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빗속 여름
어김없이 찾아온 12월 31일의 밤은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매년 함께할 상대가 있다는 점에서 그간의 시간과는 달랐다. 그 차이는 아주 컸다. 내일이, 내달이, 내년이 기대되었기에.
이번 연말은 조용하게 보내고 싶은 마음에 산속에 자리한 숙소를 예약했다. 작은 건물은 도심과 떨어져 있고 한쪽 벽이 통창으로 되어 있어 별을 보기 제격이었다. 밤이 찾아오자 숲은 어둠에 잠기고 별이 총총히 떠올랐다.
옆에서 터진 탄성에 고개를 돌리자 청우가 반짝이는 눈으로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편안한 낯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작년 하반기는 함께 휴학해 여행을 다니고 대외 활동과 공모전에도 참여하며 알찬 일상을 보냈다. 올해 초부터 청우는 공채 준비를 했으며 하반기에는 매주 필기시험을 보러 다닐 정도로 바빴다. 끝없는 면접과 인턴십까지, 얼굴을 볼 때마다 지쳐 가는 게 보여 안타까웠는데 다행히 원하던 곳에 최종 합격을 해서 입사를 앞두고 있었다.
정말 열심히 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봐 왔기에 마치 제 일처럼 뿌듯하고 벅차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서는 청우의 머리칼을 쓰다듬다가 테이블에 놓인 잔을 들었다.
“짠.”
청우가 이서의 잔에 제 잔을 부딪쳤다. 그는 소주와 맥주에는 강했지만 와인에는 약한 편이라 귀가 벌써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여기 좋다.”
“그치. 자주 오자.”
치열했던 도심 속 일상에서 멀어져 마치 둘만의 세계로 도피를 한 듯한 기분이었다. 이런 순간이 아주 길다면 좋을 텐데, 아쉽도록 짧기에 더욱 빛나기 마련이었다.
“오늘 별 오래 보고, 내일 느긋하게 일어나자.”
“그래. 너는 내일 집에 안 갈 거야?”
청우가 말하는 집은 본가일 테다. 그는 내일 저녁에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고 했다. 자신은 다른 약속을 잡지 않았다. 오늘이나 내일 함께 밥을 먹으면 좋겠다는 뉘앙스의 말을 듣기는 했으나 일이 있는 척했다.
“응.”
“가면 너……. 좀 힘드냐?”
조심스러운 물음은 그들이 자신을 힘들게 하냐는 의미를 전제로 하고 있었다. 이서는 웃으면서 고개를 젓고는 와인 잔을 손에서 굴렸다.
어떻게 답하면 좋을까. 청우에게는 솔직하고 싶었으나 몇 퍼센트의 자신을 내보이느냐는 항상 고민하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반 이상을 줘야 할 터였다. 알맹이 없는 교류로 그를 기만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내가 힘들게 해.”
“네가?”
“응. 가면 자꾸 못된 말을 하게 돼서, 안 가는 게 나아.”
“어떤 못된 말?”
이서를 응시하는 청우의 낯에는 순수한 신뢰가 어려 있었다. 네가 그럴 리 없다는 듯, 혹은 네가 그래도 괜찮다는 듯이. 그럼 그 빛에 기대 입을 열게 된다. 지금처럼.
“그냥 거절을 하는 거야. 어색한 친구 사이처럼. 뭘 해 준다고 해도, 뭘 하자고 해도 다 웃으면서 사양해.”
“왜 그렇게 하는데? 불편해서?”
“상처받는 게 보고 싶어서.”
이 나이 먹고 부모님을 상대로 벌이는 짓에 눈살을 찌푸릴 만도 한데 청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또, 못된 말이라고 해서 욕이라도 하는 줄 알았네.”
“에이, 욕보다 더 타격이 큰 말이 뭔지 다 알고 있는데.”
“뭐……. 상처받는 걸 보면 기분이 좀 나아져?”
나아진다고 말하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라고 말할까. 이서는 쓴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기분이 나아졌던 것은 어렸던 그때, 잠시뿐이었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희열에 휩싸였을 뿐, 이후로 긴 자괴감에 사로잡혀 있어야 했다.
“그럼 그것도 습관이야?”
“습관……. 비슷하지. 상처받는 걸 보면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걸 알게 돼. 그럼 이 사람들은 나를 버리지 않겠구나 하고…….”
생각보다 너무 많은 말을 쏟아 내고 말았다. 이서는 눈가를 찡그리며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버릇처럼 청우의 낯빛을 살폈으나 그는 평소와 같은 진중한 얼굴로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는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지 테이블 어딘가에 시선을 두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불안하지는 않았으나 전부 알고 싶었다. 곧 청우가 눈을 들었다.
“근데 넌 지금 버림을 받을 나이도 위치도 아니고……. 만약 부모님 지원이 다 끊기면 내가 어떻게든 너까지 먹여 살릴게.”
생각지 못한 말에 이서는 잠시 멍하니 청우의 얼굴을 훑었다.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웃음이 새어 나왔으나 청우는 전혀 농담이 아니라는 듯 묵묵한 낯으로 이서를 바라보았다.
“물론 네가 부모님한테 바라는 감정적인 부분까지 대체하기는 힘들겠지. 그래도……. 내가 더 많이 줄게.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너까지 괴롭히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문득 생각했다. 자신의 무엇이 청우로부터 하여금 저런 사랑을 끌어내게 했을까.
“너한테도 편하게 돌아갈 곳이 하나라도 더 있었으면 좋겠고.”
자신이 그에게 보여 주는, 반들반들하게 닦고 광을 내는 부분만으로는 이런 마음을 보답받을 수 없을 터였다. 청우의 말이 가슴 아주 깊숙한 곳으로 들어와 검고 끈적끈적하게 침잠된 바닥을 어루만지는 듯했다.
이서는 입꼬리를 어색하게 올렸다. 어떤 것도 꾸며 낼 수 없을 정도로 큰 너울이 그를 덮쳤다.
*
“이서 님. 오늘 한잔?”
선임의 말에 이서는 습관적으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잠시 생각했다. 청우는 오늘 만나지 못할 테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첫 회식도 아니고, 선임과의 술자리는 몇 번 가져 본 적이 있기에 오늘은 사양하기로 했다.
“저 오늘 약속이 있어서요.”
“그래? 아쉽. 수고.”
이서는 떠나는 선임에게 인사하고 나서 짐을 정리했다. 남아 있는 팀원들과도 인사를 나눈 뒤에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감기 기운이 있나. 머리가 무거웠다. 손등을 올려 이마를 만지고선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 약은 차고 넘치도록 있으니 바로 집으로 가면 될 듯했다.
벚꽃이 한창인데 아직 청우와 꽃놀이도 가지 못했다. 둘 다 신입이고 아무래도 청우는 거의 매일 야근을 할 정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니 얼굴도 자주 보기가 힘들었다. 가로등 불빛을 하얗게 받은 채 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리는 벚나무들을 훑다가 속도를 올렸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탓인지 오피스텔이 유독 텅 비어 보였다. 불을 켠 뒤에 약이 든 서랍을 열어 종합 감기약을 하나 꺼내 먹었다. 옷을 갈아입고 씻고 나서 냉장고에 든 샐러드를 꺼냈다.
샐러드를 포크로 뒤적이며 핸드폰을 들었다. 퇴근 전에 보낸 메시지를 청우는 아직 확인하지 않고 있었다. 아, 보고 싶은데. 이서는 턱을 괸 채로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콧잔등을 찡그렸다.
매일 이른 아침 경찰서로 출근하고 늦은 밤에 퇴근하는 루틴이다 보니 얼굴을 보기가 힘든 게 당연했지만, 같이 살고 있지 않은 점 또한 한몫하는 듯했다. 이서는 여전히 학교 근처 오피스텔에서 차를 타고 통근하고, 청우는 방송국 근처 원룸에 둥지를 틀었다.
이서도 근처로 자취방을 옮길까 했으나 그러면 회사와 더 멀어져 청우가 만류했다. 감수할 수는 있었으나 확실히 비효율적이기는 했다. 차라리 같이 산다면…….
요즘 들어서 그런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같이 산다면 적어도 일찍 나가는 그를 배웅해 줄 수 있을 터였다. 쉬는 날에는 서로의 체력이나 휴식을 굳이 배려하지 않아도 함께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하지만 떨어져 사는 것이 최소한의 선이라는 고집을 버리기가 힘들었다. 자신이 무엇을 꺼려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청우라면 괜찮을 거라고, 같이 사는 게 훨씬 나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지막 한 가닥의 실이 자신을 붙잡는 듯했다.
빨리 먹고 잠이나 자야지. 이서는 한숨을 내쉬고 샐러드를 비운 뒤 청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오늘 일찍 잘게」
「힘내 자기야」
갖은 아양을 떠는 이모티콘을 찾아 덧붙이고 나서 식탁 위를 정리했다. 밀린 집안일을 하고 나니 약 때문인지 슬슬 잠기운이 몰려왔다. 지금 자면 새벽에 깰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서는 시계를 보고 고민하다가 몸이 점점 무거워져 침실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핸드폰을 확인하고 나서 침대 위에 누웠다. 빛이 바랜 야광 별이 눈에 들어왔다. 저것도 갈든지 떼든지 해야 할 텐데. 생각하며 무거운 눈꺼풀을 감았다.
순식간에 수마에 잡혀 들었으나 자정이 조금 넘었을 때 잠에서 깼다. 오한이 들고 땀이 삐질삐질 나는 게 아무래도 몸살인 듯싶었다. 약부터 먹어야 하는데 일어나기가 귀찮고 힘들었다.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 하며 미루는 순간 정신을 잃듯 다시 잠에 빠졌다.
아주 무거운 돌덩이들이 몸 위로 얹힌 듯했다. 길디긴 악몽이 머릿속에서 휘몰아쳤다. 이서는 떨면서 영문도 모른 채 어둠 속을 표류했다. 언뜻 피부가 끈적거리고 불쾌했다. 이 시간은 언제 끝나는 걸까. 익숙하면서도 영원히 친숙해지지 못할 순간이 조각조각 나며 살갗을 찔렀다.
으으, 신음을 흘리며 이불을 바르쥘 때였다.
“이서야. 정이서.”
귀에 익은 단단한 목소리가 이서를 순식간에 낚아채 끌어 올렸다. 이서는 눈을 번쩍 떴다. 잘 알고 있는 온기를 지닌 손이 제 이마를 더듬었다.
“약 먹었어?”
오늘 못 볼 거라고 했는데…….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마법같이 나타난 제 연인을 바라보았다. 청우가 걱정 어린 눈으로 이서의 뺨을 매만졌다.
“괜찮아? 약은.”
“먹었어. 아까, 여덟 시쯤에…….”
“해열제 먹자.”
청우가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불빛이 새어 들어오는 문틈을 하염없이 응시하다 보니 곧 그가 약과 물 잔, 수건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몸을 일으켜 앉아 그가 건넨 약을 먹었다. 청우는 연신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이서를 훑으며 열기를 확인했다. 그의 손이 닿자 끈적해 불쾌했던 피부가 순식간에 보송해진 듯했다.
“어떻게 왔어? 오늘 못 올 거라며.”
“너 연락 안 받길래.”
“메시지 보냈는데, 못 봤어?”
“봤지. 근데 너 일찍 잔다고 해도 일찍 못 자잖아. 혹시나 해서 와 봤더니…….”
청우가 이서의 어깨를 밀어 도로 눕혔다. 그는 물에 젖은 수건으로 이서의 이마와 목덜미를 닦아 주었다. 시원한 감촉에 절로 탄성이 튀어나왔다.
“이렇게 와도 돼? 신입 사원이.”
“모르겠다.”
장난스러운 말에 청우가 진지하게 답했다. 그는 이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 사람 하나 못 챙기는 일을 무슨 사명을 가지고 할 수 있는지…….”
같이 학교에 다닐 때는 서로의 컨디션을 금방 알아채고 챙겨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이 바쁘다 보니 아무래도 회의가 느껴지는 모양이다. 이서는 웃으면서 청우의 손을 쥐었다.
“이런 마음으로 하면 되지. 날 위하는 마음으로.”
아, 그러면 일을 질투하게 되려나? 하지만 제 일에 사명감을 가지고 사소한 부분도 허투루 하지 않는 청우가 좋았다. 치열하게 일하는 그를 지켜보다 보면 제게도 하나의 원동력이 생기는 듯했다.
이서는 청우의 손을 위로 가져와 손등에 뺨을 댔다. 따뜻한 온기가 제 열기를 식혔다. 고작 연락이 조금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달음에 달려와 제 곁을 지켜 주는 그가 너무 좋아서 이 어둠마저 제 것이 된 듯했다. 문득 천장 위에 붙은 야광 별과 엽서, 포스터 따위를 전부 떼어 버리고 싶었다.
“자. 아침까지 있을 테니까.”
“나가야 하지 않아?”
“너 깨우고 나갈게.”
청우가 다른 손으로 이서의 가슴을 도닥였다. 그의 손길에 이서는 온몸을 늘어뜨리며 기쁘게 눈을 감았다. 무겁던 머리가 점차 가벼워졌다.
눈을 떴을 때는 방 안이 밝아 있었다. 이서는 고개를 돌려 청우를 찾았다. 그가 저와 조금 떨어진 부근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불편한 자세로 잠을 청하는 걸 보니 안쓰럽고 동시에 사랑스러웠다.
몸을 일으키자 확실히 컨디션이 나아진 게 느껴졌다. 가뿐한 팔을 휙휙 돌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 청우를 흔들었다.
“청우야. 일어나.”
몇 번 더 흔들자 청우가 앓는 소리를 흘리며 눈을 떴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손을 뻗어 이서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열 내렸네.”
“응, 덕분에.”
청우가 침대에서 빠져나오며 기지개를 켰다. 그러고는 시간을 확인하더니 아직 여유가 있는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너 어제저녁에 뭐 먹었어?”
“샐러드.”
“아픈 애가 끼니를 그런 걸로 때우면 어떡해. 아침 사 왔으니까 먹자.”
청우를 따라 주방으로 나가니 식탁 위에 포장된 설렁탕이 놓여 있었다. 그가 그것을 데우는 걸 지켜보다가 물었다.
“이건 언제 가서 사 왔어?”
“새벽에. 아, 배고프다.”
이걸 사려면 꽤 멀리 나가야 했을 텐데. 웃음이 피식피식 새어 나왔다. 못 당하겠다니까. 이서는 차오르는 마음을 누르며 자리에 앉았다.
배가 정말 고팠는지 청우는 숟가락을 들자마자 쉬지 않고 그릇을 비웠다. 이서는 그가 잘 먹는 모습을 감상하며 천천히 식사를 마쳤다.
“고마워.”
어릴 때도 경험해 보지 못한 지극정성의 간호를 받았다. 피곤했을 텐데 신경 써 준 마음을 고맙다는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청우는 별것 아니라는 듯 겸연쩍은 낯을 했다.
“벚꽃 핀 거 봤어?”
“응. 언제부터 그랬는지, 갑자기 피었더라. 주말에는 같이 나가자. 나도 꽃 좀 봐야겠어.”
“그래, 세상의 밝은 면도 자주 봐야지. 내 얼굴처럼.”
손으로 얼굴을 받치자 청우가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 웃을 때면 벌어지는 입 속의 작은 공간. 그곳의 어둠은 어둠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 가끔은 그곳을 난잡하게 헤집다 못해 빠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서는 청우의 입가를 빤히 응시하다가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가야겠다. 너도 출근 준비 해야지.”
“응.”
청우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서둘렀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인사를 던진 뒤에 문을 연 청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서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을 옮겨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청우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는 이서를 돌아보더니 시선을 아래로 내려 제 손목을 붙잡은 손을 응시했다. 이서가 다른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청우는 문을 닫고 도로 들어와 이서의 손을 꽉 잡았다.
“뭐 할 말 있어?”
다정하게 마주쳐 오는 시선. 가슴으로 아득한 빛이 퍼지는 듯했다. 이서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우리 같이 살까?”
그어 두었던 마지막 선은 보잘것없었다. 하찮은 것을 두고 재고 따져 보았자 그에 비할 수 없는 가치에 질 뿐이었다. 실로 원하던 일을 입 밖으로 내뱉자 가슴이 쿵쿵 뛰었다.
청우의 둥근 눈이 크게 벌어졌다. 그는 멍하니 이서를 바라보더니 이서의 목덜미를 거칠게 잡아당겨 입술을 맞댔다. 꽤 거셌던 부딪침과는 다르게 혀는 부드럽게 섞였다. 감질나는 키스 후에 청우가 이서와 눈을 마주했다.
“응.”
짧은 대답은 언제든 준비되어 있었던 것처럼 단단했다. 이서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야, 이게 얼마 만이냐.”
도욱이 올린 손에 손바닥을 맞부딪쳤다. 오랜만에 찾은 가게는 조금 더 밝아져 있었다. 처음 왔을 때는 어두컴컴했는데, 트렌드에 맞추어 인테리어를 바꾼 듯싶었다.
“뭐 하고 지내냐.”
“일하지. 넌. 장사 잘돼?”
“예전보다는 훨씬. 포트폴리오 쌓이기도 했고, 요즘에는 또 SNS 보고 다 찾아와요.”
잘되고 있다니 좋은 일이었다. 도욱은 고등학교 동창으로, 미대를 준비하더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갑자기 타투이스트로 진로를 틀었다. 가끔 다른 동창들과 함께 만나 안부나 묻는 사이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왔다. 타투를 허락해 줄 사람이 주변에 너밖에 없는 것 같다며 네 몸에 연습 좀 해도 되겠냐는 말에 흔쾌히 수락했다. 어깨 뒤에 새긴 타투는 그래서 생긴 것이었다.
“잘됐네. 너 많이 늘었더라.”
“그치? 너한테 칭찬 들으니까 좋다, 야.”
도욱이 쑥스럽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근육이 우락부락하고 인상이 험악한 것치고 의외로 섬세한 녀석이었다.
“나한테 또 받으러 와 줘서 고맙고.”
“내가 더 고맙지. 너한테 받으려면 예약하고 한참 기다려야 하던데.”
“연습 상대까지 해 줬는데 당연히 예약이고 뭐고 필요 없지. 내가 진짜 예쁘게 해 줄게. 생각해 온 시안 있어?”
이서는 태블릿 PC를 꺼내 그려 온 시안을 보여 주었다. 파란색의 물방울 모양으로, 비교적 간단한 시안이었다.
“오, 심플하네? 안에는 뭐 안 그려 넣게?”
“그냥 가장자리에 음영 주는 정도로만.”
“오케이. 어디 할 거야?”
“여기.”
이서가 왼팔을 내밀고서 팔오금 위쪽을 가리켰다. 그중에서도 가운데가 아니라 몸과 닿는 부분에 치우치게 해 달라고 하자 도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쁘겠네. 그럼 스케치 먼저 해 볼 테니까 수정하고 싶은 거 있음 말해.”
도욱이 스케치를 하는 것을 지켜보았는데, 굳이 말을 얹지 않아도 될 듯했다. 사실 충동적으로 내린 결정이었으나 도안을 보고 나니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면 돼?”
“어. 그대로 해 줘.”
“오케이. 근데 갑자기 타투는 왜?”
“그냥. 하고 싶어서.”
청우한테는 말하지도 않았다. 보면 뭐라고 하려나. 하지만 파란색 물방울을 떠올린 순간, 새기고 싶은 충동에 시달려 어쩔 수 없었다.
“그래. 뜻 없이 하는 게 좋아. 요즘엔 어휴, 애인 얼굴이나 이름 새겨 달라는 놈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사랑에 미친 놈들. 그러다 헤어지면 어떡하려고.”
도욱의 불평에 이서는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미친놈이라는 말에 딱히 반박하고 싶지는 않았다. 언젠가 이 타투를 붙잡고 청승을 떨더라도 새긴 일을 후회하지는 않을 테다. 아, 청우가 이런 생각 하지 말라고 했는데. 습관은 하루아침에 고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래도 생각의 빈도가 현저히 줄었다. 장족의 발전이었다.
완성된 도안이 팔에 천천히 새겨졌다. 통증이 따랐지만 참을 수 있는 정도였다. 이런 것에 의미를 두지 않는 편인데도 제 팔에 그의 이름이 새겨진다고 생각하자 옅은 희열이 몰려왔다.
물방울이 한창 완성되어 가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었다. 청우에게서 온 메시지를 클릭하자 음식 사진이 떴다. 늦은 점심을 먹고 있는 모양이다. 바쁠 때는 별다른 말 없이 이렇게 사진으로 일상을 공유해 주는 성실함이 귀엽고 고마웠다.
「천천히 많이 먹어~」
한 손으로 답장하고 나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안 그래도 입사하고 나서 살이 빠져서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끼니는 거르지 않고 챙겨 먹는 듯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근데 오늘 회사 안 가는 날?”
“원래 가는 날인데, 프로젝트 하나 끝나면 휴가를 줘.”
“오, 좋은 회사네.”
“대신 바쁠 땐 빡세게 굴리지.”
“하긴. 좋기만 한 회사가 어디 있겠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타투가 완성되었다. 엄지손가락보다 조금 작은 푸른색 물방울 안으로 그보다 짙은 색의 그러데이션이 선을 따라 안쪽으로 흩어졌다. 은은하게 자리를 잡은 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어때.”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잘 나왔어. 고맙다.”
“그래. 나도 마음에 드네. 관리 방법은 말 안 해 줘도 알지?”
“어.”
다음에 술 한잔하자는 약속을 잡고서 도욱의 가게를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 쉬다가 시간이 되어 밖으로 나왔다.
저녁을 먹기로 한 장소는 성수동에 자리한 영국 가정식 식당이었다. 최소 일주일 전에는 예약을 해 두어야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인기 많은 곳이었다.
근처에 차를 세우고 안으로 들어가 직원의 안내를 따라 준비된 예약석에 앉았다. 메뉴판을 보며 기다린 지 얼마 안 되어 상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이 넓지 않은 편이었기에 조연은 금방 이서를 찾았다.
“오셨어요.”
“응, 오래 기다렸니?”
“아뇨. 저도 금방 왔어요.”
회사에서 바로 왔는지 슈트 차림의 조연은 다소 상기되어 보였다. 이서가 먼저 연락해 약속을 잡은 일은 처음이었으니 당연했다.
“차 안 막혔어요?”
“조금 일찍 나와서 괜찮았어.”
“다행이네요. 뭐 드실래요?”
“글쎄, 뭐가 괜찮아? 네가 골라 줘.”
이서는 직원을 불러 몇 가지의 메뉴를 주문했다. 조연은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식당 안을 둘러보았다.
“여기 분위기 좋다. 누구랑 왔었어? 여자 친구?”
“비밀이에요.”
이서의 장난스러운 대답에 그가 웃었다. 문득 언젠가 청우를 제 연인이라 소개하게 된다면 조연이 어떤 반응을 할지 궁금해졌다.
“일은 어때. 할 만해?”
“재밌어요. 힘들긴 한데 생각보다 더 적성에 맞고요.”
“다행이다. 나는 사실 네가 더 늦게 일을 시작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마 조연은 이서가 취직하지 않고 빈둥빈둥 놀고 싶다고만 해도 지원을 해 주었을 터였다. 이서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일하는 게 체질인가 봐요.”
“그건 엄마 닮았나 보다.”
조연이 말을 내뱉고선 순간 흠칫했다. 제게로 조심스레 향하는 시선에 이서는 미소를 머금은 채로 긍정했다.
“그러게요.”
조연의 낯에 화색이 돌았다. 그의 얼굴을 보자 순간 지금까지 뭘 놓치고 살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음식이 나왔다. 조연은 입에 맞았는지 연신 맛있다며 지인들과 와야겠다고 말했다.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좋아하는 조연을 보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생각보다 자리가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속이 간질거리며 어딘가 들뜨는 듯했다.
접시를 다 비워 갈 때쯤에 이서는 조연을 슬쩍 보고선 포크를 내려놓았다. 오늘의 본론을 꺼낼 차례였다.
“저 이사하려고요.”
“이사? 회사 근처로?”
“아뇨, 바로 근처는 아니고요. 친구랑 같이 살 거라서요.”
“친구?”
조연이 궁금해하는 듯한 얼굴을 했다. 지금은 친구이지만 언젠가는 연인으로 소개할 날을 떠올렸다. 학교를 졸업한 뒤로 청우와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천천히 해 나가고 있다. 아직 서로의 가족과 관련한 대화는 나누지 않았지만, 결국에는 부딪쳐야 할 일일 테다. 물론 청우가 밝히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영영 숨길 의향도 있었다.
“이청우라고, 대학 다니면서 만난 친구예요. 지금은 SBC 소속이고요.”
“음? 이청우? 사회부 이청우 기자 말하는 거니?”
“네. 아세요?”
“그럼, 알지. 면접도 내가 봤는데. 훤칠한 친구잖아.”
그럴 거라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면접관 중 조연이 있었다는 사실은 듣지 못했다. 아마 너무 긴장한 탓에 면접장을 나오고 나서는 말할 생각도 하지 못했거나 자신을 배려해 굳이 이야기하지 않은 것일 테다.
“맞아요, 그 친구.”
“둘이 아는 사이였구나. 같이 살 생각까지 하는 거 보면 정말 친한가 보다.”
“네, 제가 아끼는 애예요. 그러니까 잘해 주세요. 티는 내지 마시고요.”
“그럼. 누구 부탁인데.”
이서가 이런 부탁을 하고, 제 친구에 관해 이야기를 하는 일이 처음이다 보니 조연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언젠가, 청우의 부모에게 자신을 소개할 날이 온다면 남자라는 약점 이외의 다른 것은 없어야 했다. 번듯하고 일반적인 가정에서 자란 아이. 청우는 전혀 신경 쓰지 않겠지만, 그들의 부모에게는 그런 인상을 주며 안심시켜 주고 싶었다. 또 만약에 그의 부모가 청우에게 상처를 주었을 때 반대편에서 따뜻하게 감싸 줄 편이 자신 말고 더 있었으면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들과의 관계를 차차 회복할 필요가 있었다. 순수한 마음이 아니기는 했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이 편안해졌다. 작은 돌덩이를 내려놓은 것처럼.
“그래서 이사하면 오피스텔 정리 부탁드리려고요.”
“그래. 집은 봐 뒀어?”
“아직이요. 이제 찾아봐야죠.”
“거기는 생각 안 해 봤어? 네 명의로 해 둔 집 있잖아.”
“아, 거기요.”
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성인이 되고 나서 증여를 받은 아파트가 있었다. 이들의 집과 멀지 않은 곳으로, 거절했는데도 굳이 증여를 해 주었다. 아마 독립 후 너무 멀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을 테다.
“방송국이랑 이서 네 회사 사이에 있으니까 괜찮지 않아? 둘 다 바쁜데 집 알아보느라 스트레스받고 하느니 거기 들어가는 게 나아 보이는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대출을 받기는 해야겠지만 모아 둔 돈도 있기는 하고, 청우 대신 자신이 찾아보면 되기는 하나 안 그래도 바쁜 그가 괜한 신경을 쓰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네요. 감사해요.”
“감사하긴. 엄마 아빠가 해 줄 수 있는 걸 해 주는 건데.”
조연이 순수하게 기쁜 낯으로 웃었다. 이서는 그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따라 미소 지었다.
*
「집이야?」
청우에게서 온 메시지에 가고 있다고 답장하자 곧 가겠다는 말을 전해 왔다. 간만에 평일 저녁을 여유롭게 보낼 수 있을 듯해 신호에 걸린 사이 뭘 먹으면 좋을지 생각했다. 밖에 나가는 것보다는 집에서 오붓하고 조용하게 시간을 보내면 좋을 것 같아 마트에 들러 재료를 사 왔다.
주방을 정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도어 록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비밀번호를 알고 있기는 하지만 예의를 차리는 건지 자신이 집에 있으면 벨을 누르던데, 오늘은 웬일인가 싶었다. 서둘러 현관으로 향하자 청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왔어?”
팔을 벌리고 맞이하자 청우가 성큼성큼 다가와 안겼다. 그에게서 제가 선물해 준, 저와 똑같은 향이 희미하게 풍겼다. 향수를 다 쓸 때마다 하나씩 사 주니 잊지 않고 뿌리고 다니는 게 귀여웠다.
그를 데리고 주방으로 향했다. 겉옷을 벗어 의자에 걸친 청우가 자리에 앉았다.
“커리 어때? 장 봐 왔는데.”
“좋지. 근데 잠깐 앉아 봐.”
이제 보니 청우는 꽤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는 듯도 싶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의아한 낯으로 앉자 청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있잖아.”
“응.”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지 모르겠다. 걱정이 되어 웃음기가 사그라들자 청우가 고개를 흔들며 입을 뗐다.
“국장님이……. 나한테 저녁 식사를 하자고 하시는데.”
아, 티 내지 마시라니까. 어지간히 궁금했는지 바로 식사 약속을 잡았나 보다. 이서는 눈가를 찡그리며 웃었다.
“내가 너랑 같이 살 거라고, SBC 소속이라고 얘기하니까 아시던데. 보고 싶으셨나 봐.”
“아, 그래서 그런 거야?”
청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어머니라기보다는 상사로서 생각해 긴장했나 보다. 하지만 그는 곧 미간을 찡그렸다.
“너희 어머니랑은 처음 갖는 자리네.”
“왜. 갑자기 또 긴장돼?”
“응.”
“긴장하지 마. 뭐하면 내가 같이 가 줄까?”
“그래 줄 수 있어?”
“어머니도 좋아하실 거고, 확실히 내가 끼면 둘 다 편할 테니까.”
그제야 청우가 완전히 풀어진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는 무덤덤하고 뭐든지 잘할 것 같은데, 제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일 때마다 깨물어 주고 싶었다. 이서는 웃으면서 일어나 청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커리를 만들기 위해 일어나자 청우가 식탁 위를 세팅했다. 그는 의자 위에 편하게 늘어진 채로 이서가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이서는 이 시간을 좋아했다. 평화로운 저녁,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기고 사랑하는 연인의 시선이 제게만 붙어 있는 시간. 이게 좋아 혼자 해 먹을 때와는 달리 느긋하게 움직였다.
“그러고 보니까 오늘은 일찍 왔네?”
“응. 뉴스 끝나자마자 바로 퇴근하라고 해서.”
“수습 끝나니까 살 만은 하네.”
“그러니까.”
완성된 커리를 접시에 예쁘게 담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음식을 보는 청우의 눈에 활기가 돌았다.
“맛있겠다.”
“먹어.”
“잘 먹을게.”
밥을 크게 떠먹는 청우를 확인하고 나서 숟가락을 들었다. 그가 몇 번 씹더니 미간을 찌푸린 채로 맛있다고 웅얼거렸다. 뭘 해 주든 잘 먹어서 요리하는 맛이 있었다. 이서는 웃으면서 천천히 먹으라고 말했다.
“근데 어머니 만나는 거 안 불편하겠어? 불편하면 만나지 마.”
“불편할 게 뭐 있어. 어차피 나중에는……. 봬야 할 텐데.”
청우가 아무렇지 않게 함께할 미래를 언급할 때면 이서는 그의 말을 접지도 않고 고이 가져와 가슴속에 차곡차곡 쌓았다. 오랜 습관으로부터 비롯된 비관과 불안을 묻은 자리에 소중한 말들을 올리고 또 올렸다. 그러다 보면, 문득 돌아보았을 때 높이 솟은 미래에 시선이 닿았다. 이서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너야말로 괜찮겠어?”
“난 괜찮아. 어머니랑 저번에 단둘이 밥도 먹었고.”
“그래? 잘했네.”
어린애도 아닌데 칭찬이 듣기 좋았다. 이서는 괜스레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접시를 비웠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차를 우렸다. 재스민 향이 기분 좋게 코끝을 휩쌌다.
“요즘 그놈은 잠잠해?”
“응. 위에서 한 번 깨지더니 꼬리 말고 있어.”
“계속 그래야 할 텐데.”
“그러니까.”
퇴근하고 나서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화제는 아무래도 직장 이야기였다. 어딜 가나 있는 꼰대 한 명을 이야기해 주었더니 이후로 꽤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그의 사소한 염려와 관심이 좋아 일상을 공유하는 게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그때 말했던 인터뷰는 잘 땄어?”
“따긴 땄어. 아, 나 학보사 때는 학생이기도 하고 방송 나오는 게 아니라 그런지 잘 협조해 주시던데 지금은 거절을 더 많이 들어.”
“고생이다. 그래도 넉살 하나는 늘겠네.”
“응. 나도 내가 처음 보는 사람 붙잡고 늘어질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청우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고되어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큰 회의도 느끼는 듯했지만 일 얘기를 할 때 그의 까만 눈은 늘 반짝거렸다. 그래서 함께 있는 시간이 학생 때보다 줄어들었어도 그것이 싫지만은 않았다. 청우의 시간을 존중해 주고 싶었고, 성장하고 성숙해 가는 그의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사실이 큰 행운처럼 느껴졌다.
둘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로의 집을 자주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잘 때 입는 옷이 다 준비되어 있었다. 청우에게 옷을 건네자 그가 그것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이서는 다른 욕실로 가 씻고 나왔다.
청우는 침대 위에 앉아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야광 별과 엽서 따위를 훑는 그를 보다 웃으면서 다가가자 그가 고개를 내렸다.
“그거 뭐야?”
가까이 다가섰을 때 청우가 이서의 팔을 가리켰다. 반소매 티셔츠로 갈아입은지라 새 타투가 아주 잘 보였다. 이서가 주춤하는 사이 청우가 그의 손목을 가져갔다.
“예쁘다. 새로 했어?”
“응.”
청우의 시선이 푸른 물방울 위로 떨어졌다. 타투의 주인이 감상하고 있으니 어쩐지 그 부분이 간질거렸다. 청우가 손가락으로 푸른 선을 살짝 훑더니 눈을 들었다.
“이거 나야?”
“아니?”
반사적으로 거짓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청우는 추궁하지 않고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서는 청우의 손에서 팔을 빼내며 타투 한 부위를 만지작거리다가 입을 뗐다.
“만약에 네 이름으로 했다고 하면……. 기분 나빠?”
“아니. 나쁠 게 뭐 있냐. 나중에 네가 후회하겠지. 나랑 싸웠다고 팔 쥐어뜯고 그러지 마라.”
무심한 타박을 던지는 얼굴에는 어떤 유감도 없었다. 청우가 다시 보자며 이서의 손목을 쥐어 당겼다. 타투를 그저 신기하고 예쁘게만 보는 눈에 문득 숨이 막혔다. 기분 좋은 질식이었다.
“안 쥐어뜯어.”
“그래. 안 아팠어?”
“응.”
“색깔 있는 것도 예쁘네. 너랑 잘 어울린다.”
그럼, 누구 이름인데. 이서는 청우의 몸 위로 덥석 엎드려 그를 안았다. 둘은 침대 위에 누운 채로 서로를 끌어안았다. 밑에 깔린 청우는 꽤 무거울 텐데도 전혀 내색하지 않고 이서의 허리를 팔로 둘렀다.
“청우야.”
“응.”
그냥. 가끔은 네 이름을 아무 이유 없이 부르고 싶어. 마음껏. 네 이름으로 내 빈 곳을 가득 채울 때까지.
이서는 청우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켰다. 그에게서 자신과 같은 향이 났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향이었다.
*
아침부터 꽤 요란하게 차림에 신경 쓴 이서는 거울을 보았다. 평소와 크게 다를 건 없었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청우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치장했다.
손질해서 올린 머리와 적당히 달라붙는 셔츠, 발목이 보이는 바지와 단정한 로퍼까지. 회사 분위기가 자유분방한 편이라 출근할 때도 이렇게 입지 않지만, 애인의 취향에 맞추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향수를 뿌린 뒤에 집 안을 돌아보았다. 이사 날이 얼마 남지 않아 어수선했다. 업체에 맡길 예정이지만 그 전에 미리 버리고 갈 것을 가리는 중이었다. 요즘은 시간이 빨리 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무언가를 기다리면 시간이 더욱 늦게 간다는 사실은 불변의 법칙인 듯했지만.
밖으로 나와 곧장 청우의 집으로 향했다. 아침저녁으로는 서늘했지만 한낮의 공기는 따뜻했다. 차창 밖으로 맑은 하늘이 보였다. 이제 그를 데리러 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함께 나가고 함께 돌아올 테니까.
청우의 집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전화를 걸기도 전에 그가 밖으로 나왔다. 약속 시각에 절대 늦지 않는 성실함에 웃음이 나왔다.
청우가 차에 올라타며 이서의 차림을 훑었다. 이서는 목과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그의 시선을 즐기며 출발했다.
“오늘 왜 이렇게…….”
“잘생겼냐고?”
청우가 다소 떨떠름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 자화자찬에 대해서는 절대 부정하지 않는 것에 웃음이 나왔다. 그는 곧 그 자신이 입은 차림을 훑어보았다. 데이트가 아니다 보니 다소 편하게 입은 것 같은데 오히려 그게 마음에 들었다. 오늘 같은 날 멋들어지게 입었다면 심사가 꼬일 수도 있었을 테니까.
“학교 오랜만에 가네.”
“그러게. 졸업한 지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주변에 뭐가 많이 생겼다더라.”
“응. 우리 같이 갔던 샌드위치집도 사라졌대.”
“뭐? 거기 문 닫았어?”
청우가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거기가 꽤 마음에 들었나 보다. 하긴 자주 찾았으니 아쉬울 만도 했다. 이서는 손을 뻗어 청우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새로운 데 더 많이 찾으면 되지.”
“……응.”
요즘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몹시도 빠르게 바뀌었다. 바뀌기 전에 많이 보고 듣고 느끼며 새로 찾아오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일도 중요한 듯했다. 감정이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청우와 만나면서 수없는 것들이 흔들리고 변해 갔다.
약속 장소는 학교 근처 음식점이었고, 안에 상대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은 변한 게 없었다. 산영은 나이를 얼마나 먹든 늘 저런 모습일 듯싶었다.
“얘들아!”
안으로 들어서자 산영이 반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몇 개월 만의 만남이었으나 일부러 공백을 가지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산영은 대학원에 입학해 한창 공부 중이다 보니 바빴고, 청우 또한 시간이 나면 이서를 만나는 데 썼기에 두 사람이 약속을 잡을 일은 거의 없었다.
그날, 청우가 산영과의 관계를 정리한 이후 두 사람은 일 년이 되지 않아 다시 만났다.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한 건 이서였다. 그때 청우에게 말했던 생각이 완전히 변하지는 않았으나 그와 지내면서 두려움에 맞서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아도 괜찮다는 확신을 얻고 싶기도 했고.
그리고 한편으로는……. 아주 나쁜 생각이기는 하지만 청우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날이 오더라도 저를 버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을 사랑하는 척만 해도 상관없었다. 물론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지만.
“잘 지냈어? 청우야, 너 살 빠진 것 같아.”
“요즘 좀 바빠서. 별일 없지?”
“응, 없어.”
“차건은. 걔도 잘 지내?”
“응. 회사 다니느라 건이도 바빠.”
그 이후 처음 산영을 만났을 때 청우는 만반의 준비를 한 채로 이서와의 사이를 밝혔고, 산영은 내내 어딘지 어색한 태도로 두 사람을 대하다가 어설프게 놀란 척을 하며 크게 축하해 주었다. 상황을 금세 알아챈 이서와 달리, 긴장했는지 산영이 알고 있었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던 청우는 그의 축하에 몹시 기뻐하며 이서를 돌아보았다. 단순히 산영의 축하를 받았다는 이유가 아니라, 이서를 제 애인이라 소개하고 밝힐 수 있다는 일에 감격을 한 것 같았다.
이 두 바보 같은 친구들의 상봉을 직접 눈앞에서 본 이서는 저도 모르게 날이 서 있던 끈을 조금씩 풀 수 있었다. 때로는 멀리서 보아야 더 와닿는 것들이 있다.
세 사람은 음식을 주문하고 그간 나누지 못했던 근황을 이야기했다. 산영은 청우의 기자 생활에 관해 듣고서는 멋있다며 연신 눈을 빛냈다. 이서는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다가 끼어들었다.
“산영이 넌 어때? 대학원은 교수 입김이 세다던데.”
“좀 그렇긴 한데 그래도 잘 봐 주셔서 괜찮아.”
“다행이네. 차건은. 업보 청산 좀 잘하고 있나?”
이서의 물음에 산영의 낯이 다소 시무룩해졌다. 건과의 사이를 누나들에게 결국 들키고 만 산영은 건을 최대한 예쁘게 포장해 보이려고 했으나 반쯤은 실패했다. 건이 아무리 내숭을 떨어도 남들 앞에 엎드릴 줄 모르는 놈이 본성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남들에게는 플러스 점수가 되는 그의 집안과 재력도 산영의 누나들에게는 마이너스 요소였으니, 아주 고소한 일이었다.
“네가 중간에서 힘들겠다.”
“아니야. 마냥 쉬울 거라고는 생각 안 했으니까.”
곧 음식이 나오고 세 사람은 배를 채웠다. 청우와 산영의 사이에는 대화가 끊이지 않았으나 예전과 같은 불필요한 끈끈함은 옅어진 채였다.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 서로 모르는 추억을 만들고 경험을 쌓으며 다른 길을 걸었으니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잠깐만.”
테이블 위에 둔 핸드폰이 울어 이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라스로 나가 전화를 받는데 청우의 시선이 따라왔다. 가벼운 윙크를 보내고는 돌아섰다.
“네.”
[응, 이서야. 쉬고 있었어?]
“잠깐 나와서 밥 먹고 있었어요.”
[그래? 아니, 이사 준비 잘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요즘 조연의 연락 빈도가 잦아졌다. 이사 관련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통화가 길어지기 일쑤였다.
“이사야 뭐, 업체가 다 해 주는데요.”
[그래. 청우도 잘하고 있대?]
“네. 청우도 짐이 많지는 않아서요.”
[응, 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시간 되면 방송국 놀러 와. 청우랑 밥 한 끼 먹자.]
청우와의 식사 자리를 가지고 나서 조연은 매우 흡족해했다. 아무래도 호감이 가는 인상에다 예의가 바르니 후배 기자로서도 마음에 들었겠지만, 청우가 저와 있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기에 더 좋아하는 듯싶었다. 그 후로 이렇게 종종 청우를 앞으로 내세워 저와 약속을 잡으려고 했다. 의도가 다 보였지만 불쾌하거나 불편하지는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청우에게는 존경하는 상사였다. 그의 순수한 동경을 빼앗고 싶지 않았다. 때로는 청우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지고 싶다가도 그 어떤 것도 털 한 가닥 건드리지 않고 지켜 주고 싶었다.
무엇보다 청우에게로 향하는 관심과 호의가 그를 거쳐 제게로 와닿는 듯했다. 이상하게도 그것은 의심하지 않을 수 있었다.
“네, 청우랑 얘기해 보고 시간 잡을게요.”
[그래. 밥 먹고 있었다며. 어서 먹어.]
“네, 들어가세요.”
전화를 끊자마자 콧등 위로 떨어진 물방울에 고개를 들었다. 날이 맑은데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여우비인 모양이다.
오랜만이네, 이런 비는.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문득 청우와 함께 맞았던 여우비가 떠올랐다.
연우의 기일을 며칠 앞둔 날이었다. 기일이면 부모와 함께 아이의 무덤을 찾지만, 그 순간은 늘 답답하게 느껴졌기에 항상 그 이전에 홀로 가 보곤 했다. 그날은 무슨 충동에서인지 청우를 데리고 갔다.
연우에 대한 이야기는 집에서 거의 금기시되어 있었다. 기일이 아니면 굳이 아이에 관해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청우는 나무 앞에서 연우의 이름과 나이, 생김새와 좋아하는 것 등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거기에 답하다 보니 이서는 새삼 자신이 제 동생에 관해 꽤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문득, 어떤 순간에는 좋기도 하지 않았나 싶었다. 보드라운 감촉이 아주 오랜만에 손을 간질였다. 그저 미화일 수도 있지만 청우에게 이야기하며 잊고 있던 기억이 조금씩 떠올랐다. 그 순간 빗줄기가 내렸다. 맑은 하늘에 찾아온 여우비였다.
‘너 반가워서 비 내려 주나 보다.’
‘응?’
다소 터무니없는 말에 웃으면서 청우를 돌아보았으나 그는 퍽 진지한 얼굴로 하늘을 응시했다.
‘네가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고 하니까 매년 비를 내려 주는 거 아니야? 어린애는 말하는 대로 믿잖아.’
청우는 미신적인 이야기를 평소에 믿거나 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 말은 자신을 위로해 주기 위해 꺼낸 것일 테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나. 이서는 그저 흘려들으며 웃을 뿐이었지만, 어쩐지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짐을 느꼈다.
기억 속에서 빠져나온 이서는 지붕 너머로 손을 내밀었다. 빗방울이 손바닥에 닿아 톡 터지며 흘러내렸다.
나 비 오는 거 안 좋아하는 것 같아. 그래도 이게 네 마음이라면, 그게 무슨 마음이든지 매년 내려도 괜찮겠네.
이서는 한참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뒤를 돌았다. 청우와 산영이 웃는 낯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뭐가 저렇게 즐거울까. 궁금하기는 했으나 고깝지는 않았다.
음, 그래도 너무 오래 웃는데? 이서는 입꼬리를 당기면서 문을 열고 자리로 돌아갔다.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
“우리 이사 얘기.”
“축하해, 이서야.”
요즘 같은 때 집을 잘 구한 것도, 청우와 함께 사는 것도 축하한다며 산영이 해맑게 웃었다. 축하해 줘서 고맙다고 말하는데, 청우가 뒤를 흘긋 돌아보더니 물었다.
“비 와?”
“조금. 여우비인가 봐.”
창밖으로 다시 시선을 준 청우가 이서의 낯을 살폈다. 그가 곧 입술을 벙긋댔다.
갈래?
제 컨디션을 염려하여 묻는 모양에 웃음부터 새어 나왔다. 산영이 궁금해하는 낯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으나 청우는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언젠가 산영에게로 향해 있던 단단하게 여문 눈이 이제는 제게 닿았다.
청우는 더 이상 산영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마음의 끝이 추하지 않을 수 있음을, 사랑이 변해도 사람은 변하지 않고 여전히 단단하고 맑을 수 있음을 청우를 통해 깨달았다. 청우가 다른 사람을 사랑했다는 사실이 제게 상처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에 위안을 받았다. 우리의 사랑이 서로에게 해방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물론 저는 완전히 해방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이전과는 달라지리라는…… 어떤 희망이 도사렸다.
이서는 고개를 저었다. 비는 이제 무겁게 떨어지지 않았다.
*
주말 오후 대형 마트에는 사람이 많았다. 이서는 청우와 함께 카트를 끌며 매대 이곳저곳을 다녔다.
“아침에 먹을 시리얼이랑……. 달걀, 우유. 오늘 저녁은 뭐 먹을까?”
“시켜 먹자. 막상 가면 해 먹기 귀찮을 것 같은데.”
“그럴까?”
오늘은 대망의 이사 날이었다. 짐은 이미 다 옮겨 놓았고 청소도 마친 상태에서 청우만 데리고 왔다. 이서는 리모델링 문제로 중간중간 진행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새 보금자리에 몇 번 들렀으나 청우는 처음 가는 것이었다. 함께 살 집이었기에 제 손으로 꾸미고 싶은 마음에 주도적으로 리모델링에 관여했고, 청우는 이서에게 모든 일을 일임했다. 가끔 이서가 두 가지 중에 하나를 고르지 못하면 선택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당장 다음 주부터 먹을 식재료와 필요한 것들을 카트에 담았다. 이렇게 함께 장을 보니 같이 산다는 것이 조금 실감되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같이 카트를 끄는 사람들은 모두 가족처럼 보였다. 이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이자 만족스러웠다.
“맥주는 필수지.”
“잔도 사자. 네 거 깨졌잖아.”
“응, 맞아. 청우가 깨뜨렸지.”
“그건 내가 깨뜨린 게 아니라…….”
청우가 목소리를 높였다가 주변을 돌아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소리를 죽여 웃자 그가 미간을 찡그린 채로 이서를 흘겼다.
제 집에서 맥주를 함께 마시던 중 식탁에서 눈이 맞아 일을 벌이다가 그만 잔을 깨뜨리고 말았다. 혹시 유리 조각이 청우의 발 근처로 떨어졌나 싶어 행위를 그만두려는 찰나 청우가 흐느끼며 이서의 몸을 잡아당겨 어쩔 수 없이 거기서 끝을 보았다.
아, 그때 좋았는데. 입맛을 다시자 청우가 카트를 끌고 걸음을 성큼 옮겼다.
“같이 가.”
제법 얄미운 목소리로 말하는데도 청우는 이서를 기다려 주었다. 이서는 청우에게 퍽 귀여워 보일 만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댔다가 뗐다.
상자 하나를 가득 채운 뒤 차에 올라탔다. 어느덧 하늘이 노랗게 물들고 있었다. 완연하게 찾아온 봄은 풍경을 온화하게 물들였다.
청우가 주먹으로 허벅지를 통통 두드리는 게 곁눈으로 보였다. 이서는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
“기대돼?”
“어.”
“그러다 실망하면 어떡하지.”
“네가 꾸민 건데 실망하겠냐.”
자신은 미적 센스가 없기도 하고 네가 하는 건 뭐든 좋으니 실망할 리 없다면서 청우는 이서를 치켜세웠다. 하여튼 조금이나마 자신 없어 하는 모습은 못 본다. 이서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주차장에 도착해 상자를 들고 내렸다. 둘의 집은 딱 중간에 자리하고 있었다. 낮은 곳도 높은 곳도 그리 선호하지 않는지라 딱 마음에 드는 층이었다.
“자, 눈 감으세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문을 열기 전에 한마디 하자 청우가 픽 웃으면서도 순순히 눈을 감았다. 이서는 문을 열고 청우의 등을 밀어 안으로 데려갔다.
“짠.”
현관에서 눈을 뜬 청우가 놀란 낯을 하고 안을 둘러보았다. 고작 중문과 신발장이 있을 뿐인데도 그는 신기한 듯 이곳저곳을 쳐다보았다.
“무슨 사진 속에서나 보던 집 같아.”
이서를 도울 수 없는 대신 인테리어를 보는 눈이라도 기르겠다며 잡지를 구독하던 청우는 그 속에 있던 집보다 훨씬 예쁘다며 감탄했다.
“에이, 여기서 벌써 놀라면 안 되지.”
이서는 청우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를 지나자 해가 지는 하늘이 넓게 보이는 창 앞으로 거실이 펼쳐졌다. 벽지나 소파, 러그, 수납장 모두 따뜻한 색감으로 안정감을 주었다. 디자인은 제 취향으로 고르되 색은 청우의 취향으로 선택했다. 늘 함께, 오래 있고 싶은 집을 만들기 위해 이것저것 고민한 결과였다.
용도를 정하지 않은 알파 룸을 제외하면 방은 세 개였다. 하나는 침실, 하나는 청우의 작업실이고 나머지 한 곳에는 홈 시어터와 함께 첼로, 피아노를 두었다. 청우는 마지막 방에 놓인 첼로와 피아노를 보고 가장 좋아했다.
“이제 집에서 하게?”
“응. 방음 장치 설치해서 낮에는 괜찮을 거야.”
청우가 밝은 낯으로 이서를 돌아보았다. 어째 새집에 이사 온 것보다 이 사실에 더 기뻐하는 듯했다. 이서는 웃으면서 청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맘에 들어?”
“응, 마음에 든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고생했고 미안하다. 내가 못 도와줘서.”
“아니야. 다 내 손으로 할 수 있어서 좋았어.”
청우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숨을 들이켰다. 새 보금자리에 그와 함께 있으니 마음이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해졌다. 청우가 이서의 손을 어루만졌다.
“고맙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꼭 보탤게.”
집이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히자 청우는 마냥 기뻐하지만은 않았다. 아무래도 아직은 경제적으로 넉넉히 보탤 수 없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짐으로 남은 듯싶었다. 이서는 그의 살결에 뺨을 비비며 입을 열었다.
“몸으로 갚아.”
“뭐?”
“이 집이 칠십육억 정도 되니까……. 일 년에 일억씩 보탠 걸로 하자.”
“무슨……. 칠십육억? 진짜야? 그 정도 아니잖아.”
“난 미래 가치까지 생각해서 말한 거야. 오히려 싸게 친 건데? 왜? 나랑 그렇게 오래 있기는 싫어?”
서운한 척 한숨을 폭 내쉬자 청우가 헛웃음을 흘렸다. 웃음기가 어린 눈이 제 얼굴 곳곳을 훑었다. 조금의 불순물도 없이, 무엇도 저어하지 않고 내리꽂히는 애정에 등허리가 짜릿할 정도였다.
“그래. 저당 잡아라.”
흔쾌하게 던진 말에 이서는 웃으면서 다시 청우의 품에 안겼다. 둘은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제자리걸음을 하다가 몸을 떼어 냈다.
장을 봐 온 것을 정리하기 위해 현관에 두었던 상자를 식탁 위로 옮겼다. 청우가 입고 있던 얇은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쳐 두고선 상자 안에 있는 것들을 꺼냈다. 그가 꺼낸 것을 정리해 옮기던 이서의 눈에 문득 청우의 팔뚝이 들어왔다.
그의 왼팔에 무언가가 그려져 있었다. 이서는 청우의 손목을 잡아챘다.
태양이었다. 청우의 왼팔, 자신이 타투를 한 곳과 똑같은 부위에 태양이 새겨져 있었다. 동그란 원 주변으로 길이가 다른 선이 빛을 내뿜었다.
“이게 뭐야?”
고개를 들자 청우가 다소 멋쩍은 낯으로 제 팔을 내려다보았다.
“너야. 뭐 할까 고민하다가 네 이름이 여름이니까……. 태양이면 좋을 것 같아서. 색깔은 갈색 하고 싶었는데 그건 별로길래 그냥 검은색으로 했어. 할 때는 큰 것 같았는데 네 것보다는 작네.”
이서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설마 타투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헤나나 스티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제 보니 팔에 타투 필름이 붙어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끝나더라. 별로 아프지도 않고. 근데 좀 간지러워. 너도 그랬어?”
대답하지 않고 빤히 쳐다보자 청우의 귀가 다소 붉어졌다. 하지만 그는 이서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왜…… 했어?”
“그냥. 나도 해 보고 싶어서.”
그냥, 해 보고 싶었다는 이유만으로 타투를 하기엔 청우에게는 나름의 큰 도전이었을 것이다. 이서는 다시 청우의 팔에 새겨진 자신을 보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속이 울렁거리고, 발밑이 빙빙 도는 것만 같았다.
늘 그랬다. 제 마음이, 제 사랑이 더 크다는 생각이나 투정 따위는 감히 할 수도 없게 만든다. 그에게 무언가를 더 바라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는데, 그는 자신이 외면했던 바람까지 전부 가져와 그 위로 물을 준다.
이서는 청우의 팔을 덥석 잡아당겨 입을 맞췄다. 입술이 얼얼할 정도로 거세게 부딪쳤다. 달래듯 머금고 빨다가 혀를 깊숙이 집어넣어 그의 안을 헤쳤다. 그에게 조금 더 깊이 닿고 싶어 안달이 났다. 타투 근처를 손끝으로 문지르며 고개를 꺾었다.
쉴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이는 키스에 청우가 헐떡이며 이서의 어깨를 밀어 냈다. 이서는 끝까지 입술을 붙이고 있다가 겨우 떨어졌다.
“좀 천천히.”
청우가 낮아진 목소리로 이서를 진정시켰다. 이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다시 입술을 부딪쳤다.
“아……!”
활짝 벌어진 다리 사이로 성기를 밀어 넣었다. 좆을 쑤셔 올릴 때마다 탄탄한 허벅지가 꿈틀거리는 게 구미를 당겼다. 이서는 고개를 숙여 그의 가슴에 이를 박았다. 새로운 자극에 청우가 잘게 떨었다.
“하, 으, 청우야.”
그의 목덜미에 코를 비비며 허리를 연신 거세게 쳐올렸다. 청우가 이서의 몸을 잡아당기며 매달렸다. 손끝이 어깨뼈를 긁는 순간 화한 쾌감이 등허리를 가로질렀다. 이서는 낮은 신음을 흘리며 손을 아래로 내려 청우의 엉덩이를 주물렀다.
차지게 손에 잡히는 살을 쥐어짜듯이 만지다가 손바닥으로 가볍게 내리치자 청우가 움찔하며 구멍을 바짝 조였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말리지 않고 오히려 허리를 더 흔들었다. 이서는 씩 웃으며 그의 움직임에 맞추어 좆을 처넣었다.
“흐윽, 으, 아!”
“자기야, 좋아? 응?”
“어, 아읏, 흑.”
“나도. 씨발, 아……!”
귀가 붉어진 채로 쾌감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낯이 사랑스러웠다. 청우의 얼굴을 마주하면 성감이 더 날카로워졌다. 단지 시선이, 몸이 맞닿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절정에 달할 수 있을 정도로 쾌감이 극대화되었다.
청우의 허벅지를 내리눌러 한껏 벌리게 한 채로 성기를 느리게 밀어 넣었다가 뺐다. 갑자기 달라진 속도에 청우가 허리를 비틀며 헐떡였다. 끈덕지게 달라붙는 축축한 속살이 감질났다. 그건 청우도 마찬가지였는지, 그가 허벅지를 짚고 있는 손을 쳐 내더니 다리를 이서의 허리에 감았다.
그리고 발과 다리에 힘을 주어 이서의 허리를 당겼다. 성기가 안으로 퍽 치고 들어가자 청우의 허벅지 안쪽이 떨리며 입구가 오므라들었다. 살 기둥을 주무르는 움직임이 황홀했다. 이서는 이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허리를 퍽퍽 쳐올렸다.
“아! 흑, 읏!”
좋아서 죽을 것 같았다. 섹스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다니, 어처구니없지만 진심이었다. 이서는 올라오는 욕설과 함께 청우의 입술을 삼켰다.
엇갈리던 혀끝이 맞닿았다. 혓바닥을 진득하게 문지르며 허리의 각도를 비틀어 청우가 좋아하는 곳을 성기로 거세게 짓누르자 내벽이 경련하듯 조이며 아득한 자극을 주었다. 입술 새로 끓는 신음이 흘렀다. 이서는 그의 소리까지 집어삼키며 사납게 허리를 움직였다.
이서의 몸에 걸쳐져 있던 청우의 손이 아래로 뚝 떨어져 팔을 스쳤다. 타투가 새겨진 부위에 그의 손이 닿자마자 팔뚝에 아릿한 쾌감이 스쳤다. 이서는 느리게 움직여 선단으로 내벽을 짓누르며 청우의 왼팔을 쥐어 들었다. 그의 그림과 제 그림이 맞닿게 팔을 교차해 붙였다. 살이 맞닿아 꾹 눌러지자 청우가 숨을 헉 들이켜며 눈꺼풀을 떨었다.
“우리 여기도 닿는 거야.”
필름 때문에 맨살이 닿은 것은 아니었으나 아주 얇아 신경 쓰이지 않았다. 팔을 위아래로 움직여 비비자 몸이 아래로 쑥 빠지는 듯 아득해졌다.
“정이서…….”
청우가 흐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이서는 고개를 숙여 그가 제게 입 맞출 수 있도록 도왔다.
절정이 더 빠르게 다가왔다. 둘은 서로를 안은 채로 온몸을 어루만지며 아래를 맞물렸다. 청우의 안을 제 흔적으로 가득 채우고 싶다는 욕망이 휘몰아쳤다. 성기를 뿌리만 겨우 보이게 깊숙이 집어넣고는 꾹꾹 누르며 허리를 둥글게 돌렸다.
“아……!”
“후우, 윽.”
순간 크게 부푼 쾌락이 참을 새도 없이 터졌다. 이서는 청우의 몸 위로 엎어져 그를 꼭 끌어안은 채로 몸 전체를 휩싸는 절정을 음미했다. 청우도 이서에게 매달려 흐릿한 숨을 흘리며 몸을 떨었다.
떨림이 점차 가라앉았을 때 고개를 들고 청우를 내려다보았다. 풀린 눈을 보자 문득 벅차올라 그의 눈가에 키스했다.
“사랑해.”
가득 차오르다 못해 말로서 흘러넘친 마음은 보잘것없이 평범하고 진부한 문장이 되었다. 하지만 마음의 조각이 청우에게는 온전히 닿은 듯, 그의 낯이 아름답게 허물어졌다.
“응, 사랑해.”
보잘것없이 평범하고 진부한 문장이 그의 입에서 새롭게 탄생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사랑이라는 단어가 온전히 담을 수 있구나. 이서는 감탄하며 웃었다.
“잠 안 와?”
청우가 졸음에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환경이 바뀐 탓인지, 기분이 들뜬 탓인지 잠이 쉽사리 올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저를 염려하느라 그가 편히 못 자는 일은 없기를 바라 고개를 저었다.
“그냥 좋아서. 우리 첫날밤이잖아.”
“……어릴 때, 첫날밤에는 딱 한 번 자는 건 줄 알았는데.”
“순진했네?”
귀여운 소리에 웃으면서 청우의 어깨를 깨물었다. 오늘 혹사를 당한 허리를 살살 문질러 주자 청우가 낮은 신음과 함께 숨을 흘렸다.
“첫날밤을 이렇게 앙큼한 남자랑 보낼 줄 알았어?”
“몰랐지. 옛날에는 그런…… 생각 같은 건 거의 안 했으니까.”
청우가 중얼거리듯 말하며 이서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졸리는지 하품을 내뱉는 소리에 그의 등을 토닥였다.
“그래서, 생각보다 더 좋았어?”
“좋지. 훨씬. 너랑 하는 건 다 그래.”
그가 머리를 이서의 가슴에 기댔다. 곧 일정하게 와닿는 숨소리에 이서는 고개를 숙였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잠에 빠진 청우의 얼굴을 훑었다.
새 보금자리. 제 취향으로 채운 방 안, 그 안에 담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
닿는 것도 아까워 청우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문득 위를 올려다보았을 때 천장은 텅 비어 있었다. 어둠에 잠긴 곳에는 어떤 별도, 빛도 없었다. 그런데도 어둠이 이제는 다른 감정으로 둔갑해 달려들지 않았다.
이서는 청우의 팔을 조심스레 들었다. 제 이름이 그려진 부위를 조심스레 만지고는 내려다보았다. 검은색의 선이 그 어떤 별보다, 빛보다 밝은 듯했다. 앞으로는 이 그림이 제 빛이자 밤을 함께 보낼 친구가 될 테다.
긴 밤이 두렵지 않았다. 빗속의 여름이 따뜻한 볕을 흩뿌리는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