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 공백의 미학 (13/16)

외전 1. 공백의 미학

창밖을 보며 청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왜 이렇게 안 가는지, 시계를 돌려서 시간이 빨리 갈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서를 못 본 지 며칠이 지났다. 고개를 돌리자 침대 위에 둔 핸드폰이 눈에 들어왔다. 연락을 하려면 충분히 할 수는 있었지만, 이제는 목소리만 듣거나 얼굴을 작은 핸드폰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애초에 왜 이서의 말을 들었던 걸까. 그가 보내 주는 사진을 보면 잘 지내는 듯해 좋으면서도 그리움이 물씬 밀려들어 와 힘들었다. 이런 생소한 감정을 다스리는 게 낯설었으나 결국에는 이 또한 하나의 과정인 듯해 이겨 내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청우는 밀려오는 감정을 감내하며 눈을 감았다. 둘의 이별은 일주일을 거슬러 올라간다.

집중력이 흐트러졌는지 은정의 눈길이 자꾸만 시계로 향했다. 청우는 설명을 하다 말고 시간을 확인했다. 학생이 원하더라도 과외를 일찍 끝내 주기를 바라는 학부모는 없었다. 학생의 집중력을 끌어 올리는 방법은 몇 가지 알고 있었다.

“첫사랑 얘기 해 줄까?”

“와, 네!”

“이거 집중해서 들으면.”

“진짜요? 네, 네. 빨리해요.”

재촉하는 은정 때문에 웃음이 나왔다. 공부하는 게 어지간히 싫구나 싶으면서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닌지라 얼른 설명을 마쳤다. 교재를 덮고 나니 끝내기로 한 시간에서 몇 분 지나 있었다. 은정이 눈을 초롱초롱 뜨며 청우를 보았다.

“첫사랑이요, 첫사랑.”

“얘기 듣고 십 분 늦게 끝낼래, 안 듣고 지금 끝낼래?”

“네에? 당연히……! 지금이요.”

은정이 억울한 낯을 한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첫사랑 이야기가 진짜 궁금했다기보다는 어떻게든 수업 시간 동안 농땡이를 치고 싶었던 것이었을 테다. 청우가 웃으면서 책을 정리하자 은정이 눈을 뾰족하게 떴다.

“와, 쌤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첨엔 이런 사람인 줄 몰랐는데!”

처음엔 모범생인 줄 알았는데 완전히 능구렁이라며 구시렁댔다. 고작 이런 일로 길길이 날뛰는 게 귀엽다 싶으면서도 이서와 다니다 보니 영향을 좀 받았나 싶기도 했다. 제가 했다기에는 퍽 낯간지러운 생각에 이마를 긁적였다.

“오늘 수고했어. 다음에 보자.”

“네에.”

집을 나오면서 이서에게 연락이 왔는지 메신저를 확인했다. 과외 들어가기 직전에 메시지가 와 있었다.

「나일ㄹ어나써」

「♡」

잠에 취한 채로 메시지를 보냈는지 오타가 가득했다. 와중에 하트는 잘 챙겨서 보낸 게 귀여웠다. 대화방을 보며 혼자서 웃다가 걸음을 옮기며 전화를 걸었다.

[응, 끝났어?]

“어, 지금 가려고. 뭐 사 갈까?”

[아니야. 우리 나가서 밥 먹자.]

“그래.”

[응. 빨리 오세요.]

“알았어.”

이서의 집으로 향하는 길 기분 좋은 설렘이 가슴을 채웠다. 요 며칠은 정말이지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느낌은 처음인지라 다소 어색하기도 했다.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지만 이서가 있을 때는 벨을 눌렀다. 오피스텔 앞에 도착해 호출을 하자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나.”

[누구? 저는 지금 애인을 기다리고 있는데요.]

능청스러운 목소리에 한숨부터 튀어나왔다. 이서는 간혹 이런 장난을 치곤 했다. 청우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소리를 낮췄다.

“맞아. 네 애인.”

[정말? 그럼 윙크해 봐.]

정말이지 바라는 것도 참 많았다. 최근에야 안 사실인데 자신은 윙크를 잘하지 못하는 편이었다. 이서처럼 한쪽 눈만 가볍고 장난스럽게 감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해 인상까지 찡그려야 했다. 윙크를 겨우 하고 나자 웃음소리가 들리면서 현관이 열렸다.

이서의 집에 다다르니 그가 문을 열어 주며 손을 잡아당기고 나서 청우를 품에 안았다.

“고생했어.”

과외를 끝내고 오는 날이면 이서는 늘 이렇게 청우를 안아 주곤 했다.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그의 품에 안기고 나면 돌아왔다는 생각과 함께 피로가 풀렸다. 줄곧 안에 있었던지라 이서의 몸은 따뜻했다. 가만히 안은 채로 냉기를 녹이는데 이서가 몸을 떼어 내더니 청우의 얼굴을 유심히 훑었다.

“안경 뭐야? 너 안경 쓴 거 처음 봐.”

“아, 이거. 문제집 글자가 작아서.”

“눈 안 좋아?”

“아니, 난시 때문에.”

제 양 뺨을 쥔 채로 구석구석 보는 이서의 시선을 견디기가 힘들어 고개를 뒤로 물리자 그가 씩 웃었다.

“안경 쓰니까 인상이 좀 달라진다.”

“그래?”

“응, 더 귀여워.”

“무슨…….”

“안경 압수.”

이서가 청우의 안경을 홀랑 가져가더니 자기가 썼다. 청우는 말리려다가 안경 쓴 이서의 얼굴을 보고 멈칫했다. 제가 쓸 땐 그저 안경이었던 것이 그가 쓰니 패션 아이템 같았다. 안경을 쓴 낯은 처음인지라 가만히 쳐다만 보자 이서가 웃으면서 검지로 브리지를 추어올렸다.

“나 잘생겼어?”

그가 속눈썹을 팔랑이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안경을 쓰니 보다 차분하고 지적인 분위기를 풍겨 색달랐다. 외모에 대한 이서의 자신감은 장난으로라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이서가 쿡쿡대더니 청우의 목덜미를 끌어당겼다.

입술을 물고 혀를 맞댔다. 따뜻한 입 안이 좋아 고개를 틀어 더 깊숙한 곳을 핥으려는데 콧등에 안경테가 닿아 거슬렸다. 안경을 잡아 휙 빼자 이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꺄악, 멋져.”

작위적인 감탄사를 무시하고 다시 입을 맞추었다. 이서가 웃으면서 키스에 화답했다.

입술이 떨어지고 나자 괜히 멋쩍어졌다. 아무 이유 없이 키스한 뒤에는 역시 아직 어색했다. 저와 달리 자연스레 제 입꼬리를 닦아 주듯 문지르는 이서의 머리칼을 괜스레 만지작거리자 그가 물었다.

“이제 밥 먹으러 갈까?”

“응.”

이서가 옷을 갈아입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주차장을 빠져나오자 냉기가 흐르는 겨울 특유의 풍경이 눈에 담겼다. 이번 겨울은 유독 추울 듯싶었다.

“뭐 먹을까?”

“거기 갈래? 너랑 예전에 샌드위치 먹었던 카페.”

“아아, 후문 쪽에 있는 거?”

“응.”

“좋지, 오랜만에.”

도착한 카페는 처음 왔을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이서와 연애하기 전 찾았던 곳을 다시 오게 되자 새삼스러웠다. 청우는 그때 먹었던 샌드위치와 음료를 주문했다.

비록 단 한 번 찾은 데지만, 변하지 않는 곳이 있다는 사실은 간혹 위안이 되기도 했다. 둘은 그때 앉았던 테이블에 똑같이 자리를 잡았다.

“여기 맛있었나 보네.”

“응. 근데 그때 맛을 제대로 못 느꼈어.”

“나 때문에?”

“너 때문…… 까지는 아니고.”

“왜. 내 탓 해도 돼.”

“뭘 탓하냐. 어쨌든 네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된 건데.”

어쨌든 이서가 자신을 일깨워 주고 끊임없이 다가온 덕에 시작할 수 있었던 관계였다.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으나 그를 탓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이서가 쑥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발끝으로 청우의 발을 툭툭 쳤다. 대놓고 연기하는 얼굴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부끄러움과 그는 참 안 어울렸지만 그래도 귀여웠다.

서로 실없는 장난을 치다가 음식이 나와서 가져왔다. 맑은 풍경을 보며 조용한 곳에서 맛있는 걸 먹으니 좋았다. 샌드위치도 음료수도 전에 먹었을 때보다 훨씬 맛있었다. 음료를 마시는데 이서가 핸드폰을 들더니 사진을 찍었다. 먹는 걸 왜 찍나 싶어서 가만 쳐다보자 그가 만족스러운지 사진을 보며 미소 지었다.

“햇볕 들어서 잘 나오네.”

청우도 핸드폰을 꺼내 이서를 카메라에 담아 보았다. 옆에 바로 통창이 있고 배경도 예뻐서 구도가 잘 나왔다. 사진을 찍자 그가 자연스레 핸드폰을 보며 웃었다. 확실히 어떻게 하면 사진에 잘 나오는지 알았다. 찍은 사진을 이서에게 보내 줄 때였다.

“어? 형.”

남자 한 명이 둘이 있는 자리 쪽을 기웃대다가 이서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이서가 눈썹을 들어 올리며 그쪽을 돌아보았다.

“응, 영운이 안녕.”

“와, 종강하고 처음 보네요. 저 친구 올 때까지 잠깐만 앉아 있다 가도 돼요?”

“네, 앉으세요.”

청우가 먼저 나서서 의자를 가리키자 남자가 고맙다고 인사하며 자리에 앉았다. 이서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는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합석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그의 표정이 빤히 읽히는 게 재미있었다. 이서가 정말 괜찮냐는 듯 자신을 돌아보았으나 어차피 잠깐이니 상관없었다.

“같은 과 후배.”

“안녕하세요. 오, 샌드위치도 팔아요? 맛있어요?”

“응, 맛있어.”

“여기 괜찮네요. 형은 진짜 모르는 데가 없네.”

후배의 말에 이서가 어깨를 으쓱였다. 둘의 대화를 들으며 샌드위치를 먹는데 정강이 안쪽을 발끝이 살살 훑었다. 청우는 움찔하며 다리를 뒤로 치웠고, 이서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아닌 척 윙크했다.

“잘 지냈어? 이쪽엔 뭐 볼일 있어서 온 거야?”

“저 계절 학기 듣잖아요. 형은 올해 휴학이죠?”

“아니?”

“그래요? 형 일 년 휴학하고 해외여행 다닐 거라면서요.”

처음 듣는 얘기에 샌드위치를 내려놓고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이서가 청우를 흘깃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냥 해 본 말이었지.”

“아아. 전 형 진짜 휴학할 줄 알았어요. 그때 계획이 완전 구체적이었잖아요.”

일 년이나 휴학할 생각이었다니 놀라웠다. 한 번도 이야기를 한 적이 없어서 그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서는 별것 아니라는 듯 반응했다.

“계획은 누가 못 세워. 너 전화 왔다.”

“어? 왔나 보다. 저 먼저 일어날게요. 나중에 밥이나 한 끼 해요.”

“그래, 잘 가.”

후배가 자리를 뜨고 나서 눈이 마주쳤지만 이서는 별다른 설명을 해 주지 않았다. 때문에 청우가 먼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휴학하려고 했어?”

“예전 얘기야.”

“왜 안 해?”

“음? 네가 있는데 어딜 가.”

일 년이나 휴학을 할 생각이었다면 그만큼 기대하는 바가 크고 계획했던 것도 있었을 테다. 그런데 자신 때문에 그런 일정을 통째로 뒤집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쓰였다.

“왜. 너 하려던 대로 해.”

청우가 던진 말에 이서의 낯에 금이 갔다.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나 하려던 대로 하라고? 넌 나 일 년이나 못 볼 자신 있어?”

아. 그건 아니었다. 청우는 고개를 퍼뜩 저었다.

“그렇게 길게는 좀 그렇고. 육 개월, 아니 삼 개월…….”

생각해 두었던 기간을 이렇게 줄이는 게 의미가 있나 싶었다. 그리고 막상 입 밖으로 내뱉고 나니 삼 개월도 굉장히 길게 느껴져 선뜻 괜찮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시원하게 말하지 못하고 우물거리자 이서가 웃었다.

“안 되겠지?”

“그래도……. 나 때문에 포기하는 건 좀 그렇지.”

“왜 너 때문에 포기한다고 생각해. 네 덕분에 내가 여기에 발붙인다는 생각은 안 해?”

“…….”

“내가 여기저기 다니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예전에는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했으니까.”

청우는 고개를 주억였다. 이서의 말을 들으니 이해가 가면서도, 네가 얼마나 가 있든 널 기다리겠다는 말이나 나도 휴학을 할 테니 같이 가자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아 마음이 불편했다. 따로 노는 이성과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테이블 한구석을 가만 바라보는데, 이서가 손가락을 부딪쳐 딱 소리를 냈다. 눈을 들자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내기할까?”

“뭐?”

“우리가 일주일 동안 안 볼 수 있는지.”

“……그런 내기를 왜 하는데?”

“안 하면 네가 계속 신경 쓸 것 같아서.”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게 왜 내기라는 흐름으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이서가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말을 이었다.

“여행 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넌 지금 과외 때문에 시간 오래 못 빼잖아. 나 혼자 일주일 정도 돌아다닐게. 그러고 나면 우리 그렇게 오래 못 볼 수 없다는 거 인정하게 될 거야. 포기가 아니라, 최선인 거지.”

이서의 말을 곱씹으면서도 그렇게 할 만한 일인지에 대한 확신이 생기지 않았다. 사실상 길게 여행을 갈 기회는 앞으로 많지 않을 터였다. 그것을 떨어질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놓치면 언젠가 후회로 남지 않을까. 하지만 연애 초반에 장기간 헤어져 있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닌 듯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그러나 청우의 머릿속과는 달리 이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낯으로 웃었다.

“도착했어?”

[응. 보여?]

잎을 떨군 큰 버드나무 뒤로 얼어붙은 늪의 전경이 보였다. 얼마 전 강한 한파가 찾아와 물이 언 모양이었다. 겨울이 아니었으면 풍경이 더 예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카메라 모드를 바꾸었는지 이서의 얼굴이 담겼다.

영상 통화는 해 본 적이 거의 없는지라 핸드폰 속에 제 얼굴이 작게 뜨는 게 어색했다. 이서는 제 얼굴과 풍경이 화면에 함께 잘 담기도록 각도를 조정하더니 손을 흔들었다.

[과외 가?]

“응, 이따가.”

[날 춥다. 따뜻하게 입고 나가.]

“어. 거긴 좀 괜찮아?”

[서울보단 나아.]

“다음엔 어디 가?”

이서의 일정을 들으며 청우는 그의 얼굴을 훑었다. 이렇게 핸드폰을 통해 보니 평소와는 느낌이 조금 달랐다. 무슨 차이일까 고민하는 사이 이서가 말을 멈추더니 씩 웃었다.

[왜? 나 벌써 보고 싶어?]

이서는 떨어져 있는 일주일 동안 참지 못하고 먼저 만나자고 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고 말했다. 지는 사람이 이긴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는데, 솔직히 일주일 정도면 그리 못 참을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혼자 여행을 떠난 이서를 보니 같이 가고 싶은 욕구가 불쑥 솟았다.

“혼자 재밌냐?”

[재밌을 리가. 옆구리 시려.]

“그래도 이왕 간 거 재밌게 놀아.”

[네에.]

통화를 마무리하고 나자 남은 정적이 크게 느껴졌다. 아, 벌써 보고 싶네. 청우는 제가 하고도 어이가 없는 생각에 헛웃음을 흘리며 밖으로 나왔다.

과외 학생 집에 도착해 수업을 하다 보니 갑자기 밀려왔던 감정은 어느새 옅어졌다. 과외 때문에 이서와 함께 가지 못한 것이었으나 그래도 이게 있어서 그나마 시간은 빨리 갈 듯싶었다.

“쌔앰.”

“응.”

“여자 친구 얘기 해 주세요.”

채점을 하는 동안 은정이 책상 위로 엎어졌다. 대학이나 입시, 공부 관련해서 물어본다면 해 줄 이야기가 참 많았는데, 저한테 궁금한 게 연애 화제밖에 없는 모양이다.

“여행 갔어.”

“친구들이랑요?”

“아니, 혼자.”

“쌤 두고요?”

“응.”

“왜요?”

“선생님은 수업해야 되잖아.”

“저 때문에?”

“너 때문은 아니지.”

청우는 웃는 반면 은정은 심각한 낯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틀린 개수를 보아하니 심각한 건 이쪽인데도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쌤, 그러다 소박맞아요.”

“괜찮아.”

“가끔은 일보다는 사랑을 선택하는 모습도 보여 줘야 한다구요.”

“그래.”

“조심하세요. 쌤같이 무뚝뚝한 사람이 딱 차이기 좋은 성격이에요.”

은정의 말을 흘려들으며 웃음을 삼켰다. 그런 이유로 차일 거였으면 시작도 못 하지 않았을까. 이미 서로가 많이 다른 걸 알고 있기에 성격 차이로 인한 이별은 정말 상상도 안 되었다. 하지만 타인의 눈에도 단점으로 여겨질 수 있는 부분은 신경 쓰는 게 맞을 테다.

그렇게 가라고 해서 서운했으려나. 하지만 청우는 앞으로 둘이 함께할 긴 시간을 생각했다.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이서가 지금의 시간을 위해 무언가를 놓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어렵더라도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쥐여 주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자, 이제 이거 봐.”

다시 수업 모드로 돌입하자 은정은 다행히도 집중했다. 청우는 남은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진도를 마친 다음 집을 나왔다.

제 집으로 돌아와 밀린 청소와 빨래를 하고 나니 시간이 훅 지나갔다. 저녁 먹을 시간이 되어 밥을 지어 먹고 나서 소파에 앉았다. 평소 같았으면 이서를 불러 노닥거리거나 했을 텐데, 혼자 있는 시간이 허전하게 다가왔다. 매일 같이 있던 게 아니었는데도 그가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니 괜히 빈자리가 느껴지는 듯싶었다.

핸드폰을 들어 지도를 켠 다음 이서가 지금 있는 곳과 자신의 거리를 계산해 보았다. 머네. 생각하다가 전화를 걸자 얼마 안 되어 그가 받았다.

[네.]

“뭐 해?”

[나 지금 숙소 도착했어.]

“저녁은.”

[이제 먹어야지.]

“맛있는 거 먹어.”

[응. 졸복탕 먹으려고.]

통화하면서 이서가 사진을 보내 주었다. 혼자서도 잘 찍은 사진을 보니 꼭 그곳의 향이 밀려 들어오는 듯했다. 문득 이 배경이 국내가 아닌 해외면 어떨까 생각해 보다가 입을 열었다.

“보고 싶어.”

[응?]

“보고 싶다고.”

얼굴이 보이지 않는 음성 통화인지라 이런 말을 더 쉽게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조금 낯간지러워 이마를 긁적이는데, 당황했는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이서가 웃음을 흘렸다.

[뭐야. 하루도 안 지났는데 이건 반칙이지. 나 빨리 오라고 그러는 거야?]

“아니. 오늘 은정이한테 들은 말인데, 나같이 무뚝뚝한 성격은 차일 거래.”

[내가 널 찰 것 같아서?]

“안 그러겠지. 근데 그냥……. 솔직하게 말해 보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고작 일주일이고, 문제가 있어서 떨어져 있기로 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잠깐의 공백에 어떤 서운함도 없었으면 했다. 네가 없어도 난 잘 지낸다고 어필하는 것보다는 조금 쑥스럽더라도 느끼는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면 이 시간도 의미를 남기지 않을까.

[아……. 은정이가 널 잘 몰라서 다행이야.]

“뭘?”

[널 알았다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걸.]

유난히 간지럽게 들리는 목소리에 귓불을 매만졌다. 이서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와 함께했던 시간 속의 기억이 쌓여 이서의 얼굴을 만들어 냈지만, 실제로 보면 이보다 더 생생할 터였다.

[나도.]

“어?”

[나도 보고 싶어.]

청우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몸을 뒤로 누였다. 이런 상투적인 말이 가슴을 날뛰게 한다는 건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가슴께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나 아까 휴게소에서 뭐 촬영하는 거 봤는데.]

“뭐?”

이서가 해 주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눈이 꾸벅꾸벅 감겼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게 흘러나와 귓가를 다정하게 감쌌다. 눈을 감은 채 반응하는데 웃음소리가 들렸다.

[졸려?]

“응…….”

[자.]

“너 저녁 먹어라.”

[알았어.]

하루가 이렇게 가는구나 싶었다. 전화를 끊지 않고 숨만 내쉬는데 이서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잠으로 빠져들 때 옅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걸 마지막으로 청우는 핸드폰을 손에서 완전히 내려놓았다.

“야, 여기.”

청우는 오랜만에 보는 동창의 얼굴에 걸음을 서둘러 자리로 향했다. 그가 앉자마자 우중이 메뉴판을 펼쳤다.

“일단 빨리 시키자. 배고프다.”

“그래, 너 먹고 싶은 걸로 시켜.”

“비싼 거 시킨다?”

“어.”

상관없다는 태도에 우중이 청우를 흘깃 보고선 픽 웃었다. 일전에 스키장에 같이 가겠다는 약속을 깬 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술을 한번 사겠다고 했는데 드디어 일정이 맞았다. 보통은 동창들끼리 다 같이 만나는지라 이렇게 단둘이 보는 일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주문을 하고 난 뒤에 바로 직원이 가지고 온 생맥주를 들이켰다. 차가운 것을 시원하게 넘기고 나자 머리가 맑아지는 듯했다.

“뭐 하다 나왔냐.”

“과외 하는 거 자료 정리.”

“할 만해? 요즘 애들 말 안 듣는다던데.”

“나 스무 살 때 과외 하던 애들도 그때는 요즘 애들이었는데, 지금은 다 성인 됐어.”

“하긴 우리도 요즘 애들 소리 맨날 들었지.”

만날 때면 늘 꺼내 놓게 되는 추억을 가지고 한바탕 이야기를 벌이다 보니 어느새 안주가 나왔다. 갓 튀겨져 나온 치킨이 맛있는 냄새를 풍겼다. 둘은 맥주잔을 부딪쳐 건배한 다음 닭으로 배를 채웠다.

배가 많이 고팠는지 말없이 치킨을 흡입하는 우중을 보다가 청우는 슬쩍 물었다.

“너 여자 친구랑은 잘 지내?”

“응.”

우중은 신입생 때 같은 학교에서 만난 여자 친구와 현재 장거리 연애 중이었다. 여자 친구가 중간에 캐나다 교환 학생으로 가면서 일 년 넘게 떨어진 상황이었다.

“괜찮아?”

“뭐, 이젠 할 만하지.”

처음에는 이 건으로 갈등이 있는 듯 보였으나 결국에는 풀고 지금까지 잘 지내는 중이었다. 여러모로 쉽지 않을 텐데 둘 다 대단하다 싶었다. 자신은 지금 고작 사흘 이서를 못 보았을 뿐인데 참기가 힘들었다. 시차가 나는 것도 아니라 언제든지 전화할 수 있는데, 만약 해외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뭐가 제일 힘드냐.”

“음……. 실시간으로 동기화가 안 되는 거?”

“동기화?”

“내 고민, 걱정, 감정, 상황 다 그때그때 털어놓을 수가 없잖아. 시차도 그렇지만 걔도 거기서 힘들 텐데 짐 얹어 주기 싫고.”

청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낸다는 말과는 별개로 생각하면 심란해지는지 우중이 한숨을 내쉬었다. 둘은 다시 건배하고 나서 잔을 비웠다.

확실히 일 년은 무리지. 육 개월도 좀……. 삼 개월은……. 이서가 가지 않겠다는데 자신이 이런 고민을 하는 것도 우스웠다. 고집이 세다는 그의 말이 틀리지는 않은가 보다. 포기가 아닌 최선. 청우는 이서의 말을 곱씹었다.

“너는 산영이랑 괜찮냐?”

“어?”

“싸웠어?”

갑작스럽지만 언급되는 게 이상하지도 않은 이름에 청우는 그저 웃음을 흘렸다.

“싸우긴.”

“그럼 뭔데. 스키장도 안 가고, 산영이랑 그때 만났을 때 들으니까 너랑 안 본 지도 꽤 된 것 같던데. 단톡방에 말도 없고.”

옆에서 늘 지켜봐 왔던 우중이 보기에는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청우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뗐다.

“나 애인 생겼어.”

“뭐?”

“그래서 좀 바쁘다. 알잖아, 나 처음인 거.”

“허어…….”

우중이 입을 벙긋대더니 왜 그런 좋은 소식을 이제야 알리냐며 타박했다. 사실 이렇게 빨리 말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굳이 숨기고 싶지 않기도 했고, 아주 나중에 생길 수도 있는 일을 떠올려 보았을 때 미리 언질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뭐야, 너도 그럼 우정보다 사랑이었다 이거냐?”

“무슨.”

“어쨌든 축하한다, 야. 너도 드디어 네 사람을 찾았구나.”

산영을 제외하고 축하를 받는 일은 처음이었다. 청우는 웃으면서 맥주를 들이켰다.

“잘됐네. 난 이제 와서 말하지만 너랑 산영이 사귀는 건가 했어. 워낙 붙어 다녀서.”

“뭐?”

“아니었나 보네.”

“당연히 아니지. 산영이는 애인 있잖아.”

“그러게 말이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치킨을 집어 먹는 척 표정을 가다듬었다. 오해가 풀려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을 이상한 시선으로 보거나 멀리하지 않아 주어 고마웠다. 언젠가 이서를 소개해 줄 날이 온다면 그의 포용을 조금은 기대해 봐도 괜찮지 않을까.

“뭐 더 안 먹을래?”

“뭐. 너 먹고 싶으면 시키든지.”

메뉴판을 가져와 우중이 좋아하는 것을 더 시키자 그가 기껏 과외 해서 번 돈을 술자리에서 다 거덜 낼 생각이냐며 핀잔을 주었다. 둘은 주거니 받거니 하며 그간 쌓인 이야기를 풀어내다 시간이 늦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 또 보자.”

“그래, 잘 가라.”

우중과 헤어지고 나니 기분 좋은 취기가 몸을 휩쌌다. 택시에 올라타 핸드폰을 꺼내 들자 이서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가 보였다. 집에 도착해 전화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시트에 몸을 묻었다.

달이 선명하게 떠오른 밤이었다. 이서도 저 하늘을 보았을까. 술을 마셔서 그런지 그리움이 물씬 밀려왔다. 단순히 얼굴을 보며 통화하는 것 말고, 그의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손끝이 닿을 때의 간지러움과 키스할 때 흘러나오는 따뜻한 숨결 같은 것들.

집에 도착해 씻고 나서 침대에 오른 청우는 이서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얼마 안 되어 핸드폰에 이서의 얼굴이 떴는데, 그도 침대 위인지 배경이 비슷했다.

[지금 왔어?]

“어, 막 씻었어.”

[술 많이 마셨어?]

“아니. 넌 저녁 먹었고?”

[응. 혼자 먹으니까 맛없더라.]

우는 시늉을 하는 이서를 보자 웃음이 나왔다. 청우는 핸드폰 속에 갇힌 그의 낯을 물끄러미 보았다. 보고 있는데도 보고 싶다는 생각이 짙어진다는 게 영상 통화의 단점이었다.

[나 없이 재밌게 놀았어?]

“재미없었어.”

[오늘따라 립 서비스가 좋은데?]

이서가 씩 웃더니 아래를 흘깃 보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 그가 입고 있던 하얀 가운이 벌어지며 가슴이 조금 더 드러났다. 멀거니 눈을 깜빡이자 그가 은근히 웃으며 물었다.

[너 지금 뭐 입고 있어?]

그 물음에 제 몸을 훑었으나 평범한 차림이었다. 하지만 범상하게 들리지 않는 물음이 어쩐지 몸을 간질거리게 했다.

“보이잖아.”

[아래는 안 보여.]

“그냥 검은색…… 바지.”

[으음.]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팔을 가운의 소매에서 빼냈다. 스르륵 내려가며 상체가 맨몸이 되자 눈을 둘 곳이 없었다. 그의 눈이 이내 예쁘게 기울었다.

[보여 줄까?]

은근한 물음에 차마 고개를 저을 수가 없었다. 가만히 있자 긍정으로 알았는지, 카메라의 각도가 점점 기울면서 얼굴이 위로 사라지고 가슴과 복부, 그 아래 아슬아슬하게 가운에 가려진 곳이 한 번에 담겼다.

“야, 너는…….”

급하게 입을 열었으나 이서는 지금 홀로 호텔에 있었고, 이 영상은 오직 둘만 볼 수 있었다. 이서의 손이 내려와 가운을 헤치자 이미 반쯤 선 성기가 보였다. 이서가 손으로 그것을 쥐고 천천히 훑자 점차 고개를 들었다.

순식간에 낯이 뜨거워졌다. 실제로 볼 때는 자연스럽게 여겨졌던 것이 핸드폰 화면을 통해 보니 다분히 외설적으로 느껴졌다. 조명 때문인지 더 붉게 보이는 것이 이서의 손안에서 쥐어짜였다.

귀두를 문지를 때 엄지손가락을 이용하는 것이나 손끝으로 기둥을 긁듯이 쥐는 것, 위아래로 훑다가 다시 위로 향할 때는 그 움직임이 조금 길어지는 그의 습관이 눈에 확연히 들어왔다. 숨을 죽이며 멍하니 쳐다보는데 카메라가 다시 이서의 몸을 타고 올라갔다.

[침 삼켜.]

청우는 퍼뜩 손을 올려 입가를 닦았다가 아무것도 나오지 않은 걸 확인하고 이서를 흘겼다. 이서가 쿡쿡대며 웃더니 카메라에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그만할까?]

한숨이 절로 나왔다. 벌써 제 아래에도 반응이 오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였다가 들며 핸드폰을 노려보자 이서가 콧잔등을 찡긋하며 웃었다.

“보여 줘.”

나지막한 말 한마디에 이서가 핸드폰을 어딘가에 둔 듯 구도가 바뀌었다. 침대에 기대어 앉아 있는 옆모습이 한 화면에 담겼는데, 얼굴은 딱 눈 아래까지만 드러났다. 그가 고개를 틀어 살짝 숙이자 눈이 보였다.

이서의 눈이 가늘게 휘었다. 그는 곧 손을 움직여 발기한 좆을 다시 훑어 올렸다. 가슴이 콩닥거렸다. 그가 자위하는 모습을 당당하게 보여 주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훔쳐보는 느낌이었다. 해서는 안 되는 부도덕한 짓을 하는 듯한 기분에 이불을 불끈 쥐었다.

성기를 흔들 때 손이 부딪치는 소리 사이로 그가 내쉬는 숨소리가 간간이 섞여 들었다. 이서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젖히면 눈이 앵글 밖으로 나가 볼 수 없어 애가 달았다. 청우는 입술을 꾹 깨물며 제 사타구니로 향하려는 손에 힘을 주었다.

[너도 보여 줘.]

나지막한 말과 함께 이서가 고개를 다시 틀었다. 그러나 여전히 눈은 보이지 않았다. 절로 차오른 숨을 내쉬며 화면을 보고 있는데, 이서가 몸을 기울이더니 손끝으로 카메라를 툭 쳤다.

[응? 보여 주기만 해도 괜찮으니까.]

어딘지 물기가 어린 듯한 목소리가 귓가로 떨어져 배 속을 적셨다. 청우는 욕설을 삼키며 핸드폰을 내려놓고 바지를 벗었다. 차라리 정말 눈앞에 두고 섹스를 하는 거였다면 쉽게 벗었을 텐데, 속옷까지는 쉽지가 않았다. 다시 핸드폰을 들고 하체가 담기도록 슬쩍 내리자, 이서가 웃었다.

[에이, 내 앞에서 그랬으면 찢어 버렸다?]

으름장을 장난스럽게 놓으며 이서가 고개를 숙였다. 웃는 눈을 마주하자 청우는 속절없이 속옷까지 벗어 버리고 말았다.

핸드폰을 들고 정말 아래만 보일 정도로 살짝 내리자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서가 핸드폰을 빤히 쳐다보며 발기한 제 것을 툭툭 쓸어 올렸다.

[아……. 청우야. 뭐 했다고 섰어?]

그 말처럼 성기는 만지지도 않았는데 비스듬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작은 화면 속에서도 이서가 제 몸을 핥듯이 보는 게 또렷하게 느껴졌다. 그가 제 위에서 자신을 어떻게 내려다보는지 알고 있기에 자극을 받은 것처럼 몸이 달아올랐다.

이서의 탄탄한 배가 호흡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하고, 성기를 더 빠르게 훑으면서 그의 콧잔등에 주름이 잡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앞에 있는데 직접 만질 수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보고만 있는 와중에도 배 속이 욱신거렸다. 청우의 좆이 꿈틀거리며 점차 고개를 들었다.

[다리 벌려 봐. 내가 쑤셔 줄 때처럼.]

탁해진 목소리에 다리가 절로 벌어지려고 했다. 청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가 펴며 핸드폰 속 작은 이서에게서 시선을 놓지 않았다.

[아니면, 박고 싶어?]

이서가 짓궂은 소년처럼 웃더니 고개를 젖히며 살 기둥을 빠르게 흔들었다. 얼굴의 반이 앵글을 벗어났으나 방금 그가 지은 미소는 아주 짙은 잔상을 남겼다. 만져 주지 않은 성기가 괴롭게 부풀었다. 단지 시각적인 자극만으로도 좁은 틈새에서 투명한 액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아래가 욱신거리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청우는 끙, 흘러나오는 신음을 삼키며 이서의 작은 움직임마저 좇았다. 다리가 절로 들썩였다. 아래가 배배 꼬이는 감각에 미간을 찌푸렸다.

[하, 읏……. 아, 청우야.]

노란 조명이 은은히 밝히는 그의 몸. 손끝에 닿으면 감촉이 어떤지 아주 잘 알고 있기에 애가 탔다. 이서가 허리를 말고선 거친 신음을 내뱉었다. 절정으로 향해 가는 그의 표정에 집중하고 있을 때, 그가 손을 뻗더니 핸드폰을 들었다.

[네 안에 싸게 해 줘.]

성감으로 잔뜩 고양된 얼굴이 부탁했으나 그건 주문과도 다름없었다. 청우는 혀로 입술을 축이며 다리를 서서히 벌렸다. 핸드폰을 아래로 내리자 이서가 눈가를 찡그리며 웃었다.

이서의 뜨거운 숨결이 제게 닿는 듯했다. 그가 헐떡이며 핸드폰에 눈을 고정했다. 그의 얼굴로 향한 카메라 때문에 아래는 보이지 않았지만 소리로 알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소리가 오히려 더 큰 자극을 가져왔다.

“음…….”

[흣, 으음, 후으…….]

그는 완전한 절정으로 향하고 있었다. 청우는 입술을 깨물며 달아오른 핸드폰을 꽉 쥐었다. 이서의 미간에 잡힌 주름과 코끝을 찡긋하는 버릇, 간혹 다른 곳으로 향하는 시선 모두를 눈에 담았다. 타악, 타악, 탁 이어지던 소리가 작은 욕설과 함께 멎었다.

이서가 눈을 감고 짧게 떨었다. 청우는 숨도 쉬지 않고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그가 눈을 뜬 다음 여운에 젖은 얼굴로 가볍게 윙크했다.

“하.”

청우는 참지 못하고 전화를 끊은 다음 욕실로 향했다. 벽을 짚고 터질 것 같은 성기를 손으로 쥐어 훑었다. 이서가 내던 소리가 제게서도 흘러나왔다.

“하, 아, 읏.”

오래 참은 탓에 가벼운 손길도 큰 자극이 되어 돌아왔다. 부푼 선단을 건드릴 때마다 성감이 예민하게 튀었다. 그를 만지고, 그가 자신을 만져 줄 때를 떠올리며 핏줄이 도드라진 기둥을 보득보득 문질렀다. 안에 싸게 해 달라는 이서의 말과 조금 전 보았던 이서의 모습이 눈앞을 떠나지 않았다. 잔상이 되어 버린 기억이 쾌감을 부추기며 피부 위를 덮쳤다.

“흣……!”

마침내 머릿속이 하얗게 번져 버리며 성기가 정액을 토해 냈다. 청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제 손바닥을 적신 것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짙은 쾌감과는 별개로 아쉬움이 밀려 들어왔다. 이서가 있었다면 서로의 몸을 어루만지며 이 여운을 한껏 즐겼을 터였다. 한숨을 흘리고 나서 고개를 돌리자 거울로 제 모습이 보였다. 문득 멋쩍어져 시선을 피한 뒤 얼른 몸을 씻고 나왔다.

엎어져 있는 핸드폰을 들자 길지 않은 사이 부재중 전화가 세 통이나 와 있었다. 헛웃음을 삼키며 전화를 걸자 이서가 곧장 받았다.

[이럴 거야?]

“뭐가.”

[혼자 뺐어? 나 안 보여 주고?]

“…….”

[돌아가기만 해 봐. 쏙 빼 줄 거야.]

투정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청우는 몸을 누이고 베개에 뺨을 문지르며 웃었다. 몸이 나른한 여운에 젖었다. 그의 목소리가 또 하나의 후희가 되는 듯싶었다.

“일찍 오면 네가 지는 거야.”

[그런 식으로 유도한다?]

“시작은 네가 했다.”

[못 이기겠네, 진짜.]

누가 할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형광등의 빛 때문에 돌아누울 때였다.

[보고 싶다.]

짧은 한마디가 깊은 울림을 남겼다. 이서에게서 터져 나온 그리움이 청우의 귓가를 아득하게 적셨다.

[만지고 싶고, 듣고 싶어.]

이서도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큰 위안이 되었다. 이 순간만큼은 떨어져 있는 이 거리가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청우는 웃으면서, 그에게는 보이지도 않는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고작 며칠의 시간이 우물 속으로 떨어져 바닥을 더 깊게 파냈다. 다시 이서를 만나게 된다면 그 속으로 물이 퍼부어질 테다. 끝없이 헤엄치고 싶은 감정이었다.

길게만 느껴졌던 시간도 어느덧 단 하루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힘들었던 순간들도 언젠가는 지나가기 마련이었다.

내기에 이기기 위해 아득바득 참은 것은 아니었다. 물론 보고 싶었으나 이서가 돌아올 것을 알기에, 그리고 그의 시간을 존중하다 보니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오래 떨어져 있는 건 무리였다. 이서는 잘 알았기에, 제가 느낄 마음의 빚을 떨쳐 주기 위해 이런 제안을 했을 터였다.

이서와의 통화를 마치고 나서 문득 밀려오는 알 수 없는 감정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젓고는 불을 껐다. 이서는 내일까지 제주도에 있다가 모레 올 예정이었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내일을 빨리 맞기 위해 눈을 감는 순간 진동이 울렸다.

「이청아」

자정에 가까운 시간에 걸려 온 전화에 미간을 찌푸렸다. 남매끼리 메시지는 간간이 나누어도 통화를 하는 일은 거의 없었기에 의아한 낯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오빠…….]

“왜. 무슨 일 있어?”

[엄마 다쳐서 지금 응급실이야.]

“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청아가 큰일은 아니라며 금방 안심을 시켜 주었다. 청우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어디를 다치셨는데.”

[넘어져서 얼굴 쪽이 좀 다쳤어. 검사받았는데 다행히 문제없대. 엄마 곧 나오면 집 가려구.]

“아빠는.”

[아빠 지금 출장 중이잖아. 엄마가 말하지 말랬는데 오빠한테라도…….]

“알았어. 일단 갈게.”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종종 집에 갈 때마다 부모님이 나이 드는 게 보여 기분이 이상할 때가 많은데, 넘어져서 다쳤다니 더욱 걱정이었다. 곧장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택시를 탄 뒤에 다행히도 막차를 잡아 집에 갈 수 있었다.

“저 왔어요.”

거실에 발을 디디자마자 보이는 어머니의 얼굴에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광대 한쪽에 멍이 검푸르게 들어 있고, 상처는 물론 얼굴이 부어올랐다.

“엄마, 괜찮아요? 어떻게 넘어졌길래 그렇게 다쳤어요?”

“어우, 별일 아니야. 너는 진짜!”

어머니가 청아를 향해 성을 내자 청아는 내내 시달렸는지 뚱한 낯으로 입술을 비죽였다. 사정을 들어 보니 회식을 마치고 취한 채로 걸어오다가 빙판길에 넘어져 얼굴을 그대로 바닥에 박은 모양이었다.

“이만하면 천만다행이야.”

이 정도 상처로 끝났으면 다행인 일이니 호들갑 떨지 말라며 어머니가 두 남매를 달랬다. 어머니는 곧 피곤하다며 방으로 들어갔고, 청우는 어머니의 잠자리를 봐 드린 후에 나왔다. 거실에 앉아 있는 청아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엄마가 오빠 와서 좋은가 보다. 좀 살아났네.”

“네가 고생했다.”

“나야 뭐 병원 같이 간 거밖에 없는데.”

“그래도. 엄마 당분간 식사 잘 못 할 것 같지?”

“응.”

“아침에 죽 사 와야겠네. 아빠 언제 오신대?”

“내일 낮에.”

한 일도 없는데 기운이 쏙 빠졌다. 청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청아에게 들어가 쉬라고 말했다. 그도 방으로 들어가 침대 위에 눕고선 핸드폰을 들었다.

이서에게 전화를 걸려다가 그만두었다. 이서는 늦게 자는 편이니 시간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으나 그에게 위안을 받으려다가 걱정을 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쨌든 오랜만에 혼자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좋은 추억만 가지고 왔으면 했다.

실시간 동기화가 안 된다는 말이 이런 뜻이리라. 자신이야 큰일도 아니고 어머니가 낫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상황이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일이 있을 때 바로 고민을 나눌 수 없다는 건 꽤 큰 아쉬움일 듯했다. 그건 자신뿐만 아니라 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힘들거나 외롭고 우울할 때 곁에 있어 주고 싶었다. 그러니 오래 떨어져 있을 수는 없었다. 아직 함께한 시간도 길지 않은데 이른 공백이 생기는 건 원치 않았다. 그러니 포기가 아닌 최선인 것이다.

청우는 숨을 내려놓으며 눈을 감았다. 일을 겪고 나니 이서가 더욱 보고 싶어졌다.

눈을 뜨자마자 집을 나서 죽집으로 향했다. 몇 끼 먹을 수 있도록 소분하여 죽을 산 다음 집으로 돌아와 식탁 위를 세팅했다. 청아를 깨우고 나서 곤히 잠든 어머니까지 일으켰다. 약을 먹으려면 일단 배를 채워야 했다.

“이걸 나가서 사 왔어?”

“네.”

“우리 아들 때문에 엄마가 호강하네.”

이런 걸 호강이라고 말하니 겸연쩍어졌다. 어머니가 숟가락을 들기를 기다렸다가 식사를 시작했다. 오랜만에 먹는 죽은 별식 같아 꽤 괜찮았다.

“청우 넌 언제 갈 거야?”

“과외 때문에 오늘 가 봐야 돼요.”

“그래. 애가 말은 잘 들어?”

“네. 착해요.”

“다행이네.”

아버지가 오기 전까지는 있다가 가려고 은정에게 연락해 시간을 조정했다. 어머니는 씹을 때마다 눈가를 찡그려 대기는 했지만 다행히도 그릇을 싹 비웠다.

“아들 나이가 올해 스물다섯인가?”

“네.”

“어휴, 세월이 진짜……. 졸업도 금방이겠다.”

“그쵸.”

“기대된다, 우리 아들 졸업식.”

청우는 웃으면서 요즘 대학교 졸업식은 잘 참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학사모 쓴 청우의 모습은 꼭 봐야겠다고 당부했다.

청아와 함께 집 안을 정리한 다음 아버지를 보고 나서 서울로 돌아왔다. 과외 자료를 정리한 뒤에는 곧바로 은정의 집으로 향했다.

새벽부터 오늘 저녁까지 바삐 움직였더니 과외가 끝나자마자 피로가 우르르 밀려왔다. 집에 도착해 핸드폰을 꺼냈다. 이서에게 연락이 와 있었다. 오늘은 메시지를 잘 나누지도 못했다. 곧장 전화를 걸자 그가 금방 받았다.

[뭐 하다 이제 전화하지요?]

“과외 지금 끝났어.”

[오늘 늦게 했네?]

“응. 집에 갔다 오느라고 시간 좀 조정해서. 오늘 재밌었어?”

[그럭저럭. 확실히 봄에 와야 더 예쁘긴 해.]

드디어 내일이다. 이서가 온다는 생각에 피로가 녹아내렸다. 살면서 이보다 긴 일주일은 이제 없을 것 같았다.

[우리 내기 끝났네.]

“그러게.”

[아쉽다. 아주 무시무시한 소원을 빌려고 했는데.]

“무슨 소원?”

[비밀. 아껴 두고 나중에 빌래.]

퍽 새침한 목소리에 웃음이 나왔다. 들어 보나 마나 저를 곤란에 빠뜨릴 소원일 게 분명했다.

[근데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왜?”

[목소리가 좀 안 좋은 것 같아서.]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피곤하긴 했지만 지금은 기분도 나아졌고,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서는 언제나 한 걸음 먼저 나아가 자신을 살핀다는 게. 가슴이 문득 찡하게 울었다.

“피곤해서 그런가 봐.”

[그래? 나 없어서 슬픈 건 아니고?]

“그것도 있겠지.”

솔직한 말에 이번에는 이서가 웃었다. 귓가로 옅게 흩어지는 그의 웃음소리가 좋았다. 이왕이면 바로 곁에서 듣고 싶었다.

[내일 일찍 갈게.]

“그래.”

얼마간 더 이야기를 나눈 뒤에 전화를 끊자 눌러 담고 있던 그리움이 갑작스레 크게 부풀어 둥실둥실 떠올랐다. 청우는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내일이면, 불과 몇 시간 후면 볼 수 있는데도 이상하게 그 짧은 시간을 참기가 힘들었다. 왜일까. 가슴이 들끓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쉬는데 뜨거운 것이 안으로 가득 들어차는 기분이었다.

이서의 존재를 가까이서 느끼고 싶었다. 그가 내일이면 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달려가 그를 품에 안아 보고 싶었다. 충동이 이리도 수선스럽게 솟구치는 일은 생전 처음이었다. 가슴이 그 충동에 불을 지피며 묵직하게 두근거렸다.

청우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택시를 잡아타며 비행기 표를 예약했다. 마지막 비행기의 출발 시각은 오후 아홉 시 이십 분으로, 부지런히 가면 탈 수 있는 시간이었다.

어두운 밤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공항에 가까워지자 이상하게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청우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달려 바로 탑승 절차를 밟았다.

비행기에 타는 일은 오랜만이었다. 하나둘씩 좌석이 채워지고 기내가 어수선한 소음으로 가득 찼다. 곧 이륙을 안내하는 방송이 흘러나오고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김포 공항의 전경이 점점 멀어졌다. 마음은 계속해서 수런거렸다.

불쑥 웃음이 나왔다. 충동적으로 멀리 떠나는 일은 처음이었다. 여행을 갈 때는 늘 무엇이든 최대한 일찍 예매해 두고 전반적인 일정을 여러 번 점검하곤 했다. 이렇게 갑자기 비행기를 타다니. 물론 제주도는 국내여서 큰 부담은 없었지만 이런 자신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서를 만나기 전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감은 지 얼마 안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착륙에 관한 안내음이 들렸다. 순식간에 제주도에 도착해 버렸다.

한밤이었는데도 공항 안에는 사람이 꽤 많았다. 청우는 공항을 나와 택시에 올라탄 뒤 이서가 묵는다던 호텔을 말했다. 호텔에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두근거렸다. 손을 모은 채 피어오르는 설렘을 내리누를 때였다.

「자기야 나 잠 안 와 ㅠㅠ」

메시지를 보자마자 입꼬리가 한껏 올라갔다. 청우는 뭐라고 말할지 고민하며 손가락을 허공에서 더듬대다가 대화방을 닫았다. 그와 동시에 차가 멈춰 섰다.

“감사합니다.”

야자수에 둘러싸인 채 은은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호텔을 눈에 담았다. 이곳에 이서가 있는 것이다. 로비로 발을 들인 뒤에 전화를 걸자 기다렸다는 듯 그가 곧장 받았다.

“몇 호야?”

[응?]

“너 몇 호에 묵고 있냐고.”

[855호……. 왜?]

“기다려.”

전화를 끊고 나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8층에는 금방 도착했다. 카펫이 깔린 복도를 지나 표지판을 확인하며 부지런히 걸은 청우는 855호에 다다랐다.

숨을 가볍게 내쉬고 벨을 누르자 얼마 안 되어 문이 벌컥 열렸다. 이서는 긴가민가한 낯으로 문을 열었다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일주일 만에 보는 생생한 이서의 모습. 드디어 만났다는 생각에 짜릿해졌다. 청우는 거침없이 발을 들인 뒤에 문을 닫고는 이서에게 달려들어 입을 맞췄다.

“읏…….”

이서가 벽에 등을 대며 청우의 몸을 받쳤다. 그는 당황한 눈치였으나 이내 청우의 키스를 능숙하게 받았다. 혀끝이 닿을 때 느껴지는 따뜻한 숨결과 목덜미를 문지르는 보드라운 손가락. 이런 게 그리웠다. 입술 새로 터지는 청량한 웃음마저도.

짧았던 공백마저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두 남자는 서로를 열렬히 끌어안으며 혀를 맞댔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루어진 만남이기에 반가움은 극에 달했다.

입술이 떨어지고 나서 청우는 이서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아직도 얼떨떨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이서의 뺨을 매만지며 저도 모르게 쌓여 있던 말을 토했다.

“나, 일 년은 무리고 한 학기 정도는 휴학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같이 유럽이든 어디든 가자.”

그래, 사실은 이런 말이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책임감이나 압박감 따위 벗어던지고, 세워 두었던 계획 같은 건 그냥 틀어지도록 둔 채 이서가 원하는 일을 함께하고 싶었다. 너 혼자 보내는 게 아니라 같이 가고 싶었다는 말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던질 수 있기를 바랐던 거다.

이서의 낯이 숨길 수 없는 기쁨으로 번졌다. 이런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가 다시 입술을 붙여 와서 청우는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붙어서서 서로의 몸을 더듬으며 키스하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안으로 들어가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몸을 겹친 채로 입을 진득하게 맞추었다. 입술이 얼얼할 때쯤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치고 웃음이 터졌다. 둘은 입을 쪽쪽 맞춰 대며 옷을 벗었다.

“이렇게 보고 싶어서 어떻게 참았어?”

웃음기가 그득한 시선과 목소리. 자신과 다를 게 없으면서 묻는 말에 그의 목덜미를 지분거렸다.

“못 참고 왔잖아.”

“아까 전화했을 때 오던 길이었어?”

“아니. 전화 끊고 나니까 오고 싶어서.”

“잘 왔어.”

입술을 맞문 채 빨다가 손을 아래로 내려 서로의 성기를 훑었다. 발기한 좆의 감촉과 온도, 모양, 그 모든 게 반가웠다. 느릿하게 쓸어 올리며 달뜬 숨을 내쉬었다. 이서의 몸을 만지고, 그가 자신을 만져 준다는 사실만으로도 쾌감이 쉽게 튀어 올랐다.

표피끼리 맞댄 채 비비다가 선단을 문질렀다. 스며드는 감각이 자극적이었다. 정식으로 연애를 시작하고 나서 이렇게 오래 몸을 나누지 않은 적은 처음이었다. 그간의 공백이 성감 또한 예민하게 만들었다.

그의 몸을 만지고, 숨결을 느끼고, 온도를 나누는 일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손바닥만 한 화면으로는 앞으로도 절대 만족할 수 없을 테다. 차차 상승하는 쾌감과 충만감에 헐떡일 때, 이서가 청우의 어깨를 손으로 밀었다.

“반대로 엎드려 봐.”

“반대?”

“빨아 줄게.”

청우는 숨을 몰아쉬며 잠시 멍하니 이서의 말을 곱씹었다. 자신이 이서의 몸 위에 엎드린 상태인데 몸을 반대로 돌리면 자세가 이상해진다.

“응? 얼른.”

이서가 청우의 엉덩이를 주무르며 재촉했다. 한숨이 나오기는 했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못 할 것도 없다 싶었다. 솔직히 그와 만나면서 이제 이런 건 어느 정도 적응해야 할 것 같았다.

몸을 일으켜 머리가 그의 다리 쪽으로 가게 엎드렸다. 이서의 얼굴에 제 아래를 가져다 댄다는 사실이 거북했으나 눈앞에 서서 흔들리는 성기에 집중하기로 했다. 단단하게 부푼 좆을 매만지는데, 축축한 숨결이 성기에 닿았다. 고개를 틀어 뒤를 돌아보았다. 이서가 입을 벌려 청우의 것을 머금었다.

탄성이 터져 나왔다. 청우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며 제 아래에서 끄떡이는 성기를 물었다. 혀로 틈새를 핥고 둥근 선단을 정성스레 빨았다. 이서가 제 것을 깊게 물 때면 성기를 머금은 입술 새로 신음이 흘렀다.

고개를 숙여 살 기둥을 깊숙이 머금으면 이서의 입에서 제 성기가 빠지고, 입술을 뒤로 물리면 그가 제 것을 깊게 물었다. 시소처럼 왕복하는 애무 속에서 쾌감은 쉬지 않고 돌아쳤다. 허벅지 안쪽이 굳었다가 풀어지기를 반복했다.

“흣, 읍.”

자극이 감당하기 힘들어질 때면 잠시 멈춘 채로 이서의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군살 없이 탄탄한 다리를 매만지자 이서 또한 청우의 다리를 어루만졌다. 그가 허벅지 안쪽을 꼬집듯이 문질러서 순간 허리가 튀었다. 성기가 이서의 입 안으로 덜컥 빠졌다가 올라왔다.

입술을 모아 기둥을 쪽쪽 빨며 손끝으로 음낭을 더듬었다. 이서가 탄성을 흘리며 혓바닥으로 귀두를 끈질기게 애무했다. 침대를 짚고 선 무릎이 잘게 떨려 왔다.

외설적인 소리가 위아래로 흘렀다. 이서의 성기를 빨며 제 것이 빨리자 마치 입 안이 성감대가 된 것만 같았다. 귀두가 입천장을 스칠 때는 어디가 아릿한지 알 수 없게 뜨거운 감각이 온몸을 덮쳤다. 그런 느낌이 계속되자 이서의 좆을 제대로 빨기도 힘들었다. 성기를 문 채로 입술만 오물거리며 숨을 색색 내쉬다가 안 되겠다 싶어 고개를 덜컥 숙였다.

“큽…….”

목구멍까지 차오른 성기를 꾸역꾸역 빨아들이자 이서가 청우의 성기를 뱉어 내며 고개를 젖혔다. 그의 허벅지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선명하게 선 근육을 더듬으며 숨을 들이마시듯 흡입하자 이서의 다리가 반짝 튀었다.

“후으, 읏.”

이서가 청우의 다리를 움켜쥐고선 허리를 들썩였다. 곧 거친 신음과 함께 입 안 깊숙이 정액이 떨어졌다. 그리 좋지는 못한 식감에 고개를 물리는 찰나, 이서가 다시 청우의 성기를 물고 강하게 빨아들였다.

“윽!”

순간 가해진 자극에 이서의 성기를 황급히 뱉어 내는 과정에서 저도 모르게 입 안에 든 것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큽, 크읏, 아……!”

이서는 기침하는 청우의 성기를 놓지 않고 입 속으로 거세게 당겼다. 아래가 빨려 나갈 것 같으면서도 녹아내리는 듯한 황홀한 쾌감에 상체가 무너졌다. 결국 이서의 복부에 이마를 비비며 크게 부푼 열락을 쏟아 냈다.

이서가 사정한 청우의 좆을 입술로 느릿하게 문질렀다. 자극이 날카롭게 느껴져 기운을 쥐어짜 몸을 일으켰다. 뒤를 돌아보자 그가 혀를 내밀었다. 붉은 혀에 흰 정액이 얹혀 있었다. 흐트러진 낯으로 제 정액을 머금고 있는 걸 보자 목덜미가 달아올랐다. 뱉으라고 말하려는 순간, 혀가 쏙 들어가더니 그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야…….”

그가 혀로 입꼬리를 핥고 나서 씩 웃더니 일어나 청우의 입술을 문질렀다.

“내 거 맛있었어?”

“바로 넘어가서…….”

입맛을 다시듯 입을 다물었다가 떼는데 넘어간 정액의 맛이 느껴졌다. 썩 좋다고는 하지 못할 맛이었으나 되새기자 배 속이 욱신거렸다. 청우가 느낀 것을 눈치챘는지 이서가 얄밉게 어깨를 으쓱이더니 청우에게 달려들어 그를 눕혔다.

“나 얼마나 생각했어?”

“……매일. 넌?”

“종일.”

이서는 고개를 숙여 청우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종일. 그 단어가 가슴을 쥐고 흔들었다. 그래도 혼자만의 여행이 쓸쓸했던 것만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청우는 제 온몸에 키스를 퍼붓는 이서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아래로 내려온 이서가 청우의 다리를 벌리고 음낭을 핥아 올렸다. 청우는 탄성을 흘리며 벌어진 허벅지가 오므라들지 않게 붙잡았다. 자신을 전부 드러내는 자세가 이제는 수치스럽지 않았다.

그가 회음에 코를 박고 다물린 틈을 핥았다. 촉촉한 살덩이가 끈덕지게 입구를 문질렀다. 젖은 구멍이 옴찔거리며 이물질의 침입을 반겼다. 혀끝이 안을 뚫고 들어왔을 때는 기대감으로 복부에 힘이 들어갔다. 다가올 느낌을 알기에 성감이 더 고조되는 듯했다. 확실히 아무것도 몰랐을 때보다 몸을 섞으면 섞을수록 쾌감이 커져 갔다.

“하아…….”

혀가 내벽 곳곳을 부드럽게 쑤셨다. 이전보다 더 잘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서 더 잘할 수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간질간질하면서도 아래서부터 위까지 바짝 조여 오는 느낌이 체온을 점점 상승시켰다. 유독 애가 타는 기분에 손을 아래로 내려 발기한 좆을 쥐고 문질렀다.

아래에서 연신 쩝쩝거리는 소리가 났다. 코끝이 회음에 비벼지거나 음낭을 툭툭 칠 때마다 청우는 움찔거리며 헐떡였다. 이서를 보고 있지 않은데도 그가 어떤 식으로 제 아래를 핥고 있는지 눈앞으로 그려지는 듯해 자극이 더욱 타올랐다.

“흣, 아.”

젖어서 축축해진 입구가 자꾸만 발롱거렸다. 본의 아니게 혀를 조였다가 풀 때마다 목덜미가 화끈해졌다. 허리께가 콕콕콕 쑤시는 듯한 쾌감이 거미줄처럼 촘촘히 퍼지며 온몸을 녹였다.

“이제, 그만…….”

다리를 좁히려고 했으나 이서가 허벅지를 우악스레 쥐어 벌리고는 혀를 더 깊숙이 처넣었다. 내벽을 쑤시는 살덩이가 보다 노골적으로 느껴져 허리가 튀었다.

“이제, 안 해도 돼.”

“내가 반성했다니까?”

이서가 혀를 쏙 빼내더니 입구 주변을 살살 핥아 댔다. 자극에 익숙해진 살결은 가벼운 애무마저도 큰 쾌감으로 받아들였다. 청우는 미간을 찡그린 채 이서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잘 풀어 줬다고 생각해도 정작 넣으면 힘들더라고. 내가 느낀 바가 커.”

“너, 저번에는 안 그랬잖아.”

“그땐 젤이 있었고.”

그가 눈을 찡긋하고는 둔부에 다시 입술을 묻었다. 사그라들 뻔했던 열기가 다시 지펴지며 피부를 지글지글 익히는 듯했다. 아래가 빨리면 빨릴수록 사정하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하체를 들썩이며 움찔거릴 때였다. 돌연 손가락 두 개가 한 번에 들어와 벌어진 틈을 가득 채웠다.

“아…….”

아득한 충만감에 몸이 아래로 축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이서가 손가락을 앞뒤로 왕복해 내벽을 쑤시며 벌어진 입구를 혀로 핥았다. 동시에 가해지는 자극이 켜켜이 쌓이며 온몸을 무너뜨렸다.

“흐으, 아, 아!”

손가락이 안을 벌려 대다가 갑자기 빠진 뒤에 그 자리를 혀가 채웠다. 감질나는 쾌락에 안달이 날 때면 손가락이 다시 들어와 속살을 거칠게 쑤셔 올렸다. 약해졌다가 도로 강해지며 요동을 치는 쾌감 때문에 절정이 조금 더 빠르게 다가오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입 밖으로 절절 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눈을 돌리면 보이는 것은 이서의 머리통이었다. 나풀거리는 갈색 머리칼을 좇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손가락 하나가 더 치고 들어오며 구멍이 한껏 벌어졌다. 이서의 혀가 손가락 주변을 둥글게 핥았다. 청우의 허리가 순간 발작하듯 튀었다.

“아, 흑!”

갑작스레 머리끝까지 치솟은 희열감에 허벅지 안쪽이 발발 떨렸다. 이서는 때를 놓치지 않고 손가락을 구부려 청우의 쾌감점을 퍽퍽 짓쳤다.

“흡…….”

순간 눈앞이 아득해졌다. 청우는 잘게 떨리는 입술을 벙긋대다가 몸을 늘어뜨렸다. 바짝 선 성기에서 정액이 후드득 튀어나왔다.

청우는 멍하니 천장을 응시하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든 여운이 몸 전체를 덮쳤다. 혀 밑으로 고인 타액을 삼키며 숨을 길게 내쉴 때 이서가 짧게 웃으며 허벅지 사이로 자리를 잡았다.

눈을 아래로 내리자 이서가 완전히 발기한 성기를 손으로 훑고 있는 게 보였다. 청우는 이를 악물고 힘을 줘 몸을 일으켰다.

“왜?”

“이렇게…….”

청우는 이서의 어깨를 눌러 앉히고 그의 허벅지 위로 올라탔다. 이서가 의아해하면서도 흥미로운 낯으로 그를 훑었다.

“이렇게 하고 싶어?”

“어.”

최대한 면적이 많이 닿는 체위로 하고 싶었다. 아직도 허벅지 안쪽이 후들거렸으나 이서의 어깨를 꽉 쥐었다. 이서가 씩 웃으며 청우의 뺨에 입을 맞췄다.

“아이, 예쁘다.”

이서는 청우의 허리를 문질러 주며 그를 잠시 기다려 주었다. 오르가슴의 부스러기가 사라졌을 때 청우는 하체를 들고 이서의 성기를 쥐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그의 좆을 품은 채로 내려 앉았다.

젤을 쓸 때보다는 버거웠지만 전희가 충분했기에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이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몸이 조금 더 쉽게 열린 듯한 감각. 청우는 기쁜 숨을 터뜨리며 그의 성기를 완전히 품었다.

둘의 입에서 만족스러운 탄성이 흘러나왔다. 서로를 온전히 안자마자 그들은 눈을 마주하다가 입술을 맞췄다. 달콤하게 혀를 섞은 뒤 떨어지고선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하, 음…….”

“아, 좋아.”

이서가 청우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가 뗐다. 상기된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손을 어깨 뒤로 넘겨 검은 새를 문질렀다. 이서의 콧잔등에 주름이 잡혔다.

청우는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면서 이서의 좆을 조였다. 속살이 꿈틀대며 안에 든 것을 주무르는 듯한 느낌이 오랜만이었다. 이서가 아래를 쳐올리자 이미 끝까지 들어온 성기가 더 깊숙이 처박히는 듯해 아찔해졌다.

이서가 청우의 엉덩이 아래를 받치며 그가 천천히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왔다. 반쯤 일어나자 구멍이 잔뜩 벌어지며 성기를 뱉어 냈다. 살 기둥의 가장 굵은 부분이 입구에 걸쳐지자 버거운 느낌에 입술이 열렸다. 이서의 손이 허리와 엉덩이를 차근차근 쓸어내렸고, 청우는 이서의 어깨를 쥔 채로 다시 철퍽 앉았다.

“흣……!”

말랑해진 내벽에 선단이 처박혔다. 쾌감점을 제대로 찌르고 들어온 것에 꼬리뼈가 찡 울렸다. 청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이서가 눈을 치뜬 채 자신을 핥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고개를 숙여 이서의 귓바퀴를 물었다. 손끝으로는 가슴을 더듬으며 허리를 앞뒤로 흔들었다가 엉덩이를 위아래로 쿵쿵 찧었다. 손과 다리, 깊숙한 안까지 전부 맞닿아 있다는 충만감이 미친 듯이 타올랐다.

앞서 두 번 사정을 한 탓인지 성감이 더 예민하게 벼려졌다. 완전히 고꾸라지지 않은 열기가 다시금 고개를 들고서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아흐, 읏, 아!”

“후, 흣, 청우야. 나 봐.”

이서의 말에 내리감긴 눈을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이서가 입술을 맞댔다. 그의 젖꼭지를 꼬집듯이 문지르며 다른 손으로는 어깨뼈를 쓰다듬자 입술 새로 그의 신음이 흘렀다. 이서의 몸이 들썩이고 근육이 단단하게 서는 것으로 그가 느끼는 열락을 알 수 있었다.

이마를 부딪치고 그의 입술을 쪼아 대다가 눈, 코, 입 전부에 키스를 퍼부었다. 이서가 흘린 달뜬 숨이 입가에 닿았다. 그 숨결을 들이마시며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래가 척척 맞물렸다. 둘은 조금의 틈도 허용하기 싫다는 듯 서로의 몸을 붙인 채로 허리 아래를 정신없이 움직였다. 이서의 성기가 내벽을 대중없이 찔러 댔다. 그의 것이 닿는 모든 곳이 성감대가 된 듯했다. 그저 단단하게 부푼 기둥이 왕복하는 것만으로도 눈앞이 어찔해졌다.

“흑, 정이서, 좋아, 아, 아흣!”

끌어안은 이서의 등허리를 손끝으로 긁었다. 이서가 목을 긁는 듯한 신음을 흘리고선 청우의 몸 곳곳을 깨물었다. 가볍게 물었을 뿐인데 치아가 날카롭게 느껴졌다. 청우는 고개를 젖히며 치솟는 쾌감 속에서 바르르 떨었다.

이성이 뚝뚝 끊어지듯 어느 순간부터는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그저 이서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만이 인식될 뿐, 쾌락이 넘실대는 행위에 빨려 들어가듯 몰입했다.

그간의 공백을 보상받으려는 듯 몸이 게걸스럽게 이서를 빨아들였다. 이서 또한 평소보다 거친 소리를 쏟으며 눈가를 잔뜩 구긴 채로 청우의 몸을 안았다.

절정이 다가옴이 느껴졌다. 청우는 헐떡이며 이서의 입에 키스한 뒤 몸을 일으켰다. 아슬아슬하게 입구에 걸쳐진 성기 위로 다시 내려 앉으며 끝까지 머금었다.

“흐으윽…….”

선단이 속살을 퍽 파고들며 손끝, 발끝까지 녹아내리는 감각에 사로잡혔다. 청우는 눈을 질끈 감으며 떨었고, 동시에 사정했다.

희멀건 정액이 이서의 배 위로 떨어졌다. 그것을 멍하니 응시하며 숨을 몰아쉴 때, 이서가 돌연 허리를 쳐올렸다.

“윽!”

몸을 둥글게 말며 이서의 어깨를 쥐었다. 이서는 고개를 틀어 청우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선 사납게 성기를 쑤셔 올렸다. 흐무러진 속살은 꼭 한 껍질 벗겨진 듯이 더욱 예민해졌고, 이서의 좆이 들이닥칠 때마다 복부 전체가 짓눌리는 것처럼 성감이 휘몰아쳤다.

입 밖으로 신음이 채 흘러나오지도 못하고 목구멍을 막았다. 청우는 억억대며 이서에게 매달린 채로 한계 이상의 쾌락을 감내했다. 이서가 청우의 어깨에 이를 박고는 청우 안 깊숙한 곳으로 성기를 짓쳤다.

“하으, 흐…….”

이서의 움직임도 곧 멎었다. 온몸이 진동하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몸이 빙빙 돌며 어딘가에 빨려 들어갔다가 도로 토해지는 듯한 감각 속에서 청우는 고개를 숙여 이서의 머리에 입을 맞추며 눈을 질끈 감았다. 무서울 정도의 쾌감이 소용돌이쳤다.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가 내려앉았다. 두 사람의 거센 숨소리가 침실 안을 울렸다.

이곳이 어디인지도 순간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청우는 눈을 뜨고는 주변을 담았다. 유리창 너머로 이곳의 야경이 얼핏 보였다.

다시 고개를 돌려 이서를 내려다보았다. 반쯤 풀린 눈으로 청우를 응시하던 그가 입술을 벙긋거렸다. 소리 없는 말은 어느 때보다 선명한 울림을 띤 채로 와닿았다.

“나도.”

청우는 그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둘은 한동안 서로에게 기댄 채로 몸을 바짝 붙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청우가 몸을 일으키자 이서가 그를 받쳐 주었고, 청우는 침대 위로 몸을 무너뜨렸다. 이서가 웃는 낯으로 그의 곁에 누우며 콧등을 손가락으로 톡 쳤다.

“소원 말해 봐.”

“소원?”

“내기 네가 이겼잖아.”

“……왜 내가 이긴 거야?”

아직 일주일이 지나지 않았으니 굳이 말하자면 이곳에 먼저 찾아온 자신이 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의아한 낯으로 고개를 기울이자 이서가 코끝을 찡긋했다.

“생각해 봤는데, 먼저 온 사람이 이기는 게 더 좋은 것 같아.”

이서의 손이 청우의 입가를 간질였다. 보드라운 감촉을 느끼던 청우는 그의 손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무승부로 하자.”

이런 일에 누가 이기거나 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서로의 마음은 같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단호한 눈으로 쳐다보자 이서가 씩 웃더니 청우에게 입을 맞추며 그의 다리를 벌렸다. 긴 밤의 시작이었다.

“청우야.”

저를 흔들며 부르는 목소리에 무거운 눈을 뜬 청우는 상쾌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서를 마주했다. 그제야 지난밤의 일이 스쳐 지나가 절로 한숨이 나왔다.

“힘들어?”

“야……. 넌 반성한다더니 사람을 죽여 놓냐.”

“에이, 엄살은.”

반박할 힘도 없었다. 도로 눈을 감자 이서가 실실 웃더니 청우의 몸을 돌려 엎드리게 하고는 그 위로 올라타 허리를 주물러 주었다. 불쑥 느껴지는 통증에 움찔했으나 부드러운 마사지에 몸이 곧 풀어졌다.

허리와 허벅지를 오가는 담백한 안마에 올라오는 탄성을 삼켰다. 안마를 하는 중간중간 이서가 위로 올라와 청우의 뺨에 쪽쪽 입을 맞춰 댔다. 그때마다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조식 먹을래? 아니면 나가서 아침 겸 점심 먹을까?”

“나가서 먹자. 바로 말고……. 여기 밖에 조금 걷다가.”

“그래. 걸을 수 있겠어?”

몸을 일으키려 하자 이서가 청우의 위에서 내려왔다. 상체는 거뜬했으나 발을 바닥에 디디는 순간 꼬리뼈가 찌르르 울리는 듯한 감각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서가 웃더니 청우 앞에 다리를 굽혀 앉았다.

“업어 줄까?”

“됐어…….”

이서의 어깨를 짚고 천천히 일어났다. 아래는 아직 벌어진 듯 홧홧하고 허벅지에 힘이 잘 안 들어갔으나 엉거주춤 몇 번 걷다 보니 다리가 기력을 되찾았다. 섹스보다 높은 강도로 운동을 할 때도 많은데 어째서 후유증은 지금이 더 심한지 알 수 없었다.

“씻고 나오세요.”

이서가 상큼한 목소리로 응원했다. 귀여우면서도 얄미운 감정에 한숨을 흘리며 욕실로 들어갔다. 씻고 나왔을 때는 컨디션이 얼추 돌아온 것도 같았다.

둘은 옷을 챙겨 입고 호텔 밖으로 나왔다. 높게 솟은 야자수 사이로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푸르른 물결이 보였다. 길을 내려가 맑은 바다를 따라 조성된 산책로로 발을 들였다.

바닷바람이 꽤 써늘했으나 공기는 더없이 상쾌하고 맑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뱉으며 겨울 공기를 음미했다.

“어디 가고 싶은 데 있어?”

“글쎄. 한라산?”

“한라산?”

“어, 오늘은 안 되고.”

오늘 한라산에 올라갔다가 오면 가는 도중 다리가 후들거려 주저앉을 게 분명했다. 이서는 한라산이라는 대답 자체가 의외로웠는지 짧게 웃었다.

“내일이나 내일모레 갈까, 그럼. 너 과외 없잖아.”

“응. 근데 너 비행기 표 예약해 둔 거 아니야?”

“취소하면 되지. 느긋하게 즐기다 가자.”

얼마간 걷다가 중간에 마련된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바다가 보이는 방향으로 설치되어 있어 눈앞에서 망망대해를 즐길 수 있었다.

이서가 손을 잡아 왔다. 찬 바람에 얼었던 손끝이 점차 녹아내렸다.

“청우야.”

“응.”

“생각해 봤는데, 방학 때 가도 괜찮지 않을까?”

“어?”

“휴학도 좋지만……. 급하게 결정할 건 아니잖아. 일 년은 길고, 우선 한 학기 다녀 보고 다음 학기에 하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아. 둘 다 내년 하반기 공채 노리면서.”

엄지손가락이 손등을 문질렀다. 이서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방학만 해도 두 달인데 노는 건 충분하고. 꼭 멀리 가지 않아도 되잖아. 난 너랑은 어딜 가든 좋은 거니까.”

“어. 나도……. 너랑 같이 있고 싶어.”

무뚝뚝한 투로 솔직하게 말하자 이서가 웃으면서 청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나 공모전 준비도 하고, 더 빨리……. 내 자리를 만들고 싶은 욕심이 생겼어. 우리 넘을 산이 많잖아.”

이서의 말은 더 먼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청우는 그의 손을 꽉 잡았다. 둘이 함께할 미래를 생각하면 앞으로 많은 대화를 나누며 계획을 차곡차곡 세워야 할 테다. 여행을 가고 싶었던 게 아니라 이서가 원하는 바를 같이하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 것이기에 그의 말에 고개를 주억일 수밖에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들며 청우를 돌아보고는 웃었다. 웃는 그의 눈으로 햇빛이 부서졌다. 저 넓은 바다보다 더 눈이 부신 웃음이었다.

“아, 쌤. 빈손이에요?”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쏟아진 야유에 청우는 의아해하는 낯으로 자리에 앉았다. 가방에서 짐을 꺼내는 동안 은정이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으로 쳐다보다가 지퍼를 닫자 노골적으로 실망한 눈치를 보였다.

“왜?”

“다음 주에 화이트 데이인 거 몰라요?”

“아, 그래?”

“화이트 데이 때 우리 과외 없으니까 오늘 주실 줄 알았죠. 제가 밸런타인데이 때 초콜릿 드렸잖아요!”

청우는 그제야 은정이 밸런타인데이 전에 제게 주었던 초콜릿을 떠올렸다. 판판한 직사각형의 평범한 초콜릿은 그날 이서의 입으로 들어갔다. 어린애가 준 거니 봐주겠다며 제게는 단 한 입도 주지 않고 웃으면서 해치웠던 것이 생각났다.

“미안. 다음 주에 사 올게.”

“저 자두 사탕으로 주세요. 양 많은 걸로 기대할게요?”

“그래.”

“근데 어떻게 화이트 데이인 걸 까먹어요? 여친한테 선물 안 줘요?”

선물? 밸런타인데이도 그냥 지나갔던지라 딱히 챙겨야겠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초콜릿이나 사탕 같은 걸 둘 다 즐겨 먹지도 않고.

“쌤 저한테 고마워해야겠네요. 제가 알려 줬으니까. 이벤트는 무조건 서프라이즈. 알죠?”

연애를 한 번도 해 본 적 없다면서 늘 연애 박사처럼 구는 은정이 눈을 빛냈다. 청우는 가볍게 웃어넘기고는 책을 펴라고 말했다. 언제나 그렇듯 반짝거리던 눈이 순식간에 시무룩해졌다.

과외를 끝내고 나오는 길,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편의점과 마트들이 하나같이 사탕 바구니를 밖에다 내놓고 있었다. 하나 사야 하나. 고민하던 청우는 발걸음을 옮겼다.

학교 근처 카페로 들어서 이서를 찾았다. 이서는 구석진 자리에서 노트북을 앞에 두고 있었다. 과제 때문에 바쁘다더니 열심이었다. 앞자리에 앉자 고개를 든 이서의 낯이 순식간에 미소로 물들었다.

“왔어?”

“응. 뭐 좀 먹었어?”

“아니. 이것만 하고 나가서 밥 먹자.”

“그래.”

이서가 코끝을 찡긋하고는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청우는 주문한 커피를 가지고 와서 턱을 괸 채 그를 응시했다. 집중을 해서 무표정한 낯은 평소와 다른 느낌이었다. 한참을 쳐다보고 있는데 이서의 입꼬리가 삐죽삐죽 올라갔다.

“너무 강렬하게 쳐다보는 거 아니야?”

“아.”

시선을 돌리자 그가 웃음을 흘렸다. 듣기 좋은 소리를 귀에 담으며 카페 안을 둘러보는데 스피커에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청우가 문득 물었다.

“너 근데 첼로 언제 들려줄 거야?”

첼로 연주를 듣고 싶다고 말한 지가 꽤 되었는데 아직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맡겨 둔 것은 아니지만 그가 나중에 들려주겠다고 해서 계속 기다리는 중이었다.

“아직 안 돼. 완벽한 상태에서 들려주고 싶단 말이야.”

“그냥 해도 완벽해.”

“넌 내가 뭘 하든 좋다고 말해서 믿으면 안 되겠어. 나까지 객관성을 잃잖아.”

이서가 과장된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은 진심이었는데 저렇게 말하면 곤란했다. 지그시 쳐다보자 그가 곧 농담이라는 듯 웃었다.

그가 다시 과제에 집중한 틈을 타 또 이리저리 시선을 주는데, 카운터 앞에 놓인 홍보용 배너가 눈에 띄었다. 화이트 데이 기념 케이크를 할인한다는 문구를 확인하고 물었다.

“너 사탕 받고 싶어?”

“응?”

“다음 주에 화이트 데이래.”

남들 다 하는 거 한 번쯤 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터였다. 뭐든 받기를 원한다면 주고 싶기도 했고. 하지만 사탕은 즐기지 않으니 다른 걸 말하면 그걸 줄 생각이었다.

“음……. 글쎄. 직접 만든 거?”

“직접? 사탕을?”

“아니. 그런 거 말고, 손 편지 같은 거.”

“손 편지?”

“응. 그거 줘.”

손 편지라니, 생각도 안 해 본 것이었으나 크게 어렵지도 않았다.

“그거면 돼?”

“응.”

이서가 고개를 산뜻하게 끄덕였다. 그새 기대에 찬 얼굴을 보며 청우는 편지와 함께 무엇을 줄까 고민했다.

편지지는 종류가 참 많았다. 오랜만에 문구점에 들른 청우는 각양각색의 카드, 엽서, 편지지를 앞에 두고 한참을 서 있었다. 편지라고 말했으니 내용을 얼마 적을 수 없는 카드나 엽서는 제외해야 할 테다. 요즘 편지지는 디자인도 참 예쁘게 나왔다. 이것저것 둘러보다가 여름 분위기를 풍기는 편지지를 골라 들었다.

무성한 나무와 노란 해, 그 밑을 뛰어다니는 작은 아이들이 손 그림으로 그려진 편지지였다. 지금은 초봄이지만 이서의 이름을 생각해 보았을 때 이게 좋을 것 같았다.

편지지를 사고 집에 돌아온 청우는 볼펜을 자신 있게 꺼내 들었으나 막상 한 자도 적지 못했다. 고작 손 편지라고 생각했었는데, 정작 이 편지지를 다 채우려니 무슨 내용을 써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매일 얼굴을 보고 있기도 해 딱히 쌓인 말도 없었고.

어릴 때 부모님께 편지를 쓴 이후로는 이런 걸 쓰는 게 처음이기도 했다. 청우는 갑자기 지끈지끈해지는 이마를 문지르며 자신이라면 어떤 편지를 받고 싶은지 생각해 보았다. 미사여구가 붙은 문장이나 의례적인 인사보다는 솔직한 마음을 보고 싶을 테다.

부담감을 내려놓고 펜을 움직였다. 한 줄 한 줄씩 이어 가며 편지지를 가득 채운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속한 시각이 다 되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 듯했다. 꽃집으로 가 예약해 둔 꽃다발을 가져왔다. 하얀 안개꽃과 분홍색 장미꽃이 섞인 다발에 미리 사 두었던 노란색 레몬 사탕을 꽂았다. 향기로운 꽃 사이로 알알이 꽂힌 사탕이 생각보다 꽤 잘 어우러졌다.

이서와는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자기가 잘 아는 카페라고 하던데, 청우는 처음 가 보는 곳이었다. 일이 있어 어디를 들렀다가 온다더니 그 탓인지 연락이 없었다.

지도를 보고 찾은 카페는 지하 1층에 있었다. 좁은 계단을 내려가 문을 열고 들어간 청우는 텅 빈 카페를 보고 멈칫했다. 카운터에는 사람이 없었고, 단 하나의 테이블과 의자를 제외하면 다른 것들은 전부 옆으로 밀려난 채였다. 카페 가장 안쪽에 자리한 무대에는 의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인 채로 조명을 받고 있었다.

이게 뭐지? 들어가도 되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며 조심스레 발을 뗄 때였다. 무대 안쪽에서 문이 열리고 이서가 나왔다.

“어…….”

까만 머리의 이서가 슈트를 입고 첼로를 든 채 무대 가운데로 걸어왔다. 꿈속에서나 펼쳐질 듯한 모습에 멍하니 눈으로만 좇자, 그가 입꼬리를 부드럽게 끌어 올리면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정이서 단독 연주회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여러분이라고 했지만 관객은 저 혼자였다. 청우는 이제야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어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완벽해야 한다고 염불을 외더니, 이걸 준비하고 있었나 보다. 카페를 통째로 빌린 걸까? 스케일이 커도 너무 컸다.

“앉으세요.”

이서가 카페 가운데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진짜 못 당하겠다. 청우는 유쾌한 기분으로 고개를 저으며 자리로 가 앉았다. 그러자 이서 또한 무대 위 의자에 자리를 잡고 활을 들었다.

연주를 하려는지 자세를 취한 이서의 손이 순간 떨렸다. 그가 이내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아, 떨리네?”

어울리지 않게 긴장을 한 모양이다. 그런 모습이 퍽 귀여우면서도 덩달아 가슴이 뛰어 청우는 꽃다발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손을 맞잡았다.

이서가 몇 번 숨을 내쉬더니 곧 활을 움직였다. 선율이 흐르자마자 청우는 탄성을 삼켰다. 아는 곡이었다. 제목은 모르지만 자주 들어 봤을 정도로 유명한 곡이었다.

지판을 짚은 왼 손가락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활이 각도를 달리하며 현을 긁었고, 이서의 고개와 팔이 리드미컬하게 흔들렸다. 처음에는 긴장한 듯 경직되어 보였던 낯이 점점 부드럽게 풀어졌다. 눈을 내리뜬 채 연주에 집중하는 이서의 모습에 허벅지 안쪽이 짜릿할 정도로 좋았다.

이쪽에는 문외한이지만 이렇게 능숙하게 연주하기 위해 얼마나 연습했을지 모를 수가 없었다. 개강 때문에 바빴을 텐데 언제 혼자 연습했던 걸까. 제게 보여 주고 들려주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 와닿아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보다 더한 선물은 없을 터였다. 이서가 제게 선사하는 최고의 선물을 청우는 온전히 집중하며 음미했다. 연주를 하는 도중 살짝 입꼬리가 올라간 낯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얼굴. 그는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아주 자유로워 보였다. 그러나 이제는 사라질 것만 같은 조마조마함은 없었다. 흐르는 음에 맞추어 가슴이 뛰었다.

길지 않은 연주가 끝이 나고, 활이 첼로를 떠났지만 멜로디는 진동과 함께 여운을 남겼다. 청우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힘찬 박수를 보냈다. 눈을 들고 청우를 마주한 이서가 장난스럽게 고개를 꾸벅였다.

곧 이서가 다시 자세를 취하고 다음 연주를 시작했다. 이전 곡보다는 무거웠지만 이서의 손은 더욱 가벼워진 듯 날아다녔다. 그는 청우와 눈을 마주하며 연주하는 여유까지 보였다. 청우도 중간중간 사진을 찍으며 이서의 작은 연주회를 편하게 즐겼다.

준비한 모든 곡이 끝났는지 이서가 첼로를 놓고 일어났다. 청우는 꽃다발을 든 채 무대 위로 성큼 올라갔다. 그의 품에 꽃다발을 안기고서 그를 끌어안았다.

“고맙다. 진짜 좋았어.”

“마음에 들었어?”

“마음에 든다는 말 정도로는 다 못 담아.”

솔직한 감상에 이서가 웃으면서 청우의 목덜미에 뺨을 비볐다. 그는 이내 몸을 떼어 내고 꽃다발에 코를 묻었다.

“향 좋다.”

“나는 이거밖에 준비 못 했는데.”

“충분해. 아직 줄 거 남았잖아?”

이서가 한쪽 눈을 찡긋하고선 청우를 데리고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가 말하는 남은 것이란 제 편지였다. 최고의 연주를 듣고 나서 편지를 주려니 겸연쩍었다. 그러나 이서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아서 어쩔 수 없이 편지를 꺼냈다.

“와아.”

이서가 반색하며 편지를 받아 들더니 곧장 봉투를 뜯었다. 청우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이서의 손목을 붙잡았다.

“여기서 읽게?”

“응. 왜?”

“혼자 있을 때 읽어.”

“싫어. 지금 읽을래.”

이서가 얄밉게 손을 빼내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하고자 한다면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청우는 한숨을 내쉬며 팔을 물리고 다른 곳을 보았다. 그사이 이서는 빠른 손놀림으로 편지지를 꺼내 펼쳤다.

차라리 안 보는 게 낫다 싶으면서도 궁금해서 자꾸만 시선이 돌아갔다. 이서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로 편지를 읽어 나갔다. 가슴이 날뛰어서 주먹을 쥐었다가 펴야 했다. 이서가 편지 내용을 마음에 들어 할지 궁금해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그는 편지를 중간까지 읽다가 돌연 접어 버렸다.

“……아, 그냥 나중에 혼자 있을 때 읽을래.”

“왜?”

“눈물 날 것 같아서.”

눈물이 날 것 같다니……. 그렇게 감동적인 내용은 아니었는데. 괜스레 머쓱해졌다.

“나면 좀 어떠냐.”

“자기야. 좀 더 로맨틱하게 말해 줘.”

“눈물 나면……. 안아 줄게.”

우는 모습을 보여 주기가 싫은 거라면 제게 안긴 채로 눈물을 쏟으면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자신은 그의 눈물을 보지 않으면서도 그의 곁에 있어 줄 수 있을 테니까.

명쾌하고 따뜻한 해답에 이서의 눈가가 웃음으로 허물어졌다. 그는 이내 청우의 품에 안겼다. 우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청우는 그의 등을 부드럽게 도닥였다. 이토록 기억에 남는 화이트 데이는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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