다고.
-10분이요.
웃기고, 이상하고, 딱한데 돈도 잘 주니까 내가 가 주는 거다.
회사 건물 앞 건널목을 지나 어둑한 고가 도로 밑을 힘없이 걸었다. 일주일 사이에 허벅지와 종아리에 배겼던 알은 풀렸지만, 걸음걸이는 여전히 힘이 쭉 빠진 채였다. 발에 치이는 돌멩이를 퍽 소리 나게 까 버렸다. 휙 날아오른 돌멩이가 앞으로 데구루루 굴러 나동그라졌다.
지긋지긋한 벌레 놈들. 아무리 주변에 공원이 많아도 그렇지. 이게 말이 되는 거야? 무슨 벌레가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거냐고. 이호연이 벌레의 가호를 받았거나, 그의 몸에서 벌레를 유혹하는 어떤 페로몬 같은 게 나오는 것이 아니고서야 이럴 수가 있나. 모기들이 좋아하는 피가 있는 것처럼, 이호연의 피나 체취에 벌레들이 환장하는 어떤 무언가가 있는 게 아닐까. 그 몸에 어떻게 해서든 닿아 보겠다고, 새시도 타 보고, 장식장에도 숨어 보고…. 이건 좀, 음, 그의 덩치에 비해 너무 더러운 상상이라 방향이 좋지 못하네.
곰곰이 생각해 봐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사는 오피스텔은 지은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많이 나와야 1년에 한두 번이었다. 퇴치용 트랩도 설치하고 벌레들이 싫어하는 향이 나오는 방향제도 두었기 때문에 출몰 빈도가 낮은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런 것들이 없다고 하더라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호연이 거주하는 낙생원마을처럼 단기간에 그렇게 많은 개체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그곳이 아무리 벌레들이 서식하기 최적의 환경이라 해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집 어딘가에 벌레들이 오갈 수 있는 틈새가 있는 것 아닐까? 가장 큰 가능성은 그 집에 환풍구나 창틀에 구멍 같은 게 있어서 벌레가 통로로 이용한다는 것인데…. 그렇지 않고서야 외부 유입으로 보이는 3만 원짜리나 5만 원짜리가 이렇게 빈번할 리 없으니까.
눈에 익은 길을 걸어 올라가다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무슨 곤충 공부하는 사람도 아니고, 생태계 연구원도 아닌데 뭘 유추를 할 수 있을까. 5분 컷으로 해치우고 물어나 봐야겠다. 1층 거실 창이 하나뿐인지, 외부와 통하는 창이 몇 개나 있는지. 벌레 퇴치용 트랩은 설치했는지.
“어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지잉. 손안에서 진동이 울리며 앱 푸시 메시지가 화면에 떠올랐다. 버그 킬러 님이 새 메시지를 보내셨단다.
“간다, 가, 물주 놈아.”
나는 한숨을 내뱉으며 입술을 비죽거렸다. 읽을 필요도 없다. 메시지 내용은 안 봐도 뻔했다. 언제 오냐, 미치겠다, 죽겠다, 이건 아닌 것 같다, 예준 씨, 예준 씨…….
처음 잡은 벌레 1만 원, 그 이후에 돈벌레가 10만 원, 바퀴벌레로 20만 원. 벌이가 제법 쏠쏠했다. 이번이 네 번째인데 3만 원이라고 했고, 야근 수당까지 챙겨 준다고 했으니 5만 원 내지 10만 원 정도 주지 않을까 싶다. 현생에 찌들어 웃을 기분은 아닌데 내 안면 근육은 알아서 해맑게 미소를 그렸다.
골목 어귀에 다다라 걸음에 속도를 더했다. 5분 컷, 5분 컷. 좋아, 깔끔하게 해치우고 9시 40분에 집에 가서, 이번에야말로 주말 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거다. 속으로 되뇌며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크게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멀리서부터 쿵쿵 뛰어오는 이호연의 기척이 느껴졌다. 벌컥, 문이 열리며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누구인지 확인조차 않고 내 손목을 그러쥔 그가 안으로 나를 이끌었다. 이젠 뭐 놀랄 것도 없다. 언제는 안 급했나. 나는 익숙하게 실내화로 갈아 신으며 성큼성큼 발을 뗐다. 이호연은 먼저 안으로 들어가는 나를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그는 앞선 방문 때와 마찬가지로 내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오늘은 무슨 벌레예요?”
“모릅니다. 매번 물으시는데, 그냥 벌렙니다.”
이호연의 지친 목소리에서 벌레를 향한 분노와 고통을 읽을 수 있었다. 그래, 일주일 동안 참기 어려웠겠지. 그간 벌레가 얼마나 튀어나왔는지 빈도는 잘 모르겠지만, 참겠다고 했으니 참았을 것이다. 겨우 한 주를 보내고 하필 귀한 금요일인 오늘 벌레와 맞닥뜨리니 분노가 치밀 만도 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위치를 물었다. 이번엔 주방 쪽이란다. 복도 끝에서 좌측 주방으로 발을 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복도와 거실처럼 광이 날 정도로 반짝거렸다. 너무 갭이 큰 거 아니냐고. 벌레들이 여기서 스케이팅을 즐기려 하는 게 아닌 이상 왜 자꾸 나타나느냔 말이야. 진짜 이호연한테 뭐 있는 거 아니야? 벌레 신의 가호, 뭐 그런 거. 평생 너를 따라다니는 버프로 벌레들이 지켜 줄 거다, 뭐 그런…….
“아.”
저기 보인다. 주방 싱크대 벽에 난 작은 창에서 적갈색의 벌레가 느릿느릿 기어 다녔다. 언뜻 보면 바퀴벌레처럼 생긴 권연벌레였다. 이 녀석도 참 흔하게 볼 수 있는 벌레였다. 공원 부지가 많아 일반 가정집보다 아주 조금 큰 사이즈였지만, 비주얼 쇼크를 일으킬 만한 생김은 아니었다. 이호연이 아무리 벌레를 끔찍하게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엄청 충격적인 광경은 아닌데.
저런 벌레쯤은, 물티슈도 필요 없다. 휴지를 서너 칸 끊어서 그대로 찌부러뜨렸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선명한 감각에 “으.” 하고 입매를 일자로 늘어뜨렸다.
주방 입장 5분도 되지 않아 벌레를 해치운 내 뒤에는 내가 해낼 줄 알고 있었다는 눈빛을 보내는 이호연이 서 있었다. 아냐, 그런 눈빛 넣어 둬요. 아무리 나라도 딱 이 정도가 적당하다고. 내 벌레 잡기의 마지노선은 바퀴벌레, 거미 정도까지란 말입니다. 꼽등이 같은 게 나올 순 없을 것이고, 나와서도 안 되겠지만(나오는 순간 그는 나를 이 집에 두고 떠날 것이다) 그건 나조차도 잡을 수 없는 하이 레벨의 벌레였다. 벌레도 아니지, 꼽등이는 메뚜깃과로 구분되는 곤충인데.
“역시, 예준 씨라면 저 정도는 금방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반짝 빛나는 그의 눈에서 나를 향한 무한한 신뢰가 보였다. 내가 회사에서도 저런 신뢰를 받아 본 적이 없는데. 누군가 날 믿어 준다는데 고맙다는 마음은커녕, 떨떠름한 기분만 드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나는 “그러시군요.” 하고 짧게 답하며 사체의 흔적이 묻은 개수대를 휴지로 두어 번 훔쳐 냈다.
“그래도 일주일간 잘 참으셨네요.”
달래듯 말했지만, 그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너무 불안해서 월요일은 호텔에서 묵었습니다.”
그는 판교역 1번 출구 근처의 코트야드 호텔에서 1박을 했다는 말을 머뭇머뭇 해 왔다.
나는 ‘자랑이다’라는 시선으로 그를 흘겼다. 공포감이 얼마나 심하면 내가 야근으로 바쁘다는 이야기에 호텔 숙박을 강행했을까. 누나도, 부모님도 그리고 스스로도 호텔 숙박까진 아니라고 했으면서. 방해하지 않겠다는 그의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애잔한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화, 수, 목은 안 나왔나요?”
“네, 다행히도….”
“여기 벌레 퇴치 약이나 트랩 같은 거는 설치해 두셨죠?”
안 했을 리가 없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보았다.
“당연하죠. 커튼 바꾼 날 사 와서 설치했습니다. 침실이 있는 2층에도 많이 뒀고, 기둥 있는 모서리에도 설치해 뒀습니다.”
“틈새 같은 게 있지는 않겠죠?”
“그건 잘 모르겠군요.”
자신이 매매한 집이 아니니 자세히 알지 못한다는 답변이었다.
“창은요? 1층이랑 2층 창이 몇 개 정도예요?”
“세어 봐야 알 것 같은데…, 1층은 전창 포함해서 4개 정도고 2층은…, 봐야 압니다.”
그나저나 신기하네. 나는 천장이며 벽이며 모든 게 깔끔하게 정돈된 집 내부를 둘러보다 시선을 거두었다. 약을 쳐 놨는데도 벌레가 나오는 거면 확실하게 외부 유입일 텐데. 에잇, 나도 모르겠다. 빨리 집에나 가야지.
“잡았고, 제 손에 있고, 가지고 300미터. 맞죠?”
내 질문에 이호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준비한 봉투를 꺼내어 내게 내밀었다. 나는 그가 건네는 봉투를 반대편 손으로 받아 챙겼다. 알아서 적당히 넣었겠지. 가는 길에 확인해 봐야겠다. 나는 대강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만 가 보겠다는 제스처였다. 속전속결이 따로 없구만.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가 번졌다. 매일 이렇게 5분, 10분 컷으로 끝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 이런 식이면 올 만하지! 나는 5분도 안 되어 잡고, 그는 내게 바로 수당을 주고. 얼마나 깔끔해?
나는 벌레를 잡은 휴지를 손에 쥐고 서둘러 이호연의 집을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틀었다. 멍하니 나를 보는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저, 예준 씨.”
“네?”
이호연의 부름에 무심코 뒤를 돌아 그를 보았다.
“혹시…, 지난번에 말씀드린 식사 대접, 내일 가능하실까 해서요.”
“내일요?”
“주중엔 야근으로 바쁘시다고 했고, 그냥 넘기자니 그동안 고생해 주신 것도 많아서.”
끄응. 나는 속으로 탄식을 삼켰다. 주말엔 진짜 나오기 싫은데. 벌레 잡는 것 하나에도 통이 큰 사람이다. 휴일 수당이니, 야근 수당이니 하는 내 헛소리를 선선히 맞춰 주기도 했다. 물론 돈이 얼마가 들더라도 눈앞에서 벌레를 치우고자 하는 니즈가 있기에 가능한 이해관계였다. 나는 고민하며 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제야 느끼는 거지만, 참 부티 나는 얼굴이다. 집안에 돈이 많으니 이런 곳에서 살고, 씀씀이도 큰 거겠지. 그가 대접한다는 식사의 스케일이 어떨지 궁금한 것도 사실이었다. 어쩐담. 진짜 내일부터는 집콕하고 싶었는데.
갈등하는 사이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거절하셔도 괜찮습니다. 너무 뜬금없기도 하고, 다음에 가능하실 때 알려 주시면….”
“자, 잠깐만요. 뭐, 뭐 사 줄 건데요?”
내뱉고 나서 바로 후회가 몰려왔다. 뭐 사 줄 거냐니. 좀 더 에둘러 말할 것을.
“일단 제 계획은….”
그러나 이호연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그는 미리 코스를 짜 두기라도 한 것처럼 내일의 일정을 하나하나 늘어놓았다.
충분한 숙면을 취한 후 9시 40분 정도에 만난다. 브런치나 간단한 아침을 먹고, 백화점을 돌아다니거나 영화를 본다. 영화 시간이 맞지 않는다면 서점을 돌아다니며 아침을 소화시킨다. 이후 1시에서 2시경에 점심을 먹는다. 먹고 난 후 30분 거리에 있는 수목원으로 드라이브를 간다. 수목원이 운영하는 플라워 카페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돌아와 아울렛을 둘러보고, 7시 정도에 레스토랑에 가서 와인을 곁들인 한우 스테이크와 추천 코스 요리를 먹고 헤어진다.
그의 설명을 한참 동안 들으며, 나는 얼이 빠져 그 어떤 답도 할 수 없었다. 단순히 생각했던 대접이 알고 보니 삼시 세끼였다니. 보통 지인들끼리 만나서 “식사 대접하겠습니다.” 하면 저녁 한 끼가 통상적인 것 아닌가? 삼시 세끼면 “삼시 세끼 대접하겠습니다.”라고 해야 하는 게 맞는 거 아니냐고. 그리고 메뉴를 떠나서 저 디테일한 코스는 뭔데. 지금 데이트 해? 눈만 끄먹대는 내 표정이 이상했는지, 이호연이 말미를 흐렸다.
“…메뉴를 바꿀까요? 뭐 드시고 싶은 게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개선하겠습니다. 사실 수목원이 제가 선호하는 곳은 아닌데, 근처에 한적한 곳으로 골랐습니다. 수목원이 별로면,”
“아, 아뇨. 다른 것보다는, 왜 삼시 세끼인가 싶어서….”
“그동안의 고생을 치환하면 세끼 정도로 계산이 되는데, 주중엔 바쁘시니.”
그러니까 그 치환이 왜 세끼가 되는 거냐고. 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종일 시간 내 주시기 좀 그렇다면, 시간을 맞춰서 세 번 정도 같이 식사를.”
“잠깐, 잠깐만요. 고생한 건 돈으로 받았고요.”
손에 쥔 반으로 접힌 봉투에 시선이 내려갔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 이상은 아닌 것 같다는 경고가 머릿속에서 빨간 불로 깜박깜박 점멸했다.
“원래도 이렇게….”
막 퍼 주세요? 차마 묻지는 못한 말이 입 안에 고였다.
“이렇게까진 안 합니다. 다만 한국에 와서 벌레 잡는 데에 예준 씨가 많이 도와주셨고.”
그래, 벌레.
“인근에 산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는 것 같고요.”
웬만한 벌레는 수용 가능한 벌레 퇴치기가 주는 심신의 평화가 꽤 큰 모양이었다.
“이사 갈 집을 알아볼 때까지 앞으로 잘 부탁드린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이호연의 설명에 수긍했다. 그에게서 벌레라면 이 집에 사는 동안 얼마를 쓰든 상관없다는 의지가 보였다. 어차피 길어야 반년이다. 이호연의 누나가 호주에서 돌아오기까지의 시간. 지금은 그가 회사 일이 바빠 집을 알아볼 시간이 넉넉지 않다고 했지만, 이렇게 벌레에 질색한다면 조만간 집을 알아보고 계약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돈으로(나로) 메꾸고 있는 셈이긴 했으나, 사실상 반년이 아닌 한두 달 내로 이 벌레 소동이 끝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올해 안에 끝날 수도 있겠구나. 아쉽네.
……?
나 왜 아쉬운 거지? 벌레 소동이 끝나면 수당이 없어지긴 해도, 내가 월급을 안 받는 것도 아니고. 버젓이 회사도 잘 다니고 있는데…. 돈 때문인가? 나는 마주 선 이호연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네, 알겠어요. 세끼…, 라는 게 좀 놀랍긴 한데, 그렇게 책정하셨다니까. 알겠습니다. 내일 연락해 주세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운동화에 발을 꿰었다. 자, 이제 수락했으니까 보내 줘.
“예준 씨.”
아, 또 뭐요. 다시 고개를 돌리자 그가 휴대폰을 내밀었다.
“연락처 주시면 내일 연락드리겠습니다.”
생각해 보니 그와 나는 모아로만 지금껏 연락을 주고받아 왔다. 그에게서 휴대폰을 받아 내 번호를 입력했다. 그걸 다시 그에게 건네던 손이 순간 움찔, 멈추었다. 연락처를 주고받음으로써 벌레로 묶인 공적인 관계가 허물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벌레 관련해서는 앱 채팅으로 주시는 거죠?”
내가 선을 긋자 그가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연락처를 주었다가 채팅으로 답이 없으면 전화를 할 것 같아 서둘러 그에게 완곡한 뜻을 전했다. 이호연이 그렇게까지 예의가 없는 사람은 아니겠지만, 벌레 한정으로는 주중, 주말 할 것 없이 돌아 버리는 사람이니 주의를 줄 필요가 있었다.
“네, 그럼 저 진짜 갑니다?”
“근데,”
이호연이 입을 열었다. 한 번에 말해요, 한 번에! 아저씨, 나 진짜 쉬어야 한다고! 당신 눈에는 일주일간 시달린 노동자의 과로한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겁니까?
“네?”
빨리 말해. 시간이 가고 있다고. 나는 정중한 자세 따위는 집어치우고 무릎 한쪽을 기울여 비뚜름하게 서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내일은 번호로 연락드려도 되는 겁니까.”
식사 대접이 벌레에 기인한 것인데, 앱을 통할지 개인 연락을 통할지 묻는 것이었다.
“네, 밥 먹는 건데. 사적인 거잖아요.”
대충 흘려 말하고는 신발장 옆으로 붙어 서며 이호연에게 눈짓을 보냈다. 문이나 열어 줘요. 벌레를 쥔 내 손이 현관에 닿는 것 싫잖아요. 그가 문고리를 아래로 힘주어 내리며 바깥으로 밀어 냈다. 내가 그 틈을 파고들며 바깥으로 나가자, 그 역시 뒤따라 나오며 고개를 기울였다.
“제가 너무 오래 시간을 빼앗았네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바깥바람이 제법 선선했다. 청량한 가을 냄새가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는 이호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저번에도 본 것 같았는데, 그가 웃는 얼굴은 언제 보아도 낯설었다. 벌레를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나른한 표정. 나는 그의 얼굴에 시선을 주었다가, 뒤로 물러나 계단을 내려왔다.
“네, 쉬세요. 내일 봬요.”
그에게 인사하며 뒤를 돌았다. 뒤에서 닫히는 현관문 소리가 작게 귓바퀴를 돌았다.
몸은 지독하게 피곤한데, 습관처럼 의식이 돌아왔다. 수면 위로 들어 올려진 의식은 창밖에서 들리는 미세한 소음을 잡아내며 신경을 콕콕 찔러 왔다. 나는 몇 번 뒤채다가 옆으로 돌아누워 충전기에 꽂힌 휴대폰으로 손을 뻗었다. 몇 시야. 화면 불빛에 눈가가 잘게 떨렸다. 7시 53분. 아이씨, 아직 알람도 안 울렸는데. 끙끙대는 칭얼거림이 절로 터졌다. 8시와 8시 10분에 맞춰진 알람을 종료하고, 졸린 눈을 감았다 뜨며 흐릿한 시야를 교정했다. 조금 더 자고 싶은데 이미 정신이 차려졌다. 다시 잠들 수 없도록 완전히 깨어 버린 것이다.
아, 맞아. 오늘 이호연이랑 삼시 세끼 먹기로 했지. 삼시 세끼. 정말 평생 잊지 못할 대접일 것 같다. 서른 해 남짓을 살아오며 이렇게 강력한 인상을 남긴 사람이 있었던가. 앞으로도 누군가 밥이나 술을 산다고 한다면, 오늘의 대접이 오버랩 되어 계속 떠오를 것 같았다.
[이호연. 010-23XX-1001]
휴대폰에 저장된 연락처를 눌러 상세 정보 페이지로 들어갔다. 나열된 숫자들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려운 것 같으면서도 간단한 번호 조합이었다. 외우긴 쉽겠네. 짧게 중얼거렸다.
이호연은 툭 튀어나온 모서리처럼 무언가 묘하게 거슬리는 구석이 있었다. 처음 시작이 벌레였기 때문일까. 모아는 아직 메인 화면 맨 마지막 페이지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연락처도 마찬가지다. 송기현이면 ‘SG 송기현’으로 소속과 이름을 함께 적어 두었다. 중, 고등학교와 대학, 첫 직장, 두 번째 직장 전부 동일한 규칙을 따랐다. 외부 모임도 똑같았다.
하지만 이호연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기타 이호연’으로 저장할 수도 없고, ‘모아 이호연’이나 ‘벌레 이호연’으로는 더더욱 저장할 수 없다. 골몰하던 나는 폴더 구분을 하지 못한 앱과 마찬가지로 일단은 그냥 두기로 했다. 뭐 이리 변수가 많은 사람인지. 무뚝뚝한데 벌레 한정으로 겁은 많고, 차가운 인상이라 배려도 인정도 없을 것 같은데 꽤 섬세하게 상대를 생각한다. 물론 이호연 입장에서야 남에게 빚을 안 지우려고 차라리 더 베푼 것일 수도 있겠지만.
현재 나는 2주째 완전한 주말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었다. 한 번은 벌레로, 한 번은 이제 곧 받을 식사 대접으로. 둘 다 이유는 이호연에게 있었다. 투덜거림은 잔재했으나 그뿐이었다. 약간의 귀찮음이 있을 뿐, 내 돈 주고 먹는 것도 아니고…, 굳이 내 삼시 세끼를 책임지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찌뿌듯한 몸을 기지개 켜며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지금이 7시 56분. 약속은 9시 40분 정도라고 했으니, 아직 시간은 충분했다. 아, 다시 누울까. 그냥 먼저 씻고 기다릴까. 나는 갈등하다가 이불을 걷어 냈다.
수건을 목에 두른 채 메시지 창을 띄워 놓고 자판을 두드렸다.
-어제 9시 40분 정도라 하셨죠? 어디로 가면 될까요?
잠시 후 진동이 짧게 울리며 말풍선이 화면에 떠올랐다.
[차 가지고 갑니다. 주소 알려 주시면 댁 앞으로 가겠습니다. - 이호연]
정갈하고 깔끔한 문자였다. 너무나 그다워서 나는 픽, 하고 웃었다. 벌레를 뺀 이호연은 그가 보낸 문자처럼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차를 가져오는구나. 어제 수목원 이야기를 했었으니까. 그런데 이 근방에 수목원이 있던가? 벌레를 무서워하는 양반이 플라워 카페에 들어갈 순 있나. 꽃구경과 벌레는 별개라는 건가. 이 근처가 아니면 과천으로 가려나? 거긴 좀 먼데. 아무리 생각해도 판교, 잠실 주변에서 마땅히 떠오르는 곳이 없었다. 뭐, 코스를 짠 건 이호연이니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야탑동 3XX번지 오피스텔이에요. 주차장으로 들어오면 요금을 내야 해서, 들어오지 마시고 근처 오시면 전화 주세요. 입구로 내려갈게요.
나는 빠르게 답장을 보냈다. 휴대폰을 침대맡에 대충 던져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찍 일어난 만큼 느긋하고 꼼꼼하게 씻고 나와 옷장 앞에 섰다. 어떤 옷을 입지? 그가 어제 말을 꺼냈을 때는 대충 입고 나가려고 했었는데, 와인과 한우 이야기가 나왔던 것을 떠올리자 그래도 좀 고민이 되었다.
와인을 좋아하긴 한다. 특히 주정 강화 와인이라 불리는 포트 와인이나 셰리 와인은 병째 사 두고 홀짝홀짝 마시곤 했다.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달고, 세서. 소주나 맥주는 회식에서나 마시고, 이제는 비싸고 맛있는 술 위주로 찾아다녔다. 일이 바쁘지 않다면 하루에 한 잔 정도 마시고 잠에 들었고, 주말이면 한 병을 전부 비웠다.
주로 와인을 찾았다 뿐이지, 다른 술도 마찬가지였다. 위스키는 토닉이나 탄산음료를 섞어 마시면 하이볼 같아서 종종 만들어 먹곤 했다. 술 자체를 즐기지만, 그 술의 역사나 어울리는 음식, 그런 것들을 생각하며 마시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호연은 나와 달리 와인의 역사부터 맛있게 먹는 법 등을 세세히 알려 주며 가이드해 줄 것 같았다. 그렇게나 돈이 많고, 외국에서 살다 왔는데 분위기부터 다르겠지. 딱 갖춰진 정장을 입진 않겠지만, 어쩐지 차려입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상대가 이호연이어서 그런가. 대접이라고 하니 다른 레스토랑보다 예약이 어렵거나, 값비싸고 호사스러운 곳일 것 같았다.
“으음.”
나는 옷장에 걸린 옷을 하나씩 넘기며 탄식했다. 단정한 옷이나 깔끔한 옷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봄가을용 얇은 재킷 정도 하나 사 둘 것을. 매년 사야지, 사야지 하다가 결국 짧은 간절기가 지나 버리고 만 탓이다. 옷장은 체크 수집가처럼 색색의 체크 남방으로 가득했다. 개발자 디폴트 옷차림을 탓할 게 못 되었다. 바지도 편안한 고무줄 바지나 청바지 위주였다. 그나마 각이 잡힌 옷들은 면접용 정장인데, 이것 또한 초년생 때나 입고 그 후에는 거의 손대지 않았다. 경력이 어느 정도 쌓이면서는 겉모습보다 포트폴리오가 더 중요해졌고, 슬리퍼나 트레이닝복 수준이 아닌 선에서 적당히 자율 복장으로 면접을 보러 갔다.
한참 고민하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무슨 소용이람. 그동안 벌레 잡으러 가면서 단정히 차려입은 적도 없는데. 품이 큰 반팔과 청바지를 주로 입었고, 날이 선선해지면서는 반팔 위에 남방을 걸치고 갔었다.
옷장 앞에서 한참을 기웃대다 골라낸 옷 중 색이 덜 튀는 것들로 배치하여 겨우 위아래 매치를 끝냈다. 설마 레스토랑에서 나를 쫓아내진 않겠지. 그런 곳이 있을 리도 없을 테고. 게다가 격식을 갖춰야 하는 곳이라면 이호연이 사전에 알려 주었을 것이다. 괜히 진 빼지 말고 얌전히 그의 일정에 맞추며 먹기나 잘 해야지. 나는 베이지색 면바지에 오른발부터 밀어 넣었다.
얼마 후, 휴대폰 화면에 그의 이름 석 자가 크게 떠오르며 진동이 울렸다.
이호연의 검은색 벤츠 조수석에 오르며 그의 옷차림에 가장 먼저 시선을 두었다. 얇은 남색 재킷을 걸친 그의 모습은 평소보다 편안한 차림이었다.
“안녕하세요.”
나는 어색하게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간밤에 벌레를 잡은 이후 숙면을 취한 모양인지, 그의 얼굴이 유독 반질반질 윤이 나 보였다. 날 향해 고개를 돌린 그가 작게 인사를 했다.
“어제는 예준 씨 덕분에 잘 잤습니다.”
“다행이네요. 앞으로도 권연벌레 같은 작은 사이즈면 좋겠어요. 아니, 나오라는 게 아니라…, 꼽등, 아니, 제가 잡을 만한 것들이라 다행이라는 뜻이었어요. 아시죠?”
이호연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꼽등이 언급 두 번만 더 했다가는 우울증 오겠네.
“네, 압니다. 잘 잡아주시니 든든합니다, 정말.”
다시 그의 안색이 밝아졌다. 고작 권연벌레를 맞닥뜨리고 피로감을 드러내던 어제와는 정말이지 상반된 낯빛이었다. 그 벌레가 집에서 사라졌다는 이유 하나로, 밤부터 아침까지 그의 기분은 유쾌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함께 차를 타는 게 아니라 길을 걸었다면, 이호연이 5cm 정도 공중에 둥둥 떠 있다고 느꼈을 만큼 그의 기분은 아주 좋아 보였다.
“근데, 저희 뭐 먹나요? 아침은 간단하게 먹는 거죠?”
“네, 석촌 호수 근처에 제가 자주 가는 브런치 카페가 있습니다. 파스타나 식사류도 있긴 한데, 샐러드랑 브렉퍼스트가 맛있습니다. 미국으로 가기 전에도 종종 들렀었고요. 귀국해서는 거기부터 찾았습니다.”
다행히 아직 운영 중이더군요. 이호연이 아침을 먹을 곳에 대해 설명했다. 까다로워 보이는 그가 극찬한 곳이라 기대감이 상승 곡선을 그렸다.
야탑역 부근을 벗어나며 차량이 속력을 더했다. 나는 차창 밖을 내다보다가 시선을 거두고 이호연을 돌아보았다. 종일 같이 있을 사람인데,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벌레에 대한 것 말고는 그가 뭘 좋아하는지 아는 것도 없고, 어떤 일을 하는지도 몰랐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뜨려 보려 입을 열었다.
“한국에서 살다가 미국으로 간 건가요?”
“네, 대학 졸업하고 바로 MST 한국 지사에서 일하다 본사로 넘어갔습니다.”
그의 이력을 처음으로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외국계 근무라 미국에서 살다 온 거였구나. 이제야 그간 서툴렀던 면들이 납득이 갔다.
“아, 미국에 본사를 둔 모바일 웹 애플리케이션 개발 회삽니다.”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을 알아차린 건지, 그가 재빨리 덧붙였다. 전문직에 종사할 것 같은 이미지였는데 개발 회사에 다니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빨간 불로 바뀐 신호 앞에서 차가 멈추어 섰다. 정면만 응시하던 이호연이 내게 눈길을 주었다.
“그럼 지금은 한국 지사로 오신 건가요?”
내 물음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MST를 계속 다녔다면 본사에 있었을 겁니다. 실리콘밸리 생활이 나쁘지 않았거든요. 실적도 좋은 편이었고. 한국에 온 건 친구가 창업한 회사로 곧 이직 예정이라서입니다. 원래는 바로 합류하려고 했는데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마무리 중이라, 인수인계하고 한 달 정도 후에 옮깁니다. 예준 씨는 무슨 일 하십니까? 아무래도 테크노밸리 근처가 회사니까, IT 쪽이실까요?”
“업종은 IT고, 직무는 프로덕트 디자인이에요. 기획서 보고 UI 그리는. UX에도 일부 개입하고요.”
“같은 IT네요.”
그가 싱그레 웃었다. MST라는 회사도 판교 근처에 있나 보다. 지금 사는 곳이 회사와 가깝다고 했다고 말했던 것 같다. 그나저나, 친구가 회사를 창업했다니. 젊은 나이에 대단하네. 신호가 떨어지고 차량이 다시 도로를 미끄러져 나아가기 시작했다.
“호연 씨는 개발자인 거죠?”
회사에서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 그에게 확인 차원에서 물었다. 개발 회사라고 해서 꼭 개발자란 법은 없었다. 사용 검증을 하는 팀일 수 있고, 기술 영업일 수도 있었다.
“저는 개발잡니다. 잘 안 어울리죠?”
개발자 맞구나. 가만 보자,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평소 그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개발자답긴 했다. 계산하고, 치환하고, 변수에 그대로 반응하고. 벌레라는 자극에 사이드 이펙트가 펑펑 터져 주시고. 나는 문득 이호연의 닉네임을 떠올렸다. 왜 버그 킬러인가 했더니, 벌레가 아니라 개발 버그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 심오한 뜻을 가지고 벌레 퇴치 구인 글을 쓰다니.
“아뇨, 완전 잘 어울려요.”
나는 그에게 답하며 눈매를 휘어 웃었다.
복정대로를 지나 금세 브런치 카페에 도착해 첫 손님으로 주문을 마쳤다.
어색하지 않을까 싶었던 이호연과의 대화는 비교적 매끄럽게 이어졌다. 업종이나 직무 간 커뮤니케이션 포인트가 많아서인지, 아니면 그간 벌레를 잡으며 심정적 거리가 가까워진 것인진 모르지만 대화는 끊기지 않고 계속되었다. UI 구현에 대한 이야기나 산업 전망에 대한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었다. 이호연은 아는 것이 많았다. 박학다식하다고 해야 하나. 게임 업계에 대한 이야기, 국내 IT 1세대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성장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것, 실리콘밸리의 동향 등 막상 현업에 있으면서도 몰랐던 세부적인 이야기들이 주를 이뤘다.
우리는 브런치를 먹고 백화점을 돌아다니다 카페에서 쉬고, 서점에서 관심 분야를 공유했다. 새로 사귄 사람과 이것저것 알아 가는 과정 같았다.
대학 졸업 후 인맥을 확장하기란 상당히 어렵고 번거로우며 귀찮은 행위라 볼 수 있다. 적당히 섞여도 자연히 흡수되던 학창 시절과는 달리 해가 지날수록 혼자인 게 당연해지고 만다. 끝없이 타인과 부딪쳐야 하는 무리 생활에서 벗어나 직장에 들어가게 되면 홀로 견뎌야 하는 순간들이 무수히 찾아오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와 연결된 사람 중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이호연은 확장 가능성의 여지가 있고, 반대로 소거의 수순을 밟을 수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앱에서 만난 사람과 이렇게 사적으로 만나 하루를 보낼 수도 있구나 싶으면서도, 왜 사람들이 동호회를 들고 생소한 환경을 맞닥뜨리면서도 계속해서 관계를 형성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이호연에 대한 정보가 차곡차곡 축적되며 내 안에서 업데이트되었다.
이름, 이호연.
나이, 서른여섯.
회사, 판교 소재의 MST 한국 지사에 재직 중. 조만간 창업한 친구의 회사에 개발팀장으로 이직 예정. 귀국 후 바로 합류하려 했으나 프로젝트 마무리 작업과 인수인계로 한 달 후로 미뤄진 상태.
가족관계, 부모님, 누나. 미국으로 가기 전에는 부모님과 살았지만, 그가 출국 후 부모님이 경기 외곽의 땅을 사서 그쪽으로 이사하였음.
이호연은 나를 데리고 계획했던 일정을 차근히 소화했다. 석촌호수, 백화점, 잠실역 근처 대형 서점, 분당으로 내려와 대학 부속의 수목원, 다시 잠실로 돌아오기까지. 그는 내가 지치지 않도록 휴식을 주고 음료나 디저트 같은 것들을 사 먹였으며, 함께 호수 벤치에 앉아 흐르는 구름을 멍하니 올려다보기도 했다.
예약제 레스토랑에 도착하자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레스토랑은 백화점 건물 6층에 위치해 있었고, 좌석 일체가 창문을 내다볼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었다. 창 너머로 어스레한 하늘이 분홍빛, 다홍빛 색색으로 물들어 가는 것이 유독 아름답게 느껴졌다. 탁 트인 전경을 멍하니 바라보다 마주 앉은 그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참 신기해요.”
나는 애피타이저로 나온 수프를 수저로 휘휘 저으며 그에게 물었다.
“어떤 점이 말입니까.”
“그냥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벌레가 그렇게 나오기가 쉽지 않은데.”
“저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누나한테도 물어봤는데,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처음 주택 설계될 때 조경을 염두에 두고 건축이 되었는데, 일부 사람들이 사설 조경업체를 불러 추가로 더 꾸며서 그런 것 같다고 말해 줬습니다.”
이호연이 힘없이 어깨를 떨어뜨렸다.
“그, 흠흠, 기운 내세요.”
“예준 씨 오피스텔은 어떻습니까? 저희 집처럼 심한가요?”
당황한 내가 고개를 저었다. 설마요.
“부럽네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말하는 그를 보며 나는 테이블 밑에서 주먹을 꾹 쥐었다. 수십억을 호가하는 집에 사는 사람이, 그리고 판교 일대에 괜찮은 매물이 나오면 바로 매매가 가능한 사람이 고작 월세살이 하는 나를 부러워하는 상황이라니.
“저기.”
입술이 달싹였다. 나는 유리컵에 담긴 물로 목을 축였다. 목을 지나 혀끝에 맴도는 말이 입을 벌리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움칠거렸다.
아냐, 말하지 마. 오지랖이야, 이거. 그냥 참아. 지금도 충분하다고.
꾹 참아 내던 나는 기어이 입을 열었다.
“제, 제가 있잖아요. 가까이 사니까….”
“그렇죠. 저한테는 예준 씨가 있으니까.”
이호연이 반색했다. 나 하나면 된다는 듯한 그의 말에 입술이 바짝 말랐다. 밝아진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괜히 말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왜 시무룩해하냐고요. 위로해 줘야 할 것 같잖아. 나는 그를 향해 눈매를 가느스름하게 흘겼다. 노린 건 아니겠지? 지금도 이미 충분히 시도 때도 없이 불러 대고 있는데, 이러다 옆에 붙들어 놓고 나올 때마다 잡으라고 하는 거 아니야? 그가 눈매를 접어 웃는 것을 보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남이라기엔 오늘 서로에 대해 너무 많은 정보가 오갔다. 이제 와 외면한다면 인정도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내 집 주소도 알게 되었다. 회사의 대략적인 위치와 이름, 연락처, 주소, 그 밖에도 오늘 나눈 대화를 통해 신변에 대한 정보를 두루 알게 된 것이다. 만약 내가 그의 SOS 신호를 무시한다면, 그는 벌레에게 집을 내어 주고 내가 사는 집으로 찾아오고도 남았다. 벌레를 마주한 그는 이성적 판단이 흐려지니까, 가능성이 아예 없진 않았다.
에이, 그래도 호화롭게 사는 이 양반이 내가 사는 좁은 오피스텔에 와서 저 큰 몸을 꾸겨 넣으려고.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나는 생각을 거두고 앞에 놓인 수프를 내려다보았다. 코스의 시작인 애피타이저의 첫 숟갈이었다. 고소한 향을 느끼며 수저를 입으로 가져갔다. 한 입 떠서 목 뒤로 넘기는 것조차 아쉬울 만큼 풍미가 뛰어났다. 나는 빠르게 수프 접시를 비운 후 다음 음식을 기다렸다.
수프에 이어 나온 훈연한 비트 숙성 연어에서는 눈을 뗄 수 없었다. 수저에 연어 살을 올려 한 입 덥석 물었다. 혀 위에서 녹아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다시 연어와 치즈 소스를 함께 입으로 가져갔다. 햐, 죽인다. 진짜 대박이다. 연어야 원래 부드럽고 맛있지만, 이런 식으로 요리된 연어는 처음 먹어 봤다.
나는 처음으로 이호연을 감탄 어린 눈으로 보았다. 대화 주제도 다양하고, 맛있는 곳에 대한 빅 데이터도 많이 가지고 있다. 브런치 카페는 좋았고, 점심의 한식당도 두말할 것 없었다. 미국에서 살다 온 사람이 어떻게 토종 한국인보다 맛집을 더 잘 알아?
음식물을 우물댄 기억조차 없는데 입 안은 텅 비어 버렸다. 얼마 먹지도 않은 것 같은데 접시는 깨끗하게 비워졌다.
“입에는 맞으십니까?”
“네, 완전.”
한 손엔 포크, 다른 한 손엔 스푼을 쥐고 다음 코스를 기다렸다. 다음 요리, 빨리, 허리 업. 나는 이미 이호연의 포로나 다름없는 사람이 되어 두 눈을 빛냈다. 나를 본 그가 부드럽게 웃었다.
“예준 씨, 와인도 같이 드셔 보세요. 드라이 와인이라 육류와 잘 맞습니다.”
그가 주문한 와인을 내 앞에 놓아 주었다. 왜 한 잔만 주문했냐고 묻자, 그는 운전을 해야 하지 않냐며 설명했다. 검붉은 과실이 그대로 녹아난 빛깔이 잔에서 찰랑거렸다. 와인을 들고 시향 후 입술만 살짝 대어 보았다. 훅 끼쳐 오는 향이 “나 비싼 몸이올시다.”라고 대놓고 말하고 있었다. 조금씩 입에 머금어 삼키자 입 안 가득 강렬한 텍스처가 느껴졌다.
“어떱니까.”
이호연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맛있음. 합격.
“바디감이 무거운 편이라 고기와 어우러지는 느낌이 좋습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연하게 익힌 고기를 썰어 입으로 가져갔다. 역시 비싼 건 괜히 비싼 게 아니다. 비싼 값을 하기 마련이라고, 비싼 것 is 맛있는 것은 진리였다.
“와인에 대해 잘 아시나 봐요.”
계속 먹기만 하니 좀 그래서,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침에 나올 때도 생각했던 바였다.
“미국에서 혼자 마셨던 게 다라 그렇게 잘 알지는 못합니다. 좋은 경험을 준 와인이라면 메모해 두고, 나중에 찾아서 마시는 정돕니다. 드라이 와인이 육류와 잘 맞는다든가, 디저트 와인은 치즈나 과일과 함께 마신다는 정도. 정말 딱 기본적인 것만 압니다. 최근엔 내추럴 와인이 좋아서 그것들 위주로 마셔 보고 있습니다. 향이 다양해서 재밌거든요.”
그는 그저 즐길 뿐이라며 겸손히 말했다. 기본만 한다는 건데도 말이 참 청산유수다.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는 그를 보며 멍하니 눈만 깜박였다. 나중에 누군가 와인에 관해 묻거든 이호연처럼 말해야지. 드라이 와인은 육류…, 나는 속으로 열심히 그의 말을 받아 적었다.
홀짝홀짝 와인을 마시는 나를 보며 그는 종류를 바꾸어 추가로 한 잔을 더 주문해 주었다. 오늘 하루 편안히 이동했다고는 하더라도, 주중 내내 지속된 야근과 종일 바깥에 있어 그런지, 조금만 마셨는데도 알딸딸한 기운이 목덜미까지 올라왔다. 취기가 느껴지자 헬륨 풍선이라도 된 것처럼 몸이 둥실둥실 떠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메인 디시와 후식까지 먹어 치운 나는 부른 배를 두드리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와, 매일 이렇게 먹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호연은 서버에게 카드를 내밀어 계산을 요청했다. 얼마 후, 카드와 영수증을 챙겨 온 서버가 정중히 그에게 인사했다. 식사가 만족스러웠는지 확인하고 감사하다며 거듭 고개를 숙였다.
“가실까요.”
이호연이 지갑을 재킷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역시 그의 뒤를 따랐다.
백화점 주차장으로 향하며 삼시 세끼 풀코스 대접이 이런 거였구나, 속으로 중얼거렸다. 가벼운 것에서 시작해서 무거운 식사로 마무리된 하루 일과의 만족도가 이렇게 큰 것이었다니. 솔직히 한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이대로 저녁까지 괜찮을까 싶었는데, 양도 적당했고 과하지 않았다. 오늘 갔던 곳들을 전부 검색해 보고, 나중에 꼭 다시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전부 좋았다.
조수석에 올라 감사하다는 인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저기, 호연 씨.”
차에 시동을 걸고 주차장 출구로 서행 운전하는 그를 불렀다.
“네, 말씀하세요.”
주차 요금 정산을 위해 카드를 꺼내며 그가 느긋하게 답했다.
“오늘 정말 잘 먹고, 잘 놀았어요. 저 때문에 돈 많이 쓰신 것 같은데, 정말 감사합니다.”
돈 이야기는 안 하려다 조심스레 덧붙였다. 그에게 받은 수당도 큰데, 먹기만 하고 입을 닦으면 지나치게 속물처럼 보일 것 같았다.
“제가 대접한다고 한 건데요. 저도 즐거웠습니다. 다음에 또 같이 식사하시죠.”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인성이 됐네, 됐어.
어둠이 짙게 깔린 대로에 길게 이어진 헤드라이트의 불빛이 깜박였다. 창문을 열어도 되는지 그에게 물은 후 조수석의 차창을 아래로 약간 내렸다. 서늘한 밤공기가 술기운이 번지는 두 뺨을 두드리듯 감쌌다. 청량한 바람을 느끼며 나는 그에게 말했다.
“호연 씨, 앞으로 벌레 나오면 불러 주세요. 제가 잡아 드릴게요.”
그리고 헤실헤실 웃었다.
응당 받은 게 있으니 답해야지. 암, 그렇고말고.
삼시 세끼 이후 이호연에 대한 경계는 일부 허물어져 버렸다. 한 끼로 끝났다면 모를까, 그렇게 극진한 대접을 받았는데 어찌 그의 벌레 연락을 무시할 수 있을까. 더구나 나타나면 불러 달라는 공수표 아닌 공수표도 남발했으니, 당분간 그의 부름에 군말 없이 가야 했다.
[<모아> Bugkiller 님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그래, 지금처럼.
[3. - Bugkiller]
나는 채팅 창에 적힌 숫자를 보고 실소를 터뜨렸다. 이젠 ‘만 원’을 붙이기도 귀찮다는 건가. 3이 뭐야, 3이. 잡아 달라는 사람이 성의가 없네, 성의가.
-ㄱㄷ
응수하듯 내가 답했다.
[ㄱㄷ? - Bugkiller]
-기다리라고요.
나는 그에게 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을 먹고 일어날 이유가 없는데 내가 자리를 털자 팀원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박혀 들었다.
“…예준 님, 어디 가요?”
김정우가 물었다. 야근 동지가 대열을 이탈할까 염려하는 눈빛이 짙게 깔렸다.
“잠깐 다녀올 데가 있어요. 한 삼십 분이면 돌아와요.”
“삼십 분이나요? 편의점 가는 거면 같이 가려고 했는데.”
멀뚱히 나를 보는 그에게 고개를 저어 주었다. 금방 올게요. 손을 휘휘 흔들며 사무실을 벗어났다. 엘리베이터 하행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는 동안 휴대폰 진동이 다시 울렸다.
[<모아> Bugkiller 님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간다니까, 참. 벌레 앞에서만 나오는 조급증이 그를 다시 덮친 모양이다.
[ㅇㄷ. - Bugkiller]
ㅇㄷ? ㅇㄷ는 뭐지. 어디냐는 건가. 이 양반이 진짜.
-어디냐는 거죠? 10분만 기다려 주세요. 이제 사무실 나왔어요.
[이번 건 납니다…. 빨리 와 주시면 좋겠어요. - Bugkiller]
휴대폰을 구명줄처럼 꼭 붙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 그를 떠올리며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날 만한 벌레가 뭐가 있지. 머릿속으로 어떤 벌레일지 고민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고가 도로와 언덕, 너무나 익숙한 거리였다. 브런치 카페를 지나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저쪽에서 웬 건장한 남자가 초조한 듯 좌우로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이호연이었다.
“…호연 씨?”
놀란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바깥에 나와 있던 그가 단숨에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 날아서…, 안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침실은 문이 닫혀 있는데, 다른 곳은…….”
말까지 더듬거리는 이호연의 낯빛은 말 그대로 잿빛이었다. 비행 능력을 갖춘 벌레에게 제집을 빼앗기고 들어가지도 못하고 이러고 있다니. 8월 중순으로 넘어가서 저녁엔 제법 쌀쌀한데, 얇은 티셔츠만 입고 있는 걸 보니 집에서 급하게 나온 티가 났다. 길가에 내놓은 아이 같은 모습에 괜히 마음이 약해졌다. 지난번 점잖은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금액만 말하지 말고 상황을 대략적으로 설명해 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급박한 줄도 모르고 초성으로 장난을 치나 했다.
“감기 걸리겠어요. 일단 들어가요. 1층에서 본 거 맞죠?”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3만 원짜리인 데다 비행 능력까지 갖췄다니. 이제껏 봤던 벌레 중 가장 하이 레벨에 속하는 벌레이긴 했다. 나는 겁을 집어먹은 이호연의 손을 잡아끌었다. 무서운 건 무서운 거고, 벌레에게 빼앗긴 집은 되찾아야죠.
“현관, 열어 주세요.”
내 손길에 이호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떨리는 손으로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는 문을 열어 주곤 당연하다는 듯 내 뒤로 숨어들었다.
복도로 올라선 나는 실내화에 발을 꿰며 입을 열었다.
“거실이었어요?”
“…네, 마지막으로 본 게 새시 쪽에서였습니다. 나는 걸 보자마자 바로 밖으로 나온 거고요.”
스읍, 진짜 저쪽에 무슨 통로 같은 게 있나. 무슨 벌레들이 틈만 나면 이 집 새시에 들러붙어서 스트립쇼냐고. 바깥이 어두워 그런지 잘 보이지 않아 눈을 크게 뜨고 거실 곳곳을 살폈다.
“저기…!”
이호연이 손가락으로 새시 틀을 가리켰다. 원목으로 된 틀에 얇은 전신을 숨긴 벌레가 보였다. 작은 몸통에 기다란 다리가 모기를 연상케 했다. 아무리 봐도 모기…는 아닌 것 같은데. 일단 잡고 생각해야겠네.
“제 키가 닿아도 놓칠 수 있어요. 테이프나 위생 비닐 둘 중 하나가 있다면 가져다주세요.”
“위생 비닐로 갖다 드리겠습니다.”
이호연이 후다닥 주방으로 몸을 틀었다. 나는 벌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를 기다렸다. 흠, 저 벌레 이름이 뭐였지. 깔, 뭐였는데…. 나중에 모기 닮은 꼴이라고 검색이라도 해 봐야 하나.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가 비닐이 담긴 곽을 들고 나타났다. 비닐을 한 장 뽑아다가 새시 근처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흘끔, 뒤로 시선을 던지자 이호연이 내가 하는 양을 주시하고 있는 게 보였다. 한번에 잡아야 할 텐데. 계획대로만 되길 바랄 뿐이었다. 옳지, 착하다. 가만히 있어, 그래. 나는 혼잣말을 되뇌며 벌레와의 거리를 좁혀 갔다. 침을 꿀꺽 삼키고는 얇은 비닐을 열어 공기를 통하게 했다. 괜히 저게 날았다가는, 이호연이 정말 거품이라도 물 것 같았으니까.
팔을 길게 뻗어 최대한 비닐의 입구와 벌레가 닿도록 조정했다. 저항 없이 들어오면 얼마나 좋을까. 까치발을 들고 바들바들 떨었다.
“앗…!”
벌레가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려 날갯짓하는 게 보였다. 진동하듯 미세하게 떨리는 날개를 보며 발돋움을 했다. 저쪽으로 가면 안 돼! 차라리 나한테 오라고! 내 바람을 듣기라도 한 건지, 다행히 벌레는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려다 벌려 둔 비닐로 안착했다. 길이 막힌 것을 알고 바로 빠져나가려 했으나, 내 손이 더 빨랐다. 입구를 동여매 묶으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자, 잡은 겁니까.”
“네, 이번 건 쉽지 않았네요.”
날개가 있는 데다, 크기도 제법 커서 물티슈로는 어림도 없었다. 손도 닿지 않을 만큼 높은 곳에 있기도 했다. 운 좋게 벌레가 비닐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상상조차 하기 싫은 광경이 펼쳐졌을 것이다.
“고맙습니다.”
침울하게 말하는 이호연을 향해 걸음을 뗐다. 그는 비닐 풍선에 갇힌 벌레를 보고 움찔, 어깨를 떨었다. 생각 없이 다가서려다 비닐을 뒤로 감추며 눈치를 보았다. 이번엔 갇혀 있다고 해도 살아 있으니, 괜히 내보여서 그의 경계를 더욱 심화시키고 싶지 않았다.
“나가서 죽이거나 할게요.”
차마 방생하겠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죽이려면 비닐을 다시 열어야 하는데, 저 어두운 밤거리에서 그게 쉬울 리 없지. 죽이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돌아가는 길에 마땅히 버릴 만한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사무실로 들고 들어갈 수도 없고.
“같이 가죠.”
이호연이 결연하게 대꾸했다. 어딜? 내가 눈만 깜박이자 그는 꾸물대다 입을 열었다.
“호텔로 갈까 합니다. 너무 놀라서 진정이 안 되는군요.”
“…침실은 괜찮다면서요.”
“그건 그렇지만….”
봉인된 자신의 침실보다 호텔에서 숙박하는 게 낫다는 건가.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조금 전과 달리 차분해진 까만 눈동자에 내 모습이 또렷하게 비쳤다.
“저 야근 중이라 또 올 수 있어요. 연락 주시면 바로 올게요. 따뜻한 물에 씻으시고,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바로 누우세요. 정 불안하면 문자… 하셔도 돼요.”
범죄자에 쫓긴 것도, 큰 사고를 당한 것도 아니다. 단지 벌레 때문일 뿐인데, 나는 그를 달래기 위해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했다. 게다가 앱이 아니라 개인 연락을 해도 된다고 말했다. 좀 비약이 심하긴 해도, 벌레 입장에서 보면 범죄자는 당신이나 나일 텐데…….
어르는 내 목소리에 그가 안도한 듯 느린 숨을 몰아쉬었다. 다 큰 어른이 말이야. 벌레 하나 무서워서 호텔로 가겠다니. 이번에 가면 두 번째 아니냐고. 이러다 습관 된다고요.
“…예준 씨밖에 없네요.”
그럼요, 저밖에 없죠.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호연을 향해 눈매를 휘어 웃었다.
**
그로부터 2주가 지났다. 시간은 물 흐르듯 빠르게 흘러갔다. 내 일상은 특별할 것이 없었다. 웹 버전 디자인 가이드를 잡으며 초과 근무를 거듭했고, 야근 중간이나 후에 이호연의 호출이 있을 때마다 그의 집을 찾았다.
돌고 돌아 다시 금요일이 되었다. 지겹게 이어지던 가이드 작업도 막바지에 다다랐다. DEV 환경 구축이 마무리되어 디자인 검수만 남아 있었다. 개발된 화면을 보고 가이드대로 나오지 않은 화면을 캡처해 수정 요청하거나, 예외 처리에 포함되지 않은 디자인 가이드를 따로 작업해 업로드했다. 본격적인 QA 진행을 앞두고 윤아영의 프로젝트 리딩에 따라 개발팀과 QA팀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가이드 거의 끝나 가죠?”
“네, 이제 거의 끝났어요. 그거 다 끝나면 웹용 이벤트 랜딩 페이지만 작업하면 돼요.”
“고생 많으셨네요. 자, 이제 백업 다시 가져가요.”
송기현이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웃었다. 정말 다행히도 휴가에서 복귀한 그가 내가 맡았던 앱 운영단의 디자인 업무를 가져가면서 그동안은 웹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덕분에 산출 일정보다 빠르게 쳐 낼 수 있었고, 다른 가이드까지 작업할 시간적 여유가 되었다.
“아니에요, 그냥 그거 기현 님 가져요.”
나도 그에게 장난을 걸며 키득거렸다. 얼마나 끔찍했던 날들이었던가. 이것도 빨리 쳐서 넘기고 두 번 다시 열어 보지 말아야지.
잠깐 쉴 겸 의자에 등을 기댔다. 휴대폰을 만지작대며 이 앱, 저 앱을 실행하고 둘러보았다. 뭐 이리 재미있는 게 하나도 없냐. 한숨 섞인 투덜거림이 입가에 맺혔다. 바깥을 나돌 여유가 없으니 탕진의 재미마저 잃어버린 지도 꽤 되었다. 퇴근을 일찍 해야 백화점에 가서 와인이라도 몇 병 집어 올 텐데, 시간이 통 나질 않았다. 새로운 스마트 기기도 10월은 넘어야 출시될 거고, 기다리는 게임 팩도 연말로 예정되어 있었다. 못해도 10월까지는 이런 재미없는 일상이 유지될 거였다. 노잼 인생이야, 노잼 인생. 메신저의 채팅 리스트를 살펴보다 그대로 앱을 종료하고 메인 화면을 휙휙 돌려 보았다.
[모아]
“푸흡.”
작은 희소가 번졌다. 딱 하나 있네. 웃긴 거. 초성 문자만 딱 왔을 땐 정말 장난이라도 치는 줄 알았는데. 식사 때의 단정함은 어디로 갔는지. 킥킥 웃는 나를 송기현이 이상한 사람 보듯 보았다.
“뭔데요? 같이 웃어요.”
“그냥, 웃긴 게 생각나서요.”
“그러니까 같이 웃자고요. 뭔데?”
나만 아는 즐거움을 네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냐. 그리고 이건 말로 설명이 안 된다고. 직접 봐야 알지. 이상한 사람에서 웃긴 사람으로 승격이 된 이호연을 떠올리며 나는 배시시 웃었다.
“있어요, 그런 게.”
다시 화면으로 고개를 돌리자, 마침 그룹 채팅이 새로 만들어졌다는 안내가 떴다.
개발 1팀의 이대현이 채팅 방을 만든 거였다. 지난번 이야기했던 나와 이대현, 김주영이 초대 멤버에 속해 있었다.
[저희 오늘 번개 갈까요? - SG 이대현]
-전 괜찮은데 누구누구 오나요.
[일단 여기 세 명이랑, 추가로 현호 님. 디자인팀에서 더 오실 분 있으면 초대해 주세요. - SG 김주영]
-물어보고 소환할게요.
팀에 물어본 후 긍정적인 회신을 받으면 멤버에 초대하기로 하였다.
내가 팀원들에게 묻는 동안, 개발팀은 기획팀에 이 번개 소식을 전하며 얼추 멤버가 추려졌다. GUI디자인팀에서는 나, 송기현, 이채선 팀장이, 개발팀에서는 1팀의 이대현과 김주영, 2팀의 성현호, 기획팀에서는 윤아영이 참석하게 되었다. 기획팀장인 구일호는 컨디션이 좋지 않아 불참을 표했다.
[오, 다행히 법카가 생겼네요. - SG 이대현]
[법카 때문에 나 초대한 거 아니죠? - SG 이채선]
[설마요. 이끌어 주고 밀어 주실 팀장님 한 분은 계셔야죠. 아, 그런데 정우 님 못 온대요? - SG 이대현]
-네, 집에 일 있대요.
[이런, 정우 님 좀비 되는 거 다시 봐야 하는데. - SG 이대현]
[그래도 우리에겐 예준 님이 있지 않습니까. - SG 성현호]
성현호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저 이제 점잖게 마시는데요.
나는 딱 잡아뗐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 듯했다.
[네, 요즘 예준 님 점잖게 암바사 석 잔 때리고 시작하죠. - SG 송기현]
송기현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를 몰았다.
[잊을 수 없어요. 암바사…. - SG 윤아영]
윤아영이 지난날을 회상하며 충격이었다고 덧붙였다.
지난 번개에서 선보였던 폭탄주가 강한 인상을 남긴 것 같았다. 다들 흥분해서 달려들어 놓고 아닌 척 너무하네. 오늘도 만들어 주면 원샷으로 털어 넣을 거면서. 나는 키득거리며 오늘도 진기명기 쇼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답변을 달았다.
퇴근까지 40분. 오늘은 일도 무난했고, 평탄한 하루라고 봐도 좋았다. 맛있는 안주를 벗 삼아 즐겁게 마시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지.
번개 장소는 유스페이스 건물 A동 2층에 있는 고깃집으로 정해졌다. 채팅을 개설하자마자 이대현이 야외 테라스로 두 개 테이블을 예약해 두었다고 했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 초입이었다. 야외에서 고기를 구워 먹기에 제격인 날씨였다.
두 테이블에 삼겹살 4인분과 목살 2인분씩을 주문해 올리고, 소주와 맥주를 주문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하셨어요!”
“건배!”
첫 잔은 소맥으로 건배를 했다. 단시간에 분위기를 달구는 덴 소맥만 한 게 없고, 타는 듯한 갈증을 씻어 주기에도 좋았다. 시원하게 쭉 들이켜자 톡 쏘는 탄산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깨끗하게 비운 첫 잔에 이어 두 번째 잔이 금세 채워졌다. 고기는 한 면만 익었을 뿐인데, 이미 두 잔을 비운 사람들의 얼굴에는 서서히 홍조가 피어나고 있었다.
“야근 최장 기간 갱신한 것 같네요.”
이채선의 말에 제각기 고개를 끄덕였다. 지겨우리만치 길긴 했다. 조금만 더 하면 끝날 것 같은데 프로젝트는 지지부진하게 계속 늘어지기만 했다. 정확히 말하면 크고 작은 프로젝트가 단타로 계속 치고 들어오니 숨을 돌릴 틈이 없는 거였다. 쌓인 작업들을 처리해 리뷰 후 개발팀으로 이관해도 새로운 기획서가 지라에 등록되며 새로운 일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엄살이 아니라 저 이번에 정말 힘들었어요.”
울적했다고, 진짜. 시간은 가는데 일은 줄어들지 않고.
“그래도, 이 바쁜 와중에 예준 님 연애 사업은 순조로워 보이던데요?”
순항이야, 순항. 맞은편에 앉은 송기현이 능글댔다.
“와, 진짜요??”
윤아영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나를 보았다. ‘정예준 연애 중’이라는 주제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이건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나 역시 두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왜 아닌 척이에요. 야근하는 중에 연락 받고 나갔다가 오고, 계속 휴대폰만 보고 있던 거 우리 팀 다 아는 사실인데. 요즘 웃을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어요. 연애 말고 없지.”
송기현의 말에 나는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극구 부인했다. 이호연의 호출로 벌레를 잡고 온 것이 연애 사업이라니. 이렇게 억울할 데가!
“아니거든요! 연애는 개뿔.”
내가 입술을 비죽거리자 이번엔 이채선이 “흐음.” 하고 나를 보았다.
“우리 예준 님, 나랑 같이 계속 솔로로 있어야 하는데.”
“그건 그것대로 싫어요!”
하하하,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동료들의 눈에 이미 나는 씹고 뜯고 맛보기 좋은 먹잇감에 지나지 않았다.
“왜애- 저번에는 잠실도 다녀오고 그랬다면서요. 대학교 수목원도 다녀오고. 예준 님, 분당 죽돌이잖아.”
매주 월요일마다 나누던 주말 근황 토크가 이렇게 부메랑으로 돌아올 줄이야. 뜨악한 표정으로 몰이꾼들을 바라보았다. 장난기 가득한 여섯 쌍의 눈을 보아하니, 한동안 존재하지도 않는 내 연애사에 깊은 관심을 표할 것 같았다.
“절대 혼자 갈 리 없는 코스인데? 거기, 수정구 쪽 수목원 맞죠? 나랑 와이프도 거기 가끔 가긴 하는데.”
김주영이 한마디 덧붙이자 내 연애 사업은 결국 기정사실이 되어 버렸다. 코스만 보면 그렇지. 상대는 건장한 성인 남성이란 말이다. 게다가 수목원도 내부를 돌아다닌 게 아니라 입구에 있는 플라워 카페에서 시간만 보내다 왔다고요. 드라이브 겸, 상대방이 짠 코스의 일부였단 말입니다.
“이 사람들 안 되겠네. 암바사 슬슬 시동 걸어요?”
내가 화두를 돌리며 엄포를 놓자 사람들이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암바사 달리나요?”
충격이었다던 윤아영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드디어?” 김주영이 머리로는 거부하는데 손이 간다며 상기된 얼굴로 기대감을 드러냈다.
“사장님, 여기 사이다 두 개랑 소주 세 병 추가요!”
나는 암바사주 제조를 위한 술을 추가 주문했다. 흥과 술기운이 슬금슬금 오르고 있기는 했다. 송기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비어 있는 내 옆자리에 앉으며 어깨에 팔을 걸쳤다. 장난기가 다분한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콱 찍어 버렸다. 너부터 보내야겠다. 네가 괜히 연애 어쩌고 이야기만 안 꺼냈어도, 또 놀림 받지 않았을 거라고.
맥주잔에 소주를 70% 정도 채우고, 사이다로 20%를 채웠다. 나머지 10%는 공기. 냅킨을 충분히 준비해 잔 입구를 막고 강한 힘으로 쳐 내면 소주와 사이다가 섞이며 순간적으로 암바사 맛을 내게 된다. 하얗게 탄산이 올라온 상태일 때 단숨에 들이켜야 소주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손바닥 위에 탁, 쳐 낸 잔을 송기현의 벌어진 입술 가까이 가져가자 그가 벌컥벌컥 들이켜 잔을 말끔히 비워 냈다.
“아우, 암바사는 진짜, 너무 막강하다.”
송기현이 숨을 내쉴 때마다 소주 특유의 알싸한 향이 함께 번졌다.
“자, 다들 줄 서요, 줄.”
한 명씩 암바사를 말아 주고, 부족한 술과 사이다를 주문하고, 또 말고…. 반복된 폭탄주 제조와 함께 나 역시 흥에 겨워 마시다 보니 잔뜩 만취하게 되었다. 분명 끝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폭탄주를 전체 테이블에 다 돌리고 나니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성현호와 이채선은 화장실이라도 간 모양인지 보이지 않았다.
“어, 예준 님 계속 진동 와요.”
주머니에 넣어 놓은 줄 알았던 휴대폰이 원래 앉았던 자리에 있었던 모양이다. 송기현이 내미는 내 휴대폰으로 손을 뻗었다.
“으, 아으, 이리 주세요.”
그가 내 손에 휴대폰을 들려 주며 히죽 웃었다.
“애인?”
그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고도 아직도 헛소리를 해 댔다.
“애인 아니라니까….”
나는 휴대폰 알림 센터를 확인하여 진동의 수신처를 찾았다. 모아에서 온 앱 푸시였다. 지잉. 세 건의 메시지가 왔고, 내가 알림을 확인하는 동안 진동이 한 차례 더 울렸다. 몽롱하고 무거운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아휴, 우리 물주님께서 또. 힘이 쭉 빠져나간 손가락으로 화면을 터치해 앱으로 진입했다.
[5!! - Bugkiller]
다급한 첫 메시지에서 저절로 흥분한 이호연의 얼굴이 그려졌다.
[예준 씨, 저번 놈이랑 같은 종입니다. - Bugkiller]
[저 미쳐요. 저번 놈이 청소년이었다면 이번엔 성체에 가깝습니다. - Bugkiller]
[ㅇ준 씨! - Bugkiller]
얼마나 급박한지, 답지 않게 오타까지 섞여 있다.
-회식 중. 기다리고 있어요. 좀 이따 갈게.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답장을 보내고 키득거렸다. 나 회식 중입니다. 이 인간들이랑 2차, 3차까지 달릴 거라고요. 하루 정도 같이 있다 보면 정도 들고 그러겠지, 안 그래요? 자꾸 싫다고 밀어내면 더 싫어지는 거라고. 자꾸 봐 버릇해야 익숙해지고, 생김도 구별이 가고 하는 거지. 게다가 그렇게 불쑥불쑥 나타나는 걸로 봐서, 이미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똬리를 틀었을 거예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빈번할 수 없지. 그러니까, 좀 더 놀고 가서 잡아줄게요.
게다가 이젠, 잡히는 애들이 불쌍할 지경이란 말이야. 아마 보이지 않는 곳에 옹기종기 모인 벌레들이 이런 망할 인간 놈들이라며 잡혀 간 제 동료를 잃은 슬픔으로 분통을 터뜨리고 있을 겁니다.
“저거 봐요. 예준 님 완전 팔불출 됐네?”
자리로 돌아온 성현호가 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나는 반박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아 그냥 눈만 흘기고 말았다.
“자, 이제 2차 갑시다. 다들 갈 수 있죠?”
이채선이 이미 1차 계산을 마쳤다며 늘어지기 시작한 사람들을 추슬렀다.
“예준 님 괜찮아요?”
밉상 송기현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 괜찮아요. 저 아직 더 마실 수 있어요. 2차고 3차고 갈 겁니다.”
송기현의 목에 팔을 두르며 매달리다시피 몸을 기대었다. 그가 나를 부축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잉. 지잉. 지잉. 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폰이 크게 울렸다.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나는 표정을 구기고 주춤주춤 손을 더듬어 휴대폰을 꺼냈다.
얼씨구? 기어이 전화까지? 공사 구분하자고 했잖아요, 이 아저씨야. 벌레는 모아에서만이라고요.
“우이씨….”
“자자, 애인님 전화 받고 뒤따라와요. 2차 장소 좌표 찍어 줄게.”
송기현이 내 속도 모르고 등허리를 툭툭 두드렸다. 저게 진짜, 자꾸 애인이래. 앞서 걷는 사람들과 합류한 송기현의 뒤통수를 노려보다 계속해 울리는 휴대폰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부세요.”
뚱한 음성이 어눌하게 입가에 번졌다.
「예준 씨, 많이… 취했습니까?」
“조금?”
「목소리는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요. 하, 이걸 어쩌나.」
내가 취한 걸 걱정하는 거야, 벌레를 못 잡을 걸 걱정하는 거야. 하나만 하라고, 하나만.
그나저나, 지난번 비행 능력 벌레를 보았을 때보다 차분한 것 같은데, 이번 벌레는 기어 다니는 것 외에 별다른 스킬을 가지고 있지 않은 모양이다. 흔들리는 시야 끝에 동료들이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같이 2차도 달려야 하는데…. 여기서 낙생원마을까지 가려면 아무리 빨리 걸어도 20분 정도는 걸렸다. 더구나 술까지 마신 상태에서 속도가 날 리 없었다.
“일단, 일단 기다려 봐요. 버스 있는지 보고요. 걸어서는 절대 못 가아. 에휴, 호연 씨, 호연 씨는 저한테 진짜 잘해 줘야 해요. 알아요? 내가 정말…….”
나는 웅얼대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지금 오실 수 있는 겁니까? 택시비 드릴게요. 택시 타고 오세요. 5만 원에 야근 수당, 택시비, 전부 다.」
아니, 이 사람이 진짜 돈이면 단 줄 아는데 말이야! 맞아, 돈이면 다지. 헤헤.
“딱 기다려요.”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미안합니다. 저것만 잡으면 오피스텔까지 모셔다드릴게요.」
나는 전화를 끊고 잰걸음으로 빠르게 동료들에게 다가갔다. 송기현의 팔을 잡아 돌려세우며 내가 가 보아야 함을 알렸다. 잠깐 다녀올 테니 2차 위치 좌표 꼭 찍어 달라는 말을 전하고 회사 방향으로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지금 기분 좋게 취한 상태라 2차까지 바로 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나는 깊게 호흡한 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택시부터 찾았다. 건물 앞에는 개인택시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회식이나 번개를 한 사람들을 실어다 나를 구명 차량이었다. 차례로 선 택시 중 맨 앞 두 대는 낙생원마을까지는 기본요금이라 갈 수 없다며 고갤 내저었다. 다행히 세 번째 택시가 입구까지 가 주겠다고 하여 반색하며 뒷좌석에 몸을 구겨 넣었다.
택시는 뻥 뚫린 사옥 단지 도로를 지나 낙생원마을 입구에 다다랐다. 기사는 이 이상 오를 수 없다며 난처한 듯 말했고, 하는 수 없이 중간에 내려야 했다. 달음박질하듯 언덕을 뛰어올라 벽돌집 앞으로 다가갔다. 아으, 하아…, 술 먹고 이렇게 뛰듯 걸으면 안 되는구나. 속도 안 좋고 세상이 핑핑 도는 느낌이었다. 주르륵 미끄러지며 이호연의 집 현관에 몸을 기댔다. 아이고, 죽겠다. 빨리 잡고 조금만 쉬었다가 2차에 합류해야지. 곡소리가 절로 나오는 거친 숨을 씨근덕대며 문을 쿵쿵 두드렸다. 멀리서 들리던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벌컥, 열린 문에 몸이 균형을 잡지 못하고 뒤로 기우뚱 넘어갔다.
“예준 씨.”
튀어나온 손이 내 허리춤을 감싸며 넘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붙들어 주었다. 술기운이 오른 두 눈앞에 이호연의 가슴팍이 보였다. 단단한 그의 가슴에 이마를 기댔다.
“아, 괜찮아요, 괜찮아. 하하, 벌레랑 잘 놀고 있었어요?”
내가 이를 보이며 웃자 그의 고운 미간이 화득 찌푸려졌다.
“역시 조금이 아니었네요. 제가 호텔이라도 갈 걸 그랬습니다.”
“아니에요~ 회식인데 이 정도는 기본으로 먹죠! 그리고 자꾸 가면 습관 된다니까. 자, 빨리 벌레나 잡아요!”
안으로 발을 들인 내 뒤로 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운동화를 벗는 데에도 몸을 가누지 못해 이호연을 버팀목 삼아 신발을 하나씩 하나씩 떼어 냈다. 그가 허리를 굽혀 양말만 신은 내 발에 실내화를 신겨 주었다. 그는 복도를 가로지르는 동안에도 내 허리에 두른 팔을 거두지 않은 채 넘어지지 않도록 지탱해 주었다.
“히, 어디 있어요?”
“주방에….”
이호연의 턱짓에 따라 주방 안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냉장고 위쪽 선반에 죽은 듯 붙어 있는 돈벌레가 보였다. 저번에 잡았던 놈보다 확실히 크기가 컸다. 취한 와중에도 몸체의 색깔이 구분이 갈 정도였다. 왜 청소년이 아니라 성체라 했는지 납득이 가네.
“아이구, 진짜 크네. 우리 호연 씨 많이 놀라셨겠다.”
탄식하듯 작게 중얼거리는 내 손에 물티슈 석 장이 쥐어졌다. 마치 집도의의 손에 메스를 올리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나는 성큼성큼 다가가 선반 근처와 냉장고에 쿵쿵 자극을 가했다. 얌마, 내려와. 야, 내려오라고. 어디서 죽은 척이야. 너 때문에 우리 물주님 놀라서 내가 회식 자리에 있다가 여기까지 온 것 아니냐고.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나는 제법 대범하게 돈벌레를 상대하고 있었다. 뒤로 힐긋 시선을 주었다. 이호연은 긴장한 듯 주방 입구에 석상처럼 굳어 내 움직임을 집요하게 주시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몇 초간 이어지다 벌레가 주르륵 벽면을 타고 밑으로 떨어졌다. 주방 바닥으로 착지한 그것이 발을 놀려 숨기 전에 빠르게 팔을 뻗어 이전과 같이 물티슈로 덮고 주먹질을 가했다. 퍽, 퍽, 움켜쥔 주먹으로 바닥을 두어 번 때리다 사체 수습을 위해 바짝 다가선 순간이었다.
“헉….”
날렵하긴 했으나 술 주먹은 술 주먹이었는지, 완전히 죽지 않은 돈벌레가 덜커덕거렸다. 으악, 다시 덮어, 다시! 고장 난 몸을 추스르는 벌레 위에 물티슈를 올리고 주먹으로 바닥을 쿵쿵 내리쳤다. 아우, 오늘 건 깔끔하지가 못하네.
“윽…….”
뒤에서 이호연의 탄식이 들려왔다. 조금 전 돈벌레의 최후 발악을 목격한 모양이었다.
“호연 씨, 물티슈 조금만 더 주세요.”
“…여기요.”
이호연이 정신을 차렸는지, 제 입을 막으며 서 있던 곳에서 물티슈 곽을 미끄러뜨려 내 앞으로 보내 주었다. 두 장을 더 뽑아 사체 위를 덮고, 길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아이고, 나 죽네. 나는 끙끙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제 가야지.
“…저, 저거 그냥 저대로 둡니까?”
“응? 아, 이미 죽었어요. 괜찮아, 괜찮아.”
내가 발로 물티슈 더미를 쿵쿵 밟아 버리자 그가 질겁하며 입술을 잘게 떨었다.
“으, 돈벌레 감촉. 잘 가, 친구야.”
“…….”
이호연의 표정이 구겨졌다. 나는 낄낄 웃으며 비척거렸다. 벌레가 덜커덕거리던 순간이 떠올라 실실 웃음이 번졌다. 벌레가 반신불수가 된 것 때문이 아니라, 이호연의 반응 때문이었다.
“알겠어요, 알겠어. 그만 놀릴게. 나 2차 가야 하니까, 가지고 갈게요.”
거참, 저 정도가 뭐가 무섭다고. 이미 저세상으로 간 벌레인데. 늘 그랬듯 수습해 둥근 공을 만들어 한 손에 쥐고 비틀비틀 복도 위로 올라섰다. 이호연이 한 발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거리를 좁혀 오며 내 비어 있는 왼손을 붙잡았다.
“지금 이 상태에서 더 마신다고요?”
“다들 2차 중일 텐데……. 가야 해요. 기다린다고 했단 말이에요.”
“안 됩니다. 예준 씨 이미 많이 마셨어요.”
“괜찮다니까요?”
“안 된다니까요.”
내가 애인 소리 들어 가면서 여기까지 와 줘, 벌레도 잡아 줘. 이제 좋아하는 술 마시러 간다니까 왜 붙잡는 건데. 조금 더 있으면 술이 깰 것 같아서 안 된다고. 흐름이 끊기기 전에 빨리 가서 마셔야 한다니까?
“잡았고, 이 물티슈 공은 저한테 있고, 저 갑니데이. 하하하.”
손님용 실내화를 한 발, 한 발 벗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뒤에서 이호연이 내가 벗은 실내화를 하나씩 주웠다. 신고 온 운동화에 발을 넣으려는 순간, 몸이 뒤로 쭈욱 잡아당겨졌다. 기우뚱 넘어간 등에 그의 가슴팍이 닿았다. 나는 끙끙거리며 세상이 반으로 누운 것인지, 내가 누운 것인지 가늠하며 눈을 깜박였다.
“호연 씨, 저를 걱정하고 또오, 고마워서 잡는 건 아는데에….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또 만나요오- 저, 2차 갈 거예요. 동료들이 기다릴 거거든요.”
“차라리, 차라리 여기서 저랑 마시죠.”
“네, 네?”
“집에 소주는 없지만, 저번에 말씀드린 내추럴 와인 있습니다. 선물 받은 위스키도 있고요. 지금 이대로 가면 위험합니다. 예준 씨 취하기도 했고, 여기서 저랑 더 마시는 게 나을 겁니다. 벌레는…, 저번처럼 변기에 내릴 수 있으면 내리고요.”
끄응. 그가 말하는 위스키, 내추럴 와인, 양주가 궁금하긴 했다. 머릿속에서 어느 것을 선택할지 저울질이 시작되었다. 동료들이 있는 유스페이스 건물로 다시 돌아가면 2차에 합류할 수는 있다. 다시 돌아가겠다고 이야기도 해 뒀고, 아직 좌표를 받지는 못했지만 가는 길에 송기현에게 전화하면 위치를 알려 줄 것이다. 다시 갔다가 또 마시고, 취해서 집으로 가고….
뒤를 돌아 이호연의 두 눈동자와 시선을 얽었다. 내 집은 아니지만, 머리를 기대면 누울 수 있는 안락한 집과 고급 술. 이호연은 내게 있어 편한 사람은 아니지만 낯선 사람도 아니었다. 최근 여러 차례 보기도 했고, 저번 주말에 많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기에 익숙한 사람에 가깝다. 원래는 벌레를 가지고 300미터 이상 떨어져야 한다던 그였다. 그 정도로 선을 긋던 사람이 지금은 나를 걱정하며 차라리 여기 있으라 한다. 이상하게만 느껴졌던 그의 말투나 태도가 이제는 특이하고, 웃기고 안타깝게 느껴졌다.
물티슈 공…, 빨리 치워야 하는데.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이호연을 오랜 기간 알고 지낸 것은 아니지만, 그는 벌레 사체조차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열감이 오른 눈으로 그를 빤히 응시했다. 의외로 착하네, 처음이랑 다르게. 겪을수록 신기한 구석이 많은 사람이다. 변화무쌍한 사람이라 볼수록 재미있기도 했다. 타지 생활을 했다던 그에게 내가 조금은 가까운 축에 속하는 사람인 걸까?
“…자고 가도 돼요?”
우물대던 입술에서 술기운이 번진 말마디가 한숨처럼 뱉어졌다.
이미 취기가 얼근하게 올라 상태가 아슬아슬했다. 동료들에게 타 주었던 폭탄주를 나 또한 자진해 몇 잔 마신 탓인지 조금 더 마시면 아마 인사불성으로 흐트러질 것이 뻔했다. 이호연의 말마따나 여기서 쉬며 마시고 가는 편이 육체적으로 덜 피곤할 테지.
“그럼요.”
당연하다며 그가 싱그레 웃음 지었다. 나는 홀리기라도 한 듯, 벗어 던지다시피 한 실내화에 다시 발을 꿰었다. 몸에 걸친 모든 것들에 싫증을 느껴 홀가분하게 있고 싶었지만, 내 집이 아니기에 겨우겨우 인내심을 발휘했다. 거실로 이동하는 동안 이호연은 나를 안다시피 부축했다.
그에게 기대어 피실피실 실소를 터뜨리다 되는대로 말을 뱉었다. 내추럴 와인은 뭐냐, 위스키 종류는 어떤 거냐, 이 술자리는 수당이랑 별개냐. 주절거리는 물음에 그는 퍽 다정한 어조로 하나하나 친절히 답해 주었다. 그는 삼시 세끼 투어를 했던 때처럼 침착함을 장착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의 친절은 벌레가 눈에 보이지 않게 된 데에서 오는 평온함의 반증이라는 것을.
거실과 주방으로 이어지는 세 갈래의 가운데에 서서 나는 이호연을 빤히 바라보았다.
“예준 씨, 차라리 씻고 나오실래요? 씻고 나와서 편하게 드시는 것도….”
이호연은 씻고 나올 것을 권했다. 지난번과 같이 옷도 준비해 주겠다는 말에 거절치 않고 알겠다 답했다. 손을 휘휘 저으며 복도 끝 욕실로 향했다. 씻는 걸 돕겠다는 그의 어깨를 토닥여 괜찮다 물리고, 욕실로 들어와 비틀거리며 벌레 사체를 변기에 흘려보냈다. 균형을 잡기 위해 발에 힘을 주어 옷을 벗고 흐르는 물에 몸을 씻었다. 어쩌다 이 집에서 두 번이나 씻게 된 거지. 몽롱하게 흐려지는 시야를 깜박여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안 돼. 정신 차려, 정예준. 이호연이 내준 술을 못해도 석 잔은 마시고 뻗어야지. 불콰해진 뺨을 두드리며 떨어지는 물에 몸을 씻어 냈다.
뜨끈하게 샤워를 마치고 비척비척 욕실을 나왔다. 취기가 만발한 상태에서 따뜻한 물에 샤워까지 하니 지상 낙원이 따로 없었다. 평소보다 굼뜬 움직임으로 그가 준비한 트레이닝복과 티셔츠로 갈아입었다.
“저 나왔어요-.”
원치 않게 말미가 길게 늘어졌다.
“주방은 청소를 다시 해야 해서, 이쪽에 준비했습니다.”
이호연이 나를 거실로 불렀다. 거실 테이블에는 그가 준비한 와인과 소시지, 견과류가 정갈히 차려져 있었다. 나는 푹신한 소파에 몸을 기대어 앉았다. 주방과 가까운 내 자리를 내려다보다 킥킥 웃었다.
“일부러 이 자리 준 거죠.”
“…미안합니다.”
그가 머쓱하게 사과했다. 주방 내부를 기어 다닌 벌레 때문에 그쪽으로는 앉지도 않겠다는 의지가 돋보였다. 그래, 뭐 그럴 수 있지. 콧소리를 내며 그가 내민 잔을 받아 들었다.
“내추럴 와인인데, 끝맛에서 풋사과 맛이 납니다.”
연둣빛의 와인이 영롱하게 빛났다. 나는 잔을 쥐고 코로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향에 집중했다.
“처음 마셔 봐요.”
“맛이 아주 좋습니다. 향도 좋아서 두 병째 들인 겁니다. 요리를 준비할 시간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제가 이 집에서는 뭘 잘 안 해 먹어서요. 에어프라이어에 소시지만 구웠습니다. 이미 뭔가 드시고 오기도 했고.”
그가 홀짝홀짝 술을 마시기 시작한 내게 포크를 쥐여 주며 안주를 권했다. 이런 집에 사는 사람은 와인도 다 준비해서 먹는구나. 나는 아무 잔에다가 대충 따라 마시곤 했는데. 멍한 눈을 깜박이며 히죽 웃었다. 물주님은 사는 세계가 참 다르구만. 저번 코스 요리도 그렇고, 부지불식간에 들이닥친 이방인을 위해 짧은 시간 동안 준비해서 이만큼이나 차리는 것도 그렇고. 이런 사람이랑 어울리다 보면 이런 게 당연해지는 걸까. 매일 맛있고, 매일 고급스러운.
“기분이 좋으신가 봅니다.”
“네에- 아주 좋죠. 오랜만에 술도 마시고, 벌레도 잡았고…. 헤에.”
“소주로 드신 겁니까?”
“소주는 소주인데, 사이다가 들어간…? 나중에 제가 말아 드릴게요! 저 완전 장인이에요. 두 잔만 마셔도 완전 훅 가게 해 드려요, 훅.”
내가 손짓으로 폭탄주를 마는 제스처를 취하자 이호연은 조용히 웃기만 했다.
“내일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미 섞어 마셔서 괜찮아요.”
취하려고 마시는 술인데 아무렴 어떠한가. 게다가 이미 자고 가도 된다는 허락도 받았는데. 이호연은 내가 도중에 뻗어도 잘 챙겨 줄 것 같았다. 내가 편히 쉬다 갈 수 있도록 옷도 내어 주고, 좋은 술도 내어 주는 그가 정신을 잃은 나를 깨워 강제로 내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머뭇거리던 이호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나는 그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잔에 든 와인을 전부 비워 냈다.
그는 얼음 바스켓과 글렌피딕, 토닉워터를 함께 챙겨 왔다.
“나를 골로 보내시려고 작정을 하셨구나.”
“…무를까요?”
내 웅얼거림에 그가 가져온 쟁반을 슬쩍 옆으로 밀었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이미 내 속에선 소주와, 맥주와, 사이다와, 내추럴 와인이 새로운 친구를 환영하는 삼바를 추고 있다고. 그렇지만 이런 상태에서 글렌피딕으로 화룡점정을 찍는다면 언제 퓨즈가 끊길지 몰랐다. 꼭 쥐고 있던 와인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 두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몸은 먼저 가죽에 파묻혔는데, 의식이 뒤따라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마치 술기운을 뭉글뭉글하게 구름처럼 뭉쳐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는 것 같았다. 버텨야 해. 언제 글렌피딕을 먹어 보겠어. 딱 저것만 먹고 나 죽겠소, 하고 누워야겠다.
“선물로 받은 건데, 저도 오랜만에 이렇게 마셔 보네요.”
나는 낑낑거리며 몸을 바로 세웠다. 일으킨 상체가 두어 번 휘청거리다 겨우 중심을 잡았다.
“저어, 그런데-, 진짜, 궁금한 게 있어요오.”
이호연이 술을 따며 내게 시선을 보내왔다.
“왜에 벌레가 싫어요? 보다 보면 그냥 벌레인데….”
사람을 물거나 해치는 벌레가 있긴 해도, 대부분 사람이 사는 곳을 스쳐 지나가거나, 어쩌다 실내로 들어와 길을 잃은 경우가 더 많다. 날이 추워지면 따뜻한 곳으로 모이는 습성이 있다고 들은 것도 같았다. 벌레 입장에서야 사람이 사는 곳만큼 따뜻하고 겨울을 나기에 좋은 곳이 없으니까. 단지 잠깐 머물다 갈 뿐일 텐데, 그가 왜 이리도 벌레를 끔찍하게 여기는지 궁금했다.
우물대며 묻는 내게 이호연이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들어도 기억 못 하실 텐데.”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라, 하며 그가 주저하는 것이 보였다.
“저 원래 필름 잘 안 끊기는데요??”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이호연의 옆자리로 다가갔다. 어디 이야기나 한번 들어 봅시다. 매번 3만 원에서 5만 원짜리가 이렇게 계속 출몰하는 것도 웃기고, 질리지도 않는지 매 순간 놀라는 호연 씨도 웃기다고요. 보통 사람들보다 벌레를 더 싫어한다고 하는데, 상황을 알아야 내가 좀 더 이해하지 않겠어요?
“그게…, 어렸을 때에…….”
이호연이 위스키 잔에 얼음을 채운 후 술을 따르며 입을 열었다. 나는 그에게 몸을 기울이며 귀를 쫑긋 세웠다. 다른 기억은 잃어도, 이건 꼭 기억해 놔야지.
과거를 회상하는 이호연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불편함을 드러내는 눈빛이 너무나 진지해서 저절로 침이 꿀꺽 삼켜졌다. 술에 취해 두 눈을 빛내 봐도 게슴츠레해 보이겠지만, 나는 최대한 눈을 동그랗게 뜨곤 이호연의 입술에 시선을 고정했다. 자, 빨리 말해 봐요!
“사실 이런 이야기가 부끄럽긴 하지만, 그래도 예준 씨는 이해해 줄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어릴 때 가족끼리 시골 할머니 댁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냥 시골도 아니고 정말 시골이었어요. 깡시골이라고들 하죠. 버스를 타려면 이십 분은 걸어서 버스 정류장으로 내려와야 하고, 거기서 또 한 시간 이상 버스를 기다려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슈퍼도 삼십 분 정도는 걸어야 나올 만큼 멀었고요. 가족끼리 간 거지만, 부모님은 다른 일로 바쁘셔서 거의 누나와 놀았습니다.”
“거기서 벌레가??”
어쩐지 조급해져서 내가 어눌한 발음으로 덧붙이자 이호연은 호박색의 위스키를 한 모금 들이켰다.
“누나가 시골 여치라며 어디서 주먹만 한 갈색 곤충을 하나 잡아 왔습니다. 아, 주먹만 하다고 한 건, 성인 주먹만 하다는 겁니다. 그렇게 큰 곤충은 태어나서 처음 봤어요. 신기한 마음에 가까이 갔는데, 마침 제 얼굴로 그게 갑자기…….”
이호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얼굴로 튀어 올랐다는 말이 작게 흐려졌다.
나는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허어, 시골 여치면 곤충계의 탑 티어급 아닌가? 그건 곤충이 아니라 곤충의 탈을 쓴 제 3세계의 생명체잖아. 꼽등이는 물지는 않지만 시골의 갈색 여치는 사람을 물기도 한다고 들었다. 나는 으, 하고 찌푸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팔을 뻗었다.
“저런, 어린 나이에…, 많이 놀랐겠어요.”
토닥토닥, 한 품에 들어오지도 않는 그를 붙잡아 어깨를 다독였다. 성인 주먹만 한 벌레가 얼굴로 튀어 오르는데, 어떤 사람이 안 놀라고 배기겠는가. 어리고 아니고를 떠나서 트라우마로 남을 만도 했다. 나라도 여치가 내 얼굴을 덮쳤다면……, 아니다, 괜한 상상으로 내 벌레 잡기 스킬에 마이너스 요인을 주지 말아야지. 이호연이 왜 벌레라면 회까닥 정신을 놓고 벌벌 떠는지 알 것도 같았다.
“나중에 찾아보니 물기도 한다고 들었습니다.”
내 다독임에 그가 마치 이르는 것처럼 말을 덧붙였다. 네, 맞아요. 그거 문다고 했어요.
“다행히 저는 물리지는 않았지만…, 그 이후로는 곤충이나 벌레만 봐도 얼굴을 덮칠까 봐 몸이 굳더군요. 부모님과 함께 갔던 중국 여행에서는 아예 기절까지 했습니다. 아, 중국 여행은 초등학생 때였습니다. 바…, 아무튼 그 튀김을 보는 순간 의식을 잃었습니다.”
얼마나 지독한 기억이면 바퀴벌레 튀김을 보는 순간 까부라졌을까. 왜 그렇게까지 진저리를 쳤는지 알겠네, 알겠어. 처음엔 내가 그를 안아 주려 팔을 뻗었는데, 한두 번 그의 어깨를 다독이다 보니 취한 몸뚱이가 슬슬 미끄러져서 그에게 반쯤 기대어 안긴 꼴이 되었다.
그의 가슴팍을 짚고 상체를 일으키려 하는 순간, 현기증이 일며 눈앞이 핑 돌았다.
“더는 안 되겠네요.”
이호연이 무너지는 나를 붙들어 주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나는 느물대며 손가락으로 내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잘 기억했고, 성심성의껏 잡아주겠다는 의미였다.
“나아…, 괜찮, 은데….”
더 깨어 있고 싶고, 그가 주는 술도 더 마시고 싶고, 이야기도 더 듣고 싶었다. 그러나 괜찮다는 말과 달리 내 주량은 한계치에 다다라 눈두덩도 무겁고 몸도 녹진했다. 내 정신은 이제 그만 육신을 놓고 싶다며 아우성쳤다.
“자요.”
이호연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귓바퀴를 돌았다. 낮은 음성이 자장가처럼 느껴졌다. 까무러지는 의식을 놓으며 그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
단단하고 포근한 온기에 멀어졌던 의식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느껴지는 고른 호흡과 기척에 졸음이 저 멀리 달아나며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여, 여기가 어디야. 당신이 왜 여기에. 아니지, 내가 왜 여기에…?
옆자리에 누워 나를 끌어안고 잠든 이호연의 얼굴을 보며 멍청히 눈만 깜박였다. 딱딱하게 굳어 미처 깨지 않은 정신을 추스르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전날, 술기운에 알딸딸한 상태로 벌레를 잡으러 여기에 왔다. 2차에 합류하려는 내게 이호연은 위험하다 만류하였고, 차라리 여기서 같이 마시자는 제안에 함께 술을 마셨다. 1층에 있었던 것까진 생각이 나는데, 그 이후론 기억이 이어지지 않는 게 문제였다.
왜 내가 그의 침실로 보이는 곳에 나란히, 함께 누워 있느냔 말이냐. 물론 내가 먼저 자고 가도 되느냐 묻긴 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보통은 손님방을 내어 주거나, 소파에 이불을 내주는 게 당연한 거 아냐?
근데, 날 어떻게 옮긴 거지?
“…으음.”
이호연이 뒤척였다. 나는 혹시라도 그가 깰까 싶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자, 깨어났으면 떨어져요. 당신이 창피해할까 봐 자는 척해 주는 거라고요. 그렇게 그가 내게서 자연스럽게 멀어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냥 잠꼬대였는지, 그는 나를 더욱 옥죄어 안으며 고르게 숨을 내쉬었다. 일어나, 일어나요. 눈가를 찡그리며 그의 잠든 얼굴을 노려보았다. 내가 당신 애착 인형입니까? 슬금슬금 움직이려는 내 몸짓을 따라 무겁고 길쭉한 다리가 따라왔다.
나는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이거, 다리가 아닌데…?
꾹, 눌러 오는 살덩이의 정체는……. 으악, 떨어져, 떨어져요! 발버둥 치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내적 비명을 질러 댔다. 정자세로 누운 내 몸을 이호연이 압박하듯 눌러 왔다. 정신없이 잠에 취한 듯 보이는 그의 반듯한 얼굴과 달리 하체의 움직임은 솔직하게 제 욕구를 드러내고 있었다.
“…아…….”
의도치 않게 탄성이 터졌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허리를 움찔, 떨었다. 나 역시 건강한 성인 남성이다. 성기에 닿는 외부 자극에 당연히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호연 씨….”
이호연을 깨우기 위해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호연 씨…?”
미동조차 없는 그의 어깨를 잡아 천천히 흔들었다.
“저기요.”
저기, 아침이라 선 건 알겠고, 덩치도 크고 키도 큰 만큼 거기도 큰 건 알겠는데…, 아무튼, 그게 내 거에 닿아 있다고요. 울상을 짓는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호연은 느린 호흡만 규칙적으로 내뱉을 뿐이었다. 그가 본능적으로 허리를 움직였다. 마찰하는 살덩이에 하반신으로 서서히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으앗, 움직, 움직이지 말라고…!
“호연 씨!!”
우렁차게 소리치는 내 목소리에 이호연의 고운 이마가 종잇장처럼 찌푸려졌다. 굳게 닫힌 수문이 열리듯 그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이호연이 두어 번 제 눈을 감았다 뜨며 조금 전의 나와 마찬가지로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아…, 예준 씨.”
잠긴 목소리가 나른하게 울렸다.
“더 자요…….”
이호연이 나를 품에 가두었다. 뭘 자?! 지금 이런 상황에서 잠이 오겠냐?
꾸욱, 감겨드는 하체의 자극에 창피함과 부끄러움이 한데 섞인 낯으로 입술을 잘근 씹었다. 이 순간을 어떻게 모면해야 해? 그리고 이런 게 흔한 건가? 아침에 발기하는 거야 남성이라면 당연한 거긴 하지만, 남자끼리 나란히 누워, 서로의 성기를 맞대고 있는 상황…. 이게 흔할 리가 있겠냐고!
“아, 그, 그러니까, 밑에…, 읏, 밑에 닿아요.”
화끈거리는 얼굴을 그의 가슴팍에 묻고 중얼거렸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이호연이 제 허리를 뒤로 빼내며 붉어진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했다.
“…미안합니다.”
숙연하게 사과하는 그를 올려다보다 그냥 고개를 푹 숙이며 얼굴을 가렸다.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어이도 없고 당황스럽기도 한데, 무어라 더 할 말이 없었다. 화가 난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예상외의 상황에 조금 많이 놀랐을 뿐.
“…둘 다 건강한 거로 쳐요.”
“제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그렇겠죠. 원래 이런 사람이면 변태라고요. 속으로 투덜거리다 붉게 달아오른 이호연의 귓불에 시선이 멎었다. 이 사람 회사에서도 이렇게 허당기 가득한 모습일까 궁금하긴 하네. 나는 침대를 벗어나며 자리를 털었다. 재워 주기도 했고, 건강한 성인 남자가 아침에 텐트 좀 치는 거야 그럴 수 있지.
“저 1층 내려가서 씻으면 되죠?”
엉거주춤 서서 계단 쪽을 향해 턱짓했다. 등을 약간 굽힌 내 어정쩡한 자세에 이호연이 짧게 탄식했다. 그의 눈길이 내 중심부로 향하는 게 느껴져,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당신 걸로 누르니까 나도 이렇게 된 거 아니야. 창피하니까 그만 봐요.
나는 머쓱해져서 뒷목을 매만지며 문 가까이 다가섰다. 안 되겠네, 씻으면서 한 발 빼야겠다.
“아, 네네, 씻고 나오세요. 나오시면 같이 식사나 해요.”
“식사요?”
문고리를 잡으려다 그를 돌아보았다.
“네, 술 드셨으니 해장해야죠. 같이 식사하고 이따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참, 보면 볼수록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은 사람일세.
“메뉴는요?”
내 물음에 그가 입을 열었다.
“북어포 사 둔 게 있습니다. 간단하게 북엇국이나 끓여서 먹어요.”
해장 메뉴조차 완벽해 고민의 여지가 없었다. 끓여 먹자는 걸로 보아, 직접 요리를 해 줄 생각인가? 어제 소시지도 에어프라이어로 구운 게 다긴 했지만 맛있었지. 실력이 없다면 에어프라이어가 있어도 활용을 못 할 테고. 그간 축적된 데이터로 미루어 보아, 미식을 즐기는 이호연은 어느 정도 요리를 할 줄 아는 듯했다. 나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만 말해 봐요. 나 입 무거운데.”
“저어기 가서 마셔요. 그리고 그걸 믿으라고 하는 소린 아니겠죠?”
퉁명스러운 내 말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송기현은 느물대며 웃었다. 이런 진상, 밉상, 화상. 넓디넓은 사내 카페에서 굳이 내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송기현이 얄밉기 그지없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잔에 맺힌 물방울을 손끝으로 톡톡 건드렸다. 또르륵 타고 흐르는 물기에 시선을 주었다가 송기현을 노려보았다. 네가 입이 무겁긴 뭐가 무겁냐. 우리 팀의 대나무 숲인데.
지난주 금요일, 2차에 합류하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로 나는 오전 내내 팀원들에게 탈탈 털려야 했다. 애인이 누구냐, 몇 살이냐, 회사 근처에 사냐, 어디에서 만났냐, 이 근방이 거주지라면 운중동이나 백현동뿐인데 있는 집 자식 아니냐, 왜 그리 꽁꽁 숨기냐 등등.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그 어떤 질문에도 답하지 않았다. 속으로 꿍얼대기만 했다. 애인 아니고요, 서른여섯이고요, 근처에 살긴 하는데 조만간 이사 가신다고 했고요, 앱에서 만났습니다.
“미안, 그만 놀릴게. 그런데 진짜 올 줄 알았어요. 분명 그때 다 같이 취했는데, 2차 합류할 거라고 하면서 헐레벌떡 택시 잡아서 갔잖아. 진짜 무슨 일 있나 싶었다고요.”
짧게 탄식을 내뱉었다. 큰일은 아니었는데, 동료들 입장에서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슬며시 혀를 차며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또 한 차례 일어난 벌레 소동. 취하긴 했어도 벌레는 금방 잡았다. 문제랄 건 없었지만, 이후 이호연과 함께 술을 마시며 그의 트라우마에 대한 것도 들었고 그를 다독여 주기도 했다. 다만, 사과 향이 은은하게 나던 내추럴 와인은 기억이 나는데, 글렌피딕 맛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침에 창피한 순간이 있긴 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리고 그가 끓여 준 북엇국은 최근 먹은 집밥 중, 단연 으뜸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맛있었다. 벌레 때문에 요리를 잘 안 한다고 했었지. 그럼에도 나를 위해 해장국을 끓여 준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냉소적으로 생긴 것과 달리 기본적으로 다정한 성격이고, 요리도 잘하고, 술도 잘하는 그야말로 완벽한 남자 아닌가. 게다가 이름도 멋있어. 차라리 이호식 같은 이름이었다면 치킨이 생각난다며 이름 빼고 잘났다고 할 텐데, 그것까지 완벽했다.
“금요일에 진짜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니죠?”
송기현이 장난기를 거두고 진지하게 물어 왔다. 생각의 흐름이 이호연에게로 자연히 흐르다 멈추었다.
“아뇨, 무슨 일은요.”
“그러면 JD 들어온 거 있어요? 아니면 어디 합격했다든가?”
“푸핫, 내가 기현 님인 줄 알아요?”
심각한 표정으로 뭘 말하나 싶었는데, 내가 이직이라도 할 줄 알았나 보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 답했다. 최근 JD 메일을 안 받은 지도 오래되었고, 가깝게 지내던 헤드헌터와는 안부 인사를 주고받은 지 벌써 1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SG플레이도 처음 입사했을 당시, 2년 정도 다니다가 이직할 생각이었다. 자존감을 다 박살내 가며 겨우 이직을 했건만, 다시 퇴사 각을 잰 것이다. 퇴근 후나 주말마다 포트폴리오를 업데이트하고, 취업 포털을 살펴보며 시간을 보냈다.
IT 업계는 다른 업계보다 종사자의 근속 연수가 짧은 편이다. 지인들도 짧게는 1년을 못 채웠고, 길게는 3년 정도 다니다가 몸값을 올려 다른 회사로 적을 옮겼다. 개중 한 명은 메신저 어플리케이션의 프로필 배경 음악을 이승환의 <천 일 동안>으로 설정해 두어 3년 정도만 다니다 그만둘 것을 공연히 암시하기도 했다(그러다 돌연 회사 일이 힘들면 알리의 <365일>로 바꿔 놓았다). 나 역시 지인들처럼 연봉을 올려 더 높은 곳을 노려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도저히 이직 준비를 할 시간적 여유가 나지 않았다. 내내 야근으로 일을 쳐 내야 했고, 거기에 틈틈이 이호연이 불러 대는 통에 평일이고 주말이고 정신이 없었다. 부가 수익이 제법 짭짤해서 이직 생각이 안 나는 건가.
그러고 보니 이호연에게 받은 영향이 꽤 크네.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8월부터 지금까지, 다른 건 기억에 남는 게 없고 머릿속에 오직 벌레와 이호연만 남아 있었다.
휴게실 창으로 늦은 오후의 햇살이 스몄다. 멍한 눈으로 판교 사옥 단지와 주차장, 탄천, 화랑공원을 천천히 훑었다. 드높아진 하늘은 가을의 특색을 뚜렷하게 보이고 있었다. 청명한 하늘에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멀리까지 갔다 되돌아온 시선이 테이블 위로 부서지는 햇살 조각에 닿았다.
“가을은 가을이네요.”
“그러게요. 또 한 해가 가네.”
송기현이 다 늙은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이번 가을은 좀 쓸쓸할 거 같아요.”
계절감을 크게 느끼며 살진 않았는데, 어쩐지 하늘이 너무 맑아 기분이 센티해지는 것 같았다.
“예준 님이?”
“왜요, 나는 가을 타면 안 되나?”
가을 탈 수도 있지. 허구한 날 일만 하고 벌레만 잡아 봐라. 씁쓸하지 않은가. 다들 어디서 그렇게 만나고, 연애들을 하는 건지. 나만 모르는 건가 싶다. 송기현이 놀랍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확실해. 만나네, 만나. 아니면 확신이 안 섰거나.”
아니라고 반박하기도 지겹다. 누굴 만나야 확신이 서도 서는 거지. 송기현의 말을 대강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예준 님은 돈 아니면 관심 없잖아요. 내가 예준 님 본 후로 봄가을 탄다는 말 한 번도 못 들어 봤는데. 소랑 님 남자 친구 생겼을 때나 다른 팀원들 데이트 이야기에도 시큰둥했었잖아요. 그리고 월요일마다 하는 스크럼에서도 물어보면 항상 집에만 있었다는 사람이 최근엔 좀 돌아다니는 거 같기도 하고. 돈 말고는 관심 1도 없는 것 같은 예준 님이 쏘다니는 느낌이니까 팀원들이 장난이랍시고 애인 생겼냐 물을 수밖에.”
주절거리는 말들마다 전부 맞는 얘기라 반박할 수 없었다. 침음을 삼켰다. 내가 그렇게 돈돈 거리며 살았나. 나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송기현을 흘겼다. 네가 돈돈 거리니까 나도 돈돈 거리는 거 아냐, 이 주식광아.
“지금 나 때문이라 생각했죠?”
“들켰네.”
송기현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자 그가 킥킥 웃었다.
에라, 모르겠다. 언젠가는 제 짝 찾아 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