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3화
윤이 무흔을 보며 포근하면서도 다정한, 그런데도 어찌보면 음흉한 속내가 묻어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신나게 잘 놀고 왔어?”
“어… 어떻게 벌써 와 있는 거야?”
무흔은 분명 반 시진 전에 윤이 집무실에 붙들려 있는 걸 확인했었다. 성실한 성주라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었는데 어느새 이리 돌아와 있을 줄이야.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
아휘가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나갔다. 닫히려는 문 사이로 그가 저 멀리 대기하고 있는 윤의 시종에게 살짝 손을 흔들어 보이는 것을 보았다.
‘은증왕께서 지금 처소로 향하십니다!’라는 식의 정보가 미리 전달된 건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이 솟았다.
저를 향한 따가운 시선을 느낀 아휘가 뒤를 돌아보고는 겸연쩍게 웃더니, 재차 깊이 허리를 숙여 무흔에게 인사를 올리고 부리나케 사라졌다.
저 녀석 내일 두고 보자, 무흔은 그리 다짐했다. 그러다 윤의 기척에 흠칫 고개를 들었다.
단정하게 올렸던 머리를 푼 윤이 무흔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만 자자.”
“아, 아니, 무슨 혼인한 부부도 아닌데 눈이 마주치자마자 자자 해?”
“그대도 무척 피곤할 텐데? 여독이 다 풀리지도 않았는데 여기저기 엄청 돌아다녔다면서.”
“아니야, 난 하나도 안 피곤해. 주 국공이야 장사한테 목줄 잡혀서 밀린 업무를 처리하느라 피곤하겠지. 먼저 자. 푹 자.”
무흔은 침대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방구석에 앉아 근처에 있던 아무 책이나 펼쳐 들었다. 그러다 말고 책을 내려놓고는 벌떡 일어났다.
“얼른 누워. 내가 불을 다 꺼 줄게.”
방의 곳곳을 환히 밝히는 초를 후후 불어 열심히 껐다. 머리가 핑 돌 정도로. 침대 머리맡에 나란히 놓인 다섯 개의 초를 있는 힘껏 후우 불어 날리며 무흔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바라보며 윤은 뺨이 좌우로 터질 듯이 미소를 한껏 머금었다. 무흔의 허리를 덥석 붙들어 침대로 끌어들일 법도 한데, 윤은 침대 한쪽에 공간을 남긴 채 그대로 드러누웠다.
“책을 읽다 잘 모양이지?”
“응. 저쪽에 남긴 촛불 하나면 충분해. 아… 설마 불이 있으면 신경 쓰여서 못 자? 그럼 내가 나가서 읽을게.”
“전혀. 난 괜찮아. 예전 같았으면 당연히 못 잤겠지만, 지금은 그대 덕분에 매일 온몸의 기혈이 맑지 않나. 효명성으로 오는 길에 마차에서 지인도 듬뿍 받았고.”
윤의 눈웃음에 무흔은 부리나케 도망쳐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아침에 마차에서, 이대로 죽는 게 아닌가 하는 아찔함을 맛봤었다. 기는 물론이요 영혼까지 빨려나갈 듯이 그가 무시무시하게 입을 맞췄던 것을 떠올리니 순간 소름이 돋았다. 결국 온몸에 힘이 다 빠져서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할 지경이었으니.
무흔은 냉큼 책장을 넘기며 사뭇 진지한 표정을 만들어냈다.
윤에겐 미안하지만, 그가 제 몸을 취하려 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속에서 똬리를 틀고 당최 나갈 생각을 않고 있었다.
‘입맞춤이 어떠한가를 떠올려보면 잠자리는 어떠할지, 충분히 추론 가능해.’
그 행위를 상상할 때면 매번 공포를 느꼈다. 입을 맞춘다거나, 몸이 스친다거나 하는 것에서 이는 달콤한 흥분감은 사내와의 교접과는 엄밀히 다른 영역이었다. 고통으로 점철된 기억에 의하면, 그것은 절대로 인간이 인간을 상대로 할 짓이 아니었다.
‘당신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 절대 내게 그런 파렴치한 고통의 행위를 강요할 리 없겠지.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두려워. 불안해.’
무흔의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순전히 부끄러움의 문제였다.
윤과 같이 나란히 눕는다는 것이 너무도 어색했다. 말로 다 표현 못 할 부끄러움이 속을 미친 듯이 간지럽히는지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귀가 달궈지는 기분이었다.
혹시나 정말 빨개졌나 싶어, 무흔은 슬그머니 책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주 국공, 잘 자.”
“그러지 말고 지금 자자. 아까 보니 눈 밑이 퀭하니 짙은 게 많이 피곤해 보이던데.”
“아니야, 무슨 소리야. 으흠, 나는 하루 종일 이 책이 너무 읽고 싶었는걸? 이제야 짬이 나네.”
“그래, 나는 먼저 잘게. 내일은 새벽에 또 산에 올라야 하거든.”
“어? 산에?”
무흔은 움찔하여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추었다.
“나는 매일 새벽에 수련을 위해 산에 오른다고, 전에 말했잖아.”
“아, 그랬지.”
“나만의 치유자가 생겼다 하여 10년간 해 온 수련을 게을리할 수는 없지 않겠어? 이만 잘게. 아침엔 깨우지 않도록 조용히 나갈 테니 염려 말고.”
윤이 무흔을 향해 화사한 미소를 한껏 날리고는 이불을 당겨 몸을 덮었다. 심지어 무흔에게 등을 보이며 몸을 옆으로 틀어 누워 버렸다.
무흔은 완전히 낚였다.
이 책을 꼭 읽고 싶다 강조해댄 탓에 대뜸 침대로 들어가는 꼴도 우스웠다. 무흔은 윤이 자는 것을 기다려 움직이기로 했다.
이쪽의 촛불 빛 너머, 윤이 미동도 없이 가만 누운 것을 확인한 무흔은 책을 내려놓았다. 초를 들고 살금살금 이동하여 윤이 비워둔 공간에 은근슬쩍 엉덩이를 들이밀고 앉았다.
잘 때는 꼭 빼고 자라는 윤의 잔소리를 떠올리며, 목걸이부터 풀어 침대 옆의 탁자에 소리 나지 않게 내려놓았다.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무흔은 슬쩍 고개를 빼 잠든 윤의 얼굴을 확인했다.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람이 평온하게 감은 두 눈이란 본디 이런 느낌인 건지.
숨결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는 널찍한 가슴을 만져보고 싶은 욕망이 일자 심호흡부터 했다. 신체 접촉의 빌미를 이쪽에서 제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목걸이 옆에 촛대를 내려놓고 조심스레 이불 속으로 몸을 들였다.
등과 머리가 닿자마자 편안한 나른함이 밀려들었다. 이불 속이 어찌나 포근한지 몸이고 마음이고 하늘하늘하게 녹아 버렸다.
게다가 바로 옆 베개 위로 흩어진 짙고 까만 머리카락에서는 좋은 향기가 났다. 보고 싶지 않다고, 절대 보고 싶은 게 아니라고 스스로 세뇌를 하는데도 자꾸만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순간 윤이 뒤척이며 무흔 쪽으로 몸을 돌렸다.
두근두근.
잘생겼다. 이러니 내가 설레지.
윤의 얼굴에 폭 빠질 듯이 바라보다 문득 빛이 남아 있음을 깨달았다.
촛불을 끄려 윤에게 등을 돌리고 후, 불어 방 안에 어둠을 막 내려 앉힌 찰나였다.
“악!”
저를 덥석 껴안는 두 팔에 놀란 무흔이 비명을 질렀다.
“안 잘 거라며?”
윤의 입술이 귓가에 닿아 낮은 목소리가 달콤하게 흘러들었다.
그의 뺨이 무흔의 뺨에 닿는 순간, 당연하게도 정화의 기운이 넘어 들어갔다.
“이런….”
윤은 낭패라는 듯 재빨리 얼굴을 떼고서는 옷으로 감긴 부분만을 딱 밀착시켰다.
“그대가 많이 피곤할 테니까, 지인은 안 돼.”
“자다가 우연히 손이 닿으면?”
“그러게. 둘 다 모르고 자게 될까? 내일 도학 선생한테 물어보자.”
“아니, 왜 자는 척을 해? 날 놀리려고 대기한 거야?”
“설마. 내가 앤가? 내가 자야 그대가 자러 들어올 것 같아서, 줄을 좀 당긴 것뿐이야.”
“팔 치워.”
“안고 자자.”
윤은 한 팔로 무흔을 안은 채로 다른 한 손으로는 무흔의 옷깃을 꼭꼭 여미어주었다.
“잠들면서까지 그대가 지인을 제어하려 하면 피곤할 테니까, 긴장 풀어. 내가 조심할게.”
“안겨 있는데 어떻게 자.”
“한 번 자 보자.”
“주 국공은 누굴 안은 채로 잠이 와?”
“저번에 몰래 그대 이불 속에 들어갔을 때 엄청 잘 잤어.”
무흔은 그날 일을 떠올리는 순간 또 얼굴을 붉혔다. 엉덩이에 닿았던 그놈의 돌덩이 생각에, 그날과 똑같은 지금의 자세가 그 어느 때보다도 불편해졌다.
“나는 그냥 천장을 보고 바로 누워 자고 싶어.”
무흔은 몸을 꿈틀대며 불평했다.
“그럼 대신 이렇게 하자. 팔베개. 어때?”
“그냥 한 침대에서 구역을 반 나누고 각자 잡시다. 응?”
“참 매몰차구나.”
“뭐?”
“난 늘 안고 싶은데.”
“아니, 그리 낯부끄러운 소리를 이리 대놓고 할 수 있어? 술이라도 한 잔 한 거야?”
“취했어.”
윤이 슬쩍 어깨를 들어 상체를 일으켜서는 무흔의 머리에 입을 맞추고 옆으로 길게 누웠다.
“밤에 취하고, 그대에게 취하고.”
장난스런 어투이긴 했으나, 지독하게도 낯간지러운 소리였다. 소름이 돋은 무흔은 경악에 찬 두 눈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그러다 눈을 질끈 감고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렸다.
“…미쳤나. 뭐래.”
“하하하하하.”
윤은 신나게 웃어대고서는 무흔에게서 손을 떼었다. 옆으로 살짝 이동하여 간격을 두고서는 이불을 잘 덮어주고, 본인도 잘 덮고, 한 번 더 장난스레 중얼거렸다.
“푹 자. 내일 산에 다녀와서 깨워줄게.”
“뭐! 보자 보자 하니까, 날 놀리려고 데려온 거야?”
“하하, 미안. 그대와 있으면 내가 자꾸 어려지는데 이를 어쩌면 좋나.”
“어쩌면 좋긴. 잠이나 자.”
무흔은 몸을 굼벵이처럼 움찔대며 윤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침대의 왼쪽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누웠다.
그러다 문득 궁금한 것이 하나 떠올랐다.
“주 국공, 그 산은 안전해?”
“응? 추한 사건이 일어난 적은 없는데?”
“마물 말이야. 거기도 태고산맥에서 나온 산줄기잖아.”
“아…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마물이 나왔었지.”
“지금은? 회룬석 결계를 쳤어?”
“마물이 나왔던 혈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어. 사혈과 생혈. 사혈은 더는 마물이 나오지 않는 곳이고, 생혈은 나올 가능성이 있는 곳. 하여 후자에는 회룬석 결계를 치는 것이지.”
“사혈과 생혈은 어떻게 구별해?”
“마물이 나왔던 혈에서 뜨거운 물이 솟기 시작하면 거기는 사혈이야. 막혔다고 보지.”
“그럼, 우리가 내일 간다는 폭포 옆의 그 온천이… 마물이 출현하던 곳이라고?”
“뭐 그렇지.”
무흔은 기겁을 하고 되물었지만, 윤은 별 것 아니라는 듯한 반응이었다.
“확실한 거야? 사혈이라고 했으니까, 이제 더 안 나오는 거지?”
“100년 가까이 아무 일도 없었으니 앞으로도 없겠지?”
“불안하게….”
윤은 팔을 뻗어 무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순간 움찔하여 긴장했던 무흔은 이내 힘을 풀었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푹 자, 내일 새벽에 깨워줄게.”
“꼭이야. 잘 자.”
어둠과 침묵이 둘 사이에 그득 찼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통에, 무흔은 살며시 고개를 돌려 윤이 어쩌고 있는지를 살폈다.
‘뭐야, 사람을 잔뜩 흔들어 놓고 자기는 저렇게 평온하게 잔다고?’
무흔은 입이 나와서는 눈을 애써 감고 잠을 청했다.
윤이 실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그러한 저를 보며 웃음을 참고 있는 것은 조금도 알지 못했다.
*
다음 날 새벽, 드르륵하는 문소리에 무흔은 잠에서 깼다.
“헉! 이런!”
윤이 저를 두고 나가는 소리인가 싶어 무흔은 눈을 번쩍 뜨고 소리를 지르며 화들짝 몸을 일으켜 앉았다. 침대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주 국공!”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는 순간, 밖에서 우당탕하는 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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