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소나기를 지나 (10/16)

10. 소나기를 지나

새소리가 들렸다. 청우는 선잠에서 깨어났다. 맑은 하늘 아래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누구도 밟지 않아 발자국도 남지 않은 깨끗한 곳으로 검은 차가 들어섰다. 클랙슨이 울려 청우는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이불을 정리하고 대강 씻은 뒤 외투를 입고 밖으로 나왔다.

공기가 유난히 상쾌했다. 발밑으로 눈이 뽀득뽀득 밟혔다. 청우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에 뒤를 돌아보았다. 잠을 자지 못했는지 이서의 안색이 안 좋았다.

먼저 걸음을 떼 뒷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운전석의 기사에게 인사를 하자 그가 핸드폰을 넘겨 주었다. 한숨을 내쉬며 지난밤 동안 온 연락을 확인하는데 이서가 차에 올라탔다.

“출발하겠습니다.”

차가 눈에 잠긴 별장을 빠져나왔다. 달리는 도로 위 정적만이 차를 채웠다. 둘의 분위기를 살펴보라는 요청이라도 받은 건지 기사가 룸 미러로 간간이 이쪽을 확인하는 게 느껴졌다.

간밤 내린 눈으로 도시는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솔잎에 맺힌 눈이 후드득 떨어지고, 제설제를 뿌려 녹아내린 도로가 빠르게 달리는 바퀴를 질척하게 붙잡았다.

모든 혼란이 사라지고 치솟았던 감정들도 가라앉았다. 이서가 자신을 받아 주지 않을 거라는 걱정은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잘되리라는 희망이 자리를 잡은 것도 아니었다. 밤사이 쏟아진 눈이 모든 것을 지워 버린 걸까. 어쨌든 제 마음은 모두 내보였고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차는 고속도로를 달려 서울에 진입했다. 익숙한 건물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차는 곧 청우의 집 앞에 멈춰 섰다. 제 집에 다다르고 나서야 청우는 이서를 돌아보았다.

“나 갈게.”

이서의 시선이 청우에게 닿았다. 그 또한 자신과 비슷한 기분을 느꼈을까. 아니면 느끼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을까. 뭐라도 말하고 싶었으나 어떤 말도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 청우는 그저 웃어 버렸다.

“조심해서 들어가라.”

청우는 기사에게도 인사를 건넨 뒤에 차에서 내렸다. 이서를 태운 검은 세단이 길을 떠났다. 차가 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까지 제자리에 서 있던 청우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창을 살짝 열어 두고 나갔는데도 라벤더 향이 은은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방 한가운데 서서 아, 하고 낮은 숨을 흘렸다.

첫 시험을 끝내고 나온 청우는 자판기에서 사이다 한 캔을 뽑아 마셨다. 쓸 수 있는 건 다 쓰고 나와 후련했다. 목을 축이는데 뒤따라 나온 윤수가 손을 내밀었다.

“나 한 입만.”

“다 마셔.”

음료가 반쯤 남은 캔을 건네자 그가 단번에 비우고는 쓰레기통에 버렸다. 오랫동안 시험지를 보고 있었더니 눈이 뻐근했다. 무거운 눈두덩을 비비고 기지개를 켜다가 걸음을 옮겼다.

“도서관 갈 거냐?”

“아니. 자리 없을 것 같아서 그냥 집에서 공부하게.”

“나도 가면 안 됨? 점심 시켜 먹고 같이 하자.”

“그래.”

윤수와 함께 강의동을 빠져나왔다. 문제 답안에 관해 의견을 나누는데 답이 갈릴 때마다 윤수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네 답이 맞을 수도 있잖아.”

“맞겠냐. 아, 나도 그렇게 쓸걸.”

“지나간 건 잊고 다음 시험 생각해.”

“부처야?”

윤수가 나도 너처럼 평온한 마음가짐으로 살고 싶다며 청우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몸을 기울였다. 최근 그 어떤 때보다 큰 격랑을 겪었던 청우는 그의 말을 웃으면서 넘기다가 정문을 넘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이서를 발견했다.

그날 이후 처음 보는 얼굴에 저도 모르게 쌓여 있던 그리움이 부스러기를 날렸다. 이서도 이쪽을 발견했고, 청우는 입가를 자연스레 풀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안녕.”

“응, 안녕.”

이서의 시선이 윤수에게 향했다가 다시 청우에게로 돌아왔다. 청우가 혀로 입술을 훑는 사이 그가 물었다.

“시험 끝났어?”

“어, 다음 거 공부하러 가려고.”

“그래, 열심히 해.”

“너도.”

이서가 웃으면서 지나쳤다. 이상할 것 없는 아주 자연스러운 대화였다. 불현듯 가슴이 찌르듯 아파 왔으나 무시했다.

“누구냐? 존잘이네.”

“친구.”

“저런 친구도 있었어? 무슨 모델 같다, 야.”

남들이 보기에도 확실히 잘생기긴 했나 보다. 자신은 처음 그를 보았을 때 그런 생각은 하지도 못했었는데. 청우는 속이 빈 웃음을 흘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집에 도착해 음식을 주문한 뒤 배달이 올 때까지 쉬기로 했다. 오랜만에 놀러 온 청우의 집 곳곳을 구경하던 윤수가 책상 한구석에 둔 향초를 들어 올렸다.

“너 이런 것도 있냐?”

“어.”

“좋아?”

“좋던데.”

“많네? 나 하나만 주라.”

“그건 안 돼. 다른 거 사 줄게.”

“선물 받은 거야?”

“……비슷해.”

받으면 받은 거지 비슷한 건 뭐냐면서 윤수가 핀잔을 주었다. 그가 책상 위를 둘러보더니 이번에는 책 사이에 꽂혀 튀어나와 있던 표 두 장을 꺼냈다.

“이건 뭐야? 뮤지컬?”

“아, 그거. 누가 줬어.”

“두 장이네? 누구랑 보게?”

이서와 가라고 받은 선물이고, 그와 함께 가고 싶었으나 이제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시험이 끝나면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이 뮤지컬을 보러 갈 수나 있을까. 쓴웃음을 삼키며 어깨를 으쓱였다.

“몰라.”

“알지? 난 여친 있어서 못 간다.”

“넌 생각도 안 했어.”

“뭐? 이 자식이.”

윤수가 장난스레 달려들었다. 청우는 그를 가볍게 피하며 뮤지컬 예매권을 책과 책 사이에 다시 잘 꽂아 두었다. 혼자서 청우를 잡겠다고 난리를 치던 윤수가 헥헥대며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근데 난 너 누구 생긴 줄 알았어.”

“……왜?”

“옷 잘 입고 다니길래. 아니었냐?”

그동안 옷을 너무 편하게 입고 다녔나 보다. 청우는 웃음을 흘리면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문득 탁상 달력 속 날짜가 눈에 콱 박혔다. 올해가 끝나 가고 있었다. 시간은 야속하게도 흐름을 늦추지 않았다.

알람 소리에 눈을 떴으나 몸이 몹시 무겁게 느껴졌다. 청우는 눈가를 잔뜩 찡그리며 일어났다. 시험 기간이라고 밤을 새우는 스타일은 아닌지라 잠이 모자라지는 않았는데 무척 피로했다. 장시간 책상 앞에 앉아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한숨을 푹 내쉰 뒤에 욕실로 향했다.

씻고 나오자 좀 괜찮아진 듯도 싶었다. 어제 사 온 삼각김밥을 데워 먹은 뒤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하늘이 우중충했다. 하필이면 날씨도 좋지 못했다.

오늘은 마지막 시험 날이었다. 시험 두 개를 치고 나면 끝이었다. 끝. 청우는 정말 끝이 다가왔다는 것을 실감하며 인문대 안으로 들어섰다.

강의실에 자리를 잡은 뒤 핸드폰을 꺼내 들어 무음 모드로 설정했다. 밤새 단체 대화방에서 메시지가 오갔으나 이서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 청우는 시간이 지나 꺼진 화면을 문지르다가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시간이 되어 사람들이 하나둘씩 들어와 자리를 채웠다. 조교가 시험지를 가져왔고, 곧 각자의 앞에 시험지가 배부되었다. 답안을 채우는데 머리가 무거웠다. 다 알고 있는 내용인데도 문장이 완성되기까지 오래 걸렸다. 왜 이러지. 청우는 펜을 쥐지 않은 손으로 목덜미를 매만졌다.

손바닥에 열기가 스며들었다. 감기인가. 현재로서는 미열에 불과했다. 아프다기보다는 그냥 컨디션이 안 좋은 것 같기도 했다. 한숨을 삼키며 펜을 움직였다. 평소보다 오래 걸려 시험 시간을 꽉 채우고 강의실을 나왔다.

따로 쉴 시간이 없어 바로 인문대를 나와야 했다. 다음 시험은 이서와 함께 듣는 강의의 시험이었다. 이서를 볼 수 있을 테지만 어떤 일도 없을 거다. 체념은 아니었다. 모르겠다. 시간이 훅 지나 버렸고, 조금씩 내려놓아야 아프지 않을 듯해 기대 또한 의도적으로 차단했다.

다리가 점점 무거워졌다. 청우는 제 이마를 짚고는 미간을 구겼다. 상태가 더 안 좋아지는 듯했다. 시험이 끝나면 집으로 들어가 약을 먹고 푹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약이 집에 있던가. 머리를 느리게 굴리며 안으로 들어서자 앉아 있는 이서가 보였다. 청우는 그보다 앞자리로 향했다. 이서를 신경 쓰느라 집중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가방을 내려놓고 펜을 꺼내며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집에 들어가서 쓰러져 눕고 싶었다. 몸이 무거우니 시간이 더디게 갔다. 빨리 시험을 시작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잠시 책상 위에 엎드렸다.

곧 교수가 들어오고 시험이 시작되었다. 비교적 간단한 문제였으나 이번에도 한참을 공들여야 했다. 마지막 문제를 남겨 두고 있을 때 강단에 시험지를 내러 가는 이서가 시야에 걸렸다. 고개를 들어 그의 뒷모습을 좇다가 눈을 내렸다.

가는구나. 일순 집중이 흐트러졌다. 청우는 펜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마음을 다잡았다. 자기 할 일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을 누가 믿을 수 있을까. 느리지만 꼼꼼하게 시험지를 채운 뒤 마지막으로 검토까지 하고 나자 시간이 끝났다. 시험지를 내고 나서 밖으로 나왔다.

싸늘한 공기를 마시자 머리가 조금 맑아졌다. 청우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가 부재중 전화가 뜬 것을 확인했다. 산영이었는데,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 사이 그가 다시 전화를 걸어 왔다.

“여보세요.”

[청우야! 어디야?]

“나 지금 학교. 시험 끝났어.”

[그럼 잠깐 카페 들를래?]

“어……. 미안한데 오늘은 집에 바로 가려고.”

[아……. 안 돼. 꼭 와 줘. 알았지?]

이유 모를 간청과 함께 전화가 뚝 끊겼다. 청우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산영이 이런 식으로 군 적은 처음이었다. 무슨 일이 있나. 일이 있어도 평소라면 자초지종을 설명했을 텐데. 다시 전화를 걸까 하다가 어차피 가는 길이기에 잠깐 들르기로 했다.

카페에 도착한 청우는 카운터로 다가갔다. 테이블을 두드리자 음료를 만들던 산영이 돌아보며 반색했다.

“어, 청우야! 잠깐 앉아 있을래?”

어서 집에 가고 싶었으나 분주해 보여서 일단 자리에 앉았다. 목덜미를 매만지며 열이 더 올랐는지 확인했다. 컨디션은 여전히 나빴으나 심해지지는 않은 듯싶었다.

곧 산영이 따끈한 김이 올라오는 머그잔을 들고 왔다. 노란 차에서 생강 향이 은은하게 감돌았다. 청우는 컵 안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생강차도 팔았어? 신메뉴야?”

“아니, 생강 청이 생겨서……. 레몬 생강 청이야. 마셔 봐.”

따끈한 차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잔을 들어 차를 조심스레 머금었다. 상큼하면서 알싸하고 뜨끈한 액체가 넘어가자 몸이 좀 풀리는 듯했다. 청우가 차를 음미하고 있을 때 산영이 카운터에서 쇼핑백 하나를 가져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뭐야?”

“이거 가져가.”

별다른 설명 없는 말에 쇼핑백 안을 보았다. 해열 패치와 종합 감기약, 해열제, 진통제, 소화제가 있었다. 청우는 즐비한 약을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게 뭐야?”

“그, 나한테 좀 남아서……. 너 주려구. 나도 선물로 받았는데, 너무 많아서.”

청우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어딘지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의 산영을 응시했다. 눈을 마주하자 그가 배시시 웃었다. 청우의 시선이 다시 쇼핑백 안으로 빠졌다가 튀어 올랐다.

“정이서야?”

“어?”

“이거 이서가 줬지?”

덤덤하나 확신이 담긴 물음에 산영이 입술을 꼭 다물며 고개를 저었다. 청우는 쇼핑백의 끈을 꽉 쥐며 다시 한번 물었다.

“이서가 준 거 맞지?”

산영은 거짓말을 잘하지 못했다. 그가 거짓말할 때 어떤 얼굴을 하는지 훤히 꿰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럼 아프게 되면 나 불러.’

그날 방 안에서 이서가 제게 했던 말이 툭 터져 나와 가슴속을 따뜻하게 적셨다. 그의 말은 새콤하고 알싸한 이 차 같았다. 내내 잠잠하던 가슴이 톡 튀기 시작했다.

진실을 꼭 들어야겠다는 듯 단호하게 쳐다보자 산영이 결국 눈을 질끈 감고 실토했다.

“이거 비밀인데, 이서가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청우 너 주랬어. 자기가 줬다고 하지 말고 내가 준 것처럼 하라고……. 근데 이서랑 싸웠어?”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함께 의아함이 떠오른 낯을 보며 청우는 숨을 터뜨렸다. 애써 둑을 쌓고 막아 두었던 그리움과 기대, 설렘과 사랑이 와르르 무너지며 빈 가슴을 가득 채웠다. 청우는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차 고맙다. 나 가 볼게. 그리고 이제 화해하려고.”

청우는 카페를 나서며 이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자신이 찾아가면 되니까.

이서도 오늘 시험이 마지막이었을 거다. 잠시 고민하다가 택시를 잡아탔다. 목적지를 말하고 차가 출발한 순간 빗방울이 차창에 떨어졌다. 투명한 유리에 맺힌 물방울을 훑으며 손을 마주 잡았다.

두근거림이 머리 위를 짓누르고 있던 돌덩이를 튕겨 냈다. 약을 먹지도 않았는데 약효가 도는 듯 몸이 맑게 진동했다. 이서가 집에 있을까. 있었으면 좋겠다. 간절히 바라는 사이 택시가 멈춰 섰다. 청우는 요금을 지불한 뒤 차에서 내렸다.

주민이 밖으로 나오면서 문이 열렸기에 굳이 호출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빠르게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가슴이 심하게 쿵쾅댔다. 열이 오르는 게 느껴지는데 이것이 감정으로부터 피어난 것인지 아니면 진짜 몸 상태가 안 좋아진 건지 알 수 없었다. 내리자마자 청우는 벨을 눌렀다.

그러나 안에서는 답이 없었다. 이번에는 문을 두드려 이서를 불렀으나 묵묵부답이었다. 아무래도 집에 없는 것 같았다. 어디 있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다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1층으로 나왔을 때는 빗줄기가 굵어져 있었다. 후드득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이서가 어디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비가 오는 흐릿한 풍경을 눈에 담자 문득 떠오르는 곳이 있었다. 청우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비에 몸이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길가로 나가 택시를 잡았다.

“대한대 사회관이요.”

그새 차오른 숨을 가라앉히며 쇼핑백 안을 들여다보았다. 쇼핑백 자체에 코팅이 되어 있어 엉망으로 젖지는 않을 듯해 다행이었다. 청우는 다시 창밖을 돌아보았다.

이서라면 그곳에 있을 것 같았다. 비가 오고 있는데도 청우의 가슴에는 빛줄기가 들이쳐 마음을 단단하게 굳혔다. 갈대는 바람에 흔들릴지언정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택시가 정문 안으로 들어섰다. 사회관까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기사가 물었다.

“여기예요?”

“아뇨. 왼쪽이요.”

“흠, 이쪽인가?”

“음, 그냥 여기서 세워 주세요.”

아직 거리가 좀 남았으나 마음이 급해 차에서 뛰어내렸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어깨를 적셨다. 빗줄기를 뚫고 사회관을 향해 달렸다. 호흡을 따라 입김이 아스라이 퍼졌다.

사회관에 막 다다랐을 때 초록빛 덩굴이 늘어진 지붕 아래 앉아 있는 이서가 보였다. 비를 내뿜는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의 시선이 내려와 청우와 맞닿았다. 이서는 예감한 듯 혹은 기다린 듯 동요하지 않았다. 청우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다리를 성큼성큼 내뻗었다. 마침내 그의 앞에 다다랐을 때, 속눈썹에 엉겨 붙은 물방울을 털어 내며 들고 있던 쇼핑백을 내밀었다.

“너 나 좋아하지?”

꾹꾹 눌러 담은 감정이 한마디의 질문과 함께 터져 나왔다. 청우는 미간을 구긴 채로 이서를 노려보듯 응시했다. 이서의 잠잠한 시선이 청우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타고 내려왔다. 그의 눈길이 닿은 곳이 차례로 전율했다. 차가운 빗방울마저 뜨겁게 증발하는 듯했다.

“청우야.”

이서가 눈을 찡그리며 입을 뗐다. 그는 괴로워 보였으나 자신이 이곳을 찾을 수 있도록 한 걸음을 내디딘 사람도 그였다. 청우는 뒤이어 나올 말을 잠자코 기다렸다.

“나는 네가 소나기였으면 좋겠어.”

소나기. 청우는 소나기의 뜻을 되짚어 보았다. 잠시 내렸다가 그치는 비. 아마 제 이름을 두고 하는 비유일 테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제 가슴속에 지어진 우물은 몹시 깊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 바닥을 보이던 샘이 그의 이름을 지니고 차올랐다. 우물에 비해 두레박은 아주 작았다. 자신은 그 물을 길어 마실지언정 버릴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증발하기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었다.

“비 올 때마다 너 이렇게 찾아낼 거야.”

청우는 부정하는 대신 선언했다. 그에게 비가 올 때 필요하면 불러 달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을 이서는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겠다. 그저 빈말이라 여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서와 함께하면서 그에게 향했던 말은 모두 진심이었다.

청우는 그가 어서 일어나 자신을 받아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서는 한 걸음을 내디뎌 놓고도 주저하고 있었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달려 나가 봉지를 가득 채웠을, 그 소중한 마음을 산영의 호의로 돌리려고 했던 것처럼.

이 순간을 놓쳐 버리면 정말 끝이었다. 청우는 울컥해서 손을 내리고는 모든 것을 내던지는 심정으로 입을 뗐다.

“나 또 짝사랑해야 되는 거냐? 너 아니면 이제 구제해 줄 사람도 없어, 하…….”

순간 눈물이 솟아올랐다. 욕설을 읊조리며 눈을 비비자 이서가 일어나 청우의 손목을 붙잡았다. 채 닦지 못하고 나온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고개를 틀었다. 그러나 그것도 하지 못하게 이서가 청우의 양 뺨을 붙잡았다. 결국 청우는 일그러진 낯으로, 모든 감정을 다 드러낸 얼굴로 이서를 마주했다.

엄지손가락이 눈물을 닦아 냈다. 이서의 눈은 고요하게 끓고 있었다. 빗방울이 떨어져 무수한 파문이 이는 호수처럼. 그가 청우의 얼굴을 훑더니 입을 열었다.

“후회할 것 같지 않아?”

“안 해.”

“이럴 만한 가치가 없었다고 느끼게 될걸.”

“그런 거 따졌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어.”

눈물이 멎은 눈에 단단한 빛이 도사렸다. 그 빛은 흐린 하늘 아래서도 절대 꺼지지 않을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서의 낯이 일그러졌다. 그는 청우의 얼굴을 당겨 거칠게 입술을 부딪쳤다.

입술 새로 비가 흘러내렸다. 차가웠던 입술이 서로를 머금으며 뜨겁게 달아올랐다. 손에서 쇼핑백이 떨어졌다. 청우는 이서를 끌어안고 그의 입 안을 열렬하게 헤집었다. 아주 오랜만에 닿은 혀는 서로를 붙잡은 채 몸을 맹렬하게 비볐다.

투둑투둑 떨어지던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머리 위를 적시던 빗방울이 마침내 멎었고, 둘은 입술을 떼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서가 청우의 목덜미를 끌어당기면서 이마가 쿵, 부딪쳤다.

“좋아해.”

그가 눈을 감으며 속삭였다. 이서의 고백은 치열한 싸움 끝에 나온 인정이었고, 청우는 그의 말을 듣고 비로소 모든 불안을 내려놓으며 한숨 같은 웃음을 흘렸다. 축축한 공기가 부드럽게 그들을 감쌌다. 이제야 함께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의 불순물도 없는 기쁨이 젖은 몸 위로 쏟아져 내렸다.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 고요한 긴장이 두 남자의 주변을 휩쌌다. 청우는 갈증을 느끼며 상승하는 숫자에 시선을 두었다. 손끝을 꿈틀거리며 옆을 흘긋 보았다. 비에 젖어 평소보다 차분하게 느껴지는 이서 또한 숫자를 보고 있었다. 곧 영롱한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이서가 도어 록을 여는 걸 뒤에서 기다렸다. 문이 열리고, 둘 다 안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이서가 청우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입술이 거세게 맞닿았다. 청우는 혀끝을 비비며 이서의 목을 끌어안아 살갗을 매만졌다. 이서의 손이 청우의 옷 안으로 들어와 맨살을 쓸었다. 민감한 부위도 아닌데 그저 만져지는 것만으로도 몸이 달아올랐다.

허리를 내밀어 이서의 아래에 제 하체를 맞붙였다. 둘은 서로의 중심을 비비며 입 안을 탐했다. 그저 닿기만 했는데도 성기가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머릿속은 축축하게 번져 어떤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좋다는 것밖에는. 마음이 닿는다는 게 이토록 행복한 일인 줄 알았더라면 조금 더 빨리 그에게 달려갔을 테다.

겹겹이 걸친 옷 때문에 맨살을 만지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젖어서 무거워진 코트의 깃을 잡고 젖혔다. 이서는 청우가 제 코트를 벗기는 걸 돕고 나서 그의 외투 또한 벗겼다. 둘은 옷을 벗느라 입술이 떨어지는 시간도 아깝다는 듯 한 꺼풀씩 내려놓을 때마다 입을 맞췄다.

마침내 모든 껍질을 벗은 그들은 서로를 와락 끌어안았다. 날이 흐려 어둡기는 했지만 밤도 아니고 현관 앞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게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저 손바닥에 닿는 온기와 꿈틀거리는 근육, 탄탄한 피부 전체를 새기듯이 만져 댔다.

꼿꼿하게 선 채로 맞붙은 성기를 이서가 손으로 쓸어 올렸다. 그의 손길에 뜨거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청우는 목덜미를 쥐던 손을 내려 이서의 가슴을 더듬었다. 크게 쥐어 주무르다가 어깨까지 넓게 애무했다. 닿아 문질러지는 표피의 감각이 지나친 쾌락을 가져왔다. 쾌감 또한 심장이 조종하는 듯 평소보다 몸이 더 예민했다. 그건 이서도 마찬가지였는지 청우의 손이 닿을 때마다 그의 입술 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둘은 서로의 입술을 깨물고 혀를 비비다가 입 안 깊숙한 곳을 헤집으며 허리를 흔들었다. 상하로 엇갈려 비벼지는 성기가 붉어진 채 크게 부풀었다. 살을 마찰하고 타액을 헤치는 소리와 흐느낌만이 공간을 채웠다.

“하, 윽.”

“흐읏…….”

그간의 공백을 채우려는 듯 이서는 청우에게 갈급하게 달려들었다. 키스와 손길 모두 평소와는 달리 여유롭지 못하고 조급했다. 청우는 그의 페이스를 따라가며 헐떡였다.

손가락의 굴곡과 곳곳에 박인 굳은살, 손끝의 감촉과 온기 모든 것이 열락에 불을 붙였다. 이서의 손 위로 청우는 제 손을 올렸다. 어떤 손가락은 겹치고 어떤 손가락은 엇갈린 채로 성기를 애무했다. 청우의 손이 더해지자 이서가 코끝을 찡그리며 끓는 신음을 뱉었다.

쾌감이 온몸을 긁었다. 청우는 이서에게 매달리듯 그의 어깨를 강하게 쥐었다. 급격하게 찾아온 사정감에 이서의 입술에 제 입술을 문질렀다. 같은 순간이 찾아오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제 몸을 훑는 이서의 손에도 잔뜩 힘이 들어갔다. 둘은 동시에 뒤로 물러났다가 서로의 몸을 꽉 끌어안으며 사정했다.

“하아, 하…….”

벅차오른 숨을 내쉬었다.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터져 나온 정액의 일부가 바닥으로, 나머지는 서로의 몸으로 흩어졌다. 둘은 이마를 맞대고 눈을 마주쳤다. 청우는 웃음기 없는 낯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이서의 시선을 맞받았다. 이제는 절대 다른 곳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 같은 눈. 내린 비가 모두 그의 속으로 잠긴 듯, 눈동자가 깊었다. 그 안으로 얼마든지 빠질 수 있을 듯했다.

한참을 그렇게 마주하던 이서가 손을 들어 올려 청우의 이마를 짚었다.

“너 뜨거워.”

“괜찮아.”

이 순간을 기념하듯 기억하고 싶었다. 다른 것은 떠올리지 않고 오직 지금에만 집중하기를 원했다. 청우는 이서의 눈가에 짧게 키스했다. 어떤 감정이, 의식하지 않았는데도 차올라 줄줄 터져 나왔다. 눈앞의 남자가 사랑스러웠다. 단순히 제가 내민 손을 잡은 게 아니란 걸 알고 있다. 자신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그의 앞을 가리고 있는 무성한 숲을 헤친 것이다.

이서의 눈이 일렁였다. 이서는 뜨거운 눈으로 청우를 응시하다가 그의 몸을 돌려세웠다. 청우가 벽을 짚자 그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손을 아래로 내렸다.

손가락이 둔덕을 벌리고 침입했다. 열이 있어서인지 이서의 손이 닿은 곳이 뜨겁게 느껴졌다. 손끝이 내벽을 헤집는 감각이 보통 때보다 더 가까이 닿았다. 퍽퍽한 길을 뚫는 것을 견디기가 힘들어 앓는 소리를 흘리자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이서의 입술이 어깨를 머금었다. 그는 척추를 따라 입을 맞추며 무릎을 꿇어앉았다. 양손이 엉덩이를 쥐어 벌리는 순간 입김이 닿았다. 뭔가 싶어 돌아보는 순간, 혀가 틈을 뚫고 들어왔다. 상상도 하지 못한 행동에 놀라 저도 모르게 까치발을 들었다. 그러자 이서가 몸을 강하게 쥐며 코를 더 깊게 박았다.

“하, 으.”

말캉한 살덩이가 내벽을 찍는 것이 지나치리만치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타액으로 안이 부드럽게 젖으며 애무를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청우는 손끝으로 벽을 긁으면서 달뜬 숨을 터뜨렸다.

이서는 손으로 구멍이 한껏 벌어지도록 살을 당기며 그 사이로 입술을 묻었다. 쭉쭉 빠는 소리에 귀가 뜨거워질 지경이었다. 배 속이 간질간질하고, 성기나 손가락을 삽입했을 때와는 다른 쾌감이 찾아와 다리를 녹였다. 강렬하지는 않지만 속살이 욱신욱신 저린 듯해 발끝을 가만두지 못하고 꿈틀거렸다.

“아, 야…….”

허리를 휘자 성기가 벽에 닿아 비벼졌다. 벽을 더럽힐 수 없다는 생각에 하체를 뒤로 밀자 이서의 혀가 더 깊숙이 들어왔다. 주름 하나하나를 펴려는 것처럼 섬세한 혀 놀림에 구멍이 움죽대며 살덩어리를 잡아먹었다.

이서의 손가락이 내려와 회음을 벅벅 문질렀다. 청우의 몸이 퍼뜩 튀어 오르자 이서가 고개를 뒤로 물리며 욕설을 낮게 중얼거렸다. 그는 일어나며 벌어진 구멍 사이를 손가락으로 비집었다. 뿌리까지 처박힌 손가락이 안을 사납게 헤집는 게 느껴졌다.

예민하게 달아오른 내벽이 손가락을 빨아들였다. 손끝이 찌르는 곳곳 모두 성감대가 되어 몸을 자극했다.

“아, 흐읏.”

“청우야…….”

이서가 낮게 끓는 목소리를 흘리며 청우의 귓바퀴를 물었다. 그의 입 안에서 여린 살이 질근질근 씹혔다. 청우는 손을 뒤로 돌려 이서의 등허리를 더듬었다. 그 손길에 이서가 탄성을 내뱉었다.

고개를 틀어 이서와 눈을 마주했다. 여전히 식지 않은 온기가 제 몸마저 끓게 했다. 구부러진 손가락이 한 지점을 쑤셨을 때 청우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놓았다. 이서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청우의 낯에 그려지는 그림을 전부 담았다. 청우 역시 이서의 손길에 온전히 제 몸을 맡겼다. 제가 느끼는 쾌감, 기쁨, 환희 모든 것이 그의 앞에서 드러나는데도 전혀 창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두 이서에게 닿았으면 했다.

손가락이 늘어나 구멍을 능숙하게 늘렸다. 청우는 이서의 눈을 피하지 않고 흘러나오는 신음도 막지 않았다. 애정을 품은 시선이 얼굴 곳곳에 닿아 사랑을 피웠다. 어떤 껍질로도 가리지 않은 눈이, 거짓 웃음으로 무장하지 않은 낯이 마음을 말하고 있었다. 그의 감정을 온몸으로 느끼자 제 우물도 더욱 깊어졌다.

청우는 참지 못하고 이서의 콧등에 입을 맞췄다. 이서가 코끝을 찡긋하며 탄식을 흘렸다.

“이제, 넣어.”

이서의 손목을 붙잡고 삽입을 종용하자 그가 청우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안에서 손을 빼냈다. 기대감으로 가슴이 술렁였다. 이서가 청우의 허리를 쥐고 그새 거리를 좁힌 틈으로 성기를 밀어 넣었다.

성기가 퍽, 단번에 뿌리 끝까지 치고 들어왔다. 청우는 억 하고 튀어나오는 소리를 삼키며 벽으로 밀려났다. 오랜만의 관계여서 그럴까. 몸이 반쪽으로 쪼개지는 통증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안이 충분히 젖었다고 생각했는데도 성기가 유독 크게 느껴져 찢기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눈을 감고 조용히 숨을 몰아쉬자 이서가 움직이지 않고 청우의 허리를 어루만지며 귓가에 입을 맞췄다. 그의 숨과 손길이 곳곳으로 스며들며 고통을 중화시켰다. 이서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이상하게 울컥했다. 이 모든 과정이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나누는 일이라는 느낌이 여실했다. 제 마음을 떼어다 그에게 주면 그가 빈자리에 그의 마음을 채워 주었다. 그렇게 서로의 마음이 섞여 완전해지는 것이다.

“움직여도 돼.”

힘겹기는 했으나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청우의 말에 이서가 허리를 얕게 흔들었다. 마찰이 뜨겁다 못해 따가웠으나 성기가 왕복하며 길을 내자 점차 익숙해졌다. 그의 좆이 치고 들어올 때마다 몸이 툭툭 밀렸다. 청우는 벽을 짚은 채로 천천히 허리를 움직여 보았다. 움직임이 잘 맞지 않아 엇갈리자 그가 잠시 정지했다가 청우에게 맞춰 주었다.

거동이 맞물리니 성기가 속살에 박힐 때마다 쾌감이 점차 섞여 들었다. 엉덩이가 꾹 조였다가 풀어지며 좆을 머금었다. 귓가로 이서의 숨이 흩뿌려졌다. 그가 손을 올려 청우의 이마를 짚었다. 열기를 확인하는 손에 머리를 비비자 이서의 입술이 목덜미에 내려앉았다.

“아, 흣, 흑…….”

“청우야, 이청우.”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유독 달콤했다. 그가 손가락을 활짝 펴 청우의 가슴을 주물렀다. 부드러운 애무에 긴장이 완전히 풀리며 성기가 찔러 올리는 곳마다 열기가 피어올랐다. 청우는 이서의 몸 중 제가 만질 수 있는 부위는 전부 어루만졌다. 끓는 신음이 귓속을 파고들 때면 말로 다 할 수 없는 만족감이 차올랐다.

빡빡했던 내벽이 열리며 좆을 알맞게 물었다. 희미하게 남아 있던 통증마저 사라지고 완벽한 쾌락이 들어찼다. 그건 이서도 마찬가지였는지 그의 움직임이 더욱 거칠어졌다.

“아흐, 야……. 아! 흐, 으읏.”

“후으, 흣.”

평소와 달리 이서의 낯에는 장난기도 웃음기도 없었다. 그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는 음담패설도 입에 담지 않았다. 미간을 구긴 채 행위에 집중하다가 시선이 닿으면 키스를 퍼붓고, 청우의 반응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끈질기게 눈을 맞춰 왔다.

오로지 둘만의 시간이었다. 거짓 연애도, 한순간의 충동도 아니었다. 쾌감은 배가되어 돌아왔다.

이서의 것이 뿌리 끝까지 들어올 때면 배 속이 저릿저릿했다. 선단이 속살을 쿡 쑤시고 떠나도 그 자리는 여전히 파인 것 같았다. 성기가 왕복하며 그 부근을 계속해서 긁어 댔다. 청우는 헐떡이며 까치발을 들었다가 놓았다. 발꿈치가 바닥에 닿는 것조차 자극이 되어 고개를 흔들며 몰려오는 오르가슴을 감내했다.

이서가 거친 욕설을 작게 흘리며 청우의 몸통을 끌어안고 허리를 퍽퍽 쳐올렸다. 꼿꼿이 선 성기가 벽에 문대졌다. 청우는 이서의 팔뚝을 긁듯이 쥐고서는 아찔한 감각을 버텼다.

음낭이 철썩 부딪치도록 세게 몸을 밀어 넣은 뒤 성기를 곧장 빼지 않고 안쪽을 꾹꾹 눌러 댔다. 굵은 성기가 구멍 안을 압박하는 것만으로도 미칠 것 같았는데, 깊숙한 곳을 야금야금 짓치니 허벅지 안쪽이 발발 떨렸다.

“아흑, 하……!”

떨림과 함께 구멍이 잔뜩 오그라들었다. 아, 좋아. 이서가 감상을 터뜨리고는 다시 허리 짓을 했다. 좆이 왕복하는 어느 순간 배가 뚫릴 것만 같았다. 성감이 그만큼 부풀어 배 속을 두드려 댔다. 배꼽을 중심으로 아찔하게 퍼지는 감각 속에서 청우는 흐느끼며 고개를 젖혔다.

아. 나오려던 신음이 도로 들어가며 숨이 막힐 듯한 전율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흘렀다. 떨리는 손끝으로 이서의 팔을 긁었다. 이서가 이를 갈며 허리를 거세게 쳐올리는 찰나, 폭죽이 터지듯 모든 감각이 하얗게 번졌다.

“흐으읏……!”

“하, 씨…….”

잘게 떨리는 몸을 이서가 꼭 끌어안았다. 청우의 것이 끄떡거리며 진한 정액을 툭툭 토해 냈다.

퓨즈가 나간 듯 앞이 완전히 깜깜해졌다가 빛이 돌아오는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희열의 늪에서 헤엄치던 청우는 다리에 힘이 풀려 순간 휘청였다. 그러나 이서가 몸을 단단히 받쳐 주어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가 뻣뻣한 유두를 손끝으로 굴리며 청우의 귀를 머금고 쭉쭉 빨았다. 여전히 남은 쾌감이 그의 애무에 부드럽게 꿈틀거렸다. 청우는 탄식 같은 숨을 내쉬며 이서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이대로 계속 있고 싶어.”

몸이 꼭 맞물린 채로 이서가 속삭였다. 청우는 힘없이 웃음을 흘렸다. 어느 정도는 공감하면서도 모든 걸 쏟아부은 탓인지 그대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 제가 흘린 숨이 뜨겁게 느껴질 정도로 열이 올랐다. 이서도 그걸 알아챘는지 몸을 뒤로 물렸다. 성기가 빠져나가는 것마저 자극이 되어 청우는 작게 떨었다.

이서가 청우의 이마와 목덜미를 매만졌다. 그의 낯에 염려가 어렸다. 청우는 걱정하지 말라는 뜻에서 고개를 저으며 몸을 돌려 그를 끌어안았다. 입을 맞추자 이서가 혀를 내어 청우의 입술을 핥았다.

“약 먹자.”

“응.”

대답하는 순간 아래가 벌름거리며 정액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움찔하며 아래를 내려다보자 이서가 청우의 허리를 마사지하듯 문질렀다.

“나 좀 씻고.”

“그래. 모실까요?”

“걸을 수 있어.”

안으려고 하는 모양새에 퍽 무뚝뚝하게 대꾸하자 이서가 웃음을 터뜨렸다. 오랜만에 보는 웃음이었다. 새삼 가슴이 간질거리며 벅차올라서 손을 들어 올려 이서의 입꼬리를 매만졌다. 웃음기가 옅어진 낯이 청우를 응시했다. 이서는 청우의 손을 쥐고 눈을 감은 채로 그의 손가락에 입을 맞추었다. 꼭 경건한 고백이라도 받은 것만 같아 손끝이 움츠러들었다.

감은 눈과 부드럽게 떨어지는 코끝, 삐죽 올라간 입꼬리를 차례로 훑는데 이서가 눈을 떴다. 웃음기를 담고 호선을 그리는 눈. 역시 웃는 얼굴이 좋았다.

청우는 이서가 욕조에 받아 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갔다. 이서가 욕조 밖에서 무릎을 굽혀 앉아 물에 손을 넣어 보더니 물었다.

“씻겨 줄까?”

원래의 정이서로 돌아온 그가 싱글대며 물었다. 그게 좋으면서도 얄밉고, 안도가 되면서도 마음고생을 했던 게 생각나 기분이 이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힘들었던 건 자신뿐만이 아니었을 테다.

“괜찮아.”

“그럼 밖에 좀 정리하고 있을게. 씻고 나와, 너무 오래 있지는 말고.”

“응.”

이서가 물에 젖은 손으로 청우의 머리칼을 넘겨 주고는 일어나면서 이마에 키스했다. 그가 욕실을 나가자 청우는 온기가 남은 이마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욕조에 기댄 몸을 미끄러트려 코까지 물에 담갔다. 따뜻한 물에 푹 빠지니 열이 더 오르는 느낌이라 몸을 얼른 일으켰다. 가슴이 계속 간질간질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실감하자 몸이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생각보다, 아니 감히 생각할 수도 없이 행복한 일이었다.

이상하게 자꾸 웃음이 나왔다. 손등으로 입술을 꾹 누르다가 어지러움을 느껴 얼른 몸을 씻었다. 목욕을 끝내고 문을 살짝 열자 앞에 옷이 있었다. 집이 그새 훈훈해졌다. 청우는 옷을 입고 나서 밖으로 나갔다. 이서는 씻는 중인지 보이지 않았다.

식탁 위에 해열제와 함께 물이 든 컵이 놓여 있었다. 약 한 알을 꺼내 입에 넣고 물과 함께 삼켰다. 물은 미리 데워 놓았는지 따뜻했다. 약까지 먹고 나자 몸이 노곤해졌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며 달아오른 숨을 내쉬는데 이서가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침실로 들어가자 이서가 물었다.

“약 먹었어?”

“응. 머리 왜 안 말리고 나왔어?”

“마음이 급해서.”

그의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뒤늦게 머리를 수건으로 터는 걸 보며 청우는 웃었다.

“가서 말리고 와.”

“몸은 어때.”

“괜찮아.”

침대로 가 앉고 나서 다시 말리고 오라고 하자 이서가 욕실로 들어갔다. 그는 문을 열어 놓고 드라이어를 켰다. 머리를 말리는 이서를 지켜보는데 눈이 끔뻑끔뻑 감겼다. 이서가 이쪽을 한 번 돌아보고는 윙크했다.

그걸 보고 픽 웃었던 것 같은데, 순간 고개가 뚝 떨어지다가 어딘가에 닿았다. 청우는 눈을 번쩍 뜨며 머리를 들었다.

“휴. 우리 청우 머리 깨질 뻔했네.”

이서가 청우의 이마를 받쳤던 손을 흔들며 씩 웃었다. 청우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두리번거렸다.

“나 졸았어?”

“응. 피곤하지?”

고개를 끄덕이자 이서가 청우의 어깨를 눌러 뒤로 눕혔다. 머리 밑에 베개를 받치고 이불을 덮어 준 다음, 해열 패치를 가져왔다. 그는 시트의 껍질을 벗기고 나서 청우의 이마 위에 붙였다. 이마가 바로 시원해져서 탄성이 나왔다.

“시원해.”

“좋지?”

“응. 근데 이거 애들이 하는 거 아니냐.”

“음, 어릴 때 못 받은 거 오늘 다 받는다 생각해.”

이서가 침대 밑에 앉아 청우의 이마와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청우는 자신을 살피는 그를 응시했다. 그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가 결국에는 제게로 와서 그의 다정을 제게 쏟아 준다는 사실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몸이 좋지 않아서 그런지 그의 말과 행동이 더욱 크게 와닿았다.

“고마워.”

청우는 이서의 손끝에 손가락을 걸었다. 꾸벅꾸벅 감기는 눈으로 쳐다보자 이서가 웃으면서 고개를 젓고는 청우의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콩 때렸다.

“미안.”

그간의 일을 사과하는 진정 어린 목소리에 서운했던 감정이 모두 녹아내렸다. 청우는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올라와, 거기 앉아 있지 말고.”

이서가 침대 위로 올라와 청우의 옆에 누웠다. 그가 허리를 끌어안자 문득 드는 생각에 고개를 뒤로 물렸다.

“아니다. 옮으면 어떡해.”

“혀 다 섞어 놓고 이제 와서?”

“아.”

그러네.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이서가 웃으면서 청우의 뺨에 입을 맞췄다. 둘 다 아프면 큰일이니 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겠다.

“너 옮으면 내가 봐 줄게.”

감기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서에게 옮으면 자신도 어릴 때 그가 못 받은 것까지 다 해 주면 되었다. 눈이 무거웠다. 더는 버티지 못할 것 같아 눈을 감자마자 수마에 빠져들었고, 제 뺨을 조심스레 쓰다듬는 손길이 얼핏 느껴졌다.

청우는 옷장을 열고 고민하다가 비교적 최근에 산 옷을 꺼내 입었다. 이서에 비하면 평범한 차림이었으나 제가 가진 것 중 가장 좋은 옷이었다.

거울 앞에 선 뒤에 머리를 매만졌다. 그냥 빗는 정도였지만 자신을 꾸미는 일은 어색했기에 거울 속 얼굴이 열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게 오늘은 첫 데이트를 하는 날이었다. 처음 함께 맞는 크리스마스이기도 했다.

코트를 걸치고 나서 쇼핑백을 챙겼다. 안에는 그때 사고 주지 못한 향초와 새로 산 머플러가 들어 있었다. 둘 다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는데, 향초를 늦게라도 줄 수 있어 다행이었다. 두둑해진 가방을 들자 마음까지 든든해졌다.

시간 맞춰 아래로 내려가자 얼마 안 되어 이서의 차가 도착했다. 안으로 올라타자 이서가 손을 뻗어 청우의 뺨을 만졌다.

“왜 나와 있었어, 추운데.”

“방금 나왔어.”

안전벨트를 매는데 이서가 청우의 차림을 훑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야단났네.”

“왜?”

“너무 근사해서 위기감 느껴진다. 어떡하지?”

이서가 짐짓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과장된 반응에 청우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야말로 머리는 손질해서 넘기고 옷은 지금 바로 사 입고 온 것처럼 번쩍거렸다. 이마를 드러내서일까, 평소보다 얼굴이 반드르르했다.

이제 보니 이마에서 코까지 내려오는 선이 참 예뻤다. 속눈썹도 기네. 그의 이목구비를 새삼스레 훑어보는데 이서가 눈을 인위적으로 깜빡거리며 귀여운 척을 했다.

“왜? 나 오늘 잘생겼어?”

차마 아니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맞는다고 하기에는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제 애인이었다. 잘생긴 건 사실이고, 그 말을 듣고 싶어 하는데 피할 이유도 없었다. 좋은 말만 해 주고 싶기도 했고.

고개를 끄덕이자 이서가 장난기 많은 소년처럼 킥킥대더니 청우의 뺨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핸들을 잡기에 이제 출발하려나 보다 했는데, 그가 제 볼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자, 뽀뽀해야 출발해요.”

하……. 이런 간질거리는 상황은 아직 적응이 되지 않았다. 청우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내밀어 이서의 뺨에 입술을 댔다. 이서가 실실 웃으며 출발했다.

청우는 손등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이제 진짜 정식으로 연애하는 사이가 됐다는 게 실감이 났다. 더한 것도 했는데 고작 이런 것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목덜미가 달아오르는 게 느껴져 차창을 열고 찬 바람을 쐬는 사이 이서가 물었다.

“보통 크리스마스엔 뭐 했어?”

“가족들이랑 보내거나 친구들 만났어. 넌?”

“나도 비슷해. 어릴 때는 성당에 갔었는데.”

“성당? 왜?”

“부모님이 천주교시거든. 자주 따라갔었지.”

“지금은 안 가?”

“냉담한 지 오래라. 사실 믿지도 않았지만.”

하긴 신을 믿고 기도하며 의지하는 이서의 모습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청우는 엉뚱하게도 여자 신자들이 쓰는 미사포를 얹은 이서를 상상했다. 이상하게도 잘 어울렸다.

“그럼 세례명도 있어?”

“응, 요한.”

“요한……. 어울린다.”

이서가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성당 건물은 좋아했어. 여행 다닐 때 유명한 성당이 있으면 한번 가 보기도 하고.”

“어디가 제일 좋았는데?”

“노트르담.”

“여행 많이 다녔어?”

“짧게 짧게. 우리도 졸업하기 전에 가야지.”

“그러자.”

둘은 여행할 때 어떤 성향인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청우는 무던해서 상대에게 곧잘 맞추는 편이나 지역마다 가고 싶다고 정해 둔 한 군데는 꼭 들러야 했고, 이서는 다른 건 몰라도 숙소에는 많은 돈을 투자하는 스타일이었다. 파티를 열고 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는 게스트 하우스를 선호할 것 같았는데, 잠자리가 불편해 그런 곳은 꺼리는 모양이었다.

사소한 대화였지만 그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고, 앞으로의 일을 이야기하는 거라 즐거웠다. 말을 끊임없이 나누다 보니 어느새 극장에 도착했다.

청우는 주차장에 다다라 건물을 보고 미간을 찡그리며 표를 꺼냈다. 표에 적혀 있는 장소와 도착한 곳이 달랐다.

“잘못 온 것 같은데. 여기 아니야.”

“아, 우리 그거 안 볼 거야.”

“어?”

“차건이 준 거잖아. 지가 뭔데 우리 사이에 간섭하려고 해.”

아. 줄거리 다 보고 왔는데……. 뮤지컬 내용을 보고 기대했었으나 이서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자 이서가 품에서 표 두 장을 꺼냈다.

“대신 우리가 볼 건 이거.”

표를 받아 든 청우가 눈을 크게 떴다. 건이 준 표의 공연 못지않은, 더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뮤지컬의 VIP석이었다.

“이걸 어떻게 구했어?”

“관계자 중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달라고 졸랐지.”

“남은 게 있었대?”

23일에 시험이 끝났으니 이틀밖에 시간이 없었던 셈인데 구한 게 신기할 노릇이었다. 놀라워하자 이서가 뿌듯하게 웃으며 청우의 어깨 위로 팔을 둘렀다.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랑 첫 데이트 하는데 꼭 필요하다고 죽는소리 좀 하니까 주더라.”

“…….”

“뭐, 틀린 소리도 아니잖아?”

저를 향해 눈을 찡긋하는 이서를 보며 청우는 픽 웃었다. 그래도 남한테 아쉬운 소리 하는 게 쉬운 일만은 아니었을 텐데 고마웠다. 이러나저러나 이렇게 당당한 모습이 보기 좋기도 했다.

“재밌겠다. 나 이거 들어만 봤지, 보는 건 처음이야.”

“나도 그래. 가자.”

날이 날이다 보니 공연장 안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렇게 사람 많은 곳은 오랜만이었는데, 활기가 넘쳐 분위기에 전염된 듯 기분이 은근히 들떴다. 두 사람의 자리는 상당한 앞쪽으로 무대와 가까웠다. 청우는 이서와 나란히 앉은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좋다, 여기. 뮤지컬도 자주 보러 와?”

“연극만큼 자주는 아니야.”

“너 노래도 잘해?”

“음, 글쎄. 왜. 들려줄까?”

“들으면 좋지.”

목소리가 좋으니까 노래도 잘할 것 같았다.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첼로 연주도 들어야 하는데. 같이 하고 싶은 게 은근히 많았다.

“아, 오늘부터 맹연습해야겠다.”

“연습까지? 그냥 해.”

“너도 들려줄 거야?”

“난 노래 못해.”

“못하면 못하는 대로 귀여울 것 같은데?”

이서가 청우의 어깨에다 뺨을 대고 비볐다. 팔을 붙잡고 나중에 꼭 불러 달라고 조르는 걸 이길 수가 없었다. 웃음을 삼키며 알았다고 말하자 그제야 이서가 떨어지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서로 실없는 장난을 치는 사이 관객석이 꽉 들어차며 조명이 꺼졌다. 주변이 어두워지자 이서가 손을 잡아 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누군가가 손을 잡으면 이서인지 아닌지 알아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만큼 그의 손의 감촉이 이제는 익숙했다.

무대 위 조명이 켜지자 청우는 이서를 돌아보았다.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둘은 시선이 닿자마자 웃었다.

뮤지컬은 만족스러웠다. 볼거리가 화려했고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 춤 모두 훌륭해 무대 위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끝나고 나와 이서와 함께 공연에 관해 떠드니 즐거움이 배가되었다.

이서는 주인공 배우가 예전에는 상대 역할을 맡은 적이 있다든가, 무대 장치를 어떻게 만드는지, 다른 뮤지컬에서는 비슷한 장면을 어떻게 연출했는지와 같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청우는 그의 말에 정신없이 빠져들어 반응하느라 바빴다.

“다음에 또 보러 오자. 네가 이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네.”

“응, 아는 게 많아지니까 더 재밌는 것 같아.”

단순히 즐기는 게 아니라 어떤 분야에 대한 배경 지식을 얻어 가는 게 좋다고 말하니 이서가 모범생이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무리 봐도 모범생의 기준이 조금 후한 것 같았다.

둘은 이서가 예약해 둔 식당으로 왔다. 이탈리아 가정식 요리를 팔고 예약으로만 손님을 받는 곳으로, 좁은 내부에는 테이블이 몇 없었다. 인테리어에 정성을 들였다는 게 느껴져 곳곳을 둘러보았다. 선반에 놓인 작은 인형이나 고풍스러운 조명을 훑다가 메뉴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 먹을래?”

“뭐가 맛있어?”

“여기는 뇨끼랑 스테이크가 맛있어. 카르파초도 괜찮은데, 세 개 시켜서 같이 먹을까?”

“그래.”

차를 가져왔기에 술 대신 음료수를 시켰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 전, 지금이 적기라는 생각에 청우는 쇼핑백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서가 그걸 보자마자 씩 웃었다.

“아, 언제 주나 했네.”

“……크리스마스 선물.”

“우와.”

그가 안에서 향초가 든 상자와 머플러가 든 상자를 꺼냈다. 향초는 안이 보이게 포장되어 내용물을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서는 상자 두 개를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두 개나 줘?”

“향초는……. 네 생일 선물이었어. 주려고 했는데 못 줬고. 거기 하나 비어 있는데 그건 내가 쓴 거야.”

물끄러미 응시해 오는 시선에 웃음기가 어렸다. 그간의 공백을 떠올리는지 이서의 낯이 차분해졌다. 그가 상자를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마치 소중한 것을 다루는 듯한 손길에 괜히 간지러웠다.

“고마워. 잘 쓸게.”

“어.”

이서가 이번에는 다른 상자를 가져와 포장을 풀었다. 안에는 푸른색과 갈색이 섞인 체크무늬의 머플러가 들어 있었다. 그가 활짝 웃더니 머플러를 곧장 둘렀다. 머플러에 파묻힌 채 어깨를 들썩인다. 여러 개 중에 고심해서 골랐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잘 어울렸다.

“어때? 어울려?”

“응. 어울린다.”

“이거 나랑 너 같다.”

“어디가?”

“청우랑……. 나?”

그의 손가락이 머플러의 푸른 부분과 갈색 무늬를 차례로 가리켰다. 귀여운 발상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영 엉뚱하지는 않았다. 푸른색은 제 이름에, 갈색빛은 이서의 눈에 있었으니까.

“그러네.”

“너무 마음에 들어. 고마워.”

이서가 머플러에 코를 묻고는 끝을 만지작거렸다. 선물을 잘 고른 것 같아 뿌듯해졌다. 물을 마시며 벅차오르는 마음을 누르는데, 이서가 코트 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건넸다.

“자, 이건 내 선물.”

저야말로 이서가 선물을 준비했을 줄은 몰랐다. 청우는 얼떨떨하게 상자를 열어 보았다.

“향수?”

“응, 내가 쓰는 거랑 똑같은 거. 오늘 뿌리고 왔어. 맡아 볼래?”

눈앞으로 손목이 뻗어 와 청우는 그 위로 코를 가져다 댔다. 상큼한 향이 코끝에서 살랑였다. 이서가 자주 뿌리고 다니던 그 향수였다. 눈을 들자 이서의 눈이 가늘게 접혔다.

“커플.”

마음에 들었다. 아니 마음에 든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이서의 향이 제게로 왔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큰 설렘을 가져다주었다.

“고맙다. 이 향 좋아했는데.”

“응, 그런 것 같았어.”

이서가 자신이 한 센스 하지 않냐면서 자화자찬을 했다. 귀여운 말에 고개를 주억이는데 곧 음식이 나왔다. 테이블 위가 채워지고 서로의 잔에 음료를 따랐다.

“건배하자.”

“응.”

둘은 잔을 들어 맞부딪쳤다. 톡 쏘는 음료가 입 안에 상큼한 향을 채워 주었다. 주변에 앉은 사람들은 모두 즐거운 얼굴로 식사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함께 맞는 첫 크리스마스라는 사실이 가깝게 체감되었다.

나온 음식은 전부 맛있었다. 생각해 보면 이서와 함께 먹는 것들은 전부 맛이 좋았던 듯싶다. 이서 덕인지 이서의 안목 덕인지, 아마 둘 다일 테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접시를 비웠다. 배가 딱 기분 좋게 부른 채로 일어났다. 이서가 입구 쪽 카운터로 가 계산하려는 찰나였다.

“어? 정이서!”

문을 열고 막 들어오던 여자가 이서를 보고 활짝 웃으며 그의 어깨를 쳤다. 여자를 돌아본 이서가 주춤했다.

“어떻게 여기서 보냐?”

“그러게. 오랜만이네.”

“나 네가 여기 데리고 와 준 다음에 단골 됐잖아.”

“그래? 잘됐네. 친구랑 왔나 본데 잘 먹고 가.”

“응. 너 번호 안 바뀌었지?”

여자의 질문에 이서가 모호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청우는 이서의 낯을 유심히 보았다. 여자의 뒤로 일행이 들어오면서 그들의 대화는 곧 끊겼다.

“가자.”

이서가 카드를 받아 들고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청우는 그를 따라 차에 올라탔다.

예전에 사귀던 사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친구일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연인끼리 오기 좋은 장소이다 보니 아예 배제할 수 없는 추측은 아닐 터였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이서는 워낙 여러 곳을 다니고 발도 넓으니 이런 곳에서 누군가를 마주치는 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일 테니까. 하지만 다른 기억이 끼어들었다. 그날, 이서의 집에서 이서의 옷을 입고 자연스레 문을 열었던 여자가 떠오른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서와 사귀고 있던 때도 아니었고, 지난 일이었으니 그냥 넘기는 게 마땅했다. 하지만 자려고 한 게 아니었다면서 왜 그 사람이 이서의 집에 있었는지 의문이었다. 또한 그때는 이서도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을 시기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속이 잘게 끓어오르는 듯했다. 그러나 정확히 어떤 사이였냐고 물어보기에는 이렇게 좋은 분위기에서 과거의 일로 다투고 싶지 않았다. 그날 이서는 해명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 오해할 만한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집에까지 들일 수 있는 사이라니…….

“케이크, 사러 갈까?”

이서의 목소리에 청우는 정신을 차렸다. 그가 청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손끝으로 청우의 귓가를 쓸었다. 이서가 제 기분을 살피는 게 느껴졌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해 한숨을 삼켰다.

이서가 제 기분이나 눈치를 살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추측하건대 어린 시절 그는 원하지 않아도, 누가 시키지 않았어도 까치발을 들고 다녔을 테다. 자신도 그런 상황을 일부 이해할 수 있었기에 이서에게 그런 짐을 얹어 주기는 싫었다.

차라리 싸우더라도 여기서 풀고 가는 것이 좋겠지. 그래야 나중에 두고두고 생각하며 속앓이를 하지 않을 터였다.

“정이서. 그때 그 사람, 누구야?”

“그때?”

“너희 집에서 본 여자애.”

청우의 말에 그제야 그날의 일을 떠올린 듯 이서의 입술이 벌어졌다. 확실히 갑작스러운 화제에 이서가 난감한 낯으로 눈가를 긁적였다. 그는 오래 침묵하지 않고 답했다.

“예전에 몇 번 만나던 애인데, 가정사가 좀 안 좋아. 그날은 돈도 없고 갈 데도 없다고 해서 집에 들였고, 너 들른 다음에는 호텔에 놓고 나왔어. 무시해야 하는 거 아는데 사정 다 아니까 그러기가 힘들었고.”

깔끔한 설명이었다. 돈 없고 갈 데 없는 여자애를, 그것도 인연이 있었던 사람을 외면할 수는 없었을 테다. 이해는 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기분이 처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이자 이서가 청우의 양 뺨을 쥐었다.

“그런 모습 보게 해서 미안해.”

“아니야. 어차피……. 그때는 우리 싸우기도 했었고.”

이서의 손가락이 피부를 부드럽게 쓸었다. 청우는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그의 손길과 시선에 기분이 점차 괜찮아졌다. 과거의 일에 속상해 보았자 무엇 할까. 어차피 지금 같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었다. 이서는 인기가 많으니 예전에 사귄 사람도 많았을 테고, 일일이 기분 나빠하다가는 끝도 없을 거다. 그러니 어느 정도는 내려놓아야 했다.

괜찮다는 뜻에서 이서의 손을 쥐자 그가 청우의 콧등과 입술에 차례로 키스했다. 이렇게 한 사람으로 인해 기분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퍽 낯설었다. 그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가 물었다.

“……지금도 연락해?”

“아니? 안 해. 그리고 다 지울게.”

이서가 품에서 핸드폰을 꺼내더니 연락처로 들어갔다. 번호를 다 지울 필요까지는 없다고 말하려던 청우의 눈에 숫자가 들어왔다.

「기타 362명」

삼백육십이 명이나 된다고……? 고개를 번쩍 들자 기타 그룹을 체크하던 이서가 눈을 마주쳤다.

“이렇게 많다고?”

“어? 아니이, 몇 명 안 되지. 여긴 그냥 연락 안 하는 사람들 모아 둔 그룹이야. 삭제해도 상관없어서 그래. 진짜 한 손에 꼽아.”

그는 손을 내저으며 극구 부정했다. 아니라니 다행이었지만 한 손에 꼽는다는 말은 사실 믿기가 힘들었다.

지울 필요까지는 없다고 말하려고 했으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사이 이서가 삼백육십이 개의 연락처를 전부 삭제했다. 기타 그룹에 속한 사람의 수가 완전히 사라지자 속이 후련해졌다. 이런 기분이 참 이상하게 느껴지는지라 가만히 핸드폰을 내려다만 보고 있자, 이서가 청우의 뺨과 이마에 쪽쪽 입을 맞췄다.

기분이 완전히 풀린 걸 느꼈는지 이서의 낯에 웃음기가 어렸다. 그가 청우의 목덜미에 뺨을 대고 비비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제 화 풀렸어?”

“안 났어.”

“정말?”

“어.”

“그럼 키스해 줘.”

이런 식으로 애교를 부리는데 안 넘어갈 수가 있을까. 청우는 한숨을 삼키고는 이서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댔다. 혀와 혀가 가볍게 얽혀 서로를 핥았다.

입술이 떨어지고 나서 이서가 청우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고는 씩 웃었다.

“이제 케이크 사러 갈까?”

“그래.”

둘은 베이커리에 들러 작은 생크림 케이크를 사 이서의 집으로 왔다. 이서가 케이크와 함께 와인을 테이블 위로 세팅했고, 선물 받은 향초에 불을 붙여 올려놓았다. 촛불이 어두운 주방 안을 아늑하게 밝혔다.

이렇게 하니 집 안에서도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즐길 수 있었다. 은은한 향이 흘러들어 와 몸을 나른하게 했다. 이내 이서가 와인 잔을 들었다.

“뭘 위해 건배할까?”

“너랑 나.”

“그래. 우리를 위해서.”

와인 잔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쌉싸름한 액체가 혀를 휘감고 넘어갔다. 이서가 잔을 내려놓고 테이블 위에 놓인 청우의 손을 쥐었다.

“나 이렇게 멋진 크리스마스는 처음이야.”

주변에 사람도 많고 이보다 더 신나는 날을 자주 보냈을 이서가 이렇게 말하니 속이 간질거렸다. 청우는 그의 손끝을 꼭 잡았다. 앞으로는 이런 날들이 더 많으리라는 사실이 큰 벅참을 가져다주었다.

“나도.”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 이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을 잡아당겼다. 보드라운 입술이 맞닿고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다. 흐르는 향이 둘의 몸을 편안하게 둘러 감았다. 더할 나위 없이 멋진 크리스마스였다.

청우는 손끝에서 달랑이는 작은 쿠션을 코끝에 가져다 댔다. 캣닢이 든 장난감인데 그냥 허브 향이 나는 정도였다. 이걸 고양이들이 그렇게 좋아한다니 신기했다.

산영이 아르바이트하는 카페로 가는 길, 발걸음이 너무도 가벼웠다. 산영을 만나는 일이 이렇게 기다려지고 즐거운 건 매우 오랜만인 듯했다. 이제는 그를 다른 마음 없이 친구로서 대할 수 있다는 사실이 청우에게는 큰 기쁨으로 다가왔다. 정말 길고도 긴 시간이었다.

문을 열자 위쪽에 달린 종이 영롱한 소리를 냈다. 카운터 안에 서 있던 산영이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종강하고 나니 카페 안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왔어?”

“응. 뭐 안 마셔도 되니까 그냥 와.”

“응!”

산영이 자리로 오자마자 청우는 쿠션을 건넸다. 생쥐 그림이 그려진 장난감을 보고 그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너무 귀여워.”

“고양이들이 좋아한대서 사 봤어.”

“고마워. 좋아할 것 같아. 아, 사진 보여 줄까?”

산영은 이틀 전에 길에서 고양이를 주워 임시 보호를 하고 있었다. 사람의 손을 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주인이 잃어버렸거나 유기된 모양이라, 주인을 기다리다가 나타나지 않으면 입양을 보내기로 했다고 한다.

고작 이틀 같이 있었을 뿐인데 앨범에 고양이 사진이 가득했다. 턱시도를 야무지게 챙겨 입은 고양이가 카메라를 빤히 올려다보는 사진이 많았다.

“귀엽다.”

“귀엽지. 카메라를 아나 봐. 내가 사진 찍으려고 하면 계속 쳐다본다? 신기해.”

“이름이 뭐야?”

“까망이. 원래 이름도 알면 좋을 텐데.”

사진만 보았을 뿐인데도 또 보고 싶다고 산영이 중얼거렸다. 그는 고양이 때문에 아르바이트 시간까지 조정했다. 아마 혼자 살지만 않았더라면 키우려고 했을 터였다.

청우와 산영 둘 다 동물을 좋아했기에 할 말이 많았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손님이 들어와서 산영이 일어났다. 그가 두고 간 핸드폰에서 고양이를 구경하는데 마침 청우의 핸드폰도 진동이 울렸다.

“여보세요.”

[응. 뭐 해?]

“나 지금 카페인데, 일어났어?”

[응, 막 씻었어. 어디야? 점심 먹자.]

“산영이 카페야. 어디로 갈까?”

[그래? 거기 있어. 내가 갈게.]

전화를 끊고 나서 시간을 확인했다. 기상이 느직한 걸 보면 어젯밤에도 늦게 잠든 모양이었다. 저와 함께 잘 때는 조금 나은 것 같던데, 그만 괜찮다면 방학 때만이라도 같이 밤을 보내는 일이 나쁘지 않을 듯했다.

산영이 테이블로 돌아와 고양이에 관한 이야기꽃을 다시 피울 때쯤 문을 열고 이서가 들어왔다. 내내 문가에 주의를 기울이던 청우가 손을 들었다. 이서는 청우를 발견하자마자 씩 웃으며 다가왔다.

“안녕.”

“이서야, 오랜만이네.”

“그러게. 뭐 하고 있었어?”

“우리 고양이 얘기. 까망이 볼래?”

이서가 청우의 옆에 앉아 산영이 내민 고양이 사진을 보았다. 청우는 막 씻고 나와서 그런지 보드라운 향을 풍기는 이서를 곁눈으로 보다가 테이블 밑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뗐다. 이서의 시선이 잠시 흘러왔다. 그가 눈을 찡긋하고선 청우의 손을 붙잡았다.

“귀엽지.”

“응. 키우는 거야?”

“아니, 얼마 전에 길에서 만났어. 애가 계속 울어서 데려왔는데 주인 찾아 줄 거야.”

“으음. 산영이는 마음이 예쁘네.”

“아니야. 임시 보호 많이들 해.”

“그래도.”

의자 등받이에 느긋하게 등을 기대는 이서를 청우는 유심히 보았다. 착각일 수도 있겠으나 뉘앙스가 순수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청우는 저도 모르게 입을 뗐다.

“너도 그래.”

이서가 청우를 황당한 눈으로 돌아보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거냐는 듯한 반응이 당황스럽기는 했으나 진심이었다. 그는 종종 자신의 내적인 면을 과소평가하는 모습을 보였다. 스스로의 선함과 다정함을 알아주었으면 했기에 말을 철회할 생각은 없었다.

“뭐…….”

그가 이내 피식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진짠데. 청우는 덤덤하게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나 이제 정리하고 들어갈 건데, 밥 먹고 같이 우리 집 갈래?”

산영의 물음에 청우는 이서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고양이가 보고 싶기는 했지만…….

“미안. 이서랑 밥 먹기로 해서.”

“아, 그래? 알았어. 나 그럼 빨리 정리해야 돼서 먼저 일어날게.”

“응. 다음에 보자.”

따지고 보면 산영과 먼저 만난 것이었으나 이서는 자신과 먹을 생각으로 왔을 테니 이게 맞는 듯했다. 산영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나서 빤한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자 이서가 픽 웃으면서 일어났다.

“같이 먹지, 왜. 나 때문에 그래?”

“너 때문…… 이라고 하면 탓하는 것 같고. 이렇게 하는 게 맞지 않아?”

제대로 된 연애는 이게 처음이니 남들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서가 이전에 말했던 것처럼 그를 일 순위로 두는 게 맞지 않나 싶었다. 가만 보면 이서가 산영을 편하게 여기는 것 같지도 않고, 어쨌든 자신도 둘이서 있는 게 더 좋기는 했으니까.

차에 올라탄 이서가 청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돌연 그를 끌어안고 귓가에 입을 맞췄다. 키스 후에 들리는 웃음소리에 청우가 물었다.

“왜 웃어?”

“귀여워서.”

무슨……. 청우는 이해하지 못해 멀뚱히 안겨 있었다. 둘은 학교 근처에서 밥을 먹고 청우의 집으로 왔다.

“이거야?”

침실로 들어온 이서가 청우의 책상 위에 놓인 향초를 들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향을 맡고서 내려놓았다.

“좋네.”

“네가 자야 하는데 그거 쓰고 내가 더 잘 자.”

“누구든 잘 자면 좋지.”

원래도 잘 자는데 더 잘 자서 민망할 정도였다. 청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옷장 문을 열었다. 점퍼를 안으로 집어넣는데 이서가 다가오더니 선반 위에 놓인 회색 스웨터를 집었다.

“이거 산영이가 선물해 준 거?”

“어. 네가 잘 골랐다고 했다며.”

“그랬지.”

이서는 스웨터를 청우의 목 밑으로 가져다 대더니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쭉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어울리네. 입어 본 적 있어?”

“한 번 입었나.”

“으음,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구나.”

“…….”

“여기 되게 잘 보이는 자리에 뒀네. 옷장 열자마자 보이고.”

언뜻 범상한 태도였으나 표정과 말투가 시니컬했다. 청우는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한숨을 삼켰다.

“말로 해라.”

“말로 하고 있잖아?”

“넌 꼭 말로 때리는 것 같아. 집어넣을게.”

스웨터를 갠 뒤 침대 밑에서 리빙 박스를 꺼냈다. 박스 안에 스웨터를 넣는 동안 이서가 아무 말 없이 지켜보았다.

반쯤은 장난인 줄 알았는데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영의 선물을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고 느끼는 건지, 아니면 그저 산영의 선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싫은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때가 하필 장례식 이후라 그런 걸까. 곰곰 생각할 때였다.

“아니다.”

이서가 갑자기 청우를 제지하더니 박스 안에서 스웨터를 다시 꺼냈다. 뭘 하는 건가 싶어 가만 쳐다보자 웃으면서 옷을 건넨다.

“입어 봐.”

“……지금?”

“응.”

“왜?”

“그냥. 보고 싶어서.”

갑작스러운 변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청우는 빙글대는 낯을 응시하다가 결국 스웨터를 받아 들었다. 갈아입으려고 하는데 이서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았다. 머뭇거리자 그가 손을 저었다.

“에이, 내외하지 마.”

이서가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내외할 이유도 이제 없기는 했지만 저렇게 대놓고 보고 있으니 괜히 망설여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청우는 이서를 흘깃 보다가 옷을 시원하게 벗어 던지고는 스웨터를 입었다.

이서의 시선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내려왔다. 그가 이내 손을 뻗어 청우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하체가 이서의 얼굴 가까이 당겨졌다. 이서가 버클을 풀려고 해서 그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버클을 푼 뒤 바지를 내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청우는 이서를 내려다보다가 발을 들어 바지를 벗었다.

스웨터는 허리 밑으로 살짝 내려온 길이였기에 드로어즈 속 성기의 윤곽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서가 윤곽을 따라 손으로 부드럽게 애무하더니 고개를 들고 씩 웃었다.

그의 웃는 얼굴에는 거스를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손길 몇 번에 성기가 단단하게 부풀어 올랐다. 청우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이서의 손가락이 속옷의 밴드에 걸리고, 이내 청우는 스웨터만 입은 채로 서게 되었다.

둥글게 말린 손이 청우의 성기를 쥐고는 위아래로 슥슥 훑었다. 그의 손을 따라 성기의 머리가 고개를 높이 들었다. 이서가 혀를 내밀어 귀두를 날름 핥았다. 몸이 찌르르 울어서 이서의 어깨를 짚었다.

“하아…….”

혀가 선단에 철썩 붙어 살을 끈덕지게 문질렀다. 자극적인 간지러움에 배가 움푹 들어갔다. 틈새를 파내듯 핥을 때는 온몸이 찌릿했다. 지금도 충분한 자극이 되지만 아무래도 혀로는 감질나 저도 모르게 허리를 내밀자 이서가 웃으면서 입을 벌렸다.

“박아 줘.”

그의 한마디에 청우는 둥글게 벌어진 입 속으로 성기를 처넣었다. 이서가 청우의 엉덩이를 양손으로 쥐어 주무르며 들어온 좆을 게걸스레 빨았다. 처음부터 강약 조절 없이 거세게 흡입해 오는 것에 아래가 쭉 빨려 나가는 느낌과 함께 허벅지 안쪽이 바짝 굳었다.

“흑, 읏…….”

청우는 이서의 머리를 조심스레 쥐고 허리를 앞뒤로 흔들었다. 이서가 볼이 파이도록 입 안을 좁게 만들어 성기를 빨았다. 그러면서도 눈을 치켜떠 청우를 올려다보며 그의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둔부를 주무르던 손가락이 입구를 긁다가 안을 뚫었다. 손끝은 익숙하게 성감대를 좇아 속살을 쑤셨다. 앞뒤로 가해 오는 자극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청우는 헐떡이면서도 이서의 머리칼과 눈가, 귓가를 쓰다듬으며 자극을 견뎠다.

이서가 입을 크게 벌리며 고개를 젖혔다. 입술이 이내 청우의 성기를 깊게 머금었다. 좆이 목구멍까지 들어갔는지 와락 조이는 느낌에 청우는 헉 숨을 들이켜며 허리를 뒤로 뺐다. 그러나 이서가 청우의 몸을 꽉 잡으며 손가락으로 구멍 안을 퍽퍽 쑤셔 댔다.

“아흑, 아! 흣.”

허벅지가 발발 떨려 왔다. 청우는 굽어 든 손끝으로 이서의 머리칼을 쥐었다. 배가 쑥 꺼졌다가 나오기를 반복했다. 팔뚝에 힘줄이 눈에 띄게 섰다. 이서는 계속해서 청우의 성기를 깊게 물고 빨았다. 자극은 조금의 하락도 없이 곧은 선을 타고 상승했다.

이제는 혀만 닿아도 성기가 예민하게 반응했다. 마침내 쾌감이 꼭짓점에 다다라 터지려고 할 때였다. 이서가 돌연 고개를 훅 물렸고, 뿜어져 나온 정액이 이서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청우는 허리를 굽힌 채 바르르 떨면서 그의 낯에 제가 저지른 짓을 보고 굳어 버렸다. 숨을 몰아쉬며 손가락으로 정액을 훔치려는데, 이서가 눈을 가늘게 접어 웃더니 얼굴을 청우의 스웨터에 박아 버렸다.

“어…….”

이서는 마치 수건을 쓰듯 스웨터로 얼굴을 슥슥 닦더니 웃는 낯으로 고개를 들었다. 회색 스웨터에 하얀 정액이 뭉개졌다. 이걸……. 너무 당황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멍하게 이서와 스웨터를 번갈아 보자 그가 물었다.

“왜? 뭐 묻으면 안 돼?”

이서는 마치 사고를 쳐 놓고도 자신이 무슨 짓을 한지 모르는 강아지처럼 순진무구한 낯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말을 듣자마자 청우는 이서가 무슨 의도로 이런 짓을 한 건지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청우는 미간을 구겼다. 옷이 아깝거나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이런 모습까지……. 그래, 사랑스럽다는 말이 어울릴 것 같다. 청우는 무릎을 굽혀 앉은 뒤에 이서의 목덜미를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그의 혀끝을 빨고 입술을 문지르다가 고개를 내려 그의 목에 키스했다.

목울대와 가까운 곳에 입술을 비비며 이서가 입은 옷의 밑단을 쥐어 벗겼다. 탄탄한 상체를 훑어보고는 아래로 내려와 버클을 풀고 안에서 성기를 꺼냈다. 약간 단단해진 것을 쥐어 위아래로 훑다가 곧장 귀두를 머금자 머리 위에서 탄성이 터졌다. 이서가 손끝으로 청우의 머리칼을 문질렀다. 청우는 이서의 손길을 받으며 그가 그랬던 것처럼 혓바닥으로 선단을 애무했다.

혀끝으로 틈을 집요하게 파내자 이서가 고개를 젖히며 낮은 신음을 흘렸다. 눈을 치켜뜨고 툭 튀어나와 움직이는 목울대를 바라보다가 그의 좆을 더 깊게 머금었다. 어느새 크게 부푼 것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이를 세우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쪽쪽 빨았다.

“하아……. 흣, 아, 좋아.”

이서의 손이 귓바퀴를 문질렀다. 그의 손에서 연골이 주물러지자 이상하게도 배 속이 찌릿했다. 성기를 빨면서 청우는 제 좆을 매만졌다. 귀두가 입천장에 닿아 문질러지는데 몸이 그것을 자극으로 받아들여 옴찔거렸다. 달뜬 숨을 흘리며 고개를 깊게 숙였다. 이서의 성기가 쑥 들어와 목구멍을 찌르자마자 헛구역질이 나와 물러났다.

청우는 제 목을 쥐고 기침을 흘렸다. 입 안에 타액이 잔뜩 고이며 눈물이 핑 돌았다. 얘는 어떻게 한 거지? 고개를 들자 그가 웃는 낯으로 청우의 눈가를 문질렀다.

“무리하지 마.”

“…….”

“도와줄까?”

고개를 끄덕이자 이서가 청우의 양 뺨을 손으로 쥐고 벌어진 입 안으로 좆을 밀어 넣었다.

“코로 숨 쉬어. 긴장하지 말고, 입 크게 벌려 봐.”

입을 한껏 벌리자 성기가 중간까지 쑥 들어왔다가 빠져나갔다. 혓바닥을 짓누르던 좆이 멈추지 않고 진입했다. 청우는 저를 내려다보는 이서의 얼굴만을 바라보며 코로 숨을 내쉬는 데 집중했다.

그의 좆이 목구멍으로 빠졌다. 또다시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으나 이서가 숨을 쉬라고 말하며 눈가를 부드럽게 문질러 주었다. 편안하게 숨을 내쉬자 이서의 성기가 빠졌다가 다시 깊이 들어왔다.

“아, 흣. 후우……. 넌 여기도 예쁘게 조이냐.”

입 안에 고인 타액 때문에 질척한 소리가 흘렀다. 이서는 제 것을 청우의 입천장에 문질렀다가, 볼 안쪽 살을 쿡쿡 찔렀다가 다시 목구멍 가까이 집어넣으며 마음껏 희롱했다.

이서의 낯에 점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청우는 벌리고만 있던 입술을 모아 마찰하는 표피를 쪽쪽 빨았다. 이제는 요령을 좀 알 것 같아 혀를 슬슬 움직이자 이서가 거친 신음을 흘렸다.

“아, 씨발. 아…….”

그가 흘린 욕설이 듣기 좋았다. 청우는 제 입 안에서 잔뜩 느끼는 이서의 얼굴에 시선을 놓지 않으며 제 좆을 손으로 쥐고 흔들었다. 아래에서 쾌감이 솟을 때면 입 안이 바짝 조여들었다.

“청우야, 좋아? 응?”

이서가 청우의 머리채를 가볍게 쥐고 허리를 움직였다. 이전보다 다소 거친 삽입에 힘이 들었으나 열심히 혀를 움직였다. 그의 눈가가 쾌락으로 일그러질 때면 그가 느끼는 감각이 전이되어 제 몸까지 달아올랐다.

이서는 말없이 청우의 입 속에 성기를 마구 박았다. 젖은 입을 헤집는 좆은 제 아래를 쑤실 때와 다르지 않게 움직였고, 그 기억으로 마른 구멍이 움찔거렸다. 청우는 몸을 들썩이며 이서의 허벅지를 쥐고 고개를 깊게 숙였다. 입술을 모아 강하게 흡입하는 순간, 이서의 다리가 튀었다. 그는 황급히 청우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성기가 빠짐과 동시에 청우의 가슴으로 정액이 분출되었다.

“하으, 후…….”

이서가 거센 숨을 몰아쉬며 청우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그의 낯에 어린 열기가 금방 사라져 무표정해 보였다. 뻐근한 입가를 풀며 그를 살피는 찰나, 이서가 청우의 입가에 튄 정액을 손가락으로 훔치고 나서 청우를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더러워져도 상관없지?”

이서의 속삭임에 청우는 정액으로 얼룩진 스웨터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이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몸을 겹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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