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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12/16)

에필로그

별장에 들렀다 온다던 건과 연락이 되지 않았다. 벌써 세 시간째였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시간이 갈수록 기억 상실의 충격이 되살아났다. 아무 일 없으리라고 믿으면서도 건을 직접 봐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집을 뛰쳐나온 산영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는 걸 깨닫고 헉헉대며 멈춰 섰다. 문득 최근에 건이 운전기사의 연락처를 알려 주었던 일이 떠올랐다. 운전기사라면 건의 자취를 알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얼른 전화를 걸었으나 연결음은 끊기지 않고 오래갔다.

연결음이 길어질수록 손끝을 가만둘 수가 없었다. 결국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음이 흘러나오자 산영은 다른 사람을 찾아보았다. 건의 가족들과 잘 아는 이서, 혹은…….

청우의 이름이 스쳐 지나가자마자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청우와 연락하지 않은 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그에게는 소중한 사람이 생겼고, 그가 가고자 하는 길을 응원하고 싶었기에 번호를 찾던 손가락을 거두었다. 언젠가 들었던 희정의 말처럼, 아무리 친하다고 하나 청우만 찾고 그에게만 의지하는 일은 좋지 못했다. 저를 과보호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청우같이 자신도 그렇게 하는 게 맞았다.

입술을 질끈 깨물고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고개를 드는 찰나였다. 건너편 거리에서 나란히 걸어가는 청우와 이서가 보였다.

두 사람은 이 추운 날에 아이스크림 컵을 손에 들고 있었다. 이서가 분홍색 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뜨더니 청우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청우는 순간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뒤로 물렸다. 이서의 낯이 순식간에 시무룩해졌다. 그러자 청우가 한숨을 내쉬더니 숟가락을 한입에 물었다.

이서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었다. 청우는 언뜻 무표정한 낯으로 아이스크림을 녹여 먹으며 이서를 흘깃 보았다.

“어……?”

산영은 그들이 떠날 때까지 그들의 뒷모습을 멍하니 좇다가 입을 벌렸다.

이서였구나. 청우가 좋아하는 사람이 이서였어.

왜 여태까지 몰랐나 싶었다. 이서를 바라보는 청우의 눈에는 애정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청우는 아주 많이 반짝거렸다. 마치 모든 것의 주인공처럼.

그때였다. 손에 쥔 핸드폰이 웅웅 울었다.

“여보세요?”

[산영아.]

“건아!”

산영은 안도의 숨을 흘리며 활짝 웃었다. 걱정할 필요 없어. 모든 게 괜찮잖아? 그는 기쁜 마음으로 건의 목소리를 귀에 담았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던 청우의 시선이 어딘가에 멎었다. 핸드폰을 들고 있는 뒷모습이 익숙했다. 왜 외투도 안 입고 저렇게 나와 있지. 의아함과 함께 염려가 솟기는 했으나 고개를 돌렸다.

차가운 아이스크림 컵을 손에 들고 있으니 손끝이 꽁꽁 얼었다. 평소에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굳이 왜 지금 길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자는 건지, 참 별났다. 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푸는데 이서가 반짝거리는 눈을 깜빡이며 자신을 쳐다보았다. 원하는 것이 명백한 애교였다.

숟가락을 들어 이서의 입에 갖다 대자 그가 웃으면서 아이스크림을 받아먹었다. 이게 하고 싶었나. 청우는 결국 웃고 말았다.

“좋지 않아? 이냉치냉.”

“좋은데 이가 너무 차가워.”

“이따 핥아 줄게.”

이서가 혀끝으로 제 이를 쓸어 주는 것이 상상되어 청우는 손끝을 움츠렸다. 그러자 그걸 놓치지 않은 그가 눈꼬리를 기울였다.

“왜? 기대돼?”

“……아니.”

“기대될 텐데? 나한테 딸기 맛 날 거니까.”

딸기 맛 키스가 굉장히 좋을 것처럼 말하는 게 귀여웠다. 하여튼. 결국에 고개를 끄덕이자 이서가 코끝을 찡긋했다.

“빨리 들어가자. 춥다.”

“응. 손 다 얼었어.”

청우는 이서의 손을 잡아 제 주머니에 넣었다. 맞잡은 손이 패딩 안에서 천천히 녹았다. 둘은 서로의 손바닥을 비비며 걸음을 서둘렀다.

한참 걷다가 불쑥 옆을 돌아보았을 때는 당연하게도 이서가 곁을 지키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이서가 웃었다. 기쁨에서 자연스레 우러나오는 미소였다. 청우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딸기 맛 키스가 기대되어 혀끝이 아주, 아주 많이 달아졌다.

“집 가서 영화 볼까?”

“그래.”

“이번에는 꿈도 희망도 있는 걸로 보자.”

“어. 너 저번에는……. 아니다.”

“하하, 나도 반성했어. 우리 청우가 악몽까지 꿀 줄이야.”

이서의 취향에 한번 맞추어 보겠다고 꿈도 희망도 없는 영화를 함께 감상했다가 악몽에 시달렸다. 그날은 이서가 미안해하며 잠에서 깬 청우의 뺨 곳곳에 보드라운 키스를 쏟아부었다. 나쁜 꿈이 싹 잊히는 입맞춤이었다. 뭐……. 솔직히 말하면 나쁘지 않았다.

훈훈한 방 안에서 함께 영화를 보며 과자 먹을 생각을 하는데 이서의 걸음이 멎었다.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자 청우의 고개도 덩달아 올라갔다. 흐린 하늘에 엶은 먹구름이 넓게 깔리고 있었다.

“비 오려나 보다.”

“그러게.”

이서가 청우를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청우도 그를 따라 어깨를 한 번 들썩였다. 이서의 낯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는 청우를 향해 눈을 찡긋하고는 주머니 속의 손을 잡아당기며 걸음을 뗐다.

두 사람은 이어진 길을 걸었다. 빗방울이 이 길의 주인들 뒤로 한 방울씩 떨어졌다. 미처 살피지 못한 곳을 오래도록 적실 비였다.

적우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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