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적우
오랜만에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다를 보자 가슴이 뻥 뚫리는 듯했다. 군데군데 녹청색을 띤 물결이 거친 바위에 부딪혀 하얀 포말을 만들었다. 철길을 따라 걷다 보면 간혹 해변 열차가 지나갔다. 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 어딜 가나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마저도 좋았다.
하늘은 쾌청했고 하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 감돌았다. 사람이 많은 탓에 손을 잡을 수 없어 둘은 팔이 스칠 때면 서로의 손가락을 살짝 걸었다가 떼어 내곤 했다.
“부산은 진짜 오랜만인 것 같아. 신입생 때 와 봤었나.”
그때도 해운대나 광안리 해수욕장같이 정말 유명한 곳 몇 군데만 들른 뒤에 올라왔다. 이렇게 경치를 즐긴 기억보다는 비쌌던 회와 함께 술을 들입다 마셨던 일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동기 중에 부산 사는 놈이 한 명 있어서, 방학 때 꽤 자주 왔었어.”
“친했나 보네.”
“응. 전과해서 지금은 같은 과 아니지만.”
현지인이 추천해 준 장소를 여러 군데 가 본 후 좋은 여행 코스를 알게 되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함께 점심을 먹은 곳도 정말 맛이 좋았다. 나중에 가족들과 같이 와도 좋겠다는 생각에 청우는 이서와 들른 곳을 기록해 두었다.
“수영 잘해?”
“할 줄만 알아.”
“여름엔 같이 서핑도 하고 그러자.”
“너 서핑 할 줄 알아?”
“응. 끝내주게 잘하지.”
이서의 너스레에 청우는 웃음을 흘렸다. 그는 서핑 보드, 스케이트보드, 스노보드 등 보드 종류는 다 잘 탄다고 했는데 그와 참 잘 어울렸다.
“우리 내년에 바쁠 테니까 놀러 다니려면 부지런해야겠다.”
“그러게. 너 내년에도 연극해?”
“안 할걸. 귀찮아.”
“아, 그 사람 요즘도 너 괴롭히냐?”
이서가 눈썹을 들어 올리자 청우는 연극부 선배의 인상착의를 설명했다. 단순한 설명만으로도 누군지 알아차렸는지 고개를 주억이더니 웃었다.
“왜? 괴롭히면 혼내 주게?”
“너 잘 빠져나올 수 있잖아.”
“난 마음이 약한걸.”
능청맞은 목소리에 조용히 쳐다보자 이서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친구 관계에 간섭할 생각은 여전히 없었지만, 자신이 없는 데서 그가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은 싫었다.
“그런 말 듣고 다니지 마라.”
“마음이 아파?”
“어.”
“…….”
“네가 그런 말 듣고 있는데 그럼 좋겠어?”
진심으로 들어 주었으면 해서 표정을 굳히자 이서의 낯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사람이 드문 길에 다다랐을 때 그가 청우의 손을 슬쩍 쥐었다가 놓았다.
“알았어. 걱정하지 마. 그런 말 못 하게 코를 바짝 눌러 줄 테니까.”
“……그렇다고 원한 살 정도로 하진 말고.”
“글쎄. 원한밖에 못 품는 놈이 못난 놈 아닐까?”
청우는 장난치지 말라면서 이서의 옆구리를 툭 쳤다. 이서가 엄살을 부리다가 청우 쪽으로 몸을 치댔다.
둘은 한참을 걷다가 해가 질 즈음에 이어진 길을 빠져나왔다. 여행보다는 휴양이 목적이었기에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기보다는 일찍 숙소에 들어가 쉬기로 했다. 그들이 묵을 곳은 넓은 창을 통해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호텔이었다. 청우는 안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탄성을 흘렸다.
통창에 석양빛이 물든 바다가 담겼다. 그림 같은 풍경에 창 앞으로 가 서자 뒤에서 찰칵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이서가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자, 예쁜 얼굴.”
이서의 말에 입꼬리를 올리자 그가 연신 촬영 버튼을 눌렀다. 적당히 한 것 같아 다시 뒤를 돌자 이서가 다가왔다.
“마음에 들어?”
“응. 경치 좋네.”
바깥 풍경을 가만히 보고 있는데 이서가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고는 핸드폰을 들었다. 셀카 모드로 돌려진 카메라가 둘의 얼굴을 담았다. 이렇게 같이 사진을 찍는 일은 처음이라 어색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이서가 청우의 입꼬리를 손끝으로 꾹 눌렀다. 그를 따라 미소 짓자 사진이 찍혔다.
몇 번 촬영 버튼을 누르던 이서가 돌연 청우의 뺨에 입을 맞췄다. 순간 동그래진 청우의 눈까지 카메라에 담겼고, 이서가 웃으면서 촬영된 사진을 보았다.
“이거 봐.”
“이상하게 나왔어.”
“왜? 귀여운데.”
하필이면 갑작스러운 뽀뽀 때문에 어색하게 굳은 얼굴로 나온 사진을 이서는 너무 마음에 든다면서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도대체 이서의 기준을 알 수 없어 청우는 한숨을 흘리며 사진 속 그의 낯을 보았다. 그는 어떤 얼굴을 하든 사진에 잘 담겼고, 저보다는 그가 더 중요했기에 결국에는 이 사진도 마음에 들었다.
둘은 짐을 정리하고 잠깐 쉰 다음에 저녁을 사러 나왔다. 회와 함께 간식거리와 술을 사서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통창 앞에 놓인 테이블에 음식을 세팅하고 앉았다.
“자, 건배.”
두 사람은 서로의 캔을 부딪쳤다. 맥주가 오늘따라 더 시원하고 톡 쏘았다. 오동통한 회를 한 점 입에 넣고 씹던 청우는 문득 생각난 것에 입을 열었다.
“아, 나 과외 할까 생각 중이야.”
“과외는 왜?”
“방학 동안 쓸 생활비 벌 겸.”
학비는 일부 장학금을 받고 있고, 생활비는 방학 때마다 과외나 아르바이트를 해서 매달 받는 용돈에 충당하곤 했다. 지금은 이서와 사귀고 있으니 돈이 더 필요했고, 일찍 과외를 구해 오래 해 볼 생각이었다.
“아, 안 되는데.”
“왜?”
“너 여기서 인기 더 많아지면 어떡해?”
“무슨……. 좀만 있으면 걔네들한테 아저씨야.”
그리고 인기는 너만 하겠냐. 청우는 뒷말과 함께 맥주를 삼켰다. 이서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발을 들어 청우의 정강이를 훑었다.
“말해 봐.”
“뭘?”
“여태까지 얼마나 많은 고백을 받아 봤는지?”
“별로 안 받았어.”
“정말?”
“어.”
주변에서 쟤가 널 좋아한다더라, 걔가 널 좋아하는 것 같다는 말은 은근히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 고백을 받은 적은 몇 없었다. 청우의 표정을 훑던 이서가 고개를 갸웃했다.
“신기하네.”
“뭐가?”
“나였음 가만 안 있었을 텐데. 네가 착해서 친구로라도 있고 싶었나.”
청우는 헛웃음을 흘렸다. 자기였다면 가만히 안 있었을 거라니. 그의 반응에 이서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왜?”
“넌……. 가만 안 있었던 건 맞지.”
가만히 있지 않고 돌연 꼬리를 자르고 떠나 버렸다. 지난 일이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지만, 다시 생각해도 새무룩해지는 일이었다. 청우의 말을 이해한 이서가 캔을 내려놓고 뚜껑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짧은 웃음을 흘렸다.
“나도 내가 널 이렇게 좋아할 줄 몰랐으니까.”
“…….”
“적당한 마음으로 대할 거였으면, 청우야. 벌써 싹 다 발라 먹었어.”
웃음기가 어리긴 했지만 진중한 눈이 제 얼굴을 훑어 내렸다. 그 시선에 일순 목덜미가 빳빳해졌다. 갑작스레 던져진 지나치게 솔직한 고백에 청우는 눈을 내리뜨고 맥주 캔을 만지작거렸다. 곧이어 웃음소리가 터져 고개를 들자 이서가 손을 뻗어 청우의 귀를 건드렸다.
“왜 빨개졌어?”
“아…….”
“얼굴 숨기지 마. 계속 보여 줘.”
붉은 석양빛이 이서의 옆으로 긴 그림자를 그려 냈다. 청우는 쿵쾅거리는 박동을 느끼며 이서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제 눈에서 코, 입으로 흘러내렸다가 다시 눈으로 향하는 시선이 녹아내린 태양보다 더 뜨겁게 피부에 닿았다. 청우는 그의 눈길을 견디다가 입을 열었다.
“난 솔직히……. 신기해. 네가 나를 좋아…… 한다는 게.”
그저 느껴지니까, 이서가 저렇게 애정 어린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니까 나를 좋아하는가 보다 싶지만 솔직히 이유는 잘 모르겠다. 함께했던 시간 속에서 자신이 그에게 녹아들었듯, 그도 그랬을까. 이해는 할 수 있었으나 그래도 신기한 일이었다.
청우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이서가 탄식을 흘리며 이마를 짚었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손을 치웠다.
“갑자기 내가 도둑놈같이 느껴지네.”
“무슨…….”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이서의 눈꼬리가 예쁘게 휘어 내렸다. 청우는 그의 미소를 안주 삼아 술을 넘겼다. 이상하게도 맥주에서 단맛이 났다.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와 함께 술을 나누었다. 둘 다 주량이 센 탓에 수많은 맥주 캔이 테이블 밑으로 나뒹굴었다. 어느새 해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모양이 선명한 달이 떠올랐다. 어둠이 잠식한 바다는 달빛 아래 고요하게 물결쳤다.
청우는 창을 향해 고개를 튼 이서의 얼굴을 훑었다. 이마에서부터 코로 내려오는 선은 부드러웠지만 턱에서 목으로 이어지는 선은 강건했다. 빤한 시선을 느꼈는지 이서가 청우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이 이내 웃음기를 담고 녹아내렸다.
“우리 서로한테 궁금한 거 하나씩 묻기로 할까?”
“궁금한 거?”
“응.”
“…….”
“왜. 나한테 궁금한 거 없어?”
“아니……. 너부터 해.”
청우의 말에 이서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바로 물어볼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는 침묵을 지키며 둥근 캔의 가장자리를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뭘 물어보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안주로 사 온 과자를 입에 넣고 씹을 때 그가 운을 뗐다.
“산영이. 왜 좋아했어?”
전혀 생각지 못한 질문에 청우는 움직임을 멈추고 이서를 바라보았다. 왜 좋아했냐는 질문은, 좋아한 이유를 묻는 것일 테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지만 그보다는 계기가 먼저 떠올랐다.
“같은 반에 괴롭힘당하던 애가 있었어. 교실에 있던 애들 다 보고도 무시하는데 산영이 혼자 나서서 말리더라고. 그때는 키도 이만할 때였는데.”
청우는 그날의 상황을 조곤조곤 설명했다. 그저 멋있다는 생각이나 동경으로 갈 수 있었던 감정이 어떻게 한 번에 사랑에 도착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그렇게 될 일이었을까. 감정을 후회한 적은 없으나 재난처럼 찾아왔던 것 또한 맞았다.
설명을 끝내고 나자 이서가 옅게 웃었다.
“너답네.”
너답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으나 모범생이 좋으냐며 취향 운운했던 말과 결이 비슷하지 않나 싶었다. 어차피 이제는 다 지나가 버린 감정이었다. 산영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마음에 어떤 무거운 짐도 얹히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직도 생소했다.
“이제 내가 물어보면 되냐?”
“응, 물어봐.”
“방학 동안 우리 같이 자면 어때?”
최근 품고 있었던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자 이서가 눈가를 찡그리며 웃었다.
“그건 궁금한 게 아니잖아.”
“네 생각이 궁금한 거야.”
“같이 잔다는 건……. 매일 자자는 뜻이야? 순수하게 잠을?”
“어. 너 자주 밤새우니까 나랑 있으면 어떨까 해서.”
혼자 있을 때 잘 자는 편이었다면 묻지도 않았을 테지만, 이서는 자신과 함께 있을 때 더 잘 자는 듯했다. 못 자더라도 긴 새벽을 같이 보내면 그의 고통도 조금은 옅어지지 않을까.
“글쎄…….”
망설이는 투에 청우는 다소 놀라고 말았다. 사실 거절당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자는 시간은 사실상 남는 시간이니 함께 있을 수 있으면 좋으리라고만 여겼다.
“왜? 싫어?”
“싫은 건 아닌데. 매일 같이 자면 반 동거가 되는 셈이잖아.”
“…….”
“난 너한테 잘 보이고 싶어.”
청우는 이서의 말을 해석하기 위해 꺼내어진 문장을 잠시 되짚어 보았다. 동거는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일이고, 매일 같이 잠드는 일은 확실히 불편할 수 있다. 같이 살면 서로의 단점도 잘 보이니 동거는 신중해야 한다는 경험자들의 말 또한 들은 적이 있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그런 거라면 이해하지만 그가 알아주었으면 하는 게 있었다.
“잘 보이려고 하지 않아도 잘 보고 있어.”
이서는 모호하게 웃었다. 문득 이럴 만한 가치가 없을 거라 했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그때 그 말의 연장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이서는 자신을 과소평가하고 있거나…….
“나 못 믿겠어?”
“엄밀히 말하면 날 못 믿는 거지.”
이서는 별것 아니라는 듯 고개를 옆으로 한 번 가볍게 까딱였다.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알지 못해 청우는 시선을 맥주 캔의 검은 구멍 속으로 빠뜨렸다.
서로의 마음이 닿은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시간이 지나면 서로를 더 편하게 여기고 숨겼던 부분을 보여 주거나 몰랐던 부분을 알게 되는 일도 차차 생길 것이다. 하지만 만일 그게 이서의 성정이라면, 제 가치를 낮춰 보고 정말 자신이 언젠가 후회하리라고 생각하는 거라면…….
“그럼 날 믿어 줘.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좋아하는 너도 믿게 되겠지.”
기다리는 거 말고, 그저 보여 주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을까? 청우는 앞으로 함께할 긴 시간을 생각하며 술을 들이켰다. 이서는 새까만 어둠 속 달을 좇듯 청우의 낯을 응시했다.
옆으로 돌아눕던 청우는 손끝에 아무것도 닿지 않자 눈을 떴다. 이서가 등을 보인 채로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의 등 너머 창밖 풍경이 흐릿했다. 수면 위로 물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넓은 창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걸 보니 비가 오는 모양이었다.
손을 들어 이서의 맨등을 건드리자 그가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깼어?”
“어. 잠 못 잤어?”
“아니. 나도 자다가 깼어.”
이서가 청우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었다. 청우는 그의 손길을 가만히 받다가 물었다.
“비 와?”
“응.”
이서의 시선이 다시 창밖으로 향했다. 자정이 지나고 1월 1일이 되었으니 올해의 첫 비였다. 이서와 가까워진 뒤에 비를 참 많이 접하는 것 같았다. 비가 한바탕 내리고 나면 더 추워지겠지. 날이 밝아도 그치지 않으면 오늘 일정을 변경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청우는 비 오는 바다를 배경으로 두고 있는 이서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옷을 입지 않고 있어서인지 허리가 곧은 게 더 잘 보였다. 손끝을 등 가운데에 대고 뼈를 따라 훑어 내리다가 허리에 도착했을 때 떼어 냈다. 이런 손장난을 몇 번이나 할 때였다.
“청우야.”
“응?”
“내가 비 오는 날을 왜 좋아하는 줄 알아?”
갑자기 던져진 질문에 청우는 손장난을 그만두고 이서를 올려다보았다. 얼핏 보이는 그의 낯은 무표정했고, 시선은 여전히 바닷가 어딘가를 돌고 있었다.
“왜 좋아하는데?”
“동생 기일이어서야.”
비 맞는 걸 좋아한다는 정이서. 비 오는 날 동생이 죽어서 때때로 기분이 좋지 않다던 정이서. 동생이 죽은 날 비가 와서 그날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정이서.
청우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며 이서의 등에 다시 손끝을 가져다 댔다.
“내가 볼 땐 너……. 비 오는 날 안 좋아해.”
확정적인 어조에 이서가 뒤를 돌아보았다. 청우는 그의 맨살 위에 동그란 그림을 그리다가 눈을 들었다.
“넌 좋아하는 거 그렇게 안 봐. 첼로나……. 나 볼 때랑은 다르잖아.”
무언가를 좋아하는 눈은 어딘가에 끌려 들어간 것처럼 침잠하지 않는다. 이서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동생이 죽고 나서 그 사랑과 관심이 마법같이 돌아와 좋아하기라도 했을까? 동생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매일 밤 기도라도 했을까?
“이제 비 오는 거 안 좋아해, 너. 그러니까 매몰되지 마라. 그것도 습관이야.”
어쩌면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처럼 미워하는 일도, 미움을 가장하는 일도 습관이 될 수 있는지 모른다. 언젠가 못된 생각을 한 적이 있을지라도 이토록 오랜 시간을 붙잡혀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참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청우는 무거운 눈을 끔뻑이며 이서의 허리를 토닥였다.
이서가 청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보고 싶었으나 그림자가 져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그리고 좋아하면 좀 어떠냐.”
무슨 애가 비 올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도록……. 청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방치되는 나쁜 생각은 곪기 마련이었고, 자신은 이서의 편이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 곁을 지켜야 하는 사람이었다. 틀어지면 바로잡으면 될 일이다.
이서가 말없이 침대 위로 눕더니 청우의 품으로 꾸물거리며 들어갔다. 청우는 이서를 끌어안고 그의 머리를 토닥였다. 안개 낀 공기가 하얗게 창을 가렸고, 두 사람은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
청우는 단정하게 차려입은 옷을 가다듬고 벨을 눌렀다. 곧 문이 열리고 학부모와 학생 둘이 나와 청우를 맞았다. 그는 최대한 밝아 보이는 미소를 입에 걸고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어우, 미남이시네요.”
“감사합니다.”
난시 때문에 글자가 작은 책을 읽을 때나 쓰는 안경을 착용하고 온 덕인지 학부모의 눈에 흐뭇한 빛이 어렸다. 요즘은 성적 증명서는 필수에 시범 수업도 하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첫인상이었다.
거실에서 학부모와 면접을 본 다음 학생의 방으로 들어왔다. 청우는 책상 앞에 앉아 가방에서 미리 뽑아 둔 문제지를 꺼내 내밀었다.
“이거 풀어 볼래? 모르는 문제는 찍지 말고 비워 두고.”
“네에.”
학생의 첫인상은 예의 바르고 똘똘하니 가르치는 데 어려움은 없을 것 같았다. 오랜만에 쓴 안경이 어색해 학생이 문제를 푸는 동안 잠시 벗어 두었다.
“와, 쌤. 안경 쓴 거랑 안 쓴 거랑 분위기가 다르네요.”
“그래?”
“네. 쓴 거는 좀 차분하고 안 쓴 거는…….”
“집중해야지.”
“네에.”
학생이 눈에 힘을 주고 문제를 풀어 나갔다. 청우는 시간을 확인하며 그가 풀지 않고 넘긴 문제를 체크해 두었다.
“다 풀었어요.”
건네받은 문제지를 채점하는 동안 학생이 턱을 괴고 청우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시선이 느껴졌지만 굳이 반응하지 않자 그가 물었다.
“쌤. 여친 있어요?”
“응.”
“오, 예뻐요?”
“응.”
“와. 바로 답이 나오시네.”
그러고 보니 이서와 제대로 만나기 시작한 후, 다른 사람에게 애인이 있다는 말을 한 건 처음인 듯했다. 이제는 이런 질문을 들어도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언젠가 저를 잘 아는 사람들에게도 이서를 소개할 날이 올까. 쉽지는 않겠지만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여친 얘기 해 주실 거예요? 첫사랑 얘기도요.”
“나중에. 너 열심히 하면.”
“잘 빠져나가시네요.”
구시렁거리는 학생이 귀여워 청우는 웃음을 흘리며 채점을 마저 했다. 수준을 파악한 뒤에 짜 두었던 학습 계획을 조정하고 나서 일어났다. 나오기 전 청우는 학부모에게 잘 부탁한다는 말을 들었다. 순탄한 합격이었다.
페이가 좋은 과외를 구하게 되어 뿌듯했다. 돈을 모아 이서와 여행도 가고 데이트도 마음껏 즐길 생각을 하니 든든해졌다. 부지런히 걸어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전화가 왔다. 고등학교 동창 우중이었다.
“여보세요.”
[뭐 해? 단톡 안 보냐?]
“아, 나 일이 좀 있어서. 왜?”
[다음 주 금요일에 시간 어때.]
“다음 주 금요일? 아무 일도 없긴 한데.”
[스키장 가자.]
요지는 우중이 삼촌에게 리조트 숙박권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꼭 그날 가야 한다면서 청우의 답을 재촉했다.
[산영이는 되고 기호는 안 된대. 넌 괜찮지?]
“될 것 같긴 해.”
[같긴 해는 뭐야, 인마. 확답을 줘야지.]
청우는 다음 주 금요일에 이서와 무언가를 하기로 했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달리 약속을 잡은 적은 없었다.
“그래, 가자.”
[오케이.]
전화를 끊고 나서 메시지가 쌓인 단체 대화방을 확인했다. 산영이 마지막에 고양이가 한복을 입은 사진을 띄웠다. 얼마 전에 입양을 보냈다던데 잘 지내는 모양이었다. 고양이를 보고 웃다가 버스에 올라탔다.
이서의 오피스텔 근처에서 내려 그의 집으로 올라갔다. 오늘 저녁에 같이 영화를 보기로 했는데, 이서는 본가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온다고 했다. 청우는 그가 알려 준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집은 비어 있었다. 이서가 없는 집에 혼자 들어와 있으니 어색했다.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몸을 누였다. 아침부터 일어나서 준비했더니 피로가 몰려왔다. 이서는 네 시는 돼야 온다고 했으니 눈을 감았다.
잠깐 눈을 붙일 생각이었던 청우는 푹 잠들어 있다가 볼을 찌르는 손길에 눈을 떴다. 이서가 머리맡에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가 씩 웃었다.
“왜 여기서 자고 있어. 침대에서 자지.”
“아……. 잠깐 잔다는 게. 언제 왔어? 몇 시야?”
“두 시.”
“일찍 왔네?”
“응. 그냥 빨리 나왔어.”
이서가 점퍼를 벗으며 침실로 향했다. 청우는 그를 따라가 침대 위에 앉았다. 지갑과 담뱃갑을 협탁 위에 둔 뒤 점퍼를 옷걸이에 거는 걸 보다가 물었다.
“밥 잘 먹었어?”
“응, 내가 가면 항상 진수성찬이야. 너는? 면접 잘 보고 왔어?”
“어, 다음 주부터 나가려고. 애가 착하더라. 어머님도 잘 대해 주시고.”
“잘됐네. 고생했어.”
이서가 다가와 청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길을 가만히 받다가 그의 손이 떨어졌을 때 저도 머리를 매만져 주자 그가 웃었다.
“조금 쉬다가 저녁 일찍 먹고 영화관 갈까?”
“그래. 아, 나 다음 주 금요일에 친구들이랑 스키장 가기로 했어.”
“스키장? 어디?”
“여기. 알아?”
우중이 보내 준 리조트와 스키장의 사진을 보여 주자 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괜찮지. 스키 잘 타?”
“그냥 보통은 해.”
“산영이도 있네? 같이 가는 거야?”
“어, 고등학교 동창들. 원래 나까지 네 명인데 한 명은 안 된대서 세 명이 가기로 했어.”
“아아.”
불쑥 생각난 것에 청우는 산영이 보낸 고양이 사진을 눌러 그에게 보여 주었다. 다시 봐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귀엽지.”
“그때 그?”
“응, 입양 갔다고 했잖아. 새해 맞았다고 한복 입은 거래.”
“귀엽네.”
고양이 사진을 빤히 내려다보던 이서가 청우의 턱을 쥐더니 입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청우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그의 혀를 받았다.
혀 밑으로 살덩이가 들어와 보드라운 곳을 쑤시듯 핥았다. 청우는 혀를 든 채로 할딱이다가 이서의 것을 내리눌렀다. 얽힌 혀를 맞붙인 채로 훑고서는 입술을 머금고 빨았다. 이서가 청우의 목덜미를 쥐고 고개를 틀었다. 청우의 몸이 뒤로 넘어가고, 이서는 그의 귓불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혀를 깊숙이 집어넣었다.
“음…….”
이서의 손이 상의를 들추고 들어왔다. 맨살을 만지는 손길에 청우도 그의 귓바퀴를 문질렀다. 귀걸이 주변을 살살 훑자 그가 긴 숨을 흘리며 입술을 떨어뜨렸다.
이서가 청우의 다리 사이로 허벅지를 집어넣었다. 바지 위로 가해지는 자극에 탄성이 흘러나왔다. 청우는 손을 밑으로 내려 허벅지를 따라 이어지는 것을 찾아 문질렀다. 쪽쪽 쪼아 대는 입술 사이로 달뜬 숨이 샜다. 다른 손으로 그의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다리를 자연스레 벌릴 때였다. 이서가 고개를 들더니 청우의 눈가를 손끝으로 훑으며 물었다.
“오늘……. 나한테 가르쳐 줄래?”
“뭘?”
“네가 어떻게 느끼고…….”
손가락이 뺨을 타고 내려와 입가를 문질렀다. 입꼬리를 매만지는 손길이 간지러워 어깨를 움츠리자 이서가 손을 떼며 말을 이었다.
“얼마나 좋았는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아 멀뚱히 있자, 이서가 웃는 낯으로 청우의 손을 가져가 제 허벅지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그제야 청우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 내가 생각한 뜻이 맞나. 의문보다 물음이 먼저 튀어나왔다.
“왜?”
“왜라니?”
“아니…….”
조금 갑작스러웠다. 첫 관계에서부터 위치가 정해졌고, 계속 그렇게 해 왔기에 앞으로도 그래야만 하는 건 줄 알았다. 그리고 이서가 제게 먼저 제안할지도 몰랐다. 딱히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는데…….
“넌 나 안아 보고 싶은 적 없었어?”
이서가 청우의 뺨에 그림을 그리듯 매만지며 물었다. 청우에게는 굳이 안고 안기냐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저 몸과 마음을 나누는 일이었지.
선뜻 대답할 수 없는 것은, 싫기 때문이 아니라 이서가 평소와 조금 다르게 느껴진 탓이었다. 이서의 표정은 평범했고 딱히 별다른 일은 없었다. 하지만 뭐라고 콕 짚어서 말할 수 없는……. 공기. 분위기. 그런 것들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청우의 침묵이 길어지자 이서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한쪽 눈썹이 까딱 올라갔다.
“왜? 싫어?”
“아니, 싫은 건 아닌데.”
“아, 혹시 안는 건 작고 아담하고 예쁜 애로 하고 싶어?”
“무슨…….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럼 왜? 이서가 그렇게 묻듯이 태연한 낯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이 자식 왜 꼬였지? 청우는 분명 뭔가가 달라졌음을 실감하고 미간을 찡그렸지만, 이서의 뜻대로 하지 않고는 그에게서 솔직한 말을 들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면 일단 부딪쳐 주는 수밖에 없었다. 도발인 걸 알지만 열이 받기도 했다. 자신을 뭘로 보고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너 후회하지 마라.”
“할 리가.”
이서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청우는 그를 노려보듯 응시하며 상의를 벗어 던졌다.
아예 몸을 일으켜 옷을 벗는 청우를 보며 이서도 느긋하게 탈의했다. 청우가 바지와 속옷에서 다리를 휙휙 빼내 알몸이 된 동안 이서는 바지의 지퍼를 천천히 내렸다. 이서의 시선이 반쯤 서 흔들리는 성기에 닿았다. 청우는 목덜미가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이서가 마침내 모든 옷을 다 벗을 때까지 지켜보았다.
나신이 된 이서가 웃으면서 침대 가운데로 올라가 누웠다. 청우는 그의 몸 위로 엎드리며 고개를 숙여 뺨에 입을 맞추었다. 이서가 숨을 터뜨리면서 고개를 젖혔다. 청우의 입술이 그의 목덜미로 내려갔다. 쇄골을 머금고 빨다가 살을 깨물자 이서가 “아야.” 하며 엄살을 부렸다. 그를 흘긋 올려보다가 손을 들어 탄탄한 가슴을 주물렀다.
살을 몇 번 쥐었다가 떼고는 엄지손가락으로 돌기를 짓누르듯 문질렀다. 고개를 숙여 왼쪽 젖꼭지를 물고 빨아들이며 오른손으로는 다른 쪽을 애무했다. 이서가 제게 해 주었던 전희를 생각하며 자신이 좋았던 순간을 떠올려 따라 했다.
입 속으로 쏙 들어온 유두를 혀를 내어 핥았다. 혀끝으로 둥글게 짓이기다가 입술을 모아 쪽 빨아들이자 이서가 탄성을 흘리며 청우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그의 반응에 탄력을 받아 가슴을 깨물며 손을 활짝 펴 옆구리서부터 허벅지까지를 넓게 쓸어내렸다.
“아…….”
연속되는 애무에 이서의 좆이 솟아올라 청우의 허벅지를 건드렸다. 성기를 손으로 쥐어 훑자 그가 무릎을 들어 올려 청우의 사타구니를 꾹 눌렀다.
이서가 느긋한 미소를 입에 건 채로 무릎을 움직였다. 그의 다리에 이리저리 짓눌려지는 성기가 자극을 받았다. 청우는 눈을 치켜떠 그를 바라보며 제 입술을 깨물었다. 손끝으로 유두를 굴리다가 명치께로 입술을 내렸다. 쪽,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며 배꼽 근처에 키스하자 이서가 간지러운 듯 몸을 움츠렸다.
붉게 부푼 귀두에서 쿠퍼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지런한 음모를 매만지다가 뿌리 끝을 쥐고 선단을 곧장 물었다. 평소보다 짙게 느껴지는 체향이 코끝을 스쳐 배 속을 욱신거리게 했다.
“하아……. 읏.”
삽입 전에 충분한 전희가 있어야 몸이 풀리는 걸 알기에 청우는 그의 좆을 정성스레 빨았다. 손은 쉬지 않고 단단한 허벅지와 둥근 음낭을 어루만졌다. 그의 피부는 보드라웠으나 탄탄해서 닿을 때마다 손에 착 달라붙는 맛이 있었다.
이서가 신음을 흘리며 코끝을 찡긋했다. 쾌감을 느끼는 표정을 좇으며 고개를 깊게 숙였다. 숨을 천천히 내쉬면서 입을 한껏 벌렸다. 목구멍까지 치고 들어온 성기를 쭉 빨아들이자 이서의 허벅지가 튀어 올랐다.
“하으, 후……. 오늘 왜 이렇게 잘해?”
웃음 섞인 물음에 성기를 뱉어 내고는 입 안에 고인 타액을 삼켰다. 눈으로 보면 엄두가 나지 않는 크기의 좆을 손으로 훑어 올리며 답했다.
“긴장 안 돼서.”
“아하.”
이서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와의 관계에 익숙해지기는 했지만, 끝에 따라오는 삽입을 생각하면 늘 어느 정도 긴장되곤 했다. 기대와 부담이 딸린 긴장이 오늘은 따라붙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과 달리 이서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는 듯했다. 이서답다 싶으면서도…….
“너 해 본 적 있어?”
“아래로?”
“응.”
“없지. 남자는 네가 처음인데.”
가볍게 던져진 답에 고개를 끄덕이려던 청우가 멈칫했다. 그는 이서의 성기를 느리게 문지르며 미간을 찡그렸다.
“남자가 처음이라고? 너 근데……. 아니지 않아? 남자도 된다고…….”
“내가? 아아. 그땐 그냥 너 꼬시려고.”
이서의 눈이 꼬리를 늘어뜨렸다. 청우는 숨을 들이켰다. 갑자기 긴장감이 들어 손끝이 굳었다. 그렇다면 이서의 첫 남자 친구는 자신이었다. 낯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이자 이서가 실망한 눈초리로 청우를 흘겼다.
“뭐야. 왜 안 좋아해? 처음이라는데.”
“그런 거 별로, 매너 아니지 않냐.”
처음이라고 유난히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상한 일 같았다. 청우의 답에 이서가 웃음을 터뜨리더니 몸을 일으켜 입 맞추었다. 청우는 그의 목덜미를 쥐어 당기며 혀를 깊게 처넣었다. 손으로는 쉬지 않고 단단한 살 기둥을 비벼 댔다.
솔직히 기뻤다. 그의 처음을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때는 이서가 자신을 좋아할 때도 아니었는데 그런 거짓말까지 하면서 저를 붙잡은 것이다.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청우는 다시 아래로 내려와 이서의 좆을 단번에 끝까지 머금었다. 허벅지를 꽉 쥐며 목구멍을 메우는 버거운 감각을 참다가 고개를 물렸다.
“하, 아, 좋아.”
이서가 하체를 들어 청우의 입 안으로 성기를 처넣었다. 청우는 그의 움직임에 맞추어 고개를 흔들며 성기를 빨아들였다.
살 기둥이 입술에 쩍쩍 달라붙었다. 혀끝으로 도드라진 핏줄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그의 몸 중에서 미형과는 가장 먼 부위였다. 조금만 더 작아도 좋았겠으나 전체적으로는 균형이 잘 맞았다. 발기한 채로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욕실과 방 사이를 활보하는 모습을 볼 때면 정사의 여운이 타오르곤 했다.
“읏, 윽, 아, 진짜…….”
그의 입에서 욕설이 흘러나왔다. 이서가 청우의 머리칼을 쥐고 성기를 연신 입 안으로 쳐올렸다. 끝이 다가옴을 느꼈다. 청우는 혓바닥을 내밀어 기둥을 타고 내려가 부푼 좆을 반쯤 물고 강하게 흡입했다.
이서의 허벅지가 바짝 굳었다. 근육이 선 다리를 어루만지며 입술로 쭉쭉 빨아 대자 이서가 거친 신음을 흘리며 주먹을 쥐었다. 성기가 입 안에서 꿈틀거리더니 곧 무언가가 쏟아지는 듯한 감촉이 혓바닥을 휘감았다.
“후우…….”
이서가 눈가를 찡그리며 청우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청우는 성기를 토해 내며 입을 다물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냥 바닥에 뱉어.”
이서의 말에 침대 밖으로 정액을 뱉었다. 여전히 남은 비릿한 맛에 미간을 찌푸리는데 이서가 손을 뻗어 턱을 쥐었다.
“다음엔 삼켜 줄 거지?”
이걸 삼킨다고? 확답을 줄 수 없어 반응하지 못했다. 그가 턱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입술이 벌어졌다. 이서는 청우의 입 안을 살피더니 손가락을 넣어 혓바닥을 쓸어내렸다. 남은 정액이 손가락을 타고 아래로 뚝 떨어졌다.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자 입 안에 이서의 손가락이 갇혔다. 그가 눈을 휘며 손가락을 깊숙이 집어넣어 혀를 긁었다. 젖은 안을 헤집는 손길에 이를 내어 아프지 않게 깨물자 그가 또 “아야.” 하고 엄살을 부리며 손가락을 빼냈다.
이서는 곧 협탁의 서랍을 열어 젤과 콘돔을 꺼냈다. 그걸 보자 갑자기 또 손끝이 경직되었다. 자신이 넣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서 또한 성기를 받는 쪽이 처음이었다. 둘 다 처음이기는 했지만, 이서가 겪을 불편함을 알기에 제가 더 잘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겼다.
“너도 엎드려.”
확실히 처음엔 엎드려서 받는 쪽이 더 나았다. 청우의 말에 이서가 씩 웃으며 팔을 베고 엎드려 누웠다.
관계를 할 때 이서의 뒷모습은 쉽게 볼 수 없는 곳이었다. 오른쪽 어깨에서 날아가는 새, 넓은 어깨서부터 좁아지는 허리까지 빈틈없이 붙은 근육, 탄탄한 엉덩이와 처지는 살 없이 단단한 허벅지, 곧게 뻗은 종아리를 훑었다. 항상 소년같이 웃는 그의 몸은 완전히 이상적인 남자의 것이었다. 남자의 몸을 보기만 해도 달아오를 줄은 예전에는 알지 못했다.
청우는 제 것에 콘돔을 씌운 뒤 고개를 숙여 이서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둔덕 사이로 젤을 뿌렸다. 다물린 곳을 손으로 문지르며 입구를 충분히 적신 뒤에 천천히 삽입했다.
“아프면 말해.”
이서가 청우를 돌아보며 웃었다. 손가락이 끝까지 들어가고 나자 그의 미소에 금이 갔다.
“아, 느낌 이상해.”
“아직 하나밖에 안 들어갔어.”
“겁주는 거야?”
“그게 아니라……. 나아질 거야.”
자신이 먼저 겪어 보아서 다행이었다. 앞으로 그가 느낄 통증, 불편함, 어색함, 부담, 긴장 모두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경직되어 있던 손끝이 풀어졌다. 알고 있기에 더 잘해 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해 본 적은 없지만 그를 이해하며 사랑해 줄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뜨끈해졌다.
청우는 달래듯 이서의 귓가에 키스했다. 그는 이 정도는 괜찮은 듯 키득댔다. 안심하고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였다. 안은 생각보다 더 따뜻하고 비좁았다. 내벽을 둥글게 훑으며 안을 꾹꾹 눌러 댔다. 다른 손으로는 이서의 몸 이곳저곳을 쓸어내렸다.
자신도 손가락 하나로는 별 느낌이 없었던 것 같다. 손가락 하나를 더 비집어 넣자 속살이 빠듯하게 벌어졌다. 이서의 몸이 순간 경직되는 게 느껴져 귀걸이가 걸린 귓바퀴를 핥았다. 그가 웃음 섞인 숨을 흘리며 힘을 풀었다.
“아파?”
“아픈 것까진 아니고.”
이론과 실전이 다르듯, 차올랐던 자신감과 경험으로 비롯한 능숙함은 별개였다.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손가락을 움직여 이곳저곳을 누르며 헤집어 보는데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서가 손등에 이마를 묻고 웃었다.
“왜 웃어?”
“아, 청우야. 너 나한테 배운 거 맞아?”
뭘 배운 거냐는 듯한 뉘앙스에 살짝 울컥했다. 처음이니까 어쩔 수 없지 않나. 그리고 이서랑 하면서는 느끼느라 정신없었지, 그의 손길을 배우거나 기억하려고 노력한 적은 없었다.
청우는 이서의 귓바퀴를 깨물고는 손가락을 가위질하듯 벌렸다가 붙이며 구멍을 늘렸다. 그의 귀를 애무하며 아래를 탐색하는 데 집중하는 동안, 이서는 손을 벤 채로 고개를 틀어 청우를 시선으로 좇았다. 눈이 마주칠 때면 이상하게 가슴이 끓었다. 제게로 향한 눈빛이 헤아릴 수 없이 깊은 듯해서 그랬다. 참지 못하고 입을 맞추자 그가 화답했다.
손가락 하나를 더 넣기 전에 젤을 듬뿍 뿌렸다. 투명한 액이 묻어 흐르는 손가락으로 입구를 뚫자 이서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나 여기도 만져 줘.”
그가 청우의 손을 가져가 밑으로 넣었다. 청우는 어느새 가라앉은 이서의 성기를 쥐어 문지르며 세 손가락을 구부려 젖은 내벽을 찔렀다. 이곳저곳을 꾹꾹 누르다가 손끝으로 끈질기게 비비면서 이서의 귓바퀴를 물고 빨았다.
“음…….”
손가락을 빨아들인 속살이 순간 꿈틀했다. 이서가 고개를 젖히면서 긴 숨을 흘렸다. 손안에 갇힌 살 기둥이 단단해지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좆을 만져 주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방금 비볐던 곳이 좋아서였는지 알 수 없었다. 혹은 둘 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한 지점은 손가락으로 연신 쑤시면서 손바닥으로 귀두를 감싸 주물렀다.
근육이 굼틀하거나 그가 어깨를 움직일 때마다 까만 새가 움직이는 듯했다. 하얀 피부를 물들인 새가 이서와 참 잘 어울렸다. 날아와 제게로 정착한 정이서. 불현듯 가슴이 벅차올라 그의 뺨 곳곳에 키스하자 이서가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응. 넌 어때?”
“음, 생각보다 괜찮아. 솔직히 진짜 이상하긴 한데……. 너 생각하면 할 만하다 싶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으나 몸을 나누면서 서로를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 특별하게 와닿았다. 청우는 고개를 숙여 날아가는 새에 입을 맞추며 손을 움직였다. 단단한 기둥을 쥐어짜듯 문지르고 다른 손의 손끝으로는 내벽을 긁었다.
이서의 몸이 풀어지며 그의 입에서 달뜬 숨이 흘러나왔다. 세 손가락을 쩍쩍 벌렸다가 붙였다. 빠듯했던 안이 어느새 보드랍게 풀어지고 있었다. 이서의 반응을 기민히 살피면서 깊이 넣은 채로 움직이던 손가락을 뒤로 물렸다가 안으로 다시 처넣었다. 앞뒤로 왕복하며 속살을 쑤셔 대자 이서가 입꼬리를 혀로 꾹 누르며 미간을 찡그렸다.
“하아…….”
청우의 성기도 어느새 완전히 서서 꼿꼿하게 흔들렸다. 성기가 이서의 몸에 살짝 닿을 때면 차오르는 탄성을 삼켜야 했다. 손가락을 축축하게 물고 있는 안이 제 좆을 삼키면 어떤 느낌일지, 생각만으로도 흥분감이 솟아올랐다.
청우는 인내하며 이서의 낯빛을 살폈다. 그는 간혹 코끝을 찡긋하며 허리를 들어 청우의 손안에 성기를 비볐다. 눈을 내리뜬 채로 숨을 색색 내쉬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한쪽 눈을 찡긋하며 속삭인다.
“이제 안아 줘.”
부드럽게 귓가를 휘감는 목소리에 가슴이 떨려 왔다. 청우는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고는 안을 헤집던 손가락을 빼냈다.
이서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비비다가 그의 몸 위로 제 몸을 겹쳤다. 성기를 쥐고 벌어진 틈에다 맞춘 뒤에 저도 모르게 숨을 참으며 천천히 삽입했다. 선단이 입구를 툭 뚫고 들어갔으나 그 이후로 무언가가 막힌 것처럼 전진하기가 쉽지 않았다. 생각보다 너무 좁았다. 원래 이런가? 청우는 순간 당황해서 입을 열었다.
“야, 이거 안 들어갈 것 같은데…….”
“원래……. 안 들어갈 것 같을 때 뚫어 줘야 하는 거야.”
이서가 청우를 돌아보았다. 그는 이전보다 힘든지 미간에 주름이 잡혀 있었다. 청우는 혀로 제 입술을 핥으며 여기서 머뭇거리다가는 이서를 더 힘들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이서의 허리를 쥔 다음, 성기를 퍽 밀어 넣었다.
“윽!”
성기가 쑥 빨려 들어가며 강하게 조여 오는 느낌에 청우는 이를 악물었다. 하마터면 바로 사정할 뻔했다. 눈앞이 아찔해졌다. 주먹을 꽉 쥐었다가 펴며 압박감을 감내하는 사이 이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고개를 숙여 손등에 이마를 묻고 있었다. 팔뚝에 힘줄이 선명하게 섰다. 그의 온몸에 힘이 들어간 것이 느껴졌다. 힘을 너무 준 나머지 손끝이 떨리는 게 보였다.
덩달아 청우의 몸까지 경직되었다. 청우는 이서의 몸을 조심스레 더듬었다. 성기가 터질 것 같았으나 움직이지도 못하고 이서의 귀, 목덜미, 어깨에 입을 맞추었다.
“괜찮으니까, 움직여 봐.”
이서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그가 느낄 고통이 가시기를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경험상 바로 움직이는 것보다는 시간을 두는 게 더 좋았던 듯했다. 자신이 그를 아프게 한 것 같아,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기도 했다.
청우는 아찔한 자극으로 차오른 숨을 삼키며 한 손으로 이서의 성기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살 기둥을 손끝으로 애무하는 사이 몸의 힘을 조금 푼 이서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고 머리칼을 쓸어 올리더니 팔을 뻗어 협탁 위에 놓인 담뱃갑을 집었다.
“잠깐만…….”
이서가 움직일 때마다 성기가 내벽에 꽉꽉 눌리며 압박감이 심해졌다.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는지 힘겨운 신음을 흘리더니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이서는 담배에 불을 붙인 뒤에 끝을 빨아들이며 매트리스를 양손으로 짚고 허리를 움직였다.
그의 몸이 앞으로 밀리면서 꽉 맞물린 속살이 성기를 천천히 내보냈다. 이서는 침대 헤드를 한 손으로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청우는 그의 허리를 쥔 채로 각도를 맞추었다. 다른 손으로 담배와 함께 연기를 뱉어 낸 이서가 몸을 뒤로 밀자 내벽이 좆을 먹었다.
“후으…….”
이서는 담배를 다시 문 채 몸을 앞뒤로 부드럽게 흔들었다. 맞붙은 채 살 기둥을 심하게 압박하던 안에 조금의 여유가 생겼다. 그가 연기를 뿜어내면서 몸이 점차 이완되는 게 느껴졌다.
담배를 피우며 통증을 견디고, 쾌감을 이끌어 내려고 유연하게 움직이는 몸이 시각적인 자극을 주었다. 청우는 이서를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아래가 조이면서 몸 전체가 새하얘지는 감각이 찾아와 눈가를 찡그렸다. 이서는 각도를 틀어 하체를 한쪽으로 찧었다. 선단이 내벽에 파고들 때면 이서가 희미한 신음을 흘렸고, 그의 몸이 느슨해졌다.
청우는 그의 리드를 따라 천천히 허리 짓을 했다. 이서가 의도하던 방향으로 성기를 안으로 처넣었다가 천천히 빼냈다. 이서의 좆을 연신 문지르다가 음낭을 감싸 쥐듯이 주물렀다. 고개를 숙여 눈에 보이는 새 한 마리를 입술로 머금자 이서가 고개를 젖혔다.
“아, 흣. 거기 더…….”
귓가로 흩어지는 이서의 신음에 청우는 검은 새를 빨아들였다. 그와 동시에 좆을 품은 내벽이 꿈틀했다.
청우는 허리를 조금 틀어 이서가 원하는 곳을 쑤셔 올렸다. 이서의 입에서 긴 숨이 터져 나왔다. 그의 낯에서 고통이 옅어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입술을 뻐끔대며 연기를 내보내던 이서가 이내 타들어 가는 담배를 침대 헤드에 지져 껐다.
이서의 안은 그를 닮았다. 거칠게 빨아들였고 쉽게 빠져나갈 수 없었으며 대담하게 성기를 붙잡았다. 청우는 그의 귓바퀴와 어깨를 번갈아 입술로 문질러 대며 성기를 쳐올렸다.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던 움직임에 점차 속도가 붙었다. 귀두가 내벽에 퍽 짓눌려질 때의 감각이 황홀했다. 입구가 왕복하는 성기를 유연하게 조여 쾌감이 미친 듯이 솟아올랐다.
“아, 흐읏, 음.”
“읏, 윽……. 하으.”
이서가 고개를 틀어 청우를 돌아보더니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당겼다. 입술이 맞닿았다. 둘은 서로의 입 안을 열렬하게 헤집으며 아래를 맞물렸다. 척척 맞아 들어가는 움직임에 차진 소리가 났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구멍이 뜨거운 열락을 선사했다. 손으로 쥐고 흔들 때와는 차원이 다른 쾌감이 몸을 긁었다.
손을 크게 벌려 탄탄한 가슴을 주물렀다. 유두를 부드럽게 비틀자 이서의 입술 새로 작은 탄성이 흘렀다. 혀를 비비고 가슴을 애무하고 좆을 쥐어 훑으며 이서의 안 깊숙한 곳으로 제 것을 쉬지 않고 처넣었다.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 청우는 이서를 와락 끌어안으며 물었다.
“좋아? 하, 네가 좋았으면 좋겠어.”
지금 들이닥치는 쾌감과 애정이 자신의 것만은 아니었으면 했다. 자신을 안을 때와 다름없는 기쁨을 그가 얻어 가기를, 제가 그에게 안기며 겪었던 감각과 감정 중 가장 좋았던 것만이 그에게도 스며들기를 바랐다.
이서가 입꼬리를 틀어 올리며 고개를 기울여 청우의 머리에 이마를 댔다.
“끝내줘.”
이서다운 감상 한마디에 열기가 솟구쳤다. 청우는 입술로 그의 입을 틀어막으며 더 거세게 허리를 흔들었다.
둘은 조금도 떨어지기 싫다는 듯 서로의 몸을 어루만지고 입술을 맞대며 교접했다. 청우는 이서의 좆에서 흘러나온 쿠퍼액을 달아오른 기둥에 펴 발랐다. 앞뒤로 척척 젖은 소리가 흘렀다. 성기를 깊게 박을 때면 이서의 새가 흔들거리듯 날았다. 새 세 마리를 손끝으로 문지르자 아래가 바짝 조여들었다. 그의 안에 박힌 것부터 시작해 손끝, 발끝까지 타오르는 듯했다.
좋아하는 사람을 안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몸이 황홀하게 녹아내렸다. 이서에게 처음 안겼을 때 그에게 마음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기뻤을까. 하지만 결국에 제 모든 처음은 이서와 함께했다. 그는 처음에 의미를 두지 않을지도 모르겠으나 제 처음과 끝 모두 이서일 것이라 벅차올랐다.
“아윽, 흣! 하, 좋다, 청우야. 아……!”
“읏, 아흐으, 정이서, 이서야.”
이제 생각은 문장이 되지 않고, 정신은 흩어져 성감이 피워 낸 연기로 자욱했다. 그저 좋았다. 이서를 원했고 그와 한 몸으로 이어졌다는 찬란한 사실만이 타오르는 열기를 더욱 거세게 지폈다.
이서가 손으로 청우의 허리를 당기며 더욱 깊숙한 곳으로 끌어들였다. 눈이 마주칠 때면 그는 눈가를 찡그린 채로 웃었다. 청우는 그의 시선 안에서 감각하는 것들을 마음껏 드러냈다.
서로가 절정에 다다르고 있음이 여실히 느껴졌다. 청우는 이서의 허리를 꽉 잡고 성기가 입구에 걸치도록 뺐다가 뿌리 끝까지 깊숙이 처넣었다. 녹진하게 풀린 구멍이 좆을 쉴 새 없이 조여 왔다. 쾌감이 뭉게뭉게 번졌다. 긴 왕복이 계속되는 동안 이서는 제 좆을 쥐고 빠르게 쳐올렸다. 그의 입에서 목을 긁고 나오는 신음이 터졌다.
“하, 윽.”
“으읏, 흑, 아……!”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성기가 내벽 깊은 곳으로 처박혔을 때, 허벅지가 잘게 떨리며 참을 새도 없이 쾌락이 분출되었다. 이서의 어깨에 이마를 박고 미친 듯이 피어오르는 쾌감을 견뎠다. 이서의 몸이 전율하는 것이 손끝으로 느껴졌다. 그의 성기에서 정액이 뿜어져 나오는 게 보였다.
둘은 한참을 움직이지 않고 여운을 음미했다. 눈앞이 완전히 까맣게 번졌다가 돌아온 기분이었다. 가득 밀려와 떠나지 않는 충만감을 느끼며 청우는 이서의 뺨에 키스했다. 이서가 고개를 틀어 입술을 맞물렸다. 서로의 살덩이가 얽혀 고인 여운을 부드럽게 헤쳤다.
입술을 떼어 내자 이서가 힘들다는 듯 장난스레 혀를 내밀고 헐떡였다. 청우는 웃으면서 그의 귓가에 입을 맞추고는 허리를 뒤로 물렸다. 성기가 툭 빠지고 나자 몸이 완전히 풀어졌다.
콘돔을 빼내는데 이서가 앓는 소리를 내며 대자로 누웠다. 그에게 다가가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었다.
“와……. 체력 소모가 엄청나네.”
“응.”
“반성해야겠어. 내가 우리 청우를 그동안 너무 괴롭힌 것 같아서.”
능청스러운 자기반성에 청우는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이서는 능숙했고 자신은 서툰 편이었으니 저보다는 그가 더 힘들었을 것이다. 미안하면서도 고마운 마음에 콧등에 입을 맞추자 그가 웃는 눈으로 청우를 올려다보았다.
“좋았어?”
“응, 너무. 너는? 아팠지?”
“처음에만. 잘하던데?”
“다행이다.”
“내가 그렇게 좋아?”
장난스러운 물음에 청우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의 입가에서 웃음이 사그라들었다. 둘은 진중한 낯과 애정 어린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어루만지며 입을 쪽쪽 맞췄다. 입술과 손이 닿는 곳마다 고운 빛을 띤 온기가 피어났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일어나 함께 욕실로 들어갔다. 몸을 씻으며 가볍게 페팅까지 하고 나오자 목이 말랐다. 냉수를 꺼내 따라 한 잔 마시고선 이서에게 컵을 건넸다. 청우는 물을 마시는 그의 낯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가 숨기려고 하면 얼마든지 숨길 수 있었기에 한 꺼풀을 벗겨 속을 들여다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충만한 이때라면 들을 수 있을 듯했다.
따사로운 오후의 햇볕이 소파 위로 들이쳤다. 소파로 가 앉은 이서가 눈살을 찌푸리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가 보는 풍경을 잠시 좇다가 청우는 창가로 향했다. 블라인드를 친 다음 돌아서며 물었다.
“나한테 할 말 없어?”
이서는 청우의 물음을 갑작스럽게 여기지도 오리발을 내밀지도 않았다. 분명 할 말이 있다는 뜻인데도 그는 입을 닫고서는 무언가를 생각하듯 눈길로 다른 곳을 더듬었다.
“글쎄.”
청우는 끈질기게 기다리려다가 한 발자국 다가갔다. 입꼬리를 습관처럼 올린 이서의 낯빛이 살짝 가라앉아 있었다.
“뭔데.”
연이은 물음에 이서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는 이내 숨을 털어놓더니 소파에 몸을 묻었다.
“만약에 산영이랑 나랑 물에 빠진다면 말이야. 누굴 먼저 구할 거야?”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전혀 예상하지 못한 황당한 물음에 얼이 빠졌다. 그러나 이서는 농담이 아니라는 듯 진지한 눈을 했다.
“질문을 바꿔 볼까? 만약 집에 불이 났는데 산영이랑 내가 갇혀 있다면?”
“왜 그런 가정을 하는 건데.”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지만, 실제로 그런 사고가 생겼을 때 한쪽만 택하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어떻게든, 무슨 노력을 해서든 두 사람을 구할 것이었다. 물론 그런 과정에서 누군가를 먼저 빠져나오게 하는 일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서가 원하는 대답은 그런 게 아닌 듯했다. 여기서 너를 먼저 구하겠다고 하는 게 맞을까. 그런 답을 준다고 해서 이서가 만족할 것 같지는 않았다.
청우는 이서가 대체 왜 이런 가정에 도달했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딱히 짚이는 것이 없어 난감할 뿐이었다. 굳은 분위기 속에서 이서가 피식 웃으며 입가를 쓸어내렸다.
“이건 농담.”
“어?”
“산영이 만나지 마.”
“…….”
“이게 진담.”
뚝 떨어진 말에 청우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미소를 입에 건 이서의 눈은 빛이 들지 않아 평소보다 어두웠다.
“무슨……. 스키장 가지 말라는 얘기야?”
“아니. 앞으로도 쭉 만나지 말라는 얘기야.”
내쉬는 숨이 버거워졌다. 청우는 마른침을 삼키며 당황이 덮친 표정을 가다듬었다. 도대체 이서가 왜 이런 말을 하게 되었는지 파헤쳐야 했다.
최근 산영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했나? 아니다. 이서와 함께 있을 때 그의 연락을 받은 적이 있나? 메시지는 간간이 주고받았으나 이서가 신경 쓸 정도로 잦지는 않았다. 이서가 아닌 산영을 우선한 적이 있나? 없다.
걸리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은 이서에 비해 둔한 편이고, 이서의 입장은 저와 다르니 그의 마음에 흔적을 남긴 일이 분명 있었을 테다. 예전에 좋아했던 사람과 함께 1박을 한다고 해서일까? 고양이 이야기가 이서에게는 다르게 가닿았을 수도 있다. 혹은 예전의 일이…….
“왜……. 왜? 내가 뭐 잘못했어?”
“…….”
“아니면, 알잖아. 난 이제 산영이 안 좋아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너야.”
길었던 짝사랑이 자신도 인식하지 못했던 습관을 만들어 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이서의 눈에는 더욱 선명하게 들어왔을 수도 있고. 말해 준다면 고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서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잘못한 거 없어. 네 마음도 잘 알고 있고. 그러니까 이유를 너한테서 찾는 건 의미 없는 일이야.”
“그럼 왜?”
잘못한 게 없다는 말이 더 무서웠다. 문제가 있다면 바로잡으면 될 텐데, 그런 일이 아니라는 뜻이었으니까.
이서의 시선이 채 닫히지 않은 블라인드 사이로 새어 들어온 빛에 다다랐다. 의식적으로 올라갔던 입꼬리마저 제자리를 찾았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침묵을 지키다가 청우를 직시했다.
“아예 사랑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한 번 사랑했는데 두 번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어? 네가 사랑했던 산영이의 모습은 그대로인데.”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무겁게 가슴을 꿰뚫었다. 청우는 저도 모르게 퍼뜩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건…….
한 해의 마지막, 바다를 바라보며 술을 나누던 날 산영을 왜 좋아했냐고 물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에 대한 답이 이서의 마음을 붙잡았던 걸까. 하지만 거리낌 없이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은 더 이상 산영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그럴 일이 없었고.
“그건 말도 안 되지. 내가 지금 너를 좋아하는데 어떻게 산영이를 다시 좋아해? 내 마음이 변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럴 일이 아예 없을 거라고 단정 지을 이유도 없지.”
그는 꽤 예전부터 이런 생각을 해 왔던 듯 단호했다. 청우는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가라앉히려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쓸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은 괜찮냐? 내 마음이 그렇게 휙휙 바뀔 것 같으면 산영이 말고 다른 애들은?”
“위험이 큰 사람을 제거하자는 거야. 그 긴 시간 동안 네 마음속에 있었던 앤데, 흔들리지 않을 수 있어? 아무것도 모르는 걔는 늘 웃는 얼굴로 착하고 예쁘게 굴면서 네 옆에 있겠지. 둘이 붙어 있는 걸 보면서 나는 네 속의 이산영과 내 무게를 재고 또 재고…….”
뻔하지 않냐는 듯 이서가 옅게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청우는 거대한 벽에 부딪혔음을 알았다. 그 벽은 사랑에 대한 이서의 불신이었다. 불안이자 두려움이었다.
아마 산영에게 향한 마음을 옆에서 지켜보았기에 자신을 더 믿을 수 없을 터였다. 지나간 감정을 후회해 본 적은 없으나 그 감정을 여과 없이 내보였던 과거만큼은 후회되었다. 이렇게 말로 내뱉기까지, 그는 혼자서 어떤 생각을 거쳤을까. 그걸 생각하면 미안하고 속상했다. 하지만 너무 일렀다.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고 함께하기로 한 지 아직 얼마 되지도 않았다. 마음이 여기서 더 깊어지고 같이한 시간이 둘 사이에 끈끈한 접착제가 되면, 분명 불신은 옅어질 테고 그 자리를 믿음이 차지할 거다.
“시간을……. 시간이 필요한 일이잖아. 이렇게 무 자르듯 결정할 일이 아니라, 내가 걔한테는 이제 마음이 갈 일이 없다는 걸 너도 알게 될 때…….”
“차라리 지금 결정하는 게 낫지 않겠어?”
이서는 고되어 보였다. 이런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긴 걸음을 끌었던 것처럼 지친 낯이었다. 청우는 발밑이 푹 빠지는 느낌에 발끝에 힘을 주었다.
“청우야. 사랑은 백 아니면 영이야. 나한테 백을 줄 게 아니면, 남기지 말고 가져가.”
저라도 중심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주먹을 꽉 쥐었으나 이어진 말에 힘이 풀렸다. 이서의 목소리는 공허한 울림을 남겼다. 산영과의 관계를 끊지 않을 거라면 여기서 헤어지자는 말처럼 들렸다. 어떻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청우는 절망 어린 낯을 쓸어내렸다. 발끝을 내려다보며 거대한 운석이 떨어진 듯 이리저리 솟구치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뜨겁고 부글부글 끓는 것들이 이리저리 튀어 가슴을 따갑게 했다.
두 사람의 거리를 침묵이 메웠다. 그 구덩이는 아주 깊었고, 차오르는 감정이 우수수 떨어졌다. 조금 전의 아주 행복했던, 하늘을 날았던 시간이 순식간에 추락하는 듯했다. 청우는 땅바닥에 떨어진 순간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너 그럼, 왜 나한테 안아 달라고 했어?”
“…….”
“너 설마 이 말 하려고 그런 거였냐?”
청우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그런 거라면 몹시 처참할 것 같았다. 그가 제 몸으로 자신과 거래라도 하려는 거였다면…….
이서가 짧은 웃음을 흘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야. 너한테 그런 게 통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냥…….”
이서 또한 그 시간을 떠올리듯 아득한 빛이 그의 낯을 휩쌌다. 그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가 떨어졌다.
“너한테 안기고 나면 내가 이런 말을 안 할 수 있을 줄 알았지. 근데 씨발, 더 욕심이 나네…….”
이서가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며 한숨 섞인 웃음을 흘렸다. 청우는 자괴감이 잡아먹은 얼굴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가 저런 표정을 짓게 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에는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는 무거운 사실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또다시 침묵. 열여덟 때부터 함께했던, 감정을 떠나 소중한 친구인 산영과 눈앞의 사랑하게 된 남자를 떠올릴 때 이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영화는 못 보겠다, 그치?”
그의 낯에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또다시 훌쩍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공기에 한 걸음을 내밀었다.
“쉬다 가.”
“어디 가는데.”
돌아서는 이서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자 이서가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 솔직히 여기서 더 바닥 치는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아.”
“…….”
“오늘은 이렇게 끝내자.”
이서가 청우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제 손목을 빼냈다. 홀연히 빠져나가는 그를 차마 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돌아보지 않고 쫓기듯이 집을 나갔다. 청우는 홀로 남은 채 거대한 벽을 마주했다.
백 아니면 영. 흑 아니면 백. 이서에게 사랑은 그런가 보다. 청우는 그 벽의 가장 아래에 그의 유년이 있음을 깨달았다. 오랜 시간 쌓아 온 벽이 제 손 하나에 허물어질 수는 없을 터였다.
어떤 답도 내리지 못한 채로, 미로 한가운데 떨어진 기분에 휩싸여 청우는 이서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날 밤이 깊도록 이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
과외 할 때 가져갈 자료를 다 정리한 청우는 기지개를 켰다. 뿌듯한 숨을 내쉬며 외장 하드를 뽑으려는데 폴더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사진’이라고 쓰인 폴더에 들어가자 연도별로 이름이 붙은 작은 폴더들이 나타났다.
핸드폰을 바꿀 때마다 옛날 사진은 다 이곳에 백업해 두었다. 청우는 그중 열여덟 모습을 담은 사진을 눌렀다. 다소 저화질의 사진 속에는 자신과 산영이 있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둘 다 젖살이 빠지지 않았고, 지금과 달리 어린 티가 풀풀 풍겼다. 아마 이때도 스스로를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지금 보니 우습기만 했다. 미래의 자신이 지금의 저를 보아도 비슷한 생각을 하겠지.
사진을 쭉쭉 넘겼다. 아직도 연락하고 만나는 동창들과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는 친구들을 오랜만에 보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사진 하나하나에 추억이 새록새록 솟아올라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잊고 있던 웃긴 사진을 발견해 친구에게 보내 주고 나서 다음 연도 폴더를 열었다. 이렇게 가끔 꺼내 볼 때가 아니면 돌아볼 일 없는 기억들이 아렴풋한 그리움을 가지고 왔다. 청우는 사진을 낱낱이 감상하다가 매 폴더에 산영이 있음을 깨달았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그가 찍힌 사진의 비중이 줄기는 했지만, 매년 함께 시간을 보냈으니까. 그만큼 수많은 추억이 쌓였고, 비록 홀로 품은 사랑으로 앓았다고 하나 그 순간들이 바래는 건 아니었다.
문득 이 시간이 이서에게는 어떻게 가닿을까 생각하자 웃음기가 사그라들었다. 제게는 산영이 친구였다. 하지만 이서도 그렇게 느낄까. 처음부터 이서는 자신을 산영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인식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산영 또한 자신이 좋아하던 사람으로 남았을 테다. 청우의 시선이 자연스레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으로 향했다.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이서와 연락하지 않은 지 벌써 사흘째였다. 연락은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운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 그가 그런 말을 힘겹게 꺼낸 이상 흐지부지 넘어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마음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서를 만나 봤자 도돌이표가 될 게 뻔했다. 그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주고 싶지도 않았고.
그러나 그가 보고 싶었다. 청우는 고개를 젖히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서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식으로 말했지만, 애초에 그는 제게 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제 마음으로 들이닥쳤다. 자신이 그를 고른 것이 아니었다.
‘나한테 쏟아지던 모든 관심과 사랑이…….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 거지. 마법처럼.’
마법처럼 사라졌다가 돌아온 사랑. 그 경험이 이서에게는 강한 불신을 남겼을 테다. 하필이면 자신이 가장 친한 친구인 산영을 짝사랑했고, 그 마음을 전부 알았기에 쉽게 믿기도 힘들다는 거겠지.
마음이 몹시 아프고 쓰라렸다. 제가 그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서글프기도 했다. 이서에게 조금 더 적극적으로 보여 주었어야 했던 것일까. 혹은 제 사랑이 너무 서툴러 그의 가슴을 가득 채우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심란했으나 단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이서와 헤어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서가 정말 그런 마음으로 말을 꺼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와의 이별은 어떤 선택지에도 없었다. 그렇다면 산영과의 이별은……. 어떻게 관계를 그렇게 한순간에 끊어 버릴 수 있단 말인가.
청우는 멍하니 빈 벽을 바라보다가 이렇게 시간을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 공백은 서로에게 불안만 심어 줄 뿐이었다. 핸드폰을 들어 연락처를 눌렀다. 상대는 금방 전화를 받았다.
고등학생 때 함께 놀다가 배를 채울 때면 그 메뉴는 늘 닭갈비였다. 동네에 사람들 사이에서 꽤 유명한 닭갈비집이 있었는데, 맛이 좋고 양도 많아 친구들과 자주 찾았다. 그때의 기억으로 약속 장소를 닭갈비집으로 잡았다. 맛깔스럽게 양념된 닭고기가 팬 위에서 익어 갔다.
청우는 빈 잔에 사이다를 따라 건넸다. 산영이 사이다를 한 모금 마시고는 몸을 떨었다.
“차갑다.”
“오늘은 알바 안 가?”
“응, 쉬는 날이야.”
“그거 이번 방학 때까지만 한다고?”
“응, 이제 나도 졸업생이니까. 공부 좀 더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아.”
산영이 성적표를 보고 눈물을 찔끔 흘렸다며 우는소리를 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생각했던 것보다 못 나왔을 뿐이지, 그는 꽤 잘하는 편이었다. 청우는 웃으면서 젓가락을 들었다.
어느새 익은 통통한 살점을 입에 넣고 씹었다. 오랜만에 먹는 닭갈비는 동네 식당보다는 못했지만 맛이 괜찮았다. 밥은 잘 먹고 다니려나. 청우는 냉전 중인 애인을 떠올리며 한숨을 삼켰다.
“누나들은 잘 계셔?”
“응, 청우 너 한번 놀러 오래. 맛있는 거 사 준대.”
“말씀만으로도 감사하다고 전해 드려.”
“그래. 아, 저번에 누나들이 건이 봤잖아. 그 뒤로 자꾸 건이에 대해서 물어본다? 눈치챈 걸까?”
산영이 다소 심란해진 낯으로 고구마를 삼켰다. 그는 감정이 얼굴에 다 드러나는 편이니 그의 누나들이 건을 그냥 친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주 진한 우정이나……. 그 이상을 추측했을 수도 있다.
“아예 숨길 생각이야?”
“그건 아니야. 그래도 천천히 하려고 했는데……. 누나들이 받아들일 시간을 만들고 싶었거든. 근데 벌써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나 봐.”
건과의 교제 사실을 제게 알리던 산영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했다. 사실 당시에는 이미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지만, 산영은 반짝거리는 눈으로 건과 사귀고 있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너한테는 꼭 말해 주고 싶었다며 목소리를 떠니 그저 축하한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친구의 손을 꼭 잡으며 너라면 이해해 줄 거라 믿었다고 좋아했다.
산영의 확신이 부러웠다. 가족들에게 밝힐 준비도 하고 있을 정도로 건과의 미래를 당연하게 여기는 그 단단함이. 청우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물었다.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뭐?”
“차건이 나 싫어하잖아.”
산영이 숨을 헉 들이켰다. 어떻게 알았냐는 듯 동그랗게 뜬 눈을 보자 쓴웃음이 샜다. 그걸 자신이 모를 거라고 생각한 게 더 대단했다. 이내 산영의 낯이 시무룩해졌다.
“미안…….”
“왜 네가 미안해해.”
“건이 기억 잃고 나서 너희 둘이 서로 별로 안 좋아한다는 거 알게 됐는데, 그래도 건이랑 너는 나한테 정말 소중한 사람들이니까, 그래서 친해졌으면 했어. 언젠가는 그럴 거라고 생각했구. 근데 잘 안 되는 거 보면 내 욕심이었던 것 같아. 미안해.”
진심 어린 사과에 청우는 그만 웃어 버렸다. 산영의 바래지 않는 긍정과 순수가 좋았다. 누군가는 그의 그런 점을 밉게 보기도 하지만, 자신은 그를 보며 용기를 얻을 때가 더 많았다.
“사과 들으려고 한 건 아니고, 궁금해서. 걔가 나 싫어하는데 어떻게 날 계속 만났어? 걔가 나 만나지 말란 말 안 했어?”
내내 궁금했던 일이었다. 기억을 잃은 건이 단번에 제 마음을 포착했다면 기억을 잃기 전의 건 또한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런데 어떻게 그 성격으로 자신을 가만뒀는지 그것도 대단하다 싶었다.
산영이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굴렸다. 그는 기억을 떠올리듯 음, 하고 목소리를 흘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런 적이 있기는 했어. 근데 건이는 아니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자기밖에 없다는 거. 앞으로도 쭉 그럴 거라는 거.”
청우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산영의 첫사랑은 건이었고, 건은 자신과 마주치기 전까지 산영과 꽤 돈독한 시간을 쌓았다. 그리고 그는 타고나길 자신감이 넘치니 저 따위는 상대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과 ‘우리’는 달랐다.
이서와 자신이 쌓은 시간은 아직 깊지 못했고, 이서에게는 벽이 있었으며 자신은 아직 굳센 믿음을 주지 못했다. 산영의 말을 듣고 나니 마음이 정리되었다.
“산영아.”
“응.”
“나 사귀는 사람 생겼어.”
“어?”
“그 사람 남자고.”
“어어?”
산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한껏 벌어진 입을 막았다. 손바닥 사이로 “허어억…….” 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털어놓고 나자 후련해졌다. 청우는 개운한 미소를 지었다. 엄연히 커밍아웃이니 상대가 이서라는 사실은 아직 밝힐 수 없겠지만, 산영에게 당당하게 제 마음을 고백했다는 일만으로도 또 다른 용기가 되었다.
“언제?”
“얼마 안 됐어. 그래서……. 우리는 아직 너랑 차건처럼 생각할 수가 없어.”
건과 자신을 언급하는 말에 산영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어렸다. 청우는 차가운 잔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걔가 나한테 오래된, 친한 친구가 있다는 거 알아. 근데 내가 걔한테 믿음을 못 줘서 불안한가 봐. 어쨌든 너도 남자고 걔도 남자고…… 하니까.”
“응, 응.”
“나는 걔가 진짜 중요해. 그래서 믿음을 주고 싶어.”
청우가 지금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 듯한지 산영이 눈을 끔뻑이며 멍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청우는 숨을 크게 내쉬며 보다 단단해진 낯으로 산영을 응시했다.
“그래서 너랑 당분간 연락하지도 만나지도 못할 것 같다. 어쩌면…… 꽤 오래가 될 수도 있고.”
“어……. 그분이랑 나랑 만나 보면 안 돼? 우리 그냥 친구인 거 지내다 보면…….”
청우는 고개를 저었다. 산영에게는 완전한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이미 지나가 버린 감정을 털어놓아 혼란을 주는 건 못 할 짓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산영은 이 일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게 가장 미안쩍은 지점이었다.
“미안하다. 누가 더 소중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은 걔한테 더 집중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 그래.”
“아니야, 미안해하지 마.”
산영의 낯에 어렸던 당황한 빛이 가셨다. 그가 이내 청우의 손을 덥석 쥐며 기쁘게 웃었다.
“일단 진짜 축하해. 난 청우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니까 진짜 신기해. 잘됐다. 그리고 무슨 말 하는지 알겠어. 나도 건이랑 사귀다 보니까 이해해. 나 신경 쓰지 마.”
“이해해 줘서 고맙다.”
“응, 그리고……. 좀 못 만나면 어때. 우중이나 희정이도 다 자주 못 만나고 그러잖아.”
마음의 짐을 덜어 주는 말에 청우는 한숨을 내쉬듯 웃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이제는 정말 순수한 우정이기에, 그간 쌓은 시간이 있기에 오래 만나지 못하더라도 친구라는 의미가 변질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언젠가 산영에게 이서를 제 애인이라고 소개하는 날이 오면 좋을 테다.
“그래.”
“잘할 거야. 청우 너만큼 믿음직한 사람 못 봤어. 그러니까 괜찮아지면……. 나중에 나한테 꼭 소개해 줘.”
산영이 열여덟 소년 같은, 그러나 훨씬 단단하게 여문 낯으로 웃었다. 순수한 우정과 고마움이 둘 사이로 가득 들어찼다. 청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사랑하는 사람에게 갈 차례였다.
집으로 돌아와 냄새가 밴 옷을 갈아입고 향수를 뿌렸다. 손목에서 나는 상큼한 향이 기분을 산뜻하게 했다. 마음이 가벼워졌다.
창밖 하늘이 쾌청했다. 연이은 한파가 몰아치고 있기는 하지만 미세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날들이 계속되었다. 청우는 이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 이어지던 연결음이 끊기고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청우야.]
“어디야?”
[나 잠깐 일 있어서 과방에.]
“나 가도 돼? 만나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청우는 흘러가는 뭉게구름을 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래. 내가 내려갈게, 정문 앞에서 봐.]
“어, 알았어.”
전화가 끊기고 곧장 집을 나왔다. 향수가 좋기는 한데 야외로 나오면 향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이서는 다가오기만 해도 은은하게 잘 풍기던데. 나중에 어떻게 뿌리는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정문에 다다라 멈춰 섰다. 계절 학기 때문인지 오가는 학생들이 꽤 있었다. 목 끝까지 지퍼를 채운 패딩에 얼굴을 묻은 채 얼마간 서 있을 때였다. 어깨를 건드리는 손길에 뒤를 돌아보자마자 상큼한 향이 퍼졌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 방금 왔어.”
역시, 얼굴을 보니 좋았다. 청우는 반가운 이목구비를 구석구석 훑다가 물었다.
“차 안 가지고 왔어?”
“응.”
“밥은.”
“먹었어, 넌?”
“나도. 그럼 커피 한잔 사서 좀 걸을래?”
“안 춥겠어?”
“그런가.”
“너 괜찮으면 걷고.”
쌀쌀하기는 했으나 좀 걸으면서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근처 카페로 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오늘 춥긴 하다.”
“내일은 더 추울 거래.”
“그래? 어떻게 여기서 더 추워지냐.”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둘은 시시한 이야기로 시간을 채웠다. 다소 어색한 공기가 흐르기는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곧 커피가 나왔다. 따뜻한 컵이 손끝을 녹였다.
두 사람은 카페를 나와 학교로 돌아갔다. 구석에 자리한 박물관 뒤로 꽤 길게 조성된 산책로가 있었는데, 오늘은 사람이 없었다. 바람이 멎어서 걸을 만했다. 겨울에도 잎이 떨어지지 않은 나무가 푸르렀다.
“뭐 했냐, 그동안.”
“그냥, 별거 안 했어. 연극 대본 쓰는 거 좀 봐주고.”
“어땠어?”
“그럭저럭. 저번에 올린 것보다는 못한데 나쁘진 않은 정도.”
그 정도라면 이번 연극도 꽤 재미있을 것 같았다. 이서는 참여하지 않는다지만 다음 학기에 함께 보러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청우는 고개를 주억이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신맛이 감도는 쌉싸래한 액체가 고소한 향을 남기고는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따뜻한 게 들어가자 몸이 좀 풀렸다. 천천히 발을 떼며 청우는 입을 열었다.
“이서야.”
“이번에 올라가는 주연 애가 연기를 잘해.”
“정이서.”
“대본이 별로여도 연기 보는 맛은 있을 거야.”
의도적으로 제 부름을 모른 체하는 이서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제야 이서가 청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그냥 없던 일로 하자.”
“어?”
“그날 그거, 못 들은 걸로 해. 내가……. 욕심이 좀 과했어.”
연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사흘간 그의 가슴을 채운 감정은 체념이었을까. 이제 그의 낯을 완전히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있었던 일을 어떻게 없었던 일로 해.”
“왜. 그게 더 좋은 일 아니야? 나도 친구도 지킬 수 있으니까.”
“내가 너한테 안 좋은 말 할 것 같아서?”
“넌 안 그러겠지. 근데 어떤 쪽을 선택하든 너한테는 최악일 테고, 그걸 내 손으로 쥐여 주는 거잖아.”
청우는 고개를 저었다. 제게 최악의 선택지는 이별이거나 이서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었다. 산영과 멀어진다고 해서 제 선택을 후회하거나 이 일을 빌미로 이서를 원망할 일은 절대 없었다.
“산영이한테 사귀는 사람 있다고 말했어.”
미소 어린 낯이 일순 멍해졌다. 청우는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컵에 입술을 묻었다가 뗐다. 커피 향, 이서의 향, 풀숲에서 나는 상쾌한 향. 그 모든 것이 한데 뒤섞여 옅은 바람을 타고 흘러갔다.
“너한테 허락을 못 받아서 너라고는 말 안 했는데, 남자인 건 알아. 그래서 사정 설명하면서 당분간은 못 만날 것 같다고 했어.”
이서가 눈을 느리게, 마치 무언가를 지탱하듯 감았다가 떴다. 추위에 발개진 귀를 보며 감싸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손바닥을 뜨끈한 컵에 비비는데 그가 헛웃음을 흘렸다.
“뭐가 그렇게 쉬워.”
“안 쉬웠어.”
쉬웠겠냐. 청우는 혀를 차고는 손을 들어 이서의 귀를 감쌌다. 손끝에 닿은 귀걸이가 차가워 귓바퀴를 조심스레 문질렀다. 토성이 따뜻한 우주에 담겼다.
“산영이는……. 오래 같이 있었으니까. 너랑은 이제 시작이고. 내가 노력할게. 같이해 보자. 그래도 나중에……. 네가 괜찮으면 널 내 애인이라고 소개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긴 시간을 건너 드디어 산영을 순수한 친구로만 대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자신이 너무 들떴던 듯싶다. 중요한 것은 더는 가지 않을 길을 장식하는 게 아니라, 막 이어진 길을 다지는 일이었는데도.
이서가 제게 다른 길이 있음을 알려 주었다. 그 길을 그가 아닌 다른 사람과 걷거나 혼자 걸을 수는 없었다. 우여곡절이 많겠지만 그래도 앞으로의 시간이 기대되었다. 이 길을 걸으면서 친구를 포기한다거나 잃는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하나의 산을 넘고 나면 더 잘 정비된 길이 나타나리라고 믿었다.
쉬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힘이 들 테다. 그와 제가 각자 보냈던 세월이 한 점에 닿아 섞여 들려면 서로 큰 노력을 기울여야겠지. 그러나 그게 무섭지 않았다. 같이해 보고 싶었다. 이별보다는 그게 쉬웠다.
“나 너한테 소나기 같은 거 안 해. 그냥 오래 내릴게. 그러니까 너도 피하지 마.”
이서는 제 불모를 적신 단비였다. 자신은 그의 장마가 될 테다. 비를 머금고 나서 마른 흙은 더욱 단단해지기 마련이다. 청우는 눈가를 일그러뜨리는 이서를 올곧게 응시했다.
“내가……. 널 망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이렇게 너를 고립시키고, 내 마음대로…….”
“내가 애냐. 네가 하라는 대로 다 하게.”
청우는 탄식을 흘렸다. 저런 생각까지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모범생이 취향이라는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닌가 보다. 그의 속이 너무 깊어서 그런 걱정까지 하는 것 같았다. 본인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알고 보면 착하다니까. 마음이 애틋하게 녹아내렸다.
“나도 이번 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한 거야. 다른 건 모르겠다. 같이 맞추는 거잖아.”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생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회피나 이별보다는 이렇게 부딪치더라도 함께 있는 쪽이 훨씬 나았다. 말하고 나니 속이 시원해졌다. 청우는 한파가 몰아치는 겨울,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좋아해, 정이서. 나 되게 미련한 거, 너 잘 알잖아.”
제 마음이 온전하게 그에게 가닿기를 바랐다. 자신 있는 거라고는 미련하고 끈질긴 마음밖에 없었다. 짝사랑할 때는 그것이 치명적인 약점이었으나 이서를 사랑하며 강점이 되리라 믿었다. 진심을 오래도록 쏟아붓다 보면 언젠가 이서의 벽도 허물어지지 않을까. 오히려 옆에서 지켜봐 왔기에 그에게로 난 제 마음의 길을 확신할 수 있지 않을까.
청우는 미소를 띤 채로 이서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의 낯이 가장하던 단단함이 점차 뭉그러졌다. 이서는 한 걸음 다가와 청우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응, 알아……. 고마워.”
귓가에 닿는 숨소리가 잘게 떨렸다. 청우는 이서를 끌어안고 그의 등을 토닥였다. 올려다본 하늘은 눈부시게 쾌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