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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물들다 (4/16)

4. 물들다

“형, 안녕하세요.”

“어.”

과방에 들어온 재석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청우 옆에 앉았다. 청우는 쌓아 놓았던 교재를 옆으로 치우고 다시 공부에 몰두했다.

“형.”

“어?”

“용민이 형이랑 뭐 싸웠어요?”

샤프를 움직이던 손이 멎었다. 용민의 이름이 나오는 걸 보니 학보사 엠티 때의 이야기가 새어 나간 모양이었다. 청우는 한숨을 삼키며 무심하게 물었다.

“왜.”

“아니 그 형 또 지랄하잖아요. 바른말 했어요?”

바른말? 청우는 제가 한 말이 딱히 바른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본인의 기준에 아니다 싶으면 은근히 다혈질인 성격 때문에 곱게 넘어가지 못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종종 있어 주변에서 그런 이미지로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건 알았다.

“그냥. 별일 아니었어.”

“에이, 그 형이 잘못했겠죠. 그래도 형 좀 사려요. 용민이 형 안 그래도 인맥 넓은데 졸업하고 나서 껄끄러운 일 생기면 곤란하잖아요.”

이 역시 꽤 많이 들은 말이었다. 고칠 수 있었다면 진작 고쳤을 테다. 그래도 많이 나아진 편이었다. 어릴 때는 이런 문제로 심심찮게 싸우곤 했었으니까.

“충고 고맙다.”

적당히 대화를 끊고 다시 공부에 집중하려고 할 때, 전화가 왔다. 고등학교 동창인 희정이었다. 오랜만에 온 연락에 청우는 과방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어, 양희정.”

[청우. 뭐 하냐?]

“공부. 잘 지내?”

[잘 지내지. 시험 곧이지?]

“응.”

[시험 끝나면 오랜만에 만나자고. 내가 애들 모을게. 시간 돼?]

“글쎄. 최대한 맞춰 볼게.”

[오케이. 산영이한테는 네가 말 좀 전해 줘.]

“어.”

[수고.]

짧은 통화를 끊고 막 과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마침 창밖으로 산영이 보였다. 아까 메시지를 나누면서 과방에 있다고 말했더니 자신을 찾으러 온 것 같았다. 청우는 서둘러 아래로 내려갔다.

“어? 청우야!”

산영이 청우를 발견하고 활짝 웃었다. 품에 쇼핑백을 안고 있는 걸 보니, 이걸 전해 주기 위해 온 모양이었다.

“어떻게 알고 나왔어?”

“위에서 너 보이길래.”

“와, 통했다. 이거.”

“뭐야?”

“쿠키 남은 거 가져왔어. 너 좋아하잖아.”

견과류가 박힌 담백하고 고소한 맛의 쿠키였다. 산영이 아르바이트하는 카페에서 자신이 곧잘 먹는 디저트이기도 했다. 청우는 웃으면서 쇼핑백을 받아 들었다.

“고맙다. 잘 먹을게.”

“응, 공부는 잘돼?”

“어, 그냥 똑같아. 나 방금 양희정이랑 통화했는데.”

“희정이? 와, 오랜만이다.”

“시험 끝나고 만나자더라. 날짜 정해서 알려 준대.”

“와, 좋아! 재밌겠다.”

청우는 산영의 뺨에 속눈썹이 붙어 있는 걸 발견하고 떼어 주었다. 산영이 웃으면서 제 뺨을 문질렀다.

“오늘 이서 연극 보러 가?”

“아, 응.”

“나 어제 봤는데 진짜 좋았어. 이서 연기 잘하더라.”

“그래?”

“응. 우리 다음에 시험 끝나면 이서랑 같이 놀까? 재밌을 것 같지.”

“어……. 걔도 된다고 하면.”

이서와 산영 그리고 자신이 함께하는 모습은 그다지 상상이 되지 않았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쩐지 점점 산영의 앞에서 숨겨야 하는 게 늘어나는 것만 같아 근원 모를 죄책감이 들었다. 그러나 꼭 이 일이 아니더라도 산영을 사랑하면서 파생된 감정들은 어느 순간 하나같이 비슷한 색을 띠고 있었다. 얼룩덜룩 섞인 색은 더 이상 하나의 이름을 고집하지 않았다. 청우는 빛이 바랜 색을 관망하듯 내려다보았다.

학교에는 문화 회관이 있는데, 여기서 각종 전시나 공연이 열렸다. 영상학과 연극 동아리의 공연은 이 중에서도 소극장에서 진행되었다. 청우는 이서에게서 받은 초대권을 입구를 지키고 선 학생에게 내고 나서 안으로 들어갔다. 과 동아리에서 하는 공연이니 관객이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벌써 좌석의 반이 차 있었다.

청우는 중간 자리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행과 온 사람이 대부분이었으나 자신처럼 혼자 온 사람도 몇 있었다. 무대는 시골집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이번 공연에 관한 사전 지식이 아예 없다 보니 내용이 궁금하고 기대도 되었다.

여기저기 꽃다발을 들고 오는 사람들이 꽤 보였다. 꽃을 사서 올 걸 그랬나. 이런 공연에 초대받는 일은 처음이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나갔다 올까 고민하는 사이 극장 안이 어두워졌다.

무대 위의 조명이 켜지고 배우 두 명이 나왔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분장을 한 여자와 남자였는데, 분장이 꽤 실감 나서 내심 놀랐다. 게다가 배우들의 연기도 출중해서 연극에 금방 빠져들 수 있었다. 아마추어들이라기에는 수준이 높았다.

노부부가 주인공이고, 마을 사람들이 조연으로 나왔다. 이쯤 되니 이서가 무슨 역할을 맡았을지, 언제쯤 나올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이서가 등장했다.

보스턴백 하나를 덜렁 메고 이서는 털레털레 걸어왔다. 그는 노부부의 손자로, 마을 사람들의 반응을 보아 돌아온 탕아인 듯싶었다.

“아, 좆같네.”

이서는 잔뜩 짜증이 난 낯으로 담배를 물어 피우는 시늉을 했다. 담벼락에 기대어 담배를 느긋하게 피우던 그날의 모습과는 달랐다. 이서는 완전히 노부부의 손자가 되어 나타나 단 한마디의 대사와 조금의 움직임만으로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무대 위의 이서는 평소보다 훨씬 자유로워 보였고, 반짝거렸다. 창작자도 좋지만 배우를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어딜 가나 눈길을 끌어당길 테니까.

연극은 노부부와 손자의 관계를 조명했다. 능력 없는 손자는 노부부의 집에 얹혀살면서도 그들을 언뜻 증오하는 듯했다. 기침처럼 튀어나오는 손자의 적의를 노부부는 침묵으로 받아들일 뿐이었다.

청우는 이서의 얼굴에 내내 깔려 있는 슬픔의 정서를 발견했다. 평소의 이서가 늘 웃는 낯으로 상대를 탐색하듯 본다면 무대 위의 이서는 노골적인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게 낯설면서도……. 문득 무대 아래에서도 저런 표정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은 절정으로 흘러갔고, 청우는 이서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뭐든지 ‘적당히’를 모토로 어떤 일에도 열정을 보이지 않을 듯한 남자가 무대 위에서 자신이 흡수한 모든 것을 내뿜듯 열연하고 있었다.

“뭐? 떠나? 떠나라고?”

이서가 무대 한구석에 놓인 세숫대야를 걷어찼다. 그는 일그러진 낯으로 노부부를 손가락질하고는 절규했다. 당신들이 나를 버리지 않았느냐고, 어린 자신을 어두운 숲에 가두었다고.

고함치는 이서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뚝 떨어진 눈물에 가슴이 일순 조여 왔다. 이서의 눈물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청우는 숨을 크게 삼켰다.

극이 끝나고 막을 내릴 때까지 청우는 우는 이서의 얼굴에 사로잡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이상한 경험이었다. 이서의 연기에 빠져들었다기보다는 그의 감정에 동화된 것 같았다. 그러니까 무대 위 손자가 아닌, 현실의 정이서에게.

무대 위에 다시 올라온 이서가 활짝 웃고 나서야 청우는 정신을 차렸다. 박수를 보내는 관객을 따라 손뼉을 맞대다가 몇몇이 꽃다발을 들고 일어나는 걸 보았다. 그제야 다시 꽃다발이 떠올라 슬쩍 일어나 소극장을 나갔다.

학교 정문 앞에 꽃집이 하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곳의 위치를 기억해 낸 청우는 주저하지 않고 바로 뛰었다. 십 분이 좀 안 되는 거리였는데 도착하고 나니 숨이 턱 끝까지 찼다. 청우는 숨을 가라앉히며 꽃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저……. 꽃다발 좀 사려고 하는데요.”

“네. 어떤 분한테 선물하세요? 원하는 종류의 꽃은 있으세요?”

생각지 못한 질문에 청우는 머뭇거리다가 꽃집 안쪽에 진열된 꽃다발들을 발견했다. 시간이 없으니 아쉬운 대로 완성된 것을 사는 게 좋을 듯했다. 개중에서도 노란 장미와 하얀 카네이션이 섞인 다발이 눈에 들어왔다. 이서가 품에 안으면 어울릴 듯한 색이었다.

“저걸로 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꽃다발을 받고 나서 시간을 확인한 청우는 다시 뛰었다. 소극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관객들이 다 빠져 있었다. 이서도 갔나 싶어 허탈함이 밀려왔다.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쥔 채로 숨을 세차게 몰아쉴 때였다.

“그거 사려고 나갔다 왔어?”

고개를 쳐들자 무대 뒤쪽에서 나온 이서가 웃는 얼굴로 다가왔다. 그가 손을 뻗어 제 목덜미를 어루만지는 바람에 청우는 움찔하며 허리를 세웠다.

“땀 났다. 뭐가 그렇게 급해서 뛰어갔다 왔어. 난 너 어디 가나 했지.”

“하아, 하……. 축하한다.”

누군가한테 꽃을 선물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청우가 이서의 품에 꽃다발을 안기자 그가 그것을 받아 들고는 꽃에 코를 묻었다.

예상했던 대로 흰 피부와 밝은색의 머리가 꽃과 잘 어울렸다. 꽃잎 사이로 올라간 입꼬리를 보자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청우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이서의 눈가를 건드렸다가 지레 놀라 뒤로 물러났다.

“아니 아까 울었던 거 생각나서…….”

이서의 동그래진 눈이 제게로 향하자 변명처럼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서가 짧게 웃으면서 청우가 만졌던 쪽의 눈을 찡긋했다.

“고마워. 나 연기하는 거 잘 봤어?”

“어. 잘하더라. 배우 해도 되겠던데.”

“응, 웬만한 애들보다 내가 낫지.”

이서가 콧노래를 흥얼거리고는 꽃을 매만지며 연신 향을 맡았다. 청우는 그런 이서의 낯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래도 이쪽이 더 나은가. 우는 얼굴보다 웃는 모습이 더 나은 것 같기는 했다. 그런 생각을 할 무렵이었다. 무대 뒤쪽에서 나온 한 여자가 이서를 찾았다.

“오빠! 안 가요?”

“어, 갈게.”

가야 하는 모양이다. 짧게 끝난 대화가 어딘가 아쉽게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 걸음 물러날 찰나 이서가 고개를 반짝 돌렸다.

“너도 같이 갈래?”

“어딜?”

“뒤풀이.”

“거길 내가 왜 가.”

“다 자기 친구들 데려오고 그래. 감상평 궁금해하기도 하고.”

“그래도 좀…….”

“가자. 응?”

이서가 청우의 손목을 잡고 떼를 쓰듯 흔들었다. 낯도 가리는 데다 사람들 많은 자리는 불편했다. 하지만 이서가 “응? 응?” 하며 웃는 얼굴로 고개를 들이밀어서 거절할 수가 없었다.

“가는 거다?”

결국 답을 하지도 못하고 이서에게 손목이 잡힌 채로 끌려갔다. 무대 뒤쪽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이래저래 스무 명은 넘을 것 같았다.

“여기 내 친구.”

“안녕하세요.”

워낙 북적이고 정신이 없어 제대로 인사할 겨를도 없이 뒤풀이하러 가는 길에 끼게 되었다. 이서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청우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그가 꽃다발을 든 손을 움직일 때마다 화향이 퍼졌다.

“다음 주에 뭐 해? 공부?”

“어.”

“그럼 같이 공부할까?”

“언제? 나 취재해야 하는 거 있어서 힘들 수도 있는데.”

“취재? 시험이 코앞인데?”

“어. 중간 끝나면 과제 많기도 하고, 지금 쓸 수 있는 아이템이 있어서.”

할 수 있을 때 얼른 해 놓는 게 나았다. 기사를 작성하고 컨펌까지 받으려면 사실 지금 해도 빠듯한 편이었다.

“으음, 언론사 입사하는 게 목표야?”

“응.”

“방송국? 신문사?”

“일단은 둘 다.”

“방송국은 어디?”

“일 지망은 SBC.”

“아아. 거기.”

이서의 목소리가 묘하게 낮아진 듯해 그를 돌아보았지만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의 진로에 대해 역으로 물어보려 할 때, 한 여자가 끼어들었다.

“오빠. 그 꽃은 누가 준 거예요?”

“내 친구.”

“허얼. 여자분들이 준 건 다 나눠 줘 버리더니. 선택받으셨네요.”

자신을 향해 장난스레 던져진 말에 청우는 이서를 돌아보았다. 이서가 다시 한번 꽃에다가 코를 묻더니 청우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했다.

“나 주려고 공연 끝나고 뛰어갔다 왔대.”

“와, 정성 대박.”

“그치? 집에 고이 모셔 두려고.”

오버는. 청우는 머쓱해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뒤풀이 장소에 도착했다.

뒤풀이 장소는 학교 근처의 고깃집이었다. 가게 하나를 통째로 빌린 듯 안은 텅 비어 있었고, 테이블 위가 세팅된 채였다. 청우는 이서 옆에 앉았고, 그 앞에는 조금 전 말을 걸었던 여자와 이서와 친한 듯한 다른 여자가 자리를 잡았다.

“이서 오빠 친구!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이청우요.”

“저는 김지수입니다.”

지수 옆에 앉은 여자는 성예라고 제 이름을 소개했다. 전부 다 낯선 사람들이라 청우는 데면데면하게 인사를 나눴는데, 이서는 제게 말 거는 사람들과 시종일관 웃는 얼굴로 대화했다.

“오빠라고 불러도 돼요?”

“아, 네.”

“오빠는 무슨 과예요?”

“신문방송이요.”

“우와. 여자 친구 있어요?”

“지수야.”

하던 대화를 끊고 이서가 지수를 돌아보았다. 그는 청우의 어깨를 손으로 꽉 쥐었다가 떼며 말했다.

“이 친구 임자 있어.”

“아, 있어요? 에이, 그럴 줄 알았지.”

지수가 노골적으로 아쉬워하며 밑반찬으로 나온 깍두기를 홀랑 입에 넣고 질겅이듯 씹었다. 청우가 돌아보자 이서는 그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이상형이 어떻게 돼?”

“임자 있다면서 그런 건 왜 물어요?”

“궁금하니까?”

이서가 대답해 보라는 듯 턱을 까딱였다.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는데 테이블에 앉은 세 사람의 시선이 제게로 돌아와 마냥 침묵할 수가 없었다.

“별로…….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정말? 그래도 무의식적으로 호감이 가는 타입은 있을 거 아니야.”

자신이 산영을 좋아하는 걸 알면서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의도가 무엇일까. 청우는 미간을 찡그린 채로 빈 술잔을 내려다보다가 적당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냥……. 착한 사람.”

“흠. 일단 난 전혀 아니네.”

여기서 자기 자신을 언급하면 어떻게 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청우는 앞에 앉은 이들의 눈치를 흘긋 보았으나 그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지수는 이상형이 재미없다며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려 흔들었다.

“뭐, 원래 이상형이랑 반대인 사람과 만난다는 말도 있잖아?”

테이블 밑으로 내려온 손이 허벅지를 쓸었다. 놀란 걸 티 낼 수 없어 허벅지를 굳히고 눈에 힘을 주었다. 이서가 장난스레 눈썹을 까딱이고는 손을 뗀 뒤 술잔을 들었다.

“자, 자, 한잔하자고.”

이서가 세 사람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고, 청우가 병을 가져와 이서의 잔을 채웠다. 넷은 건배를 하고 나서 술잔을 비웠다.

“근데 이서 오빠 이상형은 어떻게 돼요?”

“아, 진부한 질문 할 거야?”

“뭐래, 자긴 해 놓고. 궁금하단 말이에요. 외적인 면 말고, 내적인 면을 말해 보세요.”

“글쎄.”

이서가 빈 잔으로 테이블을 장난스레 두드리며 답을 미루었다. 그에게서 어떤 대답이 나올지 궁금해 청우는 말없이 관심을 기울였다.

“포기하지 않는 사람?”

가볍게 던진 대답의 뜻은 모호했다. 지수도 마찬가지였는지 미간을 찡그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포기요? 뭐, 성실하고 인내심 있고. 그런 거요?”

“해석은 자유지.”

궁금증만 남기고 이서는 입을 다물었다. 종잡을 수 없는 대답을 곱씹어 보았지만 그 뜻을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이야기의 화제가 금방 돌아가 한 가지 생각에만 몰두할 수도 없었다.

연극을 준비하면서 힘들었던 이야기나 동아리에 들 생각이 없던 이서에게 당시 동아리장이 삼고초려를 했다는 이야기 등 청우도 끼어들 수 있는 대화에 그는 어렵지 않게 녹아들었다.

“오빠는 진짜 진지하게 연기 쪽으로 나가는 거 생각해 봐요. 연기도 못하면서 잘생긴 척 꼴불견 떠는 새끼들 너무 많아서 싫단 말이에요.”

“글쎄. 나 나가면 바로 구설에 오르지 않을까.”

“왜요? 여자관계 복잡해서? 그러니까 좀 잘 살지!”

지수가 입에 침이 튈 정도로 분노하며 타박을 주었다. 이서는 느슨한 미소를 지었다.

“이래 봬도 내 여자관계가 복잡했던 적은 한 번도 없어.”

“입에 침이나 바르세요.”

어깨를 으쓱이는 이서의 낯은 장난스러웠기에 그 말이 진심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전 여자 친구가 그를 욕했던 일이 다시금 떠올랐다.

“아, 뭐야. 이 걸레 새끼 또 여자들이랑 있네.”

대화의 방향을 마치 짜 맞춘 것처럼 한 남자가 다가오며 이서에게 지청구를 놓았다. 걸레 새끼? 설마 이서를 가리킨 말인가 싶어 의아해할 찰나 이서가 그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오셨어요.”

“오냐. 자리도 좀 바꾸고 그러자.”

남자가 성예와 자리를 바꿔 앉더니 빈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건배를 하고 나서 그의 종용에 모두 잔을 한 번에 비웠다.

“수고했다. 너, 씨, 새끼야. 오늘 아주 날아다니더라.”

“감사합니다.”

“그래도 말이야. 다 잘했는데, 마지막엔 좀 감정 과잉이었어. 연기도 좀 절제를 할 줄 알아야지. 감정 올라온다고 그냥 다 터뜨려 버리면 그거 재미없다?”

좋기만 하던데. 익은 고기를 뚱하게 내려다보는데, 이서가 집게를 들어 고기를 청우의 그릇에 옮겨 주었다.

“그래요? 연습할 때 말 좀 해 주시지.”

“미친놈. 연습 때 뭐 내가 자세히 봤냐?”

이서는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며 청우의 그릇을 집게로 톡톡 쳤다. 아무래도 더 먹으라는 뜻 같아 청우는 젓가락을 들어 고기를 먹었다.

대화를 듣다 보니 말끝마다 타박을 놓는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이서는 연신 낮춰졌지만, 그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로 유연하게 받아쳤다. 하지만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할지는 모를 일이었다.

“야. 넌 왜 안 먹냐.”

청우는 이어지는 대화를 끊고 이서의 접시에 고기를 옮겨 주었다. 이서가 웃는 눈으로 돌아보더니 고개를 기울여 머리로 청우의 어깨를 툭 쳤다. 이서의 머리가 닿은 어깨가 간질거렸다. 괜히 어깨 끝을 긁는데 진동 소리가 울렸다. 이서가 제 핸드폰을 꺼내 보더니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떴다.

“히야, 저 새끼 또 여자 생겼나 보네. 나가서 전화를 다 받고.”

“오빠 여친 없다고 했던 것 같은데요?”

“넌 그걸 믿냐? 저 걸레 새끼 뻔하지.”

“저기요.”

미간을 구긴 채 야금야금 마시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았다. 남자의 시선이 청우에게로 돌아왔다. 생각하기도 전에 그를 부르고 말았지만, 열이 올라 뒷말은 참을 수가 없었다.

“왜 자꾸 정이서 그렇게 부르시는 거예요?”

“네?”

말없이 쳐다보자 남자가 머리를 긁적이더니 이내 알아차렸다는 듯 탄성을 흘렸다.

“아, 저요?”

“예.”

“에? 아, 뭐……. 그야 저 새끼가……. 이서 친구인데 모르시나? 여자관계 화려하잖아요.”

“화려하든 아니든 그게 그렇게 부를 이유가 되진 않죠.”

남자가 멍한 얼굴로 청우를 응시하다가 이내 헛웃음을 흘렸다.

“아니 당사자도 아무 말 안 하는데 그쪽이 왜 그러십니까?”

“당사자가 괜찮은지 아닌지는 모를 일이고요.”

분위기를 보니 한두 번 이렇게 부른 게 아닌 것 같은데, 이서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그냥 듣고만 있는 것도 이상했다. 한 사람에 대한 멸칭이 그대로 굳어져 버리면 그를 대하는 태도도 비슷하게 흘러가기 마련이다. 이서가 어디서든 그런 취급을 받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제가 아는 정이서와 남들이 아는 정이서는 다를 수도 있다. 이서가 그렇게 불려도 마땅한 짓을 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적어도 제 앞에서는 그렇게 불리지 않았으면 했고, 그가 괜찮더라도 괜찮지 않아 하기를 원했다.

“허, 참……. 어, 마침 잘 왔다. 너 빨리 와서 앉아 봐.”

“왜요?”

어느새 자리로 돌아온 이서가 싸해진 분위기를 살피며 자리에 앉았다. 청우는 한숨을 삼켰다. 이서의 평연한 낯을 보자 이성이 돌아왔다. 남의 잔칫집에 와서 밥상을 걷어찬 것과 다름없는 짓을 하고 말았다.

“아니 내가 너 부르는 게 기분 나쁠 거라고 네 친구가 그러잖아. 너 기분 나빴냐? 아니지? 내가 너 아끼는 거 알아, 몰라.”

남자가 구구절절 늘어놓는 말을 들으며 이서는 의아해하는 낯으로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의 면면을 둘러보았다. 남자 옆에 앉은 지수가 입 모양으로 ‘걸레! 걸레!’ 하며 단어를 소리 없이 외쳤다. 이서는 그제야 상황을 완전히 파악한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청우를 돌아보았다.

청우는 시선을 피하고 굳은 낯으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문득 오전에 재석이 제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좀 사리라던. 자신을 걱정해서 한 말도 맞겠지만, 분위기를 흐린다는 타박의 뜻도 있었을 테다.

여기는 제 자존심을 세우는 자리가 아니었다. 사과하려고 입을 떼는 순간이었다.

“네에. 아, 모르셨어요?”

“어?”

“저 기분 되게 나빴는데. 근데 어쩌겠어요. 형도 나쁜 뜻이 있는 건 아니고, 전 마음이 약하니까…….”

이서가 침울한 낯을 하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누가 봐도 연기를 하는 얼굴에 청우는 물론이고 테이블에 있는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이내 남자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진지한 태도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청우의 말을 거든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남자가 인상을 구기고 입을 열 찰나였다.

“나 아파. 호 해 줘.”

청우는 자신을 향해 돌아온 어처구니없는 말에 시선을 피했다. 테이블 위를 완전한 정적이 감쌌다. 다행히도 남자는 전의를 상실한 얼굴이었다. 청우는 정적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화장실 좀.”

화장실을 핑계로 식당 바깥으로 나갔다. 서늘한 공기가 열기와 술기운으로 따뜻해진 몸을 식혔다.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는 골목 근처로 가는데, 따라오는 인기척이 들려 돌아보았다.

“뭐야, 안 받아 주고 나가면 어떡해. 사람 민망하게.”

이서가 하나도 민망해하지 않는 얼굴로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슬렁슬렁 걸어왔다.

“아, 씨발…….”

난데없는 욕설에 이서가 눈을 크게 뜬 채로 멈춰 섰다. 청우는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다.”

“깜짝이야. 나한테 욕한 줄 알았잖아. 갑자기 사과는 또 뭐고.”

“아니 네 선배잖아. 참았어야 했는데. 미안하다.”

이번 일로 남자와 이서의 사이가 불편해진다면 제 탓이었다. 자신은 남자와 한 번 보고 말 사이이지만, 이서는 아니었다. 그러니 그를 생각했다면 입을 다무는 게 맞았다. 빌어먹을 성질머리. 청우는 담을 발끝으로 찼다.

그를 가만히 지켜보던 이서가 웃으면서 품 안에 든 담배를 꺼냈다. 그걸 입에 물고는 청우의 옆으로 가 벽에 기대섰다.

“울겠다, 청우야.”

“나 때문에 저 사람이랑 사이 안 좋아지는 거 아니냐?”

“뭐, 애초에 안 좋아질 만큼 좋았던 사이도 아니어서.”

담배에 불을 붙이지 않고 입술을 움직여 까딱이기만 하는 이서는 아예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태연한 낯을 보니 여전히 미안한 한편으로 울컥하기도 했다.

“너 진짜 기분 안 나빠? 그래서 듣고만 있는 거야?”

“뭐어……. 기분 나쁘라고 하는 말에 정말 기분 나빠하면 우월감 느끼고 좋아할 거 아니야. 근데 내가 아무렇지도 않아 하면? 오히려 그쪽 기분이 좆같아지지. 그러니까 나는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상대 기분을 좆같게 만드는 거야.”

“……네가 네 자신을 보호하지 않는 건 아니고?”

청우의 물음에 이서가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들었다는 듯 멈칫했다. 어쩌면 그래서 더 화가 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멸칭을 들으면서도 스스로를 비호할 의지가 전혀 없어 보였기 때문에.

“대신 네가 날 보호해 줬잖아.”

이서가 곰곰 생각하는 듯하다가 청량음료 광고 속 모델이나 지을 법한 상큼하고 퍽 가증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청우는 그의 낯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손을 뻗어 그의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아!”

낮은 비명을 듣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아무래도 한 대 때려 주고 싶다는 생각을 무의식중에 계속 품고 있었나 보다. 황당한 낯으로 이마를 문지르는 이서를 보고 청우는 무뚝뚝한 투로 말했다.

“세게 안 때렸어.”

“그게 문제야?”

이렇게 어이없어하는 얼굴은 처음 본다. 그래도 어쩐지 조금 전의 웃는 얼굴보다는 이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신이 생각해도 황당한 상황에 웃음이 나왔다. 고개를 떨구고 웃는데 이서의 손가락이 다가와 입꼬리를 쿡 찔렀다. 움찔해서 미소를 거두고 얼굴을 뒤로 물렸다. 이서가 자신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너 웃을 때 여기, 동굴 생기네.”

“동굴?”

“깊다.”

입술을 관찰하는 시선에 청우는 손을 올려 입가를 더듬었다. 시선이 떠나지 않아 손등으로 가려 버리자 이서가 물고 있던 담배를 뱉고 혀로 자신의 입꼬리를 눌렀다. 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골목 밖 어수선한 거리의 소음과는 유리된 듯한.

청우는 괜히 입가와 머리를 부산스레 만지작거리다가 손을 아래로 내렸다.

“아무튼 미안하다.”

“때린 거?”

“오지랖 부린 거.”

“때린 걸 사과해야지.”

이서가 웃으면서 피우지도 않은 담배를 손안에서 구겨 버렸다. 허리가 꺾인 하얀 담배를 쥔 손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손가락이 길쭉길쭉하고 손톱은 짧았다. 정갈하고 예쁜 손이다.

“사과하지 마. 난 네 그런 점이 좋더라. 그렇게 말하는 일을 어려워하지 않는 거. 그리고…….”

“…….”

“꺾이지 않는 거. 이렇게 뒤에서 끙끙대더라도 네 생각이 틀렸다고 여기진 않잖아.”

이서의 말이 선선한 바람을 머금고 다가왔다. 그 바람이 귀로 들어와 속으로 내려앉으며 소용돌이친다. 청우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와 자신의 관계가……. 문득 저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듯 눈에 담겼다.

“내가 너랑 만나기로 한 건……. 내가 꺾인 거 아니야?”

본인이 듣기에도 자조적인 목소리가 소용돌이에 찬물을 끼얹었다. 제 감정을 부정하고자, 포기하고자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빌리는 일은 비겁한 게 아닐까. 제 사랑이 구질구질하다고 인정했고, 이서의 제안을 받아들인 순간부터 제 가치관 중 일부는 이미 꺾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게 왜 꺾인 거야.”

“…….”

“다른 길을 간 거지.”

이서가 꺾인 담배를 편 뒤에 허공에다 대고 길을 그렸다. 자유롭게 움직이던 담배가 벽 앞에 막히자 길을 틀었다. 방향을 꺾은 것은 이윽고 청우의 가슴 앞에 도착했다.

“가망 없는 사랑을 붙잡고 늘어지길 택했다면 오히려 꺾였을걸.”

청우는 제게 도착한 담배를 쥐었다. 이서의 손이 떨어지자 온기가 남은 물건의 감촉이 온전히 느껴졌다. 담배를 내려다보는데, 이서가 손으로 청우의 가슴을 짚었다. 꾹 누르는 손길에 청우는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널 죽게 하는 사랑은 버려야 마땅하지. 생존을 꺾였다고 표현하지는 않잖아?”

담담한 목소리가 다시 바람을 일으켰다. 바람은 바닥에 가라앉은 찌꺼기들을 들어 올렸다. 사랑이 죽게 한 것들, 자신이 돌아보지 않았던 빛 따위를. 문득 가슴이 아파 왔다. 청우는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이서의 손끝이 닿은 곳으로부터 파문이 일듯 가슴이 박동했다. 그 박동이 넓게 퍼져 온몸이 울었다.

“흠, 흐음, 흠.”

이서는 허밍을 흥얼거리며 식탁 위에 둔 화병에 코를 가져다 댔다. 아직 시들지 않은 꽃은 제 향을 아름답게 흩날리고 있었고, 생명력을 지닌 향은 사람의 기분을 꽤 들뜨게 해 주었다.

이 꽃은 본인이 선택한 걸까? 처음부터 끝까지 플로리스트의 손이 닿은 거겠지만 안목은 나쁘지 않았다. 어찌나 급하게 뛰어갔다 온 건지 차오른 숨을 밭게 내쉬며 땀을 흘리던 얼굴이 지금도 선연했다. 그까짓 꽃 나중에 사 주거나 못 사 와서 미안하다는 말로 대체해도 충분할 텐데, 미련하게 성실하다.

그런 모습이 나쁘지는 않았다. 상대가 제게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도 부담스럽지 않은 것은 아마 그 근간에 있는 감정이 사랑이 아니기 때문일 테다. 원래 누구에게든 그렇게 진심을 다하겠지. 하지만 약속한 것이 있으니 제게는 더 특별할 테고. 안 어울리게 간지러운 짓을 열심히 하는 그 모습이 퍽 사랑스러웠다.

상대가 노력하고 있으니 자신도 돌려줘야겠지. 최대한 산영을 잊을 수 있도록 자주 붙어 있어야겠다. 청우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흥미만 느껴도 성공이라 할 수 있었다. 이미 산영과의 약속을 깨고 자신에게 달려온 전적이 있지 않은가.

그날의 기억을 상기하던 이서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그라들었다. 비 오는 날의 축축하고 서늘한 공기, 옆을 차지한 커다란 온기, 우산에 빗방울이 떨어지던 소리…….

이서는 손을 뻗어 꽃 한 송이를 만지작거리다가 충동적으로 꺾었다. 손끝에서 대롱거리는 노란 장미를 내려다보다 테이블 위로 툭 던지고는 밖으로 나갔다.

차에 올라타 학교로 향하는 길, 전화가 왔다. 이서는 발신인의 이름을 확인하고 나서 전화를 받았다.

“응, 오랜만이네.”

[요즘 바빠?]

“왜.”

[아니 연락도 잘 안 되고. 너 혹시 여자 생겼어?]

“뭐 언제는 없었나.”

[진짜? 너 요즘 연애 안 했잖아.]

“몸 달았어? 왜 이렇게 꼬치꼬치 캐물어.”

귀찮은 기색을 숨기지 않고 내보이자 주희가 욕설을 구시렁거렸다. 이서는 픽 웃으며 핸들을 돌렸다.

“나 한 번에 한 사람만 만나는 거 알잖아.”

[알지. 이번엔 얼마나 갈지 궁금하네.]

“저주해?”

[왜. 찔려?]

“찔리긴. 아무튼 당분간 연락하지 마.”

[하, 적당히 하고 끝내. 나 너 없으면 욕할 사람도 없다고. 지금도 존나 답답한데.]

“감정 쓰레기통이 필요하면 애인이나 친구를 사귀어.”

[미쳤니? 미주알고주알 말하다가 다 도망가지.]

알맹이 있는 교류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용기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부분에서 둘은 통하는 바가 있었다. 그렇기에 적당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기도 했다.

통화하는 사이 학교 앞에 다다랐다. 이서는 제 앞에 낯익은 차가 서 있는 걸 발견하고 통화를 마무리했다. 건의 차는 길을 꺾어 산영이 아르바이트하는 카페로 향했다. 차에서 건과 산영 두 사람이 함께 내렸다.

아침부터 같은 차를 타고 온다? 둘이 어젯밤을 함께 보냈거나 아침에 산영을 데리고 왔거나. 건은 손이 빠른 놈이니 전자도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어찌 됐든 둘의 사이에 더 진전이 있었다는 뜻이다. 이서는 흥미로운 눈으로 그들을 지켜보다가 따라서 카페 앞에 주차했다.

건은 카운터가 잘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서도 따라 들어가 그의 앞에 앉자 건이 미간을 구겼다.

“뭐야.”

“우연이네? 산영이랑 같이 왔어?”

별 물음이 아니었는데도 건은 입을 다물었다. 참 어지간하다. 이쯤 되면 인정할 만도 한데 아직 혼란스러운 모양이다. 하긴 머리가 큰 성인의 생각을, 고집을 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건이 산영에게 반한 일은 드라마틱한 사건이자 단번에 인생의 말머리를 돌릴 정도의 계기였지만, 기억을 잃은 건이 맞닥뜨린 사실은 제 애인이 남자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얼마 전에 너희 형님 만났는데.”

“차윤?”

“응, 좋아하시더라. 동생이 드디어 제 갈 길을 찾아가겠다고.”

건에게 남자 애인이 있다는 건 그의 집에도 알려진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건은 자신이 하는 짓이 나쁜 일이라 하더라도 그걸 숨기거나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게다가 집안의 늦둥이이자 막둥이였으니 저래 봬도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 집안에서 그를 이길 사람이 없었다. 앞에서는 별말 하지 않았지만 건의 남자 애인을 내심 못마땅해하고 있던 형에게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처럼 느껴졌을 테다.

“어때, 놓쳐 버린 약혼을 다시 할 생각은?”

이십 대 초반에 상대를 물색하고 집안끼리 이야기를 나눈 뒤 이십 대 중반에 약혼을 하는 것이 건의 집안에서는 일반적이었다. 건은 결혼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고, 야망이 꽤 있는 놈이었다. 그렇기에 산영을 만나기 전까지는 집안에서 정해 주는 적당한 사람을 만나 결혼할 줄 알았다.

“신경 꺼라.”

심기가 불편한지 건이 으르렁댔다. 이서는 어깨를 으쓱이다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산영을 웃는 낯으로 돌아보았다.

“산영이 안녕.”

“응, 이서 왔구나. 뭐 마실래?”

“난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부탁해.”

“응. 건이 너는?”

산영에게로 향하는 건의 시선이 일순 부드러워졌다.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는 듯하지만. 하긴 산영에게 반하고 난 뒤에도 제 감정을 인정하는 데 시간이 걸렸으니 기억을 잃는다고 해서 사람이 달라지진 않을 터였다.

그나저나 얼른 이 둘이 완전히 이어져야 청우가 애먼 생각을 하지 않을 텐데 말이다. 이서는 간질간질한 분위기를 풍기는 두 남자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서는 내려오는 청우를 보고 클랙슨을 작게 울렸다. 그는 오늘 하얀 셔츠에 검은 슬랙스를 입고 있었다. 취재를 갈 때면 늘 저렇게 깔끔한 옷을 입는 걸까. 평소에는 운동부 같은 인상이 강했다면 지금은 멀끔하니 어느 회사의 인턴 같았다.

청우가 문을 열고 조수석에 올라탔다. 셔츠가 딱 맞아서인지 가슴 부분이 빠듯했다. 몸이 좋아서 붙는 옷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청우의 시선이 느껴져 눈을 들자, 떨떠름한 눈과 마주쳤다.

“안녕.”

“어, 안녕.”

청우가 안전벨트를 매며 제 옷차림을 훑었다. 이서는 웃음을 삼키며 출발했다.

“취재 갈 때는 원래 그렇게 입어?”

“깔끔하면 좋잖아.”

“두 번 깔끔했다간 여자들 다 반하겠다.”

옆자리가 지나치게 조용해져서 곁눈으로 보니 청우는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칭찬엔 영 약한 모양이다. 꽤 자주 들었을 것 같은데, 들을 때마다 저런 반응을 보이나?

“좀 서운하네. 나랑 데이트할 때는 대충 입고 나오면서.”

“대충……. 대충 입고 나간 거 아니야. 네 눈에는 부족할지 모르겠지만.”

불퉁한 목소리에서 억울한 기색이 묻어 나왔다. 결국 웃음이 터졌다. 청우가 미간을 구기며 돌아보자 이서는 맺히지도 않은 눈물을 닦는 시늉을 했다.

“내 눈에 부족할 리가. 우린 밸런스가 잘 맞아서 좋지, 뭐.”

“넌……. 진짜 배우 할 생각 없어?”

“음? 갑자기? 글쎄. 유명해지면 그만큼 자유를 잃는 거잖아. 난 그런 건 싫어.”

“그러냐.”

무뚝뚝한 목소리 뒤로 아쉬운 기색이 읽혔다. 생각보다 연극을 아주 인상 깊게 본 모양이다. 무대 위에서 청우와 눈을 마주쳤던 순간이 떠올랐다. 다른 연극을 볼 때는 꾸벅꾸벅 졸더니, 이번에는 단 한 장면도 놓칠 수 없다는 듯 눈을 반짝이고 있었지. 그 탓에 연기하는 데 방해를 좀 받았다. 열렬한 눈길이 잔상을 남겨서.

“그럼 뭐, 영화 제작 같은 거?”

“아니. 난 광고 쪽으로 나가려고.”

“광고?”

“응.”

“그것도 어울리네.”

이런 걸 묻는 건 제게 관심이 생겼다는 뜻이니 좋은 신호였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취재하는 데에 같이 가고 싶다고 말할 때까지는 거절당할 줄 알았는데, 청우는 잠시 고민하더니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전제로 흔쾌히 승낙했다.

청우의 공적인 영역에까지 발을 들인다는 것은 꽤 기분 좋은 일이었다. 아마 산영도 이런 경험을 해 보지는 않았을 테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지성대학교에 도착했다. 정문과 가까운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렸다.

“주제가 뭐길래 여기까지 온 거야?”

“몇 달 전에 여기 경비원분들이 시위하고 나서 협상했던 거 알아?”

“응, 기사 봤어.”

“협상 내용이 잘 이행됐는지, 전보다 나아졌는지 확인하려고. 우리 학교랑은 어떤지 비교도 하고.”

임금 체불과 고용 승계, 갑질 논란과 관련하여 벌어진 지성대학교 노동자들의 농성은 대한대학교 커뮤니티에도 청원이 올라올 정도로 꽤 이목을 끈 이슈였다. 다행히 빠르게 협상이 되어 여론은 금방 진정되었으나 그만큼 관심도도 떨어졌을 게 분명했다.

“시위가 한창일 때 기사를 쓰는 게 주목도가 높지 않아? 그때였으면 지금보다 덜 바빴을 테고.”

“그때는 대부분의 언론사에서 다뤘으니까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알 수 있었지. 지금은 아니고. 그러니까 다루는 거야. 주목도는 신경 안 써.”

그러고 보니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 따로 근황을 찾아본 적은 없었다. 그저 협상이 타결됐다니 잘되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한 번 화제가 되어 갈등이 봉합된 사건에서 을이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더라도 또다시 여론을 모으기는 쉽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후속 기사가 중요한 거겠지.

그런데 학보사 기사를 찾아보는 사람들이 있나. 자신만 해도 학보사에서 출간하는 신문이나 게재하는 기사에 관심을 가져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청우에게는 누가 보느냐 마느냐는 중요한 일이 아닐 것이다.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최선을 다할 놈이었으니까.

이서는 카메라를 멘 채 앞서가는 청우의 뒷모습에 눈을 붙였다. 그 섬세한 성실함이 청우를 이루는 것일 테다. 그게 썩…….

청우가 순간 뒤를 돌아보더니 걸음을 늦추었다. 이서는 씩 웃으며 그의 옆에 따라붙었다.

둘은 매점과 그 옆의 카페에 들러 음료와 먹을거리를 샀다. 밖으로 나와 청우가 학교의 전경을 찍고 나면 이서가 사진의 구도에 대해 이것저것 첨언해 주었다. 그러다 약속 시각이 되어 둘은 인터뷰이를 만나기로 한 휴게실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인터뷰 대상은 지난 시위의 주축이었던 경비원이었다. 청우는 그에게 가지고 온 것을 전했다.

“뭘 이런 걸 다 가지고 왔어요.”

“별것 아닙니다. 나눠 드세요.”

계속 사양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경비원은 웃으며 받아 들고선 자리에 앉았다. 이서는 그들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죠.”

운을 떼는 청우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부드럽고 온화했다. 경비원을 바라보는 눈 또한 온기를 머금었다. 상대를 편안하게 해 주는 데 능숙한 태도였다. 천생 리스너네. 이서는 팔짱을 끼고 청우를 훑어보았다.

세상에 정의는 있고, 선은 지켜야 한다고 믿는 얼굴. 산영을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별다른 굴곡 없이 평탄한 길만 걸어오지 않았을까. 난 저런 믿음은 꼭 부숴 주고 싶던데. 이서는 몸을 앞뒤로 흔들거리며 불량한 생각을 했다.

하지만 청우를 부수고 싶은 건 아니었다. 머릿속이 꽃밭인 애들은 한 번씩 짓밟아 주고 싶었으나 청우는 그런 쪽은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현실을 너무도 잘 직시해서 자괴감을 느끼는 쪽이리라. 그렇다면 차라리 지켜 주고 싶었다. 제가 느꼈다기에는 퍽 생소한 감정이라 이서는 눈가를 찡그렸다.

“대부분 잘 이행되고 있네요. 학교 측에서 말을 바꿀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에요.”

“네. 우리끼리 했으면 별 관심을 못 받았을 거예요. 몇몇 학생들이 도와주고 청원도 올려 주고 하니까 그제야 학교도 움직였지.”

청우는 진중한 얼굴로 메모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매사에 저런 낯으로 최선을 다하겠지. 그렇게 산영도 사랑했을 테다. 산영은 왜 청우에게 빠지지 않고 애먼 놈을 사랑하게 된 걸까? 제 곁을 지켜 주며 성심껏 마음을 다하는 친구에게 우정이 아닌 사랑을 느낄 법도 했을 텐데. 설령 사랑이 아니다 하더라도 독점하기 위하여 사랑하는 척이라도……. 아. 그건 저 같은 놈이나 할 짓이었다. 그러니 청우가 산영을 사랑한 거겠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자 들었는지 청우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이서를 살피는 눈으로 훑어보았다. 지루하지 않은지, 자리를 지키는 게 괜찮은지 지켜보는 눈.

나였다면 독점했을 텐데.

이서의 입가에 흐릿한 웃음이 맺혔다. 그 미소에 청우의 눈길이 짙어졌다. 안 그렇게 생겨서 예민하다니까. 이서는 품에서 담뱃갑을 꺼내며 눈을 찡긋했다. 그제야 청우가 안심한 듯 고개를 돌렸다.

청우가 나온 건 이서가 담배 두 개를 다 피웠을 때였다. 막 안으로 들어가려던 이서는 청우를 발견하고 나서 옷을 털었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 사람 구경 하다 보니까 시간 금방 갔어. 벌써 끝난 거야?”

“응. 쓸 건 다 정리했어.”

“그럼 남의 학교 좀 구경하다 갈까?”

청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청우는 이서를 흘깃 볼 뿐 이번에는 움찔거리지 않았다. 그것이 살짝 아쉬우면서도 이제 적응이 되었다는 뜻 같아 흡족했다.

“이 학교는 노천극장까지 난 은행나무 길이 예쁘대. 저쪽인가 보다.”

“넌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

신기하다는 듯 물어보는 말에 이서는 말없이 미소로 답했다. 그야 여자 친구들과 데이트하려면 근방의 코스는 빠삭해야 했다. 긁어 부스럼이니 굳이 이야기하지는 않겠지만. 이런 쪽 눈치는 살짝 부족한 것 같긴 했다. 보통은 아는 걸 드러내면 누구랑 갔다 온 거냐는 추궁을 듣곤 하는데 말이다.

건물을 돌아 나오자 은행나무가 줄지어 선 오르막길이 보였다. 날이 흐려서 조금 아쉬웠다. 오늘 비 소식이 있었나. 흐릿하게 축축한 냄새가 나는 듯도 했다.

“기사는 만족스럽게 나올 것 같아?”

“어, 일단은. 나한테 만족스러운 거랑 통과하는 거랑은 다른 문제지만.”

“막혀 본 적도 있어?”

“있지. 수습 때는 반려 많이 당했어.”

“그런데도 재밌나?”

“재미로 한다기보단……. 하고 싶은 일이니까 하는 거지.”

오르막길을 오르며 청우는 묵묵하게 답했다. 이서는 걸음을 늦춰 청우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넓은 어깨와 꼿꼿한 허리, 흐트러지지 않는 몸의 축, 일자로 뻗어 바닥을 디디는 발.

따라오는 인영이 없어서인지 청우가 금방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빨리 오라는 말 대신에 이서를 따라 걸음을 늦추었다. 금세 달라진 보폭의 차이를 담은 건 눈인데, 어쩐지 손끝에 새겨지는 것만 같았다.

뭐든지 말하고 싶은 기분에 휩싸였다. 이럴 때 무언가를 털어놓는 것을 경계해야 했다. 진심은 꼬리가 길고, 밟히는 순간 사정없이 내어놓고 싶어지니까. 하지만 유혹을 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서가 입술을 달싹일 때였다.

“어?”

청우가 위를 올려다봄과 동시에 콧등에 빗방울이 뚝 떨어졌다. 투둑투둑 물방울을 흘리던 흐린 하늘은 기어코 빗줄기를 쏟아 냈다. 시원하게 떨어지는 물줄기에 머리카락이 차갑게 젖었다. 속눈썹에 맺힌 것을 눈을 깜빡이며 떨어뜨리는데, 청우가 이서의 손목을 잡아채고선 뛰었다.

내리막길로 돌아가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서는 오르막길을 오르는 청우의 뒷모습을 흐린 시야로 담았다. 모든 것이 축축하고 서늘하게 젖어 가는데 유일하게 손목만이 홧홧했다. 억세지만 부드럽게 말린 손가락. 강하면서도 매끄럽게 당기는 힘. 그런 것들이 쓰여 청우의 이름이 완성된 것 같았다.

젖은 은행잎이 신발 바닥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찰박이는 소리를 가르고 마침내 오르막길의 끝에 도착했을 때 차오른 숨이 터졌다.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비를 피할 곳은 노천극장의 무대뿐이었다. 둘은 계단식으로 된 좌석을 내려가 지붕이 있는 무대 아래로 들어갔다.

“하아, 하…….”

“후우…….”

숨을 몰아쉬다가 무대에 걸터앉았다. 빗소리와 숨소리가 한데 섞여 두 사람의 주위를 둥글게 감쌌다. 소나기인 듯했지만 금방 그칠 것 같지는 않았다.

전혀 인연이 없는 다른 학교에 들어와 갑작스러운 비로 인해 고립되었다. 주변에는 사람이 없었고, 고개를 돌려보아도 보이는 것은 물선 풍경일 뿐이다. 그 때문인지 다른 세계에 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무엇이든 말해도 되고, 무엇이든 해도 용서될 듯한 세계.

“이거 비밀인데.”

이서는 무대 바닥을 손으로 짚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청우를 돌아보았다. 청우의 젖은 머리칼에서 뚝 떨어진 물방울이 눈꺼풀을 스치고 추락했다. 청우가 눈가를 찡그리며 이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난 언론인들 딱 질색이야.”

작게 속삭이며 의도적으로 눈꼬리를 휘어 내리는데도 청우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이 새끼가 갑자기 뭐라는 건가, 그렇게 생각할 법도 한데 그는 그저 묵묵하게 있다가 입을 뗐다.

“이해해.”

“이해해?”

“어. 안 좋아할 만하잖아.”

“연좌제야? 그걸 이해하면 어떡해.”

언론인이 되고 싶다는 사람 앞에서 그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지나치게 덤덤히 수긍하는 태도에 웃음이 나왔다. 청우답다 싶기도 했지만 이유도 묻지 않을 줄은 몰랐다.

“연좌제가 아니라 욕먹을 만하면 먹는 거지. 괜찮아.”

“음……. 그래도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기자가 될 거야. 네가 그쪽으로 간다면.”

이건 진심이었다. 제 말이 진심이어 봤자 청우에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겠지만. 이서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다리를 흔들거렸다. 돔 형태의 무대로 빗소리가 고인 듯 둥글게 울렸다.

“그래, 잘할게. 네가 계속 좋아하게.”

청우의 대답이 기습적으로 꽂혔다. 이서는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그저 실없는 소리라 치부할 수 있는데도 반응이 참 성실하다. 그럴 수 있는 원천은 무엇일까. 다정? 끈기?

“청우 넌……. 어딜 가나 사랑받을 것 같아.”

보다 큰 진심이 툭, 흘러내렸다. 빗소리에 갇히기를 바랐으나 마음은 언제나 그 무엇보다 큰 소리를 냈다. 청우가 이서에게 눈길을 주었다. 직선으로 꽂히는 순수한 시선이 얼굴을 부드럽게 훑는다.

“너도 그래.”

그의 맑고 낮은 목소리 또한 어떤 불순물도 지니지 않고 귓가로 내려앉는다. 동시에 가슴이 주저앉았다. 무언가가 발을 놓기에는 지나치게 비루한 곳이었다. 이서가 짧게 웃었다.

“내가? 그거 재미없는 빈말이네.”

“빈말 아닌데.”

발을 빼려 했으나 청우는 그것마저 잡아 버렸다. 습관적으로 올라가 있는 이서의 입꼬리가 잘게 떨렸다.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진심처럼 들렸다. 아니 진심일 것이다.

기대에 부응해 주지 못해서 어쩌지, 혹은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 할 수 있는 대답의 가짓수만 해도 수십 개일 텐데 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을 내렸다. 시선의 끝에, 젖어서 살결이 비치는 청우의 하얀 셔츠가 걸렸다.

꽤 두툼했는데도 단시간에 비를 많이 맞은 탓인지 안이 비쳤다. 몽땅 젖은 것이 아니라 군데군데 물이 스며 셔츠에 그림을 그린 듯했다. 퍽 원초적이면서도 비유적인 그림을.

이서의 눈길이 다시 올라와 청우의 낯을 스쳤다. 단단한 얼굴과 젖은 몸. 그 대비에 손끝이 튀는 듯했다. 바닥에 떨어진 빗방울이 튀어 오르듯.

비를 맞은 탓일까. 아니면 원래 그랬던 걸까. 오늘따라 청우의 입술이 유난히 붉어 보였다. 이서의 눈초리가 입술 사이로 보이는 혀끝에 고였다. 지붕에서 떨어진 빗방울은 첨벙, 작은 웅덩이를 만든다.

청우가 제 얼굴을 훑는다. 그의 시선은 제 얼굴을 헤매지 않았다. 그저 살필 뿐. 검은 눈에 깃든 건 염려일까. 혹은 의아함? 그가 그린 길을 해석하는데 곧 입이 열렸다.

“괜찮아?”

“뭐가?”

“비 오잖아.”

비 오는 날 축 처져 있던 자신을 기억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이렇게 걱정하는 눈으로 쳐다보는 건가? 이 섬세함의 근원은 정말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 걸까.

손으로 무대의 모서리를 꽉 쥐었으나 몸은 청우의 쪽으로 기울었다. 거센 빗소리가 점점 줄어든다. 빗줄기가 가늘어진 탓일까. 이 고립이 끝나면 모든 게 끝날 것만 같았다. 이서의 몸이 조금 더, 청우에게로 쏟아질 때였다.

벨 소리가 울렸다. 이 모든 순간을 깨뜨리는 소음. 그와 동시에 가는 비가 멎었다. 몇 방울의 여운을 남기고서.

“아.”

이서의 입에서 희미하고 가는 한 줄기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벨 소리의 주인은 자신이었다. 그는 그제야 가까워진 거리를 가늠하며 의식적으로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청우가 다소 굳은 낯으로 눈을 무겁게 끔뻑이면서 자신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이서는 저 스스로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하고는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모르는 번호. 국번을 보아 아마도 스팸일 것이다. 통화 거절 버튼을 누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청우의 시선이 붙박인 듯 따라왔다.

“이제 가자. 비 그쳤네.”

이서는 팔을 지붕 밖으로 뻗어 휘휘 젓고는 걸음을 뗐다. 청우에게는 보이지 않을 입가의 미소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그는 고개를 툭툭 꺾으며 생각했다.

남자도 되는구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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