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가랑비 (3/16)

3. 가랑비

[조기 축구?]

‘응. 1학년 때 학교에서 모집하는 거 지원해서 지금까지 하고 있어. 사람 모이면 한 달에 한두 번은 해.’

[아…….]

‘시간 돼? 아님 축구 별로냐?’

[진심이지?]

‘……싫으면 솔직하게 말해.’

[싫을 리가. 색다르고 좋네.]

청우는 발목을 풀며 지난밤의 통화를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떨떠름한 목소리였다. 싫으면 말을 하지. 다른 걸 하면 되는데. 너무 나한테 맞추려고 하는 거 아닌가? 뭐든지 자기 멋대로 해야 직성이 풀릴 놈 같은데, 의외로 배려심은 있는 것 같았다.

양말을 끌어 올리는데 상혁이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었다. 청우가 돌아보자 그가 물었다.

“네 친구는?”

“오고 있다고 했는데, 연락해 볼게요.”

핸드폰을 꺼내 드는 사이 저쪽에서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트랙탑 아래 반바지를 입고 껄렁껄렁 걸어오는데도 자신을 비롯한 주변 남자들과 달리 맵시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그가 청우를 향해 손을 흔들고는 옆에 선 상혁에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정이서라고 합니다.”

“이야, 청우 친구라 그런지 훤칠하네. 이런 게 바로 유유상종인가?”

상혁의 목소리에 주변에 있던 남자들이 몰려들었다. 해가 지날수록 신입 회원의 수는 더욱 줄어들고 동호회 자체가 고인 물이 되어 나이대가 올라가다 보니, 잠깐 체험하러 온 거라고 해도 관심도는 높을 수밖에 없었다. 불편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되어 이서를 흘긋 보았으나 그는 전혀 그런 기색 없이 싱글댔다.

“그런 말 많이 들어요.”

“크, 자신감까지?”

“근데 제가 보기엔 형님들도 마찬가지 같은데요. 여긴 뭐 회원을 얼굴 보고 뽑나.”

능청스러운 대꾸에 사람들이 뒤집어졌다. 이서는 등장한 지 단 몇 분 만에 사람들의 호감을 잔뜩 사 버렸다. 동호회 사람들이 워낙 호탕하고 잘 챙겨 주는 편이긴 하지만, 이렇게 빨리 녹아들 줄은 몰랐다. 얼빠진 채로 쳐다보자 이서가 이쪽으로 슬쩍 눈을 돌리고는 얕게 찡긋했다.

“운동은 좋아해?”

“그럼요. 작정하고 땀 뺄 때도 많아요.”

“축구는 잘하고?”

“에이, 어떻게 여기서 잘한다고 말할 수 있나요.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어떡하지, 청우야? 나 이 친구 너무 맘에 드는데?”

마음에 든다면 다행이었다. 어쨌든 취미 생활을 같이 즐긴다는 명목이었으니 재미는 못 붙여도 이곳에서 예쁨받는다면 나름 할 만할 것이다. 이제 슬슬 시작하자는 말에 청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두 친구는 팀을 어떻게 할까. 같은 팀 할래?”

“다른 팀을 해야 더 재밌죠.”

“그럴래?”

이서의 말에 둘은 다른 팀으로 나뉘게 되었다. 1학년 때부터 함께 달려왔던 동호회 사람들 사이에 이서가 있으니 이질적이었다. 문득 이서가 제 일상 깊숙이 침투해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심판이 호루라기를 불고 나서 경기가 시작되었다. 동호회일 뿐이었지만 자주 모이기 힘들었기에 한 번 할 때마다 다들 최선을 다했다. 그 속에서 이서 혼자 설렁설렁 뛰어다녔다. 경기에 집중하다 보니 자연스레 이서에게서 관심을 뗄 때였다. 이서에게 공이 굴러갔고, 가까이 있던 청우가 재빨리 그에게로 향했다.

이서는 청우의 태클을 피해 발을 움직였다. 운동에 관심 없어 보이던 것치고 꽤 괜찮은 발재간이었지만, 꾸준히 동호회에 나오는 청우를 따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청우는 페이크에 속은 척하다가 날쌔게 공을 빼앗아 그를 지나쳤다.

“아, 너무하네.”

뒤에서 원성 어린 목소리가 들려와서 웃음이 나왔다. 청우는 골대 가까이 선 사람에게 시원하게 공을 패스했다.

두 팀이 엎치락뒤치락하며 점수를 올렸다. 그동안 청우와 이서는 몇 번이나 부딪쳤지만 모두 청우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서는 축구에 큰 열의를 보이지 않다가도 청우와 붙을 때마다 눈에 빛이 돌았다. 그걸 눈치채고 나니 청우도 이서와 마주칠 때마다 짜릿한 긴장이 차올랐다.

또 한 번 이서가 공을 가지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땀을 많이 흘리지 않는 편인지, 티셔츠가 땀으로 젖은 청우에 비하면 그는 멀쩡해 보였다. 체력도 꽤 좋은 듯 내내 싱글거리는 얼굴이었다.

이번에 청우는 꽤 거칠게 붙었다. 이렇게 해도 이서는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더 즐거워했다. 뻗어 나오는 발을 피해 공을 뒤로 미는 순간이었다. 이서가 더 깊게 들어오며 두 사람의 발이 얽혔다. 잘못하다가는 넘어지겠다 싶어 피하려는데, 중심을 잃은 이서의 몸이 기울었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는 찰나 이서가 청우의 팔을 휙 잡아당겼다.

이서가 주저앉듯이 넘어졌고, 그 위로 청우의 몸도 함께 엎어졌다. 최대한 부딪치지 않기 위해 팔을 넓게 벌려 바닥을 손으로 짚고 무릎으로 디뎠지만,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워졌다.

“좀 봐주라, 우리 사이에.”

웃음기 섞인 따뜻한 숨결이 뺨에 와닿았다. 청우는 흠칫해서 재빨리 몸을 뒤로 물렸다.

승부에 미친 남자들은 예의상 괜찮냐고 한 번 물은 뒤에 공을 쫓아 떠났다. 덕분에 청우만 체감하는 어색한 정적이 남았다. 청우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자신을 웃는 낯으로 올려다보는 이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서가 청우의 손을 잡더니 또 잡아당기려고 해서 얼른 힘을 주어 버텼다.

“힘세네.”

“장난 그만 쳐.”

“취미는 즐기는 거지 목숨 거는 게 아니잖아.”

이서가 엄살을 부리며 청우의 도움을 받아 일어났다. 청우는 손을 놓으며 무뚝뚝한 투로 말했다.

“내가 목숨 걸었으면 너 못 일어났어.”

“무서워라.”

“재미없냐?”

“아니, 재밌어. 오랜만에 땀도 빼고.”

“땀 별로 안 난 것 같은데.”

손을 뻗어 이서의 목덜미를 만졌다. 살살 뛰기는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보송한 편이었다. 이서가 청우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청우의 손이 떨어지는 순간 그의 목덜미에 손을 가져다 댔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청우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나자 손가락을 안으로 접으며 씩 웃는다.

“넌 젖었네.”

“……어.”

“야! 너희 뭐 해!”

농땡이 피우지 말라는 불호령에 이서가 과장된 한숨을 내쉰 뒤에 뛰어갔다. 뒤에 남은 청우는 이서의 뒷모습을 좇다가 젖은 목덜미를 문질렀다.

뒤풀이 장소는 삼겹살집이었다. 싸지만 질도 나쁘지 않아 멤버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다. 신입은 가운데에 앉아야 한다는 아우성에 이서와 함께 덩달아 청우도 가운데에 앉게 되었다.

“우리 친구는 술 잘 마시나?”

“적당히 해요.”

“소주? 맥주?”

“소맥이죠.”

“크, 뭘 좀 아네.”

청우는 평소처럼 소주를 받으면서 이서 앞에 놓인 잔을 살폈다. 다들 술고래인지라 처음부터 너무 달리면 나중에 힘들어진다. 테이블 밑으로 그의 발을 툭 치자 시선이 돌아왔다.

무리하지 마. 입 모양으로 말하자 이서의 눈이 은근히 접혔다. 순간 발이 지그시 눌렸다. 이서가 제 발을 밟은 것 같아 미간을 찡그리자 발이 더 위로 올라와 정강이를 건드렸다. 다리를 휙 치우니 이서가 한쪽 눈썹을 천천히 치켜세우며 아무것도 안 한 척 잔을 들어 올렸다.

“자, 자. 건배하자, 건배!”

“짠!”

얘는 왜 이렇게 스킨십을 많이 하는 거야? 정강이에 남은 온기를 지우기 위해 소주를 한 번에 들이켰다.

“이서 오늘 보니까 축구 잘하던데?”

“저야 뭐 평범하죠. 고딩 때 좀 뛴 정도예요. 전 농구를 더 잘해요.”

“오, 그래? 하긴 키가 크니까 할 맛도 나겠다.”

“키보다는 손맛이죠. 근데 여기서 막내가 청우인가요?”

“아니야. 막내는 얘. 얼굴만 봐선 청우가 막내긴 하지.”

이서가 이곳에 처음 와서가 아니라, 동호회의 멤버였어도 늘 저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응력이 대단했고, 분위기를 자연스레 주도했다. 처음에는 그저 불편하게만 여기고 가벼운 언행에 색안경을 끼고 봤는데,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모습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청우는 주량이 센 편이었지만 오늘은 이서를 데려왔기에 적당히 조절했다. 이서는 건배만 하고 잔을 내려놓는다든지 하며 요령 있게 자리를 지켰다.

술을 주고받고 하며 자리가 무르익었다. 오랜만에 고기를 많이 먹어서 만족스러웠다. 더 먹으면 더부룩할 것 같아 젓가락을 내려놓고 소주를 한 모금 마실 때였다.

“근데 이서는 여자 친구 있어?”

상혁이 던진 질문에 이서가 잠시 멈칫하더니 청우를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만나는 사람 있어요.”

“큽…….”

“어이구, 괜찮냐?”

상혁이 사레 걸려 기침하는 청우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싱긋 웃는 입술이 시야에 걸렸다. 무슨 소리를 할지 몰라 지그시 노려보는데도 이서는 개의치 않아 보였다.

“너 눈 높지?”

“별로 안 높아요.”

“에이……. 근데 그 귀걸이 말이야.”

“네.”

“한쪽에 귀걸이 더 많이 하면 게이다, 뭐 이런 말 있지 않아?”

“그래요? 한쪽에만 하는 거 아니고요?”

이서가 대수롭지 않게 되물으며 오른쪽 귀를 만지작거렸다. 귀걸이가 왼쪽 귀에는 두 개, 오른쪽 귀에는 세 개가 있었다.

“잘 꾸미는 남자의 반은 호모라면서? 이거, 이거. 하고 다니는 스타일도 그렇고……. 사실은 그쪽 아니야?”

얄궂은 목소리에 청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상혁은 원래 좀 짓궂고 장난기가 많은 편이었다. 악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게 용인되는 것은 아니었다. 한마디 하려고 입을 열 찰나였다. 이서가 웃음기 어린 눈으로 청우를 쳐다보며 선수를 쳤다.

“에이, 제가 게이였으면 형 엉덩이가 무사했을까요? 저 형님 같은 스타일 좋아해서.”

“뭐? 하하하!”

뻔뻔한 너스레에 상혁이 호탕하게 웃었다. 주변 사람들도 하나같이 웃는 것이, 분위기가 더욱 좋아졌다. 청우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지금의 평화가 어쩐지 더 불편했다.

이서는 주변에서 주는 술을 몇 번 받아 마시다가 담배를 피우겠다며 자리를 떴다. 신기하게도 이 동호회에 흡연자는 아무도 없었다. 청우는 화장실에 가겠다는 핑계를 대고 이서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그새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식당 옆 골목이 눈에 띄어 그리로 가 보자, 이서가 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그가 눈만 돌려 청우를 바라보았다. 담배를 문 입꼬리가 부드러운 선을 그렸다.

“담배 피우는 줄 몰랐는데.”

“자주는 안 피워.”

“기분 안 나빴냐? 미안하다.”

돌직구로 꽂히는 사과에 이서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얼굴만 봐서는 전혀 상처받지도 기분이 나쁘지도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들은 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상혁은 자신의 지인이니 그가 직접 사과하지 못한다면 저라도 해야 했다.

“음……. 전혀 상관없는 인간이 던진 말에 상처받을 만큼 연약하진 않아서.”

전혀 상관없는 인간. 조금 전까지 하하 호호 웃으며 술을 주고받았던 사람에게 붙이기에는 퍽 냉정한 정의였다. 사과한 자신이 오히려 무안해지는 반응이었으나 마땅히 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했기에 청우는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네가 사과하지 마. 그럴 일 아니잖아.”

“그래도 나 때문에 여기 와서 그런 말을 들은 거니까.”

“동생 있어?”

“어?”

“동생 있냐고.”

뜬금없는 질문에 잠시 눈가를 찌푸렸다. 이서는 느긋하게 담배를 물고 깊게 빨아들였다가 연기와 함께 내뱉었다. 아스러지는 하얀 연기가 그와 퍽 어울렸다.

“어, 있어.”

“장남?”

“어.”

“동생이랑 나이 차가 많이 나나?”

“다섯 살 차이 나는데.”

“으음, 아프다거나 차별을 받았다거나?”

“아팠던 건 맞는데……. 왜 물어보는 거야?”

“아, 그건가.”

이서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담배를 허공에 톡톡 두드렸다. 담뱃재가 아래로 떨어졌고, 청우는 잠시 그것에 시선을 빼앗겼다가 물었다.

“뭐가.”

“아니, 그 쓸데없는 책임감이 어디서 비롯한 건지 궁금해서.”

쓸데없는 책임감? 생각지 못한 대답에 청우는 순간 멍해졌다. 동생이 어릴 적 아팠고, 동생을 잘 돌보는 오빠가 되려고 노력하기는 했지만 그것과 이것은 다른 문제였다. 애초에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어도 이서에게 사과했을 테다. 그 자리에서 직접 제지하지 못해 아쉬울 따름이었다.

“뭐, 난 좋아. 네 그 미련함이 이상하게 나쁘지 않네?”

이서가 짧아진 담배를 벽에 지져 끄며 기대 있던 등을 뗐다. 웃으면서 다가온 그에게 담배 냄새가 났다. 담배와 술, 고기와 향수. 그 모든 냄새가 섞였는데도 역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근데 왜 내 기분만 신경 써?”

“어?”

“넌 기분 안 나빴어?”

“내가 왜.”

“게이 운운하는 말이었잖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 잠시 어리둥절해 있던 청우는 이서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킬 때야 그 뜻을 깨달았다. 산영을 좋아하니 자신이 이서에게는 동성애자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산영을 좋아하기 전에 남자에게 관심을 가져 본 적 없으며 스스로를 게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별로. 난……. 그쪽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음.”

이서가 알 수 없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 발자국 다가왔다.

“이제부터 기분 나빠해야겠다.”

“왜?”

그의 손이 청우의 손을 덥석 잡았다. 순간 움찔해 빼내려고 했지만 이서가 힘을 주었고, 손가락 사이사이에 제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그쪽’이 됐잖아.”

빈틈없이 꽉 맞물린 손이 따뜻했다. 피부는 간지러울 정도로 보드라웠지만, 툭툭 튀어나온 뼈마디와 군데군데 박인 굳은살은 꽤 거칠게 제 존재를 알렸다. 정이서라는 사람이 압축된 것만 같은 감촉이었다.

혀 밑으로 고인 타액을 삼키고, 피로하게 느껴지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취했냐?”

“고작 이걸로? 나 술 잘 마셔.”

“허세는. 다 피웠으면 들어가자.”

돌아서자 손은 금방 떨어졌다. 타인과의 접촉은 그다지 익숙하지 않았다. 청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가 펴며 걸음을 뗐다.

“선물?”

“응. 얼마 안 있으면 건이 생일이잖아.”

같이 백화점에 가 주겠냐며 산영이 수줍게 웃었다. 생일……. 산영은 자주 깜빡하는 편이라 보통의 기념일은 잘 잊었지만 건의 생일만큼은 꼭 챙기는 편이었다. 달리 거절할 이유가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었다.

“강의 끝나면 갈래? 나 저녁엔 시간 안 돼.”

“그럴까? 저녁에 약속 있어?”

“학보사 엠티 가서.”

“아, 어디로 가?”

“양평.”

“와, 재밌겠다.”

청우는 싱겁게 웃었다. 학기마다 한 번씩 참여하는 엠티는 특별할 것도 없었고 그리 즐겁지도 않았다. 귀찮아서 빠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3학년 2학기라 열흘에 한 번 작성해야 하는 기사도 면제받고 있는데 사소한 활동까지 빠질 수는 없었다.

교양 강의가 끝나고 둘은 백화점으로 향했다. 산영은 아직 뭘 사 줄지 고르지 못했다며 청우에게 의견을 물었고, 청우는 침묵하다가 물었다.

“걔랑은 요즘 잘 지내?”

“건이랑? 응. 가끔 신경질 부리기는 하는데 그건 아직 혼란스러워서 그런 것 같아. 그래도 요즘은 꽤 자주 만나고…….”

산영의 뺨에 홍조가 어렸다. 완전히 안정된 건 아니지만 웃으면서 이야기할 정도는 되나 보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마냥 축하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있지. 다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도 아닐 때가 있고, 새롭게 보이는 것도 있어서 좋아. 예전에는 건이가 당연하게 배려해 줘서 몰랐던 걸 알게 됐을 때 고맙더라구.”

“그건 차건이 너한테 고마워해야 할 일이지.”

청우는 무심한 투로 말을 흘리며 산영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산영은 여전히 모래 알갱이 속에서도 보석의 파편을 찾을 줄 알았다. 건이 그에게 있어 보석이라면 자신 또한 존중해야 할 테다. 그런 생각으로 지금까지 존중해 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애초에 존중이 자신의 몫인지…….

주머니에서 울린 진동에 청우는 핸드폰을 꺼냈다. 이서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그가 전화 아닌 메시지로 연락한 것은 처음이었다.

「뭐 해?」

답장을 보내려다가 움찔해서 산영을 흘긋 보았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좋은 소리는 못 들을 게 뻔했다. 하지만 놀러 온 것도 아니고 건의 선물을 사 준다고 해서 따라온 것뿐인데, 거짓말을 하기는 찝찝했다.

「잠깐 뭐 좀 사러 밖에」

「학교 밖?」

「응」

「저녁엔 뭐 해 만날래?」

「저녁에 엠티 가는데」

산영의 부름에 청우는 어느새 멀리 떨어진 그를 향해 걸음을 서둘렀다. 재킷이 예쁘다며 어떤지 물어보기에 답해 주려고 살피는데 진동이 또 울렸다. 빨리 확인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괜히 조급해졌다.

“괜찮은 것 같은데. 걔한텐 좀 작지 않아?”

“사고 나고 살이 좀 빠져서 괜찮을 것 같아. 그래도 나중 생각해서 큰 거 살까?”

“그것도 나쁘지 않고. 이걸로 살 거야?”

“음…….”

산영은 무언가를 살 때 우유부단한 면이 있었다. 고민에 빠진 그를 뒤로하고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엠티를 어디로 가냐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양평」

이서는 메시지를 금방 읽었지만 답장을 보내지는 않았다. 얼마간 핸드폰을 들여다보아도 알림이 뜨지 않아서 결국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청우야. 나 이걸로 살래.”

“정했어?”

“응. 이거 입으면 예쁠 것 같아.”

산영이 재킷을 품에 안고 입을 벌려 웃었다. 연붉은 입술 안 다른 이보다 큰 앞니가 아랫입술을 살포시 물었다. 꿈을 꾸는 듯한 낯이었다. 건과 관련이 있는 일에만 나오는 웃음.

문득 내가 뭘 하고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이전에는 견딜 수 있었던 것들이 지금에 와서 치밀어 오르며 자신을 모서리로 밀어 넣는 이유는 뭘까. 이런 감정을 품고 산영의 옆에서 친구로 남을 수 있을까. 이 감정은 대체 언제 끝이 날까.

그간 모른 체하고 지나쳤던 제 안의 모래 알갱이들이, 돌아보니 어느새 사막을 이룬 것만 같았다. 까마득했다.

피구 세 판을 하고 나니 몸이 땀으로 젖어 불편했다. 날이 싸늘해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몸을 격하게 움직이면 후덥지근했다. 엠티에서 피구든 족구든 팀을 이루어 운동을 하는 게 학보사의 전통이어서 다들 내키지 않는 상태로 참여했다. 하지만 막상 경기가 시작하면 점차 몰입하게 되는지라 끝나고 나니 모두 즐거워했다.

피구에서 진 탓에 바비큐는 청우가 속한 팀이 준비해야 했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고기를 자르는데, 효정이 다가와 기웃댔다.

“선배님. 교대할까요?”

“괜찮아. 앉아 있어.”

“선배님만 못 드시는 것 같아서요.”

“먹고 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오, 둘이 뭐야.”

문화부장인 용민이 그들을 보고 한마디 던지자 효정이 움칠하며 뒤로 물러났다. 청우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고기를 잘라 테이블 위로 날랐다. 남은 것을 다 구운 뒤 자리에 앉자 이번에는 술잔을 받아야 했다.

체력이 달리지는 않는데 오늘따라 피로했다. 청우는 목덜미를 주무르며 첫 잔을 한 번에 비웠다.

“선배 오늘 피곤해요?”

“아니. 똑같아.”

“피곤하면 무리하지 말고 일찍 들어가 쉬어요.”

사회부장인 정아가 청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청우는 고개를 끄덕인 뒤에 고기를 씹었다. 이상하게 평소에 좋아하던 고기도 고무 조각같이 느껴졌다. 컨디션이 안 좋은 듯했다. 술보다는 물을 많이 마셔야 할 것 같아 물 잔을 가까이 뒀다.

“기획 기사는 다들 잘 준비하고 계시죠?”

국장의 물음에 각 부의 부장과 3학년들이 대답했다. 3학년은 2학기 때부터 열흘에 한 번 내는 기사를 면제받는 대신 한 학기 동안 기획 기사를 한 개 내놓아야 했다. 청우는 몇 가지 아이템을 두고 고민하고 있었다. 이들의 기사는 아이템 회의를 거치지 않는 대신 기사의 초안이 언제든지 킬 될 수 있기에 처음부터 선정을 잘하는 게 좋았다.

아이템 고민을 하는 사이 테이블 위로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최근 학내 이슈와 사회 문제부터 시험과 지인 이야기까지 화제는 대중없었다. 사적인 주제는 적당히 흘려듣고 관심 있는 문제는 귀 기울여 듣다 적당히 끼어들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은 꽤 빠르게 흘렀고 술자리가 무르익었다.

해가 서서히 넘어갔다. 어느덧 본격적인 가을이 찾아오려 한다. 계절이란 것이 허무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햇빛이 쨍쨍하고 숨이 막힐 정도로 습했는데, 어느새 선선한 바람이 불고 공기가 가을밤 특유의 찬기를 머금었다. 소주를 한 모금 넘기며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에 시선을 둘 때였다.

“청우 넌?”

“청우야.”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늦게 고개를 돌리니 모두의 시선이 제게로 쏠려 있었다. 오가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다. 얼른 잔을 내려놓고 멍한 정신을 차렸다.

“뭐라고 하셨어요?”

“넌 연애 안 하냐고, 인마.”

“아……. 네.”

“너 아직도 모솔이야?”

눈가를 찌푸릴 뻔한 것을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연애나 여자 친구 관련한 이야기를 정말 질리도록 자주 들었다. 많은 이들이 여자 친구가 없으면 소개해 주겠다고 제안했고, 연애 생각이 없다고 말하면 왜냐고 되물었다. 이상형, 좋아하는 스타일의 여자, 연애 경험……. 앞의 두 질문은 적당히 둘러댈 수 있었으나 연애 경험에 관해 물으면 거짓말할 수가 없었다. 한 번 거짓말을 하면 꼬리에 꼬리를 물기 마련이었고, 그렇게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짓은 하기 싫었다. 거짓말에 능하지도 않았고.

연애 경험이 없다고 하면 하자를 숨기고 있는 사람이나 천연기념물을 보듯 하는 사람들 때문에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적당히 자리를 피했는데, 넋을 놓고 있었던 탓이다.

“야, 청우야. 주변을 둘러봐라. 좋은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아직도 솔로를 고수하고 있냐.”

용민의 충고에 청우는 말없이 소주잔을 손에서 굴렸다. 산영을 마음에 품은 이후로 누구에게도 제 고민에 대해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감정은 순식간에 숨겨야 할 치부가 되고, 마음은 은폐해야 할 약점이 되었다.

“뭐, 예를 들면 너랑 효정이도 그림 좋잖아.”

옆에 앉아 있던 효정이 숨을 작게 들이켜며 청우를 흘깃 보았다. 이런 자리가 내키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 같은 일 때문이었다. 여자와 나란히 걷고 앉기만 해도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고, 누군가가 제게 호감을 보인다면 주변에서 엮어 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청우는 한숨을 삼키며 남은 소주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분위기 좋게 술 게임이라도 할까? 벌칙은 무조건 러브 샷으로 해서.”

“선배. 러브 샷 할 시대는 지난 걸로 아는데요.”

청우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짜증을 숨기지 못한 목소리로 말을 툭 던졌다. 학내 행사에서의 술 게임 속 폐단에 관해 지적한 기사를 내놓은 게 일 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 학보사에서 러브 샷을 벌칙으로 걸어 술 게임을 한다면 지나가던 개도 웃을 일이었다.

용민의 낯이 굳었다. 지금은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학보사는 기수에 따른 위계가 여타 동아리보다 엄격한 편이었다. 그런 곳에서 부원들이 다 있는데 핀잔을 줬으니 기분이 나쁠 만했다.

“하아……. 야, 청우야. 너 그 갑분싸 만드는 버릇 좀 고쳐라. 어? 너만 바른 생활이야? 너만 생각 있어? 우리끼리 하는 장난도 못 받아 줘?”

고개 숙여 사과하면 용민의 위신도 얼추 세워 주고 분위기도 빨리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일에 사과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청우가 입을 꾹 다물자 그의 인상이 더욱 날카로워졌고, 분위기도 그를 따라 날이 섰다.

얼어붙은 공기를 깨뜨린 건 국장이었다.

“적당히 하죠. 청우 말도 틀린 데 없고.”

“뭐?”

“청우도 더 좋게 말할 수 있었지?”

“네. 죄송합니다.”

단순히 러브 샷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연애 관련 화제로 인한 피로와 자신과 효정을 엮으려는 수작으로 인해 짜증이 났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용민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고 말할 수 있었을 테다. 순순히 인정하자 용민도 더는 뭐라 말하지 못했다.

“자, 슬슬 정리하죠? 술자리 길어져 봤자 좋을 거 하나 없으니까.”

국장이 손뼉을 맞부딪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자리를 가지면 이렇게 언성이 높아지는 일이 왕왕 있었고, 용민은 이미 전적도 있었던지라 다른 부원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얼굴로 자리를 정리했다. 청우도 주변을 치우는 걸 돕다가 모두 펜션으로 들어갔을 때 혼자 바깥으로 향했다.

펜션과 떨어진 길, 큰 나무가 가지를 아래로 드리운 곳에 섰다.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렸고, 그 밖에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제야 한숨을 크게 내쉴 수 있었다.

기분이 바닥을 치고 있는 걸 실감했다. 원인이 용민은 아닐 것이다. 괜한 화풀이를 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무겁게 했다.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짧은 머리칼을 헤집을 때였다.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울렸다.

「정이서」

이서의 이름 세 글자를 마주하니 다소 낯선 감이 있었다. 매끄러운 이름이다. 그와 어울리는 듯하면서도 걸리는 데가 없어서 오히려 이질적이기도 한. 청우는 세 글자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어? 목소리가 왜 다 죽어 가지?]

“……어?”

[무슨 일 있었어?]

새털같이 가볍지만 보드라운 이서의 목소리에 청우는 입을 다물었다. 티를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안 걸까. 순간 뒤통수를 맞은 듯 멍한 기분이 되어 고개를 떨구고 핸드폰을 들지 않은 손으로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엠티 재미없지?]

“왜 전화했어?”

[재미없을 것 같아서.]

타이밍 한번 기가 막혔다. 정말 귀신같은 놈이었다. 청우는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래, 재미없네. 어떻게 알았냐.”

[네가 엠티를 재밌어할 것 같진 않아서. 과 엠티였어?]

“아니. 학보사.”

[아, 그거 말만 들어도 하품이 나오는데.]

엄밀히 말하면 자리가 불편했던 거지 재미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애초에 이런 자리에 재미를 따지려고 온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서의 거침없는 말에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은 뚫리는 듯했다. 청우는 바닥에 갈린 자갈을 툭툭 쳐 대다가 입을 열었다.

“넌 뭐 하고 있었어?”

[난 그냥 드라이브.]

“지금 운전 중이야?”

[응.]

“그럼 끊자.”

[너무 엄한 거 아니야? 통화한 지 일 분도 안 됐어요.]

“아니, 밤이고 위험할까 봐 그렇지.”

[응, 위험한 건 아니고 거의 도착해서 끊어야겠다.]

“아……. 그래.”

막상 끊는다고 하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에 머리를 긁적이다가 전화를 끊었다. 마침 자갈을 밟고 다가오는 인기척이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효정이 고개를 살짝 꾸벅였다.

“선배님. 여기 계셨네요.”

“어. 왜 나왔어?”

“그냥……. 죄송하다고 말씀드리려고요.”

“죄송? 왜?”

“저 때문에 용민 선배님께 그런 말씀 들으신 것 같아서요.”

“그게 왜 너 때문이야. 사과하지 마. 나서서 오지랖 떠는 걸 누가 말려.”

“그래도요.”

효정이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무래도 신입생이고 선배들끼리 언성이 높아지다 보니 다 제 탓같이 느껴진 모양이다. 뒤에서 효정을 다독여 주었어야 했는데 제 불찰이었다. 무슨 말을 해 줘야 마음이 편해질까. 생각하다 보니 불현듯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너 장녀야?”

“네? 어떻게 아셨어요?”

효정이 눈을 댕그랗게 뜨고 물었다. 제가 물으면서도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작 맞는다고 하니 웃음이 나왔다. 이마를 문지르며 연신 웃음을 흘리는 청우를 효정이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아……. 그냥 그럴 것 같아서. 아무튼 미안해할 필요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네에……. 근데 저, 선배님 좋아하는 건 맞는데 막 남자로서의 호감 이런 거 아니니까 선배님도 저 불편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어, 그래.”

“선배님 만나는 분도 있으신 것 같은데 쓸데없는 일 겪지 않게 저도 뒤에서 그러지 마시라고 말할게요.”

“만나는 분?”

“네? 아, 방금 통화하신 분 여자 친구나 뭐 그런 분 아니세요?”

“아닌데.”

“아……. 그러시구나. 죄송해요. 아무튼……. 저 편하게 대해 주세요.”

효정이 모은 손을 입술 가까이 대고서는 살갑게 웃었다.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먼저 들어가 보겠다며 인사하고 돌아섰다.

여자 친구?

효정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청우는 미간을 찡그리며 황당한 낯으로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어딜 봐서 여자 친구라고 짐작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잠시 그러고 서 있다가 헛웃음을 흘리며 발을 뗐다. 펜션의 불이 꺼진 것으로 보아 다들 잠자리에 든 모양이었다.

펜션 앞에 막 도착했을 때였다. 차 소리가 들리더니 어디서 본 듯한 차가 멈춰 섰다.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자 차에서 한 남자가 내렸다. 주변이 밝지 않아 평소보다 머리칼이 어두워 한 박자 늦게 알아보았다. 이서였다.

옅은 바람에 그의 머리칼이 흩날리고, 품이 큰 셔츠가 펄럭였다. 자신이었다면 꿰입을 때 꽤 고전했을 것 같은, 스크래치가 난 청바지는 그의 웃는 인상에 장난스러움을 더해 주었다. 그를 마주하자 지나간 여름의 냄새가 흘러들어 오는 것 같았다. 멍하니 보고 있는데, 이서가 다가와 팔을 벌렸다.

“반갑지?”

“너……. 어떻게 알고 왔어?”

빠르게 돌이켜 보았지만 자신이 그에게 장소를 말해 준 적은 없었다. 단지 양평이라는 지명만 알려 주었을 뿐이다.

“몰랐어? 우리 학교에서 양평에 엠티 간다 하면 다 이쪽이야. 저렴하거든.”

“아니었으면 어쩌려고.”

“아니었으면 너한테 전화했겠지, 멋없게.”

이서가 어깨를 으쓱이며 씩 웃었다. 그놈의 얼어 죽을 멋은. 속으로 구시렁대는데 입꼬리는 참을 수 없이 삐죽 올라갔다.

“우리 청우는 내가 반가운 모양이네요.”

이서가 흥얼거리듯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받아치고 싶었지만 반가운 건 사실이었다. 익숙지 않은 장소에서 아는 얼굴을 만나는 게 이렇게 반가운 일일 줄이야. 정확히 말하면 고작 ‘아는’이 아닌 ‘반가운’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뭔 소리야.”

그럼에도 낯간지러움에 툴툴대자 이서가 다 안다는 듯 웃으며 빙 돌아와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타시죠. 바람 쐬러 가자.”

시간도 늦었고, 말없이 이탈해서는 안 되는 단체 행사지만 오늘만큼은 이서의 제안을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청우는 그의 차에 올라탔다. 차가 펜션을 떠나는 순간 해방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어디 가?”

“음, 별 보러?”

“별?”

이 근처에 천문대 같은 데가 있나. 아니면 어디 높은 곳에 가려는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작 도착한 장소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하천이었다. 근처에 차를 세우고 이서가 모래와 풀이 섞인 자리에 털썩 앉았다.

“여기야?”

“응, 앉아.”

청우는 이서의 옆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로등이 켜져 있지 않은 데다 주변이 어두워 별이 생각보다 잘 보였다. 별이 강을 이룰 정도의 드라마틱한 하늘은 아니었으나 나름대로 모인 별들이 반짝거리는 게 나쁘지 않았다.

“넌 여기 어떻게 알았어?”

“나야 모르는 데가 없지. 어때. 애인으로서 쓸 만하지?”

“그놈의 애인 소리는…….”

무겁지 않은 타박에 이서가 웃었다. 둘은 잠시 말없이 나란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곧 이서가 허밍을 흥얼거렸다. 모르는 노래였으나 잔잔하고 경쾌하니 듣기 좋았다. 문득 이서의 발길이 이리로 향하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해졌다. 제 메시지를 보고 나서 오기로 결정한 걸까. 아니면 그저 시간이 남는 김에 드라이브하듯 이곳을 찾은 걸까.

어느 쪽이든 그 끝에는 자신이 있었다. 일 순위. 그게 이런 뜻일까. 청우는 고개를 내리고 이서를 돌아보았다.

“넌 연애 많이 해 봤냐.”

“그런 질문은 곤란하다니까.”

“곤란할 정도로 많이 해 봤나 보네.”

“하하, 뭐……. 솔직히 안 했다면 거짓말이지. 내 얼굴이 아깝잖아.”

재수 없지만 맞는 말이었다. 이서는 꽤, 아니 꽤라고 덧붙이면 과소평가가 될 만한 미남이었다. 쌍꺼풀 없는 눈이 옆으로 길게 찢어졌는데도 자신처럼 차갑게 보이지 않았다. 표정이 다채로웠고 늘 올리고 다니는 입꼬리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인상이 부드러웠다. 다가가기 어려운 느낌은 아니니 아마 많은 사람이 오갔을 거다.

“왜. 신경 쓰여?”

“아니.”

“너무 딱 잘라 말하네, 서운하게.”

이서가 웃으면서 발을 까딱였다. 신발 앞코가 모래에 박혔다가 빠져나오며 자국을 남겼다. 산만하게 느껴질 수 있는 행동인데도 마치 메트로놈처럼 안정감을 주었다. 청우는 그 자국을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넌 왜 연애 안 하냐는 소리를 들어서.”

줄곧 반짝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던 이서가 고개를 돌렸다. 웃음기 담긴 시선 한 줌이 바람이 되어 가슴에 중적된 것들을 흩날리게 하는 듯했다.

“뭐, 연애하는 게 꼭 기본값인 것처럼들 말하지. 그치만 연애는 안 하는 게 더 좋지 않나?”

의외의 대답이었다. 사실 겉으로만 보면 이서는 연애 예찬론자의 선봉장일 것만 같았다. 이것도 편견이긴 하지만 적어도 권장할 줄 알았는데.

“왜 안 하는 게 더 좋은데?”

“귀찮아지잖아. 뭐든지 적당한 게 좋지. 적당히 못 할 거면 아예 안 하는 게 더 좋고.”

“……너랑 내가 하는 건?”

“우리가 하는 게 연애라는 자각은 있구나?”

이서가 고개를 훅 들이미는 바람에 청우는 얼굴을 뒤로 물려야 했다. 곧 그가 싱글대며 멀어졌다. 우리가 하는 게 연애라는 자각이……. 자신이 보기에는 이서 또한 있는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구태여 긁지는 않았다. 연애에 대한 퍽 냉담한 답변이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그걸 곱씹을 때 이서가 말했다.

“우리가 하는 건 너한테 유익하잖아.”

“그러냐.”

“그렇지. 그래서 오늘 기분이 안 좋았어?”

그것 때문에 기분이 안 좋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결국 그것 때문이었다. 그런 질문들이 불러오는 것들. 자각하게 하는 감정들. 스스로를 깎이게 하는 부정들.

문득 청우는 자신이 육 년간 숨겨온 비밀을, 감정을, 진실을 아는 사람이 이서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제가 그것을 털어놓은 사람 역시 그뿐이라는 것도. 늦은 자각에 숨구멍이 튀어나온 것만 같았다. 갯벌에 난 구멍처럼 크기가 아주 작았는데도 그 속에 숨을 수 있을 듯했다. 그래서 청우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 낮에……. 산영이랑 백화점에 갔어.”

“뭐야. 그걸 나한테 홀랑 숨겼어?”

“지금 말하잖아.”

“뭐어……. 그래서?”

“차건 생일 선물을 사는데 내가 골라 줬고.”

이서가 청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만 같아 청우는 그걸 피해 정면을 바라보았다. 이서는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턱을 괸 채로 말이 없었다. 그 정적이 오히려 참기 힘들어 돌아보자 그가 눈가를 찡그리며 기다렸다는 듯 입을 뗐다.

“마음이 아프네. 우리 청우가 호구 짓을 하고 왔다고 해서.”

“…….”

“앞으로 생각해. 네가 그럴 때마다 내 마음이 아플 거야.”

어쨌든 잘한 일은 아니니 웬만하면 알겠다고 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별로 안 와닿는데.”

“왜?”

“너 마음 안 아플 것 같아.”

이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큰 웃음을 터뜨렸다. 크게 벌어지는 입이 시원했다. 그가 한 손으로 가슴을 꾹 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큰일이야. 네가 날 너무 잘 아는 것 같아서.”

“내가 한 게 호구 짓이냐?”

“아니라고 하고 싶겠지?”

자신이 산영에게 품은 감정이 순수한 우정이었다면 제 행동에 대한 평가는 달랐을 테다. 그래서 벗어나고 싶은 거다. 스스로를 검열하는 짓을 그만하고 싶어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어쩌면 자연스럽게도 이서가 이야기했던 짝사랑이 떠올랐다. 저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 누군가를 홀로 사랑하는 일에 대한 자괴감으로 얼룩져 본 적이 있을까.

“넌 짝사랑했던 적 있어?”

“나? 있을 것 같아?”

“나한테 했던 말들……. 그런 경험 없었으면 나왔을까 싶어서.”

이서는 고개를 옆으로 한 번 까딱이더니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 그의 성격상 경험이 없다면 없다고 깔끔하게 말할 법도 한데, 침묵하는 걸 보니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다. 짐작하기는 했지만 신기했다. 어떤 사람을 짝사랑했을까. 이서에게 그런 말이 나오게 한 사람은 누구일까.

“말하기 싫음 하지 말고.”

“왜? 억울하지 않아?”

“뭐가.”

“난 네 사정을 다 아는데 넌 모르니까?”

“그런 걸로 억울하면 성격이 이상한 거 아니냐.”

그냥 좀 궁금한 것뿐이지, 악착같이 알아내고 싶은 건 아니었다. 애초에 제 감정을 들킨 것뿐 이서가 작정하고 캐낸 것도 아니고. 그래도 같은 경험이 있다는 게 마음을 좀 편하게 했다. 동질감이라는 것이 기름이 되어 자신과 이서 사이로 흘렀다.

이상한 성격. 이서가 청우의 말을 곱씹듯 중얼거리더니 픽 웃으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청우는 움찔했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어깨에 무언가가 닿은 탓이었다.

“너 귀 안 아프냐?”

“귀? 뚫을 때나 좀 아프지, 평소엔 별로?”

“누울 때도 안 아파?”

“응. 왜?”

“어깨 따가워.”

“뭐?”

이서가 고개를 들더니 제 귓바퀴를 만지작거리다가 또 웃음을 터뜨렸다. 하늘에 붙은 초승달을 떼어다 붙인 것만 같이 눈이 휘었다. 조금도 걸리는 것 없이 시원하게 이어지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청우는 손으로 바닥을 짚고 몸을 뒤로 기울였다.

순간 세찬 바람이 불면서 모래 알갱이가 허공에 흩날렸다. 그 사이로 보이는 별은 조금의 빛도 잃지 않고, 여전히 반짝였다.

청우는 카페에서 공부하는 걸 그리 즐기지 않는 편이었다.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나 사람들의 대화 소리, 특유의 어수선함이 집중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조별 과제 때문에 모임을 이곳에서 가졌고, 그들이 떠난 후 다음 강의까지 시간이 애매하게 남아 자리를 지켰다.

「공부? 벌써?」

벌써라기에는 시험까지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넌 뭐 하냐고 답장을 보내자 시간이 좀 지난 후 사진이 왔다. 메시지를 누르자마자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짓고 있는 이서의 얼굴이 떴다. 그런데 그의 뺨에 상처가 있었다. 청우는 미간을 찡그린 채 상처를 내려다보다가 전화를 걸었다.

[네에, 여보세요.]

“얼굴 왜 그래? 다쳤어?”

[걱정했어?]

늘어지는 목소리를 들으니 별일 아닌 듯했다. 하지만 이서라면 무슨 일이 있었어도 별일 아닌 척할 게 분명했다.

“무슨 일인데.”

[하하, 분장이야.]

“분장?”

[방금 사진 하나 보냈는데. 볼래?]

메시지가 왔다는 진동이 울려 핸드폰을 보자 이서 말대로 사진 하나가 와 있었다.

「민들레 꽃

대한대학교 영상학과 연극 동아리 희로애락 창작극」

영상학과 연극 동아리? 청우는 의아한 눈으로 연극 포스터에 적힌 글자들을 읽어 내리다가 맨 밑에 적힌 이름을 보고 머춤했다.

이서의 이름이 세 번째로 적혀 있었다. 이서가 영상학과라는 것도, 연극을 하고 있다는 것도 지금 처음 알았다.

“연극 해?”

[응. 보면 알겠지만 얼마 안 남아서 오늘은 분장도 하고 본격적으로 연습하는 중.]

“무슨 역이냐?”

[미리 말하면 재미없지. 보러 와, 마지막 날.]

“그래. ……근데 당장 이번 주 아니야?”

[응. 안 돼?]

“아니, 되는데……. 알았어.”

이런 거 준비하려면 엄청 바쁘지 않나. 학기 중에 과제와 시험공부까지 함께 소화하려면 힘들겠다 싶었다. 전화를 끊은 뒤에 청우는 포스터를 내려다보았다.

영상학과면 아무래도 영화 쪽일까. 연극도 영화도 다 이서와 어울렸다. 무언가를 창조해 내는 일이 그에게 잘 맞을 듯했다. 개성이 강한 편이니 그의 안에서 태어나는 것들은 특유의 매력을 지닐 게 분명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청우는 다시 공부에 집중했다. 집중하기 좋은 환경은 아니었지만 한번 몰두하면 한눈팔지 않는지라 시간이 꽤 지나고 나서 목이 뻐근해 고개를 들었다. 창밖으로 시선을 넘기며 목을 이리저리 꺾을 때, 사람들과 함께 걸어오는 이서의 모습이 보였다.

2층인 데다 바깥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지라 이서가 이곳을 볼 일이 없을 텐데도 청우는 고개를 뺐다. 얼굴이 멀쩡한 걸로 보아 분장은 그새 지운 모양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아마 연극 동아리 부원들인 듯했다.

“어? 쟤 네 전 남친 아니야?”

“어디? 아, 정이서네.”

뒤에서 갑작스레 시작된 대화에 청우는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볼 뻔했다.

“아, 씨발. 재수 털려.”

“왜? 안 좋게 끝났어?”

“뭐야, 내가 얘기 안 했나?”

본의 아니게 아는 사람의 이야기를 엿듣는 모양새가 될 성싶었다. 짐을 챙겨 나갈까 해서 시계를 볼 때, 목소리가 이어서 들려왔다.

“아니 쟤랑 사귈 때 좋아해서 사귄 건 아니었거든? 그냥 내 스타일이라서 한번 찔러 봤더니 지도 좋대서 사귄 거지. 근데 만나다 보면 마음이 갈 수밖에 없잖아? 그걸 눈치를 딱 깠는지 나도 까더니 그 뒤로 존나 재수 없게 구는 거야.”

“진짜? 뭐야, 왜 그랬대?”

“몰라. 처음부터 엔조이였다 이거지.”

불편함을 이기지 못하고 일어났다. 뒷자리를 스칠 때 시선이 느껴져 반사적으로 돌아보고 말았다. 검은 머리카락의 끝부분만 밝은색으로 염색하고 눈썹에 피어싱을 한 게 인상적인 여자였다.

적당한 연애. 청우는 머릿속에 순간 떠오른 말을 지우고 밖으로 나갔다.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첫 가을비였다. 흐르는 빗방울에 창이 뒤집어쓰고 있던 먼지가 씻겨 내려갔다. 청우는 산영을 기다리며 비 오는 풍경을 눈에 담았다.

강의가 끝나고 강의실 문이 열렸다. 하나둘씩 나오는 사람들에게서 비가 와서 싫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청우는 비 오는 날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쾌적한 실내에서 보는 풍경은 그런대로 운치가 있었으니까.

“청우야! 우리 저녁 뭐 먹을까?”

강의실을 나온 산영이 청우의 어깨에 손을 얹고 물었다. 오늘 함께 집에 가 완성한 과제를 서로 봐주고 나서 공부하기로 했다.

“배달 시킬까. 비도 오니까 빨리 들어가자.”

“그럴까? 좋아!”

강의동 밖으로 나오자 비 오는 날 특유의 흙냄새가 공기에 축축하게 스며들어 있었다. 타닥타닥 떨어지는 빗소리가 시원했다. 둘은 우산을 펴고 나란히 걸었다.

“아, 이서 연극한다는데 알아?”

“응.”

“저번 학기에는 귀찮아서 스태프만 했다던데 이번에는 배우로 올라가나 봐. 재밌을 것 같아. 건이랑 나는 첫날 가기로 했는데, 청우 너는?”

“나는 마지막 날.”

“와아. 근데 이서랑 언제 친해진 거야?”

산영이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였다. 청우는 입을 열었지만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단순히 친해졌다고 말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어떤 이유로 가까워졌는지 산영에게는 절대 알릴 수 없을 터였다.

“그냥, 어쩌다 보니 교양을 같이 들어서.”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완전한 진실 또한 아니었다. 산영에게는 숨겨야만 하는 사실이 불편하고 씁쓸했다.

“그렇구나. 둘이 친해져서 좋다. 이서가 좀 짓궂긴 하지만 착한 것 같아.”

“어……. 넌 정이서랑 언제부터 알았어?”

“난 건이랑 사귀고 나서 얼마 안 돼서! 둘이 집안끼리 아는 사이래. 그래서 친해 보였는데, 정작 둘은 안 친하다고 그런다?”

산영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자신이 보기에도 건과 이서는 퍽 친해 보였는데, 말로만 그러는 건지 아니면 실제로도 거리가 있는지 궁금했다. 이서에게 친한, 그러니까 속 깊은 이야기를 다 꺼내 보일 수 있는 관계가 있는지도.

지난번에 카페에서 우연히 듣게 된, 이서의 전 연인이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원래 그렇게 관계를 냉정하게 끊는 편인가. 뭐 어떻게 재수 없게 굴었길래…….

청우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저 생각뿐이라고 해도 쓸데없는 오지랖이 아닌가.

“청우야?”

“어.”

의아한 낯으로 돌아보는 산영과 다시 보폭을 맞추었다. 바람이 불면서 빗줄기가 들이쳤다. 우산을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이자 반대쪽의 전경이 보였는데, 그 속에 낯익은 사람이 있었다.

이서가 사회관 앞 정자에 앉아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정자는 덩굴이 얽힌 퍼걸러 형태였는데, 격자로 얹은 나무 지붕 사이로 빗방울이 다 떨어졌다. 그러니 저렇게 우산을 쓰지 않으면 비를 다 맞을 텐데…….

미간을 얕게 찌푸린 채로 쳐다보는 순간 시선을 느낀 건지 아니면 그저 우연인 건지 이서의 시선이 이리로 향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주춤하더니 이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사이 산영이 멀어졌고, 청우는 이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왜 저기서 저러고 있지? 우산이 없는 걸까? 차가 있는 놈이니 차를 타거나 차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면 택시를 부르면 될 일이었다. 아니면 누군가를 기다리는 중일 수도 있겠지.

청우는 자신과 눈이 마주치기 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이서의 표정을 떠올렸다. 언뜻 본 것뿐이었지만, 평소와 달리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이서가 그런 얼굴을 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제 생각이 맞을까. 가깝지 않은 거리였으니 착각일 수도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어느새 정문을 통과했다. 빗줄기가 그새 거세져 우산을 세차게 때려 댔다. 오늘의 비는 쉽게 그치지 않을 듯했다. 먹구름이 쉴 새 없이 몰려오고 있었다. 청우의 걸음이 다시 멎었다.

“산영아.”

“응?”

“미안한데, 오늘 하기로 한 거 내일이나 다음으로 미루면 안 될까?”

“어? 왜?”

“가 봐야 할 데가 좀 있어서…….”

산영과의 약속을 깨는 일이 벌써 두 번째였다. 미안한 마음에 표정이 굳어졌다. 산영이 동그란 눈을 굴리더니 물었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어, 그런 건 아니야.”

“음, 알았어. 그럼 다음에 하자. 우리 급한 거 아니잖아.”

“그래. 미안하다. 집 가서 연락하고.”

“응, 응. 잘 가.”

갑작스러운 상황에 짜증을 낼 법도 한데 산영은 조금도 타박하지 않고 해맑게 인사해 주었다. 미안한 마음이 커져 산영을 먼저 보내고 나서 그가 멀어지자마자 바로 뒤돌아 뛰었다. 머지않아 도착한 사회관에는 여전히 이서가 앉아 있었다.

얕게 고인 웅덩이에 빗방울이 떨어지며 파문이 일었다. 운동화의 앞코가 웅덩이를 밟자 절벅이는 소리가 났고, 위를 올려다보던 시선이 청우에게로 떨어졌다. 어떤 것도 담고 있지 않는 듯했던 무심한 눈이 순간 크게 뜨였다. 놀란 낯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이서를 향해 청우는 숨을 고르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가까이서 보니 이서는 젖어 있었다. 비 쫄딱 맞은 생쥐 꼴까지는 아니었으나 머리칼과 어깨가 축축했다. 우산을 기울여 머리를 가려 주자, 이번에는 청우의 등이 젖었다. 이서가 제 머리 위와 청우를 번갈아 보다가 짧은 웃음을 흘리며 제 옆을 가리켰다.

“앉아. 아, 젖어서 좀 그런가?”

벤치에 묻은 물방울을 손으로 털어 내는 걸 보다가 옆에 앉았다. 우산은 꽤 컸지만 두 남자의 몸을 완전히 가려 주지는 못했다. 청우는 이서 쪽으로 우산을 기울였고, 어깨 한쪽이 젖었으나 개의하지 않았다.

“여기서 뭐 하냐.”

“그냥, 비 구경.”

“무슨 청승인데.”

“왜 왔어? 산영이랑 가고 있었잖아.”

청우는 한숨을 삼켰다. 산영과의 약속도 깨고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말없이 미간을 구기자 이서가 멍하니 눈을 깜빡이더니 입가를 허물어뜨렸다.

“뭐야. 나 때문에 다시 온 거야?”

“…….”

“와, 이거……. 좀 감동인데.”

혀로 입꼬리를 꾹 누르며 웃는 낯이 어쩐지 얄미웠다. 청우는 혀를 낮게 차며 우산을 뒤로 살짝 기울여 위를 올려다보았다. 잎이 무성한 줄기 사이로 회색빛 하늘이 보였다.

“우산 없어?”

“있어, 차에.”

“차 두고 왜 여기서 이러고 있었는데.”

“그냥. 나 비 맞는 거 좋아하거든.”

내리는 비를 보며 짧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이서의 낯빛을 살폈다. 이상했다. 평소와 달리……. 웃는 얼굴이 흐릿해 보였다. 빗방울이 흐르는 창문처럼, 안개가 낀 이른 아침의 호수처럼. 청우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이서의 눈가를 툭 쳤다.

“무슨 일 있었냐?”

이서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그라들었다. 그의 시선이 다시 청우에게로 향했고, 갈색빛을 띤 눈에 어쩐지 희미한 날이 선 것만 같았다. 꼭 경계하는 어린 짐승처럼.

“넌…….”

이서가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어느새 빗줄기가 다시 옅어졌다. 아무래도 날씨 때문인지 밖에 나와 있는 사람이 없어 빗소리 말고는 고요했다.

“예민하네.”

이번에는 이서가 손을 들더니 청우의 눈가를 건드렸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한 번, 차갑게 느껴지는 손에 또 한 번 놀라 몸을 움찔하자 이서의 눈이 슬며시 휘었다.

“너는 안 좋아해? 비 오는 날.”

“난…….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아.”

“흐음. 그러고 보니까 네 이름 말이야. 비 우인가?”

“어.”

“그럼 앞 글자는?”

“푸를 청.”

“푸른 비? 예쁜 이름이네.”

부모님이 파란색을 좋아했고, 비 오는 날에 서로를 만났다고 했다. 작명소에 가서 비싼 돈을 주고 고심하여 고른 이름은 아니었지만, 자신을 낳은 부모가 좋아하는 것들로 이루어져 청우는 제 이름을 아끼는 편이었다.

이서가 고개를 기울이더니 웃는 눈으로 청우를 응시했다. 이목구비를 빤히 훑는 눈을 마주하고 있기가 어려워 시선을 피하자 그가 입을 뗐다.

“내가 그래서 너를 좋아하나 봐. 비라서.”

그의 말이 덜컹거리며 귓가로 와닿았다. 목소리가 비 사이로 스며들어서인지 평소보다 울림이 있었다. 청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게 연애하는 사이에 필수로 거쳐야 하는 말인지, 아니면 화제를 돌리기 위한 수작인지 알 수 없었다. 그게 뭐든 마음에 들지 않는 건 확실했다.

“너 손 차가워. 여기 얼마나 있었어?”

“글쎄. 별로 오래 있지는 않았는데……. 시간이 꽤 지났네.”

“뒤에 강의 없냐?”

“응, 넌?”

“없어.”

“음…….”

이서가 목소리를 낮게 흘리며 발을 까딱였다. 가끔 이서와의 시간에서는 정적이 더 편할 때가 있었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와 자신을 긴장하게 할지 몰랐으니까.

“그럼 우리 집 갈래?”

“너희 집?”

“응. 우산 보답 겸.”

이서가 눈으로 머리를 가리고 있는 우산을 가리켰다. 그리 보답을 받을 만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왠지 오늘 이서를 혼자 두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자 이서가 빙그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우산을 가져갔다. 따라 일어나자 그가 청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자, 가실까요?”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이서가 청우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몸이 딱 붙자 이서의 체온과 향, 젖은 천이 모조리 느껴졌다. 조금 떨어지려고 했지만 그럴 새도 없이 그가 뛰듯이 주차장으로 향하는 바람에 함께 발을 맞춰야 했다.

차에 올라타 이서가 카 오디오를 켰다. 가사가 없는 음악이 흘러나왔는데, 비 오는 날과 어울리는 선율이었다. 창밖의 풍경은 전체적으로 가라앉아 있었지만 사람을 축 처지게 하지는 않았다. 빗소리와 노랫소리. 차 안에서 흐르는 음 사이로 이서를 흘깃 보았다. 아까 정자에 혼자 앉아 있을 때보다는 표정이 나아진 듯해 다행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학교에서 꽤 거리가 있었지만 차로 오가기에 그리 멀지 않은 건물은 꽤 높고 컸다.

둘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이서가 버튼을 누른 층은 고층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소리를 제외하면 조용했고, 이서의 집에 간다는 생각에 어쩐지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들어와.”

청우는 이서의 집에 천천히 발을 들였다. 그를 닮아 개성 있게 꾸몄을 거라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집 안은 꽤 살풍경했다. 소품 따위는 없고 정말 딱 필요한 가구만 놓였는데, 그래도 이서의 취향이 담겼는지 눈길을 끌어당기는 구석이 있었다.

“앉아. 밥은 먹었어?”

“아니.”

“밥부터 먹을까? 나 옷 좀 갈아입고.”

옷을 갈아입고 나온 이서가 자연스레 주방으로 들어간 탓에 청우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소파에 앉았다. 블라인드가 걷힌 넓은 창 너머로 비에 잠긴 도시의 풍경이 보였다.

“볶음밥 괜찮아?”

“어.”

“집 구경 좀 하고 있어.”

멀뚱히 앉아 있는 것도 뭐해 자리에서 일어나 가장 안쪽에 자리한 방으로 들어갔다. 큰 침대와 협탁, 스탠드 하나가 놓인 침실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천장이었다. 사진과 포스터, 엽서 따위와 함께 야광 별이 천장에 붙어 있었다. 보통 저런 걸 천장에 붙이나. 야광 별은 좀 의외였다. 어두운 걸 좋아하지 않거나 애 같은 구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밖으로 나와 다른 방으로 향했다. 암막 커튼을 친 듯 어두워 불을 켜고 나서야 방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벽 한 면은 책장으로 꽉 짜여 있었고, 그 앞은 소파와 홈 시어터로 채워진 방이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기에 좋아 보였다.

방을 나오자 무언가를 볶는 소리가 들렸다. 더 구경할 것도 없어 식탁 앞에 앉자 이서가 그를 흘긋 돌아보았다.

“참고로 말하는데, 나 생긴 것만큼 요리를 잘하진 않아.”

“폼은 좋아 보이는데.”

“볶음밥은 쉬우니까.”

이서가 손목 스냅 몇 번으로 안에 든 것들을 섞고 나서 즉석 밥을 넣어 볶았다. 곧 완성되었는지 고소한 냄새가 났다. 예쁜 그릇에 햄과 채소가 섞인 볶음밥이 담겼다. 수저를 가져다준 이서가 “아.” 하더니 냉장고에서 케첩을 꺼내 밥 위에 하트를 그려 주었다. 청우는 그걸 보고 짧게 웃었다.

“먹어. 차린 건 없지만.”

“잘 먹을게.”

숟가락으로 밥을 크게 떠 한 입 먹었다. 청우는 눈썹 끝을 치켜세웠다. 요리를 못한다고 엄살을 부린 것과 다르게 꽤 맛있었다.

“맛있네.”

“그래? 다행이다.”

이서도 웃으면서 숟가락을 들었다. 둘은 잠시 말없이 배를 채웠다. 이서가 평소보다 먹는 속도가 느린 듯해, 청우는 그를 잠시 지켜보다가 물었다.

“침대 위에 그거 뭐야?”

“응?”

“야광 별이랑 사진 같은 거 있던데.”

“아아, 그냥 꾸며 놓은 거야.”

“보통은 벽에다 붙이지 않냐?”

“예전에 본 영화에서, 인간의 대부분은 천장을 보면서 생을 마감한다더라고1). 그 말을 듣고 생각했지. 난 흰 천장을 보면서 죽지는 말아야겠다.”

퍽 일리 있는 말이었다. 고개를 주억이며 밥을 다시 뜨던 청우가 멈칫했다.

“근데 그걸 벌써 꾸며 놨다고?”

“뭐, 비명횡사하지 않을 거란 보장은 없잖아?”

청우는 미간을 찡그렸다. 우리 나이대에 자기 방 천장을 보며 비명횡사하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 단순히 영화를 보고 기분을 내듯 실행에 옮긴 것인지 아니면 그런 상황을 가정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오래 살아라.”

무뚝뚝하게 던진 말에 이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내 장수를 기원해 준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다음도 있길 바란다.”

“그러려면 잘 살아야겠는데.”

은은한 미소가 감도는 장난스러운 얼굴. 확실히 기운이 좀 난 것 같았다. 청우는 이서에게서 시선을 떼고 그릇을 비웠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이서가 식탁 위를 정리한 뒤 잔 두 개를 꺼냈다.

“차 마실래? 허브차.”

“주면 먹고.”

“응. 향이 좋아.”

곧 잔이 내밀렸다. 상쾌하고 은은한 향이 코끝을 스치자 옅게 남아 있던 긴장감까지 전부 휘발되는 듯했다. 청우는 차를 불어 식힌 후 한 모금 머금었다.

“좋지?”

“응.”

“비 오는 날에 마시면 딱이야. 생각도 가라앉고.”

생각을 가라앉혀야 할 만큼 머릿속이 복잡했던 걸까.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서의 시선은 창밖에 머물러 있었다. 청우는 입술을 달싹였다.

“오늘……. 무슨 일 있었냐?”

“음?”

“무슨 일 있었으면, 내가 들어 줄 수는 있을 것 같아서.”

위로가 필요하다면 위로를, 조언이 필요하다면 조언을 서툴더라도 해 줄 수는 있었다. 이서가 원한다면, 그게 이서에게 도움이 된다면 말이다. 조심스럽게 대답을 기다리는데 이서가 다소 미묘해진 낯으로 청우를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청우야. 날 돌볼 생각은 하지 마. 난 이산영이랑은 다르니까.”

“……뭐?”

“지나치게 챙기고 살피는 거. 연애보다는 육아에 가깝잖아?”

자신이 산영을 좋아하는 방식에 대한 타박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제 말에 되돌려 주는 완곡한 거절이기도 할 테다. 청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서의 말이 불러오는 감정을 가라앉히려고 했지만 울컥 솟는 것을 참기가 힘들었다.

“너랑 내 사이에……. 이런 말 하는 것도 안 되냐? 이게 산영이랑 무슨 상관인데?”

길지는 않았지만 그간 시간을 함께 보내며 어느 정도는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서가 그의 입으로 우리 둘의 사이는 연인이라고 했다. 일 순위가 되자고. 그래서 물어본 것뿐이다. 이서가 자신의 진짜 연인이었다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물었을 테다. 꼭 연인이 아니더라도, 그냥 친구 사이여도 이 정도 이야기는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상한 기분을 채 숨기지 못하고 노려보자 이서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한숨을 흘렸다. 이내 잔을 쥐고 있던 손이 넘어와 청우의 손으로 향했다. 그가 청우의 손가락을 검지로 살살 훑었다.

“미안. 화풀이했다.”

“…….”

“사실 기분이 안 좋아. 동생이 비 오는 날에 죽었거든.”

이서가 무슨 말을 하든 지금의 기분이 풀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에 풀썩 피어올랐던 감정들이 전부 씻겨 내려갔다.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 동생이 비 오는 날에 죽었다. 그래서 좋아하던 날들을 좋아할 수 없게 된 걸까? 이서에게 동생이 있었다는 사실은 처음 들었다.

청우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그러자 이서가 짧게 웃었다.

“슬픈 이야기는 아니야.”

“마음이 안 좋았겠네.”

“뭐어……. 오래전 일이야, 오래된 이야기.”

이서는 무언가를 털어 내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의연함은 성숙에서 비롯한 걸까, 체념에서 태어난 걸까. 청우는 여전히 제 손가락을 쓸고 있는 그의 손을 보다가 물었다.

“비 오는 날마다 그래?”

“아니. 복불복 상자 같은 거야. 대신 내가 선택할 수 없고, 상자의 뚜껑은 하늘에 있지.”

“고생이네.”

“고생이랄 것까진 없고.”

웃는 눈이 제 얼굴을 훑었다. 이서의 시선을 통해 조금 전의 그는 날이 서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다행히 지금은 완전히 보드랍게 풀린 채였다.

“영화 볼래? 기분 전환 겸, 내 취미도 같이 즐겨야지.”

“그래.”

“일어나시죠.”

이서가 잔을 들고 홈 시어터가 마련된 방으로 들어갔다. 소파에 앉자 그가 책장에서 블루레이 디스크를 하나 꺼내 왔다.

“이거 내가 좋아하는 영환데, 좀 잔인할 수도 있어. 괜찮아?”

“어, 상관없어.”

이서가 영화를 재생한 뒤 불을 끄고 돌아와 청우 옆에 앉았다. 무슨 내용인지 모르기에 영화에 더 집중해야 했는데 굳이 노력을 기울일 필요 없이 흡인력이 좋아 금방 빠져들었다. 화면이 크고 소리가 빵빵하니 보는 재미가 있었다. 영화 속 배경은 비 내리는 이곳 날씨와는 달리 맑고 화창했다.

영화를 보다 보니 장르가 미스터리일 것 같다는 짐작을 했다. 옆을 흘깃 보니 이서 또한 몰두해서 보는 중이었다. 좋아하는 영화라더니, 또 보는 것인데도 좋은가 보다.

다시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릴 때였다. 절벽에서 떨어진 남자의 얼굴이 으깨지고, 그 모습이 클로즈업되어서 청우는 움찔했다. 이거, 그냥 ‘좀’ 잔인한 정도가 아니지 않나……? 기껏해야 목에 칼이 들어가 피가 튀는 정도를 생각했던 청우는 이서를 돌아보았다. 시선을 느낀 이서가 고개를 돌렸다.

“왜? 아, 좀 심해?”

“이게 ‘좀’은 아니지 않냐?”

“아……. 제일 약한 걸로 고른 건데. 보기 힘들면 그만 볼까?”

이게 제일 약한 거라고? 청우는 황당함을 숨기고 잠시 말을 골랐다.

“너…… 괜찮아?”

“어? 하하! 정신 상태는 이래 봬도 멀쩡해. 아마도?”

이서가 웃는 낯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괜찮다니 다행이었다. 타인의 취향을 폄하할 생각은 없었다.

“볼만해.”

“그럼 다행이고. 그래도 이거 나름 힐링 영화야. 내가 갖고 있는 것 중에서는.”

이서가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것을 흘리고는 청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힐링 영화라고? 청우는 이서의 말을 곱씹다가 편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예전처럼 그의 무게가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영화가 중반을 좀 넘었을 때, 숨소리가 들려 흘긋 보니 이서가 눈을 감고 있었다. 아무래도 잠이 든 모양이었다. 청우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리모컨을 들고 소리를 줄였다.

시시각각 바뀌는 스크린의 빛이 이서의 얼굴을 다채롭게 밝혔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밀폐된 공간에서 평소에 보고 들을 수 없는 풍경과 소리가 쏟아지는 영화를 보고 있자니 꼭 현실과 유리된 다른 세계에 발을 들인 것만 같았다. 평온이 차올라 무릎까지 잠긴 기분에 흠뻑 빠진 채 청우는 다시 영화에 집중했다.

영화가 끝나고 나니 이서가 어떤 이유에서 이 영화를 힐링 영화라고 말했는지 일부 이해할 수 있었다. 무엇으로든 위안을 받았으면 되었다. 몽롱한 여운에 사로잡혀 있던 청우는 이서를 돌아보았다. 불편한 자세로도 곤히 잠든 것을 보니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다.

조심스레 이서의 머리를 받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뒤 그를 소파에 눕혔다. 침실에서 이불을 가져와 이서의 위에 덮어 주고 나서 무릎을 굽혀 앉아 잠시 그를 내려다보았다. 장난기도 웃음기도 없는, 모든 감정이 사라진 백지 같은 얼굴은 언뜻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눈길을 끌어당겼다. 자는 모습은 누구나 천사 같은 걸까. 눈 뜨고 입을 나불댈 때는 간혹 얄밉고 어디로 튈지 모르겠는데, 이렇게 가만히 있으니 마음 놓고 볼 수가 있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불쑥 튀어나온 손이 손목을 잡아채는 바람에 다시 주저앉아야 했다.

“정이서?”

장난을 치는 건가 싶어 불러 보았지만, 이서는 칭얼거리듯 짧은 신음을 흘리며 청우의 손목을 잡은 채로 뒤척였다. 여기서 손목을 빼면 깰 것 같아 청우는 하는 수 없이 가만히 있었다.

저런 영화를 보고 자면 악몽을 꾸는 거 아닌가. 청우는 이서의 미간에 얕게 진 주름을 보다가 그의 숨소리가 다시 안정되는 걸 듣고서 어둠에 잠긴 허공 어딘가로 시선을 돌렸다.

불편한 자세로 잠이 들고 말았다. 다리가 저려 선잠에서 깼을 때, 청우는 손가락 사이사이로 무언가가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아마 이서의 손가락인 듯했다. 이서가 손을 쫙 폈다가 다시 쥐면서 손가락이 안으로 말렸다. 그는 마치 죄암질하듯 청우의 손을 쥐었다가 놓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잠에서 깼지만 어쩐지 기척을 낼 수가 없었다. 단단한 뼈마디와 부드러운 피부,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 여린 살의 마찰. 눈을 감고 있어서인지 이서의 감촉이 선연하게 느껴졌다.

뭐 하는 거지? 혹시 잠버릇인가? 청우는 망설이다가 눈을 떴다. 눈을 몇 번이나 깜빡이며 어둠에 익숙해졌을 때, 옆으로 돌아누운 채로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던 이서와 눈이 마주쳤다. 이서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여전히 청우의 손을 쥐었다가 펴고 있었다. 정적도 색을 가질 수 있다면 아마 이 정적은 흐릿한 보랏빛일 게 분명했다. 보랏빛 안개가 피부를 야금야금 먹어 치우는 듯한 기분이었다.

청우는 마른침을 삼키며 손을 당겼다. 맞닿은 손가락이 스르륵 스치며 떨어졌다. 소파 아래로 손을 내려 괜히 혼자 주먹을 쥐었다가 펼 때였다.

“왜 여기서 잤어. 들어가서 자지.”

이서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은 울림을 띠고 귓가를 간질였다. 청우는 잠긴 목을 풀고 말했다.

“잘 생각은 없었어.”

“침대 가서 자.”

“아니야. 집에 가야지, 이제.”

고개를 돌린 청우는 지금 시간을 짐작할 수 없어 미간을 찡그리며 일어났다. 창가로 향하는 내내 시선이 따라붙는 것처럼 느껴졌다. 숨을 작게 삼키며 커튼을 열자 희미한 빛이 새어 들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인 듯했다.

“아직 해도 안 떴는데.”

“택시 타면 돼.”

어쩐지 여기서 잠까지 자고 가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머리칼을 괜히 매만지며 뒤를 돌자, 어느새 일어나 앉은 이서가 보였다. 어깨에 걸쳐진 이불이 느릿하게 아래로 흘러내렸다. 이서가 몽롱한 낯으로 웃었다.

“데려다줄게.”

“됐어. 더 자라.”

“손님을 이렇게 보낼 순 없지. 어차피 잠도 깼고. 한번 깨면 또 자기 쉽지도 않아.”

만류하려고 했으나 이서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앞서 나갔다. 청우는 한숨을 흘리며 따라갔다.

차에 올라타 밖으로 나왔다. 새벽빛을 품은 하늘은 나름의 낭만을 펼치고 제 아래 풍경을 감싸 안고 있었다. 차창을 살짝 열자 상쾌한 공기가 새어 들어왔다. 비가 그친 뒤의 세상은 그 색이 조금 더 짙었다.

“오랜만에 꿈도 안 꾸고 푹 잤어.”

“그러냐.”

“응. 정말 오랜만이야.”

혼잣말을 하듯 작게 중얼거리는 이서를 흘깃 보았다. 그는 조금 가라앉아 보였는데, 비를 맞을 때와는 달랐다. 평소보다 색채가 옅은 느낌. 요즘 들어 이서의 다양한 얼굴을 보는 것 같았다. 문득 처음 이서를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안녕. 산영이 친구?’

‘안녕’보다는 ‘안녀엉’에 가까운 인사. 제 주변 남자 지인들에게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밝은색의 머리칼과 독특한 옷차림, 처음 만난 사이면서도 거침없이 다가와 의자를 빼고 앉던 태도. 잠깐 이야기를 하고 떠나기 전 자신을 향했던 웃는 시선.

사실 그때는 이서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이서는 그때부터 제 마음을 알아차렸던 게 아닐까. 전부는 아니었을지라도.

누군가 그때 너는 이서와 이런 관계가 될 거라고, 거짓이지만 연애를 하게 될 거라고 말했더라면 자신은 황당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비웃었을 테다. 세상일은 정말 모를 일이다. 절대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던 놈과 가장 가까운 일상을 보내게 되었으니까.

“자, 도착.”

이서가 입을 열고 나서야 청우는 생각에서 깨어났다. 익숙한 건물이 보였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피곤하니 얼른 들어가야 마땅한데도 머뭇거리게 되었다.

“잘 가. 어제오늘 고마웠어.”

그가 그린 듯한 미소를 입에 건 채 말했다. 정이서 표정의 기본값. 가라앉아 보이던 모습은 어느샌가 사라져 있었다. 청우는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심해서 들어가라.”

“응.”

차에서 내려 걸음을 떼자 뒤에서 차창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이서가 장난스러운 낯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고개를 설핏 끄덕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건물 입구에 다다라 청우는 생각할 새도 없이, 저도 모르게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이서는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웃음기 없는 낯으로. 무언가를 골몰하듯이. 그러나 그것은 찰나였을 뿐, 입꼬리가 올라감과 동시에 차창이 천천히 닫혔다. 이윽고 차가 떠났다. 배기음이 물러간 뒤로 공기가 수런거렸다. 청우는 아, 하고 숨이 섞인 목소리를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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