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전이 (7/16)

7. 전이

청우는 밖으로 나오기 전에 거울을 보고 옷차림을 점검했다. 오케스트라 공연은 처음 보는데, 아마추어 공연이라 해도 단정하게 입어야 할 것 같았다.

이번에는 표를 주는 게 아니라 선착순 입장이기에 강의가 끝나고 바로 가야 할 듯싶었다. 사람이 많으려나. 여태 이런 행사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지라 예술제를 관람하는 일도 처음이었다.

빳빳한 코트를 매만지며 강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사람들이 꽤 차 있었다. 청우는 동기들이 모인 자리를 찾아 앉았다. 고개를 돌린 윤수가 청우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훑었다.

“와, 뭐냐. 너 어디 가, 오늘?”

“아니.”

“아무 데도 안 가는데 그렇게 차려입었다고?”

“별로 안 차려입었어.”

“별로 안 차려입긴, 자식아. 이게 어디서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윤수가 청우에게 헤드록을 걸었다. 청우는 조금 당해 주다가 능숙하게 그의 팔을 잡아 빼며 제 옷차림을 훑었다.

이서의 옆에 있으면 이건 꾸민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옆에서 호들갑을 떠니 조금 신경 쓰였다. 괜히 옷을 만지작거리는데 윤수가 옆구리를 찔렀다.

“나한테만 솔직히 말해 봐. 누구 생겼냐?”

“예술제 공연 보러 가는 거야. 친구가 초대해서.”

“여자?”

“남자.”

“히야, 넌 진짜 얼굴이 아깝다.”

이럴 때마다 윤수는 내가 네 얼굴이었으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했을 거라며 입맛을 다셨다. 청우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요 며칠 공연 준비로 바쁜지 연락이 잘 되지 않았다. 보러 갈 테니 힘내라고 메시지를 보낸 뒤에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형 지금 누구 없음 소개팅 안 할래요?”

앞자리에 앉아 있던 재석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질문을 듣는 순간 이서가 떠올랐다. 이서가 있으니 수락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개를 젓자 재석이 정말 좋은 애라며 아쉬운 소리를 늘어놓았으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문득 지금 제게 가장 좋은 사람은 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의 연애가 제게 유익할 거라던 그의 말처럼.

그렇다면 이서는 어떨까. 저와의 만남이 그에게 조금이라도 유익했으면 했다. 그의 주변에는 사람이 많으니 이보다 더 좋은 관계가 훨씬 많을 수도 있겠지만……. 청우는 괜스레 코트의 소매 끝을 만지작거렸다.

강의가 끝나고 바로 내려왔는데 문화 회관 대극장 입구에는 이미 대기열이 있었다. 허탈하게 줄을 쳐다보던 청우는 팸플릿을 챙기고 나서 끝에 섰다. 다행히도 줄은 금방 줄어 안으로 들어가는 데 오래 걸리지는 않았으나 앞자리에 앉지는 못했다.

뒷자리였지만 무대 위에 선 사람의 얼굴 정도는 알아볼 수 있는 거리였다. 한숨을 돌리며 자리에 앉아 팸플릿을 열었다. 오케스트라 동아리의 공연은 맨 마지막이었고, 총 열두 팀이 무대 위에 설 예정이었다.

시간이 되어 사회자가 나와 식순대로 진행한 뒤에 첫 번째 무대가 시작되었다. 오늘 공연들은 전부 악기 연주였고, 처음 보는 악기들도 많았다. 이렇게 연주 동아리가 많다는 건 또 처음 알았다. 생각해 보면 이서와 함께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하는 듯싶었다.

무대들이 좋기는 했지만 하염없이 이서의 공연만 기다리게 되었다. 정이서와 첼로라니.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조합이라 더 기대되기도 했다.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보면 좋을 텐데, 아쉬움도 커져만 갔다.

일곱 팀이 공연을 한 뒤에 인터미션이 찾아왔다. 청우는 기지개를 켜며 핸드폰을 꺼냈다. 이서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대화방으로 들어가자 첼로의 활을 들고 있는 손을 찍은 사진이 떴다. 손이 예뻐서 그런지 잘 어울렸다. 의외로 첼로를 연주하는 모습도 그와 잘 어우러질 것 같았다. 청우는 답장하려고 했으나 뭐라고 보낼까 고민만 하다가 시간을 다 흘려보내고 말았다.

곧 인터미션이 끝나고 다시 공연이 시작되었다. 마지막 공연이 다가올수록 기대되어 자꾸만 손을 뒤척였다.

드디어 모든 팀의 무대가 끝나고 마지막 연주만이 남았다. 스태프들이 올라와 무대 위에 의자를 놓았다. 역대 무대 중 의자가 가장 많았다. 세팅이 끝나니 검은색 셔츠와 바지를 입은 사람들이 줄지어 올라왔다. 무대 위를 훑은 청우는 미간을 찡그렸다. 이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싶어 첼로를 든 채 오른쪽 자리에 앉은 사람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어?”

청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악기를 조율하는 남자를 보았다. 검은 머리인데……. 이서였다. 혹시 몰라 첼로를 든 다른 사람들까지 훑었으나 이서는 제가 보고 있는 사람이 맞았다.

염색했나?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서는 늘 밝은색의 머리를 하고 있었다. 어떤 때는 더 노랗고, 어떤 때는 더 어둡기도 했지만 대체로 갈색 계열이었다. 머리카락을 까맣게 물들인 것은 처음 보았다.

더 자세히 보고 싶어서 고개를 뺐으나 그렇다고 가까워지지는 않았다. 어쩐지 초조해졌고, 가슴이 약하게 뛰었다. 저도 모르게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곧 지휘자가 등장해 인사를 한 뒤 무대 위 모든 사람이 연주할 준비를 했다. 눈을 내리깐 채 활을 첼로에 가져다 댄 이서에게서 청우는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지휘자가 신호를 주자 처음부터 웅장한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긴장을 주는 음이 쌓이면서 본격적인 선율의 향연이 시작되었다.

이서는 왼손으로 지판을 짚고 오른손으로 활을 움직이며 고개를 까딱였다. 요란한 소리에 맞추어 심장이 쿵, 쿵 뛰었다. 이상하게도 음악이 음악으로 들리는 게 아니라 하나의 효과음처럼 들렸다. 이서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져서 이 대극장 안을 다 채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낯은 정확히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음악에 맞추어 격정적인? 혹은 늘 그렇듯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었을까? 침대 위에서 모든 것이 다 끝나고 난 뒤에 볼 수 있는 부드럽고 다정한 낯일 수도 있겠다.

자신이 모르는 이서의 모습이 더 있다는 것이 정말 신기했다. 사람에게 이렇게 다양한 면이 있고, 그 모든 면이 색을 달리해 빛을 낸다는 게. 그가 미처 가르쳐 주지 않은 모습까지 전부 보고 싶었다. 욕심일까.

쿵쾅대던 음악이 이내 잔잔해졌다. 귓가의 울림은 가라앉았지만 청우는 여전한 박동을 느꼈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어도 떨림은 똑같아서 주변을 힐긋 보았다. 제 소리가 남들에게 크게 들릴 것만 같았다. 다행히 양옆에 앉은 사람들은 무대에 집중하고 있었다. 반응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다시 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십여 분의 연주가 끝나자 박수 소리가 대극장 안을 가득 울렸다. 지휘자가 돌아서 인사할 때까지 멍하니 앉아 있던 청우는 이서가 고개를 들고 나서야 손뼉을 맞부딪쳤다. 이서의 시선이 관객석으로 향했으나 제게 닿을 리는 없었다. 그것이 안타까워 저도 모르게 좌석에 붙은 하체를 들썩였다.

연주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속에서 이서는 우뚝 솟아 단연 눈에 띄었다. 그가 악기를 들고 무대 뒤쪽으로 들어갔는데도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릴 수가 없었다. 무대 위가 정리되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청우는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눈치를 주자 그제야 일어났다.

문밖으로 나오는 길, 사람들의 대화 소리로 로비가 소란스러웠다. 청우는 영혼이 잔뜩 빨린 얼굴로 로비 구석에 가만히 섰다. 시간이 정말이지 그대로 빨려 나간 것만 같았다. 무슨 음악이었는지, 연주가 어땠는지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첼로를 연주하던 손과 눈을 내리뜬 얼굴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그러나 분명 수준급이었을 테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타이밍이 좋았다 해도 어떻게 그 자리를 꿰찼겠는가.

웅장한 소리를 귀에 담았던 여운 때문인지 여전히 몸 곳곳이 수런거렸다. 이상한 일에 미간을 찡그린 채 가슴을 꾹 누르는데,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이서에게서 온 전화에 청우는 숨을 내뱉고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 봤어?]

“……어. 잘하더라.”

[어디야?]

“여기 로비.”

[잠깐 기다려.]

기다리라는 말에 전화를 끊지 않고 가만히 있는데, 핸드폰 너머로 소음이 들려왔다. 제 곁에서 들리는 소리와 다르지 않아 청우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곧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핸드폰을 귀에 대고 걸어오는 이서를 발견했다. 역시 주변을 살피던 이서의 시선이 이곳에 닿았다. 그의 입술이 이내 시원하게 벌어졌다.

[여기 있네.]

이서가 전화를 끊은 뒤 성큼성큼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오는 그의 얼굴이 이제야 자세히 보였다. 까만 머리칼, 토성 귀걸이 하나만 달린 깨끗한 양쪽 귀, 단추 하나를 푼 까만 셔츠와 몸에 달라붙어 맵시 있는 바지…….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이서의 눈꼬리였다. 머리를 검게 물들인 탓일까. 평소보다 묘하게 슬퍼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더 짓궂은 수작을 걸기 위해 시동을 거는 듯도 했다. 딱 달라붙는 셔츠가 몸의 선을 드러냈다. 저 밑으로 근육이 그리는 선이 어떤지 자신은 직접 보았고 만져 보기도 했다.

이서의 발걸음이 몇 걸음 남지 않았을 때, 청우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이서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보폭을 더 크게 해 다가왔다. 조금씩 물러나 보았지만 그에게 따라잡힐 수밖에 없었다.

“왜 도망가?”

이서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청우의 양 팔뚝을 붙잡았다. 상큼하면서도 달콤한 향이 콧속으로 훅 끼쳐 왔다.

“내가 언제.”

청우는 무뚝뚝하게 말하고선 제 팔을 잡은 손을 눈질했다. 조금 전까지 유려한 음을 함께 쌓았을 손.

“흐음.”

이서의 목소리에 눈을 퍼뜩 들었다. 그가 싱글싱글 웃는 낯으로 청우를 빤히 보더니, 청우의 팔을 쥔 채로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

“집에.”

“뭐……. 뒤풀이 같은 거 안 해?”

“하는데, 너 보니까 그냥 가야 할 것 같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뜻을 묻지도 못하고 이서의 손에 털레털레 끌려간 청우는 주차장에 세워진 그의 차에 올라탔다.

“잠깐만 기다려. 짐 가지고 나올 테니까.”

대답을 하기도 전에 이서가 차 문을 닫고 자리를 떴다. 멀어지는 이서의 뒷모습을 보다가 청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차 안은 이서의 향으로 채워져 있었다. 혼자 킁킁대다가 어딘가 민망해져 안전벨트를 매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서가 사라지자 주변이 조용해졌다. 어쩐지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청우는 창밖을 보며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서를 찾았다. 십 분 정도가 흘렀을까. 첼로 케이스를 멘 채 이쪽으로 다가오는 이서가 보였다. 또다시 자세를 고쳐 앉는데, 그가 뒷자리에 첼로를 넣고 나서 운전석에 올라탔다.

“음, 너희 집 가는 게 더 빠르겠지?”

“더 가깝긴 하지.”

“그래.”

이서가 콧노래를 흘리며 시동을 걸었다. 갑자기 제 집에 간다니……. 청우는 그를 곁눈으로 보았다. 그는 어딘지 신이 나 보였다.

“안 피곤해? 어제도 밤새운 것 같던데.”

“밤새우는 것 정도야, 뭐. 너 어디 앉아 있었어?”

“뒷자리. 일찍 온다고 온 건데도 사람 많더라.”

“가족 초대하는 사람들도 많거든.”

이서의 다른 친구들도 오늘 와서 그를 보았을까? 보지 못했다면 아쉬운 일이었다. 그의 이런 면을, 정이서의 멋있는 모습을 모르고 지나가는 건 그만큼의 손해였으니까.

“너 진짜 잘하던데.”

“내가 잘하는 게 거기서도 보였어?”

“어.”

단호한 긍정에 이서가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문외한이고 이전에 이런 공연을 본 적은 없었지만, 이서는 잘했을 게 분명했다.

“이래 봬도 하면서 많이 혼났어. 예술제니까 대강 때운 거고, 정기 연주회였으면 못 했지.”

정기 연주회는 동아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행사이고, 졸업생 참여를 제한하는 예술제와 달라 그 자리에 못 끼었을 거라고 이서는 말했다. 하지만 청우는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갑자기 아파 무대에서 빠지게 된 그 사람에게는 미안한 말이나 오늘 이서가 그 자리에 있어서, 그리고 제가 이서를 보러 올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청우의 집에는 금방 도착했다. 도어 록을 열려는데 이서가 청우의 허리에 팔을 감고 어깨에 턱을 얹었다. 돌아보는데도 태연하게 그 자세 그대로 있어 어쩔 수 없이 비밀번호를 눌렀다.

“비밀번호 무슨 뜻이야?”

“본가 전화번호 뒷자리.”

“아하. 혹시 통장 비밀번호도?”

어림도 없다. 청우는 이서의 이마를 장난스레 밀고는 문을 열었다. 이서가 웃으면서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까 나 이 집에 들어오는 건 처음이네.”

신발을 벗으면서 하는 말에 청우 또한 이서가 제 집을 방문하는 일은 처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을 알고 나자 괜히 의식이 되었다. 평소에 집을 청결하게 유지하는 편이라 흠잡을 곳은 없었지만, 미처 정리하지 못한 곳이 없는지 살피는 사이 이서가 소파에 앉더니 청우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가 힘을 주어 잡아당기자 얼떨결에 그의 다리 위에 앉게 되었다. 이서는 청우의 허리에 팔을 감고선 고개를 젖힌 채 씩 웃었다.

“오늘 나 마음에 들어?”

“어?”

“아까부터 눈을 못 떼네.”

정곡을 찌르는 말에 얼굴이 확 뜨거워졌다. 청우는 목덜미를 긁적이며 이서를 내려다보았다. 머리카락의 색만 달라졌을 뿐인데 이렇게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을까. 장난기 많은 소년 같은 인상은 여전했으나 언뜻 냉한 느낌에 그가 지닌 색이 더 짙어진 느낌이었다.

“염색…… 한 거야?”

“아니. 아쉽지만 스프레이.”

“뭐가 다른데?”

“머리 감으면 다시 돌아와. 왜. 아쉬워?”

“내가 아쉬울 게 뭐 있냐…….”

“이 얼굴이 더 좋아? 모범생이 취향이구나, 너.”

넌 염색을 해도 모범생 같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삼켰다.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이 들어가는 바람에 청우의 몸이 이서에게 바짝 닿았다. 불편해서 뒤척이는데 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양옆으로 갸웃댔다. 자기 얼굴을 잘 알아서 그런지 귀여운 척도 수준급이었다.

어쩐지 숨이 밭아졌다. 제 집에서 이렇게 이서와 가까이 붙어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일어나려는 순간, 이서가 허벅지를 들썩여 가랑이 사이가 자극되었다. 까치발을 세우고 허벅지에 힘을 줘 최대한 닿지 않게 하려 했으나 이서의 다리가 다분히 의도적으로 아래를 문질렀다.

“야…….”

“청우야. 줘도 못 먹을래?”

이서가 한쪽 눈을 깜빡였다. 청우는 성기가 단단해지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거절하지 않으리란 것을 확신하는 눈이었다. 얄밉도록 잘 알았다. 배 속이 벌써 뜨겁게 달아올랐다. 청우는 그의 목덜미를 잡아당겨 입을 맞췄다.

거칠게 집어넣은 혀에 이서가 웃음을 흘렸다. 각도를 달리해 입술을 연신 맞물리는 사이 이서의 손이 옷 속으로 들어와 맨살을 어루만졌다. 이내 그가 스웨터의 밑 부분을 붙잡아 위로 올렸다. 청우는 입술을 떼고 옷을 벗기는 걸 도왔다. 맨살이 공기에 노출되자 순간 서늘해졌다. 그러나 이서의 손이 몸 구석구석을 쓰다듬자 금세 피부가 달아올랐다.

그가 손끝으로 청우의 가슴부터 복부까지를 쓸어내렸다. 이내 그 손이 바지춤으로 향해서 청우는 일어나 바지를 벗었다. 속옷만 남자 발기한 윤곽이 드러나 민망했다. 마저 벗으려다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느끼고 주춤했다.

“넌 안 벗어?”

“안 벗는 게 더 좋지 않겠어?”

이서가 다리를 벌리고 소파에 등을 기대며 느긋하게 웃었다. 청우는 건침을 삼키며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훑어보았다. 그는 옷으로 몸을 가리고 있는데도 어쩐지 벗은 듯한 느낌을 주었다.

거실 조명이 유난히 밝게 느껴졌다. 매일 먹고 자고 생활하던 자신의 집에서 그와 몸을 맞댄다는 사실이 묘한 흥분을 불러왔다. 청우는 다리를 들어 드로어즈를 느릿하게 벗었다. 반쯤 발기한 성기로 이서의 시선이 향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이서 앞에서 발가벗은 자신의 모습이 객관적으로 인식되자 속이 울렁거렸다. 성기가 끄떡이며 머리를 더 높였다.

“이리 와.”

이서가 청우의 손목을 끌어당겨 다리 위로 앉혔다. 허벅지에 바지의 촉감이 감겼다. 몸이 붙은 탓에 성기가 이서의 복부에 닿았다.

“너……. 옷 더러워져.”

“원래 이런 옷은 더럽혀져야 하는 거야. 그래야 꼴리잖아.”

이서의 손이 청우의 성기 위로 올라왔다. 슥슥 쓰다듬는 손길에 표피가 셔츠에 비벼졌다. 살이 맞닿을 때보다 더 날카롭게 느껴지는 감각에 청우의 다리가 움찔거렸다.

“가슴 내밀어 봐.”

남사스러운 권유에 청우는 머뭇거리다가 이서의 어깨를 짚고 가슴을 내밀었다. 그의 입술이 쇄골 밑에 닿았다.

“여기 아직 남아 있네?”

이서가 물고 빨았던 흔적이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혀로 그 부근을 느릿하게 핥고 나서 빨아들였다. 아릿한 통증과 함께 쾌감이 올라와 무의식적으로 허리를 흔들어 이서의 손에 성기를 비비고 말았다. 그가 웃으면서 입을 떼고는 쇄골을 장난스레 물었다가 놓았다.

청우는 이서의 눈썹 위에서 흔들리는 까만 머리칼을 만져 보다가 귀걸이가 없어진 왼쪽 귀를 내려다보았다. 작은 구멍이 난 귓불이 말랑해 보였다. 그가 제 귀를 핥았던 것이 생각나 고개를 숙여 귓불을 머금었다. 생각도 안 했는데 촉감이 몹시 좋았다. 이를 내어 살짝 깨물다가 혀로 굴리자 이서가 웃으면서 어깨를 움츠렸다.

보드라운 살에 연신 입술을 비빌 때, 성기를 문지르던 손이 벌어진 다리 아래로 들어와 둔덕 사이를 매만졌다. 주름 하나하나를 매만지는 듯한 섬세한 손길에 청우는 머금고 있던 것을 뱉고 탄성을 흘렸다.

“청우야. 젤 있어?”

“아니.”

“콘돔은?”

“없어.”

이서가 청우를 올려다보며 미간을 찡그린 채 웃었다. 없으면 못 하는 건가. 청우는 혀로 입술을 축이며 제 허벅지 아래로 불룩 튀어나온 윤곽을 보았다. 그도 자신도 지금 이 상태에서 나갔다 오기란 불가능할 듯싶었다.

“음…….”

그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그 안에서 콘돔 하나를 빼냈다. 잘 빠진 손가락 사이로 포장된 콘돔이 굴렀다.

“이거 하나밖에 없는데.”

“…….”

“이걸로는 네 안 풀고, 내 좆은 생으로 넣어도 돼?”

순간 생으로 넣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돼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그것을 망설임으로 읽은 건지, 이서가 청우의 허리를 끌어안고 가슴에 뺨을 비볐다.

“네 안에 싸게 해 줘.”

자신을 올려다보며 초롱초롱한 눈을 깜빡인다. 콘돔 없이 넣어서 안에다 사정하겠다고? 거부감이 확 들었으나 단칼에 거절할 수 없는 것은, 이서의 얼굴 때문이었다. 빌어먹게도 검은 머리의 정이서가 하는 말은 그 어떤 것이라도 뿌리칠 수 없을 듯싶었다. 왜일까. 내가 얼굴에 약했나?

“응?”

혼란스러워하는 청우를 보며 이서가 눈을 가늘게 휘었다. 입구를 만지작거리던 손끝이 회음에 닿았다. 매끈한 살을 뻑뻑 문지르는 거친 손길에 꽉 다물려 있던 구멍이 순간 뻐끔거렸다.

시야에 그의 양쪽 귀가 담겼다. 왼쪽 귓불은 방금 빤 탓에 붉었고, 오른쪽 귀는 귀걸이 하나만 달려 있었다. 왜 제가 선물해 준 귀걸이만 빼지 않은 것일까. 뒤늦은 의문으로 가슴팍에 열기가 번졌다. 청우가 고개를 주억인 건 거의 불가항력이었다.

“아, 예뻐.”

이서가 청우의 뺨에 입을 맞추고는 곧장 콘돔의 포장을 뜯었다. 콘돔을 씌운 손가락이 아래로 내려와 다물린 살을 문질렀다. 기대감으로 달뜬 숨을 내쉬며 청우는 이서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입구에 오일을 잔뜩 묻힌 손이 이내 안을 뚫고 들어왔다. 조금은 익숙해진 이물감을 견디며 그의 오른쪽 귓바퀴를 물었다. 귀걸이의 차가운 감촉이 닿아 최대한 피해서 핥았다. 끝까지 들어온 손가락이 곧 갈고리처럼 구부러져 내벽을 부드럽게 쑤셨다.

이서는 남은 손으로 청우의 가슴을 쥐어짜듯 주무르다가 성기를 애무했다. 앞뒤로 가해지는 자극에 몸이 달았다. 청우는 고개를 물려 이서의 낯을 내려다보았다. 시선을 느낀 그가 눈을 들었다. 길게 늘어진 눈꼬리를 문지르자 이서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문득 벅차올라 그의 눈가에 키스했다.

손가락 하나가 더 들어와 속을 넓혔다. 젤이 아니라 빠듯한 감이 있었지만 처음 그를 받아들였을 때처럼 어렵지는 않았다. 아래가 달아오르면서 몸 전체에 촘촘한 쾌감이 퍼지기 시작했다. 청우는 셔츠 위로 이서의 가슴을 더듬었다.

둘은 말없이 눈을 마주하며 서로의 몸을 애무했다. 대화가 오가지 않는데도 깊은 교류를 나누는 것 같았다. 숨과 신음, 미간을 구기며 생긴 잔줄, 점점 달아오르는 피부. 보이고 느껴지는 모든 게 교감이었다. 귀걸이가 꽂힌 귓바퀴를 손으로 어루만지자 이서가 탄성을 흘렸다.

“아, 흣.”

콘돔이 살에 척척 달라붙었다. 연이어 들어온 손가락들이 몸을 붙였다 떼며 속살을 벌렸다. 이내 옴쭉대는 구멍을 퍽 찔러 올리는 손가락에 청우가 숨을 들이켜며 몸을 세웠다. 따라온 손가락이 연신 점막을 쑤석였다. 이서는 가까워진 청우의 가슴에 입술을 대고 유두를 깨물었다. 젖꼭지가 짓눌리면서 어릿한 전율이 등허리를 타고 흘렀다.

빤히 올려다보며 표정을 살피는 이서의 낯이 유난히 상기된 것 같았다. 머리카락의 색이 어둡기 때문인지 그의 얼굴이 흥분의 기색을 조금 더 짙게 띠었다. 청우는 그의 머리와 귓가를 어루만지며 흐느꼈다. 이서의 손가락은 거침없이 성감대를 들쑤셨다.

“흐, 읏, 아흑…….”

허리가 휘면서 발기한 좆이 이서의 몸에 연신 스쳤다. 피부를 찌르는 열기가 곳곳에서 솟구쳤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놓으며 청우는 그의 어깨를 꽉 쥐었다.

“그만…….”

“그만?”

“이제 해.”

“뭘 할까?”

이서가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청우는 아래를 흘긋 내려다보았다. 바지가 타이트한지라 그의 좆이 천을 뚫고 나올 지경이었다. 와중에 여유로운 체를 해 봤자 그다지 통하지 않았다. 청우는 말없이 손을 내려 이서의 성기를 꾹 눌렀고, 그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아…….”

“줘도 못 먹냐?”

수작 부리지 말고 어서 하라는 뜻에서, 그리고 역지사지를 해 보라는 심정으로 이서에게 그가 했던 말을 되돌려 주었다. 하지만 이서는 저를 얄밉게 여기거나 낯부끄러워하기는커녕 코끝을 찡긋하고선 오히려 흥분하는 기색이었다. 그가 청우의 안에서 손을 단번에 빼내고 급한 손길로 바지의 버클을 풀었다.

“아, 청우야……. 네가 그러니까 더 꼴리는데 어떡하지?”

튕겨 나온 성기는 이미 크게 부풀어 있었다. 흉흉한 기세인데도 이제는 두려움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기대감으로 뱃가죽이 쪼그라드는 듯했다. 청우는 이서의 어깨를 짚고선 천천히 몸을 내렸다. 굵은 귀두가 입구를 벌리고 들어왔다. 좁은 길을 뚫고 들어오는 성기의 느낌이 온몸으로 와닿았다. 이서가 청우의 허리를 쥐고선 그를 덜컹 내려 앉혔다.

“아……!”

“후우, 안에 엄청 꿈틀댄다.”

이서의 성기가 안을 꽉 채웠을 뿐인데 이상하게 여기저기 긁히는 것처럼 자극이 왔다. 이서가 손으로 유두를 꾹 누르는 순간 구멍이 꽉 조여들었다.

“읏.”

“이 얼굴이 그렇게 좋아? 아직 쑤시지도 않았는데 싸겠다, 청우야.”

가만히 두면 끝도 없이 나불댈 것 같은 입술을 엄지로 꾹 누르자 이서가 혀를 내밀어 손가락을 핥았다. 그것마저도 쾌감을 불러와 손끝을 움츠리자 그가 놓치지 않고 물었다. 혀로 손톱을 문지르며 이서는 느긋하게 허리를 쳐올렸다.

손끝은 간지럽고, 아래는 화끈한 쾌감이 솟구쳤다. 다른 감각이 이어져 더 크게 폭발하는 듯했다. 청우는 이서의 혀를 짓누르며 허리를 흔들었다. 퉁퉁 튀는 성기가 이서의 몸에 부딪혔다가 떨어지며 자극을 받았다. 젖꼭지를 제법 아프게 꼬집는 손길에 상체가 순간 무너졌다. 이서의 입 안에서 빠진 손가락으로 그의 목덜미를 긁었다.

“하, 읏, 너무 조이는데.”

“흐윽, 흣!”

“청우야, 말 좀 해 봐.”

“무슨, 말, 아!”

“후우, 어때? 응?”

“하, 좋아…….”

하체를 들썩일 때마다 내벽을 긁고 들어와 깊게 꽂히는 성기에 종아리가 찌르르 울며 발끝이 굽었다. 이서가 이를 설핏 드러내며 웃자 순간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솜털이 바짝 서며 피부가 찌릿해졌다. 청우는 고개를 숙여 이서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물렸다.

격한 움직임에 혀가 엇갈렸다. 어쩐지 애가 타 꾹 내려 앉아 이서의 성기를 끝까지 품고선 그의 입 안에 혀를 깊게 처넣었다. 이서가 청우의 옆구리를 쓸어내리며 키스에 응답했다.

머릿속이 몽롱해지도록 기분이 좋았다. 평소에는 쉽게 느낄 수 없는 충만감이었다. 단순히 몸을 섞는 것만으로도 이런 느낌을 겪는 것이 가능할까? 모르겠다. 다른 사람이었어도 가능했을지……. 그건 별로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 순간 찰싹, 엉덩이를 때리는 손길에 청우는 화들짝 놀라 몸을 들썩이며 고개를 뒤로 물렸다. 이서가 눈을 가늘게 떴다.

“딴생각했지.”

어떻게 알았지? 크게 뛰어오른 박동을 가라앉히려고 숨을 길게 내쉬는 찰나, 이서가 다시 엉덩이를 가볍게 때렸다. 그 마찰에 성기가 든 구멍까지 자극을 받아 복부에 순간 힘이 들어갔다. 속살이 발롱거리며 좆을 주물렀다. 청우는 잘게 떨다가 미간을 찡그렸다.

“왜 때리는데.”

아무리 다른 생각을 했다지만 두 번이나 때리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싶었다. 진지하게 물었는데 이서는 청우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눈을 질끈 감고 탄식을 흘리더니, 돌연 그를 꽉 끌어안고 허리를 쳐올렸다.

“아! 흐, 으읏…….”

“아, 씨발.”

청우의 몸을 들어 올렸다가 내려 앉히며 그에 맞춰 허리 짓을 하느라 이서의 셔츠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청우는 그의 셔츠를 쥐어뜯듯 잡고는 정신없이 안을 찧는 좆을 받았다.

충분히 적셔지지 않은 안이 연속되는 마찰로 마르면서 아래가 홧홧해졌다. 그러나 내벽은 조금 더 차지게 성기를 물었고, 단단한 좆이 속살에 비벼지는 감각 또한 노골적으로 느껴져 촉감만으로도 흥분감이 상승했다.

둘은 여유 없이 아래를 맞물리는 와중에도 서로의 입술을 찾아 키스하고, 껴안은 몸을 어루만졌다. 셔츠 아래로 꿈틀대는 이서의 몸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를 애무하는 것만으로도 안쪽이 달아올랐다. 제 손길이 스칠 때마다 짙어지는 숨소리와 부풀었다가 가라앉는 가슴통으로 그의 흥분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이서를 휩싼 열락이 제게 전이된 것만 같았다. 그가 제게 닿으면서, 그리고 그에게 자신이 닿으면서 순환하는 열기로 쾌락이 극에 달했다.

“아흑, 야, 아, 나…….”

“괜찮아. 읏, 응, 괜찮아.”

이서가 청우의 등을 토닥이듯 문질렀다. 그 다정한 목소리에 청우는 흐느끼며 손을 아래로 가져가 제 성기를 만졌다. 가볍게 훑는 것만으로도 머리꼭지까지 찌르르 울렸다. 조금만 더 하면 마침내 해방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청우는 퍽퍽 소리가 나도록 엉덩이를 아래로 찧었다.

“허, 윽!”

반쯤 감긴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몸이 제멋대로 전율했다. 청우는 이서의 어깨를 손끝으로 긁었다. 그의 성기에서 쏘아져 나온 정액이 검은 셔츠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이서가 욕설을 읊조리며 청우의 가슴에 이마를 묻고 허리를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맞아떨어진 절정을 둘은 서로에게 닿은 채로 만끽했다. 청우는 몇 번을 잘게 떨다가 탄식 같은 숨을 토해 냈다. 엇갈려 있던 시선이 맞닿았다. 잔뜩 고양된 눈이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 먼저 웃음을 터뜨린 쪽은 이서였다.

“아……. 죽겠다, 청우야.”

그의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정말이지 죽을 것같이 휩쓸렸다. 제 몸이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입 안에 가득 고인 타액을 삼키자 이서가 고개를 젖혀 입을 맞추었다. 닿은 혀끝이 달았다. 마지막 여운이 혀로 모인 듯, 키스만으로도 쾌감이 점점이 타올랐다.

입술을 떨어뜨리며 벅찬 숨을 내쉬었다. 섹스의 여운에 잠긴 이서의 낯은 자석처럼 시선을 끌어당겼다.

“안 아팠어?”

“응.”

“좋았어?”

“……어. 넌?”

“좋다는 말로는 다 못 하지.”

솔직한 감상에 안도가 들면서도 낯이 달아올랐다. 이서가 목덜미와 쇄골 곳곳에 입을 맞추는 동안 청우는 그의 귓가를 만지작거렸다.

“일어나 볼까?”

이서의 말에 청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구멍 안을 꽉 채우고 있던 성기가 빠져나가는 감각은 언제나 이상했다. 그의 좆이 툭 빠지자 아래에서 뭔가가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퍽 불쾌한 느낌에 고개를 숙이는 순간, 흰 정액이 이서의 검은 허벅지 위로 뚝 떨어졌다.

청우는 일순 굳은 채 자신이 흘린 것을 내려다보았다. 저게 지금 내 안에서……. 그의 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얼른 일어나려는데 이서가 청우의 허리를 확 잡아당겨 앉혔다.

“잠깐……. 비켜 봐.”

“내 손에다 싸.”

이서가 청우의 벌어진 다리 사이로 손을 넣어 손가락을 모은 채 아래를 받쳤다. 정액을 흘린 것보다 이서가 이러는 게 더 수치스러웠다. 이서의 몸을 밀어 내 벗어나려는 순간, 아래에 힘이 들어가면서 정액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숨을 들이켜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서의 손날이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정액을 훔쳤다. 이내 구멍이 벌름이면서 덩어리진 것이 뚝 떨어져 이서의 손바닥에 안착했다. 그 모습을 빠짐없이 눈에 담은 청우가 이를 악물었다.

“자기야. 질질 싸면서 그런 얼굴을 하면 어떡해.”

느물느물한 목소리에 청우는 눈을 들어 이서를 노려보았다. 안에다가 싼 게 누군데 적반하장이었다. 느낌이 정말 이상했다. 다음에는 꼭 콘돔을 챙겨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서의 눈이 부드럽게 기울었다.

“나 오늘 예쁘잖아. 봐줘.”

검은 머리의 정이서가 다정하게 말하며 활짝 웃었다. 청우의 낯이 누그러지는 찰나를 놓치지 않고 이서가 그의 목덜미를 끌어당겨 키스했다. 혀를 섞는 와중 이서의 손가락이 벌어진 구멍 안으로 들어가 내벽을 긁어내렸다. 안에 든 것이 손가락을 따라 흘러내리는 느낌과 속살을 자극하는 움직임에 청우는 또 한 번 옴찔옴찔 떨었다.

“씻을까?”

손가락이 빠지고 나서 이서가 청우의 뺨에 키스한 뒤 정액이 덕지덕지 묻은 손을 모으며 물었다. 청우는 그와 그의 손을 잠시 번갈아 보다가 무뚝뚝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씻고 나니 둘 다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지경이었다. 사 먹거나 시켜 먹을 시간도 아까워 남아 있는 라면 두 개를 끓여 먹었으나 배가 완전히 차지는 않았다. 청우는 주방을 뒤적거리다가 예전에 사 둔 과자를 찾았다. 그릇에 담은 뒤에 침실로 돌아오자 엎드려 누운 이서가 보였다.

제 침대 위에서 제 옷을 입은 그를 보자 기분이 묘해졌다. 잠시 바라보다가 가까이 다가갔다. 이서는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그릇을 침대 옆 테이블에 올려 두고 그의 옆에 누웠다.

“이거 봐. 연습하면서 사진 찍은 거.”

첼로를 연주하는 사진과 첼로 앞에 앉은 채로 카메라를 보며 장난스레 웃는 사진들이었다. 무대에 오르기 전에 찍었는지 옷을 차려입은 것도 있었다. 청우는 사진과 지금 제 옆에 있는 이서를 번갈아 보았다. 검은 머리도 잘 어울리고 색다르기는 하지만, 지금의 이 모습이 그와 가장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아쉬워?”

이서가 청우를 돌아보며 웃었다. 청우는 고개를 젓고 나서 이서의 머리칼을 만졌다. 아까는 스프레이 때문인지 뻣뻣한 감이 있었는데 지금은 보들보들했다.

“첼로는 언제부터 했어?”

“음, 열한 살.”

“어릴 때 했네.”

“입양된 해에 바로 배웠지.”

이서의 입에서 자연스레 나온 이야기에 청우는 그를 마주 보며 귀를 기울였다. 그의 머리칼에서 손을 떼어 내자 이번에는 이서가 청우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어머니는 음악을 하는 게 꿈이었는데 생계 때문에 포기했고, 아버지는 집안에 음악가 한 명 있는 게 소원이라 개인 교사를 불러서 날 가르쳤어. 취미로 해 보라고 했지만 사실상 선택권이 없었지. 그래도 꽤 적성에 맞았고, 잘하니까 자연스럽게 재미도 붙었으니 나쁜 일은 아니었지만.”

정말 어릴 때부터 첼로를 배웠구나. 청우는 어린 이서가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상상하다가, 그의 손에 박인 굳은살을 떠올렸다.

“왜 그만뒀어?”

“반항심에.”

“반항심?”

눈을 내리깐 이서는 어쩐지 말을 미루는 듯했다. 말을 할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었고, 말해 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이왕이면 전부 말해 주면 좋겠지만 그건 욕심일 테다.

청우의 머리카락을 한참 만지작거리던 손이 아래로 내려와 목덜미를 쓸었다. 부드러운 손길에 나른해졌다.

“너희 말이면 죽는 시늉도 할 수 있는 착한 아들은 이제 없어요.”

“…….”

“뭐, 그런 뜻이었지. 유치하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말했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테다. 어쨌든 몇 년을 손에 잡았던 첼로를 놓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갈등이 있었을까.

“그래도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자꾸 생각나는 거야. 그래서 연습실 하나 잡아 놓고 가끔 연습했어. 손이 굳지는 않게.”

진로를 희망했던 일이 이제는 완전히 취미가 된 모양이다. 하지만 오롯이 즐길 수 있는 취미는 아니었던 듯, 이서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청우는 제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는 이서의 손을 가져가, 그의 손목을 꽉 쥐었다.

“네가 진짜 좋아하는 걸 마음껏 하는 게……. 더 낫지 않겠어?”

청우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무대 위에서 첼로를 연주하던 이서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멀었지만, 그래서 완전히 안다고는 못하지만 분명히 빛이 났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사람이 그것을 철저하게 숨길 수는 없었다. 어떤 것을 아끼고 소중히 여길 때 그 빛은 더욱 선명한 색을 띠었다.

“반항한다고 네가 좋아하는 것도 못 즐기면 너까지 피해 보는 거잖아. 하고 싶을 때 하고……. 나 보여 줘. 가까이서 보고 싶었어.”

얼핏 진중한 낯으로 청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서가 이내 픽 웃었다. 그가 이내 청우의 어깨에 이마를 묻고 쿡쿡댔다.

“너 지금 네 사심 채우는 거지?”

“……아니야.”

“우리 청우가 이렇게 엉큼한 줄은 몰랐네.”

엉큼하다니. 이건 곡해나 다름없었다. 미간을 찡그리자 이서가 고개를 젖히고 청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주름이 순식간에 풀리고 말았다. 청우는 머쓱한 낯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이서가 청우 쪽으로 돌아누웠다. 청우는 그를 가만 바라보다가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해 주었다. 이서는 유순한 낯으로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그의 시선이 보드랍게 제 얼굴을 훑는 바람에 괜히 간질거렸다.

“그럴까.”

“응?”

“첼로. 자주 해 볼까.”

이서의 낯에 순간 스친 감정은 여러 가지로 뒤섞여 있었다. 청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자 이서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숨을 터뜨리며 청우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청우는 그를 마주 안은 채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이것으로 위로가 되지는 않겠지만, 자그마한 격려라도 되었으면 했다.

“네 냄새 난다.”

“……내 침대니까 나겠지.”

“응, 그래서 좋아.”

웅얼거리는 소리에 청우의 손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청우는 고개를 뒤로 뺀 채 아래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눈을 감은 이서가 점점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순간 가슴이 꽉, 쥐어짜이는 듯했다. 청우는 숨을 급하게 들이켰다가 조심스레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제게서는 그의 향이 느껴졌다. 이서의 향으로 주변이 가득 차 숨을 쉬는 법을 잊어버리고 말 만큼.

「보내 드렸어요」

과제로 쓴 PPT와 함께 답장을 보내자 고개를 연신 꾸벅이는 고양이 이모티콘이 도착했다. 요즘 사람들이 이 이모티콘을 많이 쓰던데, 유행인가 보다. 고양이를 보다가 메신저를 끄려는 찰나, 어깨에 무게가 얹히며 이서의 향이 코끝을 스쳤다.

“서현 선배?”

심드렁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이서가 제 핸드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청우는 그가 앉기를 기다렸다가 바로 서현의 프로필 사진을 보여 주었다. 이서가 눈썹 한쪽을 들어 올리고는 사진을 보았다.

“남자 친구 있나 보더라.”

테이블 앞에 앉아 환하게 웃고 있는 한 남자의 사진이 프로필을 장식하고 있었다. 보통 이성만 나온 사진을 프로필에 걸어 둘 경우, 애인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리고 서현이 선물해 준 책을 읽어 보았는데, 주인공이 첫사랑을 회상하는 내용은 단 열 페이지밖에 되지 않았다. 이 책은 이서의 말처럼 첫사랑을 떠올리는 이야기가 아니라 주인공의 성장 소설이었다. 부풀려도 정도가 있지, 정말 황당한 녀석이다.

사진을 확인한 이서의 시선이 청우에게로 흘러왔다. 진실을 알게 된 것치고 퍽 시큰둥한 낯이었다.

“글쎄. 그런가.”

그게 끝? 청우는 잠시 미간을 구겼지만 꼬투리 잡을 일도 아닌지라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때는 그냥 아무 뜻 없이 채근한 모양이다. 거기에 휘둘린 자신이 잘못이다.

이서가 한쪽 팔을 베고 엎드리더니 손을 뻗어 청우의 뺨을 쿡쿡 찔렀다. 난데없는 장난에 손가락을 잡아채자 실없이 웃는다.

“애냐.”

“응, 내가 너보다 동생이잖아.”

몇 달 차이 나지도 않는데 형이 아닌 동생을 자처하는 놈은 처음 본다. 웃어넘기자 그가 이번에는 손가락을 잡은 손을 간질였다.

“형이라고 불러 줄까? 나 하극상 좋아해.”

“……자랑이다.”

이서가 저보다 어렸으면 어땠을까 가정하자 한숨이 나왔다. 왠지 동갑인 지금보다 훨씬 더 막무가내일 것 같았다. 그래도 연상이 아니어서 다행이지, 아마 저보다 나이가 많았다면 지금쯤 정신없이 휘둘리고 있지 않았을까.

그의 손장난을 막아 내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교수가 도착했다. 그러고 보니 과제 발표도 얼마 남지 않았다. 발표는 이서가 하기로 했기에 끝나고 나면 맛있는 거라도 사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강의가 끝나고 둘은 강의동 밖으로 나왔다. 날이 화창해서 차를 타기보다는 학교 근처에서 식사하고 좀 걸으면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채광 좋은 데로 갈까?”

“좋지.”

이서가 아는 곳이 워낙 많으니 자신을 어디로 데려갈지 기대가 되었다.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라 꽤 걸어야 했다. 상가가 늘어선 거리를 지나 코너를 막 돌았을 때였다.

“청우야!”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청우는 카페 테라스에 앉아 있는 산영과 건을 발견했다. 걸음이 반사적으로 멎었지만, 산영 혼자 있는 것도 아니고 건과 함께 있어 거북한 마음이 들었다.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였는지 건의 낯이 험악해졌다. 인사만 받고 빨리 가야겠다 생각할 찰나, 이서가 그쪽으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이야, 여기서 보네.”

그가 의자를 빼더니 자리에 앉았다. 청우는 얼이 빠진 채로 이서의 뒤통수를 쳐다보다가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산영이 해맑은 낯으로 둘을 번갈아 보다가 물었다.

“둘이 어디 가고 있었어?”

“우리 밥 먹으려고. 너흰 먹었나 보네.”

“응, 여기 커피 맛 좋다.”

이서는 쉽게 엉덩이를 뗄 기색이 아니었다. 산영 옆에 앉은 건이 눈빛을 쏘아 보내고 있는데도 철저히 무시하고 있었다. 한숨을 삼키며 의자 끝에 걸터앉자, 이서가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때처럼 친분을 과시하려는 걸까. 뜻은 알 수 없었지만 불편한 자리라 어서 벗어나고 싶었다.

“우리 방학 때 여행 가자는 얘기 하고 있었는데. 아, 맞다! 청우야. 우리 다 같이 놀러 갈까? 그때 넷이 놀면 재밌겠다고 말했던 거 기억나?”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제안에 청우는 일순 굳었다. 산영에게는 미안하지만, 여기서 이 넷의 만남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 말고는 없을 것이다. 조심스레 거절의 의사를 내비치려 할 때였다.

“난 좋아. 재밌겠다.”

이서가 청우의 어깨를 주무르며 활짝 웃었다. 청우는 순간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할 뻔했다. 고개를 돌려 도대체 무슨 짓이냐는 뜻을 담아 이서를 보았으나 그는 그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굴었다.

“차건. 너도 괜찮지?”

괜찮을 리가 없다. 청우는 건에게 희망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 한탄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청우를 주시하고 있던 건이 이내 비스듬히 웃었다. 그의 미소에서 썩은 내가 풀풀 풍겼다.

“나도 좋지. 뭐, 꿀릴 거 없잖아?”

아……. 청우는 탄식을 삼키며 혀를 꾹 깨물었다. 세 사람의 시선이 이내 청우에게로 쏠렸다. 속이 말로 다 할 수 없이 심란해졌으나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서가 손뼉을 맞부딪쳤다.

“말 나온 김에 바로 가자. 이번 주 주말. 어때?”

“어? 난 괜찮아!”

산영의 긍정에 건도 괜찮다는 의사를 표했다. 이서의 눈길이 청우에게 돌아왔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너? 청우는 울컥했지만 티를 낼 수 없어 또 고개를 주억였다.

“좋아. 그럼 장소는 내가 정할 테니까 오늘은 이만 해산.”

“응, 밥 맛있게 먹어.”

이서가 콧노래를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죽은 듯이 자리만 지키고 있던 청우는 산영에게 억지로 웃어 보인 뒤 말없이 걷다가, 카페 근처를 벗어나고 나서야 이서의 손목을 잡아챘다.

“야, 정이서.”

“응?”

“너 무슨 생각이야. 쟤네랑 왜 놀러 가.”

자신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은 채 끝나 버린 결정에 화가 났다. 제 사정을 잘 아는 이서가 자신을 저런 불편한 자리에 밀어 넣는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서라면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화를 눌러 참았다.

“왜? 불편할 것 같아?”

“당연하지. 그걸 말이라고 해?”

“불편하다고 언제까지 피할 건데?”

이서가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허를 찌른 물음에 청우는 할 말을 잃고 침묵하다가 입을 뗐다.

“도망쳐도 된다고 했던 건 너야.”

“네가 지금 어디쯤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 영원히 피할 게 아니면 한번 부딪쳐 보는 것도 나쁘지 않고. 뭣보다 내가 있잖아. 가서는 나한테만 집중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산영을 품은 마음과 멀어지고 싶다고 해서 산영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 내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리고 요즘을 생각하면 괜찮을지도 몰랐다.

“왜. 못 하겠어?”

이서에게만 집중하기.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 자리에 이서와 건이 함께 있으니 헛된 마음을 품지 않기 위해 오히려 정신을 바짝 차릴 수는 있을 듯싶었다. 청우는 미간을 모은 채 가만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 괜찮을 거야.”

이서가 청우의 뺨을 토닥였다. 이상하게도 그의 말이 꼭 주문처럼 들렸다. 그의 말대로 모든 일이 괜찮을 것만 같았다. 청우는 마음에 얹은 짐을 내려놓았다.

이른 한파가 찾아왔다. 나들이 가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날이라는 생각과 함께 창을 닫았다. 패딩을 입고 가방을 챙긴 뒤에 밖으로 나가자 타이밍 좋게 이서의 차가 들어왔다.

차 안에 올라타자 따뜻한 공기가 차가워진 피부를 녹였다. 안전벨트를 매는데 이서가 청우를 돌아보더니 싱긋 웃었다.

“우리 오늘 커플이네?”

그의 말에 그와 자신의 옷차림을 번갈아 보았다. 이서는 하늘색, 자신은 검은색의 롱 패딩을 입었다. 요즘 워낙 긴 패딩을 입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커플 옷이라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디자인이 비슷하기는 했다.

“색 너랑 잘 어울린다.”

자신이라면 엄두도 내지 않았을 하늘색 패딩은 이서와 꼭 어울렸다. 관리도 잘하고 있는지 때 탄 부분 하나 없이 깨끗했다. 칭찬에 이서가 쑥스러운 척 웃으며 청우의 입꼬리를 쿡 찔렀다.

“오늘 기분 어때?”

“기분? 왜?”

“괜찮은가 싶어서. 어쨌든 내가 억지로 가자고 한 거잖아. 가기 싫으면 말해.”

“가기 싫어도 가야지, 어떻게 하게.”

“가기 싫으면 가지 말아야지. 지금이라도 차 돌리면 돼.”

가자고 할 땐 언제고, 당일이 됐는데 가기 싫으면 말자니. 헛웃음이 나왔지만 그의 말에 꽤 싱숭생숭했던 기분이 괜찮아졌다. 사실 가면 산영과 건이 붙어 있는 모습을 종일 봐야 하고, 건이 자신을 들쑤실 게 분명해 걱정이 되었는데 이서가 옆에 있으니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될 듯싶었다. 이서를 신경 쓰는 데만 해도 큰 힘이 들기에 그의 말대로 그에게만 관심을 쏟으면 되는 일일 테다.

“괜찮아.”

“정말?”

“어. 너 있잖아.”

이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청우를 돌아보았다. 출발할 생각도 않고 빤히 쳐다보는 것에 청우는 찔끔해서 제 말을 돌이켜 보았다. 문장만 떼어 놓고 보면 꽤 낯간지러운 말이었다. 제 의도는 그의 말처럼 그가 옆에 있으니 이런저런 거 신경 쓸 거 없이 그냥…….

“그게 아니라…….”

“아하. 그렇구나.”

해명하려고 했으나 이서는 이미 말을 들을 눈치가 아니었다. 눈꼬리가 한껏 기울고 얼굴이 화사한 웃음으로 물들었다.

“내가 있으면 다 괜찮다?”

“아니 그게 아니라…….”

청우는 그냥 말을 하기를 포기해 버렸다. 이서가 허밍을 흥얼거리며 출발했다. 자신을 놀리려고 그러는 줄 알았는데, 정말로 기분이 좋아 보여 괜스레 어색해졌다.

“오늘 가는 데 너도 아는 곳이야?”

“가 본 적은 없어. 차건이랑 이렇게 멀리 나온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데.”

이서의 너스레에 청우가 웃음을 흘렸다. 넷이 모이기로 한 장소는 강원도에 위치한 별장으로, 건의 아버지가 소유한 곳이었다. 비교적 아담한 건물이라는데, 산영은 건과 함께 종종 찾는 듯했다.

“걔네가 앞에서 닭살 떨면 내 생각 해.”

“옆에 있는데 무슨 생각.”

“뭐, 많잖아? 예를 들면 내 침대 위에서…….”

“야.”

헛소리가 나오기 전에 입막음을 하자 이서가 어깨를 으쓱였다. 잠자리를 몇 번 가지기는 했지만 어떻게 저런 말을 일상에서 할 수 있는지. 그의 침대 위에서 했던 일이 떠오르자 낯이 뜨거워져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서와 실없는 대화를 나누다 보니 이제는 정말 걱정이 들지 않았다. 스스로도 어느 정도 덤덤해졌다고 여기고 있다. 여태까지는 산영이 건과 함께 있는 모습을 오래 본 적이 없다. 종일 보다 보면 인정하게 될지도 모른다. 건이 산영에게 좋은 연인이라고.

별장에 도착했을 때는 하늘이 노르스름하게 익고 있었다. 시간에 딱 맞춰 왔는데 건과 산영은 아직인 듯했다.

“인성 끝내주는 새끼는 늦을 게 뻔하니까 우린 주변 좀 훑을까?”

별장 앞은 호수가, 뒤는 산이 지키고 있었다. 바람이 써늘했지만 뻥 뚫린 풍경이 가슴속으로 들어찼다. 청우는 이서와 함께 호수와 이어진 계단을 내려갔다.

맑은 하늘과 울긋불긋한 산등성이를 품은 호숫가를 잎을 거의 다 떨어뜨린 나무가 둘러싸고 있었다. 신발 밑으로 자박자박 밟히는 낙엽 소리가 좋았다. 그저 불편하게만 여겼던 자리에 와서 이렇게 좋은 풍경을 눈에 담을 줄은 몰랐다.

부딪치기도 전에 겁을 내고 피했다면 몰랐을 길이었다. 돌이켜 보면 많은 일이 그랬다. 나를 아프게 한 일들이 결국에는 나를 만들었다. 물론 아프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과거를 돌릴 수 없다면 인정하고 껴안는 게 편했다.

그렇다면 산영을 마음에 품은 채 홀로 앓고 자책하며 괴로워했던 일은 이제 어떤 길을 만들까. 청우는 주변 풍경을 훑는 이서를 보았다. 건이 기억을 잃어 자신이 흔들리지 않았더라면 이서는 제게 그런 제안을 하지 않았을까. 데면데면하게 친구의 친구로, 어쩌다 만나면 인사나 하는 그런 사이로 지냈을지도.

문득 이 시간이 신기했다. 전혀 섞이고 싶지 않았던 사람과 많은 일을 함께하고 있다는 게.

“사진 찍어 줄까?”

눈이 마주치자 이서가 웃으면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나더니 망설임 없이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자, 여기 보세요.”

청우는 핸드폰을 들고 자신을 찍는 이서의 얼굴에 시선을 주었다. 이상하게도 가슴이 뭉클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눈앞의 그였다. 이서에게 그런 존재는 누구일까.

“예쁘게 나왔다.”

“나도 찍어 줄게.”

이서와 자리를 바꾸고 나서 청우는 그를 따라 무릎을 꿇었다. 이서가 그럴 필요 없다며 웃었지만, 그만큼은 못하더라도 비슷하게는 찍어 주고 싶었다. 팔을 활짝 벌리고 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한 채 이쪽을 보며 티 없이 웃는 이서가 그의 뒤에 펼쳐진 절경보다 선명한 색을 띠었다. 이서는 꼭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색을 빨아들인 것 같았다. 그래서 저항할 수 없이 시선을 끌어당기는지도 모르겠다.

아쉽게도 사진 속 이서는 현실의 그를 절반도 담아내지 못했다. 실력 탓일까. 시무룩한 낯으로 사진을 내려다보고 있자, 이서가 다가와 어깨에 팔을 둘렀다.

“음, 좀 나아졌는데?”

“나아졌어?”

“응. 날 이렇게 찍고 싶었구나?”

그가 사진을 보면서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꼭 다 알고 있다는 듯 거만하지만, 그렇게 느껴지지는 않는 웃음. 이서가 알고 있다는 게 왜인지 안도가 되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이서가 키득대며 청우의 어깨에 뺨을 댔다가 뗐다.

“날씨 좋네.”

이서는 걸음을 떼며 청우의 손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움찔한 청우와 달리 이서는 아무렇지 않게 그를 잡아끌었다. 주변에는 사람이 없었고, 호수에 반사된 햇빛이 눈가를 스쳤다. 손바닥으로 묵직한 온기가 스며들었다. 온기를 느낀 손바닥이 쿵쿵댔다.

이 박동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걸 이서도 느끼나 싶어 곁눈으로 보았지만 그는 모르는 눈치였다. 청우는 발을 조심스레 내디뎌 바닥을 밟았다. 손으로부터 시작한 쿵쿵거림이 자그마한 움직임에도 펄쩍 뛰어오를 것 같아서. 발밑의 낙엽은 꽤 낭만적인 소리를 내며 부스러졌다.

호수 한 바퀴를 돌았을 때 산영에게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다. 별장 안으로 들어가니 건과 산영이 거실 벽난로 앞에 앉아 불을 쬐고 있었다.

“이야, 늦게 와 놓고 여유로우시네?”

“미안, 내가 오다가 멀미를 해서.”

“지금은 괜찮아?”

“응. 약 먹었어.”

산영은 가끔 멀미를 심하게 하는데, 그럴 때면 꼭 먹은 걸 다 토해 내곤 했다. 걱정이 되어 다가가려고 할 때 이서의 손이 청우의 등 위에 얹혔다. 등허리를 끈덕지게 쓸어내리는 손길에 멈칫하며 이서를 돌아보았다. 웃음기가 옅게 어린 채 지긋하게 쳐다보는 눈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청우는 한 걸음 내밀었던 발을 다시 돌려놓았다.

“그럼 우리 장 보러 갈까?”

“장? 뭐 그런 귀찮은 일을 해. 사람 부르면 되지.”

“그게 무슨 재미야? 우리끼리 오순도순 요리해서 먹는 맛으로 이런 데 오는 거지.”

이서의 주장에 산영이 동의하는 듯 눈을 반짝이며 건을 돌아보았다. 건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썹을 꿈틀했지만, 산영을 이길 수 없어 한숨을 삼키며 일어났다.

청우와 건이 산영에게 별장에서 쉬라고 권유했으나 그는 약을 먹어서 이제 괜찮아졌다며 따라나섰다. 건이 산영을 조수석에 앉힌 뒤에 운전대를 잡았고, 이서와 청우는 뒷자리에 앉았다. 차가 출발하고 얼마 안 되어서 이서가 청우의 어깨에 머리를 댔다.

“아, 멀미 나.”

“괜찮아?”

급히 고개를 기울여 이서의 얼굴을 살폈으나 그는 멀쩡해 보였다. 오히려 장난기를 머금은 입가를 보고 밀어 냈다.

“뭐야.”

“왜 박하게 굴어?”

산영을 눈짓하며 하는 이야기에 청우는 할 말을 잃었다. 산영은 진짜 멀미를 했던 거고 이서는 아니니까 그런 것뿐이다. 이서가 보란 듯이 청우의 어깨 위로 다시 머리를 얹었다. 청우는 이서의 머리가 떨어지지 않게 신경 쓰며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룸 미러로 건과 눈이 마주쳤다. 건이 못 볼 걸 봤다는 듯 눈가를 일그러뜨리는 바람에 청우는 시선을 피했다.

허벅지 위에 둔 손에 이서의 손이 얽혔다. 청우는 앞자리의 눈치를 보며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이서는 단단히 힘을 주어 붙들었다. 하는 수 없이 손을 최대한 아래로 내렸다.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해가 녹아내리는 풍경이 차를 시원하게 스쳤다.

마트에 도착하자 건과 산영은 자연스레 카트를 찾아 나란히 밀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같은 방향으로 가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 자주 이런 시간을 가진 듯했다. 뒤에서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서가 팔뚝을 쥐어서 돌아보았다.

“나 과자 먹어도 돼?”

이서가 카트를 당기며 물었다. 과자를 먹고 싶으면 먹는 거지 왜 굳이 물어보는지 알 수 없었다. 꼭 충치 걱정 하는 아이 같은 질문에 청우는 웃음을 삼켰다.

“먹어. 그리고 카트 쟤네가 가져갔는데.”

“쟤네는 쟤네고 우리는 우리지. 우리도 먹고 싶은 거 담자.”

카트 손잡이의 왼쪽 부분을 잡은 이서가 오른쪽을 가리켰다. 잡으라고? 가만히 쳐다만 보자 그가 재촉하듯이 팔꿈치로 청우의 팔을 툭툭 쳤다.

아무리 그래도 다 큰 남자 둘이서 카트를 나란히 끌고 가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 싶었다. 머뭇거리자 이서가 한숨을 폭 내쉬더니 고개를 떨구었다. 서운해하는 낯은 누가 봐도 연극적이었다. 하지만 싫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결국 청우는 왼손을 카트 손잡이 위에 얹었다. 이서의 입가가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웃음으로 물들었다.

“과자부터 사자.”

둘이 끄는 카트는 곧장 과자가 진열된 매대로 향했다. 이서가 좋아하는 과자를 카트에 넣고 나서 청우에게도 하나 고르라고 말했다. 청우는 제 몫의 감자 칩을 하나 들고선 버섯 모양의 초콜릿 맛 과자를 골랐다.

“산영이는 이거 좋아하고. 차건은?”

이서는 청우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뚱한 낯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나 싶어 눈썹을 들어 올리자 이서가 혀를 찼다.

“뭘 좋아하는지 알 게 뭐야?”

“어?”

“내가 좋아하는 과자는 이거야. 다른 건 필요 없어.”

그가 손에 든 과자를 흔들었다. 담백한 크래커였다. 청우는 가만히 눈을 깜빡이다가 초콜릿 맛 과자를 내려놓고 물었다.

“또 뭐 좋아하는데?”

“또 이거.”

청우는 이서가 말하는 취향을 머리에 새겼다. 그에 대해 아직 모르는 게 많았다. 같이 여행을 온 친구들의 입맛을 맞추는 것도 중요했지만, 이서에 관해 더 알고 싶었다. 둘은 서로의 취향을 말하며 카트를 채웠다.

장을 보는 일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이서가 저녁을 만드는 데 전혀 필요 없는 푹신한 방석이나 변신 로봇을 손에 들면 청우는 한숨을 내쉬며 카트에 넣는 걸 막았다. 그렇게 노느라 카트에 든 건 군것질거리 따위가 다였지만, 계산대에서 만난 건과 산영이 필요한 것을 다 샀기에 부족한 물건은 없었다.

넷은 별장으로 돌아와 주방에서 짐을 정리했다. 메뉴는 여행 와서 가장 만만하게 먹을 수 있는 고기와 새우, 김치찌개였다. 이서가 식탁 위에 늘어놓은 재료들을 확인하고는 청우와 건, 산영을 차례대로 둘러보았다.

“차건 넌 고기나 구우면 되고.”

“뭐?”

“너 할 줄 아는 요리 없잖아. 청우는 기본은 하지? 산영이 넌…….”

산영의 요리 실력을 익히 아는 이서가 미소 지었다. 혹시 지나치게 솔직하게 말할까 봐 청우는 이서의 눈치를 살폈다.

“쉬어.”

“어? 나도 도와줄게.”

“글쎄. 가만히…….”

“이거. 버섯 썰어 줘.”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라고 말할 게 뻔한 이서의 말을 막고 버섯을 내밀자 산영이 좋아하며 받아 들었다. 건이 산영의 뒤에서 이서를 노려보며 입 모양으로 뭐라고 말했다. 이서는 전혀 개의치 않고 돌아서며 찬장에서 냄비를 꺼냈다. 청우는 그의 옆에 따라붙으며 속삭였다.

“야. 그렇게 말하면 상처받지.”

“상처받으면 양심이 없는 거지.”

차가운 평가에 청우는 내심 놀랐다. 사실 예전에 이서는 자신보다 산영과 더 친했고, 그를 친구로서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빈말도 워낙 잘하는 데다 산영에게 굳이 찌르는 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자신 때문에 일부러 그러는 걸까?

“왜 박하게 구냐.”

“내가 박한 게 아니라 네가 후한 거란 생각은 안 해 봤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산영은 요리를 못하고 종종 다치기도 하니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요리 경연을 하는 것도 아니고, 함께 놀러 온 마당에 한 명을 그런 이유로 배제하는 건 그리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내 앞에서 자꾸 쟤를 신경 쓰면 안 되지?”

이서가 눈을 치뜨며 단호한 눈빛을 보냈다. 아. 청우는 그제야 제 행동이 오해받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건 정말 같은 친구로서 하는 말이었지만, 이것이 과보호인지 중재인지 정확히 구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의견을 고집해 보았자 설득력이 없을 터였다. 청우는 산영을 챙기는 대신 이서의 표정을 살폈다.

“화났냐?”

제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서가 누누이 했던 말을 무시하는 것처럼 비칠 수도 있겠다 싶었다. 화가 난 얼굴은 아니었지만, 기분이 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묻자 이서의 입가가 웃음으로 허물어졌다. 그가 고개를 기울여 청우의 어깨에 머리를 댔다가 뗐다.

“내가 너한테 화를 왜 내.”

“……내던데.”

뒤끝이 남은 건 아니지만, 불쑥 떠오른 일 때문에 작게 중얼거리자 귀신같이 들은 이서가 청우를 돌아보았다. 곧 그의 눈이 제 얼굴을 다정하게 살피는 게 느껴져 멋쩍어졌다. 이서는 아무 말 없이 청우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가 흘린 눈길이 뭘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웃음기가 언뜻 사라진 눈은 차갑지는 않았지만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이서가 입술을 달싹였다. 드물게 보는 모습에 주의를 기울이는데, 그가 이내 깃털 같은 웃음을 흘리며 손을 뻗어 엄지로 청우의 뺨을 문질렀다.

“나 못되게 굴면 또 때려.”

“……내가 언제 때렸다고.”

누가 들으면 상습적으로 폭력을 저지르는 줄 알겠다. 볼멘소리에 이서가 청우의 볼을 살짝 꼬집고는 손을 떼어 냈다.

“청우야, 버섯 이렇게 자르면 돼?”

산영이 다가왔기에 청우는 이서에게서 물러났다. 뺨을 긁적이며 버섯이 담긴 접시를 보았다. 구이용인데 너무 얇게 잘려 있었다.

“아, 이거 더 굵게 자르면 돼. 차건은?”

“테라스에. 고기 구울 준비 하고 있어.”

“그럼 우리 이거 같이 자르자.”

청우는 감자와 양파를 가져와 산영과 함께 식탁에 앉았다. 이서는 본격적으로 김치찌개 끓일 준비를 했다. 그의 뒷모습을 좇다가 산영에게 각각의 것들을 어떻게 자르면 좋을지 말해 주었다.

“맛있겠다, 그치.”

“응.”

“여기 좋지 않아? 앞에 호수 가 봤어?”

“어, 아까 산책했는데 좋더라.”

“뒤에 산책로도 좋아. 밤에 가끔 반딧불이도 보인다?”

다 같이 놀러 온 게 좋은지 산영은 들떠 보였다.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근데 청우야.”

“응.”

“혹시……. 나 뭐 잘못한 거 있어?”

“어?”

“요즘 나 피하는 것 같아서…….”

말을 흐리며 제 얼굴을 살피는 산영을 보고 청우는 일순 멍해졌다. 저 혼자 그를 가까이했다가 멀리했다, 제 마음을 다스리겠답시고 거리를 벌리는 동안 산영은 별안간 친구가 멀어지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을 것이다. 청우는 쓴웃음을 삼켰다.

“그게 아니라, 내가…….”

“솔직하게 말해 줘도 돼.”

“내가 너를 좀 과보호하는 것 같다고, 다들 그러길래.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더라. 네가 잘못한 게 아니라……. 내 문제야.”

그를 품었던 제 마음을 꺼트리는 게 목표였지, 산영과의 관계를 아예 끊어 내려고 하는 게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산영이 상처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보호해 달라는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저 혼자 옆에서 서성대다가 그를 찌르게 된다면 그거야말로 우스운 일은 없었다.

제 말이 잘 가닿을까 조심스레 살피는데, 산영은 오히려 기쁜 듯 입꼬리를 둥글게 올렸다.

“그랬구나. 내가 좀 덜렁거리기도 하고, 너한테 의지를 많이 해서 그런가 봐. 청우 네 문제도 아니야. 그런 생각 하지 마.”

“…….”

“네가 편한 대로 해. 자주 못 만나도 네가 좋은 쪽이 나도 좋아.”

그가 손을 뻗어 청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늘 챙겨야 할 대상처럼 여겼던 산영이 순식간에 성숙하게 느껴져 다소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눈만 깜빡이고 있을 때, 성큼성큼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뭐야?”

건이 산영의 손목을 잡아채 청우에게서 떼어 냈다. 자신을 노려보는 눈길에 청우는 반응하지 않고 감자를 깎았다. 산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건의 머리도 쓰다듬어 주었다.

“칭찬.”

“……뭐?”

“건아, 불 다 했어?”

“했어.”

“잘했어. 나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이거 같이 해 주라.”

과도가 건의 손으로 넘어갔다. 건은 주방을 빠져나가는 산영의 뒷모습을 좇다가 의자를 거칠게 빼고는 자리에 앉았다. 노려보는 게 빤히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하고 감자를 자르는데, 건이 긴 다리를 뻗어 청우 옆에 놓인 의자를 퍽 밀었다.

“뻔뻔함이 도가 지나치네. 여기까지 따라와서 수작을 부리고.”

칼을 쥔 손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청우는 한숨을 삼키고 건을 보았다. 지난 일에 대한 앙금이 남은 눈빛이었다. 당연했다. 자신도 그때는 감정이 격해져서 그를 도발하고 말았으니까. 따지고 보면 사과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그러고 싶지 않은 건 자존심 때문일까.

“왜. 옆에서 꼬리라도 흔들면 산영이가 콩고물이라도 던져 줄까 봐? 어쩌냐. 걔 몸에서 나오는 물은 내가 다 받아 마셨는데.”

성적인 함의를 담은 듯한 말에 청우는 미간을 좁혔다. 그런 말을 타인에게 하는 건 산영에게 예의가 아니라고 지적해야 하는지, 아니면 산영을 포기하기로 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야 하는지 고민할 찰나였다.

“건아.”

이서의 부름에 두 사람의 고개가 그에게로 돌아갔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싱크대에 기대서 있었다.

“네 눈엔 산영이가 굉장한 옴 파탈로 보이나 본데…….”

무슨 말을 하려는가 싶어 청우는 괜히 긴장했다. 고개를 기울인 채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린 이서에게서 듣기 좋은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네 눈에나 예쁘지. 다 너랑 같은 수준인 줄 알아?”

산뜻한 미소를 띤 얼굴과는 달리 가시가 잔뜩 돋은 말에 청우는 굳은 채로 눈만 돌려 건을 보았다. 이맛살을 구기며 혀로 볼 안쪽 살을 밀어 내는 그는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글쎄. 나한테만 예쁘다기엔 침 질질 흘리면서 껄떡대는 새끼가 한둘이 아닌데.”

“그 집 개는 주인 하나 못 지켜서 애먼 사람들한테 멍멍대나?”

청우는 숨을 조용히 들이켰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말이 좀 심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왜 둘이 말씨름을 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가시방석 같은 자리 속에서 건의 낯이 차가워질 때였다.

“건아. 다 했어?”

물 묻은 손을 짝짝 부딪치며 주방으로 들어온 산영 때문에 차갑게 날이 섰던 분위기가 깨졌다. 이서는 청우에게 윙크를 보낸 뒤에 끓고 있는 냄비 쪽으로 돌아섰고, 건은 표정을 싹 바꾸며 산영을 맞이했다. 청우는 고개를 떨군 채 남은 감자를 조용히 썰었다.

말이 심하긴 했는데, 곰곰 생각해 보니 제 편을 들어 준 듯했다. 고맙기도 하면서 꼭 저렇게 말했어야 했나 싶기도 하고……. 불쑥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아 청우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뚝뚝 썰어 내는 감자가 왠지 말랑하게 느껴졌다.

식사 준비를 끝낸 후에 모두 테라스로 나왔다. 건과 산영이 나란히 앉고 맞은편에 청우와 이서가 자리를 잡았다. 건과 이서의 옆쪽에 그릴이 있어 두 사람이 고기와 새우를 구워 접시로 날랐다. 산영이 고기 한 점을 건의 입으로 옮겨 주었다. 그걸 받아먹는 건의 모습은 자연스러웠다.

청우는 이서를 흘긋 보았다. 고기를 굽느라 적게 먹는 게 신경 쓰이기는 했으나 먹여 줄 수는 없었다. 대신 새우를 몇 개 까서 이서의 그릇 위에 놓아 주었다. 그러자 이서가 청우를 보고선 슬그머니 웃었다.

새우를 까 주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상추 위에 고기를 얹는데 시선이 느껴져 눈을 들었다. 건이 자신과 이서를 번갈아 보았다. 그 눈빛의 의미를 해석하기도 전에 산영이 한 말에 건이 고개를 돌렸다.

“이서 너는 술 잘 마시지.”

“그런 편이지?”

“그럼 청우랑 같이 마시면 재밌겠다. 난 술 못 마셔서 우리 둘이서 마신 적은 거의 없거든.”

“음, 그러고 보니 우리도 둘이 마신 적은 한 번뿐이지 않나?”

이서의 물음에 청우는 그와 단둘이서 술을 마신 적이 있나 떠올려 보았다. 그의 말대로 한 번이었다. 분위기 좋은 펍에서 마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거기서 이서는 연애를 제안했고, 자신은 그를 뿌리치고 나왔다. 지금 생각해 보니 참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청우는 웃음을 흘렸다.

“그날 청우가 나 두고 먼저 갔었는데.”

“왜?”

“글쎄.”

이서가 턱을 괴고 은근한 시선을 보냈다. 청우는 산영이 궁금해하며 눈을 빛내는 걸 보고 당황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기에는 걸리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그땐 내가 좀 짓궂었거든.”

다행히 이서가 대신 답을 해 주었다. 좀 짓궂은 정도는 아니지 않았나. 청우는 그날 폭격기 수준으로 제 마음을 헤집어 놓았던 이서를 떠올렸다. 그 순간 테이블 밑으로 이서가 손을 움켜쥐었다. 손끝으로 손바닥을 살살 긁는 행동에 몸이 순간 들썩일 뻔했다. 그만하라는 의미에서 손가락을 꽉 잡으며 맞은편의 눈치를 살폈다.

신경이 쓰여 대화에 관심을 둘 수가 없었다. 자기한테 집중하라더니,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밥을 먹는 내내 테이블 밑에서 제 몸을 건드리는 이서 때문에 청우는 내내 그에게 주의를 기울였다.

식사를 마치고 맥주 한 캔씩을 꺼내 왔다. 테이블 근처에 난로를 두니 서늘함과 따뜻함이 뒤섞이며 기분 좋은 공기가 형성되었다. 산영은 추위를 조금 탔기에 건이 담요를 가져와 그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이곳에 와서 건은 줄곧 산영을 우선으로 챙겼다. 사소한 것들도 괜찮은지 관심을 쏟고, 자신과 이서는 거의 없는 사람처럼 취급하며 산영을 먼저 생각하는 모습에 무언가가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시기나 절망 같은 게 아니었다. 체념과 닮았을까. 아니 인정과 비슷한 듯도 했다.

제 생각 속 건은, 산영이 콩깍지가 잔뜩 씐 게 아니었다면 그의 연인이 될 수 없었고 또 적합하지도 않은 남자였다. 하지만 시간을 들여 곁에서 관찰하자 건에게는 꽤 맹목적인 구석이 있었고, 타인에게 안하무인일 뿐이지 산영을 극진히 대했다.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도 저러는데 잃기 전에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테다.

무엇보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알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그들이 지닌 감정의 깊이가 더 또렷하게 보였다. 애초에 제게 어떤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모르지 않는 사실인데 유독 무겁게 다가왔다.

둘은 서로에게 어울리는 연인이었다. 물론 지금도 산영이 아깝다는 생각은 변치 않지만…….

그간의 시간이 눈앞을 스쳤다. 헛발질이었을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금 더 오랜 시간을 친구로서 순수하게 응원해 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터였다.

“괜찮아?”

손끝이 잡힌 덕에 청우는 상념에서 빠져나와 이서를 돌아보았다. 그가 고개를 기울여 자신을 살피고 있었다. 난로에서 나온 불빛이 이서의 낯을 따뜻하게 밝혔다. 문득 난로가 아니라 그가 지닌 온도가 자신을 데우고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응.”

표정을 가다듬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안주가 담긴 그릇을 청우 쪽으로 밀어 주었다. 과자를 입에 넣고 나자 목이 탔다. 맥주를 넘기니 좀 살 것 같았다.

“아, 청우야. 보들이 미용했는데 완전 귀엽게 됐어. 보여 줄까?”

산영이 본가에서 키우는 개 사진을 보여 주었다. 오랜만에 보는 개의 모습에 청우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학교에 같이 다닐 때는 주말마다 개 산책을 함께하기도 했었다. 청우는 개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불쑥 생각난 것에 눈을 들었다.

“할머닌 잘 계셔?”

“응. 그냥 비슷하셔.”

고개를 끄덕이는데 열렬한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니 건이 팔짱을 낀 채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가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이청우. 너 여자 친구 없지?”

무슨 소리를 하려나 싶어 불안한 한편으로는 무슨 말을 할지 어느 정도 예상이 가기도 했다. 청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뗐다.

“어.”

“소개해 줄까?”

“……아니. 괜찮아.”

“왜, 취향을 말해 봐. 다 맞춰 줄 테니까.”

“마음은 고마운데…….”

“아님 맞춰 주기 힘든 취향이기라도 한가?”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대놓고 떠보는 물음에 청우는 입을 다물었다. 여태까지 너무 평화롭다 싶었다. 산영을 흘깃 보는데, 그는 궁금해하는 눈이었다. 산영에게는 한 번도 관련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질문에 여전히 답변할 수 없다는 걸 자각하자 입에서 쓴맛이 느껴졌다.

“청우 취향을 네가 왜 궁금해해? 맞으면 한눈이라도 팔아 보게?”

“뭐? 미쳤냐?”

가만히 듣고만 있던 이서가 끼어들며 맞부딪친 시선에 불꽃이 튀었다. 청우는 또 구도가 왜 이렇게 흘러가나 해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제 편을 들어 주는 이서에게는 고마운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자리에서 저 대신 싸우기를 원치는 않았다.

“하, 내가 너처럼 함부로 몸 굴리는 줄 알아? 이 싸구려 새끼야.”

“야. 말이 심하잖아.”

적당히 중재하려고 했던 청우는 발끈해서 개입하고 말았다. 사람을 싸구려라고 칭하는데 듣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분위기가 싸해지면서 산영이 저를 포함한 세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게 느껴졌다.

청우는 한숨을 삼켰다. 함께 놀러 왔다고 신이 났을 텐데,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자신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것 같아 미안했다. 분위기를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고민할 찰나였다. 이서가 제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청우야, 나 너무 못된 말 들었어. 호 해 줘.”

아양 떠는 목소리에 돌아보니 이서의 귀가 바로 제 옆에 있었다. 제가 선물해 준 귀걸이를 바라보다가 호, 입으로 바람을 불었다. 그러자 이서가 어깨를 들썩이더니 뒤로 확 물러나며 제 귀를 손으로 감쌌다.

완전한 정적이 흘렀다. 굳어 있는 이서와 눈을 마주하며 청우는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아무 생각 없이 한 행동이긴 하지만, 먼저 능청을 떨어 놓고 저런 반응을 보이니 자신이 꼭 이상한 짓을 한 것 같아 굉장히 민망해졌다. 곧 청우의 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하. 하하!”

그때 건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정적을 깼다. 그가 이서와 청우를 번갈아 보며 웃음을 흘리더니 어리둥절해하는 산영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췄다. 청우는 손등으로 입가를 문지르고 나서 맥주를 들이켰다.

그 뒤로 건은 청우에게 전혀 시비를 걸지 않았다. 저와 이서의 사이를 눈치챈 건가 싶어 심란하기도 했지만,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가 또 아무렇지 않은 듯 구는 이서도 신경 쓰였다.

얼떨결에 수습된 분위기 속에서 네 사람은 꽤 무난하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건은 대체로 산영과 말을 섞었고, 그를 제외한 세 사람은 두루두루 대화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건이 슬슬 자리를 정리하자는 의견을 강하게 피력해 모두 일어나 뒷정리를 했다.

“청우야. 우리는 저기 뒤에 산책 갔다 올게.”

“지금? 너무 어둡지 않아?”

“가로등 있어서 괜찮아.”

“그래. 조심해서 다녀와.”

함께 나가는 건과 산영의 뒷모습을 좇던 청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이서는 먼저 씻겠다며 2층으로 올라가 없었다. 청우도 갈아입을 옷을 챙겨 1층의 욕실로 들어갔다.

씻고 나왔는데도 1층은 비어 있었다. 청우는 물기가 약간 남은 머리칼을 털며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서 문이 열려 있는 방은 하나였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발코니 난간에 기대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이서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의 머리 위로 하얀 연기가 아스라이 피어올랐다. 발코니로 통하는 창이 꼭 프레임 같고, 그 너머로 펼쳐진 어둠에 잠긴 풍경은 마치 배경 같았다. 계속해서 번지는 연기와 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칼이 이 그림에 생동감을 주었다.

한참을 바라만 보고 있는데, 이서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무표정하던 낯이 이내 웃음으로 물들었다. 순간 가슴이 꽉 죄는, 알 수 없는 느낌에 청우는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거기서 뭐 해. 이리 와.”

이서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며 손짓했다. 청우는 천천히 걸어가 그의 옆에 섰다.

“비 오려나 봐.”

이서의 말대로 어느새 공기가 축축했다. 풋풋한 흙냄새를 느끼며 고개를 끄덕이자 이서가 난간을 잡고 몸을 앞뒤로 장난스레 기울였다.

“배는 좀 찼어? 아까 이래저래 잘 못 먹는 것 같던데.”

“아냐, 많이 먹었어.”

“오늘 수고했어. 차건 그 새끼 지랄 받아 주기 힘들지?”

이서는 청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건에게 억하심정은 따로 없었다. 자신이 거슬리는 존재라는 건 이해하는 바이고, 저 역시 그것보다는 다른 데 신경이 쏠려 있었으니까.

“걔가 좀 눈치챈 것 같은데, 괜찮냐?”

“그래? 뭐, 채든 말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태도에 같이 마음이 편해지는 한편으로는 어쨌든 오해의 일종이니 언젠가는 풀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언젠가는 언제가 될까. 다시금 떠오른 의문에 청우는 이서를 곁눈으로 보았다.

한번 떠올리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차단했다. 현재로서는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저다운 일이 아님을 앎에도 그저 지금 이 순간을 걱정 없이 온전히 누리고 싶었다.

“고맙다.”

“음?”

“네 덕분에……. 다른 생각 안 할 수 있었던 것 같아.”

그가 의도했든 아니든 오늘은 여러모로 그가 신경 쓰여, 산영을 내내 좇거나 혼자서 청승을 떠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한 발자국 두 발자국씩 나아가, 어느 순간 돌아보았을 때 아득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서가 눈을 돌려 청우의 얼굴을 훑었다. 그는 생각에 골몰한 것처럼 말없이 청우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것이 어쩐지 어색했고, 시선을 온전히 감당하는 게 조금 버겁게 느껴졌다.

“무슨 생각 하냐.”

“음……. 그냥.”

그는 싱겁게 미소 짓더니 손을 뻗어 청우의 귓가를 매만졌다. 간지러웠지만 꾹 참자 손끝이 곧 떨어졌다.

“그건 내 덕이 아니라 네 덕이 더 크니까 널 칭찬해.”

“내 덕?”

“도와줘도 못 받아 처먹는 놈들이 널렸을걸. 넌 잘 받아먹어서 잘하고 있잖아.”

조금 으쓱해도 될 텐데, 이럴 때는 또 다정하게 말해 주는 게 사람의 마음을 툭 건드린다. 본인은 그다지 의식하지도 인정하지도 않는 것 같지만 이서는 상냥한 사람이었다. 그걸 조금 더 알았으면 좋겠다. 얼굴도 잘났으나 그의 마음도 꽤 깊고 색이 예쁘다는 걸.

이서의 얼굴을 눈에 담는데, 입술로 시선이 갔다. 제 몸 곳곳에 닿았던 보드라운 감촉이 떠오르자 불현듯 키스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몸을 섞을 때가 아니면 먼저 그에게 입을 맞춘 적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어쩐지 망설여졌다.

눈길이 느껴져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이서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마치 하고 싶은 것을 해 보라는 듯, 자신을 관망하고 있었다. 가슴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에게 닿고 싶다는 생각이 팽창한 공간을 가득 채웠다.

청우는 고개를 기울였다. 숨을 죽이며 이서의 입술에 시선을 둔 채 그에게로 점점 가까워졌다. 입술이 닿기 전까지 한 뼘만의 간격이 남았을 때였다. 갑자기 하늘에 번쩍 빛이 들며 뒤이어 거센 천둥소리가 근방을 뒤흔들었다. 놀란 마음에 훌쩍 뒤로 물러나자 이서가 미간을 찡그리며 웃었다.

곧이어 비가 쏟아졌다. 시원하게 퍼붓는 물줄기 소리에 청우는 뒤늦게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이서의 눈을 피했다.

“하던 거 마저 하지 그래?”

이서가 손을 뻗어 청우의 목덜미를 쥔 순간, 청우는 번뜩 떠오른 생각에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산영이랑 차건.”

“응?”

“저쪽으로 산책하러 갔는데, 우산 안 챙겼을 거야.”

둘 다 비를 쫄딱 맞을지도 모른다. 우산을 가져다줘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발코니를 빠져나가는데 뒤에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자 이서가 이쪽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소용없지 않을까? 이미 비 맞은 생쥐 꼴일걸.”

“그래도.”

이 밤중에 비가 쏟아지니 걱정이 되기도 했다. 비 소식은 듣지 못했는데, 소나기일까. 그렇다기엔 들이닥친 천둥 번개가 심상치 않았다. 방을 빠져나가 1층으로 내려갔다. 다행히 현관에 우산이 있었다.

큰 우산 하나를 챙기고 제 몫의 우산을 들었다. 뒤따라온 이서도 우산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장난 아니네.”

이서가 휘파람을 휙, 불었다. 그의 목소리가 묻힐 만큼 빗소리가 세찼다. 청우는 심각한 낯으로 그들이 향했던 산책로를 보았다. 계단을 갖춘 잘 정돈된 길이었으나 경사가 있어 자칫 잘못하다가는 사고가 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우산을 펼치고 산길의 입구로 향했다. 원단에 굵은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이서가 눈을 가늘게 뜨고 길을 올려다보았다.

“여기서 기다리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괜히 올라갔다가 다치겠어.”

“어…….”

“멀리 가진 않았을 거야. 사람 다니는 길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이런 폭우가 찾아오는 날이면 늘 불길한 공기가 주변에 감도는 듯했다. 어린 날 겪은 마을의 산사태가 아직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초조하게 위를 올려다보는데 이서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차건한테 전화해 볼게.”

건의 번호를 누르고 핸드폰을 귀에다 붙인 이서는, 연결음이 길어지자 눈가를 찡그렸다. 청우는 이서를 지켜보다가 산영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그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마주한 두 사람의 눈에 같은 염려가 스쳤다. 끊기지 않는 연결음 사이로 빗소리가 연신 파고들었다. 전화를 끊고, 올라가 보든지 해야겠다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위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산영이 건을 부축하며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산영아!”

청우는 재빨리 계단을 올라가 산영과 건의 머리 위로 우산을 씌어 주었다. 가까이서 보니 숨을 힘겹게 몰아쉬는 건의 이마에 핏기가 비쳤다. 바투 다가온 청우를 보자마자 산영이 울음을 터뜨렸다.

“청우야, 건이가, 나 때문에…….”

“일단 내려가자.”

쫓아온 이서가 건의 몸을 받쳤다. 청우도 산영을 다독인 뒤에 그 대신 건의 몸을 잡았다. 두 사람이 건을 부축해 내려오는 동안 산영은 울음을 삼키며 그들의 위로 우산을 씌어 준 채 따라왔다.

건을 차 뒷좌석에 태운 뒤 이서가 운전석에 올라탔다. 청우는 정신없이 조수석에 앉아 뒷자리의 산영과 건을 확인했다.

“산영아, 걱정하지 마. 괜찮을 거야.”

“응…….”

자초지종을 들어 보니 산책 중에 갑자기 비가 와 돌아오던 길, 계단에서 미끄러진 산영을 대신 받쳐 주려던 건이 그의 몸을 끌어안고 넘어져 머리를 부딪친 모양이었다. 차에 타자마자 긴장을 놓은 건지 건은 의식을 잃었다. 미운 놈이라 해도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산영을 받아 주려다가 그랬다니 더더욱. 청우는 병원으로 향하는 길 내내 산영을 안심시켰다.

다행히 비가 잦아들면서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차로 삼십 분이 넘게 걸리는 거리를 반절도 안 되어 주파했다. 응급실에 도착해 청우와 이서는 산영을 대신해 침착하게 건의 상황을 설명했다. 건이 검사실로 들어가고 나서 청우는 아직도 밭은 숨을 내쉰 채 정신이 없어 보이는 산영을 의자에 앉혔다.

이제 보니 그의 손등에도 생채기가 있었다. 산영의 몸을 살피며 팔을 쥐자, 그가 인상을 찡그리면서 몸을 움찔했다.

“산영아, 너 여기 아파?”

“응? 아까 미끄러질 때 좀 부딪쳤나 봐.”

“너도 검사 좀 받아 봐야겠다.”

“아니야, 나 괜찮아.”

“차건은 우리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네가 멀쩡해야 차건도 안심하지.”

“응……. 고마워.”

옷이 쫄딱 젖어 있어 먼저 갈아입어야 할 것 같았다. 청우는 산영이 환자복을 받는 것을 지켜보다가 이서의 곁으로 돌아왔다. 이서도 자신도 비를 맞아 꼴이 엉망이었다. 그를 마주하자 그제야 한숨이 터져 나왔다. 다리에 힘이 풀려 이서의 옆에 털썩 앉자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참 도움 안 되는 커플이야.”

“그래도 네 친구고, 다쳤잖아.”

“나 친구 없어.”

이서가 이렇게 냉담한 소리를 할 때면 괜히 뜨끔해졌다. 그의 낯빛을 살피는데 손이 잡혔다. 손가락 사이로 맞물려 들어오는 손가락이 따뜻했다. 이서와 손을 맞잡고 나니 뛰고 있던 가슴이 점차 안정되는 게 느껴졌다.

벽에 등을 대고 편하게 몸을 늘어뜨렸다. 거친 숨을 터뜨리자 이서가 웃으면서 물었다.

“놀랐어?”

“놀랐지. 넌 안 놀랐냐?”

“뭐……. 둘 다 한 번쯤은 사고 치게 생겼잖아?”

사고 치게 생겼다는 건 무슨 말인지. 청우는 힘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일이 더 크게 번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산영은 멀쩡했고, 건은 검사 결과가 나와 봐야 알겠지만 심하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응급실 안은 조용한 듯하면서도 어딘지 어수선했다. 그 속에서 맞잡고 있는 손의 온기에 집중하다 보니 몸이 노곤해졌다. 아무래도 긴장이 풀리면서 피로가 몰려오는 듯했다. 눈이 가물가물 감길 때였다. 검사실 안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문을 박차고 나왔다. 거대한 덩치는 누가 봐도 건이었다.

순간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 왜 저러나 멍하니 생각하고 있을 때, 눈이 마주쳤다. 건이 성큼성큼 걸어와 성난 낯으로 물었다.

“산영이 어디 있어.”

“너 괜찮아?”

“산영이 어디 있냐고!”

“산영이 옷 갈아입고 치료…….”

“건아!”

어느새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산영이 건을 부르자마자 그가 고개를 번쩍 돌렸다. 긴 다리를 성큼성큼 뻗어 몇 걸음 걷지도 않은 채 산영 앞에 도착한 건은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산영아, 이산영…….”

“응, 건아. 괜찮아?”

건은 마치 아주 오랜만에 산영을 만난 것처럼 그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숨을 잔뜩 들이켰다. 그러면서 그의 몸을 간절하게 더듬는 손길에 산영은 불안한 낯으로 건의 옷을 붙잡았다.

“건아, 왜 그래. 많이 아파?”

“기억났어.”

“어?”

“다 기억났다고.”

산영의 얼굴이 순간 멍해졌다. 건이 몸을 뒤로 물린 뒤에 산영의 양 뺨을 붙잡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곧 산영은 눈물이 고인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다 기억나?”

“응.”

“진짜로?”

건이 고개를 숙여 산영의 젖은 눈가에 키스했다. 그는 흐느끼며 건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건은 여태까지의 고생을 보답해 주듯 산영을 꽉 안았다.

문득 옆에서 들린 한숨 소리에 청우는 고개를 돌렸다. 이서가 질린 낯으로 고개를 저으며 속삭였다.

“나 저런 친구 없어.”

허탈한 웃음이 터졌다. 건이 드디어 기억을 되찾았다. 이제 자신이 허튼 생각을 할 틈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다행이었으나 이상하게도 알 수 없는 공허함이 밀려왔다.

그 순간 느껴지는 온기에 청우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맞잡은 손이 있었다. 굳은살이 박인, 부드럽고 따뜻한 손. 이서의 손이었다. 그 손이 자신을 붙잡아 주고 있었다.

병원 밖 희미하게 들려오던 빗소리가 멎는 듯했다. 청우는 자신이 어떤 것에도 휩쓸리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이서가 화답하듯 제 손을 꽉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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