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꿈 (8/16)

8. 꿈

강의 후기를 보기 위해 학교 커뮤니티에 접속한 청우는 인기 글의 제목을 보고 홀린 듯이 들어갔다.

「3년간의 짝사랑을 끝냈습니다.」

꽤 길게 쓰인 글을 청우는 빠짐없이 정독했다. 동기를 삼 년 동안 짝사랑했으나 가망 없는 마음을 인정하고 정리하니 시원섭섭하고 후련하다는 게 글의 요지였다.

청우는 글을 다 읽고 나서 고개를 기울였다. 이런 기분은 과연 어떤 건지 궁금했다. 오랜 시간 안고 있던 마음을 잘라 내는데 과연 후련할 수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의문이 가기도 했다.

댓글에서는 모두 글쓴이를 위로하고 축하해 주고 있었다. 축하까지 받을 일인가. 계속 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해졌다. 자신도 누구한테 축하를 받게 된다면 그 사람은 이서가 될까. 상상이 잘 가지 않아 갸우뚱하고 있을 때, 윤수가 옆자리에 앉으며 팔을 어깨에 얹었다.

“뭐 보냐.”

“어? 그냥.”

“야, 나 여친 옷 사 줘야 하는데 같이 좀 골라 주라.”

“내가……? 다른 애들이 골라 주는 게 더 낫지 않겠어?”

“음……. 뭐, 너 요즘 옷 잘 입으니까.”

그가 핸드폰을 꺼내 들고는 브랜드부터 한번 봐 달라며 청우 쪽으로 기울였다. 청우는 아는 게 없어서 멍하니 검색 창을 내려다보았다. 윤수가 온라인 편집 숍에 들어가 옷을 찾는 것을 구경하다가, 낯익은 옷을 발견하고 가리켰다.

“이거.”

“이거? 남자 옷인데? 와, 개비싸다.”

이서가 입었던 옷이었는데, 사진보다 그가 입은 모습이 더 예쁜 듯했다. 윤수가 해당 브랜드로 들어가자 다양한 옷이 떴으나 하나같이 가격대가 높았다.

“요즘 옷들 왜 이렇게 비싸냐. 명품도 아닌데.”

“그래도 예쁘더라.”

“산 적 있어?”

“아니, 본 적 있어.”

“그래? 그럼……. 오, 여자들 옷도 예쁘다. 비싼 값을 하나.”

윤수는 비싸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질 좋은 걸 사야 한다면서 가격을 높은 순으로 정렬했다. 청우는 선물을 고르는 데 푹 빠진, 즐거워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다가 물었다.

“좋아?”

“응? 뭐가.”

“그냥, 다.”

“좋지.”

좋아하는 사람과 마음이 이어져 연애를 하는 기분은 어떤 건지 궁금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사소한 기적이 파다하게 겹쳐야 가능한 게 아닐까 싶었다.

청우는 책상 위에 올려 둔 손을 꽉 쥐었다가 폈다. 그날 병원에서 이서가 제 손을 잡아 주었던 기억이 아른거렸다. 그때를 떠올리면 손끝이 간지러워지며 손바닥이 따뜻하게 달아올랐다. 가슴이 울렁거리는 듯한 이상한 감각에 눈가를 구길 때, 윤수가 팔꿈치로 청우의 옆구리를 찔렀다.

“야, 이거 어떠냐.”

“어, 예쁘네.”

“그치. 이거 사야겠다, 땡큐. 내가 오늘 밥 살게. 저녁이나 먹자.”

“내가 골라 준 것도 아닌데, 뭐.”

“그래도, 인마.”

사 주겠다는데 굳이 만류할 이유는 없었다. 곧 강의 시작 시각이 되고 교수가 들어와 윤수는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한창 강의를 듣던 도중, 창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유리창에 빗방울이 맺혀 있었다. 비가 오는 모양이다. 요즘에는 여름보다 가을, 겨울에 더 비가 많이 오는 것 같았다.

문득 이서가 걱정되었다. 오늘은 괜찮을까. 좋았던 기분이 내리는 비 한 방울에 고꾸라지는 건 아닐까. 비 오던 날 혼자 비를 맞던 모습이 유난히 기억에 선명하게 남았다. 청우는 강의가 끝날 무렵 이서에게 어디냐고 메시지를 보냈다.

「나 카페」

답장을 확인한 뒤 청우는 강의가 끝나자마자 윤수의 어깨를 쥐었다.

“야, 미안한데 나 오늘 밥 못 먹을 것 같다.”

“왜?”

“가 봐야 할 데가 좀 있어서.”

“그래? 나야 돈 굳고 좋지, 뭐.”

“다음에 내가 살게.”

윤수가 땡잡았다며 노래를 불렀다. 청우는 강의실을 나오며 이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창밖으로는 비가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응, 청우야.]

“아직도 카페야?”

[어.]

“혼자 있어?”

[음, 아니. 친구랑. 올래?]

친구와 함께 있다니 망설여졌지만 그를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청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가도 되냐고 물었다.

[응, 와. 주소 보내 줄게.]

“어.”

전화가 끊기고 나서 곧 메시지가 왔다. 학교 앞에 자리한 카페로 청우도 알고 있는 곳이었다. 사물함에서 우산을 챙긴 뒤 밖으로 나갔다.

카페로 향하는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오늘은 더 들을 강의가 없으니 이후로 이서와 시간을 함께 보내면 좋을 텐데, 그가 일정이 있는지 모르겠다.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카페에 다다랐을 때 창가에 앉아 있는 이서가 보였다. 그를 보자마자 청우의 낯에 화색이 돌았다. 걸음을 성큼 옮긴 청우는 곧 이서의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이서는 친구와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중이었는데, 상대는 여자였다. 친구라고 해서 당연히 남자라고 생각했던 편견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어쩐지 들어가기가 뭐해 머뭇거리고 있을 때, 고개를 돌린 이서가 청우를 보았다. 그의 웃음이 환하게 흩어졌다.

들어오라는 손짓에 안으로 향했다. 다가가 이서의 옆자리에 앉자 그가 청우의 어깨 위로 자연스레 손을 올렸다.

“우리 청우.”

맥락 없는 소개에 청우는 눈썹을 들어 올리며 이서를 돌아보았다. 그냥 친구도 아니고 우리 청우라니. 그런 식으로도 소개가 되는 건가 싶었지만, 이서는 신경 쓰지 않는 듯 싱글거렸고 앞에 앉은 친구도 개의치 않아 했다.

“안녕하세요.”

청우는 이서의 친구와 통성명을 하고 갑작스레 찾아온 상황에 대해 양해를 구했다. 다행히도 친구는 이런 일이 서로 자주 있다며 괜찮다고 해 주었다.

그는 이서와 같은 과 동기였는데, 재수로 인해 나이는 더 많았다. 처음 만나는 청우가 이야기에 잘 끼어들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고, 덕분에 청우도 소외되지 않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자리가 점점 불편해졌다.

“에이, 그건 누나가 너무했지.”

“뭐어? 이게 누나 편을 들어 줘야지. 안 그래요, 청우 씨?”

둘은 상당히 친한 듯했고, 서로를 대하는 데 스스럼없어 보였다. 서로 그냥 친구라는 것은 알지만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중간에 끼어들어서 그런 걸까. 그렇다기에는 둘 다 오히려 저를 위주로 대화를 이끌어 나가고 있었다.

청우는 불편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커피를 야금야금 마시며 최대한 대화에 집중했다. 와중에 자꾸만 제 어깨 위에서 꿈지럭대는 손가락이 신경 쓰였다.

“잠깐 나 화장실 좀.”

친구가 자리를 뜨고 나서 둘만 남게 되자 이서가 청우의 어깨를 본격적으로 주물럭거렸다. 청우는 그의 손끝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정이서.”

“응?”

“여기 언제까지 있을 거야?”

“왜? 지루해?”

“아니. 나랑 둘이……. 저녁 먹으면 안 돼?”

말을 내뱉고 나자 청우는 이게 자신이 원하던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대로 시간을 보내다가 어영부영 셋이서 밥을 먹기보다는 얼른 둘이서 있고 싶었다. 단단해진 낯으로 돌아보자, 이서가 청우를 말끄러미 응시했다.

말없이 머무르는 시선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많은 생각이 들었다. 친구와의 선약이니 거절당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함께 있을 시간은 많으니 오늘만 기회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러면 굉장히 아쉬울 것 같았다.

이서가 입술을 달싹였다. 하고 싶은 말을 곧바로 하지 않는 모습을 요즘 종종 보는 듯했다. 인내심 있게 기다리자, 그의 입이 열렸다.

“되지. 왜 안 되겠어.”

“……그래.”

들뜬 기분을 내리누르는데, 이서가 손끝으로 뺨을 간질였다. 간지러운 걸 참고 가만히 있다가 친구가 화장실에서 나와 이쪽으로 다가오기에 그의 손을 밀어 냈다.

“누나. 이제 슬슬 갈까?”

“그럴래?”

“응. 다음에 또 한잔해.”

자리는 금방 파했다. 이렇게 수월하게 둘만 남게 되자 어쩐지 멋쩍어졌다. 카페를 나오자 이서가 다시 청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저녁 먹기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고, 뭐 할까?”

“공부할래? 과제나.”

“어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듯한 표정에 청우는 순박한 낯으로 해야 할 일들을 떠올렸다. 두 시간 정도 함께 공부하다가 저녁을 먹으면 딱 좋을 듯싶었다. 그러나 이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헛웃음을 흘렸다.

“청우야. 날 쟁취하고서 고작 하고 싶은 일이 공부라니, 너무하다.”

“쟁취……?”

“연습실 갈까?”

“연습실? 첼로?”

“응. 근데 첼로는 아니고.”

첼로가 아니면 그냥 가서 쉬겠다는 뜻일까. 뭐든 좋아 고개를 끄덕이자, 이서가 웃으면서 턱을 까딱였다. 둘은 이서의 차에 타 연습실로 향했다.

연습실은 이서의 집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했다. 방이 여러 개 있고, 방마다 방음 처리가 되어 있어 안에서 악기 연주나 노래를 해도 소리가 크게 새어 나오지 않았다. 둘이 들어간 방 안에는 피아노가 있었다. 꽤 넓고 아늑해서 신기한 눈으로 둘러보다가 이서의 권유에 피아노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그가 피아노의 뚜껑을 열었다. 건반 위에 올라간 손가락이 짧은 멜로디를 능숙하게 연주했다.

“너 피아노도 칠 줄 알아?”

“응, 조금.”

조금이라기에는 실력이 꽤 좋은 듯했다. 기대하는 눈으로 쳐다보자 이서가 웃으면서 건반을 두드렸다. 익히 아는 곡이 그의 손끝에서 흘러나왔다.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악보도 보지 않은 채 피아노를 연주하는 이서의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첼로를 연주할 때도 이런 표정을 하고 있었을까.

영원히 이 자리에 있을 듯한 소년 같은 얼굴. 하지만 눈 깜짝할 새에 훌쩍 어른이 되어 날아갈 것만 같아 조마조마하게 하는 자유가 그에게 있었다. 알면 알수록 그가 더 깊이 보인다는 것이 신기로웠다. 연주하는 그의 모습에 푹 빠져 있을 때, 이서가 돌연 손을 내려놓았다.

“자, 이제부터는 유료 서비스야.”

“유료?”

“팁을 주셔야죠.”

“저녁 사 줄게.”

“에이, 그걸로는 안 되는데.”

저녁으로 안 된다면 무엇으로 그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 곰곰 고민하는데, 지켜보던 이서가 검지로 제 뺨을 툭툭 두드렸다. 청우는 곧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는 고개를 지레 물렸다.

“이 정도면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

“차라리 밥이…….”

“난 이거 아니면 안 할래.”

이서가 피아노 뚜껑을 닫고는 짐짓 쌀쌀맞은 낯으로 아무것도 없는 정면을 응시했다. 대놓고 자신을 놀리려는 기색이었지만, 그의 연주를 계속 듣고 싶다는 게 문제였다. 청우는 한숨을 쉬며 묘안이 없을지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떠오르는 것이 없어서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결국 고개를 기울였다.

입술이 이서의 뺨에 닿았다. 느껴지는 감촉이 간지러워 얼른 뒤로 물러나자 이서가 눈만 굴려 청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손끝으로 청우의 입술이 닿았던 볼을 만지작거리더니 숨을 크게 내쉬고는 뚜껑을 다시 열었다.

“너 입술 따뜻하다.”

매우 낯간지러운 소리를 꼭 저녁 메뉴 이야기하듯이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바람에 청우는 뒤늦게 굳어 버렸다. 이서의 손가락이 다시 건반 위에 얹히고, 그가 곡을 연주하는 동안 청우는 그의 손끝만 좇았다.

밀폐된 공간을 잔잔한 선율이 채웠다. 이서와 제 허벅지가 닿아 있는 것이 불쑥 신경 쓰였다. 다리를 좁혀 그에게서 멀어지자, 이서가 오른손을 내려 청우의 허벅지를 쥐었다. 사타구니 근처까지 내려온 손가락에 흠칫했으나 이서의 왼손은 여전히 건반을 두드렸다. 반쪽짜리 곡이 흘렀다. 청우는 결국 눈을 들어 이서를 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자신을 주시하고 있던 다갈색 눈을 보자 입술이 말랐다. 혀로 윗입술을 핥자, 이서의 입술 새로 나온 붉은 혀가 입꼬리를 살짝 훑고 들어갔다. 어느새 음악이 멎어 있었다.

“왜……. 안 쳐?”

“재미없지 않아?”

“재미로 듣는 건 아닌데.”

“더 재미있는 거 할까.”

뭐? 되물으려는 순간 이서의 얼굴이 훅 가까워졌다. 그가 청우의 뒤로 오른손을 뻗어 피아노 의자를 짚고는 왼손으로 청우의 턱을 쥐었다. 입술이 닿는 순간 옆방에서 음악 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들어왔다.

혀끝이 달았다. 부드럽게 들어온 살덩이는 이내 난잡하게 입 안을 헤집었다. 입천장을 진득하게 문질렀다가 혓바닥을 짓누르고, 송곳니를 간질이며 곳곳을 탐색했다. 깊어지는 키스에 청우는 헐떡이며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흣…….”

목 안에서 울리는 소리에 지레 놀라 움찔하자 이서가 떨어졌다. 그의 시선이 청우의 입술에서 코를 거쳐 눈으로 올라왔다. 웃음기 없는 낯은 집요했고, 또 어떤 면에서는 지독하게 느껴졌다.

“여기까지 누구 데려온 거 처음이거든.”

“……그래?”

“좋네. 혼자 있는 거 별로였나 봐.”

청우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의 솔직한 속내가 뜨끈하면서도 시원하게, 모순된 온도를 지닌 채 제게로 뚝 떨어졌다. 열기와 냉기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가슴이 묵직해졌다.

“혼자 와서 이렇게 연주하는 거야?”

“응. 그러다 그냥 멍하니 있기도 하고.”

“무슨 생각 하는데?”

“아무 생각도 안 해. 그런 공간이거든, 여긴.”

청우는 2평 남짓한 공간을 눈에 담았다. 조명은 노란빛을 띠어 은은했고, 창이 없었지만 답답하지는 않았다. 멍하니 있다가 새어 들어오는 소리에 때로는 귀를 기울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이곳은 그의 아지트 혹은 도피처였을까. 그런 곳에 제가 발을 들인 것이다.

그가 데려와 주었으니 방해는 아니었을 테지만 조심스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이서의 마음이 제게로 열려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자 발밑이 들떴다.

“그럼 연주하지 말고 가만히 있자.”

“응? 너한테 들려주려고 온 건데.”

“꼭 안 들려줘도 돼.”

제게 꼭 뭔가를 해 주지 않아도 되니 그가 자신과 편하게 있었으면 했다. 이곳에서 혼자 시간을 보냈을 이서를 따라 하려고 눈을 감고 가만히 있어 보는데, 옆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자 그가 고개를 기울인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냥.”

이서가 손을 뻗어 청우의 뺨을 매만졌다. 그의 시선 한 줄기가 스치기만 해도 만져지는 느낌이 드는데, 그의 손이 닿으면 더 깊은 곳이 건드려지는 듯했다. 미처 말해 주지 않은 구석까지 다가오는 감각이 언뜻 곤혹스러웠으나 싫지만은 않았다.

“다음에는 첼로 가져와서 켜 줄게.”

“……그럼 나야 좋고.”

“첼로랑 있으면 내가 좀 모범생 같아 보이나? 그래서 좋은 거야?”

“그게 아니라, 그냥 새로운 모습이니까.”

“이전의 나는 별로였고?”

“무슨 그런 말을 하냐. 너는 그냥……. 너지.”

그가 어떤 모습을 보이든 그라는 사실은 변치 않았다. 자신은 그저 이서를 다른 각도로 보거나 그가 띠는 다양한 색을 보는 것뿐이지, 품평할 생각은 없었다.

이서의 눈길이 청우에게 머물러 떠나지 않았다. 요즘 그는 꽤 자주 저런 눈을 하고 자신을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때마다 몸 곳곳이 자르르했다.

이서가 이내 고개를 기울여 청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청우는 그의 무게를 받아 내며 이런 시간이 오래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순간이 어쩐지 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꿈에서도 이런 시간을 가져 본 적은 없었다.

웅웅 울리는 진동 소리에 눈을 뜬 청우는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들었다. 새벽 네 시에 가까운 시간에 눈가를 찡그렸다가 발신인의 이름을 보고 얼른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어. 받았다.]

왠지 기운 없이 들리는 목소리에 다시 이름을 확인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이서가 맞았다. 이 시간에 웬일인가 싶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뭐야, 무슨 일 있어?”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고.]

“그럼? 어디 아파?”

[하하. 잠이 안 와서.]

“아……. 여태까지 못 잔 거야? 힘들겠네.”

자신은 베개에 머리만 대도 잠들 수 있는 타입이었으나 어쩌다 한 번씩은 잠이 오지 않을 때가 있었다. 단 하루만 그래도 힘든데, 자주 불면을 겪는 듯한 이서는 더 힘들 것이다.

“내가 갈까?”

그의 수면에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긴 새벽을 같이 있어 줄 수는 있었다. 핸드폰 너머로 이서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올 필요는 없고. 사실 내가 왔거든.]

“어딜? 우리 집?”

[응. 들어가도 돼?]

멍멍히 눈을 깜빡이던 청우는 침대에서 퍼뜩 나와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했다.

“어, 와도 되지. 올라와.”

[응, 고마워.]

전화가 끊기자마자 어수선한 침대 위를 정리하고 거실을 확인한 뒤 욕실로 들어갔다. 거울 속 자신은 막 잠에서 깨어 흐리멍덩했지만 눈곱 하나 없이 멀쩡했다.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나오자 마침 노크 소리가 조용히 들렸다. 현관으로 가 문을 여니 이서가 빙긋 웃으며 들어왔다. 그는 집에서 바로 나왔는지 편안한 옷을 입고 있었다.

“들어와.”

“늦은 시간에 미안.”

“아니야. 나도 뭐, 안 자고 있었어.”

“여기 뻗쳤는데?”

뻔히 보이는 거짓말에 이서가 재미있다는 듯 청우의 뒤통수를 가리켰다. 청우는 얼른 손을 들어 머리칼을 슥슥 문질렀다.

“뭐 좀 마실래?”

“아니. 그냥 자자.”

“잠 안 온다면서.”

“넌 자고 있었잖아. 그리고 여기 오면 나도 좀 잘 수 있을까 싶어서.”

잠을 찾아 이곳까지 왔다는 그가 안쓰러웠다. 청우는 침실로 들어가 이불을 들쳤다. 이서가 장난스레 고개를 숙여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며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의 옆에 나란히 눕자, 이서가 몸을 돌려 청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청우는 그의 머리칼을 손으로 매만지다가 물었다.

“잠 안 올 때 보통 뭐 해?”

“음……. 그냥 영화를 보든가, 책 읽어. TV 틀어 놓고 보기도 하고.”

“그럼 잠이 와?”

“언젠가는 오지.”

그 언젠가를 기다리는 새벽은 참 길었을 테다. 저번에 잘 못 자느냐고 물었을 때는 거짓말을 했던 이서가 오늘은 솔직하게 말해 줘서, 그리고 힘들 때 자신을 찾아 줘서 고마웠다. 뒤통수를 토닥이는데 그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아, 네 냄새 좋다.”

“무슨 냄새. 난 잘 모르겠던데.”

“그냥, 섬유 유연제 냄샌가. 아무튼 좋아.”

제가 느끼기엔 별 냄새가 나지 않는데, 그는 좋다고 하니 겸연쩍었다. 이서의 머리카락을 건드리며 가만히 누워 있다 보니 다시 눈이 감기려고 했다. 청우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서를 확인했다. 그는 눈을 감고 있는 듯했다. 이서의 호흡이 일정하게 느껴졌다.

“자?”

“응…….”

자고 있지는 않으나 목소리는 어느새 몽롱했다. 제 덕은 아니겠지만 이렇게라도 와서 잠을 청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청우는 그의 머리에 고개를 기대고는 눈을 감았다. 희미한 샴푸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눈꺼풀 안쪽으로 빛이 새어 들었다. 눈을 뜬 청우는 여전히 제 품에 안긴 이서를 보고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푹 잠이 든 듯한 낯을 내려다보다가 조심스레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블라인드를 쳐서 빛을 가린 뒤에 방을 나왔다. 새벽에 깬 탓에 평소보다 조금 늦게 일어났다. 청우는 옷을 갈아입고 나서 혹시 몰라 이서에게 메시지를 남겨 놓은 다음 집을 나섰다.

일주일에 최소 두 번은 운동을 해야 몸이 개운했다. 한 시간 동안 조깅한 후에 마트에 들렀다. 숨을 고르며 이서에게 무엇을 먹일지 고민했다. 간단하게 해 줄까 하다가 잠도 잘 못 자는 녀석이니 든든한 걸 먹이고 싶어 정육 코너로 향했다.

메뉴를 제육볶음으로 정하고 앞다리 살과 채소를 샀다. 맥주와 군것질거리를 좀 얹고 나니 봉지가 빵빵하게 부풀었다. 손이 무거워지자 마음은 든든해졌다. 잘 먹으려나. 이서는 많이 먹지는 않았지만 음식을 가리는 편도 아니었다.

집에서 이서가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아직 자고 있을 테니 빨리 음식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문을 연 청우는 거실 소파에 부스스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이서를 발견했다. 머리가 까치집이 된 이서가 흐리터분한 눈으로 이쪽을 돌아보았다.

“어디 갔었어, 나만 두고.”

“운동하고 장 좀 보러. 메시지 남겼는데, 못 봤어?”

“봤지.”

“벌써 깼냐. 좀 더 자지.”

“네가 없잖아.”

말끝이 묘하게 늘어지는 게 아직 잠에 취해 있는 듯했다. 잠투정을 부리는 아이 같아 웃음이 나왔다. 청우는 침실로 들어가 이불을 가져온 뒤 이서를 소파에 눕혔다. 몸 위에 이불을 덮어 주자 그가 눈을 깜빡이며 청우를 올려다보았다.

“더 자. 밥하려면 시간 좀 걸리니까.”

“나 뭐 해 주게?”

“응. 제육볶음 괜찮아?”

“너무 좋지…….”

이서의 눈꺼풀이 무거워 보였다. 청우는 무릎을 굽혀 앉아 그의 눈 위로 손을 덮었다. 이불 밖으로 나온 손이 꿈지럭대다가 멎었다. 손을 떼자 그는 다시 잠이 든 듯 새근새근 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이 퍽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입가에 미소가 어린 것도 모른 채 한참을 쳐다보다가 일어났다.

씻고 나와 봉지에서 물건들을 꺼내 정리한 다음 쌀을 안쳤다. 채소를 손질하고 양념을 만든 뒤 고기와 함께 달달 볶았다. 고기만 먹기에는 아쉬워 달걀국까지 하니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청우는 한숨을 돌린 뒤에 여전히 자고 있는 이서를 돌아보았다. 밥이 다 되기는 했지만 막상 깨우려니 단잠을 방해하는 것 같아 망설여졌다.

가까이 다가가 소파 앞에 앉았다. 잠이 든 낯은 평온해 보였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눈가를 매만졌다. 이 눈이 꼬리를 길게 늘어뜨릴 때를 떠올리며 손끝으로 살짝 긁자 이서의 입꼬리가 어렴풋하게 올라갔다. 손을 떼어 내니 이서가 눈을 떴다.

“깼으면 말을 하지.”

“나를 너무 소중하게 만지고 있길래.”

청우는 계면쩍은 얼굴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식탁 위를 세팅한 뒤 자신을 좇고 있는 이서를 불렀다. 그가 다가오더니 음식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이걸 다 했어?”

“어. 맛은 보장 못 한다.”

“딱 봐도 맛있어 보이는데, 뭐. 이런 걸 다 할 줄 알아?”

“부모님 맞벌이하시고 어릴 때 동생이랑 나랑 둘만 있을 때가 많았으니까. 기본적인 것만 하는 정도야.”

이서야말로 요리를 잘하던데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격인 것 같아 손을 내저었다. 자리에 앉아 수저를 들면서 이서가 맛보기를 기다렸다. 국을 한 숟가락 떠먹은 이서의 눈이 동그래졌다.

“맛있다. 기본만 한다고 말할 정도의 솜씨가 아닌데?”

“오버는.”

타박을 주기는 했지만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뭣보다 이서가 잘 먹는 모습을 보니 좋았다. 이래서 사람들이 요리에 흥미를 붙이나 보다.

“혼자 있을 때도 이렇게 잘 챙겨 먹어?”

“아니. 웬만하면 학식 먹고 들어오지.”

“이야, 영광인데.”

“너는 집에서 좀 해 먹고 사냐?”

“나도 잘 안 해 먹지.”

하긴 자취하는 사람치고 집에서 잘 해 먹는 놈들은 별로 없었다. 대부분 다 배달을 시켜 먹곤 하지만, 청우는 배달 음식을 즐기지 않는 편이었다.

“잠 안 올 때 자주 와. 같이 밥도 먹고 하게.”

“귀찮지 않겠어?”

“귀찮을 게 뭐 있어.”

“새벽에 또 찾아오고 그러면 어떡해.”

“와. 너 여기서 잘 수 있으면 좋지.”

제 집에 와서도 못 잘 수 있겠으나 혼자서 끙끙대고 있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이왕이면 힘들 때 같이 있어 주고 싶었다.

밥을 한 숟가락 크게 떠먹다가 시선이 느껴져 눈을 드니, 이서가 한숨 같은 웃음을 내쉬었다.

“너무 쉽게 열어 주는 거 아니야? 나 그러다 여기 눌러산다?”

“열린 문이라며.”

“응?”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그러니까 나도……. 똑같다고.”

그가 자신에게 항상 열린 문이라고 했던 말이 마음에 깊은 자국을 남겼다. 그러니 저도 그 말을 돌려주고 싶었다. 이서에게는 도움을 많이 받았다. 받은 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이 안겨 줄 수 있으면 좋을 테다.

이서의 입가에 웃음이 고였다. 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여튼 못 당하겠다니까.”

누가 할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입 안에 든 것을 씹으며 어서 먹으라고 손짓하자 이서가 부지런히 수저를 움직였다. 둘은 식사를 마친 뒤에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환기차 열어 둔 창에서 싸늘한 바람이 들어왔다. 거실을 내리쬐는 햇볕은 꽤 따뜻해서 둘은 함께 창밖을 바라보았다.

“집에 혼자 있을 때 뭐 해?”

“그냥 책 읽거나 운동하고, 공부하고.”

“음. 친구들은 자주 놀러 오는 편이야?”

“아니. 뭐 할 때나 모이지, 다들 각자 자취하니까. 술판 같은 것도 신입생 때나 벌였고.”

이서가 고개를 주억였다. 처음 혼자 살기 시작할 때는 친구들이 많이 놀러 왔는데, 학년이 올라갈수록 그런 일도 점점 줄어들었다. 이제부터는 아마 이서가 제 집을 자주 찾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저건 뭐야? 구급상자?”

“응.”

“저런 것도 있고, 섬세하네.”

“운동하다 보면 가끔 다칠 때가 있어서.”

이서의 시선이 거실 구석구석을 훑었다. 청우는 그가 보고 있는 곳을 따라서 눈길을 흘렸다.

“아플 때는 혼자 있어?”

“별로 아파 본 적 없는데.”

“정말?”

“응.”

이서가 청우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면서 팔뚝을 조몰락거려 청우는 가만히 있다가 조용히 팔을 빼냈다.

“이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야?”

“응?”

“왜, 집에 아픈 애 있으면 나 아픈 건 별일도 아닌 것 같잖아.”

나지막한 목소리에 어릴 적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분명 그럴 때가 있기는 했다. 감기에 걸려 열이 올라 얼굴이 시뻘게졌는데도 어머니가 너 어디 아픈 거 아니냐고 물어보면 손을 내저었다.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결국 어머니의 손에 응급실로 끌려갔다. 갑작스레 찾은 병원이 무서우면서도 어머니가 내내 곁에 있어 주는 것이 좋아서 또 아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정말 어릴 때의 이야기지만.

청우는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이제는 감기도 몇 년에 한 번 걸릴 정도로 건강하다. 아프면 약을 챙겨 먹거나 택시를 타고 응급실에 가면 되는 성인이고.

“자취하면서 크게 아파 본 적은 거의 없어.”

“그럼 아프게 되면 나 불러.”

“간호해 주게?”

“응. 병원에 가더라도 택시보다 내가 더 빠르게 올 테니까.”

말만이라도 고마운 이야기였다. 그때가 되면 정말 이서를 부를지는 모르겠지만 청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제게 가장 친숙한 공간에서 이서와 함께 시간을 보내니, 굳이 뭘 안 하는데도 무료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서가 지루해할까 청우는 무언가 할 게 있나 찾아보았다.

“영화 볼래?”

“영화? 음, 좋지.”

“뭐 볼까.”

“너 좋아하는 거. 아니다.”

“말이 너무 확 바뀌는 거 아니냐?”

“공포 보자. 무서운 거.”

눈을 가늘게 뜨고 양손을 들어 올린 채 귀신 흉내를 내는 이서를 보고 청우는 픽 웃었다.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친 뒤에 최신 공포 영화를 결제했다. 과자와 맥주를 꺼내 와 소파에 다시 앉자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청우는 공포 영화를 즐기지는 않았지만 잘 보는 편이었다. 제 돈 주고 영화관에 가서 보지 않는 이유는 무섭기 때문이 아니라 영양가가 없다고 느껴서였다. 하지만 이서는 이런 종류의 영화를 좋아하는 듯싶으니 자신도 재미를 들일 용의가 있었다.

맥주를 들이켜며 영화에 집중했다. 긴장을 고조시키는 음악이 쿵쿵 울릴 때였다. 이서가 돌연 청우의 어깨를 쥐더니 “워!” 하고 큰 소리를 냈다. 실없는 장난에 무표정한 낯으로 돌아보자 그가 입술을 삐죽댔다.

“재미없어.”

“애냐.”

“이럴 땐 ‘꺄악’ 하면서 안기는 재미도 있어야 하는데.”

“네가 해.”

“꺄악.”

이서가 정말로 작위적인 비명을 지르며 청우를 덥석 끌어안았다. 청우는 맥주가 흘러내릴까 봐 캔을 얼른 내려놓고는 웃음을 흘렸다. 제 가슴에 머리를 묻은 이서가 귀여워 보였다. 그의 머리칼을 가만가만 쓰다듬자 이서가 청우를 흘긋 올려다보더니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안 무서워?”

“어.”

“재미없으면 다른 거 봐.”

“재미는 있어. 근데 넌 이거 무슨 재미로 보냐.”

흥미롭긴 하지만 찾아서 볼 정도는 아닌지라 이서의 시선이 궁금했다. 이서가 청우의 표정을 확인하더니 웃음을 흘렸다.

“그냥, 현실에 일어날 리 없는 일들이잖아. 판타지 영화 같은데 차이점이 있다면 반짝반짝 빛이 나는 엔딩이 아니라는 거?”

“음…….”

“생각 없이 보기 딱 좋아. 이해 안 되지?”

“아니. 무슨 의미인지는 알 것 같아.”

그의 취향인데 자신이 이해하고 말 것도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현실에 일어날 일 없는 기적 같은 해피 엔딩을 보고 위안을 받는다면, 이서는 그 반대인 모양이다.

“보고 나면 악몽 안 꾸냐? 꿈에 나올 것 같은데.”

“가끔 나오는데 괜찮아. 내가 이겨.”

“어떻게 이기는데.”

“미인계로.”

헛웃음을 흘리자 이서가 따라 웃었다. 영화 속에서는 비명이 난무하는데 둘은 마주 보며 하하댔다. 이윽고 웃음이 걷히자 시선이 깊게 맞닿았다. 순식간에 조성된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이제는 적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목덜미를 잡아당기는 손길에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맞닿았고, 현실감 없는 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꿈에 나올 정도로 강렬한 경험을 꼽자면 피가 낭자하고 난데없이 귀신이 튀어나오는 공포 영화가 아니라, 지금의 키스일 테다. 혀를 맞대고 비비는 것만으로도 잗다란 쾌감이 밀려왔다.

이서가 좋아하는 부근이 어디인지 이제 슬슬 알 것 같았다. 송곳니와 가까운 쪽의 잇몸을 문지르자 그가 숨을 들이켰다. 몸을 통해 이서를 알게 되는 과정에도 기쁨이 있었다. 단순히 육체적인 쾌락을 넘어서는 충만감이 있다는 깨달음이 더 큰 열락의 물결을 불러오곤 했다.

입술이 떨어지고 나서 이서가 청우의 입가를 엄지로 문질렀다. 한참을 그러면서 청우의 낯을 훑던 그가 입을 뗐다.

“나 오늘도 자고 가도 돼?”

“어, 자고 가.”

이서의 입꼬리가 그림을 그리듯 부드럽게 올라갔다. 청우는 그 미소를 꽤 오래 눈에 담았다.

저녁을 먹고 나서 산책하러 밖으로 나왔다. 산책하기에 좋은 기온은 아니었지만 패딩으로 몸을 꽁꽁 싸매고 나오니 나쁘지 않았다. 청우는 몰아치는 바람에 어깨를 움츠리는 이서를 보고는 패딩에 달린 모자를 씌워 주었다. 모자 속으로 쏙 들어간 얼굴이 퍽 귀여워 웃자, 이서도 손을 뻗어 청우에게 모자를 씌웠다.

둘은 한겨울 길을 나서는 사람들처럼 꽁꽁 싸맨 채 나란히 걸었다. 바람을 모자가 막아 주어 포근했다.

“이제 종강도 얼마 안 남았네.”

“그러게.”

“우리 처음 만났을 때는 봄 끝날 무렵이었지?”

“응.”

건과 산영이 초봄에 만나 늦봄이 되기 전에 이어졌고, 청우도 그 무렵에 이서를 처음 만났다. 그때 종종 마주쳤던 이서는 여자 친구와 함께 있을 때가 많았는데, 참 새삼스러웠다.

“그때 청우 너 나 안 좋아했잖아.”

“……알고 있었어?”

“그럼.”

“미안하다. 그래도 싫어한 건 아니었는데…….”

“여기서 진지하게 사과를 하면 상처받지?”

웃으면서 하는 말에 머쓱해져서 콧잔등을 긁적였다. 싫다기보다는 불편하다는 감정이 더 컸다. 이서는 한 번도 대해 본 적 없는 인간상이라 생각했고, 첫인상부터 선입견이 강했으니까.

“넌 그때도 알고 있었어? 내가 산영이 어떤 눈으로 봤는지.”

“음, 대충은?”

“어떻게 알았냐.”

“친구를 그런 눈으로 보지는 않지.”

그런가. 자신이 어떤 눈을 하고 있었는가 돌이켜 보고 있을 때, 이서가 걸음을 멈추었다. 따라 서서 고개를 돌리자 이서의 시선이 제게로 따라붙었다. 가만히 마주 보니 이서가 손가락으로 청우의 눈가를 쓸었다.

“티가 안 날 리가 없다니까.”

눈꼬리를 문지르는 손이 닿은 곳만 따뜻해졌다. 가만히 그를 쳐다보며 눈을 깜빡이는데, 가슴께가 또 뻐근해졌다. 한 걸음 뒤로 슬쩍 물러나자 이서가 코끝을 짧게 찡긋하더니 손을 뗐다.

“조금만 더 걷다가 들어갈까?”

“그래.”

길을 조금 더 걷고 나서 집으로 들어왔다. 보일러를 돌려 훈훈해진 방 안에 들어서자 몸이 따끈따끈하게 녹았다.

해가 완전히 진 창밖은 어슬하고 고즈넉했다. 붉은빛이 멀어지고 까만색으로 완전히 잠긴 하늘을 바라보다가 소파에 앉아 패딩을 벗었다.

“같이 씻을래?”

먼저 씻겠다던 이서가 패딩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태연하게 던진 물음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답 없이 미간을 찌푸린 채 쳐다보자 그는 반질반질한 낯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누가 보면 나 혼자 좋았는 줄 알겠어.”

“무슨…….”

“문 안 잠글게, 마음 바뀌면 들어와?”

이서가 윙크하고선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청우는 정말로 잠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문을 응시하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곧이어 물소리가 새어 나왔고, 그 소리에 어쩐지 편안해져 소파에 몸을 묻었다.

집에서는 되도록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편인데도 이서와 보내는 시간은 안락했다. 취향도 성격도 다른 편인데 어긋나는 부분이 없다는 게 신기했다. 청우는 간지러운 가슴을 긁적이다가 욕실을 힐긋댔다. 들어갈 생각은 전혀 없지만 이서가 그런 말을 한 탓에 왠지 신경이 쓰였다.

이서는 한참을 있다가 얼추 마른 머리칼을 수건으로 털면서 밖으로 나왔다. 기분 탓인지 그의 얼굴이 더 뽀얘진 것 같았다.

“진짜 안 들어왔네. 정 없게.”

“넌 들어오지 마라.”

“문 잠글 거야?”

“어.”

“괜찮아. 나 문 잘 따.”

청우는 일어나 욕실로 향하다가 이서를 돌아보았다. 진심인가 싶어 빤히 쳐다보자 이서가 무구한 낯을 하고선 고개를 양옆으로 기울여 댔다. 장난인 것 같았지만 찝찝해 욕실의 문을 잠그고 나서 몇 번이나 확인을 한 뒤 씻었다.

씻고 나오니 이서는 소파에 늘어져 있었다. 머리맡에 앉자 이서가 청우의 허벅지에 머리를 얹고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우리 같은 냄새 난다.”

이서의 말대로 둘 다 막 씻고 나온지라 샴푸 향이 진하게 흩어졌다. 이서가 청우의 배에 코를 묻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아 약간 거친 듯한 감촉의 머리카락을 매만지자 그가 작게 하품을 흘렸다.

“나 벌써 잠 올 것 같아.”

“잘래?”

“아니. 좀만 더 이러고 있다가.”

눈을 감은 채 뺨을 비비는 이서의 낯은 평온해 보였다. 제 품에서 그가 어떤 것도 꾸며 내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큰 기쁨으로 다가왔다. 거대한 파도처럼 덮치는 것이 아니라 미미하게 밀려오던 물결이 점차 목까지 잠기는 듯한 기쁨을 만끽하고 있을 때, 진동 소리가 물을 갈랐다.

소파 팔걸이에 둔 핸드폰에는 산영의 이름이 떠 있었다. 이 시간에 웬일일까. 수신을 망설이고 있을 때 이서가 말했다.

“받아.”

청우는 이서의 귓바퀴를 손끝으로 건드리며 전화를 받았다. 귀걸이를 건드릴 때마다 꿈틀대는 이서의 눈썹에 시선을 두며 입을 뗐다.

“여보세요.”

[청우야.]

가라앉은 목소리에 청우의 표정도 덩달아 무거워졌다. 이서의 귀를 만지작대던 손을 가만두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

[할머니……. 많이 위독하셔서 지금 보내 드릴 준비 하고 있어.]

“어?”

[시간 되면 올래?]

청우는 우두커니 눈을 깜빡였다. 불과 얼마 전에 잘 계신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나 산영의 조모는 노령이었고, 벌써 이 년간 병원 신세를 지는 중이었다. 야속하지만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어, 그래. 갈게.”

[고마워. 병원 어딘지 알지?]

“응.”

[그래. 조심해서 와.]

전화를 끊고 나자 이서가 눈을 뜬 채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궁금해하는 눈길에 청우는 어두운 낯으로 입을 뗐다.

“산영이 할머니가 위독하셔서 지금 가 봐야 할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서도 몸을 일으켰다. 빨리 옷을 갈아입으려고 걸음을 떼는 순간 이서의 목소리가 청우를 붙잡았다.

“그 자리에 네가 가?”

“어, 학교 다닐 때 산영이네 집 오가면서 자주 뵀는데 그때마다 잘 챙겨 주셔서 감사한 분이야. 산영이 어릴 때 부모님 돌아가시고 할머니 손에 자란 데다 친척도 거의 없어서, 만약에……. 떠나시게 되면 일손도 부족할 거고. 그래서 미안한데 지금 가 봐야겠다. 아, 너도 같이 갈래?”

“아니, 난…….”

저를 돌보아 준 친할머니가 중학생 때 돌아가시고 나서 한편에 늘 지니고 있던 헛헛함을 산영의 조모를 만나면서 일부 떨칠 수 있었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도 종종 찾아뵙곤 했는데, 점점 시간을 내기가 힘들어 최근에는 뵙지 못했다. 병원에서의 생활이 외로우셨을 만큼, 가시기 전 인사라도 해야 후회가 남지 않을 것 같았다.

마음이 급해져 얼른 방으로 들어가려던 청우는 이서가 대답을 끝맺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뜨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이서는 어쩐지 오랜 잠에서 깨어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난 괜찮아.”

청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거실로 나오자 혼자 앉아 있는 이서가 신경 쓰였다.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쥐었다.

“자고 가. 같이 자면 좋을 텐데, 미안하다. 다 네 맘대로 쓰고 편하게 있어.”

코트를 여민 뒤에 돌아설 때였다. 이서가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뒤돌아본 청우는 이서의 낯빛을 살폈다.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얼굴은 언뜻 평소처럼 장난스러운 듯도 했으나 다소 가라앉아 보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집주인이 자리를 비우면 불편하겠지. 불면이 다시 찾아왔을 때 혼자라면 더 힘들 수도 있겠다. 같이 가면 좋으련만 이서에게 편한 자리는 아닐 테니 더 권할 수도 없었다. 청우는 제 손목을 잡은 이서의 손을 어루만졌다.

“가서 인사드리고 바로 올게.”

이서의 손가락이 거리를 벌려 청우에게서 떨어졌다. 이서는 마치 낯선 것을 보는 양 제 손을 내려다보았고, 청우는 이서의 어깨를 두드리고 나서 자리를 떴다.

“갔다 온다.”

밖으로 나가 문을 닫기 전 한 번 더 뒤를 돌아보았다. 닫히는 문 사이로 이쪽을 멀거니 응시하는 이서가 보였다. 그를 두고 나가는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밤이 깊어 있었다. 병실을 찾은 청우는 흐느낌이 섞인 엄숙한 분위기에 황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를 둘러싸고 산영의 누나 둘이 울고 있었고, 산영은 건의 품에 안긴 채 오열했다. 청우는 그들과 떨어진 곳에서 놓쳐 버린 마지막을 망연히 응시했다.

산영과 함께 부고를 알릴 고등학교 동창들의 연락처를 취합하고, 정신없이 일을 처리하는 산영의 누나들을 대신해 건과 함께 자질구레한 일을 맡았다. 문상객의 조의금을 받고, 조문을 하러 온 동창들을 맞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잠을 자지 못해 눈이 뻐근했다. 잠깐 한가해진 사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서에게 부고를 알리며 늦게 들어갈 것 같다는 메시지를 보냈는데, 이서는 확인하고도 답장이 없었다. 설마 아직도 자는 걸까. 해가 뜨는 걸 보고 잠들었다면 그럴 만도 하지만 강의가 있을 텐데…….

혹시 알람을 듣지 못하고 자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 이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오랜 연결음 끝에 상대방이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목소리만이 들렸다. 학교에 갔나. 이서를 혼자 두고 온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청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건. 나 잠깐 집에 갔다 올 테니까 자리 좀 부탁한다.”

“어.”

산영의 식구가 의지할 수 있는 친척들이 거의 없었던지라 조의금을 받는 것부터 운구까지 건과 청우가 돕기로 했다. 건이 든든하게 느껴질 때가 오다니 세상사는 참 모르는 일이다. 그래도 슬퍼하는 산영의 곁을 건이 지켜 주어 다행이었다.

청우는 상주인 누나의 옆을 지키고 있는 산영을 한 번 보고는 밖으로 나왔다. 집으로 향하는 길 내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존재는 이서였다. 잠은 잘 잤을지, 혼자서 괜찮았을지가 가장 궁금했다.

밥은 먹었을까. 안 먹었으면 뭐라도 사 가지고 들어갈까 하다가, 일단 자고 있는지 확인부터 해야 할 것 같아 빈손으로 집에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눈에 들어온 현관은 텅 비어 있었다. 청우는 불이 꺼진 거실을 확인하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소파 위에는 잘 개어진 옷만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의식하지 못한 채 크기를 부풀린 기대가 금세 쪼그라들고, 허탈함과 아쉬움이 밀려 들어와 그 자리를 채웠다.

아무래도 강의를 들어야 하니 여기서 계속 있을 수는 없었을 테다. 다음에 괜찮으면 시간표를 보내 달라고 해야겠다. 청우는 한 번 더 전화를 걸어 볼까 하다가 방해하지 않으려고 메시지를 보냈다. 왔는데 네가 없더라, 잘 들어갔냐, 잠은 잘 잤냐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청우가 다시 장례식장으로 돌아올 때까지 이서는 메시지를 읽지 않았다.

다음 날에는 조문객들이 몰려 더 정신이 없었다. 제 동생뿐만 아니라 동창들도 많이 찾아와 청우는 산영과 함께 자리를 지켰다.

“와, 갑자기 할머니가 해 주셨던 팥빙수 생각난다.”

“대박. 그거 잊고 있었어. 그게 진짜 찐 옛날 팥빙수였는데.”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보니 산영의 할머니와 얽힌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내내 훌쩍이며 비통해했던 산영도 친구들을 대할 때만큼은 기운을 되찾았다.

고등학생 때는 다들 가까운 곳에 살아 서로의 집을 자주 오갔기에 부모님을 뵙는 일이 빈번했다. 친구들이 기억난 일화를 하나씩 이야기할 때마다 머릿속 한편에 묻어 두고 찾지 않았던 추억이 흙을 떨치고 일어났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풋풋한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산영의 조모가 정말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실감이 나 씁쓸해졌다.

누군가의 사망 소식은 늘 여러 감상을 불러오곤 했다. 그 사람이 아는 사람이라면 생전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기분이 침전할 수밖에 없었다. 청우는 물 한 잔을 마시며 테이블 아래로 핸드폰을 꺼냈다. 이서에게서는 여전히 연락이 오지 않고 있었다.

그를 보지 못해 더 침울해지는 듯도 했다. 이서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청우는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떴다.

밖으로 나오자 서늘한 공기가 피부를 덮쳤다. 노을이 지는 하늘을 보며 핸드폰을 들어 이서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역시 받지 않았다. 가라앉은 낯으로 전화를 끊을 때, 담배를 입에 문 건이 다가왔다.

“정이서는 뭐 하냐? 얼굴도 안 보이고, 이 싸가지 없는 새끼.”

담배에 불을 붙이며 하는 소리에 청우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면서 답했다.

“바쁜가 보지.”

“흥. 바쁘기는.”

“너 근데……. 이서랑 연락 돼?”

“내가 걔랑 연락을 왜 해.”

입술 새로 연기를 내뿜던 건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청우를 돌아보았다. 훑는 시선을 받자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정이서 연락 안 받냐?”

“……어.”

“오늘이 며칠이지?”

건이 미간을 구기며 핸드폰을 꺼내 날짜를 확인했다. 갑자기 날짜는 왜 묻나 싶어 같이 들여다보는데 그가 혀를 찼다.

“이맘때쯤이면 그거일 텐데.”

“뭐?”

“걔 동생 기일.”

“어?”

“그 새끼 잠수 타는 기간이 있어. 그건가 보네. 하여튼 유난은.”

생각지도 못한 일에 청우는 건을 멍하니 응시했다.

동생 기일이라고? 그렇다면 왜 말을…….

잠이 오지 않는다며 새벽 늦게 제 집을 찾아왔던 이서가 생각났다. 단순한 불면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슬픔이 그를 찾아왔던 걸까. 그래서 혼자 있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사정을 알았더라면 최대한 그의 곁에 있었을 테다. 핸드폰을 구기듯이 쥐는 순간, 흐린 하늘에서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건이 짜증을 내며 담배를 끈 뒤에 돌아섰다.

“야, 차건.”

“어?”

“나 잠깐 어디 좀 갔다 온다. 늦을 수도 있어.”

뒤에서 뭐라고 했으나 들리지 않았다. 청우는 장례식장 밖으로 달려 나갔다. 앞에 서 있던 택시에 탄 뒤에 이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았고, 청우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칼을 헤집었다.

차창을 때리는 빗줄기는 점점 거세졌다. 요즘 들어 무슨 비가 이렇게 자주 오는지 모르겠다. 이서는 혼자 있을까. 누구랑 있든 힘들지 않은 쪽이었으면 좋겠다. 불현듯 이서가 붙잡았던 손목이 저릿해졌다. 청우는 손목을 어루만지며 탄식을 삼켰다. 그때 이서는 제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어느새 이서의 집 앞에 도착했다. 우산이 없는 바람에 뛰어서 입구까지 간 청우는 닫힌 현관을 맞닥뜨렸다. 호수와 함께 호출 버튼을 눌렀으나 반응이 없었다. 아무래도 집에 없는 모양이었다.

기일이 언제일까. 만일 오늘이라면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도 몰랐다. 젖은 머리칼을 털고 나서 메시지를 보냈다.

「나 잠깐 너희 집 근처 들렀는데 볼 수 있음 보자」

「시간 되면 연락 줘」

공기가 흐릿하게 침강하는 비 오는 풍경을 잠시 내다보다가 뛰어서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따뜻한 차 한 잔을 시키고 나서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두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불규칙적으로 두근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마른 입술을 혀로 훑다가 김이 피어오르는 액체를 입으로 불고 나서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한 것이 들어왔는데도 속은 그다지 진정되지 않았다. 청우는 지금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는 감정이 초조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왜일까. 이서는 언젠가 집에 돌아올 거고, 오늘 보지 못하면 내일이나 내일모레 봐도 될 텐데. 이서가 어디 떠나는 것도 아닌데 어쩐지 지금 꼭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아귀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느낌에 주먹을 꽉 쥐었다가 폈다.

그러나 차가 식고 찻잔이 바닥을 보일 때까지 이서는 메시지를 읽지도 않았다. 어느새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여전히 우중충했다. 밤이 깊어 카페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청우는 밖으로 나왔다. 의미 없이 카페 근처를 서성대다가 결국 장례식장으로 돌아왔다.

“청우야, 왔어?”

“어. 밥 먹었어?”

“응. 아까 이서 왔다 갔는데.”

“뭐?”

이서가 들렀다는 소식에 청우는 멍청히 눈을 깜빡이다가 핸드폰을 꺼냈다. 제게 온 답장은 없었다.

“걔 괜찮아 보였어?”

“음……. 응! 근데 인사만 하고 갔어.”

타이밍 한번 기가 막혔다. 이렇게 엇갈릴 건 또 뭐란 말인가. 이왕 온 김에 자신도 보고 가면 좋았겠지만, 서운함보다는 걱정이 우선이었다. 연락은 기다리되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이서를 보고 싶은 건 제 마음이었다. 혼자 있고 싶다면 그건 이서의 마음이었고, 그를 존중해 줘야 할 때였다.

결국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이서의 얼굴은 보지 못했다. 연락도 따로 오지 않았기에 그를 볼 수 있는 강의 날만 기다렸다. 강의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밝은색의 머리를 찾았다. 이서는 친구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유쾌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얼굴을 보자 안심이 되었다. 청우는 주저하지 않고 이서에게 걸어가 그의 어깨를 쥐었다. 뒤돌아본 이서는 평소와 똑같은 얼굴이었다.

“왔어?”

“어, 안녕.”

“여기 앉아.”

이서가 제 옆의 의자를 당겼다. 청우는 순간 멈칫하며 그와 그의 곁에 앉은 친구들을 둘러보았다.

여태까지는 늘 이서가 친구들에게서 떨어져 제게 왔지, 그들과 함께 앉자고 한 적은 없었다. 둘이서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에 내키지 않았지만, 이서의 친구가 인사를 하는 바람에 맞인사하며 자리에 앉아야만 했다.

“너 향수 바꿨냐?”

“응, 좋지?”

“우웩.”

“솔직하지 못하기는.”

이서와 그의 이성 친구가 대화하는 걸 들으면서 청우는 왠지 거리가 멀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저 혼자 섬에 뚝 떨어진 듯한 느낌. 이서처럼 붙임성이 좋아 초면에도 잘 어울리는 성격이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해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이야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서가 고개를 돌렸다.

“아, 연락 못 받아서 미안. 이래저래 좀 바빴어.”

“아…….”

“전공 과제 중에 영상 만드는 게 있는데, 오류 생겼다고 해서 수습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네.”

그러면 동생 기일은 아니었던 걸까. 혹은 맞는데 숨기고 싶은 걸까. 정말 아무렇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야 다행이지만, 이상하게도 씁쓸한 감정이 밀려왔다.

“과제는 잘 해결됐어?”

“응. 무사히.”

“다행이네. 기다렸어. 너 빈소 왔을 때 못 봐서 아쉽더라.”

솔직하게 털어놓은 말에 이서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이렇게 봤잖아?”

아쉬울 게 뭐 있냐는 듯한 반응이 냉정하게 들렸다. 청우는 일순 서운했으나 그의 말도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고개를 주억였다.

“야, 야. 이거 봤음?”

이서의 친구가 그의 팔을 툭툭 때린 탓에 이서가 주의를 그쪽으로 돌렸다. 상큼했던 향이 포근하고 부드러운 향으로 바뀌어 있었다. 청우는 친구의 핸드폰을 보며 장난을 치는 그를 응시하다가 주먹을 쥐었다.

이서와 둘만 있던 시간이 많았기 때문일까. 그가 자신을 두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는 일이 굉장히 어색하게 느껴졌다. 이래서야 꼭 친구 빼앗긴 어린애처럼 구는 것과 다를 게 없지 않나.

낯선 감정을 컨트롤하기 위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는 동안 교수가 강의실로 들어왔다. 강의가 시작되고 나자 섭섭했던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청우는 턱을 괸 채로 강의를 듣는 이서를 흘긋 보고는 교재 모퉁이에 글자를 썼다.

「야.」

모서리를 이서 쪽으로 들이밀자 그가 내용을 확인하더니 눈썹을 들어 올렸다. 청우는 그 옆에 본론을 적었다.

「점심 뭐 먹고 싶어?」

만일 먹고 싶은 게 없다면 자신이 알아 둔 곳으로 갈 생각이었다. 매번 이서가 저를 좋은 곳으로 데려다주었으니, 이번에는 자신이 그에게 괜찮은 데를 소개해 주고 싶었다. 곧 이서가 펜으로 대답을 썼다.

「오늘 약속 있어 ㅠㅠ」

생각지 못한 답변에 눈을 들자, 이서가 우는 시늉을 했다. 아……. 같은 강의를 듣고 나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당연하지 않다는 당연한 사실이 처음으로 머리를 드러냈다.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이자 이서가 다시 앞을 보았다. 청우는 펜을 쥔 손을 의미 없이 꿈틀대다가 바른 글씨로 쓰인 이서의 거절을 내려다보았다.

강의를 듣는 무심한 얼굴을 핼긋 보았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그가 흐릿하게 느껴졌다. 이서의 존재 자체는 그 무엇보다 선명하나 손을 뻗으면 닿지 않을 것 같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사이 강의가 끝이 났다. 이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청우의 어깨를 쥐었다.

“간다. 다음에 봐.”

“어, 잘 가.”

이서는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채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청우는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떨어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느낌에 강의실을 떠나는 내내 뒤를 돌아보아야 했다.

노트북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으니 눈이 뻑뻑했다. 집중도 영 되지 않아 커피를 들이켠 뒤에 눈두덩 위를 손으로 짓눌렀다. 청우는 한숨을 내쉬며 붉게 물들고 있는 창밖을 응시하다가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메시지가 몇 개 떠 있기는 했으나 기다리는 사람의 연락은 없었다.

손가락을 키보드에 붙이고는 있지만 입력한 것은 많지 않았다. 버튼이 눌리는 감각도 무겁게 느껴지는 게, 컨디션이 영 꽝이었다. 멍하니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고 있을 때 과방의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윤수가 청우를 발견하고 그의 옆에 앉았다.

“혼자 뭐 하냐. 과제?”

“응. 너 이거 다 했어?”

“했겠냐. 아오, 과제가 왜 이렇게 많은지.”

윤수가 짜증을 내며 책상 위로 엎드렸다. 그가 이곳으로 오니 더 몰두가 되지 않아 잠시 창을 내려놓고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사이 윤수는 핸드폰을 꺼내 메신저를 들여다보고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무슨 일 있어? 한숨을 왜 그렇게 쉬어.”

“싸웠다, 씨발.”

“여자 친구랑?”

“응.”

그가 여자 친구와 싸우고 화해하는 일이 한두 번 있는 게 아니다 보니 심각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청우는 그저 윤수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주었다.

“답장 안 하네. 화 안 풀렸나 봐.”

화가 나면 연락이 잘 안 된다며 푸념하는 소리를 가만히 듣다가 물었다.

“……연락 잘 안 되면 화난 거야?”

“어. 존나 화난 거지.”

청우는 조용한 제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평소에 연락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핸드폰을 가까이 두는 성향도 아니었으나 이번에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늘 먼저 메시지를 보내고 별일 없으면 답장도 빨랐던 이서의 연락이 드물어졌다. 제가 먼저 연락해도 답장이 뜨문뜨문 오니 대화도 잘 이어지지 않았다.

이서와 가깝게 지내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더라면 바쁜가 보다 하겠지만 짐작되는 것이 있었다. 그날 이서를 혼자 두고 오지 않았나. 또 산영과 관련된 일이었다. 제 딴에는 꼭 가야 할 일이었으나 이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유야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두 번이나 그를 두고 산영에게 간 셈이었으니까.

화가 난 거라면 어떻게 풀어 줘야 할까.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은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게 먼저였다. 벌써 며칠째 연락도 제대로 되지 않는 사람과는 무엇도 할 수 없었다.

“나 간다.”

“어? 벌써?”

“어. 여자 친구랑 잘 풀고.”

짐을 챙긴 청우는 얼빠진 얼굴로 자신을 좇는 윤수를 뒤로하고 과방을 나왔다. 이서에게 전화를 걸면서 만약 이것도 받지 않으면 어떡하지 걱정하는 사이 연결음이 끊겼다.

[응, 청우야.]

청우는 걸음을 멈추고 숨을 작게 들이켰다. 이렇게 빨리 전화를 받을 줄은 몰랐는지라 잠시 머릿속을 정리해야 했다.

“바빠?”

[음, 왜?]

“같이 저녁 먹자고 하려고.”

[글쎄. 나 약속이 있는데.]

“……무슨 약속?”

[친구들이랑 술자리.]

청우의 낯이 시무룩하게 가라앉았다. 이서는 친구들이 많으니 당연히 약속도 잦을 터였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엇갈려 함께 있을 시간을 갖지 못한다면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이서가 처음 저와의 만남을 위해 적극적으로 다가왔던 만큼 이번에는 자신도 그렇게 굴어야 했다.

“나도 가면 안 되냐?”

[너도? 음……. 뭐, 상관은 없는데. 안 불편하겠어?]

“괜찮아.”

[그럼 지금 와. 주소 보낼게.]

“알았다. 이따 보자.”

전화를 끊고 나서 얼마 안 되어 이서에게 메시지가 왔다. 학교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호프집으로, 걸어서 이십 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청우는 부지런히 걸어 호프집에 도착했다.

제 의지로 이서의 친구들과 자리를 함께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안으로 들어갔다. 꽤 시끌벅적한 테이블의 가운데 앉은 이서가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청우를 발견한 이서가 웃으면서 그를 맞았다.

“왔어?”

“어? 온다는 친구분?”

“응, 이청우. 신방과.”

“안녕하세요!”

이서의 옆에 앉은 친구가 자리를 비켜 줘서 청우는 그곳에 앉았다. 제게로 쏠린 시선이 다소 부담스러웠으나 입꼬리를 올리며 인사했다.

“와, 키 몇이에요?”

“백팔십오요.”

“진짜? 그것보다 더 커 보이는데. 근데 말 놔도 되지? 우리 다 갑인데.”

“어, 그래.”

별다른 통성명 없이 이어지는 대화 속에서 청우는 그들의 이름을 자연스레 익혔다. 청우를 배려해 그에게 쏟아지던 질문과 관심이 흩어질 때쯤 이서가 물었다.

“뭐 하다 왔어?”

“과방에서 과제.”

“성실하시네요.”

“너는……. 요즘 바빠?”

“요즘? 그냥저냥?”

그냥저냥이면 아주 바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연락이 잘되지 않은 것은 역시 기분이 상했기 때문일까.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는 사이 친구가 이서를 부르면서 그의 고개가 돌아갔다. 청우는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을 훑었다. 아무래도 이런 자리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기는 힘들 듯싶었다.

“사과대 친구가 신방과에 잘생긴 애 있다고 노래를 부르던데. 그거 너 아니야?”

“……아니겠지.”

“왜에. 맞을 수도 있지. 여자 친구는? 있어?”

청우는 이서를 흘긋 보았다. 이서는 이쪽 대화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여자 친구는 아니지만 맥락상 애인이 있냐는 질문이니 있다고 해야겠지.

“어, 있어.”

“오오. 누구, 누구?”

적당히 끝날 줄 알았던 질문이 이어지자 청우는 당황해서 다시 이서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으나 이서는 청우의 빈 잔에 맥주를 따라 주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순간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얼어붙은 입가를 겨우 움직이며 대답을 고민할 때, 한 친구가 질문한 사람의 옆구리를 찔렀다.

“야, 말하면 아냐?”

“어, 그러네?”

웃는 이들을 따라 겨우 미소를 지으며 맥주를 들이켰다. 한 잔을 다 들이붓자 주변에서 술을 잘 마시냐며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원하는 사람의 시선은 돌아오지 않았다.

단순히 제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이런 기분이 드는 게 아니었다. 서로를 우선으로 두는 원칙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몸소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서도 이런 감정을 겪었을까. 자신이 그를 두고 떠난 날에.

청우는 연거푸 잔을 비웠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둘이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속마음을 털어놓으면 될 거라고 생각했으나 그것도 이서가 받아 주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아, 정이서!”

이서 옆에 앉은 친구가 웃으면서 그의 팔뚝을 쳤다. 청우는 대화를 하면서도 그의 쪽으로 귀를 열어 두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웃고 친근하게 접촉하며 자신이 모르는 이야기를 하는 정이서. 이게 그의 자연스러운 모습일 텐데도 낯설었다.

“나 담배 좀.”

이서가 품에서 담뱃갑을 꺼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회다 싶어 엉덩이를 들었던 청우는 다른 친구들이 우르르 일어나는 걸 보고 엉거주춤했다. 이 무리는 거의 다 흡연자인 모양인지, 주저하는 사이 청우는 맞은편에 앉은 규연과 남게 되었다.

“넌 담배 안 피워?”

“응.”

“잘됐다. 애새끼들이 다 담배를 피워서 맨날 나 혼자 남았거든. 하여튼 뭐가 좋은 거라고.”

“그러게. 심심하겠네.”

“오늘은 너 있으니까 괜찮아. 자리 어때? 불편하진 않아?”

“어……. 괜찮아.”

평소 같았으면 이서가 했을 물음을 다른 사람에게 듣고 있다. 쓴웃음을 삼키며 잔을 만지작거리자 규연이 청우의 잔을 채워 주었다.

“우리끼리 마시자. 너 술 잘 마시더라.”

“너도 잘 마시던데.”

“어우, 난 맥주는 배불러서 힘들어. 원래 소주파인데 오늘은 적당히 마시려고.”

규연이 잔을 내밀어서 청우는 제 잔을 부딪쳤다. 원샷 하라면서 윙크하는 그 때문에 청우는 잔을 비워야 했다.

“크, 잘 마셔서 좋다. 자. 안주도, 안주도.”

그가 젓가락으로 감자튀김을 집더니 갑자기 들이밀었다. 고개를 물렸지만 입술까지 밀려든 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먹었다.

“내가 먹을게.”

“그래, 그래. 자, 한 잔 더?”

맥주잔이 또 가득 찼다. 청우의 잔을 채우고 제 잔에 술을 따르는 규연은 신나 보였다. 그의 페이스에 맞추다 보면 무리를 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흡연자들이 돌아오기 전까지만 받아 주고 그 이후로는 적당히 마셔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건배했다.

“원샷. 알지?”

규연이 잔망스럽게 눈가를 찡긋하며 잔을 입에 댔다. 청우도 따라서 마시려고 할 때, 뒤에서 나타난 손이 잔을 가져갔다.

“얘한테 맞추지 마. 사람 술로 죽이는 데 도가 튼 애야.”

희미한 담배 냄새와 함께 포근한 향이 훅 끼쳐 왔다. 뒤돌아보자 이서가 청우의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청우는 제 옷자락을 쥐며 그의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뭐야, 청우랑 나랑 오붓하게 대작하고 있었는데.”

“오붓하게는 무슨. 먹잇감 보는 눈이었어, 너.”

“하, 네 친구랑 나랑 사이좋으니까 질투하는 거지?”

“모두가 너처럼 비생산적인 행동을 하진 않아.”

담뱃갑을 품에 집어넣는 이서를 보며 청우는 두근거리는 손끝으로 그의 팔꿈치를 쥐었다. 이서가 돌아보자 혀로 입술을 훑고는 입을 뗐다.

“언제 갈 거야?”

“글쎄. 왜, 지루해?”

“지루한 건 아니고.”

“힘들면 먼저 가. 여기 애들 술고래라 맞춰 주기 힘들 거야.”

아. 청우의 입술이 힘없이 벌어졌다. 팔꿈치에서 손이 떨어지는 순간 뒤늦게 들어온 흡연자들이 자리를 채웠다.

불과 며칠 전과는 확연히 다른 반응이었다. 그날이 특별했던 건지 오늘이 유난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서의 시간에 끼어든 사람은 자신이었다. 매 순간 저를 우선으로 여겨 달라는 건 이기적인 행동이었다. 그걸 아는데도 감정이 이성을 날카롭게 조각내려고 들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름도 제대로 모르겠는 감정이 저를 휘두르는 일을 막기 위해 청우는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꾹 눌렀다.

산영을 좋아하는 마음을 숨겼듯이 격동하는 지금의 기분도 잘 다듬어야 했다. 그러나 이서는 제 감정을 금방 눈치채지 않았나. 애초에 저는 감정을 잘 통제할 수 없는 사람인지도 몰랐다. 청우는 이서가 현재의 자신을 알아채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알아채고서도 모른 척한다면 그쪽이 더 참담할 듯싶었다.

술자리는 정말이지 끝이 나지 않을 것처럼 오래갔다. 관심도 없는 사람과 눈을 맞추고, 집중이 되지 않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넘기고 싶지 않은 술을 들이켰다. 오로지 이 자리가 끝나고 이서와 둘만 남게 될 기회를 위해 청우는 길고도 긴 시간을 견뎠다.

드디어 자리가 파할 분위기가 되었을 때는 알딸딸한 취기가 올라왔다. 맥주로는 웬만해선 잘 취하지 않는데, 테이블 위에 늘어선 맥주병을 보자 질릴 지경이었다. 청우는 한숨을 내쉬며 화장실에 다녀왔다. 찬물에 씻은 손으로 목덜미를 짓누르면서 나오는 사이 자리에서 하나둘씩 일어나고 있었다.

이서를 놓치거나 다른 친구가 채갈까 봐 청우는 얼른 이서의 곁에 섰다. 이서가 호프집 밖으로 나갈 때까지 졸졸 따라붙다가 일행들이 인사하며 하나둘씩 걸음을 뗄 때 이서의 손목을 붙잡았다.

“정이서.”

“응?”

드디어 둘만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숨이 차올랐다. 술을 자제할 걸 그랬다. 그랬다면 조금 더 또렷한 정신으로 말할 수 있었을 텐데.

“나랑 잠깐 얘기 좀 하자.”

“지금?”

이서가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덧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다. 새삼스레 시간을 신경 쓰는 반응에 울컥해 그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응, 지금.”

“음……. 그럴까.”

“어디 들어가서…….”

“여기서 하고 빨리 들어가자. 피곤하잖아.”

청우는 입 안의 살을 꾹 깨물었다. 차라리 자신을 비난했으면 좋겠다. 이런 식으로 잘라 내는 태도는 너무도 야속하게 느껴졌다.

사실은 몹시 섭섭했다. 가깝게 여겼던 분이 세상을 떠나시고 나서 밀려오는 헛헛함과 허무함을 함께 달랠 수 있을 줄 알았다. 산영이 엮인 일이었으나 이번에는 정말 갈 수밖에 없었기에 이해해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것이 처음이 아니었던 데다 건의 말대로 이서 동생의 기일이었다면, 그래서 그를 혼자 남겨 두었다면 제 감정보다는 그가 우선이었기에 서운함을 내리눌렀다.

그러나 대화를 통해 풀려 하지 않고, 제게 기회를 주지 않고 이렇게 단번에 멀어지려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하루아침에 벌어진 거리가 지독했다.

“너 나한테 화났지.”

“내가?”

“기분 상했잖아.”

이서는 모르는 일이라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꼭 친해지기 전, 전혀 읽을 수 없었던 이서를 보는 듯해 가슴이 험하게 들뛰었다.

“차건한테 들었어. 네 동생 기일이었다고.”

“…….”

“너 혼자 두고 가서 미안해. 그게 또 산영이 일이라서 미안하고.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할게. 그러니까 이렇게 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북받치는 감정을 다지며 최대한 덤덤하게 말했다. 변명을 하거나 제 기분을 앞세우고 싶지는 않았다. 단 하나 강하게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가 멀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이서는 대답을 기다리는 청우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언뜻 청우를 관찰하는 듯도 했고 그저 무감한 것 같기도 했다. 이내 그가 미간을 찡그리며 웃었다.

“에이, 내가 그렇게 못난 놈은 아닌데.”

예상에 없었고 관련도 없게 느껴지는 대답에 청우는 그의 말을 해석하려고 애썼다. 그사이 이서가 팔짱을 끼고선 어깨를 으쓱였다.

“친구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당연히 가 봐야지. 그냥 친구도 아니라 산영이고, 너랑도 인연이 있었다며. 날 두고 간 게 무슨 상관이야, 동생 기일은 내 사정인데. 너한테 말하지도 않았잖아. 기분 안 상했으니까 걱정하지 마.”

상황을 지극히 객관적으로 정리하는 말에 오히려 더 멍해졌다. 그렇다면 태도가 달라진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청우는 제 질문에 대한 진짜 대답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이서의 시선이 잠시 다른 곳으로 향했다. 취객들이 지나는 어수선한 번화가. 하얀 달빛이 스며든 겨울밤의 써늘한 공기. 정착지 없이 나뒹구는 쓰레기. 청우는 그의 눈길을 따라갔다. 정확한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저 그 뒤를 좇았다.

“그냥…….”

이윽고 이서의 눈이 제게로 돌아오며 기다림이 끝이 났다.

“이런 거 이제 그만둘 때 되지 않았어?”

이런 거? 청우는 이서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멍청히 눈만 깜박였다.

받아들이기를 기다리는 건지 혹은 말을 고르는 건지, 이서는 청우를 말없이 응시했다. 청우는 어수선한 소리가 스치는 침묵 속에서 이서의 말을 되새김질했다. 이런 거. 우리가 하는 전부를 말하는 건가?

청우는 생각할 새도 없이 이서의 손목을 잡았다. 그의 눈길이 아래로 향하는 순간 간절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화난 거 맞잖아.”

사과를 해도 이서가 원치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일이 처음인 데다 상대가 이서이다 보니 청우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서가 눈을 들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기분이 나빠 보이는 웃음은 아니었다. 그가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순수한 친구로 돌아가자는 소리야.”

“……어?”

“이제 차건 기억도 돌아왔고, 내가 보기엔 청우 너도 산영이에 대한 감정 예전만큼 크지 않아. 안 그래?”

예상치 못한 화제에 손에서 힘이 빠졌다. 절로 내려간 손이 이서에게서 떨어졌다. 청우는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순간에 다다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끝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들이닥쳐 버린 일에 청우는 무겁게 눈을 깜빡이며 입술을 달싹였다.

“근데 왜, 갑자기…….”

“음, 더 이러고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이제 내 도움도 필요 없어 보이고, 우리가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잖아. 너도 다른 사람 만나 봐야지.”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애초에 산영을 잊게 해 준다는 전제로 시작한 관계였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거짓 연애를 하게 된 이유는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다. 산영을 오로지 친구로만 두고 싶어서.

산영에게 향했던 마음을 다 털어 낸 것이 맞나 돌이켜 보았다. 하지만 닥친 순간이 갑작스러워서인지, 혼란한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청우는 흔들리는 눈으로 이서의 낯을 훑었다. 그가 미소 지으며 청우의 어깨를 쥐었다. 입가에 어린 웃음은 산뜻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타이밍이 좀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좋은 타이밍이란 건 없는 것 같더라고. 그러고 보니까 우리 친해지기도 전에 일 순위 하자고 해서 어색하게 느껴질 수는 있겠다. 난 이제 이 순위 시켜 줘. 삼 순위도 괜찮고?”

이서가 장난스레 눈을 찡긋했다. 그는 오래전부터 끝을 생각해 왔던 사람처럼 혹은 언제든지 이럴 준비가 되었던 것처럼 미련이 없어 보였다. 청우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무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는 듯했고, 이서의 말이 전부 맞았기 때문이다.

“그래. 오늘 피곤하겠다. 데려다줄게, 가자.”

“아니야. 나……. 집 바로 근처니까 걸어가면 돼.”

“어차피 가는 길이잖아. 놓고 가면 되는데, 뭐.”

“술도 깰 겸……. 괜찮으니까 가라.”

“음, 그럴래?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

“어, 너도.”

손을 흔드는 이서를 뒤로하고 청우는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추위로 몸을 움츠리는 사람들을 지나치며 무언가가 잘못되어 가는 듯하다 느꼈으나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집이 이곳에서 멀지 않음에도 청우는 길을 빙 돌아서 갔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다리를 움직이다 보니 점점 취기가 물러가고 이서가 했던 이야기가 머릿속에 제대로 들어왔다.

그의 말이 맞았다. 진실로 서로를 사랑하여 맺은 관계가 아닌데 영원할 수는 없었다. 이서는 자신이 산영을 잊도록 도와준 쪽이었고, 그 도움을 언제 끊든 그것은 그의 마음이었다. 언제까지 이서에게 의존할 수만은 없으니 이제는 저 혼자서도 마음을 잘 추슬러야 했다. 건은 기억을 되찾았고, 저 역시 그가 산영의 좋은 연인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었다. 이제는……. 그들을 눈앞에 두고 그리 힘들지도 않으니 괜찮은 게 아닐까.

그러나 걸음걸음마다 의문이 따라붙었다. 왜, 왜, 왜……. 오로지 의문사만 존재하는 생각이었다. 발목을 붙잡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벌어진 입술 새로 퍼지는 하얀 입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청우는 복도 벽에 기대서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잎이 떨어져 가는 나무들이 황량했다. 기온은 점점 더 떨어져 가고 있었지만 날이 맑아서인지 바깥 풍경은 보기가 좋았다.

그에 비해 머릿속은 그리 맑지 않았다. 머리 위로 추 하나를 얹고 다니는 것처럼 내내 무거웠다. 어디가 아픈 것도 아닌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청우는 발끝으로 바닥을 긁으며 무료함을 달랬다.

곧 강의가 끝나고 강의실의 문이 열렸다. 안에서 산영이 헐레벌떡 튀어나왔다.

“오래 기다렸지, 미안.”

“아니야. 교수님이 늦게 끝내 줬나 보네.”

“응……. 빨리 가자.”

둘은 학교 근처 경양식집에 도착했다. 장례식 일을 도와줘서 고맙다며 산영이 한턱 쏘기로 한 자리였다. 그는 비싼 걸 고르라고 했지만, 청우는 돈가스가 먹고 싶어 장소를 이리로 정했다.

케첩과 마요네즈를 뿌린 양배추 샐러드가 나왔다. 한 움큼 집어 입에 넣자 새콤한 맛이 입 안으로 퍼졌다. 아삭거리는 것을 집중해서 씹는데 산영이 웃음을 흘렸다.

“배고팠어?”

“어, 조금.”

“많이 먹어. 여러 번 말하지만, 진짜 고마웠어.”

“좀 괜찮아?”

“응, 이제 슬슬 실감이 나네. 할머니가 병원에 오래 계셔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나 봐. 그래도 잘 보내 드려서 다행이다 싶어.”

입가에 미소를 띤 산영은 마음의 짐을 어느 정도 내려놓은 듯 보였다. 직접 키워 주셨으니 부모님과 다를 바 없는 분이라 몹시 슬플 텐데도 잘 추스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청우 넌 괜찮아?”

“응. 난 뭐……. 괜찮아.”

그러고 보니 제 감정을 달랠 정신도 없었다. 이서와의 연락에 한눈팔려 있던 데다 장례가 끝나고 나서 생긴 관계의 변화에 적응을 해야 했다.

매일 오던 메시지는 더 이상 오지 않았고 연락도 뜸했다. 약속을 잡고 싶었으나 마땅한 이유가 있나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다른 친구들과는 별다른 이유가 없어도 시간이 되면 함께 밥을 먹고 술을 마시는데, 이서에게는 그런 제안을 하기가 어쩐지 망설여졌다. 가짜 연인에서 진짜 친구가 되었을 뿐인데 상대가 어려워진다는 건 참 이상한 일이었다.

“너한테 줄 거 있어.”

밥을 다 먹고 나자 산영이 가방에서 포장된 상자 하나를 꺼냈다. 입술을 깨문 채 웃으면서 주는 것을 의아한 낯으로 받아 들었다.

“뭐야? 풀어 봐도 돼?”

“응. 별건 아니고, 고마워서 주는 선물.”

“선물을 또 줘?”

“너랑 건이는 특히 더 고마우니까!”

이미 답례품을 받았던지라 뭘 또 이런 걸 준비했냐면서 포장을 풀었다. 안에는 스웨터 한 벌이 들어 있었다. 회색의 두툼한 스웨터는 촉감이 부드럽고 질이 좋아 보였다.

“내가 이런 걸 받을 정도로 뭘 하지도 않았는데.”

“안 하긴! 도와줘서 진짜 고마웠어. 누나들이 너한테 꼭 선물해 주라고 해서 같이 고른 거야.”

“고맙다. 잘 입을게.”

“맘에 들어?”

“응, 예쁘네.”

“아까 이서 만났을 때 먼저 보여 주면서 물어봤더니 잘 샀다고 했다? 이서가 괜찮다고 해서 안심했어.”

옷을 만지작대던 청우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정이서 만났어?”

“응, 밥 사 주겠다고 연락했더니 카페에 잠깐 들르고 말더라구.”

청우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제가 오전에 보낸 메시지를 아직도 읽지 않고 있는 놈이 산영의 연락은 받았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친구로 지내자더니, 이 순위를 시켜 달라더니 자신을 아예 밀어 내고 있는 것 아닌가.

친구로서의 정이서는 원래 이랬을까? 보고 싶을 때 볼 수 없고, 잡히지 않을 것 같은 존재. 그래도 같이했던 시간이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하루아침에 변할 수 있는 걸까. 제게는 좋았던 시간이, 그 또한 좋다고 말했던 일들이 사실 그에게는 흔히 스치는 바람 한 줄기와 같은 것이었다면 참으로 속상할 듯싶었다.

“왜 그래?”

저도 모르게 크게 내쉰 한숨에 산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염려하는 기색을 보였다. 청우는 금세 근심을 지우고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강의가 전부 끝났으나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강의실에서 짐을 챙기며 미적대고 있는데, 윤수가 어깨에 팔을 둘렀다.

“청우. 맥주 콜?”

“지금?”

“너한텐 이 시간도 낮술이냐?”

오후 네 시. 술을 먹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청우는 낮술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으나 오늘은 술이라도 마시고 싶었다. 제안을 수락하자 윤수가 손가락을 부딪쳐 소리를 냈다.

“너 그때 나한테 저녁 산다 했던 거 안 잊었지?”

“아, 어.”

“그게 오늘이다.”

“그래. 둘이 가? 다른 애들은.”

“불러도 되면 부르고.”

단둘이서 술을 마시는 것보다는 여럿이 모여 시끌벅적하게 시간을 보내는 게 나을 듯싶었다. 시간이 되는 동기를 모아 네 명이서 술집으로 향했다.

동기들과의 술자리는 오랜만이었다. 다들 마음이 잘 맞아서 그런지 술을 나누다 보니 기분이 조금 환기되었다. 청우는 황금 비율로 따라진 소맥을 시원하게 넘겼다.

“오, 청우 오늘 달리냐?”

“시험이 코앞인데 우리 이렇게 달려도 되는 거야?”

“아, 씨. 술맛 떨어지게.”

시험 기간이 가까울 때 이렇게 노는 건 지양하는 편이지만, 가끔 이렇게 놀아 주어야 숨통이 트이나 보다. 어쩌면 그간은 이서와 너무 붙어 다녀서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이서 또한 자신과 다니는 동안 만나지 못했던 다른 친구들과 어울릴 시간이 필요할 테다. 그렇게라도 생각하면 이해가 될 듯도 싶었다.

“야, 우리 종강하면 여행 한번 가자. 졸업하기 전에 놀아 둬야지.”

“그러자. 어디 갈래?”

“바다 가자. 바다 못 본 지 오래됐다.”

“아, 어디 가면 맨날 바다야. 질리지도 않냐?”

바다는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던데. 자연스럽게 이서와 함께 보았던 바다가 떠올랐다. 청우는 아무것도 없는 제 귀를 만지작거렸다.

이서가 그 귀걸이를 계속 하고 있었나. 최근에 보았던 그의 귀를 상기했다. 작은 토성이 그의 귀 끝에 매달려 있었다. 그것이 마치 어떤 연결 고리처럼 느껴졌다. 바늘이 그의 귀를 뚫던 순간이 손끝에서 재생되었다.

이상하게 가슴이 따끔했다. 그때 바늘에 찔리지는 않았는데. 손끝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으니 옆에 앉은 윤수가 청우의 팔을 쳤다.

“야, 뭐 하냐. 건배해야지.”

“아, 어.”

건배를 하고 나서 술을 들이켤 때였다. 진동이 울려 핸드폰을 꺼내자마자 청우는 잔을 내려놓았다.

이서에게서 온 답장이었다. 내용을 확인하고 메시지를 보낸 다음 뭐 하고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답장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술잔을 나누었지만 시간이 꽤 지나도록 핸드폰은 새로운 알림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그래서 다들 연말에 시간 되냐? 날짜부터 잡아야지, 안 그럼 맨날 흐지부지되더라.”

“난 돼.”

“아, 난 여친이랑 놀 것 같은데.”

“이런, 씨. 그럼 얘 빼고는 다 되는 거? 이청우 너는?”

된다고 답하려던 청우는 입을 다물었다. 원래라면 당연히 이서와 보낼 생각을 하고 있었을 테다. 물론 이서의 의사를 물어보기는 해야겠지만……. 꼭 연인이라는 이름을 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와 함께 있는 게 재밌고 즐거웠으니까.

답장이 오지 않는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친구로 돌아간 게 맞나? 이게 친구가 맞아? 꾹 눌러 왔던 의문은 꼬리 하나를 내보이고 나서 더는 참지 않겠다는 듯 꾸역꾸역 터져 나왔다.

종일 오지 않는 연락을 기다리고, 얼굴을 볼 수 있는 타이밍을 엿보는데 그것마저도 선뜻 말하기가 힘들어졌다. 산영의 연락은 받아 놓고 제 메시지는 읽지도 않았다. 하나하나 쩨쩨하게 따질 생각은 없으나 쌓이고 쌓인 시간의 골이 모두 하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야, 야. 취했냐?”

윤수가 어깨를 흔들어 깊은 생각에서 빠져나온 청우는 주변을 훑어보았다. 불현듯 위기감이 들었다. 깊이 알기 전의 이서를 생각해야 했다. 의미심장한 말이나 해 대고, 제 속은 잘 보이지도 않던 놈이었다. 그런 이서의 말을 믿어도 될까?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고? 하필이면 그 타이밍에 관계를 돌려놓고 이렇게 자신을 피한다고?

지금이 기로가 되리라는 것을 청우는 예감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렇게 시간을 흘려보낸다면 그 물결 위에 이서 또한 함께 떠내려갈 게 분명했다. 청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몸을 일으켜 세우자 취기가 슬쩍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뭐야, 왜 그래.”

“미안한데 나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좀 가 봐야겠다.”

“갑자기? 무슨 일이길래.”

“개인적인 일이야. 계산은 내가 하고 간다.”

벗어 두었던 점퍼를 챙겨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서늘한 바람이 열 오른 뺨을 식혔다.

핸드폰을 꺼내 이서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예상했던 대로 받지 않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사과도 받아 주는 사람의 마음이었고, 내키지 않아 하는데 자꾸만 귀찮게 구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하지만 갈등을 세련되게 해소하거나 관계를 능숙하게 다시 잇는 방법 따위는 알지 못했다.

그저 할 수 있는 걸 하려고 한다. 청우는 택시를 잡아 목적지를 이서의 오피스텔로 잡았다. 그곳으로 향하는 내내 손끝이 두근거렸다. 이러나저러나 이서는 다정하고 사려 깊은 녀석이었다. 그러니 진심을 다하면 닿을 것이라고 믿었다.

오피스텔에 도착해서 내린 청우는 자신이 빈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뭐라도 사서 들어갈까 하다가 이서가 집에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일단 현관으로 가 호출을 했다. 여기까지 오기는 했지만 사실 큰 기대나 희망을 품은 것은 아니었다. 불쑥 솟은 용기는 사실 용기라기보다는 예감으로부터 비롯한 절박함이었다.

잠깐의 시차를 두고 문이 열렸다. 쉽게도 열린 문에 청우는 눈을 끔뻑이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고 나서는 제게서 술 냄새가 나는지 확인했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팔에 코를 묻고 연신 확인하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어느새 꽤 길게 자란 머리칼을 정리하고 나서 문을 두드렸다. 잠시 기다린 끝에 문이 벌컥 열렸다. 인사를 하려고 입을 열었던 청우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문을 연 사람은 청우가 아닌 낯선 여자였다. 여자가 청우를 훑어보더니 의아한 낯을 했다.

“누구세요?”

제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이서의 집에 놀러 온 친구인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그가 입은 옷이 눈에 들어왔다.

여자의 몸집에 맞지 않는, 누가 봐도 이서의 옷이었다.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번져 버려 청우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여자가 입은 옷만 멀거니 쳐다보았다.

“뭐야…….”

여자가 덜컥 겁을 먹은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고, 그 순간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누군데 문을 막…….”

집을 잘못 찾아온 거라는 헛된 망상도 품지 못하도록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청우는 눈을 들었다. 그토록 만나길 원했던 이서의 낯이 저를 마주하고 경직되었다.

상황을 파악하거나 더 생각할 틈이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청우는 곧바로 돌아서 아직 내려가지 않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는 순간 따라 나오는 소리가 들렸으나 애써 무시했다.

하강하는 엘리베이터 속에서 청우는 추락을 느꼈다. 무엇이 땅바닥으로 처박혔으나 알려고 하지 않았다.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렸고, 그저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긴 다리를 성큼성큼 뻗었다. 심정으로는 내달리고 싶었으나 발끝이 굳어 걸음을 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들었다. 오피스텔 입구를 빠져나와 인도에 다다랐을 때였다.

“청우야!”

뒤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으나 돌아보지 않았다. 가득 차오른 숨이 목구멍을 메웠다. 차라리 이대로 사라지고 싶을 지경이었다.

따라오는 발소리는 더욱 커지고 가까워졌다. 이대로라면 잡히리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회피도 마음만큼 쉽지는 않았다. 뭐 하나 쉬운 게 정말이지 하나도 없었다.

“이청우.”

청우는 결국 걸음을 멈춰 세웠다. 뒤를 돌아보자 머리칼이 흐트러진 채로 벅찬 숨을 가라앉히는 이서가 있었다.

“그렇게 가면 내가 미안하지.”

외투도 입지 않고, 정신없이 뛰어온 것처럼 단정하지 못한 겉모습과는 달리 그의 말은 번드르르했다. 이서의 진심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저 여자를 만나기 위해 제게 이별을 고했던 걸까? 이제 자신은 귀찮은 상대가 되어 버린 걸까. 그렇다면 이렇게 달려온 이유는 뭘까.

청우는 낯을 일그러뜨린 채 이서를 노려보았다. 아무 말도 내뱉지 않자 이서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안 잤어.”

“…….”

“자려고 데려온 것도 아니고. 해명, 할까?”

격양된 감정을 어떻게든 감싸려는 노력이 무색하게 이서는 그저 몇 마디의 말로 청우의 희망을 해체시켰다. 청우는 참지 못하고 이서의 어깨를 쥔 채 그를 담벼락으로 퍽 밀쳤다. 순순히 밀려난 이서의 목 아래를 팔뚝으로 내리누른 뒤 사납게 몸을 들이밀었다.

“뭐? 해명?”

도대체 자신이 그에게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솟아오른 분노로 몸에 열이 잔뜩 뻗쳤다.

“나는 우리가 여태까지, 네 말대로 연애를 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청우야.”

이서의 나지막한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다갈색 빛깔의 눈이 자신을 똑바로 응시해 왔다. 온기가 바랜 듯한 시선에 가슴이 조였다.

“놀이는 끝났잖아.”

“놀이? 넌 나한테 널 애인으로 생각하라고 했고, 그래서 나는 너를……. 나는 널…….”

“사랑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 그렇다고 그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어?”

제 분노를, 앞선 감정을 짓누르는 이성적인 말이 청우를 무력화했다. 이서의 몸을 짓누르던 팔에서 힘이 빠졌다. 팔이 스르륵 내려가는 순간, 이서는 쐐기를 박았다.

“아니야. 그러니까 헷갈리지 마.”

사랑? 이 순간에 나와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단어에, 한 번도 떠올려 본 적 없는 감정에 말문이 막혔다. 그저 이 상황을 회피하기 위한, 관계에서 도피하기 위한 이서의 농간이어야 했으나 짙은 혼란이 머릿속에 안개처럼 드리웠다.

청우는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제자리에 서서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는 이서의 낯을 읽을 수가 없었다. 자신은 정이서의 무엇을 알았나. 발끝을 타고 올라오는, 뿌리째 흔들리는 듯한 이 감각은 어디에 기인하는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서의 마음은 닫혔고 제 마음은 갈 길을 잃었다는 사실이었다. 청우는 천천히 돌아서 이서로부터 멀어졌다. 더는 어떤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다음 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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