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발각(1권) (1/16)

적우 1권

1. 발각

산영은 달렸다. 달려야만 했다.

소식은 사고가 난 지 정확히 네 시간 뒤에 산영의 귀로 들어갔다.

조부모와의 식사를 위해 서울 근교에 갔던 건이 맛있는 걸 사 오겠다고 연락을 한 후 산영은 설레는 마음으로 집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올 시간이 되었는데 연락이 없었지만, 차가 막히겠거니 하고 그저 기다렸다. 시간이 자정에 가까워지자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건에게 전화했으나 들려오는 것은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목소리뿐이었다.

그때부터 알 수 없는 불길함이 엄습했다. 입술을 질근질근 물면서 방 안을 초조하게 돌아다니다가 건의 친구인 이서에게 전화했다. 전화를 받은 이서는 다른 누구도 아닌 차건에게 무슨 일이 있겠냐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산영의 재촉에 알아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건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실려 왔다는 소식이 돌아왔다.

“강, 강성 병원으로 가 주세요.”

택시에 올라타서 안절부절못하고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이서도 막 소식을 전해 들은지라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하고 바로 연락을 한 것이라고 했다. 그가 알았어도 차마 묻지 못했을 테다.

괜찮을 거라고 자신을 도닥였다. 심장은 전혀 다른 속도로 뛰고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달리는 택시를 박차고 나갈 것만 같았다.

건은 튼튼하고 운이 좋으니까. 분명 이런 건 별일 아니라면서 훌훌 털고 일어날 테다.

“고맙습니다.”

병원에 도착해서는 꽤 남은 잔돈도 받지 않고 택시를 뛰쳐나왔다. 로비로 헐레벌떡 뛰어와 산영은 초조하게 발을 구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병실이라고 했나? 수술실? 아니 그런 건 듣지 못했는데…….

“산영아!”

귀에 익은 목소리에 산영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던 이서가 손을 들었다. 산영은 그쪽으로 뛰어갔다.

“건이는?”

“일단 진정 좀 하고.”

이서가 산영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고 그를 엘리베이터로 데려갔다. 하나도 진정이 되지 않았지만 산영은 의식적으로 심호흡을 한 뒤 물었다.

“건이는?”

“지금 검사 중이래. 좀 기다려야 할 거야. 다행히 다친 데는 팔뿐이고, 머리를 부딪쳐서 의식을 잠깐 잃었어.”

작게 숨을 집어삼키는 소리에 이서가 고개를 저으며 산영의 어깨를 토닥였다.

“물론 지금은 깨어났지. 멀쩡해. 멀쩡한데…….”

“멀쩡한데?”

이서가 보기 드물게 말을 골랐다.

“뭐, 일단 가서 보자고. 걔가 쌓아 둔 업보가 있는데, 쉽게 죽을 놈은 아니잖아?”

가벼운 투에 산영은 우울한 낯으로 이서를 쳐다보았다. 이서는 싱글싱글 웃으며 앞을 가리켰다.

“자, 갑시다.”

문이 열리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둘은 왼쪽으로 난 복도로 걸어가, 검사 중이라 아무도 없는 특실로 들어갔다.

“뷰가 참 좋지? 아이러니해. 아니, 아이러니할 것까진 없나?”

이서가 블라인드를 걷고 반짝거리는 야경을 눈에 담았다. 웬만한 호텔급이라고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리가 뒤늦게 후들후들 떨렸다. 산영은 비틀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그러게 건이 따라 운동 좀 하라니까. 환자는 산영이 너 같네.”

운동 실컷 한 강아지처럼 숨을 몰아쉬는 산영을 내려다보며 이서가 혀를 찼다. 평소 같았으면 “그러게.” 하고 실없이 웃었을 그가 여전히 시무룩하니 제 입으로는 건의 상태를 말하기가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필이면……. 하여튼 건도 참 범상한 녀석은 아니다.

울고불고하는 신파를 눈앞에서 보는 것도 꽤 재밌을 테지만 그 사이에 끼는 일은 딱 질색이다. 어떻게 한다. 이서가 짧게 고민할 때였다. 문이 열렸다.

“건아!”

산영이 벌떡 일어났다. 환자복을 입은 건은 오른팔에 깁스를 하고 있었다. 그걸 본 산영의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건은 무심한 눈으로 산영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모호한 미소를 짓고 있는 이서를 쳐다보았다.

“얘야?”

얘지. 이서는 그렇게 대답하지 않고 산영을 쳐다보았다. 그렁그렁한 눈이 순식간에 어리둥절해진 걸 보는 이서의 낯에 동정이 어렸다.

“누님은?”

“통화하러 밖에.”

“그래? 다들 놀라 달려오시겠네.”

“그래서 얘냐고.”

화제를 대충 돌리고 자리를 떠날 속셈이었으나 너무 빤하게 보인 탓인지 건이 재차 물었다. 이서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건이 한숨을 내쉬며 산영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네가 말 안 하면 얘한테 물으면 되지. 네가 이산영이야?”

“어? 어……. 건아, 왜 그래?”

설마 이런 상황에 서프라이즈라도 하려는 걸까? 잔뜩 화난 척을 해 놓고 사실 이런 일로는 화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다음에 또 이런다면 화가 날지도 모르겠다고 말을 하는 일이 종종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그런 장난은 싫었다.

“네가 이산영이라고.”

이산영. 그러나 제 이름을 읊조리는 건의 얼굴에는 전에 본 적 없는 싸늘함이 어려 있었다. 첫 만남에도 이런 얼굴은 아니었는데. 마치 자신을 처음 보는 듯한, 그것도 적의가 어린 그의 얼굴은 무섭도록 차가워서 산영은 흔들리는 눈으로 이서를 흘긋 보았다. 이서는 귀찮게 됐다는 듯 눈가를 찡그릴 뿐이었다.

“남자잖아.”

무섭게 굳어진 목소리는 이서에게로 향해 있었으나 그 말에 몸을 움칠 떤 건 산영이었다. 산영은 굼뜬 머리를 움직였다. 눈치가 없다는 소리를 워낙 많이 들은지라 제가 지금 생각하는 것이 맞는지도 의심스러웠다.

드라마 속에서나 듣던 ‘기억 상실’이라는 단어가 자꾸만 머릿속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하지만 선뜻 믿기 힘든 일이기도 했다.

건이 날카로운 눈으로 산영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훑었다. 예전에는 그 시선이 자신을 간질이는 보드라운 보들이의 털 같았다면, 지금은 가시를 바짝 세운 선인장 같았다. 그러나 보기에는 여전히 예뻐서 산영은 차마 그 시선을 피할 수도 없었다.

“정이서가 네가 내 애인이라고 말실수를 하던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

말실수? 산영은 숨을 흩트리며 눈을 깜빡였다. 자신이 애인인 게 말실수라니……. 정말 기억을 잃었구나. 눈물이 찰랑찰랑 차오를 것 같았으나 꿀꺽 삼켜 냈다.

“말실수 아닌데. 건아……. 나 기억 안 나?”

고개를 도리도리 젓다가 한 걸음 성큼 내디뎌 건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와 동시에 이서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건의 눈이 느릿하게 내려가 제 손을 잡은 흰 손을 보았다. 일면식도 없는 남자와의 스킨십은 기분이 나쁘기만 할 뿐이었다. 건은 가볍게 손을 뿌리쳤다. 나름대로 가벼웠으나 밀려난 상대는 무겁게 비틀거렸다.

“내가 섹스 파트너를 애인이라고 할 정도로 매너가 좋았던 것 같은데.”

그는 이윽고 싸늘하게 웃어 보였다. 채 받아들이기도 전에 그의 말이 폭풍처럼, 산영의 몸을 휩쓸어 갈 기세로 몰아쳤다. 건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산영을 향해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내뱉고 침대로 돌아갔다.

“지금은 보다시피 그런 예의를 차릴 상황은 아니라.”

불편한 팔을 가누며 눕는 얼굴은 몹시 피로해 보였다. 산영은 장승처럼 서서 고개만 돌려 건을 쳐다보았다. 건이 눈을 감았다. 닫힌 눈꺼풀이 단단하게 거부의 의사를 내비쳤다. 평소 같았으면 내가 졸리니 너도 내 옆에서 자야 한다며 팔을 벌렸을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그 사소한 간극에 산영은 마치 아무도 없는 사막에 떨어져 선인장 하나를 마주하고 있는 기분에 적셔졌다.

“일단 나가서 얘기하자.”

이서가 하도 염색을 해서 푸석해진 머리칼을 헤집으며 산영을 데리고 나갔다. 산영은 마치 무게라고는 없는 종이 인형처럼 팔랑팔랑 끌려갔다.

새벽의 술집은 시끌벅적했다. 자고 있다가 전화를 받고 나왔는데도 청우는 피곤한 기색 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 용건 없이 새벽에 자신을 부를 산영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이서가 부른 거였지만, 건도 아닌 이서가 자신을 부르고 건도 없이 둘이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것은 분명 건과의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여기.”

멀리서 봐도 눈에 띄는 머리를 한 이서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눈인사를 하며 그리로 향한 청우는 산영의 얼굴을 보고 멈칫하다가 그의 옆에 앉았다.

“술 많이 마셨어?”

“아니. 안녕, 청우야. 늦었는데 미안. 자고 있었지.”

“안 자고 있었어.”

둘의 대화를 잠자코 듣던 이서가 휘파람을 휙 불었다. 분명 잠긴 목소리를 들었는데도 태연히 거짓말을 하는 청우를 조롱하는 듯한 소리였다. 청우는 그런 이서를 흘깃 보았지만, 신경 쓰지 않고 산영의 잔에 물을 따라 주었다.

“무슨 일 있었어?”

청우가 묻자마자 산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슨 일이 있든 복 나간다며 한숨을 쉬다가도 참던 산영이 이렇게 대놓고 쉬니 당황스러웠다. 청우는 결국 이서를 쳐다보았다. 맥주잔을 손에서 빙글빙글 돌리고 있던 이서가 빙긋 웃었다.

“병원 다녀오는 길이야.”

“병원?”

“차건. 교통사고 났거든.”

설마 크게 다치기라도 한 건가. 단 한 번도 걱정해 본 적이 없는 상대에 대한 인간적인 걱정과 함께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제 친구에 대한 염려가 솟아올랐다.

“아니, 아니. 그렇게 심각한 일은 아니고. 다친 데는 별로 없어. 없는데…….”

이서가 산영을 일별하고는 검지를 들어 제 머리를 툭툭 쳤다.

“기억 상실. 하필이면 딱 산영이 만나기 전으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하도 실없는 소리를 자주 하며 분위기 파악 안 하고 농담을 던지는 놈인지라 저 말이 진실인지부터 파악해야 했다. 청우는 잠시 입을 다물고 이서의 얼굴을 훑었다. 그러나 얼굴을 아무리 보아도 속내를 알기가 힘들어 알기 쉬운 산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청우는 곧 이서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모습을 쭉 지켜보던 이서가 서운하다며 구시렁거리는 걸 무시하고, 청우는 진지한 낯으로 산영의 등에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괜찮아? 혹시……. 심한 말 들었어?”

기억을 잃은 건과 산영이 맞닥뜨리는 장면을 떠올리자 자연스레 다른 상황도 따라왔다. 걱정이 되어 고개를 기울이니 산영이 우는 듯한 소리를 짧게 내며 청우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순간 몸을 굳혔던 청우가 조심스레 산영의 어깨를 토닥였다.

얼씨구. 차건이 봤다면 그놈 기억이 무덤에서 뛰쳐나왔을 텐데.

이서는 턱을 괴고 두 친구의 쇼를 감상하다가 테이블을 두드리며 다른 곳에 시선을 두었다.

“건이가 날 기억 못 한대. 어떻게……. 어떻게 하지?”

목소리에서 불안과 두려움이 읽혔다. 청우는 산영의 등을 두드리며 할 말을 신중하게 골랐다. 제 속내나 사심으로 기울어진 말을 선택하지 않도록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했다.

“일시적인 걸 거야. 보통 그렇듯이.”

보통이라고 해 봤자 청우 또한 기억 상실이라는 증상은 미디어로나 접한 것이었다. 확신은 없었지만, 그러한 위로나마 산영에게 의미 있는 확신이 되었으면 했다.

위로가 통한 것인지 산영이 품 안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 건이 기억은 분명히 돌아올 거야. 그냥… 그때까지 기다리기 슬플 것 같아서 그래.”

제가 심은 것이 아니라, 한참 전에 이미 뿌리를 내린 확신이었다. 청우는 이래야 산영이라고 생각하면서 눈을 내리깔고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시끄러운 술집 안을 의미 없이 훑던 이서의 시선이 불분명한 미소로 향했다. 지루해라. 이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이만. 위로는 절친이 알아서 잘해 줄 거라고 믿고. 난 내 친구가 깨서 지랄해 대기 전에 잠 좀 자 둬야겠네.”

“아, 이서야. 오늘 고마웠어.”

산영이 발긋해진 코를 훌쩍이며 따라 일어났다. 꼴이 말이 아닌 얼굴과 그 옆에 덩달아 심란해진 얼굴을 훑은 이서가 가볍게 손을 흔들고 자리를 떴다.

“청우야, 넌 안 졸려?”

“괜찮아.”

“난 졸려…….”

긴장이 풀리고 취기가 함께 찾아와서 그런지 산영이 무거운 눈을 비볐다.

“일단 자고 일어나서 생각하고 싶어.”

“그래, 그러자.”

스트레스받는 일이 그다지 없는 산영의 스트레스 해소법은 무조건 숙면이었다. 고민해 봤자 해결되지 않는 일을 가지고 끙끙 앓기보다는 나아질 미래를 기대하며 침대로 향하는 것이 훨씬 이로운 일이라고 믿었다.

청우는 묵묵히 산영의 몸을 받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여름 밤의 미지근한 공기가 둘의 곁을 스쳤다.

주방에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산영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다가 흰죽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 그럭저럭 맛은 있는 것 같았다. 건은 제 요리를 좋아했으니 한 번 먹으면 기억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그런 기대를 안고 죽을 도시락에 차곡차곡 담았다.

자고 일어나서 생각해 봤는데, 우는소리를 해 봤자 제 기분만 상할 뿐이었다. 건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일은 없다. 곁을 지키며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기억이 날 게 분명했다. 그러니 자신은 건이 제게 그러하던 것처럼 곁을 묵묵히 지켜 주면 될 것이다.

청회색 뚜껑을 꼭 닫았다. 도시락을 들고 청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건에게 다시 간다는 말을 하자 고맙게도 청우가 같이 가자고 먼저 제안해 주어 둘은 병원에 함께 가기로 했다. 곧 청우에게서 집 앞이라는 답장이 왔다.

산영은 얼른 내려가 밖으로 나왔다. 언제나처럼 티셔츠에 트레이닝복 바지를 입은 편한 차림의 청우가 자연스레 산영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도시락 쌌어?”

“응, 죽이야.”

“……괜찮겠냐?”

“응.”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산영을 청우는 다소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둘은 미리 부른 택시에 올라타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하자 산영의 표정이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청우는 그의 낯을 살피고 다시 한번 괜찮냐고 물어보았다. 산영은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다가 다짐하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특실 앞에 도착해 노크하고 잠시 기다렸다. 곧이어 문이 열렸다. 문을 열어 준 사람은 이서였다. 이서가 산영을 보자마자 입꼬리를 둥글게 올렸다.

“왔네? 마침 건이네 가족들 다 간 참인데.”

“정말?”

산영은 도시락을 품에 소중하게 안아 들고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앉아 이쪽을 보고 있던 건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누가 마음대로 들이래?”

“그럼 진작 말하지 그랬어. 다 들렸을 텐데.”

이서가 능청스레 받아치며 구석에 놓인 의자에 눕듯이 앉아 눈을 감았다. 완전히 방관하겠다는 듯한 태도에 건은 기대도 하지 않고 산영을 보았다. 싸늘한 눈초리에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청우가 산영에게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몸은 좀 어때?”

산영이 만지고 싶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겠다는 듯 손을 허공에 살짝 띄우고 손끝만 꼼지락댔다.

“그건 이제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닌데.”

“건강하구나. 다행이다.”

진심으로 안도한 듯한 목소리에 건의 눈썹이 꿈틀했다. 산영은 바퀴가 달린 의자를 가져와 그 위에 도시락을 올려놓고 뚜껑을 열었다.

“건아, 내가 죽 싸 왔어. 아직 점심 안 먹었지?”

고소한 냄새가 풍겼으나 도시락 안 내용물을 본 건은 미간을 찡그렸다.

“이 맛대가리 없게 생긴 걸 나보고 먹으라고?”

“……혹시 눈도 다쳤어?”

“뭐?”

“옛날에는 음식을 이렇게 무채색으로 만드는 것도 재주라고 칭찬해 줬잖아.”

눈을 감고 가만히 듣고 있던 이서에게서 웃음을 참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건은 숨을 삼키며 제 연인이었다던 눈앞의 남자가 자신을 물 먹이고 있는 건지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다기에는 너무나도 순수하게 자신을 걱정하는 얼굴에 부글부글 끓어 오르는 속을 눌렀다.

“먹어 봐. 배 안 고파?”

산영이 가지고 온 일회용 숟가락의 포장을 뜯어 죽을 살살 젓고는 한 숟가락 떠 호호 불었다. 건은 저렇게 맛대가리 없어 보이는 죽은 절대 안 먹겠다고 다짐했으나 막상 숟가락이 입술 근처로 다가오자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고 말았다.

죽은 따뜻했고, 물컹했고, 싱거웠다. 이렇게 구린 죽은 난생처음 먹어 보았다.

건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티슈 한 장을 뽑아 거기에다가 죽을 퉤 뱉었다. 산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씨발…….”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연 것에, 그리고 이렇게 맛없는 죽을 먹은 것에 짜증이 나 욕설을 읊조린 건은 입술을 닦고 산영을 노려보았다.

“가지고 꺼져. 내가 어제도 예의를 차리느라 말을 제대로 못 한 것 같은데, 난 너 모르니까 너랑 나는 이제 볼 일도 없어.”

산영은 참기름이 묻어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숟가락을 덩그러니 든 채로 숨을 집어삼켰다. 건에게 이렇게 심한 말을 들은 것은 처음인지라 적응이 되지 않았다.

뒤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청우가 산영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옆에 섰다.

“말이 너무 심하잖아. 아무리 기억이 없다지만 둘이 무슨 사이인지 들었다면 적어도 예의는 지켜야 하는 거 아니야?”

건의 눈길이 산영의 옆으로 느릿하게 올라갔다. 들어올 때부터 산영과는 다르게 키도 덩치도 범상치 않은 놈이라 눈에 띄었으나 부러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는데 갉작갉작 건드리는 것이 여간 짜증 나는 게 아니었다.

“내 전 섹스 파트너한테 관심 있나 본데.”

“……뭐?”

“그럼 네가 가지든지.”

청우의 얼굴이 완전히 굳었다. 산영이 숟가락을 들지 않은 손으로 주먹을 꽉 쥐고 한 발 앞으로 나온 청우를 막았다. 갈라진 분위기에 이서도 눈을 반짝 떴다.

“건아, 많이 피곤하지. 난 괜찮아. 기억이 안 나니까 무섭고 그럴 수 있어.”

미미하게 흔들리는 눈을 하고 산영은 도시락의 뚜껑을 닫았다. 상처를 받은 것 같으면서도 전혀 안 그런 척 담담하게 미소를 달고 이야기하는 그의 얼굴이 건은 매우 거슬렸다. 정말 단순한 섹스 파트너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였고, 자신이 나쁜 놈이 되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제가 나쁜 놈이 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살아왔는데도 이 미묘하게 올라오는 불쾌한 기분을 이해할 수 없어 건은 주먹을 쥐었다.

“다음에는 더 맛있게 해 올게. 퇴근 언제야? 아니, 퇴원…….”

문장 중간중간에 밭은 숨이 섞였다. 그 목소리를 듣는 건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고개를 반대로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햇빛이 눈부시게 흩어지는 풍경이 눈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아마 일주일 내로 퇴원하지 않을까 싶어. 다들 더 있다 가라고 했지만, 이 자식이 말을 듣는 성격이라야 말이지.”

“그렇구나. 나……. 더 있다가 가면 불편해?”

한눈에 봐도 더 있다 가고 싶다는 얼굴로 말하고 있었으나 고개를 돌린 건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산영은 결국 시무룩한 낯으로 도시락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

청우가 바르게 선 채로 건을 노려보고 있었다. 산영은 그의 눈치를 슬쩍 보고서는 청우의 소맷단을 잡고 흔들었다. 청우의 눈이 건과 산영 사이를 오갔다. 청우는 결국 한숨과 함께 돌아서야 했다. 그 둘을 따라 이서도 밖으로 나왔다. 이서가 산영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아,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네.”

“고마워, 이서야. 건이 옆에 있어 줘서…….”

“나야, 뭐. 그냥 있는 것뿐인데. 상심이 크지? 이렇게 된 거 저 새끼 엿 먹으라고 나랑 만나 보는 건 어때?”

산영의 어깨를 피아노 치듯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하는 말에 청우가 굳은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이서는 어깨를 으쓱이며 유들유들하게 웃을 뿐이었다.

“이서야. 건이 아픈데 그렇게 못되게 말하면 어떡해.”

산영이 한숨을 푹 내쉬면서 하는 말에 명치를 맞은 이서가 웃는 낯 그대로 손을 내렸다.

“건이 놀리지 말고 잘 돌봐 줘. 부탁할게.”

“뭐……. 내가 돌볼 만한 상대는 아니지만.”

이서가 깔끔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산영은 미련이 남는지 몇 번이나 병실을 돌아보다가 겨우 걸음을 뗐다.

뜨거운 볕에 도시락을 들지 않은 손으로 차양을 만들었다. 청우가 그런 산영을 데리고 나무 밑 그늘로 갔다. 둘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다시……. 생각해 볼 순 없냐?”

청우가 무겁게 입을 뗐다. 산영의 고개가 부드럽게 올라왔다. 동그란 눈이 두어 번 깜빡였다.

“뭘?”

“너랑……. 차건.”

산영이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더니 곧장 고개를 저었다. 예상했던 반응에 상심도 들지 않았다.

“건이도 많이 혼란스러워서 저러는 거야. 나 같아도 내 애인이 남자라고 하면 많이 놀랄 거니까…….”

아니. 만약 산영이 기억을 잃은 후에 제 애인이 남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속으로는 조금 고민할지언정 겉으로는 ‘내가 너를 참 좋아했나 보다.’ 하고 웃을 게 분명했다. 그게 이산영과 차건의 차이였다.

“그래도 조금 놀랐다? 건이가 원래 저렇지 않았는데……. 많이 혼란스러운가 봐.”

“차건은…….”

청우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보기에 건은 변한 게 없었다. 원래 저렇게 싸가지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저 산영의 앞에서만 그 눈곱만큼의 싸가지가 있었던 것뿐이다.

“응?”

“아니야. 가자. 그 죽은 내가 먹어도 되지?”

“그래도 괜찮아? 너 내 요리 잘 못 먹잖아.”

“……먹어, 나도.”

산영의 요리를 잘 못 먹는 것은 자신이나 건이나 마찬가지인데 왜 자신만 못 먹는다고 생각하는지 의문이었다. 청우는 쓴입을 다시며 택시를 불렀다.

이서가 병실로 돌아왔을 때 건은 왼손으로 종이를 불편하게 넘기며 서류를 읽고 있었다. 심각한 얼굴의 건을 보면서 이서는 기지개를 켰다.

“뭘 그렇게 공부하듯 보고 있어?”

“애인이었다며. 뭘 퍼 줬는지, 얼마나 돌았었는지 확인해야지.”

그가 보고 있는 것은 부동산 등기와 각종 계약서, 계좌 이체 내역 등이었다. 이서가 흥미 어린 낯으로 의자를 끌고 와 침대 옆에 앉았다.

“오, 이제야 산영이가 애인이라는 말이 믿겨? 이런 서류까지 찾아볼 정도로?”

산영과 교제하기 전 가볍게 만났던 이들에게 준 선물은 보통 그들이 원하는 물건이었지 절대 건물이나 현금은 아니었다. 돈이 차고도 넘치는 건이 줘 버린 선물을 아까워할 리는 없고, 서류까지 들추는 것을 보니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듯했다.

“남자랑 만났다는 건 보통 미쳤던 게 아니란 소리잖아.”

“아, 그래. 그러고 보니 걱정 안 돼?”

사람을 살살 긁기 전에 나오곤 하는 익숙한 목소리에 건이 이서에게로 흘깃 눈길을 던졌다.

“네 뒷구멍 말이야. 안 헐었을까?”

건이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는 아무 대꾸 없이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전혀 믿지 않는 눈치에 재미없다며 혀를 찬 이서가 바깥 풍경을 보았다. 하긴 덩치가 있는 청우라면 모를까 작고 순진해 보이는 산영을 상대로 이성애자였던 건이 어떤 상상을 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건 뭐야?”

못 보던 건물을 사들인 날짜는 추측해 보니 산영과 교제하고 있을 때였다. 이서가 서류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아, 이거. 학교 앞 카페 있는 덴데.”

“카페? 이걸 왜 샀는데. 임대료는 왜 이따위야?”

“궁금하면 한번 가 보든가. 갈 땐 나 꼭 데려가라?”

얼굴에 재밌어 죽겠다고 쓰여 있는 이서가 못마땅했다. 저 새끼한테 뭘 바라겠는가. 건은 그렇게 생각하며 서류 속 주소를 내려다보았다.

욕실의 문을 열고 나오자 더운 기운이 너도나도 밖으로 뛰쳐나왔다. 뜨거운 물에 몸을 적시느라 뺨이 희미하게 붉어진 이서가 수건으로 머리를 털었다.

침대 위에 엎드려 누워 다리를 동동 흔들며 핸드폰을 보고 있던 주희가 흘긋 시선을 주었다. 가운을 벗자 군살 없는 탄탄한 몸이 드러났다. 조금 전의 정사로 분명 보았던 몸인데도 주희는 꼭 처음 보는 것처럼 그를 훑었다. 시선을 느낀 이서가 옷을 걸치며 씩 웃었다.

“부족해?”

“누구누구 씨가 한 번밖에 안 하는 바람에?”

“그러게 약속 있다고 했잖아.”

“나랑 놀다 보면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흐음. 네가 나한테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었는 줄은 몰랐는데.”

특유의 늘어지는 듯한 투에 얼굴은 싱글거리는 것이 여간 얄미운 게 아니었다. 주희가 눈가를 찡그렸다.

“꼭 못되게 말하더라. 그거 악취미야, 너.”

“악취미 있는 놈이랑 자는 네 취미도 알 만하고?”

이서는 거울을 보며 물기가 남은 머리카락을 털고선 귓바퀴에 박힌 귀걸이를 습관적으로 만지작거렸다. 거울 너머로 어이없어하는 주희의 낯이 보였다. 하지만 주희는 이내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약속이길래 그렇게 얄미운 얼굴을 하고 있어?”

“글쎄. 약속이라기보다는 구경.”

“무슨 구경?”

그는 여전히 엎드려 누워 있는 주희의 곁으로 다가갔다. 머리맡에 앉아 머리칼을 손에 감자 주희가 고개를 젖혀 이서의 손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가늘게 떴다.

“사랑으로 어디까지 버티는지…… 같은 거?”

“그게 뭐야.”

실없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주희가 웃자 이서도 마주 웃으며 그에게서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가.”

“응.”

주희는 곧장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고, 이서는 그럴듯한 손짓 하나 없이 밖으로 나갔다. 여름의 끝자락으로 달려가고 있음에도 한낮의 햇볕은 여전히 뜨거웠다. 습한 공기가 피부에 찰싹 달라붙었으나 한여름 무더위보다는 나았다.

이서는 차에 올라탔다. 목적지는 학교 근처에 자리를 잡은 카페였다. 건이 보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부동산 등기와 계약서 속 그곳이었다.

도착해 주차한 지 얼마 안 되어 차 한 대가 들어섰다. 차 안에서 구깃구깃 내리는 이는 바로 건이었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문을 쾅 닫는 걸 보니 다친 팔 때문에 직접 운전을 못 하는 일이 여간 못마땅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하여튼 요란하다니까. 이서는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여기야?”

건이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으며 1층에 카페가 들어선 건물을 훑어보았다. 지은 지는 꽤 되었지만 관리는 깔끔하게 잘된 건물이었고, 카페는 개인 카페로 아기자기한 맛이 있었다.

“들어가자. 커피가 맛있거든.”

이서가 웃음을 참으며 문을 열어 주고 고갯짓했다. 건이 못마땅한 낯으로 이서를 쳐다보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개강을 앞둔 학교 근처 카페는 비교적 한산한 편이었다. 건은 인테리어부터 훑은 뒤에 자리에 앉으려고 했다.

“어서 오세……. 어? 건아!”

어디서 들어 본 목소리에 건은 고개를 돌렸다가, 카운터 안에 서 있는 얼굴을 마주하고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카페 이름이 정갈하게 새겨진 암갈색의 앞치마를 맨 산영이 환하게 웃으며 카운터 밖으로 나왔다.

“어떻게 알고 왔어? 혹시 기억이 돌아온 거야?”

건은 신경질이 어린 얼굴로 산영을 내려다보다가 이서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는 듯한 물음이 어린 눈에 이서는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답은 없고 건의 온도는 여전히 차자 산영은 시무룩하게 앞치마를 매만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무언가가 생각난 듯 눈을 반짝였다.

“커피 마실래? 건이 너 내가 내려 준 커피 좋아하잖아.”

건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지만, 산영은 그게 좋겠다면서 혼자 중얼거리더니 카운터 안으로 쏙 들어갔다.

“자, 앉자고?”

이서는 건을 이끌고 카운터가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건은 다리를 꼬고 앉아 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 신경질적인 움직임에 이서는 화사해 보이는 창밖의 풍경을 눈에 담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쟤가 여기 주인이야?”

“아니, 알바.”

“하. 그럼 내가 알바 하나 때문에 이 건물을 샀다고?”

건이 사납게 고개를 꺾었다. 건물 하나 사는 게 건에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고작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하고 있는 남자 애인 때문에 이 짓을 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글쎄. 그건 과거의 네가 알지 않을까?”

이유는 알고 있었지만 이서는 부러 입을 다물었다. 쉽게 가는 건 재미가 없었다. 이유를 알려 주어 봤자 지금의 건은 납득하지 못할 게 분명했고.

이서는 이곳의 커피를 좋아했다. 산영이 음료 한 잔, 한 잔에 정성을 다하기 때문이었다. 가끔 서툴기도 했지만 그건 또 그것대로의 맛이 있었다.

“커피를 만들어서 오나 보지?”

단점이 있다면 오래 걸린다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트집을 잡고 싶어 하는 불만스러운 목소리에 이서는 창밖에서 시선을 뗐다.

“커피는 원래 만들어서 오는 거잖아.”

합당한 지적이었으나 건은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카운터 안을 노려보듯 응시했다. 저쯤 되면 뒤통수가 간지러울 만도 한데 산영은 커피를 만드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잔 두 개가 놓인 트레이를 들고 산영이 다가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산영의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던 건이 그런 적 없다는 듯 시선을 휙 돌렸다. 두 사람의 앞에 커피 잔을 각각 놓아 준 뒤, 산영은 트레이를 품에 안은 채 기대 어린 얼굴로 건을 쳐다보았다.

건은 제 앞에 놓인 커피를 마치 독약이 든 음료라도 살피는 것처럼 쳐다보다가 천천히 잔을 들고, 한 모금 머금었다. 커피를 삼킨 건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어때, 건아? 맛있어?”

“커피 맛이 다 똑같지.”

건은 거칠게 잔을 내려놓았지만 자존심이 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맛있지만 차마 맛있다고는 못 하겠는 표정이라 이서는 웃음을 삼켰다.

누구보다 건의 반응을 잘 꿰고 있는 산영은 히죽 웃으며 어깨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손님이 들어와서 건의 곁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건아, 나 조금만 있으면 퇴근이니까 기다려 줘. 알겠지?”

산영이 신신당부를 하고는 카운터로 돌아갔다. 건은 산영이 카운터 안으로 들어가 주문을 받자 다시 잔을 손에 들었다.

또다시 영롱한 종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손님이 많아졌네. 그런 소리를 하며 고개를 돌린 이서는 휘파람을 휙, 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손님은 청우였다.

생각지도 못한 삼자대면을 또 하게 생겼다. 이서는 건을 힐긋 보았다. 커피를 한 모금 삼키고 카운터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 건의 미간이 좁혀졌다.

“저 새끼는 뭐야?”

“뭐긴, 산영이 친구지. 듣기로는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친구였다던데.”

청우를 맞이하는 산영의 낯이 밝았다. 청우를 보며 산영은 조잘조잘 떠들었고, 아마 건에 관한 이야기를 한 듯 그의 고개가 잠시 이쪽으로 돌아왔다. 건을 발견한 청우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청우에게로 향하는 건의 눈빛 또한 이글이글했다. 기억을 잃었다면서도 저 모양이니, 본능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나 보다.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이서는 청우가 돌아서기를 기다려 손을 번쩍 들었다.

“청우야, 여기!”

다른 자리를 찾으려는 듯 몸을 돌리던 청우가 어정쩡하게 이쪽을 바라보았다. 이서는 때를 놓치지 않고 눈을 가늘게 접으면서 손을 까딱였다. 결국 청우의 걸음이 이쪽으로 돌아왔다.

아아, 저 불편한 얼굴. 애써 숨기려는 듯하지만, 잘 숨기지도 못할 거면서 굳이 왜 노력을 하나 싶었다. 짧은 머리 아래 딱딱해진 미남의 얼굴을 즐겁게 감상하며 이서는 커피를 한 모금 넘겼다.

“안녕, 청우야.”

“어, 안녕.”

이서가 제 옆자리의 의자를 당겨 주었다. 잠시 고뇌하는 듯한 눈이 의자로 향했고, 이서는 청우의 손목을 거침없이 잡은 뒤 아래로 당겼다. 결국 청우는 이서의 옆에 앉고 말았다.

건과 청우의 시선이 맞닿았다. 피차 좋은 감정이 없는지라 둘은 인사도 하지 않았고, 청우는 금방 카운터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싸해진 분위기 속에서 즐거운 사람은 오직 이서뿐인 듯했다.

“산영이랑 약속 있었어?”

“아니. ……너는?”

“우리도 약속 잡고 온 건 아니야.”

크게 의미 없는 말이었으나 청우는 이서의 얼굴을 살피듯 훑어보았다. 왜 날 불편해할까? 산영의 애인인 건보다 자신을 더 불편해하는 것 같으니 그것도 참 신기한 일이었다. 이서는 가볍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곧 음료가 나왔다. 커피가 아닌 에이드였다. 어딘가 뚱한 듯한 얼굴과 운동선수 같은 느낌을 주는 옷차림, 체격과는 어울리지 않는 주홍색의 자몽에이드였다.

“혼자 안 심심하겠다. 다행이야.”

에이드를 들고 온 산영이 두 사람과 함께 앉은 청우를 보고 활짝 웃었다. 잔을 받아 들고 막 일어나려던 청우가 다시 엉거주춤 앉았다.

“근데, 건아. 연락도 없이 퇴원하고……. 몸은 이제 괜찮아?”

산영의 손이 건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동시에 건이 그의 손을 찰싹 내쳤다. 산영이 제 손을 쥐고 몸을 움츠린 순간 청우는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몸을 들썩였다.

“어디다 손을 대.”

“아, 미안……. 그래도 얼굴 보니까 좋다, 건아.”

차가운 태도에도 산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통통한 뺨에 보조개가 쏙 들어갈 정도로 미소 지었다. 이서의 시선이 핏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유리잔을 꼭 쥐고 있는 청우의 손으로 향했다.

“아, 손님 왔다. 기다려 줘야 돼, 건아. 알겠지?”

산영이 발을 동동 구르다가 카운터로 돌아갔다. 그가 떠나자마자 불편한 기류가 툭툭 튀었다. 에이드의 얼음이 녹고 있었다. 아깝네. 그런 생각을 하며 이서는 턱을 괴고 유리잔을 쥔 성난 손만을 응시했다.

“어? 차건?”

정적을 깬 건 새로 들어온 손님이었다. 건은 제 동기를 알아보고 고개를 까딱였다. 동기가 건의 옆에 앉았다.

“이야, 오랜만이다. 방학 동안 뭐 하고 지냈냐? 팔은 왜 그래? 다쳤어?”

“어, 좀.”

“그래서 애들이 불러도 안 나왔구나?”

건은 다소 귀찮은 티를 숨기지 않고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카운터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동기의 시선도 함께 돌아갔다.

“차건을 보려면 생과대 마네킹이 있는 곳으로 가라. 그 말이 사실이었네.”

“뭐?”

“응?”

“생과대 마네킹?”

커피 잔을 들어 올리던 이서가 멈칫했다. 건은 모르는 별명이었고, 눈치를 보아 청우도 모르는 듯했다.

건이 되묻자 동기가 뒤늦게 아차 하는 기색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미 명백하게 산영을 가리킨 지칭에 청우의 관심까지 사로잡은지라, 상황을 완벽히 회피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게 뭔데?”

건이 재차 물었다. 동기는 건의 앞에서 ‘생과대 마네킹’ 운운하던 친구가 그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마네킹은 예쁘기라도 하지. 너처럼 골도 비고 면상도 갈린 놈은 뭐라고 부르는데?’

그 빈정거리는 싸늘했던 목소리가 아직도 잊히지 않아 동기는 몸을 부르르 떨며 슬그머니 건의 눈치를 보았다. 동기가 궁둥이를 슬쩍 의자에서 뗄 찰나였다.

“산영이가 워낙 예쁘게 생겼잖아. 근데 알고 나면 좀 깬다고, 마네킹처럼 가만히만 있어 줬으면 좋겠다고.”

이서가 커피 잔을 손에서 완전히 놓으며 그린 듯한 미소를 입에 건 채 건과 청우를 번갈아 눈에 담았다.

“그래서 생과대 마네킹.”

지금 이 카페의 아르바이트만 해도 그랬다. 실수투성이에 커피 맛은 어찌나 없는지. 서툰 산영의 모습에 그를 자르려던 사장은 카페가 학교 커뮤니티에 소소하게 언급되고 손님이 늘자 마음을 바꿨다. 맛없는 커피를 만드는 잘생긴 아르바이트생.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이나 다름없다고 여긴 것이다.

일이 어느 정도 능숙해졌지만, 여전히 실수를 연발하던 산영이 사장에게 크게 혼나고 돌아온 어느 날이었다. 건은 산영에게 말하지 않고 카페가 있는 건물을 인수했다. 그 뒤로 사장이 산영에게 친절해진 일은 산영이 모르는 비밀이었다.

“사람을 그런 식으로 지칭하는 거…….”

가만히 듣고만 있던 청우가 입을 뗐다. 안 그래도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 싸늘하게 굳었다.

“예의가 아닌 것 같은데요.”

낮은 목소리에 동기가 움찔하며 청우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생과대 마네킹 이야기가 나오면 꼭 같이 언급되는…….

“하하, 그게 제가 지은 게 아니라 저도 전해 들은……. 죄송합니다.”

동기가 꼬리를 말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고는 연신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난 이제 가 봐야겠다. 야, 건아. 나중에 보자.”

커피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나간 동기 때문에 아까운 커피 잔만이 자리에 남았다. 그 앞에 놓인 에이드의 얼음이 녹고 있었다.

“마네킹.”

건이 조용히 그 단어를 읊조리며 피식 웃었다.

“나는 쟤가 과거의 나를 어떻게 꼬셨길래 애인 행세를 하나 싶었는데, 그게 고작 얼굴이었으면 실망이네.”

청우가 건에게 시선을 주자 그는 여유롭게 턱 끝을 치켜세우며 깍지 낀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저 정도 얼굴은 널렸잖아. 아, 아니면 몸이…….”

“입조심해.”

험악한 목소리가 곧장 튀어나왔다. 열이 받은 청우 앞에서 건은 입꼬리를 길게 늘어뜨렸다.

“아무리 기억이 없다고 해도 네 애인이야. 감싸 주지는 못할망정 거들지는 말아야지.”

“애인?”

누가 봐도 일부러 그 단어를 입에 담았다는 투로 건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청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내 건의 입꼬리가 사그라들었다.

“너 쟤 좋아하지?”

툭 던져진 가볍지 않은 물음에 청우가 일순 굳었다.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이서가 놀란 티를 감추었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있던 건이 천천히 몸을 떼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미소가 사라진 얼굴과 협박하러 온 사채업자가 연상되는 자세는 사뭇 위협적이었다.

“쟤가 정말 내 애인이었다면 말이야. 내가 너를 가만뒀을 리가 없지.”

“…….”

“그러니까 넌 다행으로 여겨야 돼.”

그렇게 말하는 건의 낯에는 그 또한 자각 못 한 불쾌함이 어려 있었다. 재미있는 상황이네. 이서는 청우의 반응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눈을 부자연스럽게 깜빡이고, 입가가 짧게 경련하듯 움직였다. 굳은 채로 표정을 갈무리하는 청우는 들켜 버린 보물을 꼭꼭 숨기려고 안달이 난 아이 같아 가여웠다. 당당하지 못한 사랑을 품고 상대의 일갈에도 반박하지 못하는 비참함이 여기까지 와닿는 듯해 이서는 눈가를 잠시 찡그렸다.

“아무래도 여긴 팔아 치워야겠어.”

건은 청우의 표정을 훑다가 따분한 낯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서 안 가느냐는 듯 이서를 돌아보았다. 이서는 고개를 까딱일 뿐 일어나지는 않았다. 결국 건 먼저 걸음을 뗐다. 카운터 안에 있던 산영이 그의 뒤를 졸졸 쫓아 나오다가 닫힌 문 앞에서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빠짐없이 지켜보는 청우를 응시하던 이서가 유리잔을 톡톡 두드렸다. 손톱에 부딪힌 잔에서 난 소리에 청우의 고개가 돌아왔다.

“녹잖아, 얼음.”

“…….”

“녹으면 아깝고.”

안 그래? 이서는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고, 청우는 이내 둥글게 녹아 가는 얼음이 둥둥 뜬 자몽에이드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는 한참을 음료만 쳐다보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선 카운터로 가 미소 띤 낯으로 산영에게 말을 걸었다. 마치 시무룩해진 산영을 달래려는 듯.

그 뒷모습이 처량해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또, 또다. 이서는 청우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다가 유리잔으로 손을 뻗고, 자몽에이드를 한 모금 삼켰다. 입 안에서 새콤한 것이 마구 튀었다. 그저 충동이었다.

우렁찬 타격 소리가 텅 빈 도장 안을 울렸다. 에어컨을 틀지 않은 실내 속 수련에 도복이 땀으로 젖었다.

발등이 육중한 샌드백을 퍽, 퍽 때렸다. 시원한 타격감과는 다르게 속은 전혀 후련해지지 않았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운동을 하면 몸이 개운해지기도 하지만 복잡한 생각을 떨쳐 낼 수도 있어 좋았는데, 이번에는 잡생각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른발을 들어 올린 뒤 빠르게 몸을 뒤틀어 날렸다. 돌려 차기에 샌드백이 휙 날아갔다가 그네처럼 제자리로 돌아왔다.

돌려 차기를 끝으로 청우는 숨을 길게 내쉬며 곧게 섰다. 이쯤 되면 지쳐 주저앉을 만도 하건만 몸이 늘어지는 걸 싫어하는지라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허리에 두른 검은 띠를 손으로 잡아당기자 띠가 느슨하게 풀어지며 여몄던 깃 사이로 탄탄한 가슴이 드러났다. 갈라진 근육 사이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숨이 완전히 가라앉고 나서 눈을 뜬 청우는 샤워실로 들어갔다. 적당히 찬 물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뜨겁게 데워졌던 몸도 차츰 식어 갔다.

몸을 씻은 뒤 옷을 갈아입고는 도복을 가방에 대충 쑤셔 넣었다. 개강 첫 주라 아직 가방에 든 짐이 많지 않았다. 청우는 시간을 한 번 확인한 뒤에 도장을 나섰다.

도장에서 학교까지는 걸어서 십오 분 정도 걸렸지만, 청우의 보폭으로 십 분 정도면 충분했다. 청우는 성큼성큼 걸어 정문을 통과했다.

“안녕.”

상큼한 향이 코끝을 희미하게 스쳤다.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염색을 거친 게 분명한 밝은 갈색의 머리칼과 귀걸이가 알알이 박힌 현란한 귀였다.

이서가 씩 웃으며 청우의 가방 위에 손을 얹었다.

“이거 나왔는데.”

“아.”

오른쪽 어깨에 걸친 가방 밖으로 하얀 도복이 삐져나와 있었다. 청우는 도복을 주섬주섬 넣었다.

“고맙다.”

“뭘. 도복?”

“어.”

“운동해? 유도?”

“아니. 태권도.”

“아아, 어울리네.”

청우는 자신과 나란히 걸어가는 이서를 곁눈으로 보았다. 느닷없이 나타난 이서와 단둘이 있으려니 어색하고 불편했다. 같이 있을 일이 거의 없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여태까지는 사이에 산영이 꼭 끼어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이서가 특유의 느물느물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꿰뚫는 듯한 눈에 청우는 무뚝뚝한 낯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강의 들으러 가?”

“전공.”

“체육관은 여기가 아니잖아? 아, 사범관?”

“체육관?”

“너…… 체교 아니었던가?”

“아닌데.”

“난 왜 네가 체교인 줄 알고 있었지?”

그런 오해를 많이 받아 봤기에 청우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딱히 기분이 나쁘지 않았고, 나쁠 일도 아니었다. 이서에게 제 전공에 대해 말한 적 없었으니 모를 법도 했다. 자신만 해도 그를 몇 번 봐 왔지만 그가 무슨 과인지는 모르고 있으니까.

“신방이야.”

“아.”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서의 걸음이 주춤했다. 곧잘 따라오던 인영이 사라지니 청우도 자연스레 멈춰 그를 돌아보았다. 어쩐지 허를 찔린 듯한 얼굴이었으나 이서는 금방 웃는 낯으로 돌아와 의아해할 겨를도 없었다.

“그것도 어울리네.”

둘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언제까지 같은 방향으로 가는 것인지, 자신도 말을 걸어야 하는지 고민할 찰나였다.

“운동은 매일 아침 하는 거야?”

“아니, 가끔.”

“오늘은 왜? 뭐 심란한 일이라도 있어서?”

의미심장한 투에 가방끈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몇 번 만나 본 경험으로 이서의 화법이 어떤지 대충 알고 있었다. 말려들면 안 된다. 청우는 무심한 투로 답했다.

“아니.”

“걸음이 너무 빨라.”

이서가 청우의 팔목을 쥐고 그의 걸음을 늦춘 뒤 인위적으로 벅찬 숨을 내쉬었다. 청우는 결국 걸음을 완전히 멈추고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이 정면으로 마주치자 이서가 씩 웃으며 물었다.

“사람으로 사람을 잊는다는 말 어떻게 생각해?”

무거운 철학이 담긴 물음이 마치 오늘 먹은 아침 메뉴를 묻듯 가볍게 던져졌다. 청우는 이서의 의중을 파악하려 그의 낯을 살폈지만, 그에게서 어떤 뜻도 얻을 수 없었다. 이서는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너 나랑 사귀어 볼래?”

경악스러운 물음이었다. 그러나 청우는 놀라지 않았다. 이런 물음이 뜬금없이 튀어나와도 놀랍지 않을 정도로 가볍고, 황당한 놈이었으니까. 하지만 기분은 나빴다. 어떤 배경으로 저런 물음이 나왔는지는 알 것 같아서.

“나 남자도 되거든.”

“미친놈.”

던져진 욕설에 이서가 눈을 가늘게 접고 화사하게 웃었다. 햇볕에 노랗게 반짝거리는 머리칼이 그 미소와 무척 잘 어울렸다.

“욕하는 쪽이 더 낫다.”

미친놈과는 옷깃도 스치는 게 아니다. 청우는 더 대응하지 않고 가차 없이 돌아섰다. 뒤에서 따라오는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산영과 함께 듣는 교양 강의는 ‘연극의 이해’였다. 한 학기에 한 번씩은 꼭 같은 교양 강의를 들었는데, 서로 시간 맞는 강의를 찾아 듣느라 대체로 관심도 재미도 없는 강의가 선택되기 일쑤였다. 다행히 이번 강의는 학기 중에 한 번 있는 과제가 공연 중인 연극을 감상하는 비교적 쉬운 것이었고, 산영이 마음에 들어 해 공통 강의로 선정되었다.

산영은 하루의 대부분을 건과 붙어 다녔고, 그와 청우는 다른 과였기에 일주일에 두 번 있는 교양 강의는 청우에게 소중한 시간이었다.

청우는 강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많은 사람 중에 동글동글한 머리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그의 옆으로 향하는 청우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감돌았다.

“어? 왔어?”

청우가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 두자 산영이 웃으면서 의자를 당겨 주었다. 산영의 표정이 근래 들어 가장 좋아 보였다. 청우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듯했다.

“뭐 좋은 일 있었어?”

“어? 티 나?”

“응.”

산영이 수줍게 웃으면서 고개를 주억였다. 한쪽 뺨에 쏙 들어간 보조개에 청우의 눈길이 담겼다.

“오늘…… 건이랑 밥 먹기로 했어.”

순간 힘이 탁 풀렸다. 몇 번이나 겪어 본 감정인데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다행이라면 표정은 능숙하게 감출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

“응. 아침에 건이랑 같은 강의 들었잖아. 내가 같이 밥 먹자고 조르는데도 싫다고 해서,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거 먹여 주겠다고 했거든? 건이가 좋아하는 갈빗집 있는데, 건이는 기억을 잃었으니까 모르잖아. 건이가 솔깃해하는 게 보이는 거야. 그래서 데려다주겠다고 했어.”

조잘거리는 산영의 뺨이 붉게 상기되었다. 건의 이야기를 할 때면 언제나 저런 얼굴이었다. 언제든 볼 수는 있지만, 저런 얼굴을 하는 산영의 입에서 자신은 주어도 목적어도 될 수 없었다.

“그놈 뭐가 예쁘다고 맛있는 집을 데려가 주냐.”

“있지, 좋은 점도 있는 것 같아. 막 사귀기 시작했을 때처럼 다 처음 해 보는 기분을 또 느끼는 거잖아.”

산영이 어깨를 움츠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산영은 무인도에 혼자 떨어져도 잘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누군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어떤 불행의 사막 속에서도 희망의 알갱이 하나를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던 적도 있다. 산영은 차건이라는 놈의 사랑할 수밖에 없는 부분을 찾아내 기어코 그 알갱이를 주워 주었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렇다면 왜 자신에게는 그의 손이 닿지 않았던 걸까. 제 알갱이는 산영에게 보이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주워 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걸까.

왜 산영의 발길이 닿았던 사막이 자신이 아니었는지 때로는 억울할 따름이었다.

“가서 너도 많이 먹어. 요즘 걱정하느라 살도 빠진 것 같아, 너.”

“응. 알았어.”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는 산영의 머리를 주저하다가 한 번 가볍게 쓰다듬고는 손을 뗐다. 그러자 산영이 청우의 소맷단을 잡고 소곤댔다.

“고마워.”

“……어?”

“너 아니었으면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도 힘들었을 거야.”

진심으로 고맙다는 듯 지어 보이는 미소에는 든든한 우정에 대한 믿음이 깃들어 있었다. 청우는 그 미소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차마 마주 웃어주지는 못하고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의 마지막 교양 강의는 ‘미래 직업 문화’였다. 인터뷰 과제에 흥미를 느껴 동기와 함께 찜해 둔 강의였는데, 동기는 신청에 실패하고 청우만 성공하고 말았다.

덕분에 독강이다. 청우는 뒷자리에 털썩 앉았다. 가방을 막 옆자리에 올려 두는데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 저도 모르게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가 멈칫했다. 어딘지 익숙한 밝은 갈색의 머리가 시선을 끈 탓이다.

자연스레 그날 들었던 개소리가 떠올라 청우는 미간을 찡그렸다. 남자도 되니 연애를 하자고? 커밍아웃을 그렇게 쉽게 해 버려도 되는지에 대한 의문은 차치하고, 그 말이 사실인지도 의심이 들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알았을까. 청우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억을 잃은 건이 어떻게 자신의 감정을 한 번에 알아보았는지, 이서가 어째서 제 감정을 훤히 아는 듯 굴었는지. 혹시 자신도 모르게 제 감정을 흘리고 다녔던 걸까. 그렇다면 산영이 알 가능성은…….

청우는 허공으로 향한 시선을 다시 현란한 뒤통수로 옮겼다. 이서가 산영에게 말을 흘릴 가능성을 생각했다. 워낙 가벼워 보이지만, 보이는 것만으로 사람을 완전히 판단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람에게는 선이 있고, 그 선을 넘지도 않았는데 지레짐작할 필요는 없었다.

만일 누군가가 눈치를 챘다면 그것은 제 잘못이었다. 산영이 알지 못하도록, 그가 불편함을 무릅쓰고 제게 다정하게 굴 날이 없도록 마음을 추슬러야 했다. 눈치가 눈곱만큼도 없다는 평을 자주 듣는 산영이 제 마음을 눈치채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등신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차라리…….

현란한 뒤통수가 휙 돌아왔다. 마치 청우가 여기 있는 걸 아는 것처럼, 혹은 제게로 쏟아진 시선을 느낀 것처럼 갈색빛이 도는 눈이 정확히 이곳으로 꽂혔다.

이서의 눈이 배부른 짐승처럼 가늘어졌다. 눈이 마주친 것에 그치지 않고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서 때문에 청우는 약간의 당황을 느꼈다. 이서는 거침없이 걸어와 청우의 옆자리에 앉았다.

“우연이네?”

“어, 그러게.”

“독강?”

“응.”

이서는 싱글거리며 청우의 낯을 훑다가 조금 전까지 같이 앉아 있던 일행을 향해 외쳤다.

“야, 내 짐 좀!”

일행들의 시선이 우수수 쏟아졌다. 순식간에 불편한 자리가 되어 청우는 괜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뭐야? 거기 앉게?”

“어.”

우우, 배신자! 장난스러운 야유와 함께 가방이 휙 날아왔다. 한 손으로 가볍게 잡아챈 이서가 제 옆자리에 가방을 올려 두었다.

“잘됐네. 같이 들으면 되겠다.”

불편했다. 청우는 미간을 찡그릴 뻔한 것을 참고 주먹을 쥐었다. 이서의 시선이 제 손으로 향하는 것도 모르고 정면을 응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수가 들어왔다. 인쇄된 강의 계획서가 한 장씩 돌아갔다. 계획서를 받은 청우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훑다가 과제에 ‘2인 1조’라고 쓰여 있는 부분에 시선을 박았다.

잊고 있었다. 이번 강의의 과제는 2인 1조로 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 같은 조 하면 되겠다.”

이서가 미소 짓는 동시에 그날 맡았던 상큼한 향이 다시금 코끝을 스쳤다. 청우는 저도 모르게 불쑥 묻고 말았다.

“향수 써?”

그 물음이 의외였는지 이서는 대답 없이 쳐다보다가 손목을 다짜고짜 내밀었다.

“응. 좋아?”

“……어. 좋네.”

라임이나 자몽 같은 것이 떠올랐는데 그보다는 덜 시고 희미하게 나무 향이 섞여 있었다. 이서와 어울리지 않는 듯하면서도 어울리는 향이었다. 예전에도 이런 향이었나. 기억은 잘 나지 않았지만, 볼 때마다 다른 향이 났던 듯도 했다.

이서의 손목은 떠났는데 향은 여전히 주위를 맴도는 듯했다. 괜히 코끝을 훑는데, 과제 발표 순서를 정하라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언제가 좋아?”

이서의 물음에 청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낯을 가리는지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편하기는 했지만, 이서는 이유 없이 어려운 존재라 차라리 처음 보는 사람과 조를 이루는 게 나을 듯싶었다. 하지만 이미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끼리 조를 짠 듯했고, 상황을 바꿀 수는 없어 보였다.

“……중간고사 끝나고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래, 그럼.”

이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칠판을 향해 걸어갔다. 비어 있는 순서에 자신과 청우의 이름을 적고 돌아와 앉았다.

“그럼 우리 오늘 같은 조 된 기념으로 친목을 도모해 볼까?”

늘 달고 다니는 미소를 지으며 이서가 물었다. 그날의 그 개소리가 갑작스레 되살아나 청우는 은근한 충격을 받았다. 이서가 워낙 아무렇지 않게 다가온지라 그 일을 어느새 깜빡 잊고 말았다. 분명 강의실에 도착해 그를 보았을 때 떠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거북함이 밀려왔다. 그런 폭탄 같은 말을 던져 놓고 아무렇지 않게 구는 게 이상했다. 역시 그냥 던져 본 말이었을까. 어느 쪽이든 지금이라도 자리를 뜨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때문에 이 강의를 굳이 포기하는 것도 못마땅했다. 어느 쪽의 대답도 내놓지 않자 이서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가 했던 말이 진심인지 궁금해?”

잊은 것은 아니었구나. 청우는 경계하듯 이서의 낯을 살폈다. 이서가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며 말했다.

“궁금하면 알아봐.”

“…….”

“왜. 무서워?”

꽤 도발적인 물음이었다. 저런 화법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흔들었을까. 말려드는 순간을 조심해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청우는 눈가를 찡그렸다.

“내가 왜 그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알아야 하냐?”

이서의 입이 살며시 벌어졌다. 재미있다는 얼굴. 청우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더욱 짙어졌다.

“그럼, 너한테만 소중한 그 구질구질한 사랑은 언제 끝낼 수 있는데?”

부드러운 낯과는 다르게 날카로운 물음이 청우의 가슴에 꽂혔다. 너에게만 소중하다는, 구질구질한 사랑이라는 말에 선뜻 반박할 수가 없었다.

당장 이 새끼와 멀어져야 한다. 머릿속 경광등이 번쩍이며 그렇게 경고하고 있었다. 하지만 쉽사리 몸을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은, 아마도 제 마음속에 은밀하게 숨겨진 욕망이 고개를 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제 접어야 한다고. 끝내야 한다고.

하지만 방법을 몰랐다. 한쪽에서는 왜 그래야 하냐며 닳아 가는 줄을 팽팽하게 당겼다. 그 가운데 선 청우의 가슴만이 따갑게 쓸릴 뿐이었다.

청우는 대답하지도, 고갯짓하지도, 손짓하지도 않았지만 이서의 미소는 짙어졌다. 마치 너는 내 뜻을 따르게 될 거라는 듯. 이상하게도 오만하게는 느껴지지 않는 웃음이었다.

강의가 끝나고 이서와 함께 찾은 곳은 학교 근처의 펍이었다. 점심에는 피자와 파스타 따위를 팔고 저녁에는 술을 파는 곳으로, 인테리어를 잘 모르는 청우가 보기에도 트렌디하게 꾸며져 있었다.

분위기가 좋아서인지 커플이 많이 보였다. 동기들과 모이면 보통 치킨집이나 호프집에 가기 때문에 이서와 단둘이 이곳에 온 게 왜인지 어색했다. 목덜미를 긁적이며 사람이 비교적 없는 구석 자리에 가 앉았다.

“뭐 마실래?”

이서가 메뉴판을 들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메뉴가 하나하나 손 그림으로 그려져 아기자기했다. 청우는 메뉴판이 적당히 보일 정도로만 고개를 내밀었다.

“뭐가 맛있냐.”

“음, 술 잘해?”

“적당히. 소주 세 병 정도.”

“그건 적당히가 아니잖아.”

이서가 웃으면서 메뉴판을 넘기다가 각종 맥주가 나열된 장에서 멈추었다. 그가 손가락 끝으로 메뉴 하나를 가리켰다.

“이런 건?”

자몽 맛 맥주였다. 산영은 쓰기만 한 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친구들과 모이면 과일 맛 소주나 맥주를 마시곤 했다. 그 옆에서 청우도 그런 술에 맛을 들였다.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이서가 직원을 불러 주문했다.

“자, 과제는 어떻게 할까. 생각나는 직업 있어?”

강의의 과제는 미래에 떠오를 것 같은 직업이나 특이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찾아 인터뷰하는 것이었다. 청우는 당장 떠오르는 직업이 없어 고개를 젓고 생각에 잠겼다.

“잡지에서 본 적이 있는데, 독립 서점을 운영하는 사람 이야기였거든.”

이서는 독립 서점을 운영하면서 예약 손님들에게 책 추천과 함께 상담도 해 주는 주인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잡지에 실린 인터뷰의 요점을 정리하면서 왜 그 사람을 소개하는 것이 좋을지 제 사견을 첨언하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청우는 이서를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평범한 대화를 나눌 일이 거의 없었는지라 이렇게 말을 잘하는 줄은 처음 알았다. 발표를 이서가 해도 괜찮겠다. 사람들의 관심을 장악하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을 듯했다.

청우는 핸드폰을 꺼내 이서의 이야기를 메모했다. 말을 끝마친 이서가 턱을 괴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열심이네.”

키패드를 누르던 손가락이 멈칫했다. 이상하게 이서의 말은 평범한 말도 범상하게 들리지 않았다. 청우는 마저 메모를 끝낸 뒤에 고개를 들었다.

때마침 맥주와 안주가 나왔다. 둥그런 접시에 크래커와 치즈, 감자튀김이 정갈하게 담겨 있었다. 직원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예쁘게 장식된 자몽 맛 맥주를 이서의 앞에, 흑맥주를 청우의 앞에 놓아 주고 떠났다. 두 잔을 이서가 바꾸었다.

“마셔 봐. 여기 맛있어.”

청우는 꽂혀 있는 빨대를 빼고 잔에 입을 댔다. 상큼하고 적당히 달면서도 맥주로서의 본분도 잊지 않은 맛이었다. 혀로 입술을 훑으며 맛을 음미하다가 눈을 드니 이서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픽 웃고는 제 몫의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말해 봐.”

“뭘?”

“나랑 사귀는 게 왜 싫은지?”

어쩌면 이 이야기가 나오지 않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청우는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미간을 찡그렸다.

“다 떠나서 좋아하지도 않는데 왜 사귀냐?”

“아아, 그런 타입?”

입가에 슬그머니 걸린 미소가 거슬렸다. ‘그런 타입’이라니. 적어도 자신은 좋아해야 연애를 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다. 정상과 비정상을 갈라 상대편을 비난할 생각은 없지만, 아니라고 생각하는 땅에 굳이 발을 디딜 이유는 없었다.

“나는 너를 안 좋아하고, 너도 나를 안 좋아하니 더 적당하잖아.”

“아니 그러니까 왜 사귀자는 건데?”

“짝사랑도 습관이니까.”

웃는 입술과는 다르게 어쩐지 투명하게 느껴지는 눈은 진지한 것 같기도 했다. 청우는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거 알아? 짝사랑도 오래 하면 말이야. 나중에는 사랑하지 않아도 사랑하게 돼.”

“…….”

“사랑하지 않는데 휘둘리게 되고, 사랑하지 않는 내가 이상해지지.”

짝사랑을 오래 한 것은 맞지만, 짝사랑을 그만둔 것은 아니라 이서의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보다는 그도 짝사랑을 해 본 적이 있는 건가 하는 의문이 솟았다. 인상을 펴자 이서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벗어날 수 있을 때 벗어나야 돼, 청우야.”

“왜 난데.”

목이 잠겼다. 청우는 맥주를 벌컥 들이켰다. 달고 상큼한 맥주의 맛이 혀끝을 아릿하게 했다.

“글쎄. 네가 내 앞에 있었으니까. 궁금하니까.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이서가 고개를 기울이고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단순히 재미로, 말 몇 번 섞어 보지도 않은 남자에게 사귀자는 소리를 운운하는 그가 이상했다. 청우의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범위였다.

이서의 손이 넘어왔다. 이서는 테이블 위에 얹힌 청우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 사이사이에 제 손가락을 넣고 얽었다. 청우가 눈썹께를 찡그리자 이서가 반응을 살피듯 그의 낯을 보았다.

“소름이 돋지는 않지?”

소름이 돋지는 않았지만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남자도 된다는 그 말은 사실이었을까. 어디부터 어디까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상대를 대하는 일은 무척이나 어려웠다.

“서로 좋아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한번 해 보자는 거야. 이산영 외의 사람에게 시간을 쏟고, 관심을 가지는 일부터 시작해야지. 너는…… 누가 끊어 주지 않으면 영원히 그러고 있을 것 같으니까.”

청우는 이서의 손에 얽힌 제 손을 빼냈다. 이서의 시선이 잠시 도망가 버린 손으로 가닿았다. 펍 안에서는 분위기 좋은 팝송이 흘러나왔고, 앉아서 술을 마시고 떠드는 사람들은 모두 즐거워 보였다. 어쩐지 안 맞는 옷을 입은 기분이었다.

“그러고 있는 게 뭔데?”

“친구 사이 깨질까 봐 고백할 용기는 없고, 그렇다고 욕심을 아예 버리는 건 아니고. 눈치 없는 이산영에게 기대서 감정을 아예 감추지도 않고, 쟁취할 생각은 좆도 없으면서 차건이 그 애를 애지중지하기만을 바라고. 그러면서 그거 보는 건 또 힘들고.”

이서가 늘어놓은 말이 뺨을 때리는 듯했다. 청우는 입 안의 살을 물었다.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왜 그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산영과 있을 때 고작 몇 번 본 게 다였던 그가 어째서 자신을 완전히 파악한 듯 구는지도. 왜 저런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두 알 수 없었다.

“그만해라.”

열여덟에 처음 산영을 만났다. 그 이후로 육 년이었다. 안다. 길다는 걸. 그만할 때도 되었다는 걸. 하지만 그건 제 몫이었다. 그 도피처로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의 연애를 선택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야. 네가 상관할 바 아니고.”

날이 선 목소리에 이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그런데 내가 차건 친구고 네가 이산영 친구인 이상 계속 보긴 할 텐데, 언제까지 구질구질할까 싶어서.”

청우는 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혀 당황하지 않은 눈길이 딸려 올라왔다. 가방을 챙겨 그냥 자리를 뜨려던 청우는 이서를 스치기 직전에 입을 열었다.

“네 말이 맞아. 내 사랑은 나한테만 소중하겠지. 근데 한 번도 구질구질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

단호하고 당당하게 선언하는 얼굴을 살핀 이서의 미소가 조금 사그라들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눈이 제 얼굴을 훑는 것이 따갑게 느껴졌다.

“먼저 간다.”

청우는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낯설게 느껴지는 저녁의 공기가 피부를 스쳤다. 불쾌함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운동이나 하러 가야겠다. 그는 걸음을 서둘러 수런수런한 거리를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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