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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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흔은 윤을 뒤로하고 먼저 그곳에 도착했다.
기이한 절경에 잠시 넋을 잃었다. 윤의 별당에서 화첩을 통해 접했던 그 풍경 속으로 뚝 떨어진 듯한 묘한 기분이었다.
좌측으로는 얼음이 부서져 내리는 것 같은 폭포수가 서늘하게 쏟아졌다. 그 아래 맑디맑은 물이 거대한 바위 웅덩이에 고이고 그것이 가느다란 내를 이루어 산 아래쪽으로 흘러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한 한천과는 반대로, 우측으로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큼지막한 온천이 있었다. 대체 이것이 무슨 조화인가 싶을 정도로 신기하였기에, 무흔은 눈을 빛내며 그 주변부터 살폈다.
“어! 저기… 아하, 우와….”
산 아래쪽으로 동쪽 능선을 따라 효명성에 이르기까지, 군데군데 수증기가 올라오는 지점이 눈에 띄었다. 아마도 온천이 솟은 곳일 거라 짐작되었다.
“효명성의 그 온천 욕실에서는 저 아래쪽 물을 끌어다 쓰는 걸까?”
그날 윤과 뜻하지 않게 함께 욕탕에 들어갔던 일을 떠올린 무흔은 순간 오늘은 어찌해야 할지에 대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날은 주 국공 저놈이 내 옷을 칼로 찢었었어. 오늘은 자연스럽게 벗게 될 텐데, 어우, 옷 갈아입는 걸 다 지켜볼 거 아냐!”
윤의 예상과는 달리, 무흔은 당연히 온천욕을 할 생각이었고 심지어 꿈에 부풀어 있었다.
온천 앞에 쪼그려 앉아 손끝으로 물을 만져보았다. 수증기가 그득 오르기에 엄청나게 뜨거울 줄 알았더니, 북부의 서늘한 가을 아침에 옷을 벗고 들어가기 딱 좋을 온도였다.
무흔은 최대한 빠른 속도로 옷을 벗어젖히기 시작했다. 윤이 오기 전에 얼른 물속에 들어가 있어야만 했다. 옷가지를 곱게 개어 놓을 여유도 없이 대충 여기저기 던져놓았다.
물의 깊이는 허리 바로 아래, 엉덩이가 시작되는 윗부분이 살짝 드러날 정도였다. 무흔은 물속에 몸을 살살 밀어 넣었다.
“으… 아윽….”
온몸을 한꺼번에 뒤덮는 뜨거움에 살갗이 따끔따끔한 기분이었다. 팔다리와 몸통을 쓸어 만지고 나니 한결 나아졌다.
폭포수 아래의 냉탕이 수정보다 더 맑디맑았다면, 이 온천의 물은 소의 젖이라도 탄 듯이 뽀얀 색을 띠고 있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향이 났다.
“아아아….”
기분 좋은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물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몸은 좋은 것을 알아 버렸다.
윤이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수면 위로 머리만 내민 채로 폭 들어가 있는 무흔을 놀라서 바라보더니 대뜸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하.”
“뭐가 그렇게 우스워?”
“내게 그리 맨몸을 보이기가 싫었나? 아니, 벗은 걸 한두 번 본 사이도 아닌데.”
이렇게 바로 눈치챌 줄이야. 단번에 속내를 들켰다. 무흔은 흥, 하고 머리만 내민 채 물속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윤은 찬합부터 얌전히 내려놓은 후, 무흔이 던져놓은 옷들을 전부 곱게 개어 볕이 잘 드는 바위 위에 얹어두었다. 그 아래에 신발까지, 각을 맞추어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다음은 본인 차례였다.
윤이 칼을 내려놓고 겉옷을 벗기 시작했다.
무흔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는 온천 가장자리의 커다란 바위에 매달렸다. 대놓고 보는 것을 상대도 뻔히 알고 있는데, 마치 훔쳐보는 것처럼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눈만 살짝 위로 드러내고 있었다.
“위, 아래, 어느 쪽을 먼저 벗을까? 골라봐.”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그렇게 쳐다보다가는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안력으로 내 옷이 다 벗겨지겠어. 새로운 이능력자의 출현이신가?”
“뭐?”
무흔이 버럭하자 윤은 더 여유 넘치는 미소를 머금으며 옷을 천천히, 아주 느릿하게 벗기 시작했다.
한쪽 어깨가 드러나고 이어서 팔뚝이 모습을 보였다. 가슴과 복부까지, 내내 무거운 것들을 들고 온 덕에 상반신의 울퉁불퉁한 선들은 터질 듯이 솟아 있었다.
“은증왕.”
윤의 몸에 홀려 넋이 빠졌던 무흔은 갑작스런 호명에 화들짝 놀랐다.
“왜, 왜?”
“그대는 내 몸이 좋은가?”
“허, 어헉… 허,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람?”
“그렇잖아. 맨살이 드러나기 시작하니까 그 눈빛부터 바뀌는데?”
“내가? 허, 내가?”
기가 차다는 듯이 발끈하며 대꾸한 무흔은 하는 수 없이 윤에게서 등을 돌렸다. 계속 보고 싶은데 그리했다가는 그의 말을 인정하는 꼴이 되어 버릴 테니.
아이고 아까워라. 그리 속으로 중얼대며 무흔은 윤이 있는 곳의 반대쪽으로 이동했다.
이제 시야를 가득 메운 것은 폭포였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귀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낙하하는 물소리가 상당했다. 무흔은 그 규모의 정도가 궁금해졌다.
“주 국공, 저 폭포는, 윽….”
다른 폭포에 비해 크냐 작으냐를 물으려 했던 것인데, 남들보다 크냐 작으냐의 비교가 의미 없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 무흔의 눈에 대번에 들어왔다.
“아니! 하의를 벗었으면 냉큼 물에 들어와야 하는 게 아닌가? 왜 다 벗고 서 있는데?”
무흔은 얼른 다시 폭포를 향해 돌아서서는 당황하여 버럭 외쳤다.
“그 잠깐 돌아봤으면서 내 얼굴도 아니고 굳이 거길 먼저 보았나 보지?”
“허, 뭐라는 거야?”
무흔은 다시 윤을 향해 몸을 바로 하고는 보란 듯이 고개를 치켜들어 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다른 부위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 윤의 눈만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하하, 나는 음양교차욕(陰陽交叉浴)을 해야 하기에 냉탕부터 들어가 봐야 해.”
“그게 뭔데?”
“7온 8냉. 냉탕과 온탕을 번갈아 가며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것이지. 냉탕에서 시작해서 냉탕에서 마쳐.”
“몸이 배겨나는가?”
“10년이나 했는데 뭘. 아무렇지도 않아. 건강에 좋으니 그대도 해 봐.”
윤은 길게 풀었던 머리를 하나로 높게 묶어 올리며 폭포 아래 냉탕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찬물을 몸에 천천히 묻히는 것 같더니만, 폭포 아래로 가 떨어지는 거센 물줄기를 등짝으로 받아내기 시작했다.
무흔은 놀라 기겁하여 온천 안에서 최대한 폭포수 가까운 곳으로 이동했다.
“주 국공! 뭘 하는 거야!”
폭포 소리에 묻혀 제 말이 들리지 않을까 봐, 무흔은 두 손을 입가에 대고 나팔을 만들어 크게 고함을 쳤다.
윤은 여유만만한 얼굴로 무흔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태연한 척하는 건지, 아니면 멋져 보이려 아픈데도 참고 있는 건지. 무흔은 걱정이 되어 다시 한번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 다쳐!”
윤은 그야말로 껄껄 웃으며 물에서 나왔다. 그러더니만 무흔이 어어 하는 사이에 온천으로 훅 들어와 버렸다.
“내가 다칠까 봐 걱정한 거야?”
“아아아아, 가까이 오지 마.”
무흔이 뒷걸음질 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윤은 덥석 다가가 그를 안아 버렸다.
“왜… 이래?”
“안고 있으면 안 돼? 난 이러려고 오자고 한 건데.”
“난 고개를 못 들겠는데?”
무흔은 폭 안긴 채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살이 맞닿은 모든 곳에서 열이 나고 전기가 찌릿 오르는 듯한 감각이 일었다. 이미 제 살결이 붉게 달아오른 것이 눈에 대번에 들어왔다.
온천수가 미끈거리고 뜨거운 탓이다, 무흔은 그리 원인을 돌렸다.
“의외로 싫다고 안 하네?”
“싫을 것까지야. 난 기본적으로 사람에 고프니까.”
“그럼 내가 아니었어도,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는 사내는 밀어내지 않았을 거다?”
“뭐… 또… 그런 건 아니고….”
무흔은 부끄러움에 유독 취약했다.
고개를 아래로 깔다 못해 이제 옆으로 틀기까지 하여 입술을 내밀고는 우물쭈물 대충 말끝을 흐렸다.
“냉탕에 들어가 볼래?”
“싫어.”
“왜?”
“물 밖으로 나가면 내 몸을 볼 거잖아?”
“아니, 이렇게 싹 다 벗고 미끈미끈한 물에서 밀착하고 있는 건 괜찮고, 눈으로 보는 건 안 된다? 무슨 논리야?”
“내 논리야. 그건 부끄럽다고.”
“참 특이해. 그러니까, 우리 은증왕께선 이리 몸을 부대끼는 것보다….”
말과 동시에 윤의 손이 무흔의 어깨와 팔을 쓰다듬었다. 무흔은 그 손길을 따라 차르르하게 이는 흥분감에 이를 악물었다.
“눈으로 보는 것에 더 욕망이 동하는 유형이라, 그 말인가?”
“아니, 누굴 너희 변태 황제와 동급으로 보는가!”
그제야 무흔이 고개를 쳐들고 윤을 올려다봤다. 무흔이 황급히 다시 눈을 피하려는데, 윤은 웃음을 참으며 무흔의 턱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그런 게 아니라면, 어찌 나와 이리 다 벗고 살갗을 맞대고 있는데 흥분하지 않을 수 있느냐는 말이지.”
“나, 난 원체 색욕이 없는 사람이야.”
끄트머리가 아슬아슬하게 수면에 닿을 듯 말 듯 단단하게 솟은 것을 서로 맞댄 상황에서 할 말은 절대 아니었다.
윤은 웃음을 참고 무흔을 안은 팔에 힘을 주어 몸을 끌어당기며 중얼거렸다.
“사람에는 고프나 색욕은 없다라.”
“주 국공, 나는 사람 대 사람의 정신적인 교류에 의미를 두지. 그것은 희로국과 건원국의 근본적인, 아주 뿌리 깊은 문화적 차이야. 그대가 이리 나의 몸을 만지지 못해 난리인 것을 나는 그러한 관점에서 이해해주고 있소.”
무흔이 점점 더 뻔뻔해지고 있었다. 윤은 그것이 못 견디게 귀여워, 발그레한 무흔의 뺨에 입을 쪽 하고 맞춰 버렸다.
“문화적인 차이를 매일 조금씩 더 수용해줘.”
윤은 가벼운 입맞춤에 얼어 버린 무흔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하고서는 온천 밖으로 나왔다. 그야말로 색기의 화신 같은 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무흔은 홀린 듯이 올려다보았다.
“나와. 냉탕에도 들어가 봐야지.”
윤이 무흔에게 커다란 손을 내밀었지만, 무흔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얼른.”
“냉탕에 일곱 번 더 들어갈 거잖아? 다음번에 들어갈게. 아직 마음의 준비가….”
“하하, 사내들끼리 몸 좀 보이기로서니 마음의 준비씩이나.”
종마와도 같은 허벅지와 환상적으로 올라붙은 엉덩이를 자랑하며 폭포로 향하던 윤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몸에 남은 흥분기를 느끼며, 바위 위에 팔을 얹고 턱을 고인 채 마음 놓고 그 잘난 뒤태를 구경하던 무흔은 당황했다. 바위에 꽂아 놓듯 얹었던 팔꿈치가 미끄러져 물에 퐁당 빠졌다.
“그 목걸이는 잠깐 풀어 둬. 긴장 풀고 휴식을 좀 취해.”
“아… 그사이에 너무 적응했나 봐. 잊고 있었네.”
무흔은 목걸이를 윤에게 건넸고, 목걸이는 무흔의 옷가지 위에 잘 놓였다.
윤도 냉탕에 가고 없겠다, 무흔은 온천을 홀로 차지하고 드러누워 온몸에 힘을 뺐다. 둥둥 떠 있는 기분이 제법이었다. 몸은 노곤해질 정도로 따뜻한데 아침 공기는 싸늘한 것이 대단히 상쾌하게 느껴졌다.
귀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폭포의 울림과 새 소리, 그리고 바람결에 부딪히는 희미한 나뭇가지의 흔들림. 모든 것이 평온하고 여유로웠다.
바깥에서 옷을 벗다니. 이거야말로 자유구나.
무흔은 제 머리에 뜬 생각에 괜한 웃음이 났다. 자유라니. 이리 편안하게 자유를 생각할 수 있다니. 평생 이 기분을 누리고 싶어졌다.
한참을 둥둥 물에 뜬 채로 무흔은 제 시야에 꽉 차게 들어오는 하늘의 구름이 무슨 모양인가를 생각하던 중이었다.
그때였다.
우우웅.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나, 온천 바닥에서 아주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뭐지?”
무흔은 발을 바닥에 딛고 바로 섰다.
다시 한번 발밑이 우웅 하고 울렸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더 강도가 컸다.
게다가 온천의 물은 이상하게도 아까보다 더 뜨거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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