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한 껍질(2권) (6/16)

적우 2권

6. 한 껍질

잠에서 깰 때쯤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돌아누우려고 했으나 무언가에 걸려 움직이지 않아 눈을 뜬 청우는 숨을 헉 들이켰다. 이서가 제 허리를 끌어안은 채로 바짝 붙어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자 새벽의 일이 스쳐 지나갔다. 한숨을 내쉬는데 허리 아래가 뻐근했다. 안 쓰던 근육을 썼는지 근육통까지 느껴졌다.

조금씩 뒤척이다가 팔을 들어 침대 위를 더듬었다. 손에 걸린 핸드폰을 들고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두 시였다. 새벽 늦게 잠들긴 했지만, 세상모르고 잔 듯싶었다.

그나저나 오늘이 생일인데 이렇게 시간을 보내도 되는 걸까. 청우는 잠이 든 이서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흔들었다. 곧 눈가에 주름이 지더니 그가 눈을 떴다.

“일어나 봐. 두 시야.”

“음…….”

잠에 취한 이서가 청우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비볐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잠시 굳어 있던 청우는 조심스레 이서의 머리칼을 쥐고 제게서 떼어 냈다.

“일어나.”

“응…….”

“바다 갈래? 늦었지만.”

청우의 물음에 이서가 눈을 반짝 떴다. 몽롱한 눈이 이내 나른하게 기울었다. 그가 청우의 가슴에 다시 얼굴을 묻고 비비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래, 가자.”

“약속 없어? 생일이잖아.”

“있어도 취소해야지? 네가 있는데.”

이서가 콧노래를 흘리며 욕실로 향했다. 청우는 목덜미를 긁적이며 그의 뒷모습을 좇다가 일어나 바깥에 있는 욕실에 들어갔다. 늦기는 했지만 다시 이서에게로 돌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자신과 함께 바다에 가는 걸 좋아해서 다행이었다.

“옷 저기 있어.”

이서가 발코니를 가리켰다. 건조대에 옷과 속옷이 함께 널려 있었다. 세탁기에 돌린 뒤에 중간에 깨서 널어놓고 잤나 보다. 그의 세심한 배려가 고마웠다.

옷을 갈아입고 둘은 밖으로 나왔다. 해가 쨍쨍하니 구름 한 점 없는 날이었다. 차에 타 창문을 살짝 열자 찬 바람이 들어왔다. 서늘한 공기가 상쾌했다.

“피곤하면 말해. 운전 내가 할게.”

“괜찮아. 너야말로 피곤하면 좀 자.”

“잠 다 깼어.”

“아픈 덴 없고?”

“……어.”

아직 좀 불편하기는 했다. 그래도 내일이면 나아질 것 같았다. 의식하니 더 불편한 듯해 청우는 몸을 조금 뒤척이다가 자세를 고쳤다.

둘은 가는 내내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험, 과제, 친구, 최근에 본 영화……. 일상적인 대화였다. 이서는 청우가 말할 때마다 흥미롭다는 듯 반응했고 중간중간 적절히 되물으며 말을 끌어냈다. 덕분에 청우는 평소보다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이서와의 대화는 즐거웠다. 그는 대체로 유머러스했고 말하는 데 막힘이 없었다. 평소에 자신을 긴장하게 하던 말이나 불편한 화제, 은근한 수작 또한 없었다. 그와의 이야기에 푹 빠져 있던 청우는 어느새 바닷가가 보이자 내심 놀라고 말았다.

“여기다 세우고 걸어가자.”

해수욕장과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우고 둘은 천천히 걸었다. 바닷바람이 써늘했다. 목덜미에 닿는 냉기가 시원하게 느껴졌다. 멀찍이 보이는 푸릇한 바다에 가슴이 뻥 뚫리는 듯했다. 바다에 온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서와 천천히 걸어가던 청우는 해수욕장 입구에 자리한 매대를 발견했다. 매대에는 각종 액세서리가 진열되어 있었다. 청우의 발걸음이 멎었다.

“저거 사 줄까.”

이서의 시선이 청우가 가리킨 쪽으로 향했다. 청우는 이서의 귀를 보았다. 갖고 싶은 게 없다 했지만 그래도 생일인 오늘 뭐라도 주고 싶었다. 일단은 저거라도 사 주고, 다음에 제대로 된 것을 선물하면 좋지 않을까.

“사 주면 나야 좋지.”

이서가 씩 웃으며 청우의 팔을 쥔 채 매대 가까이 다가갔다. 매대 뒤에서 핸드폰을 보고 있던 주인이 퍼뜩 고개를 들고는 그들을 반겼다.

“음, 뭐가 좋을까. 네가 골라 줘.”

“난 이런 거 잘 몰라.”

“그래도 골라 봐. 네가 보기에 예쁜 걸로 할래.”

청우는 난감한 기색으로 매대 위를 둘러보았다. 선택지가 너무 많았고, 다 비슷비슷해 보여 고르기가 힘들었다. 지금 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고르면 이서도 만족할 수 있지 않을까. 청우는 이서의 오른쪽 귓바퀴를 슬쩍 보았다.

두 개의 귀걸이가 박혀 있었는데, 하나는 까만색이고 하나는 은색이었다. 작고 동그란 모양이 수수했다. 청우는 그와 비슷한 것이 있는지 찾다가 눈에 들어오는 것을 집었다. 까만색의 작은 토성 모양으로, 무난하면서도 이서의 귀에 붙으면 예쁠 것 같았다.

“이거?”

“어. 별로면 다른 거 골라도 되고.”

“아냐, 예뻐. 이걸로 주세요.”

주인이 귀걸이를 가져가더니 포장해 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청우는 곧장 그렇게 해 달라고 답했고, 이서의 시선이 느껴졌으나 무시했다. 곧 리본으로 싸인 상자와 작은 쇼핑백이 내밀렸다. 청우는 그걸 건네받은 뒤에 걸음을 뗐다.

이서의 은근한 시선이 계속해서 느껴졌다. 견디지 못하고 돌아보자 그가 눈을 얄밉게 접었다.

“나 선물 언제 줄 거야?”

매대 앞에서 주기가 그래서 조금 걷고 난 뒤에 바로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물으니 괜히 선물하기 머쓱해졌다. 청우는 머뭇거리다가 얼굴을 다소 굳힌 채로 이서의 품에 쇼핑백을 안겼다.

이서가 쾌활한 웃음을 터뜨리며 쇼핑백을 받았다. 그는 고개를 숙여 이마로 청우의 어깨를 툭 친 뒤에 말했다.

“고마워.”

이상하게 아릿하게 느껴지는 어깨를 어루만지며 청우는 짐짓 무뚝뚝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별것 아닌데 고맙다는 인사를 들으니 민망해졌다.

“네 생일은 언제야?”

“6월. 지났어.”

“흠, 아쉽네. 생일엔 누구랑 보냈어?”

“동기들이랑.”

“웬일로 산영이가 아니네?”

“……아르바이트하니까.”

타박을 주지 않는 이서를 흘금 보았다. 내년에는……. 내년 생일에는 누구와 함께 있게 될까. 생일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아 남이 챙겨 주지 않으면 스스로 챙겨 본 적 없었다. 하지만 보통 연인끼리는 생일날 같이 보낸다. 그렇다면 우리는…….

“해 진다.”

이서의 목소리에 청우는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하늘을 품은 바다가 석양빛에 물들고 있었다. 어느새 발밑으로 모래가 밟혔다. 파도 소리가 가슴까지 들이쳤다. 철썩, 때리고 울컥 올라오는 무언가에 청우는 애꿎은 마른침만 삼켰다.

“좀 앉을까?”

이서가 모래사장 위에 털썩 앉았다. 햇빛이 옅어져 어두워진 그의 머리칼을 내려다보다가 옆에 앉자 그가 쇼핑백에서 상자를 꺼내 내밀었다.

“나 이거 해 줘.”

“지금?”

“응. 생일 선물은 바로 개시해야지.”

상자의 뚜껑을 열자 조금 전 자신이 직접 골랐던 귀걸이가 모습을 보였다. 청우는 바늘을 보고는 미간을 찡그렸다.

“나 이런 거 해 본 적 없어.”

“그냥 찔러 넣기만 하면 돼. 끝에 있는 거 돌려서 빼고, 끼고 나서 다시 꽂으면 끝.”

이서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틀었다. 청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서의 귓바퀴를 손끝으로 살짝 잡았다. 바늘 끝에 달린 볼을 천천히 돌리는데 이서의 시선이 느껴졌다. 얼굴이 가깝다 보니 제 숨이 그에게 닿을까 봐 의식적으로 호흡을 작게 할 수밖에 없었다.

볼을 돌리는 짧은 시간이 한없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마음은 어쩐지 조급해졌다. 드디어 볼을 빼낸 뒤에 까만 귀걸이를 잡아 뺐다. 바늘이 빠지는 느낌에 왠지 소름이 돋았다. 이서가 내민 손에 귀걸이를 놓은 뒤 새 귀걸이를 꺼냈다.

빈자리에 아주 작은 구멍이 보였다. 이서가 눈을 깜빡이자 그의 속눈썹이 의식되었다. 청우는 고집스레 구멍에만 시선을 두었다. 혀 밑으로 고이는 타액을 삼킬 수도 없었다.

귀걸이의 바늘을 구멍에 조준한 뒤, 천천히 밀어 넣었다. 이상하게도 손끝이 저릿했다. 제 얼굴을 훑는 이서의 시선이 집요하게 느껴졌다. 귀걸이가 끝까지 들어가며 이서의 귀에 토성이 자리 잡았다. 한시름을 놓은 듯 후련해졌다. 뒤이어 볼을 바늘 끝에 꽂고 돌렸다. 손끝으로 볼을 굴리다가 저도 모르게 이서를 흘긋 보는 바람에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동자가 오늘따라 깊어 보였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는 이서에 비해 청우의 눈꺼풀은 내리감을 줄 모르는 듯 자리를 지켰다. 치켜뜬 이서의 눈이 이내 아래로 향했다. 그 끝이 더듬고 있는 곳은 아무래도 입술인 듯했다.

청우는 떨듯이 입술을 살짝 벌렸다가 꾹 다물었다. 황급해진 손끝이 볼을 빠르게 돌렸다. 마침내 끝에 닿았을 때, 서둘러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이서의 내리뜬 눈이 들렸다.

이서는 그저 자신을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맞닿은 시선이 자신을 빨아들였다. 들이친 파도가 다시 한번 철썩, 소리를 울렸을 때 청우는 시선을 피했다.

“고마워.”

낮아진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청우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다로 눈길을 던졌다. 이서의 고개도 함께 그쪽으로 향했다.

어느새 더 떨어진 태양이 보다 짙은 색을 흩뿌렸다. 어두워진 바닷물은 끊임없이 일렁였다. 청우는 손을 들어 손등으로 입술을 꾹 눌렀다. 그렇지 않으면 무언가가 튀어나올 것 같아서.

강의실에 들어서 산영을 보고 나서야 청우는 그날 안부를 묻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술에 취해 잠든 그를 건의 손에 맡기고는 어떻게 그냥 잊고 만 걸까. 물론 건이 그에게 해코지를 하지는 않겠지만 놀랐을 수도 있다.

산영의 어깨를 쥔 뒤에 자리에 앉았다. 그는 다행히도 웃는 얼굴로 청우를 맞았다.

“그날 잘 들어갔어?”

“응. 일어나 보니까 건이네 집이라 조금 놀랐어. 건이가 나 데리러 온 거야?”

“어. 너네 집 앞에서 만났어. 너한테 묻지도 않고 차건한테 보내 줬는데, 미안하다.”

“아니야. 나 데려다줘서 고마웠어.”

“그래……. 그날은 왜 그런 거야? 뭐 심각한 일이야?”

다행히 지금은 화해한 모양이니 심각한 일은 아니었던 듯하지만. 산영은 고개를 저으며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다.

건이 예전에 약혼 이야기가 오간 여성을 만나려고 했다는 것, 약속 장소에 가 보니 건이 혼자 앉아 있었다는 것, 싸우고 나서 동창회에 참석해 술을 마셨다는 것, 알고 보니 여자와 약속은 했으나 취소하고 혼자 있다가 자신을 향해 거짓말을 했다는 것……. 들을수록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어쨌든 친구가 좋아하는 연인의 흉을 볼 수는 없어 주먹만 쥐었다가 폈다.

“근데 있지. 건이가 좀 이상해.”

“걘 원래……. 아니, 왜?”

“기억을 잃기 전의 자기를 질투하는 것 같아.”

“뭐?”

“내가……. 빨리 예전의 건이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화나서 말했거든. 그 말에 상처를 받았나 봐. 걔는 잊고 자기랑 다 새롭게 해 보자고 하는 거야. 나한테는 둘 다 똑같은 건이인데……. 기억을 잃으면 원래 다 그런 걸까?”

별……. 고개를 갸웃하는 산영을 보며 청우는 한숨을 삼켰다. 돌이켜 보면 이서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둘 사이는 둘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어쨌든 산영이 좋다 하면 그만이었다.

“아무튼 고마워, 청우야. 그날 난 네 얼굴은 제대로 보지도 못했네. 오늘 내가 점심 쏠게!”

“아니…….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말만으로도 고맙다.”

“그래? 그럼 다음에 시간 될 때 말해 줘.”

“……응.”

사실 약속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산영과 떨어져야 함을 느껴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했다. 그간은 산영에게서 멀어지려는 노력은 하지도 않아 놓고 꺼지지 않는 제 마음에 대해 불평만 했다. 자초한 고통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연민하는 짓은 이제 그만해야 했다. 이서의 말처럼.

그리고 자신은 이서와 잠자리를 가졌다. 몸은 다른 사람과 나누고서 마음은 산영에게 있다며 애달파 하는 일은 모두에 대한 기망이었다.

이제 길이 잡히는 기분이었다. 바보같이 자신을 미로에 가둬 똑같은 곳을 맴도는 짓은 더는 하지 않으리라. 청우는 씁쓸한 맛을 삼키고 미소를 지었다.

강의가 끝나고 나서 산영과 함께 문밖으로 나온 청우는 덩치 큰 남자에게 길을 막혔다. 건이었다. 건이 청우를 매섭게 노려보며 산영의 손목을 잡아당겨 제 쪽으로 끌었다.

“어, 건아! 언제 왔어?”

“조금 전에. 가자.”

“응. 아, 청우야. 잘 가!”

건의 손에 이끌려 인사하는 산영을 향해 손을 흔든 청우는 가벼운 숨을 내쉬었다. 쓴맛은 여전했으나 따라오는 통증은 없었다.

청우는 멈춰 선 차에 올라탔다. 이서가 청우를 향해 눈을 찡긋하며 인사했다.

오늘은 교양 강의의 과제를 하는 날이었다. 이서가 독립 서점의 주인을 섭외하여 저녁에 인터뷰하기로 했다. 서점은 성남에 자리하고 있었기에 차를 타고 꽤 가야 했다.

“오늘 왜 이렇게 예쁘게 입고 왔어?”

장난기가 그득한 목소리에 청우는 제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오늘은 평소 입는 점퍼 대신 코트를 걸치고 안에는 셔츠를 입었다. 확실히 나오기 전에 신경을 쓰기는 했다.

“네가 맨날 뭐라고 하잖아.”

“뭐?”

이서가 청우를 흘긋 돌아보더니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한참을 웃고 나서 눈물을 닦는 시늉을 했다.

“이럴 땐 나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예쁘게 입었다고 해야지.”

“이렇게 입으면 너한테 잘 보이냐?”

“아니. 넌 뭘 입든 잘생겼잖아.”

청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떻게 저런 말을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자 이서가 또 웃음을 흘렸다.

“왜. 나한테 이런 말 처음 듣는 것도 아닐 텐데.”

“잘생긴 건 네가……. 아니다.”

“어? 나 잘생겼어?”

이서가 전혀 모르겠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누구보다 자기 외모에 대해 잘 알고 있을 놈이 저런 말을 하니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청우는 굳이 답하지 않았다.

“실은 귀걸이 바꾸고 나서 잘생겼다는 얘기 많이 들어.”

“…….”

“귀걸이 때문인가 봐. 그치.”

청우는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쩜 저렇게 사람 민망하게 하는 말만 골라서 하는지 몰랐다. 물론 의도된 것이겠지만.

실없는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성남에 도착했다. 서점은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꽤 인기를 얻은 가게들이 늘어선 거리에 자리하고 있었다. 요즘 독립 서점들은 특이한 콘셉트나 인테리어로 승부를 본다더니, 꼭 동화에서나 나올 것처럼 외관이 아기자기했다.

인터뷰 때문인지 안은 밝았으나 문 앞에 ‘CLOSED’라는 표지판이 걸려 있었다. 둘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도 외관만큼 잘 꾸며져 눈길을 끌었다. 안에서는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오늘 인터뷰 약속 잡았던…….”

서점 주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청우는 그의 얼굴을 보고 주춤했다. 아는 얼굴이었다. 순간 흐릿하게 떠오른 기억을 상기할 때, 주인 또한 청우를 알아본 건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청우?”

“어……. 서현 선배?”

“청우 맞구나? 야, 반갑다!”

서현이 가까이 다가와 청우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옆에 선 이서가 둘을 번갈아 보더니 물었다.

“아는 사이야?”

“어, 나 중학교 때……. 도서부 선배.”

“아아.”

이서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현은 청우가 정말 반가운지 눈을 반짝이며 그를 요모조모 살폈다.

“어떻게 여기서 봐? 진짜 신기하다.”

“그러게요. 선배가 이 서점 하는 줄 몰랐어요.”

“너 그럼 대한대 다니는 거야?”

“네.”

“우와. 잘 컸다, 이청우.”

옆구리를 찌르는 손길에 돌아보자 이서가 시큰둥한 얼굴을 한 채 연신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러다 서현이 이서에게 눈길을 주자 금방 미소를 걸치고선 말했다.

“회포 푸는 건 이쯤 하시고, 저희 구경 좀 시켜 주세요.”

“앗, 그럴까요?”

서현이 서점을 소개하는 걸 들으며 청우는 내부 사진을 찍었다. 도서부 시절에도 꼼꼼하고 야무졌던 서현의 성정이 곳곳에서 묻어났다.

구경을 마치고 나서 둘은 서현의 안내에 따라 마련된 테이블에 앉았다. 서현이 차를 타 오겠다고 하며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무슨 사이?”

그가 사라지자마자 이서가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무슨 사이라니? 이미 답한 질문이 아닌가. 의중을 알 수 없는 물음이라 청우는 잠시 시간을 두었다가 답했다.

“그냥 선배.”

“흐음.”

의미심장한 반응에 청우는 이서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며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곧 서현이 차를 가지고 나왔다. 유자 껍질이 가라앉은 노란 차가 상큼한 향을 풍겼다.

“너 유자차 좋아했지?”

“기억력이 좋으신가 봐요. 중학교 때 취향을 다 기억하시고.”

“아, 네. 다른 애들 매점에서 콜라 마실 때 혼자 유자 음료수 마시던 게 특이해서 기억에 남았나 봐요.”

“아하. 여전히 상큼한 걸 좋아하긴 해요.”

이서의 태도가 미묘하게 느껴졌다. 평소와는 다른 것 같은데 정확히 콕 짚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는지라 더 신경이 쓰였다. 청우는 이서를 흘깃거리다가 서현의 권유에 유자차를 한 모금 마셨다. 상큼하고 달콤하면서도 희미하게 씁쓸한 맛이 혀끝을 감쌌다.

“서점이 너무 예뻐요. 직접 다 꾸미신 거죠?”

“네. 부끄럽지만 인테리어 할 때 소재 하나하나 다 제가 골랐어요. 그래서 그런지 정이 많이 가요.”

“그러게요. 저라면 여기서 종일 있고 싶을 것 같아요.”

“아하하, 그래도 퇴근은 항상 기다려요.”

“하긴 퇴근 싫어하는 사람이 있나요. 아까 도서부라고 하셨는데,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하셨나 봐요.”

“네. 막연하게 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 했어요. 편집자라든지, 책 표지를 디자인한다든지요. 근데 이렇게 서점을 차리게 됐네요.”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청우는 물꼬를 튼 이야기가 자연스레 인터뷰 형식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얼른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자 이서에게서 웃음기를 담은 시선이 흘러왔다.

서현은 요즘 서점은 그저 평범하기만 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콘셉트를 고민했다고 한다. 책뿐만 아니라 사람 만나는 일을 좋아했기에 손님들의 이야기를 듣고 책을 추천해 주는 시스템을 운영하게 되었다고. 서현의 이야기를 들으며 청우는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꼈다. 어릴 적 인연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건 생각보다 기쁜 일이었다.

인터뷰하던 중 잠시 정적이 흘렀을 때, 서현의 시선이 내용을 정리하는 청우에게 가닿았다. 서현이 웃음기 어린 얼굴로 청우의 수첩을 내려다보았다.

“넌 글씨도 어릴 때랑 똑같네.”

“아, 그래요?”

“응. 그때는 어른 글씨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도 그래.”

청우는 제가 쓴 글자를 내려다보았다. 어릴 적 아버지의 글씨가 멋있어 보여 따라 하다 보니 비슷해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이서도 글씨를 잘 쓰는 편이었다. 정자正字라는 말이 딱 어울렸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이서에게 시선을 주는데, 이쪽을 보고 있었는지 눈이 마주쳤다. 묘한 웃음기가 담긴 눈.

자꾸 왜 저러는 거지? 속 시원하게 물어보고 싶었으나 서현의 앞이라 그럴 수도 없었다.

다시 주제로 돌아가 인터뷰에 집중했다. 서현은 답변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고 고심해서 내놓았다. 일에 대한 열정을 고스란히 내보였고, 말할 때마다 밝은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 생각해 보면 중학생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그때도 늘 밝게 웃는 얼굴로 성실하게 일해 사서 선생님과 부원들의 신임을 받았다. 제게도 불편한 것이나 어려운 게 없는지 물으며 늘 살피고 챙겨 주었다.

그 시기가 떠오르자 자연스레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어려운 게 그다지 없었던 시절. 부정보다는 긍정이 앞섰고, 작은 것에도 즐거웠던 날들.

어릴 때를 한창 회상하는데 손끝에 무언가가 닿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테이블 밑으로 이서가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서현에게 보일 리는 없겠지만 순간 그의 눈치를 살피고 나서 이서의 얼굴을 보았다. 이서는 그저 태연했다. 결국 손가락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굳은 채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얘기해 주신 내용이 너무 알차서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요.”

“그럼 다행이구요.”

“마지막으로 저희 둘한테 추천해 주실 책이 있을까요?”

“음……. 이미지만 보고 어울리는 책을 추천해 드릴게요.”

서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으로 향했다. 청우는 그제야 잡혀 있던 손을 빼내 다 식은 유자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서의 시선이 제게 따라붙어서 잔 너머로 그를 흘금 보았다.

“음, 이거랑……. 이거! 이 두 권이 좋을 것 같아요.”

서현은 청우와 이서에게 각각 책 한 권씩을 건네주었다. 두 권 다 읽어 본 적 없는 책이었다.

“이건 선물이에요.”

“고맙습니다. 잘 읽을게요.”

“네, 이제 끝인가요?”

“네. 오늘 협조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를 따라 청우도 고개를 떨궜고, 인사를 끝내자마자 서현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청우야, 번호 좀 줄래?”

“아, 네.”

“가끔 보자. 나 도서부에서 아직 연락하는 애들도 있어.”

“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뭘.”

인사를 나누고 나오자 어느덧 두 시간이 지나 있었다. 깜깜해지자 세련된 거리가 저마다의 빛으로 자신을 장식했다. 가방에 책을 주섬주섬 넣는데, 이서가 손끝으로 책을 가리켰다.

“그 책 무슨 내용인지 알아?”

“아니.”

“학창 시절 첫사랑에 대해 회상하는 이야기.”

“이거 읽어 봤어? 너 진짜 아는 거 많다.”

순수한 감탄에 이서가 어쩐지 떨떠름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얘 오늘 이상하네. 청우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다가 눈가를 찡그렸다.

“뭐 불편한 거 있어?”

“응?”

“너 오늘 좀 이상해서.”

차를 멀찍이 떨어진 곳에 주차한지라 조금 걸어야 했다. 걷는 동안 이서는 말을 고르는 것처럼 보였다. 이서가 입을 열었을 때는 청우의 궁금증이 극에 달했을 때였다.

“첫사랑이야?”

“뭐?”

“산영이가 아니라 서현 씨가 네 첫사랑이었냐고.”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소리에 청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혼자서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었나 보다. 뭘 봐서 그런 가정을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소리야. 선배는 그냥 선배야.”

“그래?”

이서가 시큰둥하게 반응하며 운전석에 올라탔다. 청우는 헛웃음을 흘리며 차창 너머로 이서를 빤히 바라보다가 그의 뒤를 따라 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반응이라 그의 표정을 살피는데, 이서가 입을 뗐다.

“좀 비슷한 결이지 않아?”

“뭐가.”

“산영이랑 서현 씨.”

산영과 서현이 비슷하다는 생각은 그리 들지 않았다. 그보다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의문이 들 뿐이었다. 산영을 좋아하는 자신에 대한 어떤 타박일까?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초점이 서현에게 더 맞춰져 있는 것 같았다.

“혹하지 않았어? 네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잖아. 착하고, 밝고.”

어처구니가 없어 화가 나지도 않았다. 룸 미러를 조정하는 얼굴이 평소보다 뚱해 보였다. 그 얼굴을 보자 번뜩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너…….”

“응?”

“아니다.”

“왜. 말을 왜 하다 말아.”

청우는 입술을 달싹였다.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묻고 싶었다. 궁금한 마음이 이성을 앞섰다.

“너, 뭐, 질투하냐?”

“……뭐어?”

이서의 낯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그제야 청우는 실수했다 싶어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들어 버린 그의 기억을 지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내 이서가 보란 듯이 활짝 웃었다.

“내가? 서현 씨를?”

“아니.”

“왜 그렇게 생각했어? 내가 질투했으면 좋겠어?”

“하…….”

청우의 귀가 순식간에 달아올라 붉어졌다. 아닌 건 아는데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솟구쳐서 물어봤을 뿐이다. 진심으로 질투한다고 여긴 건 아니고, 애인으로서 으레 하는 행동을 따라 하는 건가 싶어서…….

“질투할까?”

“적당히 해라.”

아니면 아닌 거지, 전혀 그럴 일 없다는 듯 구니까 기분이 좀 이상했다. 인상을 구기고 짜증 내자 이서가 웃는 눈으로 청우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돌연 그의 턱을 쥐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입술이 닿는 순간 청우는 눈을 감을 생각도 못 하고 움찔 굳었다. 그 탓에 자신을 응시하는 이서의 눈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혀가 들어옴과 동시에 이서의 눈이 가늘게 휘었다. 계속 마주하고 있을 자신이 없어 청우는 눈을 감아 버렸다.

그와의 키스는 기분이 좋았다. 왜 갑자기 하는 건지는 몰랐지만, 청우는 적극적으로 그의 혀에 제 혀를 휘감았다. 고요했던 차 안이 젖은 소리로 가득 찼다. 혀끝이 비벼질수록 몸이 달궈졌다. 달짝지근한 향이 그와 제게서 동시에 났다. 유자차의 향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는 어쩐지 웃음이 났다.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새자 이서가 쥐고 있던 턱을 엄지로 지분거렸다. 둘은 입술을 맞문 채로 빨다가 고개를 물렸다.

“왜 웃었어?”

“그냥…….”

이서가 청우의 두 눈을 훑더니 콧등에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쪽, 하고 난 간지러운 소리에 청우는 괜스레 어깨를 움츠렸다. 키스하고 난 뒤에 밀려오는 달뜬 정적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이렇게……. 계속 스킨십을 하는 건가? 이서를 흘금 보았으나 그는 태연한 낯으로 출발했다.

문득 싱숭생숭해졌다. 이 관계가 끝이 나면 다시 친구로 돌아가면 될 테다. 그러면 그 끝은 어떻게 정하면 되는 걸까. 자신이 산영을 완전히 끊어 낼 때? 누군가와 연애라는 일을 하는 건 처음일 뿐만 아니라 둘의 관계가 특수했기에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서에게 물어보기는 어쩐지 망설여졌다.

그런 생각은 이서와 저녁을 먹는 중에 흐릿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청우는 기분 좋은 눈으로 야경을 담았다.

“고맙다.”

“뭘. 들어가서 푹 쉬어.”

“너도. 내용 정리한 거 보내 줄게.”

“응, 고마워. 들어가.”

차에서 내린 청우는 건물 입구에 다다라 불쑥 뒤를 돌아보았다. 차창이 닫혀 있어 이서가 안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한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방에 도착할 때까지 차가 떠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형, 형.”

가방에 짐을 넣는 청우에게 다가온 재석이 젤리 봉투를 내밀었다. 청우는 거기서 젤리 하나를 집어 입에 넣고는 가방을 멨다.

“형 공강이죠?”

“응.”

“같이 카페 가서 과제 하실래요? 영비평.”

청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과제는 혼자 집중해서 하는 편이었지만, 이번에는 의견을 나누면서 해도 좋을 것 같았다. 둘은 학교 근처에 있는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하, 요즘 너무 빡세지 않아요? 빨리 학기 끝났으면 좋겠어요.”

“그러냐. 난 졸업생 되기 싫어서 안 끝났으면 하는데.”

“아, 그것도 그러네요. 형은 휴학할 생각은 없어요?”

“응.”

바로 취직을 하는 것보다는 일 년 정도 쉬면서 이것저것 준비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휴학은 조금 부담스러웠다. 학비는 장학금으로, 생활비는 방학 때 아르바이트로 어느 정도 충당하고는 있다 해도 아직은 집안의 지원을 받고 있다 보니 쉬는 걸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이런저런 잡담을 하다가 이제 시작하자며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자료를 한창 찾는 중에 이서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뭐 하냐는 말에 카페에서 과제 중이라고 답하자 자신이 가도 되냐고 물었다. 후배와 같이 있다고 하니 안 불편하게 하겠다는 답이 와서 청우는 재석을 흘긋 보았다.

“야, 재석아.”

“네?”

“내 친구가 여기 오고 싶다는데……. 와도 괜찮아? 너 불편하면 안 된다고 할 테니까 편하게 말해.”

“아, 전 상관없어요.”

처음 만난 사람과도 곧잘 대화하는 재석의 흔쾌한 승낙에 청우는 이서에게 주소를 보냈다. 이서가 온다고 생각하자 왠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과제는 하지도 못하고 부산스레 주변만 만지작거리다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서를 발견했다.

이서는 오른손을 들어 대강 흔들고는 눈을 찡긋한 다음 바로 카운터로 향했다. 주문을 끝낸 뒤 이쪽으로 다가오는 이서의 손에 케이크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안녕하세요, 청우 후배분?”

“어, 안녕하세요.”

이서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케이크 하나를 재석 앞에 놓았다. 케이크와 이서를 번갈아 보는 재석의 입이 벌써 헤벌쭉해졌다.

“둘이 있는데 끼어들어서 미안해요.”

“어우, 아닙니다. 사람 많으면 재밌죠, 뭐.”

“고마워요.”

다른 케이크는 청우 앞에 놓였다. 이서가 청우의 어깨를 꽉 쥐었다가 떼며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정이서예요.”

“앗, 전 이재석입니다.”

“하던 거 해요. 나 방해 안 할게.”

“하하, 넵. 그럼, 이건 잘 먹겠습니다.”

재석이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리자 이서가 청우의 손에 포크를 쥐여 주었다. 하얀 아이싱 위에 레몬 조각이 꽂힌 레몬 파운드 케이크였다. 청우는 레몬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나 신 것만 좋아하는 건 아니야.”

“그래? 그럼 다른 거 뭐 좋아하는지 다 말해 줘.”

“아니……. 잘 먹을게. 고맙다.”

그냥 다른 취향도 있다고 이야기한 것뿐이었는데 투정하는 말처럼 들렸을까 봐 고개를 젓자, 이서가 테이블 밑으로 청우의 손등을 긁었다.

“왜, 말해 줘. 치즈 든 건 좋아해?”

“어……. 좋아하는 것까진 아니고. 넌?”

“난 좋아해, 와인이랑 같이 먹는 거. 이거 일단 빨리 먹어 봐.”

이서의 권유에 청우는 포크로 케이크를 베어 입에 넣었다. 상큼하면서도 달콤하고, 약간 퍽퍽한 듯하면서도 폭신한 식감이 좋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있던 포크를 건네자 이서가 케이크를 먹고선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주억였다.

키보드를 두드리던 재석이 이쪽을 흘긋 보았다. 이서는 포크를 내려놓고 청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자, 이제 과제 해. 방해 안 할게.”

“어.”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려 하던 일을 하다가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 옆을 보았다. 이서는 어느새 태블릿 PC를 손에 들고 뭔가를 읽고 있었다. 그도 할 일이 있으니 심심하지는 않을 테다. 청우는 그제야 마음 놓고 과제에 집중할 수 있었다.

케이크를 야금야금 먹으며 자료를 찾다가 적당한 것을 발견해 화면에 띄웠다. 과제 대상으로 적절한지 검토하고 있는데, 빤한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았다. 이서가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물었다.

“무슨 과제야?”

“방송 영상 비평. 기존 뉴스나 탐사 보도 같은 거 분석하고 비평하는 거야.”

“아…….”

사실 과제를 알았을 때부터 선정할 자료를 머릿속으로 대강 정해 놓았기에 고르는 데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재석이 노트북 위로 고개를 쭉 뺐다.

“형 뭐 할지 정했어요?”

“어. 김조연 앵커 거.”

“김조연 현역 때 뉴스면 꽤 옛날 아니에요? 최근 거 안 하고요?”

“내 롤 모델이라.”

청우는 쑥스러운 기색을 숨기고 말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왜?”

“어?”

“왜 롤 모델인데?”

이서를 돌아본 청우는 꽤 오래전의 일을 떠올렸다. 마을 전체에 천둥이 들이친 것 같았던, 그 불길한 공기와 소리를.

“나 어릴 때 잠깐 할머니 댁에 맡겨진 적이 있거든. 근데 어느 날 갑자기 비가 엄청 쏟아진 적이 있었어. 그런 폭우는 처음 봤던 것 같아. 시골이라 산이 바로 뒤에 있었는데 산사태가 일어난 거야. 다행이라면 다행히도 할머니 댁은 피해가 없었지만 다른 집이 피해를 봤고.”

그런 큰 재난은 처음 겪어 봤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놀러 갔던 다른 집들이 하루아침에 산의 토사물에 묻혀 버렸다.

“방송사에서 여럿 나왔는데, 거기 김조연 앵커도 있었어. 그때는 기자였지. 거기 상주하면서 마을 일도 돕고 어르신들 살피고……. 그러면서 가장 마지막에 철수하더라. 나중에 한 번 더 오기도 했어. 마을 재건이 잘 됐는지, 기부금 잘 쓰였는지 확인한다면서.”

자신들이 겪고 있는 재난에 관심을 가지고, 세상에 알리려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을 사람들은 큰 힘을 얻었다. 이웃 할머니의 손을 붙잡고 다정하게 인사하는 김조연 기자의 얼굴을 보면서 세상에 저렇게 멋있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기자가 되기로 한 거야? 그때부터?”

“어. 나도 저렇게 멋있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이렇게 진지하게 이야기를 꺼내 본 것은 거의 처음인 듯싶었다. 뒤통수를 긁적이는데, 이서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순간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근데 김조연, 루머 있지 않아요?”

이서의 낯빛을 살피기도 전에 끼어든 재석의 목소리에 청우가 고개를 돌렸다.

“뭐?”

“그 왜, 앵커 되고 나서 애 한 명 입양했었다면서요. 막 다큐도 찍고.”

“그게 뭐?”

“입양하고 나서 애 낳았잖아요. 근데 그 부부가 친아들 생기고 나서 자기 애만 챙기고 그 입양아는 막 학대했다고 그러던데. 그래서 울 아빠 그 여자 싫어해요.”

말 그대로 터무니없는 루머에 청우는 미간을 찡그렸다.

“루머가 왜 루머인데. 아버지한테 들었다 쳐도 네가 그 말 이렇게 전하는 건 아니지.”

재석이 찔끔하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가 그 이야기를 믿든 말든, 김조연 앵커가 자신의 롤 모델이라고 밝힌 상황에서 근거 없는 소문을 입에 담는 게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형.”

“괜찮아. 나한테 죄송할 일은 아니지.”

기분이 상하기는 했지만, 어차피 별생각 없이 내지른 말일 테니 물고 늘어져 봐야 소용없었다. 청우는 누그러진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가십에 사람들이 흥미를 느끼는 건 한편으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그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는 걸 잘 알았다. 제 앞에서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을 모욕하지만 않으면 됐다.

“저 화장실 좀…….”

재석이 마른 코를 훌쩍이며 일어났다. 자리를 뜨는 그의 뒷모습을 일별하고는 저녁을 사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과제에 집중하려고 할 때였다.

“넌 안 믿어?”

“어?”

“루머 말이야.”

“안 믿지.”

“왜?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그런 말도 있잖아.”

꺼진 열기에 불을 지피는 말에 청우는 어이가 없는 낯으로 이서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이서는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데.”

“뭐, 뜻이 있어서 하는 말은 아니야.”

“넌 그래서 저 루머를 믿는 거야?”

“믿고 말고 할 게 따로 있나? 별로 중요한 얘기도 아닌데.”

가벼운 가십을 대하는 투에 청우의 낯빛이 가라앉았다. 순간 실망감이 든 탓이다. 이서가 평소에 가볍기는 하지만 그건 그냥 말투나 언뜻 보이는 태도가 그럴 뿐, 생각은 깊다고 생각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냐는 말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상처를 받았을까.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서운한 일은, 자신이 롤 모델이라고 밝힌 대상에 대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청우는 일전에 그가 언론인은 딱 질색이라고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분명 그럴 만한 일이 있었겠지. 하지만 이해해 보려고 해도 서운함은 옅어지지 않았다. 단순히 김조연에 관해 그런 식으로 말한 것 때문이 아니라, 제가 그 말을 듣고 어떻게 느낄지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기에 그랬다.

“하, 여기 화장실 좋네요.”

재석이 돌아오면서 청우는 이서에게 더 말하지도 못하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 둘 사이가 단절된 느낌이 들었다. 이서는 대수롭지 않은 낯으로 다시 태블릿 PC를 들었다. 조금 전의 설전을 하나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과제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노트북 화면에 띄워진 영상 속에는 김조연 앵커가 있었다. 이서를 옆에 두고 계속하려니 손에 잡힐 리가 없었다. 한숨을 푹 내쉴 때, 이서가 태블릿 PC를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이제 가 볼게.”

“어?”

“일이 있어서. 과제 잘 하고, 다음에 봐.”

이서가 씩 웃으며 청우의 어깨를 툭 치고선 돌아섰다. 청우는 멍한 낯으로 멀어지는 이서의 뒷모습을 좇았다.

여기까지 왔으면 당연히 밥을 같이 먹거나 더 오래 있다 갈 줄 알았다. 자신을 피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일이 있어 그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서가 일찍 떠나 버리면서 청우의 기분은 완전히 가라앉았다.

그러나 큰일이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서가 했던 말은 사실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제 기분을 상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었으니 그의 말을 붙잡은 채 늘어질 수는 없었다. 그냥 생각이 안 맞았던 것뿐이다.

청우는 애써 털어 내려고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벌컥 들이켰다. 남은 케이크에 자연스레 시선이 갔다. 그래도 사 준 거니 다 먹어야겠지. 케이크를 입에 넣자 느껴지는 단맛이 입 안을 톡 쏘고 가는 듯했다.

어제 이서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 잠자리를 가진 후에 거의 매일 연락했기에, 그의 메시지가 오지 않는 밤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먼저 메시지를 보낼까 생각해 보았지만 그런 적이 없어 뭐라고 보내야 할지 망설여졌다. 그냥 친구들에게 하듯 하면 되는데도 왠지 어려웠다.

그렇게 고민하다 잠이 들어 아침이 왔고, 어느새 강의실 앞이었다. 오늘은 이서와 같은 강의를 듣는 날이었다.

강의실에 들어가자마자 청우는 제 친구들과 함께 앉아 있는 이서를 발견했다. 이서는 옆에 앉은 친구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방해하기가 좀 그래서 부르지 않고 뒷자리에 앉았다.

친구의 어깨 위에 팔을 얹은 채로 무언가를 말하는 이서의 표정이 다채로웠다. 웃을 때는 장난스러웠고, 진지할 때는 웃음기가 사그라들어 그의 이목구비가 조금 더 선명해졌다.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고 이야기하는 습관이나 장난스레 윙크하는 눈이 의식되었다.

나랑 이야기할 때도 저런 얼굴이지 않나. 청우는 무심코 생각했다가 미간을 찡그렸다. 당연히 저런 얼굴이겠지. 그러면서도 이서의 낯을 더 유심히 살피게 되었다. 한 자리 떨어져 앉은 이성 친구에게 말을 건넬 때는 표정이 조금 더 부드러운 듯도 싶었다.

청우는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꽤 먼 거리였는데도 마치 그 소리를 들은 것처럼 이서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일어나자 청우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서가 친구들에게 인사를 한 뒤 이쪽으로 다가왔다.

“왔는데 왜 말 안 했어.”

“친구들이랑 얘기 중이길래.”

“별로 중요한 얘기도 아니었는데.”

웃는 낯은 평소와 다른 점이 없었다. 다행이었다. 이서와는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의 차가운 시선을 받는 것은 한 번으로 족했으니까.

“오늘 강의 끝나고 뭐 해?”

“일정 없어. 왜. 데이트할까?”

“아니……. 우리 과제 정리하자고.”

“아아. 그거.”

데이트 얘기할 때는 눈을 반짝이더니 금세 심드렁해진 이서의 팔뚝을 툭 치자 그가 웃었다. 그러고는 책상 위에 엎드려 청우의 볼펜을 빼앗아 갔다.

“강의 듣기 싫어.”

투정을 부리더니 청우의 교재에 그림을 그린다. 선 몇 개가 거침없이 쭉쭉 그려졌다. 짧은 머리와 무표정한 얼굴. 어딘지 자신과 닮은 것 같은 그림을 내려다보자 그가 볼펜 끝으로 얼굴을 짚었다.

“너. 닮았지.”

“……너무 화난 것같이 보이는데.”

청우의 말에 이서가 그림 속 머리 위로 악마의 뿔을 그렸다. 청우는 미간을 찡그리고는 이서에게서 펜을 가져갔다. 제 얼굴 그림 옆으로 이서의 얼굴을 그리려고 했으나 생각보다 쉽게 되지 않았다. 얼굴형만 그리고 나서 머리카락을 그리려고 고개를 들자, 이서가 실컷 그리라는 듯 턱을 괸 채 머리를 이쪽으로 돌려 주었다.

그가 눈을 뜨고 있을 때 이렇게 가까이서 유심히 살핀 적은 처음인 듯했다. 눈썹 위쪽 작은 점과 눈을 감았다가 뜰 때면 드러나는 옅은 선이 시선을 끌었다. 그의 눈가에 집중하다 보니 그가 자신의 이목구비 중 어디를 훑고 있는지 느낄 수밖에 없었다. 시선이 입술로 향했을 때는 저도 모르게 혀를 꺼내어 입술을 핥으려다가 겨우 참았다.

계속 마주하고 있자니 낯이 뜨거워지는 듯해 고개를 숙이고 그림을 그리는 데 열중했다. 마지막으로 입술까지 그리고 나서 펜을 뗐다. 이서가 그린 그림 옆에 있다 보니 실력이 비교되었다.

“내가 이렇게 못생겼어?”

“……그건 아닌데 조금 닮긴 했잖아.”

“하아, 충격이다. 더 예쁘게 꾸며야겠어.”

그렇게 이상한가? 청우는 제가 그린 그림을 진지하게 내려다보았다. 이서의 그림에 비하면 형편없기는 하지만……. 닮게 그리려고 많이 노력했다. 예를 들면 퍽 귀엽게 올라간 입꼬리나 가늘게 웃는 눈 같은 것.

이서가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 액정으로 제 얼굴을 들여다봤다. 제 그림을 놀리려는 기색이 다분해 반응하지 않았다. 곧 교수가 들어오면서 낙서가 그려진 장을 덮었다.

강의를 듣는 동안 이서는 종종 딴짓을 했지만 청우를 방해하지는 않았다. 그가 장난을 치면 어울려 주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강의는 그대로 끝이 났다.

둘은 짐을 챙겨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비슷한 시간에 강의가 끝난 다른 강의실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왔다. 특정 학과 사람들이 모여 있는지 유난히 복도에 사람이 많아 어깨를 좁혀야 했다. 제 옆의 이서를 위해 조금 더 가장자리 쪽으로 걸음을 뗄 때였다. 누군가가 이서와 어깨가 부딪히면서 무언가를 떨어뜨렸다.

이서가 바닥에 떨어진 막대 사탕을 주울 때, 청우는 상대방을 보고 숨을 들이켰다. 머리카락의 끝만 밝게 염색하고 눈썹에 피어싱한 여자. 여자가 이서를 확인하고는 미간을 찡그렸다.

사탕을 주워 건네는 이서는 여자의 얼굴을 보았음에도 평온했다. 사탕을 가져가기를 기다리는 태연한 기색에 여자가 씹어뱉듯이 일갈했다.

“버려.”

여자가 더 말도 섞기 싫다는 듯 이서를 휙 지나쳤다. 이서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사탕을 창턱 위에 올려놓았다. 그의 반응이 너무도 평온한 나머지 청우는 저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누구야?”

“몰라. 화가 많이 나셨네.”

이서가 심상하게 대답하고는 걸음을 뗐다. 청우는 멍한 눈으로 이서의 뒤를 좇다가 그를 따라갔다.

모른다고? 정말 모른다는 뜻일까, 아니면 비꼬려는 의도일까. 전자라면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설령 전 연인이었던 사이가 아니더라도 여자는 그의 이름까지 알고 있었다.

그의 대답 하나로 기분이 들쑤셔졌다. 단순히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지나간 인연을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는 반응이 이상하게 신경 쓰였다. 안 좋게 끝난 인연이면 당연히 그럴 수 있다. 제 친구 중에서도 전 연인만 생각하면 이를 갈거나 아예 없는 사람처럼 취급하는 놈들이 꽤 됐다. 그런데도 어쩐지 이서에게 거리감이 느껴졌다. 왜일까.

“뭣 좀 먹고 할까?”

“어…….”

“뭐 먹고 싶어?”

“…….”

“뭐 먹고 싶냐니까요.”

“아.”

뒤늦게 대답을 하려는데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석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그가 이서와 청우를 향해 인사했다.

“두 분 어디 가세요?”

“밥 먹으러 갈 건데, 같이 갈래요?”

“아뇨, 저 약속이 있어서. 아, 청우 형. 형 말 듣고 저도 김조연 뉴스 찾아봤는데 좋은 게 많더라고요.”

김조연 이야기에 청우는 이서를 흘깃 보았다가 눈이 마주쳤다. 아무래도 어제 그 일 이후로 불편한 화제가 되어 버린지라 청우의 입가가 설핏 굳었다.

“저도 그 뉴스 중에 하나 골라서…….”

“어, 맘대로 해.”

“형이랑 똑같은 건 안 할게요!”

어서 이 화제를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청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재석이 희희낙락하며 둘에게 인사를 하고 떠났다.

정적이 남자 다시 그 여자와 이서가 부딪히던 순간이 떠올랐다. 자신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정말 별일 아니었다. 이렇게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사건.

“뭐 먹고 싶은 거 생각났어?”

“어, 아직. 넌 없어?”

이서의 걸음이 멎었다. 청우도 자연스레 멈춰서 그를 돌아보았다. 그가 청우를 빤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옆으로 한 번 까딱했다.

“그냥 과제 다음에 하자.”

“어?”

“청우야. 다음에는 기분 풀고 와?”

이서가 한 걸음 다가와 손을 뻗었다. 손끝으로 청우의 뺨을 톡, 가볍게 두드렸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잠시 굳어 있던 청우는 이서의 눈을 마주하고 미간을 구겼다.

언뜻 웃는 듯하지만 차가운 시선이 저를 꿰뚫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잘못 알고 있었다. 어제 일은 그냥 넘겼다. 지난 일 때문에 기분이 안 좋은 것이 아니라…….

청우는 제 뺨에 아직도 닿아 있는 이서의 손을 밀어 냈다. 이서가 밀려난 제 손을 보고선 눈썹을 까딱했다.

“먼저 간다.”

이서가 저렇게 자신을 보면 어찌할 줄을 모르겠다.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느라 얼타고 있던 것은 맞지만, 그게 이렇게 정 없이 굴 일인가?

성큼성큼 걷던 청우는 이내 멈춰서 한숨을 푹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 애새끼도 아니고 자신이야말로 이렇게 굴 일일까. 그에게 어리광이라도 부리고 싶었던 걸까? 제 태도가 이서에게 부정적으로 비쳐졌다면 그가 자신을 이해해 줄 의무는 없었다.

지금의 자신이 낯설게 느껴졌다. 청우는 입술을 꾹 닫았다가 떼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이서는 이미 가고 없었다. 흐르는 바람이 아주 쓰게 느껴졌다.

다시금 한숨이 나왔다. 연락을 해 보려고 핸드폰을 들었다가 주머니에 넣었다. 기분과 생각이 정리되지도 않았는데 그를 다시 보았다가 실수할 수도 있었다. 시간을 좀 둔 뒤에 사과를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답답한 마음에 머리칼을 거칠게 헤집고는 걸음을 옮겼다. 학교를 막 빠져나왔을 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혹시 이서일까 싶어 얼른 핸드폰을 꺼냈으나 발신인은 산영이었다. 밀려오는 실망감 또한 물선 감정이었다. 청우는 산영의 이름을 내려다보다가 느릿하게 전화를 받았다.

“어, 산영아.”

[청우야! 어디 가?]

“어? 아…….”

청우는 고개를 돌렸다가 산영이 카페 안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걸 발견했다.

“나 집에 가려고.”

[그럼 와서 음료수 마실래? 내가 만들어 줄게.]

“어, 나…….”

[신메뉴야. 맛있으니까 얼른 들어와!]

산영이 손을 휘젓고는 전화를 끊었다. 거절의 말을 채 내뱉지도 못한 청우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 산영이 분주하게 움직여 음료를 만들었다. 그의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꺼냈다. 단체 대화방에 쌓인 메시지를 확인하고 앨범에 들어갔다. 바다에 갔을 때 이서가 찍어 준 사진과 그와 함께 찍은 사진들이 있었다. 이서가 메시지로 보내 준 것인데, 당시에도 생각했지만 정말 잘 찍었다. 자신을 멋있게 찍어 주겠다며 모래사장에 무릎까지 꿇었으니, 못 나올 리가 없었다. 그에 비하면 제가 이서를 찍어 준 사진은 그의 실물을 다 담아내지 못했다.

사진을 비교해 보고 있을 때 산영이 음료를 들고 왔다. 빨리 마시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맞은편에 앉았다. 청우는 한산한 카페 안을 둘러보다 음료수를 한 모금 마셨다.

“맛 어때?”

“음, 맛있어.”

“달지 않아?”

“조금 달긴 한데 이 정도는 달아야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아?”

“응. 난 좀 더 단 게 좋지만 이건 이 정도가 딱이야. 이거 만드는 건 좀 힘든데 재밌다?”

산영이 신메뉴에 관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컵을 반쯤 비울 때였다. 그가 갑자기 손을 뻗어 청우의 이마를 만졌다. 청우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왜?”

“기분 안 좋아 보이는데 아픈 건가 싶어서.”

“……나 기분 안 좋아 보여?”

“응. 무슨 일 있었어?”

순간 멍해진 청우는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티 많이 나?”

“아니, 많이는 아니고 조금? 그냥 그런 것 같아서.”

산영이 이렇게 느낄 정도라면 눈치가 빠른 이서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딱히 기분이 안 좋다고 느끼지는 않았는데……. 애초에 왜 기분이 나빠진 거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에 청우는 한숨을 삼켰다.

“별일 아니야.”

“정말? 나 들어 줄 수 있는데.”

“괜찮아. 진짜 아무것도 아니어서.”

“그럼 맛있는 거 사 줄까? 기운 나게.”

“아……. 괜찮아. 나 좀 만날 사람이 있어서. 생각해 줘서 고맙다.”

반은 진심이고 반은 거짓말이었다.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서를 찾아가면 장난처럼 여겨질 수도 있으니 시간은 좀 두어야 할 테다. 그러나 정말 필요한 일이 아니면 산영과 단둘이 있는 시간은 피하고 싶었다. 그의 위로를 듣다가 참을 새도 없이 마음이 기울어 버리면 큰일이니까.

얼마 남지 않은 음료를 비우려는데 산영이 미묘한 낯으로 자신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의아해할 찰나 그가 곧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럼 다음에 먹자.”

“어, 나 이제 가 볼게. 이거 고마웠어.”

“응. 잘 가.”

자신을 배웅하는 산영에게 인사한 뒤 곧장 집으로 향했다. 연락은 오늘 해도 괜찮을까. 제 기분은 다 풀렸다. 그저 자신이 어이없을 뿐이다. 성숙하게 행동하자고 다짐하며 집 앞에 다다랐을 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혀엉…….]

다 죽어 가는 재석의 목소리에 청우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조금 전에 만났는데, 그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왜 그래.”

[형 저 일부러 입막음시키신 거죠? 제가 입방정 떨까 봐?]

“무슨 소리야.”

[그, 형 친구요. 하, 알았으면 친구분 앞에서 그런 말 안 했을 텐데.]

울먹거리듯 저 혼자 떠드는 재석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청우는 미간을 찡그린 채 핸드폰을 다른 손으로 고쳐 들었다.

“이재석. 처음부터 차근차근 말해 봐.”

[형 친구, 그 정이서 형이요. 김조연 아들 아니에요?]

“뭐?”

[아니 방금 김조연 기사 찾아보다가 김조연 아들 이름을 봤는데, 정이서라고……. 어? 형 아시는 거 아니었어요?]

뒤통수를 한 대 세게 맞은 듯 머리가 얼얼해졌다. 재석이 내뱉은 문장 속 정보를 얼기설기 조합해 보았다. 김조연이 입양한 아들의 이름이 정이서다. 그래서 재석은 그 정이서가 제 친구 정이서라고 생각했다.

[어어? 혹시 그냥 이름만 같은 사람이에요?]

“……글쎄. 동명이인 아닐까.”

[어후, 그럼 다행이고요. 형도 모르시는 거죠?]

“딱히……. 들은 건 없어.”

청우는 제가 들은 이서의 말을 떠올렸다. 언론인은 딱 질색이라던. 하필 김조연 얘기에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것 같냐던. 청우의 낯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제발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혹시 맞는다고 하시면……. 말씀 좀 잘 전해 주세요.]

“어……. 그래.”

재석과의 전화를 끊고 나서 청우는 심각한 낯으로 한참을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았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기에, 무언가 착각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머리를 덮쳤다. 하지만 이서와의 단편적인 경험이 재석의 가정이 맞는다고 가리키고 있었다. 머리가 무거워졌다. 입가를 쓸어내렸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집으로 들어가 책상 앞에 앉아 바로 노트북을 켰다. 검색창을 두고 잠시 망설이다가 ‘김조연 입양’이라고 입력했다. 핵심 내용 없이 키워드만 얻어걸려 뜬 기사들을 제치고 검색 범위를 과거로 설정하자 여러 개의 기사가 떴다. 그중 청우는 다큐멘터리의 캡처가 게재된 기사를 클릭했다.

「정이서(10)」

한 아이의 얼굴 밑으로 자막이 떠 있었다. 화질이 그다지 좋지 못했고 캡처 속 얼굴도 작게 나온 편이었다. 하지만 보다 보면 이서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슴이, 내려앉는 듯했다. 청우는 캡처 속 얼굴을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사실 기분이 안 좋아. 동생이 비 오는 날에 죽었거든.’

김조연 부부에게는 아들이 한 명 더 있었다. 친자였고, 병을 앓다 죽은 것으로 기억한다. 청우는 이마를 뻑뻑 문지르다가 동영상 사이트에 들어갔다. 오래된 영상이라 그런지 검색해도 나오는 것은 없었다.

해당 다큐멘터리는 지금은 종영된 프로그램이었다. 방송사 홈페이지로 들어가 날짜에 맞춰 검색하자 뜨는 영상이 있었다. 청우는 영상 속 섬네일을 한참 바라보다가 재생 버튼을 눌렀다.

김조연이 뉴스를 분주하게 준비하는 모습으로 영상이 시작됐다. 다큐멘터리는 곧 공중파 주말 아홉 시 뉴스의 메인 앵커인 김조연과 사업가인 남편의 화목한 관계를 조명했다.

다소 진부한 서론이 지나간 이후 부부가 보육원을 방문하는 광경이 카메라에 담겼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부부의 뒷모습이 곧 다른 장면으로 바뀌었다. 보육원 안에는 혼자 의자에 앉은 아이가 있었다. PD가 다가가 아이에게 물었다.

[뭐 하고 있어요?]

[기다려요.]

[누구를 기다려요?]

[제 엄마랑 아빠가 되어 주실 분들…….]

아이는 인터뷰가 어색한 듯 PD와 카메라를 번갈아 힐금댔다. 긴장한 양 꼬물거리는 손이나 입술을 물었다가 놓는 행동이 가슴을 찌르는 듯해 청우는 영상을 정지했다.

만일 이들 부부가 어린 이서를 학대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서는 제 말에 어떤 상처를 입었을까. 저를 아프게 한 사람이 롤 모델이라던 말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저를 다치게 한 이가 누군가에게는 좋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어떻게 가닿았을까.

청우는 다큐멘터리가 방영된 이후에 펼쳐진 아이의 삶을 생각했다. 모두가 좋은 시선으로만 봐 주었을까. 입양된 뒤에 동생이 생겼을 때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아픈 가족을 두는 게 어떤 일인지는 누구보다 제가 잘 알았다. 동생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는…….

엄마와 아빠라고 부르는 것을 무척 어색해하는, 긴장한, 불편해하는 어린 이서를 보았다. 그리고 무장하듯 언제나 미소를 걸치고 있는 지금의 이서를 떠올렸다.

루머가 정말 헛소문일 수도 있겠지. 그런 루머를 하도 들어 진절머리가 난 나머지 그런 반응을 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진짜라면……. 청우는 고개를 숙여 손바닥에 눈을 묻었다.

어떤 쪽이든 이서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굳은살이 박여 무엇이 할퀴든 아랑곳하지 않는 게 아니라, 상처가 갈라진 자리에 새살이 돋은 것이었으면. 가끔 아프더라도 지워지지 않을 흔적은 남지 않기를. 자신이 그에게 상처 입힐 수 없기를.

청우는 한참을 가만히 앉아 생각에 잠겼다. 오직 이서만이 존재하는 생각이었다.

날이 점점 쌀쌀해져 갔다. 청우는 패딩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오늘은 이서네 집에서 과제를 하기로 했다. 메시지만 나눈지라 그의 기분이 괜찮은지 알 수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십 년을 넘게 롤 모델로 삼은 사람이 알고 보니 이서의 어머니였고, 남다른 사정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심란하고 허무했다. 물론 인간에게는 여러 면이 있고 제게 좋은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나쁜 사람일 수 있다. 그건 자신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이서를 아프게 한 사람이라면 예전과 같은 눈으로 볼 수 없을 듯했다.

청우는 근처 카페에 들러 샌드위치와 커피를 주문했다. 간단하게 배를 채우면서 과제를 하면 딱 좋을 듯싶었다. 그러고 보니 이서 취향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없는 것 같았다. 주로 커피를 마시는 듯하지만, 다른 건 뭘 좋아하는지 더 알아봐야겠다.

오피스텔에 가까워져 괜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멀쩡한 옷을 입고 왔는데도 자꾸만 옷차림을 확인하게 되었다. 평소에는 깔끔하게만 입고 다니면 된다고 생각해서 옷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이서를 만날 때면 유독 신경이 쓰이곤 했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있었던 덕에 이서의 집까지 금방 도착했다. 노크를 하기도 전에 이서가 문을 열어 주었고, 웃는 얼굴을 보자 어쩐지 오랜만에 만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들어와. 뭘 사 왔어.”

“밥.”

“잘됐네, 마침 배고팠는데.”

바로 주방으로 가 식탁 앞에 앉았다. 이서가 접시를 꺼내 샌드위치를 담고서 각자의 앞에 놓았다.

“밖에 안 추웠어? 데리러 간다니까.”

“나 추위 잘 안 타.”

“그래? 그건 나랑 똑같네.”

“넌 더위도 잘 안 타는 것 같던데.”

“응. 부럽지.”

“좋겠다.”

청우는 더위를 타는 편이라 한여름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운동할 때도 적당히 선선한 날씨를 선호했다.

순순한 수긍에 이서가 웃으면서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그가 먹는 걸 잠시 지켜보다가 입을 뗐다.

“입에 맞아?”

“응. 맛있는데?”

“커피는. 아메리카노 말고 딴 것도 좋아해?”

“음, 딴 건 잘 안 마셔. 커피는 단 것보다 쓴 게 좋아.”

정보를 머릿속에 집어넣고 고개를 끄덕였다. 청우는 저를 보면서 씩 웃는 이서의 표정을 살폈다. 자신이 김조연 앵커 이야기를 했던 건 잊어버렸을까. 잊기 쉬운 이야기는 아니었을 테다.

다큐멘터리를 보았다고, 네가 김조연의 아들인 걸 알게 되었다고 말해야 할까. 자기가 말하지도 않은 사정을 누군가가 끄집어낸다면 기분 나쁘지 않을까. 애초에 말해 줄 생각이었다면 자신이 김조연을 언급했을 때 이야기해 줬을 테다. 그러나 다 알아 놓고 모른 척하는 것도 예의는 아닌 듯싶었다.

몇 입 먹고 나니 손이 비었다. 반면 이서는 크게 베어 물지만 씹는 것은 느려 샌드위치가 아직 남았다. 입에 부스러기 하나 묻히지 않고 깔끔하게 먹는 걸 지켜보며 청우는 생각을 이어 갔다.

어느 쪽으로든 결론이 쉽게 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거짓말을 하거나 알면서 모른 척을 하는 쪽은 영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막상 말을 꺼내자니 어떻게 말해야 할지, 그가 상처받지 않게 하려면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아, 곧 있으면 우리 예술제 하잖아.”

“어.”

“보러 와.”

“너 뭐 해?”

대한대학교 추계 예술제는 사흘간 열리며 각 학과와 동아리에서 준비한 공연이나 전시를 선보이는 행사였다. 이서는 이미 학과 연극 동아리에 속해 있는데, 중앙 동아리도 병행하고 있는 걸까.

“응, 첼로.”

“첼로? 너 첼로도 할 줄 알아?”

“그냥 취미야. 어릴 때 하다가 관두고 지금은 가끔 하는데, 오케스트라 동아리에서 급하게 땜빵 좀 해 달라고 해서.”

이서와 첼로라니. 영 연결이 되지 않는 조합이었다. 그래도 오케스트라 동아리에서 펑크 난 인력을 대체해 달라고 요청할 정도면 실력이 수준급인 듯했다.

“너 되게 잘하나 보다.”

“그 정도는 아니야. 그냥 인맥발이지, 뭐.”

“연습하느라 힘들겠네.”

“연주해 본 곡이라서 괜찮아. 아무튼 보러 와.”

“어, 꼭 갈게.”

“아, 이번엔 꽃 안 들고 와도 돼. 사람 많아서 정신없을 거야.”

이서의 눈이 테이블 한쪽에 놓인 화병으로 향했다. 꽃을 훑는 시선이 부드러웠다. 청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이서가 샌드위치를 다 먹자마자 가방에서 짐을 꺼냈다.

“좀 쉬었다 하자. 커피 다 마시고.”

이서가 커피를 들고 소파로 가 앉았다. 청우도 따라서 그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남는 시간이 생기자 또 고민이 틈을 파고들었다. 옆을 흘깃 보았다가 이서와 눈이 마주쳤다. 이서가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였다.

“왜 그래? 아까부터 힐끔힐끔.”

“……그냥.”

이서의 손가락이 다가와 청우의 뺨을 찔렀다. 쿡쿡 쑤시는 행동을 굳이 저지하지 않자 이서가 곧 묘한 낯으로 손가락을 거뒀다.

“오늘 왜 이렇게 눈치를 보지?”

“내가?”

“꼭 다큐 같은 거라도 보고 온 사람처럼.”

빈틈을 예리하게 찌르고 들어오는 말에 청우가 흠칫 굳었다. 이서의 낯빛을 살피자 그가 눈가를 찡그리며 웃었다.

“청우야. 내가 그 좆같은 눈 한두 번 보는 줄 알아?”

청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의 고민이 그에게 읽힌 모양이다. 한두 번이 아니라는 건 이런 일이 종종 있었다는 뜻이겠지. 제 망설임이 이서를 불쾌하게 했을 줄은 몰랐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일 때, 웃음을 거둔 이서의 낯에 빈정거리는 기색이 어렸다.

“대단하신 앵커님 조금이라도 흠집 날까 기분 엿같은 티 풀풀 풍길 때는 언제고. 왜. 그거 보고 나니까 내가 신경 쓰여?”

이서의 목소리에 잔뜩 날이 섰다. 이것이 마치 그의 역린이었던 것처럼, 이서는 평소와 같이 자신을 전혀 꾸미려 들지 않았다. 그는 상처 입기 전에 벽을 세우려는 양 마구 쏘아붙였다.

“동정이라도 해? 사람 아무렇지 않게 잘 살고 있는데 멋대로 짐작해서 안타깝게 보면 내가 좋아할 줄…….”

청우는 손을 뻗어 이서의 목덜미를 끌어당기고는 그의 이마에 제 이마를 부딪쳤다. 쿵, 꽤 큰 소리와 함께 머리통이 울렸다. 이서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면서 흥분의 빛이 조금 가라앉았다. 이마가 얼얼했지만 청우는 이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동정 안 했어. 내가 뭐라고 널 동정해.”

안타깝게 여긴 적은 없다. 그냥, 그냥 아팠을 뿐이다. 이게 동정일까? 청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모르겠다. 그냥 그가 아프지 않았으면 했고, 제 반응이 상처가 되지 않기를 바랐다.

“미안하다.”

“……뭐가.”

“네가 괜히 그러는 애도 아닌데, 네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생각도 안 하고 내 기분만 신경 써서.”

제 기분보다 이서에게 더 관심을 기울였으면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 테다. 실망이 아닌 의문을 가졌어야 했다. 제 눈앞에 있는 사람은 그이고, 함께 보낸 시간이 있으니까.

이서가 청우를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이내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내가 괜히 그러는 애가 아닌 건 어떻게 알아.”

“왜 모르냐. 내가 여태까지 본 게 있는데.”

“글쎄……. 날 너무 좋게 보는 거 아니야?”

“내가 봐 온 널 믿을 뿐이야.”

이서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그래도 진정이 좀 된 것 같아 천천히 이마를 뗐다. 이서의 이마가 붉었다. 너무 세게 부딪친 모양이다.

“야, 안 아프냐.”

“아파.”

“미안.”

이서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벅벅 문지르는데 그가 손을 뻗어 청우의 이마를 건드렸다. 청우 또한 이마가 붉게 번져 있었다. 뒤늦게 올라오는 통증에 청우는 미간을 찡그렸다. 너무 무식하게 갖다 박은 모양이다.

“하아…….”

이서가 숨을 터뜨리며 청우의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청우는 잠시 다리를 굳혔다가 편하게 몸을 늘어뜨렸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시선이 평온해서 안심이 되었다. 이서가 손을 뻗어 청우의 귓가를 매만졌다.

“네 후배가 말하는 학대, 뭐 이런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래?”

“응. 입양 이유가 난임 때문이라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는데, 기적같이 애가 들어섰으니 사람들 물어뜯기 좋은 가십이 된 거지. 그냥 그런 거야. 나한테 쏟아지던 모든 관심과 사랑이…….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 거지. 마법처럼.”

이서의 손끝이 허공에서 유려하게 흔들렸다. 동생이 태어나던 순간이 기점이 되었을 테다. 하지만 그의 말과는 달리 그것도 일종의 학대가 아닐까. 부모는 자식을 사랑할 의무가 있었다. 죄 없는 자식에게서 사랑을 거둬 가지 않을 책임이.

“걱정 마. 동생이 죽고 나서…….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으니까. 난 받을 수 있는 건 다 받으면서 자랐고, 덕분에 눈치 하나 안 보고 아주 멋대로 살았어. 봐.”

지금의 나를 보라는 듯 이서가 어깨를 으쓱였다. 문득 이서가 말한 짝사랑 상대가 그의 부모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하지만 묻지는 않았다. 그의 의연한 낯이 더 마음을 붙잡았다. 언젠가 그가 솔직한 아픔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가 되고 싶다는 욕심이 둥실 떠올라 청우는 입을 열었다.

“나 아픈 동생 있다고 한 거 기억해?”

“응.”

“어릴 때, 부모님이 집에 안 계실 때였어. 동생이 나한테 나가서 놀자고 하는데, 안 되는 건 알고 있지만 집에서 동생만 돌보고 있는 게 싫은 거야. 그래서 같이 나가서 놀다가……. 무리를 했는지 애가 쓰러지더라.”

놀이터에서 잘 놀다가 갑자기 픽 쓰러져 버린 청아를 보고 머리가 하얗게 번져 버렸다. 숨을 힉힉 들이켜며 청아의 몸을 흔들다가 울면서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동생에게 무슨 일이 생길 시 꼭 전화하라고 사 준 핸드폰이 아니었다면 빠르게 대처를 할 수 없었을 거다.

“난리가 났지. 부모님 오셔서 동생 병원에 데려가고, 난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이 났어. 그때 혼자 집을 지키면서 자야 했는데 동생이 그렇게 밉더라. 사실 누굴 미워할 일은 아닌데도 제일 약한 애를 골라서 미워하는 내가 부끄럽기도 하고.”

차마 부모님을 미워할 수가 없어서 동생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린 마음에 욱해서 한 생각이지만 옳은 일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럼 또 스스로를 탓하게 되는데, 이 악순환을 끊어 내기 위해 어린 날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한 것 같다.

“그러니까……. 너랑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생각은 했을지도 몰라. 너를 이해한다는 말은 주제넘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어쩐지 입술이 말랐다. 이서가 누구에게나 보여 주는 늘 웃는 얼굴 말고 다른 면도 알고 싶었다. 그에게 자신이 편한 상대였으면 했고, 이렇게 서로 기분이 상하는 일이 있어도 다시 매듭지을 수 있기를 원했다.

“비 올 때 필요하면 부를 사람은 됐으면 좋겠어.”

제 심정을 솔직하게 말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서가 정말로 자신을 부르지는 않더라도, 부를 사람이 있다는 사실 하나가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서를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이서는 말없이 청우를 한참이나 응시하다가 돌아누워 그의 배에 얼굴을 묻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움찔할 찰나 이서가 웅얼거렸다.

“이럴 땐 머리 쓰다듬어 주는 거야.”

이서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보이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 청우는 손을 들어 이서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푸슬푸슬 감기는 감촉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두피 안 아픈가. 그런 생각을 하다가 귓바퀴에 붙은 토성 귀걸이를 보았다. 남은 손으로 귀걸이를 툭 건드리자, 이서가 고개를 휙 돌렸다.

손끝을 움츠렸다. 이서가 장난스러운 낯으로 웃더니 일어났다. 티 없는 미소는 어쩐지 후련해 보였다.

“이제 하자.”

이서가 고개를 까딱이고는 방에서 노트북을 가져왔다. 청우도 노트북을 꺼내고 나서 부팅되는 걸 지켜보다가 입을 뗐다.

“야, 미안한데.”

“응?”

“나 전공 과제부터 좀 하면 안 될까?”

“전공? 급한 거야?”

“아니, 영상 비평 자료 다시 찾으려면 지금부터 좀 봐야 할 것 같아서.”

이미 정리해 놓은 김조연의 자료를 다 폐기하고 새로 하려면 시간이 걸릴 듯했다. 교양 과제는 정리해서 발표 준비만 하면 되기에 이서가 괜찮다고 하면 조금만 미루고 싶었다. 허락을 구하는 낯으로 돌아보자 이서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나 때문에 그래? 굳이 그럴 필요 있어? 과제는 과제고, 너한테 좋았던 사람이면 좋은 기억으로 남겨 둬.”

“싫어.”

“뭐야. 나 때문에 십몇 년을 존경해 온 사람을 팽 하겠다는 거야?”

“팽 하겠다는 게 아니라,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아. 이게 너보다 중요하다고 생각 안 해.”

자신이 봤던 김조연의 모습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래도록 존경했으니, 그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지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과제를 하면서 내내 이서를 떠올리게 될 텐데, 그를 조금이라도 아프게 한 사람과 그 사람의 뉴스를 순수하게 존중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너 진짜 고집 세다.”

이서가 툭 내던진 말에 청우가 미간을 구겼다. 이건 고집 문제가 아니라……. 부정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이서가 돌연 달려들어 입을 맞췄다.

“읏…….”

온몸을 부딪쳐 오는 힘에 뒤로 밀려났다. 이서가 청우의 목덜미를 받치고 혀를 깊숙이 넣어 입 안을 헤집었다. 봐주지 않고 돌진하는 키스에 청우는 틈새로 숨을 겨우 내쉬며 이서의 페이스에 맞추려고 노력했다. 머리가 소파에 닿았다. 누운 자세가 되자 이서의 손이 티셔츠를 들추고 들어왔다.

갑작스레 뜨거워지는 공기에 청우는 도리질을 치며 이서에게서 벗어났다. 반쯤 내리뜬 눈이 제 입술을 좇는 게 느껴져 청우는 손등으로 입가를 가렸다.

“야. 과제 해야지.”

“이따 해. 시간은 많잖아.”

“그래도…….”

“교양은 내가 책임질 테니까, 응?”

이서의 무릎이 청우의 사타구니로 파고들었다. 진득하게 문지르는 움직임에 다리 사이가 무거워졌다. 청우는 코끝에 희미하게 남은 커피 향을 느끼며 이서의 붉어진 입술을 보았다. 노골적인 신호를 보내며 자신을 훑는 눈에 저 역시 금방 고양되는 기분이었다.

할 게 많은데……. 제 허락을 기다리는 이서의 숨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그 소리가 이상하게 형태를 지니고 제 귓가를 간질이는 듯했다. 목덜미가 빳빳해졌으나 이번에는 두려움이나 긴장 때문이 아니었다. 겪어 본 쾌감에 대한 기대였다.

청우는 한숨을 삼키고 입술을 가리던 손을 뻗어 이서의 목덜미를 잡아당겼다. 키스하기 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는 낯이 얄밉게 느껴지지 않았다.

키스를 이어 가며 연신 성기를 문지르는 무릎 때문에 아래가 금방 단단해졌다. 힘을 잘못 조절하면 아프게 누를 수 있는데도 이서는 능숙하게 강약을 조절하며 무릎을 움직였다. 그 덕에 속옷이 답답해졌다. 고개를 젖히자 이서가 입술을 떼며 청우의 티셔츠를 들어 올렸다. 제 옷을 벗자마자 청우도 손을 뻗어 이서의 상의를 벗겼다.

드러난 맨몸을 보니 손을 대고 싶어졌다. 생각이 들자마자 손을 뻗어 이서의 가슴에 댄 청우는 제가 한 행동에 놀라 움찔하고 말았다. 눈을 슬쩍 들자 이서가 웃는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기다려 준다는 뜻 같아 손끝으로 살결을 쓸었다. 부드러우면서도 탄탄한 감촉이 좋았다.

조금 더 용기를 내어 그의 몸을 크게 쓸어내리자 이서가 고개를 숙여 청우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그가 몸 곳곳에 키스하는 동안 청우는 손끝으로 이서를 느꼈다. 단단한 뼈와 탄탄한 살결, 몸의 굴곡이 피부에 와닿자 흥분감이 더 뾰족하게 돋았다.

이서의 혀가 유두를 짓눌렀다. 돌기를 둥글게 핥는 움직임에 그 부근이 저릿해졌다. 청우는 탄성을 흘리며 이서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두피를 손끝으로 부드럽게 훑자 이서가 눈을 치떴다. 혀를 길게 내어 젖꼭지를 느릿하게 핥는 행동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흣.”

이서가 유두를 앞니로 꾹 깨물더니 이내 살을 핥고선 입술을 묻었다. 질근 물고 빨아들이는 느낌이 이상해 손끝이 절로 꿈틀했다. 그가 입술을 떼자 살에 붉은 흔적이 남았다. 이서가 그걸 만족스러운 낯으로 내려다보고는 다른 곳에 흔적을 남겼다. 청우가 연신 움칫거리자 이서는 그의 몸을 토닥이며 아래로 내려왔다.

바지 밴드에 손가락이 걸렸다. 청우가 엉덩이를 들자 이서가 그의 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벗겼다. 튕겨 나온 성기가 꼿꼿이 서 있었다. 이서의 손이 살 기둥을 위아래로 가볍게 훑었다. 그 손길에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기대감으로 고인 타액을 삼킬 때, 이서가 고개를 숙이더니 혀를 내어 귀두를 핥았다.

“야……!”

식겁해서 다리를 들썩였으나 이서가 청우의 몸을 꾹 누르고는 씩 웃었다. 그는 손으로 가지런한 음모를 매만지며 혀로 입꼬리를 핥았다.

“가만있어 봐. 좋은 거 해 줄게.”

“그건 좀, 별로야.”

“끝나고도 그렇게 말할 수 있으면……. 다신 안 하면 되잖아.”

이서의 눈이 가늘게 기울었다. 청우가 할 말을 잃고 입만 벙긋거릴 때 그가 다시 고개를 숙여 선단을 머금었다. 말캉한 입술이 부푼 성기를 문지르는 감각이 자극적이었다. 단번에 솟은 쾌감에 청우는 그를 말리지도 못하고 입술만 달싹거리다가 손끝을 말아 쥐었다.

입술이 부드럽게, 마치 뱀처럼 기어 내려와 성기를 중간까지 물었다. 안에서 꿈틀거리는 혀가 살 기둥을 훑었다. 입을 한껏 벌린 채 제 것을 머금은 이서를 차마 보지 못하고 청우는 눈을 돌렸다.

“아…….”

입술을 모아 약하게 쪽쪽 빨아들이는 행위에 등허리가 찌릿했다. 생각지도 못하게 너무 좋아서, 또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짓을 하고 있다는 게 낯부끄러워서 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별로라고 해 놓고 좋아하는 게 멋쩍어 신음을 참으려고 했으나 이서가 귀두를 쭉 빨 때는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흐, 아.”

이서는 한 손으로 입술이 닿지 않은 뿌리를 주무르고 음낭을 굴리며 능란하게 움직였다. 강하게 빨아들였다가 혀끝으로는 부드럽게 문대는 움직임에 성감이 이리저리 튀어 대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저도 모르게 허리를 들자 이서의 목구멍 앞까지 성기가 들어간 게 느껴졌다. 놀라서 몸을 빼려는 순간 이서가 청우의 허벅지를 붙들고 입술을 모았다. 목구멍이 조여지며 성기를 꽉 무는 순간 눈앞이 아찔해졌다. 헐떡이는 청우의 허벅지에 잔뜩 힘이 들어가 바들바들 떨렸다.

“야, 너무……. 흐으.”

이서가 고개를 숙였다가 들며 부푼 좆이 깊숙이 들어가고 빠지기를 반복했다. 축축하고 따뜻한 안이 성기를 꽉 물었다가 느슨하게 놓으며 노련하게 희롱했다. 이서의 머리카락 위에서 청우의 손가락이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꿈틀거렸다.

성기를 애무하는 부위가 달라졌을 뿐인데 이렇게 농도 짙은 자극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 이서와의 첫 경험이 다 너무 지나친 자극이 아닌지 걱정이 스칠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넘실대는 쾌감이 그만 잊어버리라며 몸을 뜨겁게 덮쳐 왔다.

혀끝이 쿠퍼액이 질질 흘러나오는 틈을 핥았다. 청우가 펄떡이면 이서의 손이 허벅지를 강하게 쥐었다. 그가 다시 고개를 깊숙이 숙인 뒤, 입술을 모으고선 힘을 주었다. 그 상태로 쉬지 않고 계속 빨아들이자, 급격히 찾아온 오르가슴이 배 속을 강타했다.

“아, 흡!”

숨이 턱 막히는 절정 속에서 청우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황급히 이서의 머리칼을 쥐고 제게서 떼어 냈다. 그 순간 성기에서 뿜어져 나온 정액이 이서의 얼굴에 튀며 후드득 떨어졌다.

“아야…….”

이서가 눈을 감은 채로 인상을 찡그리며 신음을 흘렸다. 청우는 정신없이 헐떡이며 손을 퍼뜩 떨어뜨렸다.

“자기야. 나 아프게 할래?”

그가 눈을 떴다. 콧등과 뺨을 가로지르는 흰 정액을 보자 얼굴이 달아올랐다. 청우는 손을 뻗어 이서의 얼굴에 묻은 것을 얼른 훔쳤다. 그러자 이서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청우의 낯을 훑었다.

“나한테 뭐 할 말 없어?”

별로라고 했던 주제에 완전히 느껴 버리고 말았다. 다음에 또 해 준다고 했을 때 만류할 자신이 없었다. 민망하기도 하고 이런 걸 꼭 짚고 넘어가는 게 얄밉기도 해서 애써 낯을 굳히는데, 사정의 여운으로 허벅지가 움찔움찔 떨렸다. 이서가 밑을 흘긋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좋았어?”

이서의 손끝이 허벅지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 손길에 순간 엉덩이가 조여들어서 청우는 퍽 당황하고 말았다.

“내가 아니었음 누가 알았을까? 너 이렇게 예쁘게 잘 느끼는 거.”

흥분이 어린 만족스러운 낯으로 이서는 바지 위로 윤곽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제 성기를 가볍게 훑었다.

“말해 봐. 내가 쑤셔 줬으면 좋겠지?”

상스러운 말에 청우가 미간을 구겼지만 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허벅지를 쓸어내렸다.

“다리 벌려. 너 지금 간지럽잖아.”

“…….”

“아직 안 잊었지?”

이서가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이듯 물었다. 제 몸의 반응을 훤히 꿰고 있는 말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날의 경험이 떠올랐다. 온몸으로 겪은 열기는 채 꺼지지 않은 불씨를 주워 세차게 지폈다.

청우는 속으로 욕설을 읊조리며 눈을 지그시 감고는 다리를 벌렸다. 머리 위로 숨이 섞인 웃음소리가 떨어졌다. 기대감과 부담감으로 배 속이 꼬이는 듯했다.

이서의 손가락이 다물린 입구를 훑었다. 청우는 한숨을 삼키며 눈을 떴다. 이서가 밑을 지그시 보고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쏙 닫혔지? 보람 없게.”

“……그만 좀 봐라.”

볼멘소리에 이서가 씩 웃더니 건조한 곳을 회음서부터 거칠게 문질렀다. 화끈하게 올라오는 감각에 청우가 목 깊숙이 신음을 흘렸다. 이내 손가락이 입구를 벌리고 한 마디만큼 불쑥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이물감에 청우의 몸이 굳었다. 손끝이 구멍 속에서 빙글 돌았다. 속살이 말라 있어 감촉이 생생하게 와닿았다.

“아……. 난 지금 기억났어.”

이서가 콧잔등을 찡그린 채 고개를 한 번 꺾고는 손가락을 빼고 일어났다. 그가 침실에서 젤과 콘돔을 가져오는 걸 보고 청우가 엎드려 누우려는 찰나, 이서가 제지했다.

“오늘은 이대로 하자.”

그가 청우의 다리를 벌리고 다시 그 사이에 앉았다. 얼굴을 보면서 하자고……?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썩 달갑지 않았다.

“그건 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젤을 듬뿍 얹은 손가락이 구멍을 뚫었다.

“아이코. 넣어 버렸다.”

뻔뻔하기 짝이 없는 낯을 보며 청우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곧 깊게 삽입되며 내벽을 쑤시는 손길에 몸의 긴장을 풀 수밖에 없었다.

다리를 활짝 벌린 채 이서의 손가락을 받고 있는 제 몸이 훤히 보였다. 이서에게는 바짝 선 유두와 오르락내리락하며 반응하는 복부, 곧게 선 성기와 음낭 그 아래까지 다 보인다는 게 실감 났다. 그러자 또다시 얼굴이 달아올랐다. 거실의 조명이 지나치게 환히 느껴졌다. 눈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몰라 여기저기로 옮기는데, 제 얼굴을 빤히 응시하는 이서의 시선이 닿았다.

“나 봐야지.”

이서의 목소리에 이끌려 눈을 마주치는 순간, 저도 모르게 밑구멍을 조이고 말았다. 우므러들며 손가락을 조이는 느낌이 선명하게 와닿았다. 그건 이서도 마찬가지였을 테다. 흥분감이 솟는 게 느껴져 환장할 것 같았다. 입술을 꾹 다무는데, 이서는 웃지 않고 오히려 눈가를 짧게 구겼다.

손가락이 하나 더 들어와 속살을 능숙하게 넓혔다. 차라리 웃거나 말이라도 걸었으면 좋겠는데, 이서는 웃음기 없는 낯으로 제 얼굴을 훑기만 했다. 아래에서는 찌걱거리는 소리가 연신 흐르고, 경험 한 번 한 것도 해 본 거라고 구멍은 자꾸만 저 혼자 우물댔다.

“흣.”

슬금슬금 자극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반응이 빠름을 실감했다. 한곳만을 짓치는 손가락 때문에 숨을 밭게 들이켰다. 가끔은 신음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흥분에 젖어 드는 제 얼굴을 온전히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 당혹스러웠다. 애써 다른 곳을 보기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이서의 얼굴로 다시 시선이 돌아왔다. 마치 자석처럼 그의 눈이 자신을 끌어당겼다.

늘어난 손가락이 계속 한 지점을 쑤셔 댔다. 쑥쑥 눌릴 때마다 배 속이 푹푹 파이는 느낌이었다. 다가오는 쾌감의 덩어리가 언뜻 두려웠다.

“뭐, 뭐라고 말 좀 해 봐.”

이서가 능글맞은 말이라도 하면 지금의 낯선 분위기가 조금이라도 해소될 것만 같았다. 신음을 참고선 헐떡이며 이서를 기다리는데, 그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청우를 내려다보다가 돌연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먹히며 혀가 들어와 입 안을 난잡하게 헤집었다. 혀끝이 성이 난 것처럼 타액을 헤치고 젖은 안을 마음껏 쑤셔 댔다. 덩달아 손가락도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아래를 치댔다. 깊숙한 곳에서 솟구치는 성감이 어느 구멍에서 소용돌이치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이서의 입 속으로 거친 신음을 흘리며 청우는 그의 팔뚝을 붙잡았다.

곧 이서가 입술을 떨어뜨렸다. 그가 미간을 찡긋하며 허리를 흔들어 성기를 청우의 허벅지에 비볐다. 그의 것이 마찰하는 부위가 화끈해졌다.

“아, 흐, 읏.”

“하아…….”

이서가 한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리고선 제 손가락을 먹고 있는 구멍을 내려다보며 손목을 흔들었다. 안을 사정없이 쑤셔 대는 손길에 청우가 허리를 들썩이며 푸르르 떨었다. 그 순간 손가락이 빠져나가며 붉어진 구멍이 벌름댔다. 청우가 잠시 숨을 가라앉히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는 사이, 이서가 콘돔을 물고 포장을 뜯었다. 그는 쿠퍼액을 질질 흘리며 끄떡이는 좆에 콘돔을 씌운 뒤 청우의 허벅지를 잡아 벌렸다.

“청우야. 씨발, 조금 아플 수 있는데…….”

이서의 눈이 다시 청우에게로 향했다. 여유를 잃은 낯이 애써 미소 짓는 걸 보는 순간 청우는 그의 성기가 제 안으로 들어오기를 강렬히 원했다. 맞닿은 건 시선인데 통한 건 마음인 듯했다. 이서가 말을 잇지 않고 발기한 것을 삽입했다.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좁은 곳을 퍽 뚫고 들어온 것에 청우의 허리가 바짝 휘었다. 둘의 입에서 동시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푼다고 풀기는 했지만 여전히 빠듯했다. 일순 찢어진 느낌이 들어 숨도 못 내쉬고 입술을 깨문 채 손을 아래로 내렸다. 이서가 청우의 손목을 잡아 좆으로 꽉 물린 입구를 더듬게 했다. 손끝에 결합부가 닿자 청우는 지레 놀라 손을 뗐다.

“내가 널, 다치게 할 린 없지. 그러니까 힘 좀 빼 봐. 내 거 잘리는 게 먼저겠어.”

이서가 신음을 흘리며 코끝을 찡긋했다. 힘을 빼려고 했지만 몸이 반으로 갈라진 느낌에 쉽지 않았다.

“그게 안 된다고…….”

짓씹듯이 말을 내뱉자 이서가 고개를 숙였다. 그가 혀를 내 청우의 입술을 살살 핥았다. 꼭 강아지가 달려들기라도 하는 것처럼 간지러웠다. 이서의 손이 청우의 몸 곳곳을 어루만졌다.

“응, 미안.”

달래는 목소리에 왠지 울컥했다. 청우는 팔을 들어 이서의 등을 껴안았다. 이서가 몸을 낮춰 주며 청우의 목과 쇄골을 가볍게 깨물었다. 끊이지 않는 애무에 서서히 긴장이 풀렸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이서가 청우의 성기를 문질러 주며 허리를 움직였다.

“아…….”

빡빡한 속살을 굵은 성기가 갈랐다. 다시 한번 입술을 깨물었지만 이서가 핥는 바람에 결국 놓을 수밖에 없었다.

“청우야, 나 봐.”

이서의 속삭임에 방황하던 시선이 그의 눈에 정착했다. 눈을 가까이서 마주하자 마치 둘만의 세계에 갇힌 것만 같았다. 숨쉬기가 비로소 편해졌다. 청우는 고개를 들어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입술을 짧게 쪼는 동안 성기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이서는 청우만을 내려다보며 애가 탈 정도로 느리게 허리를 흔들었다. 길게 빠졌다가 깊숙이 삽입되는 성기가 내벽에 자극을 오래 남겼다. 통증은 점차 옅어지고 그 사이로 희미한 쾌감이 스며들었다.

“흐읏…….”

“좀 괜찮아?”

“어…….”

“내 허리에 다리 감아 볼래?”

무릎 아래를 들어 이서의 허리에 감자 자세가 조금 편하게 느껴졌다. 이서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청우의 콧등에 입을 맞추었다.

“읏, 아.”

“네 안, 아, 기분 너무 좋아.”

이서의 숨이 얼굴 위로 흩어졌다. 그가 청우의 가슴을 크게 쥐어 주물렀다. 이어서 유두를 튕기는 손길에 몸이 절로 들썩였다. 몸 안의 성감대가 모조리 연결된 기분이었다. 그가 살을 만질 때면 아래가 벌름거렸고, 안을 성기로 쑤실 때면 애무하는 곳이 찌릿했다.

상기된 이서의 낯이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제 반응을 온전히 보여 주는 일이 더는 저어되지 않았다.

이서는 무언가를 참는 듯 미간을 구겼다. 부푼 성기는 좁은 길을 아주 느리게 오갔다. 통증이 완전히 사라지자 감질이 나 청우는 이서의 어깨뼈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더……. 빨리.”

“응, 빨리?”

이서가 청우의 콧등에 다시 한번 키스하고는 안을 조금 더 빠르게 짓쳤다. 성감대가 연신 짓눌려지자 배 안으로 화한 자극이 퍼졌다. 청우는 머리를 소파에 비비며 헐떡였다. 이서의 손가락이 젖꼭지를 꼬집자 허리가 튀며 엉덩이가 꽉 조여들었다. 이서가 낮은 신음을 흘리며 청우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댔다가 뗐다.

허리 짓이 점점 사나워지고, 성기는 빠르고 뜨겁게 마찰했다. 쾌감이 점멸하듯 몸 곳곳을 후려칠 때, 이서가 손으로 청우의 하복부를 꾹 눌렀다.

“여기, 이러면 닿을 것 같지 않아?”

“흐, 으, 야……!”

배를 누른 채로 성기를 깊숙이 집어넣자, 닿는지는 모르겠고 압박감 때문에 이상하게 성감이 날카로워졌다. 이서가 입꼬리를 혀로 누르며 성기를 쑥 빼냈다가 다시 안으로 퍽 처넣었다. 아래쪽을 강타하는 감각에 청우는 바르르 떨며 다리를 꽉 조였다.

“아야야……. 레슬링 해?”

이서가 웃으면서 청우의 다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뭉친 숨을 내뱉으며 감은 다리를 풀자 그가 허리를 세우면서 청우의 다리를 손으로 쥐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틀어 발바닥의 우묵하게 들어간 부분을 핥았다. 간지러움에 발끝을 움츠릴 찰나 다시 허리 짓이 시작되었다.

어느새 부드럽게 풀린 속살이 성기를 차지게 물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쩍쩍 소리가 나며 온몸이 푹푹 파이는 듯한 전율이 흘렀다.

손끝으로 소파를 긁었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펴기도 하며 온몸을 잠식하는 감각을 감내했다. 청우를 내려다보는 이서의 눈이 보드랍게 풀렸다. 그는 청우의 복숭아뼈를 입술로 머금고 빨았다. 그쪽이 빨리자 순간 배가 훅 꺼지면서 구멍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청우가 발을 내저으며 내빼려고 했으나 이서는 청우의 발목을 꽉 쥐고 튀어나온 뼈를 집요하게 핥았다.

“아, 흑! 으읏, 하윽, 흐……. 정, 이서, 아!”

각도를 달리하며 삽입된 성기는 자꾸만 한 지점만을 찔러 올렸다. 그곳만 둥글게 파여 물이 고인 기분이었다. 이서의 좆이 내벽을 쑤실 때마다 무언가가 주르륵 흘러내리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청우가 정신없이 흐느끼는 동안 이서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의 모습을 담으며 허리를 사납게 흔들었다. 연속되는 마찰로 부은 입구가 발름대며 드나드는 성기를 긁었다.

두 남자의 숨이 흩어지는 소리와 헐떡이는 소리만이 조용한 거실 안을 채웠다. 소파에 살이 쩍쩍 달라붙었다가 떨어지고, 연신 빨리고 깨물린 복숭아뼈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절정이 다가옴을 느끼자 청우는 입술을 벙긋대며 손을 뻗었다. 이서가 그의 다리를 놓고 바로 몸을 숙여 주었고, 둘은 서로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성기가 뿌리 끝까지 깊숙이 들어와 점막을 푹 찔렀다. 그 상태에서 이서는 허리를 둥글게 돌리다가 꾹꾹 누르며 안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청우의 손끝이 이서의 어깨를 긁었다. 허벅지 안쪽이 바르르 떨리고, 손끝 발끝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가 이내 몸이 푹 퍼져 버렸다.

“흐읏, 으…….”

“후우, 아, 청우야.”

이서가 털듯이 성기를 가볍게 처박았다. 청우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며 달뜬 숨을 흘렸다. 청우의 복부 위로 정액이 쏟아져 나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른한 전율에 휩싸였다. 청우는 눈을 감은 채 눈가를 찡그리는 이서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이윽고 이서가 눈을 뜨자, 둘은 동시에 입술을 맞물렸다.

정사 끝에 부드럽게 혀를 섞자 말로 다 할 수 없는 충만감이 차올랐다. 이서가 청우의 가슴을 느긋하게 주물렀다. 꼿꼿이 선 유두를 매만지는 손길에 청우의 혀끝이 떨렸다.

입술을 떼어 내고 나서 둘은 눈을 마주했다. 이성이 완전히 돌아오자 낯부끄러웠으나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이서가 웃음기를 머금고선 청우의 가슴을 꽉 쥐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그의 손가락에 탄성 있는 피부가 부드럽게 감겼다.

“너도 만져 볼래?”

이서가 청우의 손을 가져가 유두 위에 손끝을 올려놓게 했다. 자기 가슴을 만져 봤자 뭘 하겠는가. 멀뚱히 쳐다보자 이서가 얼른 해 보라며 재촉했다. 몸은 나른하고 실랑이할 기운은 없어 엄지와 검지로 유두를 슬쩍 비빈 청우는 움찔했다. 제 손길에 가슴이 욱신거리며 쾌감이 솟는 것이 영 낯설었다. 그때 이서가 허리를 가볍게 추어올리며 아래에 자극을 주었다.

“흣…….”

“젖꼭지 계속 만져야지.”

어르는 듯한 목소리에 유두를 문지르자 이서가 부드럽게 허리를 흔들었다. 한차례 사정을 한 뒤에 예민해진 내벽이 얕게 쑤셔지니 날카로운 성감이 피부 위를 옅게 덮었다. 저도 모르게 젖꼭지를 꼬집듯이 비빈 청우는 지레 놀라 숨을 헉 들이켰다. 그걸 위에서 보고 있던 이서가 욕설을 읊조렸다.

“청우야. 너 왜 이렇게 잘 느껴?”

“무슨……. 소리야.”

“조금만 찔러 줘도 좋아 죽으면서 아닌 척, 모르는 척…….”

이서가 청우의 턱을 쥐고는 그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낯간지러운 소리에 얼굴을 굳히자 이서는 웃으면서 다시 한번 허리를 쳐올렸다.

“아니면 내 자지가 입에 맞아?”

“너 말, 좀…….”

“하아, 또 조이잖아. 봐.”

“아, 흣.”

“키스는 네 아래가 더 잘한다.”

성기가 느릿하게 내벽을 긁었다. 제 입 안을 헤집던 혀가 떠오르자 얼굴이 달아올랐다. 자극이 계속되면 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이서의 어깨를 밀었다. 이서가 웃으면서 순순히 밀려났고, 구멍 안을 꽉 채우고 있던 성기가 서서히 빠져나갔다.

공기가 훅 들어오는 느낌에 청우는 몸을 잘게 떨었다. 이서가 몸을 완전히 물린 뒤 벌어진 구멍에 손가락을 넣고는 안을 가볍게 훑었다.

“야…….”

가만히 뒀다가는 계속 만져 댈 것 같아 청우는 일어나 이서의 팔을 붙잡아 당기고는 몸을 휙 뒤집었다. 청우의 아래에 깔린 이서가 항복하듯 양손을 들어 올렸다. 청우는 그제야 이서의 몸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헝클어진 머리칼과 붉어진 채 젖은 입술, 성기만 내놓은 채 흐트러진 하의. 거기서 눈길을 끌어당긴 건 색이 꽤 예쁜 유두였다. 가만히 내려다보자 이서가 콘돔을 벗어 던지고는 마음껏 하라는 것처럼 턱을 까딱였다.

청우는 순식간에 이서의 몸에 매료되었다. 피부는 하얬지만 적절히 붙은 근육과 큰 골격 때문에 꽤 거친 멋이 있었다. 연붉은 젖꼭지를 손끝으로 톡 건드리다가 꾹 내리누르자 이서가 나른한 숨을 내쉬었다. 청우는 그의 표정을 흘깃대다가 손을 내려 복부를 어루만졌다. 호흡에 따라 생동하는 몸이 손 아래에서 여실히 느껴졌다.

호기심이 어린 얼굴에 흥분이 차올랐다. 청우는 다소 상기된 낯으로 이서의 몸을 훑어보다가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이서의 눈치를 살피고는 고개를 숙였다. 입술로 유두를 머금었다. 입술에 닿는 낯선 감촉이 나쁘지 않았다.

이를 내어 살짝 씹었다가 이서가 그랬던 것처럼 혀로 짓누르자 그가 숨을 길게 내쉬며 청우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덩달아 청우도 고양되었다.

서툴지만 이서의 몸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애무했다. 손끝에 닿는 단단한 피부와 느껴지는 호흡, 입술에 닿는 돌기의 감촉. 그 모든 것이 청우의 몸마저 달뜨게 했다.

“아, 좋아.”

느끼는 것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드러내는 감상에 가슴이 들떴다. 청우는 입술을 아래로 내려 복부에 쪽쪽 키스하다가 한 번 사정하고 나서도 여전히 꼿꼿하게 서 있는 성기를 손으로 쥐었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단단한 살 기둥을 문지르자 이서가 웃으면서 물었다. 청우는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낯을 일별했다. 함께 하는 행위에 한쪽만 애무를 받는 건 아닌 듯했다.

색이 밝고 깨끗했지만 핏줄이 도드라지고 크기가 큰지라 이쪽은 빈말로도 예쁘다고 할 수가 없었다. 이런 게 자신의 안에 들어갔다고 생각하자 어쩐지 울컥해서 손에 힘을 주자 이서가 아야, 하고 엄살을 부렸다.

“조심히 대해 줘. 한 번 먹고 말 거 아니잖아.”

“……먹는다는 소리 좀 그만해라.”

퉁명스러운 타박에 이서가 웃으면서 허리를 들었다가 놓았다. 성기가 청우의 손안에서 솟았다가 아래로 꺼졌다.

청우는 마치 탐구하듯 이서의 것을 눈으로 새기며 천천히 위아래로 훑었다. 음낭을 슬쩍 건드렸다가 부푼 귀두를 문지르며 박차를 가하자 이서의 입에서 점점 달뜬 신음이 흘러나왔다. 한쪽 눈을 찡그리는 이서의 표정을 살피다가 고개를 숙였다. 혀를 내어 귀두를 살짝 핥자 이서의 다리가 움찔 튀었다.

콘돔을 꼈다 뺀 탓인지 맛이나 촉감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몇 번 날름거리다가 입을 벌려 머금었다.

“청우야. 이는 넣고, 입술을 더 빼는 느낌으로……. 응.”

입에 든 것이 급소이다 보니 영 신경 쓰였다. 살 기둥을 쥐고 천천히 입술을 모아 빨자 머리 위로 신음이 터졌다. 이서가 좋아하니 열의가 생겼다. 고개를 조금 더 숙여 중간까지 머금고 쭉 빨아들이는데, 웃음소리가 들렸다.

“너무 세, 자기야.”

얼른 힘을 빼자 그가 청우의 머리부터 목덜미까지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내가 좀 투정이 많지?”

살결을 간질이는 손길이 좋았다. 그를 애무하면서 자신이 고양되는 경험은 신기한 일이었다. 요령 없이 입술로만 성기를 빨다가 기둥에 짓눌린 혀를 슬쩍슬쩍 움직여 보았다.

“응, 거기 그렇게……. 아…….”

핥았던 곳을 계속 문지르며 눈을 치켜떴다. 상반신을 일으켜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서와 눈이 마주쳤다. 눈을 가늘게 뜬 채 입을 벌리고 뜨거운 숨을 내쉬는 그의 얼굴에 순간 시선을 빼앗겼다. 빠는 것도 잊고 쳐다보기만 하자, 이서가 허리를 얕게 들어 올렸다.

성기가 입 안에 쑥 들어왔다가 빠졌다. 혼자라면 넣기 힘들었을 곳까지 깊숙이 들어와 숨을 멈추는 순간, 그가 허리를 뒤로 물렸다. 이서는 능숙하게 허리를 움직이며 청우의 입을 썼다. 힘들지 않을 정도까지 파고드는 성기가 간혹 입천장을 긁고 빠질 때면 청우는 저도 모르게 목구멍을 바짝 조였다.

“후으……. 혀 더 내밀어 볼래?”

탁한 목소리로 권유하듯 물었지만 어쩐지 거스를 수 없는 힘이 있었다. 혀를 더 내밀자 이서가 혓바닥에 대고 귀두를 짓누르듯 문질렀다. 혀에 성기가 계속 마찰하는 느낌이 이상했다. 숨만 색색 내쉬는데 이서가 손을 뻗어 청우의 눈가를 매만졌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자 이서가 허리를 뒤로 물렸다.

“키스해 줘.”

이서의 속삭임에 청우는 혀로 입술을 축였다. 조금 전까지 그의 것을 담고 있었던 입인데 상관없나? 그래도 본인이 해 달라니 순순히 입을 맞추자 이서가 웃으면서 고개를 꺾었다. 혀를 깊고 짧게 섞은 뒤에 물러난 그가 청우의 뺨에 키스했다.

“이것도 좋은데, 아래로 키스해 줘.”

“……뭐?”

“여기로 물고 빨아 줘.”

이서가 손을 뻗어 둔덕 사이 구멍에 손을 댔다. 그의 손이 닿는 것만으로도 다물려 가고 있던 입구가 다시 발롱거렸다.

“세게 씹어 줘. 응?”

낮게 속삭이며 조르는 목소리에 청우는 혀 밑으로 고인 타액을 삼켰다. 이서가 도로 몸을 소파 위로 눕혔다. 바짝 서서 흔들리는 성기를 흘긋 보고는 긴 숨을 내쉬며 그의 다리 위에 앉았다. 소파 밑에 떨어진 남은 콘돔을 주워 그의 성기에 씌우자 이서가 물었다.

“직접 넣어 볼래?”

이서가 청우의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다시금 지펴진 흥분 섞인 긴장에 주먹을 꽉 쥐었다가 펴고는 단단히 선 뿌리를 쥐고 다리를 벌렸다. 성기를 고정하고 몸을 살짝 내렸지만 입구를 맞추는 게 쉽지 않았다. 제대로 앉지 못하고 몸을 들썩이자 이서가 제 좆을 쥔 청우의 손을 잡고 제대로 조준해 주었다.

“천천히, 응.”

선단이 입구를 벌리고 쑥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서가 청우의 허벅지를 토닥이는 동안 청우는 천천히, 느릿하게 몸을 내렸다.

마침내 뿌리 끝까지 머금었을 때, 청우는 이서의 복부를 손으로 짚고 미간을 구겼다.

“아, 너무……. 깊은 것 같은데.”

“힘들어?”

힘든지 안 힘든지도 알 수 없었다. 자세가 바뀌었을 뿐인데 속살을 가르고 들어와 틈을 파고든 성기가 조금 더 적나라하고 버겁게 느껴졌다. 허리를 굽힌 채 숨만 가만히 내쉬자 이서가 제 배를 짚고 있는 청우의 양손을 가져가 깍지를 꼈다.

“천천히 움직여 봐. 나 가만히 있을 테니까.”

기다려 주겠다는 듯 다정하게 어르는 말에 청우는 이서의 손을 지지대 삼아 천천히 몸을 들어 올렸다가 내려 앉았다. 성기가 안으로 푹 처박혔지만 자신이 강도를 조절할 수 있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부담이 되지 않았다.

청우는 허리를 질금질금 흔들었다. 예상할 수 있는 범위에서 쾌감이 솟구치자 몸이 편하게 감각을 받아들였다.

“흣, 아…….”

“좋아?”

“어, 좋아.”

솔직한 대답에 이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청우는 고개를 젖히고 조금 더 세차게 하반신을 움직였다. 띄운 엉덩이가 이서의 허벅지에 퉁퉁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가 몸을 찧을 때마다 곧게 선 성기도 함께 흔들렸다.

“음…….”

점점 세차지는 자극에 이서가 미간을 찡그리며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청우는 허리를 비틀었다가 젖히기도 하며 조금씩 제게 맞는 각도를 찾아 나갔다. 익숙한 쾌감이 강한 열기를 가지고 배 속에서 빙글 돌았다.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구는데, 이서의 성기가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아!”

“하, 괜찮아. 계속 씹어.”

청우도 이서의 손을 꽉 쥐며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서로의 거동이 맞아 들면서 결합부에서 젖은 소리가 연신 흘렀다. 서로의 몸을 안는 행위로 인한 원초적인 즐거움과 눈을 마주칠 때면 알 수 없이 솟구치는 충만감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번져 버렸다.

청우와 이서는 서로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오직 둘에게만 집중했다.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았고, 그래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밤이었다.

귓가를 간질이는 손길이 느껴졌다. 의식이 깨어나자 온몸이 두드려 맞은 듯 쑤셔 왔다. 넓기는 했지만 소파에서 세 번을 하고 욕실에 같이 들어가 한 번을 더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뭐에 씌기라도 한 걸까. 다시 하라고 하면 못 할 것 같았다.

눈을 떴지만 어두운 탓인지 앞이 보이지 않았다. 이서가 제 귓가와 머리칼을 쓰다듬는 것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몇 번 눈을 깜빡이자 자신을 향해 돌아누운 이서의 인영이 보였다.

“왜 안 자냐.”

목소리가 잔뜩 잠겨 있었다. 끝으로 갈수록 억누를 생각도 못 하고 소리를 내질렀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깼어? 더 자.”

이서가 청우의 눈 위로 손을 덮었다. 목소리가 쌩쌩한 걸 보니 자다 깬 것도 아닌 듯했다. 그러고 보면 새벽 두 시가 넘었는데 자신을 맞았던 때도 그렇고, 늦게 자거나 잘 못 자는 모양이다.

“너 잘 못 자?”

“아니요?”

대답이 너무 바로 나와서 거짓말 같았다. 청우는 손을 뻗어 이서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그의 이마가 제 어깨에 닿자, 그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자라.”

잠기운이 다시 몰려오기 때문일까. 이렇게 껴안고 있는 게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그저 이서도 함께 잠들었으면 하는 마음에 청우는 눈을 부릅뜨며 손으로 그를 다독였다.

그러나 수마를 이길 수 없어 눈이 다시 가물가물해졌다. 눈을 감을 찰나, 이서가 청우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티셔츠를 손으로 쥐었다. 청우는 입꼬리를 스르륵 올리며 동시에 잠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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