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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 걸음 (2/16)

2. 한 걸음

강의실에 들어가기 직전 청우는 잠시 망설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서가 있을 것이다.

며칠 동안 수강 취소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불편한 얼굴을 더는 보기 싫었고, 또 헛소리를 들을까 봐 엮이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미 과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한 조가 된 이상 그 책임은 져야겠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청우는 문을 열고 들어가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머리를 찾았다.

이서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제 일행들과 모여 앉은 그는 턱을 괴고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는데, 옆에 앉은 여자가 그의 머리칼을 매만지는 중이었다. 누가 보면 커플로 오해할 수도 있는 모습이었다. 어딜 가든 인기는 많을 것 같았다. 그가 왜 제게 그런 제안을 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었다.

어떻게 할까. 일단 자리에 앉자. 그렇게 지난주에 앉았던 자리를 찾아가는데, 이서의 고개가 귀신같이 돌아왔다. 청우를 발견한 그의 입가에 점점 미소가 번졌다. 이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청우의 옆으로 다가왔다.

“왔네.”

“어.”

“올 줄은 알았는데……. 진짜 오니까 반갑네.”

그가 싱글거리며 청우 옆에 앉았다. 말을 의미심장하게 하는 것 좀 그만하면 안 되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조용히 필통에서 펜을 꺼내자 이서가 손을 내밀었다.

“나도 펜 좀.”

“안 갖고 왔어?”

“응. 멋없잖아, 필통.”

청우는 미간을 찌푸리고 잠시 제 필통을 쳐다보았다. 남색의 민무늬인 얇은 캔버스 필통이었으나 멋없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펜을 멋으로 가지고 다니나. 청우는 필통에서 펜을 하나 꺼내 건넸다. 이서는 그것을 원래 제 것이었던 양 손에서 휙휙 돌렸다. 현란한 움직임에 청우는 잠시 그의 손에 시선을 빼앗겼다. 희고 부드러워 보였지만, 마디마디가 툭툭 튀어나온 큰 손이었다. 그런데 그 손이 펜을 놓더니 눈앞으로 불쑥 다가왔다.

목이 뻣뻣해졌다. 멍하니 눈을 끔뻑이자, 곧 손이 거둬지더니 장난스러운 얼굴이 웃었다.

“재미있는 소식 하나 알려 줄까?”

“재미있는 소식?”

“오늘 차건이 산영이 일하는 카페에 간다고 하던데.”

건이 자발적으로 산영의 카페에 간다는 말인가?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한 주가 지났으니 산영과 건의 사이가 다시 발전했을 수도 있다.

왜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는 걸까. 청우는 무뚝뚝한 낯으로 이서를 응시했다.

“가야 할걸?”

“왜?”

“상처받을 테니까.”

손끝이 꿈틀했다. 건이 무슨 일이라도 벌인다는 소리인가. 설명을 바라는 낯으로 쳐다보았지만, 이서는 더 말을 보태지 않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얼굴로 펜을 빙빙 돌릴 뿐이었다.

신경이 쓰였다. 무슨 이유로 산영이 상처받을 거라 단정 짓는 걸까. 차건이 정말 무슨 일이라도 벌이려는 걸까.

하지만 매우 심각한 일이 아니라면 산영과 건 사이에 끼어들 생각은 없었다. 건이 기억을 잃기 전에도 둘은 종종 싸우곤 했고, 여러 일이 있었지만 결국에는 둘의 일이었다. 자신이 끼어들 곳은 없는.

제게 짝사랑을 그만두라는 논조로 말했던 이서가 왜 이런 말을 전하는지 알 수 없었다. 청우는 다시 능숙하게 펜을 굴리는 손가락을 응시하다가 펜을 빼앗았다.

“정신 사나워.”

무뚝뚝한 한마디에 이서가 씩 웃었다.

가지 않으려고 했다. 건과 산영의 일이니까. 하지만 만일 산영이 상처를 받을 일이 생긴다면 위로라도 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합리화는 아니었다. 자신의 포지션은 늘 그쯤에 있었다. 옆에서 힘이 되어 주는 친구. 애인과는 나눌 수 없는 부분을 채워 주는.

청우는 결국 집으로 가던 발길을 돌려 카페로 향했다. 평소였다면 산영의 얼굴을 잠깐 보고 갈 수 있어 발걸음이 가벼웠을 테지만, 지금은 한없이 무겁기만 했다. 건이 산영에게 정말 상처를 줄까 봐 염려가 되기도 했으나 이서에게 휘둘린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휘둘리느냐 마느냐는 그리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

카페가 코앞이었다. 청우는 숨을 크게 한 번 내쉬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풍경에 자연스레 굳을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덩치가 커서 눈에 쉽게 띄는 건이 카페 정중앙에 놓인 테이블에 여자와 함께 앉아 있었다. 마주 보지 않고 나란히 앉은 채로 건은 여자의 긴 머리카락을 손으로 가지고 놀았고, 여자는 건의 어깨에 머리를 대고 노닥거렸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연인으로 오해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청우는 솟아오르는 분노를 겨우 누르며 카운터를 돌아보았다. 산영이 그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자신의 애인을 함부로 대하고, 상처를 주는 일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기억을 찾고 나면 다시 산영을 사랑하고, 사과할 테니 모두 없던 일이 되는 건가? 그렇다면 산영이 앓아야 할 불안과 혼자서 끌어안아야 할 상처는.

산영이 부디 어떤 상황에서도 그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나기를 바랐다. 설령 기억이 아닌 사랑을 잃더라도 그를 위해 줄 수 있는.

청우는 건에게로 걸어갔다. 인기척을 느낀 건이 눈을 들었다가 일순 굳은 표정을 풀고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너 뭐 하냐.”

“우리가 이렇게 친밀한 사이였나? 내가 기억은 없지만 아닐 것 같은데.”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사납고 날카로웠다. 눈치챈 마음을 헤집고 할퀴고 조롱하는 눈이었으나 전혀 상처가 되지 않았다. 청우는 제 마음이 부정하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건보다 먼저 산영을 만났고, 그보다 먼저 산영을 마음에 품었다. 둘이 교제한 후에 산영을 흔들어 보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결코 없었다.

산영을 좋아하지 않았어도 지금과 같은 행동을 했을 테다. 산영은 제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좋은 사람이자 친구였으니까.

“그만해. 이렇게 해서 네가 얻는 게 뭐야.”

“글쎄. 나는 손익을 생각해서 행동한 적이 없는데.”

“…….”

“내가 원해서 하는 행동이라면 그게 내 이득이야. 그러니까 좆같은 눈 치우고 꺼져.”

분위기가 험악한 탓인지 산영이 머뭇대다가 카운터에서 나왔다. 작은 인기척을 알아차린 건의 시선이 곧바로 그에게 향했다. 건은 산영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여자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가까워진 남녀의 얼굴에 산영의 눈이 울먹울먹해질 찰나였다. 청우는 참지 못하고 건의 멱살을 잡아 올려, 그의 뺨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만만찮은 힘에 의자에 앉아 있던 건의 몸이 옆으로 기울며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의자까지 함께 넘어지며 요란한 소리가 나자 카페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하.”

건이 헛웃음을 흘리며 맞은 뺨 안쪽을 혀로 밀어 냈다. 청우를 비스듬히 올려다보는 눈이 매서웠다. 안 그래도 사납게 생긴 데다 덩치가 큰 건이 작정하고 얼굴을 굳히니 분위기가 더욱 살벌해졌다. 건이 순식간에 몸을 일으켜 청우에게로 주먹을 날렸다.

“건아! 청우야! 그만해!”

산영이 달려와 말렸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주먹과 주먹이 오갔다. 건에게 한 대 맞을 때마다 골이 울렸다. 아무래도 힘의 차이가 느껴졌다. 도장에서 연습 상대나 샌드백을 마주하고 주먹을 지르고 치던 자신과 달리 건은 정말 사람을 때릴 줄 아는 사람 같았다. 청우는 이를 악물었다. 처음으로 저지른 폭력이었지만 어떤 후회도 없었다.

청우가 주먹을 올려 치면 건은 내리꽂았다. 둘은 엎치락뒤치락하며 싸웠고, 꽤 둔탁한 파열음이 오갔다. 건이 다시 한번 주먹을 들어 몸을 일으키는 청우를 가격하려 할 때였다. 산영이 달려들어 건의 앞을 막았다. 그가 눈을 크게 뜨며 탄력을 받은 손을 겨우 비틀었지만, 손이 산영의 머리를 스치면서 고개가 꽤 크게 흔들렸다.

“산영아!”

“야!”

건과 청우가 놀라 동시에 달려들었으나 건이 먼저 산영을 품에 안았다. 그가 산영의 머리를 재빠르게 쓰다듬으며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괜찮아? 네가 왜 거기……!”

산영이 아파서 눈가를 찡그리는 와중에도 작게 웃었다. 건이 기가 막힌 듯 그러나 한편으로는 분노가 누그러진 낯으로 산영의 얼굴을 살폈다.

“나 걱정해 주는 거야?”

“……넌 씨발, 지금 그런 말이 나와?”

“걱정해 줘서 좋다, 건아. 근데 어떡해. 너 여기 피 나.”

산영이 울상을 지으며 소맷단으로 건의 입가를 톡톡 두드렸다. 건은 움찔해서 산영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일어나 그를 훌쩍 안아 올렸다.

“어어!”

“병원 가자.”

“건아, 나 알바…….”

“시끄러워.”

“아, 청우야……!”

산영이 버둥거리며 청우를 돌아보았으나 건의 태산 같은 몸에 가려졌다. 건은 성큼성큼 다리를 내뻗어 카페를 빠져나갔다.

남은 사람은 청우 혼자였다. 그는 고개를 떨군 채 나동그라진 의자를 흐린 초점으로 눈에 담았다. 문득, 이산영이라는 아이를 처음 인식하게 되었던 때가 떠올랐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학기 초였고, 1학년 때부터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다른 아이들은 잘 알지 못했다. 쉬는 시간에는 늘 자거나 친구들과 매점에 갔으며 주변에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같은 반에 괴롭힘을 당하는 애가 있는 줄도 몰랐다. 어느 날 주변이 시끄러워 고개를 돌리니, 구석에서 왜소한 남자애가 다른 남자애들에게 둘러싸여 머리를 툭툭 맞고 있었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여럿이서 한 명을, 그것도 저렇게 작은 아이를 괴롭히는 건 비겁한 일이었다. 한마디 해야겠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날 찰나였다. 먼저 선수를 친 아이가 있었다.

‘야! 그만해!’

퍽 작고 마른 아이였다. 동글동글한 뒤통수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는 주먹을 꼭 쥐고 덩치 큰 남학생들을 상대로 크게 소리쳤다. 만류하는 친구들의 눈빛은 그 아이에게 전혀 가닿지 않는 듯했다.

‘넌 뭐야? 꺼져라.’

‘너네가 그만하면 갈게. 지금 엄청 나쁜 짓 하고 있는 거야.’

‘엄청 나쁜 짓 하고 있는 거야? 뭐 교과서 읽냐?’

남학생이 아이에게 다가가더니 머리통을 손가락으로 퍽퍽 밀어 댔다. 적지 않은 힘에 아이가 밀려났지만, 그때마다 아이는 굳건한 오뚝이처럼 제자리를 찾아갔다.

작고 마른 아이가 어떤 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든든한 나무처럼 보였다. 모두가 부조리를 보고도 애써 침묵하며 방관하는 상황에서 거침없이 나서는 게 대단하게 느껴졌다.

실랑이가 오갔고, 남학생이 주먹을 치켜드는 순간 청우가 나섰다. 그는 그때도 키가 컸고 인상이 차가운지라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상대였다. 남학생이 잡힌 손을 움찔하며 청우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넌 뭐야?’

‘적당히 해라.’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힘의 차이에서 밀리자 남학생의 얼굴이 벌게졌다. 모두가 아닌 척 그들에게 집중하고 있었고, 여기서 밀리는 순간 우습게 보일 게 뻔했다. 이 세계에서는 서열이 중요했다. 그랬기에 이 뭣도 모르는 놈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 주어야 했다. 생각을 마친 남학생이 잡히지 않은 주먹을 청우에게 날릴 때였다.

‘아!’

아이가 남학생의 주먹을 막아 보겠다고 달려들다가 광대에 빗맞아 나동그라졌다. 청우는 어이가 없어서 남학생의 손을 놓고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충분히 피할 수 있었는데도 굳이 나서서 맞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야, 괜찮아?’

‘응. 우리 한 번씩 구해 줬다.’

아이가 고개를 들더니 활짝 웃었다. 광대는 벌겋게 부어서 아플 텐데도 조금의 티끌도 없이. 그때 무슨 향이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아주 청량한. 초여름의 부서지는 햇빛과 바람에 흔들리는 연녹색 나뭇잎. 그런 것과 같은.

“와, 뭐야. 나 지금 게이 치정극 목격한 거야?”

오래지 않은 시간 속에서 빠져나온 건 여자의 목소리, 그리고 어떤 향 때문이었다. 쌉싸름하고 상큼하면서도 희미하게 비 냄새가 나는 듯한.

“그러게 왜 따라와서 못 볼 꼴을 보고 그래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끝음절이 조금 늘어지는 듯한 말투. 아래를 내려다본 채 눈만 돌리자 연한 청바지 아래로 드러난 발목이 보였다.

“비싼 밥 사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있어? 근데 막상 당사자가 날 버리고 가 버렸네?”

“그러게 차건이랑 어울리지 말라니까.”

“왜. 걔 딱 내 취향이야.”

“차건보단 내가 낫지 않아요?”

“넌 내 취향 아니야.”

“취향은 아니어도 궁합은 맞을지도 모르잖아.”

장난인지 진심인지 모를, 이서가 던진 말에 여자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아무래도 여자는 특정한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 건이 섭외한 모양이었다. 이 상황이 코미디 같았다. 안 맞는 옷을 입고, 한 번도 와 보지 못한 곳에 온 것만 같았다. 아니 어쩌면 입어서는 안 되는 옷을 입고, 있어서는 안 되는 곳에 발을 들인 걸지도 모르겠다.

청우는 손을 들어 올려 이마를 쓸었다. 자신이 초라해지는 기분. 비록 제 마음을 밝히지는 못했지만 늘 최선을 다했고, 전혀 비겁하거나 부정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합리화는 아니었을까. 간혹 그런 생각이 발목을 붙잡곤 했다. 포기하는 게 맞지 않느냐고. 네 마음이 어쩌면 산영에게는 기만일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짝사랑도 습관이니까.’

문득 그저 흘려듣기로 하고 잊어버렸던 말이 떠올랐다. 고개를 들자,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나 이서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내 사랑이 습관일까. 육 년간 산영만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선을 넘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며……. 이대로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 애와 서로 마음이 통하는 상상도 해 보았으나 진실로 바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다일까. 차건과의 연애를 단 한 번도 순수하게 응원한 적 없으면서 제 감정이 깨끗하고 정당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제 사랑이 의심할 만하기에 의심하는 건지, 혹은 이렇게 비겁하게 생각하며 포기할 명분을 만들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럼, 너한테만 소중한 그 구질구질한 사랑은 언제 끝낼 수 있는데?’

청우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네 말대로 구질구질하네.”

힘없이 읊조린 말에 이서의 눈가가 움찔했다. 그는 손을 들어 올려 청우에게 뻗으려다가 손가락을 안으로 말아 넣었다. 손이 다시 떨어지고, 이서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뻔하잖아.”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는데.”

“어?”

“사람으로 사람을 잊는 게 가능해?”

거의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답지 않게 충동적으로 묻고 말았다. 지금 심정으로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마음을 버리고 싶었다. 산영 옆에서 오로지 친구로, 그의 사랑까지 순수하게 응원할 수 있기를 바랐다. 산영에게 가장 친한 친구이나 친구가 아닌 채로 제 마음을 속이는 일은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바로 그렇다고, 아주 가볍게 말할 줄 알았던 이서는 예상외로 침묵했다. 그는 알 수 없는 얼굴로 청우를 얼마간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해 보면 되지, 한번.”

청우가 아는 이서답지 않게 그리 자신 있지도 뻔뻔하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강의실에 들어가기 전 청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번 그 일 이후 산영에게 전화가 왔고, 찾아온다고 했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말렸다. 산영은 울먹이며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그가 사과할 일이 아니었다. 다만 그의 얼굴을 보기 힘들 것 같아 애써 밀어 냈다.

오늘은 산영과 같은 강의를 듣는 날이었다. 평소라면 산영과 나눌 이야기를 생각하고, 이 짧은 시간을 소중히 여겼을 테다. 하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요즘 들어 평소와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사고가 난 사람은 건인데 어째서 자신이 이렇게 영향을 받는지 모를 일이다.

불현듯, 아니 어쩌면 필연적으로 이서가 떠올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이.

‘망설이지 마. 포기는 빠를수록 좋은 법이야.’

육 년 만의 포기가 빠르다고 할 수 있을까. 헛웃음을 삼키며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산영과 눈이 마주쳤다. 아마 자리에 앉은 순간부터 문소리가 날 때마다 돌아본 모양이었다. 청우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그의 옆으로 가 앉았다.

“청우야…….”

산영이 청우의 얼굴을 보고 울상을 지었다. 광대에 든 멍이 아직 빠지지 않았고, 입술은 터져 있는 채였다. 청우는 머쓱한 낯으로 입가를 긁적였다.

“병원은 다녀왔어?”

“이거 가지고 병원은 뭘. 약 발랐으니까 걱정하지 마.”

“미안…….”

“미안해하지도……. 안 미안해도 돼. 내가 먼저 덤빈 거잖아.”

건의 일로 산영에게 사과를 듣고 싶지 않았다. 다시 돌아가도 그렇게 했겠지만, 주제넘은 참견이었다.

“차건은. 좀 괜찮아?”

“으응, 건이는 원래 튼튼하니까…….”

“아무튼 너한테도 미안하다. 못 볼 꼴 보였네.”

“아니야! 청우 네가 화날 만했어.”

친구로서 화낼 만한 일이었다고, 산영은 그렇게 받아들이는 걸까. 그것을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생각보다 친구이기에 용인되는 일은 아주 많았다. 그것을 걷어차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다.

“너는 어때.”

“나?”

“맞은 데. 멍은 안 들었네.”

“응, 건이가 힘을 빼서.”

마음은? 상처를 받은 건?

묻고 싶었으나 말을 줄였다. 산영은 상처를 받아도 금방 훌훌 털어 내는 성격이었다. 상처를 준 사람을 미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포용할 줄 알았다. 청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가 폈다. 산영에게서 애써 시선을 떼어 내고 가방에서 교재를 꺼냈다.

“오늘 우리 맛있는 거 먹자.”

“뭐 먹고 싶은데?”

“나 말고, 청우 네가 먹고 싶은 걸로 먹자. 내가 쏠게!”

산영이 미안한 기색이 여전히 남아 있는 얼굴로 해맑게 웃었다. 청우는 메뉴를 생각해 보겠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가 들어오고 강의가 시작되었지만 집중력이 떨어졌다. 교양은 조금 놓치더라도 크게 문제가 없었지만 제 집중을 흩트리는 게 무엇인지 알기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청우는 한숨을 삼키다가 시야에 걸리는 제 필통을 내려다보았다. 멋없나. 시답잖은 생각을 하다가 이서를 떠올렸다.

돌이켜 보면 사람으로 사람을 잊는다는 말은 일리가 있으나 이서로 산영을 잊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서는 겉보기에 연애 경험도 많아 보였고 그 나름의 매력이 충분하겠지만, 산영을 잊을 만큼 그를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좋아하게 되더라도 문제가 아닌가. 사람으로 사람을 잊는다는 건, 결국 좋아하는 사람을 대체한다는 말일 텐데. 청우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가 말하는 방식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 연락하지 말자. 바보 같은 짓이다. 잠깐의 충동적인 감정에 휘둘려 어리석은 일을 해서는 안 됐다. 게다가 이서와는……. 이보다 더 깊게 얽히고 싶지 않았다. 제 마음을 들키고 말았지만 자신은 이서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속을 알 수 없는 놈이었고, 불편했다.

그렇게 결정하고 나자 조금은 후련해졌다. 청우는 중간부터 강의에 집중할 수 있었다.

“먹고 싶은 거 생각했어?”

강의가 끝나고 던져진 산영의 물음에 그제야 메뉴를 자신이 정하기로 했다는 걸 깨달았다. 평소 산영의 말을 허투루 흘린 적이 없는지라 다소 당황스러웠다. 청우는 솔직하게 고개를 저었다.

“먹고 싶은 거 생각 안 나?”

“어, 그러네.”

“그럼……. 어? 잠깐만.”

울리는 벨 소리에 산영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얼핏 본 화면에는 「♡건이♡」라는 글자가 떠 있었고, 산영의 낯에 화색이 돌아서 청우는 시선을 돌렸다.

“청우야, 나 잠깐 전화 좀 받아도 돼?”

“어, 받아.”

“고마워. 응, 건아.”

새가 재잘대는 듯한 생기 있는 목소리. 산영이 건의 앞에서 특별히 잘 보이려고 노력하거나 내숭을 떠는 건 아니었지만, 확실히 건과 있으면 더 밝아졌다. 청우는 쓰라린 입가를 매만졌다.

“나 지금 정문 내려가는 중이야. 청우랑 밥 먹으려고. 건이 넌? ……어? 건아? 끊겼다.”

산영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청우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정문을 막 통과할 때였다. 클랙슨 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둘의 고개가 동시에 소리가 난 쪽으로 돌아갔고, 낯익은 차가 보였다.

번쩍거리는 검은색의 외제 SUV에서 건이 내렸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 산영에게 다가왔다. 시선이 청우에게 스치며 미간에 주름이 가긴 했지만 잠시였다.

“건아! 나 기다렸어?”

“밥 먹으러 가자.”

“어? 어, 나 청우랑 먹기로 했는데…….”

산영이 눈썹을 팔자로 내리며 건과 청우를 번갈아 보았다. 건이 고개를 삐딱하게 세운 채 청우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상대를 찍어 누르려는 의도가 다분한 웃음이었지만 청우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너한텐 내가 더 중요하잖아?”

“건아.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야.”

조심스럽지만 단호한 말에 건이 눈가를 구겼다. 산영은 애인과 친구 사이에서 꽤 공정한 편이었다. 건의 성격이 개차반인 걸 알면서도 둘의 연애를 말리지 않았던 이유는, 건이 산영에게만큼은 잘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산영이 쉽게 휘둘리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기억을 잃기 전에도 건은 자신을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눈치였고, 이런 일이 생길 때면 청우는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아 양보하곤 했다. 정확히 말하면 산영을 속상하게 하고 싶지 않은 쪽이었다. 청우는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 한 걸음을 귀신같이 눈치챈 건이 한쪽 입꼬리를 오만하게 올렸다.

“나한텐 그런 문제야. 예전의 나는 이걸 두고 봤나?”

“…….”

“네가 내 애인이라면 증명을 해.”

휘둘리지 않는 산영이었으나 결정적으로는 건에게 약했고, 또한 건이 지금 기억을 잃은 특수한 상황이기 때문인지 망설임의 기색이 읽혔다. 결국 청우가 먼저 입을 뗐다.

“산영아, 가. 나 어차피 입맛도 없고. 집에 가서 쉴게.”

청우는 거짓말에 약한 편이었으나 산영은 그걸 알아차릴 눈썰미가 없었다. 멍이 든 부근을 피곤하다는 듯 일부러 매만지자 산영이 우물쭈물했다. 그사이 건이 산영의 손목을 휘어잡고는 돌아서 차로 향했다.

“어어……!”

산영이 자꾸만 청우를 돌아보았고, 청우는 애써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차가 떠나고 나자 그는 혼자가 되었다.

닳은 신코로 시선을 내렸다. 아끼는 물건은 자주 이용했기에 금방 닳곤 했다. 닳은 부분을 바닥에 문댔다.

어쩌면 마음도 그런 게 아닐까. 육 년을 산영만 바라봤지만, 산영이 건과 교제하기 시작한 건 작년 초였다. 고작 일 년 반. 사 년 반 동안은 나름 괜찮다고 생각하며 지내 왔으나 일 년 반은 항상 파도 위에 있는 것만 같았다. 신경 쓰고 괴로워하는 시간이 길었다. 그렇기에 빨리 닳아 버려 쉽게 지치는지도 몰랐다.

청우는 손을 들어 올려 이마를 매만졌다. 한참을 가만히 서 있다가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금방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이서는 마치 다 안다는 듯,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문 앞이라고 말하자 전화가 끊겼다. 시간이 꽤 지나고 나서 발소리가 들렸다.

“왜 비 맞은 강아지처럼 그러고 서 있어.”

강아지라니. 개라면 모를까. 청우가 힘없이 고개를 들자 이서가 눈을 휘며 고개를 까딱였다.

“밥 안 먹었지?”

이서는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골목 구석에 자리한 작은 카페로 청우를 데려갔다. 학교를 몇 년씩 다녀 놓고도 이런 곳에는 처음 와 보는지라 두리번거리다가 이서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이서는 이곳을 꽤 자주 찾는 듯, 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 익숙하게 안쪽 방으로 향했다. 문은 없지만 꽤 구석진 공간에 카운터와도 떨어져 있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기는 좋아 보였다.

“뭐 못 먹는 거 있어? 없으면 내 맘대로 시켜도 돼?”

“어.”

이서가 나가 주문을 하고 돌아왔다. 둘만 남자 어색한 기분에 청우는 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인의 손길이 곳곳에 닿은 듯 꽤 아기자기한 소품들로 꾸며져 있었다.

“여기 괜찮지?”

“응. 여긴 어떻게 알았냐.”

“학교 근처는 모르는 데 없어.”

이서가 씩 웃었다. 테이블이 조금 낮은 것만 빼면 그리 불편한 것도 없었다. 다만……. 남자 둘보다는 여자 손님들 혹은 연인들을 겨냥한 곳처럼 보였다. 제 편견일지도 모르겠지만.

“오늘 뭐 하고 있었어?”

“강의 듣고 나오던 길이었어.”

“갑자기 전화를 건 이유가 있었을 테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뻔하지, 청우야.”

어깨를 으쓱이는 이서를 보자 욱했으나 대거리할 수는 없었다. 이서의 제안을 받아들이려 하는 것이 제게는 지극히 충동적인 짓이었지만, 그가 보기에는 뻔한 일인지도 몰랐다. 청우는 한숨을 삼켰다.

“산영이랑 강의 듣고 나오는 길에…… 차건이 산영이 데려갔어.”

“외모랑 멘탈이 꼭 일치하는 건 아니야. 그렇지?”

“……그거 내 욕이냐?”

슬쩍 기분이 나빠질 찰나 직원이 트레이를 들고 오며 대화가 끊겼다. 맞은편에서 이서는 능청스러운 낯으로 싱글댈 뿐이었다. 테이블 위에 샌드위치와 잔 두 개가 놓였다. 이서의 것은 아메리카노, 청우의 것은 레모네이드였다. 이서가 턱을 까딱여서 청우는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맛있었다. 레모네이드는 너무 시지도 달지도 않은 데다 향이 좋았다. 잔을 내려놓는데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입에 맞아?”

“……어.”

“다행이네.”

이렇게 누군가를 잘 챙기는 놈이었나. 산영을 제외한 남자 친구들과는 보통 이런 걸 묻고 살피지 않는지라 어색하게 느껴졌다.

“산영이랑은 상의해서 같은 강의 듣는 거야?”

“어. 학기마다 그렇게 듣고 있어.”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나오려나 싶어 씹는 속도가 느려졌다. 레모네이드를 한 모금 넘기고 음식물을 다 삼키고 나서야 이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고2 때 만났다고 했나?”

“어.”

“고3은.”

“같은 반이었어.”

“대학도 같은 곳으로 오고?”

“……둘 다 여기가 일 지망이었어.”

“정말?”

취조라도 하듯 질문이 쏟아졌지만 상대가 속을 알 수 없는 낯으로 미소 짓고 있어서 그런지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청우는 산영과 함께 원서를 넣을 때를 생각해 보았다. 산영에게는 이곳이 상향 지원이었고, 자신은 안정권이었다. 일 지망이었냐고?

“나한테 일 지망은 아니었지.”

“순정이네. 대학까지 따라오고.”

“……일 지망이었던 곳은 어차피 떨어졌어. 우연일 뿐이야.”

“흐음.”

이서가 얄밉게 눈을 굴렸다. 제가 들어도 딱히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청우는 자신을 포장하는 것을 그만두고 샌드위치를 크게 베어 물었다. 여기라면 산영이도 좋아할 텐데. 그런 생각이 얼핏 스쳤다.

“군대 갈 땐 떨어져 있었지?”

“……동반 입대 했어.”

“아. 차건한테 들었던 것 같다.”

아마 좋은 소리는 아니었을 테다. 이쪽을 쳐다보는 이서의 눈이 꼭 자신을 책하는 듯해 입맛이 떨어졌다.

“왜 군대까지 같이 갔다 온 거야? 떨어져 있을 생각은 안 해 봤어?”

“했지. 근데……. 애가 같이 가자고 하니까. 걱정되기도 하고. 산영인 예전부터 남자들 무리에 있으면 쉽게 타깃이 됐어.”

“그러다 맘마도 먹이겠어, 청우야.”

웃음기 섞인 신랄한 말에 청우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 종종 과오라고 생각하기는 했다. 차라리 그때 멀어져서 마음을 정리했다면 어땠을까. 테이블 위에 떨어진 빵가루를 손끝으로 툭 쳐 내는데 얼음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서가 창밖을 응시하며 커피 잔을 흔들었다.

“청우 넌 산영이랑 좀 떨어져 있을 필요가 있어.”

“…….”

“걔랑 같이 듣는 강의가 뭐야?”

“연극의 이해.”

“그거 과제가 연극 보러 가는 거지?”

“어.”

“언제 가기로 했어?”

“다음 주.”

“나랑 가자.”

이서의 제안에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산영이 건과 사귀고 나서는 둘이 있는 시간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렇기에 산영과의 약속이 청우에게는 늘 일 순위였다. 게다가 선약을 깨뜨리는 것도 탐탁지 않았다.

그런 청우의 의중을 읽은 듯 이서의 입꼬리가 위로 기어 올라갔다. 아, 저 표정 적응 안 되네. 청우는 입 속으로 투덜거렸다.

“우리 청우는 평생 산영이 좋아해야겠다. 이렇게 순정인데, 억지로 떼어 놓는 것도 산영이한테 못 할 짓이네.”

“……누가 네 청우냐.”

청우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칼을 거칠게 헤집었다. 이서는 고요하게 웃는 낯으로 청우를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오히려 그것이 더한 압박으로 돌아왔다.

“하……. 그래, 알았어.”

“좋아. 그럼 약속 취소해. 그리고 연극은 이번 주에 보러 가자.”

“이번 주?”

“쇠뿔도 단김에 빼야지.”

이서가 왼쪽 눈을 찡긋했다. 어쩌면 자신이 이서의 제안을 받아들인 순간부터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청우는 뒤늦게 고개를 주억였다.

“어디 가냐?”

건이 이서의 옷차림을 훑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캐주얼한 옷이 아닌 셔츠에 슬랙스였고, 이서는 이런 옷을 주로 데이트할 때나 입곤 했다. 대답을 바라는 질문이 아니었기에 이서는 콧노래를 흘리며 의자에 앉았다.

청우를 만나기 전 시간이 남아 나온 자리였는데, 그건 건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이서도 건의 옷차림을 훑어보고 나서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켠 뒤 말했다.

“너야말로 어디 가나 보네?”

“어.”

“산영이 만나?”

“왜?”

간파당한 것이 불쾌한 듯 건이 이맛살을 찡그렸다. 여기 또 있네, 뻔한 인간. 이서는 어깨를 으쓱였다.

“너 그거 산영이 만날 때나 입는 옷이잖아.”

“이게?”

“산영이가 사 준 선물이랬나. 왜. 기억이 났어?”

건은 여전히 인상을 구긴 채로 제 옷을 빤히 내려다봤다. 무의식이란 게 참 대단하네. 이서는 흥얼거리면서 아메리카노를 넘겼다.

건을 보고 있자니 산영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어딘지 들뜬 낯으로 자신을 학교 앞 카페로 데려가더니, 꽤 근사해 보이는 미소를 입에 걸고 카운터로 향했더랬지. 건을 어릴 때부터 알았지만 사랑에 빠진 애송이처럼 구는 얼굴은 그때 처음 보았다.

사랑이란 감정은 기억을 잃어도 복귀할 수 있는 것일까. 흥미로웠다. 무의식에 산영이 강렬하게 새겨져 있어 다시 산영을 마음에 품게 된 건지, 아니면 기억을 잃어도 다시 사랑에 빠질 만큼 산영이 그에게 있어 사랑스러운 건지 궁금하기도 했다.

어찌 됐든 산영에게는 다행인 일이다. 산영은 자신도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렇게 착하고 순수한 애는 보기 드물었으니까. 하지만 청우에게는 불행한 일일 테다. 불행? 아니다. 어차피 건과 산영이 헤어진다고 해도 청우가 산영을 쟁취하지는 못하리라.

“드디어 네가 미쳤다는 게 실감이 돼?”

“뭐?”

“보통 미친 게 아니니까 남자를 만난 거라고, 네가 그랬잖아.”

“내 생각은 변함없어. 그냥…… 별식이 먹고 싶었나 보지.”

건은 제가 말하고도 별식이라는 단어가 기분 나쁘다는 듯 입가를 실룩였다. 자존심도 고집도 센 놈이다 보니 자신이 지금 산영에게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쉽게 인정하지는 못할 테다. 하지만 속수무책이겠지. 문득 뒤돌아보았을 때 자신이 머리끝까지 잠겨 있다는 걸 알게 될 테니까.

“아. 너 걔도 잘 알아?”

“누구?”

“이청우인지 뭔지 하는 새끼.”

청우의 얼굴에는 아직 상처가 남아 있는 데 반해 건의 상처는 벌써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하여간 회복력 하나는 빠르다. 저 주먹으로 맞았는데 청우도 그만하면 잘 끝난 거다. 태권도를 한다고 했었지. 운동도 꼭 그 같은 걸 한다. 아마 인생 최고의 일탈이 산영을 짝사랑한 일이 아닐까.

“알지.”

“그 새끼 내가 왜 두고 본 거야?”

“글쎄.”

그건 자신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간 청우와 건이 함께 자리를 가진 적이 손에 꼽기에 딱히 눈치를 채지 못했거나 혹은 제 상대도 안 되는 놈이라고 생각해서 신경을 쓰지 않았거나. 자신이야 원래 눈치가 빨라 한두 번 만나고 나서 바로 알아차렸지만, 청우가 이렇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 적은 처음이었으니 이전에는 알지 못했을 수도 있다.

“왜 그렇게 신경 써? 위협이라도 느껴?”

“위협? 하. 그딴 겁쟁이 새끼한테 위협은 무슨.”

“그럼 적당히 내버려 둬.”

“내가 왜?”

“가엾잖아.”

그 자신도 이미 자괴감에 휩싸여 있는데 굳이 들쑤실 필요가 있을까. 다리를 꼬고선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건이 혀를 찼다.

“성격 더러운 새끼.”

누가 누구한테. 이서는 건의 말을 못 들은 체하며 발끝을 까딱거렸다.

청우의 집은 평범한 원룸촌에 있었다. 데리러 가겠다는 말에 부담스러운지 극장 앞에서 만나자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제 등쌀에 못 이기고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지 원하지 않는 일은 칼같이 거절할 것처럼 생겨서는 의외로 약하게 군다. 그만큼 많이 흔들리고 있다는 뜻일까.

공연이든 전시회든 혼자서 감상하는 쪽을 더 좋아하기도 하고, 최근에 데이트한 적이 없어 누군가와 같이 공연장에 가는 일은 오랜만이었다. 그 상대가 남자가 될 줄은 몰랐지만. 청우에게 남자도 된다고 말하기는 했으나 언젠가 남자와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뿐, 정말 남자와 해 본 적은 없었다. 그때 그 말은 지극히 충동적이었다. 이쪽이 간절하거나 급할 것이 없는데도 그런 말을 내뱉고 말았다.

뭐……. 그럼 좀 어때. 청우와 진짜 할 것도 아닌데.

이서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따라 흥얼거리며 속도를 줄였다. 저 앞에 가만히 서 있는 청우가 보였다. 머뭇거리던 그가 차창을 내려 인사하자 조수석에 올라탔다. 이서는 청우가 안전벨트를 매는 걸 기다리다가 입을 뗐다.

“청우야. 트레이닝복은 좀 그렇지 않아?”

“어? 이거 트레이닝복 아닌데.”

그 바지가 운동복이 아니면 진짜 운동복으로는 뭘 입고 다니는 거야. 이서가 미소를 머금은 채로 가만히 쳐다보자 청우가 제 옷차림을 내려다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학교 다닐 때도 입는 옷이야.”

“그래?”

“극장 갈 때 이런 옷 입음 안 되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첫 데이트잖아, 우리.”

청우의 말문이 막혔다. 이럴 줄 알았지. 이서의 미소가 짙어졌다.

둘이 지금부터 벌일 일은 놀이에 가까운 행위이지만, 어느 정도는 서로에게 집중해야 했다. 그저 그런 마음가짐으로 육 년의 습관을 버릴 수는 없을 터였다. 이서는 원룸촌을 빠져나오며 말이 없는 청우를 곁눈으로 보았다. 그는 제 바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데이트라는 말이 신경 쓰이는 건지, 아니면 옷차림을 지적당한 게 걸리는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뭐든 신경을 쓴다면 좋은 일이었다.

“오늘 뭐 했어?”

“그냥 청소하고, 과제 했지. ……넌?”

“집에서 영화 보다가 친구 잠깐 만나고 바로 온 거야. 우리 저녁은 뭐 먹을까? 뭐 좋아해?”

“난 가리는 거 없어.”

“그래도 특히 좋아하는 건 있을 거 아니야.”

산영과 만날 때는 아마 그에게 다 맞췄을 것이다. 특별히 호불호가 강하거나 예민해 보이지는 않으니 무엇이든 괜찮다는 태도를 보였겠지. 청우가 흘긋대는 시선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불편해 죽겠는 기색이라 웃음이 나왔다.

“제일 좋아하는 건 고기고…….”

“고기 좋지.”

머릿속으로 극장 근처 고깃집을 떠올리는 사이 어느새 목적지 근처에 다다랐다. 장소가 협소한지라 주차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 해야 했다. 둘은 차에서 내려 나란히 걸었다.

“근데 이 연극은 왜 골랐어?”

“평이 좋길래.”

“그래? 이거 좀 어려운데.”

“어렵다고?”

“내용이 살짝 심오해. 가볍게 보긴 어렵지만 감상문 쓰기는 좋을 수도 있겠다.”

“아. 산영이는 다른 거 보라고 해야겠네.”

이서는 청우를 돌아보았다. 산영을 언급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이제는 의식적으로 그런 생각을 버려야 했다. 산영이 떠오르는 순간 다른 생각이 그 위를 덮치게.

“너무하다, 청우야.”

“뭐가?”

“내 앞에서 다른 남자 얘기 하는 거. 매너가 아니잖아.”

청우가 우뚝 멈춰 섰다. ‘얘가 왜 이러지.’ 하는, 닭살이 돋아 미치겠다는 얼굴. 예전에는 볼 때마다 목석같은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대화하는 재미가 있었다. 이서는 짐짓 서운한 낯을 보인 뒤에 고개를 돌리고 웃음을 삼켰다.

공연장에 다다라 둘은 안으로 들어갔다. 소극장은 작았고, 도착한 관객이 몇 없었다. 의자는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이서와 청우 둘 다 덩치가 작지 않았기에 다리가 맞닿았다. 청우는 불편한지 몇 번이나 고쳐 앉았다.

“연극 보러 오는 건 처음이야?”

“어. 원래 이렇게 작냐?”

“보통은. 여긴 특히 더 작은 편.”

“넌 자주 보러 와? 이거 내용도 아는 것 같던데. 봤던 거야?”

“예전에 한 번 봤었어. 연극 좋아하거든.”

“아……. 그럼 딴 거 보지.”

“괜찮아. 난 본 거 또 보는 거 좋아해. 심오할수록 곱씹는 재미가 있잖아.”

청우는 어느 정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와 함께 연극을 보러 온 건 아예 처음이었다. 굳이 남자 친구들과 보러 오지 않는 것은 그럴 이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면서 하품을 처하거나 핸드폰을 보거나 보는 도중 귓속말을 하며 귀찮게 굴 놈들이 많아서였다. 하지만 청우는 조용히 잘 볼 듯하니 상대로서 나쁘지 않았다.

공연 시간이 가까워지며 남은 객석이 하나둘씩 채워졌다. 곧 조명이 꺼지고, 배우 한 명이 나와 주의 사항을 설명한 후에 연극이 시작되었다.

한 번 봤던 연극이지만 그때와는 배우가 달랐다.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 인상적인 대사를 속으로 중얼거리는 동시에 배우가 대사를 읊었다. 이서는 곁눈으로 청우를 보았다. 집중했는지 약간 미간을 찡그린 채로 무대를 감상하고 있었다.

무대 위의 배우들은 손끝 하나까지 열연했다. 일반적인 감정보다는 다소 과잉되었으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인물들에게는 그것이 더 어울렸다. 연극은 눈앞에서 감정을 남김없이 쏟아 내기에 대리 만족 되는 부분이 있었다. 인간이 연기를 펼치는 콘텐츠를 좋아하는 이유도 이것에 있었다. 보고 나면 속에 쌓인 무언가가 허물어지는 듯했다.

하. 가슴에서 소용돌이치던 숨을 내뱉을 때였다. 어깨에 무게가 실렸다. 옆을 돌아보는 순간 청우가 화들짝 놀라 머리를 들었다.

“그냥 자.”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속삭이자 청우가 낯을 굳히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 집중하는 기색에 이서는 그를 지켜보다가 무대 위로 시선을 돌렸다.

연극이 끝나고 관객들의 박수 소리가 소극장 안을 울렸다. 커튼이 닫히자 청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뻐근한 몸을 풀었다. 이서는 느긋하게 기다리다가 그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어땠어?”

“볼만하네.”

“안 지루했어? 그냥 자지.”

“그건 좀. 예의가 아니잖아.”

생각도 못 한 성실한 이유였다. 무대 위 배우들에게 예의가 아니라는 뜻이겠지. 이서는 짧게 웃고선 물었다.

“중간에 놓쳤는데 감상문 쓸 수 있겠어?”

“어어. 여자가 이브고 남자가 아담 아니야? 마지막에는 신한테 복수하는 거 아닌가.”

“응. 졸았는데도 잘 캐치했네. 보통 이해 못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데. 감상문은 잘 쓰겠다.”

청우의 입가가 씰룩였다. 칭찬에 약한 타입? 이서는 그의 낯빛을 살피다가 웃음을 삼키며 걸음을 옮겼다.

차로 이동하는 것보다 걷는 게 더 빠를 듯해 둘은 걸어서 식당에 도착했다. 뼈에서 바른 갈빗살을 구운 채로 내놓는 곳이었다. 고기 냄새가 많이 나지 않고 굽는 일에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데이트하는 상대와 오기 좋았다.

“술 마실래?”

“너 차 가지고 왔잖아.”

“대리 부르면 되지. 그래도 술이 있어야 얘기하기 좋지 않겠어?”

사실 조용한 칵테일 바나 펍이 속 깊은 이야기를 하기에 가장 좋았지만, 처음부터 허들을 낮추면 오히려 불편해할 테니 이 정도에서 만족해야 할 듯했다. 직원을 불러 주문하는 사이 청우가 핸드폰을 들어 키패드를 두드렸다.

“나 잠깐만 이것 좀 한다.”

“뭐?”

“감상문. 까먹기 전에 좀 적어 두려고.”

집중한 미간에 얕은 주름이 졌다. 눈썹을 따로 정리한 것 같지는 않은데 짙고 가지런했다. 짧은 머리칼 아래로 드러난 이마는 반듯했고 그 아래로 콧대가 우뚝 서 중심을 잡았다. 속눈썹은 꽤 풍성했지만 가녀린 느낌은 없었고, 적당히 각이 진 턱은 단단한 인상에 힘을 실었다. 이서는 턱을 괸 채 청우의 얼굴을 유심히 훑었다.

이 얼굴이 활짝 웃으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차가운 인상이라 초면에는 어렵게 느껴질 수 있으나 막상 말을 섞어 보면 벽이 그리 높지 않았다. 성실하고 기본 성품은 다정한 듯하니 인기도 많았을 텐데…….

“여자 친구 사귀어 본 적 있어?”

“어?”

“여자랑 연애해 본 적은 있냐고.”

왜 그런 걸 묻는지 모르겠다는 듯 청우가 눈가를 설핏 구겼다. 하지만 말없이 빤히 바라보자 결국 입을 열었다.

“없어.”

“고백받아 본 적은?”

“……있어.”

“으음. 청우는 성실하네.”

누군가에게 고백을 받았는데도 사귀지 않은 것은 제게 말했던, 좋아하지도 않는데 왜 사귀냐는 이유 때문이었을 터였다. 아니면 본래 성적 지향이 동성 쪽이었을 수도 있겠지.

청우가 못마땅한 얼굴로 입을 뗄 찰나 직원이 음식을 들고 왔다. 테이블에 고기와 반찬이 놓였다. 어서 먹으라는 뜻에서 고갯짓을 하는데, 청우가 젓가락을 들지 않고 물었다.

“그러는 너는?”

“음?”

“너는 얼마나 만나 봤는데.”

나야말로 뻔하지 않나. 만난 여자뿐만 아니라 섹스만 한 여자까지 합하면 손으로 꼽을 수도 없었다. 그런 말을 하면 비난하려나. 이서는 능청스레 눈을 굴리며 답을 미루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말을 네 앞에서 할 순 없지.”

“어?”

“그거 예의가 아니잖아. 지금 만나는 사람 앞에서 전에 만난 사람 얘기하는 거.”

지극히 정상적인 말을 빙글거리며 하자 청우가 또 굳어 버렸다. 어지간히 적응되지 않는지 얼굴이 일그러진다. 웃는 게 보고 싶은데 말이다.

“너…….”

입을 열어 놓고도 선뜻 말이 나오지 않는 듯 청우가 몇 번이나 입술을 벙긋댔다. 식는데. 이서가 고기를 청우의 그릇에 놓아 주었지만 그는 그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았다.

“너 왜 자꾸 그런 말 하는 거야?”

“그런 말이라니. 우리 사이에 당연히 할 수 있는 말이잖아?”

“……꼭 그래야겠냐?”

“청우야.”

이서가 고기가 놓인 그릇을 청우의 쪽으로 더 밀어 주자 그가 이서와 눈싸움을 하다가 결국 입에 넣었다. 고기를 씹는 낯이 다소 누그러졌다. 이서는 청우가 맘 편히 삼킬 수 있도록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우리가 하기로 한 건 친구 놀이가 아니야. 알고 있잖아?”

“알아. 아는데……. 널 애인으로 생각하라는 거야?”

“그럼. 꼭 그렇지는 않더라도 내가 너한테 일 순위는 되어야지.”

인간이란 나약하고 간사한 존재라 관심 없던 사람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말만 들어도 혹하기 마련이다. 붙어 있으면 정이 생길 수밖에 없고, 정을 붙인 상대가 자신을 일 순위로 여긴다면 빚을 떠안은 기분을 느끼게 될 거다. 그러니 그에 보답하려 할 테고, 그러는 동안 다른 순위는 자연스레 밀려날 것이다.

“그러다가…….”

청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는 인상을 쓰지 않은 무표정한 낯으로, 진중한 시선으로 이서를 바라보았다.

“내가 진짜로 널 좋아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이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이었다. 퍽 귀여운 질문이기도 했다. 동그란 원이 누가 베어 문 것처럼 구부러졌다.

“그럴 일 없어.”

청우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이내 그의 낯빛이 무거워졌다. 검은 눈에 어떤 온기가 어린다. 꽤 신기한 광경이었다.

“왜 그렇게 말하냐.”

“뭐가?”

“왜 널……. 네가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 것처럼 말하냐고.”

또 한 번 제게 도착한 예상하지 못한 말. 이서는 곰곰 생각하는 척 눈을 굴렸다. 딱히 그런 의도는 아니었다. 누가 봐도 자신의 반대 극에 있는, 감정에 있어서도 원리 원칙을 지킬 그의 취향에 자신이 들어맞을 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청우의 말도 틀리지는 않았다. 그가 자신을 좋아할 이유든 가치든,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자신의 아주 깊숙한 곳에 내재된, 꺼내 보이지 않을 속살이었다. 껍질을 까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냄새를 맡았지? 이서는 입꼬리를 한껏 끌어 올려 무장했다.

“벌써 내 걱정을 해 주고, 기쁘네.”

청우의 낯에 불편한 기색이 어렸다. 하지만 이전과 똑같은 온도는 아니었다. 이서의 입술이 더욱 짙은 미소를 그렸다.

‘그래. 네 말대로 구질구질하네.’

사실 그 말을 듣는 순간 재미없다고 생각했다. 아, 결국 빠져나오지 못하고 빌빌대다가 나이를 먹고 세상과 타협하며 적당한 사람이라도 만나는 선택을 하려나. 그래서 청우가 제가 던진 제안을 받아들이려고 했을 때 발을 빼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은 것은 반쯤은 충동, 반쯤은 흔들어 놓은 것에 대한 어쭙잖은 책임감 때문이었다.

그때는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재미있었다. 앞으로의 과정이 퍽 기대될 만큼.

“우리 이거 잠깐 정리할까?”

“그래.”

2인 1조로 하게 된 과제를 정리하기 위해 청우는 윤선과 함께 정문으로 내려왔다. 윤선이 바로 앞에 자리한, 산영이 아르바이트하는 카페에 가자고 했다. 청우는 잠시 망설였지만 굳이 피할 이유도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다. 그거 들었어?”

“뭐?”

“저 카페에서 얼마 전에 누가 치고받고 싸웠대.”

“아…….”

설마 내 얘기인가. 청우는 찔끔하는 심정으로 윤선을 돌아보았다.

“그래?”

“응, 무슨 여자 때문에 그랬다던데. 별일이 다 있어. 그치.”

“그러게.”

윤선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학교 커뮤니티에 올라온 모양이었다. 자신을 알아본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한숨을 삼키는 사이 금방 카페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산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활짝 웃었다.

“청우야. 과제 하러 왔어?”

“응. 잠깐 있다 갈 거야.”

“맛있게 해 줄게.”

산영의 장담에 청우는 짧게 웃고선 음료를 주문했다. 윤선이 잠시 화장실에 가겠다며 자리를 떴다. 혼자 자리에 앉은 뒤 창밖을 보자마자 카페 앞을 지나치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이서였다. 마주친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이서는 친구로 보이는 남자와 있었는데, 그에게 뭐라고 말하더니 혼자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함께 연극을 보러 갔던 이후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어색함은 덜했지만 여전히 불편하기는 했다. 이서는 거침없이 발을 뻗어 청우 앞에 앉았다.

“일행 있어.”

“인사도 없이 문전박대야?”

“……안녕.”

“응. 오늘 옷 예쁘다.”

발표가 있어서 평소보다 단정하게 입기는 했지만, 특별히 차려입은 차림은 아니었다. 청우는 이서의 옷차림을 훑었다. 하얀 야구 모자를 써서 평소와 달리 이마가 드러났는데, 인상이 조금 더 시원해 보였다. 문외한인 자신이 보기에도 이서는 옷을 잘 입는 편이었지만, 제 취향은 아니었다.

“너도.”

“하하, 칭찬 들었네. 근데 일행은 누구?”

“동기. 잠깐 화장실 갔어.”

“으음.”

때마침 산영이 음료를 들고 왔다. 그가 이서를 보고 해맑은 미소를 입에 걸었다.

“이서도 왔네?”

“응. 안녕.”

“응, 응. 아, 청우야. 연극 봤어?”

청우는 이서를 힐금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이서가 은근한 윙크를 보내왔다.

그날 어떻게 약속을 깨야 할지 종일 고민하다 산영에게 전화를 걸어 연극을 다른 사람과 봐도 되냐고 물었다. 산영은 흔쾌히 괜찮다고 답하더니 누구와 보는지 궁금해했다. 연극을 같이 보고 싶어 하는 친구가 있다고 얼버무리자 이해한 듯 더 묻지 않았다.

“응, 그거 어렵더라. 넌 다른 거 봐.”

“아, 그래? 고마워. 딴 거 알아봐야겠다.”

“어.”

“과제 끝나고 뭐 해? 나랑 밥 먹을래?”

“그럴…….”

눈앞으로 큰 손이 휙 뻗어 와 산영과의 사이를 가렸다. 돌아보니 이서가 씩 웃는 낯으로 고개를 저었다.

“청우는 오늘 나랑 밥 먹기로 했는데.”

“어, 진짜?”

당사자의 의사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약속에 청우가 미간을 찡그렸고, 산영은 놀랍다는 듯 그와 이서를 번갈아 보았다. 이서는 몸을 의자 등받이에 느긋하게 기댄 뒤에 청우에게 눈짓했다.

“그치, 청우야?”

“아……. 어.”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자신을 일 순위로 두라는 말과 다르지 않은 맥락일 것이다. 이서가 원하는 대로 대답하고 나자 아쉬움과 찝찝함 사이로 희미한 후련함이 밀려왔다.

“나도 같이 먹으면 안 돼?”

“응, 안 돼. 청우는 나랑 둘이 먹기로 한 거거든.”

이서가 청우의 어깨에 한 팔을 올렸다. 퍽 친근해 보이는 모양새였으나 실상은 그리 친하지 않다 보니 얹힌 무게가 어색했다. 무슨 초등학생도 아니고……. 한숨을 삼키는데 산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둘이 언제 이렇게 친해졌어?”

보기 좋다는 듯 해말갛게 웃는 얼굴에 씁쓸해졌다. 아마 산영은 자신이 이서와 사귀고 있다고 말해도 순수하게 응원해 주지 않을까. 쓴입을 다시는 찰나 이서의 손끝이 볼을 두드려서 움찔하고 말았다. 이서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청우를 빤히 바라보며 눈꼬리를 접었다.

“앞으로 더 친해질 예정이야. 연극도 나랑 보러 간 거였어.”

“아……. 그랬어?”

산영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조금 사그라들었다. 이내 미묘해지는 표정을 청우는 읽을 수 있었다. 서운함. 제 행동으로 인해 저런 표정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달래야겠다는 생각에 입을 떼는 순간 어깨가 꽉 잡혔다. 이서를 돌아보자 그가 웃는 낯 그대로 청우를 지그시 응시했다. 그때 화장실에서 나온 윤선이 자리로 돌아왔다.

“음? 친구들이야?”

“끝나면 말해. 여기 있을게.”

이서가 윤선에게 눈으로 인사하고선 뒷자리에 앉았다. 이어서 산영도 오래 자리를 비웠다며 허둥지둥 카운터로 돌아갔다.

이렇게 산영과 떨어져 있을 시간을 만들어 주는 걸까. 어쩐지 마음이 심란해져 멍하니 있다가 윤선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한눈팔지 않고 집중해서 과제 이야기를 나누니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청우는 윤선을 먼저 보내고 나서 뒷자리에 앉은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 핸드폰을 보고 있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까?”

카운터에 빈 잔과 함께 트레이를 가져다 놓으며 산영에게 인사하자 그가 밝게 웃으며 그들을 배웅했다. 이전에 느꼈던 서운함은 잠시였는지, 완전히 잊어버린 얼굴이었다. 카페를 나오는 길,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뒤를 흘긋대는데 이서의 손가락이 튀어나와 볼을 콕 찔렀다.

“……뭐 해.”

“애 두고 가는 아빠 같다. 아하, 그래서 너도 이 씨고 쟤도 이 씨?”

뭐라는 거야. 황당해서 미간을 찌푸리자 이서가 손가락을 떼어 내며 씩 웃었다. 청우는 뺨을 문지르며 걸음을 옮겼다. 미련한 모습을 보여 조롱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윤선이랑은 친해?”

“친한 건 아니고…….”

윤선의 이름은 또 어떻게 아나 싶어 주춤했다가 이서가 뒷자리에 앉아 있었기에 대화가 들렸으리란 것을 짐작했다.

“왜?”

“걔 너한테 관심 있는 것 같더라.”

“…….”

“넌 관심 없어? 쉬운 길이 있는데 여태…….”

“너 그 말 나한테 하는 거 예의가 아니지 않냐?”

“응?”

“걔 마음이 어떻든 그걸 왜 네가 나한테 전해.”

윤선이 제게 관심이 있는 줄도 몰랐지만, 이서의 생각이 사실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사실이든 아니든 이런 식으로 가볍게 말하는 건 윤선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또한 이런 말을 하는 목적도 알 수 없었다.

“음……. 내가 잘못한 거야?”

이서가 태평하게 눈을 굴리더니 물었다. 따져 묻는 모양새는 아니었고, 확인차 되묻는 듯했다. 제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는 건지 의심이 되었다. 가만히 노려보자 그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미안. 다시는 안 그럴게.”

잘못을 순순하게 인정하자 맥이 풀렸다. 사과를 들을 사람은 자신이 아니기도 했지만, 진심에서 우러나온 사과인가 싶어 아무 말 없이 있자 이서가 고개를 기울였다. 살짝 내리뜬 눈이 그의 인상을 가늘게 했다.

“실망하지 말고 한 번만 봐줘. 응?”

눈꺼풀이 위로 완전히 들리고, 눈이 마주치자 눈꼬리가 아래로 늘어진다. 가까이 다가온 탓에 그가 뿌리는 향수의 향이 제게로 옮아 붙었다. 청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 한 대만 때리고 싶다.

하지만 여타 생각 없는 놈들처럼 밉지는 않았다. 얄밉기는 했으나 그뿐이었다. 그냥 이런 놈이라는 걸 납득하면 그리 열 낼 것도 없을 듯했다.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니 여기서 끝내자 싶어 이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됐다. 밥이나 먹자.”

“아. 미안하지만 난 약속이 있는데.”

“뭐? 그럼…….”

다시 열이 오르려고 했다. 이 새끼 진짜 뭐 하는 새끼지? 낯을 일그러뜨리자 이서의 얼굴은 오히려 웃음으로 허물어졌다.

“말했잖아. 몸이 멀어져야 마음도 멀어진다고.”

“…….”

“청우 넌 거절하는 방법을 배워야 해. 어땠어? 아쉽기만 했어?”

이서는 마치 청우의 마음을 꿰뚫은 것처럼 물었다. 휘어진 눈매에 갇힌 다갈색 눈은 여유와 미소를 가장한, 예리하게 벼려진 화살촉 같았다. 조금도 빗나가지 않고 마음을 찌른다는 점에서 그는 훌륭한 궁사였다.

불현듯 궁금해졌다. 타인의 감정을 잘 알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혹은 무엇을 겪었을까.

“대신……. 우리 취미 생활 같이 즐기기로 할까?”

“취미?”

“응. 청우 네가 좋아하는 건 뭐야? 같이 시간을 보내면, 서로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어서 좋잖아.”

“…….”

“생각해 보고 연락 줘. 이건 숙제.”

이서가 코앞에서 손을 흔들고는 돌아섰다. 청우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멀어지는 뒷모습을 좇았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희미한 향이 남았고, 그 향은 돌고 돌아 청우의 피부를 간질였다. 텅 비어 버린 시간이 아쉽다고 느껴진 순간 청우는 미간을 와락 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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