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아주세요 1
[오늘의 앱 – 모아]
‘모아?’
화면을 바라보다 입속말을 중얼거렸다. 앱 스토어 투데이 탭에서 관성적으로 스크롤을 내리다 시선이 툭, 한 구간에 걸렸다. 이용자가 쉽고 편리하게 기능을 사용할 수 있도록 적절한 색과 폰트, 아이콘 등을 배치해 시스템 가이드로 만드는 GUI디자인팀 직무 특성상 몸에 밴 탐색 중이었다. 새로 출시된 게임인가 싶어 홀린 듯 배너를 눌러 상세 페이지로 진입했다.
<이웃과 즐겁게, 모아!>
다음 중 하나라도 해당한다면 <모아>를 시작해 보세요.
1.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고 싶은 사람.
2. 지역 기반의 동호회로 동네 지인도 사귀고 취미도 즐길 이 구역 엔터테이너.
3. 아파트, 오피스텔 공과금과 각종 관리비를 하나로 끝낼 스마트한 알뜰 살림꾼.
페이지 내의 소개 글귀와 이미지를 훑으며 위아래로 스크롤을 조작했다.
앱을 소개하는 스크린샷에서는 주요 기능을 보여주고 있었다. 중고장터와 동호회, 커뮤니티가 주요 서비스였고, 커뮤니티 탭에서는 아파트나 오피스텔 등록 인증 후 월세나 관리비 납부가 가능했다.
여기까지라면 다른 앱과 비슷하게 느꼈겠지만, 사용한 폰트나 디자인이 유독 깔끔하게 느껴졌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신규 플랫폼 서비스가 쏟아져 나왔다. 월마다 받아보는 UI/UX 리포트에는 듣도 보도 못한 앱들이 수없이 소개되었고, 얼마 후 투자를 받아 합병되거나 서비스 종료 안내조차 없이 사라져 있었다.
웅성대는 기척이 멀리서 느껴졌다. 근처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때운 개발자들이 우르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들은 제각기 흩어져 자리에 앉아 쉬거나, 삼삼오오 모여 휴게 공간으로 향했다.
통로를 가로지르던 개발 2팀 개발자가 내 앞에 멈춰 섰다.
“예준 님, 뭐 봐요?”
점심도 안 먹고 뭘 보고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나는 심드렁한 투로 “지역 커뮤니티 앱이요.”라고 짧게 대꾸했다. 그리고 귀찮음이 뚝뚝 떨어지는 표정을 정돈하며 휴대폰 화면을 그에게 슬쩍 보여 주었다.
“모아?”
“이 앱 아세요?”
“요즘 핫하잖아요. 거기 아마 시리즈 투자도 받았을 거예요. 저희 와이프도 쓰던데, 덕분에 강제 미니멀 라이프 실천하는 중요.”
“그래요? 흠, 그냥 다른 앱이랑 비슷해 보이는데.”
“디자이너 눈에야 그렇지. 위치 기반으로 인증해야 게시물을 보거나 등록이 가능하니까 사기당할 위험이 없는 거죠. 직거래니까.”
게시물을 바로 보여 주지 않고 수집된 위치 기반으로 제공하는 게 훨씬 안전하다는 말이었다. 듣고 보니 일리 있는 말 같았다.
그는 자리로 돌아가려다 말고, 헤벌쭉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한번 써 봐요. 거기서 사람도 만나고 하는 것 같더라고요. 예준 님, 애인 없지 않나? 원래 나이 들면 다 그런 데서 만나는 거예요.”
나는 키득거리며 자리로 돌아가는 그를 흘겨보았다. 저게 말이면 단 줄 아나. 지금이었으면 너는 결혼은 꿈도 못 꿨다. 그리고 아직 서른 초반이거든?
<13:00>
59분에서 1시 정각으로 바뀌는 순간, 휴대폰에 충전 단자를 꽂아 옆으로 치우고 최소화해 두었던 업무 파일을 화면에 띄웠다.
나는 지금 SG플레이를 다니면서 인생에서 가장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팀원들과 점심 외식 투어를 즐기고 왔을 텐데, 꼭 11시 30분 전후로 수정 건이 들어와 며칠째 편의점으로 때우고 있었다. 21세기 IT 기업에서 점심시간 확보조차 안 되는 게 말이 되냐.
아아, 적게 일하고 많이 벌고 싶다.
모든 직장인들이 같은 생각이겠지만, 가만히 있어도 돈이 벌리면 얼마나 좋을까. 잦은 이직으로 몸값을 부지런히 올려도 늘 부족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어휴, 이런 생각할 때인가.
메일과 협업 창을 번갈아 보다 목까지 차오른 한숨을 연거푸 내쉬었다.
업무, 회의, 가이드 수정, 전달, 다시 회의가 반복되며 오후가 빠르게 흘러갔다.
개발팀이 야근 식사를 하러 나가며 침중한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졌다. 서비스기획팀의 윤아영과 구일호 팀장은 장기화된 야근으로 얼굴이 반쯤 녹은 것처럼 보였다. 시선을 흘끗, 옆으로 기울여 팀원들을 둘러보았다. 기획팀보다 상대적으로 야근 빈도가 높지 않다고는 해도 시들시들해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야근 식사로 먹을 배달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잠시 숨을 돌렸다.
“앱 출시되면 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같은 팀 송기현이 넋을 잃고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기현 님, 다음 주 휴가 확정인 거 맞죠?”
“네에, 드디어요. 자꾸 휴가가 밀리니 얼마나 빡이 치던지.”
힘없이 말한 그가 눈살을 찡그리며 이글거리는 감정을 드러냈다. 화가 날 만했다. 희망 고문도 아니고, 신청했던 휴가가 계속 밀리니 오죽 답답했으랴.
SG플레이가 SG솔루션에 인수되며 자회사로 편입된 후, 다양한 프로젝트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다. 사세 확장을 위한 중요한 시기였기에 동료들도 그러려니 했지만, 지나치게 많다는 게 문제였다. 인수된 지가 언제인데 아직까지도 사내가 어수선했으니 말이다. 내부에서 사용하는 프로그램까지 다수 교체한다는 인트라넷 공지를 보곤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흉흉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해 본부장은 앱만 출시가 잘 된다면 연차 소진 없이 휴가를 보내 주겠다는 공약을 남발했다.
모든 일이 그렇듯, 계획대로 될 수는 없었다. 준비하던 앱 플레이짐의 베타 오픈 후, 자잘한 이슈가 계속해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사용성 검증을 위한 QA 승인까지 떨어진 앱이 갑작스럽게 꺼지거나, 사용자 행동 패턴 분석이 되지 않는 등 버그가 다수 접수되며 플랫폼 본부 전체가 살얼음판을 걷듯 촉각을 곤두세웠다. 사이드 이펙트가 지뢰처럼 터지는 마당에, 비상 체제로 돌입하게 된 것은 당연했다. 디자인팀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QA도 확인했다는데 무슨 버그가 이리도 많대요.”
투덜대는 송기현의 말에 동조하며 나 또한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 한두 번 겪어 봅니까. 개발을 거지같이 했거나….”
사무실에 남아 있는 개발자가 없는데도 눈치를 흘끗 보며 이채선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QA가 뭉갰거나. 개인적인 생각으론 QA가 뭉갠 것 같은데. 어휴, 휴가는 저도 가고 싶어요, 저도. 그대들은 팀원이라 가잖아요. 저는 언제 가 보나 싶습니다.”
그녀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게 기대며 푸념했다.
“예준 님은 화면 몇 개 더 쳐야 해요?”
이채선이 돌연 나를 보며 잔업량을 물었다.
“플레이짐은 마이 페이지 아이콘 하나만 더 수정하고 가이드 올리면 돼요.”
“오, 그럼 저녁만 먹고 튀튀 합시다. 소랑 님이랑 정우 님은?”
그녀는 맞은편에 앉은 다른 팀원들에게 각각의 업무량을 물었다.
“저는 진작 끝났어요.”
“저도요.”
두 사람은 벌써 마무리를 지은 듯했다.
“티저 사이트 디자인은요?”
“내일의 내가 할 겁니다.”
이채선이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그녀의 얼굴엔 피곤함이 가득했다.
“그래도 돼요?”
“개발도 말이 저녁 식사지 반주 걸칠 테고, 본부장도 없는데 우리라고 정직하게 남아 있을 필요가 있는지?”
이채선이 고개를 돌려 기획팀 자리를 바라보았다. 역시 팀장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 듯했다. 아무렴, 하루쯤은 미루는 담대함과 포부가 있어야지.
“일호 님, 아영 님, 저희 그냥 저녁만 먹고 가도 괜찮죠?”
“네?”
구일호가 안경을 고쳐 쓰며 이쪽을 봤다.
“본부장님도 안 계시고, 저희 지난주부터 탈탈 털렸는데.”
이채선이 투덜거리자 그는 제 후임인 윤아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영 님, 다른 이슈 없죠?”
“넵, 디자인 쪽 이슈는 없습니다.”
그녀의 답변에 구일호가 끄덕이며 디자인팀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세요, 가세요. 다들 고생 많으셨죠. 나머지는 기획에서 해도 되고, 크게 수정할 게 없는 이상 아영 님이 보고 조율하거나 제가 내일 지라에 댓글 달아 둘게요. 수고 많으셨어요.”
“두 분도 식사하고 일찌감치 정리해요.”
이채선의 말에 구일호가 손을 휘휘 저었다. 식사보다 휴식이 필요해 보이는 낯이었다. 나는 부쩍 지쳐 보이는 두 사람을 잠시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남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나 역시 당장 씻고 숙면을 취하고 싶었다.
“오늘도 고생 많으셨어요!”
“내일 봐요!”
“다들 조심히 들어가세요.”
“고생 많으셨어요!”
야근 없는 야근 식사를 마친 팀원들과 서둘러 짐을 챙겨 내려와 로비에서 인사를 나눴다. 평소보다 일찍 나오게 된 팀원들의 면면에 활기가 감돌았다. 묵직한 유리문을 바깥으로 밀어 내자 서늘한 바람이 머리칼을 헤집었다.
“저 약속 있어서 오늘은 이쪽으로 갈게요. 내일 봐요!”
넥슨 사옥을 향해 방향을 튼 송기현이 턱짓했다.
나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송기현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대단한 체력이지 싶다. 일에 찌들어 야근을 거듭했는데도 약속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
아스팔트를 뜨겁게 데우던 여름은 제 몫을 다하기라도 한 것처럼 다음 계절에게 바통을 넘기고 스러졌다. 그만큼 시간이 빠르게 지났다. 사라진 봄과 여름이 어렴풋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적막이 내려앉은 판교의 사옥 단지는 한적하고 고요했다. 여름이 다 가는 동안 제 짝을 찾지 못한 매미의 구애가 규칙적으로 귓바퀴를 돌고, 느린 바람이 길가에 심긴 나뭇가지 사이사이를 휘감아 간지럼 태웠다. 나부끼는 바람에 잎사귀가 사각사각 소리를 내었다.
나는 깊게 호흡하며 멀리 시선을 내던졌다. 꺼지지 않은 사옥의 불빛이 마치 불시울처럼 느껴졌다. 문득 지인들끼리 ‘구로의 등대’에 견주는 ‘판교의 불기둥’이라는 말장난을 수시로 주고받던 기억이 났다. 꺼지지 않는 불은 비단 게임 업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플랫폼 서비스를 내세우는 회사들이 우후죽순 늘어나면서, 관련 업계 종사자들도 야근 봇이 되어 버렸다. 일상이 된 야근에 제 한 몸 불사하며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어휴, 등대고 불기둥이고, 쉬고 싶다.
나는 버스 정류장 의자에 덩그러니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올해도 일만 하다 어영부영 하반기로 접어들었다.
고개를 들어 전광판을 확인하니 집으로 가는 버스는 12분을 기다려야 했다. 애매한 시간이네. 많이 안 더운데 걸어갈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으음.”
고민하다 결국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가만히 서 있을 때에도 ‘가을이 오는구나’ 싶었는데, 걸음을 떼니 뺨으로 스치는 바람이 여름의 밤공기와 확실히 달랐다. 미세 먼지 없는 상쾌한 공기가 폐부에 깊게 스미는 것 같아 입가에 절로 미소가 걸쳐졌다.
한 걸음, 한 걸음. 길게 뻗은 대로변을 걸으며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다운로드 받고 정리를 못 했네. 액정을 가만히 응시하다 화면이 3개로 나누어진 것을 확인하고 짧게 탄성을 내질렀다. 평소 앱의 성격에 따라 금융이면 금융, 포털이면 포털, SNS면 SNS로 정리해 폴더에 모아 두는 타입이어서, 널찍한 화면에 홀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아이콘을 보니 절로 미간이 모였다.
노란 아이콘을 눌러 앱을 실행했다. 스플래시가 3초 정도 떠올랐다가 메인 화면으로 떨어졌다. 이벤트 배너가 걸린 메인을 건조하게 내려다보다 중고 장터의 탭을 눌러 이동했다. 위치를 동의해야만 볼 수 있다는 팝업 창이 다시 떠올랐다.
[위치를 등록하면 내 주변의 많은 이웃과 만날 수 있어요! 위치 설정에 동의하시겠어요?]
동의 버튼을 눌렀다. GPS가 앱과 자동으로 연동되며 인디게이터가 돌았다. 내가 서 있는 위치를 기반으로 백현동과 판교동의 거래 리스트가 출력되기 시작했다. 작게는 옷이며 생필품 따위가 올라와 있고, 크게는 냉장고며 세탁기 등의 생활 가전도 게시되어 있었다. 구조 자체는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며 스크롤을 아래로, 아래로 계속해서 내렸다.
그렇게 한참을 내리다가, 나는 여타의 글들과는 다른 특이한 제목을 보고 찬물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우뚝 멈추어 섰다.
벌레 잡아주실 분
낙생원마을 근처 거주. 채팅에서 거주지 공개. 사기 치면 고소.
조건
-새끼손톱 반만 한 크기 1만 원
-검지 크기 3만 원
-그 이상의 크기 5만 원
-비행 능력이나 아이 컨택, 위협 등등 포획 레벨에 따라 [email protected] 추가 지급
*현금 즉시 지급 가능
뭐지. 이 구체적이고도 이상한 구매 글은.
고작 벌레 하나 잡겠다고 중고 장터에 글을 써 둔 건가.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걸음까지 멈춘 채 화면을 응시했다. 현금 즉시 지급이라는 메모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조건도 상세한 편인 데다, 먼저 사기에 대해 언급한 것으로 보아 벌레를 잡아주면 정말로 돈을 줄 것 같았다. 낙생원마을 근처면 이 근방이었다.
가만, 크기가 크면 금액이 더 커진다는 거겠지?
땅 파서 10원 한 장 안 나오는 세상 아닌가. 지독하게 피곤했지만 누군가 선점할까 싶어 얼른 작성자에게 채팅 요청을 보냈다.
-지원 가능한가요? 잡아 드릴게요.
채팅을 보내자마자 읽음 처리로 전환된 아이콘 표시가 빠르게 떠올랐다.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다. 나는 실소가 터지려는 것을 참으며 몸을 틀었다. 낙생원마을이면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했다. 멈췄던 걸음에 속도를 더하며 다시 회사 사옥이 있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지금 당장 오실 수 있나요? 서판교로 XX번 길. 바로 옆 블록에 브런치 카페 있고 주택 단지 길 바로 앞입니다. 밤이라 잘 보이지는 않겠지만 베이지색 벽돌로 된 집입니다. - Bugkiller]
오타 하나 없는 정갈한 답변이 돌아왔다. 그가 말하는 브런치 카페가 어디인지 대강 알 것 같았다. 이채선의 생일이었던 날, 그녀의 요청에 다 함께 택시를 타고 가서 브런치를 먹었던 곳이었다.
-10분 정도 걸리는데 괜찮으신가요?
[네, 최대한 빨리. - Bugkiller]
-거래 중으로 돌려 주세요. 빨리 가겠습니다. 아, 잡을 수 있을 만한 게 있나요? 비닐이나 휴지, 물티슈…, 그런 것들이요.
내 요구에 성격 급한 구매자는 바로 상태를 거래 중으로 돌렸다.
[네, 드려요. 말 그만하고 빨리요. - Bugkiller]
짜증 서린 말투에 나는 순간 눈가를 찡그렸다. 말투가 좀 거슬리긴 해도, 일단 가기로 했으니까…. 투덜거리며 보폭을 넓혀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크기별 금액을 산정해 둔 걸 보니 자주 출몰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쪽은 부자 동네 아니던가? 서울보다 땅값이 비싸다는 것을 들은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근린공원이 있고 조경이 잘 조성되어 있다고…. 그래서 벌레도 많은 건가? 머릿속을 떠다니는 물음표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뭐, 가서 보면 알겠지.
서둘러 걸으며 시간을 확인했다. 딱 십 분 컷일 것 같았다.
고가 도로 밑 그늘진 길가를 경보했다. 날이 더워지기 시작한 5월 말부터는 이쪽으로 자주 오진 않았지만, 몸이 대략적인 지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긴가민가할 때마다 지도 앱으로 현재 위치를 확인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백현동과 함께 판교의 부자 동네로 거론되는 운중동. 고급 저택들이 밀집해 있는 곳이었다.
송기현이 주식으로 한탕 거둬들이면 이곳의 저택 중 한 군데를 매매하겠노라 호언장담했었지.
나는 픽, 웃으며 당시를 떠올렸다. 뭐라고 했더라. 제약 회사와 게임 회사 주식은 무조건 손에 쥐고 있어야 한다고 했던가. 특히 게임주는 상장 시기에 공모주로 들어갔다가 정점이라 생각할 즈음에 팔아야 이익을 거둘 수 있다고 했었다.
물론 돈을 밝히는 그를 향해 속물이라거나, 핀잔을 둘 입장이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안다. 나 역시 돈돈 거리다가 판교로 이직한 사람이니까. 지금도 쉬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다가 현금 몇 푼에 남의 집에 가고 있지 않나.
지인들과는 매년 새해 인사로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말 대신 ‘적게 일하고 많이 벌라’는 덕담을 주고받았고, 지금 직장 역시 다른 곳들과 비교하여 가장 연봉이 높은 곳이라 선택했다. 돈이냐 워라밸이냐 복지냐. 그중 하나만 고르라면 다른 건 거들떠보지도 않고 돈을 가장 먼저 고를 터였다. 연봉이 높으면 다른 건 그럭저럭 따라오게 되어 있으니까.
내가 돈에 집착하는 것에도 다 이유는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가난이 그림자처럼 항상 뒤를 따라다녔다. 열아홉에서 스물로 넘어가는 해 겨울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부모님께 손을 벌리지 않고 학자금 대출을 받았다. 학교를 다니면서 미술 학원 강사와 디자인 프리랜서로 일을 하며 생활비를 보태기도 했다. 군대에 있었던 때를 제외하곤 일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그건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시작한 스물여섯에도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이공계열이나 개발 직군을 선택해야 했던 것은 아닐까 과거를 후회하기도 했다. 개발 프로세스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으니, 그쪽 머리가 아예 없는 건 아닌 것 같으니까. 아니면 처음부터 GUI디자인이나 게임 직군으로 커리어를 쌓았다면 더 많은 선택지가 있었을 것이다.
여하튼, 다른 업계에 비해 기획, 디자인, 개발의 연봉 테이블이 높게 책정되어 있어 IT 쪽만을 노려 이력서를 넣었다.
첫 회사와 두 번째 회사, 그리고 SG플레이까지. 두 번의 이직을 거듭하는 동안 몸값을 착실히 불렸다. 악착같이 돈만 좇다 보니 작년에 겨우 학자금을 전부 털어 냈고, 월세이긴 해도 제법 너른 평수의 집으로 이사도 했다. 스스로 치열한 인생이었다고 생각은 하지만, 다들 이렇게 산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뭐, 어느 정도 모인 후에는 혼자 맛있는 것도 사 먹고, 와인이나 비싼 술도 마셔 보고, 영화도 보러 다니며 나름대로 욜로의 삶에 충실하고 있기도 하고.
소득 수준이 올라갔다고 해도 현금 즉시 지급이라는 것은 마음을 크게 흔들기에 충분했다. 어쩌면 나는 아직 내 생활 수준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돈 싫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냐마는, 어렵게 살았던 기억이 본능적으로 다다익선을 외치고 있달까.
헉헉 가쁘게 차오르는 숨을 간헐적으로 내쉬었다. 벌레 하나 잡겠다고 여기까지 오게 되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참 궁색맞다 싶었다.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낙생원마을 근처에 도달했다. 구매자가 언급했던 카페가 눈앞에 보였다. 고요하기만 할 뿐인 골목 안쪽을 향해 고개를 빠끔히 내밀었다. 베이지색 벽돌로 지은 집. 이 근처가 맞는데, 주변이 어두워 색 구별이 잘 되지 않았다.
결국 나는 다시 모아를 실행했다. 메인 우측 상단의 알림 아이콘에 새 메시지를 뜻하는 빨간 점이 찍혀 있었다.
[어디쯤입니까. - Bugkiller]
[저기요. - Bugkiller]
[10분까지 1분 남았습니다. - Bugkiller]
언제는 말 그만하고 빨리 오라며. 나는 1분 간격으로 쏟아진 메시지를 보며 투덜거렸다. 사기 치면 고소라고 했지. 채팅 하나로 고소까지는 힘들겠지만, 약속한 시각보다 늦으면 정말 신고라도 할 기세였다. 서둘러 위치를 찍어 보내며 구매자가 현관 밖으로 나오길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간 기다렸을까, 바로 앞 단독 주택 현관문이 열리며 장신의 남자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환한 불빛을 등진 그가 주변을 두리번대다 나를 발견하고는 턱짓으로 가까이 다가오란 제스처를 했다.
“딱 맞춰 오셨네요. 그대로 잠수신가 했습니다.”
딱딱하고 냉소적인 어조가 사무적으로 느껴졌다. 주춤주춤 남자의 앞에 다가서 침을 꿀꺽 삼키며 눈치를 보았다.
“집 가는 길에 다시 돌아온 거라 조금 늦었어요.”
우물쭈물 대답했다. 늦은 것도 아니고 십 분 정도 걸린다고 미리 말해 두었는데, 어쩐지 변명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어서 들어오세요.”
남자가 현관문을 활짝 열었다. 나는 그의 안내에 따라 발을 떼었다. 신발을 벗고 복도 위로 올라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길쭉하게 뻗은 복도는 넓고 쾌적했다. 외화에나 나올 법한 주택 구조였다. 복도 끝으로 시선이 닿았다. 정면에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보이고, 좌측과 우측으로 공간이 나누어져 있었다.
“손님용 실내화 신어 주세요.”
남자가 실내화 걸이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넋을 놓고 내부를 둘러보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엉거주춤 허리를 굽혔다. 그의 요구에 따라 연회색 실내화를 왼발과 오른발에 한 짝씩 꿰어 신었다.
몸을 바로 세운 후 다시 집 안을 뜯어보았다. 입구부터 눈이 안 부신 곳이 없다. 높은 천장에서 떨어지는 조명이 구석구석을 밝혀 주었고, 복도 벽면에는 임파스토 기법으로 그려진 묵직하고 고고한 기품이 느껴지는 유화들이 일정 간격을 두고 걸려 있었다. 미끄러지듯 시선이 기울었다. 먼지 하나 없는 액자 틀은 반질반질 깨끗하기만 했다.
나는 잠시 숨을 죽였다. 이런 곳에 벌레? 가당키나 한 일인가.
뒤에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완전히 닫혔다. 큰 울림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았다. 어두운 곳에서 역광으로 비추어진 모습을 보았을 때는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부분인데, 남자의 얼굴은 모난 구석 하나 없이 깨끗하고 단정했다. 그제야 족히 190은 되어 보이는 남자의 키가 눈에 들어왔다.
냉소적인 분위기와 큰 체구에서 오는 위압감에 슬그머니 주눅이 들었다. 새까만 눈동자가 건조하게 나를 꿰뚫듯 바라봤다.
“아, 그, 저기….”
당황한 내가 말을 더듬자 남자가 거리를 좁혀 왔다.
벌레 잡는 게 맞나?
한 발.
정말 이런 곳에 벌레가 나온다고?
또 한 발.
이렇게 깨끗한데?
마지막으로 한 발.
벌레가 들어왔다가 발을 헛디뎌 미끄러져 죽을지도 모를 만큼 깔끔한데?
남자가 바로 코앞으로 다가오는 동안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뒤덮었다.
미, 미친. 사실 벌레는 미끼였고 연쇄 살인마나 범죄자 아냐? 요즘 범죄자들 인상이 그렇게 선하다던데. 우락부락하지 않고 이웃 주민처럼 친근하게 생겼다며. 크게 부릅뜬 눈이 긴장으로 잘게 떨렸다. 뻐끔뻐끔 아가미 호흡을 하듯 입만 벙긋대고 있자 남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뭐 하세요.”
“네, 네??”
“벌레 잡으러 오셨잖아요. 거실에 있어요. 지체하면 2층으로 갈 수도 있겠죠. 하아, 그게 온 집 안을 헤집는다고 생각하면 미칠 지경이니까 빨리 좀 합시다.”
짜증 서린 메시지에 입체감이 더해지면 이런 느낌일까.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다급함과 스트레스, 분노가 한데 뒤엉킨 표정에서 그가 얼마나 지쳐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뒷걸음질 치다 주먹을 꾹 쥐었다. 벌레 맞구나. 괜히 쫄았네. 남자의 냉랭한 태도와 낯선 곳에 낯선 사람과 함께 있다는 상황에서 오는 긴장감 때문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주먹을 쥐었다 펴며 거실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복도 끝에 다다라 우측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실은 복도와 마찬가지로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소파와 러그가 보였고, 적당한 간격으로 배치된 장식장과 TV에 아늑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두리번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어떤 벌레인데요?”
“몰라요. 작았습니다. 만 원짜리였어요.”
새끼손톱 반만 한 크기라는 말이다.
“…바퀴는,”
“바퀴는 아닙니다. 그 단어는 입에 담지도 마세요.”
말을 단박에 자르며 차갑게 일갈한 그가 주먹을 꽉 쥐었다. 바퀴벌레가 있었다면 이 집을 당장에라도 팔아 버릴 기세였다. 나는 머릿속에 남자의 최악의 벌레 리스트 1순위에 바퀴벌레를 올려놓으며 고개를 설설 흔들었다. 저렇게 벌레를 싫어하는데 왜 공원 근처에서 살지? 이런 집에 살 정도면 다른 데도 쉽게 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바, 아니, 그 작은 벌레를 어디서 보셨는데요?”
“소파 뒤쪽이요.”
“언제 보신 건데요?”
“글 올렸을 때 실시간으로.”
남자가 처음 벌레를 목격한 시간을 가늠해 보면 약 13분 전이 된다. 보통 벌레라고 하면 두 다리에(두 개가 아닐 수 있지만) 자아가 강한 편이라 여기저기 들쑤시지 않나? 그리고 이미 발견 시점에 2층을 활보하다 내려온 것일 수도 있는데….
가정집에 출몰하는 벌레는 외부 유입인 경우가 많다. 특히나 이런 집에서 발견됐다면 바깥에 있다 길을 잃고 들어왔을 가능성이 짙었다.
흠, 어찌 되었든 한 군데에만 있었을 리는 만무한데…….
“일단 볼게요.”
그는 복도 벽에 기대어 선 채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이 다가갈 생각은 없으니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거실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인 소파 근처로 다가가 주변과 뒤편을 빙그르르 한 바퀴 돌다 납작 엎드렸다. 처음 발견했을 당시 소파 뒤쪽에 있었다면 이쪽 먼저 살펴봐야겠지.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 갔을 수 있지만, 소파 뒤와 밑, 틈새를 꼼꼼히 살폈다. 눈에 힘을 주고 벌레처럼 생긴 생명체를 찾기 위해 바닥을 엉금엉금 기었다. 무릎으로 세 걸음 정도 나아갔을 때, 소파 모서리 부근에서 벌레의 동그랗고 작은 몸집이 눈에 띄었다. 벌레와의 조우가 반가울 날이 올 줄이야.
“찾았어요!”
“…잡으세요. 빨리.”
“어, 잠시만요. 손이 닿으려나. 휴지나 물티슈 좀 주세요.”
엎드렸던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남자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뒤쪽으로 향했다. 아, 거실 맞은편이 주방인가 보다. 금세 다시 돌아온 그의 손에는 비닐장갑과 물티슈가 들려 있었다. 저걸로 직접 잡으면 될 것 같은데. 맨손이 어렵다면 비닐장갑을 끼고, 물티슈를 왕창 뽑아서 쿠션감 있게 죽이면 되겠구만. 나는 속으로만 구시렁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주세요.”
“…그 근처로는 못 갑니다.”
“네…?”
“그 벌레가 저한테 오면 어떡합니까. 직접 받아 가세요.”
“아니, 얘는 누굴 공격할 사이즈가 아닌데요.”
“그걸 어떻게 압니까.”
나는 말을 잃고 얼빠진 표정으로 남자를 보았다. 날지도 못하고, 동그란 몸을 가지고 기어 다니는 것 말고는 딱히 재주가 없는 자그마한 벌레였다. 더구나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종이기도 했다. 지렁이처럼 흙에 공기를 통하게 하는 종이라 오히려 익충이라 볼 수 있었다. 다른 벌레, 예를 들면 바퀴벌레에 비하면 애교 수준인 콩벌레가 무슨 힘으로 성인 남성 두 명을 공격한단 말인가.
애써 한숨을 집어삼키며 무릎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곧 만 원을 받을 수 있으니까. 만약 콩벌레가 아닌 조금 더 큰 사이즈의 벌레였다면 3만 원에서 5만 원의 보수를 받았을 것이다. 남자가 적어 둔 것처럼 비행 능력이나 아이 컨택 등등의 플러스알파 요소를 가졌다면 그 이상이었을 테고.
남자에게서 물티슈를 받아 다시 소파 가까이 다가섰다. 벌레의 위치를 확인했던 것처럼 몸을 낮추고 손을 뻗었다. 소파를 기던 콩벌레가 바닥으로 톡, 떨어졌다. 뒤집힌 벌레가 아등바등 허우적대었다. 물티슈를 덮고 그대로 손에 힘을 주었다. 동글동글한 벌레가 짜부라지는 감각이 그대로 손끝에서 느껴졌다.
“잡았어요.”
“죽었습니까?”
“네.”
여기요. 콩벌레의 사체가 든 물티슈를 남자에게 들이밀었다. 그가 움찔, 어깨를 떨며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는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그의 등은 이미 복도 벽에 닿아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 그가 시선조차 주지 않고 입을 열었다.
“들고 나가서 버리세요.”
“네?”
“족히 300미터는 벗어나야 합니다. 아무리 사체라도 벌레는 여기 있으면 안 됩니다.”
이건 또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다른 가정집에서는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는데요? 이 쓰레기를 나보고 들고 가라고? 전리품이야 뭐야. 나는 멍한 낯으로 남자를 올려다보다 이내 표정을 구겼다. 기가 차서 코웃음을 치는 내게 그는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제 할 말만을 했다.
“부탁, 드립니다. 저걸 집 쓰레기통에 버리면, 다른 벌레가 또 생길 수 있지 않습니까.”
높낮이 없이 쌀쌀맞던 남자의 어조가 순간 수그러들었다. 그는 쓰레기를 자주 버리는 편이긴 하지만, 잠깐이라도 벌레 사체가 제집 쓰레기통에 있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고 덧붙였다. 동물 사체 냄새를 맡고 하이에나나 천적이 모이는 것도 아니고, 대체 뭔…. 무어라 대꾸하려다 남자의 어두운 안색을 보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알겠어요. 제가 가면서 버릴게요.”
“300미터…….”
네에. 알겠다고요.
“그래도, 급하게 구한 거치곤 능력이 좋으시네요. 잘 잡으시고….”
“칭찬입니까?”
어처구니가 없어 물었다. 벌레를 잘 잡는 게 언제부터 능력이 되었나. 살다 보니 별소리를 다 듣는다.
“이렇게 건 바이 건으로 하는 것보다 전문 업체를 부르는 게 더 나을 텐데요.”
위생 전문, 청결 전문의 유명 업체가 있는데 굳이 앱에서 벌레를 잡아 달라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장난으로 치부하여 넘길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악용하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 사람이 무른 건지, 아니면 정말 급박했던 건지.
“그것까진 생각 안 해 봤습니다.”
“한번 찾아보세요. 저도 잘은 모르지만, 평수로 해서 견적이 나올 거예요. 아마 초기 비용만 꽤 들고 개월로는 몇만 원 선일걸요. 검지보다 더 큰 벌레에 5만 원이라고 적어 두셨던데, 아마 그것보단 쌀 테니까….”
주절주절 설명을 이어 가다 멈칫 말을 멈추었다. 굳이 내가 설명해 줄 이유가 있나 싶었다. 혹시나 큰 벌레가 나왔을 경우 그 5만 원이 내 돈이 될 수도 있는 건데. 남자를 향해 흘끗 시선을 던졌다. 단타성인 건가? 크기별로 나열한 걸 보면 꾸준히 잡아줄 사람을 구하는 것 같던데. 모르겠다. 필요하면 또 부르거나 업체를 이용하겠지. 나는 잡생각을 떨쳐 내며 복도를 향해 발을 떼었다. 그는 내 손에 들린 물티슈를 인식한 듯, 일정 거리를 두고 나를 뒤따랐다.
“저기요.”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댁이 어딥니까.”
느닷없는 호구 조사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몸을 틀었다. 어디긴 어디야, 이 근처니까 당신 글을 본 거지.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회사는 테크노밸리 쪽이고, 집은 야탑동 근첩니다. 게시물은 회사 근처에서 봤어요.”
대강 대답하며 다시 현관 쪽으로 다가섰다. 복도 마루 끝에 다다라 실내화를 벗기 전 다시 뒤를 돌았다.
“아, 맞아. 만 원 주세요.”
나는 말라 가는 물티슈 덩어리를 들어 남자에게 보였다. 그가 뒷주머니에서 반지갑을 꺼냈다. 빳빳한 지폐 한 장이 그의 손에 딸려 나왔다.
“설마 그 만 원도 제가 받으러 가야 하는 건 아니죠?”
“…그건 아닙니다.”
남자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거참, 겁도 많으시지. 이미 죽은 벌레고 내가 쥐고 있는데 무슨 위협이 된다고. 나는 그가 건넨 만 원을 손에 쥐며 해죽 웃었다. 만면에 자본주의의 미소가 번졌다. 그래, 콩만 한 작은 벌레 하나 잡고 만 원이면 선방이지. 최근 아르바이트 시급이 얼마였더라. 학부 시절에 호프집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는 4천 원 초반이었던 것 같은데. 얼마가 되었든 과거나 현재의 시급보다 훨씬 후한 값이었다.
“참고로, 이 집에 오래 살 건 아니어서 말씀하신 업체를 부르는 건 좀 그렇습니다. 게다가 평일에는 출근을 하기 때문에 저녁 늦게나 집에 옵니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라도 처리하는 게 나은 거고요.”
“그렇군요.”
돈을 받은 나는 남자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이미 상부상조하여 서로 득을 취했으니, 더 들을 것도 없었다. 조금 더 컸다면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볼일은 끝났다. 퀘스트 지령에 따라 벌레를 깔끔히 해치웠고, 보상을 수령했다. 그걸로 끝인 것이다.
나는 현관문 문고리로 손을 뻗으려 했다.
“잠깐만요.”
남자가 신발장 벽 쪽으로 붙으라며 나를 밀어 냈다.
“혹시 모르니까요.”
남자는 벌레를 죽인 내 손에 벌레의 체취가 묻기라도 한 것처럼 몸서리를 치며 손수 현관문을 열었다. 나는 신발장에 등을 기대고 서서 멍청하게 그가 하는 행동을 바라보았다. 그는 열린 문이 다시 닫히기 전에 나가라는 듯 내게 눈짓을 보내왔다.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는 눈빛을 그에게 쏴 주며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에휴, 집에나 가야지. 구시렁대며 걸음을 떼었다.
“저기요.”
남자는 자신의 행동이 스스로도 조금은 민망했던 모양인지, 현관 앞 대리석 계단을 내려가는 나를 불러 세우고는 덩치에 안 맞게 우물쭈물 뜸을 들였다.
“제가 벌레를 좀, 좀 많이 싫어합니다. 일반적인 사람보다 더요.”
“…아, 예, 그러시군요…….”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해한 것도, 양해한 것도 아니었다. 할 말이 없으니 그러냐고 대꾸한 것뿐인데, 남자의 안색이 조금 전보다 약간 밝아졌다.
남자가 현관 문설주에 기대어 서며 입매를 달싹였다.
“그래서 말인데.”
“네…?”
“또 나타나면 잘 좀 부탁드립니다. 회사가 테크노밸리 쪽이면 여기와 가깝기도 하고…, 왠지 큰 것도 잘 잡으실 것 같거든요.”
조금 전 벌레를 잡는 것이 대단한 능력이라도 되는 양 하던 말이 진심이었던 걸까. 너무나 진지한 그의 얼굴을 보자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초면인 나에게 농담을 건네는 것도 아닐 테고. 남자의 성격 자체도 딱딱해 보였고, 시종일관 무표정과 냉소적인 태도였던 점을 고려한다면 그는 지금 굉장히 진지한 상태였다.
그렇다고 그런 앱에 글을 쓰는 게 일반적이진 않잖아요, 아저씨.
이 커다란 남자가 작은 벌레를 앞에 두고 기함하여 중고 장터에 글을 열심히 적어 내렸을 모습을 상상하니 등허리에 소름이 좌악 끼치는 듯했다. 생긴 거랑 진짜 안 어울리네.
“하하, 좋은…, 아르바이트인 것 같네요.”
어색하게 대꾸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죠? 그쪽 입장에서도 돈도 벌고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남자가 악수를 청하기 위해 손을 내밀려다 화들짝 놀라 다시 거둬들였다.
“…악수는 다음에 받을게요.”
그의 원맨쇼에 내 입가가 잘게 경련했다. 외모와 상반되는 태도가 좀 깨긴 했지만, 돈도 바로 주었고 염려했던 것처럼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요. 앱 알람 켜 두세요.”
세 번 메시지를 보내는 동안 답이 없었던 것을 마음에 담아 두기라도 한 걸까. 그는 내게 앱 푸시 설정을 켜 둘 것을 요구했다.
서로 꾸벅꾸벅 인사를 두어 번 주고받은 뒤, 남자가 안으로 들어가며 현관문이 닫혔다.
나는 완전히 말라 버린 휴지 조각을 손에 쥐고 왔던 길을 되돌아 언덕을 내려왔다.
다음 날, 알람조차 울리지 않았는데 눈이 떠졌다. 몸을 좌측으로 돌려 탁자 위 휴대폰으로 손을 뻗었다. 아직 울리기 전인 알람을 해제하고 졸음이 가득한 눈을 비비며 힘겹게 상체를 일으켰다.
또렷해진 시야 끝에 책상 위로 아무렇게나 올려 둔 만 원 지폐가 보였다.
벌레 잡기 아르바이트라니.
그리 큰돈은 아니지만 하나 잡는 데 만 원이면 이득이라고 볼 수 있다. 어릴 때 좁은 집에 살며 온갖 벌레들을 맞닥뜨렸던 경험이 이렇게 돌아오다니. 이런 일도 다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벌레라면 치가 떨린다던 남자의 표정이 떠올라 실없는 웃음을 입가에 머금었다. 다음에 가게 된다면 어제보다 큰 놈이 나와 주면 좋겠는데.
상체를 뒤로 물리며 다시 몸을 눕혔다. 간밤에 고작 십 분 정도 경보한 것이 전부인데, 언덕을 올라서 그런지 다리에 약간 알이 배긴 것 같았다.
이상했다. 평소였다면 피로감에 못 일어났을 텐데. 집에 오자마자 씻고 바로 잠이 들어서 그런가.
나는 누운 채 휴대폰을 만지작대다 메인 레이아웃을 빤히 바라보았다.
[모아]
그러고 보니 앱을 어느 폴더에 넣을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페이지가 늘어난 것이 계속 눈에 거슬린다고 해야 하나. 디자이너라는 직업 때문인지, 아니면 내 성격이 이상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레이아웃이 틀어지니 무척이나 신경이 쓰였다. 기존 폴더에 넣기에는 앱의 성격이 모호했다. 관계 형성의 측면을 보면 소셜이 맞는 것 같은데, 장터가 있어 커머스로 구분이 가능했다. 기타 폴더나 참조 폴더에 넣는 것도 아니었다. 거기엔 설정이나 계산기 같은 것들이 들어가 있으니까.
한동안 고민하다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좀 더 지켜볼까. 어차피 당분간은 벌레 잡는 데에만 쓸 것 같은데. 그것 외에 다른 쓸모가 생긴다면 그때 정리를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노란색 앱 아이콘을 톡 건드렸다. 자연히 중고 장터 메뉴로 손가락이 향했다. 리스트에 출력된 콘텐츠보다 채팅 창 아이콘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채팅 목록에는 전날 남자와 주고받은 대화가 남아 있었다.
나는 그와 나누었던 대화의 스크롤을 처음으로 올려 보았다. 잡으러 가도 되냐는 물음에 미리 써 두고 기다린 것처럼 냉큼 집 주소를 답한 그와의 대화가 시트콤의 한 장면 같았다. 생각할수록 웃기는 사람이네. 키득거리던 내 시선이 남자의 프로필로 향했다. 프로필 페이지에 보이는 남자의 닉네임에 “푸핫.” 웃음이 절로 터졌다.
왜 어제는 닉네임을 제대로 못 봤을까? ‘Bugkiller’라니, 죽이지도 못하면서 버그 킬러가 뭐야. 장래 희망을 닉네임으로 적어 둔 건가. 나는 혼자 키득거리다 마이 페이지에서 닉네임 편집 아이콘을 눌렀다. 고민하다 자판을 영문으로 전환하여 새로운 닉네임을 적어 내렸다.
‘RealBugkiller’
사전에는 없는 말이지만 적당히 번역하면 진짜 벌레 살인마, 진짜 벌레 사냥꾼 정도가 될 것이다. 아, 그냥 헌터나 마스터를 붙일 걸 그랬나? 좀 더 멋진 단어로 닉네임을 바꾸고 싶은데, 마땅히 떠오르는 단어가 없었다. 나는 혼자 헤실 웃다 휴대폰에 충전기 선을 꽂고 몸을 일으켰다.
『플랫폼 본부 GUI디자인팀, 정예준, 09:28, 출근 기록 확인.』
사무실로 들어오자마자 안면 인식 태블릿에 얼굴을 비추고 출근 승인 메시지가 떠오른 것을 확인했다.
광고 가이드와 외부용 컬러 가이드를 제작하기 위해 30분 정도 일찍 출근한 거였다. 스케치 아이콘을 클릭해 최근 작업 파일을 실행했다. 막바지에 다다랐기에 하루 이틀만 더 고생하면 되었지만, 그 하루 이틀도 지겹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어, 예준 님, 일찍 나오셨네요?”
윤아영이 통로를 지나가며 인사했다.
“어제 튀었잖아요. 원래대로라면 어제 아이콘 작업하고 광고 가이드 시작했어야 했거든요.”
내 설명에 그녀가 희미하게 웃었다. 전날의 내가 다음 날의 나를 믿고 퇴근했으니 책임을 져야 했다.
“광고 가이드요? 그건 여유 있어요. 어제 요청한 아이콘 수정 건은 지라에 코멘트 달아 주신 거죠?”
“네, 지라에 댓글 달아 놨어요. 아니면 제플린 가이드 새로 고침 해 주셔도 되고요. 추가 설명 필요하시면 캘린더 빈 시간으로 미팅 콜 주셔도 되고.”
“어련히 잘해 주셨겠죠. 예준 님은 항상 가이드 잘 잡아주시니까.”
항상은 아닌데요. 나는 머쓱하게 뒷머리를 매만졌다.
다른 날에 비해 비교적 무난하게 오전이 흘러가고 있었다.
“회의 좀 다녀올게요.”
이채선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눈살을 찌푸렸다. 나를 비롯해 송기현, 정소랑, 김정우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리드급 회의라네요.”
느닷없는 리드급 소집에 이채선이 회의실로 불려 가게 되었다. 뒤를 돌아보자 기획팀의 구일호 팀장과 개발팀장들도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서는 게 보였다. 같은 팀 송기현과 정소랑, 김정우는 누군가 우리가 전날 튄 것을 찌른 것 아니냐며 낄낄거리다 숙연해진 분위기로 팀 채팅 방에서 메시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누가 진짜로 찌름? - SG 송기현]
[에이, 설마요. 본부에 똘끼로 똘똘 뭉친 인간이 있을 리가. - SG 김정우]
어제저녁, 사무실에 마지막으로 남았던 사람은 GUI디자인팀을 제외하고 기획팀의 구일호와 윤아영뿐이다. 이제껏 함께 일해 온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두 사람이 찔렀을 리는 없었다. 적어도 그들은 아군에 가까웠다. 아무래도 같은 비개발 조직이라는 내적 친분이 있으니까.
[근데 양심 무엇? 곧 점심시간인데요. - SG 정소랑]
회의를 이 시간에 하다니요. 덧붙여진 메시지에서 강렬한 분노가 느껴진다. 정소랑은 11시, 1시 미팅과 6시 미팅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11시와 1시는 점심시간 전후이고, 6시는 퇴근 한 시간 전이기 때문이다. 지독하게 밥과 퇴근에 맞춰진 인간이다. 그리고 나와 다른 팀원들 역시 그녀의 습성과 닮아 있었다.
-어떤 회의일지 궁금하긴 하네요. 무슨 놈의 회사가 바람 잘 날이 없어. 월급 빨리 들어오는 거 말고는 장점이 1도 없다 1도.
그나마 정상적인 답변을 한 나는 엔터를 탁, 소리 나게 내려쳤다.
[장점 있는데요? 우리 팀원들. - SG 송기현]
-그렇게 말하면 저만 나쁜 사람 되는 것 같잖아요.
저런 나쁜 송기현. 주식 광에 같은 물질만능주의자면서 인정 넘치는 체하기는. 능글맞게 히죽이는 꼴을 보고 있자니 괜히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렇게 말하면서 매일 어떤 JD(Job Description, 채용을 하는 포지션의 상세 직무 개요로 보통 헤드헌터가 이직을 원하는 사람에게 보낸다)가 들어왔는지 메일함을 뒤적거리는 걸 누가 모를 줄 알고. 더구나 개미 주제에 주식으로 운중동 저택을 매매하겠다는 장대한 꿈부터가 글러 먹었다. 아, 가능할지도 모르지. 내생, 아니 후후후생에서는.
-그래도 저는 주식은 안 해요. 패가망신이라고.
[푼돈 모아 봐야 소용없어요. 인생 한 방입니다. - SG 송기현]
-그렇게 훅 가죠, 훅.
푼돈이라는 이야기에 괜히 눈가가 움찔했다. 간밤의 벌레 소동이 떠오른 탓이었다.
[아, 그만 좀 해요. 11시 50분에 나가야 줄 안 서는데…. - SG 정소랑]
[53분이다. 망할. 우리 팀장 내놔. - SG 김정우]
-기현 님, 나중에 옥상에서 봐요. 근데 우리 오늘 뭐 먹나요.
메뉴를 묻자 각자 먹고 싶은 메뉴에 대한 블로그 링크를 올리기 시작했다. 빠르게 올라가는 채팅 창과 별개로 내 신경은 회의실에 집중되어 있었다. 자리에서 회의실 내부가 일부 보여 슬쩍슬쩍 눈을 굴렸다.
참석자는 총 여덟 명. 대표 이사와 CFO, CTO를 주축으로 본부장, 개발 1, 2팀장들, 서비스기획팀장, GUI디자인팀장이 자리했다. 떠드는 쪽은 주로 높으신 분들로, 이채선은 시선을 내리깐 채 입을 꾹 다물고 무언가 노트에 끄적거리고 있었다. 아니 저럴 거면 다 정해서 통보를 해 줄 것이지 왜 귀한 남의 팀장을 데려갔나. 어차피 디자인 파트는 까라면 까는 조직인데. 나는 시선을 내려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메뉴를 묻는 글에 가장 열렬히 답한 사람은 정소랑이었다. 그녀는 부대찌개, 국밥, 일본식 라면, 감자탕, 국수 등을 읊으며 회사 건물과 가까운 식당에서부터 먼 곳까지 차례로 URL 링크를 채팅 창에 공유했다.
[아, 57분. 아, 아악. - SG 정소랑]
끝내 자아가 붕괴된 듯 정소랑은 매우 분개했다. 벌게진 낯으로 거친 숨을 몰아쉬기까지 했다. 누가 보면 밥도 안 주고 노예처럼 부리는 줄 알겠네. 대각선에 앉은 그녀에게 흘끔 시선을 주었다. 물론 나 역시도 초조해지긴 마찬가지였다. 다리가 떨렸고, 손톱을 뜯고 싶어졌다. 저 고루하고 지겨운 회의는 언제 끝날 것인가.
점심시간이 딱 한 시간만 주어지는 건 아니었다. 채용 사이트에 점심시간은 열두 시 반에서 한 시 반으로 적혀 있지만, 팀마다 유동적으로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정도 쓸 수 있었다. 내가 속한 디자인팀은 열두 시부터 한 시 반 정도까지가 점심시간이었다. 딱 정해서 나간 적은 거의 없었다. 보통은 십 분 정도 일찍 일어나곤 했는데, 멀리까지 걸어갔다 올 경우에는 열한 시 반에 일어난 적도 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줄을 서기 싫어서.
하여튼, 회사의 복지는 나쁜 편이 아니다. 오히려 좋은 편에 속했다. 지금까지 다닌 회사 중 가장 좋다고 말할 수 있었고, 이것저것 지원하는 게 많았다. 취업 포털이나 회사에 대해 평가를 하는 사이트에서도 그나마 양심적인 연봉 테이블과 복지가 장점으로 꼽히고 있었다. 회사 제휴의 헬스장과 콘도를 제한 없이 이용 가능했고, SG솔루션 자회사 편입 후 솔루션 측 복지를 플레이로 가져와 추가하거나 확대해 적용했다.
본부별로 차이는 있지만 내가 속한 본부는 주어진 일만 잘하면 그만이라는 분위기라 데드 라인만 잘 지킨다면 간섭이나 강요가 많지 않았다. 야근 시 저녁 식대를 제공하며, 밤 열 시가 넘어가면 택시비도 지원해 주는 회사였다. 어제 같은 경우엔 아홉 시 이전에 퇴근했기 때문에 택시비가 나오지 않았지만, 열한 시가 넘는 날이면 업무 택시를 불러 편안히 귀가했다. 눈치껏 주에 1, 2회 정도만 이용했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단점을 굳이 꼽자면 위치가 판교역에서 꽤 멀다는 점? 역에서 도보로 15분이니 버스나 자차로 통근하는 사람들이 아니면 계절이 돌 때마다 사옥 이전에 대한 글이 익명 커뮤니티에 간간이 올라오곤 했다. 그 밖에는 윗선의 꼰대 문화가 얕게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지금이야 물갈이로 많이 사라졌지만,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00년대나 10년대 초반의 향수를 잊지 못하고 임원들 취미 생활에 직원들을 소환하곤 했다. 등산과 골프 월례회, 테니스 등. 어찌나 야외 활동을 좋아하는지, 내가 IT 회사를 다니는지 스포츠 센터를 다니는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매주 행사가 있었다. 물론 그마저도 커뮤니티에 등판한 정의의 사도가 ‘지극히 IT답지 못한 꼰대 문화’라는 글을 적음으로써 사라지는 분위기로 흘러가게 되었지만.
[답은 하납니다. 채선 님 버리죠. - SG 김정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진작 말을 했다면 49분에 그녀를 버리고 50분에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것이다. 나중에 팀장이 왜 자길 버렸느냐고 묻는다면, 김정우를 가리키면 그만이었다. 저놈이 나쁜 놈이며, 팀장을 버리자는 말을 스스럼없이 했다고 알려 주면 된다. 말을 꺼낸 이가 김정우였으니 틀린 소리도 아니다.
“…일어나실까요?”
김정우는 다들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이라 생각했는지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잇, 우리 밥 다 먹고, 커피도 마시고, 산책도 십 분 하고 와요.”
정소랑이 자리를 털었다.
“좋다, 좋아. 바로 일 시작하면 속이 더부룩해. 산책 필수라고.”
송기현도 일조했다.
마지막으로 나까지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엉거주춤 일어섰다.
그러나 이렇게 가자고 분위기를 잡으면, 꼭 회의가 끝나기 마련이었다. 우리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회의실 문이 열리며 리드급들이 우르르 빠져 나왔다. 나와 다른 팀원들은 아닌 척 후다닥 의자에 제 엉덩이를 붙였다. 그러면서 각자 모니터를 보거나 휴대폰을 보는 등 바쁜 시늉을 했다. 다들 모른 체하는 솜씨가 배우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자연스러웠다.
부쩍 수척해진 이채선이 자리로 돌아와 책상 위에 수첩을 내려놓았다.
“이젠 팀장을 막 버리네.”
그녀는 영혼 없이 짝짝 손뼉을 쳤다. 열두 시에 맞추어 나오지 않았다면, 분명 버려졌을 것이다. 하지만,
“에이, 아닙니다. 회의실에 쳐들어가려고 했어요.”
정소랑이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맞아. 우리 팀장 내놓으라고 하려고 했다고요.”
김정우는 아첨꾼이 되어 있었다.
“무슨 이야기 했어요?”
송기현이 그나마 정상인의 범주에 가까운 물음을 내놓았다.
“일단 가면서 얘기해요. 안에서 말하기엔 사심이 섞일 거 같네요.”
이채선이 턱짓했다.
“우리 한 시 반에 돌아오죠.”
그녀는 우리가 듣고 싶었던 가장 중요한 말을 입에 담았다. 정소랑과 김정우가 반색하며 그녀의 오른팔, 왼팔이라도 되는 것처럼 양옆에 섰다. 마치 그녀를 수호하기라도 하듯, 나와 송기현 역시 그녀의 뒤에 섰다.
점심 메뉴는 낙곱새였다. 매콤한 게 당긴다는 이채선을 거역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자리에 앉아 지글지글 익어 가는 빨간 국물로 다섯 쌍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짧게 이어진 적막을 깨뜨리고 가운데 앉은 팀장이 돌연 실소를 터뜨렸다. 입만 산 네 사람이 유일하게 조용해지는 타이밍이 음식을 기다리거나 씹고 있을 때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회의 엄청 길던데, 무슨 이야기 한 거예요?”
나는 국자와 집게를 번갈아 사용해 낙곱새가 눌어붙지 않도록 조절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아, 염병.”
팀장이 욕설을 내뱉었다.
“예준 님한테 욕한 거 아니에요. 다시 생각하니 속에서 막 천불이 나서.”
그녀가 깊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려 했다. 때마침 지나가던 종업원이 이제 먹어도 된다고 말했고, 일단은 한 숟갈씩 덜어 놓고 시작하자며 분주히 움직여 들을 준비를 마쳤다.
“먹으면서 들어요.”
사실 듣지 않아도 어림짐작으로 알 수는 있다. 회의는 곧 업무를 생성하기 위한 행위였으므로, C 레벨의 인사 세 명이 개입한 회의는 회사가 고용인을 부리기 위한 작당 모의인 것이다.
하청을 받거나 에이전시로 수주를 받는 곳도 있었지만, 내가 속한 SG플레이는 자체 서비스를 보유하고 있는 인하우스 조직이었다. 최근 런칭하여 야근의 숙주가 된 플레이짐과 더불어 다양한 생활 밀착형 서비스를 구축, 개발해 서비스하며 커진 회사였다. 기존에 서비스하는 앱도 두 개가 있었고, 웹은 백엔드와 프런트, 개발 환경을 전부 합해 여덟 개나 있었다. 여기에 플레이짐이 추가가 되었으니, 일은 해도 해도 줄지 않고 오히려 늘어만 갔다. 있는 거나 잘 챙기자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각각의 앱에서 연간 KPI는 순조롭게 달성되고 있으니 자꾸만 새로운 일을 벌이는 것이다.
“지금 플레이짐이 웹 버전이 없잖아요. 그거 구축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어요.”
“이건 또 무슨.”
가만 듣다 어처구니가 없어 눈살을 찌푸렸다. 운동 예약, 동호회 앱에 웹 버전이 왜 필요한 건데?
“저희 일정 완전 빠듯한데요….”
“…일할 사람도 없는데 무슨.”
“구축은 구축인데, 그럼…….”
김정우가 상상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디자인도 붙어야죠. 웹 버전은 없으니까. 담당자 배정해야 하는데, 정해서 주중에 알려 준다고 했어요.”
“어, 팀장님.”
송기현이 무언가 떠오른 듯 팀장을 불렀다. 그의 입매가 흡사 미꾸라지처럼 꿈틀거렸다.
“그래요, 기현 님은 다음 주가 휴가라 제외.”
“앗싸!”
그가 우레와 같이 소리쳤다. 식당 내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자 그는 흠흠, 헛기침하며 숟가락만 만지작거렸다. 저런 기회주의자 같으니라고. 팀원이 있어 좋다던 송기현은 업무 배정에서 냉큼 빠져나갔다.
“각자 뭐 하는지 정리해서 알려 줘요. 전체 업무는 알고 있는데 운영 쪽이나 세세한 건 각자 알아서 잘해 주니까. 이번 주에 끝나는 것들 빼고, 다음 주에 바로 들어가거나, 예정된 업무들 알려 주면 돼요.”
한 사람을 제외하고 세 명의 안색이 어둡게 물들었다. 앱 오픈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새로운 일이라니. 역시 회사와 대표는 믿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나는 머릿속으로 대충 할 일들을 정리해 보다 불행의 낌새를 예감했다. 그러곤 이내, 고개를 설설 저으며 식사에 집중하려 했다. 말만 씨가 되는 게 아냐. 생각도 씨가 될 수 있다고.
“마지막으로, 대표님이 최근에 모아에 관심이 많으신 거 같더라고요.”
신생 기업에서 나온 앱이고, 발상이 좋아 보인다며 그쪽 디자인을 많이 참고하면 좋겠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했다며 팀장이 덧붙였다. 플레이짐과 모아는 디자인에 대한 톤 앤 매너가 다르지 않던가? 이미 앱에 대한 컬러 가이드가 있는데 타사의 앱을 참고하라니. 대표자들의 생각은 다 같은 건가. 어떻게 하면 잡탕을 더한 잡탕으로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고찰, 뭐 그런 것.
“…왜요?”
어쩐지 이채선의 웃음기 서린 시선이 요상하게 날 향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으응, 아니야. 예준 님, 많이 먹어요.”
그녀의 모호한 답변에 불안이 스멀스멀 기어올랐지만, 애써 외면하며 매콤한 낙곱새 양념에 밥을 비벼 한 입 크게 집어삼켰다.
**
“예준 님, 잠시 회의실로.”
다음 날, 이채선이 나를 회의실로 불렀다.
나는 이채선 맞은편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말을 고르며 입술만 달싹이던 그녀가 길게 내려온 머리칼 끝을 손가락에 감으며 뜸을 들였다. 이내 난처한 웃음이 그녀의 입매에 내걸렸다.
“예준 님, 미안해요. 알다시피 나는 SG솔루션이랑 협업하는 업무가 선행 중이고, 소랑 님은 케어랩이랑 지티켓 운영 쪽 백업하고, 정우 님은 브랜딩 작업 중이라…. 이번에 휴가 가는 기현 님도 플레이짐 서브랑 기존 웹 리뉴얼 작업하느라 집에 잘 못 갔기도 했고. 그리고 그 프로덕트는 처음 가이드 잡은 게 예준 님이라 그쪽 기능은 다른 사람보다 더 잘 알 테니까, 부탁 좀 할게요. 우리 팀에서 제일 경력 많은 사람이 예준 님이잖아. 그거 가이드 다 치고 나면 휴가 바로 보내 줄게요.”
내심 불안했던 낌새는 역시 기분 탓이 아니었다. 이채선의 그 모호하고 음흉한 미소와 요상한 시선의 결과가 이런 것이었다니. 불행의 씨앗은 말로써 퍼지는 게 아니라, 생각으로 퍼지는 것이다. 하지만 불만을 표하거나 반박할 수 없었다. 이채선의 말마따나 플레이짐 프로덕트 초기 디자인은 내가 맡았고, 당연하게도 나만 야근을 한 게 아니라 팀원 모두가 저마다 맡은 일로 바빴다. 정해진 일만 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서비스가 고도화될수록 운영단의 UI 개선은 지속적으로 진행되어야 했다. 키를 잡는 메인 업무와 별개로 각자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업무들을 그때그때 처리해야 했다. 머리로는 내게 할당된 것이 이해됐지만, 그래도 어깨가 힘없이 늘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가만, 규모가 얼마나 되려나. 화면이 몇 벌 나와야 하지? 앱이랑 기능이 전부 같나? PC 가이드만 달라지는 건 아니겠지?
이채선은 지금껏 만난 사람 중 가장 좋은 리더였지만, 이제라도 ‘나와 상성이 맞지 않는 자’ 리스트에 올려야 할 것 같았다. 입사 후 대표, 이사, 본부장까지만 있던 리스트였다. 입만 열면 일거리를 쏟아 내었기 때문에 피해야 할 1순위들이었다. 역시 일을 주는 사람은 나와 맞지 않다. 덧붙여 송기현도 추가다. 그가 고생하여 얻어 낸 휴가라 당연한 거긴 하지만, 이런 시기에 빠져나간 괘씸죄로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기로 했다.
“어쩔 수 없죠.”
까맣게 죽은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TO 바로 날 수 있도록 본부장님께 올려 볼게요.”
이채선이 나를 달랬다. 그래, 이채선이 무슨 죄가 있겠어. 다 위에서 내려온 지시 때문인데. 먼저 일어나 보겠다며 인사를 하고 회의실을 벗어났다.
“무슨 일이에요?”
김정우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플레이짐… 웹 가이드요.”
“저런.”
진심에서 우러난 탄식이었다.
“요즘 채선 님 열일 하시는 것 같네요.”
회의실을 한 번 보았다가 다시 내게로 시선을 돌린 김정우가 목소리를 낮추며 속닥였다. 그러게요. 짤막하게 대꾸했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바지 사장 느낌이었는데, 해가 바뀌고 나서는 악덕 업주가 된 것 같았다. 아무리 급해도 디자이너의 컨디션을 고려해 일정을 산출해 주곤 했었는데, 가차 없기가 구일호 팀장을 닮아 가는 듯했다.
“어쩌겠어요. 사람이 부족한데.”
나는 한숨을 짙게 흘리며 눈두덩을 꾹꾹 눌렀다.
이번 주만큼은 정시 퇴근 사수해야지, 안 되겠어. 웹에 대한 기획서가 나오려면 다음 주는 되어야 할 테니, 단 며칠이라도 재충전이 시급했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약속이 있고, 없고를 떠나 금요일은 노동자 신분을 잠시라도 탈출할 수 있는 귀한 날이다. 한순간도 사무실에 있고 싶지 않아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수고 많으셨어요~”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주에 봬요!”
하나둘 인사하는 동료들에게 고갯짓하며 문을 열고 나왔다.
나는 엘리베이터 하행 버튼을 누르고 멍하니 서 있었다. 암만 생각해도 올해 삼재가 아닐까 싶은데.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식으로 일이 집중 폭격 될 리 없다. 짜증이 불쑥 솟구쳐 표정을 구겼다.
뒤따라 나온 송기현이 내 옆에 서며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얄밉네, 정말.
“휴가 어디로 가요.”
“그냥 제주도 다녀오려고요. 미리 썼으면 해외로 갔을 텐데, 계속 밀려서 어디도 예약 못 했어요.”
“…그래도 좋겠다.”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다. 어디든 가는 게 중요하지. 땡, 소리를 내며 10층으로 올라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입사 후 처음으로 송기현이 부러워졌다. 나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일했는데…. 내 순번은 언제 돌아오는가. 돌아오긴 하는 건가?
“원래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겁니다. 예준 님도 다음 달 정도면 갈 수 있지 않겠어요? 슬쩍 규모 봤는데, 앱처럼 화면이 엄청 많이 나올 건 아니던데. 웹이 오히려 나을 수도 있어요. 앱 개발자들보다 서버 개발자들이 더 잘해 주기도 하니까요.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가이드 태클 거는 건 프론트단뿐이었잖아요.”
맞는 말이긴 했다. 디자인 가이드로 지랄하는 건 꼭 앱 개발 파트였다. 이게 안 맞다, 저게 안 맞다 하며 꼭 이슈를 발행해 전체 메일이 수신되도록 했다. 디자인 가이드가 정확히 나와야 하는 건 맞는 일이라 따지고 들 수 없다는 것도 불쾌감 상승의 한 요소였다. 그래도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 없다. 소속된 근로자인 이상 C 레벨을 제하고 다 같은 을인데, 을이 나를 병이나 정쯤으로 취급하는 기분이 든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아직 성수기라, 9월이나 10월 휴가가 더 좋을 거고요.”
송기현이 덧붙였다. 그렇지. 9월 휴가 좋지. 10월도 좋고. 사람도 많지 않을 테고, 가격도 합리적으로 다녀올 수 있다.
“그건 그런데, 부러운 건 부러운 거예요.”
웹 가이드를 쳐 낸 후 갈 수 있긴 할까. 뭇 회사들이 그렇듯 가이드를 쳐 내면 또 무언갈 해야 한다며 일감을 던져 줄 것만 같았다.
“…기현 님. 저, 플레이짐이 싫은 거 같아요. 지겹기도 하고, 기획도 계속 바뀌었잖아요. 디자인도 계속 수정 들어가고.”
주저하다 현재의 심정을 송기현에게 토로했다.
처음 기획 리뷰를 받고 가이드를 잡아 나가기 시작했던 때가 떠올랐다. 회사에 다니며 그래도 제법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는데, 유독 플레이짐에 잡음이 많았다. 기획만 두 번이 엎어졌기 때문이다. 윤아영이 어찌나 미안해하던지. 그녀 때문이 아닌 것을 아는데도, 맥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의 타입으로 마무리 짓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을 감내했어야 했던가. 윗선은 말 같지도 않은 아이콘 추가를 아무렇지도 않게 요구했고, 기존 로직과 다른 UX를 어디선가 보고는 의견이랍시고 주간 미팅에서 툭툭 꺼내 놓기 일쑤였다. 중간에서 윤아영이 조정해 주긴 하였지만, 그렇다고 아예 수정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디자인 가이드를 잡는 것이나 업무에 대한 부분보다, 윗선의 의사 결정 포인트가 계속 바뀌니 그게 너무 힘들었다.
“괜히 미안하네. 매일 장난은 쳐도 내가 팀에서 예준 님 제일 좋아하는 거 알죠? 갔다 와서 가이드 치는 거나 지금 예준 님이 들고 있는 이슈들 백업할게요. 일단 나 좀 살고.”
“알죠. 고마워요.”
입매를 당겨 웃었다. 나 역시도 그랬다. 겉으로나 속으로나 장난을 툭툭 내뱉긴 하지만, 입사 동기는 귀한 법이었다. 딱 같은 날 들어온 건 아니지만, 비슷한 시기인 만큼 송기현에게 다른 동료들보다 더 친근감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었다. 같은 대학을 졸업한 동문이기도 했고.
일정한 속도로 하강하던 엘리베이터가 1층에서 멈추었다. 로비로 느리게 걸어 나온 나는 송기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잘 다녀와요. 내 선물 사 오고. 나는 감귤 타르트가 좋더라. 진담 섞인 농담을 건네자 웬일로 송기현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정문으로 걸어가던 중,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에서 짧게 진동이 울렸다.
뭐지? 자연스레 휴대폰 잠금을 해제하고 알림 창을 확인했다.
[<모아> Bugkiller 님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움찔 멈춰 선 나를 송기현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어,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 갑자기 약속이 생긴 것 같은데.”
“생긴 거면 생긴 거지, 생긴 것 같은데는 뭐예요. 아무튼, 불금 잘 보내요. 다다음주에 봐요!”
송기현이 실없다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방향을 틀어 낙생원마을 입구를 향해 걸음을 떼며 모아를 실행했다. 빨간 점이 찍힌 알림 아이콘을 눌러 바로 채팅으로 진입했다.
[5만 원. - Bugkiller]
거두절미하고 딱 한마디가 적혀 있었다. 이건 또 뭐야. 5만 원짜리가 출몰했다는 거야? 아니, 벌레가 또 나왔다고? 나중에 송기현에게 이야기해 줘야 할 것 같았다. 거기 집들 비싸기만 하지 벌레가 수시로 나온다고. 주식으로 한탕 쳐도 매매하지 말라고.
-얼마만 한 크기예요? 종류는요? 지금 퇴근하고 가고 있어요.
[종류를 제가 어떻게 압니까. 벌레가 다 같은 벌레지. 미치겠으니까 빨리 와 주세요. - Bugkiller]
나도 미치겠어요. 버그 킬러 님이 알지 내가 어찌 알겠어요. 그렇게 쓰고 싶은 것을 참으며 바쁘게 걸음을 놀렸다.
-중간에 놓치지 말고 위치 잘 봐 주세요. 가서 바로 잡을 수 있게요.
횡단보도를 건너 고가 도로 밑으로 빠르게 경보했다. 금세 이마에 땀이 맺혔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채팅 창을 열어 둔 채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벌레를 무서워하진 않았다. 크기가 어떻든 잡아다 죽이거나 방생하면 그만이었다. 그래도 일단은 벌레 종류를 알아야 나도 마음의 준비를 할 텐데. 가서 보고 바로 죽여야 한다는 말이었다. 게임으로 치면 메인 퀘스트를 받았는데, 세부 내용을 알고 싶다면 일단 해당 위치로 가라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직접 가서 그 위치에 도달해야만 세팅된 보스 몬스터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어휴, 게임 스토리도 이것보단 친절하겠다.”
헉헉거리며 언덕길을 올랐다. 회사에 자전거를 갖다 두는 게 나을까. 아냐, 자전거를 갖다 둬서 뭐에 쓰려고. 갖다 두는 것도 일이고, 언젠가 회사를 그만둘 때 집으로 가져가는 것도 일이다. 출퇴근할 때도 이용하지 않는 자전거를 벌레 하나 잡겠다고 회사에 두려 하다니. 나는 언덕을 다 오르고 나서 잠시 숨을 골랐다. 땅거미가 지는 골목 구석구석으로 자연히 시선이 갔다. 예쁘긴 더럽게 예쁜 동네다. 하늘은 더없이 드높았고, 햇살도 바람도 공평하게 내려앉았다. 잠시 넋을 잃고 주변을 관망하던 나는 곧 정신을 차리고 베이지색 저택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날 오르내렸던 대리석 계단을 올라 초인종을 누르고 기다렸다. 안에서 발소리가 제법 크게 울리더니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벌컥 열리는 현관문에 뒤로 한 발짝 물러나자 남자가 가쁜 숨을 내쉬었다. 뛰다시피 해서 온 것은 나인데, 마치 남자가 계주라도 한 듯 땀에 젖어 있었다.
“무, 무슨.”
“…하, 빨리. 빨리요.”
남자가 내 팔뚝을 잡아 안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 벌레를 잡기 전이니까 내게 손을 뻗은 거겠지.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남자를 노려보았다.
“무슨 벌렌데요.”
“그걸 모르니까 당신을 불렀죠.”
“…어디 있는데요.”
“그때처럼 거실요. 새시 있는 쪽에 붙어 있었습니다.”
남자는 매우 놀라고 흥분한 듯 말을 빠르게 이었다. 나는 신발을 벗고 마루 위에 올라섰다. 그는 지난번처럼 손님용 실내화를 신으라고 종용하는 대신, 먼저 연회색의 실내화를 걸이에서 빼내어 던지다시피 내 앞에 내려놓았다. 상기된 얼굴이 마치 끔찍한 것과 맞닥뜨린 사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콩알만 했던 지난 벌레와 달리 엄청난 스펙의 벌레라도 나타난 걸까. 하긴 5만 원으로 금액대가 커진 걸 보면, 못해도 검지 마디보단 큰 게 나온 거겠지.
“일단 물티슈랑 휴지, 그리고 비닐장갑도 주실 수 있으면 주세요.”
그의 긴장이 옮아오기라도 한 것인지 나 또한 괜히 승모근이 뻣뻣하게 굳었다. 대단한 미션이라도 처리하러 온 요원이 된 기분이다.
“그것만, 그것만 있으면 됩니까?”
남자의 목소리가 떨렸다.
“어떤 벌레인지 모르니까 일단은요. 그게 기본 템인데요.”
“주방에 있습니다. 일단 먼저 앞장서세요.”
나는 입술을 벌렸다 오므리기를 반복했다. 전에도 느낀 거지만, 이 집은 남자의 집이 분명한데, 벌레를 잡는 동안에는 주객이 전도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무어라 첨언하려다 그냥 조용히 복도를 가로질렀고, 내 뒤로 남자가 바짝 따라붙었다.
“그거 찾고 나서 드릴게요. 주방으로 갔을 수도 있으니까.”
“일단 알겠고, 알겠으니까 어깨 좀 놔 주세요.”
뒤에 바짝 붙어 선 그가 내 어깨를 쥐고 방패로 삼고 있었다. 나와 한 뼘 이상 차이가 나는 큰 키의 남자가 내 뒤에 숨어 있는 것도 웃긴데, 나를 방패로 삼다니. 퍽 우습고 귀엽게 느껴져 터지려는 웃음을 꾹 참아 냈다. 남자는 스스로도 조금 놀란 모양인지 내 어깨를 놓아 주며 비틀비틀 복도 벽에 바짝 붙어 섰다.
“찾아 주세요. 빨리.”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거실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그가 말했던 새시 근처로 가까이 다가갔다. 뒤에서 긴장한 남자가 체격에 안 맞게 웅크리고 서 있는 모습에 괜히 나까지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새시를 구석구석 살폈지만, 남자가 말한 5만 원짜리 벌레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무심하게 손을 뻗어 커튼을 들췄다. 새시 주변에 숨을 곳은 그곳뿐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커튼이 들추어지자 검지 마디보다 약간 큰 정도의 벌레가 여러 개의 발을 동시다발적으로 놀리며 빠르게 새시를 탔다.
“헉.”
갑작스러운 생명체의 움직임에 놀라 숨을 들이켰다. 내 격렬한 반응에 남자가 흡, 하고 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의 신선한 반응에 2차 충격을 받았지만, 거기에 놀랄 겨를도 없이 벌레가 천장으로 붙으며 거리를 벌렸다.
“저거, 5만 원보다 더 주셔야겠는데요.”
“…아, 알겠으니까, 빨리 좀…….”
남자는 거의 거품을 물고 쓰러질 것처럼 창백한 낯으로 말을 더듬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벌레를 쳐다보았다. 깜짝 놀랄 만한 비주얼이어도 쓰러질 정도는 아닌데. 단지 다리가 좀 많을 뿐이지. 눈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자, 빨리 내려와라. 잡아줄게.”
벌레를 향해 말을 걸며 나는 어떻게 잡아야 좋을지 머릿속으로 곰곰이 생각했다. 발이 빠른 편이라 민첩하게 손을 놀려야 할 것 같다. 지난번 콩벌레처럼 물티슈만으로 잡을 수 없다면 방생을 하는 방향도 고려해야 한다.
“아까 말씀드린 거 갖다 주세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남자가 주방으로 냅다 뛰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품에 물티슈와 휴지, 비닐장갑을 안고 나왔다. 나는 그것들을 받아다가 바닥에 내려 두었다. 비닐장갑을 손에 끼우고 뜸을 들였다. 벌레는 아래로 내려가면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인지 좀체 내려오지 않았다. 뭐라도 던져서 자극을 주어야 하나.
나는 벌레의 생김새를 가만히 응시했다. 흐음, 저 벌레 명칭이 있었는데. 지네…는 아니고, 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곧 떠오른 명칭에 “아!” 하고 작게 소리쳤다.
“뭐, 뭡니까.”
“저거 돈벌레인데, 방생하는 게 좋겠는데요? 새시 열어도 되나요?”
“저, 저걸 왜 방생합니까? 죽여야죠.”
“돈을 불러오는 벌레라는 속설이…….”
나는 남자를 돌아보며 말하다 이내 말미를 흐렸다. 숨넘어갈 것 같던 얼굴은 어디로 가고, 남자는 차갑게 굳은 표정을 한 채였다.
“그냥 죽이세요. 이미 비주얼부터가 죽여야 할 이유로 충분합니다. 아까 절 쳐다본 것 같기도 하고요. 5만 원, 아니 플러스알파로 10만 원.”
랩처럼 쏟아진 말마디가 흥분한 그의 상태를 가감 없이 보여 주고 있었다. 거기다 경매라도 하듯 벌레 사살에 대한 보상을 훅 올려 버렸다.
“쟤가 의도가 있어서 본 건 아닐 거예요. 아무렴, 벌레도 눈이 있는데 자연히 시선이 간 거겠죠.”
자신의 안위를 둘러싼 인간 두 명의 논쟁에 돈벌레는 슬금슬금 다리를 놀렸다.
“우, 움직인다! 저기요, 지금 벌레 변호합니까? 10만 원 필요 없다는 거예요?”
“아니, 그건 아니고…….”
돈은 필요한데 저걸 죽이기 찝찝하니까 그렇지.
“죽여요, 빨리.”
미신인 걸 알고 있지만 죽이면 불길한 기운이 올 것 같아 망설여졌다. 처음부터 돈벌레라고 해 줬으면 얼마나 좋아. 울상을 지은 나는 다시 벌레에게로 시선을 집중했다.
“그리고 저런 벌레 없어도 돈 많습니다.”
재수 없는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창문을 쿵쿵 두드렸다. 외부 자극에 돈벌레가 미끄러지듯 떨어졌다. 나는 재빠르게 물티슈를 벌레 위에 덮고, 바로 주먹으로 쿵쿵 내리쳤다.
“잡았습니까?”
“…네. 어휴, 괜히 진이 빠지네요.”
“고생하셨어요. 하…. 퇴근하고 어찌나 놀랐던지.”
남자가 제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닦아 내며 피곤한 듯 중얼거렸다. 누가 보면 내가 아니라 님이 잡은 줄 알겠어요. 나는 물티슈를 몇 장 더 뽑아내어 돈벌레의 시신을 수습했다. 그것을 둥글게 말아 공처럼 한 손에 쥐었다.
“저기, 저 조금만 쉬었다 가도 되나요.”
“…쉬는 건 쉬는 건데, 그거랑 같이요?”
남자의 동공이 흔들렸다. 쉬는 건 되어도, 벌레 사체와 함께 쉬는 건 안 된다는 뜻이었다.
“아닙니다……. 처리할게요.”
그래, 간다, 가. 더럽고 치사해서. 속으로 꿍얼거리며 주저앉았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벌레 잡을 때 말고, 나중에 식사라도 대접하죠.”
자신이 너무 쌀쌀맞았다는 것을 인지했는지, 남자의 어조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10만 원이랑은 별개인가요?”
커다란 물티슈 공을 들어 보이며 남자에게 물었다. 미간이 좁혀진 듯 보였으나, 그는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돈과 별개냐는 질문 때문이 아니라, 내가 물티슈를 들어 보여서 기분이 나쁜 것 같았다.
나는 전과 마찬가지로 물티슈를 손에 쥐고 복도를 가로질렀다. 남자가 내 뒤를 졸졸 따랐다. 실내화를 벗고 운동화로 갈아 신고는 그에게서 받을 수당을 기다렸다. 그가 지갑에서 10만 원짜리 수표를 꺼냈다. 하얀 수표를 목도하자 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래, 내가 저것 때문에 불금을 마다하고 온 거지. 장하다, 정예준.
“문 열어 주세요.”
나는 남자에게 말했다. 신발장 벽에 붙어 남자가 문을 열어 주는 것을 기다렸다가, 닫히기 전에 몸을 쑥 빼냈다. 그가 발을 내밀어 닫히는 문을 멈췄다. 실내에서 쏟아지는 빛을 등진 그와 대리석 계단에 선 내 시선이 얽혔다. 남자가 수표를 내게 내밀며 고개를 숙여 정중히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저도 보수 받고 하는 건데요.”
그가 건넨 수표를 왼손으로 받아 얼른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말투가 묘하게 강압적이고, 약간 엉뚱한 것 같다는 점을 빼면 평소 남자는 신사적인 편이었다. 돈 떼먹는 고용주는 아니니 얼마나 신사적이야. 나는 허리를 숙여 그에게 인사하고 계단을 터벅터벅 내려왔다.
“저기요.”
“네?”
“이름이 뭡니까?”
“네…?”
“계속 ‘저기요’라고 부를 순 없으니까요.”
“정예준이요.”
시큰둥한 말투로 대꾸하자 남자는 내 이름을 입 안에서 굴리듯 몇 번인가 중얼거렸다.
“정예준 씨.”
“네?”
뭐야, 가라면서 왜 자꾸 불러. 속으로 투덜대며 반쯤 틀었던 몸을 남자를 향해 완전히 돌렸다.
“제 이름은 안 물어봅니까?”
“…아, 예…, 성함이…….”
“이호연입니다.”
자기소개조차 그다워서 말을 잃었다.
“그럼, 들어가세요.”
이호연이 건조하게 인사했다. 처음 봤을 때도, 지금도 제 할 말만 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분명 같이 대화하고 있는데 자기 말만 하는 듯한 묘한 어긋남.
얼떨떨하게 선 내 입에서 “하.” 하고 헛웃음이 터졌다. 벌레를 잡기 전과 후가 이렇게 달라도 되는 거야? 한숨을 쉬며 골목 어귀를 벗어나려 발을 뗐다. 그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다. 집은 깔끔한데 왜 저런 벌레가 계속 나오는지. 오래 살 집이 아니라면서 왜 여기에 있는지. 벌레에 대한 치명적인 기억은 또 뭔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나야 돈만 주면 그만이긴 하지. 일개 고용인이 고용주에 호기심을 가지는 건 안 될 일이다.
10만 원을 벌었으니 빨리 가서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뒤덮었다.
나는 올랐던 언덕길을 되돌아 회사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졸음 가득한 눈꺼풀을 간신히 떠 올렸다. 어젯밤 교체한 새 침구에 뺨을 비볐다. 좋다. 매일 이렇게 누워만 있고 싶네. 그냥 누워만 있어도 통장에 돈이 쌓이면 얼마나 좋을까. 어느 건물주의 삶처럼 달마다 수금되는 셋돈이나 보며 사는 거지. 가끔 순회도 나가 주고, 하자 생긴 거 있으면 보수해 주고……. 처음 계약한 보증금, 월세에서 가능한 올리지 않는 선량한 건물주.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 해죽 웃음을 머금었다.
엎드려 누운 채로 길게 기지개를 켰다. 블라인드 사이로 스미는 햇볕도 유독 온화한 것 같았다. 불과 몇 주 전만 하더라도 뜨겁다고 느꼈는데, 시간이 가긴 가는구나. 스트레칭한 몸을 웅크리며 오른편과 왼편으로 번갈아 뒹굴거렸다. 오늘 아점은 어떻게 해결할까. 오랜만에 잉글리시 머핀? 아니면 빵집에서 샌드위치를 사 올까? 밀가루가 안 당기는데, 집 앞 국밥집을 다녀올까. 머릿속으로 메뉴를 고민하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일단 좋아하는 음악부터 BGM으로 켜 두고, 조금만 더 누워 있다가 일어나야지.
오랜 직장인의 습관으로 8시면 눈이 떠지긴 했지만, 아무렴 어떠한가. 오늘은 일요일인데. 비록 내일 회사를 간다고 하더라도 오늘은 침대와 한 몸이 되어 푹 쉬고 내일부터 다시 파이팅 할 생각이었다. 일이 배정된 이상, 싫다고 거절하거나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실질적인 결과물이 생긴다는 거였다. 내년 4월에 있을 연봉 협상에서 앱과 웹의 가이드를 잡은 성과를 반영하면 못해도 5% 정도는 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진동이 울리며 낯익은 알림이 화면 상단에 맺혔다.
흘러나오는 음악을 따라 부르던 허밍이 멈추었다. 풀어졌던 표정 또한 딱딱하게 굳었다.
[<모아> Bugkiller 님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이게 뭐야? 아니 갑자기 왜…? 하하, 앱 버그인가. 가끔 앱에서 운영 실수로 푸시가 나가는 경우가 있으니까. 나는 아연한 낯으로 현실을 부정했다.
[<모아> Bugkiller 님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을 배신하듯 알림이 하나 더 도착하며 기존 알림과 UI가 겹쳐 보였다.
미친 거 아냐? 제정신일 리 없잖아. 제발 아니라고 해. 아니라고 하라고! 안 돼, 오늘은 정말 싫다고! 소중한 일요일이란 말이야. 오늘이 지나면 야근 지옥을 헤엄치고 있을지도 모른단 말이다!
일요일에 회사 근처에 가는 게 정녕 말이 되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지금껏 직장을 다니며 초년생일 때를 제하고 공휴일과 주말, 연월차에는 회사 근처에 얼씬도 해 본 적 없었다. 급한 이슈가 생기더라도 집에서 해결하거나 다음 날 조기 출근하여 마무리 지었다.
떨리는 손으로 앱 채팅 창에 진입했다. 확인하지 않으면 계속 울릴 것 같았다.
[3만 원. - Bugkiller]
[예준 씨, 제발. - Bugkiller]
미쳤습니까, 휴먼? 나도 제발입니다. 그리고 부탁을 할 거면 좀 더 정중하게 하란 말입니다. 3만 원이라 써 두고 스스로 양심에 가책을 느껴서 서둘러 뒷말을 덧붙인 거 아니에요? 이름을 물어본 것도 이것 때문 아니야? 이름으로 부르면 더 간절하게 느껴질 걸 알고 물어본 거 아니냐고.
휴대폰을 붙들고 그가 보낸 텍스트 하나하나를 파헤치듯 노려보았다.
-저 지금 일어났는데요.
나는 내 지금 상태를 그에게 알렸다. 이호연이 나의 뜻을 헤아려 주길 바란 거였다. 지금 일어났다. 고로, 당장 못 간다. 바로 나설 수 없으니 씻어야 하고, 당연히 기본 10분은 소요된다. 더구나 집에서 출발하는 거라 넉넉히 30분은 걸릴 것이다.
[기다릴게요. 위치 잘 봐 둘 테니까. 저 미칩니다. - Bugkiller]
나도 미쳐요. 고작 세 번째인데 벌레로 주말 출근이 말이 되는 겁니까?! 주중에야 그렇다 치더라도 주말까지 이럴 줄은 몰랐다. 회사에 있을 때는 가까운 위치니까 그럭저럭 할 만하다 싶었는데, 주말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예준 씨…. - Bugkiller]
나는 갈등하다 짜증스레 머리를 헤집으며 상체를 발딱 일으켜 세웠다.
-휴일 수당 주세요.
이호연이 막 던지듯 나도 막 던졌다. 설마하니 이것도 오케이 하겠어?
[네, 당연하죠. 그런데, 빨리, 빨리요. - Bugkiller]
하지만 내 생각과 달리 그는 간이고 쓸개고 내가 달라는 대로 다 떼어 줄 것처럼 말했다.
-저 밥도 못 먹었어요.
[일단 잡고. 빨리 좀. - Bugkiller]
-초스피드로 가 볼 테니까, 딱 30분만 기다려 주세요.
이것도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야만 가능한 시간이다. 그 이상은 더 빨리 단축할 수도 없었다. 나는 휴대폰을 침대 위에 내팽개치며 욕실로 냅다 달렸다. 양치질을 하고 머리만 감자 싶었다. 샤워는 물로만 해도 충분하다. 꼬질꼬질해 보이더라도 어쩔 수 없다. 시간에 맞추려면 1분 1초가 소중했다. 나는 후다닥 씻고 나와 물기가 채 마르기도 전에 옷부터 주워 입었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대충 탈탈 털어 내고 휴대폰, 지갑만 챙겨 현관으로 몸을 내던졌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오피스텔 건물 1층 앞에서 갈팡질팡했다. 이동 수단에 대한 고민이 머릿속을 스쳤다. 버스를 타자니 낙생원마을까지 가는 버스가 언제 올지 모르고, 전부 돌아서 가는 버스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걸어가자니 그건 미친 짓이었다. 지하철은 정자역까지 돌아갔다가 신분당선을 타고 위로 올라가야 하는데, 환승 텀이 내 마음 같지 않다. 더구나 판교역에서 낙생원마을까지 버스를 다시 타야 하기에 지하철은 이용할 수 없었다. 나는 택시를 부르기 위해 모빌리티 서비스를 실행했다. 괜스레 손에 땀이 배는 기분이었다. 조급한 마음으로 출발지와 이호연의 집 위치를 찍고 택시를 호출했다. 가까운 거리부터 먼 거리까지 점차 확대해 나가는 화면 UX를 내려다보다 이내 호출 취소를 눌렀다. 오늘따라 택시도 더럽게 안 잡힌다.
화면상의 디지털시계에 1분이 넘어가는 걸 확인하며 초조하게 두리번거렸다. 어쩌지, 시간이 가는데…. 결국 오피스텔 1층 주차장에 있는 자전거 보관대에서 내 자전거를 찾아 잠금을 풀었다. 엉덩이를 안장 위에 대충 걸친 채 발돋움부터 했다. 속력을 내기 시작해 내달리자 행정복지센터와 탄천 입구가 시야에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미친 듯이 페달을 밟아 앞으로 나아갔다.
판교 근처까지 다다라서야 나는 내가 제정신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점점 느려지는 속도, 터질 것 같은 팽팽한 허벅지. 가쁘게 펌프질 하는 폐부. 내 다리는 하드웨어가 제정신이 아닌 게 틀림없다며 있는 대로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어후, 후욱, 하아, 하…. 진작 운동 좀 해 둘걸.
거칠게 호흡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간과했다. 내 체력이 저질이라는 사실을. 출퇴근에 이용하려고 구매한 자전거가 왜 자전거 거치대에 덩그러니 놓여 있겠는가. 사 두고서도 이용하지 않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인데. 택시를 좀 더 기다려 볼 걸 그랬나.
아냐, 애초에 주말 호출이라는 무리한 요구를 수락하면 안 되는 거였어!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지잉,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그만 좀 찾아! 가고 있다고!
지잉. 한 번 더 진동이 울렸다.
“이런, 아오, 망할. 주말이라고, 주말…!”
씨근거리는 거친 숨이 욕설과 함께 내뱉어졌다.
돈벌레 잡은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이러는 거야! 청소하는 게 맞긴 맞는 거야? 청결한 집에 벌레가 웬 말이냐고. 먼지 한 톨 없어 보이던 액자와 복도, 거실은 도대체 뭐냔 말이야! 내가 가기 전에만 잠깐 치워 놓은 거야 뭐야?!
“허어, 허억, 헉…. 끄윽…….”
부들부들 떨리던 다리에 기어코 힘이 주욱 빠져나갔다. 언덕을 오를 만한 동력은 남아 있지 않았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 거지. 후회로 속을 가득 메우며 안장에서 내려와 자전거를 끌었다. 브런치 카페, 골목 초입. 주중에 보았던 익숙한 동네는 지나치게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입고 있던 티셔츠가 땀으로 흠뻑 젖었다. 동이 난 체력으로 느릿느릿 그의 집 앞까지 다다라 2평 규모의 정원에 자전거를 냅다 패대기쳤다. 찌르릉, 소리가 나며 바퀴가 헛돌았다.
나는 기다시피 계단을 올라 문을 쿵쿵 두드렸다.
“…하, 하아, 호연, 호연 씨.”
쇳소리가 나는 목을 쥐어 짜내며 이호연의 이름을 불렀다.
잠시 후, 안에서 기척이 가까워지며 그가 벌컥 문을 열었다. 비교적 서늘한 실내 공기에, 이마의 땀이 식는 것 같았다. 하…, 조금만 쉬고 싶다.
“27분. 예준 씨, 들어오세요. 지체할 틈이 없습니다. 3만 원짜리가 몸이 제법 날랩니다.”
그는 이미 흥분 상태였다. 땀에 젖은 내 팔을 낚아채어 안으로 들였다.
“하, 허억, 끄……. 저, 자, 잠깐, 조금만, 아니, 물이라도.”
“잡고 드릴게요. 급합니다, 진짜. 저놈 비주얼을 예준 씨가 못 봐서 그럽니다. 엊그제랑 또 다른 생김새라 완전 놀랐습니다. 제가 여기 산 지 얼마 되진 않았는데, 아니, 이걸 지금 이야기할 게 아니고. 빨리 잡아주세요.”
남자는 내 발에 직접 실내화를 신기며 안으로 질질 끌어당겼다. 엊그제 본 돈벌레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새로운 벌레와 조우하여 반쯤 미쳐 있는 것 같았다.
목이 바짝 타들어 가는 갈증에 눈가가 잘게 떨리는 것을 경험했다. 이호연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종잇장과 같은 몸뚱이가 속절없이 끌려갔다. 매일 같은 순간이 반복되는 영화가 문득 떠올랐다면, 내 비약이 심한 걸까.
“제가 위치도 안 놓치고, 지난번에 말씀하신 기본 아이템도 다 준비해 뒀습니다.”
“…….”
“예준 씨?”
이호연은 내게 칭찬이라도 원하는 듯 두 눈을 빛냈다. 바닥에 열을 세워 늘어놓은 물티슈, 휴지, 비닐장갑 3종 세트가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얼음물도요…….”
“그것도 기본 아이템인가요? 저, 저기…!”
“…으앗!”
이호연이 아연실색하며 내 뒤로 숨었다. 아니, 내 몸을 들어다 제 앞에 두었다. 자신의 몸을 숨기겠다고 자기보다 작은 체격인 남자를 들어다 앞에 놓은 것이다. 그 힘으로 벌레를 죽였다면 진작 죽이고도 남았을 텐데.
“미, 미안합니다. 너무 놀라서.”
너무 놀란 나머지 내 몸을 들어 옮겼다는 변명 같지도 않은 변명과 함께, 저번과 마찬가지로 내 뒤에 붙어 서서 떡 벌어진 어깨를 둥글게 움츠린 모습에 실소가 터졌다. 도대체 몇 번을 더 봐야 이 사람은 벌레에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게다가 실제 벌레가 움직인 것도 아니었다.
“장식장 쪽 맞는 거죠?”
“네, 맞습니다.”
참 가지가지, 여러 군데에 포진해 있구나, 하하. 거실에서만 세 번을 출몰하다니. 벌레들이 이 집을 파브르의 집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혀를 차며 물티슈 세 장을 뽑아다가 성큼성큼 거실을 가로질렀다. 3만 원이면 돈벌레보다야 작은 사이즈일 것이다. 비닐장갑도 필요 없다. 단지 크기가 새끼손톱만 하지는 않을 것이기에 완충을 위해 물티슈가 여러 장 필요한 정도.
가격대에 맞춰 크기를 가늠하며 장식장 가까이 다가서서 주변을 살폈다.
“바퀴벌레네요.”
“바…….”
이호연이 두통이 이는 듯 제 머리를 손으로 짚었다. 바퀴벌레는 입에도 담지 말라고 하던 이전 기억이 떠올랐다. 언뜻 보고 크기만 가늠하고서 메시지를 보낸 거였구나. 장식장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으니 자세히 볼 일도 없었을 거고. 바퀴벌레는 흔하디흔한 벌레인데…. 충격을 받은 그의 안색을 살피다 시선을 거두고 장식장 원목을 주먹으로 쿵쿵 두드렸다. 얌마, 나와. 네놈 때문에 내가 지금 여기까지 와서 무슨 고생인 줄 알아? 나오라고.
위협을 가하는 나를 인지한 모양인지 바퀴벌레가 조금 더 안쪽으로 숨어들었다. 다시 쿵쿵 흔들며 벌레를 자극하자, 벽면 안쪽도 안전하지 않다 느꼈는지 작은 생명체는 탈출을 시도했다.
휙- 퍽.
이번에도 물티슈를 벌레 위로 덮고 빠르게 주먹으로 내리쳤다. 바닥과 얇은 물티슈 사이에서 벌레가 압사하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번 건도 어찌어찌 해결인가. 아무리 내가 벌레를 잘 죽여도 벌레와 아이 컨택을 한 상태에서 죽이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물티슈로 덮고 죽이면 어찌 되었든 찌부러진 벌레 사체를 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내 나름의 방법이었다. 사실 지난 돈벌레도 주먹으로 내리칠 때 그 느낌이 참, 좋지 않았단 말이지. 지금 죽인 바퀴벌레도 그렇고. 나는 내 주먹을 내려다보며 께름칙한 표정을 지었다. 으, 다음 생에는 여기 말고 다른 집으로 가라. 그나저나, 신기하네. 돈벌레가 있는 집은 바퀴벌레가 없지 않던가? 돈벌레의 주식이 바퀴벌레나 해충 알이라고 알고 있는데 말이지.
“잡았어요?”
“네, 잡았어요.”
기운 없이 대꾸하며 시신을 수습했다. 두툼한 물티슈를 손에 쥐고 무릎을 짚으며 일어섰다. 아이고, 다리야. 내일 알 배기겠네. 덜덜 떨리는 다리를 절뚝대며 이호연에게 한 발 다가가 섰다. 그는 벌레 시신을 든 나를 보며 움찔 놀랐긴 했지만, 첫날처럼 대놓고 피하지는 않았다. 언급조차 말라던 바퀴벌레인데 말이다. 사실상 제일 펄쩍 뛰었던 첫날 본 벌레가 가장 작고 하찮은 데다 위협적이지도 않았는데.
고생한 나를 배려하는 건가.
“…예준 씨는 좋은 사람인 것 같네요.”
이호연이 내게 시선을 주며 꿈꾸는 듯 중얼거렸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의 기준이 벌레를 잡는 데에 기인한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사실, 아까는 너무 놀랐지만, 이렇게 와 주실 줄 몰랐습니다.”
주말인데 감사드려요. 이호연이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저도 몰랐습니다. 나라는 인간이 돈에 있어서 이렇게 엉덩이가 가벼운 인간일 줄. 자신의 몸을 자전거에 태워 자학해 가며 여기까지 올 줄도 몰랐어요. 그리고 당신이 물 한 모금 안 주고 나를 벌레잡이로 쓸 줄도 몰랐고. 그리고 나는 이 온도 차에 언제쯤 익숙해질까요. 게다가 엄밀히 따지면 지금 이 모든 상황은 네가 빨리 오라고 해서 벌어진 일이잖아. 와 줄 줄 몰랐다니.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화가 일순 가라앉았다. 화낼 기운도 없었다.
“하, 너무 힘드네요. 저 진짜 너무 힘들었어요.”
힘든 건 힘든 거였다. 나는 그대로 주저앉아 울먹였다. 주말인 걸 떠나서, 여기까지 오는 과정이 너무 험난했다. 아무리 돈을 좋아해도 이런 정신적 고통이라면 당분간은 벌레고 뭐고, 현금 즉시 지급이고 뭐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저…, 상당히 더워 보이는데.”
이제야 내 상태가 보인다는 말이야? 나는 울컥해서 원망을 담아 그를 노려보았다. 벌레를 죽이기 전까지 그의 머릿속에는 내 존재보다 벌레가 더 크게 작용한 모양이었다.
“미안합니다…. 제가 경황이 없었습니다. 1층 안쪽에 욕실이 있는데, 씻고 가세요.”
점잖아진 그의 목소리에 걱정이 다분했다. 마치 내가 더는 안 하겠다고 할까 봐, 내 기분을 살피기라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벌레를 잡은 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단연 씻고 싶다는 것이긴 했다. 집에서 나올 때 대충 씻긴 했지만, 물만 묻히고 나온 격이었고 여기까지 오면서 땀을 많이 흘려서 찝찝함이 컸다.
“그럼, 간단하게 샤워만 해도 되나요.”
울먹임을 누그러뜨리며 그에게 물었다.
“당연합니다. 씻고 나오세요. 갈아입을 옷은 적당히 꺼내 두겠습니다.”
욕실을 안내 받은 나는 터덜터덜 걸어가다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근데, 이거는 어떡해요?”
이호연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히 흔들렸다.
“드, 들고 씻을 순 없으니까…….”
그가 말미를 흐렸다.
“변기에 휴지 버려도 상관없죠?”
물티슈는 버릴 수 없으니 휴지에 옮겨서 흘려보내려고요. 내 덧붙임에 그는 마치 나를 천재라도 보는 양 바라보았다. 눈동자가 유레카를 외치고 있었다.
그래, 나도 알아요. 내가 좀 임기응변에 능한 편인 거. 이호연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받으며 머쓱하게 뒷목을 쓸었다. 저번처럼 쓰레기통도 아니고, 배수관을 통해 나갈 테니 문제는 없어 보였다.
안내를 받고 욕실로 들어와 곧장 벌레 사체를 휴지에 옮겼다. 일부러 안 보고 죽이려고 했는데…, 으윽, 결국 다 보게 됐잖아. 죽은 벌레의 검댕 같은 것을 그럭저럭 수습한 후 옷을 벗었다. 땀에 젖어 끈적거리는 몸에서 티셔츠를 뜯어내듯 벗어 행거에 걸었다. 안쪽 부스로 들어가 수전을 위로 들어 온도를 조절했다.
이게 무슨 꼴이람. 멀쩡한 내 집 놔두고 남의 집에서 씻게 되다니. 나는 멍하니 떨어지는 물줄기를 바라보았다.
“하하.”
헛웃음이 입가에 절로 번졌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앱에서 만나서, 세 번 본 상대의 집 욕실에서 씻는 상황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범주냐고.
샤워 헤드 가까이 다가서자 후드득 떨어지는 물줄기가 어깨와 가슴, 배를 적셔 왔다.
그래도 오늘 같은 경우는 휴일 수당까지 챙겨 준다고 했으니 넉넉하게 담아 주겠지? 씀씀이를 보면 사람이 기본적으로 나빠 보이진 않는데 말이야. 벌레만 보면 회까닥 돌아서 그렇지 평소에는 점잖은 것도 사실이고. 말투가 좀 퉁명스럽고 고압적인 편이지만, 잘 모르는 사이고 원래 말투가 그런 거라고 생각하면 그러려니 넘길 수 있었다.
에잇, 깊게 생각하지 말자. 사람이 트라우마가 있을 수 있고, 현대인 중에 안 아픈 사람이 어디 있겠어.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 줘야지.
나는 고개를 설설 젓고는 바디 워시를 샤워 타월 위에 쭉쭉 짜내었다. 비싼 동네인데, 샴푸나 린스, 바디 워시는 마트에서 파는 거라 괜한 웃음이 입매에 맺혔다. 하긴, 비싼 집에 산다고 전부 명품일 리는 없지. 친근하고 좋네, 뭐. 거품을 내어 몸 구석구석을 닦아 냈다.
보송보송하게 씻고 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욕실 문을 열었다. 이호연이 준비해 준 것처럼 보이는 티셔츠와 트레이닝 바지가 문 앞에 가지런히 개어 놓여 있었다. 손을 뻗어 욕실로 들고 들어와 바로 팔부터 꿰었다. 체격 차이 때문인지 목 부분이 어깨까지 길게 늘어졌다. 기장도 길어서 허벅지 앞을 가릴 만큼 품이 큰 옷이었다. 새삼 이호연의 체격이 큰 편임을 깨달았다. 체격도 큰 양반이 겁을 집어먹고 덜덜 떠는 게 참 모순적이란 말이지. 갑자기 벌레를 잡던 상황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바퀴벌레라는 말에 현기증이라도 난 것처럼 머리를 감싸 쥔 그의 얼굴은 절망 그 자체였다.
“저 나왔어요. 욕실 잘 썼습니다. 그, 바…도 잘 버렸어요.”
“그러십니까. 벌레는…, 잘하셨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이호연이 나를 거실로 불렀다. 벌레가 사라지자, 그의 말투는 어느덧 차분해져 있었다. 나는 조르르 다가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테이블에는 그가 준비한 얼음물이 놓여 있었다. 나는 그것을 사막의 오아시스라도 되는 양 꿀꺽꿀꺽 마신 후 크게 숨을 들이켰다. 아이고, 살겠다. 바짝 마른 입술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이제야 머리가 돌아가는 것 같았다. 지친 상태에서 벌레를 잡고, 씻을 때까지만 해도 몽롱한 기분이었는데 냉수 한 잔에 정신이 확 차려졌다.
나는 그와 마주한 채로 어색하게 앉아 있다 손에 쥔 유리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기 위해 상체를 굽혔다. 무심코 기울인 시선이 새시 커튼에 닿았다.
“커튼이…, 바뀌었네요…?”
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그에게 물었다.
“아, 그게, 기어 다녔을지도 몰라서.”
어제 사서 갈았다며 그는 새 커튼을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돈벌레가 숨어 있었던 커튼을 새것으로 바꿀 정도로 벌레를 싫어한다면 이 집에서도 이사 가야 하는 거 아냐? 남자는 벌레를 보고 놀라고, 나는 남자를 보고 놀랐다. 돈이 많은 건 알겠는데 보통 이렇게까지 하나?
“장식장은요…? 장식장도 바꾸실 건가요?”
“그건…, 마음 같아서는 버리고 싶은데, 누나한테 물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멍하니 눈만 깜박이다 나는 고개를 내려 내가 앉은 소파의 커버를 보았다.
“커버도 바꿨습니다. 벌레 때문에.”
“…대, 대단하시네요.”
“안 바꿨으면 여기 앉아 있지도 않았을 겁니다.”
너 대단하다. 너 돈 많다. 나는 진심으로 뜨악하여 이호연을 쳐다봤다. 벌레가 잠시 머문 곳들 전부를 바꾸려면 돈이 엄청 많아야겠지.
“원래는 안 여쭤보려고 했는데요. 그렇게 싫으면 다른 데 사셔도 되는 거 아닌가요?”
고용주의 사정에는 애당초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건 회사든 뭐든 같았다. 나는 돈만 잘 받으면 되고, 그들은 과업 달성 후 정해진 조건에 맞추어 지급만 잘 해 주면 되었다. 그런데 이호연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고 해야 하나, 이상하게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게, 이 집은 원래 누나 명의의 집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다가 얼마 전에 돌아왔는데, 마침 누나가 호주에 반년 동안 매형이랑 나가 있게 돼서 집을 구하기 전까지만 살기로 한 겁니다. 회사도 가까워서 잠깐 사는 정도면 괜찮겠다 싶었고요. 집은 알아보고 있는데, 회사 일이 바빠서…….”
이호연은 이 집에 이렇게 많은 벌레가 있을 줄 알았다면 누나의 호의를 거절했을 것이라고 했다. 미국에서 지냈던 사택 주변은 이렇게 벌레가 많지 않았다며 난감한 기색을 표했다. 서판교 일대는 환경 친화적 도시 계획으로 공원 부지가 많다. 이는 사옥이 밀집한 테크노밸리 부지도 마찬가지였다. 화랑공원과 낙생대공원 등 크고 작은 공원이 곳곳에 포진해 있었다. 강남에서 판교로 회사를 다니게 되었을 때, 서울처럼 인구 밀도가 높지 않고 도로도 시원시원하게 뚫려 있는 데다, 공원 역시 잘 조성되어 있어 좋았다. 그런데 이런 환경이 그에게는 독이었던 걸까.
“누나가 이렇게 비위생적인 줄도 몰랐고….”
누나분이 비위생적인 게 아니라 그냥 이 집이 문제인 것 같은데요. 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이호연의 얼굴만 바라봤다. 그는 한동안 누나와 상종조차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덧붙였다. 투덜대는 어조였지만 장난기가 반쯤 서린 그의 어조에서 그녀를 향한 애정이 느껴졌다.
“누나분이랑 친하신가 봐요.”
“그럴 리가요. 호적만 같이 쓰는 사람입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거짓말을 하려면 입에 침이나 바르고 하지. 정말 사이가 좋지 않았다면, 장식장에 대한 문제를 논의조차 하지 않고 버렸을 것이다. 게다가 그의 누나 역시 가족이라고는 해도 부부가 사는 집을 남동생에게 내어 주진 않았을 것이다. 주변 친구들에게서 보던 현실 남매라는 느낌이 좀 덜 하달까. 미국에서 살다 와서 그런가.
“마침 모아를 볼 일이 있었는데, 둘러보던 차에 벌레가 나와서 거기다 글을 쓴 겁니다. 예준 씨가 와 줘서 다행이었죠.”
그날을 회상하던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청소나 다른 부분은 사람을 쓰거나 혼자 어떻게 해 보겠는데, 도저히 벌레만큼은 어쩌질 못하겠다고 했다. 거들떠보기도 싫고, 존재 자체만으로도 끔찍하다며 꽉 움켜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투덜거림을 한 귀로 넘기며 대충 주억거렸다.
가진 돈으로 그냥 호텔을 가지……. 누나가 아끼는 가구들은 제외한다고 하더라도 벌레의 숨결이 잠깐이라도 머문 곳들을 전부 바꾼다고 가정하면, 남아나는 게 없을 것이다.
나는 집 내부를 뱅그르르 둘러보다 피곤한 몸을 소파에 푹 기댔다.
“…호텔은요?”
내가 물어보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도 처음엔 호텔에서 지내려고 했는데, 누나도 그렇고 부모님도 그게 웬 말이냐고…. 저도 호텔까지 갈 정도는 아닌 것 같기도 하고요. 매일 나오는 건 아니니까…….”
하기야. 나라도 내 가족이 벌레 때문에 호텔에 가서 지낸다고 하면 개소리 작작 하라고 등짝 스매싱을 날렸을 것이다. 그래도 호텔 생활이 나을 것 같은데…, 또 그건 아닌가. 그가 말한 대로 매일 나오는 건 아니니까.
“씻으시는 동안 휴일 수당 포함된 금액으로 해서 넣었습니다.”
이호연이 봉투를 꺼냈다. 나는 기댔던 몸을 바로 세우며 침을 꿀꺽 삼켰다. 내민 봉투를 두 손으로 받았다. 틈새로 10만 원짜리 수표가 두 장 들어 있는 것을 얼핏 보고 숨을 흡, 집어삼켰다.
“댁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식사는 가는 길에 역 근처에서 같이 드시죠.”
“저, 제 몰골이 조금.”
아슬아슬하게 어깨에 걸쳐진 커다란 티셔츠와 고무줄로 간신히 동여맨 트레이닝 바지. 혼자라면 타인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겠는데, 차려입은 이호연과 대조될 것이 빤히 보여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그냥 갈게요. 어차피 자전거도 가지고 와서….”
잊을 뻔했던 자전거의 존재가 떠올라 터지려는 한숨을 가까스로 꾹꾹 눌러 냈다. 이 차림으로 그를 따라 식사를 하러 간다면 자전거를 차 트렁크에 실어야 하는데, 그건 또 그것대로 민폐였다. 거기다 수당도 넉넉하게 주었기 때문에 식사까지 대접받기는 좀 그랬다. 다음으로 미루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럼 다음에 제대로 대접하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충분히 쉬었고, 물도 얻어 마셨으니 남은 주말을 위해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호연 씨, 빌려주신 옷은 세탁해서 다음에 뵐 때 돌려 드릴게요.”
“그러세요.”
이호연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내걸렸다. 늘 차갑고 냉랭하기만 한 그였는데, 처음 본 웃음에 두 눈을 깜박이며 빤히 쳐다보았다. 저렇게 웃을 줄도 아네. 나는 속으로 감탄하며 입고 온 옷을 담은 쇼핑백을 챙겨 들었다.
복도를 가로질러 현관 앞에 멈춰 서서 신발을 갈아 신었다.
“맞다. 저, 앞으로는 자주 못 올지도 몰라요.”
내가 나지막하게 말하며 문고리로 손을 뻗으려는 순간이었다. 이호연이 내 팔을 붙잡아 돌려세우며 거리를 바짝 좁혀 왔다.
“왜죠…?”
코앞까지 다가온 그의 얼굴에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충격을 받은 듯 보이는 그는 마치 무서운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손까지 잘게 떨었다. 나는 그를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게, 제가 새 프로젝트를 할당받아서, 다음 주부터 야근을 하게 될 거라…….”
거창한 이유가 아니라 민망해졌다.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는 결연하게 말하며 주먹을 꾹 쥐었다.
도대체 뭘 노력하겠다는 건데. 벌레를 참을 셈이야? 아니면 벌레가 안 나오길 기도라도 할 셈인가? 뭐가 됐든 상상하고 싶지 않은 광경이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치미는 한숨을 애써 꾹 참아 냈다. 궁금한 것도 해결했고, 돈도 벌었으니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