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4화
성주의 처소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넘어진 이는 성주 본인이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였다.
늘 그러하듯 새벽녘 같은 시각에 눈을 뜬 윤은 무흔이 깨지 않도록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지난밤에 지시를 내려두었던 도시락이 제대로 준비되었는지부터 확인했다. 무흔은 분명 목표 지점에 오르는 데만 반나절이 걸릴 테니까. 고작 나무 열매 따위로 그의 배고픔을 달래주고 싶진 않았다.
숙영부인이 보낸 여종이 시간에 딱 맞춰 찬합을 들고 성주의 처소에 도착하였다.
“식어도 맛에는 지장이 없는 종류로 준비하였습니다.”
윤은 큼지막한 부피의 물건을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그녀가 수통 두 개와 몸을 닦을 수 있는 커다란 수건 두 장을 그 옆에 나란히 내려놓았다.
그다음은 아휘 차례였다. 크고 작은 온갖 크기의 삼베 자루와 짚으로 엮은 망태기를 모아들고 나타났다.
“분부하신 대로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나 많이 필요할까요? 아무리 그래도 은증왕께서 이렇게까지 채집을 많이 하시겠습니까?
그때였다.
“으악!”
침소에서 비명이 울렸다.
“주 국공!”
무흔의 목소리가 한 번 더 날카롭게 귓전을 때렸다. 깜짝 놀란 윤은 그리로 달려가다 그만 제 옷자락을 밟고 미끄러졌고, 순간 다리가 꼬여 균형을 잃고 넘어져 버렸다.
그 커다란 몸이 한순간에 쿵 쓰러졌으니, 요란한 소리가 나는 것도 당연했다.
“성주님! 괜찮으십니까?”
“으… 이런, 괜찮다.”
그러나 발목에 이는 통증이 예사롭지 않았다.
얼른 아휘가 달려와 윤의 바지를 걷어 환부를 살피고 손을 대 보았다. 그가 난처한 얼굴을 했다.
“괜찮으신 것 같지 않습니다. 발목을 접질리셨잖습니까. 오늘 산에는 오르지 못하실 것 같은데요?”
그럴 수야 없지. 우리 은증왕이 얼마나 산행을 기다렸는데.
윤은 눈물이 나게 아픈 와중에도 순간 퍼뜩 떠오른 묘책을 붙들었다. 당황한 아휘가 치유자들을 생각해내지 못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럴 리가. 아휘 넌 아직 견습 의원이 아니냐. 접질리긴. 나는 하나도 아프지 않다. 일어나는 것만 좀 도와다오.”
아휘가 그를 일으켜주고 이어 부축하려 했으나, 윤은 그 손길을 마다하고 벽을 짚어 침소의 문 앞까지 힘겹게 당도했다.
이마에는 벌써 식은땀이 솟기 시작했다.
쾅.
순간 미닫이문이 좌우로 거세게 열리며 무흔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단단한 문이 벽을 짚은 윤의 손을 짓눌렸다.
“윽!”
“헉, 주 국공!”
반사적으로 다친 손을 감싸 쥔 윤은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고꾸라졌고, 무흔은 그를 온몸으로 받아냈다.
“손 다쳤어? 어디 봐.”
무흔이 윤의 손을 자세히 들여다보려 했지만, 윤은 저를 받아내는 무흔에게 체중을 실었다. 동시에 방 안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무흔이 그를 안은 채 방으로 다시 뒷걸음질했다.
“으… 아휘, 나가. 문 닫아.”
고통의 기운이 흠뻑 묻어나는 목소리가 묵직하게 튀어나왔다.
“예, 성주님.”
아휘는 문을 닫으라는 영문을 몰랐으나 토 달지 않고 냉큼 물러서서 명을 이행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분위기가 있었다. 괜찮으시냐 한 번 더 묻는 것조차 절대 불가하다는 확신이 막연히 들었다.
“으윽….”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윤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무흔은 그의 옆에서 안절부절못했다.
“주 국공, 어떡해… 미안해. 날 두고 먼저 산에 가 버린 줄 알고 급히 쫓아 나가려다가….”
“쉿.”
윤은 뻗어 누운 채로 무흔의 손을 덥석 붙들었다. 가벼운 통증부터 지인으로 없애보자 하였는데, 또 저번처럼 아무런 것도 느껴지질 않았다.
그의 눈이 대번에 무흔의 목덜미로 향했다.
손과 발이 아픈 와중에도 황당하여 웃음이 다 났다. 산으로 쫓아온다면서, 그 와중에 목걸이를 챙겨 걸었다니.
“아! 이런… 하하. 이런.”
그의 시선을 눈치챈 무흔은 민망한 듯 웃으며, 다급히 목 뒤로 손을 뻗어 목걸이를 풀어냈다.
“자, 손 이리 내 봐.”
무흔이 소리를 한껏 낮추어 윤과 코가 부딪힐 정도로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고 속삭였다. 문 너머에 있을지도 모르는 아휘가 혹 들을까 싶은 염려 때문이었다.
“손보다 급한 건 발목이야. 왼쪽. 여기.”
윤 또한 소리를 한껏 낮춰 속삭였다.
무흔은 윤의 바지를 걷었다. 붉게 부어오른 발목을 보고 놀라서 큰 소리를 낼 뻔하였으나 재빨리 제 입을 틀어막았다.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윤의 발목을 한 번 쳐다보고 이어 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까 요란하게 쿵쾅댄 게, 넘어져서 그런 거야?”
“얼른. 저번처럼 또 안 만져줄 거야?”
무흔은 그 사이 열기가 심히 오른 윤의 발목을 부드럽게 감싸고 어루만졌다. 아팠겠다, 싶다가도 제 주먹으로 윤의 사타구니 사이를 콱 찍었던 그 날의 일이 생각나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아… 살겠다.”
순식간에 발목이 말끔히 낫자, 윤은 바닥에 그대로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주 국공, 손도 해야지.”
“손이야 뭐 그냥 통증인데.”
“그래도.”
손을 쥐는 순간, 윤이 무흔을 확 끌어당겼다.
“끄악!”
무흔은 어정쩡하게 한 손을 바닥에 짚은 채 엉덩이를 위로 치켜들고 두 다리를 벌렸다. 아직은 윤의 몸에 닿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간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주 국공, 나… 으… 이러다 넘어지겠어. 놔.”
윤은 제게 올라타기 일보 직전 상태의 무흔을 빤히 올려다봤다.
새벽 특유의 어슴푸레한 빛이 창을 뚫고 스며들어 무흔의 뽀얀 얼굴과 폭포수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을 비추었다.
이질적인 아름다움에 새삼 반했다. 처음 보는 얼굴도 눈동자도 아닌데 왜 갑자기 이런 기분이 드는지. 사랑스럽고 귀엽고, 또 황홀했다.
“무흔.”
눈을 한참이나 응시하던 윤이 난데없이 진지하게 이름을 부르자, 무흔은 어색해서 어쩔 줄 모르고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이, 이제 다리고 손이고 다 나았지? 산에 갈 수 있는 거 맞지? 얼른 나가자.”
심장이 딱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무슨 말을 어찌해야 하나. 저쪽에서 무흔, 이라고 불렀으니 이쪽에서도 그에 상응하여 윤, 이라고 살랑이는 봄 같은 목소리로 속삭여줘야 하나?
긴장으로 꽉 찬 상황을 탈출해보려, 무흔은 고개를 빼고 문 쪽을 향해 목소리를 크게 높였다.
“아휘! 들어와! 나 준비 좀 도와줘!”
순간 윤이 무흔의 아슬아슬한 균형을 무너뜨렸다.
그가 무흔의 손을 꽉 쥔 채로 다른 한 손으로는 무흔의 뒷목을 감싸 끌어당겼다.
“읍!”
둘의 입술부터 닿고, 그다음에 무흔의 엉덩이가 윤의 아랫배에 닿았다. 무흔은 윤의 몸 위에 주저앉아 등을 둥글게 숙인 채로 붙들렸다.
혀끝에 길게 맺히는 쾌감에 정신이 아득해지며 흥분에 취해 윤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순간, 문이 열리고 시종 셋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아… 죄송합니다. 실례하였습니다.”
씻을 물이 담긴 대야를 양손으로 받쳐 들고, 한 팔에 수건을 걸치고 들어온 아휘는 그대로 뒷걸음질을 쳤다. 옆에서 옷가지를 두 손 가득히 든 여종 또한 손을 쓸 수 없음은 마찬가지였다.
무흔이 산에 오를 때 신을 신발을 양손에 두 켤레씩 들고 맨 뒤에 서 있던 윤의 시종이 얼른 신발을 내려놓고 문을 겨우 닫았다.
무흔과 윤이 준비를 마치고 처소를 채 나서기도 전에, 그들이 목격한 장면은 새벽을 깨우는 부지런한 비복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은증왕이 과감하게 새벽부터 성주님을 자빠뜨리고 허리 아래를 밀착한 상태로 올라타 입을 맞추고 있었다고.
무흔은 그런 소문 따위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산으로 가는 동안 저와 윤을 보고 반가이 인사를 올리는 이들에게 정말로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
산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윤은 깊이 후회했다. 출발 전에 아휘가 분명히 짚어 주었었다.
“성주님, 짐꾼이 필요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 말이 산 중턱에 이른 윤의 머릿속에서 뱅글뱅글 맴돌았다. 그런 거 됐다 했던 과거의 자신을 꾸짖고 싶어졌다.
“주 국공! 이거 봐! 열매가 이렇게나 큰 게 달렸어!”
“그건 성에 내려가면 있어. 도착하자마자 먹게 해줄 테니까 그건 가져가지 말자.”
“왜? 내 손으로 직접 채집한 걸 먹으면 더 맛있을 것 같은데?”
“귀여운 새끼 노루가 먹을 것 정도는 남겨 둬야 하지 않겠어?”
“우와, 여기 봐! 이건 머루 아냐?”
“은증왕? 무흔!”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사정해보았지만 이미 열매에 눈이 돌아간 무흔의 귀에는 윤의 목소리가 닿지 않았다,
점점 윤이 들어야 하는 짐의 양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무겁기 때문이 아니라, 몽땅 손아귀에 쥐고 있어야 하는 것이 너무나도 불편하고 귀찮았다.
심지어 늘 허리에 차고 다니는 검조차 두고 올 걸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이제 슬슬 온천과 폭포에 가 보자. 도시락도 먹고. 소풍을 좀 즐겨 보자고.”
“하지만 뭐가 계속 나오는데?”
“매일 산에 오르면 되잖아?”
“아.”
무흔은 이제야 실감이 났다. 더는 단 하루의 귀중한 등산 허락을 얻기 위해 안달복달하지 않아도 되는 삶이 시작된 것이다. 기한이 확실하지는 않으나, 적어도 당분간은 그러했다.
“미안… 헤헤.”
무흔은 윤의 손에 들린 자루 중 세 개를 냅다 빼앗아 들었다.
“무겁지? 오늘은 그만 딸게. 얼른 가자.”
“안 무거워.”
“자루 하나하나는 안 무거워도 모아 놓으면 무거운 거 아니야? 가자!”
딴짓을 하지 않고 걷자 그리 오래지 않아 예전에 보았던 그 표시석이 있는 지점이 나타났다.
“성주 전용 길이다!”
“열매와 버섯은 여기다 두고 가자.”
“누가 가져가면 어떡해?”
“비석 뒤쪽으로 놓으면 되지. 내가 뒀으려니 하지 않겠어? 그리고, 여기 오긴 누가 와.”
“그럼 너무 비석 옆에 두진 말고, 좀 안쪽으로 더 들어가서 풀숲 같은데 숨겨 놓자. 잘 안 보이게.”
금세 마음에 드는 지점을 찾은 무흔은 쪼그리고 앉아 열심히 열매와 버섯들을 모아 놓은 자루들을 숨겨 두었다.
그리 둥글게 몸을 굴려 앉아 있는 모양새가 너무 귀여워서, 윤은 무흔의 동그란 엉덩이를 톡톡 두드려주었다.
“헉!”
“그만하면 됐어. 하나도 안 보여. 가자.”
무흔은 산 초입에서 경계석까지 오는 길은 기억이 나지 않았으나, 이 비석에서부터는 외길로 가다가 두 갈래로 갈라지는 지점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쪽은 전에 올랐던 길, 다른 한쪽은 온천과 폭포가 나란히 있다는 그 길.
무흔은 빠른 걸음으로 마구 걸어 나갔다. 뒤를 힐끗 돌아보며 윤이 어느 정도로 쫓아오는지를 확인했다. 그의 보폭이 커지려 하자 냉큼 목소리를 높였다.
“주 국공, 뛰지 마! 찬합에 들어 있는 우리 점심이 망가진다고!”
빠른 속도로 점점 작은 점이 되어가는 무흔의 뒷모습에 윤은 웃음을 터뜨렸다. 저렇게 신날까. 정말 귀여워서 못 견디겠다는 오글오글한 생각에 푹 젖어 버렸다.
윤의 등에는 젖은 몸을 닦을 수 있는 커다란 수건 두 장이 봇짐처럼 매달려 있었다. 숙영부인이 보낸 여종이 반드시 가져가셔야 한다고 당부를 한 물건이었다.
“과연 은증왕이 물에 들어가려고 할까?”
그리 고개를 갸웃하며 도착한 윤은 이미 옷을 다 벗어던지고 온천에 쏙 들어가 머리만 동동 띄워놓고 있는 무흔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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