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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2. 파리, 파리 (14/16)
  • 외전 2. 파리, 파리

    택시에서 짐을 내리고 난 뒤 어둠에 잠긴 거리를 둘러보았다. 유럽의 밤거리는 밝든 어둡든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특히 이렇듯 조금이라도 외진 곳의 어둠은 더 낯설었다.

    “여긴가 본데?”

    이서가 눈앞에 있는 주택을 가리켰다. 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해 오가는 데 불편하지는 않을 듯싶었다.

    맨 처음 들렀던 영국에서는 호텔에서 지냈으나 파리에 와서 한인 민박을 숙소로 잡았다. 이왕 온 것 다양한 숙소에서 지내보자고 서로 이야기한 끝에 결정한 곳이었는데, 슬슬 한식이 먹고 싶던 참이라 다행이었다.

    캐리어를 끌고 대문 옆에 자리한 벨을 누르자 얼마 안 되어 안에서 사람이 나왔다. 문을 열어 준 사람은 안경을 쓴 남자였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짐 주세요.”

    “괜찮아요. 가볍거든요.”

    이서가 코끝을 장난스레 찡긋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체구가 작고 어려 보여 짐은 이쪽이 드는 게 더 나을 듯했다. 청우는 캐리어를 한 손에 들고 남자와 이서의 뒤를 따라 현관 앞까지 갔다.

    “짐 여기에 내려놓고 들어가시죠. 안내 먼저 해 드릴게요.”

    “네.”

    한 채처럼 보였던 주택은 두 채였다. 건물 하나는 오로지 숙소로만 쓰이는 곳이고, 다른 한 곳은 식사를 할 수 있는 공용 공간이었다. 이런저런 규칙과 주의 사항을 읊은 남자가 곧 안경을 추어올리며 말했다.

    “스태프 유지훈이에요. 사장님은 잠깐 나가 계셔서 내일 아침에 볼 수 있을 거고요.”

    “네,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정이서고, 이 친구가 청우예요.”

    “네. 아, 내일모레 몽마르트르 투어를 하는데 참여하실래요?”

    민박에서 매주 한 번 진행하는 행사로, 참여가 가능하면 해 보자고 미리 이야기를 하고 왔다. 청우와 이서는 눈을 마주친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모레 여섯 시까지는 숙소로 와 주세요.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숙소 안내해 드릴게요.”

    “네.”

    두 사람이 묵을 숙소는 2인실로, 2층에 딱 하나만 존재하는 방이었다. 가격대가 있지만 욕실이 딸리고 다른 방과 독립되어 있으며 둘만 묵을 수 있어 이곳으로 예약했다.

    지훈을 따라 들어간 방은 꽤 넓고 아늑했다. 침대는 기역 자 모양으로 떨어진 채 놓여 있었고, 작지 않은 창으로 어둑한 야경이 보였다. 사진과 거의 비슷하고 컨디션도 나쁘지 않아 이만하면 괜찮은 편이었다.

    “방이 좋은데요?”

    “저희 민박이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그럼요. 이렇게 친절한 스태프분도 계신데.”

    이서의 너스레에 지훈의 무표정하던 낯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그는 이서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곧 고개를 숙였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지훈이 떠나고 나자 둘은 캐리어를 들고 가 침대 밑에 앉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한숨과 함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마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테다. 언제 짐을 풀고 언제 정리하고 언제 씻지.

    그래도 한국인 사장, 한국인 스태프가 있는 곳에 오자 마음이 편해졌다. 영어를 못하는 편은 아니지만 회화를 실전에서 해 본 경험은 많지 않은지라 아무래도 처음에는 조금 버벅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영어로 하는 의사소통에 능숙하고, 불어도 기본적인 회화 정도는 가능한 이서가 있어 지금까지는 모든 일정이 원활했다.

    “내일은 우리 좀 느긋하게 돌아다닐까?”

    “그래.”

    일정을 세세하게 짜 두지 않았기에 이동하고 난 다음 첫날은 편하게 쉬기로 했다. 몸은 조금 고단해도 기분은 좋았다. 이서와 새로운 곳에 발을 디디고, 새로운 일을 경험하고, 새로운 음식을 먹어 보는 시간은 정말이지 잊을 수 없을 듯했다.

    “씻을까요?”

    “응.”

    청우는 이서가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났다. 다가올 내일에 대한 기대가 무럭무럭 자랐다.

    방을 나와 식당으로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한식 뷔페에 군침이 돌았다. 한국 사람은 역시 한식을 먹고 살아야 하나 보다. 영국에서도 컵라면을 먹고, 한식당을 찾아 한 끼를 해결하기도 했으나 그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릇을 채워 자리에 앉자 이서가 휘파람을 불었다.

    “우리 청우 물 만났는데?”

    “넌 왜 그것만 먹어.”

    “잠이 안 깼어.”

    다행히 시차 적응으로 인해 고생하지는 않았지만, 이서는 여전히 간혹 잠을 설치는 편이었다. 쌓였을 피로를 풀어 주기 위해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주자 이서가 신음을 흘렸다.

    “으윽, 살살……. 아파요, 형.”

    이상하게 남우세스럽게 들리는 말에 손가락을 떼어 내자 이서가 슬쩍 웃으면서 눈을 찡긋했다.

    “잠자리는 안 불편하셨어요?”

    갑작스레 들린 말과 인기척에 청우는 놀라서 옆을 돌아보았다. 구석에 자리한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지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있는 줄도 몰랐던지라 청우는 고개를 뒤늦게 꾸벅였다.

    “다른 분들은 다 드시고 들어가셨어요.”

    “우리가 늦게 나왔나 보네요.”

    “피곤하셨나 봐요.”

    “네, 그래도 침대가 좋아서 괜찮아졌어요.”

    이서의 말에 지훈이 옅게 웃었다. 어제도 느낀 거지만, 무표정할 때는 다소 딱딱해 보였는데 웃으니까 어린 티가 확 났다.

    제육볶음으로 배를 열심히 채우고 있을 때, 식당으로 한 명이 더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청우는 고개를 꾸벅였고, 여자도 마찬가지로 인사했다. 여자는 머신에서 커피를 내린 뒤에 맞은편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두 분 같이 오셨어요?”

    “네.”

    “으흠, 여기가 처음이에요? 아님 어디 갔다 오신 건가?”

    “영국에서 왔어요.”

    여행을 다니면서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가 좋은 점은, 신상이나 개인사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야깃거리가 많다는 점이었다. 낯을 다소 가리는 청우도 이곳에 와서는 처음 보는 사람과 이야기를 잘했다.

    자신을 박서나라고 소개한 여자는 퇴사를 한 뒤 혼자 여행을 왔다고 했다. 직장에 찌들어 있다가 유럽을 돌아다니니 너무 행복하다며 눈을 반짝였다.

    “둘은 오늘 일정 있어요?”

    “아뇨. 그냥 천천히 돌아보려고요.”

    “어, 그럼 혹시 나랑 점심 같이 안 먹을래요? 가고 싶은 데가 있는데 혼자 가긴 좀 그래서 동행 구할까 하고 있었거든요.”

    이런 일은 꽤 흔한 편이었다. 런던에 있을 때도 식당에 들어가려는데, 어떤 한국인이 합석하자고 해서 함께 즐겁게 식사를 한 뒤 헤어진 적도 있었다. 청우와 이서는 서로를 돌아보았다. 이서는 어떻게 하든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고, 청우도 하루쯤은 나쁘지 않을 듯해 서나의 제안을 수락했다.

    “와, 고마워요. 거기 진짜 맛있대요.”

    “저기……. 저도 같이 가도 되나요?”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세 사람의 시선이 돌아갔다. 구석에서 가만히 대화를 듣던 지훈의 물음이었다.

    “좋죠, 사람 많으면.”

    “감사합니다.”

    “그럼 우리 열두 시에 모여요.”

    서나의 말에 식사를 마치고 나서 방으로 올라간 둘은 잠시 쉬다가 내려왔다. 밖으로 나오니 맑은 하늘이 잘 보였다. 나다니기 좋은 날씨라고 생각할 때 공용 공간에서 한 남자가 나왔다.

    다른 손님인 줄 알았으나 자세히 보니 지훈이었다. 렌즈를 꼈는지 쓰고 있던 안경이 없었다. 곧이어 숙소에서 나온 서나가 지훈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렌즈 꼈어요?”

    “네.”

    “와, 이미지가 확 다르다.”

    안경을 썼을 때는 평범한 인상이었는데, 안경을 벗고 나니 예쁘장한 낯이 도드라졌다. 지훈은 쑥스러운 건지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3구였다. 활기 넘치는 거리에서 넷은 나란히 걸었다. 지훈, 이서, 청우, 서나 순으로 걸었기에 두 사람을 소외시키지 않기 위해 청우는 자연스레 서나와 대화하게 되었다.

    “그럼 유럽은 처음인 거예요?”

    “네, 그동안은 시간이 없어서요. 엄두도 안 났고.”

    “오오, 그럼 어때요? 기대 이상? 기대 이하?”

    “기대 이상이에요.”

    새로운 경험을 하는 일도 좋았지만 이서와 함께 와서 더 즐거운 듯했다. 같은 걸 겪고 경험을 나누며 그것에 관해 이야기하다 보니 서로의 식견과 취향, 생각을 더 깊게 교환할 수 있었다.

    “다음에 또 와요. 이번밖에 기회가 없다고 여기저기 급하게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다음에 또 오겠다는 마음으로 여유롭게 즐기는 게 좋은 것 같아.”

    “파리만 세 번째라고 하셨죠?”

    “네. 그래서 일정 넉넉하게 짰어요.”

    저도 취직을 하고 나서 일을 몇 년 한 뒤에 시간을 낼 수만 있다면 이서와 또 함께 오고 싶었다. 아직 여행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조금 우습기는 했지만.

    길이 좁아지면서 두 명씩 나뉘어 앞뒤로 걷게 되었다. 청우는 이서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기 위해 뒤를 흘긋 돌아보았다. 그는 지훈과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는데, 지훈이 이서의 팔꿈치 쪽을 살짝 잡은 채로 걷고 있었다.

    이서의 몸을 잡은 손이 눈에 들어왔다. 청우는 그쪽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곧 서나가 눈앞의 가게를 가리켰다.

    네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메뉴를 골라 주문했다. 물을 마시는 사이 테이블 밑으로 이서가 제 발을 건드렸다. 맞은편에 앉은 그를 보고 슬쩍 웃는데, 지훈이 이서를 향해 물었다.

    “형은 에스카르고 잘 먹어요?”

    “응, 난 가리는 거 별로 없어.”

    언제 또 말을 놓았나 싶었다. 친화력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좋아하면 잘하는 곳 소개해 줄게요. 저 아는 데 많아요.”

    “그래? 나도 만만치 않은데.”

    이서가 씩 웃고선 청우의 잔에 물을 채워 주었다. 지훈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지훈의 눈길이 바로 돌아갔다. 곧 서나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둘은 뭐, 어릴 때부터 친구였어요?”

    “아뇨. 대학에서 만났어요.”

    “오, 이렇게 같이 온 거 보면 진짜 친한가 보다. 오면서 안 싸웠어요? 난 친구랑 여행 갔다가 진탕 싸운 뒤로는 누구랑 같이 해외 안 나오는데.”

    “네, 싸울 일이 딱히 없어서요.”

    애초에 일정을 듬성듬성 짜기도 했고 의견이 부딪칠 일도 없었다. 이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종일 붙어 있는 게 힘들지도 않았다. 어쩌면 연애 초반이라 뭐든 좋아 보여서 그럴 수도 있겠으나 여태까지는 매우 만족스러운 여행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음식이 나왔다. 차례차례 테이블을 채우는 접시 속 음식이 다채로웠다. 양식보다는 한식을 더 좋아하는 편이었으나 아침으로 한식을 먹어서 그런지 부담스럽지 않았다.

    먹던 도중 이서와 눈빛을 교환했다. 그의 입에도 잘 맞는 눈치였다. 이상하게 이서가 잘 먹으면 기분이 좋았다. 특별히 입이 짧거나 음식을 가리는 편이 아닌데도 그랬다. 그를 쳐다보는데 서나의 손이 테이블 중간을 넘었다. 거리가 먼 접시에 포크를 뻗는 걸 보고 물었다.

    “좀 덜어 드릴까요?”

    “아, 그럼 감사하죠.”

    집게로 면을 덜어 주는데 지훈의 시선이 느껴졌다. 생각을 알 수 없는 얼굴.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다. 지훈은 또 금방 눈을 돌렸지만, 이상한 기분은 얼마간 남았다.

    괜찮았던 식사를 끝내고 나서 넷은 밖으로 나왔다. 서나는 이후 일정이 따로 있다며 먼저 길을 떠났고, 세 남자가 남았다.

    지훈이 멀뚱히 선 채로 청우와 이서를 보았다. 셋이 시간을 보내는 일도 나쁘지는 않으나 솔직한 심정으로는 둘만 있고 싶었다. 어떻게 할까 싶어 이서를 흘긋 돌아보자 그가 입을 뗐다.

    “숙소로 갈 거야?”

    “아뇨. 학교에 잠깐 들러야 돼서요.”

    “그래. 이따 저녁에 봐.”

    “네, 그럼.”

    지훈이 인사를 하고 떠난 뒤 이서가 고개를 까딱였다. 걸음을 옮기던 중 그가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멈춰 섰다.

    “우리 저거 하나 사서 나눠 먹을까?”

    “그래.”

    컵 하나에 바닐라와 초콜릿 맛 젤라토가 한 덩이씩 올라갔다. 숟가락으로 한 입씩 나눠 먹으며 걸었다. 쫀득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혓바닥에 감겼다. 나눠 먹으니 배부르지도 않고 적당히 감질이 나서 좋았다. 아이스크림을 다 먹을 때쯤 강가에 도착했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센 강과 그 주변을 둘러싼 잎이 무성한 나무, 눈길을 사로잡는 건물들. 둘은 다리 한가운데 서서 강 너머를 응시했다. 바람이 불며 이서의 머리칼이 흩날렸다. 온화한 공기가 감도는 곳에서 한낮의 햇볕이 부드럽게 그의 낯을 쬐었다.

    “아, 날이 좀 아쉽네.”

    “왜?”

    “가을이나 겨울이었으면 내가 코트를 입고 여기서 널 감싸 안아 줬을 텐데.”

    퍽 귀여운 로망에 웃음이 나왔다. 이서가 입은 코트에 감싸인 자신을 상상해 봤다.

    “거기 내가 들어가겠냐.”

    “음, 쓰리 엑스 라지 정도 입으면 폭 안기지 않을까?”

    “파리 바닥 다 청소하고 다니겠네.”

    청우의 말에 이서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곧 청우의 어깨를 끌어안고서 머리를 맞댔다.

    “남의 나라 와서 좋은 일 해 주고 가네.”

    “한국 가서 해 보든가.”

    청우는 이서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남들이 보면 연인같이 느껴질까. 그러나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길을 다니며 자연스레 스킨십을 하고, 웃으면서 눈을 마주치고 표현하는 게 이토록 좋을 줄은 몰랐다. 그래서 이 시간이 더 소중하기도 했다. 여기서는 들켜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마주치고 웃다가 이서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입술이 청우의 귓가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청우는 이서의 손을 살며시 쥐었다. 이 순간의 감정이, 기분이 오래가기를 바랐다. 서서히 옅어지더라도 서로의 마음에 깊은 자국을 남겨서 훗날 어떤 동기나 힘이 되기를.

    청우는 팔을 휙 옆으로 던지듯 놓았다가 놀라 잠에서 깼다. 순간 이서가 제 팔에 맞았을까 걱정했으나 여기는 침대가 따로였다. 호텔에서는 같은 침대를 썼던지라 착각을 하고 말았다.

    고개를 들어 이서 쪽을 보았으나 그는 자리에 없었다. 어디에 간 걸까. 눈가를 찡그리며 핸드폰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한 시가 좀 넘어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잠이 안 와 나간 모양이었다.

    잠이 조금 달아나기도 했고, 혼자 잠을 청하는 것도 그래서 일어났다. 방을 빠져나와 공용 공간으로 향하는 길, 밤하늘에 떠오른 달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선선한 공기를 즐기다가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서의 것이었다.

    누구랑 이렇게 재밌게 이야기하고 있는 걸까. 청우의 입가에도 덩달아 미소가 어렸다.

    “그건 나도 몰랐네. 재밌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 이서와 맞은편의 지훈이 보였다. 지훈과 눈이 마주친 순간 올라가 있던 그의 입꼬리가 내려갔다. 청우의 걸음이 주춤한 사이 이서가 뒤를 돌아보았다.

    “깼어? 왜 더 안 자고.”

    “너 없길래. 뭐 해?”

    “잠 안 와서 잠깐 나왔는데 지훈이도 늦게 잔다고 해서. 영화 얘기 하고 있었어. 여기 영화 공부 하러 왔대.”

    “아아.”

    고개를 끄덕이며 이서가 당겨 준 의자에 앉았다. 지훈이 청우를 보며 물었다.

    “형은 영화 좋아하세요?”

    “전 그냥, 좋아하는데 잘 아는 건 아니에요.”

    “두 분 취향이 잘 맞지는 않을 것 같아요.”

    지훈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이서가 좋아하는 영화는 제 취향이 아니거나 어렵고, 간혹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제가 좋아하는 영화는 이서가 잘 보기는 했으나 그의 취향 역시 아니란 걸 알았다. 하지만 그의 말을 선뜻 긍정하고 싶지가 않았다.

    “안 맞아도 뭐, 같이 보면 재밌으니까.”

    이서가 웃으면서 청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지훈이 미소를 머금었다. 날 싫어하나 보네. 순간 그런 생각이 스쳤다.

    남이 자신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리 신경 쓰지 않았으나 궁금하기는 했다. 초면에, 고작 몇 시간 본 사람에게 싫어할 만한 이유가 생길 수 있나. 하지만 생각해 보면 첫인상이 별로라는 이유로 사람을 싫어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으니 이상한 일은 아닐 터였다.

    “유학 생활 힘들지 않아요?”

    “괜찮아요. 전 오히려 이쪽이 더 좋기도 해요. 이방인이라는 느낌이 저랑 잘 맞는 것 같고. 형도 그렇지 않아요?”

    이서에게로 향한 물음에 그가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이서의 시선이 잠깐 청우에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정착이 나한테 맞는 것 같아. 예전에는 몰랐을 뿐이고.”

    겨울 방학 때 있었던 실랑이와 짧은 공백을 생각하자 그의 말이 가볍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어지기까지의 우여곡절은 둘만 아는 일이었기에 더욱 애틋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간지러운 마음에 손끝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딴청을 부리는데, 테이블 밑으로 이서가 손을 잡아 왔다.

    “그래요? 알게 돼서 다행이에요. 내일은 어디 가실 거예요?”

    “생 쉴피스.”

    “좋네요.”

    “아, 이제 잘까? 빨리 자야지 내일 놀지.”

    이서의 물음에 청우는 시간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잠이 오지 않아도 일단 누워서 자려고 노력하는 게 좋을 것 같기는 했다. 둘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돌아왔다.

    “같이 자자.”

    침대에 누운 이서가 이불을 들쳤다. 싱글 침대는 둘이 눕기엔 좁았으나 온기를 느끼면 이서가 더 잘 자는 듯해 군말 없이 그의 옆에 누웠다. 이서는 돌아누워 청우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내일 나 늦게 일어나면 먼저 아침 먹어.”

    “응.”

    “시간이 빨리 간다. 그치.”

    “그러게. 근데 여기 온 지 되게 오래된 것 같아.”

    따지자면 이 주가 조금 안 되었는데 한 달은 넘게 체류한 기분이었다. 이상하게도 실감이 나지 않는 듯했다. 현실을 살고 있는데 어쩐지 꿈속을 헤엄치는 느낌.

    “응, 그거 좋아서 그래.”

    이서가 청우의 품으로 파고들며 중얼거렸다. 아. 청우는 깨달음에 작은 목소리를 흘렸다. 맞는 말이었다. 손에 꼽을 정도로 아주 좋은 시간이었다.

    이서의 등을 토닥이며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이서가 입꼬리를 씩 올리고선 청우의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청우는 눈을 감았다. 제 온기와 잠기운이 모조리 이서에게 향하기를 바라면서.

    광장 분수대 앞에 비둘기들이 모여 무언가를 쪼아 먹고 있었다. 거대한 분수대 뒤로는 꼭 하나의 신전을 옮겨 놓은 듯한 성당이 위용을 뽐냈다. 청명한 하늘에 하얀 구름이 겹겹이 쌓인 채로 흘러갔다. 확실히 날이 좋으면 건물이 더 빛나는 듯했다.

    성당 주변을 돌아보다가 안으로 들어섰다. 아득하도록 높은 돔형의 천장이 올려다보는 자신을 압도하는 듯했다. 곳곳에 자리 잡은 벽화와 기둥을 따라 늘어선 조각상, 빛이 새어 들어오는 스테인드글라스에서는 황홀함마저 느껴졌다.

    청우는 무교였으나 이런 곳에 오면 괜스레 벅차오름을 느꼈다. 무언가를 독실하게 믿어 본 적이 없는지라 그 마음이 궁금하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했다. 이서를 따라 천천히 안을 둘러보다 의자에 앉았다.

    푸른빛이 성당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청우는 그 빛을 좇다가 옆을 돌아보았다. 이서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을 믿지는 않지만 여행을 가면 성당에 자주 들른다던 그가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했다.

    “무슨 생각 해?”

    “지금?”

    “지금, 그리고 예전에.”

    “음…….”

    봄에 조금 더 어두운 갈색으로 염색한지라 그의 낯은 예전보다 차분하게 느껴졌다. 뿌리가 자라 색깔에 약간 차이가 있었으나 지저분해 보이지는 않았다. 조금 다르거나 어긋난 자연스러움이 이서와는 아주 잘 어울렸다.

    “예전에는 그런 생각을 했지. 내가 당신을 믿으면 당신은 나한테 뭘 해 줄 거냐고.”

    이서가 그런 제 생각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며 살지 않을까. 신은 조건 없는 사랑과 믿음을 바라지만, 인간은 보상을 원하기 마련이었다.

    “한 스무 살, 스물한 살 때까지만 해도 난 오기로 똘똘 뭉쳐 있었거든. 부모님이 원하시는 건 무조건 반대로 하고 싶었고.”

    “지금은?”

    “지금은 그냥…….”

    이서의 시선이 어딘가를 더듬었다. 빛이 희미하게 스며든 눈은 아득한 과거를 헤집고 있는 듯했다.

    “잘됐으면 좋겠다. 전부 다. 그런 생각이 드네.”

    “많이 컸네.”

    “응?”

    이서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청우를 돌아보며 웃었다. 청우는 이서의 머리칼을 슬쩍 건드리고서 손을 뗐다.

    “몇 년밖에 안 됐는데 생각이 바뀐 거잖아.”

    “몇 년밖에야? 이나가 아니라?”

    “몇 년밖에지. 십 년이면 강산이 바뀐다는데 넌 십 년도 안 걸렸네, 뭐.”

    “나무 한 그루 바뀌었을 뿐이야.”

    “그게 시작이지. 원래 처음이 제일 어렵잖아.”

    습관처럼 스스로 과소평가하는 생각을 다독여 주려 한 말에 이서가 코끝을 찡긋했다. 그가 청우의 손등 위에 손끝으로 그림을 그렸다. 간지러워 주먹을 쥐자 주먹 위로 이서의 손이 얹혔다.

    “내 처음은 너야.”

    “어?”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양 눈썹을 들어 올리자 이서가 고개를 비틀어 씁쓸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조신하게 살 걸 그랬지?”

    또 연기하네. 의도적으로 표정을 만들어 낼 때마다 귀여워지는 얼굴을 빤히 훑었다. 처음이라는 게 첫사랑이라거나 그런 뜻은 아닌 듯했다.

    “내가 처음으로……. 심은 새 나무.”

    이서가 다시 고개를 돌려 청우를 마주했다. 웃음기가 옅게 남기는 했지만 진지한 눈이 청우의 낯을 담았다.

    자신이 그의 첫 나무라니, 퍽 간지러운 말이었다. 입가가 허물어졌다. 청우는 손을 반대로 돌려 이서의 손을 꽉 잡았다. 이왕 나무가 된 김에 무성하게 잎을 피우고 가장 달콤한 열매를 맺고 싶었다. 약속하는 대신 다짐했다. 그의 용기를 후회로 만들지 않겠다고.

    해가 져 가자 광장에 버스킹 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기타 케이스에 돈이 조금씩 쌓였다.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은 노랫소리에 맞추어 고개를 까딱였다. 관심 없다는 듯 주변을 지나치는 행인들은 더 많았다.

    붉은빛으로 물든 하늘을 새털같이 옅은 구름이 가로질렀다. 옆에 선 이서가 노래를 따라 흥얼거렸다. 아는 팝송인지 가사를 정확히 읊는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청우는 조용히 감상하다가 그의 노래가 멎었을 때 물었다.

    “너 기타도 칠 줄 알아?”

    “조금?”

    “진짜 못하는 게 뭐냐.”

    “하하, 그러게. 찾아 줘.”

    이서가 고개를 기울여 청우의 어깨에 머리를 댔다가 뗐다. 청우는 손을 올려 그의 귀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말랑한 귓불과 차가운 귀걸이의 감촉이 좋았다.

    “자기야. 자꾸 거기 만질래?”

    “왜? 싫어?”

    “아니, 민박에서 그 짓을 할 순 없잖아.”

    반사적으로 손을 떼자 이서가 퍽 심각한 낯으로 중얼거렸다.

    “다음은 호텔이라 다행이야.”

    “……계속 그 생각 하고 있었냐?”

    “네가 나 만질 때마다.”

    청우는 제 손을 내려다보고 나서 헛웃음을 흘렸다.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 어떤 이유로든 앞으로는 계속 호텔을 선호하게 될 텐데, 모아 둔 돈이 많아야 부담스럽지 않을 테다.

    “조금만 참으면 되네. 여기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응.”

    파리보다는 다음 여행지인 니스에 오래 머무르기로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시간도 짧게 느껴질 게 분명했다. 허스키한 목소리의 남자가 부르는 경쾌한 노래가 주변을 선선하게 휩쌌다. 둘은 노래를 더 듣다가 자리를 떴다.

    시간에 맞게 숙소에 도착했다. 공용 공간에서는 사람들이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청우와 이서는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나서 자리를 잡았다.

    “여기 있는 분들이 오늘 야경 투어 가실 분들이에요.”

    지훈의 말에 청우는 앉은 사람들의 얼굴을 익혔다. 저와 이서까지 다섯 명, 지훈을 더하면 여섯 명이었다. 그중 한 명은 서나였고, 나머지 둘은 남자 일행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그들은 지하철에 올랐다. 구석에 자리를 잡고 서는데 서나가 다가왔다.

    “오늘 어디 갔다 왔어요?”

    “생 쉴피스랑 그 주변 둘러봤어요.”

    “어? 나도 그쪽 들렀었는데. 잘하면 마주쳤겠다.”

    맞장구를 치며 제 옆에 선 이서를 돌아보았다. 그의 옆에는 지훈이 서 있었는데, 얼핏 들어 보니 학교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했다.

    “나 이거 말고 목요일에 하는 야경 투어도 했었는데 그거 좋았어요. 루브르랑 에펠탑 찍는 거. 혼자 오면 밤에 돌아다니기 좀 그렇거든요. 그래서 이런 투어 있으면 올 때마다 신청해요.”

    “밤에는 확실히 사람 많은 곳 아니면 꺼려지더라고요.”

    “그쵸. 아니 나 독일 갔을 때는 역에서 딱 나왔는데 무슨 홍등가인 거예요.”

    “프랑크푸르트요?”

    이서가 고개를 기울이며 끼어들었다. 그의 물음에 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대화를 듣다가 옆에 있던 남자 일행들이 어디서 왔냐고 물어 그들과도 말을 섞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도착했다. 지훈이 그들을 가장 먼저 데리고 간 곳은 사크레쾨르 대성당이었다. 어두운 가운데 성당 건물이 고아하게 빛을 받고 있었다. 그 앞으로 도시의 야경이 보여 앉아서 경치를 감상하거나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았다.

    “가는 곳마다 사진 찍을 시간 드릴 거예요. 구경하세요.”

    여행을 오면서 사진 찍는 실력이 는 것 같았다. 이서가 저를 찍어 준 사진을 보고 구도를 그대로 따라 하다 보니 감이 잡혔다. 그를 찍으려고 하던 찰나, 서나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저 좀 찍어 줄 수 있어요?”

    “아, 네.”

    서나의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서나가 난간으로 가 웃으면서 이쪽을 바라보았다. 제 것과는 달랐지만 이서의 것과 같은 기종이었기에 다루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야경과 사람이 적절한 비율로 잘 나오도록 구도를 잡은 후에 사진을 찍고 나서 서나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우와, 진짜 잘 찍는다.”

    함께 사진을 확인하고 있을 때였다. 인기척이 들려 돌아보니 지훈이 이쪽을 찍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촬영에 멈칫할 찰나 그가 미소를 띤 채 말했다.

    “두 분 잘 어울리세요. 같이 찍어 드릴게요.”

    지훈의 옆으로는 이서가 다가오고 있었다. 청우는 고개를 저으며 서나에게서 퍼뜩 떨어졌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청우는 나랑 찍어야 하는데.”

    이서가 싱글대며 다가와 청우의 어깨에 팔을 두르자, 서나가 자신이 찍어 주겠다며 그에게서 핸드폰을 받아 갔다.

    이서를 두고 그런 말을 들은 게 신경 쓰였다. 남자와 여자가 붙어 있기만 해도 엉뚱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많고, 자주 겪어 보았으나 지훈의 말은 특히 더 거슬렸다. 상념에 잠겨 카메라를 멍하니 쳐다보는데 서나가 웃으라고 말함과 동시에 이서가 손가락으로 청우의 입꼬리를 쿡 찔렀다. 청우는 불편한 감정을 정리하고 미소 지었다.

    “오, 잘 나왔어요.”

    서나가 핸드폰을 가져다주어 청우와 이서는 머리를 맞대고 사진을 보았다. 하고 있던 생각과 다르게 사진은 정말 잘 나왔다. 맑게 웃는 이서의 낯을 내려다보는데 그가 속삭였다.

    “역시 잘생기고 봐야 돼.”

    밑도 끝도 없지만 근거 있는 자신감에 웃음부터 터져 나왔다. 웃는 눈으로 이서를 보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청우 네 얘기 한 거야.”

    “무슨…….”

    “나 이렇게 사진 못 나온 거 처음이야.”

    누가 봐도 잘 나왔는데 엄살이다. 우는 시늉을 하는 이서를 보자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이곳이 밖이 아니고 주변에 사람만 없었더라면 그의 뺨에 입을 맞췄을 거다. 어느새 불편했던 마음이 녹아내렸다. 청우는 그의 옆에 딱 붙어 야경을 구경하다가 일행들과 함께 계단을 내려왔다.

    골목을 지나며 지훈의 설명을 들었다. 가이드가 아니다 보니 전문적이라는 느낌은 없었으나 그런 것을 기대하고 온 것은 아니었기에 이서와 함께 주변을 구경하는 데 집중했다.

    “이건 한국에서 뮤지컬로도 만들어진 적 있었죠. 형은 보셨어요?”

    “응, 봤어.”

    “저도 봤는데. 그럼 저희 그때 같은 데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벽을 뚫는 남자 동상 앞에서 청우는 어쩐지 상기되어 보이는 지훈의 낯을 훑었다. 기분 탓인가. 청우는 헛웃음을 삼키며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가슴을 벅벅 긁고 싶은 충동이 들어 주먹을 쥐었다.

    잠깐의 시간을 가진 뒤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물랭 루주였다. 새빨간 풍차가 달린 건물은 단연 눈에 띄었다. 말로만 들었지 직접 와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형은 영화도 보셨죠?”

    “봤지.”

    “역시. 안 본 게 없으시네요.”

    청우는 영화도 본 적이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그 영화부터 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문득 자신이 낯설게 느껴져 흠칫했다. 단순한 다짐이 아닌 오기로부터 비롯한 생각이었던 것이다.

    튀어 대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핸드폰을 들고 건물의 전경을 찍었다. 화려한 빛이 사진에는 다 담기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제가 찍은 사진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데, 지훈의 이야기를 듣던 이서가 돌연 손을 뻗어 핸드폰을 가져갔다.

    “이거 이렇게 찍어 봐. 더 잘 나와.”

    그가 카메라를 프로 모드로 설정한 뒤 이것저것 조정한 다음 청우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그러고 나서 청우의 손을 겹쳐 잡고선 사진을 다시 찍었다. 확실히 빛이 보다 선명하게 담겼다. 감탄하며 고개를 들자 이서가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너 저기 서 봐. 내가 찍어 줄게.”

    “네에.”

    청우의 권유에 이서가 건물 앞에 자리를 잡았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아 깔끔하게 찍기는 어려웠지만 나름 괜찮은 사진을 건졌다.

    “다 됐어?”

    “응, 봐 봐.”

    핸드폰을 이서에게 보여 주는데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드니 지훈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난히 검게 보이는 눈이 자신과 마주하자 슬쩍 휜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웃음은 아닌 듯했다. 청우는 그가 자신보다 어린 애라는 걸 상기했다. 정말이지, 들이닥치는 이 기분이 이상했다.

    잠에서 깬 청우는 고개를 들어 이서를 확인했다. 그는 이불에 돌돌 말린 채로 푹 잠들어 있었다. 조금 늦게 잠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잠을 설치지는 않은 듯했다. 베개 위로 삐죽삐죽 튀어나온 머리칼이 귀여웠다. 눈을 끔뻑이며 바라보다가 조용히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씻고 나왔는데도 이서는 깨지 않았다. 깨우지 않고 먼저 아침을 먹기로 했기에 공용 공간으로 향했다.

    식탁에는 이미 몇 사람이 앉아 있었다. 청우는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접시를 들었다. 오늘은 좀 가볍게 먹고 싶어 많은 걸 담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여기 있는 동안 한식을 실컷 먹어서 니스에서는 먹지 않고도 버틸 수 있을 듯했다. 입 안에 든 걸 씹으며 오늘 일정을 생각해 볼 때 서나가 맞은편에 앉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서나는 막 일어났는지 졸음기 가득한 얼굴로 숟가락을 들었다. 말없이 접시를 비우는 동안 주변에 앉은 사람들이 일어나 나갔다.

    주방 직원이 설거지하는 소리와 민박 사장이 컴퓨터 앞에 앉아 마우스를 딸깍이는 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접시를 반쯤 비웠을 때 문이 열리고 지훈이 들어왔다.

    눈이 마주쳐 고개를 흘긋 숙이자 그가 웃으면서 인사했다. 지훈의 시선이 제 옆을 훑는 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첫날을 제외하고 그는 렌즈를 낀 채로 생활했다.

    “이서 형은요?”

    “아직 자요.”

    “아침잠이 많으신가 보다.”

    청우는 건성으로 고개를 주억이고는 젓가락을 바삐 움직였다. 지훈이 커피 한 잔을 들고 서나 옆에 앉았다.

    “누나는 오늘 일찍 나가세요?”

    “아뇨, 오늘은 좀 느긋하게 나가려고요.”

    “좋죠.”

    커피 한 모금을 마시던 지훈이 청우와 서나를 번갈아 보았다. 은근하게 웃는 시선에 청우는 미간을 찌푸릴 뻔한 것을 참았다.

    “누나는 남자 친구 있어요?”

    “왜요?”

    “그냥요. 보통 이런 데 와서 새로운 인연 만들고 가는 분들도 많거든요.”

    의도가 뻔히 보이는 말이었다. 이것도 기분 탓일까. 청우는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접시를 다 비웠기에 이제 일어나도 될 듯싶었다.

    “음, 난 그런 건 별로.”

    서나가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저었다. 청우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퇴식대에 접시와 수저를 놓고서 밖으로 나갔다.

    제법 따뜻한 공기를 가득 마신 뒤에 걸음을 뗐다. 신경 쓸 필요 없다. 괜한 생각에 사로잡혀 기분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다시 방으로 올라가 양치를 하고 나올 때까지 이서는 잠에 푹 빠져 있었다. 침대에 앉아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서를 처음 보았을 때는 그저 불편한 감정에 그를 과소평가했다. 하지만 그는 주변에 사람들이 끊이지 않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설령 남자라 하더라도 그에게 호감을 지닐 수 있고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의 여자 친구들에게는 어느 정도 면역이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남자는 또 다른 모양이다.

    아니면 자신이 잘못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을 테다. 이서는 같은 남자로서도 충분히 동경하고 좋아할 만했으니까. 청우는 저 혼자 고개를 끄덕이다가 지갑을 챙겼다. 조식 시간이 끝나 가고 있었으니 그가 일어났을 때 아침을 먹지 못하는 대신 간단히 먹을 것을 사 오는 게 좋을 듯싶었다.

    밖으로 나온 청우는 공용 공간 앞을 정리하고 있는 지훈을 발견했다. 걸음이 주춤한 순간 그가 청우를 돌아보았다.

    “어디 가세요?”

    “잠깐 마트 좀 가려고요.”

    “아. 다녀오세요.”

    지훈을 지나치려던 청우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확실히 하고 싶은 건 있었다. 한숨을 내쉰 뒤 입을 뗐다.

    “저기.”

    “네?”

    “저 애인 있어요.”

    “…….”

    “그러니까 서나 씨랑 잘 어울린다느니, 그런 말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런 의미가 아니더라도요. 좀 불편해서요.”

    지훈이 자신을 싫어하든, 이서를 어떤 시선으로 보든 그런 건 상관없었다. 하지만 이서 앞에서 그가 신경 쓸 만한 일을 만드는 건 싫었다.

    생각지 못한 말이었는지 지훈이 잠시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입가에 비웃음과 닮은 미소가 드리웠다.

    “그럼 그렇게 행동하지 마셨어야죠.”

    “네?”

    “누가 봐도 잘 어울린다는 말이 나오게, 오해할 만하게 구시던데요?”

    어처구니가 없어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정말 타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까 싶어 제 행동을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오해할 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눈가를 찌푸릴 찰나 지훈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본인이 이서 형이랑 어울린다고 생각하세요?”

    “……네?”

    여기서 갑자기 이서의 이름이 튀어나왔다는 것은 그와 자신의 사이를 지훈이 눈치챘다는 뜻일 터였다. 둘의 사이가 부정한 것도 아니니 들킨 일은 아무렇지도 않으나 그의 물음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이서 형 같은 사람은 형이랑 만나면 안 돼요. 내내 불안할 거거든요.”

    “…….”

    “옆에서 보니 이서 형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맞춰 주는 것 같던데. 설마, 몰랐어요?”

    그저 무덤덤하고 평범하게만 보였던 얼굴이 순식간에 가시를 드러냈다. 청우는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몰라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더욱 답답한 건 그의 말에 선뜻 반박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럼.”

    청우가 침묵하는 사이 지훈이 밉살스럽게 고개를 꾸벅인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혼자 남게 된 그는 이마를 문지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별…….”

    자신을 들쑤시려고 작정한 말이었다. 휘둘릴 필요가 없었다. 이유 없는 악의에 맞닥뜨렸던 일은 비단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 악의에 같이 빠져들면 본인만 망칠 뿐이다.

    청우는 고개를 흔들고는 걸음을 뗐다. 얼마 가지 않아 뒤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도니 공용 공간에서 나온 서나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어디 가요?”

    “마트 가려고요.”

    “어? 진짜? 나도 같이 가요.”

    “뭐 사실 건데요?”

    “초콜릿. 당 떨어져서.”

    “그럼 제가 사 올게요.”

    자신을 호시탐탐 나쁘게 보는 사람이 있는데, 먹이를 줄 필요는 없었다. 파리는 곧 떠난다. 즐거운 시간에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아니에요. 같이 가요.”

    “제가……. 뛰어갔다 올 거라서요. 운동 겸.”

    “아, 진짜요? 그럼 부탁 좀 할게요.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네.”

    청우는 대문을 나선 뒤 발목을 풀고 달렸다. 졸지에 생각에도 없었던 조깅을 하게 되었으나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까지 뛰고 나자 기분이 좀 풀렸다.

    마켓에 도착했을 때는 땀이 잔뜩 흐른 채였다. 이마를 훔치고 나서 숨을 가라앉히며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이서가 먹을 만한 샌드위치와 군것질거리를 산 다음 서나가 부탁한 초콜릿을 골랐다. 돌아갈 때는 천천히 걸으면서 주변 풍경을 구경했다. 주택가의 한적한 거리는 밤과는 달리 평화로워 마음이 안정되게 해 주었다.

    숙소에 다다랐을 때 담벼락 앞에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서나가 보였다. 청우를 발견한 그가 담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왔어요?”

    “네, 여기.”

    청우가 서나에게 초콜릿을 내밀었다. 서나는 반색하며 그것을 받아 들었다.

    “오, 맛있는 거. 고마워요.”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서나가 뒤를 따랐다. 청우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2층 창문에 선 이서와 지훈을 발견했다. 왜 둘이 같이 있지? 의문이 떠오를 찰나 지훈이 이서에게 뭐라고 말하는 게 보였다. 이서의 시선이 청우와 그 뒤에 있는 서나에게로 번갈아 향했다.

    저 새끼가……. 입을 꾹 다무는데 곧 지훈과 이서가 창가에서 사라졌다. 욕설을 삼키며 숙소 건물로 들어서는 찰나 그들이 뒷문을 통해 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들을 따라 뒷문으로 나가 뒷마당과 이어진 코너를 막 돌 때였다.

    “보셨죠? 둘이 아침부터 쭉 같이 있었어요. 형이 보셨어야 하는데. 손잡는 걸 보통 오해라고 하지는 않죠.”

    손을 잡아? 어이가 없고 화가 치밀어 머릿속이 시뻘게지는 듯했다. 지훈이 자기 마음대로 오해를 하는 것은 알 바 아니었으나 거짓말은 명백히 선을 넘었다. 한 걸음 내뻗으려는 찰나, 이서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등을 보이고 있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담배인 듯했다. 그러나 불을 붙이지는 않았는지 손가락 사이에 두고 까딱이기만 했다.

    “신기하다. 내가 그렇게 쉬워 보이나?”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비아냥거리는 기색이 감돌았다. 앞으로 내밀었던 한 발이 자연스레 멎었다. 지훈의 낯에도 당황한 빛이 고였다.

    “내가 우리 청우 고생을 좀 많이 시켰어. 그딴 수작에 깨질 거였으면 진작에 깨졌다는 뜻이야.”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차가운 목소리. 이서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몹시 궁금했다. 그의 낯을 보고 싶으면서도 보고 싶지 않은 모순된 충동이 뒤섞였다.

    지훈의 시선이 뒤쪽으로 향하며 청우에게 닿았다. 그는 당황한 낯을 가다듬고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형, 전 형 같은 사람 잘 알아요. 저도 형이랑 비슷하거든요. 저 사람이랑 서나 누나랑 붙어 있기만 해도 신경 썼잖아요. 저 다 봤어요. 저렇게 아무한테나 다정한 사람이랑? 안 되는 거 형도 잘 알잖아요. 결국엔 다 망칠 거라는 거.”

    자신을 곡해하고 나쁘게 보는 일은 참을 수 있었으나 이서를 향해 저런 말을 하는 것은 용서가 되지 않았다. 이서가 저런 소리를 들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는 지훈과 다른 사람이었다.

    “알아. 그거 내가 맨날 생각하는 건데.”

    그러나 뒤이어 나온 이서의 대답에 청우는 전의를 상실했다. 안다고? 매일 생각한다고? 전혀 몰랐던 일에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주먹을 쥐었다.

    “그렇다고 네가 청우한테 비벼? 내가 청우를 두고 널? 무슨 자신감이야?”

    비웃음 가득한 목소리에 지훈이 얼굴을 붉혔다. 그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눈을 치떴다.

    “형도 저한테 여지 줬잖아요. 처음 봤을 때부터 생글생글 웃으면서 잘해 줬잖아요! 제가 형 어떤 눈으로 보는지 알고 있었으면서…….”

    “여지? 왜 이래, 지훈아. 여지 한번 안 받아 본 사람처럼.”

    이서가 담배를 건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의 말투에는 권태가 스며 있었다. 지훈에게는 어떤 흥미도 관심도 없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났기에 지훈의 낯에는 패색이 어렸다.

    “응, 알았어. 근데 그게 뭐? 알면 내가 널 생각해서 배려해 줘야 돼? 내가 왜?”

    “…….”

    “지훈이 자신감은 좀 좆만 해질 필요가 있겠다.”

    이서는 말 몇 마디로 사람을 비참하게 찍어 내리는 법을 알았다. 지훈이 고개를 숙이고서 주먹을 쥔 채로 잘게 떨었다. 수치심으로 물든 얼굴을 보던 청우는 조용히 돌아섰다. 안 보는 게 나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조금 전 들었던 대화를 차분히 생각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고 이서가 들어왔다. 고개를 들자 이서가 웃는 낯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침울한 낯으로 가만히 올려다보자 이서가 고개를 기울였다.

    “왜. 내가 심했던 것 같아?”

    “……나 듣고 있는 거 알았어?”

    “응. 뒤쪽을 흘끔흘끔 보는데 모를 리가 있나.”

    지훈의 시선이 간 방향으로 자신이 듣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청우는 고개를 주억였다. 여전히 시무룩한 얼굴에 이서가 웃으면서 그의 뺨을 매만졌다.

    “왜. 왜 그런 얼굴이야.”

    “내가……. 신경 쓰이게 했어?”

    자신과 서나가 함께 있는 모습을 내내 신경 썼다는 지훈의 말을 이서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훈이 했던 말을 아예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음, 별로?”

    “솔직하게 말해.”

    여태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혼자서 신경을 쓰다가 결국에는 관계를 망칠 수 있다는 생각까지 내내 달고 살았던 걸까. 그렇다면 지금 털고 가는 게 좋았다. 나중에 터져서 돌이킬 수 없을 일을 만드는 것보다는.

    이서는 퍽 진지하지 않은 낯으로 눈을 굴렸다. 그는 이 상황이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린 채로 어깨를 으쓱였다.

    “뭐, 신경이 아예 안 쓰였다면 거짓말이겠지. 근데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심각하지 않아. 그냥 일반적인 감정일 뿐이야.”

    그의 말이 위안이 되지는 않았다. 진심인지 의문이 생기기도 했다. 같이 길을 헤쳐 나가는 관계에서 한쪽만 참기를 바라지 않았다. 말없이 쳐다보자, 이서가 눈썹을 까딱 올리더니 픽 웃었다.

    “솔직히 말해?”

    “응.”

    “난 네가 저 새끼 말 신경 쓰는 게 훨씬 좆같아.”

    생각지 못한 말에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이서가 한숨을 내쉬고는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쟤가 너한테는 뭐라고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네가 보는 나를 믿어야지. 앞으로 저런 새끼 또 만나면, 그때마다 흔들릴래?”

    차가운 일침에 청우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신경 쓰지 않겠다고, 휘둘리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지훈의 말에 휘둘려 버렸다. 그러나…….

    “맨날 생각한다며.”

    이서가 끝을 생각하고 있다면 그건 다른 문제였다. 제게 그런 말을 꺼낸 적이 없었기에 몹시 서운했다. 섭섭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눈에 힘을 주자 이서의 낯이 누그러졌다.

    “그건 그냥, 습관이야. 난 항상 최악을 생각하니까.”

    오랜 습관. 이해가 가면서도 감정적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고개를 떨구자 이서가 한쪽 무릎을 꿇어앉아 눈을 마주쳤다.

    “안 그럴 거라는 거 알고 있어. 생각이랑 달라지려고 노력하고 있고.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이서가 청우의 뺨을 어루만졌다. 손바닥의 감촉이 피부를 넘어 마음까지 어루만지는 듯했다. 청우는 그의 손목을 잡고 살결을 지분댔다.

    “네가 다른 사람한테 다정하게 굴어도 나한테 하는 거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인 거 알고 있어. 내가 널 그래서 좋아하는 거니까, 그런 면까지 빼앗을 생각 없고. 나 노력하고 있어. 의심하지 마.”

    진심 어린 말이 순간의 걱정과 불안을 부둥켜안았다. 이서가 자신과 오래 길을 걷기 위해 하고 있는 노력이 가슴 깊이 와닿아 불을 밝혔다. 그를 알면 알수록 마음이 더 깊어진다.

    “그럼 앞으로는 그런 생각도 하지 마. 의식적으로 끊어.”

    청우는 다소 퉁명스럽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이 습관이라면 거기서도 멀어져야 했다. 아무리 생각의 반대편으로 달려가려고 한다 해도, 때때로 그를 덮치는 생각의 그림자가 그를 괴롭히지 않았으면 했다.

    이서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가 청우의 목덜미를 잡아당기고는 이마를 맞댔다.

    “응, 알았어.”

    “신경 쓰이게 한 건 미안하다. 손 안 잡았어. 걔 거짓말이야. 마트도 나 혼자 갔다 왔고.”

    “알아. 뛰어갔다 왔지?”

    “어. 봤어?”

    “아니. 땀 났잖아.”

    등을 더듬는 손길에 청우는 그에게서 몸을 물렸다. 땀 냄새가 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이서는 개의치 않는 듯 청우를 끌어안고는 이마를 맞댔다.

    “나도 미안.”

    “넌 뭐가.”

    “네가 신경 쓰지 않게 조용히 선 그으려고 했는데, 제대로 못 하고 결과적으로 더 속상하게 만들었네.”

    “네 잘못 아니잖아. 걔가 그렇게 나올 줄 누가 알았겠냐.”

    “그래도 더 조신하게 단속하면서 살게.”

    언뜻 시무룩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청우는 고개를 저으며 이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넌 너로 살아. 그게 더 좋아.”

    이서가 잘나서 누군가의 시선을 끈 걸 뭐 어쩌겠는가. 지훈은 이서가 처음부터 그에게 잘해 줬다고 말하던데,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의아할 따름이었다. 어떤 의도도 없이 장난스럽게 예의를 차리는 평소의 이서였을 뿐인데. 어쨌든 그게 여지로 느껴졌다고 해서 지훈의 행동에 정당성이 부여되지는 않았다. 누군가가 이서에게 반하는 것보다, 이서가 타인의 말에 주눅이 들거나 가시 같은 말을 신경 쓰는 쪽이 저 또한 더 싫었다.

    청우의 말에 이서가 옅은 미소를 머금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숙소 옮길까?”

    “음……. 아니. 어차피 며칠 안 남았는데, 뭐. 우리가 피할 이유도 없고.”

    “그래? 그럼 나 이제 그냥 못되게 굴어도 돼?”

    “뭘 얼마나 못되게 굴려고……. 됐어. 그냥 무시하자.”

    이서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로 즐거운 여행에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아 좋게 넘어가려고 했던 모양이다. 일이 이렇게 된 게 아쉽기는 하지만, 여전히 이서와 함께하는 좋은 시간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청우는 이서의 목덜미를 잡고 입을 맞췄다.

    혀를 섞으며 이서를 꽉 끌어안았다. 이서에 대한 애정과 앞으로 더 단단해질 거라는 믿음이 품 안으로 차올랐다. 청우는 그의 입 속에 제가 느끼는 감정을 가득 퍼부었다.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 파리에서의 마지막 아침이 밝았다. 청우는 저를 흔드는 손길에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자기야. 일어나세요.”

    벌써 씻고 옷을 갈아입었는지 멀끔한 이서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 일어나서 준비를 마친 걸까. 청우는 끙,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피곤해? 더 잘래?”

    “아냐. 시간 맞춰 가야지.”

    “좀 늦으면 어때. 괜찮아.”

    “그럼 조금만…….”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온 듯했다. 다시 눈을 붙이자 이서가 머리맡에 앉았다. 청우는 제 머리로 이서의 허벅지를 벴다.

    이서가 청우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었다. 일정하게 움직이는 손길이 좋아 몸이 편하게 늘어졌다.

    선잠에 빠진 채로 파리에서의 시간을 돌이켜 보았다. 비록 걸려 넘어질 만한 돌멩이가 있기는 했으나 그보다 더 좋은 일이 많았다. 함께 젤라토를 나눠 먹고, 성당에 나란히 앉아 시간을 보내고, 버스킹을 즐기고, 종일 박물관을 돌아다니고, 가끔은 길을 잘못 들어 한참을 걸어야 했던 순간들. 청우는 그 시간을 되새기며 다시 눈을 떴다. 시선이 맞닿자마자 이서가 눈을 휘었다.

    “깼어?”

    “응.”

    “좋은 꿈 꿨어?”

    “아니. 왜?”

    “웃길래.”

    내가 그랬나. 청우는 손끝으로 입꼬리를 더듬다가 몸을 일으켰다.

    “네 꿈이었을걸.”

    생각도 꿈이라고 할 수 있나. 내가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꿈을 꾼 거였나. 하품하며 욕실로 향하는데, 이서가 뒤에서 덜컥 달려들면서 허리를 껴안았다. 순간 기울어진 몸을 바로 세우며 뒤를 돌아보자 그가 뺨에 입을 맞췄다.

    “내 꿈 꿨어?”

    “어어……. 아마도.”

    이서가 낮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청우의 관자놀이와 뺨에 쪽쪽 키스해 댔다. 간지러움에 어깨를 움츠리다가 돌아서 그를 껴안았다.

    한참을 꼭 안고 있다가 이서가 청우의 엉덩이를 두드리며 몸을 떼어 냈다. 씻고 나오라는 말에 욕실로 들어갔다.

    씻고 나와 짐을 정리했다. 서로 잊은 건 없는지 확인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캐리어를 닫았다. 방을 둘러본 뒤에 내려와 공용 공간으로 향했다. 안에는 사장과 지훈이 있었다. 지훈과 눈이 마주쳤으나 금방 시선을 돌렸다.

    짧은 체크아웃 절차를 거친 후에 밖으로 나왔다. 대문을 나설 때 뒤에서 사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즐거운 여행 돼요.”

    손을 흔드는 사장 옆에 선 지훈이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청우와 이서는 고개를 꾸벅인 뒤 돌아섰다.

    나중에 이 순간을 돌이켜 보았을 때 지금의 기억은 어떤 모습으로 남게 될까. 지훈과의 해프닝은 흐릿해질 게 분명했다. 이곳에서의 순간은 좋은 것들만 가지고 갈 테다. 청우는 가벼운 걸음을 뗐다. 앞으로 펼쳐진 날은 오늘도 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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